지극히 보편타당한 정도의 기준 선에서 볼 때, 유독 내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수첩과 작은 메모장들이 좀 많은편이다.
간단하게 그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시도때도 없는 나의 메모습관 때문이다.
일상에서 꼭 기억해야만 할 중요한 기일이나 약속따위를 기록하는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어느 순간 순간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이나 어떤 관심사들을 그때그때 메모하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 싶다. 또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나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서 필요하다거나 기억하고 싶다 싶으면 곧바로 메모하는 습관이 배어있어서 그리되었다.
그렇다고 꼭 수첩이나 메모장에 꼬박꼬박 메모를 하기에 그렇게 수요가 좀 많나 치자면 그것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나의 흘려쓰기는 사방 어디에고든 무조건 적고 본다.
달력에도 쓰고, 온갖 영수증에도 쓰고, 화장실에 읽으려 들고간 신문에도 밑줄을 긋고 생각난 것들을 적어서 다시 들고 나온다. 그리곤 북 찢어서서 책장 어디에든 꽂아둔다. 연필은 있는데 종이가 없으면 글씨가 써지는 그 어디에든 낙서처럼 끄적거린다.
어쩌다 책장을 정리하다보면 그런 해괴한 낙서장 뭉치들이 여기저기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분명 내 글씨는 맞는데 언제 왜 어디에 쓰려고 적어놓았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한 내가 끄적인 흔적들이 낯설게만 느껴질때가 자주있다.
그래서 아주 어쩌다 잭장정리를 포함한 대청소를 할라치면 이틀 삼일씩 걸리기도 한다.
청소보다 메모장 끄집어내서 죄다 다시 읽어보며 또 새롭게 여기저기 분류하느라 더 시간을 잡아먹기도 한다.
이런 짓꺼리를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나름 즐겁게 받아들이는 나란 넘이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참 웃기는넘이다.
나는 기억력은 상당히 좋은편이다. 그것은 자타가 공히 인정하는 면이다.
그런가 하면 필체만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감격해 하리만치 악필(惡筆)이다.
정성들여 쓴다고 써 봐도 남에게 내보이기엔 초딩 글씨 같아서 늘 창피할 정도의 악필이다.
심지어 생각이 좀 많은 날에 급하게 흘려쓰는 글씨를 사나흘 지나서 내가 다시 읽어나가기가 혼란스러울만치 최악필이다.
메모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장문의 습작도 직접 술술 써내려가지만, 남 앞에서 글씨를 써 보이는것은 지극히 꺼리고 싶은 치명적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펜글씨를 연습해도 죽어라 안되기에 고1때 타자기를 장만 해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타이핑은 아주 잘한다.
독수리타법이 아니라......... 왼만한 여자경리사원 만큼은 타이핑을 잘 한다.(물론 나이들수록 오타가 자주 나온다. ㅎㅎㅎㅎ)
그러다 보니 주변이나 집안에서 시간이 아주 지난 후에, 지난 어느시점의 어떤 약속이나 그날의 일처리를 되물어 오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그러면 시간은 좀 걸린다.
우선은 조용히 나의 기억에 테이프를 되돌려 본다. 젊어서는 즉각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했었는데,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뒤에는 기억의 한계가 늘 저만치서 가물가물하게 넘실거린다. 그러면 그 가물가물 넘실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그 당시의 기록을 찾아 온 집안을 뒤지고 또 뒤진다. 실제로 한 닷새에 걸쳐 모든 책갈피를 세번이나 흩어보는....... (정말로 정말로 엄청난 인내와 땀을 요하는 중노동) 장엄하리만치 힘든 노역 끝에 그때의 기록과 영수증을 찾아낸 기록도 있었다.
어제도 어떤 모임의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금전적 계산이 전제가 된 해결을 정산하다가 어떤 문제가 생겼기에, 만 1년전의 가물가물한 기억세포를 붙잡고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날의 기록을 찾느라 두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1년전에 문제를 중재하면서 굼전적 계산의 애행 합의서 초안을 내가 잡아주던 메모가 남아있었다. 양쪽 다 원본이 없어진 지금에 그 초안본으로 그나마 다행스럽게 원만히 해결을 보았다. 나의 힘든 노동의 댓가는 돼지갈비에 쐬주 두병이 전부........ ㅎㅎ
서론이 너무 엉뚱하게 길어졌다.
어제 그 초안을 찾느라 책장 이곳저곳을 뒤지다 보니 오래전의 메모쪼가리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주아주 오래전에 적어 논 지인들 이름과 핸디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가 서너 페이지가 나왔다.
앞자리에 1이나 6, 또는 7이 들어가고 가운데 자리가 세자리였던 시절의 번호들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 잠을 청하다 보니 그 전화번호 메모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 아니 전화번호가 왜 메모쪼가리에 적혀서 나돌았지?
- 전화번호라면 당연히 그때 쓰던 수첩의 맨 뒤쪽부터 가지런하고도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어야 하는것 아니야?
아무리 되집어 생각해 보아도 분명 그리되었어야 하는게 맞는것 같았다.
-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가 금년도에 늘 손에 들고다니던 수첩을 꺼냈다.
수첩의 뒷장부터 하나하나 넘겨다 보니............
우선. 내 이름. 주소. 핸디폰 번호가 적혀있다. 혹시나 분실하면 찾을까 하여 적어 놓은..........
그 앞장을 넘겨다 보니, 내 통장 번호들과 카드 번호들이 주욱 적혀있다. 혹시 분실하면 즉각 신고하려고 적은........
한 장 더 넘겨보니............
항공사. 휴양림. 여행사. 펜션. 책방. 등등의 연락처와 홈페이지 주소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앞장부터는 한동안 하얀 백지 상태였다.
지인들이 이름과 연락처가 가지런하고도 빼곡하게 적혀있어야 할 페이지들이 말 그대로 새하얀 백지상태였다.
해마다 12월의 크리스마스 전후가 되면 그것은 어떤 숙명같은 하나의 엄숙한 의식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새로 장만한 다음연도의 수첩을 꺼내놓고 뒤쪽 주소록의 새하얀 지면을 펼쳤다. 알수없는 설렘이 가득한 시간........
왼쪽으로 금년 한해 내 손때가 잔뜩 묻은...... 왠지 허름해 보이고 남루하게 까지 느껴지는 헌수첩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옮겨적던 그 지극히 숭고하고 성스럽기까지 하던 그 시간들...........
최소한 지난해의 흘려쓴 필체보다는 정성을 다해 반듯하게 써 내려가야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고 옮겨 써내려가면서 떠오르는 얼굴들과 시간들...........
까맣게 볼펜으로 메뀌 지워논 까만 여백에서는.......... (여기가 누구였는데 내가 지워버린거지?) 하다보면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
생각에서 조차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젠가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수첩에 부활하는 사람도 있는 우리네 인생사..........
중간에 연락처 바꿨다고 한줄 옆으로 찍 긋고 흔한말로 그 위에 덧빵친 기록들..........
헌수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지런한 글씨로 한날 한꺼번에 옮겨적은 흔적이 유력한 페이지 까지의 사람들은 지지난해까지의 오래된 지인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연필로, 파란 볼펜글씨로, 심지어는 빨간글씨로 까지 새로 등장한 연락처들은 금년 한해동안 새로 내 수첩에 등장한 뉴페이스들.............
새로운 인연이 들장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잊혀져가고..........
누군가는 거기에 더해서 지워져 갔다.
이게 어디 내 수첩에서만 벌어지는 일이겠는가?
나 역시도 누군가의 수첩에서 잊혀져가고 지워져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문득..........
잊혀진다는 것은 나름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것 같은데.........
내가 누군가에게 있어 인위적으로 지워짐을 당했다고 생각하자니 까닭없이 알싸하게 가슴이 져며온다.
아!
잊혀진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의 안쪽에 있는 것이고, 지워진다는 것은 아픈 경계의 저쪽이구나..........
그런거구나.............
세상이 변했다 한다.
이제는 수첩을 꺼내 펼쳐들고 나처럼 이런 청승을 떨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새로운 세상인 것이다.
옮겨적기는 뭘 옮겨적어.
버튼 몇개 누루면 다 알아서 기록해 주고...... 케이블 연결하면 언제든 새것으로 순식간에 이동저장되는 세상에.
수첩 잃어버렸다고 밤늦게 까지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 또 다시 헌수첩 펼쳐놓고 옮겨적던 청승을 누가 떨까?
- 핸디폰 잃어 버렸어. 그래서 연락처 몽땅 날라갔다고....... 그러니까 나 아는 사람들은 죄다 나한테 전화 한번씩 다시 걸어 줘.
이런 문구가 자신의 이니셜 앞에나 프로필에 나붙는 이 시대에 말이다.
어떤 애매모호한 상황에는 곧 잘 (핸디폰을 잃어버렸어. 내지는 잃어버렸다가 겨우 다시 찾았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잊혀지는 거?
지워지는 거?
다 똑 같은 거야. 그게 그거지 뭐.
클릭해서 삭제 누르면 끝인거야. 어때? 아주 쉽지?
그런데 어쩌나?
난 여전히 그 모두가 아직은 안 쉬운데............
좋고 싫고의 감정을 떠나서 아무 이유없이라도 모두모두를 오래오래 기억해 줄터이니, 너희들도 그때까지는 나를 남겨 둬 줄래?
망각이란 넘 때문에 잊혀지는 것 까지는 좋아.........
지워져버려야 한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디지털 만능의 시대 저편에는 아나로그가 어떤 향수처럼 아른거린다는 이야기 때문일까?
곧 잘 사람들은 말한다.
- 아무래도 우리 만남은 인연인가봐.
- 이렇게 시작된 우리 인연 오래오래 영원까지 함께 가자.
- 조물주께서 우리를 축복해 이런 인연을 주셨는가봐.
여기에는 친구사이도, 연인사이도, 동료사이도, 혈육사이도, 세상의 모든 관계가 다 포함되겠지만.....
과연 그럴까?
시작은 다 그렇게 좋고 좋은 인연들만 있을까?
그럼 우연이랑 악연은 어디로 마실갔지?
시작이 곧 인연이란 말에는 어느정도의 개운치 못한 뉘앙스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시작이란 새로운 관계의 출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관계가 시간을 헤쳐가며 흐르다 언제고 어떤 종극의 한 획을 그어야만 하는 시점에서야 비로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향기로운 시간들로 무르익으면 그때는 비로소 인연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고.........
시작이 아무리 향기로왔어도 종국에 아름답지 못하면 그것은 당연히 악연이 아니겠는가........
시작은 분명 있었던 듯 하나 그저 스치듯 지나쳐 더 이상의 무르익음이 없었다면......... 우연이겠고.........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수첩 한구석에 내 이름과 연락처가 깨알처럼 적혀있다가 해마다 새로운 수첩에 끊입없이 올겨적혀지기를 소망하고..........
내 생명이 다하거든, 그 누군가의 수첩에 적힌 내 연락처 위에 다른색 볼펜으로 (인연)이라고 덧붙여 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삶을 정녕 나는 소망한다.
그러자면........
이제 시작된 2016년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를 기억해 주고 바라보아주시는 당신을...........
오래오래 더 많이 사랑하렵니다.
정녕 그리하며 살겠습니다.
---- 2016년 1월 1일 저녁에...........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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