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36번 국도를 타고 20km 정도를 남쪽으로 달리면 수안보가 나온다.
수안보를 지나 2km 정도를 더 가면 옛길(구도로)로 빠져나가는 샛길이 보인다. 이곳이 화천리 발화동(은행정) 마을이다.
눈부시게 성장한 오늘날의 시점 이전까지 한양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한반도의 혈맥이나 다름없던 옛길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길이다. 사람들은 이곳의 이름을 소조령(작은 새재)라 부른다. 여기 소조령을 넘으면 수옥정이 나오고, 신풍 마애불을 지나 연풍으로 빠져서 이화령을 넘으면 비로소 영남지방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제에 의해 이화령길이 뚫리면서 생겨난 일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단 문경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북쪽의 하늘재를 넘어서 송계계곡 미륵리에 닿은 다음 , 수몰지역인 한수면의 신당이나 무릉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길을 택하거나, 문경에서 남쪽의 새재(조령)을 넘어서 수안보를 거쳐 충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거나 해야만 했다. 문경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날아가는 새도 쉬어야만 겨우 넘을 수 있다는 새재(鳥嶺)를 넘으면 고사리(이화여대 수련원)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힘을 내서 작은새재(소조령)을 넘어서 은행정 마을에 도착하면 하루해가 저물었다고 한다.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야 비로소 나그네는 긴장을 풀고 제대로 여독을 풀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새재를 넘는다는 것은 산적도 있고 무서운 산짐승도 자주 출몰하고, 산속에서 길을 잃거나 지쳐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새재를 넘고나면 이제 더이상 한양까지의 남은 여정에 험한 고갯길도 없고 맞딱뜨릴 위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 은행정마을 주위로 물맛이 좋은 약수와 술과 음식이 맛있는 주막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모처럼의 휴일에 반가운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관문에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는 것이다. 여기서 (관문)이란 문경새재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놓여있는 '세개의 성문'을 의미한다.
일단 자동차전용도로를 달려 문경으로 향한 일행은 1관문(주흘관)에서 출발해서 2관문(조곡관)을 지나 3관문(조령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내려왔다. 중간에 녹두전에다 해물파전에댜 동동주로 요기를 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다시 몰려온 허기를 달래야만 했다.
그런데, 문경의 유명하다는 '조약돌 삼겹살'이나 '문경 한우'를 재껴두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소조령에 위치한 '가마솥***'에 가서 '토끼탕'을 먹겠다고 아우성이다.
'왜 하필 거기를........'
차마 입밖에 내뱉지는 못하고....... 어쩔 수없이 소조령으로 함께 갈 수 밖에 없었다.
은행정 마을에서 샛길로 빠져서 소조령 옛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내가 2년반동안 머물렀던 집이..........
소조령 옛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편 언덕에 누렇게 황토벽돌로 지은 네채의 가옥이 나타난다. 윗쪽의 세채는 작은 오두막 수준이고, 맨 아래 첫번째의 가옥은 제법 커다란 살림집이다. 바로 내가 살았던 집이다. 나름 내게는 애환이 서려있는 집이다.
그런데 변했다. 변해도 너무너무 변했다.
집의 생김새는 내가 살때랑 달라진 것이 없어보이지만, 사람이 살고있다는 데서 느껴오는 분위기는 너무도 달랐다.
수 년동안 일부러 이 길은 다니지를 않았었든데......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지 모를 어떤 알싸함이 송글송글 솟아올라온다.
장작에 미리 도끼질로 이빨자국(?)을 내서 담장을 쌓듯이 수북하게 쌓아올려 논 모습이 여전이 수년전처럼 정겹다. 이적 나를 기억해 주시는 주인 아주머니의 인사말씀만으로도 감회가 새롭다. 토끼탕의 맛도 여전하다. 토종닭 백숙으로 더 유명한 음식점이다. 산책 나올때 마다 금방 담장을 뛰어넘어 와 나를 물어뜯을것만 같았던 개(dog)들이며 흑염소도 그대로다. 이 집의 음식맛은 예전 그대로 명불허전이다. 소조령 옛길에서 음식점이라곤 이집 한군데 뿐이니 물어보고 찾고 할 이유가 없다.
어둑어둑 해거름이 되어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여다보는 옛집.
겨울이라서 일까? 어찌보면 을씬년 스럽기까지 하다. 음식점 아주머니에게 여쭈어보니 내가 열쇠를 넘겨주고 떠나왔던 분에게서 또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큰 병을 앓아 몸을 추스리고자 요양처럼 오신 분인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자신의 몸을 우선 추스르다보니 집을 가꿀 여가가 부족했지 싶다. 건강을 추스르고 나시면 자신의 거쳐를 돌볼 여유가 생기겠지....... 과연 그럴까?
나도 아팠었다. 그때는...... 나도 그때는 아주 지독한 병에 걸려 중환자 다름없었다면....... 그래도 내가 살던 집은 저렇지 않았다.
소조령에 머물렀던 2년반의 시간........
더 머물렀을 수도 있었는데.........
다시....... 다시........ 시골로 나가고 싶어진다. 오늘 갑자기.........
적어도 이랬다.
내가 살던 때의 소조령의 겨울은 유난히 춥기는 했어도 나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당에 나서면 발치아래로 발화동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산책을 나가면 집과 가마솥음식점 중간에 모 문중의 장지로 쓰는 곳에 노송이 군락을 이루는 숲이 있다.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어도 걸어서 3관문까지 다녀오곤 했다. 남아있는 사진 속에서 그날의 모습을 찾아내 보았다.
폭설이 내려 소조령 도로 교통이 단절되면 나는 비료푸대를 들고 나의 전용 눈썰매장을 만들었다. 가속이 붙으면 완전 스키수준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두 발로 방향을 잘 잡아서 브레이크를 잘 사용해야지, 자칫 실수로 도로 한가운데 밖힌 핀을 지나치게 되면...... 고*가 부러지거나, 똥* 제대로 먹게 된다. 아니면 가드레일 들이박고 엠블런스를 타던가......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고사리수련원을 거쳐 몽골텐트촌을 지나 수옥정을 들러서 신풍 마애불까지를 다녀오면..... 정말 제대로 된 한나절의 산책 코스였다.
여름날 밤에 어둠속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했는데, 고갯마루에서 넘어오고 있는 시내버스 막차 불빛에 아스팔트 포장도로 위로 나와서 또와리를 틀고 있는 뱀들을 보고 놀라서는 다시는 한밤중의 산책은 하지 못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품은 온기를 느끼고 찾아서 뱀들이 기어나와 쉬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엄청 충격을 받았던 곳도 바로 소조령이었다.
냉이와 씀바귀가 무척 많이 나는 곳이 또 이곳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소조령 생활에서의 압권은 당연히 '자전거 산책'이었다.
'문경새재'는 차량통행 제한구역 이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이곳의 환경이 자연의 본모습 그대로 남아있고 유지되는 것이라 본다. 내가 머물때는 3관문까지 차량이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중간쯤인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자전거 행렬도 통행이 제한되고 있다. 이제는 내가 다시 소조령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전거 산책'은 불가능해졌다.
내가 말하는 '자전거 산책' 이란.......
나는 자전거 두 대를 장만했다. 모두 중간을 접는 자전거였다. 하나는 내꺼, 다른 빨간 자전거는 챠밍여사꺼.
새벽에 날이 채 밝기 전에 자동차 트렁크에 자전거 두대를 접어서 싣고 3관문을 향해 소조령 집을 나선다. 3관문 '조령관'의 성문에서 자전거에 올라 새벽 미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배낭을 열어 보온병에서 뜨거운 커피를 따라 '모닝 커피' 아닌 '새벽 커피'를 마신다.
대한민국에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엣길 (문경 새재)가 온통 우리 두사람만의 것이 되는 순간이다. 상큼한 새벽공기도, 우거진 숲도, 잘 정돈된 흙길도, 3관문 2관문 1관문도 모두 우리 두사람만의 것이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 봐도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우리 밖에.....'
어둠이 걷히고 숲의 푸르름과 황토빛의 흙길이 제 빛깔을 찾아가고, 골짜기에 내려앉은 새벽 연무가 드러날 때 쯤이면, 우리는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서너번 밟는다. 그럼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무도 충분했다. 더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6km쯤의 산책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싱그런 새벽의 찬 공기와, 시간이 지날수로 점점 푸르러가는 숲들과, 하루를 시작하려 기지개를 펴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2관문을 지나고 1관문을 지나 너른 잔디밭 공원을 만나게 된다.
'문경새재 관리사무소'에 들러 직원용 자전거 거치대에 우리가 타고온 자전거를 보관시킨다. 물론 자물쇠를 잠궈서 말이다.
그리고는 거기서 부터는 다시 방금전에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 길을 되돌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쉬면서 차도 마시고, 과일도 깍아 먹고....... 젊은날의 데이트를 복구시키다 보면 어느새 다시 3관문에 도착해 있었다.
어느날 인가는 되돌아 올라오다 보니 드라마 '왕의 얼굴'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경험도 종종 있다. 사극 세트장이 이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자주 촬영장면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엑스트라 출연 기회는 잡지 못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자전거는 몇날이 지나 생각이 나면 내가 차를 끌고 넘어가서 트렁크에 싣고 돌아오면 된다.
또 이런 '홈그라운드 트래킹'을 마치고 나면, 지역에서 명소로 꼽히는 곳에 찾아가 '시원한 막국수' 한그릇은 비워 주면서 마무리를........
이 같은 산책은 사계절 내내 아무때고 아주 여러번 그런 '자전거 산책'을 즐겼고 그 기억이 '소조령 생활의 백미' 였지 싶다.
살다보니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깊은 수렁에 빠져서 아주 오랜시간 허우적거린 시기가 있었다.
겨우 수렁에서 빠져나와 뒤를 돌아다보니........ 본래의 길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나 있는 초라한 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좌절. 체념. 무기력....... 그냥 이쯤에서 영원히 쉬는 길을 택해볼까 고심도 앴었다.
되돌아 가는 길을 너무도 멀고 힘겨웠다.
또, 이미 한번 어그러진 팔자는 아무리 노력하고 용을 써 보아도 추스려지거나 제대로 회복될 낌새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팔자소관'이나 '운명'이란 단어가 생겨났나보다. 그래서 애초에 더 신중하고 더 자중하고..... 아녀자의 말에 더 귀를 귀울여야 했었나보다.
'내 삶은 내꺼'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간다'라고 외치던 내 젊은날의 혈기는 그만...... 어느 순간 총기를 잃어 어긋나기 시작했고....... 깨달음을 얻었을대는 이미...... 궤도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었다.
내 인생에서 '노름' '룸싸롱' '복권' 이딴것들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 외엔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내가 못하는 것도 없다'라며 살아왔었다. 여행. 사진. 그림. 남들 하는것은 다 해보았다. 골프만해도 남들보다 한참 빠르게 95년에 한동안 푹 빠져 보기도 했고, 자동차에 미쳐서 웬간 짖을 다해보기도 했다. 다분히 젊은 혈기에서 오는 치기였다. 그 댓가로 내게 돌아온 가혹한 현실........
되돌아 가려고...... 회복해 보려고 나름 애를 쓰기는 바단히 쓰고 있음에도, 한 번 어긋날 일에는 시간이 지나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악재만 겹쳐왔다. 모든것을 잃었다. 되돌아 보니 내가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것을 덜어내고 털겠다고 다짐했지만...... 털어도 털어도 다 털어지지 않는 것이....... 그것이 인생이었다.
그래서 떠났다.
어느정도는 내 심신이 미워서 자학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힘들고 매우 위험한 일을 찾아서 자처해서 떠났다.
아주 짧으면 3개월, 평균 6개월이 걸리는 타향생활을 시작했다. 길게는 한 현장에 1년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힘에 겨웠고 나름 무척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 지경에서 내가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지상에서 철구조물이나 기구를 제작을 해서 하나하나씩 들어올려 조립을 해서 거대한 건물을 만들어 나간다. 곧바로 적응한 나는 신입작업자들을 가리키고 독려하는 인적관리 일까지 담당했다. 구조물을 들어올려 조립을 하자면 대충 지상 45m에서 50m되는 높이의 구조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일을 해야 한다. 바람에 구조물이 날라가 부러지기도 하고, 사람이 부딪거나 떨어지기도 한다. 수 톤의 구조물이 항시 머리위로 날라다니고, 여러가지 예측할 수 없는 사고들이 발생한다. 지상에서, 구조물 상부를 오가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후반부에 정밀한 기계적 장치를 설치함에 있어서는 극도의 정밀함과 밸런스를 중요시 한다. 또 그런 부분에는 내가 체질적으로 잘 맞았다.
무릎이 나가고 허리가 나가고 한쪽 팔에 핀을 수십개를 밖는 모습들을 목격하면서..... 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
남들에게서 내가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본래의 궤도에 어느정도 다가서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깨달음이 있었고..... 나는 다시 새롭게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작업현장이라는 곳이 시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기상요건이 안좋으면 무조건 휴식이다. 정해진 공사기간이 있다보니 늘 긴장속에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한 현장을 마치면 한 달에서 간혹는 2달 정도의 휴식기를 갖는다. 울산. 포항. 여수. 구미. 태안. 등의 대단위 산업단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불규칙하게 짬짬이 집에 들르는 정도가 전부였다. 실질적인 작업의 위험도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으니, 그냥 어쩌다 돌라왔다 가면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확인은 시켜주는 셈이었다.
철구조물 상부에 매달려서 다음 구조물을 기다리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면 하루에서 수십번씩 떠오르는 것은 오직 가족 뿐이다. 본래의 내 삶의 궤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 때 쯤에 우연히 소조령을 지나다가 가옥이 비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만에 간단한 옷과 책과 책상과 컴퓨터만 가지고 무작적 이사를 감행했었다.
한적한 곳에서 좀 쉬면서 내 자신도 추스르면서...... 또 당시에 오랜시간 쓰다가 만 (피안에 부는 바람)이라는 소설도 마무리 짓고 싶어서 였다. 사실 그때 모 출판사에서 소설의 출간을 제안받기도 한 상태라서 일단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짖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2년반을 머물렀던 소조령이었다.
과연 내 인생에서 소조령에 머물렀던 시간과...... 당시에 무작정 덤벼들었던 그 위험한 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소조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서부터 여러가지 변화와 안정이 찾아왔다.
현장이 아무리 멀어도 1주나 2주에 한번은 올라왔다. 장마철이나 눈이 내리면 일단 올라왔다가 현장사정을 알아보고 나서 내려갔다.
챠밍여사와 함께 냉이 씀바귀 캐러 다니고, 자전거 투어도 하고, 들국화 따다가 차도 만들고, 점 점 시골생활에 맛을 들여가면서 시내에 좀 더 가까운 곳에 갓 살고 싶다고 실제 땅을 알아보러 다니기까지 했다.
한 현장을 마치면 한달에서 두달동안 들어 앉아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하면서 보냈다. 마당에 애기들 소꿉장난하는 정도의 대리석으로 미니 탁자를 만들어 놓고 빈대떡을 굽던 삼겹살을 굽던....... 제대로 전원 생활을 즐겼다.
그러면서....... 내가 가장 즐겨 좋아하는 일....... 화단가꾸기에 다시 뛰어 들었다.
화단에 온갖 꽃을 기르고 수를 놓으며 난을 치시던 요절하신 내 어머니의 피를 더 많이 이어받았는지 나도 그런 취미가 적성에 잘 맞는다.
사냥이나 낚시를 즐기며 집에서 사냥개나 물고기를 기르던 우리아버지의 유전인자는 나에겐 전혀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도 나는 집에서 애완견이나 심지어 물고기 기르는 것 까지도 아주 싫어한다. 대신 꽃이나 덩쿨 식물을 기른다. 예쁜 식물을 어무데든지 매다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에서 꽃이 피어나면 황홀해지기까지 한다. 우리 아들 표현대로 한다면, '일단 방안에 책이 쌓이고 화분이 쌓여야만 아빠방'이라고 정의를 내려줄 정도이다.
그런데 솔직히 요즘은 아니다. 방에 책은 쌓였지만, 화분대신 술병이 잔뜩 쌓였다. 아들이 알면 또 옐로우카드 단박에 날아올것이다.
해바라기를 심었다.
황토방 주위로 약 1오백 포기 정도의 해바라기가 피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자주 들러서 사진을 찍고 갔다.
집을 비우다 돌아오니 누군가 꽃봉오리만 싹뚝 잘라서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해 태풍에 해바라기 절반이 쓰러져 버렸다.
해바라기는 꽃씨를 뿌린지 60일이 지나면 꽃을 피운다. 바람 피해를 줄이려고 싹은 좀 늦게 나와도 깊게 구멍을 파서 씨를 뿌린다. 중간 중간에 추가로 거름을 흩뿌려주고, 키가 자라면 흙을 파다가 뿌리부분을 수북하게 덮어준다. 또 씨앗을 한꺼번에 모두 뿌리는 것이 아니라, 보름 정도씩의 차이를 두고 사이사이에 서너번에 걸쳐 나누어 씨를 뿌린다. 그러면 먼저 핀 꽃이 탐스럽게 해바라기꽃씨 봉오리를 만들어도, 그 사이사이에서 또 새로운 노란꽃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나팔꽃을 심어주면 때론 해바라기 줄기를 타고, 전봇대를타고 아름다운 꽃무더기를 선물로 되돌려 준다.
소조령에서 나는 그렇게 놀며 지냈다.
창고에 쳐박아 둔 옛날에 쓰던 노트북에서 '소조령에서 가꾸던 해바라기 화단'의 사진을 찾아냈다.
그.땐.이.랬.다.
내.정.원.이.
내게는 참 고마운 소조령 생활이었다.
어떤 이유로 접기는 했지만.......
문득.
다시 그런 환경을 한번쯤 더 가졌으면 싶다.
우리 손녀 (태리)가 뛰어놀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을성 싶어서이다.
내가 예쁘게 잘 가꾸어 놓은 꽃밭에서 예쁜 손녀 재롱을 보면서 쫄래쫄래 뒤따라다니고 있을 내모습이 본래의 내모습이 아닐까....
가슴이 알싸해지는 소조령에서의 시간들........
그 시절의 사연들.........
세상엔 감사할 일들과 감사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문득 지나온 시간을 회상해 보면서.........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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