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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화양구곡 -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도원을 거닌다

by 피안재 2013. 5. 1.

 

 

 

  매년 5월 1일은  달력에 빨간 글씨가 아니면서도 공휴일이다.

  '근로자의 날'이라는 나름으로 고심끝에 국어사전에서 고르고 골라서 보편타당의 의미를 담고자 애쓴,  대다수 근로자들을 위햔 기념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이날은 '노동절' 이다.

  시대를 앞서간  몇 몇 선구자적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와 주권회복을 위해 숱한 눈물과 땀과 피로써 마침내 결실을 보아, 당당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입법화 하고 자신들의 권익옹호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게끔 커다란 결실을 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노동자들의 공식 기념일인 것이다.

  정치집단과 재벌들간의 야합으로 점철된 한반도의 근 현대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성스럽고 고귀한 노동절의 참 의미를 폄하시키려는 듯 어정쩡하게 가져다 맞춘 '근로자의 날' 이라는 표현을 대할 때 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 오는것을 피할 수가 없다.

  2013년의 '노동절'에 새삼 옷깃을 여미고 노동자의 참 권익옹호와 제도화를 위해 목숨바쳐 투쟁하신 뭇 영령들께 한없는 애정과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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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는 화창하고 따사로왔다.

  나도 왕짜증 여사도 아들도 우리가족 셋 모두가 노동자들이니, 평소 열심히 일한 우리 가족들 모두는 '노동절'의 참 의미를 되새기며 나름으로는 충분히 이날을 기쁘게 누릴 자격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겠다. 

  김밥을 세 줄 샀다.

  작은 륙색에   캔맥주 두개랑 참외  도마토 과일이랑 떡을 약간 담아서 아내와 둘만의 봄나들이를 떠난다.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도원을 거닐고 싶어서 충주 도심을 벗어나 떠나보기로 했다.

  수안보 방향으로 핸들을 잡고 10여km를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아주 커다랗고 빨간 사과를 쌓아놓은 조형물이 보인다,   충주시의 상징인 충주 사과 조형물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달린다. 표지판엔 괴산. 괴산IC 방향이라고 적혀있다.

  터널을 빠녀나와 시원하게 뚫린 곧고 너른 내리막길을 대달리다보면 싱그런 봄바람이 차창으로 스며들어와 폐부깊숙한곳까지 전해져온다.

  좌측으로 문강온천의 표지판이 보인다. 산애래 온천 주차장에 무척이나 많은 자가용들과 관광버스들이 주차해 있는 전경이 보인다.

  중부지방에선 드믈게 누런 황토빛의 휴황성분이 가득한 온천수가 샘솟는 곳이다.

  내달리던 길을 조금더 달리다 보면 머리위로 육중한 교각들이 가로질러 지나는데, 바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머리위로 지나가고 있기 때문인다.

  그 교각들 아래로 삼거리가 나타나고 이정표가 커다랗게 쓰여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괴산군 장연면 삼거리이다. 그냥 장연삼거리라 부른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에서 내려서면 톨게이트를 빠쪄나와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이정표가 바로 여기 장연 삼거리인 것이다.

  이곳에서 좌회전을 하면 추전리 방향으로 해서 장연면사무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충주를 벗어나 달려온지 십오분 정도 지난 지금, 우리가 서 있는곳은 바로 괴산(槐山)이다.

 

 

 

 

 

 

 

 

 

 

 

 

 

 

 

 

 

 

 

 

 

 

 

   시골의 정취가 물신 풍겨나는  논 밭들 사이로 난 꾸불꾸불한 지방도를 한참을 달리다 보면 왼편 언덕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방향의 괴산휴계소 건물이 뒷모습을 드러내고, 여기서 부터가 바로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이자 면사무소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렸으며, 괴산이라는 지명의 앞 글자인 괴(槐)는 바로 느티나무(괴)자인 것이다.

  그만큼 괴산에는 느티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어느마을 어느 산자락이건 수령을 수백 년씩 먹은 느티나무가 여기저기 흔하디 흔한 것처럼 사방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이곳 오가리에도 사방으로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산재해 있는데, 면소재지 한 켠에 수백년 됨직한 느티나무 두 구루가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고, 조금 옆으로 비켜나 한참은 젊어 보이는 느타나무 한 구루가 이 늙은 두 구루를 떠받들며 서 있다.  그런데 이 늙은 느티나무 중 하나가 수령이 자그만치 육백년이나 되었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속리산의 정이품송 못지않은 위용을 당당히 드러내며 서 있는 것이다.  이 노년의 느티나무가 지금 옅은 녹색의 새옷으로 갈아입고 새악시 같은 옅은 미소로 찾아오는 나그네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오가리 느티나무,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한다.

 

 

     - 미선나무 군락지.

 

 

 

 

 

   오가리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나와서 다시 가던 걸음을 재촉해 보면, 곧 바로 숨이 가슴팍까지  팍 팔 치밀듯한 가파른 고갯길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힘들기만한 고갯길이라는 인상보다는, 주변의 풍광이 하도 수려해서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다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올라설 수 있다.

  솔치재.(솔티재)

  고갯마루엔 요즘 먼 타지에서까지 일부러 찾아온 자가용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도로가에 주차돼있다.

  산나물 채취가 제철을 맞이하였고, 이곳에서 채취되는 산나물들이 나믈 좋기로 소문이 멀리까지 자자하다 한다.

  이마에 송곳송곳 솟은 땀방울을 한 손으로 쓰윽 문지르고 나서 내딘 발거러음을 재촉해 서둘러 언덕을 내려달린다.

  적당히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시원하게 내려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도로가에 약수샘물터가 나타난다. 송덕리 약수터인데 물맛이 좋고 약수가 어떤 지병환자들에게 효험이 있다하여 괴산을 지나치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제법 거리가 잇는 인근의 충주나 수안보 괴산지역에서 까지 일부러 먼길을 와서는 약수를 받아가는 사람들로 주말이나 휴일이면 물통들이 길게 늘어서는 풍경을 만들어내놓기도 한다.

  이 약수터에서 아래로 약 300M 정도를 내려가면 삥둘러 철망이 쳐져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세계를 통털어 1종 1속 뿐이며,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아주 희귀하고 귀한 식물이 바로 이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바로 미선나무이다.

  물푸렛나무과의 키가 1M 정도 자라나는 나무로, 잎은 타원형 혹은 달걀모양으로 마주보고 나는데 잎 끝에 톱니바퀴 같은 끝부분은 없다.  3월에서 5월 사이에 흰색이나 담홍색의 꽃이 잎새보다 먼저 피었다 진다.  열매는 부채모야으로 가을에 익는다.  최근들어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도 군락지가 발견되어 뉴스에 실리곤 하는데, 이 미선나무의 중요 군락지로는 바로 이곳, 송덕리 군자산자락이 가장 크고 유명하며 인근의 장연면 삼거리 부근에도 군락지가 있다. 그리고 진천군 용정리에서도 미선나무 군락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식물학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 논 밭사이의 돌무더기 위에도 저렇게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뤄 위용을 뽐내고 있다.  어딜가나 느티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는곳이 바로 괴산이다.

 

     - 지극히 단순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탑이지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절마당에 놓여졌을 것으로 여겨지나 인근의 논과 밭에서 절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의 풍상과 숱한 사연을 간직한 채 오늘도 쓸쓸히 서있다. 어느이가 있어 소망을 담아 금줄을 얹어 놓았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골짜기를 넘고 또 넘어, 빙하가 녹아 내리는 강물을 건너고 또 건너, 깍아지른 바위벼랑을 기어오르고 내려서기를 수십 수백번 반복을 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경주하고 난 후에 기력을 다해 이제 서서히 삶을 접으려 하는 즈음에........ 어떤이의 눈 앞에 나타났다는 샹그릴라.

  나는 한반도 내륙의 깊숙한 곳에 은거하듯이 감추어져 있는 괴산(槐山)이 정녕 이 땅의 샹그릴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곧 잘 해보곤 한다.

  소백산 자락의 충청도 내륙 깊숙히 자리한 괴산을 두고 일찍이 조계생은 이렇게 말했다,  '한 줄기 물은 흰 비단 같이 흐르고, 사면의 산은 층층한 성 같이 둘렀다.'라고.

  또한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차고 더운것이 알맞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찍부터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바위암벽으로 된 산들 사이에 놓여 크게 농사지을 땅이나 큰 고을이 들어설만한 대지(大地)는 없으나 나름으로는 제법 사람 살만한 곳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것 같아 보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괴산을 이렇게 단언했다. '금강산 남쪽에서 가장 뛰어난 산수를 지닌 고을이다'라고.

 

 

  제법 너른 들판을 내달리면서 저만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산등성이들은 모두가 속리산자락이다.

  그리고 그 앞에 연풍에서 흘러내려와 괴강으로 합쳐져 내리 흐르면서 달래강이 되고 충주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영월 동강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합쳐져 비로서 남한강이 되는 제법 커다란 시원한 물줄기가 개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물은 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정도로 맑으며 여울에 사는 민물고기들이 지천으로 살고 있다.  날이 풀리면 고기잡고 올갱이(고동. 다슬기) 잡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든다.

  이곳이 장연에서 넘어온 작은 도로가 괴산 연풍간의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 바로 태성리이다.

 

  태성리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아주 고즈넉한 사찰 각연사가 있다.

  나의 여행 이력에서 사찰하면, 한 이십오년 전 강원도 고성땅의 건봉사를 한겨울에 찾아갔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한다.  지금은 한참 중수 중창되어 대사찰의 위용을 갖추었다고 하겠으나, 당시에는 오랜 역사에 길이 빛나는 대가람의 위용이며 역사적 발자취며 건봉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참하리만치 황폐한 절터만 남아있었다.  지금도 내 여행의 발길이 강원도쪽을 향한다면, 나는 의례히 건봉사를 가장먼저 떠올리곤 한다.

  다음으로 사찰에 대한 나의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것이 바로 내 고향 충주 인근에 있는 각연사 이다.

  한여름 태풍이 지나 연일 폭우가 몰아치다가 잠시 소강상태로 모처럼 햇볕이 든 날에 찾아갔던 곳이 바로 각연사였다. 지금처럼 일주문도 세워지지 않은 알맞은 크기에 아담한 사찰이, 도랑을 따라 계곡을 돌아가다보면 모습을 드러내는데, 잘 정돈된 사찰의 마당이나 불탑이나 대웅전이 저만치 위용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숲 한쪽으로 스님들이 기거하시는 요사체의 뒷마당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장독대며 내다 널은 빨랫줄이며 여타 사찰에선 좀 체 보기 힘든 모습들이 가장먼저 방분자의 시야에 은근하게 내비춘다.

  마치, 갖 시집온 새색시가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곱게 차려입은 한복 치맛단 속깃이 슬쩍 드러나는 듯 한 느낌을 첫인상으로 가졌던 곳이 바로 각연사이다.

  각연사는 이곳 태성리에서 약 4km 정도 골짜기 안에 있는데, 태성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들어가면서 주변에 펼쳐지는 주위풍광을 감상하는 맛을 빼어놓으면 안될 듯 싶다. 길을 따라 왼쪽으로 흐르다 어느새 오른쪽으로 맑디 맑은 도랑이 흐르고 온갖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진달래와 철쭉이 봄이면 너무나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내고 이름모를 새들이 사방에서 노래하는 소리를 오가는 내내 들을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우리 왕짜증여사도 아주 좋아하는 산책코스로 아주 이따금씩 찾아가곤 한다. 계절을 달리하며 찾아가는 묘미 또한 달고 깊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미루어 두었다, 다음에 한 번 각연사를 다시 소개하기로 하자.

  태성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연풍으로 천주교 박해의 슬픈 역사기록과 단원 김홍도가 고을 현감으로 부임했던 연풍성지와 연풍현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태성리에서 우회전을 해서 괴산읍 쪽을 향해 달려본다.

  2km 쯤을 더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아주 커다란 돌비석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쌍곡계곡이다.

 

 

 

 

 

 

 

 

 

 

 

 

 

 

 

 

 

 

 

 

 

   쌍곡계곡은 이 커다란 바위 표지판이 서있는 쌍곡마을에서 시작하여 계곡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제수리재에 이르는 총 길이 10.5km의 계곡을 이르는 말이다. 

  본시 옛날에는 쌍계라 불렀는데 어느때 부터인가 그 낱말풀이 처럼 쌍곡계곡이라 늘려 부르게 되었다.

  주변으로 보배산(750m) 군자산(948m) 비학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항시 맑디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기암절벽과 노송들이 한 폭의 수묵화 처럼 어우려져 예로부터 괴산팔경의 하나로 손꼽혀왔던 곳이다.  조선시대 이황. 정철 같은 문인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차마 그 정취에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아 한동안씩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  여기서부터 10.5km. 계곡안의 놀라운 풍광이 파노라마 처럼 이어진다.

 

 

 

  - 쌍곡계곡의 소금강 지역.

 

 

 

  -  쌍곡계곡 초입풍경

 

 

    

 

 

 

 

 

 

 

   - 가다보면 이런 바위벼랑들이 길을 떡 가로막는다. 어쩌겠는가 돌아서 갈밖에.

 

 

 

  - 계곡 도랑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조릿대 숲길을 따라 물가로 내려서보자.

 

 

 

   - 계곡 아래로 이런 풍광들이 굽이굽이마다 펼쳐진다.

 

 

 

   - 맑은 물이 굽이치는 계곡위로 다리가 걸렸다. 다리를 건너 칠보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이다. 그리고 이 산 너머에 각연사가 있다.

 

 

 

  - 봄날의 쌍곡은 은근하고 고즈넉한 멋을 가득 머금고 있다.

 

 

 

  - 조물주께서 파스텔로 한폭의 그림을 그려놓으셨다.

 

 

 

  - 쌍곡계곡의 명소인 쌍벽. 바위벼랑이 높고 물이 깊어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한참 계곡아래에서 물길로 걸어올라와야만 제대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참 아쉽다.

 

 

 

 

 

 

   제수리재 정상에 올라서면 비로소 쌍곡계곡은 끝이난다.

  꾸불꾸불 언덕길을 내려서노라면 사방의 산들이 뽀얗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나름으로 넉넉한 풍광을 뽐내고 있다.  인근의 모든 산들이 대부분 그런 모습들이다.

  여행자의 마음도 저절로 푸근하고 넉넉해 진다.

  산세가 저러하니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훈훈하고 소박하고 마음들이 넉넉할 것만 같다.

  '세상 살아가면서 한 시절 이런곳에서 자연에 모두 내맡기고 살아보면 어찌 아니 좋은텐가' 하는 푸념이 저절로 나온다.

  제수리재 아래로 내려서면 길은 아주 잠시이지만 여기는 분명 경상북도 문경 땅이다.  대한민국 지역편재가 산이나 하천들을 기준으로 나뉘다 보니 방금까지 충청북도 괴산이었는데 산 아래는 경상도 문경땅이다.  작은 실개천을 따라 굽어진 도로를 아주 아주 조금 오르는 듯 싶어지면, 금새 떡하니 다시 '여기서 부터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입니다.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이 히쭉히쭉 개구장이 웃음으로 반기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 거리가 아주 짧기에 이를 눈치 챈 여행객들은 실소를 자아낸다.  눈치가 굼뜨면 다 거기가 거기같은 곳이겠지만.

  속리산 자락의 완만하고 뽀얀 바위벼랑들과 노송들이 펼치는 봄날의 향연에 취하면서 한적한 시골마을도 지나고 골짜기도 건너며 한참을 달리다 보면 '선유동 계곡' 이라는 간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쌍곡계곡이나 선유동계곡이나 지금 찾아가는 화양동계곡이나 모두가 '괴산8경'의 이름으로 불리는 비경을 간직한 곳들이다.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애당초 오늘의 목적지가 화양동계곡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선유동 안내표지판을 그대로 지나친다.

  '지난달에 (괴산 산막이 옛길)을 다녀왔으니 화전민들이 오가던 서민의 길을 다녀온것이요, 오늘은 선비의 길을 따라가 보고자 하니 나름 양반이나 사대부들의 발자취를 쫒아봄이요, 신선들이 노닌다는 (선유동)은 천상계의 길일 터이니 당연히 순서에 의해 다음 차례로 미뤄두는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화양동계곡은 괴산군 청천면 청천청소년수련원에서 부터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 개천을 따라 계곡 안쪽으로 들어서는가 싶으면, 몇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우측으로 하늘을 찌를듯 서있는 바위벼랑을 마주치게 된다.

  가파르게 솟아있는 기암의 경관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경천벽'으로 바로 화양구곡의 제 1경이다.

 

 

   - 화양구곡 제 1경  경천벽.

 

 

  아차 싶으면 모르고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여기서부터가 화양구곡입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들 차리시고 좋은 감상들 하시기바랍니다' 하는 안내판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여기가 화양동 이구나' 하는 표시는 약 200m쯤 올라가 공원관리사무소와 커다란 주차장이 눈에 띄고, 바리케이트 앞에서 관리인이 주차비를 징수하는 곳에서부터야 비로소 화양동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봄볕이 화사하게 내려앉은 잘 다듬어지고 관리된 화양구곡의 여행이 비로소 다시 시작된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크게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어 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한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노닐던 도원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선비의 유명한 호는 따로 있지만, 그의 호 중에는 분명 화양동주(華陽洞主) 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니 이에 더 부연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 선비가 바로 이 화양구곡이요,  화양구곡이 곧 그 선비를 일컬음이거늘.

  지금 내가 서있는 이 느티나무 아래에 사백여년 전에 그도 이렇게 멈추어 서 있었으리라. 이렇게 서서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화사한 봄이 내려앉은 물소리를 듣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그렇게 얼마만큼인가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그는 서서히 발걸음을 계곡 안쪽을 향해 옮겼으리라.

  그래서 나도 그의 자취를 따라 세월의 보폭을 세어보고 느껴가면서 천천히 계곡안으로 들어서본다.

 

 

 

 

 

 

   - 누가 화양동이 괴산땅에 있지 않다고 할까봐서인지 발길 닿는곳마다 온통 느티나무 숲이다.

 

 

 

  - 그리고 요분은 400년 뒤에 앞선분의 발자취를 따라 도원에 든 신식선비(?)의 아녀자되시는분이시다.

 

 

   - 화양구곡은 온통 화사하기 이를데없는 파스텔톤의 봄치장을 마치고 환한미소로 길손을 반긴다.

 

 

   - 구름의 그림자가 맑디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 이라 하는 화양구곡 제 2경이다.

 

 

   --- 효종임금의 승하를 슬퍼하여 매일 아침새벽마다 무릎꿇고 통곡하였다는 '읍궁암' 화양구곡 제 3경이다.

 

 

 

   - 맑고 깨끗한 물결 아래로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흐는다는 '금사담'이 화양구곡의 제 4경이다.

 

 

 

  - 그 금사담의 너른 반석위에 화양동주는 '암서재(岩捿齋) 라는 정자를 짖고 노년에 이곳에서 신선처럼 기거했다.

 

 

 

   -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만년에 머물던  암서재 전경.

 

 

 

 

 

   400년 전에 이 계곡을 거닐던 그 선비는 바로 우암 선생이다. 그가 바로 이곳 화양계곡의 주인 화양동주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효종임금이 승하하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모두 버리고 이곳 화양동에 낙향하여  칩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서책을 가까이 하며 노년을 보냈다 한다.

  먼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기꺼이 쫒아나가 반갑게 맞고, 그의 학문을 알고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온마음으로 가르침을 주기를 아끼지 않던 조선 중기의 대학자가 바로 송시열이다.

  선생은 주자학만이 최고의 학문으로 유일시 하였으며, 그 중 특히 예학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 아무튼 그가 대학자였다는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효종으 죽음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정계은퇴를 한 후, 이곳에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학양성에만 힘썼다는 사실과 그의 만년의 행태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무수한 추측과 험담과 가혹한 혹평이 뒤따르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런 몇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선생은 자기자신을 스스로 곧 잘 노자에 비유하곤 했다한다.  자신 스스로가 노자 보다 학문적으로 높다고 평가했다 한다.

  그는 분명 대학자였다. 학문이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겸양의 미덕이 부족하여 스스로 자신의 학문을  더 높이지 못하고 깎아먹는 누를 범하고 말았다.

  다음으론 효종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했다는 대목이다.  하얀 바위가 여기저기 움푹 파여나가도록 새벽마다 대성통곡을 했다는 대목이다.

  효종임금하면 오랜 볼모 생활로 오랑캐에게 잡혀가 있다가 겨우 왕위에 올라 북벌 계획을 착실하게 준비 하던중 갑자기 이유없이 죽음을 맞은 비운의 임금이다.  효종은 곧 북벌이었다.  그런 효종에게 사림의 실세였던 서인들이 조정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고 나서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끝까지 반대하였고, 결국 효종의 북벌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효종이 심기일전하여 다시 북벌의 기치를 드높게 내세우던 중에 갑자기 아직까지도 밝혀지지않은 미스테리의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 효종의 북벌을 끝까지 반대하고 물고뜯었던 서인의 중심에 바로 송시열이 있었던 것이다.  효종이 죽고나자 갑자기 송시열의 마음속에 효종에 대한 미안함과 가련함이 생겨나서였을까?  이 대목은 생각할 수록 아이러니하다.

  선생은 스승이었던 김집이 세상을 뜨고나자 비로소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숱한 사림들이 선생을 추종하고 따르기를 서로 앞다투었다.

  조선의 역사중에 인조와 효종의 왕권은 그 어느 임금보다 약했고, 반대로 사림의 영향력은 실로 왕권보다 강했다.  하여 사림의 영수가 된 선생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대를 거칠수록 올라가 실로 어마어마하게 강력해졌다. 굳이 조정회의에 나가거나 관직을 가지지 않고서도 언제든 정국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위에 이미 올라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곧 군왕이 주재하는 조정회의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낙향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정계를 은퇴하고 은둔을 한것이 절대 아니었다.

  번거롭고 복잡한 도성과 관료주의를 잠시 벗어나 쉬고자 화양동에 들어온 것이며,  그 후의 선생의 모든 행적이 여실히 이 같은 사실을 잘 뒷바침 해주고 있다.

  선생은 이 화양동 암서재에 들어 있으면서도 한양을. 조정을. 군왕을. 조선이라는 나라를 쥐었다 놓았다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림 (士林) 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었던가.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다시 노론과 소론.

  이렇게 명분과 명리 쫒기를 하며 자체 핵분열을 일삼는 집단이 아니었던가.

  비록 거창한 명분과 논리를 앞세웠다고는 하나, 한 꺼풀 벗겨놓거나 뒤집어 본다면, 명리와 명망에 눈 먼자들이 벌이는 피 튀기는 진흙탕 싸움. 곧 당쟁이 아니었던가.

  국상에 누가 무슨 옷을 입어야 되느니 안되느니가 참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안이기에 이 일로 숱한 사람이 죽어나가고 귀양을 가야만 하느냔 말이다.

  서인의 영수로 정권을 한 손에 쥔 처지이면서도 실각한 남인들의 처리문제를 모질도록 강력하게 처벌하는 쪽으로 거듭 주장을 하다 결국 아끼던 제자 윤증과 틀어져, 제자인 윤증은 소장파를 중심으로 소론이라는 파당을 만들고, 스승인 선생은 노장파를 끌어안고 노론파를 만들었다.  대학자인 스승이 제자 하나를 끌어안지 못하고 또 다시 파당을 만들어 그 후로 계속 이어지는 당쟁으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목숨으로 치부되는 세상을 만들었다가 종국에는 선생 자신도 그런 당쟁의 제물이 되는 기구한 신세를 맞게 되는 것이었다.

  말년에 드러난 성생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였다. '성격이 과단하여 정적이 많았다' 라는 평가였다.

  크게 학문을 이룬 대학자요 세상에 알려진 명망도 명망이었으려니와 권력이라는 양날의 칼도 휘두를만큼 휘둘러 본 처지였음에도,  장강의 커다란 물줄기도 종국엔 뒤에서 흘러들어오는 젊은 물줄기에 밀려 떠나가게 되어있다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는지 기어코 또 사고를 쳤다.

  이곳 화양동에서 은거하며 암서재에서 서책이나 가까이 하고 이 구곡의 풍광이나 벗삼으면서 살았으면 누가 굳이 해치려 들지 않았으련만, 스스로 자초해서 그 살벌한 당쟁의 한복판에 돌을 던져댔던 것이다.

  '신이 화양동에 칩거하던 중에 듣자오니 전하께서 세자책봉을 서두신다고 들었습니다.  전하. 이는 천부당만부당하신 처사이시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전하의 신후가 아직이옵고, 왕자마마께서 아직이시온데..............' 라고 상소를 올렸으니.

  아니나 다를까.  이내 조정은 벌집을 쑤셔놓은듯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조정 안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지난날 선생이 죄지우지하던 그 시기처럼 돌아가지를 않고 있었다.

  결국, 선생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안치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이리떼들은 추락하기 시작한 재야의거두를 그대로 가만히 두고 보지만 않았다. 어떻게든 끝을 보기를 원했다.

  연이어 상소가 빗발쳐 날아들었고 추궁해야 할 죄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재차 드러난 죄목들에 대해 재심 추궁을 위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왕명으로 사약이 내려왔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요 사림을 호령하던 거두인 선생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만은 초연하지 못했다.

  그럴싸한 명분만 있으면 군왕의 의중이 그렇다고 그동안 숱한 생명들을 당쟁을 통해 취해왔던 그 자신이었건만, 사약사발을 발로 걷어내차며 어명을 거절했다.

  그 자신이 남에게 들이대던 신성불가침의 잣대가 그 자신에게만은 대단히 부당하게 보였던가 보다.

  '임금도 자신에게는 이렇게 맘대로 할 수가 없다고 들이대다' 결국은 강제로 사약을 먹고 사사되었다.

  선생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대학자 다운 면모도 사림의 거두다운 호방함도 선비의 기개도 모두 저버린 모습이었다고 모두가 외면하였다 한다.

  그렇게 그는 떠나고,  이제는 여기 화양동에 자취만이 남았다.

  덧없음이라.

  부질없음 이렸다.

 

 

 

 

 

  무사(無事)라 했다.

  사람이 조바심 내기를 좋아하고 정적을 찹지 못한다더니 400년 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깨닫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구나.

  저 명리에 날뛰는 자들을 어찌 할까나?

  여의도의 둥근지붕아래서 날뛰는 자들아.

  화양구곡 길을 한 번이라도 거닐어 보려무나.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할때면 때는 늦으리.

  기발이승일도설. 사단칠정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첨성대는 화양구곡 제 5경이다. 층층이 쌓아놓은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하였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 암벽에는 실제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있다.

 

 

 

  - 암벽이 하늘의 구름을 찌를듯 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능운대.  화양구곡 제 6경이다.  하지만 왕짜증 여사는 암벽의 우측 윗부분에서 돼지머리상을 찾아냈다. 암돈대가 어떨까?

 

 

 

 

   - 너른 바위가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 와룡암.  화양구곡의 제 7경이다.

 

 

 

  -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내 가슴에 안겨오던 학소대.  화양구곡 제 8경으로 낙락장송 흐드러진 바위아래로 백학들이 모여들어 놀았다한다.

 

 

   - 멀리서 다시 돌아보며 잡은 학소대 풍경.  정말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아까왔다.

 

 

 

   - 계곡의 끝자락에서 화양구곡의 제 9경인 파천을 만났다. 티 하나 없는 옥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너럭바위 위에 파천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도원이 따로 없다.

  예가 바로 도원이다.

  400년 전에 이곳을 거닐던 한 선비를 쫒아 아홉굽이 비경을 감상하며 오르다 보니 벌써 구곡의 끝자락에 다달았음이라.

  경천대 옆 주차장에서 이곳 파천까지는 약 4km 정도로 길이 잘 가꾸어져 있어  별 어려움 없이 다녀갈 수 있다.

  명소만 감상하며 걷는다면 약 1시간 남짓.  그러나 노약자나 아이들을 동반하거나, 아주 느릿느릿 대자연을 감상하며 오른다면 넉넉잡아 한시간 반정도.

  다만 학소대에서 파천까지의 구간에서는 아주 약간 숨이 차오르는 고갯길이 있다.

 

 

  파천의 너른바위에 앉아 주변의 빼어난 풍광에 취하면서 김밥이랑 싸온 음식을 먹었다.

  휴식 끝에 다시 도원의 길을 되돌아 가려니 갑자기 색다른 체험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아닌,  400년전 옛사람들이 다녔음직한 벼랑아래 바위위를 물길을 벗삼아 트래킹을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위험할까 멈칫멈칫 하던 왕짜증 여사가 길도 제대로 없는 벼랑을 조금 내려오자, 길 위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풍광에 점차 도취되어 간다.

  트레킹.

  투뤠에킹.

  트레에에에에에키잉.

  어느틈에 저만치 앞서 바위벼랑을 넘어간다.

  '다음번에 한번 방태산 내린천 트래킹을 계획해 보자.  배낭을 머리위에 이고 가슴팍까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트래킹이랴. 원시림속으로' 했더니, 기겁을 하고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사전에 운동 좀 해 둬야겠네. 그 정도 난이도의 트래킹이면' 한다.

  이 사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점차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 길도 없이 이곳의 물길을 그냥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일명 투래에애애킹.

 

 

 

  -  발걸음 내딛는 바위바다 틈새에 철쭉이랑 야생화가 앙증맞게 피어있다.

 

 

 

  - 길이 없으면 어때. 가다보면 길이 생겨나는 것이겠지.  씩씩하게 잘도 앞장을 선다.

 

 

 

  -  처음에 머뭇거리던 사람 맞나?   이젠 여유가지 넘쳐흐른다.  그래. 내린천 트래킹 가보자. 누가 뻗나 보자.

 

 

 

   - 학소대까지 그렇게 트래킹을 해 내려오다보니 비로서 아주 오래된 옛길의 원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던가.

  암튼, 그 어떤분 말씀이었던 간에 그 분은 이부분을 확실하게 하여야만 했다.

  사람이라면. 좋은 의미의 이름을 역사책에 남겨야 한다고..........

  방법은 안가르쳐 주고 이름만 남기라니까 이눔. 저줌. 이놈. 저놈. 이 작대기. 저 작대기. 이 거랑말코 저 거랑말코....... 사방에 낙서질을 해 댄다.

 

 

 

 

 

 

 

 

 

 

 

 

  선비는 가고 없다.

  하지만 지금도 그 분의 발자취는 남아 있다.

  그분이 남기신 교휸과 가르침도 남아있다.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도원을 거닐었으니, 이제 발걸음을 돌려 세속으로 돌아간 뒤에도 겸허함 속에 무엇인가 조금은 달라졌을 내 자신을 기대해 보기로 한다.

  화양서원에 들렸다 돌아 나오면서 보니 도원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  2013년 5월 1일, 화사한 날에.  피안재.

 

 

 

 

 

 

 

 

 

 

  -  우암 성시열 선생을 모시고 배향하는 화양서원.

 

 

   --- 도원으로 드는 문은 항상 열려있다.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 노자돈이다.

 

 

 

 

 

 

 

   - 그리고 이 양반은 여전히 삼십년전 화곡동 색시의 청초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이 신식선비가 바로 삼십년전에 한양땅 화곡동까지 원정가서 샥시를 훔쳐온 산적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