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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산막이 옛길 - 파란 수면위로 떠다니는 길

by 피안재 2013. 5. 9.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고

     특별히 가야할 곳이 있어서도 아니다

     욕심 없이 길을 나섰던건

     무작정 그 길을 걸었던건

     어느 길목

     우연처럼 마주칠 바람 한줄기

     가슴으로 맞고 싶었던 까닭이다

                       - 백은숙 (길 위에서).  산막이 옛길 중간에 놓인 글 중에서........

 

 

 

 

   (산막이 옛길)은 시대의 흐름으로 해서 생겨난 길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시대의 흐름이라는것은 변화, 곧 발전이나 진보의 의미를 나타내야만 할 것이었는데 이길은 매우 독특하게도 오히려 뒤로 퇴보를 한   매우 특이한 길이다.  스스로 자청해서 퇴보했을리야 엢겠지만 그 퇴보로 인해 숱한 고충과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이 길이, 지금 당장 그 퇴보의 결과로 해서 커다란 의미를 담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한 아이러니를 깊이 간직하고 있다.

  (산막이)는 산이 병풍 처럼, 또는 산이 장막 처럼 둘러쳐진 깊은 산골의 오지인 한 마을의 이름이다. 산이 가로막은 작은 산골마을이란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산이 가로 막았기 때문에 지금의 그 (옛길)이 생겨난 것이냐?

  아니다.

  물 때문에 생겨난 길이다.

  (산막이 옛길)은 물에 가로막혀 어떻게든 살기위해 어렵게 어렵게 뚫어논 길이다.

 

 

   일제에서 해방이 되었을 때, 한반도에는 일제가 건설한 압록강의 수풍수력발전소가 있었다. 당시 이 수풍수력발전소의 전력량만으로도 한반도의 공업시설과 대도시의 전력이 충당되고도 남았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어느날 북측은 일방적으로 남쪽으로 송전되던 전력을 끊어버렸다.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이 전기가 나가 칠흙같은 어둠에 빠졌고 공장의 기계들이 멈추어섰다.  6.25 전쟁을 겪은 이 후로 정부는 전기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수력.화력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의 직후인 1952년 11월에 착공하여 1957년 2월에 완공된 괴산댐(칠성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의 전신)가 순수한 우리 국내의 설계와 기술진으로 처음 건설한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댐이다.

  댐의 규모는 비록 작다고 하겠으나. 댐의 건설로 하여 괴산호 라는 커다란 호수가 생겨났고,  이 호수는 칠성면. 문광면.  청천면에 걸쳐 너르게 포진하게 되었다.  이울러 이로인하여 수몰지구가 생겨났고 이주민들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괴산댐을 조금 올라간 지척에 있던 산막이 마을은 지대가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이유로 차마 수몰은 면하였으나, 뒤로는 병풍처럼  산에 가로막혀있고 앞으로는 댐 건설로 인해 생겨난 커다란 괴산호에 갇히게 되어 갑자기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비탈을 내려가 여울을 건너서 괴산읍내로(세상으로) 통하던 길이 깊은 물속에 잠기고 하루아침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수몰지구 이주민의 신세로 전락하였지만, 산막이 마을의 일부 주민들은 그 이주를 거부했다. 오랫동안 텃밭을 일구며 지켜왔던 고향 농토를 버리고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도로 그 자리에 눌러앉아 버렸던 것이다.

  고향에 눌러앉아 화전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거둘 수는 있다 하여도 최소한의 생필품은 외지로 부터 들여와야만 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외부로 통하는 길이 꼭 필요했다.  모두 수몰되고나서 이젠 가장 가까운 이웃마을이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로서 그 직선 거리가 족히 십리는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피와 땀과 눈물로써 깍아지른 바위벼랑아래로 난 짐승들의 발자국을 따라 기어코 (산막이 마을)과 (외사리 사오랑마을) 사이를 통하는 길을 만들어 냈고, 그 길을 통하여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이 오늘날 (괴산 산막이 옛길)로  잘 다듬어지고 가꾸어져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활짝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지금 그 옛길엔 지난날의 깊은 상처가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방으로 온통 짙푸른 대자연의 풍성함만이 가득하다.

  찾아드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분주하다.

  그 인고의 세월을 몸 소 겪었을 산막이 마을의 큰어르신을 만난다면 한번 여쭙고 싶다.

  '어르신. 어르신에게 저기 저 괴산댐은 어떤것입니까?' 하고.

 

 

 

 

 

   -- 규모나 발전량으로 볼 때 새삼 오늘날에는 댐 다운 위용을 상당부분 잃어간다고 하겠으나,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산인것은 분명하다.

 

 

  그럼 이제 슬슬 (산막이 옛길)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하자.

  (산막이 옛길)은 바로 외사리 사오랑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이르는 괴산호와 벼랑을 끼고도는 약 4km의 둘레길이다.

  보통 한 시간 정도면 도보로 누구나 무난히 가능하다.  단 여기서는 편도의 경우를 예를 든것이기에, 같은 코스를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니까 쉽게 다음 계산이 따라나오리라 생각된다.

  또 다른 경우로는,  등산로를 택해 등산을 하였을 경우와 두 마을 사이를 오가는 뱃길을 이용했을 경우의 예다.

  하지만 둘레길 (산막이 옛길)의 경우 참 의미와 묘미를 느껴보려면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 최고이기에 다른 경우의 예에 대한 부연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외사리 주차장은 바로 위 사진의 괴산댐이 보이는 강건너 바로 우측에 있다.

    주차장은 제법 너른편으로 소형차량과 대형버스지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승용차와 승합차까지는 2.000원 대형버스는 5.000원씩의 주차비를 징수하는데 바로 이곳 마을주민분들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  따로 입장료는 없다.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 화장실이고, 인근으로 여기저기 전통음식점들이 자리잡고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주차장을 벗어나면 곧 바로 이런 조형물들이 비로소 (산막이 옛길)에 들어왔음을 느끼게 해준다.

 

 

 

 

 

  100여m 언덕을 올라가면 여기 아주 커다란 바윗덩이에 산막이 마을길의 유래와 함께 본격적으로 둘레길 여행이 시작된다.  옆에 안내소에선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각종 안내를해 주고 있으며, 단체관광시 해설사가 동반하면서 산막이 옛길의 세세한 설명을 해준다.

 

 

  - 요놈 오줌싸개의 꼬추가 아주 실하다.

 

 

  우측으로 꽃밭을 겸한 카페휴계소에 다양한 군상들의 조각들이 서있는데, 요 오줌싸개의 표정이 가장 압권이다.

   다시 오르막을 시작하려 하다보면 튼실한 남근석과 연리지가 보이고,  그 주위로 추억를 남기려는 목패들이 늘어서듯 걸려있다.

 

 

 

 

 

 

  숲 사이로 난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부터 본격적인 둘레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언덕위에서 드디어 괴산호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잠시 쉬어가라 나무의자들과 흔들의자들도 여기저기 있고, 호수를 한 눈에 내려다 보는 전망대들도 눈에 띈다.

  '사연을 적어 놓으면 소중하게 전달해 준다'는 우체통도 눈에 띄는데 서랍을 열어보니 필기구도 엽서도 비어있다.  이 정도 자연에 심취하기 시작하였으면 생각나는 사람도 생각나는 이야기도 많이떠올랐으련만....... 정작 엽서가 없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좌측으로 나무구름다리가 놓여있다.  그 길이도 제법 되고 구릉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한참 올라야 하는 예사롭지 않은 난이도를 가지고 우뚝 서있다.  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왕짜증여사도 한 번은 타보았는데 다시는 안타시겠단다.

 

 

 

 

 

 

 

 

 

 

   그런가 하면 해괴망측한 자세의 나무도 있고,  그 옆에 다람쥐란 놈이 나타났는데 도대체 사람을 무서워하지를 않는다.

  요즘 도심의 고양이와 산속의 청살모 때문에 좀체로 다람쥐 보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이곳 산막이 엣길을 오고가는 동안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띄는것이 다람쥐 천국인가 보다.  산이 높고 골은 깊고 세상에서 동떨어진 오지이지 도토리 밤은 지천이지.

 

 

 

 

 

 

 

 

 

 

  

   그리고 이어서 망세루와 연화담이 모습을 드러낸다.

  망세루는 남매바위라는 암반위에 정자를 세우고, 이곳에서 괴산호를 내려다 보게되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잊혀지고 그저 넉넉한 대자연의 풍광에 취하기에 더없이 좋은곳이라 한다.  연화담은 아주 옛날에 하늘에서 비가 오기만을 쳐다보면서 바위벼랑들 사이로 손바닥만한 계단식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짖던 곳으로 지금 연못을 만들어 연꽃과 창포등을 심어놨다.  지금 화전민의 애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남매바위 위에 세워진 절경 망세루.

 

 

  '에게게게. 이게 뭐야. 꽁지빠진 닭처럼 기개가 하나도 없잖아. 뻥호랑이네.  이건 아니다.  이것만은 철거하는게 좋겠다.' 라고 왕짜증여사에게 구박 꽤나 당하던 호랭이님이 여전히 넋살좋은 웃음을 보이고 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부리를 연상케하는 매바위와 어른 넷쯤은 들어가 터를 잡고 앉아도 딜 것같은 여우굴,  또 제발 엉덩이를 좀 만져봐 달라는 듯한 미녀나무(?) 라는데 우리나라 사람 참 잘도 갖다 붙인다.  그 다음사진의 바위가 스핑크스 바위라는 대목에선 거의 압권이다.  하긴 질리도록 쳐다복 있으면 아무때고 스핑크스가 되어 나타날지도.

 

 

 

 

 

 

 

 

 

 

 

 

 

 

 

  아주 옛날 그대로의 산길이었다면 벌써 지쳐쓰러질지도 모르겠으나, 여행자들을 위해 데크를 설치해 편안한 나들이길을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 데크 설치하느라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갔으려나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데크로 인해 많이 편안해진 길이라고는 하나, 그래로 어느정도 왔으니 잠시 쉬어갈까 싶을때에 마침 눈앞에 약수터가 나타난다.

  안은뱅이 약수란다.  이름처럼 이곳을 지나던 앉은뱅이가 여기 이 약수를 마시고는 벌떡 일어나서 뛰어서 이 길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럼 이 물을 도심에 내다가 특허내서 한번 팔아봐?

  목도 축였으니 다시 기운을 내서 본격적으로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볼까?

  또 어떤 빼어난 풍광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숲가운데 그늘 마저도 온통 푸르름으로 배인 동네 공원같은 휴식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전망대다.

  이곳의 운치며 분위기며 내다 보이는 호수와 주변의 경관이 정말 빼어나다.

  한참을 이곳에 안아서 쉬면서 먼 여정을 지나온 나그네의 폼으로 대자연의 축복을 누렸다.

  아래로 고개를 돌리니 강자락 저만치 끝에 괴산댐이 겨우 걸리어 있고,  윗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드디어 산막이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또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보니 온통 푸르름이 수면에까지 내려앉는듯 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니 이번에도 범상치 않아보이는 바윗덩이가 하나 나타난다.

  괴산바위라 명명되었는데, 아무래도 (뫼산)이 맞지않을까 싶다.

  이넘이 상형문자의 뫼(山)자를 영락없이 빼어닮았다.

  지도나 안내팜플랫등의 그 상형그림과 어찌나 똑같은지 어디 누가 인공을 가미한것은 아닐까 했다.

 

 

 

 

 

   여기서 부터 다시 내려서던 걸음을 다시 올려잡다 싶으면 절대압권의 또 다른 풍경이 시야에 가득 차오른다.

  어쩌면 산막이 옛길의 코스중 가장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명소가 아닐까 싶다.

  바로 괴음정과 고공전망대 이다.

  일단 풍광을 먼저 구경해 보기로 하자.

 

 

 

 

 

 

 

 

 

 

 

 

 

 

 

 

 

 

 

 

 

 

 

   괴음정은 풍광이 빼어난 지점에 느티나무고목위로 전망대를 올려놓은 것으로 주변 경치뿐만이 아니라 저 스스로가 뛰어난 주위풍광에 잘 스며들어 운치를 더하여주고 있다.

  곁에 나란히 서 있는 고공 전망대는 그 드나드는 바닦을 유리로 하여, 흔히 그랜드 캐년의 스카이 워킹을 맛보기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많은 여행객들이 그 위로 나서기를 주저주저하며 곧잘 비명소리가 울려나오는 곳이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어느때부터인가 강기슭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던 산막이 마을이 '이제 거의 다 되었을텐데''어째 안보이지' 하면서 호흡을 고를 때 쯤에 '쬐금만 더 기운을 내''산막이 동네가 코 앞이여' 하는 스스로에게 위로하는 마음이 막 생겨날 즈음에 또 하나의 색다른 풍광과 묘미가 나타난다.

  산길 양쪽으로 모양도 제각각인 시를 적어놓은 시비들이 도열해서 반갑게 맞이하듯이 모습을 드러낸다.

  급할게 없는 여행자의 심정으로 하나하나 음미하듯 읽어보면서 지나쳐본다.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어떤 알지못하는 느낌들이 스미어 든다.

  여행의 다른 이름은 자유다.

  자유로운 영혼이 대자연속을 아무런 구애받음 없이 노니는 것이 여행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지나는 순례자이다.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 내려서면 물레방앗간이 나타난다.

  시간을 맞춰가면 실제 이곳에서 떡메를 쳐서 떡을 만들어 여행객들에게 판매를 한다.  떡만들기 체험이 가능하다.

  둑 아래로는 가재샘이 있는데 가재가 살정도로 깨끗하다는 뜻이고, 그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 바윗덩이를 넣어놓고,  대한민국 관광지마다 흔한 동전던져넣기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또 오겠다는 마음들을 담고 던지는 것인지, 한 번에 넣나 못 넣나 연습들을 하는 것인지.  암튼 모여진 동전들은 연말에 불우이웃 돕는데 쓰여진다고 한다.

  이제 비로소 산막이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산막이 옛길)을 편도 주행한 것이다.

  강 건너 깍아지른 벼랑위에 환벽정이라는 정자가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있다.

 

 

 

 

 

 

  산막이 마을은 (옛길)의 유래에서 풍겨나오는 그런 옛 모습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이 길이 유명해지고 찾아오는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하나 둘 모습을 감추던 옛모습이 이제는 거의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당연히 산간 오지의 너와집 까지는 아니더라도, 화전민촌의 이미지는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누런 함석지붕의 집 한 채는 버려진 듯 한쪽에 한 채 달랑 있고, 여기저기 현대식 건물들이 한참 지어지고 있다.  여느 관광지처럼 카페. 식당. 펜션들이 줄지어 새로 들어서고 있는 형국이다.

  어차피 길 때문에 온 것이지 산골 마을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는가.  하지만 무언가....... 꼭 2%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래서 마을 그림은 일절 담아오지 않았다.

  돌아서 내려오려는데 강어귀를 돌아 소나무 숲옆에 고가가 외롭게 한 채 서있다.

  수월정.

 

 

 

 

 

 

  노수신.

  조선시대 명종임금과 선조임금을 모신 명재상이었다.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순천 유배길에 오르게되고 양재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옮겨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괴산(현 산막이마을)으로 이배되어 2년을 더 살다가 선조임금이 즉위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71세의 나이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기축옥사때 정여립을 천거한 인물로 거론되어 파직되었다.

  여기 수월정(水月停)은 노수신이 2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이곳에 현재의 건물을 짓고 수월정이라 명명하였다.

 

 

 

   돌아나오는 길에 강가 버드나무 옆에 버려진 폐철선이 하나 보였다.

   한때는 분명 누군가의 밥벌이 방편으로 중하게 쓰였고, 누군가의 시름을 실어 강물 한복판에 떨구기도 하였으련만...... 가치를 다했으렴인가 낡아졌다고 내다버렸음인가........  부질없음이로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에도.........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여전히 아름답고 새롭기만 하다.

   산막이 옛길에 들어 자연을 벗삼아 걸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축복이다.

 

                                                                                2013년 05월 08일.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