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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覺淵寺 - 그곳에 가니 이미 절이 있었네

by 피안재 2013. 5. 10.

 

 

 

 

 

 

 

 

 

 

  

 

 

 

 

 

 

 

 

 

 

 

   고창의 선운사. 경주의 황룡사. 울진의 불영사. 여주의 신륵사. 양산의 통도사. 금산의 금산사. 익산의 미륵사. 그리고 괴산의 각연사.

   이름난 사찰이라는 점 말고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공통점은 바로   연못(淵)에 있다.

   하나의 예로 미륵불의 모신 사찰들은 대부분 연못을 메워 불사를 이룬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그 연못들은 용에 관한 설화들과 연결되어 있다. 미륵불을 모신 사찰로서 연못을 메워 조성한 것이 아니라면, 경내에 커다란 연못을 인공으로 조성하거나 속리산 법주사의 (석련지)처럼 연못을 대체하는 인공물을 사찰 경내에 조성하기도 한다. 석련지는 아주 커다란 돌탑처럼 생긴 하나의 연못인 것이다.

  각연사는 용에 관한 전설과는 무관하지만 연못에 관한 설화에 기인해 그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괴산과 연풍 사이로 난 지방도의 중간쯤이 태성리에서 각연사로 향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태성리에서 각연사 까지는 정확히 3.9km라고 표지판에 선명하게 써 있다.

  물론 차를 이횽해 각연사의 일주문 안 주차장까지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참 여행객의 경우는 이곳 태성리에 차를 주차하거나 약500m 윗쪽에 하늘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난간 아래에 차를 주차시키고, 여기서 부터 순례자의 몸과 마음으로 계곡 초입을 향해 발걸음을 옴겨보는 것이 참다운 여행의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 하겠다.  

  지금은 이 각연사 오르는 길의 중간부분까지 넓게 포장도로가 되어 있어서 찾아가기가 한결 수월해 졌지만, 지난날 내가 처음 찾았을 무렵에는 지금의 이런 길을 기대하기 조차 힘들었다. 당연히 비포장 도로의 꾸불꾸불한 산길이었으며, 초입의 태성리를 벗어나 계곡에 드는 길이 거의 시골의 농로를 가로질러야하는 수준이었다. 금방 무너져 내릴것 같은 자갈밭길이 밭도랑들 사이로 겨우 나있고, 차가 건너기에는 다소 무리일것 같아 보이는 엉성한 시멘트 다리가 겨우 걸리어 있는 위를 아슬아슬하게 차가 건넜다. 대형 버스는 엄두도 못내고 미니보스들이 아슬아슬 곡예를 하듯이 겨우 빠져다니던 길이었다. 

  왜 그리 멀게 느껴졌었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계곡을 찾아들던 첫 방문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만히 아련하게나마 그 기억들을 더듬어 보노라면........ '그래. 그래도 그때가 더 좋았어'라고 가슴 속 깊은곳에서 울림으로 대답이 전하여져 온다. 

 

  태성리에서 부터 각연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오솔길과 길옆에 따라 흐르는 도랑은 한 시도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나란히 흐르다 겨우 저만치 발끔치만큼 떨어져 따라오다가는 이내 다시 허리춤에 바짝 달라붙는다. 이따금씩 길 왼편으로 따라붙다가 어느샌가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 또 따라온다.  한 순간도 떨어질줄을 모른다.

  각연사로 찾아드는 오솔길은 온통 푸르른 봄날의 향연이다.

 

 

 

 

 

 

 

 

 

 

 

 

 

 

 

 

    숲길을 한참을 오르다 보면 (보개산 각연사)라는 현판과 함께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겹처마를 단 맞배지붕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측면 박공면에는 외부 비바람을 막게 풍판을 달았다.  기억하기로 작년엔가 세워졌기에 단청의 아름다움이 창연하게 빛를 발하고 있다.

   일주문 사이를 통과하면 비로소 각연사의 경내로 들어섰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서 부터는 각연사 안이라는 말이다.

   일주문은 양쪽으로 하나씩의 기둥위에 세워졌다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사찰을 여행하다 보면 일주문이 있고 다음으로 불이문이 있는 곳이 있다. 각연사의 경우처럼 일주문만 있는 경우와 일주문 불이분이 함께 있는 경우는 있으나, 아직 불이문만 있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일주문은 '여기서 부터 사찰의 경내입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불이문은 '둘 이 아니다' 라는 의미 즉 '비록 사찰 경내지만 세속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부처님의 자비가 온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골고루 퍼지기를 기도하는 도량으로서 굳이 세속에서 분리되는것을 원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세속이 곧 사찰이요, 사찰이 곧 세속인 것처럼, 애초 이 둘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표현해 놓고 보니 어느 고승의 선문답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비로소 각연사가 은근한 모습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모퉁이를 돌아 저 앞의 다리를 건너면 비로서 각연사의 경내로 들어설 수가 있다.

  그리고 가운데 푸른 나무의 왼쪽으로 희미하게 연등이 결려있는 처음 얼굴을 내비추는 건물이 스님들의 승방이다. 기거하시는 요사체이다.

  이불이며 수건이며 옷가지며 양말들이 빨래줄에 내걸려져 계곡에 부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여타의 절들처럼 첫대면의 대웅전이나 불상이나 불탑에서 주는 위압적인 장엄함이 어느곳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타 다른 사찰의 여행에서 좀체로 보기드문 스님들의 살림살이와 생활모습을 슬며시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세속에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들킬세라 허겁지겁 방안을 치우는게 상례인데, 하물며 세속을 떠나 절간에 드신 스님들의 사생활이라니.

   갓 시집옷 새색시가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곱게 차려입은 한복의 속치마 단이 슬쩍 들춰져서 내비치는 듯한 묘한 호기심이 충동질을 해 댄다. 그것이 내가 각연사에 처음 들었든 날 가졌던 첫번째 느낌이었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비로서 각연사의 품안으로 파고 들게 된다.

   길게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좌우를 들러보니 과연 선계의 정원이 따로없구나.

 

 

 

 

 

 

 

 

 

 

 

 

 

 

   각연사(覺淵寺)는 충청북도 괴산땅 칠보산과 보개산의 산자락이 서로 맞물려 게곡을 이루는 지점에 가람의 터를 잡았다.

   신라시대 법흥왕때 창건되었다 하며  신라말고 고려초기까지는 대가람의 위용을 멀리까지 떨치던 명찰이었다고 전해진다.

   각연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전해져오며, 거기에는 두 명의 고승인 유일선사와 통일대사에 관한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첫번째 전설을 살펴보면.

   신라 법흥왕때의 고승이신 유일선사께서 괴산땅의 쌍곡계곡을 찾아오신것은 스님의 말년에 가까운 늙으막하신 때였다 한다.

   이미 고승으로 칭송받으며 불도에 대해 일가견을 이루신 처지였음에도, 수행자로서 아직도 미흡하다고만 여겨지는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추구하고자 해서 였다,  그러자니 당장 수양을 할 수 있는 도량이 필요했다.  쌍곡계곡의 절골에 처음 들어섰을 때   '완만하면서 우렁차고 높으면서 가파르지 않은 산세와 지형이 노승의 발길을 붙잡는구나' 하시면서 그곳에 마음을 두셨다고 한다.  인근에서 선사의 고명을 숭배하던 많은 백성들이 찾아와 불사중창을 거들기를 자청함으로 어렵지 않게 불사를 시작하였단다.  하여 동량으로 쓸 목재들을 자르고 다듬기를 시작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밤이 지나면 감쪽같이 지난날 목재를 다듬다 나온 적지않은 양의 나무부스러기들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땔감으로 쓰려 가져갔겠거니 하였으나 나날이 이 같은 현상이 생기자 스님께서는 '이곳이 불연(佛緣) 가득한 성스러운 곳이어서 제불보살님들과 신장님들이 신이를 보이기 위함인가. 아니면 아예 불연이 없어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이 공사를 막는 징후를 보내심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시게 되어 몇날밤을 새워가며 이 상황을 살피게 되셨다 한다. 밤이 이슥할 즈음에 갑자기 어디선가 까치떼가 몰려오더니 삽시간에 나무부스러기들을 모두 입에 물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 기이한 현상에 스님은 작정을 하고 기다렸다가 또다시 나무부스러기를 물고 칠보산자락위로 날아가는 까치떼를 쫒아 나서게되었다. 여기저기 걸려서 넘어지고 승복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도 노구를 이끌고 칠보산을 넘었는데,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 미명 아래로 까치떼들이 물고 온 나무부스러기들을 한 연못위에 쌓듯이 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놀라운 충격속에서  이 기이한 현상을 쳐다보고 있는 노스님의 뇌리에 불현듯,  '아니 이 자리가 꼭 절터 같구나. 내가 절터를 잘못 잡았던 것인가. 그래서 불보살님들과 신장님들이 까치로 화현해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오심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날이 밝고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연못안을 가만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연못 안에서 찬연한 빛이 솟아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뛰어들어 건져보니 빛으로 상징되는 비로자나불상이었다.  하여 그 자리의 연못을 메우고 새롭게 불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 비롯되었도다(覺有佛於淵) 하여 각연사 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창건 설화였다.

 

  다음으로는 통일대사에 관한 내용이다.

  이곳 각연사의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각연사는 신라말 경순왕의 원찰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통일대사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했던 스님이다. 또한 비로전 내에 걸렸다고 전해지는 '연풍군 장풍면 태성동 독점원 보개산 각연사 삼세여래급 관음보살 개금기'를 살펴보아도 각연사는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드러난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각연사는 통일대사가 창건하였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통일대사가 창건한 각연사에 언제부턴지 유일선사의 전설이 첨가가 된것인지, 아니면 유일선사께서 미미하게나마 각연사를 창건하였는데 통일대사에 와서 크게 번성을 하여 비로서 사찰의 위상을 갖추게 되어 재창건의 의미를 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아무튼 두 분 고승의 발자취와 각연사가 서로 밀접한 관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각연사의 경내로 들어서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역력한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옆으로 웅장한 석등 위에 얹혀졌을 법한 옥개석이 받침을 모두 잃어버린채 덜렁 혼자 쓸쓸하게 서있다.  옥개석의 크기만을 보아서도 석등이 얼마만한 크기였을지 짐작이 간다.

   석등은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놓아 기대를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넣는 화사석을 올린 뒤, 그 위에 옥개석을 지붕삼아 덮는다. 여기에 정상부분을 보주 등으로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 모여있는 돌무더기 하나하나에서도 역사의 숨결과 세월의 아픔을 절실하게 실감 할 수가 있다.  한때는 분명 여기 대가람의 어디에선가 자리를 잡고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한껏 뽐냈을 나름으로 하나하나 소중한 옥석이었을테니까. 석등에 불탑에 건축물의 주춧돌로 다 의미있게 쓰였던 것들이니까 말이다.

 

  각연사는 지금도 꾸준히 부분적인 불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지난해 까지만해도 경내에 들어서 대웅전에 오르는 또 하나의 게단에는 위에 그림처럼 이곳 절터에서 출토된 지난날 불사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는 돌들을 그냥 갖다가 계단의 여기저기에 사용하여 만들었었다.  어느 전각에선가 쓰여졌던 많은 고맥이초석과 고맥이석을 계단만드는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맹이 초석이란 커다란 전각의 육중한 나무기둥을 받치기 위해 여러가지 문양을 새긴 주춧돌을 놓게 되는데, 그 주춧돌을 한 번 더 받쳐주기 위하여 아랫쪽으로 넓고 평평하게 자르고 다듬은 돌이다.  또한 고맥이석이란 건물의 하중을 받쳐주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사이의 바닥에 길게 다듬어서 벽처럼 놓는 돌이다.  계단을 완전히 새로 돌을 다듬어 놓았는데, 그 옆으로 쌓아올린 석축들 사이에서 여전히 몇 개의 고맥이석이 중간중간 끼어 있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26호로 등재된 대웅전이다.  정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융경(隆慶)·순치(順治)·강희(康熙) 연간과 1768년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그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1771년에 개금한 기록이 전한다. 또, 대웅전내 동편에는 승려상이 있는데, 이 절의 창건자 유일선사라는 설과 중국의 달마(達磨)라는 설이 있다. 흙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는 130㎝이며, 머리에는 건모를 썼고 결가부좌한 채 양 무릎 위에 놓은 손에는 단장(短杖)을 들고 있는 대장부상이다.

 

 

 

 

 

 

 

 

 

 

 

  범종과 법고, 그리고 운판과 목어를 봉안해 놓은 범종각의 모습이 새롭다.  범종에 새겨진 비천문양과 법고에 화려하게 그려진  용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튀어 날올 것만 같다.  이들을 불전사물이라 한다.

 

 

 

 

 

 

 

   비로전은 현존하는 각연사의 전각들 중에서 조성연대가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648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상량문에 따르면 그 후 세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다.  기단을 냦게 만든 특징을 나타내며  그 위에 외벌대라 하여 다듬은 돌로 한 단의 기단만 쌓아올렸다. 

  그리고 이 전각안에 바로 비로자나불을 봉안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인데 법신이란 '진리 그 자체'라는 뜻이다.

   높이 3미터의 비로자나불상은 뒤로 커다란 광배를 하고 있으며, 광배에는 9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전각은 바로 각연사의 해우소로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나름으로 유명한 건물이다.

  건물 자체로도 아름다울 뿐더러 여름이면 담쟁이 덩쿨이 전각의 절반을 뒤덮어 실로 아주 빼어난 풍광을 여행객들에게 선사한다.  처음 다가섰을 때, 안에서 독경소리와 목탁소리라도 난다면 여기가 해우소라 여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제 또 다른 문화재를 찾아 경내를 잠시 벗어나 보기로 하자.

   골짜기의 더 깊숙한 곳으로 도랑을 따라 올라가 본다,

   우거진 나무숲이 하늘을 가리고 사방에서 물소리랑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석등을 닮은 부도탑 두 개가 나그네을 맞는다.  부도탑이란 성불하신 큰스님들의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흔히들 세속에서 말하는 무덤이나 산소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이 우거진 깊은 산속에서 만난 이 부도탑들은 전혀 그런 느낌들을 전해주지 못한다.  그저 무엇인가 사람의 손길이 여기에도 있구나 하면서 반가운 마음이 먼저 생겨난다.  아주 오랜 시간전에 살다가신 분의 넋을 위로하려는 듯 부도탑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다가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부도탑을 지나면 길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다.

   이곳이 칠보산으로 올랐다가 쌍곡계곡으로 내려서는 등산로 임에도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잘 눈에 띄지를 않는다.

   하긴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은 입산이 일절 통제되는 지역이었다.  각연사의 경내 뒷쪽으로 철망을 치고 육중한 철문을 해 닫고 잠구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난날 내가 찾아왔을때도, 승방으로 스님을 찾아가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하고 이런저런 이유 ,  바로 지금 찾아 올라가고 있는 '문화재에 관심이 있어서 왓습니다. 다녀오게 하여 주십시요' 하고 청을 드리면 스님께서 물끄러미 쳐다보시다가 어떤날은 나오셔서 직접 열쇠로 철문을 따 주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열쇠를 건네주시며 '다녀오시면 열쇠는 요기다 걸어 놓아 주세요' 하며 손짓으로 가리키곤 하였었다.  하다가 근자에 들어 여기 각연사가 제법 여행객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되고,  또 지금 찾아가는 문화재도 알려지게되면서 이제 각연사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곳을 오른다고 여겨져 아예 철망과 자물쇠를 없애버리게 되었나보다.

  그런데도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와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위쪽으로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예까지 찾아 올라오는 사람이 실제로는 많지 않을 뿐더러,  계곡이 깊어 약간의 비만 내리면 이곳저곳이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남았다가도 비 한번에 지워지고 다시 남았다가 또 지워지고는 반복하는 골짜기인 것이다.

  한참을 헤매며 올라가자 이미 눈에익은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고, 이윽고.........

 

 

 

 

 

 

 

 

 

 

    보물 1295호인 통일대사 탑비이다. 바로 이 각연사의 창건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고 알려진 고려 전기에 활동한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인 것이다.

   아무나 승려라고 이런 비석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당대의 국사급 고승대덕만이  이러한 탑비를 갖게 되는 것이며, 이런 탑비야말로  당대의 불교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대다수의 탑비인 경우 탑신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않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격다보면 가장면저 탑신이 상하게 되고 결국은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되면 부러진 탑신이 힘들게 떠받들고 있던 머릿돌인 이수는 땅바닦에 이리저리 나뒹굴다 어디에 묻히거나 누구네 집이나 길가에 석축쌓는데 실려가 파묻히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면 종국에 세월의 흔적으로 부서지고 파여나간 귀부(거북모양의 받침돌)만이 덩그렇게 혼자 남는 경우가 허다했다.  송계 미륵사지의 거북귀부가 탑신과 이수를 잃어버린채 슬프게 엎드려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런데도 통일대사의 탑비는 처음 만들었을 당시의 모습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그날의 위용을 뽐내면서 당당하게 서있다.  이수와 귀부의 정교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여타 오늘날의 내놓라 하는 석공들과 최첨단의 절삭과 다듬는 기계들로도 가히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로 장인의 빼어난 솜씨를 지금도 여실히 그대로 드러내고있다.

  다만.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탑신만은 잘 견뎌내지를 못하였다.

  탑비에 새겨진 비문의 대용이 대부분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지워진 것이다.  지극히 일부분의 글자만이 남아 겨우 판독을 해 낸 결과로, 이 비가 바로 통일대사의 탑비이며 스님께서 당나라에 유학을 하셨으며 고려의 태조를 직접 만난일이 있으며, 스님이 입적하시자 광종임금이 직접 '통일대사의 시호'를 내렸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다.  또한 이 탑비가  고려 광종 9년(958)년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었다.

  천년을 넘게 지금 이 자리에 우뚝 서서 오랜 풍상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꿋꿋한 기상과 늠름한 위용을 이 탑비는 여전히 뽐내고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각연사 경내를 지나쳐 언덕길을 걸어내려 간다.

   귓전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이 정겹다.

   숱한 상념들이 떠오르고 또 지나간다.

   때론 나그네가 되어 때론 순레자가 되어 오늘도 길을 걷는다.

   길가에 도랑 건너로 온통 뿌리를 드러낸 채로 여전히 푸르름을 뽐내고 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드러난 속살을 흙으로 덮었으면 좋으련만........

   세상사 아무 걱정이나 근심없이 이 깊은 골짜기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대가람에 오르내리는 길 옆에 우뚝 서 있으면서도, 너에게도 네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있구나.

  그것은 어쩜 속세를 살아가는 중생들도 알거나 느끼지는 못하여도, 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는것과 같은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눈이 부시도록 푸르름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나름의 위안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아까 올라온 일주문이 보인다.

   그 너머에는 속세가 있다.

   나는 이제 다시 그 세속의 나라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2013. 05.08.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