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떨어진 야영장에서 더는 무엇들을 할까?
어느 캠프나 할것없이 너도나도 일제히 화덕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 우리도 서둘러 화덕에 참나무 숯으로 알불을 지피고 삽겹살 바베큐 파티를 벌인다.
안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어코 하나로마트를 찾아내서 간촐하게 쑈핑을 재개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겠으나, 다분히 요넘의 바베큐 파티를 위한 남의 살과 폭탄주의 원료를 구비하기 위함이 첫째였으리라. 또한 모종의 목적을 위해 맛소금도 꼭 사야만 했다.
참나무 숯불의 위력을 실감나게 했다. 솔직히 타들어가면서 은은하게 풍겨난다는 참나무향은 느끼질 못하겠으나, 한번 불이 붙으니 참으로 오랫동안 뜨거운 열기를 한껏 뿜어내면서 은근하게 오래오래 타들어갔다. 또한 숯불의 분위기도 은근한게 대단히 운치가 있었다. 매퀘하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연기도 전혀 없고.
지난밤 못지않게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며 우리 둘이 폭탄주 서너잔씩을 주거니 받거니 건배를 찾다보니, 어느틈엔가 잘구워진 남의 살이 그만 동이나고 말았다.
마트에서 살때는 '이거 우리 둘이 다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오다가 어디로 샌건지 바다가 훔쳐갔는지 포만감도 느껴보기 전에 남의살 봉다리가 바닦을 드러내고 말았다.
여전히 숯불은 시뻘건 화기를 무한정 내뿜고 있는데 철판은 텅 비어 있었다. 바베큐 파티를 해 본 중에 이렇게 허망한 마음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왕짜증여사가 낮에 수확해 들인 손바닦만한 조개를 건져다 철판위에 얹는다. 또한 작은 조개를 조금 넣고 끓여내온 조개탕도 맛을 본다. 국물은 짭쪼르니 그럴싸 한데, 조개를 하나 꺼내어 입에 넣어보니 아뿔싸 '에퉤퉤퉤' 아직 해금이 덜 되었더라. 입안 속 사방으로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떠다닌다. 끔찍하다.
입안을 헹구어 내고 바베큐 불판위에 입을 떡 벌리고 드러누워있는 커다란 조개를 아주아주 조심스레 끄집어내서는 요리조리 살펴보고 확인해 보고나서 입안에 넣고 한 입 깨물어 보니, 가히 그 맛이 아주 일품이더라. 아주 약간의 모래가 들어있는 느낌은 있었으나 거기서 포기하기에는 그 맛이며 향이며 씹히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절대 중도포기를 못하고 계속 새김질을 해댔다. 헌데 그마저도 달랑 두개씩 뿐.
못내 아쉬운지 저절로 입맛만 다시다가, 이번엔 그 조금 모자람의 아쉬움을 달래려 또 폭탄주 잔을 들어 올리는데 어디선가 결정적 한 방이 울려 퍼졌다.
'에이 씨. 해금도 제대로 안됐는데 우리 낮에 잡은 조개 다시 다 살려주자.'
오잉? 시방 내가 몬가를 잘못 들은거 아니여?
'짱구모친. 시방 낮에 잡아 온 저기 조개 한통을 통째로 다 살려주자는 말씀이여? 그거 참말로 진정성이 내포된 말씀이시냐 이거여 시방.'
'응. 지금 들어가서 다 살려주자.'
힐끗 돌아다보니 칠흙같은 어둠속에 성난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징말이구나. 구럼 할 수 없지 뭐. 살려주러 가야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저 수긍하고 받아들이려는 찰라에, 이번엔 청천벽력 같은 또 다른 결정적 한 방이 직격탄으로 날라온다.
'응. 모두 살려주고 이번엔 큰 조개만으로 골라서 새로 잡는거야. 알았지?'
뭐야? 어촌 원주민 포스 가득한 이 아줌마가 아예 여기 갯벌을 아작내려고 하는구나. 이러다 무슨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것만 같다.
- 조개를 제대로 잡으려면 아무래도 오전 물때가 좋겠어. 맛조개 구멍을 찾아야 아까 사온 맛소금 위력을 발휘하지.
- 누가 그러는데 심야 물때에는 갯벌을 그냥 돌아다니다가 쭈꾸미며 고기며 고동이며 그냥 주워 담는거래. 심지어는 꽃게와 낙지도 나온데. 물 반 고기 반이래.
또 다시 쪼그리고 앉아 조개를 캔다는데 놀래서 이러저런 닥치는대로 주워삼키는데.
'그려? 그렇담 나가봐야지.'
이 아줌마가 다시 장화를 꺼내 신고 고무장갑을 끼고 후레쉬 하나를 챙겨서 씩식하게 해변으로 나선다. 그리고 한 사내가 노란장화를 신고 후레쉬 하나를 손에들고, 다른 손엔 조개가 가득 담긴 빨간통을 들고 낑낑대며 어둠속으로 앞서나간 원주민 포스가 충만한 아줌마를 서둘러 쫒아간다.
잡을때는 언제고 다시 살려 주는 심뽀는 또 어떤거래?
살려 줄 바에는 제대로 살려줘야 한다는 말씀에, 여기저기 갯벌을 서성대는 후레쉬 불빛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서 홀랑 쏟아부어 정말로 모두 살려줬다.
그리고나서 텅 비워진 통을 새로운 무엇으로 가득 채울 부푼 기대를 안고 씩식하게 갯벌안으로 전진했다.
심야의 갯벌 정복 전쟁이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한시간 반 이상을 몽산포항 방파제쪽까지 해안 갯벌 곳곳을 샅샅이 수색하고 다녔다.
이제 되었다 싶어서 베이스 캠프로 돌아와 빨간통 안을 불빛을 비춰 들여다 보니, 통 안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그냥 웃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서로의 볼을 톡톡 다독거려주었다.
'낮에 조개 잡는것 보다 더 재미있었어.'
'다음엔 내가 물때를 잘 마춰서 여행계획을 짜볼께. 또 기회가 있겠지 뭐.'
'이젠 동해안으로는 안가고 싶을것 같어.'
어이쿠. 이 아줌마가 기어코 서해안 갯벌을 아작내기로 작정을 하시는구나. 어떤 알지 못할 불안한 심기들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책자에 실린 사진 한 장만으로도 늘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던 간월도의 간월암.
고요한 숲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숲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숲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는 가장 강력한 가치기준이자 힘은 바로 '빛'이다.
인간들 이라면 서로 차지하려 빼앗고 싸우고 패거리를 만들고 거짓과 모함과 암투를 벌이겠으나, 가을을 봄삼아 느즈막히 새순을 틔우는 조릿대의 한 예처럼 치열한 경쟁에서 한 걸음 비껴나 기다릴 줄 아는 여유와 작은 빛에도 감사하며 나눠가질줄 아는 지혜가 숲에는 가득하다.
봄의 야생화는 누가 볼세라 잎도 나기전에 서둘러 꽃을 피운다. 빛의 양이 많아지면 잎이 크고 무성한 나무들이 그들의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기 때문이다. 서로 다툼 끝에 기필코 사생결단을 내기 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나눠 사용하고 배분할 줄 아는 지혜가 오늘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숲에 누워서 그런 생각들을 해본다.
간월도로 향했다.
그동안 숱하게 책자를 통해 보았던 간월암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동양화를 보면서 그 간결함 속에 내포된 여백의 미를 떠올리던 시선으로 넓은 해안가에 뽈록 솟아있는 바위암자를 바라본다.
간월도로 건너가는 바위벼랑에 작은 시장이 서있다. 굴을 까서 파는 아주머니며, 젓갈을 파는 아주머니며, 주먹만한 소라를 삶아 내놓은 아주머니도 있다. 사방 어디에서든지 짭쪼름한 한 바닷내음이 그득하다. 간월도의 풍광을 사계절 담아내서 작품으로 만들어 팔고계신 사진사 아저씨의 작품(상품)들을 구경하노라니 실로 놀라운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계절 별로도 전혀 다른 놀라운 풍광을 만들어 내지만, 손 내밀면 닿을 듯 지척의 사이를 두고 물이 들어왔을 때와 빠져나갔을 때의 풍경이 전혀 다르고 그 여운같은 맛과 느낌이 전혀 다르게 전해져 왔다. 높은 산 하나가 주는 장엄한 풍광도 있겠고, 너른 들판이나 해안이 주는 놀라운 풍광도 있겠으나, 지금 간월도는 앙증맞아 보일 정도의 작은 몸짓 하나로도 너무도 충분하리만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록 신록이 우거지거나 단풍이 들지 않았어도, 물이 들어와 고립된 이미지를 전하여 오지 못했어도, 그냥 지금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오래오래 기억되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사 아저씨의 작품에는 분명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띠지않아 여쭈어 보았더니, 물때에 간월암과 육지를 연결해 주던 조각배가 한 2년전쯤부터 치워졌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한 2% 정도가 빠져나간 느낌이 드는것은 왜일까?
- 조금 먼 곳으로 물러나와 갯벌을 건너 바라다 본 간월암.
- 간월도 인근에 너른 유채꽃밭이 조성되어 있고 지금 한창 유채꽃이 만발했다.
-- 여행내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여행객이라기 보담은 이 유채꽃밭의 주인 같은 원주민의 포스가 강하게 전해져온다.
이제 안면도 여행도 서서히 마무리가 되어져 가고 있는 시점.
마지막으로 남겨둔 그 곳을 향해 차를 달린다.
가는 여정중에 색다른 풍광들이 눈에 띄면 무조건 차를 세우고 셔터를 눌러댄다.
곰탕집 이라는 간판이 너무도 선명하게 위장 속까지 전하여져 오기에 속도 달래고 위로할 겸 들렀는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내다 건 가마솥이 보이지 않는다. 내다 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참으로 아기자기하게 예쁘게 꾸며논 집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커다란 곰탕집 간판 아래로 앙증맞게 작은 글씨로 해바라기 펜션 카페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저기 다시 둘러보며 셔터를 눌러댔다.
- 벽에 걸린 소쿠리에서 한껏 여백의 미가 새어나오고 있다.
- 황토 벽 옆으로 수줍게 진달래가 피었다.
- 하나는 산적. 다른 하나는 왕짜증.
- 아담하게 늘어선 황토 펜션들
- 모양과 색갈을 달리한 펜션도 보이고
- 이번엔 해바라기 카페의 마님 포스를 풍기며 왕짜증여사가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고 있다.
- 민리포 해수욕장 인근에 놓인 아주 커다란 유류저장탱크를 이용해 만든 펜션이 이색적이다.
- 천리포 수목원의 안내도
천리포 수목원.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은 한 젊은이가 미군 정보장교로 1945년 한국에 왔다가 6.25와 같은 이 땅에서 벌어진 숱한 사건과 사연들을 몸소 겪으면서 그만 한국의 소박한 정취와 아름다움과 사람냄새에 취하여 정착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1979년에 한국인으로 귀하하여 이름을 민병갈(1921 -2002)이라 지었단다. 그의 본래의 미국 이름은 칼 패리스 밀러. 1962년부터 사재를 털어 천리포해변 인근에 부지를 매입하고 수목원 건설에 전념을 했단다. 2000년에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을 받기도 하였단다.
고즈넉하고 아담한 느낌의 수목원은 곳곳을 둘러볼 수 있는 사색길이 예쁘게 잘 놓아져 있어서 편안하게 걸으며 사색을 즐기기에 정말로 좋다.
주로 목련을 중심축으로 수목원을 가꾸었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목련 종류가 다양하게 모든곳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작은 웅덩이와 연못 주위로는 수선화가 제철을 만난 듯 한껏 노란 자태를 뽐내고 있고, 다양한 식물과 나무들이 각자의 자리에 딱 알맞다 싶을 정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꽃은 좀 더 있어야 피어나겠고, 민병갈 본인이 수목원을 가꾸며 실제 거주했던 가옥과 전통방식의 아담한 한옥들이 군데군데 나름의 풍광이 빼아난 곳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이들은 게스트 하우스로서 인터넷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실제 사용되고있는 숙소였다.(가격은 쬐끔 쎘다) 바닷가 쪽으로는 수목원의 3분지 1 정도의 길이 해안 천리포 해변과 맞닿아 있어서 또다른 풍광을 가슴 깊은 곳까지 전하여 준다. 예쁜 등걸이 의자가 숲속 곳곳마다 자리를 내어주고, 해변을 바라다 보는 꽤나 운치있는 그늘집과 들마루도 있다.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맨 나중의 코스로 남겨 두었었는데, 한마디로 베스트 초이스 였다.
단 하나, 1% 부족한 감으로는 입장료가 성인 1인당 9000원 으로 여타의 수목원이나 관람료들에 비해 아주 쬐끔 비싸다는 느낌이 다들 공통으로 갖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전체적인 수목원의 풍경이나, 그속에 피어난 온갖 꽃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그곳에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사진속에 남아있는 고 민병갈님의 노년의 미소였다.
수목원측에서 민병갈님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었는데 정말로 귀하고 소중한 추억과 상념과 느낌들이 전시회를 통해서 나에게 전해져왔다. 사진속에서 그 분은 정말로 내가 내 얼굴에 담고 싶을 정도의 그런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삶은 지금 이 수목원의 풍경 보다도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으리라.
- 천리포 해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수목원 숲속 언덕위에 고인이 실제 오랜세월 살았던 집이 게스트 하우스로 꾸며져 이용객을 기다리고 있다.
- 외국에서 들여온 목련의 일종인 불칸 이란다.
- 연못과 둠벙 사이로 난 사색길. 둠벙에 연꽃들이 피어나면 더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 온통 빛과 푸른 잎들이 벌이는 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 또 다른 게스트 하우스
- 고 민병갈님 기념 회고전 사진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는 왕짜증 여사.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아득한 기억 저 편의 안따가운 첫사랑 처럼 언제나 짧기 마련이다.
그리고, 떠난다는 것은 늘 또 다른 출발이다.
이미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간 자의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떠나는 것에 대한 망설임과, 후회와, 설레임과 작은 두려움들이 제 각각의 모양과 빛갈로 잘 스며들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변화와 기회는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언제고 불쑥 찾아 온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와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 들이지 않는것,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누구나가 이렇게 다짐하고 말들을 한다. '지금 부터가 시작이라고'
그래.
'오늘은 내 남은 삶의 첫날이다!!!!!!!'
------------- 2013. 04.30. 소조령 산막에서.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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