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 아니 한 선비가 있었다.
어려서 부터 유독 그림 그리는데와 글씨 쓰기에 남들보다 빼어난 자질을 내보이던 아이였다.
안산땅에서 이미 세상에 명망을 드러내던 화가 강세황을 찾아 그분의 문하에 들었다.
애정어린 지도를 하던 스승은 어느덧 제자의 기량이 어느정도 성취를 이뤘다 싶어 그를 도화서의 화원으로 추천을 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에서, 같은 도화서의 직장동료로, 인생의 동반자로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관계를 지속하게되었다.
스승 조차도 이 사내를 가리켜 '얼굴이 청수하고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항상 말해왔을 정도였다. 조희룡은 (호산외사)에서 말하길,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같은 사람이라 한다'고 썼다.
스믈아홉의 나이에 영조임금의 어진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려 그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높게 알렸다. 마흔일곱 되던 해에 정조임금의 초상을 다시 그려 올리니 임금이 마냥 흡족해 하였다. 그에 대한 정조임금의 신임과 총애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임금은 그를 아꼈다. 그의 자유로운 화풍과 기질이 구중궁궐에만 갇혀있는 것에 대해 몸시 안스러움을 느껐다. 하여 임금은 그에게 커다란 선물을 내렸다.
연풍 현감.
사내는 하루아침에 고을현감이 되어 이곳 연풍에 부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감.
한 고을의 수령으로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인 종 6품의 벼슬아치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다.
한적하고 주변경관이 빼어난 이곳에서 한동안 유유자적 지내면서 지친 심신도 추스리고 사내만의 화풍을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라는 배려였다.
사내는 위 사진의 연풍동헌과 숙소에서 해수로는 5년(만3년)을 재직했다. 인근의 속리산에서 부터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에서 멀리 단양팔경까지 두루두루 돌아보면서 무엇인가를 하기는 했다. 어찌되었건 현감의 자리는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충청위유사 홍대협이 고을을 살피고 다녀가더니만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것이 발단이 되었다. 곧바로 파직이 된것이다.
아마도 신선처럼 먹고 마시고 유람이나 하며 그림이나 그리고 글씨나 쓸 줄 알뿐이지, 고을 수령으로서 백성들을 돌보고 이끌어 주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 오늘에 까지 연풍땅의 '연풍동헌'을 찾게되면 꼭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그 화가에 관한 일화이며 그는 바로 단원 김홍도 이다.
산수화 인물화 불화 화조화 풍속화 등 모든 분야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여온 그 사내는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있어서는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될 성싶다.
그림 그리는 것에 그치지않고 거문고와 당비파와 생황은 물론 퉁소 등을 잘 연주하는 등 음악에 대해서도 빼어난 재주를 지녔고, 아울러 평판이 드높던 서예가에 시인이기도 했다니 어쩌면 그로서 연풍에서 현감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가 행하였을 발자취가 아렴풋하게나마 지리짐작을 하고도 남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62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풍동헌은 '풍락원' 이라고도 불리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건물로, 영.정조 시대를 풍미한 단원 김홍도의 자취와 숨결이 깊게 배어있는 곳이다.
본래는 현재 춘주교 연풍성지로 조성된 연풍관아에 지어졌었으나, 너무 낡고 허물어져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현재의 자리, 연풍초등학교 운동장 옆에 새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때 까지 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유물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연풍.
백사 이항복의 형이 한 때 이곳에서 현감으로 재직했었다 한다.
하여 산 넘고 물 건너 형을 찾아보고나서 이항복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곳에 사또로 오느니 차라리 관직을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얼마나 첩첩산중이었으면 반가운 형을 찾아왔으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도 백사대감께서 말이다.
백두대간의 우뚝치솟은 산세가 소백산을 내려와 월악산에 들렸다가 남쪽으로 치달리고 내려가 속리산에 다다르기 전에 이화령 이라는 험준한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게되는데,
요기 사방으로 병풍처멈 준봉들이 둘러친 가운데 이화령 고개를 머리에 이고 엉덩이를 비집어 겨우 고을이라고 틀고 앉은 곳이 바로 연풍이다.
북쪽으로 충주가 50리 길이요 한양까지가 정확히 362리였다.
그나마 일제치하라고는 해도 1925년에 이화령 길이 뚫리니 비로소 남쪽으로 험한 고개 하나 넘으면 통하게 되었던 것이지, 그 이전까지는 문경땅에서 새재(조령)을 넘어 고사리(소조령)로 나온 뒤 다시 길을 거꾸로 접어들어 신풍리를 지나 삥 돌아서 나와야 겨우 통했던 오지 중의 오지였던 것이다.
그 첩첩산중 오지 중의 오지였던 연풍은 이화령 길이 개통되었던 이후로도 여전히 심산유곡 오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년 전에 이화령 터널이 뚫리고,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척으로 관통하듯 지나가면서 이제사 비로서 세상과 훤하게 통하는 길이 열렸다고 보아야 하겠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 에서 빠져나와 우회전하면서 모퉁이를 돌아서면 바로 연풍 면소재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시대흐름에 적절하게 대처할지 못한 지역적 특성의 결과로서 면소재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보면 아주 오래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그런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아마도 한 세대는 지나서 두 세대 가까운 지난 과거의 모습들을 슬며시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금의 연풍이다.
그럼 이제 그 연풍속으로 오늘과 과거가 공존하는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이화령은 해발 (548)의 험준한 고갯길이다.
이 산 아래로 연풍에서 두개의 커다란 터널을 문경쪽으로 뚫어 하나는 고속도로 다른 하나는 본래의 지방도를 터널로 연계하여 고개넘어 남쪽과 소통하게 되었다. 하여 이제는 특별한 여행객이 아니면 이 이화령 정상을 굳이 찾아 올 사람이 없게된 것이다.
그 잊혀져가는 도로가 지금 다시금 생기를 되찾고 있다.
하나는 백두대간을 혈맥을 잇는 복원사업으로 이화령 정상에 작은 터널을 뚫고 그 위를 복토하고 나무를 심어 백두대간 능선 줄기를 푸르르게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생겨난 국토종단 자전거 종주길의 가장 험난한 코스로 탈바꿈하여 비지땀을 흘리는 자전거 매니아들이 끊임없이 저 험준한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이화령 정상에서서 꾸불꾸불 이어지는 험준한 고갯길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 올 지경인데, 오토바이도 아니고 죽는 힘을 다해 자전거를 타고 이곳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서 올라오고 있다. 이 이화령을 넘어서면 이제 부산까지 이런 고갯길은 다시는 없다.
연풍 향교의 바깥쪽 담벼락을 넘어서면 세월의 풍파에 얼마나 시달려왔는지 짐작이 되고남는 초라한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연풍현을 다스리던 고을 수령들의 공덕비이다. 지워지다 남은 흐린 비문에 군수도 있고 면장도 있다. 당연히 아주낡고 다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김홍도 현감도 있으려니 하고 눈을 비벼가며 찾아보아도 김홍도라는 이름은 없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사라졌음인가? 아님 현감으로 오긴 왔는데 해 놓은게 없어 공덕비를 세울 자격이 미달이었음이련가?
일찍이 서거정이 말하길 '시내 소리가 땅을 다한다'고 하였다.
영조 때의 이름난 시인 이병연이 '푸른산은 역마을과 잇닿았는데, 절반은 흰구름속에 들어있구나' 하고 노래했던 고을 연풍현.
지금 연풍을 둘러보고 난 후 그분들이라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고 궁궁해진다.
연풍을 보고 있으면 나는 가슴이 아스라해진다.
연풍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요, 또한 연풍에서 벗어나는 나들목이었던 직행버스정류소. 흔히들 차부 라고 불렀고 지금의 고속버스터미널 쯤으로 여기면 될 터이다. 당시에는 요즘에사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있는는 시내버스 안내양을 방송에서 보며 추억하듯이, 그때엔 시골 오지를 며칠씩만에 다니는 버스에는 남자차장들이 따라다녔었다.
철도가 처음 개설되었을 때, 시골지방의 모든 상권과 고을의 중심지는 역전이었듯이, 한 때는 이런 차부 인근이 고을의 핵심 중심지였었다. 진한 여운처럼 추억만을 남긴 채 연풍차부는 지금도 들어가는 초입에서 떨어져 나가다 만 간판이랑, 어그러져 이제는 열리지도 않을 것 같은 유리창문만을 남루한 차림처럼 하고 마냥 서성이며 세월앞에 마주서 있다.
모두가 떠나가고 없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세월의 흐름에 원만하게 편승하지 못하였다.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점차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다.
한 때는 누군가의 손 발이 되어주고 누구에게 밥벌이가 되어주고 누군가를 폼나게 만들어 주기도 하였건 만, 이젠 한 곳에 애초부터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버려졌다.
도회지에선 노인들이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물이라고 낼름 집어가 버리기도 하련만, 이곳에선 마을 도로 한 곳에 방치하듯 버려져있다.
마치 언제까지고 이곳의 일부인 양 떡하니 제법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말이다.
연풍 면소재지 번화가 농협을 마주보는 요지를 차지하고 말이다.
리어카와 구닥따리 짐바리자전거는 사라졌지만 자전거포는 아직도 그자리에 있었다.
한 세대와 두 세대의 중간쯤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다른 도시의 아주 후미진 뒷골목인 듯한 이곳의 주 도로요 번화가이자 중심가와, 세탁소와 신발가계와 삼성사진관의 모습.
시골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하던 만물백화점과 또 다른 세탁소와 페가가 되어버린 성미식당. 지나버린 한때의 풍미를 가까이서 엿볼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어느 영화 셑트가 아닌 2013년 어느 봄날의 연풍 모습인 것이다
좌. 연풍양조장의 전경이다. 우. 홍문새마을회관 건물이다.
지난시대에 양조장을 운영한다 하면 당연히 그 지역의 으뜸유지 축에 끼었었다. 시골 보통학교(초등) 운동회나 졸업식에 보면, 면장. 지서장. 우체국장. 그리고 양조장주인 들이 당연히 그 지역의 으뜸 유지들이었다. 근처에 가면 막걸리 익어가는 냄새가 구수하고 아침이면 시커먼 짐발이자전거에 양쪽으로 두 통씩 매달고 배달을 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했었다. 인근 마을의 구석구석까지 소달구지에 싣고 다니며 배달을 하다가는 나중에는 경운기가 그 일을 대신했다. 소주와 맥주가 보편화되면서 사양길을 걷다가는, 요즘에는 직접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장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각 면단위 마다 들어섰던 양조장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이제는 도회지 인근의 현대식 시설을 갖춘 커다란 양조장에서 제조되어 위탁판매하는 도매상 정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천렵이라도 나갈 요량이면 술도가에 찾아가 부탁하여 껄쭉한 술찌거미를 한 통 얻어서 나가던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시골의 부락마다 마을회관이 없는 곳이 없다. 오랜 세월 전 새마을사업의 유산인 것이다.
처음 새마을사업을 시작을 하였을 때는 회관이라는 것이 없었다. 하여, 대개는 그 마을은 한복판 쯤에 있던 구판장(막걸리 소매점)에 간판을 내 걸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시작을 하였다. 대개 나이 지긋한 과부할머니가 운영하던 구판장에는 아주 커다란 항아리를 한 두개 묻어 놓고는 그 위에 커다란 나무로된 뚜껑을 덮어놨다. 술을 한 되 받으러 가면 손잡이 막대가 달린 나무되박으로 줄 줄 흘러내리게끔 퍼서 담아주곤 했다. 밭일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간 꼬마가, 한여름 더위에 한모금 두모금 하다가 그만 논두렁에서 비틀비틀 술취한 걸음을 옮기고 밭도랑 옆에서 놀란 뜸부기가 저 멀리로 황급히 날아가곤 했다.
모두가 그리 오래지 않은 우리 지난시절의 그리운 유산들인 것이다.
연풍에는 극장(영화관)이 없다.
아이들이 자라고 인터넷이 들어와 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특정 날을 골라잡아 멀리 떨어진 괴산군민회관에서 영화라는 것을 상영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괴산군에 영화관이 없다.
아득히 오래전의 시절에는 일년에 한 두번씩 이동 극장이 각 마을을 돌며 몇십명씩 주민을 모아놓고 오래된 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했었다. 낮에 영화쟁이가 들어오면 마당 넓은 곳에 하얀 장막을 크게 펼쳐 세우고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서빨리 해가 저물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연풍의 복판길에는 차량이 지나가는것 만큼 경운기가 연실 지나간다. 경운기야 말로 최우선의 생활수단인 것이다.
골목안을 돌다보면 초기교회의 모습을 한 교회 종탑이 보여 반가왔다.
더군다나 기독교장로회 란다.
나는 스스로를 돌팔이 기독교인이라 칭하지만, 젊은날 나를 받아주고 이끌어 주던곳이 기장교회 였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도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땅의 현대사와 민주화에 너무나도 커다란 발자욱을 남긴 기독교장로회 팻말을 보게되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잠깐, 사실은 기장이라는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 왕짜증여사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은 기장의 텃밭에서 자라난 컬러가 오리무중 보이질 않는다. 그저 한 분이신 그 분과 천진난만한 병아리들(아이들) 외에는 관심이 없단다.
'왕짜증아. 난 돌팔이지만 그래도 기장표 돌팔이야.'
흥x상회 라는 간판 흔적만 있고 안은 텅 비어있다. 근데군데 남아있는 진열장을 보니 제법 잘나가던 잡화점이었던 것 같다. 담배판매점 간판만 녹슨 채 내걸려 있다. 바로 옆으로 최신식 농협 하나로마트가 거창하게 들어서 있으니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봐도 알겠다. 이 작은 면소재지의 마트라고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정육점에 수산물 코너까지 갖춘 맘모스급 대형마트였다. '골목상권에 대기업 마트 침입' 이라는 뉴스를 곧 잘 접하게 되는 세상인데, 요 담배가게 아저씨는 농사짖는 농협회원이 아니셨을까? 농민을 살리자는게 농협인데......
담배가게 쥔은 떠나갔지만 녹슨 간판 처마 밑으로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참으로 이게 몇 년만에 보는 제비인가..........
돌아다니다 보면 골목 어귀마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방치된 폐가들이 심심치않게 눈에 띈다.
늘상 풍년이 찾아든다는 이름의 연풍.
이곳에 다시 사람의 발자취가 가득한 풍년이 들때는 언제이려나.
서글퍼지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골목길을 나왔다.
연풍향청에 들었다.
향청이란 그 지역에서 명망과 덕망을 두루갖춘 사람을 뽑아 향리로 삼고 그로하여 고을수령(현감)을 보좌하는 업무를 보던 장소를 말한다.
중앙에서 발령을 받아 오는 관리에 비해 그 지역의 상황과 민심을 잘파악하고 있었기에 참으로 유용한 제도였으나, 훗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나치게 권한을 남용하고 남의 재물을 갈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연풍향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건물로 현재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시대에는 헌병대와 주재소로 사용되면서 이곳 인근의 주민들을 탄압하고 핍박하는 고난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광복 후에는 연풍지서로 사용되었다.
1963년 천주교에서 매입하여 연풍공소로서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되면서 필요한 용도에 따라 상당부분 내부구조가많이 변형되었던 것을, 최근에 원형 보존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에도 여러가지 집회와 예배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 유명한 리오데자네이로 산 언덕에 놓여있는 조각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순순히 생명을 놓으신 많은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시려 그들이 숨져갔던 역사의 현장에 오셔서 그들을 향해 영원한 안식의 문을 열고 환대하시고자 하는 지극히 높은 곳으로 부터 내려온 구원의 메세지를 담은 예수상이다.
유교가 그 당시였던 조선의 통치이념이요, 사람이 태어나기 한참 전의 일에서 부터 아무도 알 수 없는 먼 미래까지의 모든일을 유교적인 잣대, 거기에서부터 모든것의 기준이 생기고 유일한 가치관이 확립되면서 부터 이미 몸에 배고 생각에 배이던 그런 시대였다. 그들이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유교적 가치관은 이미 고려왕조가 멸망한 후 조선에 들어서면서 오랜 세월 궁궐과 민간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던 불교 마져도 철처하게 배격하였고 탄압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천주교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당쟁이 온 나라를 씽 씽 휩쓸고 지나던 시대에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사조와 함께 새로운 신앙이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의 연경을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 둘 이야기로 전해져 온 천주교 신앙은 참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요. 이미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배어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문물에 목말라 하던 신진지식인들과 가장 하충에서 핍박받던 하층민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고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어느날 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조정과 사대부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으로서는 실로 아주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당파에 따라 어느정도 이 새로운 종교와 가치관에 대해서 우호적인 집단이 있는가 하면, 눈감고 외면하는 집단도 있고 이 신흥집단을 정적으로 보는 집단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당쟁의 한 복판에서 정권을 잡기위해 제거해야 하는 정적에 대한 치명적 약점으로 천주교 신앙을 끌어 들이기에 이르렀다.
'전하, 천주교쟁이라는 자들이 나날이 늘어 이젠 어디를 가나 찾을 수 있고 전국 각지에서 회합이 잦다고 하는데, 하늘님이라는 서양 귀신을 아비라 부르고 돌아가신 조상을 귀신이라 하여 제사를 모실 수 없다고 하며, 화합의 장소에는 반상이 따로 없다 하기도 하고 남녀노소가 수시로 함게 모여 해괴한 짓꺼리들을 한다 하오니,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해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에 어찌 이런 해괴한 일들이 벌어 질 수 있단 말씀입니까? 더우기 그런 불손한 자들이 무리가 대궐 성벾을 넘어 이곳 전하가 계신 조정 안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차마 어찌 두렵지가 않겠사옵니까? 소인이 확인하여 보니 이곳의 누구 누구 또 누구도 그 천주쟁이 무리에 끼어 몰려들 다닌다 하였습니다. 전하, 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머지않아 이 나라의 정통성 마져 해를 입을까 심히 두렵사옵니다. 전하. 당장 저들을 물리치시고 그 죄를 낱낱이 추궁하시옵소서................' 이런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통치자와 기득권을 움켜 쥔 사대부들과 유림들은 각기다른 동상이몽을 꾸면서도 제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국면 전환 내지 기득권 유지, 정적제거의 명목으로 마침내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쟁이들을 색출하라.'
1791년 전라도 진산땅에서 윤지충이라는 선비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제사를 폐하고 신위등을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빌미로 유림이 들고 일어나게 되어 수많은 천주쟁이들이 체포되어 끌려가고 처형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신해박해이다.
순조임금이 즉위하게된 후, 임금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해 오는 남인무리 등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남인들이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약점으로 끄집어 내서 천주교를 정치문제로 끌어들이면서 커다란 참변이 일어나게 되고,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과 이승훈이 끌려가던 이 참사를 신유박해라 부르니 때가 1801년 이었다.
기해년 이었던 1839년 천주쟁이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된 집권자들에게 선교사였던 앙베르 주교와 모방신부와 여러 다른 신부들, 그리고 정하상등 여럿이 잡혀가 끝내 순교를 당하였다.
열강제국들의 전쟁판으로 변해가던 이 시국에 마침내 러시아가 조선에 야욕을 드러내며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군왕과 조정대신들은 프랑스에서 나온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였다. 허나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군왕과 조정대신들은 노골적으로 그 모든책임이 천주쟁이들에게 있다고 덮어씌워 무자비한 살륙으로 번지는 대참사를 빗고 말았던 것이다. 여덟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팔천명의 신도가 무참하게 끌려가 목숨을 일었다. 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병인박해라 한다.
이 후로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져만 갔고. 절두산 베론 연풍성지 등은 모두 끌려간 선교사와 신도들이 처형을 당했던 아픔의 장소인 것이다.
이 땅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활이 많이 부각되어왔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기독교가 들어 온 것이 알렌과 아펜젤러 라는 장로회와 감리회의 선교사가 같이 이땅에 들어온 때가 1884년 이었으니, 이미 천주교는 그로부터 1백년 이상전에 부터 이 땅에서 갖은 핍박과 고난속에서도 꾸준하게 그 생명력을 지켜나왔던 것이다.
끌려간 그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자신의 죄상을 불어야 했고 배교를 종용당하기도 했고, 숨어있는 다른 성도들을 대야만 했다.
새남터에 북소리가 울려퍼지면 술에 취한 망나니가 다가와 커다란 칼로 목을 베었던 것이다. 참수를 시키고, 높은 대들보에 밧줄을 묶어 목을 매달아 효수를 시켰다.
위 사진의 돌구명에 밧줄을 올가미처럼 매어 끈을 구멍 안쪽으로 넣고, 앞에 사람을 꿇어 앉힌 후 목에 밧줄을 옭아매고 구멍 뒤에서 사람이 잡아당겨 죽였다. 저 돌구명이 살인의 도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수많은 목숨들이 침묵속에 순종하며 끌려가는 어린 양들처럼 죽어갔다. 전국 여러곳의 성지에서.
이유는 '서양 귀신을 받드는 천주쟁이' 라는 죄목으로 죽어갔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이 땅의 깊고 깊은 산속 바위벼랑이나 산간오지에 암자가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역시도 유교에 의한 불교탄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을 세우고 통치이념을 확고히 세운 유교는 불교탄압에도 철저하였던 것이다.
사찰에 노비를 두지 못하게 하고 부역을 부과하였으며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그래도 스님이 되고자 하려면 엄청나게 큰 돈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의식속에 스님을 천민중에서도 가장 하층민인 백정의 정도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큰고을의 안쪽에 있는 유명사찰의 큰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주벙뱅이나 불량배들에게 얻어맏기가 다반사가 되었으며, 누군가 홧김에 절간에 불을 질러도 관아에서 은연중에 쉬쉬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불교는 유학이 설치고 관아가 있는 고을로 부터 점차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나마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 멀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쉽게 남에 눈에 띄지 않고 쉽게 남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달아나 겨우 비바람만 피하는 거처를 마련하고 수도정진하기로 하다보니, 그것이 오늘날 명소로 회자되는 암자들이 생겨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천주교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림의 끈질긴 추격과 탄압속에서 저들은 신앙을 지켜야만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하여 신도들도 뿔뿔히 흩어져 숨어지내기로 하였다.
일단 한양을 피해야 했고, 유림이 득세하는 지역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상당 수의 많은 신도들이 험준한 조령(새재)를 넘어 영남지방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들 흩어져서 이 새재를 넘어들 갔다.
하지만 흩어진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한양에서 벌어지는 박해의 동향과 그래도 흩어져 있는 신도들 간의 소식과, 이다금 찾아오시는 선교사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저 하다보니 중간 거점 같은 교두보가 필요하였던 것이고, 그 일에 최상의 요건을 갖춘곳이 바로 연풍이었다.
영남에서 험준한 새재를 겨우 넘어와 한참을 돌아 나온뒤에야 겨우 나타나는 연풍,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이요 오지 중의 오지가 아니었던가. 어디 하나 남들보다 돋보이거나 튀는 것이 없는 산골 깊은 곳의 작은 고을이 그들이 절실하게 찾던 거점이었던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그 요지에 자리를 틀고 들어앉아 신앙의 징검다리 역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신도들이 늘어가는 만큼 이 요충지의 열활도 커져만 갔다.
그러던 차에 저들의 집요한 추적이 마침내 이곳 연풍에까지 들이닥치게 되었고, 결국 또 한번 무수히 많은 목숨들이 형장의 이슬로 끌려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연풍의 관아에 끌려가 저 돌구멍에 목숨을 내맡기게 되었고, 그 관아의 자리가 바로 지금 연풍성지가 되었던 것이다.
연풍 병방골(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다.
병인박해 때 갈메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신 성인의 고향이 이곳인 이유로 유해를 이곳으로 모셔와, 이곳 연풍에서 순교한 많은 신도들과 함께 성지로서 조성하여 그분들의 뜻과 넋을 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분의 동상과 그분에 대한 기록들이 연풍성지에는 잘 정리되어 있다.
기타 연풍성지에 대한 소개는 또 기회가 있던가, 합번 찾아가 보는 것도 대단히 유익하고 소중한 기억이 되지 않을 까 하여 여지로 남겨 놓기로 하고 성지의 풍경그림을 약간 더 놀려 놓기로 한다.
이곳 연풍에는 아니러니 하게도 그토록 천주교를 탄압한 유림에 관련된 문화유적이 또 잘보관되어 유지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연풍향교가 아주 가까운 지척에 있다. 연풍 향교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한 소개와 그림만 올려 보기로 하겠다.
그 고난의 성지 한켠에 느티나무 아래 나무의자들이 자연스레 놓여있다.
지난시절의 아픔이 핏자국만큼이나 진하게 배인 성지이지만 오늘 이곳을 찾은 참배객이나 여행자들에 잠시 휴식의 장소를 내놓은 것이다.
오늘의 우리 모두는 그날의 피와 눈물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연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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