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가 자신의 일생을 모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컬렉션은 더없이 훌륭하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 역사와 미술사에 영원히 남기는 방법으로 그의 컬렉션을 몽펠리에시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몽펠리에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파브르가 모아들인 작품을 고스란히 유지 보수 보존한다는 한 가지 조건이 전부였다. 흡사 지난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시에 우피치 미술관을 기증한 것과 같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파브르 컬렉션의 기증으로 바로 지금의 파브르 미술관(Fabre Museum)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 파브르 미술관이 보유 전시하고 있는 작품의 수준이나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다. 어떤 한 나라의 국립미술관에 못지않을 정도로 알찬 작품들로 빼곡하다. 그만큼 학계와 미술계에서도 세계 최상위권의 미술관으로 꼽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한 미술가 개인의 노력과 헌신으로 만들어졌고, 일개 지방 자치단체에서 소유 보수 유지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며, 그런 이유로 이 순간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몽펠리에를 그리고 파브르 미술관을 찾고있는 것이다.
그런데말이다.
그냥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미술관을 둘러보고 감동받고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리는 것으로 족했으련만, 한 번 꽂히면 죽자사자 공부랍시고 파고드는 성격 탓에,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미술관 역사의 이면과 파브르라는 화가의 지난 발자취를 살펴보노라니 썩 그리 개운하지 않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인생을 투자해 미술품을 사 모았고, 다시 쿨하게 전부를 시에 기부를 해서 후세의 누군가를 위해서 헌정했음에도...... 그 이면에 그 사람이 정말로 노리거나 성취하고 싶은 야심의 편린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는 쉽게 그냥 넘어가 주기가 싫어질 것 같다.
딱히 어떤 하나를 딱 끄집어 내서 ‘그래서 이게 싫고 이건 용납이 안돼’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깃장 놓는것과는 다르게 나는 마냥 쉽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슬그머니 감동이 밀려오는 그런 느낌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도 조금 놀라고 있을 뿐이다.
하긴, 프랑스라는 국가가 나서서 못된짓을 일삼고 나서 그럴싸하게 포장해 놓은 곳이 (루브르 박물관) 이라면, 파브르라는 한 개인이 조금 정당치 못한 일들을 저지르고 나서 막판에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나름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 놓은 곳이 (파브르 미술관)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굳이 공(功)이나 과(過)를 따지는 것이 소용이 있을까?
몽펠리에 공화당 시의원이자 몽펠리에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이었던 쥘 르누비에 (Maurice Barthélémy Renouvier)의 저서 <혁명기의 미술사>에 파브르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피렌체의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 창문을 수리하다가 밖으로 미닫는 창문의 안쪽에 나무판자가 덮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망치로 그 판자를 떼어냈다. 먼지와 때가 수북이 쌓여 층을 이루고 있는 판자를 쓸고 문지르자 페인트로 칠한 그림이 나타났다. 함께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입을 모아 ‘그거 제대로 그린 그림인데?’ 하면서 ‘운이 좋다면 가져가서 팔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 했다. 인부들이 그림을 팔 수 있는 곳을 여기저기 이야기했고 가난한 집주인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림 수집상이자 화가였던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가 바로 피렌체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수아 파브르였다. 그림을 받아 든 파브르는 아주 예리한 눈으로 나무판자의 그림을 살피고 또 살폈다. 괘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에 파브르는 그림을 그냥 내던지듯 가난한 집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쓸모가 없어 보이는 허접한 누군가가 연습으로 칠하다 만 나무쪼가리야. 어느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도 아니고, 붓질의 정도나 표면의 상태도 다 긁히고 바스러지기 직전이라 그림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쳐주고 싶지만 쓸데라곤 불쏘시개로 밖에 못 쓸 것 같아. 그냥 다시 가져 가시오.’라고 대답을 하고는 돌아섰다.
낙심이 크고 저절로 한탄이 터져나오는 것은 가난한 집주인과 인부들이었다. 혹시라도 운이 좋으면 다소 얼마라도 받아서 일 끝나고 저녁에 고기라도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일어서 돌아나가려는데 파브르가 지갑을 열어 이만 원(요즘 시세로)을 꺼내 건넸다. 가난한 집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내가 그림을 팔아주지는 못했지만 당신들이 이곳까지 찾아주시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시세가 없어 허사가 되었지만 이래야 다음번에도 당신들이 내게 더 좋은 그림을 가져와 주시지 않겠는가? 그냥 내 마음을 표시니 받아주시게나.’ 하는 것이 아닌가?
단 돈 백원이 아쉬운 처지에 가난한 집주인은 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화가님. 틀림없이 다음번엔 더 좋은 그림을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 그림을 저희가 다시 가져가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여기다 놓고 갈 터이니 받침으로라도 사용해 주십시오.’ 하며 가지고 왔던 나무판자 그림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니라니까? 그러면 사주지 못하는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니까?’
‘버리시더라도 여기서 버려 주세요. 용돈도 주셨는데 자꾸 그러시면 저희가 송구스러워 다시 못 오겠잖아요?’
그러자 파브르가 마지 못한 듯 받으며 다시 지갑을 열었다.
‘알겠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네들이 그림을 가지고 찾아 온 것이고, 어쨌거나 내가 그림을 받은 게 되는 것이니 셈은 셈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들 함께 저녁이라도 드시고 다음에 다시 또 만나세.’ 하면서 이번엔 삼만 원을 더 건넸다. 다들 감격에 겨우 표정으로 매우 흡족해하면서 화실을 나갔다.
허접한 나무판때기였다고는 쳐도 화가이자 그림 수집상으로 거래는 분명히 정식으로 거래를 마친 것이다.
가난한 집주인과 인부들이 돌아가자 갑자기 파브르의 태도가 돌변했다.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 두고 간 나무판자를 들고 뚫어져라 살펴보는 파브르의 표정에 이루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감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브르는 나무판자를 들고 화실의 이곳저곳을 둥실둥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림배달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시종이자 집사가 이제까지 처음 접해보는 주인의 행동을 보며 너무도 놀라 물었다.
‘나으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이제 앞으로 누가 너에게 너희 주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그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프랑스에서 온 화가 파브르에겐 라파엘로가 있소 라고 대답해 주어라. 알겠느냐?’라고 말했다.
방금 파브르가 거져 줍다시피 한 그림이 바로 위대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의 작품이었던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파브르는 끝까지 이날의 일을 감추고 싶어했지만 어쨌거나 진실은 드러나고 말았다.
파브르는 모든게 정상적인 거래였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말로 해선 안되는 극악한 사기행위다. 프랑스 살롱전을 우승한 화가이자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며 최고급 미술 중계상인 파브르가 이렇게 치졸하게 사기를 쳐가면서 그림을 훔쳐 갈 이유가 있을까?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미 파브르는 그 그림이 라파엘로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억은 아니라도 천만 원이라도 쥐어주면서 정식으로 구입을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허접해 보여도 라파엘로 작품이라면 최소 수십억은 훌쩍 뛰어넘었을 테니 말이다.
이날 이후로 프랑수아 파브르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라파엘로가 그린 <젊은이의 초상>이 놓여지게 되었다.
‘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소장한 프랑수아 파브르야!!!!!’라고 말이다.
어려서부터 파브르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좋아했다. 라파엘로풍의 그림을 평생동안 추구했다. 몽펠리에 장학생으로 파리로 유학을 가서 스승으로 다비드(Jacques-Louis David)를 만났는데, 신기하게도 스승 다비드 또한 라파엘로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런 인연으로 스승의 총애를 받았고 살롱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이탈리아 로마 유학의 특전을 받았다. 로마에서 늘 라파엘로의 그림을 찾아다니며 모사하면서 공부하고 노력하였다. 여기 피렌체까지 오게 된 이유 또한 라파엘로의 그림이 피렌체에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파브르가 기연을 얻어 마침내 라파엘로의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다. 스승 다비드도 가지지 못한 라파엘로의 그림을 말이다.
파브르의 인생 말년에 이르기까지 라파엘로가 그렸다고 믿은 <어느 젊은이의 초상>은 프랑수아 파브르의 최고 업적이었으며 자부심이자 성공의 상징과도 같았다.
노년의 파브르는 일찌감치 고향인 몽펠리에 시에 자신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컬렉션 전체를 무상으로 시에 기증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했다. 시가 이를 받아들였고, 그의 컬렉션이 들어갈 미술관을 자신이 살던 고급 빌라를 확장 수리하여 만들기로 하고 그 공사 전체를 파브르가 직접 감독하며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자신의 작품을 전시 기획하였으며, 부족하다고 생각한 파브르는 전 재산을 가지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 1년 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 수집에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게 된다. 파브르의 미술관 컬렉션 공사는 어디까지나 몽펠리에라는 지자체의 사업이었고, 이 당시 프랑스 남부지방인 몽펠리에를 포함하는 랑그독에서 툴루즈를 지나 대서양에 연결하는 미디운하 건설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운하가 시작하는 시테(sete) 인근의 중심도시인 몽펠리에가 이 거대한 국가개발 사업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초고 관리와 학자와 부자들이 속속 몽펠리에를 다녀갔다. 파브르는 이것이 미술관의 앞날에 크게 이롭게 작용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몽펠리에를 찾는 고위층 관리나 사회지도층을 연일 파브르 박물관으로 초대하기에 바빴다.
초대를 받은 사회저명 인사중에 <적과 흑>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이 있었다. 다방면에 있어서 박식했으며 창작활동과 신문 잡지를 통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식인이었으며, 나중엔 영역을 넓혀 각국에 영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정치인이었다. 파브르가 이런 스탕달을 놓칠 리가 없었다. 스탕달은 파브르 박물관에 초청되었고, 역시나 파브르는 스탕달에게 라파엘로 작품을 자랑하기에 열을 올렸다.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 지났고 스탕달은 파리로 돌아갔다.
‘이 미친놈이 뭘 잘못 먹고 갔나? 뒈질려고 환장한 것 아니야?’
며칠이 지나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습관처럼 신문을 펼쳐 든 파브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파브르 미술관이 거창하게 훌륭한 미슬품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수집했다고는 하나, 대부분이 허접한 것들이고 그 출처와 진품 여부도 불분명한 것들 투성이다. 그들은 거듭거듭 라파엘로를 내세웠는데, <젊은이의 초상>이라는 작품 하나만 보고 있어도 도무지 라파엘로 그림만의 독창적인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눈 주위와 볼과 입술에 덕지덕지 너무 과하게 덧칠한 흔적이 역력하며 아마도 굳이 라파엘로를 찾아보자면 손뿐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음으로 보여 준 <창문 밖을 내다보는 사내>라는 라파엘로의 데생 작품의 경우, 이 정도의 데생이라면 비슷한 화가의 스케치 부분만을 도용하여 충분히 그릴 수 있는 정도라 보이며, 밑에 있는 16줄의 시가 라파엘로의 친필이라는데, 이 또한 화실 골목 근처에 가보면 라파엘로의 글씨체와 남겨진 편지들을 이용해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보자면 파브르 미술관은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의 의문이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진위를 밝혀내야 한다고 보여 진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스탕달의 생각과 평가였겠지만, 그 후폭풍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화가 극도로 치밀어 난동을 벌였을 정도라니 파브르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심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후로 파브르와 스탕달 사이가 얼마나 살벌해 졌겠는가?
그날 이후로 서둘러 피렌체로 돌아간 파브르는 전재산을 내걸고 그후 1년 동안 이탈리아 미술품을 무자비하게 마구 사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파브르와 스탕달의 다툼이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았을텐데..... 사방에서 호사가들이 입방정을 더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의 <어느 젊은이의 초상>을 두고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새로운 국면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쟁에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탈리아 로마의 한 수집상이 파리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왔다.
‘프랑수아 파브르가 주장하는 <어느 젊은이의 초상>은 라파엘로가 그린 것이 아니라 한 세대 뒤에 활동한 화가 안드레아 델 브레시아니노 (Andrea del Brescianino)가 그린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더하여 그는 브레시아니노의 화실에 남아있는 기록들과 애초에 그가 시작할 때 그렸던 초벌 그림의 사진까지 보내온 것이다.
브레시아니노는 시에나 출신으로 형제가 함께 화가로 활동했으며 그들의 주로 활동 무대가 바로 피렌체였다. 라파엘로가 요절하고 나서 몇 년 후에 씨에나에서 태어났는데, 이 그림을 그린 동생의 이름이 안드레아였고, 형의 이름이 라파엘로였다. 그들의 작품 여럿이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우피치 미술관에도 <성가족>이 소장 전시되고 있다.
그런 우여곡절을 담은 <어느 청년의 초상>은 현재 파브르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작가란에 분명하게 이탈리아 씨에나 화가 안드레아 델 브레시아니노 (Andrea del Brescianino) 작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산 클레메네트 궁전(Palazzo di San Clemente)은 1643년 엘레오노라 대공의 요청으로 이탈니라 건축가인 게라르도 실바니(Gherardo Silvani)가 만들었다. 잘 정돈된 정원으로 녹지공간이 풍부했고 커다란 분수와 멋진 동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건물을 1777년 올버니 백작 찰스 에드워스 스튜어트 왕자(Charles Edward Louis John Casimir Sylvester Severinus Mary Stuart)가 구입을 해서 아내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 시작했다. 올버니 백작은 순위는 좀 멀다고 해도 분명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위 서열에 올라있는 왕족(왕자)의 신분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현실적으로 살펴본다면 그는 실질적인 영국 스코틀랜드의 왕권에서는 완전히 밀려나 있다거나 배제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그는 로마의 무티 궁전에서 출생했으며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보호 하에서 성장했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교황의 고향이기도 한 피렌체에 자주 머물 기회가 있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참혹한 왕위다툼에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하여 조부 때부터 이미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망명객의 처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안에 있다가는 언제 왕권다툼과 후계 싸움에서 일가족이 몰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왕족으로 백작 지위를 얻었고, 엄청난 부를 여전히 물려받고 있는 처지이다 보니 영국으로부터 있을지 모를 암습만 아니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한량의 삶이 바로 그의 가문의 내력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나 교황청을 찾아오는 세계각지의 왕족이나 귀족이나 유명 인사들과 어울리며 파티를 벌이고 사냥을 다니고 음악회를 즐기면서 사교생활을 하는 것이 그의 전부였다. 그런 도락이 점차 사회 저명인사들과 귀부인들이 몰려드는 살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아주 유명한 명사였다. 어디를 가나 그의 주위로 상류층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철저하게 그런 생활을 즐겼다. 숱하게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남들 앞에 나서고 남들 입에 오르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생활이 최고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연애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결혼도 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고, 바람을 피워 사생아로 아들과 딸을 낳기도 했다.
그런 난봉꾼 한량 찰스 왕자가 1772년 느닷없이 사랑에 빠져서 슈톨베르크 게데른의 루이즈 공주(Princess Louise of Stolberg-Gedern)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왕자의 나이가 52세였으며, 공주의 나이가 갓 스물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속한 슈톨베르크 게데른의 공주 신분이었다. 거기에 천하에 없이 막강한 후원자를 두었으니 바로 함스부르크 왕가를 통치하는 마리아 테레자 황후였던 것이다. 이 세상 모두를 교권(敎權)을 앞세운 교황이 살아있는 절대 권력으로 통치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절반 정도는 황권(黃權)을 움켜 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지금은 마리아 테레자 황후가 합스부르크왕가의 최고 통치자였던 것이다. 왕자는 교황의 지지와 보호를 받고 공주는 마리아 테레자를 후견인으로 둔 처지로 둘이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30살 이라는 실로 엄청난 나이차를 가지고서 말이다.
당연히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도 또 그렇게 드러나게된다.
그럼 도대체 왜 말도 안되는 결혼을 했을까?
나는 그것이 찰스 왕자의 헛된 허영심과 과욕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뻔한 결과를 알았음에도 도저히 물러날 수 없는 어떤 그런것?
하필 그 상대가 루이즈 공주였다니....... 헐!!!!
루이즈 막시밀리안 캐롤라인 엠마뉴엘 공주(Princess Louise Maximiliane Caroline Emanuel of Stolberg-Gedern)는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리던 봉건영주인 스톨베르크 게데른 가문의 세 딸 중에 장녀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아돌프 왕자가 로이텐 전투(폴란드 지역)에서 사망함으로써 가문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당시 4살이었다. 몰락하는 왕족이나 귀족의 가문을 되살리는 방법의 하나는 정략결혼을 통해 다시 부와 명예를 얻어 일어서는 것이 매우 흔하던 시절이었다.
가장을 잃은 가문은 기울어져 갔고 왕가로서의 품위와 생활유지가 점점 힘들어져 갔다. 루이즈 공주는 결국 수도원(수녀원)으로 유배 아닌 유배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다양한 활동 속에서 상류층 숙녀로서의 품위 유지와 예절 등을 배우라는 이유였지만 이제 사춘기를 지나 예비 숙녀로 성장해가던 루이즈 공주에게 수도원 생활은 그야말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보통의 귀족 여성이었다면 아무나 택해서 정략결혼으로 수도원을 탈출하거나, 무작정 수도원을 나와서 떠돌다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나면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루이즈 공주는 달랐다. 나름 수도원 생활 속에서 유럽의 역사와 가문들의 역사와 왕족들의 특별한 생활과 권리와 책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일가견을 가졌을 정도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지고 누렸던 상류층 생활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공주가 19세가 되던 해에 큰 깨달음과 결심 끝에 그녀는 아주 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수취인이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궁전에 사는 마리아 테레자 황후였다. 루이즈는 단 한 번도 황후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내세울만한 인연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편지 속에서 강조한 것은 황후가 이 세상의 모든 봉건영주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점이었고, 자신은 비록 몰락했지만 엄연히 아버지를 잃은 봉건국가의 공주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봉건 영주의 가족들이 피폐해지고 형편없는 꼴을 일반 백성에게 보이게 된다는 사실은 곧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스러운 통치에도 누를 끼치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더불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미래에 대한 꿈과 확신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유럽 봉건국가들을 통치하는 최고 권위자인 황후에게 자신의 치하에 있는 몰락한 봉건 영주의 가족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간절하게 요청하는 편지였다.
마리아 테레자 황후는 교황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가진 유럽 최고위층의 절대적인 통치자였다. 그런 황후에게 알지도 못하는 숙녀의 편지가 도착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에서 왕족이라는 신분이 하도 흔해서 강변의 모래알보다도 많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기적처럼 그 편지가 테레자 황후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편지를 읽은 황후는 실로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눈물을 펑펑 쏟았을 정도였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 테레자 황후에게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아픈 손가락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편지 속에서 공주는 말끝마다 지상의 최고 통치자인 황후를 떠받들어 칭송하면서도 황후로서의 책무에 대해서 꼬박고박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부모를 잃고 몰락한 가문일 지라도 왕족의 품위를 잃지 않고 노력하여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 최고 통치자가 해야 할 관심과 자비와 무한한 은총일 것이라고 띠지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황후가 일절 개의치 않아도 되는 아주 먼 몰락한 일개 왕족의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주어서, 혹시나 훗날 그들이 결혼을 통해서 유명한 가문으로 다시 일어나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서 전쟁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공을 세워 황후를 칭송하게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황후의 위대한 공적으로 영원히 후대에 길이 남겨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테레자 황후는 이 당돌한 공주의 편지속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당장 멀리 떠나보낸 막내딸의 하소연으로 폐부 깊숙한 곳까지 쿡 쿡 찔러왔던 것이다. 아픈 손가락인 막내딸 생각에 황후는 더욱 가슴을 움켜쥐면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람을 보내 루이즈 공주를 데려오라.’
사진에서 보듯이 루이즈 공주는 ‘아리따운 숙녀’쯤은 되겠지만 한 나라의 존망을 쥐고 흔들 만큼 ‘빼어난 미녀’는 결코 아니었던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기록에서도 그녀가 ‘무척 아름다웠다’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그녀에게는 다른 색다른 매력이 차고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정도의 미모는 갖추었던 것 같고, 늘씬했으며 그녀만의 쓸쓸한 듯 고즈넉한 특색있는 분위기를 꿰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지만, 어쨌거나 일단 나섰다 하면 삽시간에 대중의 시선을 빼앗아 버리는...... 왜 있지 않은가? 단체 미팅을 가던 노래방을 가던 축제 때 훼스티발을 가던 고고장을 가던 여간해서 잘 나서지는 않지만 일단 나섰다 하면 무조건 확실하게 주인공을 차지해버리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성 말이다. 루이즈에겐 그런 넘치는 끼와 매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차게 덤벼드는 기질과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자 황후는 그런 루이지 공주가 썩 마음에 들었다. 고고한척 내숭만 떠는 상류층 귀부인들에 둘러싸여 아부와 아첨 소리만 듣다가 털털하고 생기발랄한 아가씨가 거침없이 내뱉는 말투와 적극성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멀리 떠나보낸 자신의 막내딸도 저렇게 활기차고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가슴앓이가 있었다.
황후는 루이지 공주를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최하는 파티에 데리고 다녔다. 유럽의 모든 왕족과 귀족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황후는 그들에게 슈톨베르크 게데른 왕국의 루이지 공주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유럽의 모든 왕족과 귀족들이 사라지다시피 한 슈톨베르크 게데른 왕국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황후가 루이지 공주에게 어떤 제의를 했다.
이제 비엔나를 떠나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견문을 넓혀보라고 말이다. 모든 후원을 마다하지 않을 터이니 많은 곳을 다녀보면서 다양한 체험을 권유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루이지 공주가 오랫동안 바라마지 않았던 간절한 소망이었다.
마리아 테레자 황후가 추천한 첫 방문지는 바로 파리였다. 루이지 공주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꿈만 같았던 일이 현실이 되어 방금 목전에 닥친 것이다.
허겁지겁 서둘러 준비를 마친 루이지 공주는 황후의 환송을 받으며 파리로 향했다.
왜 테레자 황후는 루이지 공주를 파리고 보내고자 했을까?
그것은 황후 자신의 가장 아픈 손가락 마리 앙뜨와네트 공주가 프랑스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교황의 권위에 맞서서 신성로마제국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한 방책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 간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결혼에도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루이 16세(당시 17세) 황태자와 마리 앙트와네트 공주(당시 14세)간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테레자 황후가 가장 아기고 사랑했던 공주가 멀고 낯선 프랑스 파리로 시집을 간 것이다. 아무리 왕족간 결혼이고 황태자비면 무엇인가? 아직 나이 어린 철부지 소녀가 집과 엄마를 떠나 멀고 먼 타국에서 시집살이를 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막막했겠는가 말이다. 그저 적당한 지위의 왕족중에서 사위를 골라 결혼을 시키고 평생 비엔나 왕궁에 데리고 살았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히 바랬던 엄마였는데 말이다. 자주 안부 편지를 보내오는 것도 아닌 처지에 맨날 ‘엄마. 집에 가고 싶어’라고 적혀있었다면 그 엄마의 가슴속이 어떠했겠는가 말이다. 시집살이 2년으로 마리 앙트와네트가 16세가 되었을 때 방년 19세의 활기차고 생기발랄한 천방지축 예비숙녀 루이지 공주를 황후가 만난 것이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황후는 루이지 공주를 파리로 보내 한동안 함께 지내게 하면서 막내딸을 위로하고, 소상하게 사는 모습을 알아보고 싶어서 보낸 것이다.
공주가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드디어 입성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테레자 황후로부터 절대적 후원을 받고있는 슈톨베르크 게데른 왕국의 공주 신분으로 유럽 최고의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파티와 축제는 세상 그 어디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요란했다. 유럽에서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잘 나가고 안 나가고의 기준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로 나뉘어 질 정도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방탕한 성격 때문에 파티는 풍기문란을 넘어 세기말적인 증후군까지 내비쳤을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바람기 많은 귀부인들의 요염함과 온갖 추문이 궁전의 곳곳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거침없이 털털하고 생기발랄한 야생의 한 떨기 꽃과 같은 루이지 공주의 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베르사이유 궁전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실로 묘한 야생의 활기찬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루이지 공주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서서히 주인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세상의 좀 난다 긴다 하는 숫 짐승(?)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 좀 난다 긴다 하는 숫 짐승(?)들 사이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왕위 상속권자에 속해있는 찰스 에드워스 스튜어트 왕자(Charles Edward Louis John Casimir Sylvester Severinus Mary Stuart)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때 스튜워트 왕자의 눈에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 프랑스 파리와 로마를 오가면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화려한 경력의 숫 짐승 무리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언저리에 끼었던 것 같은데........ 난데없이 등장한 이 상큼 발랄 새침한 햇병아리를 놓고 침을 흘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튜어트 왕자는 루이지 공주의 주위를 맴돌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느닷없이 루이지 공주가 프랑스를 떠난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베르사이유 궁전의 향락 파티라지만 발정난 짐승남들과 욕정을 진한 향수로 감추고 있는 내숭녀들로 가득한 그런 가축 시장과 같은 궁전이 생기발랄한 아가씨에겐 그저 한없이 한심하고 지겨울 뿐이었다.
그녀는 로마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롱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정장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친절함과 예의를 갖춘 분위기 좋은 공간에서 홍차와 디저트를 먹고 마시며 철학과 인문학과 르네상스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런 고급스런 분위기가 그녀의 적성에 그대로 딱 들어맞았다. 그녀는 살롱에 푹 빠져들었으며 그곳에서 진정한 휴식과 평안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집요한 스투어트 왕자가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허구한날 이 연세 지긋하신 왕자는 공주의 꽁무니를 쫓아 로마의 살롱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언젠가 너를 반듯이 내 꺼로 만들고 말거야’하는 다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서서히 접근에 성공한 노신사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의 반응은 언제나 시큰둥이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어느새 내놓으라 하는 멋지고 잘생기고 품위 있는 귀족 남성들이 줄을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게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왕자의 욕망과 집착은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포기하거나 거절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왕자는 이쯤에서 작전을 바꾸었다.
루이지 공주의 생모와 합스부르크 왕가에 손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지의 엄마 호른의 엘리자베스 공주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왕족이라고 결혼을 해서 딸을 셋 낳았는데, 결혼 4년만에 남편이 죽더니 그만 가문이 폭싹 망해버린 것이다. 딸을 수녀원에 보내야만 했고, 남아있는 영지를 소수의 하인을 거느리고 직접 파서 일구고 추수를 하면서 평민보다도 못한 삶을 평생 해오면서 그래도 한때는 왕족이었다고 최소한의 품위유지라는 허세를 부리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오고 있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런 엄마에게 느닷없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자라는 왕자가 나타나 따님과 결혼하고 싶다면서 엄청난 돈과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말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친 피붙이는 아니지만 황후가 발굴하고 적극 후원해 준 루이지 공주가 왕위 계승 서열이야 막연하지만 그래도 명분이 있는 영국 스코틀랜드 왕자와의 결혼 배후와 중재에 크게 기여를 한다면 신성로마제국을 통치 하는 입장에서도 비록 작겠지만 어느 정도의 명분과 실리를 얻게 되는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과 명분을 앞세운 스튜어트 왕자의 집요한 공세는 마침내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비록 나이가 많은 재혼남에 여성편력이 화려했지만 그에게는 실로 엄청난 재산이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약혼을 하고 1772년 로마 인근의 마체라타라는 마을의 교회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은 가히 세기의 결혼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성대했다. 현대에 벌어졌던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아나 비의 결혼식에 버금갔을 정도로 결코 못하지 않을 정도로 거창했다. 그것이 그만큼 스튜어트의 마지막 야망을 달성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능력과 위세를 세상에 널리 떨치고 싶은 허세의 결정판일 수도 있었겠다. ‘내가 마침내 루이지 공주를 차지했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 결혼식에 왕자가 공주에게 바친 왕관에 4만 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황금 왕관을 씌워주었다고 하니 이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암튼 그만큼 부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혼식 후에 로마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보내 준 4대의 국영 버스에 올라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로마에 마련해 둔 보금자리 무티 궁전에 도착을했다고 한다.
그럼 이후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들인 돈과 열정과 욕망만큼 행복했을까?
글쎄다.
이탈리아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에서 조금 도심 안쪽에 위치한 무티 궁전(Palazzo Muti)은 2개의 궁전과 2개의 일반 주택과 너른 정원을 가진 고급 주택으로 4층으로 지어졌다. 이곳의 위치와 주변 환경을 썩 마음에 들어 한 안주인 루이지 공주는 이곳에 자신 방식의 살롱을 개설하기로 한다. 그러자 남편 스튜어트 왕자는 아예 이 건물의 등기를 아내 루이지 공주 명의로 바꾸어 버렸다. 아마도 금슬이 썩 좋았던 것 같다. 이 엄청난 재산이 아내 명의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살롱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대박을 쳤다. 로마에 가서 무티 살롱을 가보지 않았다면 그는 적어도 유럽 사교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티 살롱에 자주 드나든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상류층 신분이라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신사가 처음으로 무티 살롱에 나타났다.
그는 살롱의 주인인 루이지 공주에게 다가가 자신을 피에몬테 출신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알피에리 (Vittorio Amedeo Alfieri) 백작이라고 소개했다. 순간 두 사람의 마주친 시선 사이에 번쩍 섬광이 번뜩인 것이다. 24살의 알피에리와 21살의 루이지 공주 사이에 짜릿한 전기가 통한 것이다. 아무리 손을 꼭 잡고 있어도 전혀 전기가 통하지 않는 남편 스튜어트의 나이는 53살이었다.
이후로 알피에리는 아예 무티 살롱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런 그를 루이지는 늘 새롭게 대했다. 오래지 않아 둘은 깊은 사이로 발전했다. 불륜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남편 스튜어트가 눈치를 챘다. 부부간에 다툼이 늘어갔지만 살롱은 계속 문을 열었고, 이제 루이지와 알피에리의 염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스튜어트와 알피에리 사이에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뺨을 후려갈기거나 장갑을 벗어 던져 어디 한적한 외곽으로 나가서 증인들을 세워놓고 권총으로 결투를 벌일만도 하지만 말이다. 스튜어트는 마냥 모르는 척 이들의 관계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븅신!!!!!)
부부사이에 다툼이 심해지고 폭력이 오고갔다는 소문까지 났다. 더불어 스튜어트는 점점 술주정뱅이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2년 뒤에 무티 살롱을 접고 부부는 피렌체의 산 클레메네트 궁전(Palazzo di San Clemente)을 사서 이사를 했다. 아마도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부부는 그곳에서 루이지 공주의 바램대로 다시 살롱을 열었다. 클레메네트 살롱을 연 것이다. 그러면서 스튜어트 왕자는 그동안 자신의 지위에 왕자라는 신분을 담아오던 것을 벗어버리기 위해 스스로를 새롭게 ‘올버니 백작’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술주정뱅이 왕자로 불리기가 부끄러웠던 것이 아닐까? 그러자 당연하게 이제 루이지 공주의 이름 또한 ‘올버니 백작 부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루이지 공주의 삶은 사라지고 올버니 백작 부인의 삶이 새롭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쭈욱 그렇게 살았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클레메네트 살롱에 떡하니 알피에리 백작이 또 나타났던 것이다.
올버니 백작 부인의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정작...... 올버니 백작 본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울러 알피에리 백작의 이 뻔뻔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알피에리는 더 대담하게 클레메네트 살롱에 당당한 모습으로 드나들었고, 그럴수록 올버니 백작 부부의 다툼을 커져갔다. 그리고 그럴즈음에 이 살롱에 새롭게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실제 주인공이랄 수 있는 프랑수아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였다. 살롱 문화에 갓 입학한 파브르가 클레메네트 살롱을 열심히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 역시 이 살롱은 주인인 올버니 백작 부인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파브르는 이곳에서 알피에리 백작을 만나 우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자상하고 부유한 삼촌이나 고모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빠르게 친해졌고 알피에리는 이제 파브르의 넉넉한 후견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파브르는 알피에리가 여기 살롱 마담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물론 불륜이었지만 두 사람의 성품을 보아 충분히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고주망태 술주정뱅이로 변해버린 남편 울버니 백작에 대해서도 아주 소상하게 알게되었을 것이다. 올버니 백작 부인과 알피에리의 염문은 이제 아주 그냥 드러내놓고 벌어지는 지경이 되었다. 백작은 점점 미쳐가는 듯했고, 다툼을 넘어 손찌검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피에리가 올버니 백작 부인에게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혼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파브르는 알피에리에게 직접 들었다. 백작 부인이 수녀원으로 도망쳤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백작은 자신 가문의 절대적 후원자인 교황을 찾아가 하소연 하기에 이르렀다. 알피에리는 소식을 접하고 잽싸게 도망쳤다. 교황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것이고 구실을 찾아 잡아들일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백작 부인은 정식 이혼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불허했다. 재화합쪽으로 결론을 내려준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함께 새 출발을 다짐하며 로마를 거쳐 파리로 갔다. 그런데 알피에리가 파리까지 쫓아왔다. 백작은 부인을 끌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청을 인근에 두면 알피에리가 오지 못 할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알피에리가 로마까지 쫓아왔다. 백작 부인은 거듭 정식 이혼을 요구 했지만 교황은 번번이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움으로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정식 별거 허락을 받아냈다. 교회의 법 때문에 이혼은 안 되지만 상황을 따져보매 꼭 부부라고 볼 수도 없는 지경임으로 합법적으로 별거을 허락한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백작은 로마에 남았고 백작 부인은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럼 알피에리와 파브르는 어디에 있을까요?
남편은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그냥 미쳐갔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다가 어느날....... 올리버 백작이 죽었다.(1788년 1월 31일) 68살의 나이로 기어이 떠난 것이다. 백작 부인은 36세였다.
그런데 정말 기가차고 놀라 자빠질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간도 쓸개도 다 녹아 없어진 이 미친 노인이 끝까지 또 일을 저륵고 만 것이다. 죽으면서 까지 또 미친짓을 하고 떠났다.
자신의 재산을 백작 부인 앞으로 모두 남겨주고 떠난 것이다. 이게 사랑일까? 애증일까? 아니면 심심풀이 땅콩일까?
하루 아침에 대부호가 된 36세의 매력적인 백작 미망인! 그녀가 바로 올버니 백작부인이었다.
살롱을 드나드는 호사가들은 하나같이 이들이 이제 곧 무척이나 화려하면서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들이 정식으로 하나 되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을 것인가? 미망인이 된 올버니 부인의 표정에서도 알피에리 백작의 프로포즈를 기다리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알피에리는 서둘러 결혼을 하려는 낌새 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도 두 사람 사이에 결혼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알피에리 백작은 단짝인 파브르에게 물어올 정도였다.
결국 기회를 보아 파브르가 알피에리에게 직접 왜 결혼을 서둘지 않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알피에리. 사람들은 당신과 올버니 부인이 왜 서둘러 결혼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 하고 있어요. 나도 그렇고요.’
‘결혼? 그딴걸 왜 해? 우린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하고 좋은데.’
‘올버니 부인은 결혼식을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는데요?’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모두 해결했어. 우리는 앞으로도 쭈욱 지금처럼 그냥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기로 했어. 거추장스러운 결혼 따위는 없을거야.’
‘그동안 부인과 함께 지내려고 당신이 무척 애를 썼잖아요.’
‘우리 사이에 분명하게 장벽이 있었고 그 장벽을 없애려고 노력했던 거지. 그런데 지금 아무런 장벽도 없잖아. 그런데 왜 굳이 결혼이라는 틀에 우리 자신을 옭아매야 하는지 나는 확신이 서질 않아. 지금 이대로가 마냥 좋은걸. 우린 이렇게 살아갈 거야.’
이것이 알피에리의 진심이란 것을 파브르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두 다 이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알비에리와 올버니 부인이 앞으로 그렇게 그의 말대로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이후로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함께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알피에리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내 개인적으로 지극히 주관적 입장에서 알피에리의 속내를 들여다 본다면...... 아마도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이유이거나, 어쩌면 두 가지에 모두 다 해당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추론해 본다.
첫 째는 허망하게 먼저 죽은 올버니 백작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나름으로 시달렸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남자란 기사도(신사)라는 덕목으로 평가되고 인정을 받던 시대였다. 아무리 신분이 높고 부자라 해도 기사도 덕목 평점이 낮다면 어디에서도 남자 취급을 받을 수 없던 시대였다. 젊은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바람을 피워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이 결코 크게 단점은 아니었다. 당당하게 기사도를 발휘하는 능력 있는 사내라면 어느 정도 불륜쯤은 오히려 훈장으로 치부되기도 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피에리가 올버니 부인에게 집착하면서 벌인 행각은 사실 정도가 심하게 지나쳤으며, 당당한 남자로서 그렇게까지 당사자인 올버니 백작에서 모멸감을 주고 비참하게 죽기에 이르게 만들었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불륜을 서슴지 않았고 끝내는 기어코 그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자책감이 드는 순간, 결혼에 대한 치졸한 갈망이 엄청난 죄악의 덩어리로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의 가책으로 감히 결혼까지는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 째 역시 올버니 백작의 죽음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사랑)이란 것이 영원불멸도 아니며 영원한 약속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 결과로 결혼생활의 유지에 대한 확신이 깨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백작 부인이 남편을 혐오했다고 쳐도 결과적으로 백작의 사랑은 끈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고통과 애증 속에서도 끝내 유산을 부인에게 남기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올버니 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숭고한 것이라고 확신을 내릴 수 있을까? 더불어 백작 부인은 끝까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사랑)은 늘 불확실성 속에서 언제든지 쉽게 변할 수 있는 요물일 텐데 말이다. 알피에리와 올버니 부인 사이에 아무 때고 또다른 알피에리나 또다른 올버니 부인이 새롭게 출현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이번에는 알피에리 자신이 죽은 올버니 백작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랑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고 쉽게 왔다가 떠나기 마련인데 굳이 결혼이라는 틀 속에 갇혀서 억지로 파경을 겪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서로가 원하는 순간까지 더 없이 아끼며 사랑하다가, 언제고 사랑이 변해 식으면 그냥 쿨하게 쉽게 뒤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억지로 지금 이 순간의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결혼의 족쇄에 스스로를 얽어맬 필요는 없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기거하며 신혼에 들어 갔다. 이들의 이런 관계는 알피에리가 죽을 때까지 쭈욱 이어졌다.
프랑스가 혁명을 거쳐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그가 이끈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위기를 감지한 두 사람은 영국 런던으로 옮겨갔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자였던 올버니 백작의 미망인 신분으로 말이다. 남편과도 가보지 못한 영국을 내연남 알피에리와 함께 방문을 했고, 왕족의 예우를 받으며 런던에서 지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와 피렌체에 거주하면서 이따금 파리를 방문했다. 누가보아도 금슬이 썩 좋은 아름다운 부부였다.
그렇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다가 1803년 알피에리 백작이 54세로 사망했다. 올버니 백작부인의 나이는 51세 였다.
또 한번 미망인 신세가 된 올버니 백작부인의 뒤를 새로운 남자가 든든히 지켜주었다. 이제 39살이 된 프랑수아 파브르였다. 알피에리와 올버니 부인이 영국으로 피난 생활을 떠난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알피에리와 올버니 부인과 파브르가 늘 함께 지내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의 가족이었다. 알피에리가 파브르의 후견인으로 고모부나 외삼촌이었다면, 올버니 부인은 파브르에게 고모나 외숙모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알피에리가 굳이 결혼을 거부했던 이유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것이었을까? 사랑은 언제든 쉽게 변하는 것이어서일까?
올버니 백작부인과 프랑수아 파브르 사이에 남녀 사이의 애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4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서 말이다. 올버니 부인의 운명이 기구한 것일까? 아니면 뭔가 요상한 끼 같은 것을 타고난 때문일까?
이제부턴 올버니 부인과 파브르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고 부부로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후로 21년 동안이나 말이다.
아참! 그 전에도 신기하게 알피에리 백작은 죽으면서 엄청난 자신의 재산을 이번에도 참으로 아리송하게 올버니 부인에게 남겼다. 21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올버니 백작부인이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파브르의 나이는 58세 였다.
그런데....... 이승을 떠나면서 올버니 백작부인 또한 모든 재산을 프랑수아 파브르에게 남기고 떠난 것이다. 실로 엄청난 부를 가졌던 스튜어트와 알피에리 두 가문의 재산이 고스란히 몽펠리에 출신의 촌뜨기 화가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결국, 그 돈이 지금의 (파브르 미술관)인 것이다.
파리의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엔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이 있고, 강 건너 남쪽엔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서로 마주보고 있다. 가끔 오르세 미술관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미술 전공의 가이드들이 여행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여기가 바로 오르세 미술관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세계적인 첫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실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르세 미술관에 대해서, 혹은 소장된 작품들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자. 그럼 처음으로 마주칠 세계적 작품은 무엇일까요? 유명한 작품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포함되는 <지옥문>도 있고, 밀레의 <이삭줍기>는 한국인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된지 오래고, 고호의 <자화상>이나 <해바라기>도 있습니다. 모네의 <수련>도 당연히 있고, 드가와 르노아르와 세잔과 고갱의 타히티 그림도 아주 많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둥근 시계창이 인증 샷 찍는 핫스팟인 곳 또한 오르세가 분명히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오르세에 도착해 처음으로 만나 볼 수 있는 세계적인 첫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 가이드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여행객들의 표정을 살피며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잖아요? 1939년까지 니스나 마르세유를 포함한 프랑스 남부에서 오는 모든 기차는 바로 이곳에 멈추어 섰습니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 막 도착한 것이지요. 당시에도 이 기차역은 건축학적으로 이미 세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르세에서 처음으로 마주치는 세계적인 위대한 첫 작품은 바로 이 미술관 건물 자체입니다. 비록 재활용된 기차역이라 할 수 있지만, 오르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중의 하나가 분명합니다.’
1939년에 플랫폼이 제거된 텅 빈 기차역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우편물 소포를 담당하는 우체국 건물이었다가 전쟁 후에는 수많은 프랑스 영화에 등장하는 촬영장이었다가 다시 잠시 기차역으로 재사용되었다가, 미테랑 대통령의 ‘예술 중심의 새로운 프랑스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침내 1986년 지금의 오르세 미술관으로 탈바꿈 되었다.
19세기 예술품의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오래된 기차역을 상상해보자. 역사상 최초로 산업용 건축물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역의 플랫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볕이 잘 드는 거대한 오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이 건물의 척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널찍하고 길게 펼쳐진 오르세 미술관은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많은 예술 애호가들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되는 작품은, 미술관 그 자체"라며 칭송한다.
오르세(Orsay)에서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표현한 마네, 드가, 모네, 르노아르 등 다양한 프랑스 회화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가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조각, 사진 및 다양한 장식 예술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선사시대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의 미술품들은 모두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프랑스 미술 고전주의관이라 할 만하다.
그 이후의 시대인 인상주의 미술이 따로 구분되어 대부분 이곳 오르세 미술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한 마디로 인상주의 미술관이라 할 만 하다. 정확하게 연도까지 구분하여 ‘1848년과 1914년 사이의 인상주의 작품들’ 이라는 전제까지 해두었을 정도이다. 다만, 그 시대라는 것이 딱히 어느 날, 혹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딱 정해놓고 바뀌고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인상주의를 1848년 4월5일 혹은 10월 23일 이렇게 기준할 수 없기에 과도기에 해당하는....... 인상주의에 크게 영향을 끼친, 혹은 그들에게서 인상주의가 유래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들라크루아. 루소. 뒤프레의 작품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1914년 이후의 현대 미술은 또 별도로 구분하여 퐁피듀 센터 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 소장 전시하고 있는데, 이곳에도 역시 현대 미술에 영향을 끼친 고호와 마티스를 포함하는 인상주의 화가들 작품 일부를 새로운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전신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 작품을 포함하는 5천점이 넘는 미술품을 보관하고 있는 가히 세계적인 으뜸이자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피치 미술관 다음으로 오르세 미술관을 좋아한다.
그 다음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아주 유명해진 이유 중에는 ‘소장 미술품의 대여를 포함한 반출이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미술관’으로 악명(?)이 아주 높은 미술관이다. 모든 미술관들은 서로 소장 미술품들을 빌려주고 받으며 다양한 특별 전시회들을 개최한다.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도 될 수 있고, 그것이 새로운 미래지향적 사업의 일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다양한 전시회들이 다양한 주제와 기획으로 자주 열리고 있다. 미술관끼리는 동업자 정신을 발휘하여 빌려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오르세 미술관 작품을 대여하려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하소연을 한다. 하긴 지구상의 인상주의 작품 상당수를 완전하게 확보하고 있는 처지로...... 절차도 복잡하고 대단히 신중을 기하기보다는 ‘인상주의는 다 여기 있어. 그러니까 인상주의가 보고 싶으면 너희가 직접 찾아와’하는 강력한 텃세로 보인다. 어쨌거나 암튼 루브르 보다 훨씬 힘든 게 오르세 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 오르세 소장미술품인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에밀졸라 초상>이 파브르 미술관에 임대되어 (2024년 마네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파브르에 이미 소장된 마네 그림이 있기는 하지만, 그림 2점을 빌려와서 특별전이라니....... 예전에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2년 만에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그때까지 여전히 열리고 있던 ‘2년째 카라바조 특별전’에 카라바조 그림이 달랑 두 점뿐이었던 그 뻘쭘한 사기전이 또 생각이 난다.
그럼에도 6월 중순까지만 전시되고 오르세에 반환된다는 마네 특별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니 자못 신기할 밖에......
프랑수아 파브르가 설립한 미술관에 마네라니?
더군다나 파브르 미술관이 명성을 날리는데 크게 기여한 화가가 쿠르베다. 세상에나...... 파브르 미술관에 쿠르베라니?
프랑스 미술의 지존이자 절대 금수저라면 당연히 푸생(Nicolas Poussin)이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가 수없이 많지만 최고의 자리는 푸생이다. 이탈리아 하면 르네상스고 르네상스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지만, 프랑스 하면 신고전주의가 있고 신고전주의 하면 푸생이 있다. 르네상스 3대 거장의 다음 서열은 당연히 푸생의 몫이라고 프랑스인들을 생각한다. 프랑스 미술의 자존심이자 마지막 보루인 것이 바로 푸생이다.
푸생은 프랑스 살롱전의 최대 수혜자이자 모든 영광을 성취하고 누린 사람이다. 그런 푸생의 발자취를 쫓아가고자 했던 살롱전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파브르였다.
마네와 쿠르베는 이 살롱전에서 배척당하고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다.
살롱전의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배척당한 마네(Édouard Manet)가 살롱 전시장 건너편에 자비를 들여 <풀밭 위의 점심>을 비롯한 40여점의 자기 작품을 전시했다.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신 폭삭 망했다.
다음해에 벌어진 살롱전에서 쿠르베(Gustave Courbet) 역시 각오했던 바처럼 또 낙선을 하자 낙선한 사람들의 작품만을 모아 다른 장소에 별도의 낙선전(Salon des Refuses)을 개최했다. 마네와 피사로와 세잔이 적극 동참했다. 그런데 그만 이 낙선전이 대박을 쳤던 것이다.
‘당신, 그거 봤어?’
‘뭘 봐?’
‘낙선전 안 가봤어? 쿠르베가 그린 <세계의 기원> 안 봤단 말이야?’
‘<세계의 기원>이 뭔데? 쿠르베라면 살롱전에서 번번히 떨어진 그 화가 아냐?’
‘<세계의 기원>을 안 봤으면 이야길 하지 마. 서둘러 꼭 가봐.’
당시 파리에 새로 생겨난 유행어가 ‘당신, 그거 봤어?’였을 정도였다. 살롱전은 낙선전의 위세에 완전히 눌려버리고 말았다. 팬덤이나 신드롬 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 설명을 할 수가 없겠다. 그냥 정히 궁금하시면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을 검색해 보시라고 할 밖에. 혹시나 ‘성인 인증’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런 그림이 이백 년은 안쪽이지만 백오십 년 훨씬 이전에 그려져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당연히 완고한 프랑스 주류 미술계와 사회적으로도 쿠르베와 낙선전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고립과 압박이 가해졌고 가난한 화가들이 몽마르트 언덕에 모여들며 함께[ 고난을 겪으며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완강한 쿠르베에 대한 주류들의 가혹한 핍박이 뒤따랐다. 분노한 쿠르베는 살롱전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왕립 미술조각 아카데미에 대한 반항으로 나폴레옹 황제의 조각상에 돌을 던져 파손시키는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쿠르베는 체포되었다. 일정 형을 살고 방면되었는데,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벌금과 배상금이 물려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쿠르베는 프랑스를 벗어나 해외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는 파리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시실을 버젓이 두고 프랑수아 파브르가 자신이 설립하는 미술관에 쿠르베를 선정해 여러 작품을 모아들였다는 점과 마네까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롱전의 혜택 속에 살았지만 인상주의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심적으로 동참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재간 있는 미술품 수집상으로 미래의 가치를 깨닫고 무작정 작품을 마구 사들이다보니 얼떨결에 그 속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닐까?
화가 프랑수아 파브르의 고전주의와 마네 쿠르베의 인상주의는 물과 불의 관계였지만, 미술품 수집상에게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작품이 더 투자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라 생각하면 다소 이해가 쉬어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화가의 아틀리에>나 <샘> 같은 쿠르베의 원작 또한 직접 감상하려면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하지만, 쿠르베 미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파브르 미술관을 가지 않고는 쿠르베의 초기와 말기의 다양한 작품들을 모두 만나볼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파브르 미술관의 엄청난 자랑이자 자부심 중심에 쿠르베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쿠르아作 <모로코 군사훈련> 파브르 미술관 소장.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쿠르아作 <알제리 여성들> 파브르 미술관 소장.
알렉상드르 카바넬作 <페드라> 파브르 미술관 소장.
클로드 모네作 <바질의 초상> 파브르 미술관 소장.
프레드릭 바질作 <전원풍경> 파브르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作 <안토닌 푸루스투 초상> 파브르 미술관 소장.
앙리 마티스作 <검은 칼이 있는 식탁> 파브르 미술관 소장.
피에르 술라쥬作 <작품 162x114> 파브르 미술관 소장.
사이먼 한타이作 <화이트> 파브르 미술관 소장.
장 자끄 피에르데르作 <니시아> 파브르 미술관 소장.
프랑스의 대부분의 미술관은 자라나는 어린아이와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 무한 개방되어 있는 놀이터이자 공부방이며 최고급 무료 데이트 코스다.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까지 무료 상시 개방되어 있는 아주 편리하면서도 특별한 공간이다. 날씨에 상관없이 최고로 좋은 온도와 습도와 밀도까지 아주 세밀하고 조절되고 있는 청정구역이자 안전지대이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선생님과 대화를 통한 공부를 하고 심지어는 작은 소품들을 가지고 놀이문화를 즐기기까지 한다. 소란이나 불의의 사고나 여타 다른 관람객들에게 불편을 주는 행위 등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어린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공공질서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로 불편한 것은 내 경험으로 딱 한 가지가 있다. 하필이면 화장실이 필요한 순간이 겹치는 경우이다. 남녀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어린이가 우선이다. 선생님들이 애를 쓰고 계시지만 아무리 그래도 꽤나 많은 어린이 행렬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어른들은 웃으며 차분히 기다려준다. 예쁜 병아리들의 재롱을 보면서 말이다. 그 또한 커다란 기쁨이자 감동이 된다.
프랑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미술관 박물관은 그런 곳이다. 으슥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그런 청소년들의 불미스런 일이 미술관에는 없다. 완벽한 시스템이 틈새 없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린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나 전시실 바닥에 둘러앉아 선생님 설명을 듣고 질문하고 때론 놀이문화를 통해 미술을 이해하는 시간과 특별한 공간 활용에 대해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미술을 대하고 이해하게 되는 아이들 정서에서 장차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이다. 정말로 너무너무 아름다운 풍경이고 부럽기 그지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마냥 부럽다. 우리의 손녀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이런 공간과 이런 자연스러움 속에서 마냥 즐겁게 무럭무럭 자라났으면 좋겠다.
내년엔 꼭 우리 손녀 태리 손잡고 이탈리아 미술관과 박물관과 역사유적을 가야지 다짐해 본다. 할아버지가 아직 힘이 있고 기억력이 좋을 때 반듯이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파브르 미술관 소장 작품을 추리고 또 추려서 일부만 게재를 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머지를 포함한 전 작품은 기회가 되신다면 몽펠리에를 방문해 미래지향형 환경도시를 경험해 보시고, 파브르 미술관을 제대로 감상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울러 미술관 소개를 좀 더 해보고 싶지만..... 살롱전과 낙선전이나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하나 작품을 만나보자면........ 아마도 금년 말쯤이 되어야 겨우 끝나지 않을까 싶어진다.
오죽하면 이번 여행에서 루브르 박물관 여행기를 아주 쬐끔 꺼내다 말았겠는가 말이다. 하여 결국 오르세 미술관도 그냥 건너뛰고 니스 여행으로 넘어갔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파브르 미술관을 만났지만 역시나 또 뛰어 넘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야만 하겠다.
일단은 몽펠리에 여행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지은 후에...... 앞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짬을 내서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파브르 미술관)에 관한 미술 이야기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시 꺼내 이야기 해보기로 해야겠다. 하여 파브르 미술관 여행기를 이쯤에서 일단 마무리 하고자 한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미술관 투어)라는 게 결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작은 아주 간단해서 그냥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지만, 끝나고 나면 누구에게 온 몸을 두드려 맞았거나, 어디 가서 하루 종일 삽질을 하고 난 것처럼 가히 중노동을 넘어 상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파브르 미술관을 나와서 서둘러 다시 코미디 광장으로 향한다.
일단은 폼 나는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뜨거운 알롱제 커피 한 잔을 마셔주어야 하겠고, 좀 쉬었다가 마트에 들려서 오늘의 피로를 날려줄 푸짐한 성찬 파티를 위한 장보기를 해야 하겠다. 그래서 카페를 찾아가 알롱제를 주문해 마셨다. 은근히 몸이 욱신거리고 슬며시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즈음이 되어서 카페를 나섰는데...... 어디선가 떼창 소리가 들린다. 버스킹이 벌어지는 풍경을 찾아 갔다.
몽펠리에 대학생들이 버스킹 공연을 펼치고 있다. 비록 아는 노래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 열정적 공연이었으며 충분히 사전에 연습을 많이 했다는 노력이 엿보였다. 흡사 오래전 포르투 여행에서 검은 망토로 무장한 포루투 대학생들의 공연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버스킹을 아주 많이 즐기는 여행자다. 버스킹 공연은 이제 세계 어느 여행지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새롭게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새로운 볼거리 문화가 되었다. 로마에 가면 어딘가에서 불쑥 검은 가죽 자켓을 걸친 중년 기타리스트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공연을 볼 수 있다. 혹, 진짜 핑크 플로이드 멤버가 아닐까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포로 로마노가 건너다보이는 아우구스투스 동상 옆에서 닐 영의 분위기로 장착한 꽃미남 남성구릅이 공연을 하고 있는데 수준이 가히 인상적일 정도로 압권이다. 조지아 트빌리시 푸쉬킨 동상 건너 도로에 가면 남성 4인조 그룹이 연주하는 <bad case of loving you>가 또한 압권이다. 로버트 팔머가 지나가다 ‘닥터 닥터’에 맞고 기절할 정도로 잘한다. 몰타 발레타의 한국인들에게도 너무 유명한 노래하는 할아버지도 손에 꼽아 드려야만 하겠다.
한참 공연을 감상하다가 세리 할망이 내 앞에 턱 손을 내민다. ‘돈 내놓으라’는 표시다. 나는 지체 없이 동전 지갑을 건넨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슬며시 다가가 버스킹 앞에 놓은 통에 넣고 돌아온다. ‘절대 공짜는 안 되는 거여. 공연을 잘 보았으면 응분의 보상을 해주는 게 예의여, 기본 매너여.’ 하면서 말이다.
역시나 젊음은 아름답다. 그들에게 무한한 기회와 성취가 있기를......... 덕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가!
얼추 되돌아 온 동전 지갑의 무게를 통밥으로 재볼 때....... 와인 한 병 값은 나간 것 같다. 얼추‘재들 팀이 여러 명이잖아’설명하려는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이탈해 마켓으로 향한다. 이런 거 투덜대다가는 즉석에서 (쪼잔한 *) 소리가 나올게 뻔하기 때문이다.
오늘 여행은 이렇게 마치고...... 저녁을 좀 거나하게 먹고 마시고.......
내일은 세티(Sete)를 방문한다. 이제 서서히 몽펠리에 여행을 마쳐가고 있다.
--- 장문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 여행은 세티(Sete) 방문기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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