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술관 가는 날!
내게 있어서는 당연히 설!!레고 기다려지는 시간이겠지만, 챠밍 여사로서는 당연히 지루하고 버거운 일정이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내가 곧 잘하는 말 중에 ‘여행은 사전에 공부하고 노력해서 꼭 아는 그만큼 풍요롭고 즐거워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가 바로 미술관과 박물관이다. 어려서부터 유독 역사(세계사)와 미술사(서양 미술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미술관은 그야말로 최고의 휴식이자 안식처라 하겠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라면 성서에 기록된 기독교적 역사에 국한되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쇼팽이나 모차르트 같은 음악 분야가 아니라면 크게 관심이 내키지 않는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오늘은 미술관 가는 날’이라는 오늘의 일정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충분히 짐작이 되고 남았다.
거기다가 이탈리아 피렌체(우피치 미술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터키 이스탄불 (터키 국립 박물관)을 이미 다녀 본 입장에서, 적어도 (대영 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정도가 아니라면 당연히 실망감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해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중에 파리를 떠나와서는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이나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 등도 그냥 지나쳐 왔던 것이다. 그런데 몽펠리에에서 느닷없이 미술관이라니?
일단은 약간 썰렁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일단 코미디 광장으로 향한다.
코미디 광장엔 프랑스식 정취와 낭만이 가득 넘쳐나는 카페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광장을 오가는 현지인들을 바라보면서 알롱제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나면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의 온기만큼 축 처진 분위기가 한결 나아질 것이다. 거기다가 오늘은 특별히 ‘라 코미디 카페(La Comedie Cafe)’ 테라스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을 생각이다. 1893년에 영업을 시작한 몽펠리에 코미디 광장의 상징과도 같은 카페다. 늘 사람들로 가득해 어제도 그제도 테이블이 나지 않아서 주변의 다른 카페들을 전전했었다.
'미술관 이름이 뭐라고?'
'파브르 미술관(Musée Fabre)'
‘파브르는 곤충기(Souvenirs entomologiques) 쓴 사람 아니야? 그사람이 그림도 그렸어?’
‘아니, 다른 사람이야. 곤충기를 쓴 사람은 장 앙리 카시미르 파브르((Jean-Henri Casimir Fabre)이고, 화가는 프랑수아 자비에르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인데,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여기 몽펠리에 출신이야. 어쩌면 화가 파브르가 곤충기 파브르의 삼촌이나 할아버지쯤 되는 가까운 친척이었을 거야.’
‘미술관에 이름을 붙였을 정도면 꽤나 유명해야 하는데 난 공충기 말고는 파브르라는 기억이 없어. 내가 알만한 무슨 그림이 있어?’
‘그렇기는 한데...... 딱히 이거다 하고 내세우거나, 또 보여줘도 팍 이해가 갈만한 대표작품은 없어. 미술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사실은 프랑스인이라 해도 파브르를 모르는 사람도 많을 거야.’
‘그럼 별로 인기도 없는 무명에 가까운 화가라는 말인데, 여기까지 오면서 피카소 샤갈 마티스 미술관을 그냥 패스해 놓고 잘 알지도 못하는 파브르라는 게 이해가 안 되잖아? 막말로 프랑스까지 와서 인사동 개인 미술 전시회를 가야 한다는 말이야?’
‘어허. 그래도 미술관이라니까? 프랑스에 루브르나 오르세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술관이 버젓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 파브르 미술관은 미술계에서는 이미 세계적으로 수준 높다고 톱 클래스 평가를 이미 받고 있어. 국가가 지정하고 지원하는 국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제외하고 이렇게 소도시의 지방 미술관으로 세계적으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미술관은 거의 없어. 그게 여기 파브르 미술관이야.’
‘이름난 화가도 아니라면서? 모가 그렇게 유명해?’
‘소장하고 있는 알짜 미술품.’
‘알짜 미술품? 유명 화가도 아니라니까 먹고 살기도 어려웠을 텐데 이 건희 회장도 아니면서 무슨 돈으로 미술품을 어떻게 모아? 미술관을 만들만큼?’
‘그게 참 신기한건데..... 돈이 막 저절로 생겼어.’
‘금수저야? 부친이 광산을 했는데 돌아가신 뒤에 금맥이 막 터져 나왔어? 아니면 유전이라도 터졌어?’
‘거 참. 난감하네..... 로또에 담첨됐다고 해야 하나?’
‘에이. 값나가는 미술작품 하나가 얼마인데...... 로토 터졌다고 미술관을 어떻게 차려? 사기꾼이야?’
‘아니라니까? 로또가 터지는데 한 번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한 십년간 계속 터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건 사기지? 로또 한 번 확률만 얼마인데, 한 달에 한 번씩? 십 년이나 연속해서? 그건 로또 운영회사가 작정하고 사기치는 거지?’
‘어디까지나 그렇다는 이야기지. 로또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돈이 주체를 못하게 막 쏟아져 들어온거야. 그래서 그 돈으로 미술관을 짓고 미술품을 마구 사들인 거야.’
‘헐!!! 아무리 운이라도 그 정도면 사기꾼이지..... 정말이야?’
‘정말이지. 파브르에 비하자면 난 지지리도 복이 없는거지......’
‘무슨 뚱딴지 소리야? 갑자기 파브르 이야기 하다가 당신이 왜 나와?’
‘장가를 잘 들었거든. 마누라가 초 초 초 초 슈퍼 로또였던 거야?’
‘...... 미술관에도 못가고 지금 여기서 죽을래?’
'깨갱 깽!!!'
이 정도면 됐다. 마눌님 표정을 살피니 상당히 업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제 슬슬 미술관으로 향해도 되겠다. 지금 충분히 궁금증을 가지고 호감과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게 오랜 여행을 계속해오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나타나면 내가 아내에게 주로 써먹게 되는 작전인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아내가 앞장서서 매표소로 향한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든 해결하거나 풀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갑자기 들자면...... 피렌체 여행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두오모의 지붕에 올라갔다. 오로지 계단을 걷고 또 걸어서 높이 100m의 지붕까지 올라갔다. 피렌체를 파노라마처럼 돌아보는 참으로 놀라운 전경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어차피 가기는 했겠지만, 여기에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가 어쩌고 저쩌고 했더라면....... 쉽게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영화라도 인페르노에서 과학자가 뛰어내려 자살하는 신을 찍은 장소라면 몰랐겠지만 말이다. 두고두고 회자될만큼 멋진 장소였다. 어쨌거나 감동이 역력한 표정으로 막 내려왔는데, ‘두오모 지붕 보다 더 멋진 풍경이 하나 있는데’라고 낚시를 던졌다. ‘어디?’ 하며 즉각 낚시밥을 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바로 옆의 지오토의 종탑을 가리켰다. ‘에이 거기가 거긴데’ 하며 시큰둥 한다. ‘어허. 피렌체에 왔으면 당연히 브르텔리스키의 지붕에 올라가 내려다 보는 풍경이 압권이겠지만, 부르넬리스키가 만든 돔의 본모습을 볼 수가 없잖아. 돔에서 주변을 보는 것이 멋지다는 것이지, 돔 자체의 아름다움은 볼 수가 없잖아. 하늘에 커다란 거울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옆의 종탑에 올라가면 피렌체의 전경을 배경으로 하는 멋진 부르넬리스키 돔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잖아? 그거야 말로 최고의 전경이라고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말하지. 나는 예전에 올라가 보았으니까 충분히 그 느낌을 알고있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결과가 어땠느냐? 물 한 모금 마시고 심호흡 크게 몇 번하고 나서 울 대단한 마눌님 그 자리에서 즉시 다시 지오토의 종탑까지 올라갔다.
이게 거듭거듭 반복되다 보니.......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썩 내키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적응해 버렸고 나름 어느 정도 수준의 스팩을 쌓을 정도가 되었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눈길 한 번 주고 스쳐지나 (가나의 혼인잔치) 앞에서 심각해 지기도 하고, 유럽의 대성당 앞에 가면 ‘성당의 정면부를 파사드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대성당 건물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또 다른 건축물로 이들은 인식하는 거야. 작품이라는 것이지. 씨뇨리아 광장의 미켈란젤로 조각상도 여기 피렌체 대성당의 파사드 상부에 올려 설치할 조각품으로 애초 제작의뢰 하였었기에 50미터 높이 위에 올려 세워질 조각상의 원근법을 생각해 머리를 좀 크게 가분수로 만들었던 것이야’라고 설명할 정도의 나름 도사(?)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나에게 세뇌되었다고나 할까?
라 코미디 카페를 나와 북쪽으로 향하면 곧바로 플라타너스나무 숲길이 인상적인 에스플러네이드 샤를 드골 (Esplanade Charles-de-Gaulle) 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여기저기에 잘 가꾸어진 정원과 수많은 작은 분수들이 놓여있지만, 한겨울이라 낙옆만 우수수 쌓여있고 광장의 대부분이 휘장으로 가려진 채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 플라타너스 숲길의 외곽으로 상드 마르스 공원이 드넓게 이어져 있다.
지금이야 그저 몽펠리에 북쪽의 도시 일부지역이겠지만, 이 플라타너스 숲길의 왼편 경계가 바로 지난날 몽펠리에 도심의 성벽이 요새처럼 에워싸고 있었기에 성벽 안쪽의 봉건 영주를 비롯한 귀족과 부자들의 세상과 성벽 밖의 평민들 세상으로 갈리던 경계였던 지역이다. 프랑스가 로마 가톨릭 국가였기에 몽펠리에의 봉건 사회 또한 로마 가톨릭이 지배계급이었는데, 파리에서 벌어진 성 바톨로메오의 축일 대학살 이후에 분노한 위그노(개신교도)들이 몽펠리에도 몰려와 대성당의 종탑을 불 지르고 성상을 파괴하며 몽펠리에 요새 도시를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몽펠리에는 개신교 저항세력의 본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면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루이 13세가 몽펠리에 탈환을 명령했다. 그 전투에서 루이 13세의 명령을 받는 몽모랑시 공작이 몽펠리에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 바로 여기 플라타나스 숲길에 길게 포병부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부터 요새를 향해 무차별 대포 공격이 벌어졌다. 성벽이 무너졌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결국 함락되었다. 살아남은 위그노들은 피레네산맥의 산중 요새 툴르즈로 도망쳤다.
몽펠리에 옛 도심은 이 때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페허된 토대 위에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의 모습처럼 도시가 새롭게 형성되어온 것이다. 하여 몽펠리에는 지금 그 옛 성채도시의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그동안의 개발사업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다시 한다고 하면 충분히 해내겠지만, 하천이 복개되고 도로가 새로 뚫리고 경계가 모호해진 옛 성곽도시를 어떻게 복원해 낼지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할 따름이다.
광장에는 고서적과 작은 소품들을 파는 벼룩시장이 상설시장처럼 열리고 있다. 여기 또한 이색적인 몽펠리에의 명소라 하겠다.
잠시 구경을 하고 다시 조금만 발걸음을 올기면 왼편으로 마침내 파브르 미술관(Musée Fabre)이 나온다. 타지에서 그동안 보았던 미술관의 전경과 사뭇 달라 보이는 것은, 이곳이 애초부터 미술관을 목적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성채 안에 위치해 있던 고급 빌라 단지를 매입해 서로 연결하고 개축해서 만든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입구에 해당하는 잔디가 갈린 너른 공터(정원)는 몽펠리에 성벽이 지나가던 자리가 허물어지자 아예 이곳으로 통로를 만들어 공원으로 출입문을 낸 것이다.
파브르 미술관은 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 1766년 4월 1일 - 1837년 3월 16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모든것이 고스란히 파브르에 의해서 사전에 의도되고 직접 설치하고 해서 지금 남겨져 있는 것이다.
하여 이번 파브르 미술관 견학은, 이제까지 주로 입구에서 출구까지 진행되는 순서에 따른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름 파브르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꼭 기억해야 할 사건과 작품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중요한 몇 작품을 살펴보는 것으로 아주 약간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한다.
물론 ‘로또 연속 당첨’과 같은 그의 노다지 행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이제까지는 화가 파브르를 전혀 모르셨다고요? 이젠 조금일망정 아시게 될 것입니다.’
‘루브르에 가면 르네상스 회화작품이 많이 있지만...... 그 이면에 새겨진....... 프랑스라는 국가가 르네상스에 얼마나 목숨을 걸 정도로 환장(?)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재정이 열악한 지방 소도시도 훌륭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소유할 수 있답니다.’
‘화가 파브르가 메디치 가문의 흉내를 살짝 냈다는 이야기 까지 있답니다.’
우리는 이제 발걸음을 파브르 미술관으로 향해 옮긴다.
‘오늘은 미술관 가는 날!!!’
서양미술사에서는 지오토(Giotto di Bondone)를 직업적인 최초의 화가(Painter)라고 적고 있다. 아울러 르네상스 미술의 기준 또한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지오토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는 화파와 라이벌인 시에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파가 이미 존재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이때까지의 그림(회화)이라는 것 대부분이 공방(工房)에 속한 기능인들이 부업 내지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인하여 그림을 그려주거나, 일부 수도사 중에서 솜씨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려지고 있었다. 시에나 화파에는 두치오를 필두로 하여 시모네 마르티니와 암브로시오 로렌제티 등이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여기에 대적하여 피렌체 화파에는 치마부에가 있었으니, 바로 지오토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당시에 공방(工房)은 장인이나 상인들의 조합인 길드(Guild)에 속한 일종의 작업실이었다. 시장의 탄생이 길드로 이어졌고, 이는 곧 독과점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 발전하면서 결국엔 많은 공과를 낳게 되었다. 모직업에 종사하는 직공 길드, 염색공 길드, 건축업에 종사하는 석공 길드, 건축가 길드, 도장공 길드, 금속세공인 길드, 대장간 길드, 제빵사 길드, 푸주간 길드, 가죽장인 길드, 비누제조 길드, 가구공예 길드, 금은세공 길드, 환전상 길드와 다양한 상인 조합 등등 끼리끼리 집단으로 모여서 자신들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카르텔이 형성된 것이다. 이 와중에 가구 길드에서 책상 식탁 등의 가구를 비롯해 보석함이나 보관함을 만들면서 치장으로 예쁜 그림을 그려 넣는 그림쟁이들이 있었다. 물론 일부에는 금속 공예에서 금은 세공품 접시나 그릇이나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가죽공예에서 말안장 등에 치장으로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들 그림쟁이 기능인들이 화가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오토는 바로 이런 시기에 가구공예를 담당하는 길드에 속한 공방의 최고 기능사인 장인(마이스터)이었다.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일정 기간 교육을 받고 숙련 과정을 거치는 도제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으면 오를 수 있는 각 분야의 최고 기능인이 바로 장인이었던 것이다. 가구를 치장하는 공방의 그림을 담당하는 최고의 장인이 지오토였으니 그의 그림 실력은 이미 널리 잘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화가라기보다는 오로지 공방에 속한 그림 그리는 최고의 기능인(장인) 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사방에서 교회나 부자나 귀족들이 지오토를 불러다 자신의 집 벽면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해왔고, 어디까지나 짬을 내서 부업으로 돈벌이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대박을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부업으로 산 조르지오 알라 코스타 교회(Chiesa_di_San_Giorgio_alla_Costa)에 <성모와 어린 성자>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삽시간에 피렌체를 넘어 전 이탈리아로 그의 뛰어난 그림 솜씨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서양미술사를 통털어 최초의 ‘화가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내 주관적인 판단하에 아주 간략하게 지오토를 평가한다면‘2차원적 평면적인 그림을 3차원적 입체적 그림으로 대전환시킨 화가’라고 이야기하겠다. 그는 화가들이 당시 교회의 엄격한 신성모독 판단에 얽매여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했던 중세시대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회화에 입체감과 실재감을 부여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지오토에게 수없이 많은 그림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망설임 끝에 결국 지오토는..... 가구 공방의 장인직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피렌체의 후미진 골목에 자신만의 ‘그림 공방’간판을 내걸었다. 그곳에서 오로지 그림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쳤고, 그림 주문이 들어오면 요구하는 그림의 내용과 크기와 소요 시일을 계산하여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이 성사되면 정식으로 정당한 그림값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오늘날과 같은 화가라는 직업이 정식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하여 바사리 또한 지오토를 ‘최초의 화가’라고 적었던 것이다.
아울러 지오토가 최초로 시작한 ‘그림 공방’이 바로 오늘날의 ‘미술 아카데미’가 된 것이다. 이후로 거의 대부분의 화가는 일단 부모나 지인들에 의해서 일찍 타고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은 다음에 어른의 손에 이끌려 ‘그림 공방’에 입학하게 되고, 그곳에서 스승에게 그림 그리는 교육을 받게 되고, 스승의 인정을 받게 되면 독립하여 스스로 자신만의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공하여 유명해지고 아니고는 오로지 독립 이후의 자신의 몫인 것이다.
스승에게는 가르침의 보람이 댓가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결론은 ‘천당 아니면 지옥’인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를 배출한 베로키오는 천당에 오른 스승이었고, ‘그 사람은 실력이 형편없어서 난 그 사람에게 하나도 배운 것이 없어’라는 미켈란젤로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기를란다요는 지옥에 빠진 스승이 된 것이다.
안드레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는 르네상스 전기를 대표하는 피렌체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베로키오의 공방에는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과 조각의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베로키오가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깊이 유대를 나누고 있는 화가 중에 희대의 광인이라 손가락질을 받고 있던 필리포 리피(Filippino Lippi)가 있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라 하겠다. 그런 리피에게 유일한 제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보티첼리(Sandro_Botticelli)라는 사실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광인 리피가 엄청난 사고뭉치라 툭하면 잡혀가고 잠수타고 갇히기 일쑤라 보티첼리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을지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보티첼리는 다소 일찍 독립하여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스승의 오명이 오히려 짐이 되어 오랫동안 서러운 무명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게 되었다. 스승의 벗이었던 베로키오가 꾸준하게 보티첼리에게 관심과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보티첼리가 베로키오의 제자라고 하는 경우까지 있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미 보티첼리가 무명이었을망정 화가로 독립한 이후였고, 어쨌거나 보티첼리는 필리포 리피의 유일한 제자라고 나는 보고 있다.
베로키오에겐 제자가 다 기억하지 못할정도로 넘쳐나는 판에 보티첼리를 제자라 우겨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베로키오에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라는 걸출한 제자까지 있는데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베로키오에게 1515년 산 살비 교회로부터 마가 마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제작 주문이 들어 온 것이다. 베로키오는 등장인물인 예수와 요한을 완성했고 배경의 마무리를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거금을 전제로 계속 제의가 들어온 작품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림 완성이 지체되자 살비 교회로부터 거듭 재촉이 들어왔다. 결국 베로키오는 흔한 말로 주말을 포기하고 공방에 꼼짝없이 붙잡혀 그림의 배경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리피가 찾아와서 술이나 한 잔하러 나가자고 부추겼다. 일이 많이 밀렸다고 하자 리피가 뒤를 돌아보면서 ‘겨우 배경만 남았는데 뭘 걱정해? 마무리는 보티첼리와 다빈치에게 맡기고 술이나 거나하게 마시러 가자'고 다시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보티첼리 실력이라면 베로키오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공방에 온 지는 짧았지만 다빈치의 천재성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상황이었던 지라 ‘그럼 그래 볼까? ’ 하면서 함께 외출을 서둘렀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알았지?’ 그러자 밖으로 나가는 베로키오에게 보티첼리가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선생님 왼편의 여백이 너무 크니 거기에 저희가 최선을 다해 천사를 하나씩 그려 넣어도 되겠습니까?’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은 베로키오로서도 그 점이 영 마음에 걸리던 중이었다. 여백이 너무 커서 단순처리로는 영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겠니? 자신 있는 거지? 내가 다시 지우게 하지만 말아라?’ 하고는 리피와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보티첼리와 다빈치는 한참동안 세세한 부분까지 상의를 했다. 그리고는 형인 보티첼 리가 먼저 베로키오의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을 무렵에야 다빈치가 붓을 내려놓으며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이 잔뜩 취한 필리포 리피와 베로키오가 돌아왔다.
그들은 밤새 제자들에게 맡겼던 그림이 궁금하여 이젤 앞으로 다가섰다.
스승들은 보티첼리가 그린 천사가 누구이며 다빈치가 그린 천사가 누구인지도 단박에 모두 알 수 있었다.
더하여 다빈치가 그린 천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베로키오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후대의 소문엔....... '아무래도 내가 붓을 꺽어야 할까봐' 했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ㅎㅎㅎ
그리고..... 그 이하는....... 생! 략!!!
파브르 미술관 관람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뜬금없이 르네상스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이는 여기 미술관의 실질적 주인(?)이랄 수 있는 화가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가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훌륭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따져 볼 때 다른 유명화가들에 비해 평가도 덜하고 잘 알려진 유명작품 또한 덜하다는 다소 빛바랜 결과가 돌출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프랑스 미술계의 최고 엘리트 화가 중에 한 명이었다. 그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와 당시의 프랑스 미술계의 성향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파브르 미술관 이야기를 해나가 보려고 한다.
프랑수아 파브르는 1766년 이곳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는 극심한 혼돈의 시대였다. 끝내 이 혼돈은 이십년 후에 프랑스 혁명(1789년)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어쨌거나 어린 파브르의 그림 솜씨가 남달랐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를 눈여겨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아끌어 몽펠리에 미술아카데미에 입학시켰으니 말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오늘날로 치자면 일종의 장학생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의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나 제조업이나 상업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 부자들은 ‘순수 미술협회(Société des Beaux-Arts)’와 같은 여러 단체를 만들어 예술 분야에 막대한 후원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메디치 가문이 은행업(성경에서 부정시하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지만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사회적으로 나름의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의 유럽 상류사회에 진하게 남아있었던 사회풍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파브르는 몽펠리에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그의 학업 성취도가 가히 군계일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프랑스의 시골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 정도의 실력이라고 모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 다음 수순은 무엇이겠는가? 지역의 유지들이 앞장서서 추천서를 써주고 사회단체들이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서면서 ‘우리 몽펠리에도 제대로 된 유명한 화가 하나쯤 키워보자’고 파브르 후원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필립 로랑 드 주베르(Philippe Laurent de Joubert)가 작성해 준 추천장을 가지고 프랑수아 파브르는 꿈에 그리던 파리로 떠났다. 추천인이자 후견인인 주베르가 파리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 회원의 신분이었으니 이제 파브르는 소르본 대학이던 서울대학교이던 하버드던 켐브리지던 어디든 간에 그 추천장 하나로 충분히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셈이었다.
파브르가 도착한 파리에는 당시 두 명의 독재자가 그곳에 있었다.
한 명은 전 유럽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이었고, 다른 한 명은 프랑스 예술계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던 다비드(Jacques-Louis David)였다. 나폴레옹의 궁정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라의 죽음> <사빈느의 여인들>을 그린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바로 그 화가를 가리킨다. 다비드에 대해서는 절대 권력에 아부한 어용화가라는 부정적 평가와 로코코 미술의 경박함에서 탈피하여 다시금 미술을 고전적인 엄숙함과 엄정함으로 이끈 위대한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평가는 전자가 49% 후자가 51%라고 평가하고 싶다.
아무튼..... 몽펠리에를 떠나 온 프랑수아 파브르는 ‘다비드의 스튜디오(화실)’에 들어가게 된다. 실로 엄청난 파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대 최고의 미술학교인 다비드 스튜디오에 들어간다는 말은 당대 최고의 화가 다비드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였고, 이는 당연히 커다란 성공이 보장되는 보증수표와 같았기 때문이다. 파리나 프랑스 전역은 물론 온 유럽 전체에서 밤하늘의 별자리 숫자보다도 더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온갖 추천장을 가지고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독재자 루이스 다비드가 파브르에게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몽펠리에 시골에서 그림 좀 그린다고 운 좋게 파리까지 유학 온 시골 촌뜨기의 실력이 다비드까지도 깊은 관심을 가졌을 만큼 뛰어났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는 곧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르네상스 회화는 중세의 회화에 비하여 일단 소재가 다양해지고 풍성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성서의 내용을 고전적으로 표현해야만 했던 중세의 회화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신화와 역사 속에서까지 무궁무진 찾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에 눈 먼 장님 노인이 구걸을 하는 소재의 그림을 유럽의 미술관을 관람하다 보면 곧 잘 만나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주의 화가들에게는 이 소재가 대단히 끌리는 이야기였음이 틀림없다.
위에 게재한 <벨리사리우스의 구걸>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0년 직접 그린 소묘작품이다. 같은 소재의 대형 유화를 그리기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비잔틴 제국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벨리사리우스의 초라하고 비참해진 노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 만나게 되는 장님 노인의 초라한 모습이 담긴 그림속의 주인공이 모두 한 사람은 아니다. 주로 두 명의 노인이 각기 다른 그림 속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오디세우스’와 ‘벨리사리우스’가 바로 그 두 명이다. 이 두 명의 인생 스토리 자체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면 화가나 음악가나 연극무대에 올리기엔 더없이 좋은 소재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신탁에 의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신탁은 어김없이 그대로 실현되고 말았다. 뒤늦게 신탁에 대해 깨닫게 된 어머니는 자살을 택했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스스로 두 눈을 불로 지져서 장님이 되었다. 죽을 때까지 장님 신세로 세상을 떠돌면서 거지로 연명했는데, 막내딸이 불쌍한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고난 끝에 찾아내서 함께 유랑 생활을 마지막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 막내딸의 이름이 여기 몽펠리에의 새로운 명소로 건설된 (안티고네)인 것이다. 안티고네 역시 여러 연극무대에 올려지고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디세우스의 비극을 소재로 한 그림이 무척이나 많아서 유럽의 미술관 곳곳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훌륭한 장군이었다. 항상 전투의 맨 앞에 용맹하게 나섰으며, 뛰어난 병법가이자 전술가였으며, 병사들에게 존경을 넘어 추앙받는 용사였다. 그런 그를 알아보고 친구로 삼았으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지도자가 바로 비잔틴 제국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였다. 동로마를 기반으로 한 비잔틴 제국이었기에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까지를 다시 회복하여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황제의 그런 원대한 염원을 벨리사리우스는 짧은 기간에 완벽하게 달성해 버렸다. 이번에도 지극히 내 개인적인 주관에 의해 판단해 본다면..... 알렉산더를 제외하면 그 어떤 위대한 전쟁 지휘관도 감히 벨리사리우스에게는 비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저나 나폴레옹이나 심지어 칭기스칸 조차도 벨리사리우스의 눈부신 업적에는 비교 자체가 부족하다고 판단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장대한 스케일의 블록버스터 역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정말로 환상적인 명콤비였다.
그 두사람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해 주는 놀라운 일화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는 테오도라라는 아름답고 재주가 많은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왕비가 있었는데...... 그 테오도라가 본래 창녀 출신이었다. 하여간 어쨌거나 황제는 창녀와 결혼을 했고, 황제의 치세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황제에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가장 친하고 신뢰하는 친구인 벨리사리우스가 잃어버린 옛 로마의 영토를 회복한다고 연일 전쟁터만 누비고 다니느라 아직 미혼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왕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왕비는 자신의 주변에서 썩 괜찮다고 생각된 여자를 강력하게 추천하였는데 그녀 역시 창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벨리사리우스는 친구와 친구의 아내가 추천해 준 여인과 기꺼이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역시 매우 만족스런 결혼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무런 탈도 없었다.
문제는 벨리사리우스가 짧은 시간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모두 수복해내는 원정을 완성하고 콘스탄티노플로 귀국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위대한 비잔틴 제국의 완성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불멸의 업적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백성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용맹한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힘이 오히려 황제보다도 더 절대적이었다는 막연한 신뢰와 믿음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정적들이 벨리사리우스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분쟁이 생길 때마다, 국경에 소란이 생길 때마다 언젠가 벨리사리우스가 측근들을 이끌고 나가서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소문을 내키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왕비 테오도라가 벨리사리우스의 남성미에 흠뻑 빠져서 둘이 바람이 났다는 소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황제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피비린내를 맡은 정적들이 벨리사리우스를 체포하여 황제 앞으로 끌고와 공개재판을 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황제는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적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참형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어디에도 그가 역모를 꾸몄거나 왕비와 바람을 피운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적들을 끝까지 그의 참혹한 죽음을 부르짖었다.
이젠 황제에게도 은근히 두렵고 떨쳐내고픈 벨리사리우스였지만 증거 하나 없는 마당에 무조건 그를 죽일 수만은 없었다. 하여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의 모든 직위와 재산과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먼 변방의 시골로 유배를 보냈다. 무장한 군대가 그를 철저하게 감시했으며, 어떤 사람도 벨리사리우스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무수한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고 고대 로마제국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고 확장시킨 위대한 장군이 하루아침에 실각하고 첩첩산중에 유배되어 스스로 통나무집을 짓고 장작을 피고 씨앗을 뿌리고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유배 생활로 연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무심한 시간이 꽤나 오랫동안 그렇게 마냥 흘러갔다.
통일제국 비잔틴이 이때부터 서서히 나태해지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멀리 변방에서 잔혹한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벨리사리우스가 어디론가 사라지면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한 비잔틴의 군사력을 적들은 샅샅이 파악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비잔틴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을 마구 점령하던 자신들의 무적 군사력이 여전하다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랑캐가 국경을 넘어왔고 단숨에 한 번의 전투로 모든것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부패한 비잔틴의 지휘관들이 모든 제국의 군대를 끌어모아 보부도 당당하게 전쟁터로 달려갔다. 싸움은 붙었는데....... 결과는 참혹해도 너무나 참혹했다. 제국 군대의 숫자에 비하자면 소수라 할 수 있는 오랑캐 침입군대가 절대다수의 비잔틴 군대를 놀이를 벌이듯 휘젓고 다니며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집단 학살이었고 몰살이었다. 대열을 정비하지 못한 채 패배한 군대가 죽어라 하며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에서 축제를 벌이며 오랑캐의 잔인한 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위험을 감지한 콘스탄티노플의 주민들이 테오도시우스 성채를 빠져나가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서 로마를 재통일한 비잔틴 제국이 불과 수년 만에 멸망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국가적 재난을 넘어서 제국의 몰락이 코앞에까지 닥친 것이다. 그때...... 부패한 제국의 수뇌부 중에 누군가가 뻔뻔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시여. 벨리사리우스를 불러서 출정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라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염치도 없는 인간들이다. 어떻게 저런 인간 말종들만 골라서 왕궁을 가득채울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더 어이없기로는....... 느닷없이 벨리사리우스의 통나무 오두막에 왕의 명령서를 가진 전령이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또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헐!!!!!! 또 헐!!!!!!
과거 용맹했던 장군의 위용이라곤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벨리사리우스가 낡은 궤짝에서 과거에 자신이 입었던 갑옷을 꺼내 입고 오두막을 나왔던 것이다.
‘그래 황제께서 보내주신 지원부대는 얼마나 되며 지금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는가?’
‘지원군은 없습니다. 전령으로 온 저희 셋이 전부입니다. 대기중인 지원군도 없습니다.’
‘뭐라고? 나와 함께 전쟁터로 향할 군대가 너희 셋이 전부라고?’
‘저희중에 한 명은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해야만 합니다.’
헐!!!!
얼마나 어이 없었을까? 입에서 저절로 황제를 향한 쌍욕이 터져나와도 수백 번 수천 번은 더 터져나왔을 것이다.
‘적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 수가 얼마나 되는가?’
‘사백리 쯤 떨어져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족히 일만은 넘는다 합니다. 그 중 기병이 삼천이라 합니다.’
한참동안 벨리사리우스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깊은 상념에 잠긴 것이다.
‘내일 아침에 해가뜨기 전에 출정할 것이다. 너희들 중에 누구라도 나를 따라 전쟁터로 갈 필요는 없다. 기꺼이 목숨을 내걸고 죽을 각오로 싸울 사람이 아니면 누구라도 소용없다. 대신 내일 아침까지 내가 타고 갈 튼튼한 말 한 마리를 이 자리에 대기 시켜놓아라. 황제의 명을 받았으니 신하 된 몸으로 나 혼자라도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갈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각 마을과 고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쳐라. 벨리사리우스의 명령을 전달한다. 제국을 침략한 흉노를 물리치기 위하여 출정한다. 지난날 나와 함께했던 용사들은 모두 원대 복귀하라.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 모두 물러가라.’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통나무 집으로 들어가 굳게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벨리사리우스가 통나무 집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어제 찾아왔던 병사 둘이 벨리사리우스가 탈 말을 한 필 더하여 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가 밤새 손수 바느질로 수선한 깃발을 병사에게 건네준 다음에 말에 올라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붉은 바탕에 황금색 실로 사자 두 마리가 수 놓은 비잔틴 제국 총사령관의 깃발이었다.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마지막 전투가 되는 이 이야기는 모두 비잔틴 제국 역사에 기록된 실제의 이야기다. 실화라는 말이다.
벨리사리우스가 달리고 또 달려나가 적들과 마주하게되는 그 순간....... 그의 뒤에는 약 1천 팔백 명의 용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게 보이는 노병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나이 들어 은퇴했던 노병들이었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부른다는 소리 하나만을 듣고 앞다투어 전쟁터로 달려와 합류했던 것이다.
절대적 우위의 전력을 가진 오랑캐로서도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신화 속의 용장 벨리사리우스가 지금 눈앞에 떡 버티고 나와 있는 것이다. 그의 전력에서 보자면 절대적 열세의 전투에서 역전승을 거둔 전투가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부족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니 당연했을 것이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사나흘 동안이나 오랑캐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긴, 오랑캐 처지로는 가다듬을 전력이라도 있겠지만, 벨리사리우스 군대로서는 더 이상 가다듬은 전력도 없고 기다린다고 해서 몰려올 지원군도 없었다. 어차피 막판 아니겠는가?
느닷없이 총사령관의 깃발이 적들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앞에 적들을 향해 칼을 빼 들고 진격 명령을 호령하는 벨리사리우스가 보였다. 누가 보아도 무리한 공격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기선 제압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찔러오는 그 창끝이 말로만 전해 들었고 귀가 따갑도록 전설처럼 무수히 들어왔던 불세출의 저승사자 벨리사리우스였다면 그와 맞딱뜨려야 하는 처지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랑캐 지휘부로서도 어떻게 손써 볼 도리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마구마구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코앞에서 이 상황을 모두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벌어졌던 비잔틴과 오랑캐 간의 전투 장면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패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비잔틴의 눈부신 승리였다. 벨리사리우스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를 위해 기꺼이 달려와 준 노병들의 대부분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거나 이미 죽어있었다. 참혹하고 가슴 아픈 승리였다.
승전보가 전해지자 콘스탄티노플은 온통 축제가 벌어졌다. 밤이 새도록 사방에서 벨리사리우스의 이름을 외쳤대며 노래를 불렀다. 전쟁터의 참상을 수습한 벨리사리우스의 살아남은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서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때 황제로부터 급하게 전령이 도착했다.
군대를 고스란히 현재의 자리에 주둔시키고 벨리사리우스 혼자 단신으로 와서 전황을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번에도 부패하고 타락한 정적들이 모함하기를, ‘이대로 승리자 벨리사리우스가 정예 군대를 고스란히 거느리고 개선해 혹시라도 지난날의 일에 앙심을 품고 반역을 도모한다면 감히 그를 막아설 군대도 없을뿐더러 지금 밖의 함성처럼 군중들이 그의 반란을 지지하고 동참 할지도 모르니 혼자만 비무장으로 들어오라 명령하십시오’라고 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즉시 벨리사리우스가 분노하고 명령을 내렸다면 어쩌면 비잔틴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이없게....... 벨리사리우스는 혼자 비무장으로 황제를 찾아온다.
여기에서부터 이후의 이야기는 서너가지 버전으로 다르게 전해내려 온다.
정적들의 모함으로 끝내 벨리사리우스는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는 버젼이 분명히 있다.
다음으로, 이번에도 삭탈관직 당하고 또다시 통나무 집으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다음 버전이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도 억울해서 가슴속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만...... 눈이 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노쇠하고 눈까지 멀게 된 노영웅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유배에서 풀어주었는데, 그 이후로 세상을 떠돌려 구걸을 하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고, 바로 이 대목이 수많은 화가와 작가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더없이 아주 매력적인 소재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미술사를 대표하는 신고전주의 대가 다비드(Jacques-Louis David)에게도 그런 벨리사리우스의 비극적 삶은 유독 매력있게 보였던 것 같다.
결국 다음해인 1781년 루이스 다비드는 위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벨리사리우스 이야기를 유화로 그리게 된다.
다비드가 그린 <벨리사리우스의 구걸>은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는 붉은 갈색 색조가 풍부하면서도 아름답게 수를 놓듯 그려져있다. 캔버스의 크기가 288 x 312에 이르는 제법 커다란 그림이다. 먼저 펜으로 드로잉을 한 후에,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한 끝에 건물은 수직으로 분명하게 등장인물들은 수평적으로 구성을 마친 후에야 유화로 그려낸 것이다. 다비드는 그 구성의 완성을 위해 배경을 그리기 전에 과거에 벨리사리우스를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군인이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추가로 구려 넣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군인을 제외시키고, 초라하게 늙은 벨리사리우스와 적선을 하는 여인의 모습만으로도 이 그림은 충분히 풍성하고 아름다웠을 것만 같다. 나는 이 생뚱맞은 군인의 모습이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을 심하게 훼손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부연 설명에서 자끄 루이스 다비드가 작가라는 성명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끝내 이 그림이 다비드의 작품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뭔가가 빠진듯하고 어딘지 모르게 다비드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나 <사빈느의 여인들>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구성과 캔버스 구석구석까지 완벽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던 다비드의 섬세한 붓 터치가 이 그림에서는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좀 엉성해 보이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구성의 엉성함과 생뚱맞은 군인의 모습이 그림의 품격을 확연하게 떨어트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궁금했을 지경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벨리사리우스의 비극적 삶은 수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에게도 훌륭한 소재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비드와 비슷한 시대를 함께 활동했던 화가 페이롱과 프랑수아 앙드레 빈센트 또한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려서 발표를 했다.
처음 다비드가 <벨리사리우스의 구걸>을 발표했을 때 그토록 칭찬일색이었던 상황이 페이롱과 빈센트의 그림이 발표된 이후로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생각을 다비드가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다비드 또한 내가 가졌던 생각과 비슷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참 지나서 다비드는 자신이 그렸던 <벨리사리우스의 구걸>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그림의 구성은 나소 나아졌지만 완성도는 전작에 비해서 훨씬 미치지 못한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같은 듯 다른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서 감상하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왜 그가 굳이 다시 그렸을까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무엇을 보완하고자 했을까?
나중에 새롭게 다시 그린 <벨리사리우스의 구걸>은 현재 파리의 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 볼 부분은 바로 이 새로운 <벨리사리우스의 구걸> 그림을 그리는 상황에서,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의 베로키오가 자신의 제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를 참여시켰듯이. 이 그림의 완성에 부쩍 관심이 늘어가던 제자 프랑수아 파브르를 참여시켰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빈치와 보티첼리와는 다르게 이 그림에서 파브르가 어떤 부분을 참여해 그렸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하여 배경처리에 파브르의 솜씨가 추가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다만, 이런 사실로 몽펠리에 시골촌뜨기 유학생 프랑수아 파브르가 다비드 스튜디오에서도 훌륭하게 정착하고 실력을 인증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프랑수아 파브르의 진가는 다시 드러나게 된다.
프랑수아 파브르는 파리 살롱전에 작품 <느브가네살은 시드기야의 자녀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죽였고 그의 눈을 도려내 장님으로 만들었다(Nabuchodonosor fait tuer les enfants de Sédécias sous les yeux de leur père)>를 출품했다.
이미 두 번이나 낙선한 처지의 파브르였지만 여기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구약성경 열왕기 하편 25:1-10절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이었다.(내용 설명은 구약성경 참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빌론 유수’ ‘디아스포라’가 생겨난 것이다.
이 당시 화가로 크게 성공하려면 일단은 재능을 인정받아 유명한 화가의 스튜디오(화실)에 입학해 제자로서 교육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스승에게 인정을 받고나면 흔한말로 과거시험에 급제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살롱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상을 하는 것이었다. 살롱전에 입상하여 살롱 전시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자신의 작품을 내놓게 되는 것만으로 이미 성공은 사실상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이 두 가지 상황 가운데에 ‘프랑스 왕실 회화 조각 아카데미’라는 아주 특별한 관문이 하나 있었지만, 여러 가지 폐단으로 없어진 후로는 곧장 살롱전으로 화려한 데뷔가 가능해 졌다.
다시 거론하게 되겠지만...... 프랑스 회화와 조각을 포함하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무궁한 자부심은 바로 여기 ‘프랑스 왕실 회화 조각 아카데미’라는 이름 속에 담겨있다. 그리고 그 깊은 저변에는 오로지 하나 ‘르네상스에 대한 간절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울러 이는 영국이나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살롱전(Salon de Paris)은 ‘프랑스 왕실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소속된 28명의 심사의원들이 제출된 수천 점의 작품을 세심하고도 엄격하게 평가를 통해 수십 점을 뽑았다. 초기에는 심사의원들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뽑히는 등의 문제가 불거져 살롱전이 종국에 취소되기도 했던 만큼, 공백기를 지나 재개된 살롱전의 심사와 기준은 엄격하고 공평하기로 정평이 났다. 그 점, 공정성 또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되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살롱전에 출품해서 입선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가로서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로 권위를 가진 등용문이 파리 살롱전이었다. 왕실 아카데미는 그렇게 입선작을 뽑은 뒤에 궁전의 한 장소에 전시실을 만들어 대중에 공개했다. 대략 한 달에서 때론 석 달 정도까지 전시회를 열었고, 실제로 1백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살롱전도 실제로 있었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온 유럽에서 좀 살만하다, 소위 잘나가는 귀족이다고 처신하려면 이 살롱전만은 죽으나 사나 땅을 파고 사채를 쓰더라고 꼭 다녀가야지만 하나의 거창한 허례 의식으로 자리 잡았을 지경이 되었다. 한 달에서 석 달가량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특별한 행사를 벌였는데, 전시된 입선작품 중에서 1등 2등 3등을 뽑아 시상식을 거행했다. 그러니까 전시회 기간 내내 동안도 심사의원들은 관람객의 여론까지 들어가면서 세세하게 심사를 계속했던 것이다.
1787년 파리 살롱전이 끝나는 날, 수많은 인파가 전시장 앞에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왕실 아카데미 수석이 동상과 은상 시상식을 마치고 나자 군중들의 함성이 드높게 울려 퍼졌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살롱전 1등 당선자의 수상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화려한 차림의 25세 왕비는 아름답고 기품이 넘쳐 흘렀다. 열광하는 군중의 함성이 잦아들기까지 꽤나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서야 겨우 다시 아카데미 수석(교장)이 왕비 뒤에 나타나 황금 실로 수놓은 두루마기를 건네주었다. 왕비의 섬섬옥수가 두루마리를 풀어서 펼쳐 들었다.
‘1987년 파리 살롱전의 프릭스 데 로마(Prix de Rome)는........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 축하해요.’
몽펠리에의 촌뜨기 파브르가 살롱전의 입상을 넘어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파리가 떠나갈만큼 함성이 울려펴졌다. 며칠이 지나 고향 몽펠리에는 온통 축제의 도가니가 되었다.
살롱전의 우승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특전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대상을 ‘프릭스 데 로메(Prix de Rome)’ 라고 달리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속에 담겨 있다. 대상을 수상한 사람에는 프랑스 정부(프랑스 왕실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후원하여 3년 동안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특전이 부상으로 딸려오는 것이다. 교통비와 체재비와 교육비용과 현지의 상류사회와 교류하는 비용까지를 모두 프랑스가 부담하는 특전 중에서도 아주 놀라운 특전이었다. 거기다가 학업을 열심히 하고 성취도가 입증되면서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추가지원 서류를 접수하면 심사 끝에 2년 더 연장을 할 수가 있었다. 최장 5년의 국비 유학인 것이다.
파브르는 곧바로 파리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그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강력한 추종자였던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하나, 서둘러 로마로 가서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작품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뿐이었기 때문이다. 파브르는 다비드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배웠지만, 그의 마음속에 스승은 사실 어려서부터 이미 오로지 라파엘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들 이탈리아 이탈리아 아니면 르네상스 르네상스 했던 것일까?
아무리 명망이 높은 군주(왕)면 뭐하겠는가? 아무리 돈과 권력이 넘쳐나는 추기경이나 귀족이면 무엇하겠는가? 아무리 영지와 재산이 많은 부자면 무엇하겠는가?
암흑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일반 군중들이, 그리고 콧방귀 좀 꾼다는 귀부인들에게 칭송을 받거나 인기가 없다면 왕위도 권력도 돈도 다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귀부인들은 멋진 미남에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을 역사속에서 내내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일단 허세일지라도 교양과 매너가 필수 충분조건으로 추가되었다. 일종의 기사도가 이때 정착이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토스카나어로 단테의 <신곡>을 줄줄 암송하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을 논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나 화가나 조각가와 친분이 있거나 그들의 유명 작품을 적어도 서너 작품쯤은 소유하고 있어야 적어도 시대의 명망 있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 개의 성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성은 두 개뿐이라도 라파엘로와 서신을 주고받는 교분이 있으며 보티첼리의 작품을 세 개쯤 가지고 있다면 그가 훨씬 매력남인 시절이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고 스캔들 서너 개쯤 달고 다니지 못한다면 칠푼이 한심한 남자였으니 말이다. 한 여자만 사랑하고 고관대작의 지위에 엄청난 부자보다는,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고 사방에 부채는 쌓였고 툭하면 칼을 뽑고 결투나 벌이는 카사노바가 더 칭송을 넘어 뭇 여인들에게 추앙을 받는 그런 요상스런 시대였단 말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쳐부수고 바야흐로 세상을 좌지우지 흔들어대던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까지도 오매불망으로 르네상스를 간절하게 원했을 정도였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이룩했음에도 궁정 문화와 생활 수준은 아직 원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까지 빼앗아왔건만..... 한 주먹 꺼리도 안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전혀 가지지 못한 것이다. 여왕은 명령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르네상스를 빼앗아 오든지 훔쳐 오든지 아니면 억만금을 주고라도 사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이탈리아가 죽어도 영국과는 거래를 안 한답니다. 교황님의 명령이래요.’라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할아버지인 헨리 8세가 재혼문제를 두고 교황과 마찰을 빚다가 끝내 로마가톨릭의 호적을 파서 성공회를 만들었으니 서로 마구마구 이단시하고 파문까지 시켜버린 처지에 로마가톨릭의 영역임이 분명한 이탈리아가 영국과 교류하는 것을 교황이 인정해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대영제국의 특사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베키오 궁전에 파견되었다.
‘교황께서 모든 교류를 제재하도록 하셨다니 억울하기는 하지만, 그렇기로 몰래 교류를 해서까지 피렌체 공화국에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대한 그리움과 부러운 마음은 금할 수가 없답니다. 해서 바라기는 르네상스 회화나 조각품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하여도 사람을 보내 담아올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다녀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그 감동을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기에 그림 그리는 사람 하나를 피렌체로 보내서 전시 풍경을 담아왔으면 하는 마음에 사신을 보냅니다. 수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글의 말미에는 분명하게 엘리자베스 여왕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었다.
메디치 가문에 남자의 대가 끊어져 결국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Medici)에 의해서 우피치의 메디치 가문이 소유한 모든 미술품이 피렌체시 정부에 귀속되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피렌체는 결국 이를 승낙했다.
영국으로부터 특사가 피렌체에 파견되어 도착했다. 그가 바로 영국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고전주의 화가 요한 요제프 조파니 (Johannes Josephus Zaufallij)다. 그는 이후로 피렌체에 2년을 머무르면서 체류 기간의 대부분을 우피치 미술관의 당시 핵심 지역이었던 팔각형의 전시실 ‘우피치의 트리뷴(The_Tribuna_of_the_Uffizi)’에서 보냈다. 그럼 2년 동안 도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느냐? 다음 한 장의 그림이 그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여왕이 파견한 특사 요제프 조파니 (Johannes Josephus Zaufallij)는 우피치 미술관에 틀어박혀서 여왕의 명령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을 했고, 2년 뒤에 그림 2점을 들고 귀국했다. 팔각형의 방(The_Tribuna_of_the_Uffizi)에 드나드는 문이 두 개가 있는데, 왼쪽문에 이젤을 펴놓고 들여다보이는 풍경을 담느라 1년, 반대쪽 문에 의자를 놓고 죽치고 않아 또 들여다보이는 풍경을 고대로 베끼는데 1년, 그림의 채색이 마르자 마자 보따리를 사서는 영국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요즘이라면...... 비행기 타고 오는데 하루, 매표소에 2시간 줄 서서 표를 끊고 올라가서 사진 찍고 나오기까지 넉넉잡아 30분,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서 다시 런던까지 가는데 넉넉잡아 하루면 충분할 것을....... 중간에 티본 스테이크 먹고 젤라또 먹고 좀 뛰어다닌다면 두오모 부르넬리스키 돔까지는 다녀올 수 있지 않았을까?
헐!!!!
그림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그렸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장 영국 왕실에서 여왕을 모시며 대영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실질적인 영국의 귀족과 정치가인 실력자들이었다. 영국의 실세들이 우르르 지금 우피치 미술관을 돌아보면서 르네상스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중앙 앞에서 최고 권력자들이 감상하고 있는 그림이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란 작품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조각품이 <아를의 비너스>로 천상의 아프로디테 조차도 자신의 나신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알려진, <밀로의 비너스>가 발견되기 이전까지 최고의 아름다운 조각상의 원조격이었다. 그 다음이 라파엘로의 <성 모자상>이다. 이 그림들을 슬쩍 통째로 모사해서 영국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하나하나의 작품을 실지로 대하는 것 보다는 못하겠지만, 양감과 질감을 실제로 느껴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말로만 듣던 비너스가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이게 어디 가짜야? 저 사람들 눈에는 다 진짜로 보이는걸!
이거 하나 하나의 작품 가격이 얼마야? 그걸 지금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거지. 이 모두가 탁월하신 여왕페하의 은혜가 아닌가? 이순간부터 영국도 넘칠만큼 르네상스를 보유한 것이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영국 전체가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나고 말았다.
그리고 너도나도 무조건 이탈리아를 가야겠다고 광풍이 들이닥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여왕이 파견한 특사 요제프 조파니 (Johannes Josephus Zaufallij)가 ‘영국 왕실 아카데미’ 회원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에도 프랑스의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있었듯이 영국에도 ‘영국 왕실 아카데미’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초 강대국들도 르네상스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려 노력했고, 또 스스로 자국의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저렇게 학술단체를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제국은 언제든지 무수히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또 망각속에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문화와 예술을 가진 제국은 역사속에 천년을 살아남는다. 로마(Roma)가 바로 그 증거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절정기를 맞게 되는 르네상스(Renaissance) 열풍은 전체 유럽으로 퍼져나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아마도 인류 역사를 통 털어서도 이런 광풍은 어디에서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 뜨거운 열기는 곧바로 간절한 열망으로 불어 닥치고 만다. 특히나 강대국일수록, 훌륭한 업적에 대한 야망을 가진 군주일수로, 명망이 드높은 귀족일수록,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와 권력자일수록...... 르네상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불치의 병처럼 번져갔다. 세상을 모두 정복하고 온갖 보물을 사들이고 하늘의 별도 딸 수는 있었지만....... 르네상스는 소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를 다녀 온 사신이 자랑삼아 떠벌렸다. 피렌체의 성당 벽마다 다빈치와 보티첼리의 그림이 걸려있고, 미켈란젤로의 엄청 거대한 눈부신 조각상이 길거리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고, 메디치의 집무실은 궁전 자체가 온통 르네상스 그림들로 벽화처럼 가득 차 있다고 말이다.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와 조르지오네와 리피와 틴토레토의 그림들이 어찌나 넘쳐나는지 일일이 다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이다. 그래서 재차 실제인가 확인을 해 보려 친척을 다시 보냈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함흥차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다. 도시가 온통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차고 넘치는 예술낙원인데 왜 돌아가고 싶었겠는가?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비록 프랑스 살롱전에서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자녀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였다(Nabuchodonosor fait tuer les enfants de
Sédécias sous les yeux de leur père)> 작품으로 당당하게 (Prix de Rome)를 받아서 로마에 도착한 파브르였지만, 그가 도착과 동시에 로마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가히 공포였다. 식당이나 여관 벽면에 아무렇게나 걸린 그림조차도 자신의 솜씨를 능가할 정도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그렸던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파브르는 죽어라 라파엘로를 찾아다녔다. 라파엘로에게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기꺼이 피렌체로 달려갔다.
라파엘로를 만나고 깨달은 결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각오뿐이었다.
파브르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살롱전에 출품학 위해서 밑그림으로 처음 스케치했던 ‘시드기아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어서 살롱전에 출품한 본 ‘시드기아 그림’을 떠올렸다. 너무나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벽면에 걸려있는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의자에 앉아있는 성모마리아(Madonna della saggiola)> 원본 그림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옆 이젤에는 그 그림을 보고 자신이 모사한 같은 그림이 놓여 있었다. 관리자가 탄성을 지르며 또 같다고 했지만........ 파브르 자신은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어딘가에 분명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파브르는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유명 그림을 죽어라 따라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후대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지 않았던가?
과거에 수많은 화가들이 하나의 기술 습득의 과정으로....... 스승이나 유명화가를 연구하는 방편으로 모사를 하고 나름 약간 변형시키는 것은 오늘날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할 수 있다. 모사한 작품을 활용해 영업활동(?)을 할 이유가 없었고, 다시말해 저작권 보호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그런 과정을 통해 훌륭한 화가로 성장했었으니까 말이다.
파브르는 살롱전에 대상을 받고 정식 화가가 된 이후에서 많은 모사를 계속했다. 파브르 미술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작품들을 곧 잘 만날 수 있다. 가만히 관심을 받고 비교하다보면........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더 강세를 보였고, 아주 가끔은 지극히 개인적 주관하에서...... 원작보다 낳은 리메이크 작품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적인 재미를 아주 간혹 실제 경험해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미술이나 조각이나 영화나 예술이란 것은....... 원작자가 추구하는 점과 모방하는 사람의 관점과 또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과 또 나의 주관적인 시선 사이에 분명히 어떤 갭(Gap)dl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마냥 파리유학을 즐기고 누려도 될것만 같았던 파브르에게 점차 암울한 악재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실 장학금
지원이 끊어진 것이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영국과 벌어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고, 결국 북쪽의 카나다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어서 영국 정부와 식민지 의용군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미국 독립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억한 마음에 프랑스가 어처구니없는 선택으로 신대륙 독립 의병대를 지원하는 웃기는 해프닝을 벌이게 된다. 싸웠던 지지고 볶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왕정국가였다. 신대륙의 독립의용대는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국 군대였다. 프랑스 왕정국가가 영국 왕정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란군(?)을 적극 지지하고 군대와 탄약을 마구 보내주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지원 때문에 프랑스 왕정의 재정이 휘청거릴 만큼 이었다 하니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독립을 쟁취한 후에 미국 의용대 정부가 프랑스 왕정을 보은으로 지지해 줄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영국 왕정에 도전해 성공했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당연히 프랑스 왕정에도 도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거기다 국고가 바닥이 날 정도였다면 정말로 미쳐도 제대로 미친것이라 보아야 하겠다.
프랑스 전역에서 거세게 데모와 반란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는 외침이 군중이 원하는 전부였다. 하지만 부패하고 타락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은 왕실과 상류층은 군중들에게 내줄 빵이 절대 부족했고, 더하여는 있어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평민들보다, 최고급 살롱에서 영국산 티와 케이크로 브런치를 즐기는 귀족들만의 향락문화 생활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프랑스 정세는 혁명 전야가 도래한 것이다.
국가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으니 로마에 간 유학생들에 대한 지원도 끊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문에 들려오는 프랑스의 정정이 극도로 불안했으니 당장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프랑수아 파브르는 로마에 위치한 프랑스 장학생들의 숙소이자 학교인 프랑스 아카데미(만치니 궁전)에서 나와 피렌체로 거처를 옮겼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수많은 작품이 그곳에 있었을뿐더러 이제부터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자면 아무래도 로마보다 피렌체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당시 르네상스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신드롬이었다. 르네상스를 모르거나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결코 지식인이나 상류층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팬덤의 열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그 팬덤들이 하나 둘 이탈리아로 ‘르네상스 순례자 여행’을 떠나오기 시작했다. 이 여행은 곧 유럽 전체 상류층의 필수 불가결한 요식행위로 격상되었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고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최상층의 가문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자신 가문의 위상을 자랑하고 뽐내기 위해서, 명망 있는 학자나 예술가를 개인 가정교사로 들이고 그의 인솔하에 자녀들을 이탈리아로 언어연수(유학)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뽐내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으니 엄청 비싼 가정교사를 앞장세워야 했고, 오가는 교통편이나 체류하는 호텔이나 먹는 것이며 차림새 비용이며......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 무한정 들어가는 초호와 유람이었던 것이다. 그 유람의 화려함이나 사치의 정도에 따라 그를 떠나보낸 부모나 가문의 능력과 위세가 판가름 되었다. 한마디로 요즘 가끔 화제가 되는 중동 석유왕국의 부자 왕자들 해외 유랑이 딱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파브르가 피렌체에서 택한 새로운 직업이 바로 이런 초호화 유람단을 맞이해서 안내하는 안내자(Guide)였다.
이렇게 찾아온 유람단의 경우 짧게는 서너달에서 일년, 길게는 삼사년씩 피렌체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성당을 가고, 또 하루는 인근 시골을 산책하고, 하루는 보티첼리를 만나고 다빈치를 만나고 미켈란젤로를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발이 부르트고 학문을 연구하듯이 그렇게 파고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요식행위로 적어도 피렌체에 장기체류하면서 르네상스의 명사들을 두루두루 찾아보았다는 경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 실제적으로는 그런 문화재 탐방도 잠시뿐이었고,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부류들끼리 모여서 술 파티를 벌이고 춤을 추고 노는 게 전부였다.
파브르 같은 사람에겐 이 보다 더 좋은 직업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여유롭고 돈벌이에도 썩 좋은 아주 휼륭한 직업이었다.
그 환상의 직업에 푹 빠져서 삶을 즐기고 있을적에, 파브르는 또 하나의 기가막힌 돈벌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여 파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주 심각한 범죄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저작권 시비가 생겨나기 전이었다. 머리에 든 것은 없고 가진 거라곤 돈이 전부인 골 빈 한량들이 유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저마다 서너 개씩 기념품을 가지고 가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요즘이야 인증샷이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유학 졸업장이 피렌체나 로마에 있는 유명 화가의 작품 모사품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비록 모사품이긴 했지만 모사하는 사람과 흥정의 정도에 따라 실로 엄청난 금액에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브르의 경우 가이드를 병행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프랑스 아카데미 살롱전에 대상을 수상한 국제적인 화가 라이센스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파브르는 시간만 나면 유명화가의 그림을 모사하는 새로운 직업인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라파엘로의 그림 경우에는 또같은 그림을 여러점 그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언젠가 불쑥 라파엘로가 그린 <의자에 앉은 성모마리아>는 피티 궁전에 있는 한 점뿐이겠지만, 프랑수아 파브르가 그린 <의자에 앉은 성모마리아> 작품은 현재 파브르 미술관에 전시된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도 튀어나올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유럽의 도깨비 시장을 다니게 되면 주의깊게 잘 살펴보기로 하자. 리파엘로의 원작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파브르의 작품들도 웬만큼 돈을 받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파브르 미술관에 가져가면 아마도 꼭 사지 않을까?
만약에 영국인 원정단 둘에 스페인 원정단 하나쯤을 맡아서 프렌체의 르네상스를 안내한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는 일 년짜리고 둘이 육 개월짜리 연수라고 가정 해보자.
월 수는 영국A, 화 금은 영국b, 목 토는 독일이다. 주일은 쉬어야 하니까. 전날 술이 덜 깨서 휴업이고 두오모 돔에 올라갔다 와서 힘들어 휴업하고, 토스카나 와인 체험하느라 반나절 투어하고, 마사초 그림 두 점 보고 쉬고 보티첼리 <비너스 탄생> 보고 나서 또 쉬고(가슴에 담아야 하니까), 학습 비용에 식사비 포함이고, 저녁마다 파티 초대받아 다니고, 수시로 그림 설명 잘 해주면 모사해 달라고 주문 들어오고, 거기다가 그 멍충이가 고향에 편지를 보내 또 가까운 친구나 지인 중에 또 새로운 호구를 스스로 물어다 바쳐주기까지 한다.
뭘 더 바라겠는가? 프랑스에서 유학 지원금이 끊어지고 나서 파브르는 훨씬 풍요해졌고 살기 좋아졌다, 피렌체가 천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몽펠리에니 파리니 기억속에서 저만치 멀어져 있을 뿐이었다.
돈이 쌓여가고 시간은 남아돌고 주변에서 점점 파브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던 어느 시점에서 그에게 전혀 새로운 아주 재미있는 세계가 불쑥 나타났다.(아마도, 오늘날로 치자면, 어느 정도 살만해 지고 나서 어느 날 골프의 재미에 푹 빠진 느낌이랄까?)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18세기는 가히 혁명의 시대라 하겠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근대적 시민혁명의 탄생을 흔히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신대륙에서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탄생의 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으로도 대영제국에 무장봉기한 신대륙 의용군의 궐기가 당연히 앞섰으며, 혁명의 발단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또한 신대륙의 시민들이 가장 먼저였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은 전체적 그림을 펼쳐놓고 보자면 거창하게 포장된 겉 포장지는 민주혁명이지만 실질적 내용물은 여전히 봉건주의 간의 마찰이나 분쟁이었을 뿐이다. 너무나 뻔한 스토리를 프랑스의 화가. 소설가,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스타일로 거창하고도 그럴싸하게 호사가들의 입맛에 맞으면서도 한 편의 뮤지컬 같은 감동적인 대서사시로 각색을 하고 꾸며서 역사의 무대에 올려놓았을 뿐이다.
아주아주 간단하게 요약본으로 설명을 하자면, 루이 16세의 폭정에 못 견딘 파리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민란이 발생한 것이다. 군대 역시도 봉급이 밀려있고 보급이 최악이어서 나 몰라라 방관했다. 경찰은 있으나 마다 오히려 삥땅이나 뜯으며 소요와 분쟁을 반겼다. 성난 민중이 몽둥이와 낫과 괭이를 들고 궁전으로 쳐들어 갔다. 왕이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왔다. 왕비가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나갔고 좀 시간 차이를 두고 왕까지 죽여버렸다. 무주공산이 된 프랑스를 누군가는 추스르고 수습을 해서 빵을 나누어 주어야 했다. 성난 민중은 한마디로 무식했다. 배가 고파서 몽둥이 들고 뛰어나오기는 했지만, 다음에 무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인도자가 없었다. 지도자를 뽑았는데 역시나 그동안 권력의 그늘에서 슬쩍 밀려나기는 했지만 탐욕과 야망에 쪄든 무리들 뿐이었다. 독재를 막으려 세 명의 대표를 뽑았는데, 하나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나머지 둘이 권력다툼을 하다가 하나를 암살해 버렸다. 마지막 하나가 통치를 하겠나고 나서는데....... 얼마전에 좇아내서 죽여버린 왕(루이 16세) 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 하지 않은 폭정이 이어졌다.
도대체 민중 봉기를 왜 했던거야? 달라진게 뭐야? 앞날이 캄캄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고 빵은 어디에도 없는데.......
민중이 또 몽둥이와 삽을 들고 뛰쳐나왔다. 자기들이 뽑았던 하나 남은 통치자를 끌어다 감옥에 가두고 며칠 후에 죽여버렸다.
뭐를 어떻게 해야 세상이 나아지고 빵이 돌아올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죽여버린 루이 왕조가 더 나았던 것 아닐까?’여기 저기서 후회를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리에 봄)이 슬그머니 밀려왔다. 우리나라 공전의 히트 영화 (서울의 봄)에 나오는 ‘전두광’이 파리에 ‘나구광’으로 등장을 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무정부 상태를 만든 폭도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한 것이다. 총만 쏜 것이 아니라 난폭해진 민중을 향해 대포를 직접 조준해 발사했던 것이다. 경찰력과 군대의 능력과 영향력은 확실히 다르다. 수갑을 꺼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총부리를 직접 가슴에 들이대고 서툴면 그대로 발사해 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즉사요 개죽음이다. 여기저기서 이런 장면을 쉽게 목격하게 되는 마당에 누가 시위대가 되어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릴 것인가?
삽시간에 파리가 조용해 졌다. 약탈도 없어졌고 살인과 방화도 없어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시민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요와 암투뿐인 시민정부 보다는 차라리 군대의 강력한 통치가 더 좋아. 나폴레옹이 이제 빵 문제도 해결해 줄거야.’
이제 나폴레옹이 새로운 프랑스의 주인이 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왕조를 세우고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에 즉위하여 다시 봉건왕조가 또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게 전부다. 이게 프랑스 혁명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임꺽정’이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이었다 해도, 프랑스 혁명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랑스 혁명이 최초 민주주의 혁명이 되려면, 어찌되었건 힘들었어도 꾸준히 유지가 계속 되었어야 만 한다. 나폴레옹 왕조의 탄생을 위해 잠시 민란이 일어난 것이 (프랑스 소요)였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하지만 (미국 독립전쟁)은 그 내용과 질이 다르다.
영국 본토안에서 절대왕정의 통치를 거부하는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대자연과 맹수와 풍토병과 원주민(인디언) 싸우면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일구어 나갔다. 그들은 영국 시민이 아니라 개척지 신대륙 주민이 된 것이다. 아울러 이들 중 상당수가 영국의 종교인 성공회를 거부해 온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신대륙에서 나는 자원이 많은 것을 깨달은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가 신대륙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서 몰려왔고, 북아메리카를 두고 영원한 원수지간인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었다. 해군력은 영국이 강했지만 지상전에서는 프랑스가 오히려 막강했다. 프랑스가 우위를 점령하고 영국을 위협했다. 위기에 몰리자 영국군 지휘부는 신대륙에 정착해 있는 영국 이주민들을 찾아갔다. ‘우리가 남이가?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가 아닌가?’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고향사람들이 밀리며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서 주민 자치 방어조직이었던 ‘의용대’의 이름으로 영국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맹수들과 싸우느라 모두가 하나같이 특등 사수에다가 신대륙이라는 특수한 자연환경을 모두 능숙하게 이용하면서 군대의 길 안내를 도맡아서 해냈다. 전세는 역전되었고 프랑스는 북쪽의 카나다 퀘벡 지역으로 쫓겨 도망쳤다. 승리한 영국은 동쪽 해안에 처음으로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면서 명목상 처녀인 여왕의 이름을 따서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식민지 도시를 세웠다. 영국과 별개의 신대륙 자유민인 개척자들은 다시 숲속으로 자신의 개척지를 향해 떠났다. 이렇게 한동안은 신대륙 개척자들과 영국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냈다. 문제는 개척민들은 계속 꾸준히 농장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며 열심히 일해서 부를 늘려가는 마당에, 식민지에 파견 온 관리와 가족들은 심심하고 모든 게 부족하고 영국 본토에 비하자면 생활 전부가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본토로부터 보급과 재정마저 열악했다. 그러다 보니 영국 왕실에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들 생각에 ‘신대륙 개척민이라는 게 어차피 본토에서 도망 친 여왕 폐하의 백성이 아니겠는가? 여왕께서 지난날의 도망친 죄를 사하여 줄 터이니 다시 기쁘게 영국 백성임을 자각하고 열심히 세금을 바치도록 하라’고 여왕의 칙령을 발송한 것이다.
개척민들은 이를 당연하게 거부하였고, 영국은 군대를 앞세워 굴복을 강요했다.
개척민들은 배 한 척에 102명이 목숨을 걸고 험한 대서양을 건너와 맹수와 풍토병과 인디언과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개척한 자신들의 영토와 온전한 자유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웠으며 이제껏 지켜내고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여왕의 백성이 아니요. 우리는 신대륙의 개척민이며 자유인이요. 더 이상 복종을 강요한다면 전쟁을 불사하겠소.’ 라며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 시기의 개척민 지도자에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군대를 앞세워 무차별 진압에 들어갔다.
개척민들은 스스로 ‘신대륙 의용대’를 모집해 대영제국과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멜 깁슨 주연의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가 이 시기를 아주 상세하고도 세밀하게 잘 담아냈다.)
조지 워싱턴이 신대륙 의용대 총 사령관이 되어 독립전쟁을 벌여나갔다. 그러면서도 정말 대단한 것은(내가 미국 독립 전쟁을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가 되겠지만) 왕정 시대와 다른 민주 공화정부를 위한 국가 설립과 헌법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하나의 구호나 외침이 아니라 앞으로 이를 어떻게 성취해 나가야 하는지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 설립과 헌법의 제정과 공포를 위해서는 최고 지도자(대통령)를 선출해야만 하며, 이 모든 것은 선거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세계 최강의 대영제국 군대와 전쟁을 벌이는 다른 한 편으로 이들은 모든 전쟁터를 쫓아다니고 지나치는 후방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미국이라는 신대륙 국가의 탄생)과 (미국의 헌법)과 (민주주의 선거)에 대해서 교육하고 홍보했다. 더 나아가 (민주당과 공화당) 이라는 전시 정당을 설립했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조지 워싱턴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토마스 제퍼슨이 출마했다. 두 사람은 함께 말을 타고 강원도로 가서 전투중인 군사들을 찾아다니며 국가 건설의 필요성과 자신의 공약을 피력했다. 낮엔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고, 밤이면 두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투표를 했다. 열흘도 걸리고 한 달도 걸렸다. 강원도 주민과 주둔 군대의 숫자에 맞게 대의원 수를 여섯 명, 열 한 명으로 정하고, 투표에서 이기면 일단 그 지역(강원도)에 배분된 대의원 수를 싹쓸이 하기로 했다. 강원도가 끝나면 경상도로 함께 달려갔고, 다시 전라도로 함께 달려가 전쟁 중에 선거를 치루었다. 한 마디로 기적이라고 할 밖에........ 그래서 미국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유독 큰 것이다.
워싱턴과 제퍼슨은 당시 13개 주를 돌아다니며 1년이 넘게 걸려서 선거를 마쳤다. 워싱턴이 6개 주에서 승리를 했고, 제퍼슨이 7개 주에서 승리를 했지만, 주둔 중인 군인과 시민들의 숫자에 따른 대의원 수에서 워싱턴이 확보한 대의원의 숫자가 제퍼슨의 대의원 숫자를 능가했다. 이미 약속한 바에 의해서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들은 다시 날짜를 잡고 전보를 보내 정해진 날짜에 다수당의 대의원들이 전투지를 벗어나 워싱턴에 모두 모여서 당선자를 추대하는 것으로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쟁은 끝이났고 약 2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득이 국가가 전쟁 중에 치러야만 했던 선거이기에 여러 가지 폐단과 불편함이 산재했지만, 미국은 지금도 그 선거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조상이 피와 땀과 민주주의에 대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갈망으로 이룩한 국가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사실...... 나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지금 행하고 있는 많은 역할에 상당히 거부감을 심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의 개척정신과 민주주의를 탄생시키고 정착시킨 업적에 대해서만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이렇게 파리에 폭동이 일어나 왕비를 단두대에 끌어다 목을 잘라버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동안 그런 왕실에 기대거나 빌붙어 권력을 누리며 호화롭고 방탕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 귀족들과 고위관리들과 부자들과 성직자들이었다. 세상은 태평성대로 이끌 때도 중심엔 왕과 추기경(종교 최고 지도자)가 있었고, 혼탁하고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도 같은 자리엔 언제나 왕과 추기경이 있었다. 이 두 권력의 주위로 귀족과 권력이나 부를 탐하는 자들이 에워싸고 온갖 음모와 패악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패거리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시대 흐름의 낌새를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고 눈치채는 재주가 있었다. 왕이 약하다 싶으면 교회(추기경)에게 달라붙고, 왕이 세다 싶으면 나 몰라라 추기경을 버리고 왕에게 달라붙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처럼 왕조나 국가 자체가 위기다 싶으면....... 잽싸게 보따리를 싸서 이웃 나라로 일단 피신하고 보는 게 이들의 습관이라면 몸에 밴 습관이었다.
중세 후기 이후로 최고의 도피처는 로마 아니면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이 최고였다. 왜냐하면 그동안 기대고 살았던 왕이나 추기경 보다 훨씬 높은 절대 지존이 살고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바티칸에 가면 이 세상을 초월하는 절대권력자 교황이 바로 그곳에 살고 있었고, 빈에 가면 교황에 맞서는 유일한 절대권력자로 신성로마제국 이후로 오랜 세월 모든 유럽의 왕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합스부르크 왕가의 절대권력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였다. 근자에 목이 잘려 죽은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모였다.
당시에는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르네상스에 목마른 예술가나 정치적 이유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장소는 일단 무조건 로마행이었다. 로마에 가면 일단 안전했다. 로마에 가면 차후에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천천히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파리에서 런던에서 암스텔담에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온갖 향락을 맘껏 누리며 살자면 항상 마주치는 게 왕족 귀족 추기경(고위층 종교지도자)였다. 허구한 날 파티고 포커고 승마고 누리면서 나름 각별하게 오고 가는 것이 넘쳐나던 시절이 아니었겠는가? 로마로 내빼고자 하는 귀족은 일단 추기경에서 선물 보따리 하나를 보내면서 로마에서 의탁할만한 실력자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동안의 친밀도에 따라서 기거이 추기경은 로마 주재의 다른 추기경이나 귀족 가문에게 추천장이나 소개장을 답례로 써준다. 로마에 도착해서 여장을 푸는 대로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다. 성대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말이다. 이제 그 추기경이나 귀족이 갓 망명 온 사람을 데리고 유럽의 상류층을 돌아다니면 소개를 시켜주는 것이다. 한 달쯤 지나면 그는 이제 로마나 비엔나를 포함한 전유럽의 상류층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파리보다도 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새로운 향락문화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언제고 다시 프랑스가 안정되면 되돌아가 다시 예전의 권세를 누릴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프랑스의 혁명과 혼란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수많은 귀족과 고위관리와 부자들이 로마로 도망쳐 왔다.
그런 사람들이 가져 온 것은 진한 향수와 보석과 금화와 화려한 의상만이 결코 아니었다.
자신들이 파리에서 오랫동안 누려왔던 아주 독특한 문화를 통째로 로마와 비엔타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바로 살롱문화였다.
망명자들은 로마나 비엔나의 상류층에 어필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 시키기 위해서 웅장한 궁전을 서슴치 않고 매입했다. 그리고는 그 궁전을 바로코풍의 초호화판으로 개조시켰다. 그 화려함이나 사치가 크면 클수록 능력 있는 귀족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정원을 조성하고 최고급 샹들리에를 매달고 최고 전망의 응접실에 최고급 가구를 배치하고 최고급 의상으로 꾸민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프랑스 파리 방식의 살롱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궁전의 어느 왕족들 못지않은 화려하고 고급지며 성대한 자리가 벌어진 것이다. 최고 품질의 커피가 디저트와 함께 제공되거나 영국 귀족 부인들의 전용인 홍차에 케잌이 추가된 브런치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귀족에게 초대되어 살롱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시며 단테를 이야기하고 르네상스 미술품을 관람하는 것이 최상류층의 최고급 문화가 되었던 것이다. 살롱의 등급에 르네상스 미술품의 수준이 크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엽이면 살롱은 상류층의 최고 향락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프랑스인들이 가는 곳마다 살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마침내 피렌체에도 살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프랑스에서 도망쳐 온 상류층 사람들과 영국에서 온 귀족 유학생들과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각지에서 온 귀족과 부자들이었다. 여기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시인과 화가와 조각가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주로 참석하는 부류로 정례화까지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살롱에 마침내 프랑수아 파브르가 참석하게 된 것이다.
몽펠리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미술전에 출품하여 상을 타고 로마까지 유학을 오게 되었지만 이제까지 그의 처지에 상류층 사람들의 전유물인 살롱에 출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해 본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독립하여 피렌체에서 나름 인정받는 화가로 피렌체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기도 했고, 유럽의 내놓으라 하는 가문들에게 일류 가이드이자 스승으로 대접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동안 짭짤하게 벌어들인 재산도 어느 정도 쌓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학생 귀족을 따라나섰던 길에 살롱을 찾았던 것이다. 화가 이력에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었고 타고난 언변에 말끔한 인상은 그를 하루아침에 살롱의 중심에 서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거기다 애초 살롱이 프랑스 문화였던 만큼 그에게는 고향 같지 않았겠는가? 파브르는 살롱에 푹 빠져 살았다.
프랑수아 파브르(François-Xavier Fabre)는 피렌체에 새롭게 등장한 프랑스 살롱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올버니 백작부인이라는 귀족 여성이 이 살롱의 주인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파리와 로마와 비엔나 살롱의 유명인사로 피렌체에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스스로 아예 자신의 스타일대로 살롱을 연 것이다. 올버니 백작부인에 대해서는 이미 상류층 전용의 살롱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 활약(?)과 루머로 너무나 유명해진 여성이었다. 왕족이면서 엄청난 부자라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더하여 당시 시대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남성편력의 대명사라는 묘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어찌되었건 파브르가 이 살롱을 죽어라 드나들었다는 사실에는....... 적지 않게, 살롱 마담에게 호감을 느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그림의 떡이었다.
왜 불가능했을까? 그것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시기에 프랑수아 파브르는 이 살롱에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는 지인 비토리오 알피에리(Vittorio Alfieri)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알피에리를 파브르의 친구나 지인으로 부르게 되지만, 조금만 솔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알피에리가 젊고 패기에 찬 전도유망해 보이는 파브르를 거두어 보살펴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단 알피에리가 파브르보다 열일곱 살이나 위였다. 삼촌이나 고모부였던 것이다. 거기다 알피에리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 남쪽의 토리노를 기반으로 하는 피에몬테라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공식 직함이 ‘비토리오 아메데오 알피에리 백작’으로 명망이 있고 엄청난 부를 소유한 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로마나 피렌체에 주로 머물면서 명사들과 교류하기를 즐기는 이탈리아 극작가이자 철학자이며 시인으로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알피에리가 파브르를 보는 시선은 ‘활기차고 자신과는 다른 일면을 가지고 있는 젊은 화가’가 아니었을까?
이 후로의 모든 스토리는 파브르와 올버니 백작부인과 알피에리의 세 사람이 서로 얽히며 풀어나가게 된다. 그럼 이들이 삼각관계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전혀 아니냐? 글쎄, 또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 세 사람 간에 있었던 잔잔한 이야기가 바로 지금의 파브르 미술관이 되었고, 이 신기하고도 또 미묘한 꿈같은 이야기가 미술관 곳곳에 녹아들어 스며있다고 해야겠다.
올버니 백작부인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올버니 백작부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21세기에 사는 나로서도 쉽지 않은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18 세기를 살았던 당시의 그녀가 가진 가치관과 활동이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올버니 백작부인과 알피에리를 빼버리면 파브르 미술관은 절대로 세워질 수가 없게 된다.
다음 이야기에서.........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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