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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내 인생 최고의 화창한 오월 어느 봄날에 부쳐...... (태리야! 황매산 갈까?)

by 피안재 2024. 5. 6.

 

 

 

‘아덜. 아빠가 부탁하고 싶은 게 생겼어.’

(아덜)은 내가 하나뿐인 아들에게 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는 내 나름의 애칭이다. 아마도 (아덜)하고 부르면 우리 아들은 일단 적지 않게 긴장부터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이자 철부지인 아빠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빠는 철부지 개구쟁이로 통하고, 아들은 애늙은이로 통한다. 지금도 만나고 헤어질 때 아빠와 아들은 포옹을 하고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는 행사를 예외 없이 반복하는 사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이놈이 분명 아직 내 아들이구나’하는 안도감에 큰 위로가 된다. 39살에다가 예쁜 아내가 있고 더 예쁜 병아리를 두 마리나 기르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나에 대한 호칭은 (아빠)다. 언젠가는 바뀌겠지 하다가도, 어느 날 정말로 달리 부르면 얼마나 징그러울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아빠. 무슨 사고 났어?’라는 녀석의 반문은 곧 ‘아빠. 또 무슨 사고 친 거야?’라고 해석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사고는 무슨? 엄마 아빠는 아무 일 없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니?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고.’

‘비밀? 아무래도 무슨 일 생겼구나?’

‘아니라니까? 내가 이래봬도 태리 할아버지야. 태리 이름 걸고 아무 일 없어.’

‘그럼 다행이네. 말씀해 보세요. 편하게.’

‘내가 말이야. 만약에......... 내가 애들이 학교 가야하는 날에 어디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경은이가 허락해 줄까?’

‘아빠. 지금 내 생각을 묻는 거야? 아니면 경은이(우리 하나뿐인 소중한 며느리이자 딸) 생각을 묻는 거야?’

‘임마. 병아리들이 너희 자식이니까 당연히 너희 둘에게 물어보는 거지? 아덜. 어떨 것 같아?’

‘글쎄....... 나야 별 상관이 없겠지만........ 애들 교육은 주로 경은이가 하는데....... 학교 가는 날 데려간다고 하면........ 한 번 물어는 볼께. 근데 도대체 무슨 일 인데요?’(이넘이. 아빠하고 둘이 있으면 존칭이 절반은 그냥 어디로 날려버린다)

‘엄마 아빠 4월 스케줄이 많이 바빠서 나들이를 통 못했잖아. 그래서 내가 맘대로 몇 군데 캠핑장을 알아보다가 황매산을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예약을 하려는데, 최고 성수기인 철쭉제 시즌이라서 주말은 안 되고 겨우 평일에 얻었거든. 그냥 시간이 되면 다녀오겠다고 예약을 했는데....... 우리 병아리들이 너무 보고 싶은 거야. 평일이라서 당연히 안 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한 번 물어는 보고 싶어져서 너한테 부탁해 보는 거야.’

‘엄마는 뭐라 하시는데요?’

‘엄마는 아직 예약 자체를 몰라.’

‘왜?’

‘임마. 네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개근한 마당에...... 멀쩡히 학교가야 하는 애들을 데리고 어디를 간다고 하면 엄마가 순순히 허락해 줄 것 같니?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당장 몽둥이 들고 덤벼들걸?’

‘그렇기는 하지? 그럼 파토네. 어차피 엄마가 동의 안 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지? 어떻게 엄마 동의를 얻었다고 해도 마지막에 경은이가 안된다고 하면 그땐 또 어떻게 해?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 가문의 최고 실세인 시며느님에게 할애비가 먼저 읖조리며 선처를 구해보는거지. 다 네가 중간에서 하기 나름 아닐까?’

‘그러니까. 경은이 동의를 받아도 엄마 허락이 문제고, 엄마가 동의해도 며느리가 태리 세리 안 내놓을까봐 아빠가 걱정하는 거네. 경은이는 내가 물어보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먼저가 아닐까?’

‘아니여. 아빠 생각에 모든 성패는 경은이 손에 달려있어. 틀림없어. 아덜. 아빠 마음 알지? 어떻게 부탁 좀 하자.’

‘당연히 알지. 아빠인데....... 경은이에게 물어는 볼게. 조금 있다가 점심시간에요.’

‘아덜. 부탁한다.’

‘그런데 아빠. 이렇게 되니까 생각할수록 신기하네? 어제 태리 데리고 애버랜드 갔거든요? 그런데 잘 놀다말고 갑자기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냥 갑자기.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또 아빠가 나타나시네?’

‘그랬어? 태리가 할아버지 보고 싶대? ㅋㅋㅋㅋㅋㅋㅋ 이래서 핏줄이 땡긴다고 하는 거여. 임마. 너야말로 아빠가 갑자기 보고 싶은 적 있냐?’

‘그런건 됐구요. 알았어요.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무슨 놈의 점심시간이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원. 기다리다가 지쳐갈 무렵이 되어서 아들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아빠. 경은이에게 물어봤는데...... 무단결석은 안 되겠고. 결석 처리가 안 되는 가정학습이 있는데 그것은 15일 전에 학부모가 서면으로 학교에 미리 신청을 해야만 된대요. 그런 계획을 가지게 되시면 미리 말씀을 해 주시래요. 황매산이라니까 좀 멀기는 하지만 경은이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라네요. 애들은 다음에 데려가시면 되니까 이번엔 엄마랑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딱 내가 예상하고 미리 각오한 우리 시며느리님 대답이었다. 역시나 올곧고 슬기롭고 현명하면서도 당찬 우리 신세대 무결점 며느리답다. 사실 매사에 엄마는 은근히 아들 편으로 기울지만, 나는 죽어도 거의 완전빵 며느리를 지지하는 시아버지다. 내가 쫄딱 망했어도 가문의 실권만은 놓지 않았는데, 아들이 결혼하는 순간 아들에게 훌쩍 넘겨 버렸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이 실권이 며느리 손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이런 며느리 가진 사람 어디 나와 봐!

접수. 수긍. 인정.

‘아빠. 다음부터는 아무 때고 미리만 말씀해 주시래요. 그리고 아참........ 애들이 5월 1.2.3일은 학교를 가지 않는대요. 가정주간이라나 뭐라나...... 그때라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경은이가 말씀 드려 보라고.’

‘그래? 1.2.3일은 학교 가지 않는다고? 오 마이 갓!!!!!! 아빠가 예약해 둔 날짜가 2일이야? 그러니까 1박 2일로 2일.3일을 원했던 거지. 그럼 캠핑 가도되는 거네?’

‘정말이야? 그럼 다행이지. 잠간만 아빠. 다시 물어볼게.’

이럴 수가....... 이거야 뭔가 일이 내 바람대로 술술 풀려가는 게 아닌가? 풀려도 너무 잘 풀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남은 것은 할망구 재가가 문제인데? 벌써 나의 뇌리는 다음 문제 해결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경은이가 아빠 계획에 대찬성하고 나섰어. 우리가 1일 날이 노동절이라 쉬니까 아예 점심때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갈게. 옷가지만 챙겨서. 그럼 아빠가 생각했던 대로 다 되는 거지? 애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대.’

‘아덜. 아빠가 경은이에게 무척 고마워한다고 전해 줘. 사실 무리한 부탁이라 엄청 마음 졸이고 있었거든.’

‘마음 졸일 게 뭐있어 아빠. 다 아빠 며느리고 손녀들인데.’

‘그래도 그건 아니야. 엄연한 너희들만의 특별한 영역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건 아주 중요한 거야. 엄마나 아빠도 간섭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되는....... 그런걸 알면서 병아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뻔히 알면서 아빠가 너에게 부탁을 해 본거야. 경은이가 이해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게 오해가 되면 서로 엄청 불편해 지거든.’

‘경은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제 더 필요한 게 있나?’

‘있지. 산을 하나 넘었으니 아직 산이 하나 남아있는 거지.’

‘아! 엄마가 남았구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네가 해 줘야지. 엄마에게 특효약발이 너밖에 더 있니? 네가 얼마 전에 아빠 생각을 전해 듣고 동의를 해서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엄마를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지. 또 애들 학교 얘기 나오고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하면...... 경은이도 동의했다고 핵폭탄을 팡 터트려 주어야지. 그러면 엄마도 항복할거야. 그 다음이야...... 아빠가 엄마만 빼놓고 아예 작심해서 아들 며느리를 홀라당 꼬득여 놓고 이제 와서 최후통첩을 한다고 방방 뜨겠지만....... 경은이까지 이미 동의 했다고 하면........ 엄마는 자동 따라 나오게 되어 있어. 그 다음은 엄마가 다 알아서 챙기게 되어 있어. 안 봐도 그냥 파노라마야. 40년을 살았는데 그것 모르겠니?’

현실적으로 어쩔거여? 아빠와 아들이 이미 은밀하게 내통했는데..... 자칫하면 귀한 아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일텐데....... 더 나가면 며느리가 지원군으로 나설텐데....... 할머니가 시방 더 이상 어쩔거여?

‘알았어요. 좀 있다가 제가 엄마한테 전화 할게요. 1일에 봐요. 애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기대돼요.’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아들이 이미 전화는 했을 테고, 이제 모든 정황을 마눌님이 꿰뚫고 계실 테고...... 이제껏 그런 일은 없었지만...... 문이 안 열린 다던가, 집이 텅 비어있다거나, 아예 문 밖에 나와서 몽둥이 들고 서있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떨리기 시작한다.

다행이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집에 들어갔는데 도통 말이 없다.(어쩌지?)

씻고 밥상 앞에 마주 앉았는데 그때까지도 도통 아무런 말이 없다.(이거 문제가 커졌나?)

맥주 컵이 두 개 밥상에 올라와 있다. 이건 술을 마시겠다는 뜻인데? 냉장고에서 술까지 꺼내 온다.

'실컷 마셔! 잔머리 굴리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이젠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아주 작당을 해요. 작당을.’

‘작당이라니? 죽어도 엄마편이 뻔한 놈을 데리고 내가 무슨 작당을 해? 그놈이 어디 엄마 빼놓고 아빠 말을 들을 놈이여?’

‘옛날엔 그랬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슬 아빠 편을 드는 느낌이 든단 말이여.’(허허허. 이 말엔 혼나고 있으면서도 왜 기분이 슬쩍 좋아지지? 거 참.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아들이 도대체 뭐라 그랬는데?’

‘애들이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기가 막히게 어떻게 아시고 같이 캠핑가자고 했다면서?’

‘할머니도 애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는데, 할머니만가 나서 준다면 애들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한 거지. 할머니가 빠졌네. 당신은 애들 보고 싶지 않아?’

‘누가 보고 싶지 않대?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사전에 한 마디 상의도 없었고, 만약에 그랬다 쳐도 경은이가 썩 내켜하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하냐고? 왜 서로 불편하게 만들어?’

‘경은이도 좋대. 그럼 됐잖아.’

‘되긴 뭐가 돼? 그럼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며느리가 무작정 안 된다고 하겠어? 우리 경은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애 아니야? 경우 분명하고 또렷또렷한 애라고? 경은이가 우리 애들 어떻게 기르려는지 알면서 할아버지가 돼서 그게 뭐니? 기다렸다가 방학 때 가면 되지? 할머니는 그럼 폼이니? 나라고 애들하고 여행가고 싶지 않겠어?’

술을 연거푸 들이켜 본다.

아들하고 작전상으로는 분명 완벽했고 술술 풀려갈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건 숫제 저항을 넘어 반격을 해오지 않는가? 아들 말로는 엄마랑 통화가 잘 되었다고 했는데...... 지금 펼쳐지는 상황으로는 아들에게 말로는 좋다고 해 놓았지만........ 아직 승낙이 떨어진 것은 아니란 말이 아닌가? 대. 략. 난. 감. 이. 제. 어. 쩌. 지.

가만히 보아하니 이거 쉽사리 그냥 넘어갈 기세가 아닌 게 분명한데.......

<<모야.모야>>

반가운 카카오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 마이. 갓.

마눌님 핸디폰에서 요 벨소리가 나오는 경우는 딱 세 가지 뿐이다. 하나는 아들, 두 번째는 경은이. 세 번째는 손녀 태리.

화면을 검색한 마눌님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간다. (그래. 경은아.)라고 급격하게 낮아지고 차분한 음성으로 며느리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다. 며느리 전화다. 이 순간에 걸려온 생명의 전화가 아니겠는가? 오!!! 주여!!!!!!

아이고야. 통화는 길게 하는 거 아니라면서 며느리랑 통화하면 엄청 길어진다. 하지만 지금 당면한 상황에선 좀 길게 하면 어때? 경은이가 할머니를 좀 수그러지게 만들어줬으면 좋으련만....... 대충 한 이십 분 만에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눈치를 볼 밖에........

‘경은이가 뭐라는데?’

‘뭘 뭐래? (어머님. 태리 세리 둘을 감당하시겠어요? 애들이 너무 좋대요. 할아버지 할머니 얼른 보고 싶대요. 고맙습니다. 어머님.) 그러지.’ 하면서 며느리 성대묘사에 흉내까지 낸다.

‘그래서 뭐랬는데?’

‘뭘 뭐래? 할아버지가 애들하고 캠핑하는 게 버킷리스트였다니 이번에 도와줄 수밖에 없지 않겠니 했지. 하여간 우리 경은이가 여시여. 여시. 시에미를 들었다 놨다 꼼짝달싹할 틈을 안줘요. 틈을. 어머님. 우리 어머님 하면서.......’

‘그건 맞아. 여우여 여우. 꼬리가 한 여덟은 달린 여우여. 맞아.’

‘내가 그런다고 당신까지 그러지 마. 경은이가 어때서? 어디 가서 다른 집 애들 봐봐. 그만한 애가 있나? 나는 그런 다 쳐도 당신까지 경은이 폄하하지 마. 그런 며느리 없어. 딱 뿌러 지고 똑 소리 나는 애야.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며느리이기도 해. 세상에..... 경은이가 여우는 맞아. 저렇게 할머니를 순식간에 완전히 홀려 놓고 말았으니........’

‘하지 말래니까? 남이 우리 며느리 흉보는 것 같아서 싫어. 당신은 좋겠다. 이번 일로 며느리 점수 팍 팍 따서........’

‘그래? 뭐라는데?’

‘아버님. 고맙습니다. 애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많이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해요. 자주 여행 데려가 주세요 하지. 하여간 여우여 여우.......’

‘이쁜 여우지 뭐.’

‘이쁘긴 개뿔.......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시에미를 몰아세우질 않나? 도통 시에미를 어려워 할 줄을 몰러. 그건 그렇다쳐도 암튼 난 몰러. 아들 며느리까지 나서니까 못이기는 척 대답하기는 했지만...... 몰러. 가만히 따라가 주기는 할 테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해. 난 몰러. 알았지? 따라만 가 줄 거여.’

‘알았어. 땡큐.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알았어.’(휴! 고비는 다 넘겼다)

‘개뿔. 알아서 하기는........ 두고 볼 거여.’

5월 1일 아침. 우리 공주님들이 캠핑을 가기 위해 집으로 오는 날이다.

서둘러 사무실 창고로 향한다. 차에 실린 연장들을 내리고 창고에서 캠핑 장비를 꺼내 실어야 한다. 나름 장비 손질을 평소에 해 놓는 편이라 꺼내서 싣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 밤에 할망구께서 하달하신 새로운 명령이 문제꺼리다. 계절도 바뀌고 해서 미니멀까지는 아니라도 가벼운 장비로 챙겨서 비교적 단출하게 다녀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난 안가. 못가. 이게 어디 단순하고 쉽게 우리끼리 가는 캠핑이니? 우리 제일 귀한 보물덩어리들하고 가는 첫 캠핑이라고. 좀 힘들고 번거로워도 할아버지가 다 감수해야 하는 거야. 할 수 있다며? 첫 캠핑 잘못하면 평생 다시는 애들 데리고 못 가게 될지도 몰라. 텐트는 제일 큰 거. 바람 안 들어오고 벌레 못 들어오고 아이들이 안에서 어느 정도 뛰놀 수 있는 거. 그 제일 무거운 몽고텐트 그거. 러그는 다 가지고 가. 에어침대 가지고 가면 애들이 올라가 뛰다가 다칠 수 있고 자다가 떨어질 테니 빼고, 대신 바닥을 충분하게 깔아야 돼. 테이블은 데크가 있다고 했으니까 데크 위에 낮은 테이블이랑 거실형 테이블이랑 다 가지고 가고, 의자는 당연히 어린이용 어른용 4개 실어야 하고, 화롯대는 불티 조심하게 작은 거로 하고, 장작은 확실하게 마른 것이어야 하고, 조명은 애들이 깨서 다칠 수 있으니 유리는 빼고 단순한 것으로 챙기고, 그리들은 뚜껑 없이 하고........’

하이고야!!!!

이게 아니었는데, 마지못해 따라만 나서겠다더니......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이거 내 생애 최고 난코스 캠핑을 경험하게 생겼다.

어쨌거나 장비를 챙기고 집에 돌아왔더니만....... 떡하니 영수증을 내민다. 이십 칠 만원이 찍혀있다. 결재 청구서란다.

거실이며 부엌이며 식탁이며....... 세상에 뭘 이렇게 많이 샀냐? 잔치 하냐? 태리 시집 보낼껴? 그건 아들 몫이지?

내숭만 떨던 할망구....... 큰 손녀 좋아하는 메뉴판대로 준비, 작은 손녀 취향에 맞춰 또 별도의 장보기........ 유별나리만큼 온갖 과일을 좋아하는 작은 손녀 세리를 위해 사과. 토마토. 파인애플. 오렌지. 포도. 불루베리까지....... 야! 이걸 애가 하루 먹을 치라고? 넷이서 삼일은 충분히 먹겠다. 골라 담는 빵도 두 통이나 되고 먼 애들 음료수가 이리 가지가지야? 과자 사탕이 시장 가방으로 하나....... 헐. 어디 한 달 살기 가냐?

암튼 오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주님들이 집에 왔다.

외식하고 키즈 카페 가고..... 저녁에 과감하게 엄마 아빠를 지덜 집으로 쫓아 보냈다.

비로소 우리 병아리들이 온전히 할아버지 할머니 몫으로 남았다.

이불 죄 꺼내다가 대충 거실에 길게 펴고 함께 뒹굴다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함께 다시 짐을 챙겨서 차로 날라서 싣고 드디어 힘차게 출발을 한다.

‘태리야. 우리 황매산으로 캠핑 갈까?’

브라이튼 12.3(태리꺼). 지니 쉘터 허브 돔(할머니꺼). 나르시스 돔(세리꺼). 이것이 우리집 최근 애용 캠핑 3총사.

 

 

캠핑장에 캠퍼들이 모이면 어디에서나 항상 ‘캠핑 사이트 구축’이나 ‘캠핑 장비 자랑’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개미지옥)으로 빠지는 헤어날 수 없는 치명적 함정으로 연결된다. 빠짐에서 헤쳐 나옴 까지 대략 약 6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들 한다. 그 정도에 따라 즐거운 여가선용이어야 할 캠핑이 패가망신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하니 나름 각별히 조심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내게는 제법 많은 캠핑 장비가 있다. 아마도, 캠핑카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는 게 없다고나 할까? 부족하다거나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는 된다. 다만, 남들 앞에서 자랑하거나 내세울만한 명품 장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거나 보편적이거나 허름한 것들이다. 내게 허락된 수준 정도라고 밖에.......

요즘 가장 아끼고 즐겁게 사용하는 장비는 대충 3가지라 하겠다.

큰손녀 태리 몫으로 장만한 것이 네이처하이크 브라이튼 12,3 텐트다. 엄청 무겁고 부피가 크고 설치하려면 팩을 수도 없이 박아야 해서 망치질에 자동 도사가 된다는 단점 빼고는 딱히 더 흠을 잡을 것이 없는 최고의 텐트라 생각한다. 동계 캠핑엔 가히 최고이지 싶다. 가을과 겨울용으로 주로 사용한다.

노스피크 나르시스 돔은 작은 손녀 세리 몫이다. 일단 앙증맞은 자태로 무척 예쁘다. 웬만한 데크에는 날렵하게 올라가 앉는다. 여름에서 선선한 계절까지는 딱 이다. 둘 다 티피텐트(면)라서 사용하는 감촉이 남다르고 쾌적하다. 다만 우천에 캠핑을 하게 된다면 사용 후 정리에 특별히 신경을 써 주어야 한다.

세 번 째는 네이처하이크의 지니 쉘터 타프 허브 돔이다. 개량형 타프의 일종으로 이것은 특별히 세리할머니(챠밍여사) 몫이다. 이번 손녀들과 함께하는 캠핑의 수고에 대한 선물이다. 우연히 인터넷 서치를 하다가 눈에 띄었을 때, 더는 따지고 검색하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딱 우리 마눌님 취향이다. 해외 직송을 언제 기다리고 있겠는가? 더도 덜도 말고 번개같이 싸이트 사방을 뒤져서 기어코 찾아냈다. 치열하게 밀당을 한 끝에 썩 만족서러운 가격에 중고거래를 통해 여행 출발 전에 도착하게끔 구입을 했다. 거의 완전 새거나 진배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세리 할머니가 이만저만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완전 성공!!!! 앞으로는 당분간 이 삼총사 아이템으로 캠핑을 즐기게 될 것 같다.

하여 오늘은 브라이튼12.3에다가 허브 돔 타프다. 다음번에는 팩을 박을 때 간격 조절을 통해 완벽하게 조인트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허브 돔 타프가 가진 비밀 무기가 있다. 어느 캠핑장을 가던 하나의 싸이트에는 하나의 텐트가 기본이다. 타프는 자유지만 두 개의 텐트 설치를 허락하는 곳은 거의 없다. 허브 돔은 분명 옆구리가 시원하게 열린 타프다. 브라이튼 12.3이나 나르시스 돔에 조인트 타프로 사용하거나 약간 간격을 두고 설치하는데....... 내부의 적재 공간이 커서, 그곳에 비박용 텐트 하나가 날름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는 사실이다. 부득이 손님이 생기면 텐트 타프 설치하고 놀다가, 잠 잘때만 비박용을 펼쳐 타프 안에 감추고 잠을 잔 뒤에 새벽에 감쪽같이 거두면 끝인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황매산 캠핑장에 텐트와 타프를 조인트 비슷하게 설치하고 나니 챠밍여사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무적정 사고 보기를 너무나 잘 한 것 같다. 맘에 쏙 든다.

 

충주에서 황매산 오토캠핑장까지는 225km로 2시간 50분 정도가 예상 소요시간이다. 그런데 어린 공주님들을 모시고 가는데다가 각별히 운전조심 하겠다고 아들에게 약속까지 한 처지라서 평소처럼 달릴 수도 없다. 거기다가 9살 태리야 별로 문제가 안 되겠지만 5살 세리에겐 지루하고 아주아주 먼 거리일 수 있기 때문에 잠들기를 기다리던가, 아니면 자주 휴게소에 들리면서 분위기를 쇄신해 줄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어찌어찌해서 아주 다행스럽게 황매산 근처까지 간 것은 다행이었는데...... 입구를 한참 앞둔 지점에서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고 지레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앞쪽 행렬에서 이따금씩 산행을 포기하고 차를 돌리는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어쩌지? 여기까지 와서 돌리기도 그렇고...... 아이들 지쳐가는 것을 모른 체하고 할아버지 욕심만 부릴 수도 없고........ 이거 정말 심각하네 하는데....... ‘할아버지. 우리 여기서 내려서 길 따라 걸어가다가 할아버지가 다가오면 다시 타면 안 되나요?’라고 태리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핵심인 작은 손녀를 보니 따라 내리겠다고 한다. 할머니랑 아이들이 내려서 뙤약볕 아래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량 행렬은 굼벵이처럼 움직이기는 움직였다. 20분 정도 지나서 손녀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우리 삼거리 검문소 나무그늘 의자에 앉아 쉬고 있어요. 천천히 조심해서 오세요. 여기 와서 보니까 계속 들여보내 주기는 하는데, 할아버지 줄에서 내려오는 차들이랑, 반대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들을 나누어 교대로 올려 보내느라 밀리고 있어요. 걱정 말고 천천히 오세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하는 게 아닌가?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걱정할까봐 오히려 위로를 보내준다.

한참이 더 걸려서 입구에서 손녀들과 할머니를 다시 태웠다.

황매산 정상을 향해서 쭉쭉 잘 올라가더니만 글쎄....... 정상주차장 겸 캠핑장을 1km쯤 남겨놓은 지점 언덕길에서 또 다시 차가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자차장이 가득차서 빠져나가는 차량 수만큼만 앞에서부터 그만큼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캠핑장 예약이 되어 있었고, 우리 구역에 별도의 주차구역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캠핑장까지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는 것이다. 가장 문제는 도로변의 불법주차 차량이 문제였다. 길의 양쪽으로 불법주차를 해 둔 상황에 그 아주미세한 틈 사이로 겨우겨우 버스(대형차량)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헤치고 올라간다. ‘욕먹어도 싼 한국인들의 비도덕적 뻔뻔함’에 나도 욕설 하나를 보태본다. 손녀들 몰래........

1km 올라서는데 50분이나 걸렸다. 정말 신통하게도 우리 손녀들이 꿋꿋하게 견디어 주었다는 놀랍고도 참으로 감사한 사실이다.

황매산 오토 캠핑장 D-14 사이트에 무사히 도착했다.

텐트와 타프부터 치고, 살림살이를 텐트 안에 넣어두고, 데크에 돗자리를 깔아 휴식을 취하게 만들어주고 나머지 정리를 한다.

이 계절에 그 오기 힘들다는 ‘황매산 철쭉 축제마당’에 자리를 폈으니 서둘러 철쭉 군락지로 달려 올라가고픈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지금 내 본분은 어디까지나 (두 손녀의 할아버지)요 (안락하고 즐거운 소녀들의 캠핑을 위한 도구 내지는 머슴)이 아닌가?

‘할아버지. 놀이터 가고 싶어요.’

‘그래? 그럼 가야지. 당장 놀이터 가야지. 놀다가 돌아 올 때 축제장에 들려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을까?’

헐!!!!! 난 이렇게 산다. 난 손녀 바라보기 할아버지다.

 

 

 

 

흔히 여행이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남한)에서 철쭉이라 하면 소백산 정상과 지리산 바래봉과 황매산의 황매평전이 가히 으뜸이라 꼽으며 우리나라 3대 철쭉 군락지라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그런데 소백산(1.440m)이나 지리산 바래봉(1.167m)의 높이가 결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젊어서야 가장 단거리 코스인 단양 다리안 계곡을 타고 올라서 수도 없이 소백산을 헤집고 다녔지만(주목군락지 비박 멋짐) 나이를 슬그머니 먹고 난 후에는 급경사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하산길이 무리가 되어 결국 그 후로는 소백산을 올라보지 못했다. 그럼 이제 ‘봄날의 최고 축제’라고 하는 철쭉제를 이대로 포기 해야 만 하느냐?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아직 황매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황매산은 경남 산청군 차황면과 합천군 가회면과 대병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는 1.113m에 이른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계방산. 함백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나라(남한)의 산세로 보자면 중간 정도의 고만고만한 산이라고 할 만하다.

70.80년대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자 축산업이 미래 산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여기 황매산의 정상부근에 거대한 초지가 만들어지고 초대형 목장이 들어선 것이다. 황매산은 특이하게 해발 800m의 정상부근에 마치 평지를 방불케 하는 아주 드넓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습지처럼 여기저기 웅덩이에서 충분한 물이 솟아나고 있어서 목장을 만들기에 적격인 최고의 청정지역이었던 것이다. 국가 정책과 맞물려 실행되었기에 이 높은 산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뚫리고 전기 시설이 들어왔다. 매일 신선한 우유가 생산되어 국민 건강과 식생활 개선에 크게 기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90년 대에 들어서면서 절망적인 새로운 상황에 맞딱뜨리게 된 것이다.

새롭게 국가간 경제질서 측면에서 등장한 FTA 협약에 따라 농축산물 시장이 급격하게 개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유를 가공한 식품들이 해외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양한 먹거리가 연이어 쏟아져 들어오고 국민들의 입맛마저 변해가면서 축산업은 하루아침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거기다가 값싼 쇠고기 수입까지 벌어지고 나니 결국 국내의 축산업자들은 대부분 도산하고 말았다.

황매산 황매평전을 뛰놀며 풀을 뜯던 소와 양과 염소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봄이면 철쭉과 가을이면 억새밭이 덜렁 썰렁하게 남겨졌을 뿐이다. 소는 억새 뿌리만 남겨 놓은 채 모든 풀을 뜯어 먹지만, 염소란 녀석은 엉겅퀴나 찔레 같은 가시덤불에서부터 소나무 껍질까지 모두 벗겨 먹어치우는 무서운 먹성을 자랑한다. 염소를 키우는 곳에는 나무하나 풀뿌리 하나 제대로 남아나지를 않는데, 신기하게도 철쭉과 억새는 살아남는다고 한다. 억새는 뿌리의 질긴 생명력과 놀라운 번식력으로 살아남게 되고, 철쭉은 꽃과 잎새에 소나 양들이 먹으면 설사를 하게 만드는 아주 독특한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소나 양들이 철쭉만은 오히려 피해다닐 정도라고 한다. 하여 목장이 폐쇄된 이 너른 황매평전에 살아남은 철쭉이 봄이면 군락을 이루어 피고, 가을이면 억새가 군락을 이루어 온 산을 뒤덮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생겨난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등산인들을 통해서 점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등산이나 캠핑 등의 여가선용문화 개선과 인터넷을 통해 활발해진 SNS 영향 덕분이지 싶다. 그것이 미래형 먹거리를 고민하는 지자체에게 ‘황매산 철쭉제’를 상품화시켜서 지역 홍보와 수익 창출에 크게 기여하게 끔 만들어 준것이라 생각한다.

해발 800m의 황매평전에 아주 너른 주차장이 들어섰고,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황매산 제1 오토캠핑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오늘 이곳의 D구역 14번 사이트가 바로 내가 예약한 장소다.

등산이라는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펼쳐지는 철쭉군락지를 만나고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거기다가 소백산이나 비래봉과 비교하기는 좀 그렇겠지만, 가장 많은 사진작가들이 몰리고, 가장 많은 멋진 풍경의 사진들이 SNS 상에 떠다니는 명소 또한 바로 여기 황매산이다.

그러다보니 가장 큰 문제점은 차량혼잡이다. 서너군데의 주차장은 혼잡을 넘어 늘 만원이다. 오전 9시 이전에 이미 주차장은 가득 찬다고 한다. 거기다가 (정상 주차장 차박금지)가 시행 중 임에도 은하수와 새벽 일출을 보려는 차량들로 밤새도록 주차장은 만차 상황이다. 추위에 덜고 피로에 지친 여행자들이 일출을 마치고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하는 아침에서 오전 9시까지가 그나마 다소 운행이 원활하다고 이야기 들었다. 철쭉제 기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을 억새축제 때도 또 그렇다고 한다.

정상부근 능선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노라니, 황매산이 아름다운 것은 결코 봄의 철쭉이나 가을의 억새들이 만들어내는 빼어난 풍광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사방으로 뻗어내려 가는 산자락과 능선들마다 굽이치는 동선이 그지없이 아름다울뿐더러, 고고하게 휘어져 나온 소나무가 뿜어내는 멋스러움 사이로 기암괴석들이 마치 병풍을 드리우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수화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져진다. 누가 황매산이 ‘영남의 알프스’라고 했다더니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이번 첫 번째 황매산 방문이 결코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예쁜 손녀들을 동반하고 온 터라, 이대로 저 능선들이 하나하나 타고 넘어 볼 수는 없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적어도 2박 3일은 머물면서 황매산 정상과 저마다의 능선을 따라 개설된 등산로를 두세 개는 꼭 다녀보고 싶다. 가을에 꼭 다시 올까?

 

 

 

신통한 우리 소중한 병아리들.

먼 거리 여행인데 다가 막판에 차가 막혀 꼼짝달싹을 안 할 때도 투정 한번 없더니만, 심지어 스스로 차에서 내려 걸어 내려가 기다리면서 오히려 할아버지를 걱정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흙장난 했지, 저녁 먹고 장작불 피워놓고 마시멜로 구워 먹었지, 은하수 별자리 구경했지, 피곤하기 무척 피곤했나 보다. 엄마 아빠 한번 찾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랑만 놀다가 쉽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자다보면 위로 튀어 올라가 자는 작은 손녀의 잠버릇과 자다보면 무조건 이불을 발아래로 차버리는 큰 손녀의 잠버릇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쉽게 깊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게 어디 보불도 보통 보물들인가? 자칫 무슨 탈이라도 생기면 다신 병아리들과 이런 나들이가 물 건너가 버릴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말이다. 무조건 안전하게, 그리고 무조건 병아리들 기억에 남겨질 만큼 즐겁게........ ㅎㅎㅎㅎㅎ

연실 끌어내리고 이불 끌어올려 덮어주다 보니 어느새 새벽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처럼 새벽 일찍 몸을 세우고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 새벽 뉴스를 켜려고 하는 순간, 할머니가 ‘망설이지 말고 산책 갔다 와. 애들이야 일어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몰라서 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일출 보고와. 이따가 애들 데리고 올라가려면 어디가 좋은지 보아두고.’한다. 손녀들이 함께하는 여행이라 새벽 일출은 애초부터 생각지 않았고, 아침나절에 아이들이 올라갈 수 있는 만큼만 가서 황매산 철쭉제가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보여 주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할망구가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같아서 은근슬쩍 못 이기는 척하고 카메라만 챙겨서 살며시 텐트를 나왔다.

저만치 산자락에 붉은빛이 번져나가고 있다. 본격적인 새벽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산자락 능선 위로 향했다.

지난밤을 지켜주던 하현달이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는데, 뭐가 그리도 급한지 해가 저렇게 서둘러 올라오고 있다.

‘황매산의 일출’이 빼어난 절경이기는 하나, 결코 아무에게나 쉽게 그 빼어난 절경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우선 날씨가 쾌청해야만 하고, 또 그렇다고 해도 연무가 낮게 깔려 해를 가리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다고 들어왔었기 때문이려나?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기억은 없지만, 혹여 오늘이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특별한 날은 아닐까?’

 

---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황매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