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몽펠리에의 역사지구인 에쿠송(Ecusson)을 둘러보며 자유여행자의 특권을 맛껏 누려보기로 작정한 날이다.
'우리가 가진 것 이라고는 오로지 시간과 배짱뿐 아니겠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라는 우리나라 애국가 3절이 딱 어울리는 바로 그런 날씨였다. 사계절 내내 미세먼지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늘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파란 하늘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해? 저 파란 하늘....... 그 자체로만도 하나의 예술작품이야!’라고 아내가 탄성을 지르던 일이 아직도 생생한 오늘 아침에 바로 그렇게 똑같은 하늘을 만났으니 어떠했으랴.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아주 쾌청한 아침인데, 다만 기온만은 어제 아침에 비해 다소 선선한 편이었다. 바람막이나 가디건 하나만 걸치면 산책하기 딱 좋은......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몽펠리에의 날씨가 일 년 365일 중에서 평균 300일 이상 이렇게 쾌청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런 날씨라고 하니 말이다. 한 여름과 한 겨울을 제외하면 늘 이런 여유와 낭만이 흘러넘치는 그런 날씨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택한 몽펠리에 숙소 <Le Jeu De YourHostHelper>는 아주 훌륭한 호스텔이었다. 우리는 여행 중에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시설을 보유한 숙소를 우선 선정 기준에 두다보니 일반적 호텔 보다는 호스텔이나 프라이빗 게스트하우스를 곧 잘 선호하는 편이다. 그간의 오랜 경험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시설. 청결. 위치. 가성비 등 모든 면에서 최고점을 주고 싶고, 혹 다시 몽펠리에에 오게 된다면 무조건 다시 찾고 싶을 정도의 안락한 쉼터였다. 몽펠리에 역사지구의 담장이랄 수 있는 성벽의 연장선상에 놓인 상가건물 2층이었기에 관광명소가 대부분 인접했고, 기차역이 불과 300m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문을 열고 나가면 거기가 바로 트램 Observatoire 정류장이다. 역사지구엔 트램 외의 대중교통이 없다. 걷거나 트램이 전부다. 그런 트램 2개 노선이 숙소 코앞에 정차한다. 나머지 2개 노선을 이용하려면 300m 전방의 기차역으로 가던가, 좌회전해서 500m 인근의 코미디 광장까지 가면 된다.
Observatoire 라는 말은 ‘전망대’ ‘망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 방향으로 100m 쯤에 서 있는 중세시대의 성문 La Tour de la Babote 에서 따온 말이다. 중세 몽펠리에 성의 출입문 중에서 두 개가 남아 현존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La Tour de la Babote 성문 위에는 외부의 먼 곳까지 살피기 위한 ‘망루’가 존재한데서 유래되었다.
가히 몽펠리에를 여행한다면 최고의 거점이 아닐까 추천하고 싶다. 대형 마트나 재래시장 또한 인근에 산재한 편이어서 쉽고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숙소를 나서려는데....... 이 넘의(?) 육중한 나무대문은 영 쉽게 친해지지가 않는다. 크고 두꺼워서 무게가 엄청나다. 드나들 때마다 어지나 삐걱 소리가 요란한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닐 정도다. 거기다 중세풍의 묵직한 쇳덩어리 열쇠를 끼워 여는 방법 때문에 처음에 생고생을 했다. 그러다 몇 번 이용해 보니 그게....... 그런대로 나름 상당해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역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매우 그리운 세대 인가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다시 떠오르는 것이 ‘코로나 사태 팬더믹(COVID-19 Pandemic)’에서 생겨난 새로운 여행 풍속도였다.
우리의 이번 여행은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안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3년 만에 다시 재개하는 여행이었기에 비로소 ‘비대면 상황’이 모두 해제된 시점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여러 상황에서 비대면이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사태가 끝난 시점에서도 나름 편리함이나 효과가 있었음인지 여전히 비대면을 지속하는 분야가 있었으며, 특히 인포가 없는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비대면이 대세였던 것이었다.
이용자와 관리자가 굳이 만날 필요가 없고, 그편이 오히려 서로에게 편리했던 때문이리라.
마르세유에서 떠나기 하루 전날 몽펠리에 숙소 관리자에게서 장문의 메일이 왔다. 도착 시간 확인 차 온 메일이었고, 샐프 체크인에 대한 장문의 세세한 안내가 있었다. 펼쳐보는 순간 대충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고, 다음날 몽펠리에로 이동하면서 번역기를 통해 메일 전문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였고......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비대면’인만큼....... 어찌되었던 이용하려면 열쇠가 필요했고, 관건은 마주지지 않는 상황에서 열쇠를 과연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겪어보면 이 상황에서 여러 가지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삐죽 얼굴을 내밀고 열쇠만 달랑 건네주는 경우도 실제로 있다. 그럼 몽펠리에는 어떻게 할까?
이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서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찾아 온 예약해 둔 숙소의 짙은 초록색 대문 앞에 일단 배낭과 캐리어를 모아놓고 아내를 그곳에 있게 하고는 메일 번역본을 켜들고 트램 철도가 있든 도로를 건너간다. 왼편의 골목길로 접어들어 가면 조금 지나서 다시 양쪽으로 갈라서는 좁은 골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면 바로 앞쪽에 아침 새벽에 도심 곳곳을 청소하는 분들이 임시로 리어카와 빗자루와 삽 등의 도구를 보관하는 철망으로 된 작은 구조물이 담벼락에 기대어 설치되어 있다. 그 구조물 위로 건물 외벽의 창문이 나 있는데, 그 창문의 보안창살에 작은 철갑으로 된 열쇠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매달린 두 개의 열쇠주머니 중에서 왼쪽의 보라색이 바로 우리 숙소의 열쇠주머니인 것이다. 메일에 담겨있는 4개의 아라비아 숫자 버튼을 돌려 맞추니 지갑이 열리고, 안에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제법 커다란 무게감이 느껴지는 열쇠가 나왔다. 짐을 놓아둔 숙소로 돌아와 육중한 중세풍 나무문의 커다란 구멍에 큰 열쇠를 찔러 넣고 돌리는데...... 이쪽으로 돌리고 저쪽으로 돌려도 딸깍 하는 소리가 나질 않는다. 거 참 난감하다. 열쇠가 맞기는 분명히 맞는 모양인데....... 슬쩍 뺏다가 꾹꾹 찔렀다가....... ‘딸깍’ 하더니 문이 열렸다. 그런데 힘 좀 서야만 삐걱하는 아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출입 현관문이 열린 것이다. 물론 쪽문이었지만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 2층에 올라가니 우측 첫 번째 방이 우리에게 배정된 숙소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드는..... 꽤나 여행자의 입장에서 편하게끔 정성을 들인 그런 휴식처 말이다.
몽펠리에(Montpellier) 하면, 남프랑스를 통 털어서도 가장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로만 가득 찬, 파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도시로 불린다. 거기에다 가장 젊은 대학의 도시가 바로 몽펠리에다. 1.300년의 프랑스 역사가 고스란히 이곳 에쿠송(Ecusson) 곳곳에 녹아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몽펠리에의 근원지였고 출발이었던 에쿠송의 역사가 곧 몽펠리에의 역사이며, 이곳은 몽펠리에의 심장이자 랜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페이루 급수탑이 랜드 마크라 하고, 누군가는 개선문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변화의 상징과도 같은 안티고네가 진정한 랜드 마크라고도 하는데....... 이 모두가 몽펠리에가 너무나 많은 세상에 뽐낼만한 문화유산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리라. 파브르 미술관 경우만 해도, 비록 소도시에 위치했다고는 하지만 풍부하고 다양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예술 컬렉션으로 온 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널린 인정받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에 들어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도시 재정비와 재개발 프로젝트는 이제 하나의 좋은 예로써 온 세상의 관심과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학업을 위해 꾸준히 찾아오는 젊은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몽펠리에를 느껴보고 배우고 연구하기 위한 여행자들의 발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성공을 위해 줄달음치던 치열한 삶에서 잠시 비켜나려는 사람이나, 세상일에서 벗어나 지친 심신을 추스르며 남은 노년의 삶을 풍요로우면서도 여유 있게 누려보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몽펠리에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도심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문화유산을 둘러보면서 중세의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몽펠리에 요새 수비대원이 되어 성벽 아래를 걷게 되고, 중세의 의사가 되어 호롱불을 앞세우고 야간 진료에 나서기도 한다.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고성을 높여가면 격론을 벌이는 광장이 나오는가 하면, 개신교도들의 폭동에 허겁지겁 성당 안으로 피해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지중해에서 잡은 생선을 마차에 싣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시장에 당도하는 어부 아낙네의 모습도 보인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벽 야채 장사를 마치고 농장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도 보인다. 꽃을 사들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차림새 복장부터 달라 보이는 여인은 어느 호화로운 주택의 고귀한 따님이리라. 부르봉 왕조에 의해서 요새화된 성 안쪽으로는 관공서와 교회와 학교와 70 개의 호화로운 지배계층의 대저택만이 들어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에쿠송의 광장 어귀에 서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노라면......... 몽펠리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조화를 이루며 섞여서 내는 은근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숙소에서 나와 몽펠리에 세인트 로흐 기차역 방향으로 향하다가 성문(La Tour de la Babote)에서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서 곧장 코미디 광장(Place de la Comédie)으로 향한다. 누가 뭐라고 하던 코미디 광장은 몽펠리에의 중심이고 몽펠리에 여행의 시작이자 끝 지점이다. 마치 파리 도심의 어느 공원 카페테라스에 산책 나온 그런 기분이 든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치 그런 느낌말이다.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고 넘쳐난다. 도시 인구의 4/1이 대학생인 몽펠리에인 만큼, 아직 어린이와 아침 외출을 서둘지 않은 중장년층을 제외하면 아침 코미디 광장에 모였거나 지나가거나 트램 정류장으로 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대학생 아니면 젊은 직장인이라 해도 결코 무리가 아니지 싶다. 젊음에 넘치는 사람들이 정말로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다. 군데군데 우리처럼 서둘러 이동을 하려는 여행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배낭이며 캐리어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식전댓바람부터 카페테라스에 아침 손님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빵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는 저들의 식생활문화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다분히 그런 분위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프랑스인 특유의 아침 카페 문화가 여실히 엿보이기 때문이다. 식전댓바람부터 아예 광장의 카페테라스로 마실을 왔음이 틀림없어 보이니 말이다.
‘우리도 커피 알롱제 두 잔 주세요. 뜨거운 물도 좀 별도로 부탁해요.’
우리 스스로를 살며시 들여다 보니....... ㅎㅎㅎ. 이젠 영락없는 현지인 포스가 몽실몽실 피어올라오고 있다. ㅋㅋㅋㅋ.
코미디 광장(Place de la Comedie)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맘껏 멍을 때려본다. 느긋하다거나 여유롭다는 말로는 무언가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 이번여행에서 전혀 색다른 것이 있다면 아마도 바로 이 ‘멍 때리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여행은 늘 분주하고 바쁘기 일상이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어떠한 결과로든 어차피 여행을 마치고 나면 많이 아쉽고 많이 후회될 것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좀 많이 지치고 좀 많이 힘들더라도 이왕 나온 김에 최대한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욕망이야 순전히 내 책임이겠으나, 이런 결과의 상당부분은 앞에 앉아있는 마눌님 책임이 아니겠는가? 힘들다고 뒤처지거나 아프다고 드러누웠다면 강행군 여행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인데...... 이넘의 마누라가 지칠 줄을 모르는데다가 어지간해선 티도 내지 않는 여간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간 어쨌거나 걷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도 톡톡히 있다. 거기다가 쫄딱 망해서 옴팡지게 고생을 시킨 탓인지 어떤 힘든 상황도 거뜬히 잘 견디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잔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완전 겁대가리 라는 놈도 상실한지 오래다.
항상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는 ‘좀 여유 있게 차분차분 쉬면서 뒤도 돌아보는 여행 하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현지에선 오로지 뿔고로 욕심을 너무나 심하게 부리는 내 뒤를 잘 쫒아온다. 그러니 내가 부러 여유를 부리거나 느긋해질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제까지 여행은 여기 몽펠리에에 오기 직전까지 온통 춥고 흐리고 이따금씩 비를 맞아야 하는 험악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에펠탑 아래서 맞았던 세찬 겨울비는 우리에게 당연하듯이 며칠 몸살기운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에즈에서 잠시 눈부신 햇살아래 모든 것을 내맡기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더니 그렇게 마냥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 새로운 멍 때림의 기분은 카시스에서 한 자리에서 두 시간 이상 멍하니 넋 놓고 쉬는 맛을 제대로 경험했다. 그 이후론 어떻게든 짬짬이 그런 여유를 가지려고 부단히 애썼던 기억이 있다.
멍 때림의 압권은 마르세유 옛 항구의 선한 사마리안 카페테라스였다. 나름 파리를 연상 시키는 카페테라스라서 찾아갔을 뿐인데, 그곳에서 내다보이는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씨크한 웨이터까지....... 한 주먹의 햇살과 한 잔의 커피만으로 얼마든지 여유롭고 풍요롭고 마냥 행복한 시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거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지하철을 타고서라도 사마리안 카페를 드나들었었다. 그 다음이 여기 몽펠리에였으니 더 이야기해서 무엇 하겠는가? 난로가 활활 타오르는 카페 창가와 한 주먹의 햇살이 있는 야외테라스를 선택하라면....... 지금은 오로지 야외테라스를 선택한다. 만약 햇살이 한 주먹도 안 된다면 인공 태양 삼아서 난로를 찾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건....... 햇살 한 주먹이 아니라 넘쳐도 너무 넘치고 숨고 싶어도 숨을 수가 없을 지경이니...... 그냥 포기하는 셈 치고....... 그냥 파라솔도 없는 맨 의자에 앉아서 넋 놓고 세상 구경에만 몰두한다.
그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다음 여행지 바르셀로나에 가서 지자는 사람들과 비교해보고 숙소에서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정말로 까맣게 타지 않았던가? 나도 정말로 당황스러워할 정도로 까맣게 탄 내 얼굴에 놀랐다.
한국인과 서양인이 마주보고 앉아서 딱 두 시간 동안 햇볕을 쳐다보았는데....... 서양인은 먼저 벌개 지더니 다음날 완전 말짱한데, 한국인은 말짱했다가 왜 다음날 까마지는 것일까? 그렇다고 허옇게 밀가루 반죽을 덮어쓰고...... 하이고, 가면 쓰고 어떻게 살아? 이 나이에 말이야?
따사로운 햇살에 취했음일까 아니면 진한 알롱제 커피에 취했음일까?
코미디 광장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이런저런 무한 상념에 젖다보니까 뜬금없이 슬쩍 비위에 거슬리는 게 보인다. 이제껏 몽펠리에는 무조건 좋다고 실컷 칭찬만 늘어놓고서 이제와 뜬금없이 지적 질을 해대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만은..... 그렇다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몽펠리에나 모두를 위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순전히 그런 의도라고는 아무리 내 얼굴을 들여다봐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한 예술가의 예술 정신을 매도할 생각도 없다. 다만 느닷없이 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딱 거기까지다.
몽펠리에의 중심이자 심장이라 여겨지는 코미디 광장(Place de la Comedie)은 한쪽 끝에 우뚝 서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옛 군대의 위병소였던 현 관광안내소까지 12.500 제곱미터의 너른 타원형 광장이다. 생긴 모양 때문에 간혹 현지인들은 ‘달걀 광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광 안내소에서 우측으로는 쇼핑몰이 있으며, 그곳에서 안티고네(Antigone)가 시작된다. 다른 왼편으로 플라타너스 나무숲이 아름다운 샤를 드골 공원이 있다. 그 공원의 왼편으로 유명한 파브르 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코미디 광장은 1755년에 완공되었는데, 여기에 1790년에 광장의 오페라 하우스 앞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테나와 아프로디테와 헤라 여신을 나타내는 세 여신 조각상으로 장식된 분수(Fountain of the Three Graces)가 조각가 에티엔 앙투안(Étienne d' Antoine)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런 조각상을 볼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세 여신 조각상’과 ‘삼미신 조각상’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미(美)를 대표하는 세 명의 여신인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 여신을 간혹 ‘삼미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미술사에서는 커다란 실수가 된다.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는 분명 최상의 ‘여신 급’이라 별도 취급을 해드려야만 한다. 보티첼리의 <봄>(La Primavera)에 등장하는 ‘삼미신’은 올림포스 산에 살면서 신들의 축제 등에서 흥을 돋우는 무희나 연회를 진행하는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님프들이다. 가끔 <봄>에서처럼 아프로디테나 다른 여신들의 출현에 도우미로 찬조출연을 하기 도 한다. 그러니까 여신들 보다는 한 계급 낮은 단계의 님프(요정)들인 것이다. 이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만...... 미술사와 작품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딴지를 걸어보려고 하는 것은 ‘삼미 신’도 ‘세 여신’도 아니다.
코미디 광장이라는 아주 너른 공간 안에 왠지 왜소해 보이는 ‘세 여신 분수대’ 자체를 대상으로 비평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게게게...... 이 너른 광장에 저게 겨우 뭐야? 최소한 이탈리아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니야? 하긴...... 그러고 보니 프랑스엔 이탈리아에 비해 변변하게 내세울 정도의 분수가 없네?’
프랑스 영토는 이탈리아 보다 훨씬 크다. 로마 역사와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이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자존심은 프랑스가 오히려 훨씬 높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름 현실적으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는 유명한 분수가 별로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이랑 파리 곳곳에 좀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탈리아는 저 북쪽에서 남쪽 시칠리아까지 사방이 온통 분수 천지하고 할만하다. 폄하하려는 의도 없이........ 코미디 광장의 분수 정도라면 얼핏 이탈리아 소도시 동네 마다 놓여있는 분수도 그 정도는 될 것만 같다. 워낙 분수가 널리다시피 많기에 그냥 솔직하게 해보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조각이 시작은 그리스에서 출발했고, 완성과 대중화는 로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미술사적으로 말이다.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가 프랑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보니까 정말 그런 면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네?
베르니니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헐!!!!
베르니니가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면........ 몽펠리에는 작은 파리가 아니라 작은 로마가 되었을까?
카페테라스를 나서서 북서쪽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큰 길을 가운데 두고 작은 골목길이 양쪽으로 미로처럼 서로 엉켜있다. 그 골목길 사이사이에 작고 예쁜 카페며 레스토랑이며 기념품 상점들이 쏙쏙 숨듯이 박혀있다. 갤러리와 부티크 의상실들도 앙증맞을 정도로 예쁘게 꾸며져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몽펠리에 역사지구의 분위기가 저절로 느껴지고 은근히 나름의 매력이 슬며시 다가온다. 모든 지역이 보행자 전용지구라 걸음걸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역사지구 안쪽의 골목길은 유일한 교통수단인 트램으로 부터도 완벽하게 안전하고 한적한 특별구역인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앤을 기리는 앤 성당(Église Saint-Anne)은 문이 굳게 잠겨있고, 몽펠리에의 꽃시장으로 유명하고, 주변에 온통 노천카페로 가득한 플뢰르 광장(Place du Marché aux Fleurs)은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혔으며, 몇 몇 가계가 문을 열려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에쿠송(역사지구)의 이곳저곳을 둘러 본 우리를 이제 기다리고 있는 곳은 너무나 당연하게 몽펠리에에서 가장 좋은 산책로이자 유명한 기념물들이 늘어서 있는 최고의 명소를 향해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었다. 저만치 벌써 몽펠리에 개선문(Arc de Triomphe)이 빼어난 위상을 고스란히 우리 앞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선문(Triumphal Arch)은 로마 시대 이후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황제나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을 말하며, 그 공적을 기록하고 업적을 오래 기리고자 하는 형식의 조형 건조물을 가리 킨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군중이 운집하여 개선하는 군대를 커다란 함성으로 환호하며 꽃과 향유를 뿌려대면서 그들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와 무사 귀환을 찬양하는 가두행진이 펼쳐지니 말이다. 승리자인 그들이 개선문 아래를 힘차게 행진하면,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승리를 위해서 수많은 적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했으며 나아가 정의롭지 못했거나 불의했던 인간으로서 가진 모든 죄와 양심에서 모두 면책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신으로부터 모든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로마가 정복했던 지역 곳곳에서 황제와 장군을 기리는 개선문들이 건설되었고 현재까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개선문이 로마의 콜로세움과 나란히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아닐까 싶다.
개선문이 이렇게 공적을 기록하고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설된 독립 기념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로마 시대 이후의 도시들이 대부분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요새화 과정에서 생겨나다 보니 당연히 도시를 드나드는 여러 개의 성문이 필요했다. 하여 개중에는 요새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성문 자체를 개선문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런 개선문들의 경우는 그 도시가 전쟁에 휩싸였을 때, 당연히 가장 치열하게 공방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개선문일 수밖에 없었기에 성벽의 훼손이나 파괴와 함께 가장 먼저 폐허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를 침공해 점령한 나폴레옹은 바로 이 개선문을 파리로 가져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불가능해지자 결국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선문을 능가하는 새로운 개선문을 파리에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다분히 자신의 업적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보다 찬양하고 더 오랫동안 세상에 남겨 후대로 하여 기리도록 하려는 야심에서였다.
이렇게해서 나폴레옹에 의해서 생겨난 개선문이 파리에는 두 개가 있다.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에 들어선 샤를 드골 광장의 중앙에 건설된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Etoile)이 그것이다. 오스만 백작의 파리 재개발 사업의 핵심으로 도시를 12방향의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게 만든 도심 도로망의 중심에 놓여 있다. 다른 하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길 건너에 놓인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다. 이 역시 프랑스 제국의 심장인 루브르 왕궁에 드나드는 귀족과 고위관리와 외교 사절들에게 가까이에서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고 칭송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세운 나폴레옹의 업적 기념물이다.
어쨌거나 프랑스인들의 개선문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해 보인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미테랑 대통령의 프랑스 정부는 불로뉴 숲 가장자리에 현대적인 새로운 개선문 그랑 아르쉐 드 라 데팡스(Grande Arche de La Defense)를 세웠다. 프랑스의 역사가 담긴 현대적이면서도 거대한 액자라고나 할까? 현재 새로운 파리 여행의 명소로 크게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안에서 널리 잘 알려진 개선문을 찾아본다면 파리의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틴 운하 옆에 라 포르트 생 마르탱(La Porte Saint-Denis) 개선문이다. 이 경우가 바로 성문(Porte)이 명칭에 들어가 있듯이 위에서 설명했던 바처럼 요새화된 도시의 출입문을 그대로 개선문으로 건설한 경우라 하겠다.
파리의 절대 성지라 할 수 있는 생 드니 지역에도 라 포르트 생드니(La Porte Saint-Denis) 개선문이 있다.
파리를 벗어난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개선문이 바로 여기 몽펠리에의 포르트 뒤 페이루(Porte du Peyrou)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사람들 개선문 사랑의 저변에 어느 정도 깔려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혹 위대한 영웅에 대한 그들만의 추앙 심리가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에투알과 카루젤 개선문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세워졌고 프랑스인들에겐 하나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이자 자부심인 것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생 마르탱 개선문이나 생드니 개선문이나 몽펠리에 개선문의 경우는 모두가 한가지 공통점으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히 최고의 전성기로 꼽히는 ‘태양왕’ 루이 14세를 칭송하고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라는 공통된 사실이다.
낭시의 스타니 슬라스 광장 입구에도 멋진 개선문 아크 에레 (Arc Héré)의 경우는 루이 15세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글쎄다. 루이 15세에게 저렇게 기릴 업적이 제대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문이고 나도 잘 모르겠다.
많은 여행자들은 앞다투어 파리의 에투알 개선으로 달려간다. 저마다 인증샷을 찍어대기에 바쁘다. 지붕에 올라가 오스만이 설계한 장방형의 파리 전망을 파노라마로 즐긴다. 그리고 나면 인근의 샹젤리제 거리로 우르르 발걸음을 옮겨간다. 파리 여행에서 적어도 개선문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명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프랑스에서 에투알 개선문이 가장 멋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명소일까?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이 ‘노우(NO)'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내 생각과 대답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에투알은 두 번째야’라고 말이다.
프랑스엔 만들어진지 2.000년이나 되는 개선문이 버젓이 존재한다.
줄리어스 시저가 고대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갈리아를 로마식으로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펼쳐 들었다. 갈리아 곳곳에 로마의 융성한 도시문화가 살아있는 거점을 개발하여 갈리아인 스스로가 로마의 풍습과 제도에 편입되게끔 만드는 유화정책이었다. 아를이나 님이나 오랑주에 로마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이다.
바로 그 오랑주에 아무구스투스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로마식 개선문(Triumphal Arch of Orange)이 남아 있다.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갈리아 너머의 게르마니아(독일지역)를 정복한 후에 개선문을 세웠다.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나 있을법한 개선문이 아주 먼 갈리아 지방 한구석에 여전히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오랑주 개선문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이 개선문을 실제로 만든 건축가에 대한 사실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구이자 사위이며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품페이우스의 이집트 해군을 물리친 위대한 장군이자 또한 훌륭한 건축가였던, 다시 말해 맥가이버 로마 군대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랄 수 있는 아그리파(Marcus_Vipsanius_Agrippa)가 만든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임을 전제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건축물로 로마의 판테온(Pantheon) 꼽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류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조건 판테온이다. 그 판테온을 만든 사람이 아그리파이고, 바로 그 아그리파가 오랑주의 개선문을 세웠다.
몽펠리에 개선문(Arc de Triomphe Montpellier)는 17세기 후반에 건축가 프랑수아 도르베이가 건설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는 분명하게 잘못된 오류라고 정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도르베이가 스케치하듯이 밑그림을 그린 것은 사실로 드러났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본격적인 설계와 건설은 오귀스텡 다빌러(Augustin-Charles d' Aviler)에게 돌아갔다. 몽펠리에 개선문은 다빌러의 작품이 맞다. 몽펠리에 개선문의 건축을 맡으면서 다빌러는 아예 몽펠리에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개선문 앞쪽에 건설되는 왕실 광장인 프롬나드 뒤 페이루(Promenade du Peyrou)까지 그에게 맡겨졌다. 대단히 광대한 프로젝트가 다빌러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우선 개선문과 광장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숲과 정원을 만들면서 중심에 루이 14세의 동상을 세웠다. 건너 마을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도교를 건설했고, 끌어온 물을 모아두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저수지의 물을 도시 전역에 골고루 보내기 위하여 급수탑을 건설했으며, 정원에 어린아이와 사자의 동상도 세웠다.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지나쳤기에 결국 왕실 광장의 완공을 목전에 두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부터 개선문을 시작으로 몽펠리에의 진정한 자랑이자 자부심이자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는 모두 다빌러의 작품인 것이다. 다빌러가 남은 생명의 불꽃을 모두 이 자리에다 태워버리고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몽펠리에 개선문은 애초 파리에 있는 생 드니 개선문을 본딴 형태로 도르베이가 처음 스케치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기는 닮았다.
몽펠리에 지역의 라임스톤 색감이 본래 다른 것인지, 항상 눈이 부시게 빛나는 몽펠리에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리는 가시광선의 빛이 다른 것인지, 몽펠리에 개선문의 색감은 언제나 연한 황금빛이다. 유난히 아름다운 색감이 잔잔하게 가슴까지 젖어든다. 규모 면에서는 파리의 개선문들에 비하자면 많이 작아 보이지만 멋드러진 아름다움은 어느 개선문에 비해서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빛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빌러가 건설한 몽펠리에 개선문은 그가 열정을 다해 세세하게 디테일에 까지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고전적인 도리스 스타일로 외관으로 꾸며 졌다. 은은한 황금빛 색채에 정확한 좌우대칭은 어쩌면 역사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루이 14세에게 헌정된 개선문인 만큼 벽면에는 루이 14세의 역사적 공적을 나타내는 4가지 사건에 대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간의 종교전쟁에서 나뮈르를 함락시킴으로 승리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의 대표들이 루이 14세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두 번째는 헤라클레스로 신격화된 루이 14세가 승리의 왕관을 쓰는 모습을 묘사했다.
세 번째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고자 하는 미디 운하의 건설을 시작했다는 사건을 묘사했다. 물론 그것은 온 유럽의 역사를 통 털어서도 가히 기억할만한 기념비적인 대사건이었다. 미디 운하에 대해서는 차후에 인근의 세테(SETE) 나들이에서 소상하게 거론해 볼 계획이다.
네 번째는 ‘낭트 칙령 폐지 선언’을 묘사해 놓았다. 유럽의 중세에서 근세까지에는 신.구교간의 갈등과 전쟁이 가득 수놓아져 있다. 더군다나 여기 몽펠리에는 유럽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의 최전선이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 전쟁을 제대로 논하자면 아마도 엄청난 시간과 분량의 사료들이 필요할 것이다. 하여 몽펠리에 여행을 긑내기 전에 곳곳에서 약간의 맛보기 정도 종교 전쟁 이야기를 풀어나갈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발걸음을 개선문 아래를 지나 다리를 건너 몽펠리에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코스인 ‘왕가의 정원’ ‘왕가의 광장’으로 옮겨 본다.
페이루 산책로(The Promenade du Peyrou)는 ‘왕실의 공원’ 이라고 불리며 태양왕 루이 14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광장이다. 메모 반듯하게 각지도록 다듬어진 플라타너스 숲이 인상적인 공원의 한 가운데 루브르 광장에서 가져다 놓은 듯 여겨지는 태양왕의 청동 기마조각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다리 건너로 개선문과 몽펠리에 역사지구(Ecusson)가 시야 가득 펼쳐진다.
몽펠리에에서 가장 높은 언덕....... 그러니까 도시의 시작이 바로 이곳에서 부터였던 것이다. 몽펠리에의(Montpellier) 시작은 본래 이곳에서 10km 떨어진 해안마을 마겔로네(Maguelone)에서 부터였으나, 해적들의 노략질이 극성을 부리자 샤를 마르텔은 마겔로네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주민들을 내륙의 안쪽 바로 이곳에 정착하도록 만들었다. 늪지와 슾지가 대부분으로 마을을 이룰만한 땅이 부족했던 이주민들은 야트막한 돌멩이로 쌓여 이루어진 두 개의 언덕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목이 거의 자라지 않는 벌거벗은 언덕의 의미를 담은 (Mont pele)를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지만, 사실 어디에서도 산(Mont)의 느낌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페이루 정원의 위치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장소인데 겨우 해발 57m인 처지로 본다면 언덕이라 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산악국가인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처지에서 본다면 어디를 가든 마을 앞에 있는 남산 정도는 되어야 산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페이루 광장이 위치한 언덕배기가 몽펠리에(Montpellier)이고 수도교 건너편의 언덕에 들어선 마을이 몽펠리에레(Montpelliéret)로 행정 구역이 다르다. 몽펠리에는 그냥 몽펠리에이고, 몽펠리에레는 주변의 슈 레즈(Montferrier-sur-Lez)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과 경기도 쯤으로 이해하면 다소 쉽겠다. 처음엔 양쪽에 흩어져 함께 살았으나 부유한 사람들이 에쿠송(역사지구)로 몰려들면서 관청과 시장이 부근에 생기자 몽펠리에의 발전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도시가 요새화되면서 성채가 생기면서 건너편 지역은 철저하게 외면되다시피 되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중세 시대에 에쿠송 지역의 몽펠리에 봉건영주가 건너편 지역에까지 세금을 과하게 물리자 이에 항거하는 살벌한 전투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건너편의 몽펠리에레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에쿠송 지역의 몽펠리에와 구분하려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17 세기에 들어서서 문제가 생겼다.
몽펠리에의 에쿠송 지역이 도시로 성장하고 나자 생활용수의 부족현상이 점차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몽펠리에 북쪽으로 13 위쪽에서 발원한 레즈(Lez)강은 주변으로부터 풍부하게 수자원을 흡수하여 남쪽 지중해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물줄기가 역사지구(에쿠송)의 남쪽 약 1km 떨어진 외곽(현 시청사 광장)으로 물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마을이 시작될 때부터 도시로 성장했을 때까지는 미처 이런 사태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길이 마을 남쪽 1km의 낮은 지대로 넘쳐나도록 풍부한 수량으로 흘러가고 있다. 물은 속성이 낮은 지대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이미 도시보다 낮은 지대가 되어 흘러가고 있는 물을 거꾸로 도심까지 끌어올릴 방법이 당시로서는 없었던 것이다. 기계 동력을 이용해 물을 퍼 올리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한참 후대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하게도........ 상류의 레즈 강 지류가 건너편 언덕의 몽펠리에레 지역으로는 흘러갔다가 두 언덕 사이를 계류를 따라 하류 외곽에서 다시 합류하여 지중해로 흘러내려 간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몽펠리에가 건너편 언덕에 세워졌었다면 아마도...... 페이루 광장이나 생 클레망 수도교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당연했을 것이다.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이 지역의 대개발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명분은 루이 14세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동안 오랫동안 괄시했던 건너편 언덕에서 물을 끌어와 생활용수의 부족으로 도시의 유지가 한계에 부닥치게 되자 몽펠리에 통치계급들이 찾아낸 묘수 내지는 꽁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펠리에 개선문(Porte du Peyrou)의 완공이 1693년이니까 ‘왕실의 산책로’로 불리던 프롬나드 뒤 페이루(Promenade du Peyrou)는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광장의 첫 삽을 뜬 것이 1689년 1월이었다고 기록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루이 14세 기마동상이 1685년부터 이곳에 이미 세워졌다고 하였으니, 몽펠리에의 가장 높은 곳에 애초에 왕의 동상과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 공원을 헐어내고 새롭게 동상의 주변을 ‘왕의 산책로’로 다시 만들었다는 뜻이 되는데...... 이 주변의 모든 이름에 모두 들어가 있는 페이루(Peyrou)는 사실 오크언어로 ‘돌(石)’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사실은 ‘돌의 개선문’ ‘돌의 산책로’ ‘돌의 수도교’ 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몽펠리에는 세우고 발전시킨 사람들 마음속에는 항상 산(Mont)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가득했지만...... 차마 이 야트막한 언덕을 산이라고 우길 자신이 없어서 대신 돌멩이 언덕을 어쨌거나 죽어도 우겨보려고 모든 것에 페이루(돌) 라고 새겨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들킬 줄 알았겠지만...... 한국 속담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짜식들. 그건 언덕배기 축에도 못 끼어. 까불고 있어.’ ㅎㅎㅎ
몽펠리에 개선문 건축 책임자 다빌라(Augustin-Charles d' Aviler)가 이곳 정원의 재개발 공사까지를 맡았다. 동시에 이 시기에 몽펠리에 도시 발전에 따른 생활용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상수도 시설 사업이 벌어진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성공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불쪽으로 찾아 올라가 건너편 몽펠리에레 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의 어딘가를 연결해 한참 우회를 시켜 이곳 왕실의 산책로까지 어쨌거나 끌고 오기는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물의 부족 사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던 것 같다.
50여년이 지나서 1753년 몽펠리에 시정부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을 벌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몽펠리에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백 명으로 구성된 ‘몽펠리에 참여 연합’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왕립 과학 아카데미 소속의 엔지니어 앙리 피토(Henri Pilot de Launay)를 불러들인다. 그는 강물의 흐름을 살피고 유체의 속도를 계산해 내며 이미 수많은 다리와 수로를 건설한 전문가였다. 그로 하여금 에쿠송(역사지구)의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철저한 사전탐사와 계산으로 레즈(Lez)강 상류에서 새로 물길을 내서 왕의 광장 건너편인 몽펠리에르로 도심에서 필요한 이상의 물을 끌어오게끔 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면서 아비툥 근처에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로마의 가를 수도교“를 모방하여 몽펠리에와 몽펠리에레 두 언덕사이의 나지막한 골짜기에 로마식 수도교를 건설하기로 설계를 마쳤다. 수도교의 길이는 약 900m로 고대 로마의 토목공학이 아닌 프랑스식 근대의 토목기술로 수도교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앙리 피토가 몽펠리에의 물 부족을 해결하려고 건설한 수로 사업의 총 길이는 약 13km에 이르며, 그 중에 낮은 구릉지대를 통과하기 위하여 설치한 21,5미터의 이중 아치 형태의 로마식 수도교는 길이 900m로 완공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앙리 피토는 몽펠리에 수도교(Saint Clément Aqueduct)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리고 앙리 피토가 세운 생 클레망 수도교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수도교나 시설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상징성이 빠진 두루뭉술한 형태로 처음엔 완성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뭐야? 성문도 아니고 분수도 아니고 신전 치고는 조금 작아 보이는데?’
‘저렇게 육각형으로 생긴 파빌리온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왕실의 산책로’로 불리는 프롬나드 뒤 페이루(Promenade du Peyrou)의 중심에 서 있는 루이 14세 동상 옆에서 수도교(Squeduct saint-Clément)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런 궁금증에 휩싸이게 된다.
은은하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도교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 파빌리온의 전경이 잔잔한 호수위에 내려 비치는 모습은 무척이나 장관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왕 이쯤된 것 루이 14세의 인물 동상이 안쪽 어딘가에 안치되어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계단에 올라서 파빌리온의 안을 살펴보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굳이 따지고 또 따져본다면....... 차라리 하나의 사원이라고 치는 편이 맞지 싶다. 그리스나 로마나 프랑스의 사원이 아니라...... 물의 사원이자 자연의 사원 말이다. 고대이래의 물이나 강이나 수생환경이 우화 형식‘저게으로 건축의 곳곳에 수놓아져 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사원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테샤토 도우(thechâteau d'eau), 그러니까 급수탑이다.
13년이나 걸려서 레즈 강 상류의 수원지에서 생 클레망 수도교를 통해서 왕실의 정원까지 물을 끌어오는데 성공은 했지만, 그 모든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앙리 피토가 완공 1년을 앞두고 사망했다. 일단 생활용수가 부족한 몽펠리에 여러 지역에 공급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일정한 량이 꾸준하게 공급되기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여 ‘몽펠리에 백인 참여연합’은 1년 뒤에 다시 건축가 장 앙투안 지랄(Jean-Antoine Giral)을 불러들여 클레망 수도교 건설 사업의 총 마무리를 맡기게 된다. 장의 부친인 앙투안 지랄(Antoine Giral)은 아주 유명한 석수장이로 앙리 피토를 도와서 아치형 수도교 건설에 직접 참여했던 인연으로 장은 이 대형 프로젝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젝트의 완공을 위해서는, 클레망 수도교를 통해 흘러들어 온 물을 저수지를 만들어 일정 수량 이상을 늘 저장함으로써 수원지의 가뭄이나 수량 저하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커다랗게 물을 보관할 저수지를 팠으며, 수도교의 물을 통제하면서 받아들이고, 또 이곳에서 도시의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공급할 수 있는 조절이 가능한 배수관 시설이 필요했다. 이런 모든 시스템을 제어 통제할 수 있는 시설물로 급수탑((thechâteau d'eau)이 마치 아름다운 물의 신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클레망 수도교의 아치 시설에는 두 개의 물줄기라 흘러들어 오며, 아래의 것은 겨울에도 얼지 않도록 단열 시설까지 갖추었다.
1765년 12월 7일 준공식에 모여든 몽펠리에 사람들은 서로 내기를 걸었을 정도였다. 과연 이 오랜 시간 끝에 책임자를 바꾸어가며 만들어진 시설이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내기였다. 수원지에 수문이 열렸고..... 한참이 지나자 13.904m를 흘러내려온 물이 급수탑을 채우고 올라왔는데 그 수량이 정확히 1분에 800리터씩 흘러들어왔다. 처음에 앙리 피터가 계산하고 목표한 그대로였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과거의 노력과 영광은 모두 멈춰서고 말았다.
이제 생활요수도 산업발전의 영향으로 하류에서 보다 풍부하게 물을 퍼 올 수 있게 되었고, 과거처럼 자연수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준에 맞추어 정화시키고 나서 음용수로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하여 이제 생 클레망 수도교와 급수탑의 용도는 폐기되었고 이대한 역사의 기념물로서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기 ‘왕가의 산책로’에 서면 대단히 아름다운 문화유산들이 손에 닿을 듯 방문자를 반겨주는가 하면, 이곳에서는 200km쯤 떨어져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인 피레네 산맥의 탁 트인 놀라운 정경을 바라보고 한없이 즐길 수도 있다.
몽펠리에 페이루 광장을 벗어나 개선문을 통해 다시 역사지구(Ecusson)로 향하다 보면 우편으로 공터(Place Giral)에 놓여있는 인상적인 십자가(Peyrou Cross)가 눈에 들어온다. 1821년 본래 이 자리에 처음 세워진 것은 거대한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였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종교분쟁 때마다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1821년 대성당의 주교에 의해 철재로 만든 십자가로 대체되었다. 1920년 9월에 들이닥친 허리케인에 의해서 또 십자가가 부러져 버렸다. 몽펠리에시는 이 자리에 전쟁기념관을 짓고자 추진하였으나 카톡릭 신자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어 7년간 이 장소는 그냥 텅 비어있었다. 1985년 몽펠리에 재개발 사업의 일 환으로 몽펠리에 미래 천년을 기리는 뜻을 모아 새로운 십자가를 만들어 설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십자가(Peyrou Cross)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과거 몽펠리에가 가졌던 역사에서 최근 들어 표면에 그렇게 잘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어두운 역사의 이면에 대해 새삼 감회가 새롭게 다가온다. 몽펠리에는 중세 이후의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늘 종교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온갖 상흔이 도심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의 이 십자가 또한 그런 흔적들의 하나인 것이다.
몽펠리에는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교통의 요지다.
동쪽으로는 거대한 알프스산맥의 남쪽 끝자락 해안을 통해 이탈리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피레네산맥의 가장 낮은 지역을 통해 그나마 가장 쉽게 스페인으로 연결된다. 고대 역사 속에서 아프리카 튀니지에 근거를 둔 카르타고가 강력하게 등장한 로마에 의해 수세에 몰리자 한니발은 스페인 지역에서 군대를 양성한 다음 바로 이 길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한다. 그만큼 이 지역은 지중해 연안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통요지다. 유럽의 남부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몽펠리에를 지나 툴루즈를 지나 생장을 거쳐 산티아고로 향한다. 가장 유명한 순례길로 알려진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의 순례길의 연장 선상에 몽펠리에가 위치 해있는 것이다. 몽펠리에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던 길은 마르세유에서 올라온 길과 아비뇽 인근에서 만나 수도 파리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페이루 십자가를 떠나면서 짤막하게라도 몽펠리에와 종교전쟁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이 광장을 벗어나면 다음으로 찾아갈 장소가 인근의 대성당이자 몽펠리에 의과대학 이기에 때문에 약간의 설명이나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가톨릭(로마 가톨릭)의 총 본산이 로마의 교황청인만큼 많은 사람들은 이탈리아야말로 가장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 유럽을 여행해보면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과 자부심)을 가진 나라는 스페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페인 국민 스스로가 ‘스페인이야말로 진정한 로마 가톨릭의 정통이자 본산’이라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정통 교리에 입각해서 스스로 가장 엄격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사람들의 가톨릭 신앙심은 스페인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느낌을 설명함에 있어서 두 명의 중세 여걸을 거론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1451~1504)이다.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을 ‘로마 가톨릭에 의한 국토회복 운동’이라는 의미로 레콩키스타(Reconquista) 라고 이름 붙였다. ‘스페인 국토회복’이나 ‘왕조의 부활’ 보다 ‘로마 가톨릭에 의한’을 중요하고 분명하게 명시했다. 여왕 이전에 로마 가톨릭 신자이며, 스페인이라는 국가나 왕조가 존재하는 전제조건에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무엇보다 더 중요 했던것이다. 그런 특이한 종교관이 현재의 스페인 국민의 삶 속에 그대로 고스란히 녹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 맹목적이기 까지 해 보이는 남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가톨릭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을 나는 최고로 꼽는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를 공격해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유럽 본토에서 몰아내기 전에 이미 (종교 재판소)를 인류의 역사에 등장시켰다. 어떤 이유나 명분도 필요 없었다. 이 세상에 공정하고 정당한 종교는 오로지 로마 가톨릭 하나뿐이다. 다른 종교는 모두 이단이다. 이단에게는 오로지 배교나 죽음뿐이었다. 다른 종교를 버리고 가톨리기에 귀의하던가 아니면 정해진 시간 안에 스페인 영토를 완전히 떠나는 것뿐이다. 이단은 무조건 체포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결과는 뻔한 죽음뿐이었다.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유대인과 정교회였다. 유대인의 경우 스페인 안에서 장사를 통해 엄청나게 부를 이루었거나, 글을 깨우치고 장부 정리를 잘하는 부류로 나름 곳곳에서 지식인으로서 삶을 오랫동안 유지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일주일 안에 유대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전향하던가 스페인 영토를 떠나라고 포고령이 나붙었다. 종교재판에 회부되면 무조건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점포와 부동산을 팔아야 하는데 현지인들은 유대인들의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거저 주워 먹으려고 돌아서 버렸다. 결국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장 도망치듯 등짐에 지고 갈 수 있는 정도밖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보물과 황금과 장부와 서류와 귀중한 책들만 챙겨서 부랴부랴 배에 오르거나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프랑스로 도망쳤다. 유대인들이 남기고 간 모든 것이 스페인의 부자와 권력자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엄청난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루아침에 스페인은 유럽 최고의 부자이자 최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일장춘몽으로 곧 끝이 나고 말았다.
유대인에게 빼앗은 재산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부를 사회 곳곳에 계획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의 밑거름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오직 왕족과 귀족과 권력자들의 특정 계급을 위한 사치와 방탕한 생활과 투기를 목적으로 부정축재를 하는 바람에 상상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중 하층민의 피폐해진 생활이 결국 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개선책을 마련해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그동안 그런 중간의 역할을 오랫동안 모두 유대인들이 해왔던 처지로 글을 알고 장부를 정리하고 통신문을 작성해 보낼 유대인들이 씨가 마른 지경에 스페인의 행정력마저 마비되고 말았던것이다. 스페인은 몰락했다. 쌓아놓은 돈(재화)이 넘쳐나지 않았는가? 오랜 유대인들의 상술이었던 대부업(은행업)의 주요 고객은 왕족과 귀족과 부자와 장사꾼들이었다.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멸시하면서도 뒤로는 몰래 거금을 꾸어 쓰고 했던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종교적 정당성과 사회적 지위에도 커다랗게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아주 은밀하게 거래를 해 왔으며, 유대인들이 쫓겨나게 되자 돌아서서 쾌재를 불렀던 재배계급 특권층 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쫓겨간 유대인들에게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역시나 돈이었다. 비록 현금을 회수해 가져가지는 못했지만, 만약 현금으로 회수를 했다손 쳐도 다 가져가지 못했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간 등짐 속에는 서류 장부와 영수증이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을 벗어난 유대인들이 좀 안정되고 나서 자금 회수에 나선 것이다. 욕심 많은 가톨릭 종교 지도자에게 접근해 스페인의 어느 귀족에게 백만 냥을 꾸어주었는데 회수를 해 주면 20% 정도를 수고비로 주겠다고 시도한 것이다. 부패한 추기경이 사신을 스페인으로 파견했다. 돈을 갚지 않으면 교황에게 부도덕한 사실을 고해 교회에서 파문시킬 수도 있고, 스페인 왕가에 고발 조치해 강제 징수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심하면 그간의 이자를 더해 중계자의 이득을 높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신흥 갑부가 귀족의 저택과 영지가 탐이났지만 감히 어쩌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도망간 유대인으로부터 그 귀족의 엄청난 차용증을 가지고 있다는 연락이 당도했다. 신흥 갑부는 이탈리아로 달려가 유대인으로부터 차용증을 사들였다. 차용증에 유럽의 대형 은행 보증서까지 보태져 있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신흥부자는 귀족에게 차용증을 들이밀었고 관공서에 저당권 설정을 등록했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귀족의 재산 대부분을 빼앗게 되었다. 이렇게 스페인은 유럽에서 경제적 후진국으로 하루아침에 급격하게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유럽 전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남다른 정보력과 결속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금융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베네치아 상단의 배후에서 크게 성장했고,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해 지금의 수많은 거대금융자본의 이면에 유대인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것이다.
이렇게 이사벨 여왕이 벌인 ‘종교재판’의 와중에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최고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교인과 정교회 교인과 학자들이 대거 다급한 상황만큼이나 절박하게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쳐 온 것이다. 겨우 살아 도망친 당대의 지식인들이 겨우 도착해 심신을 추스르고 앞날을 계획한 대표 장소가 바로 몽펠리에였다. 당시 유럽 최고의 유대인 거주지역이 바로 몽펠리에였다. 이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찾아온 지식인 중에서 의사가 대성당의 일부 시설을 이용해 선진 의술을 펼쳤고, 의사가 되려는 젊은이에게 의술을 가르쳤다. 도망쳐 온 법학자들이 프랑스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해결 할 기준인 법률에 관한 모든 것을 인문학과 함께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대학이다. 몽펠리에 대학은 유럽에서 거의 최초였지만, 당시에는 하나는 사회제도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임기응변이자 최선의 대처법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심신을 추스른 지식인들이 유럽 전역으로 살길을 찾아 흩어져 떠났다.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던 부자 도시 피렌체로 학자와 예술가들이 떠났고, 로마 가톨릭의 강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폴랑드르(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북부) 지역으로 상인들이 몰려 떠났다. 이들은 곳곳에서 몽펠리에에서 했던것과 같은, 나름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로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이바지하는 방법으로 남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점차 봉건 영주나 통치계급으로부터 하나의 사회제도로 인정받으면서 정식으로 볼로냐 대학, 옥스퍼드 대학, 켐브리지 대학, 파리 소르본 대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작 몽펠리에 대학은 한참 지나서야 뒤늦게 대학으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몽펠리에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몽펠리에 의과 대학(Faculté_de_médecine_de_Montpellier)’을 찾아가기 위해서 구글 지도를 켜고 따라가 보면 느닷없이 ‘몽펠리에 생 피에르 대성당 (Cathedrale Saint-Pierre de Montpellier)’이 나타난다.
원뿔형 지붕의 탑 2개 뒤로 거대한 4개의 망루를 가진 거대한 고성이자 난공불락의 요새가 느닷없이 등장을 하는 것이다. 비스듬한 언덕 안쪽에 마치 해자가 파인 듯 깊은 고랑이 드러나고 이층 높이에 성의 안쪽으로 드나드는 다리가 놓여있다. 이것이 과연 성당일까? 아니면 요새일까?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오로지 몽펠리에 의과 대학을 찾아왔던 것인데 말이다. 대학은 보이지 않고 성당이 나타났는데...... 거대한 요새와도 같은 성당은......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원뿔형 지붕의 탑 2개가 자리해 마치 고성과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요새의 망루와도 같은 탑은 세 개만 남아있다. 종교 전쟁에서 탑 하나가 소실되었다. 왜 이토록 성당(교회)이 요새처럼 생긴 것일까? 십자군 전쟁 당시의 영화나 기록에서 보이는 레반트 지역의 요새 도시를 떠올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종교전쟁 때문이었다. 이슬람과의 종교 전쟁이 아니라 유럽 내에서 벌어진 내전이랄 수 있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의 오랜 전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조금은 놀랍고, 어떻게 생각하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자기들 끼리 사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참혹했기에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어쨌거나 우선은 몽펠리에 의과대학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하겠다.
인류 최초의 대학은 어디일까?
그 해답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 바티칸의 사도궁전의 벽면에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제목은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이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학술원’의 의미를 담아 아카데미(academy)로 부르고 있으며, 바로‘대학’의 어원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까 인류 최초의 대학은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 였다. 그림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수많은 철학자와 수학자와 의학자와 문학가와 영웅이 등장해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있다. 바로 오늘날 대학의 풍경 그것이다.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고대 로마는 초기에 그리스의 모든 전통과 학문과 예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발전시켜 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만. 기독교가 공인(AD 313년)되고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면서 이교도 탄압과 우상숭배의 문제들을 앞세워 그리스 문화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과 예술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탄압하는 정책으로 변해간 것이다. 이 세상에 정의이자 꼭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받들어 모시기 위한 성경 연구를 전제로 하는 신학 하나만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세 천 년의 암흑기’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로마가 지배하는 온 세상엔 오로지 한 가지 신학만이 전부였다.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과 학문은 절대 금기시 되었고 파괴되었으며 철저하게 지워져 버렸다. 그런 탄압에 못 이겨 겨우 살아남은 극소수의 학자들이 그나마 비교적 탄압이 적었던 정교회가 지배하던 비잔틴으로 도망쳤다. 그들의 품속엔 고대 그리스의 학문 책자들이 갈무리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 저편에서 이슬람교가 태동하더니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더니 마침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유럽을 실제로 지배하던 동로마(비잔틴)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단길의 등장과 연장선상에서 동서의 교류가 활발해 졌고, 그 와중에 로마에서 쫓겨와 있던 고대 그리스 문명의 흔적들이 우연하게 이슬람 상인들의 손을 거쳐 술탄에게까지 전해졌다.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선진 문물이 바로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기독교의 신성을 절대시하고 숭상하기 위하여 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철폐시키고 파괴하는 종교적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기독교 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과 예술은 이단이면 신성모독이었다.
하지만 이슬람은 달랐다. 그리스 신화속에서 올림포스의 신들과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씨앗을 뿌리고 추수를 함께하며 수확의 기쁨을 함께 축제로 나누었다. 밤이 새도록 함께 춤과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어 찬양을 했다. 거기에서 철학과 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의학이 놀라울 정도로 이미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술탄은 이 찬란한 고대 그리스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책을 그리스어에서 이슬람 언어로 번역하게 했고 명석하고 뛰어난 자들을 모아 철학과 신학은 물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의학을 연구 발전시키게 만들었다. 이는 이슬람 지역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영토를 넓혀가는 정복전쟁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이게 된 것이다. 수학을 바탕으로 튼튼한 다리와 성을 쌓고, 천문학과 지리학을 통해 바닷길을 개척하고 지도를 만들었으며, 의학의 발전을 통해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유대의 지식인들이 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천문학 지리학 의학을 받아들였다.
이런 고대 그리스 문명의 계승과 단절의 결과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한 순간에 세상에 드러났다.
유럽의 지식인과 통치계급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나게 컸다. 당연히 로마 가톨릭이 받은 충격이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의 최상층에 안착해 있었던 교회는 드러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변화를 거부했다.
이슬람은 이 현대적 대학의 제도를 더욱 계승 발전시키며 이슬람 전역에 확대하였다. 그런 결과로 유럽의 서쪽 리베리아 반도(스페인 지역)를 다스리던 후기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인 톨레도에까지 이슬람식 연구소인 대학이 들어섰고 그 영향력을 스페인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사벨 여왕 주도하에 레콩키스타(가톨릭 주도의 국토회복운동)가 벌어졌고, 끝내 이슬람은 유럽에서 쫓겨나 아프리카로 도망쳤다. 승리한 이사벨 여왕은 로마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도록 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이를 거부하는 이교도는 무조건 모두 종교재판에 회부했으며, 결과는 화형이나 참수형의 죽음뿐이었다. 바다를 건너 도망칠 수 없는 유대인과 정교회인과 이슬람인들이 부랴부랴 목숨을 걸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부로 도망쳤고, 그 중심에 여러모로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진 몽펠리에가 있었던 것이다.
몽펠리에로 도망 온 스페인 영역에 살았던 지식인들이 체류하는 동안에 현지의 젊은이들에게 철학과 수학과 천문학과 지리학과 의학을 비롯한....... 이제껏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사라졌던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에다가 당시로선 크게 앞서있던 이슬람 세계의 눈부신 연구 성과를 더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예 몽펠리에에 둥지를 틀고 안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살기좋은 환경을 찾아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와 폴랑드르 지역(독일북부. 네덜란드. 벨기에)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들에 의한 선진문물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고 소문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몽펠리에를 다스리던 봉건영주 길햄 8세(Guilhem VIII)는 이슬람권에서 도망쳐온 지식인들을 위해 생 제르맹 수도원(Saints Benoît et Germain et Germain)의 일부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들의 일부가 이곳에서 병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가톨릭에서 절대 금하고 있는 인체의 수술을 실제로 감행했으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이런 사실은 점차 소문이 났고, 이는 종교적 교리에 분명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때 길햄 8세는 튀니지 출신의 수도사 콘스탄틴 아프리카누스로부터 이교도라고 적대시해오던 이슬람의 선진문명과 열린 세계관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1181년 봉건영주 길햄 8세는 주변의 영주와 지배계층과 몽펠리에 주민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칙령을 발표했다.
‘유대인이던 이슬람인이던 그가 속한 국가와 종교를 가리지 않고 그가 가진 의술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진정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을 허락하며, 다치거나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들에게 올바른 치료받을 수 있게 하겠다. 여기에 종교적 교리나 관습이나 제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나의 책임이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치료 행위에 적극 지원과 협조해 줄 것을 바라며, 그들에게 의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도록 여기 이 수도원을 개방하고 체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제 이 수도원을 공공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고 교육을 위한 장소로 지정한다.’
길햄 8세의 칙령이 발표되는 순간 마침내 ‘몽펠리에 의과대학(Faculté_de_médecine_de_Montpellier)’이 탄생했던 것이다. 당시 이 자리에 섰던 의사들의 1/3이 유대인이었다. 20년의 세월을 통해 선구자들이 이루한 결과였다.
몽펠리에에 도착한 이슬람 지역에서 탈출한 의사들이 여기 이 수도원에 자리를 잡고 처음 치료를 시작한 것이 1160년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극히 일부의 역사학자들은 몽펠리에 의과대학의 탄생을 1160년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꼽기도 한다. 훗날 발렌시아 아라곤 왕국에 속한 처지로 1120년에야 콘라드 폰 우라흐 추기경에 의해서 정신 대학인가를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수도원은 1536년 이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 가톨릭의 주교좌가 몽펠리에로 옮겨지면서 생 제르맹 수도원을 대성당((Cathedral of Saint-Pierre de Montpellier)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요새와도 같이 중무장한 대성당의 2층에 해당하는 부속 건물은 여전히 역사속의 ‘몽펠리에 의과대학’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의과대학과 대성당이 같은 주소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몽펠리에 대성당(Cathedral of Saint-Pierre de Montpellier)의 내부는 비교적 아주 단촐했다. 성당의 외형이 아주 거대하고 튼튼한 요새와도 같았으니 그 내부 또한 병참기지 같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이 크게 기대를 저버지리 않는 모습이다.
역사속에서 몽펠리에는 요새와도 같은 대성당처럼 로마 가톨릭의 남프랑스 중심인 주교좌의 거점도시였다. 그런데 지금 속사정을 보면 몽펠리에는 거의 개신교의 도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아주 드물게 거대한 요새 성채와 같은 성당을 가지고 있는 몽펠리에는 그만큼 로마 가톨리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간의 치열한 종교 전쟁이 벌어진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이 중심에 참으로 신기한(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여인이 하나 등장한다. 신통방통을 넘어 짜증스러운 여인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드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로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이탈리아 피렌체를 지배했던 유럽 최고의 은행가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딸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개인적 판단으로 그녀는 중국 역사의 측천무후(則天武后). 고려의 천추태후(千秋太后), 조선의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버금가는 악녀(惡女)라고 감히 나는 말하겠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이....... 메디치 가문하면 ‘르네상스의 절대적 후원가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지 않는가?
이사벨 여왕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 온 사람들이 여기 몽펠리에는 거쳐서 멀리 피렌체까지 몰려 갔다. 메디치 가문은 이런 사람들의 능력과 학문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들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서 부흥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과 의학과 예술을 위해 개인적으로 아카데니아를 열러 플라톤 철학을 노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로마 가톨릭의 폭정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과 거짓과 위선과 폭정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 부흥을 통해서 점차 종교개혁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루터와 캘빈이 등장했고 종교재판을 통한 가톨릭의 폭정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카드린느 메디치가 등장하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의 은행가 가문에다가 피렌체를 쥐고 흔드는 권력자 집안이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절대 금하는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상의 치명적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오로지 신분 상승의 꿈을 간절히 꾸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왔다.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프랑수아 1세의 차남인 앙리 2세와 혼담이 오고 가게 된 것이다. 프랑수아의 프랑스 왕국은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메디치 가문은 혼맥을 통한 신분 상승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집요하기로 소문난 메디치 가문의 지나친 참견을 빌미로 일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돈이 절실했던 프랑수아는 차남 앙리의 경우 왕위 서열에서 밀려나 있는 강골이 못 되는 성품으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프랑스에서는 전혀 득세하지 못할것이라 판단해 강력하게 추진했던것이다. 어쨌거나 정략결혼은 성사되었고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프랑수아 1세가 사망했다. 자연스레 왕위가 프랑수아 2세에게 양위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그만 프랑수아 2세가 갑자기 사망해 버린 것이다. 후사가 없었던 터라, 졸지에 앙리 2세가 프랑스 왕에 즉위하게 되었으니, 카드리느의 신분 역시 왕비로 급상승한 것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사태는 매우 조용했다. 그런데 이 꽁생원 앙리가 주야장창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역시나 갑자기 죽어버렸다. 카드린느는 졸지에 미망인 왕비가 된 것이다. 나이 어린 장남 프랑수아 2세를 왕에 앉히고 이를 지켜보던 카드린느는 새삼 정치놀음의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적어도 아들이 장성하여 스스로 통치에 나서기 전까지는 엄마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들이 점덤 커가면서 대신들이 덤벼들기 시작할 무렵 신통하게도 큰아들이 죽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아들 둘째 샤를이 10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다시 한참동안 왕비 맘대로 프랑스를 가지고 놀았다. 아들이 성장하여 슬슬 어려움이 생길 즈음에 또 느닷없이 둘째 아들이 갑자기 죽음으로써 어머니께 극진한 효성을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셋째 앙리 3세를 왕에 앉히고 또 분탕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분노하셨음인지 앙리 3세가 즉위 8개월 만에 암살당하고, 사위가 왕으로 등극해 앙리 4세가 되면서 사악한 장모의 짓꺼리를 끝장을 내버리게 된다. 호사가들은 이렇게 연이은 아들들의 줄초상에 못된 엄마의 장난질이 작용했다고 믿고 있다. 권력놀음에 한 번 빠지면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거추장스러워질 뿐이기 때문이다.
왕비의 친정은 당대의 지식인들을 적극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고, 그 결과로 종교개혁 운동이 거섹 벌어졌음인데, 정작 그 가문의 여식은 프랑스까지 시집간 처지임에도 교황청과 정치권력 간의 합작으로 벌어진 부패와 탐욕과 타락을 누리며 뒤에서 조정하는 입장에 올랐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이 곧 그녀의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의 열풍이 마침내 파리까지 옮겨붙었다. 카드린느는 아들들의 줄초상보다도 가톨릭의 위기가 더 커다란 위협으로 받아들여 졌다. 하여 그녀는 성 바톨로메오 축일 대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자신의 딸과 개신교 세력의 우두머리 나바라의 앙리 아들과 혼사를 치루기로 하고,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에 성대하게 파리에서 잔치를 벌였다. 프랑스 전역의 개신교도들이 모두 초대되었다. 그날밤 자정을 넘어 파티가 한참 무르익었을 지음에 카드린느 왕비의 극비명령을 받은 왕실 근위대와 정규군대가 총출동하여 파티장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리고는 날이 새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까지 무차별 학살을 벌였다. 우리에 가둔 가축을 사냥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하룻밤 새의 사망자 수가 약 3만에서 7만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각기 다르게 추정되고 있다. 왕실에선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졌고, 교황청에서는 이 사태를 기념하는 기념 예배와 함께 교황의 축도가 이어졌다.
살아남은 기독교도들이 프랑스 남부로 몰려들었다.
몽펠리에 대성당을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성상을 훼손시켰다. 전면적인 종교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부랴부랴 대성당을 나와서 조금 떨어진 식물원으로 이전했다. 현재 의과대학의 본관은 이곳에 있다. 이후 몽펠리에는 명실상부하게 프랑스의 개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 13세가 거의 프랑스 군대 전체를 몰고 쳐들어와서 다시 몽펠리에를 함락시키는 1622년까지는 말이다.
이후로 몽펠리에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내달리고 만다. ‘외면당하고 잠든 도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점차 역사에서 지워져가고 말았던 것이다. 몽펠리에 의과대학 마저 없었다면...... 어쩌면 몽펠리에는 아주 벌써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장문의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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