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바티칸 미술관' - 르네상스로 가는 시간여행

by 피안재 2021. 1. 10.

 

 

 

 

 

 

 

 

 

 

 

 

 

 

 

 

 

 

 

 

 

 

 

 

 

 

 

 

  브라만테(Donato d'Angelo Bramante)는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화가이다.

  그의 인생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서 평생을 다 받쳤다 해도 결코 무리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와의 사이에서 생겨났던 일들만 제외한다면  브라만테야말로 정말 흠잡을데 없는 아주 훌륭한 예술가였을테니까 말이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면 브라만테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테니까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실로 위대한 천재였으며 미술역사에 기여한 공로가 너무나도 지대하기에.........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방 어디에나 언제까지나 넘쳐나기에,  상대적으로 그사람들 대부분의 의식속에 이미  '미켈란젤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못살게 괴롭힌 나쁜 놈'의 의식이 짙게 깔려있는한  브라만테는 영원히 '나쁜 예술가'의 대명사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피에타) 조각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이미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미켈란젤로가 이름을 새겨놓게끔 만든  나쁜 놈이 브라만테' 하는 선입견이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시스티나 성당을 방문해서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감동과 감격에 눈물까지 흘리고 돌아서는 사람들 입에서 저마다 '브라만테가  일을 그릇되게끔 꾸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천장화를 그려야만 했다네....... 4년 5개월동안 천장만 올려다보면서......  나쁜 놈 브라만테' 라고 중얼거리기가 일쑤다.

  이런 분들 눈초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참에 아예 베드로 대성당에서 브라만테를 지워버릴 심산인것 처럼 보인다.

  '죽기전에 미켈란젤로와 쐬주라도  한 잔 하면서 화해를 좀 하시지...........  하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겠지 뭐.'

  내가 보기에도 브라만테는 정말로 억울할것만 같다.

  브라만테 역시 미켈란젤로 못지않게 한 성질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가진 천부적 성격이었을 뿐,  미켈란젤로와의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그가 부정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잘 드러난다.  오로지 미켈란젤로와의 사이에만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는 아마도 후대에 위대한 천재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반대급부로 미켈란젤로를 미화시키려 지어내고 부풀려서 꾸며낸 이야기라고 나는 보고있다.

  31살 이라는 나이차에.......  명실상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고 건축을 총 책임지는 성공한 삼촌이 한참이나 어린 조카를 시기하고 질투 할 이유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추측하건데는 이 모두가 인류 역사를 통털어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미켈란젤로의 까칠함에서 유발된 오해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다 가만히 생가해 보면 이 세상에서 미켈란젤로와 사이좋게 지낸 사람이 누가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교황 조차도 원수 대하듯 했으며,  23살이나 많은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저잣거리 양아치 취급을 했다.  라파엘로를 한낮 애송이라 불렀고, 보티첼리를 사기뿐 취급했다.  단테와 부르넬리스키를 존경했고 평생을 통털어 사브나롤라와 마키아벨리 정도가 그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정도였다.

  (피에타)는 교황청 주재 프랑스 추기경인 빌레르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미켈란젤로와 빌레르의 만남부터가 어디 정상적이었는가?  가난에 찌든 조각천재는 고대 그리이스나 초기 로마시대의 조각들이 비싼 가격에 사고팔리는 것을 보고는 천재적 소질을 살려서 마스크 조각을 만들고 불에 그을리고 땅에 파뭍었다가 파내서 골동품이라고 속여 팔았고,  그 물건이 빌레르 추기경에게까지 넘겨졌다가 가짜로 판명되어서,  소위 사기꾼으로 붙잡히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기는 분명 범죄이고 범인은 미켈란젤로였음에도,  그 사기꾼의 범상치 않은 솜씨를 알아 본 추기경의 배려에 의해서 탄생한것이 바로 (피에타) 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경력이 있었기에 초반부터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타) 작품이 너무나 뛰어났고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되자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주문자인 추기경이 사망했고,  애초 (피에타)를 전시하기로 했던 예배당을 교황의 지시로 헐어버리게 되었다.  헐어버린 예배당 터는 새로 짓고있는 베드로 대성당에 편입되었고,  그 전과정의 공사 책임자가 바로 브라만테였다. 프랑스와 교황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고,  (피에타)의 소유와 전시에 대해서 옥신각신 다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에 대한 소문이 증폭되었고,  이를 전해 듣고 화가 치민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조각상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고 말았다.  이름은 이미 새겨져 버렸고,  조각상의 뒤에는 항상 교황과 브라만테의 이름이 따라 붙었다. (피에타)의 안위가 어쩌면 그 두 사람의 손에 달렸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 브라만테라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교황을 능멸할 수는 없을테니까......

 

  브라만테가 위대한 천재를 시기하여 교황을 꼬득여서 한 번도 그림을 그리지 못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시스티나 천장의 (천지창조)를 억지로 그리게 만들었다?

  나 역시도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을 쉽게 설명하고 또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정도로 슬쩍 그런류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들곤 한다.  또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난 역사를 좋아하고 나름 미술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 본심으로는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 역시도 까칠한 미켈란젤로의 성품에서 비롯된 웃지못할 이야기이며,  그를 위대한 천재로 더 크게 부각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에서 비롯된 억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브라만테는 나름으로 인성을 충분히 갖춘 훌륭한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천재성은 넘쳐났으되 인성은 그야말로 낙제였다.

  브라만테에게 피렌체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렌체에서 좀 떨어진 현재의 페르미냐뇨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화가로서 건축가로서의 소양과 기술을 모두 이곳에서 습득하고 성장했다.  처음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곧 건축가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0살의 브라만테는 밀라노 공작인 루도비코 체스카의 초대를 받고 밀라노로 향한다.

  밀라노로 떠나기 전에 브라만테는 이미 브라만테는 피렌체에서 새로 피어난 새로운 사조인 르네상스를 온 몸 가득 담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보티첼리가 그가 아끼는 피렌체의 친구이자 후배였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 꽃 피운 이 르네상스의 열풍이 밀라노가 그를 초빙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밀라노에서 브라만테가 주력한것은 건축이었다.  고식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던 밀라노에서 새로운 문명사조인 르네상스 양식의 교회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 수도원' 이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 레오나드로 다빈치로 하여금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끔 만들었다.

  밀라노에서 건축가로 크게 성공한 그가 피렌체에서 8살이나 후배인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밀라노로 불러 들였다.  함께 지내는 동안에 브라만테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로 부터 피렌체의 동향을 모두 소상하게 전해 들었다.  그 동향의 중심에 미켈란젤로와 자신과의 다툼이 있었고,  라파엘로라는 밝고 예의바른 청년 화가가 막 피렌체 화단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에 이미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통해서 어느정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밀라노에서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브라만테는 곧 로마에 거주하던 교황청의 실세였던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브라만테를 로마로 초빙했다.   브라만테는 곧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소개되었고  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다.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리베리아 반도를 다시 카톨릭의 영토로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교황은 브라만테에게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몬또리오의 템플테드 산 피에트로)를 만들게 하였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체적인 라인의 순수함과 장식적인 엄격함을 최고의 경지로 이끈 걸작으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브라만테의 명성을 로마에서도 드높게 만들어 주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를 교황 전속 건축가로 임명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상갈로의 도움하여 그는 이제 남은 평생동안 새로운 대성당의 건축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대성당의 건축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모두 불러들여서 한껏 자신들만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건물을 짓고 싶어했다.  브라만테는 이를 적극 수용했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활약하고 있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이미 수행하고있는 작업이 산더미 같았던 다빈치는,  피렌체에서 한창 성장하고 있던 라파엘로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다.  로마에 온 라파엘로는 교양과 매너와 준수한 외모로 브라만테를 매우 흡족하게 하였고,  이는 곧바로 교황의 총애를 받는 존재로 급부상한다.  교황은 자신이 거주하는 사도궁전의 상당 부분(절반 정도를)을 라파엘로에게 맡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라파엘로에 대해서 브라만테는 어느 정도의 걱정을 솔직히 숨길수가 없었다.  브라만테가 보기에 라파엘로는 뛰어난 기대주이기는 하였지만 결코 위대한 천재이거나,  아니면 아직은 모든 역량과 자질을 활짝 꽃피우지 못했다는 아쉽지만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브라만테는 라파엘로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하여 브라만테가 택한것은 그에게 속성 개인교습을 기켜주기로 한 것이다.

  속성으로 개인교습을 시켜 줄 교사는 자신이 아니었다.  진실로 브라만테 자신도 혀를 내두를만큼 위대한 천재가 바로 여기 베드로 성당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빼어난 자질을 속성으로 향상시켜줄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위대한 천재는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브라만테는 이미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바탕이 있어서 사사껀껀 누구와도 맞짱으로 응수하는 괴팍한 천재를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끔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인성은 개차반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천재성만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브라만테가 나쁜마음으로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게끔 만들었고,  그 결과가 비참했다고 가정해 보자.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노여움으로 비통하게 쫓겨(?)갔을 것이다.  4년을 들였던 천장은 다시 회칠로 원상태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새로 그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또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모든 책임이.......  시간과 비용에 대한 책임이 모두 브라만테의 몫으로 되돌아 오게 될 것이다.  그가 책임자고 적극 추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브라만테에게 미켈란젤로는 개뼉다구 같은 싸가지였지만,  그의 위대한 천재성에서 탄생하는 작품으로 이곳을 장식하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양심과 지성과 책임감때문에 모든것을 감수하고자 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이미 라파엘로가 로마에 오기 1년 전부터 예배당을 통째로 차지하고 문을 걸어 잠구고 혼자 들어앉아서, 미켈란젤로는 4년반 동안 시스티나 성당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천장화에 매달렸다.  교황과 다투어 삐졌을 때와,  막내동생이 위독하면 급하게 쫓아가는 등,  그리고 이따금씩은 휴식을 위해 로마 시내로 나가긴 했는데,  그럴때마다 브라만테는 굳게 잠겨진 예배당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살펴보곤 했다.  물론 상호간의 약속위반 사항이었지만  브라만테는 누구보다도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속성 과외를 위해서 그는 또 다시 미켈란젤로가 자리만 비우면 예배당 자물쇠를 열고 라파엘로를 안으로 들여 보냈다.

  라파엘로의 일생동안 이 시기에 가장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속성 과외를 끝낸 라파엘로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과거의 라파엘로와는 전혀 다른 화가로 성장해 있었다.  워낙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미켈란젤로였기에 서로 말을 섞어 본 처지는 아니었음에도  그로부터 너무나 많은것을 이미 배우고 난 후였다.  이때 얻은 자신감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라파엘로의 방'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런데........  이 누군가의 무단침입을 미켈란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애송이 같은 화가 나부랭이야.  너무 우쭐해 하지마.  너가 뽐내는 솜씨가 모두 나에게서 몰래 배운것이라는 것을 잊은것은 아니겠지?' 라고 라파엘로에게 비아냥 거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아냥으로 인해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 의해서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다.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브라만테는 씁쓸하게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라만테(Donato d'Angelo Bramante)

 

브라만테의 계단(Bramante Staircase) 2 ???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온 교황들은 로마도심의 정반대쪽에 멀리 떨어져있는 라테라노궁전에서 나와 새로 지어지고 있는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머물기를 원하였다.  대성당의 인근 언덕위에 역대 교항들의 여름궁전인 벨베데레 궁전이 있기는 하였지만,  과거에도 외국의 귀빈이 왔을 때 접견과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쓰여졌었을 뿐,  크기만 너무 방만하게 크고 시설이 낡은 여름궁전을 수리하고 복구하느니 새로운 거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하여 건설중인 베드로 대성당과 벨베데레 궁전 사이에 새로운 사도궁전을 브라만테로 하여금 짓게 했다.  사도궁전에는 우선 교황의 개인 예배당이랄 수 있는 시스티나성당이 포함되면,  교황의 숙소와 필요에 따른 여러개의 집무실과 서재와 접견실 등등의 많은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동시에 벨베데레 궁전의 뜰을 정원으로 가꾸면서 라오콘상을 비롯한 수많은 조각들을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차차 벨베데레 궁전은 역대 교황들에 의해서 거대한 박물관 겸 미술관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궁전이 완성되고 율리우스 2세 교황은 라테라노 궁전을 나와서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교황이 브라만테를 불러서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사도궁전과 대성당을 오갈 수 있는 복도(회랑)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무겁고 치렁치렁한 교황복을 걸치고 흙탕길을 걸어서 오가는것이 영 힘이들었던 모양이다.  브라만테는 즉각 새로운 설계를 시작했다.  그의 설계는 교황 사저인 사도궁전에서 나와서 긴 회랑을 걸어서 높이가 적당한 계단을 몇 개 돌아내려서면 대성당의 입구 현관이랄 수 있는 나르텍스에 도착하게 설계되었다.  계단이 시작되는 기단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이 그 통로를 보호할 것처럼 포효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사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실체가 밝혀지게 되지만,  대성당에서 시작된 이 회랑(복도)는 교황의 거처인 사도궁전까지만 연결되는 통로에 그치는것이 아니었다.  이 통로는 바티칸을 에워싼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테베강변에 서있는 산탄젤로성(천사의 성)까지 비밀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바티칸의 외부 세력에 의해서 침공당한다면 이 비밀 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산탄젤로 성에서 마차를 타던가,  테베강에서 배에 옮겨타고 내뺄 수가 있게 사전에 은밀하게 비밀통로를 확보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회랑(복도)을 율리우스 2세 교황도 브라만테도 끝내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회랑의 완성은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베드로 광장과 함께 베르니니에 의해서 완성되게 되는 것이다.

  교황의 두 번째 요청은 브라만테를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교황의 거처에서부터 시작하여 바티칸의 영역 밖(외부)으로 직접 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며 감히 세속의 왕이나 황제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상 최고의 절대권력자 였다.  그의 생각대로 안되는 일이 없으며,  그의 지시를 거절하거나 따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었다.  성스러운 이 거대한 베드로 대성당을 마음대로 다 차치하고 있었으며,  이제 막 완공된 사도궁전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아방궁이었던 것이다.  교황이 요구하는것은 하늘의 별이라도 기꺼이 따다가 바칠판이었다.  그런 교황이 대성당의 영역이 아닌 세속의 외부와 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온 것이다.

  이미 1400개나 되는 궁전의 방을 1천개나 되는 계단들이 서로 연결해주고 있었다.  교황의 거처는 사통팔달 사방 어디로든지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뻥 뻥 뚫려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별도의 통로?  그것도 외부와?

  왜?  어디에? 도대체 무슨 용도로?

  가져오라면 무슨 수를 쓰던지 가져 올 것이요,  택배로 부치라면 부칠 것임이요,  날아서 가져 오라면 하늘에 날려서라도 가져다 바칠판인데.........  

  '브라만테야.  마차를 타고 내 사저까지 오를 수 있게 만들고 싶고,  말이나 나귀에 짐을 싣고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만 하겠다.  더하여  오르고 내려가는데 막히는 일이 없어야 하겠고,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결코 서로 마주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내 사저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통로가 필요하고,  그 통로가 곧바로 바티칸 성벽 밖으로 통하게 해서 은밀하게 드나들게 만들어야만 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알겠니?'

 

  브라만테의 계단(Bramante Staircase)은 이런 사연을 배경으로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브라만테의 계단'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따져보면 따져볼 수록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다.

  기록에도 분명 교황의 요구에 의해서 시작된것은 맞다.  대성당과 사도궁전의 연결 통로는 베르니니가 완성하게 되지만,  브라만테의 계단의 경우는 브라만테가 직접 완공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브라만테의 계단'은 안토니오 상갈로가 만든 오르비에토 '성 패트릭 우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여행 책자나  현지의 가이드들이나 현지인들 조차 그렇게 알고 있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시간상으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안토니오 상갈로가 만든 '성 패트릭의 우물'은 브라만테가 사망한지 20년을 훌쩍 넘긴 시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갈로가 브라만테 계단을 만들어서 스승에게 헌정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브라만테의 설계도 또한 상갈로의 것이란 말인가?  이치를 따지자면.......  브라만테의 계단이 먼저 완성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성 패트릭의 우믈을 만들어져야만 시간상으로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역사와 미술사와 건축학사에는 분명하게 '브라만테의 계단은 브라만테가 만들었으며 오르비에토에 있는 상갈로가 만든 성 패트릭의 우물에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 패트릭 우물은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요청에 의해서 상갈로가 설계를 하였고,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시기에 상갈로에 의해서 완성 되었다.

  브라만테는 1444년 출생해서 1514년에 사망하였다.  상갈로는 1484년 생으로 1546년에 사망했다.

  이렇게 보자면 '성 패트릭 우물'에 관한 모든것에 브라만테는 전혀 상관이 없게된다.  브라만테 사망 후 13년이 지나서야 성 패트릭 우물공사가 발주되었으니까 말이다.

 

   브라만테의 계단은 베드로 대성당이 한참 활발하게  건설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중에 교황의 추가공사 요구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 공사 기간중에 교황청과 교황은 황권과 교권의 대립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초를 격게된다.  오르비에토로 달아나야만 했던 교황은 오르비에토를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성 패트릭 우물 건설이 필요했고,  브라만테도 다빈치도 삼촌들은 물론 라파엘로까지 모두 떠나간 마당에 유일한 생존다랄 수 있는 상갈로에게 공사가 주어졌다.  하여 결국 성 패트릭의 우물은 상갈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상갈로는 스승인 브라만테가 만든 '브라만테의 계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우물을 완공했다.  어디까지나 그것이 나의 생각이고 나의 주장이다.

그럼 이제부터 '브라만테의 계단'에 대해 내가 알고 기억하는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하자.(실증을 바탕으로 말이다)

 

 

 

 

 

 

 

 

 

 

 

 

 

 

 

 

  

 

 

 

  사도궁전의 교황 사저까지 마차나 당나귀가 올라갈 수 있어야 하고,  오르내리는 과정에 서로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던 브라만테는 어린시절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살라딘의 우물'을 생각해 내었다.

  브라만테가 피렌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기는 십자군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여덟번째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 성지회복을 부르짖으며 소아시아로 건너갔다가는 별 소득도 없이 회군하던 시기였다.  유럽과 소아시아을 오가자면 이탈리아는 반듯이 거쳐야하는 길목이었으며,  당시 유럽 최고의 상업중심지였던 피렌체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군인과 원정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하던 상인들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온갖 사연을 저마다 간직하고 몰려들었다.  찌든 여독을 풀려고 술을 좀 마시고나면 누구나가 전쟁 승리자요 영웅이 되어서 자신의 무용담을 밤이 새도록 늘어 놓기가 일쑤였다.  브라만테는 이들 무리에 섞여서 멀고 먼 이방인의 나라 사람들의 건축과 교량과 성채 건설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별 소득없이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허풍스런 전쟁담 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거나 탈출한 사람들과 이슬람의 후방 도시까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사람들의 관심과 경험은 차원이 달랐다.  그들이 몸소 체험한 경험을 늘어놓을 때 마다 전율이 일어나고 충격을 받고는 했었다.  그것은 신개념과 신기술에 대한 간접적 일망정 커다란 경헙이었던 것이다.

  '살라딘의 우물' 이야기도 그때 전해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의 한 가지였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점령한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아간 이슬람의 위대한 군주 살라딘은 이집트 카이로를 근거지로 한 아유브왕조의 술탄이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은 이집트 카이로로 돌아가서 자신의 왕국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카이로의 한복판 모카타담 언덕에 건설한 성채를 '살라딘왕국(성채)' 이라고 부른다.  살라딘 성채는 북서쪽 아카바만에도 하나 있고,  시리아에도 살라딘 성채가 하나 더 있다.

  카이로의 살라딘 성채는 가히 난공불락으로 여겨진던 예루살렘 성채 못지않게 견고하게 지어졌다.  새롭고 풍요로운 도시로 거듭난 살라딘 성채는 모든 물자와 생화용수 공급에서도 원활한 편이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급수의 중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왔던 살라딘은 유사시(성이 적들에게 포위당해 장기전에 돌입할 때)를 대비해 별도의 군사목적 급수시설 확충 내지 확보를 최측근인 카라쿠시에게 명령했다.  살라딘 성채를 설계했고 직접 공사책임을 맡았던 당시 이슬람 최고의 건축가였던  카라쿠시는 살라딘 궁전의 외곽에 깊이 85m 깊이의 우물을 완성했다.  이는 이슬람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을 통털어 중세 공학의 최대 걸작이자 경이로움 자체이기도 했다.  사람의 힘으로 삽과 괭이로만 85m 깊이를 파내려간 것이다.  웅덩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폭 13m의 구멍을 따라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나선형의 계단을 만들었다.  당나귀의 잔등에 여러개의 가죽 부대를 달고 계단을 따라 물이 넘쳐나는 지하 85m의 구멍을 내려갔다.  물을 가죽부대에 퍼 담아서 당나귀 등에 매달고는 내려왔던 계단을 돌아서 다시 올라간다.  중간 중간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당나귀와 비켜지나가는 것을 위하여 커다란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오르고 내리는데 있어서 다른 상대가 보이면 이 공간에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가던 계단을 가면 되는 방법이었다.  시일이 한참 흘러서는 근처의 나일강에 수로를 뚫어서 살라딘 우물의 수원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고,  중간 높이의 하부 공간에는 수레바퀴 형태의 기계설비를 통해 중간부분까지 물을 끌어 올렸고,  가까운 이곳에서부터 예전처럼 나귀를 이용해 불을 퍼 올렸다.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놀라운 이슬람의 건축과 토목 기술 등은 철학 인문학 의학 천문학 등과 더불어 하찮은 이교도의 문명이라 하여 터부시되고  금기시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브라만테가 접했던 이 놀라운 이야기들은 십자군 전쟁의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먼 이집트 카이로까지 끌려가서  궁전 건설과 성곽 건설과  살라딘의 우물 공사에 직접 노역을 담당했던 생존자들의 생생한 경험담이었던 것이다. 허툰 소리나 푸념이 아니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생생한 경험담이었던 것이다.

  지하 85미터 까지 나선형의 웅덩이로 파고 들어간...........  브라만테는 이 나선형 통로에 관심을 집중시겼다.

  마침내.......  해결책의 실마리를 거기에서  찾아냈다.

  나선형 두개를 포개지 않고 한 단계의 층계를 두고 설치하고,  상부와 하부의 출입구를 따로 구분해 설치한다면.......  통로(계단)은 전혀 막힘없이 언제나 사용이 가능하고,  오르는 전용통로의 사람과 내려오는 전용통로의 사람은 단 한순간도 서로 마주칠 이유가 없게되는 것이다.  

  '브라만테의 계단'은 이렇게 이슬람의 건축가 카라쿠시가 만든 '살라딘의 우물'에서 영향을 받은 브라만테에 의해서 완공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크게 기뻐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이집트 카이로 아유브 왕조의 '살라딘 성채'

 

 

지하 85m 깊이의 우물까지 당나귀를 끌고 물을 길러 오르내렸다.(이슬람 건축공학의 금자탑이라 불린다)

 

 

 

 

 

 

 

 

 

 

  세월이 흘러 삼촌들도,  브라만테도, 레오나드로 다빈치도, 라파엘로까지 모두가 이승을 떠나고 안토니오 상갈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동안 바티칸에도 여러가지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에도 성전건축 공사는 지지부진함 속에서나마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도시들간에 분열과 전쟁이 이어졌고, 유럽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극렬한 대립속에 새롭게 독일이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권력다툼의 가장 깊은곳에는 교황과 세속의 군주들간에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황권과 교권의 치열한 암투라는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헤파이토스 대장간의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길과 열기로 먀냥 끓어오르던 불구덩이에 다이나마이트를 던져서 용암을 솟구쳐오르게끔 화산을 폭발시켜버린 사람은 다름아닌 새롭게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 7세였다.

  프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두 번째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유럽의 평화를 위하여 프랑스왕국과 스페인왕국(에스파냐)의 전쟁 종식을 주선하였으나 상승일로에 있던 스페인의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 카를로스 1세 황제)는 이를 거절했다.  그 와중에 새롭게 떠오른 프랑스왕국의 프랑수와 1세는 카를 5세를 재치고 유럽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심하에 밀라노를 침공하여 점령해 버렸다.  가뜩이나 카를 5세의 거만함과 독선에 치를 떨어왔던 교황은 즉시 프랑수와 1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동맹을 맺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말을 갈아탄 것이다.  분노한 카를 5세가 군대를 몰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쳐들어 왔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스페인군대에게 비참하게 패배하였고 프랑수와 1세마저 포로로 잡혔다.  포로가 된 프랑수와 1세는 마드리드까지 끌려가 카를 5세와의 협정문서(마드리드 조약서)에 서명한 후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러자 클레멘스 7세는 다시 잽싸게 말을 바꾸어 타고는 다시 스페인과 예전의 관계 회복을 위한 동맹을 맺었다.  몇 년이 지나 프랑수와 1세가 파비아 전투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군비를 재건하고 나서자,  교황은 또다시 카를 5세에게 등을 돌리고,  이번에는 보다 안전보장 차원에서 프랑수와 1세를 앞세워 밀라노를 끌어들이고 합스부르크왕조(카를 5세 가문)에 대항하는 연합(코냑동맹)을 결성한다.  이러한 교황의 왔다갔다하는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긴 '폼페오 콜로나' 추기경은  스페인을 지원하기로 반교황파를 결성하면서 사병들을 모아서 사도궁전 일부를 점령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놀란 교황은 특사를 보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카를 5세와의 변함없는 동맹을 거듭 천명하였다.  시위를 진정시킨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으로 하여금 나폴리에 가서 이번 사태의 진위를 나폴리 총독을 통해 카를 5세에게 잘 설명하여줄것을 요청하면서 특사로 임명 파견하였다.  콜로나 추기경이 나폴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교황은 코냑동맹군에게 교황청의 안전을 맡아줄것과 함께 동맹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퍼랑수와 1세가 이끄는 코냑동맹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로마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카를 5세는 땅을 치면서 '저런 작자가 무슨 교황이란 말이냐?  늑대와 다름없는 짐승이지' 라고 외치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교황을 징벌하겠다고 외쳤다.  군대를 소집하면서 카를은 우선 급한대로 독일지역에 주둔해 있던 샤를공작에게 신성로마제국의 총사령관자격을 내려 교황청을 향해서 무조건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교황에게 참으로 운이 없었던 것일까?  하필이면 샤를공작의 군대였단 말인가?  십자군 전쟁 이후로 최고 막강한 군대로 꼽히던 샤를공작의 군대가 당시 독일북부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카를 5세의 명령을 받은 샤를공작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침공해 나갔다.  그들에 목표는 오로지 하나 교황청을 정복하고나서 교황을 체포한 후에 황제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것 뿐이었다.  이미 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나폴리를 노리고 있던 코냑동맹군으로서는 보기좋게 뒷통수를 제대로 얻어맞게 된 것이다. 샤를공작의 군대는 삽시간에 밀라노를 침공해서 정복해 버렸다.  밀라노의 절대 군주인 스포르자 가문을 추방시켜 버렸다.  교황과 코냑동맹군에겐 아주 커다란 충격이었다.  여세를 몰아 남하하기 시작했다.  피렌체를 점령하여 메디치가문으로 하여금 베네치아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파죽지세의 샤를공작군대는 이내 로마에 도착하였다.  프랑수와 1세의 군대는 우회로를 통해 프랑스로 후퇴하기에 바빴고,  코냑동맹군은 우왕좌왕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로지 교황이었다.  로마도심을 에워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카를 5세가 전폭적으로 신임하는 샤를공작은 역시나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그런 샤를공작이 치열하게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도중에 그만.......  동맹군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눈 앞에서 총사령관의 죽음을 목격한 군대가 혼란에 빠질줄 알았지만,  용맹한 군대나 출중한 장수 뒤에는 항상 그에 못지않게 용맹하고 충성스런 참모가 있는 법이다.  샤를공작에게는 필리베리 드 샬롱이 있었다.  흩어질뻔한 군대의 사기를 수습하고 나서, 자신이 직접 샤를공작의 깃발을 들고 사다리에 올라 성벽을 타고 넘었던 것이다. 이제 샤를의 군대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이미 피맛을 본 야수들이었던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격파한 제국의 군대는 곧장 교황청으로 쳐들어갔다.

  교황청 소속의 수비대와 제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뻔한 결과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제국군이 교황청 안으로 쏟아져 들이닥쳤고,  이제는 제국군대와 교황근위병인 스위스용병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바이킹 이후로 최고의 용병으로 평가받던 스위스용병의 저항은 극렬했다. 700명의 스위스용병이 마지막까지 교황을 지키려 사투를 벌였고,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이번엔 교황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것이다. 교황청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교황은 보이지 않았다.(현재까지도 스위스 용병이 바티칸을 지키게된 사건)

  교황은 베르니니와 상갈로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성당과 사도궁전을 이어붙인 회랑(복도)에서 더 나아가 산탄젤로성까지 길게 놓여진 성벽위의 길 뿐만이 아니라,  그 아래로 지하에 설치해 놓은 비밀통로(다빈치 코드 인페르노에 등장)를 통해서 최후까지 극히 일부의 살아남은 스위스용병의 호위아래 산탄젤로성으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군대는 교황이 산탄젤로성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내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부터 역사책에 따로 기록될만큼 그 유명한 (로마약탈)이 시작된다.

  지휘자인 샤를공작의 죽음으로 피맛을 본 야수로 변한 제국의 군대는 로마를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청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교황군 1천명을 모조리 참혹하게 살륙했다.  새로운 군지휘자 필리베리 드 샬롱이 나서서 적극 제지했지만,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칼을 휘두르는 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교황을 찾아내 체포하고 로마를 떠나는 길 밖에는 없었다.

  야수로 변한 제국의 군대는 로마 전체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약탈과 살륙과 방화와 강간을 자행했다.  로마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성당이며 수도원은 물론이고 추기경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이 우선적으로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서는 폭도들에게 보석이나 거액의 금전을 바쳐야만 했다.  궁궐이나 귀족들의 저택이 그 다음 목표였다.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강간당한 후에 살해되었다.  심지어 수녀들까지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성경에 적혀있는 지옥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로마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교황의 우유부단함과 그릇된 처신이 불러 온 재앙이었다.

  마침내 교황은 항복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댓가로 가늠할 수 없는 정도의 천문학적 배상금을 내놓았고,  교황령의 영토 일부를 내주었고,  카알 5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허락하였다.  교황은 7개월 정도를 산탄젤로성에 갇혀지냈다.  제국의 군대가 철수를 시작하면서 산탄젤로성의 구금을 풀어주자,  교황은 두려움에 교황청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그 길로 오르비에토로 도망쳤다.  로마와 피렌체 중간쯤에 위치한 교황령 오르비에토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이미 난공불락의 요새로 정평이 나있던 바위벼랑 위에 건설된 철저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던 것이다.  이전의 많은 교황들이 요양처로 즐겨 사용하였으며,  위난시에는 천혜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오르비에토에서 머물면서 자신을 수습하려 애써보지만,  워낙 호되게 당한터라 두려움은 쉽게 사그러지지를 않았다.

  그 시기에 하루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안토니오 상갈로를 불렀다.

  <오르비에토와 르네상스에 관해서는 좀 뒤에 직접 찾아가는 여행기에서 차차 하기로 함>

 

  '여기 오르비에토 성채를 완벽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겠느냐?'

 

 

 

 

 

 

 

 

바위벼랑 위에 건설된 오르비에토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역대 교황들의 휴양지이자 임시 피난처였다.

 

 

 

 

 

 

 

 

    인구 3만명의 오르비에토가 역대 교황들의 별장이자 은신처로 오랫동안 각광을 받게된 이유에는 깍아지른 바위산 위에 도시가 들어서 있다는 천험의 방어진지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바위벼랑 위를 싸고 돌듯이 성벽이 설치되었다.  통하는 길이라고는 양치는 목동들이 드나들던 남쪽으로 난 가파른 언덕길이 전부였다.  언덕길에 설치한 정문만 가로막게되면 그야말로 오르비에토는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는 것이다.  평원 위에 우뚝 솟아오른 바위성채 도시가 바로 오르비에토였다.  많은 교황들이 즐겨 이곳을 찾았다.  심지어는 아예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면서 교황으로서의 업무를 보던 교황들까지도 있었다.  세상과 단절한 채 은둔하면서 유럽의 카톨릭 세계를 다스리기엔 오르비에토만한 장소가 없었다.  바티칸이 열린 교회라면 오르비에토는 철옹성같은 수도원이었던 셈이다.

 카를 5세의 스페인 군대에게 호되게 곤역을 치룬 클레멘스 7세 교황으로서는 처음부터 이곳에 머물면서 거사를 치루지않은것을 후회 할 정도였다.

  '서너군데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고  유일한 통로인 출입문을 대폭 보완하기만하면 오르비에토는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철옹성이 틀림없습니다.  성문 앞에 또 하나의 성문을 만들어 만약에 대비하시고,  언덕을 올라오는 길목에 몇 개의 방어진지를 만들어, 올라오는 적들을 1차 2차 3차로 나누어 저지한다면 외적이 이곳을 침범한다는 것은 날개를 달지 않고는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성 안으로 식량만 충분하게 비축하고 식수만 공급할 수 있다면 이 삼천명의 군대로 능히 수만의 적들을 아주 오랫동안 막아내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상갈로야.  네가 지금 말한 그대로 성을 요새로 수축하도록 하여라.  끔찍한 수모를 내가 또 격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성으로 올라오는 언덕의 방어진지에 각별히 신경쓰도록 하여라.  어느정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성 안에 능히 1년 이상을 견뎌 낼 정도의 식량과 물자 보급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별로 문제가 아니겠는데........  물 공급이 문제로구나.  불필요한 인원을 사전에 성 밖으로 내보낸다고 쳐도.......  성채의 유지를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하고,  군대와 말들을 비상시에 먹이고 마시게 하자면 지금 확보되어있는 용수로만은 부족하지 않겠느냐?  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먹을것은 확보한다고 해도, 포위된 상황에서 물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버텨 낼 재간이 없지 않겠느냐?  상갈로야.  물 부족을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

  '우물을 판다 해도 지대가 높아서 수원을 찾기 힘들 뿐더러,  더러 찾아낸다 해도 작은 웅덩이에 불과 할 것입니다.  풍부한 물을 퍼올리기 위해서는 바위산 아래 평지 아래의 수원에까지 도달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우물을 팠다고 해도 매번 그 깊이에서 물을 길어올리는 방법 또한 보통 일이 아닐것입니다.'

  '이곳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하지 않았느냐?'

  '아일랜드의 성인인 성 패트릭이 지옥의 고통을 체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고통을 닮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웅덩이를 지옥에 비유하였다고 했습니다.  하여 여기 오르비에토의 깊은 웅덩이 우물을 성 패트릭의 우물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근원이 산아래 평지의 수원에 닿아있어서 마르지 않는것으로 사려됩니다.'

  '패트릭의 우물이라고?  깊이가 문제일 뿐 수원은 결코 마르지 않을거람 말이 아니더냐?  이제부터 그 우물을 요새의 우물(Pozzo della Rocca)에 임명하겠다.  이 순간부터 교황의 명령으로 패트릭 우물을 징발하고,  유사시에 이 성채의 모든 사람과 말들이 충분히 물을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라.  군사적 목적의 크고 풍부한 우물을 말이다.'

  크레멘스 7세 교황의 명령을 받은 상갈로는 '성 패트릭 우물'을 설계함에 있어서  본 바탕에는 스승에게서 전해 들었던 이슬람 건축가 카라쿠시가 살라딘의 우물에 처음 시도했던 방식의 공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거기에다가 스승인 베드로 성당 사도궁전에 만들었던 이중나사선 방식의 계단식 통로를 생각해 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성 패트릭의 우물이 깊다해도 이중나사선 계단을 통하여 중간에서 서로 교차하는 일 없이 물을 길으러 내려가고 올라가는데 체증이 없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72m 깊이의 '성 패트릭 우물'은 안토니오 상갈로에 의해서 이중나사선의 구조로 완공되었다.  우물로서의 역활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중세 공학의 우수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표본이자 위대한 엔지니어링의 승리를 상징하는 상갈로가 만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오르비에토를 방문하는 모든 여행자에게 자유롭게 열려있다.

 

 

 

 

 

 

 

 

 

 

 

바위벼랑 도시 오르비에토에 설치된 (성 패트릭 우물) 전경.

 

바티칸 대성당 (브라만테 계단)에서 영향을 받은 제자 상갈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많은 여행 가이드와  자유여행자들이,  그리고 여행 책자와 모 여행방송 프로그램에서조차도 바티칸의 '브라만테 계단'은  상갈로가 만든 오르비에토의 '성 패트릭 우물'에서 영향을 받았다 라고 하지만.........  나의 생각과 견해는 전혀 다르다.  브라만테는 이슬람 세계의 '살라딘에 우물'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내 '브라만테의 계단'을 만들었다.  이 브라만테의 계단 완공에 어떤면으로든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안토니오 상갈로가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해 교황이 요구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만든것이 바로 오르비에토의 '성 패트릭 우물' 이다.

  이런 형태의 유사한 우물은 좀 더 있다.  하나만 골라본다면 포루투갈의 신트라에 가면 성 패트릭의 우물과 아주 아주 유사한 우물을 만날 수 있다.  두 우물간의 연관성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안토니오 상갈로는 브라만테의 제자였으며,  스승과 제자의 나이 차이는 40살에 이른다.

  더군다나 정확한 기록에 따르자면 '성 패트릭 우물'은 브라만테가 사망한지 14년이 지나서 설계가 시작되었다. 

  이 정도로 세세하게 설명을 해드렸으면.......  이제 브라만테와 상갈로의 관계에서 파생된 오해들이 좀 풀리려나? 

 

  그렇다면 이제 '브라만테의 계단'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로 하자.

  '쥬세페 모모'의 계단인 (브라만테의 계단 2)가 아니라 진짜 '브라만테의 계단(Bramante S taircase)'을 의미한다.

 

 

 

 

 

 

 

  바티칸에 교황의 초청을 받은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고 치자.

  초청 받을 수 있는 사람에는 내외 귀빈에서 저잣거리 과일장수나 꽃을 배달 온 사람까지 다양하게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주 유명한 국가 정상으로 가상해 보기로 하자. 

  국가정상을 태운 승용차가 산탄젤로성을 지나 화해의 도로를 따라 바티칸 광장 영역으로 들어선다.  거기에서부터는 모든 보안과 안전을 바티칸 근위대인 스위스용병이 담당한다.  수행원을 비롯한 모든 차량과 사람들은 광장의 열주 앞에서 스위스 용병으로부터 제지를 당한다.  이들은 모두 별도의 보안조치와 절차를 거쳐 차후에 다른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초청대상자인 국가정상을 태운 승용차만이 열주들이 늘어선 복도를 따라 들어간다.  이 원칙은 중세 이후로 한결같은 교황청을 방문하는 절차이자 요식행위다.

  들리는 말에는 지금의 바티칸을 만들때부터 교황으로부터 베르니니에게 이 열주의 숲을 통과해서 교황을 알현하러 오게끔 미리 목적을 가지고 만든 열주들의 숲이자 통행로인 것이다.  수행원으로부터 떨어져 혼자가 된 초청자는 이 어마무시한 돌기둥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에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게끔 되어 있단다.  아마도 마음편하게 어떤 기대를 갖게하기 보담은 떨림과 긴장과 약각의 두려움 속에 은근하게 교황에 대한 우러러봄이 생겨났을거라고 한다.  이 어마어마한 돌기둥 숲 너머에 사는 거인족 같은 느낌 말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게 심신을 짓누르는 돌기웅 숲을 겨우 빠져나오면 마차는(승용차) 정사각형의 정원이 있는 교황청의 내당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 사각형의 정원(Cortile di San Damaso, 사도궁전의 뜰)은 말이 정원이지 풀 한 포기 없는 돌로 포장된 공터일 뿐이다.  더하여 이 정사각형의 공터는 사방으로 웅장한 5층 건물(층 톺이가 아주 높아 실제로는 7~8층 건물 높이)이 빼곡히 에워싸고 있다.  하늘만 빼끔 뚫려있는 그야말로 공허한 감옥(?) 같은 느낌이 들기에 딱 좋은 그런 장소이다.

  이런곳에 어둠이 짙게 내린 밤중에 마차를 타고 횃불을 켜든 채 이 장소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보라.  사형장에 끌려온..... 아마도 그런 기분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

  국가 정상이 이곳에 도착하면 교황청을 대표해서 격식과 절차에 따라 환영 인사가 기다리고 있고 환영식이 조촐하게 벌어진다.  교황은 보이지 않는다.  워낙 고령이시라는 이유가 항상 먼저 제시되지만,  샤를마뉴를 서로마제국 황제에 임명하면서 얻어진,  황제 보다 높은 지위의 고귀한 신분이시라 여전히 그 품위를 지키시려는 꼼수(?)라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어도 그 분 생각엔 까짓 대통령이나 수상이나 유엔사무총장이라 할지라도,  서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보다는 높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교황은 그 윗 레벨인데 문 앞까지 마중이라니........

  수행원의 안내를 받는 정상은  교황 사저까지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오르게 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  교황 전용 엘레베이터를 사용하게도 해주지만 말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그랬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나는 일에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분은 지엄하고 고귀하고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정상들까지도 이런 마당에 우리네 같은 소시민들이야 어떻겠는가?

  이 상황에서 슬쩍 태클을 걸어본다면.........  독일 총리나 미국 대통령의 처지가 참으로 딱한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교황께서 전용 엘레베이터를 내어주셨다손 치더라고.........  이건 너그러움과 배려와 공평함에 너무도 어긋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말이다.(고자질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어떤 이들(?)은 사도궁전의 뜰에서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건물 안쪽에서 신부복장을한 사람이 은밀하게 다가와서 마차 안쪽을 살피고는 현관의 근위병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보냈다.  그러면 현관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병인 무기를 거두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비켜주었다.  교황을 만나러 와서 이제 개인 사저로 향하는데도 신원조회도 없고, 몸 수색도 없고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눈 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애초로와 보일 정도였다.  첫째도 둘째도 오로지 비밀 비밀유지를 목숨보다 더 중하게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복도를 좀 들어가다보면 사도궁전의 안뜰(Cortile di Sisto V )이 나타나고, 다른 근위병이 나타나 옆쪽의 새로운 커다란 통로문을 가리킨다.  마차가 새로운 통로에 들어서 보니 가파른 언덕길 같은 돌기둥 계단이 나타난다.  포장된 계단식 통로는 약간 비좁게 느껴지지만 조금만 조심한다면 마차가 올라가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반대쪽에 똑같은 계단식 통로가 하다 더 있는데,  이중 나사선 형식의 계단식 통로는 이곳으로 올라가 5층 교황 사저에 들렸다가,  반바퀴를 돌아서 다음 통로를 통해 내려오면 바로 여기의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 내려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중간에 마주치거나 지체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계단식 통로를 통해 5층의 교황사저에 도착하면 역시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황에게 초대받은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면 사제는 옆쪽에 이동식 작은 계단을 가져다 놓고 가슴 높이에 올려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초대받은 손님만이 사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초대손님을 내려 준 마차는 계단 통로를 통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복도를 빠져나가 사도궁전 정원의 짙은 어둠이 내려깔린 한쪽 구석에서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연락을 기다리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지 마부는 손님의 비밀보장을 보장해야만 하는 서약을 하였기에 시간을 포함에 이곳에서의 모든 일을 기억에 남겨두면 안되는 것이다.

  근위병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두드리면 마부는 서둘러 마차를 끌고 다시 사도궁전의 계단을 올라간다.  5층에 올라가면 볼 일(?)을 마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손님을 다시 태우고 내려와 정원을 나서면 기다리던 신부가 교황청 사도궁전에서 베드로 대성당으로 통하는 정문이 아닌,  반대편 후원의 비밀의 문으로 안내한다.  스위스근위병이 성문의 안팍을 살펴본 후에 조심스레 문을 열어준다.  마차가 밖으로 빠져 나간다.

  마차가 막 빠져나온 골목은 바티칸이 아니라,  인근의 후미진 로마도심의 뒷골목인 것이다.

  많이 드나들었음일까?  마부는 아주 능숙하게 마차를 끌고 테베강을 향해 밤길을 달려 사라져 갔다.

  은밀하게 마차가 오르내렸던 통로.........  브라만테의 계단(Bramante Staircase) 이다.

  브라만테의 계단에는 바티칸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교황청의 치부가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는 브라만테 계단이 바티칸사람들에게는 결코 자랑스런 유산이 아닌 것이다.

 

 

 

 

 

 

 

 

 

 

 

 

 

 

 

 

 

 

 

브라만테 계단을 올라 온 마차에서 내려 교황사저로 가는 은밀한 통로.(필요시에만 사용하는 이동식 계단)

 

 

계단 창을 통해 바티칸 인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차와 당나귀 이동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이중나선형식  (진짜 브라만테 계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한 번 물어보시라.

  '바티칸에 가셨을 때 브라만테 계단을 올라가 보셨습니까?' 라고 말이다.  대답은 절대적으로 '아뇨. 보지도 못했는걸요.' 라고 대답 할 것이다.

  혹시나 '보기는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쥬세페 모모의 계단 말고요,  오리지널 브란만테 계단 말씀입니다.' 라고 되물으면, '진짜 브라만테 계단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한 마디 톡 쏘아주자.

  '독일 총리나 미국 대통령 자리도 별거 아닌가 봐요?  남들은 수시로 5층 교황사저까지 직접 차를 타고 다녔다는데 말이예요'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독일 총리도 미국 대통령도 절대로 안되는 5층까지 직접 마차를 타고 오르내린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끗빨이란 말인가?  완전 무사통과에 철저한 비밀보장까지.........

  어디 그 뿐인가?

  브라만테 계단 건설의 전제조건이 마차 통과만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지 않았는가?  당나귀 출퇴근 허용?  아니 교황청 사저에 웬 당나귀?  당나귀도 드나드는 계단에 독일 총리도 미국 대통령도 못다닌다고?  도대체 무슨 당나귀길래?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절대성역으로 여겨지는 바티칸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의 비밀보장이 철두철미하게 최우선시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VI)는,  피렌체 출신이면서 교황의 부도덕함과 교황청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개혁을 요구하던 '지롤라모 사브나롤라'를 화형시켜버린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단테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결과적으로 '신곡'을 집필하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 알렉산더 6세에 대해서 역사는 '막나가도 너무나 막나간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최악의 교황' 이라고 적고 있다.  어쩌면 알렉산더 6세야말로  여기 (브라만테의 계단)을 가장 적극적으로 훌륭하게(?) 용도에 아주 적절하게끔 사용하신 분이 아니실까 싶다.

  알렉산더 6세 교황께서 직접 은밀하게 하명하시어 브라만테 계단을 오르내린 사람들의 명단을 종합하여서 주로 어떤 임무나 용도로 쓰였나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본 결과는 대략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Sex) (Power) (Muder).

  아무리 생각해보고 따져보아도 도무지 교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 가지를 빼고나면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서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팩트이자 진실이다.

  건축가는 억울하겠지만........  브라만테의 계단 자체가  바티칸의 흑역사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황청의 흑역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여 좀 더 소상한 내용은 르네상스 후반부의 (종교개혁) 부분에서 별도로 나누어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자신의 모든 행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천하신 거룩한 분의 이름은 (교황 알렉산더 6세) 이시다.  아멘.

 

 

 

 

 

 

 

 

 

 

 

  바티칸의 피오 그라멘타인 박물관 입구라 할 수 있는 사각형의 정원(Cortile di San Damaso)에서 건물 안의 통로를 따라 쭉 나아가면 사도궁전의 안뜰(Cortile di Sisto V)이 나온다.

  이곳을 기점으로 나선형 계단(브라만테 계단)을 통하여 궁전 맨 위층의 교황사저까지 마차가 오르내릴 수 있는것이다.  이 궁전의 안뜰에서 피오 클라멘타인 박물관으로 통하는 사각형의 현관(Vestibolo Quadrato)을 지나서 원형의 현관(Vestibolo Rotondo)이 나오는데, 이 현관의 한가운데 유명한 아폭시오메노스 조각상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여 이 현관을 아폭시오메노스 현관(Cabinet of Apoxyomenos) 이라고 부른다.

  브라만테의 계단(Bramante Staircase)은 이곳에서 이제부터 시작하여 사도궁전의 가장 높고 깊숙한 곳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의 '긁어내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폭시오메노스의 조각상이 그저그런 흔한 조각상이 결코 아니라는데에 있다.  물론 이 조각상은 진품이 아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레플리카(복제품) 작품이다.  2m가 넘는 커다란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그리이스의 조각가 (뤼시포스)가 분명하다.  혹 '고대 그리이스의 미켈란젤로'라고 부른다면 그릇된 표현일까?  아니다.  나는 기꺼이 '뤼시포스가 미켈란젤로를 낳았다' 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이스의 조각' '뤼시포스' '레플리카' '아폭시오메노스' 등의 단어 하나하나를 설명을 통해 짚고 넘어가는데만도 한참이 걸릴것만 같다.  그렇다고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면서 그리이스 문화와 예술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조각을 그냥 외면해버리고 지나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여,  지금 등장하는 '아폭시오메노스의 조각상'은  로마 여행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별도의 장을 마련해서 '그리이스의 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하겠다.

  '뤼시포스'는 실로 위대한 고대의 조각가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시해 본다면 우리주변에서 아주 가깝게 만나 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곧 다시............

 

 

  브라만테의 계단은 각층을 8개의 도리아식 화강암 기둥이 떠받치는 형태로 그 기둥을 따라 나선형으로 빙빙 돌면서 올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계단의 바닥은 붉은 벽돌을 이용해 여러갈래의 빗금형태로 서로 엇갈리게 만들어(해링본 패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효과로 마차나 동물이 오르내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 계단은 분명하게 바티칸의 공식적인 역활과는 별도로 아주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비밀을 요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오르내리며 교황의 개인 사저를 드나들었다.

 

 

 

 

 

 

 

 

 

 

 

 

 

아폭시오메노스 현관에 있는  '긁어내는 사람'  조각상은  그리이스의 조각가 뤼시포스의 작품이다.

 

프라만테의 계단.

 

사도 궁전의  교황 사저는 의외로 소탈한 모습이다.  

 

 

 

 

 

 

 

 

 

 

 

 

  최근에도 교황청은 결코 교황청 답지않은 모습으로 언론에 노출되어 세간의 이목을 또다시 집중시켰다.  고위 성직자들의 성추행(남색) 내지는 스위스 비밀금고의 어마어마한 돈이 문제였다.  하긴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 않았는가?  수많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과거의 그릇된 역사가 버젓이 아로새겨져 있는 교황청 역사에서 성추행과 금전에 관한 일은 지극히 작은 편린에 불관할 뿐이며,  교황청의 전체 역사를 통해 항상 존재해왔던 문제였던 것이다.

  얼마나 떨쳐내고 지워버리고 싶을까?

  아니지?   도대체 2천년의 역사 동안 같은 사건들이  왜 거듭거듭 반복되고 있을까?

  그 또한 하나님의 뜻 이란 말인가?

  이렇게 교황청의 추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때마다 교황청의 역사를 어느정도 아는사람들은 하나같이 (브라만테의 계단)을 떠올리곤 했다.  그만큼 교황청에서 벌어진 흑역사의 대부분이 이 계단을 통해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여 바티칸은  브라만테 계단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과거의 흑역사를 지우기 위하여 대대적인 건설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세간의 이목이 있는데 흑역사를 감추기 위하여 멀쩡한 사도궁전의 브라만테 다리를 헐어내 버릴수는 없는 처지였다.  대신 브라만테 다리를 대중들의 시선에서 감추는 방법을 택했다.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였던 쥬세페 모모(Giuseppe Momo)에게 '브라만테의 다리' 이미지에 걸맞는 새롭고 현대적인 계단 건축을 의뢰하게 된 것이다.  쥬세페는 결코 바티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리지널 '브라만테 계단'에서 영감을 얻어 1932년에서야  마침내 완공 등장한 '쥬세페 모모의 계단'은 그야말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1세기에 접어 든 현재까지에도 세계적으로 특별히 아름다운 다리에 선정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본래의 기대를 넘어선 쥬세페 계단의 높은 완성도에 만족스러워 하던 바티칸은 애초의 의도대로 오리지널 브라만테 계단을 감추기로 하고는 새로운 쥬세페 모모의 계단에 감추기로한 오리지널의 이름을 그대로 붙이기로 했다.  당시 새로운 계단을 완성한 쥬세페라는 원작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를 설득하여서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브라만테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가 나는 몹시도 궁금하다.

  바야흐로 새로운 브라만테의 계단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오리지널 브라만테 계단은 바티칸의 흑역사와 함께 기억속에서 사라져주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결과였다.

  오리지널의 기본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새로운 계단은 현재 피오 클레멘타인 박물관의 출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약 15미터 되는 계단의 외벽을 둘러싸고 이중의 나선형 계단이 휘감아 돌듯이 위로 치솟아 오르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의 도리아식 돌기둥 대신에 아주 고급스런 문양으로 장식된 청동난간이 회오리 문양처럼 하늘을 향해 지솟는 느낌을 강렬하게 전달해 준다.  계단의 꼭대기 위로는 온화하면서도 따사로운 느낌의 유리천장을 통해서 자연 채광이 쏟아져 들어와 계단 전체의 품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지금 모든 여행자의 시선 앞에 보여지는 이토록 정교함과 아름다움과 화려함의 극치를 잘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브라만테의 계단을 나는 극구 '주세페 모모의 계단' 이라고 불러보고 싶어졌다.

  '바티칸에 가면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한 브라만테가 만든 진짜 어마무시한 계단이 있는데,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계단이 아닐가 싶어' 라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귓가에 들리게되면........  나는 오열을 넘어서 분노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외칠것만 같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교황의 침실에 창녀와 과부가된 귀부인들과 심지어 유부녀들을 끌어들이거나 고위 성직을 사고파느라 마차 가득 금화와 보석들을 싣고 오르내리던 브라만테 계단은 대성당 열주들의 기둥숲 너머 감추어 놓았고,  여행객들에게 베드로 대성당이 자신있게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계단은 20세기에 쥬세페 모모가 만든 전혀다른 계단인것이야.  속으면 안돼?  쥬세페 모모가 너무 가엽잖아..........'

  거기에다가 계단의 설계와 건설은 쥬세페 모모가 담당하였지만,  이 계단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휘감아 도는듯한  청동난간의 완성에는  조각가 안토니오 마라이니의 공이 절대적으로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 거대한 청동난간 전체가 안토니오 마라이니에 의해 만들어진 한 폭의 부조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디난도 마리넬리 예술 주조소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어도 주세페 모모의 계단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의 청동 주물 제조기술을 현재까지도 이어내려오고 있는 세계 유일의 청동제작소 라고 할 수 있다.

  피렌체의 로지아 델 메르카트 누오보에 있는 청동 멧돼지 조각상이 바로 이 페르디난도 마리넬리 예술 주조소의 작품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보면 이 주조소가 창작작품 뿐만이 아니라 고대의 유물에서부터 복원에 헌신해온 결과물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가 있다.

  이렇듯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어느 특정한 천재 한 사람만의 몫이 전부인것은 아닌것이라 생각된다.

  칼카라 대리석 광산의 노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작품들도 빛을 많이 잃었을것이기 때문이다.

  쥬세페 모모의 설계와 열정에 안토니오 마라이니의 멋진 조각 솜씨와 마리넬리 주조소에 속한 수많은 장인들의 솜씨가 더해져서 겨우 탄생한 '쥬세페 모모의 계단'이 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한 브라만테가 날로 통째로 집어 삼키느냔 말이다.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면..............  헐!

 

 

 

 

 

 

 

 

 

 

 

 

 

 

 

 

 

 

 

 

 

 

 

 

 

 

  바티칸(Vatican)은 기독교(로마카톨릭)의 성지이자 세상에서 최고의 명소로 손에 꼽히는 박물관이다.

  바티칸 하면 어떤 사람은 우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떠올린다.  그런가하면 더러는 박물관에 속하는 쥬세페 모모의 계단(브라만테 계단 2)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바티칸을 상징하는 꽃이라면 바티칸박물관의 핵심이랄 수 있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라파엘로 산지오(Raffaello Sanzio da Urbino)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마에 도착해 브라만테의 소개로 율리우스 2세 교황을 만난다.  라파엘로에게 흠뻑 취하게 된 교황은 교황의 집무실이자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4개의 방을 라파엘로로 하여금 꾸미도록 허락했다. 

  르네상스 미술사가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가 율리우스 2세 교황으로부터 자신의 집무실에 벽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았을 때,  이미 이 방의 벽면에는 빼곡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베네데도 볼피글리, 안드레아 델 카스타노, 루카 시뇨렐리, 바르톨로메오 델라 가타 등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때 존재했던 그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바도 남아있는 작품도 전혀 없다.  하지만 라파엘로 화풍에 매료된 교황은 기존의 벽화를 모두 제거해버리면서까지 라파엘로에게 새로 벽화를 그리도록 한 것이다.

  글쎄다.  아무리 유명세를 얻었다고는 해도  라파엘로가 직접 자기 손으로 선배들의 작품을 깡그리 제거해 버렸을까?

  어찌되었건 이렇게하여 흔히들 '라파엘로의 4개의 방' 이라고 일컬어지는,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을 시작으로 하여, '엘리오도르의 방(Sala di Eliodoro), '보르고의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el Borgo),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stantino)'을 만드는데 10년 이상을 매달리게 된다.  그러던 라파엘로는 마지막 방인 콘스탄티누스의 방 마무리 작업을 하던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7세 때에 벌어진 일이다.

  주변에서 흔히 말하길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으로 레오나드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꼽는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듣게되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전성시대에 해당하는 3대 화가'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그렇게까지 굳이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냥 '르네상스의 3대 거장' 하면 차라리 나는 레오나드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브라만테를 꼽고 싶은 사람이다.  결코 라파엘로를 폄하하거나 그의 작품세계를 무시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라페엘로를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반열에서 취급해야한다는 사실이 쬐끔은 못마땅 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 입장일 뿐이다.

  굳이 화가라는 직업이 아니어도 다방면에 재능이 아주아주 특출했던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천재라는 단어는 이런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켈란젤로야 말로 진정으로 르네상스를 완성시킨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파엘로에게서는 이들과 비교가될 정도의 탁월하거나 아주 특출난 재능이나 천재성을 내세울만한 것이 조금은 부족해 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라파엘로에게도 남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천재성이 분명히 있다.  그 누구보다도 다른 화가들의 뛰어난 점을 재빨리 깨우치고 습득하는데 있어서 탁월했던 것이다.  스승인 페루지노에게서 화가 수업을 받고 독립하였지만,  그의 회화적 정서의 기반이었던 피렌체만 하더라도 이미 라파엘로를 능가하는 화가들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르네상스가 전성기였고 그 한복판에 피렌체가 있었던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천재성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그들의 장점만을 하나씩 하나씩 습득해 나가면서 놀라울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을 거듭해 나갔던 것이다.  20세가 넘어서면서 그는 이미 유명한 화가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 난 라파엘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하여 자신만의 천재적인 습득력과 재창조력을 바탕으로 레오나드로 다빈치로부터 안정적인 구도와 명암법과 함께 스푸마토 기법을 깨우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신보다 앞서서 로마에 와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브라만테의 도움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보게 되었지만,  이를 통해서 미켈란젤로식의 인체 표현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표현하자면,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만큼의 천재성이나 예술적 재능은 가지지 못하였지만, 인상적일만큼 뛰어난 외모와  다정다감한 인간성과 겸손하면서도 상냥한 매너 덕분에 자신이 가진 실력 보다도 더 후하게 점수를 받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재능인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많은 그의 작품중에서도 (아테네 학당) 만큼은 진정한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작품에 손색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살아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풍요를 맘껏 누렸던 이 행운아는 죽어서도 판테온이라는 로마의 절대 성역에 고이 잠들어 있다.  르네상스를 통털어 최고 금수저라면 당연히 라파엘로인 것이다.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당시에 화려하게 꽃피운 르네상스에 의해서 새롭게 부각된 고전과 인문주의를 대단히 중요시하게 되어,  라파엘로로 하여금 인간 지식의 4대 영역이랄 수 있는 신학(Theology). 철학(Philosophy). 법학(Jurisprudence). 예술(Poetry)을 주제로 하는 벽화를 자신의 개인 집무실이자 서재라 할 수 있는 방의 네 벽면에 그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고스란히 수용한 라파엘로는 네 벽면에 네 가지의 그림을 그렸다.

  신학을 주제로 한 그림은 '성체논의(Disputation over the Most Hole Sacrament)'다.

  철학을 주제한 그림이 그토록 유명한 라파엘로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이다.

  법학을 주제로 한 그림은 '기본적인, 신학적인 덕목과 법(Cardinal and Theological Virtues and the Law)' 이다.

  예술을 주제로 한 마지막 그림이 바로 '파르나수스(Parnassus)'인 것이다.

 

 

 

 

 

 

 

신학을 주제로 한 '성체논의(Disputation over the Most Hole Sacrament)'  라파엘로 作.

 

 

 

 

 

 

 

 

 

  카톨릭 교회의 미사중에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한 목소리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나서 차례대로 성체를 모시려고 제단 앞으로 나아간다.

  카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타종교인들이 목격하게 된다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굳이 이성적 논리까지는 꺼내지 않는다 하여도 21 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다소 이질적인 이벤트처럼 여겨질게 뻔하다.

  '어떻게 빵이 몸으로 변했다고 믿을 수가 있고 또 그 빵을 받아먹으려 눈을 지긋이 감고 감격한 표정으로 선뜻 나서느냔 말야?' '빵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 이고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라는 말을 어떻게 믿는냔 말이야?' '저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있단 말이야?' '그게 21세기인 현실에 말이 돼?' '그럼 입증해 봐. 분석해보면 알것 아냐?' 라고 다소 비웃음 섞인 질문들을 쏟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신기할뿐더러 신비스럽기까지 한 카톨릭의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역시나 신비한 방법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기회나 방법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만 이 신비를 이해아고 믿을 수 있을것이란 이야기이다.

  이같은 성체의식은 카톨릭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기독교(정교회. 개신교)에서도 더 이상 깊이있게 고심하거나 따지려 들지 않으면서도 부활절. 추수 감사절. 성탄절 등의 특별한 날에 성찬의식으로 행하여 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특유의 예식행위에 대하여 처음 기독교가 탄생하면서부터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었고 수많은 논의를 거쳐 오늘날에까지 내려왔다. 이것을 '성체논의(Disputation over the Most Hole Sacrament)' 라고 부른다.

  삼위일체대축일(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다) 바로 다음 주일에 거행되는 성체성혈대축일은 한마디로 '성체의식'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그러한 의식이 하나의 정식 교리로서 제정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를 다룬것이라면, 바티칸 공회의를 통한 성체논의는 카톨릭 교회의 존재 이유와 방식에 대한 문제를 다룬것이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라고 하겠다.

 

 

 

 

 

 

 

 

 

 

 

 

 

서명의 방 천장에는 각기 (신학) (철학) (예술)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네 명의 여신이 그려져있다.

 

법과 정의의 여신.(네 명의 여신들 중 하나)

 

이 그림의 소실점은 제단 위에 놓여진 몬스트랜스(Monstrance)에 맞추어져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라파엘로 다운 방식으로 구현해 낸 탁월함이 느껴진다.

 

 

 

 

바티칸의 교황 집무실 벽화에 '사브나롤라'(자주색 수도사복)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충격적이다. 

 

 

 

 

 

 

 

 

 

 

 

 

 

 

 

 

 

  거룩한 성체에 담겨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전달할 수 있을까?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 에게도 실로 버거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믿음이 아예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아직 작은 사람들에게 이 무한한 신비를 어떻게 납득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교회는 어떻게든 이를 납득 시키고 믿게끔 하여야만 되는 필요성과 정당성의 기로에 서게 되었으며,  이 역활을 청년 라파엘로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라파엘로에게와 같은 요청이 들어온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것이 과연 어떤것이 있을까?

  믿음에 이미 상당한 거리를 둔 사람들에게,  더하여 합리적 이성과 과학을 앞세운 사람들에게 이 무한한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만 한단 말인가?

  초기교회 역사에서 벌어졌던 (성 삼위일체 토론) 이나 (성상파괴 운동) 이라면  역사적인 관점에서 나름 피력을 할 수 있겠지만, (성체 논의) 라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고나 할까?  오로지 기독교 안에서만의  어떤 신비로운 믿음이나 의식에 대한 서약이라 해야할까?  도대체 이를 어떤 논리로 설명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혹여 이 대목에서 논리를 따진다면 신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닐까?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에 처음으로 그린 (성체 논의) 속에서 우선 천상과 지상의 둘로 나누었다.

  구름 위의 상부는 천상계,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를 나타냈으며 구름 아래로는 성직자와 성인들과 교인들이 집회를 열고있는 인간들의 세상으로 표현했다.  구약과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와 사도들을 포함하여 기독교적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황금돔 앞쪽에 근엄한 표정의 하나님 시선이 어디론가 먼 곳을 응시하시고, 그 아래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위로 영광스러운 아우레올(aureole)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좀 더 작은 아우레올 가운데에 흰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빛나고 있다.  (성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탄생한 기독교는 이 (성 삼위일체)의 완성 위에 비로서 유일신 종교로 완성된 것이다.  이 역시 다분히 무한하게 신비로운 믿음의 영역이라고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레올 영역에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그럼 요셉은 어디 있을까?  이 그림에 요셉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에 성모 마리아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세례 받은 예수' 등의 성화를 통해 세례자 요한 또한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정장 성인으로 추대는 받으셨지만,  예수의 탄생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벗어나면  '나사렛의 요셉'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하긴........  거룩하고 신비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성체 논의' 한 귀퉁이에 나사렛의 요셉이 불쑥 등장해 버리면....... '성 삼위일체'가 자칫 흔들릴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라파엘로가 '성체 논의'를 그리는 동안에는 요셉이 멀리 나사렛 요양원에 장기 입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둘기 성령의 아래로는 큐피트 모습을 한 아기천사(케룹) 두 명이 각기 두 권씩의 책을 펼쳐들고 있는데,  이는 '위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면서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인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을 나타낸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금장을 두른 파란 직사각형의 제단이 놓여있고,  그 위에 몬스트랜스(Monstrance)가 올려져 있다.  몬스트랜스는 교회에서 예식에 쓰여지는 전래용구라 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청체를 담아 놓는 용구로 쓰인다.

  이 그림의 핵심이며,  이 몬스트랜스를 꼭지점으로 하여 천상과 지상은 물론 모든 등장인물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몬스트랜스에 담긴 성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뜻이라 하겠다.

  몬스트랜스가 놓인 제단으로 여겨지는 사각형의 돌은 '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고자하는 의도가 담겨있으며,  이는 이곳이 곧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깨우침을 은근히 강요하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신성한 장소이며 그의 후계자인 사도 베드로가 묻혀있는 절대성지라는 로마카톨릭 신앙에 대한 속성을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제단 상부의 금색테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교황 율리우스 2세'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글씨가 교묘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2세는 바로 이 그림 제작을 의뢰한 사람이다.

  중세시대 성화에는 그림을 주문한 교황이나 부유한 상인이나 정치가들은 물로 화가 자신이 은근하게 슬며시 그려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이런 이유를 설명하자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하여 '성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단테)를 이야기 할때 제대로 한 번 다시 거론하기로 하겠다.  단테의 (신곡)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성체(聖體)에 관한 특별 쎄미나에 초대된 지상세계 사람들 면면을 살짝이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왼편으로 고개를 숙인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성 제로니모' 다.  영어로 '제롬' 이라고도 불리는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헬라어(그리이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제롬은 서기 391년에서 406년까지 약 15년에 걸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예수 십자가 사건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이 이미 존재했었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신약성경은 시자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쓰여진 기록들이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탄압으로 궤멸되었고 12사도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퍼져나갔고,  한 세대쯤 지나서 사도들의 제자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에 의해서 4대 복음서가 쓰여졌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거나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매우 특별한 사도로 여겨지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쓰여진 로마서. 데살로니카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등등의 7개 서신은 4대 복음서보다 일찍 쓰여졌을것으로 생각된다.

  최초 성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졌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후 부활 사건을 목격한 기독교인들이 뿔뿔히 흩어진 곳은 대부분이 그리이스 지역이었다.  로마와 불가리아 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리이스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터키지역(당시는 그리이스 영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카파토키아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정도를 확실하게 기독교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실제의 현지 지역 선교를 위해서 처음 히브리어로 쓰여졌던 성경은 이후 헬라어(그리이스어)로 번역되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에 수도사들에 의해 필사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지극히 고위 성직자들만의 교유 영역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심지어 영주나 왕들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글을 아는 극소수의 고위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독점했다.  그것이 중세 암흑기다.  교회는 모든 학문을 페기처분해 버렸다.  신을 찬양하며 신에게 무한정의 절대 복종만을 강요하는 방패 역활을 담당하는 허울뿐인 신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로마카톨릭에 의한 분서갱유가 유럽에서도 벌어졌다.  성경을 인용하는 교황의 설교마저도 시기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 해석이 제각각이었다.  

  한 수도사가 교황을 쫓아다니면서 그의 설교를 집약시켜 기록으로 모아 두었다.  어느날 교황의 설교 내용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교황은 존엄한 권위를 앞세워 소요자들을 징계해 내치고자 했다.  그때 설교 기록을 가진 수도사가 나서서  교황의 성경 해석이 몇 번이나 부당하게 왜곡되었는지를 증언했다.  교황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도사는 사탄을 숭배하는 이교도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후 일체의 기록을 금지 시켰으며 모든 서책은 불태워 졌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출신의 '성 제로니모'가 나타나 헬라어(그리이스어)로 적혀진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교황청)의 반발은 당연히 극에 달했다.  살해 위협과 종교재판 회부 등의 압력과 회유가 뒤따랐다.

  하지만 제로니모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읽고 깨우칠 수 있도록 만국통용어인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 보급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은총은 온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겠다는 소신이자 사명의식을 재천명 한 것이다.

  교회에는 엄청난 타격이 가해질것이 분명했지만,  제로니모가 내세우는 대의명분을 거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 번역의 과정에서 교회(교황)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권위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이 총동원 되었다.  더우기 그릇된 번역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었던 제로니모는 계속적으로 수정을 가했으며,  구약 성경의 경우는 심지어 그리이스어 구약성경을 배제하고 본래의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직접 해석하는 노력까지도 서슴치 않을 정도였다.  1546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는 제로니모의 번역성경을 로마카톨릭의 공식성경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다시 수 백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그 시간 안에는 수많은 사건과 비화들이 켜켜히 쌓여있게된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제로니모의 해석이나 번역에 대해 종교적으로 도저히 이해나 납득할 수 없는 상당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리이스 정교회 주도로 헬라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전인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 내용들이 새로 만들어져 추가로 기록된 부분들이 여러군데서 드러났다.  거기에 외경(성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문서)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불변의 진리인 성경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겨우 완성되었으며,  그 또한 교회(로마카톨릭)가 납득하고 허락할 수 있는 내용들로만 취합된 결과물이라는 뜻이 된다.  거기에다 히브리 시절(초대교회)에는 없었던 사실들이 여러군데 새롭게 만들어져 추가되었다는 사실도 확인 되었다.  가려졌던 진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입증되었다면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서 추가되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꾸며진것이라면 이는 대단히 심각한 여러가지 상황을 초해하게 된다.  현대에 발견된 쿰란의 (사해 문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외경이나 사해문서 등의 여러가지 문서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거나,  또 이후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고대 문서가 발견되지 말란 법도 없을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발견들이 기존의 교리와 다르거나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그릇됨을 지적하게 된다면 바티칸이나 기존의 교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 

  이렇게 여러 정황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어쩌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미 수많은 오역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기존 교리에 치명적인 어떤 약점을 만회하거나 감추기 위해 억지로 꾸며서 추가로 써 넣은 부분들이라 의심되는 영역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성서에 관한한 '바티칸은 이미 정형화된 절대적으로 신성한 틀'을 정해 놓았고 이것이 세속의 인간사가 아닌 천상의 계율 처럼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이나 이의제기는 신성모독이며 이단이고 이는 곧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뿐이다.  성경에 관해서는 보다 깊이있는 논의를 해 볼 수도 있겠느나, 그 방대함과 어느정도의 후폭풍도 감수해야만 할 것 같아서 차후로 역시 미루어 놓기로 하겠다.

 

  성체논의를 넘어서 지금 당장 화면 가득 펼쳐지고 있는 성찬예식을 다정다감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제로니모 옆쪽의 사람이 바로 '성 그레고리오 교황' 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격된 다음 약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성 그레고리오의 영향력 아래서 오늘날 교회(카톨릭. 성공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예식(미사)과 절차를 만들고 정착시킨 인물이다.  또한 각처에 흩어져있던 당시의 성가를 모아 '그레고리오 성가'를 만든 사람이다.  교회사는 그를 '기독교 전통 예절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시선을 들어 천상에 열려진 삼위일체를 마치 황홀경에 빠진듯한 표정으로 감탄해 마지않은 '성 암브로시우스' 가 보인다.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당당하게 맞서서 바티칸이 주장하는 서구의 정통 기독교를 지켜냈으며, 이후 성직의 개혁을 훌륭하게 이루어낸 성인으로 성방교회의 4대 교부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어떤 젊은이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듯이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스틴)' 이다.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이룩해 놓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가히 사도 바울의 업적에 버금간다는 평가가 뒤따를 정도이다.  로마카톨릭의 위상을 최고로 굳게하게 세운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성직자의 무오류' 내지는 '교회의 무오류성'을 주장하여 안착시킨 것이 그의 가장 큰 공로라 하겠다.  모든 성사(聖事)의 효험은 사제직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성스러움에 있는 것이지,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제(사람)의 품성에 따라 죄우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나 사제는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모든것이 이미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교회나 사제는 절대로 어떤 그릇됨이나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 성스러운 교회와 사제직에 내려진 신의 은총을 의심하거나 심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논리를 어찌되었건 기독교 안에 안착시켜 놓았다.  무한정의 절대적 권위가 생기게 되었고, 이후로 인류 역사 안에서 교회나 사제들에 의해서 벌어진 그 모든 잘못과 악행은 모두 하늘의 뜻이었기에 언제나 그냥 덮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것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공로였다.  그러니 교회는 그에게 성인 반열을 수백번인들 마다않고 떠받들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림을 통털어 가장 이목을 끄는 매력적인 사람은 아무래도 푸른 겉옷에 노란 복장을 한 금발의 르네상스 청년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청년에게까지 몰려온 모든 시선은 한 순간에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동적으로 몬스트랜스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 청년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전혀 없지만 어느정도의 추론은 가능해 보인다.

  라파엘로에게는 연인이 수도없이 많았지만  그때 그때마다 자신의 그림속에 당시 사귀던 연인을 슬쩍 등장시키는 묘한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가정하에서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라파엘로 연인이었던 마르게리타 루티를 인물의 주인공으로 추론할 수 있다.  다만 마르게리타를 예쁜 여인으로 그리지 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그린것은 모든 사람의 관심을 슬쩍 따돌려 보려는 라파엘로다운 장난끼가 아니었을까?

 

  옆으로 난간에 엎어진듯 기대어 서서 뒤를 돌아보는 인물이 나오는데, 누구라도 한 눈에 단박 알아볼 수 있는 이 사람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총책임자인 브라만테의 모습이다.  아마도 성전 건축에 관한 토론이라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우측으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이 보이고,  월계관을 쓴 단테가 보인다.

  그리고 붉은 수도사 복장에 채양 모자를 쓰고있는 지를라모 사보나롤라의 모습이 너무도 당당해 보인다.

  이 그림 전체를 통털어서 사보나롤라의 등장은 세세하게 그림을 살펴보던 나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롤라모라면 당연히 로마카톨릭의 역사에서 떨쳐버리고 지워내야 할 인물로 나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 여행기 쯤에서 한 번은 단테. 마키아벨리. 사보나롤라를 살펴 볼 장을 마련해야만 할까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그림 전편을 통해 흐르는 단 한 가지는 영원히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성체의식의 축복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라는 권고'를 이 그림은 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는 커다란 은사요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 합리적인 이성과 현대의 과학적 체험을 가지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는 당연히 무리일 수 밖에 없다.

  일단 '먼저 믿고나서 빵과 포도주를 먹으면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공허하고 영양가가 느껴지지 않는 허구이며 허상일 뿐이다.  혹, 배부리 먹을 수 있을만큼의 빵과 마시고 취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포도주를 나누어 준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것이 바로 '중세시대적' 이라고 나는 말한다.  무조건 일방적인 강압적 시도이다.

  라파엘로의 (성체논의) 내용이야 말로 지극히 구태의연한 '중세식' 이라고 나는 표현하겠다.  하지만 그림의 구도는 더 할 수 없이 신화적이다.  천상과 지상으로 나뉘고 큐피트 형상을 한 아기천사 케룹이 등장하는가 하면 구름에 떠받들여지고,  천상과 지상이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마치 고대의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것 같지 않은가.

  중세를 극복하고 르네상스가 새롭게 시작되는 모습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생겨날 정도이다.

  다양한 방식의 인물 표현과 화려한 색채가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그림이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라파엘로에게서는 딱 꼬집어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라파엘로의 방)  다른 작품으로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