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신약성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신교(多神敎)를 믿고있는 고대의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게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유일신(有一神)을 섬겼다. 여기에는 다분히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컸을것이라 짐작된다.
신(神)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며 우주를 창조하였고 삼라만상을 다스린다고 여겼다. 모든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물이지만, 그 신은 특별히 유대민족을 선택하셨고, 그에 대한 배려로 율법과 계율을 유대민족에게만 계시하였다고 믿고 따랐다. 인간이 참되고 가치있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해야 하는지를 구약성서(舊約聖書)를 통하여 정확한 가르침을 주시고 계신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시며 지극히 공명정대하시다. 그런 신을 기쁘게 하는것은 오로지 그의 율법에 따라 순종하는 일이다. 이것이 유대민족의 오랜 전통이자 그들의 삶 자체였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구약의 율법과 계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랐다.
하지만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재조명된 신은 민족이나 신분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를 따로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인간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굳이 계율을 지키려고 얽매이기 보다는 온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부득이 계율을 잘 지키지 못한사람도 신은 기억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가르침은 일대 쎈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히 하나의 혁명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렇게 베푸시듯이 인간들도 서로간에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고 잘못을 서로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제까지의 유대 전통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새로운 가르침이었으며 이를 복음(福音)이라고 기록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반듯이 찾아 올것이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구세주의 새로운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구도자의 삶을 살다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인간 구원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모두 성스럽게 이행하셨다. 예수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믿음을 찾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구세주와 더불어 영원한 삶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약속인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이제 유대민족을 뛰어넘어 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고르게 허락되었던 것이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신분의 지위고하나 피부색도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대민족만의 종교에서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활짝 열려진 새로운 기독교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유대민족에 의해서 지배되던...... 인간 세상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결코 아니었다.
유대인은 오히려 빼앗기고 지배를 당하던 피지배자의 신분이었던 로마제국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에게 구세주의 약속이나 영생은 그야말로 허상이며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그들의 통치에 장애가 될 뿐이었다. 로마는 참혹하게 기독교를 탄압했고 신앙을 지키려는 수많은 생명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예수가 사망하고난 후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믿고 따르던 믿음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로마는 아예 예루살렘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하교회에 숨어살면서도 기독교 복음을 믿고 다르던 사람들은 로마의 압력이 덜한 지역으로 흩어지면서도 더욱 끈끈하게 신앙의 맥을 이어나갔다. 이때에 등장하는 것이 에페소, 코린트, 데살로니카,카파토키아, 그리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새로운 신앙의 중심 거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여러가지 이유로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중심적인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는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생겨났던, 기독교의 발생은 오로지 유대지역 안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생겨나고 벌어진 일이었다. 예수나 사도들 모두 유대인이었다. 초기의 믿고 다르게된 사람들도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의 박해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졌고,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그리이스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허락된 믿음의 종교는 이제 유대인을 벗어나 대부분의 실제적인 종교적 리더들로 그리이스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종교 이전에 오랜 역사와 민족적인 유대와 그리이스 사이의 갈등이 깊게나마 분명하게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주 커다랗고 놀라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이스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기독교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가까운, 또는 예수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한...... 모든 민족과 인류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는 구원의 종교를 선포하고 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예수와 함게 지내며 직접 가르침을 수용했던 사도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하며 대단히 복잡한 여러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삼총사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모두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에게는 아직도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을 믿는 구약성경의 약속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가진 명분(기득권)은 오로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 분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엄청난 명분과 정당성은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정통성이기도 했다. 이런 정통성을 가진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여전히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지하에 숨어지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공평하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허락된 은총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부활 사건이 이루어진지 얼마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종교적인 기득권이 등장을 했고, 그것을 차지하고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분명이 있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사도들 중에서도 최측근 3인방이었다니............ 할렐루야............. 아멘.(초대교회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역활은 상당히 컷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로마카톨릭이 초기 사도들의 이런 오류와 함께 막달라 마리아를 기독교 역사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렸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굳이 다르게 설명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이미 이유는 대충이나마 밝혔으므로)
이런 사도들의 어긋나고 그릇된 행태를 보다 못한 라이벌이 등장한다. 사도가 아닌 사도......... 바울의 등장이다.
로마인이자 관리로서 다마스쿠스에 파견되던 바울은 도상에서 신의 부름을 받는다. 커다란 깨우침 뒤에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의 험난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바울은 로마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데 힘썼고, 이내 그의 명성은 지하에 숨어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의 복음이 사람들 마음속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는 불만이 터져나왔고 심기가 불편해져만 갔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경고를 보냈다.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자살한 유다를 대신해 정식으로 선출한 마티아를 새롭게 포함해 여전히 12명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생전에 예수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바울이 감히 사도를 운운하면서 헛되고 그릇된 하느님의 가르침을 남발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자 바울도 공개적으로 반박한다. 그릇된 교회를 허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릇된 예루살렘교회의 터를 성지라 여겨 차지하고, 온세상의 만백성을 모두 공평하게 구원하겠노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저버리고 여전히 개종한 유대인들만 우선구원된다는 거짓된 망상의 틀에 쳐박혀서 기득권 차지에만 혈안인 당신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유대인 제사장들과 다를바가 무엇이냐고 따지고 들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살벌하게 돌아갔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소환했다.
바울은 이 고난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법정에 서는것과 똑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소환에 응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바울 간에 끝장 토론이 벌어졌다.
사도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기독교적인 정통성이 있다면서 바울을 힐난하고 힐책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제거하고 싶었다. 바울은 이 소환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사도들의 그릇됨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약속하셨으며 어떻게 실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자신에 차고 당당한 태도로 청중에서 열변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억지와 진실의 대결이었다. 바울의 위대한 승리였으며 사도들의 참패였다.
하지만 이미 승패와는 전혀 상관없이 결론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종교지도자 재판에서 사도들은 바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기 전날 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더 신뢰하는 믿음의 간수를 통해 로마총독부에 억울한 로마인의 죽음을 막아달라는 청원을 전달한다. 즉시 로마관리가 파견되었다. 사형집행은 중단되었다. 로마시민권자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로마의 법정에서 로마의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도록 로마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민권은 그만큼 효력이 무궁무진한 특권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몰타와 시칠리아를 경유하는 동안에도 그곳에 기독교의 씨앗을 뿌렸고 이는 훗날 커다란 열매를 맺게된다.
다급해진것은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과 기독교인 지도자들이었다.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이 유대율법을 위반했다고해서 굳이 처벌을 받을 이유가 없을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이 필요한것은 바울의 사형집행 이었다. 바울의 죽임이었고 제거였다. 그런데 이제 바울의 회생을 뻔히 쳐자볼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이번 바울의 회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여겨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예루살렘 재판에서의 끝장토론에 대한 바울의 위대한 승리가 온 기독교 세계에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다급해진 야고보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서둘러 베드로를 로마로 급파한다. 좀 더 솔직히 접근한다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석방되기 이전에 서둘러 로마의 기독교를 장악하라는 밀명이었으리라. 석방된 바울이 당당하게 이끄는 로마의 교회 꼴을 도저히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조건 어떤 방법으로든 바울의 석방 이전에 로마와 인근의 기독교인들을 장악해 놓아야만 한다........ 더하여, 만약에 바울을 어떤 방법으로든 오래 가두거나 아니면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과감하게 실행하라는 밀명도 충분했으리라. 필요하다면 바울이 아주 악질적인 기독교의 중요 우두머리라는 고발도 불사할 판이었다.(그들이 적어도 사도의 신분이었을진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 사실을 모르거나 과연 용서해 주실것이라 생각했을까?) (그 대답은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의 가장 깊은곳에 주로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 형벌을 받고 있는지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고 본다)
바울은 로마의 법정에 섰다.
로마의 시민권자에게 내려진 유대의 율법위반은 당연히 무죄였다. 다만, 당시 바울이 로마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금지당하던 해악적인 신앙집단인 기독교인 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무거운 중죄였다. 대부분이 고문끝에 형장에 끌려가 십자가형이나 화형에 처할 중대범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시민권은 효력을 나타냈다.
바울에게는 2년의 가택연금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마도 이부분의 가택연금은 스스로 자제하라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조심스럽게 외출을 하고, 더하여 비공식적으로 그리이스 지역으로 은밀한 전도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종국엔 누군가의 모함과 밀고로 이런 사실들이 전부 드러나면서 다시 로마법정에 선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하면 석방되는 상화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부정하는 진술을 거부했다.
더는 로마의 법률도 로마시민권자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공적이자 모든 병페의 근원인 기독교의 유명한 지도자를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법정기록에서 바울의 예루살렘에서 호송과 가택연금 처벌과 다시 제보에 의한 체포는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의 모든 행적이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여 종교학자나 역사학자 비롯하여 모든 분야에서는 마지막 기록에서의 체포 이후에 재판을 받았고 윗쪽의 부조상에서 처럼 사형에 처해졌을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바울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부조상에서 보듯이, 형의 집행을 확인하는 로마군인만 있는것이 아니다. 뒤돌아서서 흘겨보고 있는 유대인, 유대인 종교지도자가 분명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한편, 야고보에게 등 떠밀려서 로마로 급파된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향한 베드로의 기록은 존재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이나 사망에 대해서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중세시대 쓰여진 로마 주재 교회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그리이스인들이 만든 지하공동묘지의 교회에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모아놓고 초대 주교에 취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으로 하여 베드로의 로마입성을 반증한다고보면 다소 미심쩍음은 있다해도 그가 일단 로마에 들어왔었다고는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을 것이다. 여기저기 로마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을 만났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생활했던 사도가 아니였던가? 하지만 그 나머지는 이해나 받아들이기가 다소 버겁다.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지도자이자 사도인 베드로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씀도 전하고 축도도 내렸을 것이다. 그런 숨어서 몰래 활동하는 그들의 만남과 신앙활동을 굳이 '교회'라는 이름을 덧씌워서 '초대 주교'에 취임했다고 할 필요까지가 있었을까? 이는 다분히 훗날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바티칸의 정통성이 유대인 사도에서 시작되는 정통성을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꾸며져서 삽입되었다고 보는것이 어디까지나 나의 시선이자 관점이라 하겠다.
예루살렘을 떠난 이후의 베드로에 대한 행적은 어떤것도 남아있지 않다. 로마카톨릭 안에서의 주장과 내놓는 자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교회의 주장을 진실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는데는 성경이나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한 소설가가 쓴 (쿼바디스)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로마에서 도망치던 베드로에게 로마를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현상이 나타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십자가 지기를 꺼려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는 길이다' 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고, 신앙을 고수하다가 순교하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다가 붙잡혀서 원형경기장에 끌려나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새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겠느냐? 나는 거꾸로 매달려 죽겠다'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처형을 받고 순교했다는 이야기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이 마치 성경책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한다.
어쩌면 그것은 '로마카톨릭'만의 간절한 바램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 또한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역사학자들은 교회사를 넓고 보편적인 세계사 속에서 들여다보고 판단한다. 진위여부를 따져보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를 교회는 지극히 부당하고 불편하게 생각한다. 거기에는 오로지 믿음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남겨져있지 않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아주 가끔은 교회가 자청하고 나서서 역사 기록에 비추거나 따져보고자 나설때가 아주 간혹 있다. 성서속의 이야기가 사실로 담겨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될때만 말이다. 그러때 교회는 교회사가 결코 허구가 아닌 사계사속에 엄연히 실재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역사이던 교회사이던 어쩌다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모두 오픈하고 모두 따져보면 안되는 것일까? 다 떠져보고 믿으면 불경이라 했던가? 일단 믿고 나면 깨닫게 되고 그러고 나면 보일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로마교회는 예루살렘에 뿌리를 둔 유대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차지했다. 사도 베드로의 후예들이다.
이 과정에서도 외경(外鏡)이나 유대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교회를조직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수장인 야고보와 베드로 사이에 심각한 대립과 마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이는 장자권에 대한 다툼으로 해석된다. 이런 다툼은 이후로 사도들이 한명씩 한명씩 로마에 의해서 순교당해 사라지게됨으로써 정통성 내지는 장장권에 대한 다툼이 점차 사그라지게 된다. 더하여 그 와중에 외경에 따르면 사도들 전체와 막달라 마리아의 대치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표현들을 쏟아내게 된다. 결국 이런 모든 사태들은 종국에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정리가 이루어 진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어떻게든 결론이 나게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로마제국의 압제하에 놓여 있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1세대 2세대들이 사망하게되자 로마의 카톨릭교회는 점차 고립이 심화되어 갔다. 예루살렘의 기독교가 침체되자 많은 사람들이 카파토키아로 옮겨갔다. 이제 로마를 제외한 기독교는 에페소르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카파토키아와 알렉산드리아는 성직자 양성의 중요 거점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런 흐름은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로마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활동의 자유를 허락했다는 의미이다. 로마는 아무리 억압하고 탄압을 가해도 꿋꿋하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기독교 정신을 끌어들여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를 로마사회라는 지상으로 끌어내오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서 힘과 동력을 꺼내고자 함에는 동조세력이 필요했다. 로마는 당연히 가까이에 있던 로마교회의 지도부를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전 제국의 영토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독교의 대표자 선출을 요청했다. 2세기 이상의 기간동안 로마교회와 나머지 모든 교회들간에 이러한 기득권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상황에서 로마교회(베드로의 후예들)가 이런 기회를 내버려둘리가 만무했다. 로마교회는 자신들 스스로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정통성을 갖추고 있다고 내세우면서 로마제국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자연스럽게 진출했다.
이젠 지하로 숨어다니며 실낮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고난속에서 믿음을 이어가던 과거의 교회가 아니었다. 오래지않아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승격되었다.
이미 기독교내에서의 정통성 확보와 제도정비에 성과를 본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위상에 걸맞는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눈치 챈 황제는 로마에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거대한 교회를 짓도록 허락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현재의바티칸이 아닌 초대 교회)'는 이렇게 해서 지금의 자리에 건설되었다.
로마교회는 베드로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선택받은 후계자이며, 그의 무덤 위에 지어진 교회야말로 모든 기독교의 총본산이자 구심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고 싶었다. 자신들은 그 베드로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제 초대교회의 질곡과 고난의 역사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로마제국이 이제는 기독교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숨어다니고 쫒겨다니던 신세에서 이제 로마제국이 가능한 일은 모두 기독교 지도자들도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엄청난 권력과 부와 사치와 향락이 저절로 교회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교회는 짧은 시간만에 본질을 잃어버렸다. 교만해지고 나태해지고 타락해 갔다. 하지만 이미 향락에 젖어버린 교회의 파행은 그만 도를 넘어서고 말았다. 제국의 황제가 점차 교회에 환멸을 느끼게된 것이다. 황제 스스로가 교회를 선택한것은 지극히 타당한 선택이었으나, 문제의 핵심은 제도권으로 끌어들인 로마교회 지도자들의 자질에 있었던 것이다. 어는 순간부터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 황제에게는 로마라는 거대한 먹이를 탐하는 이리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로마교회를 떨쳐내는 방도를 찾게되었다.
황제는 로마를 둘로 나누어 절반인 동로마만을 데리고 멀리 소아시아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을 계획했다. 로마교회가 나서서 천도를 반대했다. 어떠허게 차지한 기득권인데....... 겨우 권력과 부와 향락에 취해보았는데, 이 모든것을 포기하고 먼곳으로 천도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그제까지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동로마는 떠났고, 서로마는 멸망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교회는 사치와 향락에만 심취해 있었다.
멸망한 제국의 영토 위에 달랑 혼자남은 로마교회(로마카톨릭)는 이제 스스로의 안위를 돌보기에도 벅찬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을 힐끔 힐끔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동로마 황제의 마음속엔 로마교회에 대한 회의와 환멸 뿐이었다. 그 실망과 페단이 어찌나 컷음인지 비잔틴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황제는 로마교회 대신에 지중에 연한에 흩어져있던 기독교 세력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그리이스 정교회'를 제국의 기독교 대표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그친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법률로서 비잔틴의 황제가 국교인 기독교의 수장(정교회 총대주교)를 임명한다는 조항을 마련하여 제정했다. 교회가 분명하게 황제의 지휘를 받는다는 법령이었다. 그만큼 로마교회의 황제에 대한 간섭과 파행이 지나쳤던 때문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황제의 명령을 통하여 로마의 영토에 남아있는 로마교회를 그리이스정교회의 산하에 두고 지도를 받도록 제도적 장치를 법령으로 제정했다. 로마카톨릭의 추락이었다. 숨어다니던 기독교에서 하루아침에 로마에 국교까지 올랐다가,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제국의 황제를 업신여기며 행패를 부리다가 다시 하층민의 처지로 곤두박질 치게된 것이다. 로마교회는 추락했고 하루아침에 세상으로부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와신상담, 절치부심........ 로마카톨릭은 자나깨나 오로지 재기를 꿈꿨다. 권력과 부의 달콤함에 실컷 취해보았던 그들이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광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궁리만 하기 시작했다.
비잔틴의 전성기가 지나자 옛 서로마제국의 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고, 훈족의 남하에 쫒긴 게르만족(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어서 프랑크 왕국이 이 지역에 들어섰고, 카롤링거 프랑크 왕족이 마침내 서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하고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은 곧 부활의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샤를마뉴 카롤링거 프랑크왕을 로마로 초청했고, 용의주도하게 사전 계획하였던 바대로 얼떨결인것처럼 속여서 샤를마뉴를 부활한 서로마제국의 황제에 임명했고 즉석에서 거창하게 대관식까지를 거행했던 것이다.
이를 기회로 로마교회는 비잔틴제국과 동방정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진정한 '바티칸(Vatican)'의 탄생이었다.
로마교회의 대주교이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장을 이제는 '교황'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또한 교황은 당연히 초대 교황으로 헌정된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교황)의 목표는 결코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노라.)
-- 마태복음 16, 18~19
'기독교 전승(인류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카톨릭내에서만 인정되는 교회사)'에 따르자면 사도 베드로는 AD. 64년에 로마에 체포되어 네로의 콜로세움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십자가 쳐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의 그의 직분은 로마교구의 초대 주교였다. 이는 곧 초대 교황을 의미한다. 그는 인근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순교자의 시신에 위해르 가하려는 불손한 무리의 손길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모처에 숨겨졌다가 후에 처형장 인근의 지하묘지에 모셔졌으며,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건립하게되었으니 바로 '성 베드로 성당'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 전승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오로지 카톨릭만의 주관적인 주장이다. 정교회나 개신교는 카톨릭의 기독교 전승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대성당이 아닌 4세기 경에 기독교 공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에 의해서 세워진 애초의 베드로 성당을 말한다. 이렇게 보자면 옛(올드) 대성당의 명칭은 정확하게 '성 베드로 대성당(Old Basilica Sancti Petri)'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듯 싶다. 326년에 시작되어 약 30년만에 완공된 대성당은 애초에 언덕을 깍아서 안정되지 못한 지반위에 급하게 건설되었던 탓에 1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자 여기저기에서 수리를 넘어서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청은 낡은 대성당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여 1506년에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하는 120년간의 대역사에 돌입하게 된다. 이렇게하여 새롭게 등장한 '뉴 베드로 대성당(Basilica Vatican)'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이렇게 커다랗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성스럽게 건설된 대성당이지만 사실 조금만 내막을 들여다보게되면 의아스러운 일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베드로 대성당의 최초 건성당시부터 이미 이곳이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사실에 회의와 부정적인 시각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의문은 고리에 꼬리를 물고 버젓이 존재했지만, 정작 베드로의 후예들은 단 한번도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고 어떤 증거도 없었다. 현대에까지도 베드로의 로마행 행적에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오로지 기독교 전승이라는 카톨릭내에서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이곳이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로마교회의 주장일 뿐이며, 그렇게 여기고 싶고 믿고싶은 로마카톨릭 신자들 뿐이었다. 오로지 그런정도의 믿음 위에 대성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성당은 완공되었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로마교회는 베드로의 무덤을 주장했고, 세상은 이를 의심하고 부정해 왔다.
AD. 800년에 로마카톨릭의 교황이 샤를마뉴를 서로마황제에 임명함과 동시에 비잔틴의 동방정교회로 부터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천국의 열쇠를 주었고, 로마교구의 대주교인 교황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베드로의 무덤위에 건립된 '베드로 대성당'의 권위와 정통성을 거듭 주장하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또 한번 사도 베드로의 로마행에 대한 진실성과 베드로의 무덤에 대한 진위여부가 세상을 들끓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카톨릭이 증거로 제시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줄 알고 우선 믿고나면 저절로 알게될거란 식'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후로도 바티칸의 주장은 한결 같았고, 당연히 내놓은 새로운 증거는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런 흑역사를 어떻게든 서둘러 지우고 싶어서였을까?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옛 대성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차후로 21명의 교황이 재위를 거쳐가고 120년 동안 쉴새없이 계속적으로 건축이 지속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천문학적 건축비를 미처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판테온을 뜯어다 자재로 사용하게 되고, 심지어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티칸 대성당은 바로 이런 더럽고 어두운 역사 위에 건설되었다. 이런것을 두고 과연 진흙밭에서 연꽃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약탈과 살생과 무모한 전쟁이 바로 여기 성스러워야 할 바티칸 때문에 생겨났고 저질러 졌다. 눈에 보이는 거룩함과 성스러운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닌것이다.
아룰러 그러한 숱한 바티칸이 자행한 성스러운 선택과 행동(?)은 모두 신(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저들 가해자의 말로는 '신의 가호와 지지와 보살핌 속에 성스럽게 모두 이루어졌다'고 거듭 주장해 왔다.
1950년 12월 23일(우리나라가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라디오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진 교황 비오 12세의 음성은 감격에 가득차 떨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저공간을 보수하던 중에 성 베드로의 진자 무덤을 발결했다고 발표했다. 더군다나 성탄절을 앞둔터라 세계여론은 들끊었다. 무덤 주위로 베드로란 글자가 새겨진 낙서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출토된 유골이 서기 1세기 경에 사망한 60대 중반의 남자라고 발표했다.
그러했음에도 학계의 의심스런 눈초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의 고고학이나 과학발전 수준이 유골 감정을 통해 1세기 단위의 판정이 불가능했을 뿐더러, 유골 감정 역시 카톨릭의 일방적 주장이 아닌 고고학, 인류학, 생체학, 의학들을 포함시켜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접근과 판정을 요구하였으나 교황청은 이를 모두 부인하고 거절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 발견은 더 많은 의혹을 증폭시켰고 교황청은 또다시 깊은 침묵으로 답을 했다.
1968년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는 정밀검사에 다시 맡겨본 결과 베드로 부덤에서 나온 유골이 여러 정황상 '사도 베드로의 유해'가 거의 확실했다고 발표한 후에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묻었다고 발표했다. 역시나 공동 조사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과 재론을 거부하는 봉인의 수순을 밟았던 것이다.
모든 판단은 지극히 높은곳에서 영원히 침묵을 고수하고 계신 그 분........ 절대자의 고유영역인가?
과연 무엇인 진실이란 말인가?
이것은 신앙과 비신앙의 문제가 아닌........ 인간이란 거룩한 존재로서의 당신이 판단할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판단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확고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대성당(바티칸)이 기독교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교회인 것이다. 아울러 거기에는 카톨릭 총본산을 넘어 절대적인 기독교 성지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하기로서도 '성 베드로 대성당'이 모든 교회중에서 으뜸 교회는 결코 아니다. 로마 교구의 대성당이라는 참 명예를 간직하고 세상의 모든 카톨릭 교회중에서 으뜸 교회로 인정받는 곳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로마의 교회 순례에서 다시 거론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지금의 바티칸 처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으나 초기 로마교회에서 중세까지도 로마카톨릭은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에 모든 사활을 걸었지않나 싶어지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한 사례는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바티칸 대성당의 파사드 안쪽 복도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광장의 계단을 통해 복도에 들어서서 본당으로 통하는 다섯개의 문 중에서 한가운데 놓인 '필라레테의 문(Forta del Filarete)' 앞에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있는 둥근 모자이크 타일로 바닦을 장식해 놓았다. 서기 800년에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이곳에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통해서 서로마의 홪제로 즉위할 때 엎드렸던 지점을 따로 표시해 놓은 것이다. 아마도 황제를 임명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교황이 올랐다는 역사를 기록해 두고 싶었던 교황의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리라. 아울러 세속의 권력까지를 탐하던 교황의 극에 달한 탐욕을 상징한다 하겠다.
이 같은 업적과 다행스런 감사는 결코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르텍스(열주회랑, 복도)의 깊숙한 양쪽으로는 종탑의 기단부분을 마치 성스러운 제단처럼 꾸며놓았으며, 두 개의 멋지고 늠름한 기마상이 꽉 찬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기독교 역사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지만,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바티칸을......... 교황을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끔 만들어준 존재들이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한 쪽에는 말을 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역시 말을 탄 샤를마뉴 대제가 폼나는 자세로 등장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을 제국의 정치권력으로 이끌어 안내해 준 사람이다. 거기에다 끝내는 교황청의 조작으로 드러났지만 희대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라는 문서까지 조작하여서는, 마치 황제가 서거하면서 로마제국 자체를 로마카톨릭에게 무상으로 헌납했다는 역사적 범죄를 기꺼이 허락해 준 지극히 성스럽고 현명하며 거룩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샤를마뉴 대제야 말로해 더 무엇하겠는가?
쫄딱망하다 못해 비잔틴의 그리이스 정교회 노비로 전락한 로마카톨릭을 불쑥 나타나서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나아가 비잔틴과 담판해서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 그래도 모자라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일신지하 만권지상(一神之下 萬權之上)'의 지극히 고귀한 지위로 신분세탁까지 완벽하게 시켜준 분이 바로 샤를마뉴가 아니었던가?
그랬다면 기마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정도였어야지, 굳이 엎드려 임명장을 받던 치욕의 장소를 따로 표시로까지 남겨둔 심뽀는 무엇일까? 내심 자신의 승리를 영원히 남겨 기념하려는 헛된 야욕에서 나온 옹졸함이 아닐까?
본당으로 통하는 다섯개의 문도 하나하나가 귀한 예술작품 들이다.
가장 왼쪽의 '자코모 만추'가 제작한 청동문은 '죽음의 문'이다. 교황이나 왕들의 장례시 이 문을 통해 장례행렬이 통과하는 문이다.
다음은 '선악의 문'으로 루치아노 민구치가 비교적 최근이랄 수 있는 1977년에 완성했다. 예전과 달리 이번 여행에선 이문을 통해 왕래했다.
가운데의 '필라레테의 문'은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을 찬미하는 청동부조상으로 이루어진 문은 피렌체 출신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아베를리노'에 의새 15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작가의 별칭을 붙여서 부르게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으로 더욱 유명해진 문이다. 더하여 중앙문인 필라라테의 문 윗쪽으로는 대성당이 보유한 보물중에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만든 모자이크화 '나비첼라(Navicella)'가 있다. '작은배'라는 의미의 나비첼라에는 물 위를 걷고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카톨릭의 7가지 성사를 묘사한 청동부조상으로 이루어진 '성사의 문'은 '베난치오 크로체티'에 의해서 1965년에서야 완공되었다. 선악의 문과 더불어 대성당을 주로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문은 맨 오른쪽의 '성스러운 문(Porta santa, 혹은 The Holy Door)' 이라 불리는 문이다. 1749년에 나무 패널로 만들어졌던 문을 1950년 '비코 콘소르티'가 청동패널에 금박을 입힌 패널로 교체작업을 하였다. 이 문은 카톨릭에서 성스러운 행사로 여기는 '희년'을 상징한다. 구약성서 레위기에서 기원한 유대민족의 희년 풍습은 애초에는 100년 마다 치루어졌으나, 이것이 50년 단위로 줄어들더니 2000대에 들어서는 다시 25년 단위로 줄어들어 거행되고 있다. 희년이 되면 노예로 팔린 사람을 풀어주고 저당잡힌 재산을 풀어주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여 이 성스러운 문은 25년마다 한 번씩 열리게 된다. 2015년 12월 8일 희년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은망치로 문을 가로막아 놓은 벽돌을 두들기는 개문의식을 거행한 후에, 축복기도와 함께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해주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성당이라고도 불렸던 본래의 성 베드로 대성당(Old Basilica Sancti Petri)은 사실은 교황이 체류하면서 교회일을 보던 장소가 아니었다. 성당의 중앙에 설치된 사도 베드로의 가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묵어가는 거주용 숙소로 지어졌던 것이다. 16세기에 들어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이 완공되기 전까지 교황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는 라테라노 궁정에 기거했다. 교황의 직분 또한 라테라노 대성당의 로마교구 대주교였다.
아비뇽 유수 70년의 시간은 실추된 교황권으로 인해 교황청의 위기이기도 했지만, 방치되다시피 한 베드로 대성당의 수난기였다. 성당은 이제 부분적인 보스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노후화가 심각해졌다.
새로운 대성당의 건축 필요성을 직감한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콜로세움으로부터 2.522개의 석재를 반출했다. 교회가 성당을 짓기 위하여 로마의 고대유적을 과감하게 훼손시키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돔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판테온의 지붕 청동판을 일부 뜯어오는 것으로 보아, 대성당의 건축에 여러곳은 문화유산이 피해를 보게되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교황은 알베르티와 로셀리노에게 새로운 성당의 설계를 명령하기까지 하였으나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더하여 새로운 대성당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예기치못하게 급사하자 오래된 성당을 허물지 못하게하려는 하늘의 저주가 내린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햇음에도 기어코 율리오 2세 교황에서부터 20명의 교황이 대를 물려가면서 120년에 걸쳐서 마침내 바티칸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에서부터 시작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줄리아노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를 거쳐 '라파엘로'로 이어져 나갔다. 라파엘로가 37세로 요절하자 다시 '페루치'로 이어졌는데, 느닷없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가 스페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들이닥쳤다. 스페인 군대는 로마를 휘젖고다니면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한참 건설공사중이던 대성당 건설현장도 참화를 당하고 말았다. 건설공사는 오랫동안 중단되었고 페루치도 공백 기간에 사망하고 말았다. 안토니오 상갈로가 책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가 이는 다시 나이 70줄에 들어선 미켈란젤로에게 넘어갔다. 대성당 건축에 기여한 미켈란젤로의 공은 매우 큰것이었다. 앞선 책임자들의 발상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계안을 덧씌워 나갔다. 돔의 설계를 완공했고 돔의 기초인 원통형 초석을 올리던 단계에서 미켈란젤로가 사망했다. 자코모 비뇰라와 조르조 바사리가 책임을 이어 받았다. 그리고 자코모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로 공사 책임자는 계속 바뀌며 이어져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도메니코 폰타나가 대성당의 돔 위에 랜턴(채광창)을 올려놓음으로써 완공되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완공에 총책임자는 아니었지만 바티칸 대성당의 건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있다. 총책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가 바로 그사람이다. 그의 역활은 앞섰던 위대한 건축가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에서부터 대성당의 모든것을 리모델링하는 작업이었다. 광장의 오벨리스크에서 부터 가장 안쪽의 제단까지를 일직선상에 놓으려는 브라만테의 설계구조를 미켈란젤로도 바꾸지 못했으나, 이를 마데르노가 기어코 구조변경을 통해 완성 시켰다. 로마의 어디에서나 보이는 대성당의 돔이 정작 광장에서는 역시 마데르노가 만들었던 파사드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완공때까지도 광장은 계획조차 없었고, 광장의 자리는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광장 앞의 화해의 길도 20세기에 들어서 뭇솔리니에 의해서 겨우 열리게된 것이다. 마데르노가 대성당을 리모델링 하고 있을 당시에는 대성당의 정면에 돔을 올려다보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문을 통해 대성당의 안으로 들어서면 제단까지 이어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공간인 중랑을 '마데르노의 중랑(中廊)' 다시 말해서 '마데르노의 복도'라고 부르겠느냔 말씀이다. 바티칸 대성당의 내부는 마데르노의 작품이라 해도 결코 그릇된 표현만은 아닐것이다.
와~아!!!!!!!!!!!!
그저 한없이 놀랍고 연신 극도의 놀라움에 탄성이 터져나올 뿐이다.
'바티칸 대성당'은 내부 공간에 500여개의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을 가지고 있다. 다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채플)와 미켈란젤로의 돔을 포함하여 주위에 10개의 돔이 올려져 있으며, 1.300개의 모자이크 벽화가 성당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초대형 공간에는 약 6만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으며, 성당 앞의 광장 또한 30만명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는 슈퍼 매머드급 공간이자 열린광장이다. 이 모두를 포함하여 우리는 이곳을 카톨릭의 최고 성지 (바티칸)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매번 대성당의 내부인 마데르노의 중랑에 들어서면 긴 감탄의 시간이 끝나가면서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한가지 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헐어버리고 외치신 타락한 교회와 이렇게 장엄하고도 화려하게 지어 놓은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루살렘의 교회가 어떠했기에 헐어버리고 싶으셨을까? 그럼 지극히 크고 화려한 바티칸 대성당은 옛 그리스도께서 아주 기쁘게 받아주실 교회일까?
교회(敎會)에 대한 인식에서조차 기독교 종파 별로 이해가 다르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란바가 있다.
사전에서 교회를 찾아보면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공동체'를 일컷는다고 적혀있다. 다분히 무형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하지만 조금 보태서 그 신앙공동체를 실현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더한다면 유형의 공간적인 의미를 담게 될것이다.
어느쪽이든 괜찮다. 다만 그런 공동체를 위한 공간적 의미라면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그 장소가 광장이던 헛간이나 마굿간이던 지하묘지이건 심지어 비닐하우스라 하여도 문제가 될것이 없는것이 아닐까? 신앙 공동체가 가지는 믿음의 질적인 면과 영속성과 고귀한 신앙의 전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수많은 보물과 장시으로 치장된 궁궐같은 교회가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듯이 세워져서 뽐내는 이유가 진정한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현실적으로 기독교 종파를 떠나서 믿음의 생활, 즉 다시말해서 '기독교적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주장하는 교회에 대한 주관적인 표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교회는 하나님이 집'이라는 고정관념이 너무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언제가 오실 그 분게서 거하실 집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짓고 치장하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고스람히 담겨져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자 다시오실 메시아께서 기거하실 성스러운 공간이다?
나는 성경 어디에서도 '다시 올테니 내가 머물 집을 어마무시하게 잘 지어놓고 기다려라'는 말씀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러 종파별로 하나씩의 교회만 어마무시하게 지었으면 되는것이 아닐까? 오실 구세주는 한 분인데........ 뭔 거주할 숙소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주 속세에 눌러앉아 사실것이 아니면 하숙집도 있고 멋진 호텔이나 리조트도 넘치는 마당에 동네마다 슈퍼마켓 숫자만큼이나 교회가 사방에 놓여있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최고로 크고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를 지어 받치면 그 때에 꼭 그 교회에 찾아오셔서 머무신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네온사인 십자가를 아무리 높게 내걸어도 절대 소용이 없다. 차라리 할인 티켓이나 무이자를 활용해 하늘나라에 이 메일을 보내는 것이 현실에 맞지 않을까?
신앙공동체를 위한 굥간적 의미의 교회라면 좀 단촐하고 실질적으면서 활용도가 높은 소박한 공간으로 만들면 어디 탈이라도 난다는 말인가?
이거야 어디....... 신실한 마음으로 거룩한 분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믿음의 시선으로 찾아갈 수가 있나? 엄청난 돈을 들여서 금은보화로 치장된 건축과 예술을 찾아보기 위하여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꼴이 아닌가?
솔직히 대성당이나 종교 유적을 찾을때 마다 스그머니 가슴 한쪽에서 그런 삐닥한 생각들이 솟구쳐 오르곤 한다.
무엇인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많은 유익한 활동들을 벌이고 인간의 영적 구원이라 허상만을 설파하려 애쓰지말고 실질적인 세속의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네 모습과는 다른 모범적인(주께서 기뻐하실만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면 어떻게 그런 삐닥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부디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지금 행태의 교회에서는 구원도 미래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신께서도 그런 실망에 돌아앉아 외면으로 일관하시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내가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다.
'바티칸의 리모델링 장인'이랄 수 있는 카를로 마데르노는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콘페시오(Confessio)'만들었다. 콘페시오란 대성당의 돔의 똑바로 아래 지하에 거대한 공간을 설계하고 준공한 것이다. 그곳은 또한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카톨릭이 주장하는 성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20세기에 들어서야 베드로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지금 그곳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전직 교황이나 교회사에 크게 공헌한 추기경들만이 특별한 허가를 받아서 베드로 가까운 곳에 무덤을 쓸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가 있다. 교황의 설계단 아래 대리석 계단을 통해 내려가게 되어있으며, 95개의 청동 램트가 주위를 밝혀주고 있다. 이를 끝으로 마데르노의 역활과 시대는 막을 내렸다.
실로 엄청난 크기의 바티칸 대성당 내부를 허접해 보이지 않고 지극히 성스러운 공간으로 가득 채우듯이 장식해야 한다는 일은 그 누구라도 감히 쉽게 접근하기 힘든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 차갑고 쓸쓸하고 공허함으로만 가득찬 공간을 인간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과 따스함으로 가득채울 수 있을까는 마데르노만의 오랜 고심이나 고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데르노도 떠났다.
예술 분야에 남다른 관심과 안목을 가지고 있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마침내 바티칸 대성당 완공을 위하여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지오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를 건축 총감독에 임명했고, 이후 베르니니는 50년 동안 대성당의 건축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지금의 대성당이 고급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성스럽게 보이는것은 상당부분이 베르니니의 공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발다키노(교황 설교단)를 비롯해 성채 경당, 네 곳의 벽감, 모든 창문과 창문 사이의 벽 부분을 마감한 로지아, 베드로의 의자등이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카톨릭교단 안에서만 인정되고 있는 '기독교 전승'에 따르자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로 와서 선교활동을 다니면서 앉았던 나무의자들의 파편들을 모두 모아서 의자(가구)로 만들었고 이를 다시 상아로 장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왔다고 한다. 그 의자를 조각가인 베르니니로 하여금 청동을 입히고 장식을 더하게끔 요청하여 새롭게 탄생한것이 바로 지금 대성당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놓인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다.
하지만 이 성스러워야 할 의자 이야기도 결국은 거짓으로 드러냤다.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가 직접 사용하였던 의자가 아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자신을 서로마제국 황제로 임명해주것에 감사하여 특별히 제작해서 교황청에 선물한 의자임이 밝혀졌다. 기증자측의 역사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던 탓(?)이다. 교황청은 의자 하나에까지 왜 그렇게 성스러운 이야기를 꾸며서까지 갖다 붙여야만 했을까? 그리고 더 솔직히, 이제까지 성 베드로가 직접 사용했던 고귀하고 성스러운 의자로 받아들여 왔었는데, 이제 9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만들어진 선물이었다고 밝혀졌으면...... 저 의자가 자졌던 절대적인 성스러움은 모두 사라지는 것일까? 바티칸이 당당하게 소장한 베드로의 의자는 성스러운 카톨릭의 유산일까? 아니면 그냥 평범한 베르니니의 작품일까?
의자를 떠받치고 있는 네 명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망토를 펄럭이며 환희에 찬 표정으로 경배를 올리고 있는데, 앞쪽은 로마카톨릭의 상징하는 교부들로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뒷쪽은 동방 정교회(그리이스 정교회)을 대표하는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아타나시오다. 이는 로마카톨릭과 비잔틴의 그리이스 정교회가 모두 초대 교황 베드로를 인정하고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를 담고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말해 교권의 통일을 의미하며, 아울러 교황의 권위가 황권을 넘어서 이 세상의 최고 존엄한 권력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 하겠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빛이 12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것은 그리스도의 12 제자를 나타내며, 빛이 쏟아지는 타원형이 3개의 원형으로 구분되는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비둘기의 주위는 구름에 둘러쌓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이 부분이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기독교 공인과정에서 로마의 토착 원시종교들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모종의 적당한 타협의 결과로 생겨난 오점이라고, 많은 고대 미술품에서 태양신 미트라를 상징하는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말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베르니니의 대표작은 역시 '발다키노(Baldacchino)'라 하겠다. 이것은 오로지 교황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설교단으로 '하늘을 가리는 덮개' 혹은 '천개'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 개의 화려한 나선형 기둥들이 하늘을 찌를듯이 치고 올라가 더그매(천장과 지붕 사이의 공간)를 더욱 성스러운 영역으로 보이게끔 만들어 준다. 네 귀퉁이의 천사들 조각상 뒤에서 활처럼 휘어감아 올라간 상부의 장식은 십자가를 황금보주 위에 드높여 올려주면서 이교도(異敎徒)들에 대한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듯 하다. 굳이 종교인을 따지지 않더라도 탁월한 구성과 넘치는 표현력은 가히 감동적이라 하겠다.
베르니니는 82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의 인생 중에서 50년을 이곳 바티칸 대성당에 받쳤다. 대성당 앞의 광장까지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대성당 안에는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지하공간인 콘페시오에 있다. 당연히 성 베드로를 비롯해 로마카톨릭에 크게 공헌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와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2세 황제등이 포함되어 있다. 더하여 굳이 꼽아본다면 카톨릭 신자에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로 넘어갔다가 다시 회심하여 로마카톨릭에 귀의하여 왕위마저 버리고 로마에서 수도자을 길을 걸었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을 꼽겠다. 여왕의 회심은 반종교개혁의 정당성 주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할 수 있겠다.
어디 대성당의 내부가 그것들 뿐이겠는가?
대성당의 신랑과 측랑, 익랑과 계상랑, 그리고 기둥마다위 윗쪽과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조각상과 그림과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 이를 모두 하나하나씩 세세하게 살펴본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또 행사와 보수 등의 이유로 성당 내부의 여러곳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어서 안쪽 깊은곳의 대부분은 여행자의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베드로의 동상만 하더라도 지난 여행에서는 가까이다가가 발끝을 만져보기도 했는데, 이번엔 아예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여 부득이하게 접근할 수 있고 사진에 담아올 수 있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중요 문화유산을 살펴보기로 해야겠다.
대성당 내부 신랑의 북쪽 측랑 끝부분에 까만 얼굴로 한손은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손으론 열쇠를 빼앗기기라도 할가봐 꼭 움켜쥐고 있는 노인 조각상이 있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제외한 나머지 성당의 몸체를 완공한 '아르놀포 캄비오'가 제작한 '성 베드로 청동상(Statua Bronzea di San Pietro)'이 놓여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모르고 쉽게 지나칠 수도 있다. 중세시대 성지순례자들에 의해서 이미 너무나도 유명해진 조각상이다. 순례자들이 베드로 동상의 오른쪽 발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어루만지다 보니 변;형된것으로 여겨질만큼 심하게 닳았다. 서기 400년에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운 교회였기에 2천년 가까이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작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고 발견 발표를 한것은 20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확인되지도 않은 텅 빈 무덤을 두고 찾아 온 아무것도 모르는 순례자들이 성 베드로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조각상 밖에 더 있었겠는가? 이 조각상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이런 허접한 벽지를 뒤에 붙여 놨어? 코디가 누구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뿔싸. 벽지가 아니라 400년 된 모자이크화였을 줄이야......... 대성당에서 유일한 고딕양식의 조각상이라는 설명을 가이드를 뒤따라가다가 듣게 되었는데........ 글쎄다. 나는 바티칸이라는 공간속에 산재해 있는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도 고딕양식 조각상인지, 바로크양식 조각상인지, 아니면 르네상스양식 조각상인지 구분해낼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하여 나름 잘 알려진것만 슬쩍 짚어보기로 하자.
아마도....... 이것이 아직은 부족한 나의 한계지 싶다.
유럽으로 역사 예술 문학기행을 다니면서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작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이다.
나는 동행인에게 이렇게 설명을 대신해 질문한다.
'바티칸 대성당'측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그림이야. (그리스도의 변용)이라고 불러.'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한 반응이다. 열에 아홉이 모두 그런 반응을 보인다.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무심하게 대할 수가 있는것이지?
내가 질문을 던진 사람들의 수준이 너무나 높은것일까? 특히 미술에 대한 안목들이 하나같이 남다른 것일까?
이 작품이 37세에 요절한 작가의 마지막 유작이며, 또 80% 정도만 완성된 미완성의 작품을 그의 제자가 마저 완성했다는 사실가지도 눈치치고 완성도의 미흡을 지적하는 표정들일까?
그것마저도 아니라면....... 그네상스 당시에도 이 작품의 작가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반열에서 평가를 받았으나,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수준에는 좀 못미친다는 평가가 뛰따라다녔던만큼 이분들도 르네상스 여행을 하면서 높아질대로 높아진 안목으로 평가할 때 약간 모자는 느낌이든다는 표현일까?
또, 그것마저도 이니라면......... 바티칸 대성당 내부에 걸려있는 그림이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것일까?
와!!!! 이 작품을 복제품이라고 판별할 정도라면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큐레이터 정도는 되어야 할텐데?
'이 작품이 말이야. 이래뵈도 라파엘로의 마지막 유작이라고...... 르네상스 회화의 3대 거장인 라파엘로 말이야. 지금 라파엘로의 작품이다하면 일단 천억 단위에 거래가 성사된단 말이야. 그래도 이 그림이 별로야?'
그쯤되면 하나같이 다시 한번쯤 쓰윽하고 벽에 걸린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을 돌아보긴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무엇이 유독 이 작품을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것인가?
두 번째 방문을 마치고 테르미니역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나는 그 해답을 깨달았다. 지금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이 작품에 냉담한 반을을 보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나의 여행기를 통해 이 글을 읽고있는 바티칸 대성당을 다녀온 온 분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참에 저의 설명을 듣게되면 다소 상황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변용) 이라는 라파엘로의 작품에 주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다음 정도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원인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작품에 한국말로 제목을 붙이는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가이드 분들이 여행자들에게 안내와 설명을 함에 있어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으며, 나아가 이를 여행계나 우리나라 미술계에 건의해서라도 제목을 좀 다르게 바꾸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기도 하다.
중세시대에 교회가 앞장서서 성서의 내용들로 교회를 치장하고자 하는데는 단순한 치장 이외에 간접적인 성서해설이나 성서교육이나 성서설명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중세까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기사들이나 영주중에서도 평생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했다. 서류나 편지도 대부분 글을 아는 사람에게 구술하여 적게 만들고 말미에 도장으로 직인을 찍으면 되는 시대였으므로 글을 모르는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특별히 읽을 거리들도 성경 외에는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하여 교회는 까막눈의 신자들을 위하여 굵직굵직한 성서의 내용들을 벽화등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주위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한 번 물어보라. '그리스도의 변용이 무슨 뜻이야? 성서에서 뭘 이야기 하는거야?' 라고 말이다. 알고 설명해 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리스도의 세례' '동방박사의 경배' '유다의 키스' '오병이어의 기적'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등등은 굳이 그림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그 제목에서 모든것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태고지'까지는 모르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리스도의 변용' 이라니? 도대체 변용이 무슨뜻이지?
변용(變容)은 말 그대로 '얼굴 모습이 변한다'는 뜻의 한자 표현이다. 어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하고 쉬운 문제라 하겠다. 하지만 '예수가 얼굴이 변해?' 라고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상황은 좀 달라지게 된다. 성서에 예수가 얼굴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있었나 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승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도 3총사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다) 하늘이 열리고 그들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제까지 보아 온 세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은 빛처럼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해처럼 섬광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기 전의 구세주 모습이었던 것이다. 당황해하는 사도들에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다.
이 같은 성서의 내용을 '라파엘로(Raffaello Sanzio)'는 화폭으로 옮겨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귀한 깨달음으로 전달해 주고자 만든 작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 of Jesus)'인 것이다. 남겨진 미완성인 부분은 라파엘로의 제자인 '로마노'가 마감처리 하였다.
이처럼 다수의 사람들에게 널리 잘 알려지지 않은 성서의 내용을 그린 그림을 '변용' 이라는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않은 제목을 붙여놓았으니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하여도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딱히 바꿀만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변신' '그리스도의 환골탈태' '그리스도의 본모습' 거참, 그 또한 남감할 뿐이다.
대성당에 걸려있는 작품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인근의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로에 대한 이야기도 박물관과 씨스티나 성당편에서 다시 꺼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면 바티칸 대성당을 어느정도 세세하게 둘러보았고 나름 소개도 어느정도 제대로 되었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바티칸에 왔다면은........ 그것도 대성당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아직 하나는 남았다고 여겨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보려고....... 이 조각상 앞세서 인증샷을 목표로 길게 줄을 서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어찌되었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보인다.
'피에타(Pieta)'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위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가 조각으로 표현해 낸 작품으로, 가히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생전에 여러개의 피에타상을 조각했는데, 마지막 작품이었던 미완성작 (론다니니의 피에타)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첫 피에타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수많은 논란꺼리와 화제를 낳았다. 오늘날의 현재까지도 말이다.
더욱 더...... 미켈란젤로의 유작이 된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본 사람들의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가 이 둘을 같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완변한 인체 구조와 극도의 아름다운 신체를 창조던 진짜 미켈란젤로는 어디로 가고, 어설퍼도 아주 어설픈 마치 조각을 이제 막 처음 시작하는 사람 수준의 작품을 그렇게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었더란 말인가?
미켈란젤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였기에 궁금증은 더욱 증폭도리 수밖에 없었다.
바티칸 대성당의 가장 깊은곳의 왼쪽 채플에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Altare di Santa Petronnilla)'가 있다.
대성당에 들어서서 가장 가까운 오른쪽 첫 번째 공간에 '피에타 제대(Cappella della Pieta)'가 있다. 바티칸 대성당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채플(예배당) 중의 일부일 뿐, 특별히 이 두 개의 채플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성당 관계자가 아니면 별로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경당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쩌면 오른쪽 입구쪽과 가장 깊숙한 왼쪽으로 부러 멀게 나누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두 개의 예배당은 바로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쫓겨아오다시피한 미켈란젤로는 당장 오갈데가 없게 되었다.
생계유지를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인근의 대리석 조각공방에 기술자로 드나들면서 근근히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로마에서 한 골동품상인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인근에서 발굴된 고대로마의 조각상을 비산값에 사가는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절실하게 생활비가 필요하던 시기였다.
미켈란젤로는 굴러다니는 대리석으로 고대로마의 농경과 목축을 담당하는 신(神) '파우누스의 마스크(Faunus)'를 만들어 땅속에다 묻었다. 시간이 지나 파내어서는 슬쩍 그을리게해서 최근에 어쩌다 발굴하게 되었다면서 로마에서 온 골동품상 밀라네제에게 팔았다. 골동품 전문가 조차도 그 솜시에 넘어가 제법 후한 돈을 치루고 마스크를 로마로 가지고 갔다. 밀라네제는 그의 가장 큰 고객인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랑그로사리오 추기경에게 마스크를 팔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그야말로 사단이 나고 말았다. 마스크가 가자라는 것이 판명나고 만 것이다. 바티칸의 추기경이면 그야말로 저승사자 보다도 한참이나 윗선이 아닌가? 밀라네제는 엎드려 빌면서 엄청난 배상을 약속하면서 용서를 구하였다. 그런데 추기경은 뜻밖의 엉뚱한 제안을 해 오는것이 아닌가?
'이제까지의 일을 다시는 거론하지 않겠네. 책임을 묻지도 않겠네. 다만 그 가짜를 만든 사람을 내게 데려다 주게.'
밀라네제는 죽어라 피렌체로 달려 갔다.
가짜를 만들어 자신을 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청년을 찾아서 돈을 회수하고 죽지않을만큼 혼쭐을 내 주어야 했다. 더불어 이 엄청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청년을 찾아서 로마까지 데려가야만 했다.
오래걸리지 않아 미켈란젤로는 골동품상 일행에게 붙잡혔다. 죽지않을만큼 고역을 치루어야 했다. 골동품상은 마치 중죄인으 다루듯이 미켈란젤로를 포박하여 강제로 로마로 끌고 갔다. 이쯤에서 인생이 끝나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두려움 가득한 악몽은 거기까지였다.
랑그로시오 추기경이 뛰쳐나와서 손수 포박을 풀어주며 환대속에 궁전으로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랑그로사리오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의 후견인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 부속건물중의 하나인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 입구에 기념 조각상을 하나 만들어 줄 것을 정식으로 작품의뢰를 하게된다. 미켈란젤로 인생에 처음으로 작품 의뢰가 아주 후한 조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정당한 작품가격을 받고 제작을 하게되는 직업적인 조각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가짜 모조품 하나에서 천재의 솜씨를 찾아낸 랑그로사리오 추기경의 탁월한 안목과 과감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만 하겠다.
이렇게 해서 20세의 미켈란젤로가 세상에 처음 내놓게되는 작품인 '피에타(Pieta)' 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골동품상이 환불해간 마스크는 얼마지나지 않아 피에타로 명성을 얻은 뒤에 돌고돌아서 까마득히 높아진 가격으로 다시 그 골동품상 손에 들어갔다. 그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이 시기에 바티칸 대성당 건축의 총 책임자였던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는 섬세하고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교황 율리오 2세의 지나친 간섭으로 헉헉대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야말로 밥먹는것 보다 전쟁을 더 좋아하는 무대포 기질의 교황이었던 것이다. 우연히 추기경으로부터 예배장에 놓을 조각상을 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업현장을 살피던 브라만테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도 건축가 이전에 분명한 조각가였는데, 이 듣도보도 못한 촌뜨기의 솜씨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순간 짧은 상념에 잠겼던 브라만테는 이 젊은 청년을 교황에게 주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괴팍한 교황이 또한 괴팍한 청년조각가와 어울려 어떤 상황이 전개되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자신에게 쏠려있는 지나친 간섭이 줄어들겠지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아주 딴방향으로 되돌릴 수 없게 흘러가고 말았다.
추기경의 간곡한 부탁으로 자신이 총책임을 맡고있는 대성당 건설현장의 한구석을 내주었는데, 피에타 조각상이 완성되어 장막이 거둬지자마자 교황을 비롯하여 추기경들을 넘어서 온세상의 관심과 찬사가 온통 쏠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많은 사람이 브라만테에게 누가 만든 작품이냐고 거듭 물어왔다.
'글쎄요. 확실히 기억이 안나는데........ 크리스토포로 솔라리라고 하던가......... 북쪽 어디에선가 온 뜨내기가 어쩌다 만들어냈다고 들은것 같습니다. 그게 다 입니다.........' 라고 말을 흐지부지 끝냈다. 그리고 이 말이 미켈란젤로의 귀에 들어갔다. 그날 밤 미켈란젤로가 끌과 정을 들고 피에타 작업장으로 들어가....... 기어코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제 세상의 피에타의 작가가 누군지 알게되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사실을 평생동안 후회하고 부끄러워 했다.
이제 '피에타'는 '올드 베드로 대성당'의 부속 건물로 부쪽 모서리에 남아있던 '성녀 베드로닐라 제대(Altare di Santa Petronnilla)'로 올겨가야만 했다. 베드로닐라 예배당(채플)은 바티칸에 파견되어 있는 프랑스 사람들을 위한 전용 예배당이었다. 교황청을 실질적으로 반석에 올려놓아 준 샤를마뉴 대제는 자신의 아들을 굳이 이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게 하였을만큼 이 장소는 '프랑스 왕국의 예배당' 이라고 신성시하여왔던 것이다.
여기 이 베드로닐라의 채플엔 '일 게르치'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화가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의 (성 베드로닐라의 매장과 영광) 이라는 캔버스화가 걸려있는 제단이 있었다. 이제 피에타는 이곳으로 옮겨져서 제단의 입구를 장식하면 모든것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의 발생이었다. 프랑크 왕국과 바티칸 사이에 극심한 대결양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또한 이 상황에서 브라만테는 일방적으로 새로짓는 대성당의 확장을 명분으로 프랑스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채플은 사라졌고 그림은 현재의 대통령궁인 퀴리날레 궁전으로 옮겨갔다. 피에타는 애초의 작업장이었던 대성당 입구의 오른쪽 첫 번째 방에 아예 터를 잡고 주저앉아 버렸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을 때, 바티칸의 일방적인 처사로 프랑스 예배당을 철거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책임을 따지고 들었다. (성녀 베드로닐라의 매장과 영광)은 이 덕분에 애초부터 프랑스 소유라 하여 파리의 루우브르 박물관으로 옮겨갔다. 바티칸은 결국 대성당은 가장 깊숙한 공간에 새로운 '성녀 베드로닐라의 제대'를 만들어야만 했다. 동시에 그림은 지금의 모자이크화로 재탄생하여 여전히 전시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성녀 베드로닐라의 매장과 영광)은 다시 이탈리아로 반송되었다. 지금은 캄피돌리아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나 볼 수가 있다.
그림의 내용은 사도 베드로의 양녀로 받들어지게 된 성녀의 수난사를 담고있으니 한번쯤 직접 찾아보시는것도 괜찮을듯 싶고, 카톨릭에서만 통용되는 '기독교 전승'에 관한 이야기라서 여기서는 언급을 이쯤에서 자제하기로 해야겠다.
피에타는 지금 방탄 유리 안에서 특별하게 보호되고 있다. 접근이 불가능하다. 정신질환자의 유명한 테러가 벌어졌던 때문이다. 그 후로 보안도 철저하게 강화 되었다.(이전 여행기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음)
어떤 사람들은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일컬어 '천재들의 경연장' 이라고 표현한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이렇듯 동시대에 천재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기는 이전까지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길에 나뒹구는 돌덩이 보다도 많고 흔한게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들이었다. 천재들의 홍수는 인류문명사에는 커다란 축복이었겠으나, 어찌 생각해보면 적지않은 천재들에겐 불행의 시대였을 것이다. 자신도 분명 천재인데 천재가 넘쳐나는 시대에 태어났으나 돋보이는 몇몇의 아주 특별한 천재를 제외하곤 저들의 그림자에 묻히고 말게 생겼으니 말이다. 천재가 아주 드문 시대에 태어났으면 자신의 천재성이 빛을 발했을지도 모를일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여명은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같은 문학의 천재들에 의해서 가치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드디어 수세기 동안 어둠속에만 갖혀있던 중세의 회화에 빛을 선사해준 지오토가 등장하고, 피렌체 두오모를 완성한 부르넬리스키의 건축이 등장하게 된다. 회화에 처음으로 원근법을 도입한 마사치오도 분명 천재였으며, 조각에 인본주의를 끌어들여 르네상스 미술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도나텔로 역시 천재였다. 베로키오와 보티첼리와 고촐리도 르네상스 회화의 천재들이었음은 분명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칼리레이 역시 과학의 천재였다. 그리고 이쯤에서는 반듯이 회화를 예술의 정점으로까지 끌어올린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끌어내게끔 되어 있다. 다빈치야말로 다방면에 걸쳐서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 천재중의 천재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 많은 천재들이 동시대에...... 그것도 한 도시를 중심으로 모두 태어나고 모여들어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 나갔다. 축복받은 도시 플로렌스(피렌체)는 찬란하게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 아주아주 특별한 존재가 한 명 등장한다.
그는 분명한 천재였다. 하지만 피렌체의 천재무리에 속하기를 거부했다. 천재들 무리에서도 그를 거부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현란한 붓놀림으로 사람들의 눈이나 속이는 칠쟁이(페인트 맨)라고 혹평했다. 라파엘로를 아직 한참 더 배워야하는 애송이라고 불렀다. 보티첼리는 먼 발치에서도 돌아갈 정도로 하찮게 보았다. 대중적 지명도가 탄탄한 기를란디요를 배울것이 하나도 없는 형편없는 화가라고 혹평했다.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는 로렌조 메디치 정도는 되어야만 그가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는 정도였다.
심지어 라파엘로는 말하기를 '그는 교황(敎皇)을 대하기를 프랑스 샤를마뉴 대제도 감히 할 수 없는 정도의 무례와 거침없는 행동으로 대했다' 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꼬박꼬박 교황의 면저에다 삿대질을 해가면서 대들었다. 교황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면 노발대발 성질을 고래고래 부리고나서 언제까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나타나질 않았다. 끝내는 교황이 사람을 풀어 수모문을 해서 겨우 찾아낼 정도였다. 하지만 나타나면 언제나처럼 또 대들었다. 라파엘로 조차도 우연히 길에서 그를 만나면 마치 '사형 집행인'을 만나는것 같아서 피해다녔다고 말 할 정도였다.
그는 아주 작고 볼품없고 못생긴 외모에다 성질마저도 괴팍한 존재였지만 그를 빼놓고는 천재의 계보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가히 '천재중의 천재' 였으며 '천재의 끝판왕'이라 불릴만 했다. 길거리에 돌부리처럼 채이는 천재들 조차도 그이 천재성 앞에서는 누구나가, 심지어는 당사자인 천재들마저도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Buonarroti Simoni, 1475.3.6~1564.2.18)'는 그렇게 아주 유별스러운 천재였다.
수없이 찾아오는 실망과 좌절, 이어지는 주저함과 자책감, 가족으로부터 생겨나는 교통과 고뇌, 후견인과 주문자들과의 끊임없는 다툼과 분쟁, 거기에다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자기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이 그의 성품과 삶을 그렇게 이끌어 갔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끼고 존경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했었다.
첫 번째는 막내동생이었다. 유독 연약했던 막내동생을 미켈란젤로는 평생 엄마처럼 가슴에 담고 살았다. 어마어마하게 벌었던 돈의 대부분은 페병환자였던 동생의 치료비와 요양비로 쓰여졌다. 동생의 이른 죽음은 그를 더욱 스스로 닫힌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로는 그의 유년시절을 돌보아준 유모다. 채석장 광부의 아내였던 유모는 미켈란젤로에게 따스한 인간의 심성을 가슴속 깊은곳에 담아주었다.
셋 째는 당연히 로렌조 메디치를 꼽아야겠다. 위대한 천재에게 더없이 훌륭한 소양과 희망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네 째가 아주 중요한데, 미켈란젤로는 건축가 브르넬리스키를 진정으로 흠모하고 존경하며 닮고 싶어했다. 부르넬리스키의 미완성 건축물인 로렌초성당의 파사드 의뢰가 드어왔을 때 오랜 고심끝에 그는 사양한다. '로렌초성당의 파사드는 진정으로 위대한 건축가 부르넬리스키 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을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없는 존경심 앞에서 나온 진심어린 겸손함이자 예우였다. 미켈란젤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 로렌초성당의 파사드는 지금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미켈란젤로를 훌쩍 뛰어넘을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다섯 째와 여섯 째는 단테와 지롤라모 사브나롤라(혁신적인 종교개혁자)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들을 스승의 예우로서 평생동안 대했다.
일곱 번째는 마키아벨리를 꼽을 수 있겠다. 그들은 동시대를 함께 살면서 많은 생각과 가르침을 나누었고, 특히 사브나롤라로부터 두 사람이 함께 종교적이거나 시대적인, 혹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심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 외에도 빅토리아 코론나와 토마소 디 카발리에리 등이 더 있지만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해야겠다.
**##** 미켈란젤로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이전 여행기에서 나름 심도있게 다룬적이 있기에 중복은 피하고자 한다
열 아홉살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태어났다. 몇 년 뒤에 어머니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사망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던 아버지는 지난날의 영화만을 곱씹으면서 신세한탄으로만 일관한 한량이었다.
불우했던 그의 유년시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떤 표현을 끌어와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소년은 대리석 광산이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보내져 외롭고 궁핌한 생활이었지만 고운마음씨를 가진 유모의 손에 의해서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유모의 힘겨운 헌신을 모다못한 15세의 소년은 급기야 피렌체로 떠나오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자이자 대부호이자 은행가였던 로렌초 메디치를 만나게 되어 함께 메디치 가문의 리카르디 궁전에서 생활하게 된다. 로렌조 메디치의 세 아들(훗날 이들중 두 아들이 차례로 교황이 된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유명한 학자들을 가정교사로 모셔다가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다방면으로 풍부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때 얻은 교육적 소양들이 그의 작품인생에 아주 큰 역활을 하게되는 것이다.
로렌조는 궁전에 조각학교를 만들고 궁전밖의 재능있는 청소년들에게도 조각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 라는 청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리지아노가 3살 위였다.
로렌조 메디치에 의해서 조각학교 지도자로 임명된 '베르통도 디 조반니'는 조각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인근의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으로 드로잉 학습을 나갔다.
브랑카치 예배당은 '산타 마리아 델 까르매네 성당'에 속한 부속건물이랄 수 있는 예배당으로 부유한 실크 상인이었던 펠리체 브랑카치의 개인 가족묘역이었다. 당시의 부호들은 이처럼 교회에 크게 기부를 하거나 개축이나 증축을 협조한 댓가로 작은 채플을 자신이나 가족의 묘역으로 활용하는 시대적 교회적 풍습이 있었다. 로렌초성당의 경우처럼 말이다. 정작 브랑카치 예베당이 유명하게 된것은 이곳에 바로 마사초의 프레스코화가 여러작품 제단화로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흔히들 '르네상스는 건축가인 브르넬리스키와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화가인 마사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말로 이들을 르네상스의 3대 선각자로 꼽는다. 다라서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서 마사초의 그림을 보고 배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귀한 장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사초는 정작 일생동안 반메디치 가문을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조각학원의 소년들이 예배당에 둘러앉아서 마사초의 그림을 보며 스케치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그림중에는 (에덴에서의 추방)이나 유명한 (성전세)를 비롯해 (개종자의 세례) (테오필루스 아들의 일어남과 베드로의 권좌) (성 베드로, 그의 그림자에 덮인 병자의 치료) 등등의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미켈란젤로가 무엇을 그렸는지, 토리지아노가 무엇을 그리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사초의 그림을 답습하면서도 마사초 그림의 특징이 어떤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마사초를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마사초를 그리겠다고 할 수 있는거지?'
가뜩이나 모든 소년들로부터 못마땅한 눈초리를 독차지하고 있던 미움투성이 미켈란젤로가 모든 소년들의 그림에 대해 지나친 혹평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동안 쌓이고 참아왔던 시기와 질투와 중오심이 한 순간에 폭발했음일까, 보다못한 토리지아노가 단숨에 벌떡일어나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날아간 주먹은 그대로 미켈란젤로의 얼굴에 작렬했고 미켈란젤로는 피를 쏟으며 코를 움켜쥐고는 땅바닥을 내뒹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미켈란젤로의 전 일생을 통털어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사건으로 남게된다.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드로 다빈치, 혹은 라파엘로와의 극한 대립에는 잘생긴 얼굴에 대한 미켈란젤로 특유의 자격지심이 엄청나게 작용했다고 바사리를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작고 왜소하고 못생긴 추남의 전형인 미켈란젤로의 얼굴은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에 코까지 부러져 내려앉은 것이다. 이 일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인물에 대한 핸디캡은 이후로 미켈란젤로의 전 인생을 통해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물론 이런 상황이 다소 페쇄적이고 작품활동에만 매달리게 만들고 타협을 거부하는 극단의 완벽주의자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경향도 솔직히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 미켈란젤로는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최고 추남(醜男)의 반열 최상부에 당당하게 자신을 올려놓고 말았다.
무심한 주먹은 허공을 갈라치며 날아갔고 그이 콧날은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BGM은 당연히 사이먼 & 가펑클의 그 노래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그리고....... 누구라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바로 그런 결과만이 남았다.
로렌초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권력이 센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총애하는 기대주를 참혹하게 망가트렸다. 토리지아노는 곧 자신에게 닥쳐올 수 있는 여러가지의 위험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로 달아났다. 여기저기의 조각공방에서 날품을 팔기도하면서 떠돌이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고 메디치로 사주받은 사람들이 들어닥치리라는 두려움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을 이곳저곳 대도시들간에 벌어지는 싸움터에서 용병으로 생활하면서 겨우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면서도 떠돌이 생활중에 틈틈히 미술공방의 다양한 조각품 생산에 솜씨를 팔기도 했다.
그의 조각 솜씨를 눈여겨 본 사람에 의해서 추천을 받아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이번엔 정식 조각가로서 영국 왕실의 초청장을 받게된다.
이런 사실들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토리지아노 역시 상당한 능력을 가진 조각가였던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메디치의 조각학원까지 다니게 되었지 않겠는가? 단지 미켈란젤로와의 만남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토리지아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무덤을을 만들게 된다.
점차 영국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토리지아노는 다시 유럽지역을 떠돌다가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번엔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후에 성인으로 추대받는 제로니모에게 교회에 쓰여질 몇 개의 조각작품을 의뢰받아서 만들었는데, 돈이 제때 지급되지 않아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분노에 휩싸인 토리지아노는 망치를 들고 쫒아가서 자신이 만들었던 조각상들을 모조리 심하게 파괴해 버렸다. 이제는 작품값의 미지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성스러운 성인들의 이미지를 파손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끝내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를 완성한 위대한 천재로 남았고....... 토리지아노는 미켈란젤로의 코를 뿌러트린 사람으로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랬던 사건이 미켈란젤로에게도 충격이 컸었음일까? 중년이 넘어서면서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쓴 쏘네트 중에는 토리지아노와의 다툼과 같이 자신이 수도없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자조석인 음성으로 위로하듯이 써내려간 글 귀가 지금 나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우쭐하며 즐겼던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칭찬만큼이나 그 질투도 두렵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향해 홀로 걷는다."
이토록 오만하고 완벽주의자였던 천재의 유년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개의 교회와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하나는 토리지아노와의 사움이 벌어졌던 '산타 마리아 카르미네 성당의 브랑카치 예배당'이며, 그곳에는 '마사치오'(마사초)의 프레스코화 제단화가 있다.
다른 하나는 미켈란젤로가 가혹하게 평가한 스승이었던 화가 '기를란다요'를 빼놓을 수가 없겠다. 기를란다요는 제자인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 제단화 작업에 동행한다. 스승을 못마땅하게만 생각하던 미켈란젤로는 슬며시 스승의 실력을 테스트하게 되고, 1년만에 떠나게 되었고, 이후로 스승을 형편없는 실력의 화가로 매장해 버린다.
베로키오는 자신보다 출중한 화가실력을 갖춘 제자를 보고는 스스로 붓을 꺽었다. 하지만 그 뛰어난 천재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훌륭한 스승으로 명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게되었다. 기를란다요는 천재의 자질이 넘쳐나는 제자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스승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제자는 세상으로 뛰쳐나가 스승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동네방네 떠들기 시작했다. 위대한 천재성의 제자는 이후로 스스로 성장해 최고가 되었다. 이제 스승은 실역이 형편없는 자격미달의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영원히 기록되고 말았다.
이쯤 되었으니...... 아무리 갈길이 멀고 바쁘다 해도 이전의 여행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위에 거론한 두 개의 교회와 두 명의 화가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살펴보고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은 피렌체 여행기에서 다루는것이 맞다고 할 수 있겠으나, 피렌체에서 볼것도 다룰것도 너무나 많기에 여기에서 일부분이라도 미리 살펴보는것도 괜찮을것만 같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룬 부분들은 피렌체에서 생략하기로 하고......... 말이다.
'천재들의 전시장'과도 같았던 16 세기를 현 시점의 우리들로써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깨고 싶지않은 꿈'만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재생. 부활) 이라는,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이상이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미증유의 탐구정신과 창의력을 가진 천재들이 신화속의 거인족들 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느껴야 하고 어떻게 절감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책이나 티비 또는 인터넷을 통하여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와 문화와 예술을 자신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 써치하며 누리는 풍요와는 전혀 다른........... 훨씬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결코 떨쳐버릴 수가 없다. 쉽게 선택하기만 하면 누구나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무미건조한 문화예술이 아니라, 세월의 퀘퀘함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처음 그대로의 불편한 문화예술을 그리워함이다.
봄에는 춘분(春分)이, 여름에는 하지(夏至)가 있고, 가을에는 입추(立秋)가 있다. 그런가하면 겨울에는 어김없이 입동(入冬)이 찾아온다. 기독교가 하늘로 통하는 구름으로 만든 문(門) '계절'을 파괴해 버렸지만, 그랬음에도 네 명의 여신은 때가되면 어김없이 지상으로 내려온다. 사계절이 문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봄이 딱히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고 또 여름이 어느때부터 여름인지는 정확히 구분짓지 못 할 뿐더러 알 수도 없는 일이다.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가 찾아왔고 찬한하게 한 시대의 문명사조로 꽃을 피우게 되었긴 하지만, 딱히 언제부터가 정확하게 르네상스라고 구분짓는것 또한 계절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학자들에 의하면 '르네상스'는 (부르넬리스키의 피렌체 두오모 건축)과 (도나텔로의 성 마르코)와 (마사치오의 프레스코화)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문명사조라는 변화는 도나텔로의 조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뒤를 이어서 피렌체 두오모의 최초 설계가 부르넬리스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가장 늦게 브랑카치 채플에 마사치오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지게 된 것이다. 회화분야가 좀 늦게서야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 앞에 한 사람을 놓아두고 싶다. 새로운 변화의 사조는 이들보다 이미 백년 전에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르네상스의 선구자 세 사람은 백 년이나 앞서 살다간 화가로부터 많은 영향과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지오토(Giotto di Bondonne)'로 역사속에서 처음으로 '화가'라는 직업을 탄생시킨 사람이다.
이런 확자들의 규정과는 별도로, 15세기 초 피렌체에는 예술가 3인방이 따로 이미 있었다. 모두가 피렌체 출신이었고, 모두가 당시로서는 피렌체의 두오모였던 현재의 세례당에 설치할 청동문 제작 공개응모에 응했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위는 기베르티가 차지했고, 공동 우승자로 채택은 되었으나 공동 수상을 거부하여 자연스레 2등으로 낙점된 부르넬리스키가 있었고, 중간에 낙선한 도나텔로가 그들 3인방이었다. 이 후로 기베르티의 사람은 청동문 2개를 제작하느라 50년을 매달리게 된다. 부르넬리스키는 20년을 방황과 새로운 건축학 공부로 보내다가 인생의 마지막 20년 동안 두오모의 돔에 매달린다. 도나텔로는 꾸준하게 자신만의 조각가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이들 3인방에 새롭게 한 사람이 뛰어들어서는 기베르티를 밀어내고 '르네상스 선각자 3인방'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1422년 불쑥 피렌체에 모습을 드러낸 이 사내는 불과 22세의 청년 '마사치오(Masaccio)'였다.
마사치오의 피렌체 등장 이전의 삶에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불우한 유년시절을 추측할 뿐이다.
마사치오란 이름도 그의 본명이 아니다. '산 지오반이 태생의 구이디(Tommaso di Giovanni di Simone Guidi)'가 그의 본명이었고,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피렌체 인근의 시골 출신으로 길드의 일종인 화가조합에 가입할 당시 그가 서명한 이름이 바로 '마사치오' 였다.
마사치오가 이 도시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시기의 피렌체에는 예술문화 전반에 걸쳐서 이미 새로운 기류가 어느정도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고 난 다음이었다. 다만 회화분야만은 아직도 고딕양식의 화풍이 굳어져 있었다.
피렌체라는 도시가 마사치오에게 내어준 가장큰 선물은 당연히 지오토였다. 마사치오는 지오토의 작품을 찾아다니며 반복되는 모사작업을 통해 점차 조형적 회화적인 지오토만의 기법을 깨닫고 습득하게 되었다. 이 과장에서 브르넬리스키와 도나텔로를 만나게 되었고, 브르넬리스키로부터 원근법의 원리와 도나텔로로부터 인체조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마사치오보다 도나텔로는 15살이나 많았고, 브르넬리스키는 26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친구나 형제처럼 마사치오를 감싸주었고, 마치 제자를 가르치듯 새롭게 불어오는 문명의 기류를 습득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고귀한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칠 년 정도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마사치오가 그만 요절하고 만 것이다.
마사치오는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보니 그가 남긴 작품의 수는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선구자 3인)에 이름을 올렸을만큼 위대한 천재였다.
마사치오를 나타내고 상징하는 대표작이라면 당연히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에다 그린 프레스코화 (성 삼위일체) 그림이다. 이는 당연히 피렌체 여행기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마사치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길드인 화가조합을 통해 들어오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마솔리노(Masolino da Panicale)'를 도와주게 되었다. 마솔리노는 마사치오 보다 15살이나 연상의 이미 널리 알려진 화가였는데, 서너 번의 협업을 통해 마사치오의 천재성을 알아채게 되었다.
비단과 견직물을 통해 엄청나게 부를 축적한 브랑카지 가문으로부터 마솔리노에게 작품 의뢰가 들어왔다. 당시 부자나 권력가들의 유행이 교회에 많은 기부를 하고 채플(예배당)을 하나 제공받아서 그들 가문의 개인적 예배당이자 가문의 묘역으로 꾸미는 일이었다. 그 채플의 화려함이나 훌륭한 작품의 소장이 곧 그 가문의 위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는것이었다.
브랑카지 가문의 작품의뢰는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카르미네 성당(Santa Maria del Carmine)' 내에 있는 채플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의 제단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으로 마솔리노는 이 작업의 파트너 화가로 마사치오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제단의 한 쪽 벽면을 모두 마사치오에게 전담해서 그려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의외의 제의였다. 마사치오는 브르넬리스키와 어울려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고, 마솔리노는 기베르티의 조수이자 제자였던 것이다. 기베르티와 브르넬리스키는 이미 철천지 원수와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마솔리노는 제의를 했고 마사치오는 이 제의를 수락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브랑카치 채플의 벽화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채플의 프레스코화 완성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마사치오가 사망했다. 27살에 벌어진 돌연사였다.
브랑카치 채플에 그려진 마사치오의 프레스코화는 결국 후배 화가인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어진다. 하여 지금 우리가 브랑카치 예배당을 방문하게되면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마솔리노와 마사치오와 필리포 리피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3명의 솜씨를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악(驚愕)과 전율(戰慄)......... 그것은 이내 공포로 번져나갔다.
토리지아노와 미켈란젤로의 다툼도 혹 이 작품에서 야기된것은 아닐까?
구약 성서속의 성스러워야 할 인물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은 알몸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것도 제단에 버젓이 말이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하고는 있었다고 하나, 아직 교회는 절대적 권위가 엄연한 중세였던 것이다.
아무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엄청난 일은 이미 저질러졌는데 당사자인 마사치오가 갑자기 죽었다. 사실 어딘가 모르게 묘한 뉘앙스가 풍겨나온것도 사실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마사치오는 이미 죽었고 그림은 남았다.
최초의 누드화가 등장했다. 혁신을 넘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같은 일은 또 한 번 벌어졌었다.
도나텔로의 작품 중에서 (다비드) 제목의 작품이 두 개있다. 하나는 대리석 조각품이고 다른 하나는 검은 청동조각품이다. 그런데 이 청동 다비드상이 누드 차림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또한 엄청나게 광풍을 몰고왔던 것이다.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시대를 지나서 1천년 이상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야 다시 누드 작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딜레마가 등장한다. 마사치오의 작품은 완성 직전에 갑자기 사망하였기에 그의 사망 시기인 1428년 이전의 작품임이 확실해 진다. 하지만 도나텔로의 경우는 마사치오 보다 15살이나 연장자이면서도 38년이나 더 오래 산다. 그리고 그 와중에 대략 1420년에서 1460년 사이에 청동 다비드상이 조각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따지자면 중세 이후에 누가 가장 먼저 누드를 꺼내들었느냐는 판별할 수가 없게된다. 또 어지보면 굳이 따져야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문제가. 그냥 쉽게...... 회화에서는 마사치오가,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최초로 누드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버리면 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브랑카치 예배당에서 만날 수 있는 마사지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작은 역시 (성전세)라고 해야겠다.
(성전세)는 누가 뭐라해도 가장 마사치오다운 작품이라고 부를만 하기 때문이다.
愕
브랑카치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두 가지의 주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렸음이고 다른 하나는 성 베드로의 일생으로 채워졌음이다.
마사치오가 그린 '성전세(Payment of the Tribute Money)'는 하나의 그림에 두 개의 주제를 모두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서, 신약성경 마태복음 17,24~27 의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앙에는 제자들에 둘러싸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버나움을 방문하였을때의 일로서 로마의 관리로부터 성전세 납부를 종용받고 있다. 당시에 유대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로마에 성전세를 납부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에 반발하였고, 예수께서 그런 베드로를 제지하시면서 강가에 물고기 입을 열면 돈이 있을것이니 가져다가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왼쪽으로 물고기의 입을 열고 돈을 꺼내는 베드로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의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서 돈을 꺼내온 베드로가 로마관리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1인3역을 맡은 베드로 혼자만 바쁘다)
마사치오는 후기 고딕양식의 토대 위에 지오토에게서 받았던 영향력을 토대로 성전세 그림을 그렸다. 그림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입체적이면서도 단단한 조각과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틀림없는 지오토의 영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금을 걷고있는 로마관리의 다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마치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을 보고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단계 명암법을 이용하여 표현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마사치오만의 독창성이다.
지오토의 그림이 명암을 적절하게 구사하고는 있다지만 하나의 단순한 조각상을 보고있는 느낌이라면, 지오토의 그림은 단단한 신체 위에 별도의 옷을 덧입은 느낌을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해주는 느낌이다. 시제로 그는 옷입은 사람을 그리지 않고, 알몸의 사람을 먼저 그린 후에 그 위에 옷을 그려 입혔다. 이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그런가하면 가깝게 지내면서 브르넬리스키로부터 배웠던 원근법을 적용해 가까이에 있는 나무는 짙게 그리고 갈수록 옅게 칠하는 기법도 엿보인다. 나무도 앞은 크고 뒤로 갈수록 작게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브르넬리스키의 원근법 영향이나 적용은 생각보다 아주 작은부분만 작용을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비잔틴 모자이크화에서 많이 보아왔던 '이소케팔리아(Isokephalie) 기법'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어 '이소스'에서 유래하였다 전하며, '이소스'에는 (동등한) 또는 (머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우러 이 기법은 여러사람을 화폭에 담는데 있어서 일단 사람들의 키를 일정한 높이에서 나열하듯이 길게 늘어놓고 나서, 사람들의 몸동작을 지나서 제각각의 키를 다르게 나타내는 방법을 택한다. 일단 화몀에서 키를 맞추고나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야가 편해지고 등장 인물들을 우러러보이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성전세) 그림의 아랫부분이 제단 바닦에서 4m 정도 높이에 높게 걸려있다는 점을 유념해서 생각해 보자. 원근법이 정확하게 적용되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관람자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소케팔리아 기법이 적용된 지금의 그림은 예수의 모습에만 굳이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아도 시선은 저절로 편하게 등장인물 모두에게 자연스레 쏠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사치오의 (성전세는)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바탕위에 지오토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녹아들었으며, 한걸음 나아가 새로운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 베드로가 그림자로 병자를 고침) 이라는 작품에서는 고대 그리이스 이래로 처음으로 소재의 다변화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역사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모든 그림의 주제는 우선 신(神)의 모습이었고, 다음이 영웅의 모습이었으며, 비로소 중세 이후에 르네상스에 들어서서 인간을 주제로 등장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제는 '그림자'이다. 장차 일어날 그림자의 기적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표현 방식을 넘어서 회화의 개념을 다변화 시켰고 나아가, 인간들이 생각과 사고가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르네상스인 것이다.
마사치오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피렌체 여행에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 삼위일체)를 만날 때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자애스러운 시선과 표정을 가진 할아버지가 또 있을까? 마치 신(神)의 자비로움이 넘쳐나는듯 하다.
대부분의 폴랑드르 화가 초상화에는 마치 규격화된 듯한 필수 요소랄까 회화적 정교함이 유독 돋보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세세한 표현 보다는 피부의 살결이나 얼굴 표정의 세부묘사에서 폴랑드르 화가만의 또 다른 특징을 여실히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는 모두가 작가의 예리하고 정확한 관찰력에서 나온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마에 패인 주름살과 사마귀와 병이 깊었음을 나타내는 눈자위에 드리운 어두움과 콧잔등의 물혹들, 이전가지의 어떤 초상화에서도 이런 사실적인 표현은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었던 새로움이자 커다란 충격이었다. 초상화의 목적이 무엇인가? 모델의 지극히 좋은 시절이나 미모나 위엄을 화폭에 담아 오래도록 남겨두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던가? 더 화려한 옷을 입히고, 더 근엄한 표정을 만들고, 더 예쁘게 치장하는것이 초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가히 충격이라 할 정도로........
하지만, 어떤 이미 정형화된 고정적인 관념에서 탈피한 이 할아버지의 초상화는 대신 전혀 다른 뜻밖의 새로움을 담고 있다. 그것은 그림이나 사진이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점이기도 했던 바로 그 점, 노인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뛰어넘어 노인의 내면을........ 다시 말해서 노인이 어떤 성격의 인물인가를 이 초상화는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초상화속의 할아버지는 사랑과 자비로움으로 가득찬 생생하게 살아서 숨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가 사랑스런 손자를 바라보는 그 표정과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살아서 생생하게 전달되어오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도 이제까지는 그런 마음과 온기까지는 미처 담아내지 못했었다. 오늘날의 사진들 대부분도 그렇다.
한편, 품에 안긴 소년의 표정에서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할아버지를 올려다 보고있는 소년의 눈빛을 느낄 수 있다. 얼마나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추하게 부풀어 오른 코와 병색과 주름살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한장의 그림은 우리 모두에게 두 사람간의 사랑과 온정이 얼마나 숭고한것인가를 여과없이 그대로 전해준다.
그것은 어쩌면 신(神)게서 우리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최고의 은총일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를란디요(Domenico Ghirlandaio)'가 바로 이 그림 (할아버지와 손자)을 그린 르네상스의 화가이다.
프레스코화와 초상화를 많이 남긴 기를란다요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사실기법을 통해서 통속 묘사와 초상 묘사에 있어서 실로 위대한 성과를 이룩해낸 사람이다. 르네상스 초기에 그 만큼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얻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피렌체에 대형 공방(미술작품 제작소)까지 차려놓고 수많은 직인(기능공)을 거느리며 수많은 작품을 양산해 냈다. 물론 이 공방작업을 통해서 많은 유능한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그에게는 항상 고위층으로부터 수많은 작품의뢰가 쇄도했고, 일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면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거기까지 였다.
기를란디요 자신의 삶이나 그때까지의 명예와 부도 모두가, 딱 거기까지였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건을 계기로 그의 내면이 첨차 파헤쳐지기 시작되고 드러나게 되면서 엄청난 시련에 봉착하고야 만다. 좀 더 일찍 조금만 겸손하고 조금만 절제할 수 있었더라면 미술사(美術史)에서의 그에대한 평가는 전혀 달라졌을텐데 말이다.
화가로서 일찌기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 쥔 기를란다요에게 어느날 몰락한 귀족의 혈통을 가진 친한 친구가 15살이 된 아들의 손을 잡아끌고 공방에 나타났다. 아비는 아들이 법률가나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한사코 미술을 하고 싶다는 아들을 더는 어쩌지 못해서 유명한 화가인 친구에게 가르침을 좀 나누어 달라고 의탁하러 온 것이다. 기를란다요는 흔쾌히 친구의 아들을 받아들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기를란다요는 그만 친구의 아들에게 홀짝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니지 아예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까지 어디서건 그 누구에게서건 듣도 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친구아들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아니지. 출중하다는 말로서는 정확한 표현이나 전달이 부족할 정도였다. 가히 천재였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천재중의 천재였던 것이다. 기를란다요는 혼자서 생각했다.
'이놈은 훗날 위대한 화가가 될것이다. 그런 천재가 제 발로 내 휘하에 걸어들어 오다니 이거야말로 횡재가 아니겠는가? 틀림없이 녀석은 위대한 화가가 될것이 틀림없고........ 나는 자연히 위대한 화가의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술의 역사에 가장 드높게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친구 아들의 생각은 애초에 달랐다.
그가 보기에 스승은 작품에 혼신을 다하기는 커녕, 오히려 작품의 숫자에 가격을 곱하며 늘어나는 재산에만 관심을 갖는 시전잡배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스승은 된이 되는 작품의뢰에만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였다. 고관대작이나 부자의 작품에만 관심을 보였다. 나머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가면서 적당히 그때그때마다 임시응변식으로 땜질을 했다.
점차 스승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친구아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지만, 그럴수록 친구아들의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스승의 친구인 유명한 화가 '보티첼리' 조차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메디치 가문의 사돈이자 메디치 은행의 은행장이었던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로 부터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에 속한 가족 성당이자 묘역인 '토르나부오니 예베당(Tornabouni Chapel)'에 (동정녀 마리아와 성 요한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받는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유럽을 휩쓴 흑사병과 재정난으로 1360년 미완성의 상태로 준공된다. 그나마 114년이 걸친 대공사였다. 성당 정면의 파사드도 출입문까지만 마루리 된 상태였다. 다시 100년이 흐른 상태에서 피렌체의 거부 '루첼라이'가 후원자로 나서면서 '알베르티(Battista Alberti)' 에게 건축을 의뢰하여 최종적으로 1470년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루첼라이의 파사드 건축 주문에는 몇가지 특별한 요구조건이 있었는데, 노벨라 성당이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파사드의 상단을 태양 이미지로 꾸며줄것, 출입문 위에 메디치 가문으이 다이아몬드 문양을 넣어서 메디치 가문에 대한 루첼라이 가문의 충성심을 나타내줄것, 상하단 분리대에 루첼라이 가문의 상징인 '돗단배 문양을 형상화해줄것 등등이 있었다 한다. 이는 알베르티의 파사드에 제대로 반영되었다.
다소 단조로와 보이면서도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딕양식 파사드의 심플한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성당 안쪽에 있는 여러개의 채플 중에서 정문쪽에 위치한 '토르나부오니 예베당(Tornabouni Chapel)'에 그려진 '동정녀 마리아와 성 요한의 생애(Scenes from the Lives of the Virgin and St. John the Baptist)'를 바탕으로 '기를란다요'가 그린 연작인 것이다.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는 이 예배당의 3개의 벽면에 네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그려졌다.
기를란디요에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의뢰자인 부호 트로나부오니에서 그치는것이 아니라 피렌체의 실제적 통치권자인 메디치까지 연관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를란디요는 자신의 공방에 속한 전직원과 제자들 모두를 데리고 이 작업에 사활을 걸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거두어들인지 얼마 안되는 친구의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마침내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장장 5년이나 걸릴줄은 기를란디요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열달쯤 가까이 지나게되자 공방의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던 친구의 아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스승인 기를란디요가 아직도 여전히 프레스코화의 스케치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를란디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친구아들의 생각에는 별거 아닌 밑그림 정도를 가지고 질질 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벽화의 진척보다는 현장을 찾아오는 피렌체의 실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접대하는 일에 더 열심인것으로 보였다. 예술가로서의 스승은 어디에도 없고, 돈만 밝히는 솜씨좋은 그림쟁이로 보일 뿐이었다. 결국 친구의 아들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다음날도 스승은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벽화의 한 패널에 스케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렸다 지웠다를 밥먹듯 해댔지만 패널의 반쪽도 아직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 패널에는 여러명의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도무지 진척이 없자 부아까지 치밀은 스승은 조금 이른시간에 작업장을 박차고 나갔다. 스승이 나가자마자 모든 공방의 사람들은 이른 퇴근을 기뻐하면서 도구를 챙겨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친구의 아들은 그제서야 목탄을 들고 스승이 며칠 째 스케치에 매달리던 패널 앞에 섰다. 스승의 스케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친구아들은 이윽고 스승의 스케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스승의 스케치를 다르게 손질한 것은 아니었다. 스승의 스케치 옆 여백에다 여인을 스케치해서 새로운 등장인물로 포함시켜둔 것이다. 스승이 가장 고심하던 부분이었다.
다음날 스승은 정시에 다시 패널을 앞에두고 앉았고 멀리서 지켜보던 친구의 아들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의 덧붙인 스케치가 스승에게 발각되어서 호통이 내려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스승의 호통도 없었고 그 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승은 덧붙여진 친구아들의 스케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자신이 어제 작업을 하다만 그 상태로 온전하게 놓여있었다는 듯이 나머지 스케치를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졌던 것이다. 둘 중 하나였다. 스승의 실력이 형편 없던가, 아니면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자신의 실력이 평생을 같은 작업만 해 온 스승에 비해서 모자랄것이 없다는 사실이던가, 아무튼 둘 중 하나였다.
그날 밤 친구의 아들은 공방을 뛰쳐 나갔다.
재능을 알아보았던 기를 란다요는 사방천지에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끝내 친구아들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우연히 도나텔로의 제자였던 베르톨로에게 조각을 배우는 천재가 한 명 있더라는 소문을 접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 화가 길드에서 기를란다요는 도저히 믿기어려운 충격적인 소문을 로마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로마에 위대한 천재 조각가가 탄생하였는데 피렌체에서 온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고 하던데요?'
'미켈란젤로? 내가 애지중지 가르친 제자가 미켈란젤로인데?'
'제자라구요? 그렇다면 당신이 도미니코 기를란디요라는 말씀입니까?'
'나를 아시는가? 미켈란젤로가 내 이야기를 하던가?'
'미켈란젤로가 직접 말하기를....... 스승인 기를란디요가 돈만 밝히는 그림쟁이일뿐 하도 실력이 없어서 일년만에 아무것도 배운것 없이 한밤중에 도망쳐서 나왔다고 그러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은 1494년에 45세의 나이로 기를란다요가 사망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대성공을 거둔 직후였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유독 드로잉(스케치)에 열정을 솓아부었고 미완성인 드로잉 상태의 작품을 상당히 많이 남겼다. 미켈란젤로 역시 드로잉에 정성을 기울였으나, 그의 스케치는 때론 벽에다가 때론 땅바닥에다 그리기도 했다. 그러낙하면 밑그림처럼 그린 스케치 위에다가 단숨에 칠을 입혀 완성시키기도 했다. 무조건 속전속결이었다. 그런 그는 말년에 자신의 스케치 그림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즈음하여 기르란다요의 스케치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기를란다요의 작품들을 사진으로나마 한자리에 모두 모아놓고 가만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나는...... 기를란다요가 너무도 훌륭한 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떤이는 기를란다요에 대해서 - '현란하고 교묘한 붓놀림으로 시류에 편승하려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다분히 미술의 본질적인 접근에는 미흡했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대형 공방의 성공에 힘입어 이룩한 명성과 부의 축적속에 안주하다보니 미술사조의 변화에도 둔감하게 되었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보티첼리가 변화에 대처하고 노력한 끝에 중세적 회화에서 탈피하여 극도의 섬세한 양식과 인문학을 바탕으로하여 도상학적인 상징들을 그림속에 그려넣기 시작하였을때에도, 역시나 기를란다요는 조악하고 부유한 주문자의 기호에만 맞춘 천편일률적인 화풍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라고 호의적이라 할 수 없는 평가를 내렸다.
르네상스라는 동시대를 살아간 '바사리'의 기를란다요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호의적이다.
하지만, 세상은 르네상스를 미술사의 최고 전성기로 이끈 최종적 완성자인 미켈란젤로에 의한 기를란다요에 대한 평가에 보다 더 크게 비중을 두고있는 편이다.
기를란다요는 대단히 많은 숫자의 작품을 남긴 화가이면서, 또한 자신의 작품속에 자신을 슬쩍 그려넣기로 유명한 화가였다. 하여 기를란디요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한 편으로 그림속에서 기를란다요를 찾아내는 재미 또한 솔솔한것이 사실이다. 조금만 관심을 갖게되면 그림속에서 작가 자신을 찾는다는것이 꼭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기를란다요는 그냥 (할아버지와 손자)를 그린 화가로 남았으면 좋을걸 그랬다.
하긴 그 역시 오랜 세월동안 잊혀진 화가였다. 1994년 그의 사망 500주년을 맞이하여 심포지엄이 열리면서 기를란다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었다. 하긴 그랬다해도 기를란다요가 크게 실망할 이야기는 아닐것만 같다.
르네상스라는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그 변화의 중심에서 커다랗게 꽃을 피웠던 친구 보티첼리 조차도 1900년대 초기까지는 우피치 미술관의 지하 수장고에 파뭍혀서 500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피치 미술관의 젊은 큐레이터가 전시실에 좀 색다른 그림을 내걸고 싶어서 먼지가 퀘퀘히 쌓인 나무상자를 열고 묵혔던 옛날 그림들을 하나하나식 살피다가 우연히 '어! 이 그림 괜찮네. 썩 잘 그린 그림이잖아?' 하면서 끄집어 내서 먼지를 털어내고 햇빛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고, 여기저기 상한 부분들을 수리 복원한 후에 벗겨진 액자를 새로 칠하고 해서 한적한 전시공간을 겨우 찾아서 내걸었는데 그만......... 한 순간에 대박을 제대로 터트리고 말았다.
(비너스 탄생) 이었다.
사방에서 '보티첼리가 도대체 누구야?' 하는 문의가 쇄도했다.
다시 지하 저장고로 뛰어내려간 큐레이터는 사흘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뒤지고 또 뒤졌다. 그때 다시 튀어나온 그림이 (봄) 이다.
바티칸 대성당을 살펴보다말고 미켈란젤로가 등장하는 바람에 예정에 없이 한참을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쩌면 이쯤에서 살짝이나마 살펴보고 나가게 됨으로써, 피렌체에서의 여행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볼 수 있지않을까 하는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이쯤에서 바티칸 대성당 여행기는 마무리하면서........ 다음으로는 바티칸 박물관과 씨스티나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하자.
---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코로나 조심하시고.......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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