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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로마(Roma), 글래디우스에서 십자가로.........

by 피안재 2020. 12. 25.

 

 

 

 

 

 

 

 

 

 

 

 

 

 

 

 

 

 

 

 

 

 

 

 

 

 

 

 

 

 

  " 이 평화는 주교, 수도원장, 백작과 자작을 비롯한 신을 경배하는 귀족들의 승인을 얻은 것이며...... 어떤 사람도 교회 안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  교회와 성직자의 보호를 받은 토지나 지역공동체를 약탈하는 일도 금한다.....  어느 누구도 농민이나 농노, 그들의 처자식을 살해하거나 때려서는 안 되고, 또한 이들이 비행을 저질렀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들을 잡아들이거나 유괴해서도 안된다....... 이 평화를 깨트리거나 또는 2주 이내에 벌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가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배상을 시행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  또한 주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수요일 해질녁에서부터 월요일 동이 틀 때가지 신의 휴전을 따를 것을 엄숙히 선포한다......  휴전기간동안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두 배로 변상케하고, 찬물 고문에 처하도록 한다."     --- James Harvey Robinson作  <유럽의 역사> 중에서.

 

 

 

 

 

  이 처럼 공명정대하고 아름다운 포고문이 세상에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지위가 높고 가진자들이 스스로 배려와 품위유지에 힘쓰고,  가지지 못한 약자들도 억울함 없이 비굴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만 된다면 부와 권력을 사이에 놓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 사이의 비인간적인 처사들이 없어지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할렐루야.  교회를 찬양하라.  이 모든것이 지극히 높은 지위에 오르신 덕성을 겸비하신 교황의 은덕이니 바티칸(로마카톨릭)을 찬양하라!!!

  천국이 어디메뇨?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바로 여기가 아니겠는가?

 

  중세시대 이후로 올곳게 쭈욱 교회(로마카톨릭)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위 선언문의 주체자이자 발표자는 당연히 교회(로마카톨릭) 이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간적이며 인간사회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며졌지만,   어디 한 번  가만히 그 안에 숨겨진 내용을 들여다 보자.

  우선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교회, 성직자, 주교, 수도원장, 백작, 자작, 농민, 농노가 등장한다.  농민과 농노를 제외하면 모두가 기득권자이자 지배자이다.  뜯어먹고 사는사람이 뜯기며 사는사람 보다 훨씬 퍼센테지가 크다.  이런 비율에서 상식이 통하는 형평성은 불가능하다.  거기다 등장인물에 교회나 성직자만큼이나 실질적이면서도 확실한 사람들이 빠져있다.  바로 황제와 왕들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교회(교황)으로서도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세속을 실제로 지배하는 사람들이다.

  선언문의 내용만을 보자면 교회(교황)이 '이 세상의 절대군주'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세상을 교회의 법률로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재판을 하고  심지어는 고문을 명하기도 한다.  인간세상은 오로지 교회의 율법과 교회가 지정한 법률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바로 윗쪽의 선언문이 말하고자하는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중세시대 1천년을 흔히 말하길 '암흑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것이 교회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윗쪽의 선언문은 왕이나 황제가 선포하고 정당하게 시행하는것이 세속의 인간사였다.  교회는 그런 제도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상처를 보듬어 주는 정신세계의 영역을 담당했어야 하는것이 초대교회의 의미가 이니었을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권(敎權)을 넘어서서  세속의 황권(皇權) 까지를 탐하면서 부와 명예와 절대권력 모두를 차지하려고 혈안이되어 수많은 오류를 범하고 반인륜적이며 반교회적인 행태를 서슴치않게 저질렀다.

  이렇게 교회가 주도해 온 1천년의 암흑기 속에서,  인간 스스로가 희망의 끈을 놓지지 않고 빛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 바로 르네상스인 것이다.

  르네상스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로마제국의 붕괴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교회(로마카톨릭)의 대변혁과 교권과 황권의 끊임없는 대립과 마찰의 결과로 인간사는 생지옥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교회사를 살짝이라도 들여다 보지 않을 수가 없을것만 같다.  여기서의 교회사는 결국 로마카톨릭(바티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제 바티칸(Vatican)으로 향한다.

 

  19세기 유럽의 교육과 역사 분야는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진보를 뛰어넘어 가히 혁명적인 로빈슨의 학설과 주장과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주류를 이루어왔던 학계는 소란과 혼돈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그는 '새로운 역사'를 일반 대중들이 좀 더 본질(진실)에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교육자이기도 했다.

  로빈슨에 따르면,  476년 로마의 신화적인 몰락 이후 중세시대의 전통적인 관점을 통일된 우울함과 문화적 붕괴의 독특한 천년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서유럽의 전체 역사에서 이전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가 분리된 것보다 더 선명한 휴식(축복)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중세라는 한시대가 얼마나 끔직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는 르네상스를 중세 후반의 진보에서 느리고 점진적인 발전으로 여겼고, 르네상스의 전통적인 개념이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런 꽃으로 피어난  신화라고 여겼다. 그는 종교 개혁이 르네상스에서 성장했다고 믿는 것은 중세라는 의미와 똑같이 거짓이라고 가르쳤다.  대신 두 사건의 극명한 대조를 강조하고 개혁은 갑작스런 종교적 반란보다는 국가정치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가장 유익한 접근법이 그 원인과 개발 과정에 대한 연구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으며, 극적이고 감각적인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이는 일시적이고 작은 사건과 의미들의 나열일 뿐이라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로빈슨의 시선으로 중세의 교회를 바라보기 위하여 바티칸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테르미니역 버스정류장에서 64번 버스를 타면 성 베드로 광장 인근의 테베강가에 내리게 된다.  5분이면 바티칸 영내에 도달할 수 있다.  테르미니역에서 가장 빠르고 쉽게 가는 방법은 지하철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로마 도심을 가로질러 나가면서 좌우로 내다보는 로마도심의 풍경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기꺼이 시내버스를 택했다.  물론 돌아오는 길은 바티칸에서 테르미니역까지 죽어라 걸어서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런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교회는 끊임없이 '화해' '용서' '평화'를 위해 노력과 헌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부인하거나 벗아날 수 없는 흑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이제 미래의 교회는.....   그들은.........  또 다른 교회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용맹스런 로마군단, 아니면 로마제국하면 흔히들 '글라디우스(Gladius)'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로마군 보병대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쇼트 소드(짧은 검)를 먼저 떠오리는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중해 연안에서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을 거쳐 북쪽 브리테니아까지를 모두 그들이 직접 점령했기 때문이다. 첨단 최신무기의 전시장인 현재전에서도 항공모함이 동원되고 비행기가 뜨고 미사일이 날라다니지만, 결국 보병이 그 지역에 직접 점령하고 깃발을 꽂아야지만 진정한 승리하고 하는 이유가 바로 로마의 보병사단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붉은 갑옷과 투구와 망토를 걸친 말을 탄 장수의 허리츰에 멋지게 매달린 쇼트 소드는 어디까지나 장식이었겠지만 말이다.

  이런 글라디우스의 본래 이름은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 였다. 다시말하자면 '스페인의 검'이었다는 뜻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이 짧고 곧은 양날검을 고대부터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하여 당연히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된 카르타고의 군대가 먼저 글라디우스를 채택했다. 이는 곧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시기의 1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부터 로마군단의 보병대들도 비로소 글라디우스를 실전용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와전되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살상한 불멸의 위대한 무기로 추앙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평균 길이 약 70cmdp 1kg 정도의 쇼트 소드는 실제로는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철제 기술로는 장검을 만드는데 한계가 분명히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만든 장검은 무게가 엄청났다. 또 고대의 군사들은 현대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왜소했다. 그러다보니 한손에 커다란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으로 적들과 맞부딪쳐서 찌르는 전술을 위해 고안된 무기였다.

  하지만 이후에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나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보니 짧고 곧은 양날검은 오로지 찌르는데만 효력이 극대화 되어 있었던 단점이 드러났다. 휘어진 외날검이 등장한 것이다. 한테 엉켜서 혼전일때 일일이 찌르기가 불가능한 순간에도 휘어진 검은 휘둘거나 잡아당기면서도 벨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기의 발달과 전투의 양상이 점차 바뀌면서 곧 글라디우스의 명성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군대에서도 글라디우스가 실제로 사용된 기간은 로마군대의 역사중에서 그리 오래지 않았다. 당연히 글라디우스로 인한 인명 살상도 거의 허구라는 의미가 된다. 다만, 글라디우스를 허리에 차고 번쩍이는 투구와 붉은 갑옷으로 치장한 채 보부도 당당하게 세계도처를 진군하던 로마군대의 제식행렬이 수천년이 지나도 인간의 기억세포에 너무도 강렬하게 기억되고있기 때문 일것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AD. 476년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족(서고트족)이 로마의 방어벽을 뚫고 침입했다. 로마의 몰락이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로마군대는 붕괴되어 흔적조차 사라졌고, 약탈과 살륙과 방화가 지나간 뒤 로마는 페허로 변해 있었다. 제국의 영화는 어디론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테베강 건너에 커다란 건물 하나만은 온전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현재의 건물이 아닌, 4세기말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시작된 애초의 베도로 성당)' 만이 서고트족의 침략과 약탈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런 대목에선 이구동성으로 '할렐루야'를 외쳐야 하는것이 아닐까?

 

  로마에 의해서 야만족으로 불리던 서고트족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반도로 쳐들어 내려오기 이전에 어디서 어떤방법으로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에게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트족 지휘부의 일부가 이미 세례까지 받은 신자였다고 전해온다.

  이런 기적 같은 은사로 이제 로마는 떠났고 카톨릭은 남았다.

  북방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남하하는 훈족의 영향으로 얼떨결에 서로마를 멸망시킨 서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했음에도 여전히 훈족의 남하가 두려워 서둘러 전리품 보다리를 싸서는 일프스 이남의 서쪽을 향해서 죽어라 죽어라 내빼기에 바빴다.

  이때 서고트족을 도망치게 만들었던 훈족을 터키 역사는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기록하였다.

  역사학자마다 상당한 이견과 차이는 있지만, 이 부분의 훈족에게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일정부분 연관이 있다.

  시베리아 일대에서 한반도 최북단 백두산 유역에까지 퍼져서 살던 유목민을 훈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훈족은 쉽게 다시 말해서 '북족지방의 유목생활을 하는 오랑캐족' 쯤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역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흉노족 여진족 말갈족이 모두 포함된다. 이들 훈족은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다가 혹한의 겨울이 엄습하면 생존을 위해 연합전선을 펴면서 따뜻한 중구대륙의 남쪽을 향해 쳐들어 왔다. 그들의 약탈은 극에 달할 정도로 참혹했다. 주기적인 이들의 남침과 약탈을 막고자 탠생한것이 만리장성인 것이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설득과 타협을 넘어서 이젠 본격적인 오랑캐 토벌작전에 돌입한다. 한민족 출신인 고선지 장군이 티벳쪽으로 진출한것도 모두 오랑캐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막강한 토벌대에 직면한 오랑캐(훈족)들은 급기야 중앙아시아쪽으로 무리지어 도망치게 되었다. 하지만 고선지를 비롯한 막강해진 명나라 군대가 뒤쫓아오자 중앙아시아를 지나 발칸반도 지역으로 쫒겨가게 되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발칸반도 이북에 흩어져 살던 유럽계 유목민족인 게르만족이 훈족의 위세에 눌려 덩달아 앞질러 남쪽으로 도망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세계사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발칸반도에서 게르만족은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게 된다. 서쪽으로 달아난 서고트족, 동쪽으로 달아난 동고트족 등등으로 모두 흩어져 역사에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고 이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기도 한다.

  서고트족은 반달족의 뒤를 따라 리베리아반도(스페인)까지 도망쳐서 왕국을 건설하고, 동고트족은 결국 앞을 막어서는 기독교 세력과 훈족 사이에서 몰락한다. 그리고나서 훈족은 아나톨리아 방면(현 터키)으로 진출한다.

 

  로마제국은 사라졌고, 서고트족이 약탈하고 떠나간 로마 영토에 카톨릭만이 달랑 쓸쓸하게 살아남았다.

  그들은 이제부터 '로마카톨릭만의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티칸(Vatican)' 이다.

 

 

 

 

 

 

 

 

 

 

 

 

 

 

테르미니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바티칸으로 향한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2019년의 성탄절 사진)

 

 

 

 

 

 

 

 

  라틴족의 로마가 사라진 유럽은 한마디로 새롭게 등장한 게르만족의 놀이터였다.

  이 시기에 너도나도 우후죽순 처럼 새로운 민족들이 대거 한꺼번에 역사의 장에 등장했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곤 했다.  부르군드족,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등도 따시고보면 모두 하나같이 게르만족의 일파들이다.  그들중에서 역사에 굵직하게 이름을 남기게되는 게르만족은 바로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왕국이라 하겠다. 

  일찍부터 로마인들이 믿어왔던 아타나시우스파의 카톨릭으로 개종했던 클로비스 1세가 강력한 게르만 전사적 기풍을 앞세워 영토를 확장하고 흩어져있던 유민들을 불러모아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독일의 일부를 다스리며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바야흐로 새로운 유럽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크왕국은 클로비스 2세에 이르러 최고 전성기를 맡게된다.  하지만 이후로는 단 한 명의 탁월한 지도자도 등장하지 않게되면서 왕은 명목상의 통지자로 전락하게 되고 왕국의 모든 운영은 재상(宮宰)를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다.(당연히 오래가지 못한다는게 역사의 교훈)

  이 시기에 유럽의 서쪽끝 리베리아 반도는 이미 711년에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온 아랍의 우마이야왕조가 에스파냐 대부분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들 이슬람의 리베리아반도 지배는 장장 8백년에 걸쳐 이루어 진다.  리베리아반도를 차지한 이슬람의 다음 목표는 당연하게 피레네산맥을 넘어 본격적으로 유럽 본토를 침공해서 온 유럽을 이슬람 세계로 만드는 것이었다.

  732년, 마침내 에스파냐의 이슬람제국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그들을 처음 맞이한것은 프랑크왕국이었으며, 메로빙거왕조의 명재상이었던 '샤를 마르텔'이 군대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프랑스 남부의 평원지역인 투루와 푸아티에에서 양군은 국가와 종교의 미래를 담보로 처절하게 전투를 벌였다.  모두가 열세라고 여겼던 프랑크의 군사들이 샤를의 뛰어난 지휘에 힘입어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슬람군은 서둘러 피레네산맥 이남으로 도망쳤다.  이슬람은 그후로도 영원히 피레네산맥을 넘지 못하게 된다.

  그만큼 투루와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유럽과 기독교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가 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샤를 마르텔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피핀이 재상을 이어 받는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2백년 이상을 침묵속에서 자중해왔던 로마카톨릭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게 된다.  교황은 교회의 이상과 꿈이 아무리 정당하고 크다고 해도 결코 성경과 성직자들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지난날의 부귀영화는 모두가 로마제국이라는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했기에 얻어진 것들이었다.

  교황은 프랑크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모두 예의주시해 왔으며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교황은 둘째아들인 피핀에게 교황청 특사를 파견했다.  역사적인 공을 세운것은 아버지이고, 훌륭한 능력의 소유자인 피핀이 왜 허울뿐인 무능한 왕에게 복종해야하고 어리석은 왕의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냐고 슬슬 속내를 긁어재켰다.  만약 피핀이 왕이 될 생각만 있다면  교황이 직접 나서서 그것이 부정한 쿠데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은밀하게 건네었던 것이다.  타고난 피핀의 권력욕에 기름을 부은 효과가 나타났다.

  피핀은 과감하게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왕국'을 세운다.  교황은 그의 왕위 등극이 타당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피핀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메로빙거 왕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왔는데(영화 다빈치 코드에 같은 줄거리가 등장),  그 신성한 혈통을 뒤엎은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에 대해서 저주스런 이야기들과 메로빙거의 복귀를 준비하는 비밀 결사대의 설도 끊임없이 등장하게 된다.

  아무튼,  교황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장자계승의 정통성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왕위에 오른 피핀이 이제는 교황에게 무엇으로든 보답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여 피핀은 자신을 비롯한 카롤링거 왕조가 영원히 '교황을 보호하는 자'가 되겠노라고 서약을 하였다. 아울러 교황청이 부족함 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교황령의 영지를 늘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모든것이 애초부터 교황이 바라던 것들이었다.

  동로마가 모든것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나버린 후에 비잔틴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기독교 안에서의 역활과 지위에서 마저도 로마카톨릭을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의 기독교는 로마카톨릭이 아닌 동방의 그리이스정교회가 모든것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이스정교회가 세상의 기독교를 다스리는 2백년 이상의 시간동안 로마카톨릭은 교황청 하나를 제대로 건사하고 외부의 압력이나 침입으로부터 지켜내기도 실로 버거운 아슬아슬한 2백년의 세월을 근근히 버텨왔던 것이다.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비잔틴은 분명하게도 그리이스정교회의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 그 나머지 절반을 서서히 차지해 가고있는 새로운 젊은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노련한 교회(로마카톨릭)는 이것을 기반으로 다시 세상의 절반을 넘어서 세상 모두를 차지하고 지배할 꿈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황청은 자신들에게 위해가 되거나 장애가 되는 일에 대하여는 즉시 피핀에게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면 피핀은 즉시 외교 채널이나 군사력 동원을 빌미로 교황청이 바라는 바 대로 일이 처리되도록 만들어주었다.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를 뒷배경으로 존재시키는 한,  유럽의 그 누구도 교황청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된것이다.  그랬음에도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한 가지.......  동방의 그리이스정교회를 흡수 통합하는 명실상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피핀이 죽자 아들들 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노련한 교황의 촉은 이번에도 바쁘게 움직였다.  오래지않아 교황은 출생에 대한 핸디캪에 시달리는 피핀의 첫째 아들을 정당한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샤를마뉴(Charlemagne)'는 피핀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르게된 사람의 프랑스어 표기이다.

  라틴어 표기로는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로서 여기에서의 '마그누스'는 '위대하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일전의 스페인 여행에서 보았듯이 '카를로스'라는 이름은 세계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혼란을 좀 줄이기 위해서, 적어도 이 시기의 카를로스는 분명 프랑스 영토를 기반으로 유럽 전역으로 영토확장을 꾀했던 인물이기에 '사를마뉴'로 그의 행적을 정리하고자 한다.

  샤를마뉴 대제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나 깨나 영토 확장'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그의 목표는 '로마의 수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왕좌의 즉위 과정에서 동생들과 처절하게 전쟁을 벌여야 했고 끝내는 죽였다.  이어서 그는 동생들을 지원했던 세력들의 응지이에 나섰다.  그 중에 하나가 이탈리아 반도 북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롬바르디아왕국 이었다.  샤를마뉴는 군대를 몰아 이탈리아 정복에 나섰고 마침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거의 대부분을 자신의 왕국에 편입시켰고,  중부지역의 일부를 교황령에 나누어 주었다.  교황청은 넘겨받은 영토가 적다고 화를 냈지만  그렇다고 샤를마뉴를 능멸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명실상부로 유럽 본토의 대부분을 회복한 샤를마뉴의 다음 목표는 피레네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계의 축출이었다.  샤를마뉴는 여러차레 리베리아반도 수복 전쟁을 시도하였고,  바르셀로나나 사라고사를 탈환한 적은 있으나 끝내는 전쟁에 실패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자신의 영역으로 되돌아 간다.

  비슷한 시기에 교황 레오 3세에게 끔직한 위기가 닥쳤다.

  로마교황청 내의 반대파들이 레오 3세를 암살할 목적으로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까지도 엄연하게 로마교황청은 비잔틴 황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적지않게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리이스 정교회의 지배와 간섭이 존재했던 상황이었다.  로마카톨릭의 완전한 독립을 꾀하고 있는 레오 3세의 속셈이 드러나자 반대파들로서도 심히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던 결과였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교황을 다수의 불순분자들이 습격했다.  그들은 교황을 땅바닦에 대동댕이 쳤으며,  저마다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 배를 찌르고 눈을 후벼파려고 하였다.  우연히 지나가던 군사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구사일생으로 교황을 구하였는데 그들은 로마주재 프랑크왕국의 주재소를 호위하던 샤를마뉴의 군대였다.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교황을 수행원들은 로마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 줄것을 간청했다.  군대는 즉시 교황을 독일지역으로 피신시켜 치료하였다.  회복한 교황은 로마로 귀환을 원했고,  교황의 보호자가 되겠다던 아버지 피핀의 서약대로 샤를마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교황을 호위하면서 보부도 당당하게 로마에 입성하였다.  테러를 감행했던 세력들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교황을 상대로 테러는 감행할 수 있겠지만  샤를마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마는 다시 레오 3세의 휘하로 안전하게 되돌아 갔다.  이젠 어디에서도 교황의 정적들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교황은 샤를마뉴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교황은 이것을 계기로 비잔틴의 영향력에서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또 한 편의 드라마를 각색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칼바흐作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

 

 

 

 

 

 

 

 

 

 

 

  AD. 800년 성탄절 미사에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초대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직접 로마까지 호송해주어서 정적들 스스로가 물러가게 만든 공로에 보답하고 싶어서 였다.  예복을 갖춰입은 샤를마뉴는 성탄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 베드로 성당으로 향했다.  그를 보기 위하여 광장을 가득메운 로마인들의 입에서 '샤를마뉴 황제' 라는 연호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센 함성소리를 넘어 합창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탄절 미사가 끝날 지점에 이르게되자,  교황은 샤를마뉴를 제단 앞으로 나오게 청했다.  사방에서 다시 '샤를마뉴 황제' 찬양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성유식을 거행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카를로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과 함께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했다.  샤를마뉴는 잠시 무척이나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열광하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환한 표정으로 허리 굽혀서 왕관을 수여받았다.

  프랑크왕국은 비잔틴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 오고 있었으며 꾸준히 조공을 받치는 처지였다.  비잔틴이 과거의 동로마제국이라면,  이제 자신은 엄연한 서로마제국의 황제인 것이다.  서로 대등한 처지로 신분이 바뀌게 된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사전에 꼼꼼하게 계획된 교황의 꼼수에서 나온 것이었다.

  샤를마뉴가 새로운 서로마제국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서로마와 비잔틴제국은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유럽을 양분하여 실질적으로 지배 통치하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라면 이제 로마카톨릭도 비잔틴의 그리이스정교회에 대하여 대등한 위치와 독립된 자치권을 확보하게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교황의 깊은 흉계는 그 보다도 훨씬 높고 먼 곳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유럽 최고의 군주가 되었다.  이러한 최고 지위의 군주자리는 교황(교회)가 임명권을 행사함으로써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서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이제 명실공히 교황은 그 황제보다 위에,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자의 신분으로 격상된 것이다.  이것이 교황이 노린 최후의 목표였다.

  해가 바뀌면서 이러한 교황의 기묘한 노림수는 실제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서로마제국 황제의 명령에 우선하는 교황권의 행사가 잇따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훗날 결국은 위조로 판명되어버리게 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서'를 다시 세상에 꺼내놓고 바티칸의 새로와진 위상을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 하듯이 외쳐대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막말로 유언장 비슷한것을 교황에게 써 주었는데, '자신이 죽고나면 로마제국을 통째로 교황에게 기증한다'는 거짓 증서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유럽 최고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실세중의 실세인 샤를마뉴황제와 그의 군대를 교황청의 부하 정도로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 성립되게된 것이다.

  유럽은 샤를마뉴가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이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난리가 나고 있었지만,  이제 유럽의 실제 주인은 바티칸인 것이다.  그 바티칸의 주인인 교황의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샤를마뉴는 이 모든것이 교황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샤를마뉴는 '교황의 흉계에 속아서 대관식을 받아들였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쓰여진 역사를 지울 수는 없었다.

  황제를 임명해 휘하에 두었다고 판단한 교황의 파행은 극에 달하게 된다.  후대의 황제들이 이런 교황의 독선에 계속해서 반기를 들게된다.(훗날 교황권에 가장 극렬하게 도전한 사람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된다)  이는 오랜 세월을 두고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의 대립으로 치닺게 되고,  그 와중에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 같은 사건들이 발생된다.

 

 

 

 

  바티칸(Vatican)은 교황이 다스리는 카톨릭의 총본산이자 로마 속의 아주 작은 도시국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 이라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유래했다.  고대로마 이전부터 이곳에는 토테미즘적인 주술사들이 거주하던 신성한 지역이었다.

  작은 도시국가인 바티칸시국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도서관과 성 베드로 광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고 있다.

  역사속에 기록되어 있는 로마카톨릭의 공(功)과 과(過)는 지금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신(神)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찾도록 하는지' '종교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많은 교회가 세워져야만 했는지'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신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으로만 일관하는지'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 뿐이다.

  (화해) (용서) (평화) 라는 단어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교회는 나아가야 할 길을 이미 모두 잃어버린것이 아닐까?

  그저 '다시 오실 구세주' 타령만을 일삼으면서 갈데까지 가보자는 속셈은 아닐까?

  바티칸아.  이제는 네가 우리 모두에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할 시간이야.....  그 마저도 잊은것은 아니겠지?

 

 

 

 

 

 

 

 

 

  버스에서 내려서 성 베드로 광장에 이르는 너른 길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 라고 부른다.  20세기 중반까지 이 도로는 빼곡히 건물들이 밀집하게 들어서 있었으며,  교황청은 영락없이 노쇠한 도시에 갖혀 사로잡힌 형국이라 부를만 했다.  교회와 정치권력이 필요에 의해서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도 명칭은 그럴싸하게 골라 붙였다.  아무튼 목적을 달성한 파시스트 뭇솔리니는 권력을 휘둘러 이 일대의 건물들을 강제로 철거하면서 시원하게 뚫린 지금의 교황청 풍경을 선물했다.  결과적으론 전쟁을 일으킨 독재권력들의 만행에 대해서 교회의 침묵이 그 댓가였다.

  화해의 길을 통해 광장에 이르면 가장 먼저 광장 중심에 놓인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칼리큘라황제가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에서 쌔벼온 것이다.

  광장은 한마디로 열주들의 숲속이다.  좌우로 반원형의 긴 회랑을 떠받치고 있는 열주들은 284개의 도리아식 원통형 기둥과 88개의 각이진 기둥들로 각기 16미터의 높이로 이루어져 있다.

  오벨리스크 가까운 땅바닦에 둥근 표시가 있는데 이것을 '회랑의 중심(Centro del Colonnato)' 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 사방으로 회랑을 둘러보면 각기 4개의 기둥이 1열로 만들어진 회랑이지만 이곳에서만은 기둥들이 일제히 1렬로 정리되어 마치 하나의 기둥인것처럼 보인다.  광장의 한복판 꼭지점인 것이다.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가득하고,  그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무리지어 이동함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수선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만..........  진정한 여행자는 여기 이 꼭지점에 멈추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바티칸의 역사와 이 위대한 건축물이 탄생하기까지의 천재들의 노력과 노동력을 부담한 민초들의 삶을 느껴볼 수가 있을것이다.  두 번째 여행에서야 비로소 이 광장의 한복판 오벨리스크에 기대서 바티칸을 바라볼 수 있는 식견을 깨닫게 되었다.  신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당연히 내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는 바로 이 꼭지점이 아닐까 싶다.

  성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잔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는 바로크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이다.

  로마를 여행하다보면 지극히 단순한 생각으로 두 가지를 떠올렸었다.  '팍스 로마나'로 상징되는 고대로마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바티칸'으로 상징되는 중세시대이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여기에다 한가지를 더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르니니' 였다.  만약에 로마가 누군가 개인의 소유가 된다면  나는 당연히 베르니니가 그 주인에 가장 잘 어울릴것이라고 확신한다.  베르니니가 곧 로마라는 도시 자체이면서,  베르니니가 없는 로마는 존재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만큼 베르니니의 손길이 로마 전역에 골고루 퍼져있다.

  칼리큘라황제의 전차경주장이었고 후에 네로황제가 검투대회를 여는 원형경기장으로 개축한 후에 기독교 탄압의 형장으로 이용되었으며 사도 베드로가 이곳에서 순교하였을 것이라는 과거사는 지금 나에게 중요하지가 않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이 광장의 의미와 쓰임새가 궁금할 뿐이다.  그와 함께 이 광장을 거닐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을 뿐이다.  광장에서 보이는 풍경은 장엄하고 엄숙하면서도 지극히 아름답다.

  혹,  이 광장에서 카톨릭의 흔적을 모두 깔끔하게 털어낸다 하여도.......  광장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웅장한 열주들의 행렬은 회랑을 따라 걷는 여행자를 아늑한 쉼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르네상스 시기인 1506년에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서 시작된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약 120년이 걸려서 1626년 교황 우루바노 8세에 이르러 마침내 축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만큼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였다.  가장 큰 이유로는 실로 어마어마한 건축비용이 그 주된 이유가 되었다.  판테온에서 건축자재를 뜯어다 썼다는 이야기가 발생한것에서 부터,  종국에 건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청이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는 희대의 사기극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막상 120년이나 걸려서 대성당은 완공되었지만  달랑 교회당 건물만 겨우 완성된것이었다.  대성당이 완성되고 20년이 지날때까지 감히 광장에 대한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교황 이노첸시오 10세가 즉위하고나자 비로소 썰렁한 대성당의 전면에 광장을 조성할 생각을 겨우 가지게 되었다.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는 육각형과 사각형과 원형과 타원형의 네가지 광장조성 설계도를 만들어 교황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여전히 생각이었을 뿐,  교황청의 재정사정은 광장 조성에 뛰어들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알렉산더 7세 교황에 이르러서야 성 베드로 대성당 최종 완공 책임자였던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광장 조성의 책임을 맡겼다.

  여전히 막대한 건축비용 부담은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하지만 교황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

  처음 베르니니의 설계는 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아 광장에서 감명을 받아 이것을 바탕으로한 사다리꼴 형태의 광장 조성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교황이 베르니니에게 당부한 한가지 전제조건에 이 첫 설계안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교황은 광자아에 모인 인파에게 강복할 때,  무조건 그 인파들이 교황의 모습을 잘 볼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고,  베르니니의 회랑 설계는 사도궁전에서 교황이 등장하는 창문들을 가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요구조건은 오랜 고심끝에 안과 밖으로 포갠 형태의 두 개의 타원형이 광장을 감싸는 지금의 모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베르니니가 만든 회랑으로 둘러싸인 광장은 곧 성 베드로의 상징과도 같은 '천국 열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열주가 늘어선 회랑의 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고,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역대 교황들과 성서속의 성인들 모습이 일률적인 3.24m 높이의 조각상 140개로 만들어져 늘어서 있다.  그 복판에 이 광장을 만든 교황 알렉산더 7세를 나타내는 문장도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늘.... 항상 오른쪽의 회랑이 시작되는 지점에 양쪽으로 나뉘어 길게 행렬이 이어지곤 한다.  행렬은 두 세줄로 끝을 모르게 길게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여덟이나 열줄 정도로 늘어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오른쪽의 줄은 한여름에도 30분에서 많게는 2시간반까지 기다려야만 하기로 유명하다.

  오른쪽의 행렬은 바티칸 박물관을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시스티나 성당 관람까지를 포함한다.  왼쪽의 행렬은 베드로 대성당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 절대 다수가 이토록 서두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로 대성장의 종탑인 쿠풀라에 올라 로마의 전경을 내려다 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 광장에 도착해보니 박물관 입구를 향하는 행렬이 보이질 않는다.  그저 일부 사람들이 흩어져서 서성거리고들 있다.  이는 오늘 오전 관람권이 이미 팔렸다를 넘어서서 이미 오전 관람객 입장이 모두 끝났다는 이야기다.  지금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오후 입장권이라도 사야할까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하니까 포기할까를 고심하는 중이리라.

  우리는 지체없이 대성당을 향하는 행렬의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조금은 한산한 느낌의 광장이 마냥 좋기만 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계획에 박물관 관람이 아예 빠졌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굳이 보기 위하여 다소 비싼 입장료를 내고 많은 시간을 투자 할 생각을 아예 접었기 때문이다.  챠밍여사로서는 어쩌면 소중한 기회를 잃는것이 되겠지만,  그간의 내 경험으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겨우 입장하면  가이드의 뒤만 쫄쫄 따라다니거나,  가이드가 없다면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하는 한.......  별로 재미가 없다.  그저 기억 할 수 있는 명작들 앞에서 인증 샷 몇 장 찍고 돌아서는 것이 대부분이다.  거기에다 그 명작들도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서 제대로 감상을 할 수가 없다.  시스티나 성당의  그토록 유명한 천장화는 지상에서 거의 20m 정도 높이에 그려져 있다.  그저 느낌상으로 '아!!!  저거?'  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다 과도한 보안시설과 요원들의 저지로  사진 촬영마저 아예 금지되거나  후레쉬 사용이 금지되기가 일쑤다.  

  챠밍여사를 인도한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 절망적인 현실을 절실하게 실감했던 터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유명 미술관 박물관은 티비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나 미술책자를 통해서' 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번 여행의 시작점인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 자유로운 조건이었으나,  아쉽게도 본관 2층의 전시실이 수리중이어서(나는 예전에 모두 보았지만)  알렉산더의 두상 같은 2층의 전시물을 볼 수가 없어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여 이번 로마여행에서 바티칸 미술관은 아예 계획에서 지워버린 뒤였다.

  대신,  여행 도중에 만나는 작은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은 열심히 부러 찾아서라도 기웃거린다.

  더하여,  세계적 미술관 중에서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만은 예외로 어떤 경우에도 결코 빼어 놓을 수가 없는 장소다.

  워낙 귀중한 르네상스 미술품중 상당수가 보관되어 있고,  관람 분위기도 비교적 아주 자유로운 편이라 항상 들려야만 했고,  이번 여행의 핵심이기도 했다.  비록 가이드를 대신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작품들을 챠밍여사에게 열정적으로 소개하다가 저절로 손가락질이 보안선을 두 번이나 넘어버리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피치는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  이제 남은것은  파리의 루우브르 박물관을 한 이틀쯤 실컷 누려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대성당으로 향하는 검색대에서 항공기 탑승만큼이나 까다롭게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피에타 수난 사건 이후로 강화된 보안체계가 가동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본당을 향해서 열주들 숲속을 걷는 느낌은 참으로 기묘하다.  오대산 월정사에 들기 위하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옷깃을 여미고 심신을 추스러던 느낌이라면 어느정도 설명이 될까?

  이 열주들의 숲을 만든 베르니니의 위대한 천재성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그런가하면.......  사실 이 회랑을 만든 이유의 저변엔,  교황을 찾아오는 왕이나 제후나 각국의 대사들이 탄 마차가 광장의 한복판을 그대로 가로질러 대성당의 계단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마차가 굳이 이 열주들 숲 사이를 지나오게 만듬으로써 그들 모두가 거대한 열주의 숲을 둘러보면서 장중한 위압감에 짖눌려서 곧 교황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끔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온다.

  나는 지금 교황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의 말단 서기관쯤의 신분으로 남북통일의 기원을 가지고 교황을 알현하려 열주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기분을 느껴보고 있다.(주께서 화해와 용서와 평화를 보내 주시기를 염원하면서........)

  본당의 모서리에서 왼편으로 계단을 오르면 성 베드로 대성당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모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지점에서 서둘러 우측으로 발걸음을 빨리하거나 심지어 뛰기도 한다.  쿠풀라(종탑)에 오르는 입장권을 사야만 하기 때문이다.

  쿠풀라에 오르려면 무조건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는데 비용이 8유로다.  계단을 통해 오르는 비용이다.  여기에다 2유로를 덧붙여서 10유로를 내면 쿠풀라 바로 아랫쪽인 대성당 본당건물의 지붕까지를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는 엘레베이터 사용이 제공된다.  내가 처음 쿠풀라에 올랐을 때는 5유로에 7유로였는데,  지난해에는 6유로에 8유로이더니,  이번엔 8유로에 10유로로 올랐다.

  내심 속으로 솔직하게는 '교회까지 이러면 안되는데........'  하다가도 이내,  '하긴 이 건물이 면죄부까지 팔아가면서 지은 건축물이니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장을 보려는 것이겠지' 하는 푸념으로 마무리 하기로 한다.

  안내 표시를 따라 쿠풀라로 향하는 엘레베이터로 향한다.

  같은 처지의 여행객 인파가 상당하다.  순서를 기다려 엘레베이터에 오르면 아주 잠시 후에 본당의 옥상에 닿게되고,  눈 앞에 '미켈란젤로의 쿠풀라'가 번쩍하고 등장한다.  돔 앞에 놓여있는 계단을 통해 돔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좁은 통로와 철제 계단을 통해서 쿠풀라 상단의 렌턴 부분에 설치된 전망대에 오른다.  계단을 오를 수록 상부는 점점 좁아지고 가파른 경사로 인하여 숨이 가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베드로 성당 쿠풀라 정도는 그야말로 공원산책 이라고 해야겠다.  '계단타기'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피렌체 두오모 쿠풀라'나 '지오토의 종탑'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당의 지붕에서 쿠풀라의 안쪽으로 들어서게 되면 안전망 너머로 베드로 대성당 본당의 안쪽이 발치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장관이다.  그리고 돔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멋진 천장화를 올려다 볼 수가 있다.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알 수 없는 느낌과 감정들이 가슴 저편에서 서서히 차오르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DOME)을 '미켈란젤로의 쿠풀라' 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돔과 쿠풀라는 같은(둥근 지붕)의 의미를 담고있다.  하지만 이 돔을 실제로 모두 미켈란젤로가 완공한것은 아니다.  대성당의 건설이 120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루어지다보니 여러명의 건축가들이 책임을 맡았다가 사망했고, 다른 사람으로 이어져 나갔다.  그 중간에 미케란젤로가 대성당의 총책임자로 20년 조금 못되게 역활을 했으며,  그 기간에 쿠풀라가 설계되고 시공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본당의 지붕위로 쿠풀라의 기초라 할 수 있을만큼의 둥근 기단이 설치되었다.  딱 거기까지 였다.  미켈란젤로가 사망했던 것이다.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덕분에 그의 후임자들은 설계안을 수정하거나 다른 공사방법등을 채택하지 못하였고,  결국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원안에 가깝게 돔 공사가 완공되었기에 지금까지 '미켈란젤로의 쿠풀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거룩한 대성당이 모두 완공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돔(DOME)만으로는 무엇인가가 2% 부족했다. 하여 추가로 계획된 것이 바로 랜턴(채광창)이었으니,  지금의 전망대에 해당하는 뾰족탑이다.  랜턴의 완성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야흐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회가 되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에 이어서 도미니코 포르타에 의해서 대성당의 마지막 공사였던 랜턴(채광창)을 통해서 찬란하게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전임자이자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끝내 대성당을 완성한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이름을 돔의 안쪽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복음16,18-19.)

 

'S. PETRI GLORIAE SIXTVS PP. V. A. M. D. XC. PONTIF. V.'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

 

 

 

 

 

 

 

 

 

 

 

 

 

 

 

 

 

 

 

 

 

 

 

 

 

 

 

 

 

 

 

 

  이쯤에서 한가지 팁을 나누고 싶은것이 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은 당연히 '돔양식' 이다.  둥근 지붕이 솟아나 있는 커다란 교회를 말한다.  밀라노 대성당이나 오르비에토의 경우처럼 바실리카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있기는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대도시마다 건설된 대부분의 두오모들은 대부분이 돔양식이라 보면 되겠다.

  지금 여기 성 베드로 대성당의 천장인 쿠풀라(돔)에서 천장화를 올려다보듯이  앞으로 유명한 피렌체 두오모를 비롯해 수많은 돔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분히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될 것이다.

  산악인들은 나침판이나 해가 없어도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방향을 알 수 있다.  어떤 대자연의 거를 수 없는 순리가 작용함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처럼 돔양식의 교회에서도 천장화를 보면 방향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오랜 과거에 벌써 나침판을 어디엔가 달아놓은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들이 돔속에 숨어있는 천장화에 은밀하게 방향을 알 수 있는 비밀 암호를 감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그 작품의 의미와 숨겨진 내용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을 도상학(圖像學) 이라고 한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기호학자인 랭던교수와 비슷한 일을 한다보 보면 되겠다.  그들은 비잔틴미술에서 부터 주제나 표현형식에 엄격한 도상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천장화에도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교회당의 우뚝 솟아오른 둥근돔(Dome)은 하늘나라인 천상계(天上界)를 상징하는것으로, 곧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여 당연하게  그 아래 주위로 대선사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린다.  좀 떨어져 동쪽 엡스(apse)에는 붙박이로 성모자와 두 천사가 항상 놓여지게 된다.  이 불변의 체계 다음에서야 비로소 성자와 순교자와 성서속의 등장 인물이나 중요한 사건들이 그려지게 된다.  윗쪽은 다분히 천상적인 그림이 그려지게되고 아랫쪽은 지극히 지상적인 그림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가지 더 불변의 원칙이 등장하는데,  '최후의 심판' 그림을 꼭 서쪽벽면에 그러넣게 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천장화를 바라보게 된다면 한층 이해가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서쪽도 슆게 찾을 수 있을것이고 말이다.

 

  우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풀라에 마침내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교회의 가장 높은 곳..........  천상계에 올라 온 것이다.

 

  2025년이 되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상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교회의 지위를 내려 놓게 된다.  2000년의 세월동안 베드로 대성당이 가장 놓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엄연히 존재했었다.  하지만 교황청(교황)은 베드로 대성당 보다 더 높이가 높은 교회의 건축을 승인했다.  건설중인 교회는 2025년 완공을 예고한 바 있다.  바로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 성당) 이다.

 

 

 

 

 

 

 

 

 

 

 

미켈란젤로는 사망 직전에 대부분의 설계도면들을 불살라 버렸다.  몇 장 남은 도면을 바탕으로 후배들은 원본에 가깝게 쿠풀라를 완성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미켈란젤로의 쿠풀라)라고 부른다.

 

 

 

 

 

 

 

 

 

 

  언젠가는 죽을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그 까닭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귀치아르디니(Francesco Guiccardini)'가 그의 저서인 '회상록(回想錄, Ricordi)'에 남겨놓은 말이다.  친구인 마키아벨리의 그늘에 가려 별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역사학자 였다.  중학교 시절에 우연히 고모님 댁에서 대학생이던 형들 덕분에 두 권의 낡은 책자를 접하게 되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귀치아르디니의 <회상록> 이었다.  당시에는 명상록이 나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하였는데,  나이 오십 줄에 넘어서니 어느날부터인가 <회상록>이 아련하게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들어앉기 시작하였다.  책은 귀치아르디니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솔직한 자서전적인 잠언집이다.  그런데 오늘 먼 과거의 (르네상스 산책)을 하면서 지나간 교회사를 되돌아보고, 이렇게 가장 성스럽다는 세상의 가장 높은곳에 올라보니 갑자기 귀치아르디니의 글귀가 떠오르는 것이다.

  푸념이기도 하고,  회한이기도 하고,  더하여는 어떤 경고의 의미도 담겼다고 느껴진다.

  '너는 무엇이냐?  무엇을 하려느냐?  종국에 너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

 

 

 

 

 

 

 

 

 

 

 

 

 

 

 

 

 

 

 

  로마는 글래디우스로 대지에 피를 뿌리고 군화로 수많은 국가와 민족을 짓밟으면서 피로 얼룩지 평화(팍스 로마나)를 거짓으로 내세오며 대제국을 이룩했다.

  교회(기독교)는 그러했던 로마를 기반으로해서 지금까지 (평화)를 내세우며 또 하나의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인류의 역사중에서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똑 같이 (평화)를 이야기하고 앞세우면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갔다.

  교회가 말하는 (평화)와 이전의 수많은 (평화)와는 무엇이 다른가?

  교회가 말하는 (평화)는 과연 허구인가?  아니면 여전히 진행형인가?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미래형인 (평화에 대한 계획)은 존재하는가?

  혹, 교회(성직자)는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미래형인 평화는 다분히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분의 영역이라고.......  그 분께서 예비해 두셨기에 때를 기다리면 된다고........  여기에는 초대교회에 대한 숭고함은 이미 어디론가 깡그리 사라지고  교회의 기득권을 끝까지 가져가고픈 은근한 속내가 담겨 있는것은 아닐까?

  그 미래형 약속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염없이 지속된 거룩한 신의 침묵과 함께.......  어쩌면 인류가 완전하게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그저 막연하나나 여전히 진행형 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면..............

  (왜 이런 생각들을 기독교의 가장 높은 정점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풀라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불경인가?)

 

 

 

 

 

 

  로마인들은 너무나도 현명했다.

  시대를 앞 선 법질서와 잘 정비된 제도와 행정력에다 월등하게 강력한 군사력만 가지고는 세상을 통치한다는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인구가 한정되어 있는데  열배 백배의 적들을 허구헌날 전쟁을 통해서 정복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이 채택한것은 (포용)과 (관용)의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어떤 나라를 정복하면 우선 '로마의 방식' 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가르쳤고 보다 물적 질적으로 나은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거기에는 로마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자격을 갖춰 로마의 시민이 되면 어느 누구나 똑같이 로마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로마를 위하여 당당하게 헌신할 자세만 되어 있다면 누구나 부자도 될 수 있고 권력자도 될 수 있는 그런 열린 사회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세상은 '로마의 시민권'이 담보하고 있는 가치를 충분히 느끼고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누구에게나 가능한 열린 기회였던 것이다.  심지어 로마가 점령한 식민지역 출신의 황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에 즉위한 자는 자기 출신지역을 위한 구국영웅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충성스런 로마제국 지지자였던 것이다.  그저 로마만을 생각하는 하나의 로마인이었을 뿐이다.

  로마가 누구나 로마인이 될 수 있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로마는 고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참패하여 일찌기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온 한니발은 지금의 수도권 지역인 라치오지역(로마인근)만을 남겨놓고 전 이탈리아를 차지한다.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약탈하고 도륙했다.  로마에게 스스로 항복하라고 협박을 계속했다.  그러자 로마는 주변의 모든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로마는 위기에 봉착했지만 기어코 극복해 낼것이다.  신성한 로마와의 동맹을 믿고 이행해주기 바란다.  로마는 모든 동맹국을 형제국으로 대등하게 대했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항상 지켜 주었다.  모두에게 로마시민의 자격을 열어주었다.  생각해 보라.  과연 카르타고가 승리한다면 그들도 당신들에게 우리 로마처럼 대해 줄 것인가를.........  카르타고의 노예가 되겠는가?  아니면 로마의 형제가 되겠는가?'

  이미 로마에게 점령당했고 식민국으로 전락한 지중해 인근의 모든 부족과 국가들이 선택한 것은 몰락 직전의 로마였다.  그들 스스로가 카르타고의 승리보다는 이제까지 보여준 로마의 열린 사회와 앞선 문명을 희망으로 판단한 것이다.

  로마는 전세를 뒤엎고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지상에서 흔적조차 드물게 사라졌다.

  그것이 로마의 위대함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치명적 약점은 무엇이었을까?  극에 달한 사치와 향락만이 약점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위대한 제국을 붕괴로 몰고가게 되었을까?  일부 역사학자와 인문학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작게나마 로마의 약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로마제국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종교에 있다.

  로마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로마에는 특정한 종교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름으로 로마에는 분명 공식적인 종교가 있었다.  그러나 딱 꼬집어서 '로마의 종교'라고 내세울만한가는 좀 짚어볼 대목들이 있다.

  로마종교 최고 신(神)이 '유피테르(luppiter)' 라고하면 다들 조금은 생소할 것이다.  그 최고의 신은 하늘나라 신들의 왕이며 천둥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린다.  다른 이름으로는 '주피터(Jupiter)' 라는 이름으로 불이웠으며,  앞선 그리이스에서는 '제우스' 라고 불렀다.  실제로 발굴된 유물 중에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오는 내용처럼 갈리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한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황제(리차드 해리스)가 개선행진을 마치고 캄피돌리아의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가 소를 제물로 받치며 승전을 기념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리이스 신화를 각색해서 로마 신화를 만들어냈던 로마는,  자신들이 그리이스를 정복하고 멸망시켰음에도 그들의 문화와 예술과 제도를 넘어 종교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와서는 약간의 손질을 가해서 자신들의 것으로 토착화 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제우스를 비롯한 열 두명의 중요한 신 무리에다가 새롭게 몇 몇의 로마식 신을 추가하여 과거의 그리이스와 똑같이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받치고 축제를 벌이고 그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로마는 특별한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워낙 방대한 영토와 국가들을 점령하면서 그 정복지의 종교들을 비교적 자유스럽게 허락했다.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까지 했다.  종교적 이유로 문제를 만들고 또다시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는 고대 그리이스의 종교적 골격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민족들의 토넴미즘들이 섞이는 복합적인........  있기는 하되........  황제와 귀족들을 제외하면 있으나마나한 종교가 있을 뿐이었다.

  제국으로 발전하여 후기로 가게되면,  로마의 황제들을 스스로를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후예이거나 동일 인물로 신격화에 열을 올리게 된다.  스스로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스스로 취해서 천상의 세계에 사는 듯 신선놀음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참으로 기가차고 웃기지도 않는 난장판의 한가운데에 고대 그리이스의 대서사시인인 호머에 견줄만한 위대한 천재시인(아니면 희대의 사기꾼?)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가 등장한다.  하나의 허례의식처럼 전락한 종교로는 제국의 정통성이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저가 암살된 후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에 등극하였으나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고,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별로 없었던 황제였다.  위대한 이야기꾼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를 트로이의 멸망속에서 신탁을 받고 겨우 빠져나온 영웅 아이네이스로 계보를 연결시키는 고귀한(?) 작업에 돌입한다.  이제 로마는 고대 그리이스의 명맥을 이어내려온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아이네이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외가쪽 선대 핏줄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당연히 황제가 될 자격과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그 위대한(?) 창조행위는 후대에 단테로 이어진다.(그 대목은 다음 기회에 차차 이어나가기로 하고....)

  이렇게 로마의 종교에 대한 배려를 넘는 방치는 점차 제국민들의 정신세계를 혼란과 무기력으로 이끌게 된다.  방대한 로마의 영토에는 너무나도 많은 신들이 널려있게된 것이다.  누가 믿는 어느 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질 수도 없게된 마당에 어느 신을 믿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정신적 혼란은 제국이 안정되고 평화롭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는 어떤 문제점으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콜로세움에서 검투경기를 벌이고 밤이 지새도록 환락의 밤문화에 파뭍혀 지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될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상황이 나빠지고 위기에 봉착하게되었을 때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보다 강력하고 확신할 수 있는 신앙을 갈구하게 되었으며,  그 신앙으로부터 위안과 평안을 확보하고 싶어졌다.  바로 이런 시기와 맞물려 오랜 탄압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끗끗하게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온 기독교 신앙이 무섭게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초대교회의 강인한 믿음과 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그야말로 빛을 무한정 발산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져가는것과는 반대로 로마는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로마는 재도약의 발판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기독교가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의 순간부터 이제 기독교는 과거의 그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어진 새로운 기독교였다.  초대교회는 목표를 이루고 고귀하게 순교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중세시대의 로마카톨릭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승리한 교회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를 파괴하고 말살하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유산과 풍습까지도 파괴해 버렸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하고 판단했으며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어떤 여지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정의를 빼고나면 나머지는 오로지 악(惡)이라 생각했다.

  그 정의의 심판은 로마제국이나 세상의 그 어떤 부족이나 국가들이 가했던 징벌보다 가혹하고 참혹했다.

  바티칸은 바로 그 무자비하고 가혹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위에 세워졌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 것일까?  신께서 기뻐하시고 축복을 내리실 만한  성스런 행위였을까?

  그것이야 말로 진정 신의 몫이리라. (신이시여.  당신에게 바티칸은 어떤 의미입니까?)

  '물론 이 물음에도 변함없이 묵비권을 행사하실 줄은 익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 대성당 파사드의 중앙부분으로 본당의 중앙문으로 통하는 입구.

 

 

 

성 베드로 대성당의 파사드 안쪽 회랑 풍경화.  본당은 5개의 출입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풀라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다시 본당 건물의 지붕인 옥상에 닿는다.

 

  이곳에는 아주 맛있는 케익 빵 등의 간식류와 차와 커피를 파는 스넥점이 있다. 나란히 기념품 상점과 병행하고 있는 형국인데 최고의 성지라서 그런지 정말로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기념품들과 교회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만 시중과는 어느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는 가격표를 달고 있다.

  이곳에서는 작은 돔이나 여러개의 환기창을 통해서 대성당의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보수중인 돔에 설치한 비계나 다른 설비들을 엿봄으로써 건축에 조예가 있는 분들의 다양한 호기심을 어느정도 충족시킬수도 있는 공간이 된다.

  지난 여행에서는 옥상의 발코니로 걸어가서 본당 지붕에 설치된 예수 그리스도상과 12제자의 조각상(배신자 유다를 대신해 선출된 마티아 포함)의 뒷모습을 가가이서 바라보고 만져볼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복구공사와 관령해서인지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따스한 휴식 시간을 가져본다.

  쿠풀라에 오르느라 땀도 흘렸지만, 이제부터 내려가면 본격적으로 본당 내부를 관람해야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마냥 서성거리듯 고개를 올려 천장을 쳐다보면서 다닌다는 것이(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하리만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려와서 보니 광장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대성당의 본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간다.

  거대하지만 이미 여타의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파사드를 많이 보아왔던 때문인지, 베드로 대성당이라해서 무엇인가가 다르게 느껴질 줄로만 알았던 기대감에는 미치지 못하는 단촐한....... 아주 쬐끔은 실망스런 파사드가 맨얼굴을 드러낸다.

  베드로 대성당의 파사드는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의 작품인데 처음 건설될 당시부터 수많은 부정적인 의견들에 의해서 수난을 당했던 건축물이라 하겠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대성당 본체 건물의 너비()에 배해서 파사드의 너비가 지나치게 크다는게 그 이유였다. 230mm의 발을 가진 아이에게 툭 삐져나온 270mm의 고무신을 신켜놓은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이 들끓자 설계자인 마데르노도 잘못된 점을 시인했다. 하여 그는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추가로 파사드의 양쪽에 종탑을 설계했고 시공을 진행했지만 여의치 못하자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파사드의 완공은 베르니니의 손에 넘어갔다. 베르니니가 양쪽의 종탑을 새로 설계했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종탑의 가단부분에 규열이 생기자 종탑의 하중을 잘못계산헤서 그런것이 아니냐고 베르니니 지지자들과 보로미니 지지자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자 공사는 중단되었고, 종국엔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뒤 '주세페 발라디에르(Giuseppe Valadier)'에 의해서 마지막 완공을 보게되었으며, 이때 시계탑이 얹혀졌다.

  아무튼......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대성당의 파사드는........ 카톨릭의 총본산인 성스러운 교회라는 이름에 비하여......... 웬지 뭔가 빠진듯 허전하고 무엇인가가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직접 대면한 대성당중에서 가장 별볼일 없는(?) 파사드가 바로 바티칸 대성당의 파사드였노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대성당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 열주랑(Portico)로 들어섰다.

  성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에 저절로 엄숙해짐을 느낀다.

 

  어차피..... 로마의 르네상스는 종국엔 모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거기에다 지붕이 덮여있는 건물의 실내에 6만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이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졌다.

  오늘 안에 이곳을 다 둘러볼 수는 있을까?

 

 

 

 

 

 

 

 

 

 

 

 

 

 

 

 

 

 

 

  -- 어차피 기약할 수 없을만치 길어질 수 밖에 없는 바티칸여행기는 다음으로 이어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