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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라파엘로의 방에서 (아테네 학당)을 만나다

by 피안재 2021. 2. 3.

 

 

 

 

 

 

 

 

 

 

 

 

 

 

 

 

 

 

 

 

 

 

 

 

 

 

 

 

  피렌체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운 르네상스가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마저 꽃을 피우고 나서야 서서히 알프스 넘어 북부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끝내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했을만큼 자존심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오로지 태양을 향하고 의존하듯이 제국으로 성장한 프랑스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만 했고,   그 중심엔 태양과도 같이 위대한 자신의 의지와 권위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만방에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르네상스를 가지고 싶었다.

  하여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비롯한 당대의 이름난 화가와 조각가와 건축가들을 파리로 초청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하여 그는 '로열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프랑스 스스로가 위대한 르네상스를 창조해 나가기를 열망하였던 것이다.  이 로열 아카데미를 통해 배출된 화가와 조각가를 '관학파(官學派) 미술가' 라고 부르게 된다.

  과거의 미술가는 가지고 태어난 우수한 자질만으로도 가능했지만, 이제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실기 위주의 경험과 숙련된 손재주만 가지고는 더 이상 훌륭한 미술가가 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술가에게도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미술 이론과 원근법과 같은 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과 고대의 신화나 성경 내용을 어느정도 완벽하게 터득해야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로열 아카데미가 바로 그런 역활을 하게끔 만들어진 미술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이는 아주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술학교의 전형이자 모범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관학파 미술가 배출' 이라는 표현의 어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것이 긍정적으로만 펼쳐지지는 않았다.  훌륭한 미술가나 예술가는 어떤 정형화된 틀 속에서는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틀을 깨트리거나 뛰쳐나오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는 존재할 수 없는 기이한 특성이나 기질이 제대로 된 미술가나 에술가들에게는 아주 흔하게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로열 아카데미'는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급성장하였고 나름 프랑스의 미술에 크게 공헌한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로열 아카데미가 하나의 교본처럼 받들고 존경하면서 따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최고의 모범은, 프랑스가 배출한 최고의 화가이자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불리는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이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지나 티치아노와 마사치오에게나 익숙한 우리들 기억속의 '르네상스 화가 명부' 에서 푸생이라는 프랑스 태생의 르네상스 화가는 어쩌면 한참이나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사람에게 푸생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르네상스 맨'인 것이다.

  루이 14세가 만든 로열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미술 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교육기관에 점차 제계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학습방법의 개혁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는 미술이라는 분야를 대상으로하여 (구도) (소묘) (채색) (표현력)의 네 가지 분야로 평가 분석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미술의 핵심 분야를 넷으로 나누어 관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어느 특정화가를 살피고 관찰하고 연구하고 평가하는 기준의 잣대로도 네 가지 평가가 뒤따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 전, 어느 미술잡지에서 현대에 들어 뜨겁게 각광받고 있는 '카라바조의 미술세계'를 다루고 있는 특집 기사를 읽은적이 있었다.  말미에 어떤 미술 아카데미에서 앞서 거론한 기준에 의거하여 카라바조의 미술세계를 평가해 보았는데,  구도나 소묘와 채색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얻었지만 표현력에 있어서만은 0점을 받았다는 기사를 잃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카라바조의 표현력이 낙제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기준을 전제로 한다면 로열 아카데미의 기준으로 평가받았던 푸생만큼은 구도나 소묘나 채색이나 표현력에서 모두 100점 만점을 받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이후로 로열 아카데미는 프랑스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것은 사실이었지만,  푸생만한 혹은 푸생을 능가하는 화가는 배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푸생만이 만점 득점자인 것이다.

  푸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푸생에 대해서 혹은 푸생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것일까?

  인상주의 화가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 속에다 푸생을 그려 넣는것을 목표로 한다' '항상 색과 빛이 있는 자연 위에 푸생을 그린다' 라고 까지 찬양을 받치기도 했다.

  세느강 하류에서 태어난 푸생은 화가 바랑을 만나 자신도 화가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파리로 상경해 여기저기 아틀리에를 전전하면서 화가생활을 연명해 나가기는 했지만 끝내는 좌절과 상처로만 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연히 라파엘로의 판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라파엘로 그림의 매혹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푸생은 라파엘로를 만나기 위해 로마에 오게되지만 라파엘로는 이미 100년 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사방으로 라파엘로의 그림을 찾아다니면서 관찰하고 연구하던 푸생이 깨닫게 된것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었음에도 그들에게는 성서뿐만이 아니라 그리이스 신화나 로마 신화는 물론 서사시를 넘어 인문학에도 상당한 조예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풍부한 지식과 소양 속에서 다양한 소재들을 찾아내곤 하는 것이었다.  푸생이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하지만 푸생은 그때 받은 충격에서 뛰쳐나와 자신도 그들처럼 풍부한 지식과 소양을 갖춘 화가로 탈바꿈 시키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르네상스적 자존심인 위대한 화가 푸생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바로 라파엘로를 통해서........

  푸생이 (구도) (소묘) (채색) (표현력)에서 모두 백점 만점을 받았다면........  라파엘로는 과연 몇 점을 받아야 할까?

  글쎄다.

  지극히 나만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푸생은 절대로 모두 백점을 받을 수가 없겠다.

  라파엘로를 굳이 그런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구도와 표현력은 미켈란젤로를 만나기 이전하고 이후가 확연하게 차이가 분명하게 난다.  그런가 하면 구도와 표현력 또한 다빈치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차이를 나타낸다.  다만 채색에 관해서라면 라파엘로는 애초부터 대단히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기준에 따라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평점을 매겨본다면 라파엘로의 평가는 (구도-95점) (소묘 87점) (채색-100점) (표현력-91점)을 주었을 것 같다. 

 

 

 

 

 

 

 

 

 

니콜라스 푸생의 대표작품인 (사빈느 여인의 약탈).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니콜라스 푸생作.  (포키온의 매장)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니콜라스 푸생作 (폴리페무스가 있는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 헤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니콜라스 푸생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켈란젤로가 고독하고 반항아적인 천재를 대표하고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천부적인 다재다능한 천재를 대표한다면,  라파엘로는 그들과는 정반대적인 유형의 전형적인 세속적 내지는 통속적인 예술천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미켈란젤로 같이 극적인 삶을 살다간 예술가야말로 전기 작가나  역사 소설가는 물론 영화 제작자들에게 까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소재로 작용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라파엘로를 바라본다면 미술사가들이나 어쩔 수 없이 잠시 다루게될 뿐, 그다지 인상적이거나 대반전 같은 극적 요소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된다.  짧고 단조로운 삶의 여정속에서 수많은 성공적인 이야기들로만 이어지고 극적인 전개가 하나도 없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하루하루가 그저 풍요롭고 향락에 젖어 산 기록들뿐이기 때문이다.  특출난 이력을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수없이 많은 여성편력을 쌓았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세계를 보더라도 느낌상 별로 힘들이지 않고 쑥쑥 찍어내듯이 생산해 낸것만 같은 많은 작품들이 하나같이 화려함과 우아함으로 너무도 충만해 있기에,  미켈란젤로에게서 볼 수 있는 다소 비극적인 장려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인상이나 압박감에는 미치지 못하는것이 사실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처럼 고뇌하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과감한 실험정신을 통해 미술사에 공헌한 혁신가로서의 업적면에서도 라파엘로는 거의 이루어 낸 것이 별로 없다.  그저 타인의 장점과 기교를 세세하게 파헤치는 예리한 분석력과 그 결과물을 무한으로 흡수하여 재빠르게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여 새로운것을 만들어내는 천부적인 능력만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다.  라파엘로에게 있어서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영향은 그야말로 완성된 화가 '라파엘로의 모든것' 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는 라파엘로가 절대적으로 위대한 화가가 못된다고 폄하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와 항상 비견되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는 조금 못미치지 않았나 하는 의미의 표현이다.  상대가 상대이니 말이다.

  라파엘로가 있어서 푸생의 작품세계가 풍성하게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나는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다.

  푸생에게 있어서 라파엘로는 스승이었으며 그가 추구하고자하는 예술세계의 신(神) 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브라만테나 미켈란젤로 조차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절대영역이었을 것이다.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아테네 학당)을 선택 할 것이다.

  장대한 하나의 건축공간 속에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재현해 낸 르네상스 전성기의 최고 걸작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 전성기의 고전적 정신을 최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하나의 규범이며, 가장 잘 표현해 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정신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 하나만을 고르라면 당연히 (아테네 학당) 이다.

 

 

 

 

 

 

 

 

 

 

 

라파엘로作.  (아테네 학당)   로마 바티칸 라파엘로의 방 소재.

 

 

 

 

 

 

 

 

 

 

 

 

  '서명의 방' 이라 불리는 율리우스 2세 교황의 방(집무실. 도서관) 한쪽 벽면에 가득 거대한 신전을 통째로 옮겨다 넣은 라파엘로의 발상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테네 학당) 과의 첫만남은 그만큼 놀라운 경이로움 자체였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브라만테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을까?  마치 바티칸 대성당이 통째로 이 방으로 옮겨져 왔던가,  아니면 우리가 지금 대성당의 제단 전면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림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마져 들었다.  그가 브라만테나 상갈로의 뒤를 이어 대성당의 건축에 실제적으로 크게 관여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보면,  어쩌면 그가 생각하던 대성당의 실내 조감도라고 추측해 보게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듯 싶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의 슬픈 화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 이유없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가 바로 그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는 화가로서 이론적 바탕에 아주 투철한 사람이었다.  풍부하게 감정이 넘쳐 흘러나는 벽화나 초상화를 주로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항상 너무 이론적으로 보여지 않느냐는 지적이 뒤따랐다.  르네상스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우던 시절에 맞추어 프란체스카의 그림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교황청은 이 뛰어난 화가를 초빙하여 교황의 집무실인 '서명의 방'을 벽화로 가득 채워주도록 요청하였다.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20여년 전에 이미 교황의 집무실인 서명의 방은 프란체스카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즉위하였을 때,  프란체스카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던 서명의 방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하여 처음에는 보수 공사를 계획하였고, 보수공사가 막 진행되려는 시기에 교황은 막 로마에 도착한 파릇파릇한 미소년 화가 라파엘로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은 이내 예의 바르고 총명한 이 청년화가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여 서명의 방 보수공사 자체를 백지화 시켜버렸고,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벽화를 모두 긁어내고 지워버리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서명의 방 전체를 라파엘로로 하여금 직접 그림들로 가득 채워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명의 방'은 모든 공사가 끝나는 시점부터 '라파엘로의 방'으로 불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라파엘로의 방에서 많은 훌륭한 라파엘로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덕분에 뜯겨나가고 사라진 프란체스카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모두 없어지거나 그쳐지는 것도 아니다.  못내 아쉬울 수 밖에........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살려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대영박물관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건축물의 벽면을 통째로 뜯어서라도 잘도 가져가던데 말이다.  그냥 훼손시켜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 보다는.......  차라리 대영박물관이라도 찾아가서 만나 볼 수 있었더라면.........

  라파엘로 때문에 쫓겨나야만 했던 프란체스코의 작품들이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作. (부활)   이탈리아 토스카나  산세폴크로 시립박물관 소장.

 

 

 

 

 

 

 

 

 

 

 

  이런 작품들로 가득했던 '서명의 방' 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프란체스코는 떠났고  라파엘로만이 남았다.

 

 

  암튼 라파엘로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서명의 방을 가득 채우게되는 미술작품들의 소재는 라파엘로 자신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율리우스 2세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라파엘로가 이 방의 벽화 하나 하나를 위해서 신중하게 연구를 거듭했고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에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라파엘로의 소묘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헌신과 노력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하면 다소 떨어지는 라파엘로의 소묘이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패턴으로 다양하게 반복해 가면서 보완작업을 계속한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소묘작품들 속에서 그가 얼마나 힘겹고 신중하게 작품의 완성에 다가가고자 하였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학 대표적인 것은 1626년 페데리고 보로메오 콜렉션이 처음 소장하고 있다가  보로메오 비스콘티 미망인을 통하여 밀라노의 피나코테카 암브로시아나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아테네 학당 소묘)이다.

  소묘작품 속에서는 개개인 등장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이나 호려한 색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가상의 웅장한 고전적 건물 속에다가 어떠한 구성을 가지고 등장인물들을 배치하고자 하였는지를 살펴보면서 차후의 완성은 어떤방식으로 진행되어 갔을지에 대한 짜릿하고도 흐뭇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작품의 감상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라파엘로作.  (아테네 학당 소묘)   밀라노 피나코데카 암브로시아 갤러리 소장.

 

(아테네 학당)의 구도.  마치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최후에 만찬)을 보는것만 같은 느낌이 생겨난다.

 

 

 

 

 

 

 

 

 

 

 

 

 

 

 

 

 

 

 

 

 

 

 

 

 

 

 

 

 

 

 

 

 

 

 

  (알림)

  오랫동안 나름 공부해왔던 자료들도 다시 챙기고 저 스스로의 공부도 겸해서 (르네상스 산책) 이야기를 열심히 써서 올려왔는데,  로마 도착 이후에 워낙 살펴 볼 것들이 많다보니 상당히 많은 지면이 오로지 (역사) (미술사) (인문학) 등등의 이야기만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곳도 많이 남았고,  살펴보아야 할 르네상스는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말입니다.

  하여 잠시 쉬었다 가는 의미로..........  연재중이던 <바티칸 박물관> 여행기를 잠시 미루어 놓고 <로마 여행>을 통해 다른 르네상스를 먼저 둘러보는것으로 하겠습니다.  바티칸 박물관 여행기는 짬짬히 준비되는대로 되돌아 와서 보강을 해 놓기로 하고 로마의 다른 여행지로 먼저 떠나보겠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여행기는 조금 기다려 주세요.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과 병행하다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