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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골목을 지나면 보이는것은 온통 로마(Roma)뿐

by 피안재 2021. 2. 6.

 

 

 

 

 

 

 

 

 

 

 

 

 

 

 

 

 

 

 

 

 

 

 

 

 

 

  길(路)은 앞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생겨난다.

  아무도 간적이 없는 원시상태의 자연속을 누군가가 처음 지나갔을때  그것은 흔적일 뿐이다.  그렇게 어떤이가 이미 앞서서 지난간 흔적을 따라 누군가가 뒤따라 같은 장소를 지나간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길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방향이나 목적이 같거나 비슷해야만 하는 전제가 따르겠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앞사람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 길은 앞선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생겨났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하여 나의 여행(길)은 늘 앞선 세대의 발자취를 살피고 느껴보고 깨우치고자  하는 일상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제는 길(路)이 꼭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road)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방법을 나타내는 길(way)의 의미도 있고, 다소 추상적인 의미의 정신적 영역이랄 수 있는 행위 규범으로서의 길(path)도 이제는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분명한 길(路)이라 하겠다.

  지금 나는 길 위에 있다.

  유럽의 어느 하늘아래를 걷고 있다.

  유난히 맑고 파란 하늘은 이따금씩 삐끔삐끔 모습은 아주 간간히 드러내곤 이내 다시 숨는다.  사방으로 온통 숲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소리가 들리고 산들바람이 부는 푸르른 울창한 숲도 아니다.  사방으로 세월의 흔적이 켜켜히 쌓여있는 낡고 비좁은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는 건물들의 숲속을 헤매고 다니는중이다.

  사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네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  혹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간격이 지극히 좁을 경우 그 사이에 난 좁은 길' 이라고 말이다.  영어로 'Alley'라고 부르는 이 길을 우리는 '골목길' 이라고 부른다.

  길이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에 편리하게끔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조해 낸 일정한 너비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사가 바로 길을 통하고 길 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공간에서 서너걸음만 비켜나면 조금 떨어진 주변의 모습은 이제까지 길을 오가면서 보아왔던 풍경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소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낙후된 동네의 이미지로 각인된 골목길.  미로처럼 얽히고 섥힌 골목길은  그 비좁은 공간에 면을 맞대고 살아가는 그곳의 사람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필요나 선택에 의해서 갖추어진 공간이 결코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 부득이 하게 생겨난 이 골목길은 그러다보니 툭하면 막다른 골목이나 심지어 낭떠러지 벼랑에서 멈춰서기도 한다.  그 아나로그적인 구시대의 유물을 사진에 담으려 찾아오는 여행자도 있고,  과거 힘들었던 시절을 추억하거나 옛정취를 느껴보려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골몰길은 어떤 누군가의 일상이며 삶의 터전인 것이다.  골목 안에는 더 이상 최소한의 생존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하여 모든 골목길은 어딘가 밖을 향해 열려있다.  그 골목이 향하는 밖에는 슈퍼, 빵집, 식당, 미용실, 정유점, 문방구, 약국, 교회, 동사무소,  그리고 학교가 있다.

  시간만 나면 찾아다니는 대한민국의 골목길은 주로 그런 모습이었다.  내가 살고있는 고향 충주에만 해도 그런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골목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는 좀 다르다.

  어느나라를 여행하던지 골목길이 주는 이미지에는 굳이 별다른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될만큼  앞서서 이야기 했던것 같은 골목길만의 독특한 정취와 숨결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왠지 이곳의 분위기른 사뭇 다르다.

  이곳의 골목을 빠져나가면 그 흔한 슈퍼, 빵집, 식당, 미용실, 정육점, 문방구, 약국, 교회, 동사무소, 학교가 나오는것이 아니다.

  이 골목을 빠져나가도 로마(Roma)  저 골목을 빠져나가도 또 로마(Roma)  사방 어디를 뚫고나가도 보이는 것은 온통 로마(Roma) 뿐이다.

  'All roads lead to Roma.'

  로마라서 다른것인가?  이거야 숫제 내가 가지고 있던 '골목길'에 대한 일종의 편견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 

  골목길은 무언가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나거나 뒤쳐지거나 최소한 비켜나고자 하는 그런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곳에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기미 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쩌다 찾아 온 외지여행객의 눈에 그네들의 세세한 속내가 모두 들춰보이지도 않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대로변이 로마제국이라면 골목길은 최소한 변방의 로마소왕국이라도 되는 것일까?

  뒷골목 까지도 로마스러우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유럽에서도 명물로 꼽힌다는 로마의 포르타 포르테세 벼룩시장을 둘러보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바티칸을 나와서 벼룩시장을 가자면 '바티칸 대성당 뒷동네' 라고 할 수 있는 '뜨라스떼베레(Trastevere)'를 지나가야만 한다.  관광객들로 들썩이는 화려하고 혼잡한 로마가 아닌, 변화와 번영에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듯한 소박하고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듯한 동네라고 할 수 있겠다.  테베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의 중심' 이자 '인류 문명사의 중심'인 로마 번화가가 있고,  반대편은 바티칸 대성당만이 전부인 양 들어서 있는 현실의 형국에서 뜨라스떼베레는 바티칸을 제외한 고즈넉한 옛도심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로마를 찾게되면 일단 테르미니역 근처에 교두보를 확보해두자마자 서둘러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트레비 분수, 스페인 계단, 판테온,  그리고 나서는 바티칸 대성당을 찾는게 보편적으로 택하는 여행계획들이다.  하지만 여행 경험이 풍부한 유럽의 자유여행자들은 로마에 오면 우선 뜨라스떼베레 인근에 숙소를 정하고 느긋하게 골목길을 산책하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우선 충분한 휴식을 취한단다.  유럽인들에게 뜨라스떼베레는 잊혀져간 지난날의 고향처럼 느껴진단다.  여독을 풀고 마음의 위안과 여유를 되찾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대성당 투어에 나서서 미사도 드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바티칸 박물관 투어에 뛰어든다고 한다.  하루를 온전히 바티칸에 쏟아붓는다고들 한다.  그리고 나서야 다음 차례로 한껏 여유로움과 자유로움 속에서 로마투어를 착착 진행해 나간다고 들은 바가 있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트라스테베레에 들어서면 확연히 다른느낌이 강하게 차고 들어온다.  로마의 수많은 골목길 풍경들과는 사뭇 무엇인가가 다르게 다가온다.  굳이 다른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 인사동의 전형적인 분위기에다 운치있는 카레들로 길게 늘어 선 골목길 같다고나 할까?  화려함이나 강렬함은 없지만 은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푹 젖어드는 느낌을 가득 안겨준다.  이리저리 뻗어나간 미로같은 골목길과 영화 셑트장이거나 소품같이 깜찍한 카페들과  구멍가계 같은 기념품점 사이로 고혹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서점이 보인다.  수리를 필요로 하는 낡은 건물들의 창틀과 발코니와  빛이 벗겨져나간 건물 외벽에 걸려있는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줄기들에서 벌써 봄을 연상해 보는것은 좀 심한 무리일까?  어느 카페에서인가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오고 있다.  해가지면 노천 카페 위로 수은등의 정취를 풍기는 조명들이 밝혀질 것이다.  정다운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와인을 나누고 햄과 치즈를 나누면서 이야기 꽃을 피울것이다.  혹 단테나 니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설마 꺼내지는 않겠지?  어쩌면 인터 밀란과 AS 로마의 축구경기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이곳에 숙소를 잡았어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어느 카페의 창가에 앉아서(그래도 겨울이라 노천 보다는 창가) 생맥주를 마시면서 뜨라스테베레에 밤과 야경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시간을 확인해 본 결과로 벼룩시장은 이미 한참전에 폐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발길 닿는대로 무심코 뜨라스테베레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거닐어 본다.

  '또각 또각?' 아니면 '따박 따박?'

  호젓한 유럽의 골목길을 걸을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다른곳에서는(대한민국)에서는 좀체로 들을 수 없는 그런 감흥이 가득한 속삭임이다.

  좁고 후미진 골목길일수록,  사람이 적거나 혼자일 수록,  낮 보다는 가로등 불빛 마저도 희미한 깊은밤 일 수록 더욱 말고 청아아게 들려오는 아주 또렷한 울림이다.

  천 년 이천 년을 견뎌 온, 투박하게 대충 다듬어진 돌로 만들어진 유럽의 고대 포장도로에서는 아주 특별한 발자욱 소리가 난다.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우리는 거의 잊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 유럽의 골목길을 걷노라면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나와 함께했던 그림자와 같은 벗이 또 하나 불쑥 나타나 길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와 동행을 한다.  산길을 걷거나 물을 건너거나 포장도로를 걷거나 간혹 맨발로 걸을 때마다 그 느낌과 소리는 모두 달라지겠지만,  유럽의 돌로 포장된 골목길을 걸으면서 들을 수 있는 발자국소리 만한것이 없다.

  늘 함께하고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서 함께 걷는 발걸음은 언제나 행복하다.

  무작정 골목길을 걷다보니 어느 순간 언덕을 내려서더니 가지만 앙상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게 늘어서있는 자동차 도로가 불쑥 나타난다.  골목이 끝났음에 아쉬워할 즈음에 문득 시야 가득 들어오는것은 푸른 테베강이다.  로마 도심을 휘감아 돌며 흘러가는 테베강의 강변도로가 나타났다.  도로에 내려서서 주변을 살피니 단박에 어디쯤인지 알것 같다.

  눈 앞에 나타난 거다란 다리 아래쪽으로 우리나라 한강의 밤섬을 연상시키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테베섬(Isola Tiberina) 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다리는 가리발디 다리가 틀립없다.

  로마에는 미처 내가 다 헤아리지 못 할 정도로 많은 다리들이 있다.  

  로마 도심의 하류에는 로마역사에서 너무도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우스와 로마제국을 놓고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꿈에 천사가 나타나 십자가를 앞세우고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계시를 내려주었고 그 결과로 승리를 쟁취한 후에 기독교를 공인해 주었다는 기독교역사에서 너무도 중요한 사건을 담당한 다리를 말한다. 밀비우스 다리 아래로도 여러개의 다리가 건설되었지만 이곳 '이솔라 테베리나(테베섬)'에 설치된 양쪽의 다리가 아마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테베섬에 토목공사를 벌여 신전을 지었던것이 고대 그리이스의 신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신전을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이곳을 다스리면서 세운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도시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고대로마는 그리이스를 온전히 그대로 모방하고 받아들였으며 그 시기의 초기 로마인들에 의해서 행해졌던 일이다.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에 주된 신(神)들은 주로 고대 그리이스의 모든 신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로마인들은 '전쟁과 평화의 신' 이자 '승리의 여신' 이며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미네르바)를 무척이나 숭배했었다. 

  이솔라 테베리나 상류로 가리발디 다리와 시스토 다리와 쥬세페 마치니 다리가 들어서 있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프린시페 아메데오 다리가 있고,  그 윗쪽에 로마도심의 가장 중요한 삼총사 다리가 있다.  아랫쪽이 빗토리오 에먀뉴엘 2세 다리이고 중앙인 그 유명한 베르니니의 조각상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로마 최고의 명물다리라 할 수 있는 천사의 다리가 로마 도심과 천사의 성(산탄젤로 성)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윗쪽이 움베르토 1세 다리이다.  이탈리아의 역사와 크게 연관이 있는 인물들을 상징한다.

  로마의 현지인들이나 많은 여행객들에게 아주 낭만적인 명소로 각광 받고있는   이솔라 테베리나는 도심을 가르며 흘러내려온 테베강이 급하게 휘어지면서 지류를 만나 작은 삼각주(모래톱)를 형성시키면서 만들어 졌다. 

  기원전 7세기 경에 테베강 안쪽에 일곱 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로마가 탄생했지만 여러 왕을 거치고나서야 제대로 된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당연히 로마라고 할 수 있는 영토 조차도 포로로마노를 중심으로한 지극히 작은 영역에 그쳤을 것이다.

  현재의 바티칸 대성당이 들어서 있는 테베강 건너의 지역은 수수께끼 문명사에 등장하는 로마 이전의 고대 왕국 에트루리아의 영역이었다.  하여 당시에는 여기 테베강 건너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정착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밀과 호밀을 경작하는 대규모 농촌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필요에 의해서 가축을 길렀는데 주로 소와 양이었다.  농사를 위주로 하는 지역이다 보니 가축을 기를 초지가 부족하였다.

  테베강 건너 지대가 낮은 지역엔 한없이 드넓은 초원이 펼쳐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로 넑고 거센 테베강이 가로막고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천 정비가 잘 이루어진 오늘날과 비교하면 안된다.  고대의 테베강은 대단히 넓고  수량이 엄청났다.  물살이 낮은 하류를 택하면 강폭이 너무나 넓고,  강폭이 좁은 상류를 택하면 물살이 너무나 거셌다.  사람은 배를 이용해 건너다녔지만, 가축을 배를 이용해 나르며 기를 수는 없는 문제였다.

  기원 전 510년, 고대로마의 여섯번째 왕인 타르퀴니우스 왕은 세찬 테베강에 다리를 놓을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최선의 방책으로 자연적으로 생성된 모래톱(이솔라 테베리나)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착안하여, 나무말뚝을 박고 수확을 한 밀집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이용하여 물길을 반대쪽으로 돌린 후에 목재 가교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같은 방법으로 반대쪽에도 다리를 놓았다. 이솔라 테베리나는 더 이상 섬이 아니었고 사람과 가축들이 이곳을 통하여 오고가게 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홍수때마다 다리는 쓸려 내려갔고, 그럴때마다 다시 건설되었다.  테베강을 오가는 다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만큼 이 작은섬 이솔라 테베리나의 중요성도 커져만 갔다.

  고대 로마에 아주 커다란 재앙이 몰려왔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한 것이다.

  병들거나 도심에서 밀려 난 하층민들이 꾸역구역 이솔라 테베리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수시로 많이 오고가는 다리 주변을 서성이면서 구걸이라도 해야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밀 수확을 도와주고 댓가를 받거나 나락이라도 주워야만 했다.  아니면 도둑질을 하던가 행인을 털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이솔라 테베리나는 우범지대이자 하층민들이 우굴거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지각이 있는 일부 로마인들이 고대 의학이 유독 남달랐던 그리이스인들의 전염병 대처방법을 배우고자 멀고 먼 그리이스 지역까지 찾아갔다.  그들은 미처 로마가 알지 못했던 상당한 의학지식을 가지고 돌아와 전염병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의학지식과 함께 그리이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의신(醫神) 에피클라피오스'를 함께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전염병이 사라지자발렌티니아 황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폰테 파브리치오를 세웠다.  그리고 시간차를 두고 후일  폰테 쎄스티오가 지금의 모양으로 건설되었다.  후로도 여러차례 대홍수에 의하여 파손되었고 거듭거듭 복원 절차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후로도 전염병은 계속되었고,  그리이스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의학지식 활용이 중요했음을 깨달은 로마는 이솔라 테베리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자 우선 제방공사를 벌였다.  길죽한 섬의 모양을 대리석으로 제방을 쌓아 하나의 범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바로 의학의 신 에피클라피오스에게 받치는 신전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곳을 중심으로 로마의 의학과 의술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중심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이곳은 빈민가를 벗어나 병을 치유하는 소중하고 신성한 지역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의학의 성지이자 치유의 섬인 것이다.

  파테네프라텔라 병원과 이스라엘 병원이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세의 기독교 세력이 맹위를 떨치던 10세기를 전후해서 결국 이솔라 테베리나의 상징과도 같았던 에피클라피오스 신전을 파괴되었고 잔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헤브라이즘에 의한 헬레니즘의 파괴와 살상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리이스 신전의 터전 위에 성 바톨로메오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이어서 산 조반니 칼리비타 교회가 건설되었다.  에피클라피오스가 담당했던 치유를 기독교 성인들이 기적을 행사하면서 치유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도 교회는 성스러운 유물과 시체들로 인하여 한바탕 떠들썩한 소동을 벌이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사건과 사연들을 만들어 내게 되지만........  이는 다분히 그분들만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야기들로 어느정도 알고는 있지만 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과감하게 생략 내지는 삭제해 버리기로 한다.

 

  또한 이솔라 테베리나는 영화의 섬이다.

  이탈리아 국제 영화제가 펼쳐지는 장소이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연인들이 이 섬을 더욱 특별한 낭만적인 장소로 여기고 찾아 오는것이 아닐가 싶다.  시내를 거닐다 보면 '스파게티 서부영화'를 비롯한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 포스터를 여기저기서 자주 접할 수 있다.  포스터 속의 소피아 로렌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우리가 이솔라 테베리나를 찾은 계절이 겨울만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아이고......  이 추위에 아이스크림이라니.......  하여간 웬수여 웬수...........'

  '아이스크림 이라니?  젤라또여.  이탈리아산 젤라또라고?'

  '젤라또던 아이스크림이던  춥다고 했잖아.  따끈한 코코아라면 모를까?'

  '헐.  로마에선 오드리 햅번 처럼 폼나게 젤라또 한 번 먹어줘야 한다며?'

  '오드리 햅번이던 줄리아 로버츠던 날씨를 봐 가면서지,  무턱대고 추워 죽겠는데 아이스크림이야?'

  '젤라또라니깐?'

  '암튼?'

  '스페인 광장에서 젤라또 못 먹게하니까 눈에 띠었을 때 먹어두는 거고,  또 스페인 광장 가자면 한참 더 걸리니까 틀림없이 어두워질테고, 그러면 더 추워질테니까 미리 먹어두자는건데..........'

  '그렇게 따지자면  두었다가 내일 먹으면 안돼?  내일 로마 아이스크림 가계 다 문닫는데?  어휴,  이빨 시리는것 봐.'

  '앞으로 죽어다가 깨어나도 내가 다시 젤라또 사는가 봐라?'

  '어휴.  저 무지막지한 억지......... 또 돋았네 돋았어?'

  (우린 이러면서 손 잡고 싸돌아 다닌다.  환갑이 되어서도 말이다.  앞으로도 쭈욱 그럴것이지만....... 말이다.)

 

  파브리치오 다리 위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거리의 음악가는 헐리웃 배우 뺨치는 미남이었다.   버스킹 음악 수준도 상당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의 노래와 연주를 세 곡이나 감상했다.  물론 매너팁은 기본이었고.

  파브리치오 다리를 건너 와서는 다시 하류쪽으로 발걸음을 다잡고 걷기 시작했다.

  여기 근처 가까운 곳에 로마여행의 아주 유명한 명소가 있는것은 첫 방문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냥 지나쳤었는데,  챠밍여사에게는 어쩌면 즐겁고 유익한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들러 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로마에 왔으면 오드리 햅번이 등장한 다분히 로마적인 명소 몇 군데는 들려주어야 하는게 아닐까?

  이솔라 테베리나가 끝나고 팔라티노 다리와 만나는 지점에 고대로마시대에 가축시장이 열리던 '보아리움 포룸(Forum Boarium)'이 있다.  고대 그리이스 유적과 분수가 있는 이 멋진 역사유적 공원이라 해야겠다.  교통의 요지인 이곳의 너른 도로를 건너면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 온 이유이기도 한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Piazza della Bocca della Verità)'이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보아리움 포룸에 있는 그리이스 신전과 이 지역이 로마역사에서 차지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비중과  인근의 다른 사원들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일단은 돌아나오는 길에 다시 만나보기로 하고 가던 발걸음을 서둘러 횡단 보도를 건넌다.

  아뿔싸.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람들이 매우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지를 않은가?  혹시나는 ......  역시나 였다.

  '라 보카 델라 베리타(La Bocca della Verita)'는 오늘도 역시나 여행자들로 만원이었다.

  로마의 초대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진흑으로 만들어진 로마를 물려받았고,  이를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어서 물려 주었다' 라고 말이다.  그럼 나는 오늘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명언에 한 마디를 첨언해 주고 싶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기는 하였지만,  지금 로마를 먹여살리는 것은 오드리 햅번 이다' 라고 말이다.

  '진실의 입(라 보카 델라 베리타)' 앞에는 오늘도 오드리 햅번 처럼 깜직하고 우아한 포즈로 달랑 사진 한 장을 찍고싶어 안달이 난 여행자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다.

  도대체.......  둥근 대리석 판떼기에 뿔난 못생긴 괴수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악마의 목구멍처럼 시커먼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무엇이 그리도 귀중한 것이라고들..............  헐.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없었거나,  혹 여자주인공이 오드리 햅번이 아니었다라면.........  저런 성화들이 과연 펼쳐졌을라나?  로마의 역사나 유적이나 문화재 때문에 찾아오는 여행자들 말고,  실제로 오드리 햅번의 발자취를 따라 하고파서 찾아오는 여행자들(특히 여성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해 본다.

  보아리움 포룸 건너편의 광장 이름 조차도 '라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이다.  그러니까 그냥 '진실의 입 광장' 이다.  어느날부터인가 모르게 이곳에선 모든것이 '진실의 입'을 기준으로 구분되고 가리켜지게 되고 말았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의 입'은 이곳에 오래전인 6세기 경에 건립된 아주 유서 깊은 교회의 출입구 한쪽 회랑에 보존까지도 아니고 들여다 놓았던 커다란 둥근 대리석 돌덩이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 돌덩이의 유래는 교회보다도 훨씬 오래된 기원 전인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유서 깊은 교회에 견줄바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로마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에게 유서 깊은 교회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Santa Maria in Cosmedin)'는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그저 '진실의 입'을 찾아가는 검색용 주소로 효용될 뿐이다.

  이 교회가 로마카톨릭이 아니라 비잔틴의 동방정교회(그리이스 정교회)에  의해서 생겨난 유서 깊은곳 이라던가,  성당 내부에 2월 14일을 기념하게 만든 '성 발렌타인'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조차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로지 출입문 안쪽에(외부에서 창살 너머로) 달랑 벽면에 걸리다시피 올려져 있는 대리석 돌덩이에만 관심이 있다.  아마의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에 어떤 포즈로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인증샷에 찍힐것인가에만 정신이 쏠려있다.

  참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현장에 내가 지금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긴 줄을 비켜 돌아서 비어있는 창틀로 다가갔다.  코 앞에 대리석 원형 돌판이 보인다.  연실 사람이 바뀌어가면서 사진찍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다 본다.  나는 슬쩍 눈빛으로 챠밍여사에게 신호를 보낸다.

  '저걸 기다려가면서 꼭 찍어야 하겠어?'

  '아니?  난 오드리 햅번이 아닌걸?'

  '그냥 되돌아 나간다?'

  '알써.'

  우리는 무리에서 이탈하여 다시 발걸음을 보아리움 포룸으로 옮겼다.   이곳에 귀중한 볼 것이 얼마나 많은데..........

 

 

 

 

 

 

 

 

 

 

 

 

 

 

보아리움 포룸과 '진실의 입'이 놓인 산타 마리아 코스메딘 성당이 모두 보인다.
산타 마리아 코스메딘 성당과 진실의 입을 찾는 사람들.
이곳 출입문 안쪽 왼쪽 회랑에 '진실의 입'이 놓여져 있다.

 

 

 

결국 로마를 떠나오던 날  다빈치 공항에 마련된 복제품 앞에서 '진실의 입'에 기어코 손을 넣어보기는 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미 잘 아는바 대로 '진실의 입'은 고대로마의 하수도 시설 맨홀 뚜껑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사진 기자인 그레고리 펙이 공주인 오드리 햅번을 데리고 로마시내를 구경시켜 주면서 스페인 게단에서 젤라또도 사주고,  여기 진실의 입 앞에서 깜짝 이벤트를 벌이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유명세를 탄 결과로 지금처럼 로마를 찾는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아주 크게 사랑을 받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런것 말고는 더 무엇이 있을까?

  혹 대리석 원판의 크기와 무게 정도?  귀신의 모양이나 형체 정도?

  그런데 나는 좀 다르다.  이 대리석 덩어리 하나에도 무궁무진한 이야기 꺼리가 내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나의 대상이 선택되거나 주어지면 나는 아주아주 심도있게 파고들어 다루어 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진실의 입' 하나만으로도 나는 고대로마의 역사를 주루룩 샅샅이 흩어 볼 수도 있다.  때론 몇 날에서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실타래 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대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호기심이 엉뚱한 곳에서 발동하기도 곧 잘 한다.  그런데 그런 탐험을 계속하면서 많은 메모를 기록하며 남기고 이곳 저곳을 살피다보면.........  어느날 그것들이 상호 보완내지는 하나로 서서히 연결되어 드러나면서.........  쨘하고 아주 커다란 하나의 퍼즐로 완성될 때가 간혹 있다.  그 순간의 감동과 기쁨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거대한 완성된 퍼즐을 가만히 살펴보다 보면은 또 습관처럼 수많은 궁금한 실타래들이 사방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한다.

  때론 그런 의문들의 실타래를 찾아가며 따라서 여행을 하기도 하고,  때론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의문의 실타래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혹여,  다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역사나 미술사를 강의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아니면 인문학 강의도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소장 규모가 있는 도서관의 관장이 못되더라도 사서로 태어나고 싶다.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으며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도 챠밍이랑?

  그렇다면 아예 말이 나온 김에.........  어디까지나 내 방식대로의 '진실의 입'을 한번 열어 볼까?

 

 

 

  피안재 방식에 의한 '라 보카 델라 베리타(La Bocca della Verita)' 탐구여행..........

 

 

 

 

 

 

 

'진실의 입((La Bocca della Verita)'

 

 

 

 

 

 

 

 

 

 

 

 

 

 

 

 

 

  AD. 1세기 경에 만들어진 직경 1.75m에 무게가 1.300kg 이나 나가는 디리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가면조각은 애초의 용도가 무엇이었으며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그 가면조각을 'La Bocca della Verita(진실의 입)' 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것은 정확하게 1485년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가면조각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3세기 경에 어딘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뜯겨져 이곳저곳에 방치되다가 이곳 코스메딘 성당까지 우연히 흘러들어 왔다고 전해진다.  하여 성당 외벽에 세워두었다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인 출입구 옆 왼쪽 회랑에 놓여지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관하여 하도 풍문이나 거짓말이 많이 떠돌아다녀서인지,  전쟁 말기인 15세기 말엽에 '거짓말을 하는 자는 이 가면조각의 입에 손을 넣어서 잘려도 좋다'는 진실 서약이 벌어졌다는데에서 유래하여 이 때부터 '진실의 입'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이야기꺼리와 화제를 낳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서 이 가면조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던 사람들은 '진실의 입' 이라 불리기 이전의 이름을  하나 새롭게 착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하여 극히 일부의 학자들은 이 가면조각을 '시뮬라크륨' 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도 '진실의 입'  보다는 '시뮬라크륨' 이라 부르는 느낌이 더 좋게 다가온다.

  '시물라크룸'은 플라톤에게서 나온 말로 '원본이 존재한 적이 없는 동일한 복제' 라는 다소 난해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도대체 '원본이 없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플라톤의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말장난일까?

  198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어떤 사건을 재연하는 행위나 위조품을 모사하는 행동에 시물레이션(simulation) 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붙였다.  원본이 없이 진행된 그 시물레이션의 결과를 시뮬라르크(simulacre)  라고 부르게 되었다.  살인 사건이 벌어졌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하면 해결을 위하여 확인된 모든 정황을 토대로 사람을 통한 상황극이나 컴퓨터 그래픽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위를 시뮬레이션이라고 하고,  그 시물레이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를 시뮬라르크 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 결과를 어디에 어떻게 어느정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우리 미래에 대하여 인간이 많이 고민을 새롭게 해야만 하는 영역이 될 것이다.  플라톤 철학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새롭게 창조해낸 원형이 없이 생겨난 이미지가 곧 시뮬라크룸인 것이다.  시물라크룸은 분명 가짜 존재이다.  하지만 원형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가짜를 판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심오한 이름을 이 가면조각에 처음으로 붙이고자 한 이유와 뜻은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누가 왜 무엇에 사용하려고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초의 제작 목적인 원본(정체)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 시물레이션을 거친 결과로 이런 저럭 결론(복사품)을 추정할 뿐이다.  그런 결과로 가면조각(진실의 입)이 진품인지 복제품인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에 빗대어 '시뮬라크룸' 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쉽고도 어려운 문제인가?  원본이 없는 복제품이라니.......

  처음 학자들은 이 가면조각이 길 건너편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의 배수구 커버(뚜껑)였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동안 이는 하나의 정설처럼 받아들여 졌다.  열려진 눈 코 입의 구멍을 통해 빗물이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어서 다른 주장이 등장했다.

  여기 일대의 분지를 이루는 너른 초원은 로마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목장이었고,  그 한복판이 빅터 사원 인근에 로마에서 가장 큰 가축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여 가축시장 인근에서 도축업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그 둥근 가면조각이 소를 도축할 때 올려놓고 작업하는 도구(거대한 도마)였을 것이라 주장했다.  소를 통째로 올려놓고 머리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분리해내며 부위를 나누는데 안성맞춤이라는 견해였다.  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온 피가 흘러 들어갔고, 동물을 살해하는 부득이한 행위에 대하여 신에게 나름 양해를 구하는 의미로 험악한 귀신상을 새겼으리라는 견해들이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부분적인 동의는 이끌어 낼 수 있었지만 어느것도 절대적인 동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비교적 현대에 들어서면서 학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대두된 학설이 바로 로마 하수시설을 위한 맨홀 뚜껑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로마는 왕국과 공화정과 제국의 통치기반을 모두 신성한 일곱개의 언덕을 기준으로 설정하여 그 안쪽에 두었으며 핵심은 바로 포로 로마노(로마 포룸) 이었다.  로마 도시를 상징하는 굳건한 로마 성벽은 포폴로 문을 기점으로 테베강변을 휘감아 돌며 보다 훨씬 넓은(2배 이상) 영역에 건설되었으나,  진정한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로얄 임포리움(royal Imporium)'은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아 언덕을 중심으로 하는 별도의 아주 특별한 영역으로 달리 취급하였던 것이다.  로얄 임포리움만이 진정한 로마라고 여겼다.

  고대로마가 기틀을 잡아가고 영토확장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로마는 눈부시게 발전해 나갔고 도시는 급성장을 계속했다.  신전과 왕궁과 원형극장이 늘어가고 인구가 몰려드는만큼  도시의 발전과 형성에 있어서 뒤따르게 되는 많은 문제에 새롭게 봉착하게 된 것이다.  몰려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파트나 연립같은 주거지역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시장이 대형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식수 공급을 위하여 먼곳으로부터 수도교를 건설하여 풍부한 생활용수를 끌어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풍요로움을 로마는 오로지 먹고 마시고 향락에 취하며 소비하는 도시로 점차 전락하게 되었다.  도시의 곳곳에 쓰레기가 쌓이고 배수시설이 전무했던 로마는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독 목욕탕 문화를 좋아해서 로마의 곳곳에 초대형 목욕탕이 들어섰지만  하수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그저 낮은 지대로 자연배수에 의존 할 뿐이었다. 

  여기에서 로마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아 언덕 사이에 건설된 로마제국의 권력 심장부인 포로 로마노는 사실 지대가 낮은 평평한 습지 위에 건설되었다.  빗물은 물론이고 인근의 로마도심에서 배출되는 모든 생활하수와 쓰레기가 고스란히 이곳으로 유입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마왕국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고대의 로마왕국을 이끈 7명의 왕 중에서 다섯 번째였던 타르퀴니우스 프리쿠스에 의하여 기원 전 600년 경에 인류문명사 최초로 포로 로마노에 하수도 시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를 로마의 역사는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라고 기록했으며,  2.6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하수시설은 현재에도 일부 제 역활을 버젖이 해내고 있다.  지금으로 따져보자면 하잘것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진정 위대한 발견이며 건설이며 한마디로 신기원이라 하겠다.

  로마는 라틴 민족인 로물루스 형제에 의해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들은 탄생에서부터 생존을 위해 열린 사회를 추구했다.  혈통을 중시하면서 자기들 중심의 닫힌 사고만으로는 생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사빈나 여인의 납치 강간 사건을 시작으로 외부로의 통로를 활짝 열어 놓고는 흡수 통합방식으로 도시국가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때 로마를 앞서서 이탈리아 중북부에 화려하게 문명을 꽃피웠던 에트루리아를 흡수 통합하게 된다.  에트루리아는 고대로마를 훨씬 능가하는 선진물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외부에서 흘러들어 온 라틴계의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민격인 에트루리아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통합된 로마 위에서 왕위에 오른 타르퀴니우스 푸리쿠스는 바로 에트루리아인 출신 중에서 탄생한 첫번 째 왕이었던 것이다.  인류 최초의 하수시설인 클로아카 막시마는  타르퀴니우스의 계획에 따라 앞선 기술을 가진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이 만들었다.

  초기의 클로아카 막시마는 생활하수가 흘러내리는 수로를 정비하고나서, 대리석을 얇은 널판지처럼 만들어서 바닦에 깔고 양 옆에 세워서 하류로 흘려내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생활하수를 외부로 흘려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냄새가 풍기고 벌레들이 생겨나는 문제까지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한 사람은 로마왕국의 7번 째 왕으로 등극한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Tarquinius Superbus)' 이다.  슈퍼부스는 아예 국가적인 차원에서 거대란 토목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신전와 왕궁을 짓고 다리를 놓으며 도시를 건설하던 로마의 최고 건축가와 토목공사 인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한 것이다.  당연히 인류문명사를 뒤흔들었던 로마의 군인 집단이 투입된 것이다.  그들은 땅속 깊은곳까지 아예 운하를 파고 석재와 벽돌을 이용하여 오늘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리시설을 만들어 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를 만들고 집수정을 만들어 여러곳에서 흘러드는 하수를 모아 거르면서 하류로 흘러내려가도록 만들었다.  이를 보완해서 규모를 확장한 것이 프랑스 파리의 지하 3층 규모로 이루어진 하수시설인 것이다.  물길의 군데군데에 시설을 살피고 정비를 할 수 있는 통로인 맨홀을 만들었으며,  그 맨홀의 열려진 커다란 구멍을 덮었던 것이 바로 '시물라크륨(진실의 입)' 이라는 나름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현재는 이 새롭게 제기된 학설이 가장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울러 이 새로운 학설에 따르자면 앞으로도 또다시 제2 제3의  가면조각이 더 나올 수 있다고 밖히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시뮬라크룸(진실의 입)은 포로 로마노 지역의 하수를 가장 가까운 테베강으로 배출하는 로얄 임포리움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맨홀의 뚜꺼이었던 것이며,  애초에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의 대대적인 토목공사는 이곳만이 아니라 동서남북의 로마 전역에서 벌어졌었던 때문이다.  그들은 최소한 로얄 임포리움의 동서남북 지점이나 그 이상의 지역에 하수로를 관리하고 정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맨홀을 설치하였으며,  그런 이유로 새로운 시뮬라르크룸(진실의 입)이 얼마든지 더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을 갖춘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시뮬라크룸(진실의 입)은 AD. 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는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신교의 대부분은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믿고 따랐었다.  그리이스 신화에 따르자면  지구는 엎어놓은 함지박처럼 생겨 가운데 육지를 두고 사방으로 삥 둘러 바다가 펼쳐졌으며 그 끝은 거대한 폭포같은 낭떠러지로 만들어져 있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대로 로마가 계승해 왔다.

  로마의 로얄 임포리움 안에서 생겨난 물은 모두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하수시스템을 통해서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되게끔 만들어졌으며,  신화에 따라서 혹 하수로를 통하여 이민족이나 이교도들의 부정한 신통력이 로마로 흡수되는것을 막기 위하여 불행이나 재앙을 막아내는 어떤 상징을 맨홀의 뚜껑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에 의해서 2천 6백년 전에 인류 최초의 하수도 시스템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가 로마의 도심 아래로 완공된 후에야 이를 기반으로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이나 트라잔 목욕탕이 생겨날 수 있게되었고,  더불어 11개나 되는 로마의 수도교를 퉁하여 풍부하게 물이 마구 로마도심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어쩌면 로마에 놓여진 수많은 분수와 공중 목욕탕과 황궁의 정원들도 클로아카 막시마가 완공되지 못하였던들 로마라는 도시가 가진 한계로 인하여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 보카 델라 베리타(진실의 입)'에 새겨진 형상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바다의 신 '오세아누스(Oceanus. 오라클) 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타탄족인 오세아누스는 낭떨어지로 된 지구의 바다를 관장하는 신이다.  트리톤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넵튠이나 포세이돈과는 전혀 다른 바다의 신이다.  오세아누스는 제우스 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오림푸스의 신들 세계 훨씬 이전이랄 수 있는 과거속의 신들 세계에 살았던 사람이다.  넵툰이나 포세이돈은 한참 지나서 후대의 신화(신의 세계)에 새롭게 등장하는 신들이라 할 수 있겠다.  신화 속에서 오세아누스는 황소 뿔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왼손에는 뱀과 오른손에 물고기를 들고 등장하기도 한다.  더러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이름에서 바다(Ocean)가 생겨났고,  오세아니아 주의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을  쉽게 알아 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마에 솟아난 뿔은 어떤 때는 황소의 뿔로,  어떤 때는 게의 발톱으로,  또 어떤 때는 돌고래 형상으로 나타나는 생긴것과는 다르게 앙증맞을 정도로 깜찍한 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진실의 입에 새겨진 형상의 인물이 바다의 신 오세아누스라고 밝혀줄 수 있는 증거가 로마에 있다.  비슷한 시기인 AD. 1세기 경에 만들어진 오세아누스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메달이 로마의 한 개인 소장가에게서 나왔는데,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라 보카 델라 베리타 속의 인물이랑 닮아도 너무나 닮았다.

  이로서 라 보카 델라 베리타 속의 인물이 오세아누스라는 사실은 어느정도 입중된 것 같다.

  또한 그것이 클로아카 막시마의 맨홀 뚜껑이었다는 사실도 이제는 좀 더 현실적으로 수긍이 가기도 한다.

  더하여 또 다른 대리석 뚜껑이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하여,  라 보카 델라 베리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궁금증이 덜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데........

 

  시뮬라크룸.  '원본이 없는 복제' 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플.라.톤.이.미.워.지.기.시.작.한.다.

 

 

 

 

 

 

 

 

 

바다의 신 '오세아누스'의 청동메달.  로마.

 

La Bocca della Verita(진실의 입).  로마.

 

 

 

 

 

 

 

 

 

  '라 보카 델라 베리타(진실의 입)'에 대한 보완 설명은 이제 어느정도 이루어진것 같다.

  이야기의 과정에서 플라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르네상스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의 입'을 이야기 하는 동안에 어디에도 르네상스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까지 설명했던 가면조각은 AD. 1세기에 해당하고  르네상스는 14세기에나 등장하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 실타래는 여기서 끝이 절대로 아니다.

  없는 사실을 허위로 만들어 끄집어 낼 수는 없었도,  가려지고 잊혀진 역사속에서 르네상스를 찾아내고 발굴해 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 보카 델라 베리타'를 활용하며 고대에 실제로 벌어졌던 '클로아카 막시마(생활하수 토목공사)'를 통해서 어떻게든지 르네상스를 꺼내오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다분히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전제되는 여건하에서 말이다.

  하여 나는 이 대목에서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를 완성시킨 고대 로마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를 소환시켜  르네상스 산책을 계속하고자 한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는 속담이기 이전에 인류 문명사 위에서 한 획을 그은 거룩한 명제라 할 만하다.

  거기에서의 로마는 (왕국) (공화정) (제국)을 거치면서 1천 년 이상을 건재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고대 로마제국을 이야기 할 때면 당연한 것처럼 로마의 평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포용성, 당시로서의 뛰어난 선진문명을 세계에 전파시켰다고 이야기 한다.  로마의 정복지마다 도시가 건설되고 시장과 교역을 통하여 역사와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럼 로마 시민들이 모두 그만큼 뛰어난 박애주의자들이었느냐?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정복지로부터 노예와 약탈한 재화와 소비물자를 강제로 징발해 와서 로마를 풍요롭고 살기좋은 제국으로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단편적이면서도 왜곡된 시각의 평가보다는 타키투스의 비판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로마인들은 약탈하고 살육하고 파괴했다.  이런것들 마저 제국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들은 모조리 빼앗아 간 다음 재기불능 상태로 황페화 시켜 놓고는 로마 방식의 평화(Pax Romana)를 외쳐댔다'

  인류 문명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다는 로마의 초기 역사는 온통 음모, 폭력, 친족 살인, 암살, 납치와 강간으로 가득 얼룩져 있다. 

  이미 거론한 바처럼  (로마왕국)은 똑같은 두 번의 사건을 통해서 하루아침에 불쑥 건국되었고  또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로마의 건국과 패망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두 번씩이나 벌어진 똑같은 유형의 사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로마의 역사에서 절대로 떨쳐버리거나 지워버릴 수 없는 이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되돌아 보자면.......  어느날 불쑥 하루아침에 로마는 생겨났고,  또 어느날 갑자기 하룻만에 쫄딸 망해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다.  새삼스레  끄집어내거나 거론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세바스티아노 리치作.  (사비니연인의 약탈)   비엔나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소장.

 

 

 

 

 

 

 

  두 사건 모두 '여인들에 대한 강간사건' 이다.

  첫번 째 사건은 다수의 여인들을 집단으로 납치하고 강간한 사건이며,  두 번째 사건은 유부녀를 강간한 사건이다.

  로마왕국이라는 고대 국가의 탄생과 몰락에는 이렇게 여인들에 대한 강간 사건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 피해자는 사비니 부족의 헤르실라를 포함한 30명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가해자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형제를 포함한 다수의 로마 남성들이다.

  로마 건국의 역사는 로물루스 형제에 의하여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분명 테베강 유역 라치오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라 어느날 불쑥 나타난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타난 이방인이었다.  이들 라틴족이 이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모두가 남성 이주민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 터전을 잡고 세력 확장에 나선 라틴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여자였다.  음식과 의복 등 살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더러 라틴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종족 번식을 위한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 교역은 물론 자유스런 왕래와 혼인동맹을 요청하였지만,  주변의 모든 부족들로부터 유독 심한 경계와 배척을 받게되었다.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난 건장한 남자들만의 집단을 은근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결국 로물루스의 라틴 부족은 커다란 잔치를 벌여 주변의 부족들을 모두 초청했다.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던 주변 부족들이 모두 모여서 밤새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라틴부족의 정예병들이 몰래 빠져나가 사비니 부족을 침략해서는 부족원을 해치고 30명의 여인들을 강간하고 납치해 버렸다.  사비니 부족이 잔치를 마치고 부족으로 돌아갔을 때,  마을은 풍비박산이 났고 여인들이 어디론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사비니 부족의 왕인 타티우스는 먼 숲속에서 자신의 딸인 헤르실라와 사라졌던 30명의 여인들을 찾아냈다.  모든것이 라틴부족의 로물루스 왕이 꾸민 일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타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팔라티니 언덕의 라틴부족을 향해 쳐들어 갔다.  타티우스군과 로물루스군대가 한바탕 전쟁을 치루기 시작하였을 때,  한 무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싸움터의 안복판으로 뛰어들어 휴전을 부르짖었다.

  이미 시간이 너무나 흘러버렸고  모든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강간을 당하고 납치를 당했던 여인들은 끌려가서 강간을 자행한 자들의 아내로 여러날을 이미 지내왔으며,  그들 사이에선 이미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있었던 것이다.

  애초의 사건으로 돌아가 정당한 복수를 하게되면  자신들은 모두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를 잃은 처지가 되고,  반대로 범죄를 저지를 라틴족이 싸움에서 승리하게되면 여인들은 모두 친정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게되고  아이들은 외갓집을 모두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상황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총명한 헤르실라는 양측 모두에게 화해와 용서를 요구했다.  화해와 용서가 아니라면 자신들(30명의 여인이자 어머니)과 태어난 아이들 모두가 자결하겠노라고 선언한다.  결국 로물루스의 라틴부족과  타티우스의 사비니부족은 결혼 동맹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된다.

  이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로마는 소수의 남성들의 라틴 부족에서 도시 국가로 발전 형성해 나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로 거듭 결혼동맹을 통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사비니 여인의 강간 약탈 사건은 로마건국과 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슬픈 비극이었지만 그것은 로마왕국의 훌륭한 밑거름이었다.

  

 

 

 

  중세 시대의 모든 학문과 예술은 오로지 종교(기독교)를 위해서만 존재하게끔 강요되었다.  교회가 주도하고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될 뿐이었다.  학문과 예술에게 허락된 한계는 신학의 뒷바침 정도였다.

  모든것은 신을 찬양하고 찬미하는데에만 필요 할 뿐이며,  그마저도 교회에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전부였다.  여차하면 신성모독 내지는 이교도로 내롤려 종교재판에 회부되기 일쑤고 그 결과는 대단히 참혹할 뿐이었다.

  그런 암흑의 시기가 1천년을 지나가는 시점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학설이 있는만큼,  어느 시점에서부터가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해도 어느날 불어닥친 르네상스의 열풍은 요원의 불길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교회(로마 카톨릭)로서도 무작정 달겨들어서 이 불길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는 학문과 예술 분야에만 변화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는 물론 일반인들의 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뜨겁게 크게 변화를 가져온것은 아무래도 회화분야였을 것이다.

  중세의 회화는 모든 소재가 '성서'로 한정되어 있었다.

  오로지 교회를 위하여 벽화를 그리고 모자이크를 만들고 타일을 만들고 하다보니 내용 모두가 성서에 적혀있는 내용이 전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교회의 기준에 맞추어야 했고 엄격하게 제재를 받아야만 했다. 

  르네상스는 '재생' '고대로의 회귀'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여기에서 말하는 고대는 그리이스를 말한다.

  중세인들의 삶 전체를 한 순간도 빼놓치않고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교회는 원죄설에 입각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죄인의 존재이며,  이는 죽는 순간까지 회개하고 기도하여야 하며,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 말씀에 순종하며 노동력 뿐만이 아니라 가진 재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교회에 의하여 어디엔가 유폐되었고,  두 눈을 부릅뜨고 인간들의 대소사를 한 순간도 빼놓치않고 감시하고 분노하고 징벌을 내리시는 무지막지하고 흉포한 진노의 하나님만이 부각되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도 모자라 교회세를 거두고  성수를 팔고 면죄부를 팔면서도  교회의 뜻을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조리 종교재판의 이름으로 형장에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것은 거룩한 진노의 하나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1천년의 시간을 모두 진노의 하나님 때문에 빼앗기고 억압받고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에게  에덴 동산이나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저 허상이자 허구이며 꾸지도 못하고 꾸어서도 안되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대 그리이스로의 회귀'는 한 마디로 '이제부터 마음대로 꾸어도 되는 꿈'이었다.

  하늘에서 올림푸스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함께 씨앗을 뿌리고 추수를 하고,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 춤과 노래를 함께 추고 부르면서 와인과 음식을 마음껏 나누었었다.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하나님의 세계와 씻을 수 없는 죄인들이 살고있는 지옥같은 인간들의 세상이 전부라고 내세우는 기독교 세상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신들은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늘나라 신들인 인간 여인들을 사랑하여 자식을 낳는가 하면,  인간세상의 영웅들도 하늘나라의 여신과 사랑하는 사이가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그리이스의 신과 인간들은 언제나 함께 괴노하고 함께 기뻐하며 더불어 살았다.  신들은 지상을 하늘나라 처럼 만들고 가꾸어서 더불어 행복을 누리며 살고자 힘썼고,  인간들은 그런 신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감사의 표시로 신전을 지었다.

  누구인들 고대 그리이스에서 꿈을 꾸며 신들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겠는가?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신이 났다.

  교회의 강압적인 제재와 요구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소재의 다양성이 허락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꼭 성경 이야기에서 소재를 찾아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리이스 신화속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자유롭게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전투를 벌이는 트로이 전쟁도 얼마든지 그릴 수가 있었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도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여정도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로마의 건국이야기도 훌륭한 소재가 아닌가?  이제부터는 중세 시대의 교회나 교황의 치부를 건드리는 소재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얼마든지 그림의 소재로 삼아도 되는 세상이 열린것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그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에게 로마 건국 초기에 벌어졌던 (사비니 여인의 약탈 혹은 강간)  사건은 더 없이 훌륭한 소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사비니 여인의 약탈) 하면  '다비드'의 그림을 통해서나 아니면 피렌체 란치 회랑에 있는 '잠볼라냐'의 조각으로 다가오겠지만,  푸생을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나 조각를 통털어서 이 소재에 접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피카소' 까지도 (사비니 여인의 약탈)을 그렸으니까 말이다.

 

 

 

 

  소재의 다양성으로 중세 시대의 갈증을 해소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화가들에겐 (사비니 여인의 약탈) 못지않게 더없이 훌륭한 새로운 소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왕국을 하루 아침에 몰락을 길로 빠트리게 만든 두 번째 강간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7명의 왕이 다스려왔던 로마왕국은 멸망한다.   부패한 권력(왕권)과 제도로 인하여 한 가정이 있는 여인이 강간 당하고 죽어야 하는 악습을 폐지하고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화정)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로마왕국의 왕자로부터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의 이름은 '루크레티아(Lucretia)'다.

  수많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서로 앞다투어 이 사건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도대체 그림을 통해 무슨 뜻을 전하고 싶어서 그리도 많은 화가들이 저리도 매달리게 되었을까?

 

 

 

 

 

 

 

 

 

 

 

 

 

 

 

 

 

 

 

 

  '루크레티아의 강간(The Rape of Lucretia)'는 20세기의 대표 음악가 중의 한 명인  벤자민 브리튼에 의해서 오페라로 만들어 졌으며 1946년 영국 글린데본에서 첫 공연이 이루어진 이후로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 와는 전혀 다른 오페라임을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루크레티아'는 기원 전 5세기 경의 로마왕국 말기에 겁탈당해 죽은 여인의 이야기이고,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교황의 사생아로 태어난 여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에 살았던 여인의 이야기다.  오빠인 체사레 보르자 공작이 야심에 가득찬 용병이었다면,  유럽 역사를 통털어 아름답기로 정평이 났던 루크레치아는 빼어난 미모때문에 짧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 일찍 사망한다.  가련한 여인과 희대의 악녀라는 평가가 늘 함께 따라붙는 그녀의 인생이야 말로 충분히 훌륭한 오페라의 소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것은  로마왕국 말기에 강간 당해서 자살한 여인 '루크레티아' 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하나를 먼저 설명해야만 하겠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루크레티아 이야기) 라는 그림이다.

  사실 나는 보티첼리라는 화가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중에서 내가 온 신경을 집중해서 감상하는 작품은 하나 밖에는 없다.  (봄) 이다.  그 외에는 별반 내가 관심을 집중해서 살피는 작품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가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관람중인 작품이 바로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0과 (봄) 이다.  특히 비너스 탄생 작품 앞에만 유독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증샷 찍기에 여념들이 없다.

  내 자신이 미술에 대해서 특별히 내세울것이 하나도 없는 입장이라서 더 이야기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보티첼리는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조악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책받침에 등장했던 (비너스 탄생) 모습이나 상황이면 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보티첼리'는 그렇게 관심의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보티첼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피치 미술관의 전시실에서도 보티첼리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시기에 사람들 앞에 (봄)을 떡하니 내보여주었다면 아마도 그것이 보티첼리의 작품임을 알아 보는 사람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한 젊은 의욕에 가득찬 큐레이터가 새로 들어왔다.  오래지 않아서 매일매일 똑같은 전시실의 풍경에 그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우피치 미술관의 수장고에 수없이 많은 르네상스의 귀한 미술품들이 쌓여있다는 것을 많이들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 귀찮은 작업을 하려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의욕에 찬 젊은이는 달랐다.  아무런 변화도 조짐도 없는 전시실의 분위기를 자기 방식으로 바꾸어 보고 싶어졌다.  하여 그는 굳게 잠긴 열쇠를 풀고 어둡고 습하고 먼지 가득한 지하 수장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근 1년이 넘도록 젊은 큐레이터는 시간만 나면 지하 수장고에 들어가 세상에서 잊혀진 르네상스 시대의 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감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수장고에서 '어? 썩 괜찮은 그림인데?  이런걸 여기에 이대로 쳐박아 두다니?'  하면서 한 작품을 꺼내어 전시실로 가져다 한적한 벽면에 내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질문이 나오기 시작하자 젊은 큐레이터는 그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이름은 (비너스 탄생) 이었고,  작가는 '보티첼리' 였다.  수 백년을 지하 수장고에 뭍혀 지냈던 보티첼리가 20세기에 환생한 것이다.  큐레이터는 지하 수장고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여 두 번째로 찾아낸 작품이 바로 (봄) 이다.  계속적으로 찾기 작업에 몰두한 결과로 나머지 작품들까지 모두 모아서  지금은 우피지 미술관에 가장 사람들이 몰리는 보티첼리 전시실을 별도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作.  (루크레티아 이야기)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발물관 소장.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두고 군인과 시민들이 슬픔과 분노에 떨고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선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르투스 이다.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당혹스러워하며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찾고있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왕자가 칼로서 루크레티아를 위협하고 있다.

 

루크레티아는 남편과 아버지와 여러 증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서 자결했다.

 

 

 

 

 

 

 

 

 

 

  로물루스가 헤르실라를 강간하고 납치한 (사비니 여인의 약탈) 사건을 계기로 라틴부족국가는 비로소 로마왕국으로 발전 할 수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부족국가들을 하나 하나씩 통합해 나갔다.  평화를 앞세우며 상업적 교역과 혼인동맹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로마왕국이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기득권과 권력의 행사는 오로지 라틴족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앞세운 평화와 화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로물루스의 후손인 로마왕국을 차지한 라틴족이 이를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합하기 시작하자 에트루리아 부족의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무장 봉기에 나섰다.  로마왕국 안에서 라틴 부족과 에트루리아 부족간의 전쟁이 터진 것이다. 치열한 싸움 끝에 루시우스가 승리했다.  그가 로마왕국을 접수하자 이번엔 사비니 부족이 돌격해 왔다.  이번에도 용맹한 루시우스의 군대가 승리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를 새로운 로마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다섯 번째 왕이자 첫번째 라틴부족이 아닌 에트루리아 출신의 왕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지 못한 같은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여러군데서 일으켰다.  루시우스는 그 때마다 군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모든 승리를 쟁취했고,  반란을 참혹하게 진압했다.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루시우스의 시대는 로마왕국의 최고 전성기였다.  영토 확장을 계속했고,  캄피돌리아 광장 언덕에 아폴로 신전을 세웠다.  로마 최초로 전차경기장을 건설했다.  인류역사 최초의 하수도 시설인 클로아카 막시마를 건설하여 쾌적한 로마 건설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임 왕이었던 라틴부족의 왕자들이 주동한 폭동을 진압하던 중에 심각한 중상을 입게 된다.  왕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왕비는 서둘러 정예군대를 이끌고 있던 용맹한 장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섭정으로 등용하여 폭동을 진합하게 했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중상을 입었던 루시우스 왕은 사망했다.

  로마왕국의 시민들은 사망한 루시우스 왕의 후손들 중에서 후계 왕을 선출하지 않고 용맹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새로운 로마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여섯 번째 왕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ius)'가 등극한 것이다.  왕에 등극한 세르비우스는 전왕의 일족을 달래기 위하여 사망한 루시우스 왕의 딸인 '타르키니아'와 결혼 한다.  그런데 이 결혼에서부터 비극이 싹트기 시작한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게 푹 빠진 타르키니아는 여왕처럼 늘 행세하면서 세르비우스로부터 생겨나는 막강한 권력과 호사스러움이 영원히 계속되기만을 바랬다.  하여 그녀는 세르비우스의 권력을 보다 굳건하게 만들기 위하여 친정식구들인 형제와 자매와 조카들을 추방하거나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의 운명은 그가 뿌린 씨앗들을 스스로 거둬들이게끔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세르비우스와 타르키아 사이에는 여러명의 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세르비우스와 타르키아 사이에 태어난 작은딸 '툴리아 마이너(Tullia Minor)'가 등장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지켜보고 배운것은 모두가 어머니에게서 였다.  허니 무엇을 배우고 생각하고 꿈꾸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자업자득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커다란 야망을 가진 그녀가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택한것은 남자를 제대로 고르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한 남자를 골랐다.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였다.  그런데 수퍼부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왕위를 빼앗다시피하고 몰락시키려한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왕의 직계후손으로 힘겹게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왕비 타르키아가 이를 탐탁하게 여길리가 없었다.  슈퍼부스는 계략으로 아주 고분고분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이 성사되자마자 작은딸 툴리아는 남편인 슈퍼부스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의 핵심으로 이끌어 갔다.  그녀의 목표는 너무도 확실했던 것이다.  툴리아는 어머니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자인 위대한 여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여왕이 되자면 남편이 슈퍼부스가 왕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생각은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시키는 것이었으며,  서열상으로도 한참이나 뒤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툴리아는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표를 위해서는 이미 부모도 형제나 자매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뇌물과 협박과 납치와 암살을 통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군대를 실질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리고나서는 남편의 잠들어있는 야망에 발길질을 하여 깨우고 기름을 부어 타오르게 만들었다.

  자신이 위대한 여왕이 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왕이 되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왕과 후손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가능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남편으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기기 시작한 것이다.  뇌물과 협박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장애물은 제거해 버렸다.  마침내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을 이끌고 궁전으로 몰래 숨어들어간 슈퍼부스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을 기습하여 중상을 입히고 계단 아래로 집어던져 버렸다.  땅바닥을 나뒹굴면서 툴리우스 왕은 근위병을 외쳤다.

  그때였다.  왕이 사랑하는 작은 딸이 마차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못된 사위는 역모를 꾸며 왕위를 찬탈하려 반란을 꾸렸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딸은 자신을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줄것이라고 믿으며 손을 휘저으면서 간절하게 딸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버지 툴리우스 왕의 상황을 발견한 작은딸 툴리아가 한걸음에 마차를 몰고 달려왔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마차는 툴리우스의 앞에서 멈춰서지 않았다.  속도를 더 내면서 말들은 툴리우스를 타넘었고 육중한 마차의 바퀴가 툴리우스의 목을 타고 지나갔던 것이다.

  확인 사살이었다.  비극의 이미 벌어졌고, 결과는 거룩한 쿠데타의 성공이었다.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는 로마왕국의 새로운 여섯 번째 왕이 되었다.  툴리아는 바램대로 여왕이 된 것이다.

  툴리아의 목표가 '어머니 타르키니아를 능가하는 위대한 여왕' 이었으니,  그 다음에 펼쳐진 이야기들은 새삼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가 짐작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이 모두 그대로 자행되었다.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네作.  (로마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암살)  미국 애너하임힐 놀 컬렉션 소장.

 

역사화가 장 바르딘(Jean Bardin)作.  (아버지의 시신을 타고 넘어가는 툴리아)  독일 마인츠 란데스 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키아리(Giuseppe Chiari)作.  (아버지의 시신을 타고 넘어가는 툴리아)  이탈리아 버글리 하우스 컬렉션(개인소장).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는 그런 방법으로하여  로마의 일곱 번째 왕에 등극했다.  욕망의 화신 툴리아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어떻게 쟁취한 왕좌였던가?

  부정하게 쟁취한 권력이었던만큼 혹시나 또 부정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슈퍼부스는 시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영토정복 전쟁을 연일 벌이고, 전전 세대에 시작해 놓은 도시의 하수도 정비사업(클로아카 막시마)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벌인다.  그러나 지난친 인력동원과 공사를 위한 과도한 징세로 말미암아 민심은 점점 극도로 흉악해져만 갔다.  이 흉포해진 민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영토확장 전쟁에 과도하게 몰입하게된다.  한편 소원대로 권력을 손에 쥐고 여왕이 된 툴리아의 갖은 횡포와 사치는 이미 극에 달할대로 달해 있었다.  이제 이들 부부에게는 어떻게든 이 권력을 무한정 누리다가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것이 남은 과제였다.  그런데 그동안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저주였을까?  권력을 잘 유지해나갈만한 싹이 어느아들에게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슈퍼부스와 툴리아는 티투스, 아런스, 셋스투스 이렇게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일찍부터 그릇된 부모의 꼼수만 보고 배우며 자란 이들에게 올바른 정치력을 기대하기는 아예 글러버렸다.  그나마 막내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고 이르 위해 차근차근 권력승계를 진행해 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부자지간인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와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사이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좋아할만한 소재가 되는 사건이 한가지 있었다.

  라틴부족의 도시였던 가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의외로 반란군의 기세는 막강했다.  섹스투스는 형등에게 왕위를 이어주려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등을 돌린 반란자로 행세하며 가비의 반란군에 합세했다.  다혈질에 난폭한 성격의 섹스투스지만 사움터에서 용맹함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가비의 반란군은 섹스투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섹스투스는 은밀하게 사람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차후의 계획을 지시내려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첩자로부터 모든 정황을 전해들은 아버지 슈퍼부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자라고 있던 애꿋은 키가 큰 양귀비만을 골라가면서 나무막대로 후려쳐서 꽃의 모가지를 삭뚝싹뚝 잘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신이 아무리 기다려도 슈퍼부스는 양귀비 꽃밭을 아작을 내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가비로 돌아온 사신은 슈퍼부스의 엉뚱하기만 한 행동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자 이내 섹스투스가 목을 끄덕였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作.  (키가 큰 양귀비 꽃을 자르는 타르퀴니우스 슈퍼부스)

 

 

 

 

 

 

 

 

  이 서건을 서양역사는 '키가 튼 양귀비 증후군(Tall_poppy_syndrome)'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해 당사자 자신보다 똑똑하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섹스투스는 아버지가 행위로 보여준 메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 받았다.  하여 가비의 반란군 중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면이 있거나,  차후에 장애가 될만한 사람들 모두를 일거에 제거해 버리고 반란을 진압해 버렸다.  결과적으론 이후로 부모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이 뒤따랐다.

  유독 로마제국의 사치와 퇴페와 반인륜적인 사건을 주로 소재로 삼아 작품을 만들어왔던 네덜란드 화가 '로렌스 알마 타테마(Lawrence Alma Tadema)'가 매력적인 이 소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화폭에 옮겨 담았는데,  그림으로만 보아서는 신드롬의 의미를 느껴 볼 수는 있으나 이면의 비극에 대한 아픔이나 슬픔이나 어떤 비장감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저 연인이나 한 가족의 정원 산책으로 느껴질 뿐이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반인륜적인 비극을 초래하면서까지 왕위에 집착했던 슈퍼부스와 툴리아의 영원 할 줄로만 야망들도 이제 서서히 종말을 맞을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에서 지중해쪽으로 일 백리쯤(35km) 떨어진 아르데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왕은 진압군을 편성해 총지휘관으로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를 임명하고 젊은 귀족들을 참모로 삼아 파견하였다.  섹스투스의 군대는 아르데아를 포위하였고,  식량과 물이 떨어져서 저들 스스로가 걸어나와 항복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미 승리에 도취한 로마군대는 연일 술과 여자들로 파티를 벌였다.

  그날도 젊은 귀족들과 셋스투스가 질펀하게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날의 이야기꺼리는 여자와 여성편력에 관한것이었다.  셋스투스를 비롯한 모든 귀족들이 저마다 자신의 여성편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리이스 시대에 비하여 로마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역활이 그나마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성착취의 대상이며 쾌락의 도구로 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정조에 대한 관념이나 가치가 적어도 남성들 세계에서는 별반 중요하지 않은 새대로, 여성의 하나의 오락이자 성적 해소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 중에 유독 한 사람, 섹스투스의 이복 사촌이 되는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만은 달랐다.  로마를 통털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빼어난 미모를 갖춘 그의 아내 루크레티아에 대한 정숙함과 지고지순한 사랑과 정조관념과 절개에 대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찬사를 보내는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술에 취한 모든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음에도 콜라티누스의 자기 아내에 대한 애정과 찬사는 그칠줄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파티가 끝나고 콜라티누스가 자기의 막사에서 골아 떨어졌을 때,  섹스투스와 젊은 귀족들이 다시 만나서 하나로 뭉쳤던 것이다.  그들의 화제는 단 하나였다.  '콜라티니우스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정말로 그렇게 정조관념이 투철하고 절개를 지키는 여자인가'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었다.

  그들은 잠에 떠어진 콜라티니우스 몰래 밤길을 달려 로마의 콜라티누스의 집에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군대를 이동하던 중 사촌들의 집안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서 들렸다고 했다.   남편 콜라티누스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중이라고 둘러댔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남편의 동료들을 위해 잠들었던 하인들을 깨우고 불을 밝힌 다음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당시의 사회풍조가 그러했듯이 귀족들은 하녀들을 추근덕거리기 시작하였고 돌아가면 루크레티아에게 찝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크레티아의 반응은 단호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그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남편 콜라티누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그대로 였다.  왕자와 귀족들은 그들의 그릇된 호기심을 포기하고 진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혈질에 단세포적인 그릇의 도량을 가진 섹스투스가 갑자기 혼자 말머리를 돌린것이다.

  콜라티누스의 집으로 혼자 되돌아 온 섹스투스는 몰래 거실을 지나고 하녀들의 방을 지나서 루크레티아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접근했다.  이상한 낌새에 눈을 뜬 루크레티아에게 섹스투스가 단검을 꺼내서 목에 들이대면서 속삭였다.

  '루크레티아.  너가 지조있는 아주 특별한 여자라는 꼴을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내가 너의 그 정절을 깨트려 주고야 말겠어.  이제 너에게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하는 선택의 기회가 있을 뿐이야.  이제 네가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준다면 이 담에 내가 왕이 된 후에 너는 여왕이 되는거야.  어때?  서로에게 더 없이 좋은 일이 아니겠어?  그게 아니라면 나는 당장 밖으로 나가서 네가 가진 남자 노예 중에서 젊은 놈을 하나 죽여서 네 침대위에 던져 놓은 다음 문을 잠구고 밖으로 나가서 네가 간통을 저지르다 살인을 했다고 외쳐댈거야.  네 남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안봐도 잘 알겠지?  모든게 끝나는 거야.  어떻게 할래?  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내 말을 듣는것이 어때?'

 

 

 

 

 

 

 

 

 

 

 

티치아노作.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캠브리지 피츠윌리엄 박물관 소장.

 

 

 

 

 

 

 

 

 

  르네상스 회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촛점을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만 맞추고있는 사람들에게 티치아노는 별반 그리 매력적인 화가라고 말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티치아노는 르네상스의 그 어떤 미술가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화가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별(화가)들이 넘쳐나도록 많이 있지만,  티치아노는 그 중에서도 가장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다' 라고 말이다.

  조반니 벨리니에게서 시작되어 조르지오네에 의해서 정착된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눈이 부시도록 확짝 꽃피운 사람이 바로 티치아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업적은 곧바로 틴토레토로 이어진다.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는 빛나는 베네치아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지만,  그 둘을 빼놓고는 결단코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수가 없는것이다.

  나는 티치아노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라파엘로가 떠오른다.

  많은 화가들의 뛰어난 장점들만을 삽시간에 추리고 추려서 쏙쏙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놀라운 천재성을 가졌던 라파엘로만의 개성을  다시 한 번 엎그레이드 시킨것이 티치아노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고전속의 신화나 실제한 역사속에서 신화처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대자연속에 아름답게 그림으로 풀어 놓고서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인간들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티치아노는 누군가의 말처럼 피가 흐르고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는 존재를 그 대자연속에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느끼는 티치아노다.

  티치아노는 로마의 건국신화 속에서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의 그림 소재를 찾아냈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 까지는 스페인의 왕실 컬렉션에 전시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 성공했을 때,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이 프랑스로 빼앗아 갔다.  여러 소장가를 거치다가 런던의 미술품 경매에 나오게 되었고, 한 미술 수집가가 구매한 후에 현재 소장하고 있는 피츠 윌리엄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와 아주 유사한 그림들이 간간히 미술경매에 나와 화제를 낳고 있다.  티치아노의 편지에도  그가 수 년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같은 소재를 놓고 그림을 그렸노라고 썼다.  이를 근거로 유사한 여러개의 작품이 모두 티치아노의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미술상들과 전시관들이 있다.  티치아노가 본 그림에 앞서서 초벌 그림으로 그렸거나,  진짜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리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미완성으로 두고 위에 올려놓은 진짜 본 그림으로 넘어가 마침내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뭏튼 현실적으로 지금 티치아노에 의해서 제대로 완성된 진품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는   피츠 윌리엄 박물관 소장 그림으로 인정된다.  나머지 그림들에 대해서는  같은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동생이 그린 작품이 있다는 설과,  조수로 작품에 참여했던 제자가 나름으로 별도로 그린 그림 이라는 설과,  나중에 위조범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복제품이라는 설이 뒤따른다.

  대표적인 작품을 살펴 본다면........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비엔나 쿤시토리스 박물관 소장.

 

 

 

 

 

  루크레티아의 비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처음 화폭에 옮겼던 티치아노의 가장 초기 사본이라는 주장이 뒷받침되는 작품이다.  지나치게 깊고 어두운 그림자에 남성의 인물이 비정상으로 드러나고, 칼로 협박하는 잔인한 강간사건이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벌어지는 우아한 댄스를 연상시킨다는 혹평속에  아마도 티치아노의 형제가 그린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비엔나 쿤시토리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비엔나  빌덴 쿤스테 비엔 미술관 소장.

 

 

 

 

 

 

  등장인물의 의상이나 차림새에 이르기까지 거의 원형에 아주 가깝다.  고개를 돌려 트르퀴니우스의 시선을 피하는 루크레티아의 얼굴표정이 이채롭고, 칼을 든 손의 위치가 아래쪽에 위치했다는 점이 전혀 다른 점이다.  하여 티치아노의 처음 버젼이 분명하며,  완성 도중에 구성과 구도에 만족치 못해 포기하고 다른 구도와 구성으로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완성도를 높이고자 적당한 선에서 원본의 구도를 변형시킨 위작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원본에 가까운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고,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어떤 불안정성이 심하게 풍겨나며 침대와 커튼의 배경 처리에 있어서 티치아노 솜씨를 따라 갈 수 없어 중도에 그만 둔 미완성 작품을 과장해 만들어냈다고 보는 시선이다.

  '티치아노' 하면,  그림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의 느낌을 너무나 완벽하게 표현해 내기로 유명한 화가였기에 그러한 지적들이 대단히 신빙성이 높은 지적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티치아노作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뉴욕 프릭 컬렉션 소장.

 

 

 

 

 

  티치아노는 '신화적인 영역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들을 꺼내다가 살과 피가 흐르는 인간들의 이야기들로 그림을 풀어냈다' 라는 말로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한다.  우리는 눈 앞에서 그의 그림을 마주함으로써 그 이야기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그의 작품이 많이 있지만.......  유독 나는 여기 이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티치아노의 최고 작품을 꼽으라면 서슴치 않고 이 그림을 선택 할 것이다.

  이 그림이야말로  티치아노다운 느낌과 특징을 고스란히 모두 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티치아노에 대해서는 피렌체 여행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을 만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다시 나누게 될 것이다.

 

  다시 '루크레티아' 이야기로 되돌아 가기로 하자.

 

 

 

 

 

 

 

 

 

 

틴토레토作.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시카코 아트 인스티뉴트 소장.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유파는 조반니 벨리니(그의 가족)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배운 제자 중에 티치아노와 조르지오네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었지만  벨리니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 유파의 맥은 고스란히 티치아노에게 물려졌다고 하겠다.  조르지오네의 천재성은 그가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요절하면서 아쉽게 끝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그가 남긴 작품은 여섯점에 불과하다.  그나마 진품으로 확실하게 보장받는 작품은 두 세점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위작이 가장 많은,  모든 갤러리나 개인 소장가들이 작품을 가지고 시피어하는 최고 반열의 화가에 조르지오네가 있다.

 조반니 벨리니에서 시작된 베네치아 유파는 조르지오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나서 비로소 티치아노 시대에 이르러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라파엘로 이후로 가장 유명한 화려한 풍부한 색채의 마술세계를 펼쳐내는 화가가 된것이다.

  틴토레토는 그렇게 화려한 색채의 마술같은 티치아노의 화풍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수제자였다.  티치아노가 세상을 떠나자 베네치아 미술계는 온통 틴토레토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원숙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틴토레토의 그림은 급속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티치아노풍의 그림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는 조르지오네 화풍의 강한 영향을 받아가고 있었다. 스승은 분명 티치아노 였지만  은연중에 그는 조르지오네의 화풍을 답습해 나갔다.  그런가하면 당시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매너리즘의 경향이 틴토레토의 그림에서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적지않게 파르미지아노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전적인 르네상스 화풍의 전통은 이제 틴토레토에게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원근법이 무시되기 시작했다.  화면을 고르게 비추는 빛의 효과도 확 무시해 버렸다.  갑자기 밝아지는가 하면 기괴할 정도의 짙은 그림자가 깔리기도 했다.  대담한 터치와 작열하는듯한 색채, 그리고 뚜렸한 명암 대비 등 티치아노에게서 물려받은 무난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치 우울하고 음습하고 무시무시한 한 편의 연극을 보고있는듯한 긴장되고 한층 고양된 분위기를 캔버스 가득 옮겨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틴토레토은 역시 이미지 편집의 대가이자 장인이었다.

  틴토레토의 모든 작품은 하나 하나의 장면마다 더없이 훌륭한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와 틴토레토가 빠진 베네치아 유파는 존재 할 수가 없을뿐더러,  그 둘이 빠진 르네상스 회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터 폴 루벤스作.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상트페테스부르크 헤르미타지 미술관 소장.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화가' 라는 별명이 늘 따라 다녔다.  하여 이참에 아예 나는 그에게 '걸어다니는 그림공장의 공장장' 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선사하고 싶다.

  루벤스는 생전에 대충잡아서 약 3.000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63세에 사망했으니까 유년시절을 제외하면 대충 1년에 70작품에서 100여점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작은 크기의 (모나리자)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만 4~5년이 걸렸다.  로마에서 시작한 작업을 밀라노로 가지고 가서도 계속했고  결국 마무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마누리를 했다.  다빈치라면 100점 그림을 남기는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루벤스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만큼이나 넘쳐나는 역동감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네상스 시대 화가의 작품을 펼쳐놓고 작가를 알아맞히라고 하면 아마도 루벤스의 그림이 가장 먼저 뽑힐 확률이 가장 높을 것이다.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성화를 그렸는가 하면,  때로는 에로티즘이 뚝 뚝 묻어나는 그림들도 썩 잘 그렸다.  거기에다 그것이 성화였던 에로틱한 그림이었던 모두가 루벤스만의 매우 독특한 스타일로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라파엘로 이래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루멘스 아니었을까?

  가장 호사스럽게 살다 간 화가라면 당연히 라파엘로 산지오를 꼽겠다.  그런 라파엘로의 삶에다가 엄청난 부와 명성까지 얻은 가장 성공한 화가라면 당연히 루벤스가 아니었을까?

  미켈란젤로에게서 완벽한 소묘(데생)를 터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게서나 볼 수 있는 완벽하고 힘찬 인간의 육체를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코렛지오의 역동적인 생동감과 티치아노의 황홀하리만치 빛나는 색채를 가져와 완벽하게 해석하고 자신의 작품에 보다 뛰어나게 반영해 냈다.  카라바조와 같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절정과 빛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적극 활용했으며,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었던 적막감과 긴장감과 신비스럽기까지 한 표현들이 생생하게 잘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루벤스 그림의 특징인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림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추리고 추려서 한 무리의 제자이자 조수들을 항상 끌고 다녔다.  오랜 시간동안 루벤스는 그림의 구상만을 하고 나머지 데생과 채색은 모두 제자와 조수들이 나누어서 분업으로 작업을 해 나갔다.  어느정도 완성이 되면 최소한의 마무리와 서명만은 자신이 직접했다.  루벤스의 작품중에서 약 60% 정도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가 루벤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 가수의 그림에 대한 비슷한 사건은 이미 르네상스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조르지오네, 카라바조, 구스타프 모로, 조르주 쇠라, 잔 와토와 같이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아서 못내 아쉬운 화가들을 끔찍히 아끼는 사람들에게 루벤스는 허황된 거품으로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루벤스의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를 볼 때마다,  남여 주요 등장인물의 신체적인 부분은 루벤스가 직접 손질을 가미한 부분이도  주변인물이나 배경은 다른 사람의 솜씨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다른 솜씨는 아마도 틴토레토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제자나 조수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나 비전문가 수준인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주스 반 클레브作.  (루크레티아의 죽음)   비엔나 쿤시토리스 박물관 소장.
사이먼 부엣作.  (타프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요한 마이클 로트마이어作.  (루크레티아의 강간)   비엔나 벨베데레 박물관 소장.
한스 본 아헨作.  (루크레티아의 강간)   비엔나 쿤시토리시 박물관 소장
쥬세페 마리아 크레스피作.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새뮤엘 에이치클래스 컬렉션 소장
에두아르도 로살레스作.  (루크레티아의 죽음).  
헨리 핀타作.  (루크레티아의 죽음과 부르투스의 맹세)   유러피안 미술관 소장.
개빈 해밀턴作.  (루크레티아의 죽음과 부르투스의 맹세)   리츠 컬렉션 소장.
장 오로네 프라고나르作.  (루크레티아의 죽음과 부르투스의 맹세)   프라고나르 생가 박물관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作.   (부르투스의 맹세)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한 여자가 어떤 남성에게 강제로 겁탈(강간) 당한다는것은 고대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그저 감추고 쉬쉬 할 일이었다.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고귀함 보다는 세상이 온통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거나 향락의 대상으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교회의 교리나 봉건왕조시대의 사회질서와 규범은 성범죄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는 물론이고 왕이나 귀족이나 군인들에서 평민의 남자들까지  여자는 대부분 그저그런 성적 대상이자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취급하던 시대였다.

  왕의 총애를 받는 왕자가 유부녀를 겁탈을 했다.

  심야에 무단으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여인의 침실에 칼을 뽑아들고 몰래 침입을 했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면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후의 자리를 제시하면서 잠자리를 요구했다.  만약 거절할 경우에는 밖으로나가 남편의 남자 노예중에서 젊은 남자를 골라 죽인 다음 옷을 홀랑 벗겨서 여인의 침대에 내던져 놓고는 여인도 죽여서 두 사람이 간음을 저지르다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소문이 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여성의 명예는 물론 남편의 명예와 가문의 명예를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칼을 뽑아든 왕자와 자리를 비운 왕자는 사촌지간 이었다.

  여인은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무지막지 몰아치는 남자의 힘을 당해낼 재간까지는 없었다.

  로마왕국의 왕자가 사촌형제의 아내를 겁탈한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많은 부를 가진 남자들에게 이런 정도는 유야무야 흔하게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저 속으로 삭이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중세까지 유럽의 영주들에겐 자기 영지에 사는 소작농들의 여인들이 자라서 결혼을 할 경우에 초야권(?)을 전제로 결혼 승낙을 허락해 주던 시대였다.

  하지만 비록 불가항력으로 겁탈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 대응방식에 있었서 루크레티아(Lucretia)는 달랐다.

  한 마디로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왕자가 루크레티아를 너무 만만하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결단코 세상 남자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정도의 그리 호락호락한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강간을 당한 여자들은 통치자에게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은(혹은 세상의 시선은) 피해자인 여자를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를 않았다.  아울러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법집행관을 포함한 남자들로 구성된 참관인들 앞에서 완전히 알몸인 채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고 어디를 어떻게 다루어져서 어떤 결과의 상처가 났는지까지를 낱낱이 보여주어야만 했다.  결국 피해를 입증하기도 전에 모든 결론이 나 버리기가 십상이었다.  이는 오히려 여성이 치부를 드러내놓고 피해여성은 물론 가문에까지 두고두고 불명예로 남게되는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여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런 경우 최소한 남편에게 들키지 않고 넘어가 주기를 바라고 기도 할 뿐이었다.  당연히 왕자도 그런 결과를 예측했고 당연시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아는 달랐다.

  다음날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있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서 4일 뒤에 집에 다녀가 줄 것을 요청했다.  친정에도 사람을 보내 같은 날 다녀가 주실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명망있는 사람들도 초대를 하고,  남편과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로마왕국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있는 친구들을 특별히 초청했다.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은 루크레티아의 집에 남편이나 그녀에게 여럿이 함께 축하할만한 기뿐일이 있는줄로 알고 모두가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로마의 귀족인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집에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영문까지는 몰랐지만 안주인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과 와인이 모여든 모든 사람들에게 한껏 흥을 돋구어 주었다.  잔치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고 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콜라티누스의 아내인 루크레티아가 계단 위로 올라섰다.  초대받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을 때,  그녀는 무겁고 단호하게 외쳤다.

  '나흘 전에 저는 어떤 남자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강제로 겁탈을 당했습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고 없는 심야에 손에 칼을 뽑아 든 남자가 몰래 저의 침실에 침입하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순히 요구를 들어주면 훗날 여왕의 자리를 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아니면 저를 죽이고 나서 남자 하인 하나를 골라 죽인 뒤 제 침대에 함께 뉘어놓고 불을 질러 제가 부정한 짓을 저릴러버린 것으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제 남편과 가문의 명예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겠노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가 저의 옷을 찢고 겁탈을 하였을 때........  저는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끝가지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죽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처음 그가 말했던 대로 이 천인공로할 만행을 감추려 엉뚱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당연히 죽었어야만 했지만..........  어저면 서툰 죽음이 오히려 그자의 바램대로 남편의 불명에와 몰락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겁탈을 당했음에도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섰습니다.  나는 남편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것이 한 순간에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이 증인이 되어 주십시요.  제 남편은 이제껏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며 당당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남편과 가문의 명예를 지켜 주십시요.  그리고........  저의 모든것을 한 순간에 빼앗아가 버린 그 나쁜 인간을 끝까지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요.  신의 뜻과 정의가 살아있다면 반듯이 그 나쁜자에게 천벌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왕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바로 저를 겁탈한 원흉입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요.  그에게 겁탈을 당하기 전까지 저는 온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눈물 속에서 연설을 마친 루크레티아는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들고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칼끝을 꼿아 넣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절명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이라고 했다.  나쁜 인간들은 참혹한 결과를 맞게되었다.

  왕정(王政)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페단의 막장드라마가 펼쳐졌었으니  혁명 세력은 '로마왕국'을 몰락시키고,  단일 국왕이 아닌 선출된 둘 이상의 지도자가 통치를 하는 '로마 공화정'의 시대로 변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야누스의 문'은 벨라브로의 산 조르지오 대성당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야누스의 아치(Arch of Janus)

 

 

 

 

 

 

 

 

 

 

 

 

  '누가 야누스(Janus)를  Two Faces 를 가진 이중인격자 라고 부르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 그 짝으로 보고싶은 단면만 보면서 살지 말어. 도리가 아니지?'

  도대체 야누스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기에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늘어놓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인식에 대해서 나는 아주 짧게 설명을 함으로써 그릇되어짐을 바로잡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크게 나에게 관심을 끌었고,  당연히 나에게 큰 감동이자 호기심과 탐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기데 된것은 바로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 이었다.  첫 여행에서는 그냥 무심히 지나쳤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다가가서 가만히 살펴 본 결과로는 다소 충격적이었을만큼 신선한 감동 그 자체였다.  신화속에 등장했던 하나의 신(神)을 넘어서 살아있는 감동으로서의 벅찬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함께 하고 싶다.

 

 

  야누스를 '투 페이스'나 '이중인격자'로 부르자면 우선,  야누스는 '아주 썩 그르쳐 먹은 파렴치한' 이라는 전제가 깔려야만 한다.

  야누스가 이세상사람들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에다가 얼굴이 두 개나 달려있는 괴물이라면 지금 당장에 어떤 상황들이 벌어질까?  아무리 멀리서도 딱 한 눈에 누가 야누스인지 몰라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가 얼마나 나쁘고 위험한 사람인지를 익히 모두 알고있다면 일찌감치 외면하고나 달아나 버려서  그의 주위에는 항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디에서든지 한눈에 딱 알아챌 수 있는 괴물이 과연 위험한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생겨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아주 특별한 존재의 주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사건이나 사태는 아주 미미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  사전에 이미 모두가 경원하고 의심하고 미리 대비 할테니까 말이다.

  야누스가 어떤 지극히 사소한 실수라도 할라치면 누구라도 그게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게 될 것이고 곧바로 신고를 할테니까 말이다.   현삼범 포스터가 따로 필요없는 경미한 잡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유독 튀는 사람은 별로 딴 짓도 못하게 되어있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서운 존재는 과연 누구냐?

  '포커 페이스(Poker Faces)'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다.

  도박판에서 패가 나쁘게 들어오거나 아주 좋게 들어오거나 한결같은 표정을 가진,  전혀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때론 좋게 때론 나쁜 의미로 왜 통용되고 있겠는가?  대형사고나 큰 범죄는 그런 포커 페이스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어느 재래시장을 들썩일 정도로 곗돈을 통째로 어마어마하게 떼어먹고 도망친 계주들이 바로 포커 페이스의 전형이라면 다소 이해가 쉬우려나?

  이 상황에서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포커 페이스(Poker Face)와  투 페이스(Two Face)를 동일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늘 상 그게 그거려니 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포커 페이스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기꾼의 전형이라고 통용해도 무방하겠으나,  태생적으로 얼굴이 두 개인 외형으로 태어난 (야누스)를 그런 무지한 처사로 나쁘게 표현하고 인식하는 것은......  아마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을 '야누스만도 못한 인간' 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정중하게 묻고 싶다.

 

  '당신은 야누스(Janus)에 대하여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야누스(Janus)는 어디에 살고 있는 신(神) 일까?

  야누스는 고대 그리이스의 올림푸스 궁전에 살지 않는다.  야누스가 살고있는 곳은 쌔턴(Saturn) 이다.

  쌔턴은 태양계에서 여섯 번째에 위치한 행성인 토성을 말한다.

  태양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 토성은 크기로는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크지만 그만큼 운행이 느린 노쇠한 행성으로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여 고대 로마사람들은 쌔턴을 뇌쇠한 늙은 신 사투루누스(Saturnus)라고 이름 붙였다.  농경생활을 담당하는 신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이스사람들은 이 쌔턴을 제우스에게 쫒겨난 늙은아버지 신인 크로노스라고 생각했다.

    토성은 수 십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위성들의 공전으로 레코드판을 돌려놓은 것과 같은 고리가 토성을 감싸고 있다.  아마도 태양계에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름다운 별이라 하겠다.  이 아름다운 토성의 고리를 발견한 사람은 갈리레이(1609년) 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이미 이 토성의 고리를 만들고 있는 수 십개의 위성에 이름을 붙이고 아름다운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대목에 이르게되면.......  나는 어느새 꿈 속을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토성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 위성중에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신화를 담아놓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찾아내기  2천년 전에 말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만 한단 말인가?

  17세기 초에 들어서야 갈릴레이는 토성의 고리를 찾아냈고,  좀 더 망원경이 발전한 뒤에서야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카시니가 토성의 고리속에서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말하던 프로메태우스와 에피메테우스 같은 별자리들을 그때에서야 찾아냈었는데 말이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신화를 그리이스인들은 2천년 전에 토성의 고리에 새겨 넣었다.  수 백년이 지나서 고대 로마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학자의 눈에 고대 그리이스의 천문학자들 눈에는 띄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 위성과 에피메테우스 위성 사이에 또 하나의 이름없는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하여 그들은 그 행성의 이름을 (야누스) 라고 붙였다.

  고대 로마의 천문학자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별자리 사이에 있는 새로운 별자리에 (야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그랬을까?  야누스 라는 신은 그리이스 신화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로마 신화에만 등장하는 신이다.

  그런 이유로 (야누스)를 이해하자면 먼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이해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이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에피메테우스를 기억하십니까?

  야누스애 대해 알고자한다면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데우스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만 한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름에는 '먼저 생각하는 자' 라는 의미가 담겨있는가 하면 동생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의 이름에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 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신들이 모여서 지상에 인간과 동물들을 빚어서 만들 때, 에피메테우스가 맡았던 역활은 이들 모든 창조물들에게 저마다 자신들의 삶을 유익하게 영위할 수 있는 재주를 한 가지씩 나무어 보유하게끔 해주는 일을 맡았다. 늘 계획성 없이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뉘늦게 깨닫게되면 그제서야 후회하기가 다반사였던 에피메테우스는 허락된 재주를 되는대로 마구 나누어 주다보니 정작 마지막에 차례가 된 인간에게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되었다.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프로메테우스가 보자니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생각조차 없는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로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된 인간은 저마다 한 가지씩의 재주를 가진 동물들에게 둘러 쌓여서 생명조차 지켜나가기 힘들게 되었다는 뻔한 미래를 예축해 볼 수가 있었다. 인간을 측은하게 여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정해놓은 하늘나라의 원칙을 무시하고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불과 불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해 주었다.

  이 때부터 인간에 의한 지상에서의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라 하겠다.

  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세상의 끝에 있는 코카서스산의(현 조지아의 북쪽 산맥) 바위동굴에 쇠사들로 묶어놓고는 지구를 떠받쳐 들고 있게 했다. 낮에는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심장을 쪼아먹게 하고, 밤이면 뜯어먹긴 심장이 다시 자라나는 영원한 형벌에 처했다. 이는 훗날 소식을 접한 사촌동생 헤라클레스가 찾아와 아테네 여신의 활과 화살로 독수리를 쏘아죽이면서 형벌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쳐서 준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신이 인간에서 내려준 선물을 신들의 왕 격인 제우스가 무효라고 다시 무르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불과 지혜를 얻게된 인간이 제대로 행복하게 살지 못살지는 역시 이 일의 시초이자 단초가 된 에피메테우스 하기나름이라는 신묘하기만 너무도 결과가 뻔 해 보이는 처방을 내려준다. 제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커다란 상자 하나를 내려주면서 '영원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아라. 약속을 지키는 한 인간은 불과 지혜를 활용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것을 보장한다. 다만, 혹여 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다면 그에 대한 참혹한 댓가가 에피메테우스 네가 아닌 인간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라고 약속했다.

  늘 아무런 생각이 없이 처신하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내려 준 '판도라의 상자를 절대로 열지 말라'는 다짐은 너무나도 공허하고 뻔한 꽁수였다. 제우스의 마음속에는 '반듯이 오래지않아 판도라의 상자는 꼭 열린다' 라는 전제를 사전에 깔아놓고 선심쓰듯, 너른 아량을 베푸는듯한 치졸한 사기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에피메테우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세상은 이제 한바탕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절묘한 타이밍에 참으로 기가막힌 창의력을 가지고 고대 로마의 천문학자들은 토성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위성들 중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위성의 사이에 새롭게 발견된 위성에 (야누스) 라는 이름의 새로운 '로마의 신'을 창조하여서 삽입 시켰던 것이다.

  절로 이 타이밍에서 (야누스)를 창조해 낸 고대 로마인들에 한없는 존경과 갈채를 보내드리고 싶다.

  '먼저 생각하는 자' 와 '나중에 생각하는 자' 사이에 넣을 수 있는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해답은 너무도 간단하지 않은가?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자'가 해답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가지를 모두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자' 가 바로 '야누수(Janus)' 인 것이다.  그 기가막힌 창의성에 혀를 내두르고 소름이 마구 돋아나고 있을 뿐이다.

  로마인들은 '생각이 앞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생각이 너무 뒤지는 에피메테우스' 사이에다 두 사람의 역활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매우 특출난 존재를 창조해 내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몸체 위에 생각이 앞서는 머리와  생각이 뒤쳐지는 또 다른 머리 하나를 가진 '야누스'의 탄생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생각이 앞서는 것' 과 '생각이 뒤쳐지는 것' 을 다르게 표현했다.

  야누스(Janus)의 한 쪽 얼굴은 '미래를 내다보고 예측을 할 수 있는 시선'을 가졌다.  다른 한 쪽 얼굴은 '지나간 과거를 돌아다 보고 개선을 할 수 있는 시선'을 가졌다.  이보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존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야누스는 그야말로 '완벽한 존재' 로서의 가장 위대한 상징이라 할 만 했다.  다만.........  인간들의 통념적인 가치판단에 의하자면 외형적으로 해괴한 괴물처럼 보여질 뿐이겠지만 말이다.  외모는 참으로 흉측하겠지만 말이다.

  이 완벽하고 위대한 존재에게 누가 '이중인격' 이니 '겉과 속이 다르니' 비판하고 폄하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미래를 예측해 주어 환란에 고통을 격지 않게 해주고,  지난 일들에 대한 착오와 실수를 되짚어주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야누스)야 말로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신 중에서도 인간들에게 한없는 찬사와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최고의 신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야누스 보다도 더 인간을 사랑하고 아낀 유익한 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야누스를 돌로 쳐라.' 라고 외치고 싶다.

  그런 야누스의 진면목을 알지도 못하면서 '차마 상종 못 할 이중인격의 신' 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데스를 따라 지옥의 가장 깊은 속으로 내려가야만 할 것이다.

 

  포커 페이스(Poker Face) 와 투 페이스(Two Face)는 반듯이 구분지어져야 한다.

  야누스는 태생적으로 투 페이스 이기는 하지만,  결코 투 페이스는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은 포커 페이스들에 의해서 자행 되었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포커 페이스와 투 페이스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포커 페이스적'인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럼 도대체 '포커 페이스적'인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어떻게 하여 '포케 페이스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있어서 '야누스'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인가?

  '야누스' 라는 명칭이 '이중인격적인' 혹은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의 의미로 쓰여진것은  1946에서야 벌어진 일이다.  불과 얼마되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야누스'를 그렇게 '이중인격적인 야비한 존재'로 부르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달력의 1월(January)에 해당하는 신'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왜 야누스(Janus)는 비인간적인 야비한 존재가 되었을까?  야누스에 비교된 진짜 야비한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성직자들과 왕족과 귀족으로 구성된 로얄 패밀리를 모두 합쳐서 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국토의 30%에 해당하는 토지를 차지하고는 온갖 횡포와 특권을 마음대로 누리면서도 갖은 방법으로 세금은 한 푼도 내지않는 말도 안되는 특권을 누리는 세상이 프랑스였다.  상인과 제조업자의 신분이 상승하였고 법률가. 의사. 등의 자유직업인들이 생겨나서 시민계급을 형성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극소수의 로얄 패밀리에 의해서 정치적 사회적 권리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상당부분의 토지를 수용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면서 여러가지 세금의 강제징수에 시달려야만 했다.

  경제 파탄에 견디지 못한 민중은 결국 혁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교회와 귀족들은 어수아비 정치세력을 앞세워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민중이야 어떻게되던 아무런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고수에만 혈안이 되었다.  마침내 성안 민중은 올바른 인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끌려가 갇혀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각인시켜준 위대한 역사 발전의 한 이정표였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세상은 그 이전보다도 더 어수선하고 극심한 혼란으로만 치달았다.  문제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민중을 대표하고 대변해야 하는 정치가들이 개혁세력이 아닌,  과거의 성직자나 귀족들과 하나도 다를것이 없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해서 밥그릇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를 기회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과거의 성직자와 귀족들이 득세하던 세상보다 더 후퇴한 왕정정치로 크게 후퇴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것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는 또 정치가들이 기득권 싸움을 놓고 극심하게 집안 싸움만 일삼다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격으면서 나찌 독일에 점령당한다.  영국으로 도망친 망명정부는 처절하게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여야만 했다.  전쟁은 끝났고 프랑스는 해방되었다.  국가적인 오랜 재난을 겪었음에도 전쟁이 끝난 프랑스는 정치가들의 이합집산과 자기들만의 기득권 확보와 행세로 전쟁을 격기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정치학자였던 '뒤베르제(Duverger)'가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프랑스에서 자행된 모든 구태와 개악에는 항상 두 얼굴을 가진 정치가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 일때마다 항상 투쟁과 질서라는 상반된 화두를 내던지면서 속으로는 저들의 실속만 챙기고 있다.  세상이 잠잠해지면 투쟁을 들고나와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키우고나서 정치가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만들고,  혼란이 극에 달하면 또 나타나 질서와 안정을 외쳐댄다.  그럴때마다 정치가들의 입지만 높아가고 세금은 모두 그들의 주머니로 향하게 된다.  정치가들은 모두 야누스 처럼 두 개의 얼굴을 달고 돌아다니는 괴물집단이다.'  라고 썼다.

  그는 분명 '부패한 프랑스의 정치가'에 한 해서 내놓은 표현이었지만,  이후로 사회전반의 모든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모든 상황을 대변하는 말로 '야누스'가 쓰이게 된 것이다.  1946년에서야 등장한 사회적 현상인 것이다.

  그 후에 소비에트 연방을 차지한 스탈린이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자 '뒤베르제'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며 참혹한 숙청을 단행하는 스탈린을 향해 또 정치적 이유를 들어 '앞에서는 공평한 민중의 세계'를 외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수백만명을 시베리아로 숙청'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가증스러운 인간으로 스탈린을 또 한 번 야누스에 비교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때부터 (야누스)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격을 가진 가증스러운 인간의 뜻이 되어 버렸다.

 

  로마시대 최고의 신이었던 야누스(Janus)는 하나의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얻은 지혜와,  다른 하나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얻은 지혜를 모아서,  인간의 주변에 항상 머물면서  인간사를 모두 주관하고 인간의 안전을 돌보아주던 수호의 신(神)이었다.  하여 중요한 문(門)에는 야누스를 모셨다.  문은  그 문을 나서면서 새로운 미래가 되기도 하고,  문을 들어서면서 되돌아 보면 지나온 과거가 되는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야누스는 인간의 미래와 과거를 살피고 통찰하면서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유익한 신이었다.  또한 그는 시간의 신이었다.  1월은 '야누스의 달'을 상징하고,  1월 1일은 '야누스 데이'로 불렸다.  한 해라는 새로운 시간이 바로 야누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야누스는 농사와 법(法)의 신이었다.  인간 생활의 풍요로움과 정의와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 야누스였다.

  야누스는 로마인들이 창조해 낸 '로마 신화' 속에서 제우스나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의 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야누스(Janus) 라는 존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못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21세기인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하나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야누스에 대한 인상은 바로 영화 (배트맨)에 등장했던 '하비 검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혹한 운명의 희생자로 그려지는 하비 검사는.........  모든 사람의 관심과 존경을 받는 정의의 수호신이었다.  사랑하는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한 순간에 그를 방금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야말로 그는 악(惡)의 화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모든 분풀이로 인간세상에 복수로 되갚아주고자 했다.

  하여 현대인들은 하비 검사를 야누스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의의 수호신과 악마의 화신을 투 페이스 처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구하고 있는것이 있다.  하비 검사는 그의 운명이 꼬일대로 꼬여서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운명에 앙갚음을 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최후까지도 그의 뜨거운 피 속에는 인간적인 후회와 미안함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비 검사는 일그러진 참혹한 얼굴의 상처를 입은 후에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지만,  결코 두 얼굴의 악마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인간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운명이 그 처럼 질곡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면,  우리도 틀림없이 그렇게 분노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커(Joker)는 어떠했던가?

  가면(지나친 분장) 속에 본 얼굴을 감춘 조커는   도무지 그의 속내를 알아채거나 짐작 할 수조차 없는 악마 그 자체다.  마치 그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장난처럼 일상처럼 모든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은듯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그야말로 악의 근원이며 악의 화신인 두얼굴(Two Face)가 아닌가?  악마는 야누스가 아니라 투 페이스인 것이다.

  현대의 우리들은 결코 알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야누스)의 얼굴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악마나 저승사자처럼 인식되고 있는지 말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야누스의 얼굴 모습을 이렇게 생각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찬란하게 빛나고 다스한 태양이 떠오른다.  그런 태양을 보며 하루가 시작되기를 염원했다.  하여 로마인들은 시작을 축복해주는 아침의 모습을 가진 신을 야누스의 한 쪽 얼굴에 그려 넣었다.  바로 '태양의 신' 이자 '지혜의 신' 이며 '전쟁의 신'인 (아폴로) 였다.  그럼 반대편은 누구였을까?  하루를 마치고 나면 인간은 활동을 마치고 휴식의 시간을 갖게된다.  하루동안 거둔 수확이 있어야 하고 오늘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고 내일을 계획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 휴식의 시간을 누가 지켜줄 수 있겠는가?  해가지면 뒤따라 찾아오는 '달의 여신'이며, 낮동안 먹을거리를 장만해 주는 '사냥의 여신' 이며 농경생활을 수호해주는 '농경의 신' 이기도 했던 (아르테미스 여신)을 야누스의 뒷모습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한 쪽에 아폴로가 있고,  다른 한 쪽에 아르테미스가 있는데........  그런 야누스를 징그러운 악마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과 올림푸스 산 정상의 하늘나라를 통 털어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선남선녀의 모습이 아닌가?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시라.  그 둘을 합쳐 놓은게 바로 야누스 이다.

  야누스는 고대 로마인들이 늘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필요로 하는 선(善)한 신이었으며,  인간의 생활에 꼭 필요한 유익한 신(神) 이었다.

 

 

 

 

 

 

 

 

영화 (배트맨)에 등장하는 비운의 '하비 검사'.  그를 악의 화신 야누스로 비약하는것은 옳지 않다.

 

'조커'야 말로 악마 그 자체라 해도 좋겠다.  그가 바로 '투 페이스'다.

 

야누스의 앞쪽 얼굴은 바로 이 모습이다. 태양의 신, 지혜의 신인  (아폴로)의 모습이다.

 

야누스의 뒷모습은 바로 이 얼굴이다.  사냥의 여신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말이다.

 

 

 

 

 

 

 

 

 

 

  야누스(Janus)는 결코 고대 로마인들의 신(神) 만은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불리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에 이미 야누스는 등장했던 것이다.  고대 수메르인들의 신화속에서 '이시무르(Isimud)' 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최고의 신 엔키의 측근이자 신들의 전령사로 등장한다.  고대 바릴로니아의 미술과 신화에도 야누스는 등장한다.

  힌두교 신화에서 두 얼굴은 더이상 특별한 이미지나 존재로 부각되지 못한다.  힌두교의 최고신인 브라만이 네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북반구 슬라브 민족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과 다산의 신 스베토비드 역시 네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고대 신화속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의 어머니이자 다산의 여신인 아디티 또한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중세 시대에 지중해의 해상 교역을 둘러싸고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 도시들이 서로 무한 경쟁을 펼쳤을 때,  베네치아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제노아의 상징으로 바로 야누스가 추앙되었던 것이다. 

  그런 야누스를 지금 '진실의 입' 이 위채해 있는 '포룸 보아리움 템플리스' 주변에서 새로운 존재감과 느낌으로 다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여행에서는 그냥 가볍게 지나쳤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정리를 해나가던 중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팜플릿 하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입수했는지는 기억조차 없었다.  아마도 로마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안내 팜플릿으로 입수했던 것 같다.  팜플릿의 제목엔 분명하게 (The Temple of Janus) 라고 적혀 있으며,  더군다나 친절하게 '로마 포룸'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안내까지 있다.  아내 지도까지 첨부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은 사진에 있었다.  배경으로 등장한 사진 어디에도 '야누스 사원'의 모습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오류다.  팜플렛 속의 사진은 '야누스 사원'의 사진이 아니라,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 사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 앞에 놓여있는 '야누스의 문'은  '포룸 보아리움' 지역에 산재한 '고대 그리이스 신전 지역'에 놓여 있다.  하지만 '야누스 사원'은 '포로 로마노'를 벗어나 베네치아 광장을 스쳐지나,  로마의 정문이자 관문이랄 수 있는 포폴로 문으로 향하는 중심도로인 '코로소 빗토리아 에마뉴엘 2세 거리의 가가운 대로변에 현재는 교회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나보나 광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장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야누스 문(Arch of Janus)'의 정확한 용도는 무엇일까?

  고대 로마인들은  도대체  왜 저런 건축물을 이 자리에 남겼을까?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作  (야누스 아치의 폐허)

 

 

 

 

 

 

 

 

 

  바로코 시대의 화가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가 그린 18세기 초의 그림을 살펴보면  포룸 보아리움 일대의 고대 그리이스 신전 지역이 완전 페허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 신전 기둥만이 그나마 원형으로 남아있을 뿐 지붕도 사라졌고   땅바닥엔 주변 신전들에서 부서져내린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고대로마 초기부터 이 지역은 팔라티노 언덕만큼이나 가장 중요한 성지로 추앙받던 장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건국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쌍둥이 형제가 테베강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다가 늑대어미에 의해서 뭍으로 구조되어 처음 둥지를 튼 장소가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야누스의 문 바로 옆에 있는  '산 지오반니 벨라브로 교회)'가  바로 늑대 어미가 쌍둥이 형제를 구출하여 처음 늑대젓을 먹인 장소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이곳에 신전을 지었고,  후대에 이르러 이 신성한 장소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성지이며 교통 요지였던 이 지역의 한복판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넵튠 분수는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뒤에 역시 상층부가 심하게 훼손된 '야누스의 문' 이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의 모든 고대 그리이스 신전 지역은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심하게 파손되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누가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이토록 참혹하게 파괴해 버렸을까?

  헤라클레스 신전의 경우는 중세시대 기독교 교회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던 탓에 그나마 파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의 콩코르디아 신전과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모든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에게 무참하게 살륙 당했다.

  그렇다면 야누스는  헬레니즘의 신이 아니라 로마의 신이었기에 그나마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의 사람들은 '야누스의 문' 이라 부르지 않고 '콘스탄티누스의 문' 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여러군데 남아있다.  헤브라이즘 전사들은 '야누스의 문' 이었다면 당연히 더 심하게 파괴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를 공인해준 구원자 '콘스탄티누스의 문' 이었다면 결단코 파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건물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견고하지 못해서 자연적으로 세월에 의해서 이만치 훼손되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야누스가 그렇게 헤브라이즘의 시선으로 보자면 더없이 이교도적이며 야만적이며 기독교 교리의 적이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사르트르 대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 교회들의 파사드나 스테인 글라스 등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예술가의 당돌한 치기였을까?  고위성직자나 교황청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오랜세월 많은 사람들이 '야누스의 문'에 대해서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어느 하나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추론은 많이 있지만 말이다.

  '승리의 개선문' 이라는 설이 가장 오랫동안 꾸준하게 정설로 여겨졌다.

  '야누스 신전' 이라는 설도 있었다.

  '어떤 기념물' 이나 '이정표' 라는 설도 있었다.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은 누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던 것일까?

  그리이스 신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로마의 신 '야누스'와 연관은 있기는 한 것일까?

  여기까지 온 김에 다음 이야기에서 좀 더 '야누스의 문'에 관해서 나름 심도있게 접근을 해 볼까 한다.

  '야누스의 문' 하나의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어미에게 구출된 성지에서 부터,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환전소의 문(머니 체인지 게이트)'과  '포룸 보아리움' 안에 위치한 고대 그리이스의 신전들과 서너 블럭 떨어진 곳에 있는 '마르셀루스 극장'과 '아폴로 신전' 등을 하나로 엮어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해야만 하겠다.

 

 

 

 

 

 

 

 

 

 

 

 

 

 

 

   --  로마산책은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장문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