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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천년왕국 바티칸은 또 하나의 제국이다.

by 피안재 2021. 1. 5.

 

 

 

 

 

 

 

 

 

 

 

 

 

 

 

 

 

 

 

 

 

 

 

 

 

  보는 사람이나 선정 기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소장품의 역사성을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세계 3대 미술 박물관)을 선정한다면 다음의 결과에 대부분이 수긍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영국 런던의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 이다.  물론 소장품의 규모나 숫자로 보아도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미술관이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을 해독하고 기록하고 보존해 나가는 가장 대표적인 이들 세 개의 박물관에는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이 공통점은 저마다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내세우는 존립의 정당성을 심하게 격하시키는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에 모두 적용되는 치부를 들추는 일일수도 있다.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이나 바티칸 미술관은 모두가 제국주의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올바른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는 절대로 탄생하지 말았어야만 하는 역사의 종양 같은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외치던 대영제국의 군대가 체계적으로 군함까지 동원해 가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해외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 금은 보화와 문화재 약탈을 일삼은 결과로 탄생했다. 영국인들 스스로가 '대영 박물관에서 영국의 것은 껍데기 건물하고 경비원뿐'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일삼고 있을 정도다.

  파르테논 신전의 벽장식 부조상을 아예 벽채로 헐어서 약탈해 왔다. 박물관 내에 신전과 같은 크기의 벽면을 만들어 놓고 약탈물을 이전의 모습처럼 재조립해서 자신들의 문화재인양 세상에 자랑하고 있다.

  이집트의 애스원 댐이 건설되면서 룩소를 신전이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세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미술가들이 모두 모여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살려내자고 뭉쳤다. 마침내 그들은 어마어마한 신전을 댐의 수위 위로 옮겨서 재조립하였다. 룩소르 신전이다. 이 일을 계기로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국제기구인 유네스코 세계역사 문화 보존 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인류가 힘을 모아 지켜낸 룩소르 신전의 전면에 있는 네 개의 신상중에서 가운데의 람세스 조각상만이 부서진 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영국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몰려가 다이나마이트를 이용해 람세스의 두상을 절단해서는 군함에 싣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지금 떡하니 대여박물관 특별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대영 박물관은 인류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한다는 걷치례와는 전혀 다르게, 국가 권력이 앞장서서 합법을 강조하면서 강도질과 약탈과 심지어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장물아비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훔쳐가고 빼앗은 모든 인류의 유산을 본래대로 되돌려 준다면, 아마도 경비원과 텅 빈 창고만 남게될 것이다.

  그것이 신사도를 내세우는 영국인들의 DNA가 아닐까?

 

 

 

 

대영 박물관.  다르게는 '대영제국 왕립전당포'라고 부르기로 하자.
파르테논 신전의 벽면 부조상은 싹쓸이,  전후의 박공을 비롯해 신전의 일부까지 뜯어왔다.
파르테논 신전의 박공을 장식했던 조각상들.  대충 쓸어담아 군함에 싣고 훔쳐갔다.
특별전시실에 자랑스럽게 전새해 놓은 람세스 두상.
람세스 두상이 원래 있었던 자리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이다.  뜯어간 영국군대의 솜씨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이번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을 살펴보기로 하자.  유독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사람들이 사는나라 이니만큼 좀 다를까?

  '르브르에서 프랑스제를 찾기란 골프장에서 어디론가 날아간 골프공을 찾는것 보다 어렵다'는 누군가의 푸념이 있는 현실을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고스란히 잘 드러내주고있다고 본다.

  루브르 박물관을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우뚝 세워놓은 일등공신은 당연히 프랑스 제국을 세우고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아니겠는가?  이집트 원정에서 수많은 유적 유물을 약탈해 왔고  유럽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것은 모두 침을 발라놓거나 파리까지 자진 납세하도록 으름짱을 늘어놓기로 유명했다.  로마의 개선문을 가져가려다 가지못해 새로 만들었던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다.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이 나폴레옹에세 잘보이기 위하여 수많은 예술품들을 스스로 바리바리 싸서 마차에 싣고는 루브르에 까지 자진 택배를 벌이기까지 했다.  하여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기부를 받기는 하였으나,  결코 약탈은 없었노라고 지금도 오리발을 흔들어대고 있다.  특히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로마의 유적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하여는 영국 못지않게 고대 그리이스 미술품들을 싹쓸이 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밀로의 비너스, 니케의 여신상은 약탈물을 넘어서 이제는 자랑스런 프랑스인의 자부심이 되었다.  함무라비 법전 원본도 루브르에 있다.

  프랑스의 문화유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은 우리나라에도 군대를 앞세워 쳐들어와서는 강화도 정족산성의 외규장각을 털어서 의궤등을 약탈해 가기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의 덕을 고스란히 누리던 루브르(프랑스)는 결국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철저하게 개인교습을 받은 한층 엎그레이드된 히틀러에 의해서 제대로 홍역을 단단히 치르게 된다.  히틀러는 빗자루로 쓸어담아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히늘러는 아예 기름을 쥐어짜듯 문화재와 미술품에 도를 넘어도 한참이나 넘을 정도로 집착했다.  하긴 나찌의 수뇌부 대부분이 미술품과 문화재에 광적으로 집착을 보이는 경향들을 고루 가지고 있었다.

  종전 후,  그나마 공정하고 공평한 미국의 대국적인 조치에 힘입어 대부분의 약탈 문화재와 미술품이 본래의 소유자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루브르(프랑스)의 경우 자신들이 남에게 빼앗와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양 모조리 루브르로 되찾아 갔다.  그것이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이다.

  프랑스에서 약탈해온 문화재를 모두 돌려주고 나면 딱 세 개만 남는다고 한다.  수경재배 온실로 쓰게될 유리 피라미드와 에펠탑과 개선문 뿐이라고.........

 

 

 

 

루브르 박물관 야경.
니케의 여신상은 그리이스 조각이다.

 

 

 

 

  그럼 이제 남은것은 '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 뿐이다.

  바티칸 미술관은 로마 교황청에 속하는 부속 시설일 뿐더러  종교적으로 카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과 제국이 무슨 상관이 있는냐고 반문 할 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로마제국이라면 모를까?  거기다가 바티칸 미술관과 약탈 문화재를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올 수가 있다.

  더하여,  위에서 처럼 설명을 위하여 한 두장 제시하는 사진으로 미술관 전경과 라오콘군상 사진을 계재한다면.......  라오콘 군상이 무슨 약탈물이냐고 되물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라오콘군상 또한 분명한 약탈 문화재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약탈의 주체가 바티칸이 아니라 로마왕국이었다는 차이가 존재했을 뿐........

  그리고 보다 확실한 것은........  바티칸은 분명한 제국이다.  더하여 역사상 지극히 보기 드물게 천년을 훌쩍 뛰어넘으면서까지 굳건하게 제국의 위상을 이어내려오고 있는 명실상부한 위대한 '바티칸 제국'인 것이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바티칸 미술관 전경.
바티칸 미술관은  모두 여기 이 고대 그리이스의 (라오콘 군상)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기독교(로마카톨릭)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급부상하였지만, 395년에 제국이 동.서로마로 나뉘게되면서 동로마는 모든 보따리를 싸서는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급기야 410년엔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비록 기적이 일어났던 것인지 침략자 고트족이 이미 기독교를 전해받고 있었던 이유로 교회의 약탈만은 면하게 되었다.

  이제 고트족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 영토는 그야말로 페허로 변한 무주공산이었고  그 한복판에 교회(로마카톨릭)만이 덜그러니 쓸쓸하게 남겨진 꼴이 되었다.  막강한 로마제국의 힘과 군대를 뒷배경으로 든든하게 가지고 있을때의 교회 위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의 안위를 걱정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뒤를 이어서 훈족과 반달족 등 수많은 침략자들이 있었지만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침략자들 대부분이 어느정도 기독교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터라  교회가 나서서 그들과 협상을 하기도 하고 타일러서 약탈을 좀 덜하게 하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던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있는것 없는것을 박박 긁어서 침략자들이 고분고분 돌아가는 댓가로  십자가와 교회를 상징하는 물품들을 만들어서 선물로 마구마구 딸려 보냈다.  일종의 거룩한 선교행위라고나 할까.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마구마구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영역에 머물게되면 일단 어느정도는 약탈과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전역에 기독교 교회가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모든 교회는 모두 로마교구의 산하에 예속되었다.  로마교회의 수장인 대주교는 유럽 영토내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제도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지역적 배분속에 대형교회에 주교 혹은 대주교를 임명하고 이를 통하여 엄격하게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언젠가 어디에선가 부터  '파파(PaPa)'라는 호칭이 생겨나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 파파라는 호칭은 그 지역의 교회수장(대주교)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이제 유럽은 기독교가......   로마카톨릭의 로마교구 대주교가 나름의 권리와 지배력을 가지고 행사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시기를  '로마카톨릭 왕국시대(Kingdom of Roman Catholic)' 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파파(PaPa)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그리이스어 '파파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야훼 하나님을 우리들은 쉽게 '하나님아버지'로 호칭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주인이다. 그렇게 본다면 교회의 지도자인 파파는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여 오래지 않아 이 파파라는 호칭은  대주교들은 사용할 수 없게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이자 천국의 열쇠를 물려받는 단 한사람만을 호칭하는 의미로 바뀌게 된다.  '파파(PaPa)'라는 호칭은 에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오로지 교황만을 가리키는 호칭이 된것이다.  교황은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은 실현되어져야 하는 '기독교 왕국'인 것이다.

  유럽의 역사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이 (PaPa) 라는 호칭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된다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좀 더 깊이있게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면........  유럽 영토에서 로마카톨릭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으나,  당시까지는 엄연하게 로마카톨릭이 비잔틴의 그리스정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분리되기전까지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모든것이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죄지우지되었으나,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가 비잔틴으로 제국의 이름을 바꾼 뒤에는 비잔티제국의 그리이스정교회가 모든것을 관할하고 통제했기 때문이다.  비잔틴 교회(그리이스정교회)는 기독교 세계를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알랙산드리아 교구. 로마 교구로 나누어 관장했다.  로마 교구를 제외한 나머지 3군데의 교구를 모두 그리이스정교회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거느렸다.  로마 교구만 외톨이 신세였던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적으로 따져본다면  모두가 로마교구가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탄압의 대상이던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과 협의하에 모든것이 제도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로마에 상주하고 있던 극소수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모든것이 채택되고 추진되면서 그들만이 엄청난 기득권을 송두리채 차지해버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임이 과도하리만치 포장되고,  그 베드로의 무덤위에 지어진 교회가 이 세상 교회들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베드로의 후예들인 로마교구의 대주교가 최고지도자인 '교황(PaPa)'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오로지 자기들 마음대로 독자노선을 걸어왔던 결과였다.  결국 로마지역을 벗어난 대부분의 교회는 '너네들 끼리 다 해먹어라' 라는 반감의 결과로 싸그리 그리이스정교회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비잔틴제국은 더욱 발전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과거 로마제국의 영토회복을 주장하면서 전 유럽을 하나 둘씩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잔틴의 정복지역은 당연히 그리이스정교회 방식의 기독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곧 로마카톨릭의 심각한 위기가 된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우선 살아남기 위하여 비잔틴에 항복했다.

  로마카톨릭이 비잔틴의 그리이스정교회에 속하는 로마교구로서 머리숙여 생존을 모색하기에 이른것이다.  이제 로마카톨릭은 그리이스정교회의 실질적인 재배를 받는 산하교구로 전락한 것이다.

  300여년 정도를 로마카톨릭은 넙죽 엎드려서 비잔틴에 있는 그리이스정교회의 눈치를 살피며 생존을 모색해왔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자 비잔틴 제국이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영토가 급겨겨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유럽에 대한 지배권이 상실되는 틈을 타서 유럽 각지에서 여러민족과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던 와중에 프랑크 왕국이 주변국들을 통합하면서 급부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로마카톨릭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프랑크왕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미래에 닥쳐올 로마카톨릭의 운명을 유럽 영토내의 새로운 세력에게 걸었던 것이다.

  726년 비잔틴의 레오 3세 황제가 '성상파괴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사건을 계기로 로마카톨릭은 그리이스정교회를 파문시켜 이교도로 낙인찍는다.  때가 이르렀으매 독립을 하겠다는 선포였다.  로마카톨릭이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짓고 십자가를 높이 내걸고 성전 치장사업을 오랫동안 벌여 온 결과로,  프랑크 왕국이나 유럽 대부분의 민족과 국가들이 그런 방식의 교회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마당에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졌으니 반목이 심하게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리이스정교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로마카톨릭은 성상파괴운동을 '사탄의 유혹' 이라면서 타오르는 불길에다가 기름을 아낌없이 끼얹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였음에도 쇠락해진 비잔틴은 이들을 단죄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할 여력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즈음이 되면 나는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된다.(내 블로그의 앞쪽에 올려놓은 해당 영화의 감상문을 참조)

  바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14년에 발표한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이 바로 그 영화다.

  내가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는  약간의 보완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제 그 이야기를 마저 해보기로 하자.

 

 

 

 

 

 

 

 

 

 

 

 

 

 

 

 

 

 

 

 

  'PaPa(교황)' 이라는 호칭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이 전까지 이 세상에는 단 두 개의 부류만이 존재했었다.

  이세상에는  '싸우고 통치하는 사람들'과 여기에 상대적인 '일하는 사람들'의 두 부류를 말한다.  '싸우고 통치하는 사람들'에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군인과 관리와 훗날의 기사들과 부유한 사람들을 일컷는다.  다른 부류는 다분히 복종의 의미를 담고있는 평민들과 노예들을 말하며,  숫자상으로 절대다수인 하층민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중세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세상은 이들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PaPa'라는 호칭이 등장하면서부터 새로운 부류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성직자 집단이다.  천년 전,  혹은 이천년 전에 이미 교회는 있어왔지만,  굳이 교회를 별도로 나뉘어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PaPa'라는 호칭의 등장과 함께 교회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자 생각이다.

  '싸우고 통치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 외에도 '기도하는 사람들' 이라는 새로운 부류가 이제는 역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싸우고 통치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아우르면서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급의 출현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역사는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을 구분해서 판단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교권과 황권의 극한 대립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었다.

  '신들과 왕들(Exodus; Gods and Kings)'은 교권(敎權)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황권(皇權)을 대표하는 이집트 왕국의 람세스 2세간의 대결을 세속의 인간역사와 종교의 기독교 역사를 반영하면서 한 편의 대 서사시로 그려내고 있다.  람세스의 이집트 역사가 모세 사건 이후로도 한동안 번영을 계속적으로 이어나갔다는 인간역사 기록과는 다르게,  기독교역사에 서술한 바대로 모세가 성스러운 전쟁을 이기는것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이집트는 당연히 커다란 제국이었고,  모세의 후예들이 이룩한 기독교왕국도 분명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러했던 역사는........  모세의 기독교 왕국이 PaPa(교황)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Kingdom)으로 새롭게 탄생하였고,  이는 머지않아서 거대한 기독교 제국(Empire)으로 발전해 나간다.  아울러 람세스로 대변되던 이집트 제국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게 된다.  비잔틴 제국이기도 했다가, PaPa(교황)의 호칭이 등장함과 함께 그것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들이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유럽의 수많은 왕들과 영주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종국에 오스만 제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세 부류로 나누어졌던 것이 이제는 '기도하는 사람들' 부류와 '기도하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부류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 이어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바티칸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곧 바티칸(Vatican)이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로마교구는 비잔틴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로마카톨릭 왕국(Kingdom)이 되었고,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하면서부터 바티칸제국(Empire)으로 스스로 지위를 격상 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선포했다. ' 이 모두가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분께서 직접 예비해 주신 것' 이라고 말이다.

 

 

 

 

 

 

 

 

  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의 탄생.

 

  아래에 세 가지의 '라오콘 군상(Raocoon and his sons)' 사진을 게재해 놓았다.

  하나는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중인 조각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중인 작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조각상이 훼손된 채로 발견되었을 당시의 추측에 의해서 복원해 놓았던 조각상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과연 어느것이 진품일까?

  어느것이 고대 그리이스의 로도스섬에서 만들어진 진짜 라오콘 조각상일까?

 

 

 

 

 

 

 

라오코 상 ( A )

 

라오콘 상 ( B )

 

라오콘 상 ( C )

 

 

 

 

 

 

 

 

 

 

 

  흔히들 말하기를 로마의 베스파니우스 황제가 폭군 네로의 궁전터를 부수고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마당 앞의 저수지를 메꾸다가 라오콘 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종국에 이 조각상은 한참이나 떨어진 다른곳에서 발견되었다.  공사 관계자 누군가가 훔쳐가려고 몰래 도굴하여 어딘가에 뭍어놓았다가 훗날 누군가에 의해서 다른곳에서 발굴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에 새삼 다시 문제를 삼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공사 도중에 이만한 크기와 무게의 조각상이 발굴되었다고 친다면 어덯게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아울러 장님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의 조각작품을 보는 순간 놀라 까무러치지 않았으면 당장 쏜살같이 달려가 높은곳에 신고를 해야하지 않았겠는가?

  콜로세움 공사중에 많은 유물과 조각상들이 출토된것은 맞으나 딱히 라오콘 조각상을 꼬집어 표현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라오콘 상의 발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당신이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해야겠다.

 

  1506년 테르미니역 근처인 에스퀼리노 언덕(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부근)에서 포도밭을 일구던 농부 펠리체의 곡괭이 끝에 단단한 돌덩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파내려가던 농부는 순간적으로 까무러칠 정도로 놀랬다.  너무도 무시무시하게 생긴 얼굴 조각상이 땅속에서 솟아올라왔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건 하나님의 어떤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길로 펠리체는 죽어라 달리고 또 달렸다.  테베강을 건너서 그가 또 달려간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그 당시는 올드 베드로 대성당을 모두 헐어버리고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던 때였다.  농부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다.  교황은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책임자였던 상갈로에게 조사를 명하였고 상갈로는 미켈란젤로를 조수로 동행했다.  다음날 아침일찍 상갈로와 미켈란젤로가 에스퀼리노 언덕으로 조사를 떠났는데,  그날 작업장을 비우게 된 이유가 '에스퀼리노 언덕 조각상 조사차' 라고 적었는데 그 날이 1506년 1월 14일 이었다.

  상갈로는 인부들을 동원하여 조각상을 완전하게 출토했다.  그야말로 보도 듣도 못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는 조각에 관한한 자신보다 실력자라고 본 미켈란젤로에게 출토된 조각상의 감정을 의뢰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조각작품이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역사학자와 미술사가들은 이 조각상이 그리이스 로도스섬에서 하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 라는 세 명의 조각가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고 밝혀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학설은 아니다.

  이들의 보고를 받은 교황은 즉시 농부를 불러 상당 금액을 지불하고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을 구입했다.

  몇 군데의 심한 훼손은 있었지만 세척을 하고 제대로 맞추어 놓고나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귀하디 귀한 보물덩어리가 아닌가?  교황은 자신의 소유가 된 이 위대한 조각상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여 교황의 거처였던 리카르도 궁전 안들에 전시를 해 놓고 사방에 자랑을 늘어놓았다.  건축중인 베드로 대성당에 놓인 피에타와 라오콘상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거기에다 당시에 교황에게는 또 하나의 고대 그리이스의 명작 조각품이 있었다.  아폴로 조각상(오늘날 벨베데레의 아폴로라고 부름) 이었다. 

  '아폴로 조각상(Apollo del Belvedere)'은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에 의해서 기원전 4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조각품은 애초에 청동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추세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이는 아울러 라오콘상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공히 그랬을것으로 추정된다.

  인체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고전양식 중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왼손엔 아폴론의 상징인 활을 들고 오른손에는 호살통에서 막 뽑아낸 화살을 시위에 걸려고 하는 중이었을 조각상은 부분적인 심한 훼손으로 원형을 그렇게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완벽에 가깝도록 아름다운 아폴로 조각상은 미켈란젤로에게 적지않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씨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벽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중심의 예수의 얼굴에서 아폴론 조각상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드 베드로 대성당 인근에 놓여졌던 아폴로 조각상을 1503년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자신의 궁전인 리카드로 궁전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3년 뒤에 라오콘상 까지를 소장하게 되는 것이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 아름다운 조각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공간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상갈로의 뒤를 이어받아 베드로 대성당 건설 총책임자가 된 브라만테는 교황의 처소를 위하여 벨베데레 궁전(현재의 바티칸 미술관 영역)을 건축하였고,  이 조각상들을 전시하기 위하여 벨베데레 정원을 만들게 되었다.  현재 그곳에 전시되고 있다.

  밥 먹는 것보다 전투를 더 좋아하는 전쟁광으로,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정력적으로 교황령의 영토확장을 위해 싸움터를 제 집 삼아 살던 율리우스 2세의 깜짝 놀랄만한 괴벽이자 취미였던 고대 조각품과 미슬품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이후로 모든 교황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즉위하는 교황마다 귀한것들을 싸쓸이 하듯이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곧 교황 능력의 잣대 구실까지 하게 되었다. 카톨릭 역사는 이 당시에 모두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했거나 기증을 받은것이라고 늘상 주장을 하고 있지만........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대영제국이나 나폴레옹 제국이나 고대의 로마제국도 이미 그러했을진대........  바티칸제국이라고 뭐가 달랐을라나?  괜히 제국인가 뭐?

  교황청은 이 쏟아져 들어오는 귀중품들을 따로 전시하고 잘 관리할 공간이 필요했다. (바티칸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유명 화가 조각가를 초빙하여 큰 돈을 지불하고 많은 그림을 그렸고 조각품을 만들었다.  제대로 후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제작 의뢰하여 소장하게된 지극히 당당한 미술품들 이라는 해명이다.  하지만.......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면죄부를 팔아서 만들었고  정당치 못한 수많은 파행과 범죄를 저지르면서 축적한 돈이었다.  대성당의 건립과정에서 콜로세움을 헐어서 석재를 조달했고,  판테온의 지붕을 뜯어서 청동을 마련했다.  교회의 재산을 메디치 가문 같은 수단이 좋은 은행가에게 맡기고,  거기에서 나온 이자와 배당은 교황의 개인주머니로 들어갔다. 공개적으로는 고리대금업을 십계명에 어긋나는 죄악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결국 교황의 손에서 나오거나 교회를 통해 오고가는 돈은 이전의 제국들이 행해 온 약탈과 강요와 다를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것이 제국이지........ 제국이 뭐 따로 있나?  십자가만 앞세우면 제국이 저지른 모든 범죄가 하늘의 사면을 받는가?'

  결국.......  바티칸 미술관의 시작은  바티칸 제국의 약탈물 저장고에서 처음 발단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벨베데레의 아폴론(Apollo del Belvedere)' 아테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 작품이다.

 

 

 

 

 

 

 

  전승에는 두 가지 버젼의 라오콘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오늘은 호머의 시선에 비춰진 트로이 멸망 사건에 견주어 살펴보기로 한다.

  트로이성의 포세이돈신전 사제였던 라오콘은 유리시즈의 계략에 의해 탄생한 (트로이 목마)의 비밀을 신탁을 통해 미리 알게되었다.  트로이 전쟁 자체가 신들 간의 다툼에서 파생된 대리전 형상이었기에  신들에 따라서 아테네 연합군을 지지하기도 하고 트로이군을 지지하는 신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폴론은 당연히 아테네 연합군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포세이돈 신전의 사제였던 라오콘은 엄연한 트로이 시민이었고  누구보다 트로이를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라오콘은 유리시즈의 계략을 알아챘고 목마가 성내로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오랜 전쟁 끝에 승리감에 도취한 트로이 사람들은 위대한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목마를 성내로 끌어들이려고 성문을 뜯어낼 정도였다.  라오콘은 뛰쳐나가 이 일로 트로이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연하면서,  심지어 창을 목마의 목부분에 던지기 까지 했다.  목마 안쪽의 목덜미 부분에 숨어있던 유리시즈와 아테네 특공대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을 것인가?  이제 모든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고 유리시즈외 특공대는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렀을때만 하여도 목마의 내부를 살짝이라도 살펴보기만 했어도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트로이 시민들은 끝내 목마를 성 내부로  끌어들였고,  밤이 새도록 승리를 축하하는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  새벽이 되자 목마에서 비밀의 문을 열고 유리시즈와 특공대가 트로이성의 성문을 열었고 기다렸던 그리이스 연합군이 들이닥치면서 트로이는 멸망했다.  호머의 대 서사시 (일리아드)가 전하는 이야기다.

  트로이는 멸망했다.

  하마터면 신이 허락한 비밀작전이 한 사제에 의해서 수포가 될뻔했다.  분노한 아폴론이 포세이돈 신전으로  포르케스와 카리보이아라는 거대한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서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깔려죽게 벌했다.

  호머에 의하면 당시 트로이에는 세 명의 신탁에 능한 사제가 있었는데,  포세이돈 신전의 라오콘과 아폴로 신전에 헬레노스와 카산드라 라는 여사제 두 명이 더 있었다 한다.  카산드라 여사제는 라오콘과 똑같이 트로이 목마의 비밀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하여 그녀 역시 거리에 뛰쳐나가 똑같은 주장을 외쳤으나,  그 이전에 남자를 알게(사랑)되어 신기(神氣)가 쇠락한 그녀의 주장을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위에 게시한 세 개의 라오콘 조각상 중에서 ( c ) 가 바티칸 박물관의 (벨베데레의 라오콘상) 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정품(正品)으로 인준 받고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품 ( A ) 는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라오콘 조각상으로 최초의 소유권자이기도 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시에 의하여 최초의 복제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애착을 보인 교황은 해외에도 크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하여 로마교황청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프랑크왕국(프랑스)에 복제품 하나를 선물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제작 도중에 교황이 사망하자  이를 피렌체가 사들여서 현재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게된 것이다.  이런 수문은 끝내 프랑크왕국에도 전해졌고,  후임 교황이 새로 복제품을 하나 더 만들어서 프랑스로 보냈다.  그러자 유럽의 권력자나 부자들이 너도나도 라오콘 조각상을 탐을 내는 지경에 이르러 수많은 복제품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작품 ( B )는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라오콘 조각상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상갈로와 모든 사람들이 예측했던 '라오콘상의 본래 모습을 추정' 하였던 바에 준하여.........  '본래 라오콘상은 이런 모습의 작품이었다'고 생각하여 만들어 본 추정에 의한 조각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미켈란젤로만은 '조각상의 구도상 절대로 손을 쭉 뻗을 수가 없다.  구부러진 형상이어야만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결국 라오콘상은 오랜 세월동안 미완성의 상태로 의문을 간직한 채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60년에 이르러 우연히 빠져있었던 부러져나간 팔의 조각이 출토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무한한 관심속에 출토된 팔 조각을 라오콘상의 본체에 맞추어 보았다.

  놀랍게도 끝까지 팔이 구부러졌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오로지 그 한 사람..........  미켈란젤로가 주장했던 바와 똑 같았다.

  세상사람들은 이제 천재적인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 뿐만이 아니라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갖춘 고고학자로서의 또 다른 미켈란젤로에게 갈채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갈채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를 시기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 입에서 (미켈란젤로가 만든 라오콘상)이라는 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라오콘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인생의 역작으로 삼아 심혈을 기울여 남몰래 숨어서 만든 작품이다.  그는 완성된 이 조각상을 부러 망치로 심하게 훼손시키고 불에 그을렸다.  그리고나서 남몰래 옮겨서는 포도밭에 뭍었다.   언젠가 일부러 부러트린 이 팔마저 발굴되고나면 온 세상이 자신을 우러러보게되고 추앙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서 일부러 시간이 제법 지나서 이런저런 경로로 조각상이 발견되고 세상에 드러나게 연출을 더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발굴현장에서 독자작인 자신만의 주장을 앞세워서 스스로를 아주 위대한 인물로 부상시키고자 모든것을 꾸민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몸체만을 보면서 아예 있지도 않은 팔의 원형을 예측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몸체와 비슷한 형질의 대리석을 구해다가 구부러진 팔을 만들어 파뭍어서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실제로 한동안 미켈란젤로는 이런 루머에 극심하게 시달리게 된다.

  아주 젊었던 시절에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미켈란젤로의 과거 행적에서 유추한 불확실한 추측들이었다.

 

 

  기원전 2 세기에 그리이스를 멸망시키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되는 로마는 로물루스를 비롯한 5명의 왕이 다스리던 왕정국가를 거치면서 이미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가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영토와 막강한 군대와 굳건한 백성들로만은 부조하다는 사실을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에서 깨닫고 배워왔다.  위대한 국가에는 제대로 된 역사가 필요했다.  그 역사에는 법률이나 신학 이외에도 문학과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로마는 이를 일찍부터 깨달았다.

  공화정의 시대 내내 로마는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실로 전방위적인 모든분야에 심혈을 기울여 박차를 가했다.  로마가도를 통해 세상을 모두 로마로 향하게끔 만들었고,  법령을 완비하여 제국으로서의 질서와 규율을 정비하고 안착 시켰다.  신전과 원형경기장을 비롯해 수도교에서 공공목욕탕까지 건축을 통해 과거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위대한 세상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이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통해 실현을 시켰으며,  시와 문학을 숭상하고 과학에서 의학까지 모든 학문을 놀랍도록 발전시켜 나갔다.  미술 분야도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분야가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지만,  로마를 그리이스나 카르타고 같은 고대국가에 머물지 않고 제국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이면에 가장 중요했고 가장 거룩한 업적은 로마인들은 로마만의 매우 독특한 정신세계로 이끌고 승화시킨것이 아닐가 싶다.  이는 곧 열린사회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 시민권자라는 그들만의 거룩하기까지한 자부심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일지기 그런 필요성을 느꼈던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이스 신화)가 (로마 신화)로 둔갑하게 되었다.

  로마의 대표적 시인인지,  위대한 역사가인지,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인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는  고대 그리이스의 호머가 써내려간 (일리어드)의 맨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인.........  모두 불에타서 한 줌 재로 변하여 트로이의 멸망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트로이 성문을 박차고 제대로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를 업은 아이네이아스를 극적으로 탈출 시키면서..........  이제 로마의 역사를 고대 그리이스 트로이의 마지막 장면에다가 절묘하게 끌어다 짜맞추었다.  그 정교함이 얼마나 뛰어났음인지  (아이네이아스 이야기)는 마치 (일리어드)의 후편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족 핏줄이 아이네이아스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고,  아이네이아스는 곧 로마의 시조가 되는 로물루스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 로물루스의 핏줄이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게되는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외가쪽 조상인 것이다.  바야흐로 로마제국의 황제는 고대 그리이스 트로이의 후손이라는 특별하게 선택받은 핏줄이라는 정통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모든것이 '베르길리우스'의 머리와 펜에서 탄생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은 훗날 단테에게 고스란히 물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위대한 로마의 유산이 된다.(이러한 속사정들은 다음 기회에 단테를 통해서 재조명 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불타는 트로이 성을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페데리고 바로치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정치와 행정에 있어서 로마인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라틴족만의독특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을 벗어나면 철학 인문학 예술 등의 학문과 문화분야에서는 절대로 그리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제 그리이스는 로마가 제국으로 발건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반듯이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여 로마의 통치자에서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마음으로 그리이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똘똘 뭉쳤다.  시간이 제법 흐르자 이제는 더 이상 고대 그리이스가 불가능한 극복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그리이스에 견줄만한 로마의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고대 그리이스를 부러워하지 않게되었고,  로마인들의 주변을 로마의 학문과 문화와 예술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그들만의 뛰어난 정치와 행정이 더하여 지나 비로소 로마는 제국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단.........  한 분야만은 제외로 하고 말이다.  그 분야가 바로 조각이었다.

  고대 그리이스는 지중해 연안의 곳곳에 도시를 세웠다.  도시마다 그리이스 극장을 세웠고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 극장과 신전의 곳곳을 모두 빼곡하게 멋진 조각상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도시에 세운 궁전과 사람들의 거주지에도 사방에 조각상들이 세워졌었다.  길거리에 돌부리가 방레 채이듯 세상에 넘처나고 흔하디 흔한게 그리이스 조각들 이었다.  거기에다 하나 같이 다시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만치 뛰어난 솜씨로 창조된 것들이었다.

  그리이스르 멸망시키고 지중해 연안을 모두 차지한 로마인들은 다른건 몰라도 조각에 대해서는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집을 짓거나 신전을 만들고 궁전을 완성하면 지중해 연안에 넘쳐나는 그리이스 조각상들을 고르고 골라서 그냥 가져다 쓰면 그만인 세상이었다.  힘들여 구상을 하고 기술자를 불러서 시간과 돈을 들여서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디에 뭐가 있더라 들었으면 미리미리 그냥 가져오면 되던 시대였다.  왜?  로마니까.  로마의 위대한 시민이니까.

  로마인들은 사람을 보내서 지중해 연안의 과거 그리이스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들을 찾아다니면서 멋있는 작품의 목록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파르테논 신전이야 벽면을 통째로 뜯겨서 대영박물관으로 약탈해 갔다지만,  밀로의 비너스나 니케의 여신상 같은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이 우여곡절 끝에 르우브르 박물관 소유로 전락했고,  라오콘과 아폴론상이 바티칸의 소유가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표현을 하던 결국엔 도굴과 약탈과 강압에 의해서인 것이다.

  그리이스쪽 전승에 의하면 (라오콘상)도 (아폴론상)도 애초엔 청동조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바티칸의 라오콘도 아폴론도 진품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복제품인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언젠가 어디에선가 또다시 고대 그리이스나 초기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똑같은 모양의 라오콘과 아폴론이 출토되거나 발견되지 말라는 법이 없게되는 것이다.  이는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로마가 공화정으로 들어서면서  마지막 남은 분야인 조각 마저도 그리이스를 극복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로마의 지도자들은 대도시마다 조각을 가르키는 학원(조각 아카데미)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조각품들을 가져다 놓고 이를 복제하도록 가르쳤다.  복제를 통하여 안목을 기르고 기술을 습득하고나면,  비로스 그들로 하여 로마다운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시기에 수많은 그리이스 조각품들이 만들어졌고 버려지거나 파괴되었다.  짧은 시간에 로마의 조각가들은 놀라울마친 충중한 조각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진품과 복제품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런 새로운 로마의 조각가들에게 적어도 (라오콘상) 정도라면 기꺼이 너도나도 도전해 볼만한 최고의 목표이자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우피치의 라오콘상은 부서져서 복원한 부위의 파편으로 변한 부위와  대리석의 재질을 제외하고는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바티칸의 라오콘상과 똑 같다.  로마의 아카데미에서 성장한 고급 조각가들이 한 두명은 아니었을 터,  어디엔가 라오콘이 여럿 더 나올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이 시기의 로마 조각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이 학습에 이용되었고,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이 바로 (아폴론상)이었다.  아폴론상은 최고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져 로마의 통치자들이 로마에서 수도없이 복제품으로 만들어 로마영역의 대도시마다 있는 조각 아카데미에 교과서로 보내졌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복제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바티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론) 조각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마저도 진품이 아닌것이다.

  (라오콘상)도 (아폴론상)도 모두 고대 그리이스 영토에서는 애초에 청동조각상으로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이스의 어디에선가,  혹은 이탈리아의 어디에선가.......  루브르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나 대영박물관의 지하저장고에 원본인 청동조각상으로 꼭꼭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라오콘 부자는 신의 징벌로 인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라오콘과 안키세스는 사촌지간으로 모두 트로이 왕국의 왕족이었으니 신성한 그리이스의 핏줄인 것이다.  안키세스의 아들이 아이네이아스로  로마를 건국한 시조 로물루스의 조상이다.

  라오콘 혈육들은 유리시즈로 대변되는 신들간의 대리전쟁의 결과로 책임을 물어 비참하게 죽었다.  그리이스의 신들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살아서 로물루스에게 전해져 로마제국으로 찬란하게 부활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로마제국의 기독교에 의해서 올림푸스 산에 기거하던 그리이스 신들의 세상이 모두 파괴되고,  나아가 신들도 모두 죽여 버린다.

  라오콘의 복수였을까?  라오콘의 저주였을까?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 세웠고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리이스의 신들이 헤브라이즘에 의해서 모두 죽었다.  그리고 라오콘은 저렇게 번듯하게 기독교의 성전에 버젓이 살아남았다.

 

 

 

 

 

 

 

 

 

 

 

 

 

 

 

 

 

 

 

  지극히 보편타당한 여행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티칸 여행)은 대단히 감동적이고 즐거운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많고많은 여행중에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 만은 결코 아니다.   하루종일 도심의 뒷골목을 돌아다녔다고 치자.  발목이 시큰거리고 발바닥이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찬물에 씻고나면 다음날 아침엔 다시 가뿐해 진다.  나이가 들었음인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산을 올라다녔다면 일단 무릎이 통증을 호소하고 발목이 시큰거리지만 그 정도는 역시 푹 자고나면 다시 온전해 진다.  그런데 미술관 박물관 종일 관람은 좀 다르다.  서너시간 정도야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서서히 허리가 뻐근해 지기 시작한다.  좀 더 지나면 목덜미가 뻣뻣해지기 시작하고,  난데없이 어깨와 다리종다리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쯤되면 낭만적이면서도 감동적인 황홀한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왠지 전신이 뻐근해지면서 무력감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내 몸이 점 점 내 몸 갖지가 않게 느껴진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피로감이 엄습한다.  지친 표정으로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찐하게 와인이나 위스키를 좀 마시면 잠시 피로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이다.  엇저녁의 피로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음에 스스로 놀라게되니까 말이다.  허리와 무릎의 기분 나쁘고 거북스러운 고통이........  새로운 하루를 암울하게 바라보게끔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기 일쓰니까 말이다.  물론........  나도 몇 년 전까지는 멀쩡했다.  하이고야........  그넘의 세월이 문제지.......... ㅎㅎㅎ

  그래서 나는 인파로 뒤덮히는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주로 그냥 패스해 버리는 타입이다.  책자나 방송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나름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것도 나름은 내방식대로의 여행 요령이자 지혜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모습은 이런것이다.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한 작은 2층 미술관을 들어갔는데  관계자를 빼고는 적막이 흘르만큼 조용했다.  그래서 아주아주 여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작품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가방을 둘러 맨 사내아이가 불쑥 들어왔다.  대략 중학교 1학년 정도 되었을라나?  느낌에 녀석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듯 했다.  녀석은 너른 전시실에 막 들어왔음에도 밖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유리창 옆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 앞으로 곧장 다가갔기 때문이다.  고개를 서너 번 갸우뚱하더니 이내 뒷쪽 갤러리 중앙에 위치한 너른 평상으로 다가가 걸터 앉았다.  어줍짢게 턱을 괴고 그림을 살피더니 이내 가방을 열고는 연필통과 노트북 크기의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러더니 이내 좀 전까지 살펴보던 그림을 자신의 시케치북에 옮겨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벅찬 감동!!!!!!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런 곳이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바로 그런 장소다.

 

 

  흔히들 세계 3대 미술관이라 일컷는 (바티칸 미술관)을 돌아보려면 쌩쌩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미켈란젤로의 쿠풀라와 대성당의 내부를 먼저 살펴보느라 어느정도 방전된 체력을 다시 보충해줄 필요가 있다.  광장 건너편네 늘어선 기념품점과 카페를 돌아보면서 바티칸을 상징하는 기념품도 구입하고 노천 카페에서 커피랑 피자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 커피는 말이다..........  주문은 분명 아메리카노인데 나온 커피를 보면 영락없는 에스페레소다.  딱 한번 현지인처럼 에스페레소에 도전해 본 적이 있는데,  내 커피 취향으로는 감당이 안되었다.  전통 터키식 커피랑 비슷하다.

  거기에다 이탈리아 피자는 말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만들어 팔면 쫄딱 망할 것이다.  그 흔한 토핑은 다 어데가고 밀가루 떡에 토마토를 갈아 바르고  치즈 쬐끔 듬성 뜸성 끼얹어 놓았다.  여기저기 태우기까지 멋대가리가 정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맛대가리는 기가 막히다.  피자가 맛있다기 보다는 베이스인 빵 자체가 그냥 너무너무 맛있다.

 

  기운도 차렸겠다,  이제 서둘러 바티칸 박물관을 둘러보려면 오후 관람시간에 맞추려고 벌써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쫓아가서 한참동안 차례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서 서둘러 나서려는데.......   지난번의 여행에서는 보지못했던 커다란 조형물이 하나 광장 한 켠에 자리를 잡고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지난번의 여행에서는 성탄절이 막 지났던 때이라 베들레헴의 아기예수 탄생을 모래조각으로 만들어 성치해 놓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말이다.

  이 카다란 조각군상이 바티칸 광장에 설치된 것은 불과 4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잡지에 실렸던 글을 통해서 이미 이 조각상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터였다.  여기 이 조각군상은 카나다의 현대조각가인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제작한 '뜻밖의 천사들(Angels Unwares)' 이라는 작품이다.  한국말로는 또 하나의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천사들' 이라는 부제가 따라 붙는다.

  아주 짧게 내용을 소개한다면 '난민 문제를 소재'로한 조각 작품이다.  구약성경에 처음 등장해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등장했던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나는 박물관 안에 전시되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작품 못지않게 박물관 전시장 밖에서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티모시 슈말츠의 작품도 대단히 훌륭하고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해서 조금 더 소개를 하고 싶어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뜻밖의 천사들' 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려면........  그에 앞서서 다른 작품을 하나 꼭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 작품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아무때라도 찾아가기만 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작품 역시 카나다 조각각 티모시 슈말츠의 작품이며  제목은 '노숙자(Homeless)'다.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作  '노숙자(Homeless)'.   대한민국 서울 서소문 성지역사 박물관 소장.

 

 

 

 

 

 

 

  2014년 미주지역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든 사회적 이슈가 한가지 있었다.

  카나다 현대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완성한 조각상 때문이었다.  정확한 조각상의 제목은 '노숙자 예수( Jesus the Homeless)' 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초라하고 처량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약 2m 길이의 의자에 누워서 긴 담요를 덥고 있는 모습이다.

  제작자 슈말츠는 이 작품을 토론토에 있는 세인트 마이클 성당에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하지만 성당측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슈말츠는 뉴욕의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 거듭 설치를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다른 몇 곳의 교회들도 모두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서서히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커다란 이슈로 발전하는 되는 계기가 있었다.  조각상 설치를 거절한 교회의 한 신자가 '슈말츠가 일부러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조각작품을 화제꺼리로 만들고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언론을 통해 표출해버린 것이다.

  '예수는 길거리의 부랑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움이나 바라는 분이 결단코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필요로 하는것이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바라고 있는것이 아니다' 라는 그 사람의 회견 내용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이 말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으셨다면 무엇이라 답변하셨을까?

  교회는 왜 필요한 것일까?

  신(神)이란 존재의 의미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가치있기도 하고 무가치로 전락하기도 하는것인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 저변에는 저러한 요구가 바탕이 깔려있는 것일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대의 의견들이 하나 둘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믿는 사람의 근본이 심각하게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걱정이었다.

  '노숙자 예수'  조각상은 그 탄생에서부터 저렇게 숱한 오해와 사연을 담게 되었다.

  북미 지역을 뜨겁게 달군 그 화제의 한복판에서 어떤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는 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불식시키고 해결하였다.  또한 그런 결과로 지금 그 작품이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한복판........  서소문 성지역사 박물관에 떡하니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때고 누구나 찾아가기만 하면 무료로 이 작품을 만나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불쑥 나타나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 사람이 한국인?  도대체 누구지?  덕분에 그 화제의 작품이 공짜로 한국땅에................?

 

  아니다.

  그 분은 바로........  교황........... 그분이다.

  교황께서 친히  '노숙자 예수 조각상'을 바티칸에 설치하여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서명날인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마십시요.  남을 접대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요.  언젠가 구세주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어쩌면 노숙자의 모습을 하고 당신에게 손을 내밀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간절한 손길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전 세계의 모든 교구 신자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믿는 사람이나 믿지않는 사람이나 그 누구도 이 사회에서 배척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 조각상이 바티칸에 설치되던 날,  교황께서는 미사의 말미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거듭 강조하셨다.

  '노숙자 예수' 조각상은 그렇게 실제로 바티칸에 설치가 되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찾아 보시라.

  하지만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까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여행자들의 관심에서 저만치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숙자 예수' 조각상이 바티칸에 설치되자 세상의 많은 교회와 공공단체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티모시 슈말츠는 (All Free)를 선언했다.  저작권료도 상표권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 공짜다.  직접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설치까지 해주고 있다.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저렇게 길거리에서 비를 맞고 눈을 피하지 못하면서 나무벤치 위에 지쳐 쓰러지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채 담요로 가지지 못한 두 발에 드러난 선명한 못자국을 지켜보면서 말입니다.

  그 분께서 왜 저렇게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구세주는 결코 저런 모습으로 오실 분이 아니시라고,  저건 모두 가짜라고 소리치시겠습니까?

  새로오실 구세주의 모습이.........  그분의 직업이........  그분의 차램새나 인물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는 저렇게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  무리에서 떨어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저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더 중요한것은  그분께서는..........  그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그분을 찾아서 우선 만나려고만 애쓰는 사람들이 아닌........  당장 주변의 병들고 굶주리고 힘들어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당장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당신의 즉각적인 행동을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바라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점이 아닐까요?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마세요.

  언젠가 무심코 돌아본 자리에 누워있던 저 조각상이 진짜로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테니까요.  얼굴에 덮여진 후드가 벗겨지면서 '그동안 참 많이 고마웠어요' 라는 말씀이 흘러올지 어떻게 알겠어요?

 

  'Quo Vadis, Domine.'

 

 

 

 

 

 

 

 

 

 

 

 

 

 

 

 

  교황청 산하기구인  '온전한 인간발전 이주사무국'의  미카엘 체르니 신부가 추기경단 회의에 의해서 2019년 추기경에 추천되었다.  서임에 앞서서 신부는 교황에게 한 가지 청원을 하였다.  바티칸 광장의 열주회랑 앞에 조각상 하나를 세우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각상은  '노숙자 예수'를 만들었던 티모시 슈말츠의 다른 작품인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천사' 였다.  또한 이날은 (세계 이민자의 날)이었기에 교황은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그날.......  교황은 직접 조각상의 설치를 지켜보았고 작품을 위해 축복 기도를 올렸다.

  '청동과 점토로 된 이 조각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속에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이 성 베드로 광장에 설치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앞장서서 보다 확실하게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만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초대된 카메룬의 한 가족이 조각상을 덮고있던 흰 천을 줄을당겨 거둬냈고,  교황은 그들 가족과 모여든 여러사람들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뜻밖의 천사들(Angels Unwares)'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인간 역사속에서 실제 벌어졌던 수많은 난민과 이주민 슬픔과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의 표정엔 도망, 위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을 고스란히 잘 드러내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수많은 난민들이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손을 부여잡으면서 좁은 땟목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이다.  무리지어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가운데 중앙부분에 한줄기 희망을 암시하는 천사의 날개가 나타나 있다.

  천국까지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런 표정과 저런 눈빛을 보지 않아도 되는 최소한의 세상을 나는 간절하게 기원하는 사람이다.

  저들 속에서 혹여 어린 아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이건 옳지 않다.

  '바라기는 부디 저들을 굽어살펴 주소서.........'

 

 

 

  기원 전 587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해버린 앗시리아인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모두 멀고 먼 바빌로니아로 강제로 끌려갔다.  구약성경 (신명기 28;25) 에 기록된 이 사건을 훗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a)' 라고 기록했다.  페르시아에게 바빌로니아가 몰락하자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유대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되었지만,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다.  강제로 끌려나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리지어 살면서 고향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사람을 (디아스포라) 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정치적인 난민이나 귀화와는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인도 북부 출신들로 페르시아에 의해서 유럽으로 대부분 노예로 팔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가는 집시(Gypsy)가 디아스포라의 경우이고,  현대에 들어서는 터키의 무자비한 침공과 150만명 학살을 견디다 못해 기독교도(아르메니아 정교회 소속) 이면서도 살기 위해서 부득불 타종교인 정통 이슬람 국가인 이란의 국경을 넘어 달아나야만 했던,  현재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란 북부 국경에 몰려사는 2백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현대의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러건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발단의 시작이 된 종교적 문제만도 아니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다분히 현대적인 비상식적이고 인륜을 저버린 패륜이며 결고 지워지지 않을 죄악인 것이다.

  더 이상 무슨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움이 있어도 달리 할 수 없는 처지를 안스러워 할 밖에..........

  그러난 저들이 그런 만행을 서스럼없이 저지르면서도 당당하게 말했었다. ' 이 모든것이 신의 뜻이라고..........'

 

  이럴 땐..........    John Lennon 의 'Imagine'  이라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추스를 수 밖에......

 

                  www.youtube.com/watch?v=L4ux15LKIq4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제작한 '뜻밖의 천사들(Angels Unwares)' 

 

 

 

 

 

 

 

 

 

 

 

 

 

 

 

 

  앞서 누누히 말해왔지만 본래의 베드로 대성당(Old Basilica Sancti Petri)은 기독교 전승(카톨릭교 안에서만의 기독교 역사)에 따라서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워서, 멀고 먼 예루살렘 까지 성지순례를 떠날 수 없는 유럽 각지의 믿음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절대 성지였다.  먼 길을 찾아 온 순례자들이 머물면서 기도도 하고 먼 여행의 여독도 풀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숙소 개념으로 처음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대성당은 그저 로마카톨릭의 정통성의 굳건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만들어놓은 기념물이 아니었을까 싶은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분히 전 유럽의 기독교인들 마음과 신뢰가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정하게끔 만들고,  거기에서 로마카톨릭(교황)의 정통성(후계자 구도)이 확립된 것이라고 의심치않게 하기위한 수단(한 가지 방법) 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대성당의 건립 시기에서부터 교황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

  교황은 처음부터 테베강 건너 아주멀리 떨어진 로마시내의 북쪽 끝 지역에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에 속하는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렀다.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Vantican)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전부인 '베드로좌'일 뿐이다.  하지만 저 세계 기독교인들은 '카톨릭의 총본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이끄는 최고 종교지도자는 분명 교황이지만,  교황의 공식 직책은 로마 교구의 대주교 이다.  그리고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은 바티칸이 아니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인 것이다.  이는 곧 '이 세상의 모든 카톨릭 교회의 어머니이자 으뜸인 교회는 라테라노 대성당'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지위는 모든면에서 바티칸 대성당 보다 더 높다.  거기에다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베드로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바 대로,  로마로 압송되는 바울에 심각하게 위협을 느낀 예루살렘의 교회의 야고보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베드로를 로마로 급파하였고(기도교 전승에만 따른다면),  로마에 도착한 베드로는 서둘러 로마 교회의 주교로 취임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교황의 직위에 대한 정통성인 것이다.  로마교구의 주교자 교회는 라테라노 대성당인다.  교황이 로마교구 대주교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에 입성한 베드로가 찾아왔고,  로마교회의 수장으로 임명된 곳이 바로 라테라노 대성당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바티칸은 그저 베드로가 그곳에서 처형되었고, 그곳에 묻혔다는(역시나 기독교 전승에만 따른다면)  성지일 뿐이 아니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는 어떤 의문을 품게 되었다.

  초대 교회라는.......   '교회의 의미'나 '교회의 사명과 맡은 바 책임'이 시작되고 실현되기 시작한  성스러운 장소가 바로 라테라노 대성당인 것이다.

  바티칸 대성당은 초대 교회의 수장으로 추앙받게되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기독교 전승에 따르자면)는 성지의 의미가 담달랐을 뿐이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들의 의식에 카톨릭의 총본산이자 절대 성지로는 당연히 '바티칸 대성당'이 고정관념처럼 먼저 떠오르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모두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들임을 내세우면서 교회의 권력과 세속의 권력 모두를 탐했고 누리고자 했던 중세시대의 역대 교황들에 의해서 생겨난 파행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천국의 열쇠를 물려받는 정통서에 입각한 후계자가 사도 베드로이고,  그이 후계자들이 역대 교황들인 전제하에,  베드로가 고난끝에 십자가 쳐형을 당하고 죽어서 뭍힌 무덤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천부적(하늘이 내려준) 당위성이 모든것을 정당화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고,  이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하거나 놓칠 수 없는 명분이 아니었겠는가?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야 말로 온 세상 기독교의 당연한 중심이었고,  그 한가운데 나르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사도 야고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야고보를 적극 지지했었고,  또한 이들 12명의 제자(유다 대신 마티아 합류)가 공히 적대시하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사람들이 기대가 너무도 컸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심장부라는 로마를 선점한 사도 베드로와 로마의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과 생각이 달랐다.  하나의 커다란 기득권을 점차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기득권을 예루살렘 교구나 안디옥 교구나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무시해 버리고 로마교구의 베드로에 후손들이 무작정 먼저 차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는 '신약성경의 내용' 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예수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박해를 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뿌리가,  기독교가 존재하게끔 만들어준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모구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신바가 처형을 받았던 골고다 언덕과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텅 빈채로 남아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기독교의 성지가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과 제자인 사도 베드로의 무덤 중에서 어느것이 더 소중한 것이란 말인가?

  그랬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지도부가 그렇게 더 베드로의 무덤에 거의 이 천년 동안이나 신기할 정도의 집착을 보인것은 아닐까?  '예수의 무덤은 텅 비었고  후계자의 무덤은 여기에 확실하게 있다'를 억지스럽게라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기독교 전승을 제외하면 로마에서의 베드로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에다가 이 천년의 세월동안 로마카톨릭(교황청)이 잊혀질만하면 또 끄집어내는 (진짜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유해)에 대해서도  주장은 여러 번 있었으나,  역사적 과학적으로 확실히 규명되진 않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지하에서 발견되었다고 꺼내는 사진과 발굴된 유해를 판단하기 어려운 사진 정도로만 공표하곤 했다.  그리고 교회 자신들의 방법으로 그것이 진짜 무덤이며 유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바티칸의 완공 시기인 1650년 경에 발굴을 발표하고 진짜임을 확신했다.  그런것을 1940년 대에 들어서 또 새롭게 현대적 과학의 잣대로 들이대보니 모두 진짜였다고 또 발표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교황청)의 방식으로 자신들 사람에 의해서 확인된 바 임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기록이나 인류의 역사는 카톨릭이 주장하는 단 하나의 근거인 '기독교 전승'의 진위 여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있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있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기독교 전승'은 오직 카톨릭 신자들만이 믿고 인정하는 시간의 기록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 승격'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 가름침의 실천이기도 했지만,  세속의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이루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기득권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와 로마교구의 지도자들은 열심히 주판을 튕기고 계산기를 두드려 댔다.

  예루살렘을 당장은 포기 할 수 있다고 행각했다.  야고보를 비롯한 11명의 제자들과 의절도 필요하면 감행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로마만 남게되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것이라 판단했다.  온 세상을 다 포기 할 수는 있어도,  로마제국과의 타협에서 파생되는 기득권을 결단코 포기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것만은 꼭 쟁취해야만 할 목표였다.  일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우선 쟁취하고 나면 차차 모든것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대로 풀려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생각도 저들과 일치했다.

  로마 교구의 지도자들은 절대적인 선택권자인 로마제국이 자신들을 선택했고 지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비롯한 모든 교구의 생각을 달랐다.  그것은 범 기독교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흩어져 있는 모든 기독교의 훌륭한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로마제국과 협의를 벌일 대단히 중요한 하느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거절되었다.  로마의 지도자들이 이미 전 교회의 대표권을 스스로 앞세우고 로마제국과 담판을 했고  로마 교회가 바라는 바를 대부분 이루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이제 전대미문의 새로운 종교적인 권력집단이 된 것이다.  그 새로운 권력의 핵심은 바로 교황(PaPa) 였다.

 

 

 

오랜 세월동안  라테라노 대성당의 사도궁전(라테라노 궁전)이 있었으며  역대 교황들은 모두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의 위치를 쉽게 설명하자면 로마 테르미니 역이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지금 당장에도  지하철을 이용하면 약 40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버스로 정체없이 달려간다 해도 한 시간 이상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로마 도심의 정 반대편에 서 있다.

  라테라노 성당에서 베드로 대성당까지의 거리가 결코 호락호락한 거리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 거리를 마차를 타고 로마 됨을 거쳐서 다시 테베강을 건너서 가야만 하는 거리였다면  아마도 베드로대성당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교황이 직접 나서서 모두 처리하기는 아마도 불가능했을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오늘날 도심의 대형교회가 한적한 시골에 기도원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 것쯤으로 받아들여도 될런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 상황이 변했다.

  상황의 변화는 교권(敎權)과 황권(黃權)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으면서부터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의 대체적인 시선은 '카놋사의 굴욕' 사건을 시작으로 교회(교황)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 편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샤를마뉴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교황이 임명하는 순간부터 이미 교회는 '바티칸 제국'이 되었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후대에 '모두 허위이고 가짜'라고 판명이 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증서' 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낼 때 부터 교회(교황)가 원하는것과 최종적인 목표는 이미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제 '로마카톨릭'은 '바티칸 제국'으로 완성되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유일무이한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서양 속담에 '구르는 돌 이라야만 이끼가 끼지 않는다' 라고 했다.

  동양 속담에 '고인물은 반듯이 썩는다' 라고 했다.

  부와 권력과 사치와 향락의 맛에 취한 교회(교황)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탐욕과 방탕이 나날이 늘어만 갔다.  드러난 파행과 저질러진 죄악은 이루 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를 '중세 암흑기 천 년'이라고 부른다.  천 년동안 저질러진 모든 죄악의 뒤에는 오로지 교회(교황)이 있었을 뿐이었다.  더불어 저질러진 그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 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교황)의 타락을 르네상스의 위대한 시인 보카치오는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에서 19금의 삽화와 함께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낮에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성스러운 사도에 길을 수행하던 사제(신부)는 저녁이면 부유한 여인들에게 남편 몰래 하느님을 말씀을 전하는 척 하였지만,  밤이 깊으면 그 여인과 추잡한 일을 저질렀다.  이는 교황에서 부터 말단 수도사에 이르기까지 만연했던 타락상의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이성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하여 무오류설을 통하여 교회는 언제나 항상 정의이며 복종만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가르쳤다.  모든 책들을 거두어 불사르고  성서를 번역하거나 알기 쉽도록 해석하는 일을 절대금기시 하였다.  그 이상의 교회에 위협이 되는 사상이나 책이나 부류에게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무조건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거기에다 십일조를 넘어서 헌금을 강요하였고 온갖 명목을 붙여서 소위 종교세를 뜯어가기 시작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더 이상 두고 볼 수도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제지에 나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실패로 도아갔다.  몇 년 후에 교황에게 보복은 성공하지만 교회의 개혁으로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세상은 다시 깊은 시련의 암흑기로 되돌아 갔다.

  130년이 더 지나서 썩을대로 썩어버린  교회(교황)는 마침내 응징을 당하게 된다.  '아비뇽 유수'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세속의 권력이 마침내 교황청에서 강제로 교황을 끌어 낸 것이다.  모든것을 박탈당한 교황은 마치 세속의 사형수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멀리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후 70년 동안 아비뇽의 교황들은 세속의 권력자들 눈치를 살피며 처절하게 생존을 위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단테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향해 '검은 짐승' 이라면 삿대질을 멈추지 않았다.

  유배지인 아비뇽 교황청의 궁정 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는 익명으로쓴 글에서  '교황청은 인류의 수치요 악의 소굴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오물이 집결하는 하수구가 바로 교황청이다.  그곳에서 거룩한 하느님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며 위선속에 섬겨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나 법은 깔아뭉개진지가 이미 오래전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공기건 흙이건 교회이건 침실이건 교황청의 모든것들은 성스러움으로 치장된 거짓 숨을 내쉰다.'  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크신 배려 덕분이었을까.

  교회를 징벌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외치며 뛰쳐나왔던 세속의 황제들 간에 권력다툼이 한 시도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급기야 이해타산을 노리는 봉건제후들의 가세로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게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했다.

  그 틈새를 노려서 교회(교황)는 또 한번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바티칸은 이비뇽의 교황청을 로마로 일단 옮겨놓고나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기로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재구성 했다.  그 결과로 마침내 그레고리 11세 교황이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돌아와 라테라노 대성당과 궁전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선 교황청이 옮겨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아직 모든 문제의 핵심에 교황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나름 유능하고 훌융한 교황으로 평가받고있는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프랑스인 교황이었다.  아비뇽 유수 기간 내내 7명의 교황이 모두 프랑스인 이었고,  결국 그레고리 11세는 마직막 프랑스 출신 교황으로 남게된다.

  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선 무조건 로마의 라틴계에서 교황이 나와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시작된 정통성이 바로서게 되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만이 거대한 기득권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교회 안에서의 특별한 존재이자 계급이라 여겼기에  교황제도는 곧 그들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정의였던 셈이다.  프랑스인 현교황의 영향력 행사로 후임의 교황마저 프랑스계통에서 선출되는 것만은 무조건 막아야만 했다.

  그들의 열망이 하늘에 까지 닿았음이려나?

  그레고리 11세가 선종했다. 콘클라베(교황 선출위한 추기경 회의)가 열렸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당연히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로마교구 신자들이 신성한 콘클라베가 벌어지는 회의장에 난입했다.  폭도로 변한 로마교구의 신자들은 흉기를 휘두르며 '이탈리아인 출신 교황'을 요구했다.  난장판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출신 우루바노 2세를 새교황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야심으로 가득한 우루바노 2세는 교황 즉위식과 동시에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모든 추기경들의 권위를 박탈하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만의 방법으로 교회를 통치하려는 야심을 내비쳤다.  추기경들의 입장에서는 모든것이 '하루아침에 죽 쑤서 남주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폰디에서 뭉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2세를 선출한 콘클라베가 무효였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교황이 보낸 토벌대가 다가오자 우르르 다시 아비뇽으로 도망쳐서는 임시 추기경 회의를 개최하고 프랑스인중에서 클레멘스 7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해 버렸다.

  동시에 두 명의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약 30여 년간 이 세상에는 바티칸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이 동시에 집권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비판하고 파문시켜 버렸다.

  AD. 451년에 교회는 동.서 교회로 나뉘었다.  로마카톨릭과 그리이스정교회로 나뉜 것이다.

  AD. 1378년 이니까 동.서 교회로 분열된지 1 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서방교회은 또 다시 로마와 아비뇽으로 나뉘고 만 것이다.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모든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연속적인 사건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신의 가르침에 준한 정의로운 사건은 눈을 씻고도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이다.  자신있게 말하건데.........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을 빙자하고 신을 방패로 삼아 저지른 교회가 있었을 뿐이다)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더 이상 아무도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시전잡배들만도 못한 악의 구렁터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교회의 위기였다.

  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할 처지도 못되었을 뿐더러,  죄악의 근원인 교회에 누가 헌금을 하고 근로 봉사를 하고 먹을 빵을 갖다 바치겠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권자가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심하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모든 악행의 씨앗으로 여겼다.

  교회의 발 등에 불이 떨어졌다.

  더 이상 이탈리아인 이거나 프랑스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가려는 교회를 일단 살려놓고 나서 볼 일이었다.

  추기경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우루루 콘스탄티노플로 몰려갔다.  1414년에 존폐 위기를 놓고 '콘스탄츠 공회의'를 열고 일단 교회를 되살려 낼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사안이 어찌나 중대했었는지 공회의는 장장 4년 동안 열띤 토론과 대결로 이어졌다.  4년만에 추기경들이 내어놓은 결론은..........  바티칸과 아비뇽에 있는 두 명의 교황을 동시에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옹립하여 실추된 교회의 권위를 우선적으로 되찾고자 하는데 있었다.  하여간 어찌어찌 해서 모두 페위가 되었고 어찌어찌해서 아무튼 일단 봉합이 되었다.  이 과정이야 당연히 교회는 감추고픈 치부일 수 밖에......

  새롭게 선출된 마르티노 5세 교황은 그야말로 로마카톨릭의 토박이라 할 수 있는 로마에서 가장 명문가로 통하는 콜로냐 가문 출신이었다.

  당장 교회를 진정시키는데는 신분상으로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던것 같다.  어수선한 과도기였던 탓에 너무나도 많은 일에 관여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별다른 업적이 없는 편인 교화으로 기록되었다.

 

 

  이 어수선한 격동의 시기에 새로운 사도궁전(교황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로마카톨릭의 수장들은  아비뇽에서 돌아온 프랑스인 교황을 전혀 반가와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적대시 하였다.  하지만 그레고리 11세에게는 나름 막강한 그의 친위세력인 프랑스출신 추기경들이 교황의 주변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라테라노대성당과 궁전은 이제 프랑스계 교황청 사람들의 아지트가 된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사람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성지 순례자들이 숙소였던 올드 베드로 성당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프랑스계통의 교황청 사람들을 몰아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현 교황도 프랑스인인 판에 혹여 차기 교황까지도 프랑스인 추기경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로마카톨릭의 정통성에 사망선고가 내려진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교황 승계권을 다시 이탈리아인으로 되찾아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면 팔고 싶은 정도였다.  그런 그들에게 라테라노의 교황 처소인 사도궁전은 이미 프랑스인에게 회복될 수 없을만큼 심각하에 오염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결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황권을 되찾아 온 다음,  새로운 이탈리아인 교황이 머물 처소를 새롭게 마련해야만 한다는데 이르렀다.

  아비뇽 유수 동안에 회복될 수 없을 지경으로까지 심각하게 훼손 된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건축하여야 했고,  새로운 이탈리아계 교황이 머물 사도궁전(교황 거처)을 새로 서둘러 마련해야만 했다.

  대성단 건축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성당 인근 언덕의 복숭아 밭을 매립하여 새로운 궁전을 지을 계획을 마쳤다.

  현재 교황의 거처인 사도궁전인 '팔라초 아포스톨리코(Palazzo Apostolico)'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베드로 광장 오른쪽으로 회랑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사각형 건물이다.  궁전에는 장중한 천 사백개의 방이 있고  천개의 계단이 이들을 서로 연결한다.  박물관과 도서관과 갤러리 등이 로지아(한 쪽 벽면이 없는 복도 모양의 긴 방)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교황의 개인 사저에만도 현관과 서재, 비서실, 직무실, 의료실, 개인 예배당 등이 속해 있다.

  이 당시까지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풍경을 가장 고스란히 담고있는 사진이 하나 있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올드 성 베드로 대성당 복원 조감도.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기 위해 건설되었다.

 

천사의 성에서 시작하여 현 바티칸 씨티의 영역이 모두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옛 베드로 대성당의 모습도 건재하다.(중요한 자료)

 

 

 

 

 

 

 

 

 

 

 

 

  고미술품에 심취해 있던 율리오 2세 교황은  사도 궁전에 딸린 벨베데레의 안뜰에 라오콘과 아폴론 조각상의 진열하고는 모든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했다.  라오콘상이 발견된 1506년을 바티칸 미술관의 설립 원년으로 삼고 2006년에 바티칸 미술관 5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루게된 이유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작은 율리오 2세에 의해서였으나 미술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것은 클레멘스 14세와 비오 6세 교황대에 이르러서 였다.  클레멘스 14세는 고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품까지를 마구마구 끌어 모았다.  거의 조각에 관한한 수집광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교황에게 특별히 부탁할 것이 있다면 고대의 조각품을 하나 들고가면 해결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후임인 비오 6세 역시 소장품 확대에 열을 올렸으나 그는 좀 더 체계적인 정시까지를 늘 염두에 두었다.  하여 두 명의 교황을 이름을 따서 '비오 클레멘스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로 미술품 수집은 교황들의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급 취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만드는것이 교황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을 정도였다.  비오 7세에 의새 키아라몬티 미술관과 브라치오 누오보가 만들어졌고,  그레고리 16세에 의해서 고대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 박물관과 고대 이집트 박물관이 세워졌다.  비오 11세는 사도 궁전 내에 있는 보르자 빌라에 있던 기존의 회화관인 '피나코데카'를 새로운 건물을 지어서 이전했고,  옛 회화관인 보르자 빌라에는 현대 종교미술 컬렉션이 만들어졌다.

  그럼 이제 안으로 역대 교황들께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고미술을 포함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발굴과 복구와 보존에 힘쓰신 지대한 공로(?)를 생각해 보면서 바티칸 박물관을 느껴보기로 하자.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한 미술품을 모두 제대로 보자면 족히 한 달은 걸여야 할것 같다.

  하여 대부분은 그냥 눈으로만 즐기면서 지나가기로 하고,  르네상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미술사에 커다랗게 획을 그었거나 큰 의미가 담긴 작품들을 위주로 극히 일부분만.......  어디까지나 나의 시선과 나의 주관적인 견해를 비탕으로 (르네상스 산책)을 이어나가 보기로 하겠다.

 

 

 

처음 바티칸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는 수많은 관람자 행렬이 입장 티켓을 구입하기 위하여 바티칸 씨티와 로마시의 경계인 성벽 너머 로마의 영역에 도로를 따라 길게 길게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려야만 했다.

  티켓을 구입하고 입구로 향하면 출입문 위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조각상이 내려다 보면서 '바티칸 미술관에 오시느라 공생 옴팡지게 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이곳이 입구가 아니다.  이제 이곳은 미술관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는 출구로만 이용되고 있다.  그나마  대성당을 부러 먼저 본 여행자가 아니라면,  미술관 관람을 마치기가 무섭게 반대쪽의 출구를 통해 대성당의 본당이나 미켈란젤로의 쿠풀라로 향할 수 있기에 지금은 아주 한산하다.  출입구는 좀 더 왼쪽으로 마치 거대한 성벽에 구멍을 일부러 뚫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로 새로 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리는 아주 멋진......  실로 환상적이라고 탄복할 수 밖에 없는 나선형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나오려는 사람은 엘레베이터를 이용해 우선 광장으로 올라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선형 계단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바티칸 대성당을 찾아갔다는 것은 몇가지 목적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아마도 미켈란젤로 쿠풀라에 올라서 바티칸과 로마의 풍경을 내려다 보면서 인증 샷을 찍는것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다음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감상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한 목표다.  천지창조는 까마득한 천장에 그려져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할 뿐더러, 최후의 심판 또한 예배당 안쪽으로 접근이 불가해서 그저 망원경이라도 가지지 않았으면 심도있는 감상은 공염불이다.  거기다가 사진 촬영도 절대 금지구역이다.  내 경우처럼 아예 기대를 처음부터 가지지 말고  그냥 눈으로 쓰윽 흩어보면서 '아하!  저기에  저렇게 붙어 있는거로구나' 했으면 미련없이 통과하고  여행 후에 미술 책자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본격적인 감상은 그때 하면 된다.

  그 다음 목표가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멋진 계단에서 인증샷을 제대로 날려서 바티칸에 다녀갔다는 기록을 아름답게 남겨야만 하겠다는 불타는 사명감에 잦아든 장소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바티칸의 나선형 계단'  또 어떤이는 '브라만테의 계단'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별거 아닐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도 통용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해야한다면........  '브라만테의 계단'은 아니다.

  브라만테의 계단은 확실하게 따로 있다.  비용을 더 지불하고 특별한 관람을 신청하면 실제 '브라만테의 계단'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나도 그 계단을 보지는 못했다.  내용은 소상하게 잘 알고 있지만서도 말이다.

  하여(사전에 누누히 밝혀 놓았듯이,  내가 소장하지 못한 사진은 구글을 통하여)  인터넷의 도움을 통해서  '브라만테의 계단'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까지를 해 보고다 한다.

  지금 우리는 바티칸 미술관의 나선형 계단 앞이다.

 

 

 

 

 

 

 

 

 

 

 

 

 

 

 

 

 

 

 

 

 

 

 

 

 

 

 

 

 

   ---   다음 이야기는 '브라만테의 계단'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