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했습니다. 타티우스 족장이 직접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 이끌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습니다.'
로물루스는 숲속에서 나뭇가지들 사이로 저만치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한무리의 남자들을 내려다 보았다.
'됐다. 우리의 목표는 애초부터 저들 사비니가 목표였다. 절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저들을 공손히 축제 마당으로 안내하여라. 어떻게 하든지 저들을 죄다 흩어지게 만들어서 먼저 온 시에니넨스 부족이나 크러스투미니 부족이나 엔테마네이트 부족들과 섞여지게 만들어야 한다. 모닥불을 밤새 활활 타오르게하고 밤새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게 하여라. 모두 마시고 춤추다가 취해서 내일 날이 환하게 밝기 전에 모두 쓰러져 잠들게 만들어야만 한다. 알겠느냐?'
로물루스는 환한 모습으로 달려나가 먼길을 달려온 타티우스와 그의 부족을 환영했다.
팔라티노 언덕에 대낮처럼 환하게 모닥불이 여기저기 피워져 올랐으며 춤과 노래가 울려 퍼졌다.
라틴족이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기일을 맞아 테베가 유역에 흩어져 살고있던 여러부족을 초대했던 것이다.
추측을 전제로 당시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나의 관점에서는 라틴족이 처음에는 분명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분명하게, '테베강가에 버려졌던 쌍둥이 형제를 늑대가 거둬들여서 팔라티노 언덕에서 다른 늑대들과 함께 늑대 젖을 먹여서 키웠다' 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이후의 로마역사가 흐지부지 사라졌다거나 별볼일 없는 그저그런 정도의 국가로 내려왔다면 이 정도의 건국신화쯤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통털어서도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로마에게는 그 이상의 명분과 정통성이 반듯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차후에 늑대에게 거둬들여지기 전의 핏줄의 역사가 첨가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흔하게....... '그럴싸한 정통성 창조'의 수순이 뒤딸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로마의 탄생'에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정통성을 창조하는 마당에 새롭게 시작한 초기 역사의 합리적이면서도 정통성에 입각한 스토리를 꾸며서라도 팍 팍 그럴싸하게 삽입시키는 행위 또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라는 것에의 접근을 가급적 보다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아주 너른 시각으로 조심스럽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이 말은 모든 긍정정 부정적 가능성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로물루스와 레물루스가 이끄는 라틴족이 기원전 753년에 불쑥 나타나 테베강가 팔라티노 언덕을 차지하고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중부를 가리키는 테베강 유역의 '라치오 지역'에는 이들에 앞서서 이미 카이니아 부족, 시에니넨스 부족, 크러스투미니 부족, 엔테마네이트 부족들이 먼저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존의 부족들은 느닷없이 강인한 체력을 갖춘 거의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불쑥 나타난 이들 이방인에게 심각할 정도로 경각심을 갖추게 되었고, 이는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여 라틴족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연합부족은 모두가 라틴족과의 교류를 꺼려하였으며 사비니족의 경우는 라틴족과의 경계쯤에 목책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전승으로 미루어보자면 로물루스가 이끄는 라티니족은 어떤 이유에서건 아이들이나 여자나 노인 등의 부족민이 없이 전투력과 노동력을 갖춘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불쑥 팔라티노 언덕에 등장한 것이 분명하다.
이탈리아 반도의 고대사에 근거하면 이 당시에(로마의 탄생보다 1백년 정도 앞서서) 테베강 이북에서 북쪽 롬바르지아 지방의 밀라노 인근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에 '에트루리아'라는 고대 국가가 번영을 구가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에르투리아는 로마건국에 1세기나 앞서서 이미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라틴족은 이탈리아의 북부이거나 혹은 주변국가에서 등장하였다가, 국가로서의 제도와 체제와 군사력을 갖춘 에트루리아의 공격에 쫓겨서 남족으로 내려와 정착하였을 수도 있다. 또한 여기 테베강 유역에 먼저 거점을 확보한 여러부족들은 에트루리아라는 도시국가에 속한 부족연맹체로 볼 수도 있다. 라틴족을 향해서 분명 그들은 연맹체를 구성해 대항했기 때문이다.
팔라티노 언덕을 차지한 라틴족은 끊임없이 주변의 부족들에게 교류를 요청하였다. 물자 교환도 요청했다. 하지만 언제나 거절 당했다. 라틴족이 부족연맹체에게 호의적 반응을 얻어내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쯤에서 레물루스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진다. 로물루스와 레물루스는 부족이 체계를 잡고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부터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했다. 권력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로물루스는 쌍둥이 형제 레물루스를 직접 자기손으로 죽이면서부터 라틴족은 한 명의 리더가 이끄는 단일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부족의 매래와 성장을 위해서는 부족 구성원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해 졌다. 사냥도 싸움도 농사도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로만 구성된 라틴족에게는 종족을 생산하고 늘려가는데 필요한 여자가 없었다. 라틴족은 여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의 연합부족체는 최소한의 교류를 허락했을 뿐, 물류나 자원 교환을 허락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우기 여자는 사고파는 물건이 더더욱 아니었다. 교류가 없으니 몰래 꼬득여서 데려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유독 사비니부족에는 여자가 많았다.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거기다 하나같이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결국 라틴부족의 미래를 위해서 로물루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족의 축제일에 로물루스는 주변 부족연맹체에 정중하게 초대장을 보냈다. 여기에다 은근하게 무력을 통한 압박의 뉘앙스를 양념처럼 더했다.
모든 부족이 어쩔 수 없이 참석에 동의했고, 만약의 사태를 우려하여 부족 내의 여자들은 모두 제외시킨 채 건장한 남자들만 모두 데리고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독 사비니 부족만은 끝까지 참석을 거부했다. 로물루스와 라틴족으로서는 이 거창한 행사의 목표가 오로지 사비니족에게만 한정된 음모였음에 말이다. 참석을 허락한 부족들이 거듭 동참을 요청해 오기에 이르자 사비니부족의 티투스 타티우스 족장으로서도 더는 거절할 명분을 잃고 말았다. 하여 해가 질 시점에서야 부족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팔라티니 언덕에 오게 된 것이다.
아무런 의식이나 제재나 조건이 없었다. 그야말로 오로지 진탕 먹고 마시고 춤추기 위한 한바탕 광란의 축제가 벌어졌다. 먼동이 트고 햇쌀이 뜨겁게 대지를 다시 덥히고 있을 때까지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와 여러 부족장들과 축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심한 숙취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축제의 환희에 도취되어 광란의 춤에 빠져들고 있었을 때...........
한 무리의 괴한들이 보초들의 감시를 지나 사비니마을 안으로 몰래 잠입하고 있었다. 이윽고 괴한들에 의한 약탈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정작 사비니족을 지켜왔던 건장한 남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팔라티노 언덕에서 축제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나절 동안 사비니 촌락은 이비규환 지옥이었다. 마을은 불타고 촌민들은 살해 당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보석과 무기와 식량과 가축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특이하게도 성숙한 서른 명의 여인들만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라진 여인들 중에는 사비니 부족장 타티우스의 딸 헤르실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출가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가 되어서 돌아 온 타티우스의 외동딸이었다.
부족으로 돌아 온 타티우스는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되었고, 모든 부족연맹체에도 사태를 알렸다. 해답은 뻔했다. 안하던 짓을 벌인 라틴족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로물루스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든것을 부인했다. 자기 부족 공동체의 모든것을 오픈했다. 조사자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철저하게 조사를 벌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30 명의 과년한 처자들만 골라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의심은 당연했으나 아무런 물증이 없었다.
이를 빌미로 라틴족과 부족연맹채의 갈등은 더욱 심각하게 대결로 치솟아가게 되었다.
사소한 마찰의 결과로 카이니나 부족이 팔라티노 언덕으로 쳐들어 갔다. 하지만 이미 튼튼하게 방어진을 구성해 놓았던 로물루스는 쫓아나가 카이니넨스 부족장을 단칼에 살해해 버리고는 이내 여세를 몰아 카이니아까지 쳐들어가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전리품을 앞세우며 당당하게 귀환한다. 이어 연맹체였던 안테마네이트에 항복할 것을 통보하고 응하지 않자 쳐들어가서 점령해 버렸다. 여세를 몰아 쿠르스투미니도 점령해 버렸다. 점령군은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여 버렸다. 포획된 여자들은 늪지를 지나 먼 곳의 안테름내와 크러스트투메리움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사비니에서 사라졌던 여인들이 아이들을 기르며 살고 있었다.
라틴족과 사비니족 간의 숙명적인 대결만이 남았다.
3년 동안 적지않게 세력확장을 이룬 라틴족이었으나, 본래부터 부강했으며 에트루리아라는 도시국가의 속국으로 배후에서 지원을 받고있는 사비니는 결코 호락호락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더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all or nothing' 뿐이었다.
노련한 타티우스는 젊고 잘생긴 부하로하여금 라틴족의 영지인 팔라티노 언덕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카피돌리아 언덕에 설치된 방어성채의 책임장수인 타르페이우스의 딸 타페이아를 유혹하여 성문을 열게하고 기습을 통하여 점령했다. 사비나 군대는 문을 열어준 타페이아를 과거에 대한 복수로 칼로 찌르고 바위위로 내던져 버렸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던 로물루스가 날이 새면 호위대만 거느리고 카피돌리아 성채로 와서 함께 전장으로 나설 예정이었다. 라틴족의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로물루스가 죽게되면 라틴족의 승리와 미래는 절대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카피돌리아를 기습으로 점령하고 승리를 목전에 둔 타티우스의 수하중에 포로들을 통하여 여인들이 잡혀있는 지역을 알아낸 병사가 있었다. 그는 서둘러 달려가 부족장의 딸 헤르실리아를 구출하여 전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는 밤을 달려 크러스트투메리움으로 잠입하여 헤르실리아를 만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정황을 세세하게 설명하였다.
잠시 깊은 고민에 빠지던 헤르실리아는 밖으로 뛰쳐나갔고 라틴족의 호위군사를 소리쳐 불렀다.
밤길을 달려 온 사비니 군사는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날이 밝았다.
수십명의 호위군만 거느린채 로물루스가 마침내 카피돌리아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장한 사비니의 보초병들이 목책을 열어 주었다. 로물루스 일행이 천천히 성채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호위군의 하나가 오늘따라 마주치는 보초들 하나하나가 모두 초면이라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소리쳐 이 이상한 느낌을 전했고 로물루스의 행군은 멈추어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사비니 군대가 쏟아져나와 로물루스 일행을 에워싸끼 시작했다.
말들이 놀라 날뛰면서 굉음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칼들이 부딪치고 피오 함께 군사들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승리를 자신한 타티우스가 전투를 끝장내기 위하여 칼을 뽑아들고 로물루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사비니의 궁수부대가 활끝을 로물루스에게 겨누기 시작했다. 로물루스의 표정에 짙은 절망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서로 엉켜서 칼부림이 난자하고 있는 사움터 한가운데로 한 무리의 정체모를 사람들이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비명 소리에 가까운 절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그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던 사비니의 여인들이었고, 맨 앞장을 선 여인은 다름아닌 타티우스의 외동딸 헤르실리아였다. 그녀의 손에는 사내아이가 하나 끌려나오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타티우스시여. 여기 당신의 외손자가 있나이다. 로물루스를 죽이시려거든 저와 아이를 먼저 죽이십시요.'
'로물루스 나의 남편이여. 어찌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내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와 아이를 먼저 죽이십시요.'
로마 건국史는 이 사건을 로마가 부족집단에서 고대 도시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이 소재는 르네상스와 그 이후의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좋은 소재로 받아들여 진다. 문학과 인문학 차원에서도 문명의 발달과 여권 내지는 여성의 존엄성과 당당하고도 활발한 역활에 대해서 현대에까지도 깊은 관심과 작품 소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헤르실리아의 중재는 성공했다.
라틴족과 사비니족 간의 전투가 멈췄다. 두 부족은 하나로 합쳐졌고, 합쳐진 부족 공동체는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공동 지베체재로 전환되었다. 이는 타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젊은 로물루스가 이런 결과까지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타티우스 사후엔 부족체는 당연히 로물루스가 통치하는 라틴부족 중심의 도시국가로 성장하게 되니까 말이다.
헤실리아의 중재로 전투가 끝나게 되자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러 발길을 달려갔던 병사가 물었다.
'헤실리아는 이제 누구의 집으로 가야 합니까?'
그러자 촌각도 다투지 않고 타티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딸은 당연히 타티우스의 집으로 간다. 남편의 집으로 가는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절차에 따라 별도의 날을 잡아서 보낼 것이다.' 라고 말했고, 로물루스도 이에 동의 했다. 헤실리아와 아이는 타티우스의 집으로 향했다.
이 사건을 기원으로 로마인들에 의해서 새로운 결혼식 풍습이 탄생하였다. 날을 택해서 결혼식이 거행되면 신부의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마지막 행진을 한 후에 신랑에게 인도하는 관행이 생겨났으며, 이를 '탈라시우스(Talasius)' 라고 부른다. 탈라시우스가 없는, 몰래 꼬득여 도망치거나 납치를 통한 결혼은 무효라는 의미로 해석함이 옳지 않은가?
풀르타르크와 키케로는 이 '사비니 여인의 강탈' 사건을 로마 건국의 초석이자 위대한 결정이었다고 추켜 세웠다.
과연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필연적인 사건이었을까?
얼핏, 로마인들이 주장했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가 엿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로마에 복종하면 위대한 로마의 보살핌 속에서 아무런 걱정꺼리가 없다. 로마가 모든것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로 내세우던 (로마의 평화)는 구호가 아니라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무엇이 로마로 하여금 저런 구호를 자신있게 호언장담할 수 있을만큼 무한한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것일까? '팍스 로마나'에는 정말로 피지배계급(속국)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전제로 한 약속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 좀 해 보자. 로마가 예속된 국가나 민족(식민지)에게서는 과연 무엇을 얼마나 요구하였는지를........
덧붙여서, 고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는 '로마가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것이 신이 로마에게 부여한 운명' 이라고까지 극한으로 과장하고 '로마의 정복에 의해서 세상은 평화와 자비를 얻을 것' 이라는 엄청나게 과대망상적인 허상을 앞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여기의 이 '베르길리우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 젖을 먹고 성장한 로물루스에 의해서 시작되는 로마건국의 신화 위에다가,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끔 실로 어마어마한 전설을 꾸며서 덧붙이는 위대한 창조(?)를 더 한다. 늑대젖을 먹고 겨우 생명을 부지한 로물루스가 한참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이스의 뼈대있는 핏줄의 후손으로 신분세탁을 하게되는 것이다. 이 신성한 '베르길리우스'의 로마제국 정통성 확보와 창조의 영역에서 탄생한 것이 (트로이에 마지막 핏줄 아이네이스) 이다. 로물루스 앞 전의 건국신화는 기회를 보아서 다시 거론하기로 해야겠다.
이것은 허구이며 허상이다. 신화나 전설로 얼머부릴 이야기 소재가 결코 아니다.
'로마인들은 약탈하고 살해하고 강탈(강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를 평화를 전면에 내세운 자랑스러운 제국의 역사라고 정당화 시키고 있다. 이는 역사의 황폐화이며 정의의 왜곡이며 인간 존엄성의 말살이다'라고 타키투스는 비판했다. 그러자 피카소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와 문학가들이 이 비판에 열렬히 동참하기 시작했다.
준엄한 역사의 공정한 심판이 내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일련의 사단이 겨우 반경 1km도 안되는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돌리노 언덕 사이에서 벌어졌던 고대의 전설이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는 이 고대의 작은 사건을 로마제국의 시작으로 가는 긴 여정의 출발에서 발생했던 실로 엄청난 의미와 뜻을 담고있는 소중한 역사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이 곳의 언덕 사이에는 습지와 늪이 거의 전부였다고 한다. 라틴 부족은 테베강변의 7개의 언덕으로 구성된 분지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그중에서도 자기 부족의 기원과 연계해 팔라티노 언덕을 신성한 지역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다보니 당연하게 유일한 여유 공간인 습지와 늪을 매립하였고 그 위에다 로마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것이 '포로 로마노(Roman Forum)' 이다.
팔라티노 언덕의 라틴부족이 세력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언덕은 비좁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이들은 언덕아래의 너른 늪지를 매립을 통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도시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포룸은 그저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의 중심공간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고 생필품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도시 중심의 시장은 사람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행사를 치룰 수 있는 광장으로 성격이 바뀌어 갈 즈음에 라틴 부족은 하나의 도시국가로 성장 발전해 나갔으리라. 국가는 통치자 외에도 통치행위를 담당하는 부서와 건물이 필요하고, 구가를 지탱하는 군인을 양성해 상주시키는 장소도 필요하고, 신을 위한 신전도 필요해 졌다. 이제 매립된 터전은 궁전과 관공서와 시장 형성을 중심에 두고, 행사와 공공 연설과 선거와 재판을 여는 공공장소 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거대한 시장이 서고 여러개의 신전이 들어섰다. 전쟁에 나가 승리한 군인들은 이 도심의 한복판을 씩씩하게 행진하면서 꽃과 포도주를 선물 받았다.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이 만들어졋고, 번잡을 벗어나 검투사들의 경기를 즐기는 원형경기장과 대전차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도심을 한발짝 벗어나면 초대형 공중목욕탕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연이어진 로마의 승리와 함께 이제 포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며, 세계를 다스리는 핵심이 되었다. 승리의 행렬이 끊이지를 않는 로마제국의 심장이 바로 '포로 로마노'인 것이다.
티투스 개선문을 등지고 몇 발자욱만 언덕 아래로 옮기면 쨘 하고 로마제국이 느닷없이 시야가득 펼쳐지기 시작한다.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여 제국을 완성했고 그 제국의 힘은 모두 이곳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힘이 이룩한 모든 결과물이 바로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포로 로마노는 곧 로마였고, 로마가 곧 포로 로마노 였다.
가진 자(승리자)가 제시하는 평화와 약속은 모두 거짓(허구)라는 사실을 역사는 구구절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결국엔 그렇게 귀결되었음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강자는 거짓 평화를 약속하고 약자는 넌즈시 그 약속에 감사하면서 또 속아넘어 간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이제까지의 오랜 인류역사를 통털어서도, 더하여 인류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더할 수 없이 멋진 유혹으로 치장된 가장 달콤하고 위대한 위선'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 위대한 약속의 결말은 지금........... 폐허로 잔해만 남아있는 '포로 로마노의 모습' 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흔하게들 말한다. '인생이 뭐 별거야?' 라고.........
역사도 그렇다. '역사가 뭐 별거야? 어차피 영원한것은 없는것을..........'
그래도 말이다. 어떤 경우에건 어떤 결론에서건............ '의미가 있는 것' 과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있는 사람이 바로 나 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는, '옳은가 그른가?' '과연 모두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하는 정도의 고민 정도는 해본 후에 선택할 수 있는 (의미)를 말한다.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고, 상념의 나래를 무한정 펼쳐보기에 더할나위없이 딱 좋은 장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포로 로마노이지 싶다.
BC.753년 로물루스가 이끄는 라틴족이 테베강 유역의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하면서 고대로마가 처음으로 역사의 장에 등장하게 되었다. BC.509년까지 7왕이 이어져 내려가면서 다스리던 시기를 로마왕국의 시대라고 부르며 당시의 로마 왕국은 고대 그리이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트 등의 도시국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정치체제가 로마 공화국이다.
로마 공화국의 시기는 온통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의 시기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것이다. BC.27에 이르기까지 로마 공화국이야말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와 법률체계를 보다 확고히하고 발전해 나가면서, 또한 다양한 형태의 정치 사회발전을 실험해 본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로마역사가 정말로 전통을 고수한 로마다운 로마가 아니었을까?
7왕의 시대를 지나면서 로마는 어느 한 사람의 왕이 전권을 가지고 휘두르는 독재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이 되었다. 도시국가로 형성된 마당에 여전히 라틴족만이 왕위를 고수하고 라틴족만이 주요요직을 독점하고나니, 부족 연맹체의 이미가 퇴색하였고, 이는 곧 반목과 국력의 저하로 드러났다. 이리하여 채택된 것이 공화정이다. 각 부족을 대표하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설득과 타협과 투표를 통하여 모든 부족에게 공히 유익한 안건을 채택하는 아테테의 민주정치와 비슷한 덕목을 갖추기 시자가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며, 드러난 결과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려는 지도자들이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제도라 할 수 있었다. 이민족에게 철저하게 국가가 유린당한다는 것이 어떤것인지 로마가 뼈져리게 아픈 경험을 한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도시국가 로마는 우선 앞선 강대국인 에트루리아와 전쟁을 벌여 눈부신 승리를 쟁취했다. 그 승리에 마냥 취해있던 시기에 북방의 야만족인 켈트족이 로마를 유린하였다. 그 피해가 어찌나 심하였던지, 부서진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만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고통이 컸던 때문일까? 켈트 사태 이후의 로마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이상 부족간의 구분이나 차등은 있을 수가 없었다. 로마라는 공동의 책임과 공동의 목표아래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최우선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고, 다음이 법률과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이 로마인들의 안정과 행복추구였다. 아울러 이 모든 준비가 목표로 하는것은 오로지 정복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장과 풍부한 전리품 확보였다. 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로마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했다. 이것이 곧 '팍스 로마나'라는 참으로 멋진 캐치프레이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켈트족에 대한 보복은 곧 북부유럽과 북서유럽의 원정으로 이어진다.
따뜻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린 로마는 이내 시칠리아를 탐내게 되고, 그 결과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벌이는 3차례의 포에니 전쟁으로 화려하게 수를 놓게 된다.
크라쿠스 형제가 등장하고 술라와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키피오가 나오고 품페이우스가 등장하자 뒤질세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삼두정치는 로마정치체계를 가장 안정적인 평화의 시대로 이끌어갈것 처럼 보였지만,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고 싶은 카이사르의 생각은 달랐다. 카이사르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다는 부루투스는 결국 카이사르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이어서 아우쿠스티누스가 등장하게 되지만, 그의 등장은 곧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뜻한다.
씨저가 알살되고 아우쿠스티누스가 황제에 즉위하면서부터 로마는 '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BC.23년 경에 벌어진 일이다. 곧 로마제국의 탄생이기도 하다.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된다.
AD.395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됨과 동시에 로마제국든 동.서로마로 분리된다.
동로마는 소아시아지역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수도를 이전하고 떠났지만, 서로마는 여전히 로마에 남았다.
불과 15년이 지난 AD.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
딱 여기까지였다.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마의 멸망까지가 곧 '포로 로마나(Roma Forum)'의 역사였다.
이 기간동안의 모든 로마의 역사가 이곳에서부터 생겨났고 이곳으로 귀결되었다.
포로 로마나의 운명이 곧 로마의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의 로마는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노플의 몫이었고, 그것들은 '비잔틴'이라 따로 구분짓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로마는 여기까지였고, 여기는 포로 로마노를 가리킨다.(서기 410년 까지다)
포로 로마노는 처참하게 짖밟히고 파괴 되었다. 로마도 그렇게 파괴되어 갔다.
로마 공화정 초기의 켈트족 침입은 로마로 하여금 군국주의적인 정치군사 체제를 확립하도록 강요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프랑스 전래동화 (아스테릭스)에 등장하여 로마군을 농락하는 인물들이 바로 켈트족이다. 국가가 쇠락하고 몰락하면 어떤 결과를 나하게된다는 것을 로마는 켈트족으로부터 일찍 깨우쳤다.
다음이 한니발의 카르타고 였다. 알프스를 넘어 온 한니발은 로마 도시만을 고립시킨채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장장 16년 동안이나 휩쓸고 다니며 초토화를 시켰다. 로마인들은 온통 죽음의 그림자에속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스키피오만이 미래를 꿈꾸면서 한가지 한가지 적들에 대해서 지켜보고 연구를 계속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 바로 전쟁을 준비해라' 라는 속담을 카르타고와의 전쟁 이후 로마인들은 생활화 하기에까지 이른다. 승리만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고, 당연히 승리는 이 세상에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킨다.
하지만, 세상을 정복한 로마는 풍요로움에 젖어 향락에 빠져들었고, 더 이상 적이 없다고 판단되어 군대는 가치를 잃어갔다. 로마의 방어선은 너무나 넓게 세상에 걸쳐져 있고 군대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이제는 절대적인 애국심도 사라졌다. 극동아시아 지역의 추운지방에 살던 흉노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하하기 시작함에 따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발칸반도를 지나면서 게르만족의 일파들은 동고트와 서고트로 나뉘어 민족 대이동을 계속해 갔다. 잔혹한 흉노의 침입에 밀려난 서고트족이 서로마제국에 들이 닥쳤다. 제국의 말기현상이 뚜렷하던 서로마는 이미 항거할 능력을 상실한 후였다. 그들이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하고 방화를 저지르고 도시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훗날 에스파냐의 역사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회(로마카톨릭)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이탈리아 반도 북쪽의 모든 민족을 만족(蠻族) 이라 불렀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이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이 중화권 밖의 모든 민족을 오랑캐라 부른것과 같은 의미이다.
4세기 이후의 교회는 로마의 기득권층에 올라있었고, 로마의 시각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시기였다. 물론 교회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이제는 로마에게서 쫓겨다니고 잡혀가고 살해당하는 지하교회(카타콤베) 교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 교회의 생활은 로마제국 기득권자(귀족. 부호)들과 같이 식사하고 같이 자유와 부를 누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교회는 이미 로마 자체가 되었거나 로마보다 더 한 위치에 올라있었다.
교회의 눈치와 판단이 빨랐던 것일까?
동.서 로마의 분리는 교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지던 시대였다. 거기에다가 이내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황권을 능가하는 교권을 항상 앞세우려는 교회(로마카톨릭)에게 심각하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황제의 우위에 존재하고 싶었다. 견디다 못한 황제는 제국을 둘로 나누면서 자신의 제국인 동로마에 로마카톨릭이 아닌 그리이스 정교회 중심의 새로운 기독교 세력을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그리이스 정교회 수장(교황)에 대한 서임권이 황제에게 있다는 전제하에 생겨난 새로운 정책이었다. 서로마에서 교회는 황제의 위에 서지만, 동로마에서는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를 임명하였다.
그런 와중에 동.서 로마로 분리되었고, 동로마는 떠났고 서로마는 고트족에 의해서 멸망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무주공산 고트족의 세상이 되었다. 교회(로마 카톨릭)은 눈 앞의 미래도 기약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연속되어 일어났다.(이런게 기적인가? 신의 축복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이 당시의 서고트족이 비록 어리숙한 초보단계이긴 하였지만.......... 이미 적지않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단 사실이다.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서고트족은 이어서 갈리아 지방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영역으로 몰려갔을 때는 고트족의 지배층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 기독교 집단으로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누가 유목민처럼 옮겨다니는 야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했던 것일까? 서로마제국을 침공했을 당시의 고트족의 기독교적 신앙 상태는 어떤것이었을까? 갈리아 기록에는 당시의 고트족 통치자들이 먼곳으로 기독교 공부를 하러 찾아가기도 했고, 전쟁의 와중에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기적은 교회(로마카톨릭)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효과를 낳았다.
로마를 초토화 시킨 고트족이 교회(로마카톨릭)에는 어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크게 깨우쳤고,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서였을까?
거기다가 오랜세월 인류 역사와 문명을 송두리째 차지했던 제국의 중심인 로마를 차지하고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고트족은 정착할 기미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흉노족이 곧 뒤따라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 이었을까? 웬만큼의 약탈이 끝나자 고트족은 밀물이 빠져나가듯이 삽시간에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해가기에 바빴다. 유럽의 서쪽 가장 끝까지 무작정 앞만 내다보고 도망치는 꼴이었다.
로마만큼 도시로서 국가로서 모든 기반을 갖춘 성채이자 요새가 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로마로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지구의 끝까지 달아나고자 했다면........ 그것도 로마를 삽시간에 무너트리는 군사력을 가진 고트족이 말이다........ 도대체 흉노는 어떤 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일까?
초토화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모두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 한복판에 교회(로마카톨릭) 하나만이 달랑 남겨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암암리에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색이 카타콤베에서 꾸었던 초대교회로의 회귀였을까? 아마도 절대 아닐것이다. 이미 부와 권력의 맛을 본 로마제국 방식의 교회로의 복구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트족이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흉노족도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이미 멸망해버린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선 동로마의 시기였다. 동로마는 흉노를 구스르고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을 침공한 몽골이 로마을 위협했고, 이어서 소아시아에서 시작된 오스만 투르크(이슬람)이 꾸준히 로마를 위협했다. 프랑스가 영국이 독일과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부터 끊임없이 로마를 침범했다. 종국에 나폴레옹은 로마를 점령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감행했다. 제 1.2차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는 그릇된 선택을 하게되었고, 그 댓가는 엄청나게 가혹하게 돌아왔다.
이제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옛 로마제국의 위용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포로 로마노를 거닐면서 그러했던 지나간 로마의 역사와 로마인들의 영화를 하나씩 하나씩 어루만져 본다.
상업의 발달로 인한 도시문화의 발달은 사람들의 생활문화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다.
부를 소유한 유럽의 지식인들은 너도나도 성지순례를 꿈꾸데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성지순례가 꼭 소아시아지역의 멀고 먼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를 역사상 최초의 성지순례자로 꼽고 있듯이, 적어도 중세 까지나 나아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예루살렘으로의 성지순례는 특별한 지위나 엄청난 부를 소유한 아주 특별한 지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세상은 나름대로 풍요로와졌고, 여유가 생긴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성지순례를 꿈꾸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갈 수 없는 그들에게있어서의 성지순례는 기독교의 중심이자 신흥성지인 로마(교황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가 점차 발전하여 유럽 전역에서 이름난 성지를 어디든 걸어서 찾아가는 성지순례의 붐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대표적인 것이 '산티아고 성지 순례'라 하겠다. 산티아고 성지순례의 경우만 해도, 스웨덴이나 러시아에서 출발하는 코스도 있고, 포루투갈에서 출발하는 코스도 있고, 어디에서든 그 길은 열려있고 가능한 것이다. 꼭 프랑스 남부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산티아고까지 가는 것만이 성지순례인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무튼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 로마로 성지순례를 너도나도 떠났다.
중세에 성공한 유럽의 지식인이 이제 막 로마에 도착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위대하고 찬란한 로마제국의 위상이 그대로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 제국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성스러운 기독교의 절대성지인 교황청을 고대하고 있었다.
로마에 도착한 그들의 앞에 펼쳐진 꿈에나 그려보던 로마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포로 로마노는 모두 사라졌다.
듬성 듬성 바위덩어리들이 나뒹굴고 기둥 몇 개만이 남아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돌더니 주변으로 잡초가 무성한 황량한 들판일 뿐이었다. 사방으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신전들 사이의 공터에서는 소를 사고파는 시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로마라고 기억될 수 있는것은 벌판 저너머 끝자락에 을씬년스러운 모습으로 처량하게 서있는 콜로세움이 전부였다.
AD.410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부터 13세기에 들어서 지극히 일부의 새로운 문화사조가(르네상스) 꿈틀거리게 되고, 소수의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이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게되고, 초기 로마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될 때까지 장장 800년 이상을 포로 로마노는 버려지고 외면당해 왔다. 이곳은 로마 역사의 공동묘지였고, 그나마 돌보는 후손들마저 모두 끊어진 역사의 기억에서도 사라져간 망각의 들판이었을 뿐이다.
성지 순례를 왔던 유럽인들도 그저 무심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 테베강을 건너 교회로 몰려갔다. 그곳엔 새로운 로마가 건설되고 있었다. 로마는 어디론가 모두 사라졌고 그 로마의 기반 위에 바티칸(로마 카톨릭)이라는 위대한 또 하나의 제국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바티칸에게 있어서 이제 로마는 차마 모두 떨쳐내버릴 수 없는 귀찮은 구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티탄의 시야에는 오로지 정적인 그리이스 정교회와 그 배경에 있는 비잔틴 제국이 보일 뿐이었다. 바티칸의 열망과 목표는 그 어느때 보다도 확고하고 분명해졌다.
하지만 지극히 소수의 지성인들이 사라진 로마의 잔해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라진 과거 로마의 위대함 속에서 미래를 향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싶었다. 거기에는 적지않게 권력지향적으로만 내닫고 있는 바티칸에 대한 반감도 적지않게 깔려있었다.
지난 여행에서는 세베루스의 개선문 옆의 계단을 이용해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올라갔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보니 출구가 잠겨있다. 이 계단의 매표소를 통해서는 로마 포룸에 입장만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건너다 보이는 베스타 신전의 뒷쪽 현지인 거주지역쪽으로 출구만 전담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로 나가면 언덕을 비스틈히 지나서 아래쪽의 '진실의 입'을 향해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의 입은 다른 스케줄과 연계하려던 참이었다.
하여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중간쯤인 씨저 신전 옆으로 난 출입문을 찾아 발걸음을 되돌렸다.
'성스러운 길(Via Sacra)'을 걷노라니 분명 지금 나는 고대 로마의 시민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에야 콜로세움에서 에마뉴엘 2세 기념관까지 곧게 왕복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뻥 뚫려있지만, 20세기 초까지 이곳은 폐허로 변한 유적지와 현지인 주거지가 혼재해 있었다. 이 도로 양쪽의 주변 모두가 비록 페허로 변해 있었지만 엄연히 '포로 로마노' 였던 것이다. 도로라고는 티투스 개선문에서 세베루스 개선문 사이로 뻥 뚫린 포장도로인 '성스러운 길'이 전부였다. 또한 이 길은 멀리 북쪽의 포폴로문까지 일직선으로 연장되어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을 이 광장에서 출정식을 가졌고, 시민들의 환호속에 전장터로 향했다. 승리와 함께 전리품을 가득싣고 또다시 이 길을 통해 개선행진을 했던 것이다.
'포룸(Forum)' 이란, 로마시대 신전과 공공건축물 사이에 난 광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와 개인의 생활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하고 토론을 벌이던 열린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다보니 이 주변으로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포룸은 이런 다각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고대 그리이스의 '아고라(Agora)'가 그 기원으로 보고있으며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성스러운 길' 양쪽으로 콩코르디아 신전, 셉티무스 세베르스 개선문, 원로원, 라피스 니제르, 사투르느스 신전, 포카황제 기념 원주, 에밀리아 바실리카, 티투스 개선문, 베스타 신전, 폴록스 신전, 줄리아 바실리카, 시저 신전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나 콜로세움 앞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흔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로마 포룸' 이라고 여기는 지역의 풍경인 것이다. 그 유적들 사이로 난 유일한 도로였던 '성스러운 길'이 보인다.
콜로세움에서 에마뉴엘 2세 기념관 사이로 뻥 뚫린 도로는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에 파시스트 독재자 뭇솔리니가 옛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속에 '제국의 길(Via dei Fori Imperiali)'을 개설하여 생겨났다.
로마시대를 상징하는 많은 황제와 영웅들의 청동조각상이 늘어서 있는 제국의 길에서 내려다 보면 로마 포룸 전경이 대부분 세세하게까지 보인다. 하지만 로마 포룸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여행자가 서 있는 도로 위와, 반대쪽에 너른 공터처럼 놓여있는 움푹 들어간 옛 유적지까지 모두가 '로마 포룸'의 지역이다. 뭇솔리니가 제국의 길을 만드느라 로마 포룸의 절반 이상을 갈라놓고 방치해 버렸던 것이다. 엄청난 파괴가 자연스레 뒤따랐을 것이다.
트라얀 황제 시장과 포룸, 네르바 포룸,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던 아우쿠스트스 포룸 등등이 모두 로마 포룸의 일부였던 것이다. 개대하고 웅장했던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지역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위대한 로마는 지금 이렇게 분리되고 방치되고 여행자의 시선으로부터도 한참이나 비켜나 있게된 것이다.
거듭 반복하는 말이지만 고대로마왕국, 로마공화정, 로마제국 모두가 여기 로마 포룸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것이다. 로마는 곧 로마 포룸이었고, 로마 포룸이 곧 로마의 역사였다.
동로마가 비잔틴으로 분리되어 나가고, 서고트족이 로마 포룸에까지 침입하면서 로마의 역사는 단절되었다.
이때부터 로마라는 영토위에는 아이러니한 과정을 겪으면서 '로마 카톨릭(바티칸)'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이를 '중세시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인류 문명사가 약 1쳔년 뒤에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새대적 사조를 부르기 전까지 오로지 로마 카톨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포로 로마노는 페허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캄피돌리아 언덕 너머로 교황청에 시절로 파견된 베네치아 대사관이 들어서는 바티칸의 시대가 이어지고, 다시 찬란한 르네상스가 미켈란젤 등을 통하여 팔라티노 언덕에 다시금 개혁의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제국의 길에는 수많은 여행객들과 현지인들의 발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곳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계속하고 거리의 화가들이 작품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혼자서 핑크 플로이드의 힛트곡을 멋지게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하던 검은 가죽코트의 멋쟁이 악사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로마 거리음악의 랜드마크 같은 아저씨가 아마도 오늘은 판테온 앞에 자리를 잡고있나 보다.
그래피티 화가의 놀라운 손놀림 솜씨에 태어난 (흰 족제비를 안고있는 여인)을 보고 있노라니 커다란 감동으로까지 느껴진다. 로마의 길거리에서 레오나느로 다빈치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다빈치의 작품중에서 유독 이 그림에 애착이 간다. 다빈치가 첮재이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의 화가라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의 실제 미술작품은 몇 점 되지 않는다. 워낙 다방면에 출중한 천재였기에 본래 직업인 그림을 그릴 시간마저도 부족함 때문이었으리라. 다빈치가 평생동안 그렸던 여인의 초상화가 4점에 불과한데, 그 중의 한 작품이 이렇듯 쉽게 우리를 찾아왔다.
'헬로. 레오나드로.......... 반가워요.'
제국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으로 베누스 베네트릭스 신전과 성녀 마르티나 성당을 돌아서 왼편으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게 된다. 로마 포룸을 한 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와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향하는 뒷길이라 할 수 있다.
로마 포룸의 위용에 범접 할것만 같은 마르티나 성당을 지나면 상아색 빛을 발하는 아담한 교회가 하나 서 있다. '산 쥬세페 팔라그나미 교회' 이다. 이 교회의 담벼락 옆으로 포로 로마노에 입장만 할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여기 지극히 평범한 이 교회가 이렇듯 역사적인, 혹은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장소에 놓이게 된 이유가 있다. 이 교회의 아랫쪽 지하에는 로마시대부터 아주 유명한 '마메르틴 감옥(Mamertine_Prison)'이 있던 장소였다. 더더욱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에 왔다가 붙잡혀 수감되었던 장소인 것이다. 성지 순례를 위해 로마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포로 로마노는 그저 인증샷을 찍으면 그만인 곳이겠지만, 포로 로마노 한 구석에 놓여진 이 작은 교회의 어두침침한 지하 공간은 지극히 성스러운 공간인 것이다. 그런 그들의 믿음과 신앙관에 대해서는 존경과 갈채를 서슴치 않고 보내고 싶을 뿐이다.
다만....... 이곳이 그만큼의 절대성지라는 인식하에는....... 석연치 않은 진실이 감추어져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에 아주 조금은 가슴이 알싸해 온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 전도여행은 다분히 추측성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를 정당화 해 준것은 당연히 영화 (쿼바디스) 였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십자가를 두려워 하기에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에 간다.'는 명대사는 그야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보다도 더 위력적이었고 불멸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폴라드인 작가는 허구를 자신의 소설속에 써 넣었던 것 뿐인데 말이다.
성서학자나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대부분 일치한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세상 선교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간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유대성직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내세워 로마법정에 서기 위해서 로마로 압송된다. 압송 과정에서 몰타와 시칠리아를 거치면서 기독교를 전파한다. 한편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 사태로 흔들릴 로마 지하교회를 위하여 서둘러 베드로를 파견한다. 하지만 베드로에 관한것은 거기까지 뿐이다. 바울은 로마법정에 섰다.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로마의 재판기록에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2년여의 가택연금에 처해진 기록이 존재한다. 그 또한 여기까지이다. 당시가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시기였기에....... 결국 로마에서의 바울은 전도를 멈추지 않았을것이고 결국 로마에 의해서 십자가형에쳐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것이 역사속에서는 전부이다. 베드로의 경우는 아예 남겨진 기록이 없다.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하였는지, 박해를 받았는지, 네로 콜로세움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았는지....... 아무런 기록도 흔적도 없다.
오로지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신성화 작업과 정당성 부여를 했다. 여기에서 파생된 개신교도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쿼바디스)라는 영화 한 편이 성경 속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로 진리를 새겨넣어 버렸던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진실이 분명히 있는것일까?
캄피돌리아 언덕의 뒷쪽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포로 로마노는 가히 일품이다.
그러다가 허리가 뻐근해지고 무릎이 시려올 때쯤되면 돌아서서 거대한 골목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골목길의 하늘에는 거대한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할까?
마치 베네치아에서 본 '탄식의 다리'를 연상케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실제로 많이 닮았다.
그렇게해서 광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기마상이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뒷모습으로 말이다......
캄피돌리아 광장은 대단히 유서 깊은 명소이다.
로마의 역사는 그 기원을 팔라티노 언덕에 두고 있었기에 수많은 왕들과 왕족들과 귀족들은 앞다투어 팔라티노 언덕에 궁전이나 별장을 짓고 살아왔다. 정치 권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겐 늘 막연하게나마 어떤 정통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캄피돌리아 언덕(Campidoglio)은 사뭇 달랐다.
7개의 언덕을 기반으로 이룩된 로마에서 가장 한 복판에 가장 높게 우뚝 서있는 장소가 바로 캄피돌리아 였다. 하여 이곳에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된 라틴민족의 정통성을 이미 확보한 단 한 명의 최고통치자만이 이곳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이나 황제만이 이 언덕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사시대 팔라티노 언덕에서 라틴민족을 이끌고 부족국가를 건설한 로물루스는 습진 건너편의 캄피돌리아 언덕에 방어진지(성채)를 건설했다. 여인들을 빼앗긴 사빈느족이 처음 쳐들어 온 곳이 바로 여기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역사에 첫 등장 장면으로 기록되어있다. 새삼 이 언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로물루스를 비롯한 고대로마의 다섯명의 왕은 이곳에 왕궁을 지어 통치를 시작했고, 언덕의 가장 높은곳에 쥬피터 신전을 세웠다. 이는 그리이스의 제우스 신에 해당된다. 기원은 팔라티노였지만, 이제 국가로 발전한 로마에 있어서 정치와 권력의 중심은 캄피돌리아가 된것이다. 로마제국의 전쟁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모든 회의와 의결은 로마 포룸(포로 로마노)에서 이루어졌지만, 어디까지나 최고 결정은 칼피돌리아 궁전의 최고 통치자에 의해서 승인되었으며, 모든 국가의 대사가 궁전 뒷쪽의 쥬피터 신전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곳이 세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5세기 경에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세상의 중심은 소아시아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이제 서서히 로마는 지워져가고 있었다. 대신 테베강 유역의 라치오지역(로마 인근)을 근거로 바티칸(로마카톨릭)이 새로운 역사를 개쳑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커다란 돌무더기로만 남아있던 캄피돌리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름아닌 교황이었다. 캄피돌리아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와 반대쪽으로 바티칸 주재 베네치아 대사관(현 베네치아 광장)이 들어서면서 점차 도시로 번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날 베네치아 대사관을 방문한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 재위)는 대사관 저편의 황량한 언덕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몸소 올라 보았다. 페허로 변한 고대문명 위로 사방으로 펼쳐진 놀라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교황은 이곳을 다시 세속의 로마 중심으로 가꾸고 싶어졌다. 테베강 저편은 신성한 바티칸 제국으로, 이편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융성한 세속의 제국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것이 곧 자신의 업적으로 영원히 기려지리라 생각했다.
마침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희대의 천재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막 끝낸 참이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캄피돌리아 언덕 위에 옛 로마제국의 황궁과 신전 못지않은 관공서와 교회와 광장을 지어줄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캄피돌리아 언덕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대대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다. 총감독은 당연히 미켈란젤로였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캄피돌리아 언덕에 오르는 길고도 멋진 계단이 완성되었다. 그 위에 사각형의 너른 광장을 조성하였고, 광장 주변으로 에워싸듯이 건물을 지었다. 정면에 세워진 세나트리오 궁전은 교황의 별궁쯤으로 시작되었으나, 현재 로마 시장의 집무실과 시의뢰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편의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왼편의 우오바 궁전은 현재 모두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로마시청사로 오르는 알므다운 게단 아래로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앉아있고, 옆으로 이탈리아의 분수나 명소에서 흔한게(?) 만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부조상이 걸려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한결같이 매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이 광장의 포장도로이기도 한 모자이크 바닥은 하나같이 모두가 각진 도형의 연결로 느껴지지만, 모자이크의 지름 크기만큼만 하늘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그것은 하나의 꼭지점이 오로지 곡선의 도형을 그리면서 연속되는, 마치 활짝 만개한 연꼿모양의 도형으로 변모한다. 드론이나 항공사진이 없던 시기에 이런 상상을 시도했던 미켈란젤로에게 절고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이 너른 광장을 모자이크 문양만으로 채워두기에는 너무도 허전했다. 유럽의 대부분 광장엔 반듯이 분수가 놓였듯이, 처음엔 분수를 고려했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고압펌프가 없던 시기에 물을 끌어다가 분수를 쏘아올릴 수는 없었다. 당연히 다음으로 거론된것은 거대한 조형물(조각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미켈란젤로를 살펴보면 또 다시 피렌체의 다비드상 같은 대형 조각을 만들 애초의 생각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이미 오랜 로마에서의 생활에 지쳐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로마를 빠져나갈 생각 뿐이었던 것이다.
텅빈 광장은 무엇으로인가 채워야만 하겠고...... 몇 년에 걸쳐서 대형 조각상을 또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때 누군가가 미켈란젤로에게 귀가 솔깃 할 만한 사실을 넌즈시 건네왔다.
'산 지오반니 인 라떼라노 대성당(San Giovanni in Laterano) 부근의 골목 안쪽에 아주 커다란 청동 조각상이 있습니다.'
귀가 솔깃한 미켈란젤로가 계단을 설치하고 있던 작업장 인부에게 되물었다.
'조각상이라니? 무슨 조각상인가? 누가 만들었는가? 거대한 조각상이 왜 골목 안족에 방치되어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만....... 아주 커다란 청동 기마상입니다. 옛날엔 대성당 광장에 놓여졌던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누가만든 누구의 것인지가 밝혀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하였답니다. 하여 동상 주변으로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다보니 이젠 골목 안쪽에 천덕구러기로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청동이라면 비싼 재료인데 어지 파괴해서 내다 팔지않고 그냥 두었단 말인가?'
'그 또한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저를 길러주신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그 동상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청동기마상이라 전해져 내려왔다고 합니다. 대성당 인근에 놓인 먼 옛날에 교회를 승인해 준 황제의 기마상이었으니 감히 누가 손을 댈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언젠가 어떤 정치가가 와서는.......... 아무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니라 했더랍니다. 그때부터 다시 외면당하고 버려지다시피 하였습니다. 다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감독관께서 한 번 찾아가 보시지요. 그저 뻔한 조각상이 절대 아니올시다. 이놈 말씀을 한 번 믿어보시지요?'
미켈란젤로는 그 길로 인부를 앞세우고 라떼라노 성당 근처로 달려갔다.
엄청난 충경과 전률이 미켈란젤로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랬다. 그 인부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실로 위대한 작품이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수백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모두 해결 되었다. 캄피돌리아 광장에 두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구나..........'
이 청동조각상의 이름은 그냥 '에퀴마니(equimagni)'라 하는것도 무방하겠다 싶어진다.
그리이스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모든 분야에서 앞섰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단 한 분야, 조각에서만은 그리이스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여 로마인들은 이 불가능한 분야에 무분별하게 도전하기 보다는 그냥 지중해 연안 도처에 널려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품들을 가져다가 마치 자신들이 창조한 것인양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일부 지각이 있는 로마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조각 아카데미가 탄생되었고, 이곳에서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을 가져다가 모방하는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수많은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이 절대 원본을 구분하기가 여려울 정도의 탁월한 솜씨로 무수히 복제되어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들에 의해서 로마의 조각이 비로소 눈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각분야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비로소 가지게된 로마제국은 당시까지의 로마 역사에 등장하는 위인 22명을 선정하여 거대한 청동조각상을 제작하였는데, 이렇게 탄생한 22개의 청동조각상을 '에퀴마니'라 불렀던 것이다.
22개의 에퀴마니는 로마제국의 중요도시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1천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21개의 에퀴마니가 모두 소실되었다. 파괴되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단 한 개의 에퀴마니만이 겨우 남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눈에 띄게 된 산 지오반니 라떼라노 대성당 인근에서 발견된 청동기마상이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좀 더 솔직해지자면........ 21개의 에퀴마니를 없앤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로마카톨릭)들이었다. 그들 눈에 고대 로마의 위인들 동상은 모두가 우상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에퀴마니는 철저하게 부서져서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상만은 앞서 말한바 대로 기독교를 공인해 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으로 알고있어서 환란을 겨우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위대한 현자였음에도 기독교를 용인하지 않았고 심하게 탄압했던 황제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동기마상의 주인공은 로마제국 16대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년)'이다. 로마역사를 통털어 5명의 현명한(賢) 군주가 등장하는데, 그들 5현제 중의 한 명이다. 그런가하면 <명상록(暝想錄)>의 저자이기도 하다. 익히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를 아끼고 지원하면서 갈리아 원정을 직접 따라나섰던 황제(리차드 해리스分)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뜻밖의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어 힘들게 옮겨 온 기마상이겠지만, 어찌 생각해 본다면 로마역사상 최고의 현재로 추앙받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애초보터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캄피돌리아 언덕 자체가 로마 최고의 통치자가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궁전과 수호신전이 있던 성스런 공간이었으니까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의 제작자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로마제국 조각공방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캄피돌리아 광장 한가운데 놓여진 기마상의 받침대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만들었다.
국내 케이블 티비의 여행 프로그램들과 훌륭하신 여행사 가이드님들 덕분에 이제 캄피돌리아 광장하면 미켈란젤로를 먼저 떠올리고, 캄피돌리아 광장의 미켈란젤로 하면 너도나도 이구동성으로 (미켈란젤로 계단)을 외쳐댄다.
맞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적어도 대한민국의 이탈리아 여행자들에게 칼피돌리아 언덕하면 미켈란젤로의 계단이 가장먼저 떠오르는 관광명소가 되어 버렸다.
캄피돌리아 광장과 함께 미켈란젤로는 여기 언덕을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함께 만들었다. 하여 미켈란젤로 계단이라고 불리게 된 이 계단의 진짜 이름은 '코르도나타(cordonata)'다.
계단은 걸어서 오르는 사람이 힘들지 않게(말을 타고 오르거나, 가마를 멘 일꾼이 힘들지 않게) 층간의 높이가 지극히 낮은 편으로 만들어 졌다. 유모차를 끌고서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나이도를 갖추고 있다. 아울러 원근법을 역이용하여서 아래쪽 보다 멀리 높은곳의 너비를 차차 넓게 하여서 언덕의 상부가 그리 멀지않게 느끼게끔 일부러 착시현상을 유도하면서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통해야만 오를 수 있는 언덕이 아주 쉽고도 가깝게만 느껴진다.
광장에서 내려다보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으로 말을 끌며 나란히 서 있는 멋진 청년의 거대한 조각상이 양쪽에 나뉘어 서있다. 고대 로마왕국 당시에 주변의 이민족들과 전쟁중에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되었는데, 홀연히 안개속에서 백마를 탄 두명의 청년이 나타나 적군을 무찔러 로마군에게 승리를 안겨주고는 사라졌다. 하여 후대 로마인들은 이들이 유피테르 신의 두 아들 디오스쿠리 형제라 믿게되었고 추앙하게 되었다. 디오스쿠리 형제의 거대한 조각상이 캄피돌리아 광장과 로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캄피돌리아 광장은 급진적인 제국의 개혁을 주장하던 2명의 혁명가가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영업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서민층을 대변하면서 권력자들에게 도전하였다가 귀족들에 의해서 이곳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콜라 디 리엔초는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서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결국 민심을 이반한 민중들에 의해서 이곳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계단을 내려서다 보면 이들의 청동조각상이 옆쪽에 서있다. 아래쪽 초입의 작은 청동상이 특히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데........ 처음 이 동상을 마주치면서 나는 문득 사브나롤라를 떠올렸었다. 나는 지금도 그 동상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지롤라모 사브나롤라가 떠오른다.
왜 그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코르도나타(cordonata)'를 내려서면 저절로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흰대리석의 거대한(세계적 크기) 신전과도 같은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이 엄청난 위용으로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관으로 향하다 보면 지상과 땅속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대 유적이 나타나는데,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실로 어마어마한 빌라나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 역사적인 캄피돌리아 언덕의 기반부에 이정도 규모의 주택단지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은 상당한 지위의 사람들 이었을것만 같다. 이 유적의 잔해들을 헤집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본다면....... 어쩌면 이 캄피돌리아 언덕 아래로 실타래 얽혀있듯이 비빌스런 고대로마의 수수께끼가 감추어져 있을것만 같다. 로마의 멸망과 파괴를 피하려 깊은 지하로 숨어 든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로마가 어디엔가 아직 감추어져 있을것만 같다.
로마 사람들은 위대한 조상들의 역사를 기릴 수 있도록 '영원한 도시'에 걸맞는 현대적인 건축물을 가지고 싶었다. 물론 속으로야 로마제국 이후, 처음으로 통일 이탈리아를 세운 에마뉴엘 2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아들 에마뉴엘 3세의 열망에서 시작되었지만서도 말이다. 마침내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최고품질의 흰대리석으로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초매머드급 기념관이 역사적 신화적 소재를 다분히 간직한 채 완성되었다. 기념비적인 이탈리아 새역사의 장이 펼쳐졌다고 사방에 외쳤다.
하지만 정작엔 '뭐야? 왜 뉴욕 타임즈에서 쓰다가 버린 타이프 라이터가 저기에 서 있어?'라는 혹평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허세뿐인 궁전'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념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념관의 철문 입구를 지나 1차 계단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베네치아 광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왼편으로 교황청 주재 베네치아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지난날 뭇솔리니가 베네치아 대사관 창문을 통해 광장을 가득 메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파시스트 독재 정권을 앞세우고 '제 3세계行'을 명연설로 설득하였고, 우뢰와 같은 환호속에 이탈리아를 제 2차 세계대전의 참화속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패색이 짙어지자 파시스트들을 도망쳤고 뭇솔리니는 반도 북쪽의 코모호수 연안에서 총살되었고, 이탈리아를 배신자로 낙인찍은 히틀러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해 버렸다. 결국은 같은 전범국으로 몰락하고 만것이다.
치욕과 아픈 상처의 현대사와는 상관없게....... 수많은 차량과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아름다움을 찾아서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이탈리아다움을 찾아서들 말이다.
--- 이번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새로운 로마이야기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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