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Roma).'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 항상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뛰게 만드는 몇 개의 단어 중에 하나이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어느때 부터인가 로마는 내 가슴의 일부처럼 간직되었다. 첫 손가락에 꼽는 '이스탄불'의 경우에도 그 배경으로는 결코 적지않게 로마가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거기에는 유적과 예술품으로 가득한 이탈리아의 수도에 해당하는 '로마'만을 일컷는것은 결코 아니다. 지중해 연안을 넘어서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와 멀리 북쪽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까지를 차지했던 로마의 광활한 영토와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그 시대를 살아간 로마인들 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로마의 군대에게는 늘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하지만, '로마(Roma)'를 어떻게 어디까지 구분지어야 할 지에 대해서는 항상 어려운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로마는 '위대한 제국' 이라고 하는데, 초기 로마는 결코 제국이 아니었으며 그리이스에게도 한참이나 밀렸다고 보는 것이 냉정한 판단이다. 로마의 시작은 모든것에 있어서 그리이스의 모방에서 시작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처음의 모방과 답습을 자신들에게 맞게끔 토착화 시켰고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했다고도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로마'하면 번영을 구가하던 광활한 영토의 '로마제국' 만을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로마의 모든것은 아니다. 전제왕정과 공화정이 엄연히 존재했던 로마에는 제국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해서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는 동.서로 나뉘고, 오래지 않아 서로마는 멸망한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까지를 '로마'로 보는 사람도 있고, 비잔틴으로 국가 체재가 바뀌기 전까지를 로마로 보기도 한다. 비잔틴을 로마의 연장선상에 놓고 보는 사람도 있다. 동로마는 로마의 이름을 가지고 소아시아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였지만, 동로마나 콘스탄티노플은 분명하게도 이탈리아 반도 안의 로마라는 영토를 한참이나 벗어난........ 모든것이 기존의 로마와는 상당히 달랐던 것이다. 초기 동로마의 역사를 기존의 로마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도 적지 않게 무리가 따른다고 하겠다. 서로마의 멸망으로 이탈리아 반도 내의 옛 로마에는 교회(로마카톨릭)가 덜렁 혼자 남았을 뿐이고, 지배 세력과 경제활동의 주체들이 모두 옮겨 간 콘스탄티노플에는 새로운 비잔틴 왕조와 더불어 또 하나의 교회(그리이스 정교회)가 존재했을 뿐이다.
서로마가 멸망하였고 비잔틴이 성립되었다. 로마의 국교가 된 로마카톨릭은 멸망한 서로마의 영토에 홀로 버려졌고, 새롭게 부상한 비잔틴 제국에는 새롭게 그리이스 정교회가 터전을 넓혀나가게 되었다. 이 시기를 역사는 (중세의 시작)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설명만으로 '로마'를 이해하기란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하여서 부득이........ 로마에 막 도착했으므로........ 로마가 역사의 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까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나서 '로마여행을' 시작해야만 하겠다.(다음의 내용은 실제로 로마 여행을 시작하면서 챠밍여사에게 죽어라 열심히 설명했던 '초기 로마의 역사와 세계사'에 대한 열의에 찬 강의(?)와 동일하다 하겠다)
서구(유럽)의 문명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모두가 불문율 처럼 떠받드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빛은 오리엔트에서' 라는 이 말은 유럽 문명의 탄생이 동방(오리엔트)으로부터 전해진 시대를 훨씬 앞섰던 선진문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여기에서 말하는 '빛'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이집트를 거쳐 그리이스와 로마에까지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오리엔트문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소아시아지역에서 발생했다. 이 동방의 문명은 약 3.000년 전에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나일강 유역으로 전파되어 이집트 문명(기원전 약 2.400년 전)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에 주력하던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 문물을 부지런히 배에 싣고 지중해 전역으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크노소스 문명(BC. 1.900년 경)을 지나고 미케네 문명(BC. 1.300년 경)을 거쳐서는 마침내 기원 전 700년 경에 아테네를 중심으로하는 도시국가 연합체인 고대 그리이스 문명을 탄생 시켰다. 비로소 지중해 연안에서 최초로 유럽 문명의 싹이 움트게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 곧바로 건너편의 카르타고는 헬라 문명권(그리이스) 보다 약 100년 앞서서 '포에니칸문명(카르타고문명. BC.800년 경)'에 먼저 발생했다. 반면 '로마(Roma)'의 경우는 고대 그리이스와 아주 비슷한 시기이거나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크레타 등이 이집트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도시국가로 성립하는 시기에, 로마는 아직 반도 깊숙한 내륙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부족단위의 연맹체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구의 편협한 일부 지식인들은 유럽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이스문명이 자유시민의 공동체인 폴리스를 기반으로 찬란하게 꽃피운 민주주의의 표본이라 찬양하면서 동방의 오리엔트문명과의 연계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투표에 의해서 대표를 선발하고 권한을 위임하여 통치를 전담케 하는 현대적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 소수의 선택된자들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정적을 추방하거나 제거하는 방법으로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실로 말 뿐이 허구의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고대 그리이스의 폴리스 체제는 전쟁의 결과에서 얻어진 '노예'들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왕정국가와 다를바가 별로 없다. 차라리 그 보다는 제대로 체계와 질서가 잡힌 동양의 전제군주국가(고려.조선)가 오히려 더 민주적인 요소가 많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여러개의 도시국가 중에서 리더격인 아테네에 대적 할 만한 도시국가인 스파르타를 보자. 스파르타는 그리이스 본토에 살고있던 원주민을 정복한 도리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이다. 중장보병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용맹한 스파르타는 전시민의 용병화에 입각한 철저한 군국주의형 도시국가였다. 그들은 노예 신분인 헤일로타이(heliotai)와 일반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적구성 속에서 소수인 스파르타인(5~10%)들만이 시민으로서 자유과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었다. 이는 민주주의와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나마 아테네는 이주인인 도리아인(스파르타)에 대하여 대립의 각을 세우는것이 방어이자 생존이라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스파르타와 상반되는 길을 걷는다. 나름 자발적인 도시생활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초기 민주주의의 행보를 게속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 건설로 해상무역을 통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터는 빈부의 차가 심각해지면서, 후기에는 자유인인 아테네 시민들조차도 부채노예로 전락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된다.
두 차례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바야흐로 그리이스도시국가 연합체는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델로스동맹을 빌미로 주도권을 쥔 아테네의 지나친 행보가 마침내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레포네스 동맹체와 내전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소모적인 내전은 침체와 쇠락의 깊은 수렁으로 그리이스라는 도시국가연합 전체를 끌어들였고, 기원전 338년에 이르러 변방의 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모두 장악되기에 이른다. 헬레니즘의 탄생이다.
찬란한 그리이스문명과 위대한 로마제국 사이에서 간혹 헬레니즘은 그 빛을 잃기가 쉽상이다. 헬레니즘이 알렉산더 대왕이고 알렉산더가 곧 헬레니즘 자체라 하겠기에, 이 불세출의 영웅이 느닷없이 요절함으로써 당연히 찬란하면서도 위대해야만 하는 헬레니즘은 반짝하고 사라지는 문명이 되었다. 누군가는 헬레니즘은 그리이스문명의 말기쯤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헐~~~~~~~~~~
대충 그리이스문명을 한 5백년으로 치고, 고대 로마문명을 대충 6백년이라고 친다는 전제하에서, 만약 헬레니즘이 대충 2백년만 유지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리이스와 로마와 비잔틴을 능가하는 또 하나의 실로 어마무시한 문명이 등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언젠가 헬레니즘만을 따로 저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로마(Roma).'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내륙 깊숙히 중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소규모 부족의 하나인 라틴족이 세운 부족연맹체였다. 떠돌이 유목민 집단이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부족국가로 체계가 잡혀 나갔다.
부족이 커져서 국가가 되면 영토 외에 반듯이 군사력과 잘 정비된 법률 및 행정체제와 시민(백성)이 있어야만 한다. 보다 강성한 국가로 발돋음하자면 여기에다가 국가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내포하는 정통성 확립이 중요해지고, 국가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와 예술이 반듯이 뒷바침이 되어야 강대국이라 할 수 있다.
라틴부족에서 도시국가로 성장한 로마에도 그러한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고대의 초기로마는 참으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야만 했다.
부족에서 국가로 성장하려는 로마에게 당장 가장 급하게 장애로 등장한것은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중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에트루리아(Etruria)'(상당부분이 미스테리이자 전설처럼 남아있는 이탈리아 반도에 실재한 고대국가) 였다. 에트루리아는 분명히 로마보다 훨씬 앞선 고대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라틴부족은 에트루리아의 머슴처럼 지냈다.
결국 힘든 싸움 끝에 라틴부족은 에트루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더불어 국가란 어떤것이고 국가로 발전하기 위하여는 어떤것을 갖추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에트루리아로부터 많은것을 배우고 깨우쳤다. 로마는 이제 공화정을 수립한 국가로 변모하게된 것이다. 우선 영토와 사람(백성)을 확장하기 위하는 일에 전념했다. 때론 주변의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고 때론 협상을 통해 흡수 병합했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회화의 아주 중요한 소재가 되는 '로마와 사비니 부족간의 전쟁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로마는 한시도 쉬거나 멈추지 않고 확장을 계속해나갔다.
남하하는 켈트인을 몰아냈고 삼니테인을 물리쳤다. 이탈리아 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로마의 군사력을 총동원해 남하하여 기원전 272년 마침내 그리이스를 점령했다.
기원전 2세기 말엽에는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로 압축되는 약 100년 동안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집트를 제외한 지중해 전지역을 점령함은 물론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 지역의 깊은곳까지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는 '로마제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위대한 제국의 탄생은 오로지 모든 시민이 저마다 앞다투어 직접 참여하는 강력한 시민군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고 로마軍에 박수갈채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When in Rome, Romano vivito more.(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
All roads lead to Rome.(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격언들은 결코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한 뒤에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 지어낸 말들이 아니다. 초강대국의 허풍스런 너스레도 결코 아니다. 로마라는 역사를 가만히 떠올려보면 적어도 저런 격언들이 결단코 허언이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나 절실하게 느끼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가 실감되지 않는 당신이라면.......... 로마는 당신에게 이렇게 경고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로마다.
Qui desiderat pacem, praeparet bellum.(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곧 세상의 중심이 로마라는 말이된다. 그런 로마라는 도시의 모든 도로와 교통이 여기 테르미니역과 광장에서 시작되어서 끝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면, 혹 지금 세상의 중심이 테르미니역이라는 뜻일까?
테르미니가 이처럼 로마 교통의 중심으로 부각된것은 비교적 근간인 20세기에 들어서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구 유입과 교통량이 늘어나자, 18세기 중반에 처음 이곳에 들어섰던 기차역을 현대적인 지금의 모습으로 재개발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수 천년 동안 로마의 중심은 당연히 원로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공서가 들어서 있는 '포로 로마노(Forum Romanum)'가 명실상부한 로마의 핵심이었다. 이 포로 로마노에서 로마 도심의 북쪽 경계인 포폴로문(門)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포장도로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코르소 거리이다. 코르소 거리를 지나가면 로마의 경계인 포폴로문 앞에 커다란 포폴로 광장이 놓였다.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도로망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도 국가인 로마의 남쪽은 지중해로 가로막혀 있다. 로마의 시민권자는 이 광장을 시작으로 북쪽을 향해 문을 나서면서 '고향을 떠난다'라고 여겼다. 제국의 군대는 이 너른 광장에서 성대하게 출정식을 거행하고나서 문을 나서서 북쪽으로 나아가 세계를 정복했다. 승리한 군대는 똑같이 이 도로를 통해 회군하였으며, 또다시 이 광장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거친 후에 코로소 거리를 따라 원로원과 궁전이 있는 포로 로마노까지 승리의 행군을 펼쳤던 것이다. 그것이 로마의 위대함이었으며, 그것이 '로마의 평화' 였다. 포폴로문을 나서면 북쪽 알프스 산자락이 나타나는 반도의 국경까지 플라마니아 가도(路)가 펼쳐진다. 말과 마차가 달려갈 수 있는 포장도로다. 그리고 그 국경에서부터는 인체의 사방으로 촘촘하게 뻗어나간 실핏줄처럼 로마가도(혹은 아피아가도)가 세상의 끝까지 펼쳐지게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놀랍다는 말이 전부라 할 실로 위대한 로마의 업적이다.
로마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즐겨 테르미니역 인근에 숙소를 마련한다.
일단 공항으로의 접근에서 시작하여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등의 모든 대중교통망이 나름 촘촘하게 잘 짜여진 로마에서도 모두가 여기 테르미니에서 시작하거나 꼭 거쳐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테르미니역 앞에 광장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고, 광장의 지하로 두 개 노선뿐이 로마의 지하철이 지나간다. 지유배낭여행자에게 이만한 정도의 안정된 대중교통을 제공해주는 여행지가 그리 흔치는 않은 상황에서 로마 테르미니역은 아주 탁월한 기본 여건을 우선 갖추었다.
거기에다 비록 과거에 대제국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 역사속의 도시국가였다고 할 수 있는 로마. 어디를 가든지 우리의 여행은 항상 '제까짓게 커보았자 얼마나 크겠나' 싶어서 과감하게 뚜벅이 여행을 시도하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아무렴 로마가 서울만 하겠어?' 늘 상 이런식으로 '까짓 바르셀로나 정도야?' '쿠알라룸프 정도라면 너끈히' '이스탄불 정도라면 도전해 보아야지' 하면서 거리로 나서곤 하는게 '내 스타일' 이자 '우리의 여행방법' 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번에도 그대로 적중했다.
로마? 내 고향 충주 보다 아주 조금 더 큰 도시였을 뿐.........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바티칸을 찾아갈 때 말고는, 바티칸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부터 로마여행의 모든 일정을 거의 대부분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다니면서 소화해 냈다.
챠밍여사? 잘 걷는다. 무지하게 잘 걷는다.
'두 발이 아직 온전할 때 더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거여' 라는 그녀의 지론은 끝내 '코로나 바이러스의 횡포가 끝나는대로 우리 공동의 회갑을 기념해서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떠나자'고 대남편 선전포고를 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테르미니 역에서 동서남북으로 어느쪽을 선택하여 길을 나서는가에 따라 그날의 여행이 크게 달라진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자면 북쪽으로 발걸음을 시작하여 '500인 광장'을 지나 '디아클레이누스 욕장'으로 알려진 로마시대의 공중목욕탕에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번까지 세번째인 로마여행에서 항상 나는 첫발걸음을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로마의 랜드마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챠밍여사에게도 '로마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것'을 우선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새벽같이 테르미니역에 도착한 우리는 역 구내에서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 요기를 해결했다.
길 건너편의 가까운 위치에 마련해 둔 숙소를 찾아갔는데 전날 이용자가 아직 있어서 체크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테르미니 역 근처에는 알뜰절약형의 자유배낭여행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해외 유명 여행지치고는 숙소의 환경들이 거의 대부분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열악한 편이다. 전체적인 유럽여행을 통털어 로마의 숙소가 항상 최악이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조금 엎그레이드를 시도하면 가격차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물론 제대로 비용을 다 지불하고자 한다면 이곳에도 나름 썩 괜찮은 숙소들이 많이 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 정도로 판단한다면 로마 테르미니역 인근의 숙소들은 대부분 상당히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방으로 늘어선 대부분의 건물들 조차도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개발에 제한을 두고 있어서 마음대로 고칠수도 없다고 한다. 대중교통망이 잘 확보된 로마이기에 테르미니에서 지하철이나 지상 트램이나 버스를 이용해 조금 벗어나면 저렴한 비용으로 상당히 럭셔리한 숙소들을 마음껏 고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나는 그러면 그런대로 테르미니역 인근을 선택한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열악하면 열악한대로....... 지금 나는 로마에 있지 않은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고, 또 그것이면 족한 것을.........
배낭을 맡겨놓고 우리는 서둘러 그렇게 기다렸던 로마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행자 숙소들로 밀집된 동네를 벗어나 몇 발자욱만 옮기고 나면, 버스와 택시들이 지나가고 그 사이로 낡은 트램이 가로질러가는 너른 대로 건너편으로 웅장한 교회가 나타난다.
테르미니역을 등지고 교회를 바라보는 교차로에 서면 왼편 도로가에 커다란 박스를 깔고 앉아서 두꺼운 이불로 앞가림을 하고있는 걸인이 보인다. 24시간 주야로 영업중이시다. 가끔은 두 세명의 동업자들이 함께 근무하기도 하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 걸인이 상주한다는 의미는 곧 여행자나 현지인을 불문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요충자라는 뜻이 성립된다. 걸인께서 운영하시는 영업장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바로 옆건물에 지하로 내려가는 커다란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잘 살펴야만) 자유여행자에겐 생명수처럼 대단히 중요한 장소이다.
로마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이 이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필품 대부분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된 실로 환상적인 반가움이 억수로 마구마구 피어나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유럽의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대한민국을 연상하면 엄청난 낭패를 겪기 십상이다. 우럽인들은 도대체 생필품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입하는것이지 라는 의문이 수시로 마구마구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쩌다 동네 어귀에서 아주 쬐끄만한 구멍가계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동네마다 마구 들어서있는 대형마트를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하겠다.
여기 대형마트에서 교회(성당)을 기점으로 정반대방향의 대로변 내리막길 초입에 한인이 운영하는 한국식 슈퍼마켓이 있기도 하다. 컵라면을 비롯한 한국식 식재료는 이곳에서 구입이 가능한데 가격대는 조금 높은 편이다.
챠밍여사와 함께하는 내 방식의 여행조건중 한 가지가 '싱싱한 포도가 흔하고 나름 질좋은 포도주가 저렴하면 무조건 훌륭한 여행지' 라는 전제가 엄연하게 항상 존재하는 바, 로마의 최고 대형수퍼를 확보하고 난 우리에게 로마는 당연히 최고의 여행지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로마에 들어와 처음 만나는 이 웅장한 교회는 '로마 4대 교회'에 속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Basilica di Maria Maggiore)' 이다. 이 성당을 아주 쉽게 기억하고 떠올리는 방법으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하면 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의 일이다. 로마의 귀족이었던 조반니 부부는 어느날 똑같은 꿈을 꾸게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던 이들 부부에게 꿈속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셔서는 다음날 아침에 눈이 내리는 곳에 성모를 위한 교회를 지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계시를 남겼다. 부부는 곧바로 리베리오 교황에게 달려가 꿈 이야기를 꺼냈는데, 신기하게도 교황도 똑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다음날인 서기 352년 8월 5일, 한여름 아침에 에스퀼리노 언덕위로 하얗게 눈이 내려 소복히 쌓였다.(이날의 기적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화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하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은 건설되었고 당연히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이른아침 로마시내를 걷는다.
아침 출근길을 서두는 현지인들과 서스럼없이 아침인사를 나눈다. '본 조르노'라고 먼저 말을 건네면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인사까지 따라 나온다.
페부 깊숙히 로마의 싱그런 아침이 푹 푹 파고들어 온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즈음으로 치자면 좁고 울퉁불퉁하고 골곡까지 심한 기능성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도로라 하겠지만, 2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먼 과거에도 이들은 벌써 도시계획에 의하여 건물을 동일한 선상에 늘어놓기 시작하였으며 작은 골목의 뒤안길 까지도 바위와 돌을 자르고 다듬어서 포장도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세기를 지나고 밀레니엄을 타고 넘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도시와 도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뜯어고치는 우리나라 콘크리트 보도블럭을 생각하면 역한 감정과 함께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2천년을 버텨오면서도 여전히 너끈한 이들의 지혜를 좀 빌려가면 안될까? 2천8백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는 과거를 이렇게 오늘에까지 당당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유구한 5천년(반만년)의 숭고하기까지한 역사를 소중하게 간직한 대한민국은 해마다 11월이 되면 도심의 이곳저곳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뻔하게 내다보는 미래가 고작 1년을 보장하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그런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백년대계는 과연 실현 가능한 믿을 수 있는 비젼인가?
내 입에서 저절로 그에 대한 해답이 흘러 나온다. (개뿔! 비젼은 무슨?)
그런 상념속에 발걸음을 도심속으로 도심속으로 옮기다 보면........
빛바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선 언덕으로 저편으로 익히 우리가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로마)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콜로세움(Colosseo)' 이다.
비로소 로마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로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명소로는 (판테온)을 꼽는다.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완성도 높은 건축물로도 서슴없이 판테온을 꼽겠다.
하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로마의 랜드마크이자 가장 이상적인 명소로 대부분 꼽고 있는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약 5만명의 인원을 수용했던 로마시대의 가장 큰 원형극장이 (콜로세움)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은 어디까지나 로마를 찾는 이방인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현지에서는 모두가 '콜로쎄오'라고 부르고 'Colosseo' 라고 쓴다. 이를 다시 번역하자면 단순하게 그냥 '거대한 건축물' 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거대한 건축물'을 '거대한 원형극장'의 의미로 그냥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발상지라 여겨지는 신성한 팔라티노 언덕을 건네다볼 수 있는 이 자리에는 본래 네로 황제의 궁전이 있었다. 궁전의 앞마당에 아주 커다란 연못이 있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아주 거대한 네로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 네로동상의 이름이 '콜로쎄오'라 불려졌었다. 그런가하면 전설로만 전해내려오던 지중해 로도스섬의 거인조각상의 이름도 콜로쎄오였다. 이는 그리이스어 '콜로세우스'에서 유래한 라틴어 명사로 '거대한'의 의미를 담게되었던 것이다.
폭군 네로를 몰아내고 궁전과 연못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원형극장을 세우고, 같은 자리에 있던 거대한 동상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콜로쎄오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로마인이 세운 거대하고 웅장한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는 화려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했던 고대 그리이스의 건축이 몰라볼 정도로 진일보했음을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에 대한 개념과 접근방식 조차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건축 기술뿐만이 아니라 건축자재도 몰라보게 달라졌던 것이다.
그리이스의 건축은 대부분 석재(대리석. 화강암. 화산암)였든것에 반해서 로마는 훨씬 다양해졌다. 오늘날의 건축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모든것이 건축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것이 로마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리이스 건축을 살펴보면 높이는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했다. 하부 기단의 받침만 튼튼하게 할 수 있다면 돌기둥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높이는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석재일지라도 횡으로 들어올렸을 때 버텨내는 인장력에 있어서 석재는 가히 최악의 자재였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걸쳐져 지붕을 지탱해야만 하는 대들보나 석가래의 역활을 담당해야만 하는 석재는 엄청난 스스로의 무게로 인하여 겨우 한정된 약간의 거리밖에는 지탱하지 못했다. 더우기 그 위에다 지붕의 무게를 더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집트나 그리이스의 신전 건축을 보면, 거대한 신전의 내부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만치 빼곡하도록 수많은 돌기둥으로 가득차있는것을 볼 수가 있다. 종(높이)로서는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했으나, 횡(수평공간)으로서 극복을 하자니 역시 같은 돌기둥을 빼곡히 세워서 천장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신전은 외부적 규모와 상관없이 지극히 적은 공간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고대건축에 있어서 의외의 협소한 공간확보는 거의 그복할 수 없는 숙명 같은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군인들은 이 불가능을 극복해 냈다.
로마의 군인은 무기를 들고 적을 정복하는 용맹한 군인일뿐만이 아니라, 토목 건축 공학자이며, 기술자였다. 농사를 직접 짓고 농업 기술을 개량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정복사업과 동시에 측량을 하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성을 쌓고 막사와 궁전을 지었다. 한명 한명의 로마군인은 맥가이버였으며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드넓은 세계각처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군대 이외에 토목기사와 건축가와 의사와 마차나 무기를 생산하는 기술자 등을 따로 데리고 다닐 수 없었던 로마의 군대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나가기로 계획을 바꾸고 군인들을 모두 각분야의 전무가 집단으로 양성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로마의 평화는 하나하나의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세고비아의 수도교와 1천년을 버틴 이스탄불의 테오도시우스 성채와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로마가도는 모두 이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건축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위대한 로마인들은 3가지를 창안하고 개발해 냈다. 로마 건축의 위대함은 바로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아치)와 (궁륭)과 (콘크리트)의 등장이었다. 이것들로 인하여 건축물의 높이와 크기를 무한정 확장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넓은 실내공간 확보가 가능해 졌고, 이로인해서 그 넓은 공간을 치장하는 인테리어가 발전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석재를 쌓아올리고 쐬기등으로 연결부위를 보완해야만 하는 작업에 놀라운 접착력으로 이를 말끔하게 해소해 주었다. 석재를 자르고 다듬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하게 되었다. 자재와 인력과 시간의 절약을 실현가능케 해주었던 것이다.
비록 하나의 완성체로서의 건축물에 비하자면 지붕이 삭제된 형국이지만, (콜로세움)은 이렇게 새로워진 로마 방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이자 상징적인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로마인들이 창안한 새로운 방법에 의한 건축에서 시작하여 다방면으로 퍼져나간 사조를 (로마네스크 양식) 이라고 한다.
아아치와 궁륭을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콘크리트라는 자재를 사용하기 시작한 로마인들은 건축물의 지붕마저도 무거운 석재를 버리고 목재를 사용하여 공간확보에 주력했다. 목재 지붕위에 동판을 덮어씌우거나 기와를 덮기 시가했던 것이다. 로마 건축의 위대함은........... (판테온)으로 드러난다. 완벽한 로마네스크의 완성이 판테온이다.
일정 면적의 무게를 고스란히 그 아래의 기둥 하나가 고스란히 감수하고 버텨내야 하는것이 그리이스의 건축이다. 그것이 그리이스 건축이 가진 한계성이자 치명적 약점이었다.
로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치(arch)'를 발명했다. 그리이스 신전 기둥이 가진 무게의 한계성에 아치를 가미하면 그리이스 기둥의 크기와 무게에 비하여 절반 이하의 부피와 두께로도 이 한계성을 너끈히 극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치를 통하여 지구의 중력을 충분히 분산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런 아치와 아치를 엮어서(연결) 하나의 지붕을 가진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궁륭(vault)' 이다. 이렇게 생겨난 작은 공간들은 길게 연속으로 늘어트려서 터널처럼 만들수도 있고, 쌓아올려서 아파트 형태로 만들 수도 있게된 것이다. 이런 작업을 돌덩어리들로만 한다면 여전히 어렵겠으나, 콘크리트가 이런 치명적 단점을 극복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대지를 다듬고 너른 돌판으로 포장도로를 만들듯이 기초토대를 마련한다. 그 위에 거대한 주춧돌과 조달이 쉽게 가능한 높이의 기둥을 올려 놓는다. 이제 아치가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는 위대한 역활을 해 줄것이다. 돌이나 콘크리트 벽돌을 이용하여 아치를 만들고 그 위로 벽을 마구마구 또 쌓아 올린다. 적당하다 싶으면 궁륭을 통하여 아치와 아치 사이를 연결한다. 옆으로든 위로든 이 같은 방식이 거듭거듭 반복된다. 그렇게 반복된 작업 끝에 마침내 '콜로세움'이 완성되었다. 수용인원이 5만명이다.
콜로세움의 내부를 돌아보던 중에 일전의 여행에서는 없더니만 이번엔 '카르타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위험성을 절감한 로마는 아주 철저하게 카르타고의 모든것을 부숴버리고 지워버렸다. 카르타고의 문헌이나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는 이유는 오로지 로마의 철저한 복수의 결과에서 나왔다. 그런 로마에서, 로마를 대표하는 콜로세움 안에서 특별관을 만들어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너그러워진 후손들 역사의식의 발로일까? 이님 여전한 승자의 여유와 자부심일까?
르네상스를 여행하자면 로마의 역사가 뒤따르게 되고, 로마의 역사에서 카르타고를 빼고는 제대로된 역사와 문화(르네상스)를 논할 수가 없다. 하여 그때그때마다 부분적이나마 거론함을 계획하고 있는데 느닺없이 카르타고가 들이닥친 형국이 되었다. 차차 조금씩이라도 거론하겠지만, 아무리 줄여도 여행기 1회분 이상의 카르타고 이야기가 될 것만 같다.
이렇게 탄생한 '콜로세움'을 그저 단순하게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그 이면에 건축물이 탄생하기까지 건축을 계획한 사람의 의도에서 시작하여 건축물의 순기능과 건축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까지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마냥 기쁜마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암울한 역사와 깊은 상처를 간직한것이 콜로세움이라고 하겠다.
과거 군사독재중권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를 떠올리면 잊혀지지 않고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독재자는 3S 정책에 정권의 목숨을 건다' 라는 이야기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살펴보아도 불의(不義)한 독재자나 정권은 항상 이렇게 부당한 정책을 마치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것 처럼 자행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3S 정책'이 가리키는 것은 영문 S의 이니셜로 시작되는 세 가지를 의미한다.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가 이에 해당한다.
이 세가지를 적극 권장하여 퍼트리면, 이것들로 하여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당한 권력들은 실제로 이런 정책을 입안하고 암암리에 심혈을 기울여 실행에 옮겼다. 우리나라 과거의 군사독재 정권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아픈 과거사인 것이다.
콜로세움은 한 마디로 이들 '3S'를 모두 합쳐놓은 것이라 보면 무방할 것이다. 현대의 스크린과 스포츠와 섹스를 로마시대에는 콜로세움 한자리에서 모두 한꺼번에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역활을 담당했던 것이다.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역활이 시대가 발전하면서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것이 '3S'라고 보면 되겠다.
로마에서 발생한 사상초유의 화재사건을 저지른 네로황제는 후환이 두려워지자 엉뚱하게 지하에 숨어있는 기독교 세력인 저진른 범죄라고 죄를 덮어씌운다. 결과로 참혹하게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뒤따르게 되지만 점차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성난 민심이 이반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어디까지나 군사 쿠데타와는 좀 다른 성격의 반란이었지만, 네로황제의 폭정에 등 돌린 로마군은 반란을 묵인한 채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다. 군대가 방조하는 반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네로는 자살함으로서 극에 달했던 폭정의 시대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음 황제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반란은 종지부를 찍을 수도, 여전히 진행형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로마 원로원과 권력자들이 볼때, 이미 하나로 뭉친 시민의 힘이 어떤 위력으로 나타나는지를 반란에 참여한 시민들은 몸소 체험한 다분히 위험한 세력이었다. 대결보다는 저들을 달려면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러자면 차기 황제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의 폭이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게되었다.
네로의 폭정과 연관되었거나, 로마의 정치적 권력과 경제권을 차지한 세력들은 우선적으로 배제되었다. 로마에서 가까운 곳에 위협적인 군사적 세력을 가진 군부도 제외되었다. 결국은 로마에 정치적 세력이 없고 끌어들일 수 있는 막강한 배후도 부족하고, 당장 동원할 군사력도 없는 사람을 찾게되다보니 아주 멀리 변방에 나가있는 무던한 장군 중에서 고를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선택되어진 사람은 유대땅에 파견중인 베스파니아누스 장군이었다.
베스파니아누스야 말로 로마의 정치권에 전혀 연줄이 없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 유대 반란 진압군 총사령관이었다. 성지순례자의 탄압에서 촉발된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고 있던 중에 황제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베스파니우스는 예루살렘 정벌을 아들 티투스에게 위임하고 로마로 돌아와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아들 티투스가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군 총사령관이었던 '요세프스'를 포로로 잡아서 로마로 귀환하였다. 베스파니우스 황제에 의해서 사면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요세프스는 심지어 베스파니우스 집안의 성씨도 물려 받는다. '플라비아누스 요세프스' 라는 로마 시민권자로 새롭게 태어나게된 것이다. 유대군 총사령관까지 지냈던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역사학자였던 요세프스는 하루아침에 친 로마주의자로 전향하고 베스파니우스와 로마를 위해서 유대의 역사를 왜곡하고 유대를 정복하는 사업에 열과 성의를 다하게 된다. 유대의 변절자이며 매국노가 된 것이다.
노련한 요세프스는 베스파니아누스 황제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대다수 로마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것이 우선적으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시민들의 지지가 황제에게 쏠려 있는 한, 그 누구도 황제에게 불손한 생각을 가지거나 반란을 주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쏠리는 사업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것이 바로 콜로세움의 건설이었다. 시민들의 관심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피와 땀과 향락과 사치가 범벅이된 극한의 놀이판을 벌어주면 시민과 권력자들의 저항심은 저절로 수그러지게 될것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향락과 사치와 즐거움은 오로지 황제의 업적이 되고 시민들의 함성 속에서는 오로지 황제에대한 찬양과 복종의 메아리만 울려퍼지게 될것이다.
하여 당시의 불리하고 무리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콜로세움의 건설은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물론 베스파니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이 티투스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고 공사를 이어나가 완성시켰다. 그리고 아버지가 바랬던대로 콜로세움을 100% 활용하였으며, 그의 권위와 명성을 치솟게 만들었다.
축제때마다 검투사 경기가 벌어졌고, 시간이 지나자 검투사와 맹수들 간의 싸움이 추가되었다. 수상극장의 기능을 추가하여 실제 크기의 함선을 동원하여 과거의 위대한 해상전투를 재현하기도 했다. 기독교 탄압과 맞물려 기독교인의 처형장으로 피를 뿌렸고, 전쟁 발발시에는 요새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집트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은 총알을 만들 납이 필요하게되자 콜로세움의 외벽을 헐어서 쌓아올린 돌틈 사이의 쐐기로 사용한 납덩어리를 추출하면서 가장 많이 심각한 정도의 파괴와 훼손을 가했다. 극심하게 국력을 상실한 정부가 치안확보마져도 어려운 시기에는 너도나도 이곳의 석재들을 마구 헐어서 훔쳐다가 다른곳의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채석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실제로 콜로세움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인근에 콜로세움의 석재를 어마어마하게 뜯어다가 원형대로 똑같이 재조립한 후에 안쪽과 윗쪽으로 궁전같은 건물로 꾸민것을 만나볼 수가 있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콜로세움의 내부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치 사이로 주변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가 있다.
팔라티노 언덕이 올려다 보이고, 발치 아래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한눈에 쏙 들어 온다. 포로 로마노의 일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멀리 흰대리석으로 지어진 이탈리아 통일궁이 보인다.
이제는 콜로세움을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콜로세움의 그리 멀지않은 인근으로는 가거에 어느 정도의 지위와 부를 가졌던 사람들이 정부의 통제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점을 이용하여 멀쩡한 콜로세움을 훼손 시키고 파괴하여 밀반출을 하였다. 상당량의 석재가 이미 오래 전에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위하여 반출되면서 부터는 누구나가 해도 되는 광행처럼 되어버렸던 것이다.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무분별한 석재의 남획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들은 남보란듯이 남획해 온 석재들을 원형대로 재조립 했다. 그리고 보완을 하여 자신들의 생활터전으로 활용했다.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인지, 문화유산의 재창조와 보존의 차이점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시간과 돈과 정책의 방임이 더 허용되었다면 콜로세움은 어디론가 뜯겨져 다른곳에 누군가의 여름별장으로 전락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탈리아가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수많은 위대한 문화유산에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훼손이 가해졌고, 열강의 이탈리아 침공 전쟁이 끊이질 않고, 결국 나폴레옹이 침략하여 문화재 약탈을 자행하였음에도 나름 굳건하게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온은 여기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몹시도 탐을 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분해, 이동, 재조립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대단히 슬퍼했다고 한다. 개선문의 파리 이전은 불발로 끝났지만 개선문에 대한 나폴레옹의 욕망은 끝내 파리 개선문을 스스로 만들게까지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물러갔지만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3 세계에 참여한 전범국으로 연합군의 총공세속에 처참하게 파괴되었었다. 끼니를 걱정하던 그 격변의 풍파를 헤쳐나오면서도 그들은 마침내 완벽하게 과거의 문화유산을 복원하였고 멋지게 지켜냈던 것이다.
현재의 로마를.......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나는 절로....... 이탈리아에 존경과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흑백 사진으로 접해 본 그들의 과거는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욕망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의 출발에서부터 생겨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숙명 같은것 이라고 말 해야만 하겠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 사회적 구성원으로 성장 발전하게 되면서부터 ,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생리적인)에서 점차 벗어나 사회적 욕망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곧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적 욕망을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었던 생리적 욕망은 점차 무리속에서의 안전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애정과 집단에 대한 욕구가 추가되는가 싶더니만 다시 자기 존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로 거듭거듭 발전하게 되었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서부터 인간은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훨씬 강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로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고, 때론 그 욕망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살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다분히 그런이유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커다란 업적이나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그런 사실을 주변을 넘어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곤 했다. 단순히 1회성 홍보에 그치지 않고 오래오래 먼 후대에까지 자신의 자랑꺼리를 유지시키고 남기려고 애썼다. 오늘날 처럼 기록 영상물이나 책 같은 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대의 인간이 선택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구성이 강한 조형물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인간에게 업적과 사회적 명성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만큼 빠르고 강렬하게 다가오는것은 아마도 없을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기지나 용맹으로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 전투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투였다면 굳이 부연 설명을 더이상 보탤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한 순간 한 순간은 언제나 'all or nothing'이다. 자신의 생명과 동료와 가족과 미래까지 모든것을 순간에 거는 지극히 위험한 도박인 것이다. 그들 모두가 그 극도의 위험한 순간을 극복한 영광을 조형물에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기를 원했다. 여기에는 덕으로 명성을 날린 사람이나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을 이룬 사람들도 해당된다.
동양에서는 주로 비석을 세웠다. 한국과 중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수많은 비석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서구사회(유럽)도 업적이나 명성을 후대까지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동양에 비해서 스케일이 어마무시하게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유럽사회에서 명성을 드높인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잘 정형화된 본보기처럼 받아들여지게된 것은, 로마의 군인들을 충격속으로 빠트렸고, 결국 엄청난 비용과 시간과 피와 땀과 정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어코 로마까지 빼앗아 가져와야만 했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였다. 이 엄청난 조형물은 남의 나라인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거대한 탑이었음에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는 그것을 약탈하여 마치 자신의 업적기록물이라도 되는 양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과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정작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들의 오벨리스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당수가 로마로 옮겨졌고 서구의 강대국들이 앞다퉈어 강탈에 뛰어들었든 때문이다.
오벨리스크가 어느정도 동이나기 시작하자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거대한 석조 개선문(triumphal arch)의 등장이다.
처음 등장한 개선문은 참혹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승전 기념문으로 출발했다. 주로 황제들이 통치하고 다스리던 로마에 세워졌다. 하지만 점차 승전비는 공덕비나 송덕비의 성향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자했다. 황제가 영토를 확장해 나간 지역이나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건설한 지역에도 업적을 찬양하는 공덕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14대 황제였던 히드리아누스의 경우 아나톨리아나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단순하게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는 개선문과 원형경기장과 목욕탕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건설되기도 했다. 로마제국의 황제 업적 순위와는 상관없이 어떻게 보자면 세계 도처에 가장많은 개선문과 기념 조형물을 남긴 으뜸황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건축물을 통털어도 로마시대의 개선문 같은 건축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독특한 로마의 문화유산 중 하나라고 하겠다. 물론 그 원형은 이탈리아 반도에 로마 보다도 앞서 등장했던 에트루리아의 문화유산 중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빛나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나폴레옹 조차도 여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에 홀려서 그토록 파리로 약탈해 가져가고 싶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전 불가의 통보를 받고 나폴레옹은 땅을 쳤다. 프랑스로 물러간 뒤에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기어코 스스로 못지않은 개선문을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만들어서 자신의 업적와 명성을 기리고자 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개선문은 아마도 현재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간 지역에 설치되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카피톨리노 개선문' 이었을 것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개선문으로 어찌보면 당연하게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어느때인가부터 사라졌다. 나의 개인적인 추론으로는 여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주체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파괴된 석재들이 일부 대제의 개선문 건축에 쓰였으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카피톨리노 개선문'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제압함으로써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로마를 구한 위대한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기념물이었다. 로마 전체의 역사속에는 이당시 스키피오의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은 로마나 로마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한 군인의 업적과 칭송이 감히 황제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 통치자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초대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개선문을 만들 수 없다고 법령을 개정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황제가 스스로 만들거나, 아니면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로서만 개선문을 만들 수 있도록 법률로 대못을 꽝 박아버린 것이다. 그런 기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원인을 제공한 스키피오의 기념물이 어찌 온전하게 버텨낼 수가 있었겠는가?
현재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남아있다.
콜로세움에서 팔라티노 언덕을 바라보는 지점에 로마의 상징물 중에 하나인 3개의 아치로 꾸며진 '콘스탄티누스 1세 개선문'이 콜로세움과 함께 나란히 제국의 위엄을 여실히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곳에서 발걸음을 포로 로마노로 돌려서 얕은 언덕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포로 로마노가 시작되는 지점에 아치가 하나인 티투스 개선문이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다. 티투스는 콜로세움 건설을 시작한 아버지 베스파니우스의 뒤를 이어 완공한 사람이며, 1차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군 총사령관 요세푸스를 포로로 잡아 로마까지 압송해 왔으며, 아버지에 대를 이어서 황제에 즉위한 사람이다.
다시 발걸음을 포로 로마노로 옮겨서 로마 제국의 중추를 담당했던 지역을 지나 북쪽의 언덕에 다다르면 그곳에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육중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볼륨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북아프리카 지역 리비아의 트리폴리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로마 시민권의 가치를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으며, 또한 로마가 완전한 열린사회를 지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출신이 아프리카인데다가 유난히 피부가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던 이유료, 한때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로마의 황제 중에 흑인도 있었다' 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로마 지역을 벗어난 개선문으로는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 현존하는 또 하나의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이 가장 유명하다.
로마의 개선문은 전면에 아치 모양의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 승리자의 업적을 기리는 문장을 새겨 넣었다. 아치의 옆 표면은 여러가지 보조나 조각으로 치장하였는데, 주로 근대의 행진, 슬이자의 행적이나 업적을 묘사한 부조, 승리자가 제압한 적이나 굴복시킨 노예들이나 전투 장비인 무기들이 묘사되었다. 그런가하면 세세하게 전쟁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예술성까지를 빌려가면서까지 승리자의 업적을 극대화시킨 찬양 공적비였던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은 한마디로 '조각(부조) 갤러리' 라고 부를만 하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조각 작품이다.
그런데 이 갤러리에서는 흡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부도덕하고 부당한 냄새가 솔솔 풍겨나온다. 세계 3대 미술관이자 박물관으로 영국인들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인 대영박물관을 아무리 둘러보고 돋보기를 넘어 현미경을 들여대보아도 영국 역사는 손톱의 때 정도로 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 도처의 가장 다양하고 가장 많은 숫자의 귀중한 보물이란 보물을 싸그리(?) 소장되어 있다. 대영제국이란 막강한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워 99% 이상을 훔치거나 약탈에 의해서 강탈해간 것들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 한부분인 박공을 통째로 뜯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더 많은 부분을 싸그리 훼손하거나 부숴버리는데 결코 양심의 가책이나 망설임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것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는, 이것들이 자랑스런 영국의 유산이라고 버젓이 돈을 받고 구경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에서도 그런...... 도용을 넘어 강탈을 합법화한 위선과 거짓으로 도배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차지하고 있다.
앞서서 나는 '어쩌면 스키피오의 개선문을 없애버린 사람들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를 만든 사람들' 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개선문 자체는 '폰테 밀비오 전투(밀비오 다리 전투)'를 통해 황제의 권위를 안착시키고 기독교의 공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을 들어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을 찬양하는 공적비'로, 황제 스스로가 아닌 원로원의 헌정 방식을 빌어 건설을 추진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겠으나, 공적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선대 황제들의 유산을 함부로 취급하고 무작위로 가져다 사용했다는 부정한 방법에 대해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겠다.
일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로나 공성전에서 크게 승리했다. 이 승리를 자신의 공적비에 꼭 넣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조각가를 동원하여 여러번 시도를 했음에도 썩 마음에 드는 부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듣자니 스키피오의 사원에 전쟁 부조상이 있는데 솜씨가 놀라울 정도이며, 자신의 위대한 승리를 묘사하는데 써먹기에 딱 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각 현재에 엄연히 살아있는 막강한 황제의 공권력을 동원했다. 스키피오 사원의 안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망가지던 부서지던 사라지던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공적비만 완성도를 극한으로 높여서 먼 후대에까지 위대한 황제로 칭송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할아버지의 묘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파헤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와 히드리아누스 황제와 마커스 아우렐리우스의 개선문이나 사원이나 기념관들이 여기저기 뜯겨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디보 사원이 가장 크게 훼손을 입었던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뜯겨져 나온 부조상들이 버젓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에 여기저기를 장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결과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했음에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TV를 통해서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것은 아마도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였을 것이다.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에서 에디오피아 출신의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마지막 결승점인 개선문을 통과하는 사진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의 돌로 포장된 울퉁불퉁한 포장도로 위를 맨발로 달렸다. 아울러 그는 당시의 신기록을 작성하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렇다면 과연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내가 그를 처음 만난것은 중학교 시절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서 였다. 그는 그저 로마 제국 말기의 황제로서 지독한 로마의 탄압속에서도 로마가 차지한 제국의 전영토에 걸쳐서 널리 퍼져나가고 점차 세력 확산의 기로에 서있는 기독교의 잠재력에 눌려서 제위 말기에 들어 결국 기독교를 공인하였으며, 그 기독교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끌어들이려 고심을 거듭하다가 죽기 직전엔 영생을 구걸해 세례까지 받은 '야심으로만 가득찼던 어정쩡한 군주' 쯤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바라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역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는 사실을 그 후에 차차 알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를 바라보는 시야의 폭이 넓어지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부분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로마제국이 심각하게 말기적 증상을 보이자 황제는 나름의 방식으로 전반적인 재정비를 꾀하여 다시 로마를 번영의 시대로 되돌려 놓고자 노력하였다. 지속적이면서도 과감한 개혁을 추구하다보니 전제로 절대적인 황제의 권력 강화야 말로 제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측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구시대적 사고의 정적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그는 시롭게 인식한 기독교의 저력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고,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는 새로운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에 있어서 최대의 고민은, 최고 권력자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를 주고 거듭 협조를 받아야만 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이런 의식이 혹시 세속의 황제 권위가 종교적인 신권에 휘둘리는 인상을 남겨줄까봐 극도로 조심에 조심을 다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런 결정 이면에는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황제권위의 확립을 전제조건으로, 필요한 정치적 동력을 점차 기독교 국가로의 전환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고도의 정치적인 술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벌어진 말기현상을 벌이던 로마제국의 재정비와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동.서로마의 분열에서 파생된 동로마 수도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적어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장 전후의 로마제국 상황과 역사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공부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선행되지 못한다면 가이드는 가이드대로 혼자 떠들고 여행자는 그저 유명 유적지에서 인증 샷이나 날리는 패키지 여행과 다를바 없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식으로나마 로마제국 말엽의 상황과 정치제도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사두정치'는 로마제국의 말기에 채택된 아주 독특한 정치제도의 하나로서 '테트라키아(Tetrarchia)'라고 부른다.
이는 로마제국의 국가권력과 황제의 자리를 네 명의 통치자가 나누어서 담당하는 초유의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로마 황제의 권력을 분산한다'는 뜻이 결고 아니라, 방대한 로마의 '영토를 네 명의 통치자가 분할하여 다스린다'는 점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통치자 스스로가 자신의 권력을 분할하여 내려놓고자 하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당대의 최고 실권자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자신이 스스로 내어놓은 새로운 정치제도였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걷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바램이나 야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혼탁한 로마 정치권의 판단과 요청에 의하여 느닷없이 하루 아침에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다. 한 시대의 말기적 현상을 심각하게 겪고있던 로마는 도처에서 반란이 끊이질 않고 주변의 정적 국가들이 이틈을 노려서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분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전쟁터를 내달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황제는 로마의 황궁에서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전쟁터를 쫓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오른 황제의 직위가 아니었음에도 자나깨나 오로지 참혹한 전쟁터만 쫓아다니는 황제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도처에서 점점 늘어만 가는 전쟁을 보면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게되자 황제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지만 그 마저도 황제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모든것이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영토정복 전쟁에 온힘을 기울였던 것에서 나온 반작용이 었던것이다. 정복전쟁의 시기에는 전쟁에 이겨서 전리품을 획득하고 노예를 잡아들이고 식량등의 물자를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온 세상에 더없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난 입장에서는 군대를 파견하고 확보한 영토를 고수해야만 하는 수세의 입장이 바뀐것이다. 더 이상 전리품이나 승리자의 수익이 보장되지 않았다. 군대에 대한 보급품은 늘어만 가고, 정해진 군대로 지켜야만 하는 영토는 너무나 넓었다. 자신들의 한계를 한참이나 벗어나 앞으로 나가버렸던 것이다.
후방의 도시에서 경제력을 차지한 상인들의 권한이 점점 늘어만 갔다. 반면에 신분 상승의 기회였던 군인들에게 위험한 임무는 증가되었고 혜택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탈자가 속출했다. 거기에 사방에서 반란과 전쟁이 이어졌다. 로마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원로원에 제의 했다. 통치자 한 명을 더 뽑아서 너무나 넓어진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원활하게 통치하는 방법을 제의하면서 막시무스를 추천하였고, 이듬해에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황제로 임명했다. 디오콜레티아누수는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마시무스는 로마 북쪽의 갈리아 지방에서 멀리 브리테니아 지역(영국)까지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하였음에도 분란은 끊이질 않았고 제국의 통치는 여전히 한계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여 부득이하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참에 두 명의 황제를 더 뽑아서 네 명의 황제가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제의하였고, 막시무스의 동의로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1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동방세계를 담당하며 통치했다.
2황제 갈레리우스는 트라키아와 판노니아 등지의 그리이스와 불가리아 지역을 다스렸다.
3황제 막시무스는 이탈리아 본토와 지중해 건너 북부 아프리카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4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브리타니아(영국)과 갈리아(독일)와 히스파니아(스페인) 지역을 다스렸다.
분할된 영토를 통치하던 황제가 사망하여 후손에게 승계되기도 하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아버지 클로루스의 뒤를 이어 4황제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각기의 다른 황제들이 다스리는 지역마다 적용되는 법률과 조세제도의 차이가 심했다. 더하여 각 황제들간의 알력과 다툼은 분할통치 이전의 상태와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런 제도를 창안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경우 황제 즉위 이후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아시아지역의 반란 수습에 올인해 왔던 처지였다. 이는 당연히 로마 역사를 통털어 기독교를 가장 극심하게 탄압한 황제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탄압으로 인한 극심한 소요와 반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그 여파가 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자 로마제국 자체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염려하여 황제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기독교인의 봉기는 계속되었고 황제는 언제나처럼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진압했다. 역사는 이 시기를 로마제국에 의한 '대박해의 시대'라고 적었다.
견디다 못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슷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막시무스가 동반 퇴진을 선언했다. 새로운 황제들이 즉위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운명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만치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은퇴한 대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고향인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로 돌아갔다. 자신의 소박한 궁전을 짓고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배추를 재배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나머지 여행을 보내고자 했다.
어디까지나........ 은퇴 후의 소망이었다.
확인 할 바는 없으나 그의 말로는 대단히 불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 즉위한 황제들이 가세한 '사두정치'는 극렬하게 내분으로 치닺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지역을 차지한 막센티우스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의 1인 황제에 의한 제국운영을 탐냈다. 막센티우스는 자신에게 제재를 가해오는 타지역의 황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쟁을 통해 격파해 나갔다. 이젠 갈리아 지방의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만이 정적으로 남게 되었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스스로 항복해 올것을 종용하였다. 이제 콘스탄티누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패배와 자멸이 너무나도 뻔해보이는 전쟁을 어쩔 수 없이 벌여야만 하는 결정이 남았을 뿐이었다.
서기 312년 초. 라인강을 떠난 콘스탄티누스는 열악한 전력의 차이를 감수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투린과 베로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얻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전력의 손실을 입은 콘스탄티누스 진영의 앞길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 남았을 뿐이었다. 전력의 이탈은 이어졌고 사기는 이미 땅을 치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질 것은 너무도 뻔한 참패였다. 하지만 멈출 수도 돌아서서 달아날 곳도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갈리아 군단은 어쩔 수 없이 남하를 계속했고, 마침내 로마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막센티우스 군대에 테베강을 사이에 두고 밀비우스 다리에서 마주쳤다. 승리를 자신한 막센티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직접 참전했다. 불을 보듯 뻔한 전투가 예상되었다.
그날 밤,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하늘에서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십자가가 내려오고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 In this sign, you will or you shall)'라는 음성을 들었다.
날이새자 전투에 앞서서 황제는 지난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승리에 대한 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황제는 꿈에 보았던 십자가 문양을 군기에 새겨넣고 앞세우며 진군했다.
이 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원정군은 기적과도 같은 눈부신 승리을 거두었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달아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테베 강물에 익사하였다. 승리자들은 막센티우스의 시신을 건져서 목을 잘라 창에 꽃아 효시하였다. 다음날 이를 앞세우고 로마에 당당하게 입성하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목을 지중해 건너 카르타고 지역의 고마군대에 보냈다. 막센티우스의 세력이 아직 카르타고 지역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막센티우스의 목을 본 아프리카 군단은 곧 콘스탄티누스에게 모두 항복하였다.
여기에서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전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믿기지 않는 이 사건의 진실을 규정하기 위하여 전기를 쓴 에우세비우스는 이 대목에 대해서 진실이라는 황제의 별도 맹세까지 받았다고 전해 진다. 하지만, 이 전기에 앞서서 직전에 같은 작가인 에우세비우스가 직접 집필한 <교회사>에는 위의 이야기가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독교 공인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선에서 꾸면 낸 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이 어처구니 없는 씨츄에이션에 지나지 않는 이 사실을...... 그래도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다분히 역사적인 사료라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거듭거듭 강조를 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신통한 영도력 아래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기독교의 영험한 신통력까지 가세한 승리였고 통합이었다면 다시 로마제국은 번영을 구가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쟁취한 승리였음에도 제국의 한계점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음에도 더 이상 이 난제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채 20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해 제기되었던 '사두정치'가 지향했던 비젼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말로도 결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별반 달라질것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속의 모든 권력(황제)을 스스로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혼탁한 세상은 결단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본인은 황제의 지위까지도 스스로 내던질만큼 이미 모든것을 내어놓았지만, 2기 3기로 사두정치가 진행되어가는 동안에 세상 상황은 전혀 변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혼탁해질 뿐이었다. 자신이 관여할 때 보다 통치자들 간에 반목과 분란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아주 잠시 그는 자신이 스스로 황제의 권위를 내려놓고 떠나온것을 후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에게 다시 황제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사람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스스로 내려놓고 떠나온 마당에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떠나왔음에도 떠나온곳 때문에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네명의 황제 귀에 흘러 들어갔다. 자신들간의 사움으로도 벅찬 마당에, 과거의 거대한 권력이 재차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곧바로 모두의 정적으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역사에는 이후의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오래지않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막내딸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의 말미에 그녀가 디오클레티아누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였다고 적혀있다. 이 말은 많은 의미를 오늘의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결말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여 그 역시 그가 걸어갔던 길을 뒤따라 이어나가는 선택을 한다. 자신에게는 부디 다른 결과가 남겨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콘스탄티누스로서도 너무나 방대한 로마제국의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군대로 제국의 영토를 지켜내기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렸다. 이제까지의 제국이 가진것을 덜어내고 털어내고 줄이고 줄여야만 겨우 통제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제국을 둘로 나누었다.
기독교의 잠재 능력을 높이 샀고, 제국을 가로막고 있는 구태의 기득권 세력을 떨쳐내기 위하여 말고 먼 이방인의 땅으로 천도를 결심했다. 모든것은 (죽을 것이냐 살것 이냐)의 기로에서 그때마다 한가지 한가지씩 간절한 선택을 결정해나가야만 하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의 선택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결판이 났다. 그가 스스로 내어 준 서로마 제국이 고트족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이다. 그는 동로마를 과거의 '로마제국'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왕조로 찬란하게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그는 헌신적이었고, 그의 노력은 후대 황제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비잔틴 제국이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제국의 황제이자 개척자로서 역사의 시선으로 한 번쯤 심도있게 조명해 보는것도 유익한 일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가 판단한 기독교는 과연 어떤 실체를 가진 모습이었을까?
AD.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사망했다.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시대에 마침채 기독교는 동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 되었다. AD.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종교의 자유(기독교 공인)을 획득한지 58년 만에 이루어진 기독교 입장에선 최고의 성과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느닷없이 교회(로마카톨릭)는 또 다시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끄집어 냈다. 황제 앞에 내민 서류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 라는 제목이 뚜렷하게 적혀있었으며, 문서의 하단부에 분명하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서명과 직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기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신성한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황제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으며, 자신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의 권위를 포함한 동로마제국의 모든것을 로마교회에 양도한다는 기증서 이자 서약서였던 것이다.
교회(로마카톨릭)는 이 기증서의 효력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서약을 황제에게 거듭 요구했다. 후임 황제는 전임황제의 약속이 유효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곧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력에 우선한다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제 인간세상에서 종교영역의 정신세계와 세속의 권력 모두를 교회가 단독으로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실례라고 해야겠다.
중세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로마카톨릭의 세상이 곧 중세 암흑기로 역사를 검게 칠해나가기 시작했다.
영원할 줄로 알았다. 교회(교황)의 권세가 영원할 것이라고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둠은 광명으로 빛나고 거짓은 반듯이 진실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지독하게 공부벌레였던 한 학자가 15세기 초엽에 참으로 놀라운 진실을 밝혀낸 것이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은 적지않게 르네상스 흐름을 가속화 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아랍세계에 이미 널리 퍼졌던 헤로도투스와 투키데스의 고대 그리이스 문헌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하였고, 키케로의 글을 비판하기도 했고, 신약성서를 문헌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던 '로렌초 빌라'는 오랫동안 고문서를 연구한 끝에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가 후대의 교회(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거짓으로 작성된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증을 시도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시대마다 변하는 당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법과 용어에 대해서까지 구분해가면서 세세하게 살펴나갔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이 기증서는 모두 가짜이며 8세기 후에 새롭게 장성된것이다' 라고 발표했다. 유럽사회를 넘어서 아랍세계와 예루살렘까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허위라고 반격을 가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장만큼이나 치명상을 입게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문헌을 필사하고 번역을 통해서 고전시대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오랜 기간동안 전념해온 이들의 주장과 증거 제시에 마침내 교회는 굴복하고 말았다. 1천년 동안 지속된 교회의 신성하면서도 절대적인 우선권 주장이 모두 가짜였던 것이다. '로렌초 빌라'와 '마르실리노 피치노'와 '피코델라 미란돌라'는 초기 르네상스를 앞당기는데 크게 공한한 '인문주의 3총사'였던 것이다.
드러난 진실과 교회(로마카톨릭)의 위선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교황(교회)는 왜 그토록 세상의 가장 높은곳에 올라서고 싶었을까? 거짓을 창조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잘 포장되어있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가볍게 걸어서 오르노라면 양 옆으로 로마 특유의 잘가꾸어진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길게 늘어서 있다. 전형적인 로마가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멋진 문이 하나 나타난다. 지금은 '로마 포룸'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면 안쪽으로 매표소와 작은 매점과 화장실과 휴계실이 놓여있다.
콜로세움과 로마 포룸을 기본으로 하고 팔라티노 언덕을 무료로 둘러볼 수 있고, 다른 한곳을 더 포함한 후에 여타의 문화재나 박물관 이용시 할인혜택이 주어지는 (로마 패스)를 이곳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미 콜로세움 매표소에서 구입하였기에 별도의 추가구매는 필요치 않다.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출입문은 아마도 어느 사원이던가 어떤 궁전의 출입문이었으리라.
이 출입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언덕을 내려가면 곧바로 (로마 포룸)으로 이어지고, 왼쪽 언덕을 오르면 로마의 기원과도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있는 신성한 지역인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하게 된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부른다. 베베강 인근으로 야트막하게 도열해 있는 7개의 언덕을 사이에 두고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나아가 제국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다.
성역으로 추앙받는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아벤티노 언덕, 셀리오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 카피톨리노 언덕, 비미날레 언덕, 퀴리날레 언덕 등이 감사고 있는 형국이다.
로마 도심을 걸어서 여행하다보면 확실하게 느껴지는 언덕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건물숲에 가려서 거의 언덕임을 잘 느끼지 못하는 장소도 많이 있다.
아무튼 로마의 역사는 이곳 신성한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전쟁의 신(神)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형제는 어떤 이유로 테베강 동쪽에 버려졌다고 한다. 늑대가 이 쌍둥이를 품어 팔라티노 언덕의 동굴에서 늑대의 젓을 먹여 길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인근의 부족들을 흡수통합하여 팔리티노 언덕에 본격적인 라틴민족의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는데, 권력에 대한 마찰로 형인 로물루스가 동생 레물루스를 죽이고 통치자로서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 부르게 되었으며,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로물루스의 건국 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하는 왕정체제를 유지하였다. 이후로는 로마의 귀족들(원로원)에 의해 주도되는 로마 공화정의 시대가 도래학 되는 것이다.
하여 건국 신화와 연계된 신성한 구역인 팔라티노 언덕은 항상 권력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이 된다. 왕과 귀족들은 앞다투어 이곳에다가 자신들의 궁전을 짓고 살고자 했다. 그것이 통치자로서의 로마 정통성 확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다양한 유적들이 상당이 여러곳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이 궁전들이다. 언덕너머의 양지쪽 동굴에는 고대 로마의 흔적이 더욱 여실하게 남아있다. 그곳 동굴중의 어느곳에선가 로물루스와 레물루스가 늑대에 의해서 양육되었을 것이다.
언덕의 가장 높은곳으로는 로마 가도를 가로질러 건너 온 '클라디우스 수도교'가 부분적으로나마 찬란했던 로마의 과거 영화를 회상이라도 시켜줄듯이 그대로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로마는 이 언덕에까지 수도교를 건설하여 왕들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물론 이곳에 분수와 목욕탕과 식물원까지 만들고 사용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언덕의 뒷편으로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현재에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프란시스 가든(Casina Farnese)'는 중세시대 알렉산드로 파르네 추기경이 조성한 정원으로 유럽 최초의 식물원으로 만들어진 유서 깊은 장소있다. 과거의 팔라티노 언덕을 회상해 볼 수 있을만큼 여전히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의 건축물 일부가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남쪽 먼 발치 아래로는 로마제국을 통털어 규모면에서 가장 컸던 대전차 경기장이 현재은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남아있다. 영화 (벤허)에 등장하는 로마의 대전차 경기가 실제 이곳에 셑트장을 지어서 촬영했다.
발길을 우측의 언덕으로 옮기면 저멀리 도심 너머로 바티칸 대성당의 지붕이 시야에 들어 온다. 그리고 가까운 발아래로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코스메딘 교회가 보인다.
이제 왔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돌리면 다시 내려가는 언덕길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 (로마 포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옆에 끼고 아랫쪽을 향해 포장도로 위를 걸어내려가면 이내 또 하나의 개선문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막는다. 티투스의 개선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부터 '진짜 로마'를 만나 볼 수 있게되는 것이다.
'로마 포룸(Roman Forum)'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진짜 로마의 심장부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 소리를 일으키며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다.
관광안내판이나 설명서는 이미 내팽겨쳐 버렸다.
로마제국의 한복판에 서면 시간 개념이나 목적지나 무엇을 먼저 볼것인가 하는 걱정과 근심이 어느새 모두 사라진다.
앞으로 나아가로 로마요, 돌아서도 보이는 것은 로마다. 좌우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드러나는 것 역시 온통 로마 뿐이다. 굳이 한 곳에 집중할 이유도 시간에 쫓기며 쫓아다닐 이유도 전혀 없다.
로마는 사방에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마냥 우리를 향해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만 서 있다.
이젠 우리가 로마의 품속으로 뛰어들 타이밍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포로 로마노에 있다.
---- 다음 (르네상스 산책)은 포로 로마노 여행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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