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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르네상스로 가는 열차를 타고.....

by 피안재 2020. 11. 29.

 

 

 

 

 

 

 

 

 

 

 

 

 

 

 

 

 

 

 

 

 

 

  열차는 정시에 팔레르모 중앙역을 출발했다.

  밤을 새워 어둠을 뚫고 달리는 기차는 내일 이른 아침이면 우리를 로마 테르미니역에 내려 줄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몰타를 여행하고 시칠리아로 건너 온 우리는 이제 이탈리아 본토로 향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이번 여행의 주요 관심사인 '르네상스'가 이제 본격적으로 보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본고장을 논하자면야 당연히 (피렌체)가 등장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며칠 후에 다음 여행의 단계로 피렌체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피렌체에서 찬란하게 꽃피운 르네상스가 종국엔(나름의 시대적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로마로 이어져서 더 찬란한 문명을 꽃을 피우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베네치아로 전해져서도 찬란한 영광을 재현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유럽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폴랑드르의 르네상스는 폴랑드르만의 르네상스로,  서쪽 끝자락 스페인에까지 전파된 르네상스는 스페인만의 르네상스로 새롭게 거듭 피어난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르네상스) 미술과 건축과 조각과 문학과 철학을 만난다는 설레임 때문이다.

  대학시절(해외여행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대) '로망' 이나 '버킷 리스트'가 아닌 '죽기 전에 이스탄불을 볼 수 있을까?' '나 살아서 피렌체를 가볼 수 있을까?'하는 꿈을 간직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다 세상이 변하고 보니.......  이제 이스탄불이나 피렌체는 나의 로망이나 버킷 리스트에서 제외시키는 세상을 내가 살게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스탄불이나 피렌체는 이제 내 간절한 열망에 없다.  대신 너무도 많은.......  그리이스. 산티아고 순례. 아일랜드. 쿠바. 페루 등등이 나의 버킷 리스트를 새롭게 가득 채우고 있다.

  이스탄불은 한 여섯번쯤 방문 했나?  이젠 기억에서 조차 헷갈릴 정도이고.......

  피렌체는 이번으로 세번째 방문을 앞두고 있다.  또 이탈리아를 다시 찾아 올 기회가 있을까 싶어진다.  더우기 이번 여행은 채 1년도 안되어서,  10개월만에 다시 찾게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방문이었으니 말이다.  서양역사나 인문학이나 미술사를 나름으로 공부하고자 함에 있어서  그리이스. 로마를 빼 놓고는 도무지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터키 이스탄불에 머물다가 무작정 로마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은것이 첫 이탈리아여행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예 배가 죽을 정도로 고픈것은 참거나 포기할 수가 있겠는데,  적당히 견디기 힘들만큼 배가 고파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된다.  타고난 역마살의 배고픔이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2019년 2월에 무작정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전체적으로 빠듯한 일정에 흐리고 쌀쌀한 날의 연속이었다.  어느 정도의 정신적인 허기를 면하고 무사히 귀국을 했다. 열심히 일과 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집에서 나만 이탈리아를 못 가봤네?  이럼 안되는거잖아?  아들도 며느리도 이탈리아가 너무 좋고,  특히 베네치아가 제일 좋았다고 하는데.........  나도 이탈리아 가고싶어졌어.'라고 챠밍여사가 부담이 팍팍 솟아나는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순전히 빛쟁이가 돈 내어놓으라고 독촉하는 폼과 별반 다를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부랴부랴 '한 번 더 이탈리아'를 계획하였고,  같은 해 12월 중순을 넘어서서 우리는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르네상스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기차에 탄 채  바다를 건너가는 시칠리아 익스프레스.

 

 

 

<공지사항>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르네상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는데 있어서는  수많은 문학가. 철학자. 미술가. 조각가. 평론가. 과학자. 건축가 외에도 정치가와 종교인과 로마나 그리이스 시대의 인물 등등의 시대적 중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하여 (르네상스 산책)을 전개해 나가고자 함에 있어서 부득이 하게  지도나 설계도나 책자등의 자료나 인물 사진들이 필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조각과 건축을 다루고자 함에 있어서도 자료나 사진들이 많이 필요하게 된다.  여행을 통해 내가 소장한 사진과 자료들이 상당하지만,  전문가에 비해 형편없는 내 사진기술의 한계나,  미처 내가 가보지 못한곳에 소장된 그림이나 조각이나 건축물의 사진들을 비롯한 부연 설명에 필요한 그림이나 사진이나 기타 자료들은 오로지 (Google)에 소장된 자료들을 검색하고 가져와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사전에 밝혀두고자 한다.  어떤 상업적 이용 의도 없이,  의도하는 바대로 사료들을 전달함에 있어서 보다 쉽고 풍성한 내용으로 이해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리하게 되었다.  구글의 도움에는 크게 감사하고,  이런 (퍼옮)에 불편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지적이나 시정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정할 것을 약속하면서 스스로의 다짐을 확실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이탈리아의 철도망은 거의 완벽하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100점 만점에 95점 정도)

 

 

 

 

 

 

 

 

 

 

 

  로마행 야간열차에 오르면서 부터 챠밍여사의 입가에서는 함박웃음이 연실 떠나지 않는다.

  시칠리아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있어서 이제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도 아닐것이요,  고대하던 로마로 향한다는 설레임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웃음에는 지금 타고있는 야간열차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것 같다.  동남아를 여행하면서는 장거리 버스를 넘어서 야간 슬리핑 버스를 나름 충분히 경험해 보았던 터였다.  또 야간 열차야 지난해 스페인 여행에서 포루투갈 리스본을 출발해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야간 열차를 12시간 이상 타 본 경험이 있다.  다만 그때는 사전 예약이 원만하지 못하여 침대칸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4인용 침대칸이 있는 야간열차였다.

  '나름 아늑하고 편리하겠네? 주점부리도 나오고.......  비행기 보다 운치도 있고 더 좋은것 같애.'

  자리에 누워 보기도 하고 2층 칸에 올라가보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야간 풍경도 내다보다가 생수랑 비스켙도 확인하고........ 연습 삼아서 화장실도 다녀 온다. ㅎㅎ

  자정 가까이 되어서 기차는 메시나 역에 도착했다.  한참을 멈추어 서서 기다리다가 아주 느린 속도로 항구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쇳덩어리들이 부딪치는 아주 우렁찬 소음들을 연실 발산하면서 서서히.......  아주 느릿느릿하게 눈이 부시게 조명이 밝혀진 커다란 문으로 들어간다.  메시나 해협을 오가는 커다란 배에 기차가 고스란히 승선하는 것이다.  승객이 내리지 않고 기차에 올라탄 채 통째로 배에 실어서 바다를 건네준다.

  메시나 해협의 가장 가까운 거리를 거대한 화물선이 헤엄쳐 건너간다.  배가 기차를 실어나르는 동안에 여행객들은 뱃전에 나가거나 갑판에 올라 메시나 해협의 양쪽을 모두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칡흑같은 어둠과 세찬 바람이 안겨주는 추위뿐이겠지만 말이다.

  아주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겠는데,  수로가 좁은만큼 수심이 깊고 거센 풍랑이 일기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정부와 시칠리아 지자체가 수십년째 이 메시나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 건설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이런 난공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 뿐이지 않을까 싶다.  페낭 대교나  이스탄불 해저 지하철 등등  세상에서 불가능한 토목 건축공사는 언제나 한국인들이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혹 머지않아 한국인들에 의해서 불가능으로만 여겨졌던 메시나 현수교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는것은 아닐까?

 

  메시나 항구를 떠난 배는 그리 오래지 않아서 이탈리아의 최남단 칼리브리아 지방의 산 지오반니 항구에 기차를 내려 놓는다.  이렇게 접안과 이안에 대부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에 걸린 시간은 약 50분 정도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기차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어둠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시칠리아를 벗어나기까지는 여래개의 도시와 마을에 번번히 기차가 모두 정차했었다.  그런데 시칠리아를 벗어나 본토에 상륙한 기차는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죽어라 달려가기만 한다.  그래도 나폴리에는 서겠지?  산 지오반니에서 로마에 이르는 국토의 절반을 달려가는 여정 중에 로마 못지않은 대도시가 나폴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나폴리에만은 정차를 하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실은 어젯밤에 갑자기 살짝 여행 스케줄을 조정해서 나폴리에 잠시 들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분히 야간 와인 만찬중에 챠밍여사가 '쏘렌토로 돌아오라' 타령을 했기 때문이다.  로마로 가는 중에 새벽에 나폴리에 들려서 쏘렌토와 아말피 해변을 맛만 슬쩍 보고나서 다시 로마로 갈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얼씨구?

  기차는 나폴리에 멈춰서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본토에는 다른 기차 노선들이 많이 정비되어 있기에,  시칠리아에서 오는 기차는 본토에서의 전구간을 그냥 통과한다는 답변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일탈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ㅎㅎㅎ   '이런게 자유여행 아니겠어??????'

  결국 기차는 나폴리를 지나쳐 우리를 로마 테르미니역까지 곧장 데려가고 말았다.

  그럼 나폴리와 쏘렌토와 아말피가 우리 여행에서 모두 사라졌느냐?  글쎄 올씨다.........  당장은 아닌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직은...........

 

  이른 아침  6시 15분.

  새벽 미명이 밝아오는 즈음에 우리는 로마 테르미니역에 도착했다.

  '여기가 진짜 로마야?'

  '이 세상의 길이 모두 로마로 통한다고 했잖아.  밤새 달린 기차가 멈추서서 우리를 내려 놓았으니 로마가 틀림없겠지.'

 

 

 

 

 

 

 

 

 

 

 

 

 

 

 

 

 

 

 

 

 

 

 

 

 

 

 

  로마(Roma).

  로마가 뭐지?  로마는 어떻게 해서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거지?

  세상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우리는 지금 로마에 있다.

  혹,  여기가 우리나라 대도시마다 있는 나이트 클럽 '로마'는 아니겠지?

  아니지..........

  '로마'는 구닥따리 구시대적 지나간 유물이라고 치자......... 그럼.......  여기가 지금 '이탈리아(Italy)' 라는 이야기가 되는거잖아?  토티와 아주리 군단의 이탈리아.'

  이탈리아답다는 것이 무엇이지?

  여기가 이탈리아야?  아님 로마라 불러야 하는 거야?

  이탈리아가 로마를 가진 것이야?  로마가 이탈리아를 낳은 것이야?

 

 

 

 

 

 

 

 

  지난 밤, 야간열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끝내 나는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로마에 대한,  또는 르네상스에 대한 막연한 설레임이나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수없이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져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없는 속삼임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가는 떠나갔다.  간혹 여행중에 먼거리를 이동할때 생겨났던 그렇고 그런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연속된 시간들의 끝자락 쯤에는 역시나.......

  '르네상스(Renaissance)를 다시 만난다............'

  무심한듯 물끄러미 차창 밖으로 아른거리는 '르네상스'라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림자 처럼 '휴머니즘' 이라는 녀석이 뒤를 따라다닌다.  태양이 사라진 밤이되면 그림자는 사라져야만 하는것이 순리일테인데  저렇게 항상 따라다니고 있는것을 보니 아마도 그림자는 아닌듯 싶다.  그럼 저들의 관계는 뭐지?

  그래서 더는 참지 못하고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휴머니즘(humanism)' - 1.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따위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나 태도.   2. 서양의 문예 부흥기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에 널리 퍼진 정신 운동.  카톨릭교회의 권위와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문화적 교양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더 보태어 부연 설명을 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보여진다.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거명된 로마카톨릭이나 성령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 탐탁지 않은 표현이거나 신성모독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이번엔 르네상스에 대하여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르네상스(Ranaissance) -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  도시의 발달과 상업 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개성. 합리성. 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反)중세적 정신 운동을 일으켰으며,  문학. 미술. 건축. 자연 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화에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보고 다시 짜맞추어 보아도 그 말이 곧 그 뜻이 아닌가?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을 결코 뗄레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같은 것을 일컷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이다.

  르네상스의 다른 이름이 휴머니즘이고,  휴머니즘의 다른 표현이 르네상스일까?

  예술과 문화로 접근하면 르네상스이고,  학문과 사상으로 접근하면 휴머니즘이 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왜 이탈리아였을까?

 

 

 

 

 

 

 

 

 

 

 

 

 

 

 

 

 

 

 

 

 

 

 

 

 

 

 

 

 

 

 

  이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적어도 이탈리아 하면 이런 정도는 되어주어야 하다고 생각되던 적이있었다.

  뒷골목의 거지도 비록 지저분하지만 양복을 걸치고 스카프를 두르고 구두만은 반짝거리며 적당한 수염 아래로 멋지게 담배연기를 내뿜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시장 거리에서 곷이나 담배를 파는 아가씨도 최소한 소피아 로렌 정도의 미모에 장미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멋진 썬글래스를 썼을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탈리아는 그러하리라 생각했고 또 그랬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파시스트 정권의 뭇솔리니가 있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으며,  패망과 함께 엄청난 경제공황의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정엄하고 화려한 로마의 유적들이 전쟁 공습으로 인해 처참하게 파괴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탈리아는 또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언제나 보그지 같은 온갖 패션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들 같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유럽이 모두 그러할진데 하물려 유럽의 중심이자 심장인 로마야 오죽하겠느냐 싶었었다.

  이탈리아를......  로마를........  꼬마들이 생각하는 디즈니랜드 처럼 생각하게끔 하는데는 어쩌면 이들의 역활이 적지않게 기여했으리라.

  로마 시내를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리고,  스페인 광장 계단에서 젤라또를 먹고,  악마의 입에 주먹을 넣어볼 수 있는 로마(이탈리아)야 말로 로망이요,  버킷 리스트 톱 랭킹을 넘어 간절한 소망이 아니었겠는가?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

  또한 우리는 로마(이탈리아)를 꿈꾸며 살았었다.

 

 

 

 

 

 

 

 

 

 

 

 

 

 

 

 

 

 

 

 

 

 

  인류 역사를 비극으로 물들게 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릇된 종교전쟁은 교황(로마카톨릭)의 권위를 극대화 시켜주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제 교황은 세속의 권력과 종교적 영역을 모두 총괄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의 반열에 스스로 올라섰다.  세속의 왕이나 황제의 권위도 여전했으나 이제 그들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것을 허가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젠 세상에 흩어져 있는 대성당들과 성직자들의 지위와 권세마저도 세속의 군주들 못지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너무도 당연하게 교회(교황)와 성직자들의 타락과 탐욕과 횡포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 시기인 중세시대 1천년의 역사를 '암흑의 시대'라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우르바노 2세 교황의 칙령에 따라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떠난 십자군 원정대는 첫 원정에서 4년동안 약 7만 명의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 혈육들 간에 벌어진 장자권 내지는 상속권에 대한 골육상쟁이었다고 하겠다.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은 그 분 스스로가 유대민족을 선택하셨듯이 영원히 유대민족만의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는 한,  예수의 십자가 부활사건으로 생겨난 기독교(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기독교적인 정통성을 절대로 가질수가 없게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감도장을 찍어서 약속하신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을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 본래의 1차 상속권자들(유대민족)을 모두 없애버리면,  등기소(구약성경)에 기록된 상속권자가 더 이상 없게도리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이제 온세상의 하나님으로 자연상속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대표권자인 교회(로마카톨릭)가 전권을 가지게 된다는 허망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다.

  보니파스 7세는 요한 14세를 암살하고 추기경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뿐만이 아니었다.  올리안스 주교는 요한 12세와 레오 8세와 보니파스 7세를 '피로 더럽혀진 악마' '하나임의 성전에 앉은 적그리스도'라고 몰아붙여서 자기 마음대로 교황을 갈아치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노쇠하여 더 이상 교황직을 수행하기 어려웠던 요한 15세 교황은 그냥 물러나기가 참으로 아까웠다.  그리하여 그는 은밀하게 몇 몇 사람에게 사신(브로커)을 보냈다. 결국 교황직은 요한 15세에게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한 그레고리 5세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노쇠해진 그레고리 5세는 실베스터 2세에게,  다시 실베스터 2세는 요한 17세에게,  요한 17세는 셀기우스 4세에게, 셀기우스 4세는 베네딕트 8세에게  돈을 받고 교황권을 팔았다.  한동안 뜸했던 성직매매(聖職賣買)는 요한 19세와 베네딕토 9세로 이어지고, 그레고리 6세와 실베스터 3세의 시대에는 이 같은 성직매매의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경쟁력이 치열해지자 이번엔 뛰어난 암살자들이 로마의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속속 모여드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주장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과 비호가 자신들에게 함께하고 있다고......'

  십자군전쟁의 실패는 교회(교황)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히게 되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위클리프는 '교황이 국왕보다 높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며 이는 심각한 죄에 해당된다' 라고 주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절대적인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로마카톨릭으로서는 도저히 그대로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끝내는 위클리프가 사망한지 40년이 지나서 종교재판을 열어서 유죄를 선고하였고,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서는 화형해 처해 버렸다.  십자가 부활 사건의 자비와 은총이 그렇게 세상에 베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중세시대였다.(누가 이슬람은 평화를 말하고 기독교는 사랑으로 드러난다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가?)

  교황의 권위는 심각하게 추락했고  교회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카톨릭이 독점한 채 행해지는 가르침과 신앙생활의 방편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저들 욕심에 의해 자행된 허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교황과 고위성직자들만이 독점하는 라티어 성경에 대한 회의론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성경과 교리와 신앙생활에 대하여 진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유대 경전과 초대교회에서 전해내려온 히브리어와 그리이스어로 된 초기성경에 관심을 넘어 직접 번역을 시도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교황(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넘어서서 불신이자 로마카톨릭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틴테일(Tyndale)이 가장 먼저 성경 번역을 시도한 죄로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화형에 처해졌다.  절대절명의 위기의식에 휩싸인 교황(로마카톨릭)은 마침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신성한 교회 안에 '거룩한 사무소(Holy Office)'가 설치된 것이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최초로 설립하였고, 교황 그레고리 9세의 칙령을 통하여 '거룩한 사무소'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을 펼쳐나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며 합법적인 정식 기구로 인정받게 되었다.  후세의 역사는 이 '거룩한 사무소'를 '종교 재판소(Inguisition)'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단자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만든 정식 기구이다.

  하지만 이 거룩한 사무소에 강제로 끌려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교회나 교황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이었다.  끌려 온 사람들은 모조리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발자는 절대 밝혀지지 않았으며, 모든 소송 절차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모든것이 교회의 고위성직자의 소관이었다.  최소 판결이 종신형이었으며 대부분은 화형에 처해졌다.  피고인의 재산은 대부분이 교회로 귀속되었으며 일부가 국가로 환속되었다.

  종교재판소의 페단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교회(교황.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해 종교 개혁의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을 때이다.  교황 이노센트 3세 시대에 들어서 30년 동안 약 900.000명의 개혁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종교재판을 통해 사형 시켰다.

  거룩한 옷을 입은 성직자들과 신자들(로마카톨릭의 부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는, 저들의 지시와 요구에 다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다가 온갖 고문으로 거짓된 죄를 시인케 하고 화형시켜 버렸다.  교황과 교회와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안한 '거룩한 사무소(종교재판)'은 놀랍게도 그후로도 장장 500년 동안이나 모든 악행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후대의 역사는 종교재판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기독교인의 숫자를 무려 5천 5백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전무후무한  최고의 악마적 행위였던 것이다.

  면죄부 판매는 이미 9세기 경에 교황 파스칼 1세와 요한 8세에 의해서 새행된적이 있었으나,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원정대를 파견함에 있어서 군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다시 꺼내든 것이 바로 면죄부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교리에 다르자면 인간은 누구나 죽어서 천국이나 연옥이나 지옥을 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승에서의 삶 중에서  올바른 신앙생활과 교회에 대한 기여도  등등을 통해서 구분되어 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속적인 인간의 경우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99%의 인간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원죄(인간으로서 탄생 자체가 죄악)에 해당된다.  십자군 원정대에 참여하여 성지를 탈환하는 군인에게는 특별히 이 지옥행 원죄를 탕감하여 준다는 것이 바로 면죄부였다.  이처럼 교황에게는 죄를 가감하거나 면죄시켜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로마카톨릭교회(바티칸)을 개축하면서 건축비용이 모자라게 되자,  이승에서의 모든 죄를 사하여 줌을 조건으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나게 엄청나게 면죄부를 팔아댔음에도 여전히 바티칸 성전 건축비용은 터무니없이 모자르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이승에서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면죄부 판매를 넘어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으로 짓게될지도 모르는 온갖 죄악에 대한 '미래형 면죄부'를 새롭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황 식스터스 4세에 이르러서는 당사자를 뛰어 넘어 과거의 조상님들이 지은 죄에 대한 면죄부까지 팔기 시작했다.  이는 고스란히 교황들의 개인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교황쯤이나.......  교황씩이나 된 사람들에게 돈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도대체 어디에 쓸려고?

  세상 최고의 권력을 쥐고,  금은 보석으로 가득한 세상의 카톨릭 교회가 다 자신의 집이자 별장이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이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이 모두 자기 만대로 부릴 수 있는 수하 아닌가?

  할렐루야!

  아멘!  아멘!

 

 

  결론적으로 마무리하자면,  단테의 (신곡) 이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지옥의 가장 깊은 아래쪽에서 가장 참혹하게 신의 징벌을 받고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교황이나 최고위 성직자들이다.(이는 작금의 종교에 연관된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어떤 의미로든 나름의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지각있는 선각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카톨릭의 전횡에 다른 1천 년의 중세 암흑기에 서서히 새로운 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휴머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성' 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중세 기독교에 대한 반감(교황과 로마카톨릭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류의 흐름'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세 기독교의 만행이 오죽했으면  1천년 이상을 숨도 제대로 못쉬면서 죽은척 지내오던 민초들 속에서 때를 같이하여 느닷없이 동시대에 그렇게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나타났을까?

  그렇게 등장한 휴머니스트들에 의해서 새롭게 (르네상스)라는 문명사조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 마저도 거룩한 신의 축복이라고 여겨야만 할까?

  르네상스라는 이 위대한 문예사조를 위해서 신(神)께서 하신 일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없다.  아무리 생각하고 찾아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신(神)의 존재가 없는 르네상스가 가능했을까?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신은 항상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있었다.

  헐!!!

  어렵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로마카톨릭의 자성을 주장한 혁명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중세시대 비로소 시작된 초기 휴머니스트들의 상당수가 '에라스무스'를 따르는 기독교인들 무리였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직자 출신으로 인문주의자로 잘 알려진 에라스무스에 대하여는 호감과 비호감 사이에서 극렬하게 지지자들이 갈라지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를 평가할 때 루터나 캘빈같이  개혁을 주창한 종교혁명가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분명한것은 교회(로마카톨릭)가 주도하던 중세암흑기에서 한줄기 새로운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유럽의 지성사회에 전파시킨 역활에 대해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대변환의 시기에 등장한 선각자로서 다분히 저평가 받고있는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불어 또 한명의 덜알려진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또한 극히 저평가된 유럽 지성사의 선각자 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루터나 캘빈에 의해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탄생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들은 모두 동시대를,  혹은 아주 조금 앞선 시대의 에라스무스와 논쟁도 벌이고 상대를 극렬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루터나 캘빈이 에라스무스의 여향을 받지 않았다고,  또는 그가 먼저 시작해 닦아놓은 개혁의 발판 덕을 보지 않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매우 독특한 기질과 개성으로 뭉친 루터나 캘밴은 끝내 에라스무스를 깔아뭉개고자 했다.  종교개혁에 대한 의지와 확신이라기 보담은 독보적인 자신들만의 입지를 노린 명예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루터나 캘빈이 보여주었던 때론 좀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아집과 집착 등은 앞서 살다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활동에서 적지않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주장한 다소 온건적인 혹은 타협적인 종교개혁이나,  결코 무장투쟁을 두려워 하지않는 초월적 혁명 같은 종교개혁을 직접 실천하고자 뛰어들었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중간쯤 노선에서 루터와 캘빈은 개혁을 주장했고  새로운 종교단체를 만들었다.  로마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분명 다르다.  루터와 캘빈은 구태에서 벗어나 진보와 개혁을 수반한 새로운 종교단체를 만들었다고 온 세상과 하늘나라에까지 선포했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의 주도하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삶이나........

  프로테스탄트가 인정되고 세상 종교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오늘날의 인간들의 삶이나.......

  무엇이 달라졌고 얼마나 나아졌는가?

  과연 종교(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역활로 인간의 삶이 윤택해 졌고 나아가 과거보다 행복해 졌는가?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편리함과 생명연장의 새로운 길로 일끌어 왔는가?  또한 그것이 행복인가?

  지금 인류는 과학 발전의 혜택을 극한으로 누리고 있다.  무한한 편리함과 나아가 영원한 삶에의 접근을 열망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은 절대적 신성함을 전제로 하는 대부분의 종교에 심각하게 타격을 입히고 있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교회(로마카톨릭)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신성 모독이자 성경의 기록을 오류로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과학의 발전은 '우주가 하나님이 만든 지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향해 돌고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입증해 냈다.

  교회는 마치 세상이 이대로 곧 멸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과학을 폄하하고 내치고 불경스런 연구를 계속하는 과학자들을 무자비로 잡아다가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장으로 보내 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이제 진실이 밝혀졋다.   무조건 신성하다고만 절대시했던 사실들이 하나 둘 오류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회는 여전히 버젓히 옛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온 우주를 통털어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그 또한 해답은 아주 간단 명료하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 존재이니까..........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면서 과학이 주는 혜택과 풍요를 마음껏 즐기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겉과는 다르게 혹시나 있을지로 모르는 하늘나라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또 있을지도 모르는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도 슬쩍 다리를 놓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는 삶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삶의 행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중세에 나타난 휴머니스트들도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생각들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냥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는 위험스런 선택보다..........  '우리 인간 스스로를 되돌아 보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르네상스'라 하겠다.  르네상스는 그다지 위험한 것도 유별난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도 더 늦기 전에 우리들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만 하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중세의 초기 휴머니스트들은  하나같이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을 다시 찾는데 열중했다.  이는 곧 시와 철학과 문학으로의 탐구로 이어졌으나 이상하리만치 고대의 과학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독주와 복종과 희생만을 강조하는 종교적 반감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조는 이제 무조건적으로 종교를 지적 생활을 넘어 세속적 생활의 전반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이제까지의 시대(중세)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인간은 결코 태생적으로부터 죄인이거나 무한한 복종과 희생을 강요당하고,  교회(교황)의 판단과 선처에 의해서만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는 원시적인 하등동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신과 직접 교류하였고,  함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 나누고 음악과 춤과 포도주를 나누며 함께 축제를 벌이며 살아왔다.  신과 인간은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서로에게 무한한 존경과 자비를 베풀고 서로를 걱정하며 온정을 나누던 존재였다.  비록 인간은 천상의 신들에 비해서 무한한 능력면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지고 영원한 삶을 영유할 수는 없지만,  상호간에 원만한 교류와 어울림이 전제된 상황에서 신(神)과 인간(人)의 구분이나 차별은 별반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였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신과 인간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뛰어넘어  남자 신인 인간 여성을 사랑하기도 하고,  여신이 인간세상의 남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낳기도 했다.  신과 하늘나라는 지극히 인간세상과 가깝고 다를바가 없었다.  신의 품격과 인간 존재의 가치가 백지장 한 장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등장한 헤브라이즘은(로마 카톨릭 중심의 기독교) 하루아침에 헬레니즘(그리이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인간을 비참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영원한 죄인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성경엔 분명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죄 없으신 귀한 분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태생적인 죄인이 인간이란 존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모든 죄악으로 부터 영원히 구제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공했다.  인간은 구원을 받았으며 영원한 영생을 보장받게된 것이다.

But.........  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고,  로마 카톨릭이 종교를 뛰어넘어 세속의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쥐게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다시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미개한 하등동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이란 존재의 가치와 구원의 길은 오로지 교회(교황)에 달려있게 되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폭정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어쩜 저들에게 십자가 부활 사건은........  가짜 마패를 앞세워 횡포를 저리르는 가짜 암행어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온 우주에는 오로지 세 가지 존재만 있을 뿐이었다.

  영원히 침묵하면서 교회(교황)에 전권을 위임하신 하나님과,  위임받은 전권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무오류설로 스스로 정당화를 꿰하면서) 내지는 전횡을 일삼는........  말로는 신 아래라고 하면서도 행태는 거의 신과 동격으로 행동하는 절대지존의 교황(교회)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신의 가르침에 순종해야만 하는 무지렁인 인간 무리로  그들에게는 신의 대리권자인 교황(교회)에게 영원히 복종해야만 하는 운명이 남아있을 뿐이다.

  당연히 로마 카톨릭으로서는 고대 그리이스나 초기 로마의 불경스런(?) 이교도적인 야만성(?)의 파괴하고 지워내서 기독교적인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확보해야만 했다.  이는 이교도에 탄압과 파괴로 이어졌고 인간 내면의 생각이나 사고까지도 개조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이로써도 부족해지자 '성스러운 사무실(종교재판)'을 만들어 고문과 살인 행각을 벌여나갔다.  이 모두가 성스러워야 할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 되었다.

  신의 침묵은 곧 교회의 정당함으로 합리화 되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중세에 들어서면 이제 유럽영토(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그리이스. 초기 로마에 관한 모든것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다.  아테네도 제우스도 헤라 여신도 죽었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땅속에 묻혀서 잊혀진지 오래되었다.  교회는 그들의 무덤 위에 (불경) (이교도의 잔재) 등의 팻말을 가득 세워놓고 끊임없이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사람이나 문화나 풍습이나 제도나 미풍양속까지도 철저하게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갔다.  유럽의 그 어떤 사람도 이제 그리이스나 플라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이스는 엉뚱한 곳에서 부활한다.

  이교도인 아랍인(무슬림)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지중해를 건너면서 자신들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하였던 위대한 고대문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것이다.  그들은 옛 그리이스의 영역이었던 지중해 연안을 모두 샅샅이 뒤져서 그리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북서쪽 아프리카와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집트와 그리이스의 시골에서 하나 둘씩 고대 그리이스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는 물론 새롭게 점령한 에스파냐(스페인)의 대도시에 대학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고대 그리이스 문화'를 번역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폴론과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가 되살아 났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피타고라스가 되살아 났다.  호머의 서사시가 번역되고 아랍의 대학과 거리에서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리이스의 신들과 문학 예술이 로마 카톨릭은 신성함을 훼손하고 성스러운 믿음에 혼란을 초래한다고 파괴하였지만,  역시나 유일신 알라를 믿고 따르는 이슬람은  그리이스 문화와 예술에서 나오는 배움을 통하여  알라신의 정당성을 더욱 논리적으로 가다듬고자 하였고,  문학과 예술을 통하여 더욱 알라신을 찬양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내는데 적용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이교도 문명(그리이스)를 놓고,  같은 신앙의 뿌리를 가진 교회(로마 카톨릭)와 이슬림교의 태도와 방식은 극명하게 달랐던 것이다.

  이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 '평화'를 주장하게 된다.  인간은 소중한 존재이며 비록 종교가 다르다 해도 신은 평화를 통해 공존과 공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하신다.  하여 인종과 민족과 종교를 뛰어넘어서 '손님은 알라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다' 라고 그들은 인간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교회(로마 카톨릭)은 '사랑'을 내세웠다.  신이 허락하신 무한한 자비와 은총이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인 명분이었다.  '십자가 부활 사건의 완성'은 허울뿐인 공염불이었던 것이다.  신성해야한 신이 부여해 주셨다는 위임권을 앞세운 교황은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이제 교회를 위해서만 헌신하고 희생하여야 하는 거룩한(?) 노예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들이 저지른 죄가 되었고,  그 죄값은 오로지 교회(교황)에 복종함으로써 갚아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구성되어 파견된 십자군은 소아시아 지역에 발을 들이면서 까무라치도록 놀랐다.

  교황의 약속대로라면 동방의 이교도들은 거의 짐승과 다를바 없는 미개한 야만인들로  이번 원정 또한 전쟁이 아니라 그냥 여행삼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그곳의 야만인들을 크게 호통쳐 나무라고 버릇을 고치게 만들어 준다음 무사히 그냥 돌아오면 된다고 격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분오열된 아랍세계(이슬람)들이 정식 국가나 제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뿔뿔히 흩어진 상태라 체계화되고 질서정연한 군대에 의한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지나치는 길목마다에 위치한 아랍의 도시들은 이제껏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못한 새로운 신세계였다.  자신들이 떠나 온 유럽 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품격높은 생활들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들이 사는 터전이 척박한 사막지역이었고 그들이 사는 방식이 유목민이었지만,  물을 차지하고 생활하는 오아시스 지역들은 가히 천상의 세계와 다를바가 없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였다.

  십자군 전쟁에 직접 참여한 유럽의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오히려 이 전쟁을 통하여 아랍의 선진 문물이 중세의 유럽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이미 별자리를 관측해 바다와 사막에서 길을 찾았고,  인간의 뇌를 수술했으며,  만년설을 가져다가 사막 한복판에서 얼음을 나누는 냉동고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이면에는........  아주 오래전 유럽에서는 흔적조차도 사라진 고대 그리이스의 찬란한 문명이 번역되고 재해석 되고 계승 발전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우럽의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아랍으로 부터 고대 그리이스 문화를 역수입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이 이미 그리이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비잔틴과 소아시아 지역의 상인들을 통해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이스의 모든것들을 들여와 다시 라틴어로 복사하였다.

  이 같은 영향속에서 이같은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대부분 초기의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에 심취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존재와 삶 자체를 오로지 신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교회의 가르침과 이끄는 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한,  교회와 휴머니즘은 결코 공존 할 수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써로만 전락시킨 교회는 이제 반휴머니즘의 목록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존엄한 존재여야만 했으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삶을 살아갈 자유인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며 하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사건이 완성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약속도 이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의 횡포와 시대 변화에 의해서 점차 깨닫게 된 신학적 도그마의 결과로서 이제 인간은 합리주의와 자유 사상운동으로 일대 전환을 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기류속에서서 비로소 (르네상스)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가)에 들어 갈 인물은 누구일까?

 

 

로마카톨릭 체계화의 중심 축이며 <고백록>의 저자이기도 한  아우구스티누스. (봇티첼리 作)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으로 인하여 탄생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기독교는 바울과 베드로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교회'라는 제도적 기틀이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하지만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일부 사도들은 새롭게 탄생한 기독교를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시키고자 하였다.  이에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온누리에 복음을 전하라는 위대한 사명이라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를 한 번도 직접 대면해 보지 못한 바울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심하게 사도라는 의미를 내세워 정통성 시비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기독교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으로 성장했고,  여기에서의 새로움은 유대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바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다.

  장자권(?)에 대한 위기를 느낀 사도들은 예수와 같은 혐의를 씌워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을 고발했다.  바울은 예루살렘 감옥에 갇혔고 로마 법정에 섰다.  이제 그는 로마에 위협이 되는 이교도로서 십자가 처형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되었다.  사도들과 그들을 가까이서 따르던 기독교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위기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꺼내들었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긴 하였으나 여전히 바울은 엄연한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이다.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법률에 의한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어 있었다.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압송되었다.

  기독교 복음 전파에 가장 크게 공헌하던 바울이 어처구니 없게도 예수의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예수와 같은 죄목으로 고발되었고, 사형집행 직전에 기독교 탄압의 원흉인 로마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다.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몰타 시칠리아등 가는 곳마다 바울로 인하여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제 기독교내에서 바울의 명성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사도들은 여전히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꼈다.  여전히 정통성에 입각한 장자권 때문이었다.  어쩜 기득권일 수도.......  사도들은 급한대로 예루살렘을 야고보에게 맡겼다.  바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서둘로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 도착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로마의 초대교회 주교로 취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베드로는 훗날 초대 교황에 오르게 되었다.

  ----  이하는 중략...........

 

  사제가 되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발걸음은 사도 바울과 많이 닮았다.

  그가 로마카톨릭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아마도 '성령의 은사는 고유 영역인 사제의 서품에 있는 것이지 사제의 인간적인 성품에 달린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신의 은총을 가타부타 따지거나 심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곧이어 '사제직은 결단코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교회의 무오류성)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교회의 힘은 이를 바탕으로 한 사제의 능력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점은 교황의 권위였다.  신께서 직접 사제의 직위에 대해서 거론하거나 제재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사제의 권위에 대해서 넘볼 수가 없게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신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건들과 인간들의 자유의지까지 모두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굳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최종적으록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신은 무소불위의 절대자이기에 세상 만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실시간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모두 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현재의 모든 일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 것이지 까지도 미리 모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께서 지켜 보는 것]일 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안간 세계의 시간 이라는 것이 신의 눈에는 모든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신은 모든것을 알 수는 있지만 직접 나서서 관여하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로써 신의 침묵은 정당성을 갖추게 되었고,  교회(교황)은 신의 대리권자로서 무한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든것은 '신의 뜻'이었으며 '신의 이름으로' 자행 되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결국 '로마에 있는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갖어야만 한다'라는 논리로 비약되었고,  '그 로마 교회의 수장이 가장 우위에 서야만 한다'는 결론을 낳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고스란히 이어받은 정통성이 베드로에게 있다로 연결되었고,  베드로의 무덤 위에 베드로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로마에 존재한다는 최종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베드로가 초대 교황에 즉위했다.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두 나라의 갈등으로 묘사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인 '신국(神國)' 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나라 '인국(人國)' 이다.  시간이 처음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 하나 뿐이었지만,   천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탄이 천국에서 추방되면서 사람들의 나라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인간은 사람의 나라인 세속 세계에 머물러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고 사흘만에 부활하는 사건 이후로 사람들의 세계는 또다시 나누어지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사탄이 주재하는 세속 세계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 사람은 아니다.  이는 세상 종말의 날에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가려질 것이다.  권받은 사람은 다시 완전한 인간의 옷을 입고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며,  저주받은 사람들은 사탄과 함께 영원한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 교회(교황)은 지상 최고의 권력이 되었다.  그런 중세는 바야흐로 영원한 암흑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이 너무나도 컸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 진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일까?

  천국?  연옥?  지옥?  아니면 차마 주소를 밝힐 수 없는 멀고 먼 오지의 교회?

 

 

 

 

 

 

 

 

 

 

 

 

 

 

 

 

 

 

 

 

 

 

 

 

 

 

 

 

  14세기가 막 시작되던 130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 아이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itesko Peitrarka) 였다.  유년시절 가족은  피렌체 근처로 이사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려서 부터 그는 유독 라틴문학에 관심을 보였고 글쓰기에 열중했다. 

  문학에 열정을 보인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단테를 꼽을 수 있겠다.  <신곡>을 발표하여 유럽의 지성사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단테 알리기에리)가 부친의 가까운 친구였던 관계로 그는 여러번 단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적지않게 그로부터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후대의 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신곡>을 통하여 단테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무질서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질서와 규율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굳이 교회가 주장하는 면죄부 등을 통한 구원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애초부터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따라 구원이라 일컷는 죽음 이후에도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 축복받은 영원한 삶을 가질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신으로부터 이미 부여 받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새롭고 놀라운 성찰은 삽시간에 온 유럽의 지성사에 실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페트라르카는 일생동안 단테에 대하여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단테에게서의 가르침이나 영향력을 꺼내면 그는 강력하게 이를 부정했다.  더하여는 단테에 대해서 다분히 비판적이기까지 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 일생을 통털어 페트라르카의 작품생활을 살펴보면 그가 단테로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받았음을 누구나 익히 알게될 것이다.  그 주변의 지인들 모두가 단테로 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만은 그런 사실에 대하여 극구 부정을 해왔다.  그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페트라르카가 청소년이던 시기에 이탈리아와 유럽사회에서는 황권(세속 군주)와 교권(교황)의 대립이 극에 달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결국 '카놋사의 굴욕'으로 나타났고,  이는 다시 그리 오래지 않아 '아비뇽 유수'로 이어졌다.

  로마 교황청에서 쫓겨난 교황 클레멘스 5세를 따라 페트라르카 일가족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트라르카는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비뇽 교황청의 사무관이 되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의 생활은 그의 바램이나 행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이 젊은 시인의 가슴속에는 항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참지못하고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의 교황청을 떠났다.  아버지와 가문의 바램이었던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몽펠리아 대학과 볼로냐 대학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대학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게 된다.  법학을 공부하던 중에 과거의 로마카톨릭(교황)이 저지른 부정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일기장에 '정의를 팔아먹는 기술에 환멸을 느꼈다' 라고 적었다.  그 기술은 한참이나 앞선 시기였던 9세기 경에 이미 어떤 교황에 의해서 '면죄부 판매'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이었다.  한없이 성스러워야 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돈과 권력에 집착한 교황(교회)의 전유물이 되어 마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팔듯이 거래가(장사)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불경이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정의가 모두 사라졌다'는 사형 선고와 다를바가 없게된 것이다.  믿는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한 매춘부의 죄악 보다도 더 추악한 범죄였다.

  페트라르카는 대학을 뛰쳐 나왔다.  그리고나서 또다시 그의 오랜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곳을 여행했다. 사그라들지 않는 학구열과 탐구정신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랬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새롭게 그가 선택한 것이 등산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그저  여행의 일부로 여겨졌던 트래킹 정도의 등산을 그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젠 유럽의 명산 순례를 뛰어넘어 험준한 산들을 골라 찾아다니며 오르기 시작했다.  로프를 들고다니며 가파른 바위 벼랑 등정을 마다하지 않는 수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등산의 역사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제대로 된 알피니스트'로 페트라르카를 꼽는다.

  돌로미티 산맥은 유럽의 최고봉인 알프스 산맥의 동쪽 끝자락이라 할 수 있다.  사방으로 만년설에 뒤덮인 바위 암봉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암벽등반의 요람이자  동계 올림픽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페트라르카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치메 트래킹 코스를 따라다니며 봉우리 하나하나 암벽등반으로 잦아들지 않는 가슴속의 상처를 달래고 있었다.

  하루는 암벽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에 우연히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려 수정처럼 맑은 호수의 물을 마시고 엎드리다가 문득 호수 수면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과 닮은 또 하나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헤어날 수 없는 지옥의 구렁텅이에라도 빠진듯 절망의 표정을 가진 나그네여.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아프게 하는가?'

  수면 아래의 사내는 페트라르카를 올려다 보면서 그렇게 물음을 던져왔다.

  순간 페트라르카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한 방울 수면위로 떨어져 아주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수면 아래의 사내는 재차 입을 열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이 항상 너의 뒤에서 지켜주고 있음을 잊어더란 말이냐?  믿음을 상실하였느냐?'

  순간 오랜 세월 응어리졌던, 콱 막힌 그의 깊은 가슴속에서 한맺힌 절규가 자신도 모르게 페부를 뚫고 솟구쳐 올랐다.

  '주님에 대한 저의 사랑과 믿음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저에게 부여된 씻을 수 없는 영원한 죄인의 낙인은 저를 오랜 방황과 좌절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의 몸으로 주님을 위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어떤것인지 도무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순결한 영혼을 가진 나그네여.  어찌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긴단 말이냐?  너는 애초 한없이 고귀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더냐?'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낙인을 교회로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여 받았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저는 그 방법을 실천할 능력도 자신도 없습니다.  영원히 죄인일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아픔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나그네여.  어찌 스스로 죄인이라 여겨 낙심하고 있느냐?  구세주께서 이미 너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약속이 영원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렸다는 말이더냐?'

  '구세주께서 오셨던 때에는 분명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인간은 다시 나약해져서 사악해지기 시작했고,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대리권자인 교회를 보내셔서 징벌을 내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나그네여.  어찌 하느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수시로 저버리신단 말이더냐?  그 분은 결코 그런분이 아니시다.  성경에 기록된 바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특별히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분이 아니셨더냐?  하늘에서 반란을 꾀한 천사들이 세상에 내려가 인간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허락하신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너는 이미 영생과 구원의 축복을 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지닌 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제가 자유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유인인 나그네여.  그대의 믿음을 의심치 말라.  여전히 그대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니라.'

  페트라르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아 마구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수면아래의 자신을 닮은 사내가 환하게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 미소는 하나님의 미소와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페트라르카는 하산을 서둘렀다.  오랜 세월동안 그의 시야를 가렸던 어둠의 장막을 걷혀졌고 답답했던 페부속 깊은곳까지 싱그러운 돌로미티의 바람결이 가득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새 이제부터 새롭게 그가 걸어가야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에게 하고자 하는 수많은 일들이 머리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 등산의 거점으로 삼았던 코르티나 담페초의 여관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애하는 벗 페트라르카에게.  자네를 찾았지만 긴 일정으로 돌로미티에 갔다기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네.  나는 지금 피렌체에 있네.  아비뇽에서 아주 떠나 온 것이라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그동안 못다했던 내 방식의 그림이나 그리려고 하네.  내가 피렌체에 들린것은 두 가지 이유였네.  첫째는 당연히 자네를 만나기 위함이었지.  아비뇽의 무역상을 통해서 우연히 아랍의 서책을 구했다네.  아랍어로 적혀있네만 전해 듣기로는 아리스토 텔레스와 탈레스의 이름이 등장하는 고대 그리이스에 관한 서책들이라고 들었네.  자네와 함께 아비뇽에 머무르는 동안 고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에 관해서 많이 이야기 나누던 기억이 늘 떠나지 않아서 어렵게 구했다네.  마땅히 맡길곳이 떠오르지 않아 이대로 우리집으로 가져가려 하네.  아무때고 씨에나에 들리도록 하게나.  그때까지 소중하게 보관해 놓겠네.  또한 자네가 씨에나에 온다면 이미 내가 여러차례 말했던  나에게 자네만큼이나 소중한 친구인 보카치오를 소개해 주겠네.  듣자니 보카치오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네처럼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에 관심이 많아서 아랍으로부터 많은 서책들을 구하여 번역까지 하고 있다고 들었네.  둘이 만나게 되면  서로에게 아주 즐겁고 유익한 일이 될것이라 생각하네.  두 번째 이유로는 지오토의 그림을 만나보기 위하여 피렌체에 온 것이라네.  지오토의 그림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독특한 화풍을 완성단계에까지 끌어올렸다는 소문이 아비뇽까지 전해왔다네.  떠나기 전에 지오토의 그림을 실컷 보았으면 하네.  여건이 허락된다면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잔 해야겠지.  지오토의 명성이 치솟아 더없이 바쁘게 지낸다 하니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만나주기나 하려는지...........  곧 우리 만나세.   시모네 마르티니 보냄.'

  아비뇽에서 결코 짧지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아비뇽 교황청의 전속 궁정화가인 시모네 마르티니가 보낸 편지였다.

  마르티니의 편지에는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가 등장하고 보카치오와 지오토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페트라르카를 '최초의 인문주의자' 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친구이자 동시대를 살아간 보카치오 역시 르네상스의 탄생에 페트라르카 못지않게 크게 기여한 인문주의자 이자 당대의 최고 지성인 이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지않게 영향을 끼친 단테를 포함하여 이들 세 사람을  '초기 르네상스의 3대 인문주의 개척자' 라고 부른다.

  열강들의 침략 앞에 이탈리아는 똘똘 뭉친것이 아니라 여럿의 도시국가나 공화국으로 나뉘어 저들끼리 극렬하게 대립하고 경쟁하고 전쟁까지도 불사했다.  그런 사태의 가장 대표적이라면 당연히 피렌체외 시에나의 경쟁과 마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 관계 그 이상이었다.

  그 중에서 회화(마술) 분야에서의 경쟁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는데,  (치마부에)에 의해서 세상에 명성을 얻기 시작한 피렌체 미술은 그의 제자인 (지오토)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에 뒤질세라 씨에나 역시 비잔틴 풍의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린 (두초)에 의해서 피렌체 못지 않은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제자인 (시모네 마르티니)에 이르러서 씨에나풍 이라는 완성도 높은 그림 세계를 완성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는 여러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지만,  르네상스의 회화(미술)은 바로 이들의 등장과 경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돌로미티의 코르티나 담페초를 떠난 페트라르카의 발걸음은 곧장 씨에나로 향했다.

  어둠이 내리자 어쩔 수 없이 베로나에서 하루 유숙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시기와 날씨탓으로 하루를 쉬어갈 여관을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베로나 대성당의 문을 굽하게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망명중이었지만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근무했던 그의 이력은 세상 어디라도 대도시의 대성당이나 기타 교회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능력으로 충분히 작용했던 것이다.  아침이 찾아오고 날이 개이자 서둘러 마차를 출발시키려던 페트라르카에게 아비뇽에서 잠시 함께했던 대성당의 수도사 한 분이 찾아와 강력하게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수도사의 손이 이끌려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베로나 대성당의 '쳅터 라이브러리(Biblioteca Capitolare)' 였다.  그 수도사는 대성당의 도서관 사서였던 것이다.

  베로나 대성당에는 더없이 귀한 기독교 서책들과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더하여 대성당 건축에서 시작하여 증축과 수리를 비롯한 방대한 양의 관리 자료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거기에다 새로이 많은 서책과 자료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결국 도서관의 공간 부족으로 나타났다.  결국 대성당측은  꼭 교회에 해당하거나 필요치 않은 것들을 엄선하여 구분해 처분하기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도서관 정리 작업 도중에 가장 깊은 구석에서 낡은 나무 상자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초기 로마시대의 자료임에는 분명하였으나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료로 판명되어 소각 처분하기 직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그 집행자인 수도가가 우연히 대성당에 들린 페트라르카를 알아보게 되었고,  그가 아비뇽에서 시를 쓰고 라틴 문학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나무 상자속에는 두루마기 형태의 편지 뭉치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였건  분명 누군가의 편지를 한곳에 모아둔 것이 분명 했다.  먼지가 쌓이고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한 타인의 편지 나부랑이가 수도사나 페트라르카의 관심을 끌 여지가 전혀 없었다.  페트라르카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유난스런 수도사의 고집은 끝내 그 나무상자를 막무가내로 페트라르카의 마차 짐칸에 싣고 말았다.  적지않은 분량에다가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아서 꺼내다가 멀리까지 운반해서 불에 태우는것 조차도 그리 만만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무 상자는 기어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페트라르카의 마차 짐칸에 실렸다.

  남쪽으로 내달리던 마차가 폭우가 쏟아지는 밤길을 어쩌지 못하고 볼로냐에서 또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다.  창밖으로 무심하게 쏟아붓는 폭우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페트라르카는 무심결에 나무 상자를 열고 두루마리 편지중에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하나 꺼내서 펼쳐 들었다.  지극히 미미할 정도의 아주 작은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의 심각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였으며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흐르는 땀을 자주 씻어내야만 했으며 두 손을 넘어서 그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읽어내려간 두루마리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으며,  작성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직인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보냄.'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사르라면 로마를 제국의 반열로 이끈 '위대한 씨저'가 아닌가?  그는 밤이 새도록 그 편지를 일고 또 읽어 보았다.  그만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용으로 보아,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먼저 통치자인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에 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 답장을 보낸 편지가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에 관한 수많은 기록과 키케로에 관한 기록등에도 분명하게 두 사람간의 서신 교환이 등장하고,  특히 위대한 웅변가이자 정치가이면서  철학자였던 키케로가 일생동안 수많은 편지로 지인들과 소통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또 세상 어디에서도 그 기록의 실체(편지)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온갖 추측과 소문만이 난무해 내려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이 놀랍게도 지금 페트라르카 앞에 놓여져 있다.

  그 순간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페트라르카는 그 나무상자 속의 편지 더미에 파뭍혀 살게 된다.

  페트라르카의 인생에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여향을 끼친 키케로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찬란한 철학사상이 그리이스의 멸망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가 이슬람을 통하여 재발견 되고 유럽에 역수입되면서 새로운 문명을 꽃을 피웠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이렇게 페트라르카가 키케로를 만나게 되면서 키케로가 가졌던 고대 그리이스에 대한 학식이 고스란히 페트라르카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이 키케로의 가르침이 페트라르카를 통해 보카치오와 지오토나 마르티니를 거쳐 피렌체의 휴머니스트들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된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 우연한 편지의 발견으로 키케로가 살아나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고대 그리이스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르네상스의 시작' 이라고 조심스럽게 적고 있다.

 

 

 

 

 

 

 

 

 

 

 

 

 

페트라르카로 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기록했다.

 

 

 

 

 

 

 

 

 

 

 

 

 

  14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의 문학과 미술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 새로운 문화의 발전은 고전 문화의 재발견이나 부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의 고전들이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파괴되었던 것에 비하여,  새롭게 등장한 인문주의적 가치관은  종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새로운 인생관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치마부에(Cimabue)'에 의해서 새롭게 시도된 변화의 물결은  '지오토(Giotto)'에 이르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성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마침내 '미켈란젤로(Michelangelo)'에 의해서 그 완성을 이루었다.>

 

  '조르조 바사리(Basari)'는 자신의 저서 (르네상스 전기)에서 이렇게 새로운 문화사조를 기록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고전문화의 부활' 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리나시타(rinascita)' 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프랑스어로 '르네상스(renaissance : 재생. 부활)'가 된 것이다.  아울러 르네상스란 단지 미술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모든 영역의 새로운 시대 흐름을 나타내는 단어로 확대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19세기에 이르러 '부르크하르트(Burckhart)'에 의하여 '르네상스는 곧 근대 문화의 출발점'이 라고 정의 했다.  이는 인간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으며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의견들도 상당하게 존재한다.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에 다르자면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 1천년은 완전한 암흑기였다'라는 전제가 우선되어야만 했다.  상당수의 역사가와 미술가들은 중세를 완전한 암흑기로만 치부해 버리기 보다는,  나름의 문화와 예술이 의미를 갖는 고전주의의 일부로 인정하면서  르네상스를 '중세 문화의 말기' 혹은 '중세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라 하겠다.  르네상스는 중세를 바탕으로 생겨났으며,  또 르네상스의 저변에는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잔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차차 시간을 가지고 르네상스를 산책하면서 하나 하나 보다 세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 대해서 내 방식대로의 부연 설명을 간략하게나마 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겨울(winter)' 이란 단어가 있다.

  '명사로서, 한 해의 네가지 철 중에서 네번째 계절에 해당한다.  낮이 짧고 추운 계절로 12~2월을 가리키며,  절기(節氣)로는 입동부터 입춘 전까지를 이른다' 고 국어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익히 겨울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춥고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더하자면 가을이 가면 긴 겨울이 오고, 그 너머에 따스한 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다.

  더군다나 지극히 현명하신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겨울이 입동에 시작해서 입춘이면 끝난다는 음력에 준하는 구체적인 기간까지도 명확하게 명시해주고 계시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겨울이란 놈이 입동이 되면 번쩍하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입춘 하루 전 날에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시간에 맞추어 훌쩍 떠나버리는 것도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분명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에는  입동과 입춘이라는 절기의 날짜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다.  양력에 대비해 보면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절기는 분명하게 날짜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말썽꾸러기 계절이란 놈은 때론 더디게  때론 느닷없이 찾아오고 떠나가는 놈이라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것이다.

  '겨울인가봐'  '아니여.  바람이 차긴 하지만 아직은 가을의 끝자락이야' 라고 인간의 심성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하면, '봄이 왔는지 알았는데 눈이 내리네.  아직 겨울인가?'  라는 경우도 있다.  유난히 따뜻한것이 봄이 일찍 왔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밤새 눈이 쏟아지곤 할 때도 있는것이 말이다.

  가을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반듯이 겨울은 오게 되어 있고,  겨울이 아무리 발광을 해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그 놈의 계절이라는 것이 한 날,  한 시에 딱부러지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어설프게 겹쳐지는 시간을 나는 개인적으로 (잉여의 시간) (잉여의 계절) 이라고 이름을 달아 주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 잉여의 시간들은 '있으나 마나한 짜투리 시간' 쯤으로 허툴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앞선 시간이나 사건이나 계절의 차마 다하지 못했던 여운들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소중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잉여의 시간에는 앞선 시간의 빈티지한 잔상이 은은하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역사에서 '불의 발견' '문자의 발견' '산업혁명' 이나 '현세의 핸디폰'에 이르기까지의 위대한 발견 보다도 '시간'의 개념을 완성하고 시계를 만들어 낸 장인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찬사를 받치고 싶은 사람이다.  시간이야 말로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구분짓게 만들었고  체계화 시키는데 절대적인 형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문자가 등장함으로 써,  인간은 비로소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것을 구분짓고 명확하게 구분해 나타내 준다.  

  하지만,  과학이 그토록  눈부시게 발전한 현재에도 시간의 개념으로도 명확하게 구분되어지지 않는것들이 엄연히 존재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계절'과 같은 것이다.  아울러 거기에는 문명의 사조나 역사의 시대구분 등도 해당된다.

  '중세의 고딕양식'은 '르네상스'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바로크. 로코크. 매너리즘의 시대를 거쳐  근대로 넘어간다.  이런 상황 구분에 있어서 딱히 정해서 몇년 몇일 몇시서 부터는 바로크고 1년 뒤,  그러니까 365일을 지나면서는 로코크라 정의 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 고딕과 르네상스 사이에는 상당 기간의 잉여 시간이 존재했다.  혹자는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잉여의 시간에 잠시 등장한 것들이 바로크이며 로코크이자 매너리즘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바로크. 로코크. 매너리즘의 시대는 아직 다 시나가지 못한  르네상스의 말기쯤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게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관점으로 르네상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결론적으로 '르네상스'를 딱히 언제부터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고 끝났다는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쯤이면  이제부터 로마를 시작으로 (르네상스 산책)을 본격적으로 실행함에 있어서 나름의 '프롤로그(prologue)'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것은 여행이겠지만, 역사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문명 사조에 대하여 나름으로 세세하게 살펴 볼 요량이다.

  로마에서는 아무래도 건축과 조각과 회화와 역사 순서대로 주안점을 두게 될것이고,  피렌체에서는 회화를 중심으로 건축과 조각 순으로 보게되겠고,  베네치아에서는 건축과 역사에 관심을 두게될 것이다.

 

 

 

 

 

 

 

 

  우리를 태워 준 시칠리아 익스프레스는 이미 우리를 로마의 테르미니역에 내려 놓았다.

  로마!!!!.  우리는 왔노라!  보겠노라! 실컷 즐기고 느끼겠노라!  로마여. 우리에게 그대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소서.

  르네상스는 플로렌스 지방에서 시작되고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고 하지만,  로마나 베네치아 역시 르네상스의 한복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피렌체는 몇 일 뒤에 찾아갈 예정이고  우리는 지금 로마에 있다.

  이른 새벽의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숨결을 느끼며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향해 아침 산책을 나서기에 앞서서,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 분에게 서투른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어졌다.

  인류 최초의 화가는 누구였을까?

  인간은 약 3만5천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이미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가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의 시대에 들어서 문명권에서의 그림은 주로 죽은자를 위한 무덤화가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가 문명권이 제도화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신과 통치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벽화나 무덤화를 그린 사람을 화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대인 화가' 내지는 '무명씨' 라고 불러야 할까?  그리이스와 로마와 비잔틴을 거치면서 종교화를 중심으로 아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회화 작품들이 탄생했다.  작가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그 누구도 그들을 (화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림을 그린 사람' '벽화를 만든 사람'은 존재 했지만 '그림을 그린 화가 아무개'나 '벽화를 그린 화가 아무개' 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당시까지는 '칠을 하는 장인' 내지는 '그림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 라고 불렀다.  영어식으로 치자면 똑같은 '페이트 맨(painter)'이 되겠지만,  당시까지는 기술자나 장인이었지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 이란 의미의 (화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전의 그림 직공들은 대부분이 '길드(조합)'에 속한 직인이거나 장인이었다.  가구를 비롯해 수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주로 종사했다.  금은 세공품이나 보석함이나 가구를 고급스럽게 만드는데 있어서 그림을 그려 넣거나 새겨 넣은 기술자로 인식 되었다.

  '지오토(Bondone Giotto)' 역시도 길드에 속한 가구 공방의 수석 장인이었다.

  그의 아래로 숙련공인 두 명의 직인과 수십명의 견습생을 두고 길드를 통해 제작 주문이 의뢰되면, 제작된 가구나 보석함 등에 세밀화와 같이 정교한 그림의 본을 뜨는 사람이 있고, 인물을 그려넣는 사람이 있고,  배경을 그려넣는 사람이 따로 있게 세분화된 작업들을 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하여 일정 급여를 받는 직인신분 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지오토의 그림 솜씨가 남달리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자, 길드를 통한 공동의 작업이 아닌  지오토 개인에 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그림이나 벽화가 하나 둘씩 의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가 마침내 파도바에 위치한 수도원내 예배당의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먼 거리와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기에 길드의 허락이 있어야만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즈음하여 고심 끝에 지오토는 장인의 권리이기도 한 길드와 공방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택하게 되었다.  사표를 냈다는 말이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오토는 수도원측과 벽화 제작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작품의 크기와 벽화의 숫자와 물감과 숙식 등의 제반 경비를 기반으로하는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그림을 그려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직업인으로서의 '화가'가 처음으로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미술사는 지오토를 '인류 최초의 정식 화가'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화가만으로서는 밥을 먹고 사는것이 힘들었는지  아니면 태생이 다방면에 재능이 차고 넘치는 천재로 태어났음인지,  정작 우리가 지오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되는 것이 피렌체 두오모 옆에 높다랗게 서있는 '조토의 종탑'이다.  이렇틋 시대를 앞서간 개척자 지오토를 만나려면 결국은 피렌체를 찾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러곳에 지오토의 작품이 존재하지만 '지오토 하면 역시 피렌체라' 하지 않았던가?

  (르네상스 산책)을 시작함에 있어서  르네상스 회화의 시발점이자 개척자인 '지오토'의 작품을 한번쯤 미리 편하게 살펴봄으로써 '르네상스가 이렇게 시작되는것이었구나' 하는 부연 설명의 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혹,  '이게 무슨 새로운 문예사조의 시작이야?' '이게 무슨 르네상스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왜냐면,  우리는 대부분 '완성된 르네상스'만을 주로 보아왔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봇티첼리와 다빈치와 라파엘로만이 르네상스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해야만 진정한 르네상스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소상한 지오토의 이야기는 차차 피렌체를 여행하면서까지 나누기로 하면서.........

  이제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회화 기류로 정착하기 시작한 지오토의 원숙함을 선보이고자 한다.

 

 

 

 

 

  ----  다음 이야기는 '로마(Rome)'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지오토 作 (죽은 그리스도를 슬퍼함).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