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옛날 희랍의 하늘에는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門)이 있었다.
마냥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으로 만들어진 이 문은 아침이면 터진 옷깃 사이로 여명이 밝았음을 내비추고 저녁무렵이면 붉은 노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가 하면, 때론 성난 지옥의 목구멍처럼 칠흑같이 검은빛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천상(天上)에 살고있는 모든 신(神)들은 이 문을 통하여 지상(地上)에 내려와 인간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 되면 풍성한 수확을 함께 거두어 들였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이 새도록 춤과 음악으로 축제를 벌이다가 새벽별이 뜨기 전에 다시 이 문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고는 했다.
천상의 모든 신들이 지상의 인간 세계를 오가자면 반듯이 구름으로 만든 문을 통해야만 했다.
우리는 모두 태고적부터 그 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때가되었다 싶으면 천상의 신들은 회합을 열고 그 결과를 알려주려 특별히 선정된 네 명의 요정(님프) 중에서 한 명을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 보냈다. 이제 그 천사는 한동안 지상의 인간들과 함께 생활할 것이다.
절기상으로 보아....... 아마도 지금쯤이면 하늘나라에서는 시기를 정하는 회합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구름으로 만든 문이 열리고 '겨울(winter)' 이라는 이름을 가진 요정이 지상으로 내려 올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삼일 후에는 한동안 인간들과 함께 생활해 온 '가을(autumn)'의 요정이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해 천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봄(spring)'이 내려오고 나야만 '겨울'은 다시 올라갈 수가 있고, 그 봄은 '여름(summer)'의 요정이 내려와야만 구름으로 만든 문을 통해서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숙명같은 것이었다.
신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사는 한, 네 명의 요정에게 부여된 책임과 그녀들에게 맡겨진 나름대로의 특별한 사명과 의미는 영원히 변치않고 지속될 것이다.
이쯤되었으면 그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을까?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의 이름은 바로 '계절(season)' 이다.
고대 희랍의 신들은 지상의 인간들을 위하여 선물로 '계절'을 주었던 것이다. 크고 깊고 많은 의미를 담아서........
하지만 언제였던가.........
희랍의 하늘을 수놓았던 구름으로 만든 문이 사라졌다.
천상(天上)의 세계는 모두 파괴되었고, '계절의 문(season)'을 통과하던 신(神)과 님프도 모두 죽어 버렸다.
희랍사람들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헬레니즘(Hellenism)'은 이제 이세상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그럼 그 많은 신들과 요정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스스로 자멸의 길을 찾아 먼 우주속으로 훌쩍 떠났다는 말인가? 올림포스의 신들과 함께 생활하고 축제를 벌인던 희랍인들은 왜 느닷없이 그들을 모두 털어내고 지워버려야만 했던 말인가?
올림포스의 신들과 요정들은 자살하진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가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한것은 분명하다. 희랍인들의 후예들은 모두가 그 진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그 진실을 잘 알고있다.
그들은 모두 철저하게 죽임을 당했다.
헬레니즘의 소멸 뒤에는 '헤브라이즘(Hebraism)'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물론 다른 몇가지 이유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점령군 처럼 등장한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을 마치 '카오스(Chaos,혼돈)' 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카오스를 모두 몰아내고 '코스모스(Cosmos,우주)'를 금방이라도 모두 완성해 낼 것처럼 행세했다.
2천년의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의 세상이 과연 그들은 호언장담처럼, 정의가 바로 서고, 사랑이 넘쳐나며 이상적인 행복한 세상이 되었는가 되묻고 싶다. 아마도 지금의 현실이 2천년 전 헤브라이즘이 보부도 당당하게 점령군의 위세로 등장하던때 보다 수천배 수만배 수억만배 더 증오와 배척과 불신과 불공정이 판을 치는 '초슈퍼 카오스의 시대'가 아닐까 라고 감히 나는 생각해 본다.
헤브라이즘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정녕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최고의 적소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이다.
난 지금도 가나안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지금도 희랍사람들이 꿈꾸던 '엘리시온의 들'이 혹여 내가 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은 땅이다. 희랍사람들은 대양하의 서쪽 끝에 '축복받은 사람들만의 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곳은 죽음의 괴로움을 격지 않고서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의 대지였다. 그곳에는 아침이면 여전히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지고 달과 별이 변함없이 찾아온다. 낮에는 들에 나가 기쁘게 땀을 흘리며 일하고 때가되면 신들이 먹는 음식인 암브로시를 나누고 천상의 음료인 넥타르로 목을 축인다. 모닥불을 피우고 와인을 마시고 세상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풀어 듣기도 하고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신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헬레니즘은 삭제를 강요 당했다.
모든 신들이 모여서 회의을 하고 축제를 벌이던 주신(主神) 제우스의 거처였던 델포이 신전까지도 모두 허물어지고 페허 위에 잔재만 남았다.
올림포스산 위를 맴돌던 제우스의 독수리도 까마귀의 밥이되었는지 사라졌고, 수렵 허가제 때문인지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가 모습을 감춘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고, 큐피트의 화살도 카카오 톡의 득세에 밀려나고 말았고, 헤라여신의 시기와 질투는 갑질이라는 여론재판의 뭇매를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새로운 가치관의 시대에 꽁지를 감출 수 밖에 없었으리라. 날개달린 모자와 신발을 신고 시공을 초월해 날아다니던 헤르메스 조차도 요격 미사일과 하늘의 지뢰밭 같은 드론의 추세에 밀려 이직을 고심중이라 하고,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요즘 무역장벽과 높은 주세때문에 페업신고를 마쳐놓은 신세라 한다. 아프로디테(비너스)의 미모쯤이야 강남 모 성형외과에 금덩이만 주면 상상초월급까지 변신이 가능하다하니 이젠 모델 섭외도 거의 없는 신세이다 보니........ 올림포스 기업이 부도처리되는 것도 어길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겠지만서도, 네미시스(복수의 신)나 모모스(냉소의 신) 등은 새롭게 호황을 누리고 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헬레니즘은 모두 강제로 삭제를 당했지만, 헤브라이즘이 온 세상을 평정하고 대세를 이루던 그 중세역사의 한복판에서......... 깜찍하게도 시칠리아 사람들은 잊혀진 헬레니즘을 기어코 찾아냈다.
헤브라이즘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헬레니즘에 대한 동경이나 회귀는 잘못이나 그릇됨을 넘어 배교이자 이단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부의 시칠리아 사람들은 기어코 지워버린 과거 속에서 헬레니즘을 되찾아냈고 더 나아가 그것을 지상에(현실속에) 번듯하게 재현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콰트로 간티(Quattro Canti)'인 것이다.
마케다로와 (via Maqueda) 비토리오 에마뉴엘 도로(via Vittorio Emanuele)가 만나는 교차로를 '빌레나 광장(Piazza Villena)' 이라고 부른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팔레르모 올드시티의 가장 핵심적인 중심지였다. 하지만 도시가 현대화되면서 한 블럭 아래쪽의 로마대로가 현대적인 도시재개발 계획에 의해서 확장되면서 중심 상권이 한 블럭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겨찾으며, 팔레르모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반듯이 들려야만 하는 장소는 여전히 빌레나 광장이다. 이 역사적인 광장은 역사 기록물에 '일 테아트로 델 솔' 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빌레나 광장은 정팔면체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네개의 면은 마케다로와 비토리오 에마뉴엘로가 교차하면서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네 개의 도로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개의 면에는 저마다 우아하고 고풍스런....... 일관된 모습인듯 싶으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간직한 채 고대 그리이스 양식과 노르만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멋진 건축물(궁전)들이 들어서 있다.
광장에 접한 궁전들의 네 개의 건축면을........ 마치 르네상스식 교회의 정문을 별도의 건축물처럼 우아하고 화려하게 꾸미던 파사드 처럼 정말로 멋들어지게 꾸며 놓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중세 이후로 사라졌던 고대 그리이스 신화와 문화의 재현이라 할 만 하다. 다시 표현하자면 피렌체에서 시작해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만개했던 르네상스가 이렇게 버젓이 시칠리아에서도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는 반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팔레르모의 모든 도로는 이곳 빌레나 광장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간다.
아울러 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네 개의 궁전은 그리이스 신화속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상징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곳을 '콰트로 간티(Quattro Canti)'라고 기억하고 있다.
궁전 건물의 외관(파사드)는 공히 4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광장과 맞닿은 아랫쪽에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 도시의 강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오레토와 케모니아와 판나리아와 파피레토가 그것으로 1층은 다분히 순수한 고전형식을 빌었다.
2층은 다음 발전단계인 도리아식 스타일로서 신화속의 4계절을 상징하는 이에올루스, 비너스, 세레스. 그리고 바커스가 (로마 신화속의 신들 이름을 따왔다) 대리석 조각상으로 서있다.
3층에는 이오니아식 기둥 장식 안에 실질적으로 시칠리아을 통치했던 찰스 4세, 필립 2세, 필립 3세, 필립 4세의 동상을 세워두었다.
4층에는 팔레르모, 혹은 시칠리아와 연관이 있는 성녀와 성직자를 모셔 놓았는데 아가타 성녀, 크리스티나 성녀, 로잘리아 시니발디 성녀, 그리고 성 베네딕트이다.
크리스티나 성녀와 찰스 4세 동상이 있는 남쪽의 궁전은 (봄)을 상징한다. 남쪽 궁전의 뒷쪽인 알베르게리아 지역은 헝가리안 집시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다. 서쪽은 여름을 상징하던 세랄카디오 지역이고, 북쪽이 가을을 상징하는 로지 지역이었다. 그리고 동쪽의 칼사 지역은 겨울을 상징하였는데 그 지역으로 권문세가들이 주로 거주하거나 관공서가 있는 지역이었으니 아무래도 괜히 겨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는듯 싶다.
르네상스 이후로 콰트로 간티는 유럽지역에서 소아시아 지역을 통털어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광장이자 도시의 중심가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유서 깊은 장소였다. 이 거리가 400년 전의 도로라고 가정하면 충분히 공감이 될 것이다. 파리의 샹젤리제쯤 된다고 할까나?
그만큼 '시칠리아식 바로크'의 정수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유명세에 비해서 실제 찾아가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될것이다.
작금에 쾨트로 간티가 가장 애를 먹고 있는 이유로는........ '노상 방뇨'를 꼽울 수 있겠다.
기마 순찰대와 자전거 순찰대가 상주하다시피 단속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다. 세상의 남자들이란....... 야생의 짐승들처럼.........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픈 욕망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아님...... 콰트로 간티를 다녀간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성수기 새벽에 찾아가면 소변냄새가 코를 찌르기로 유명하다. 하긴 인근으로 노천 가페나 술집이 많고........ 또 간티 주변 풍광이.......ㅎㅎㅎ......... 숫컷들이 한쪽 뒷다리 들고 쉬 하기 딱 좋은 분위기이기는 하다........ㅎㅎ
다음으로는....... 지금 누가 콰트로 간티의 사진을 찍는다 해도 멋진 사진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사진빨 안받는 최고의 명소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콰트로 간티의 모든 건축 장식물이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대리석은 석회암 보다는 단단하지만 화강암에 비해서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르다. 재질 면이곱고 색감마저 아름다워서 최고의 석재로 꼽히지만 환경오염에 가장 취약한 것이 험이다. 유럽 최고의 아름다운 광장은 현대화로 인한 대기 오염과 자동차 매연과 비둘기등의 배설물로 훼손을 넘어서 페기의 위험에 처해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렌체 베키오궁전 앞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시비드 상을 비롯해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의 모든 조각상들이 모두 모조품이라면....... 유럽의 대기오염 실태와 미술품 보존에 힘쓰는 유럽인들의 노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진품은 모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어앉아 있다. 실물 크기의 완벽한 모조품들이 노천에 대신 놓여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콰트로 간티는 그렇게 조치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훼손 정도가 심해서.......
이탈리아를 도보로 여행한다면 어디를 향하던 사방천지에서 발뿌리 걷어차이는것 만큼이나 흔한것이 분수대와 조각상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분수대와 조각상들이 그저그런 허접한 장식들이 아니라 제대로된 예술품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다. 시골 촌동네 마을 어귀의 훼손상태가 심한 낡은 분수대 조차도 우리나라 기준으로 본다면 틀림없는 국보급으로 느껴지는것이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골목 순회에서 (유네스코 유형문화재 등재 안내표지판)은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그저 걷다가 보면 사방에 넘쳐나는것이 그런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들이다.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의 분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트레비 분수) 이듯이 유명한 분수들은 대부분 로마에 몰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마에 위치한 분수를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뿐더러, 유명세를 톡톡하게 치루는 분수들이 로마에 유독 몰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여 이참에 나는 로마가 아닌 시칠리아에 존재하는 아주 멋진 분수를 소개해 볼까 한다.
르네상스 미술에 관하여 커다란 업적을 이룬 미국 출신의 미술 사학자 '버나드 베렌슨'은 시칠리아 소재의 한 분수에 대하여 '16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분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렌슨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 분수는 시칠리아의 가장 북쪽이랄 수 있는 항구도시 메시나에 있다.
이탈리아 본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 메시나는 점차 늘어만 가는 본토와의 해상 교역물량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도시가 팽창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발생한것이 생활용수의 부족사태였다. 이에 메시나 시의회는 멀리 떨어져있는 카마로와 보르도나로의 계곡과 강에서 물을 끌어오기로 수로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1530년에 시작한 도시 수로사업은 1547년에야 완공을 보게된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와 대역사는 메시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자부심이기도 했다.
하여 메시나 주민들은 도시 수로사업의 완공 시기에 맞추어 기념 조형물을 건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로 카마로와 보르도나로에서 끌어들인 생활용수가 메시나 도심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장소인 '메시나 대성당(두오모)'의 광장에 최고로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바로 '오리온 분수(Fantana di Orione)'이다.
이 역사적인 기념물을 만들기 위하여 메시나 주민들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제자라고도 불리는 피렌체 태생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안젤로 몬토르솔리(Angelo Montorsoli)'를 초빙하여 제작을 맡겼다. 몬토르솔리는 흔쾌히 수락을 하고 자신의 제자딘 마르티노 몬타니니와 함께 메시나에 도착하여 분수대 건설을 시작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여 현지의 많은 조각가들이 합세하여 공동작업으로 오리온 분수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오리온 분수는 시리우스(개)와 오리온, 물을 뿜어내는 돌고래가 등장하며, 이는 나일강과 테베강과 메시나 수로의 공급처인 카마로와 에브로 계곡을 나타내고 있다. 다분히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를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균형잡힌 조형미와 아름다움은 버나드 베렌슨이 결코 헛말을 한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 태클 아닌 태클을 건 사람이 있었으니........
(오리온 분수)가 있는 메시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는 또 하나의 분수에 대하여 엄청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오리온 분수'와 다른곳에 분수 사이에 시작에서 부터 적지않게 경쟁과 드러내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할 수 있었으니..........
팔레르모에는 '콰트로 간티'와 인접하다 못해 등을 지다시피하고 있는 분수가 있다.
르네상스 역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르네상스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화가이자 역사가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는 팔레르모의 분수에 대하여 '피렌체 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통털어서도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분수다'라고 평가를 내려 놓았다.
같은 시기에 시칠리아에서 서로 경쟁상태에 있는 두 도시에 각기 다른 두 개의 분수가 있는데, 하나는 '16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분수'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단연 으뜸이다'라고 한다면....... 어떤것이 진짜 최고가 되는것일까? 작가로 치자면..... 그래도 미켈란젤로의 제자가 쬐끔 지명도를 얻지않을까......... 하지만 평가를 내린 사람의 지명도를 치자면....... 바사리에 대적할만한 르네상스 전문가가 또 없지 않은가?
여기에 등장하는 팔레르모의 분수를 사람들은 '프레토리아 분수(Fontana Pretoria)'라고 부른다.
팔레르모의 랜드마크는 대성당(두오모)이요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명소는 콰트로 간티일 수 있지만, 팔레르모를 빛내주는 가장 멋진 여행상품은 바로 프레토리아 분수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은 관심은........ 프레토리아 분수가 팔레르모에서 제작되었을까, 아니면 들리는 말처럼 피렌체에서 만들어져서 옮겨왔을까 정도에만 쏠려있는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쇠락해져 가고 있지만 자존심 하나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팔레르모와 새롭게 몰라보게 급부상하고 있는 메시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배경이 되었고, 그런 내용들이 프레토리아 분수의 탄생에 적지않게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여, 이번 기회에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두 분수를 맛보기 형식으로나마 살짝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하면서, 뒷이야기도 약간만 슬쩍 적어나가 보련다.
메시나의 '오리온 분수'는 도시수로가 완공되던 1547년에 시작되었으며, 피렌체 태생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안젤로 몬토르솔리'에 의하여 1557년에 완공되었다.
반면, '프레토리아 분수'는 1554년에 착공되어 같은 피렌체 태생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카밀리아니'에 의해서 1555년에 완공되었다. 더하여......... 처음 완공(1554년)된 프레토리아 분수는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르네상스는 문명사조이기 이전에 하나의 거대한 사회변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렌체에서 찬란하게 피어난 르네상스는 특히 건축과 회화와 조각분야에서 유독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냈다. 이는 고스란히 로마로 전해져서 역사도시 로마를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게 만들었다. 특히 로마는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분수들이 대거 만들어졌다. 이 거대한 열풍은 베네치아에서 정점을 찍으면서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르네상스의 열기가 마침내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에까지 전해지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이탈리아 영역에 포함된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오히려 스페인에 더 가깝고 친숙한 이탈리아의 변방이랄 수 있는 분명 이탈리아이면서도 결코 이탈리아답지 않은 시칠리아, 마침내 그곳에까지 피렌체나 로마나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열풍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시칠리아 사람들의 정서에는 유독 분수에 대한 어떤 강한 집착같은 면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약 400년에 걸친 아랍인들의 지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막을 떠돌면서 유목과 유랑생활을 주로 하는 유목민들이 주류인 아랍인들은 생존의 근거지가 오아시스와 같은 물이 있는 곳이다. 정착을 하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부터 분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의 정원과 분수 사랑은 그 뿌리가 아주 깊다. 사막의 어딘가에 물을 끌어들여 도시를 건설하고 화려한 분수를 여럿이나 만든다는 것은 곧 부와 권력과 성공의 과시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정착을 하게되면 사원(모스크)을 짓는 다음으로 중요시한것이 푸르른 정원과 곳곳에 분수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질적인 생활의 향상에 대한 로망이 시칠리아 사람들 마음속에는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본토와 가장 가깝게 위치한 도시 메시나는 십자군 전쟁 이후로 눈부시게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아랍인들에 의해서 생겨난 시칠리아의 주도(州都) 팔레르모를 능가 할 정도였다. 아랍인들이 점령한 이후로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빛나고 부유한 도시로 9세기에서 11세기 말까지 명성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먼 영화가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날이 발전해 나가던 메시나는 도시의 생활용수를 멀리 4~6KM 떨어진 인근의 계곡마을에서 끌어들이는 대역사를 벍이게 되었다. 도시수로공사가 완공되던 1547년에 메시나 시의회는 이런 대대적인 대역사를 기념하고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기념물 제작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도시의 한복판에 있는 메시나 두오모 광장에 '오리온 분수(Fantana di Orione)'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오랜 협의와 심사 끝에 시의회는 이 기념물 제작의 총 지휘를 '안젤로 몬토르솔리'를 초빙하여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몬토르솔은 르네상스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제자였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몬토르솔리는 수많은 조각가들을 끌어들여서 본격적으로 분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팔레르모 시의회에 전해졌다. 팔레르모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흡사 르네상스가 꽃피우게 되는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벌어진 '도시간의 경쟁'을 다시 보는듯 했다.
과거의 영광을 아직도 생생하게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팔레르모의 자존심은 지금 메시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념물 조성을 마냥 물끄러미 바라다보고만 있을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팔레르모 시의회도 시를 대표할 수 있는 기념물 조성사업에 뛰어들었으며, 대상은 당연히 '시칠리아를 너머 이탈리아 최고의 분수'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마음을 먹고 욕심을 낸다해서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결코 아니었다.
우선 분수대를 만들 장소를 정해야 했고....... 엄청난 재정을 감수해야만 하는 커다란 난제들이 수두룩하게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혹 그 비용을 넉넉하게 충당했다손 치더라도........ 아직 그 위대한 작업을 맡아 책임을 질 뛰어난 건축가를 섭외해야만 하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공사비용의 많고 적음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넘어서고 있는 시대상황에서 '안젤로 몬토르솔리' 정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를 섭외한다는 일은 가히 하늘의 별따기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팔레르모 시의회와 시민들 모두가 발벗고 나섰지만......... 무심하게 세월만 축내고 있었다. 어느 하나 제대로 진척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무조건 메시나에 뒤지고는 못산다'는 팔레르모의 자존심뿐이었다.
오리온 분수의 기단이 꾸려지고 인근에서 조각상이 하나 둘 완성되어 갈 수록 팔레르모인들의 속은 타들어 갔다.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는 별도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놓고 벌인 전쟁을 이탈리아전쟁이라고 한다.
프랑스를 물리친 스페인은 나폴리를 차지하고 나서 시칠리아를 식민지배 하게된다. 이 와중에 분열된 이탈리아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의 여러 도시국가 내지는 자치공화국으로 나뉘어지게되고 로마만이 교황청의 직속 영토로 남게된다. 스페인 왕은 나폴리에 왕국을 세우고 총독을 임명하여 대리청정을 하게하였으며, 아래로 2~4명의 부총독을 두었다.
에스파냐 톨레도 출신의 돈 페드로 공작은 나폴리의 부총독으로 이탈리아에 왔다. 나폴리에 상주하며 부총독의 일을 하던 그는 피렌체와의 교역을 담당하면서 점차 피렌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돈 페드로의 동생 가르시아 알바레즈는 같은 부총독으로 시칠리아를 관장하고 있었다.
피렌체에 심각할 정도로 빠져버린 페드로 공작은 급기야 아예 피렌체에 눌러앉아 살기로 작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그가 '산 도메니코 알 마글리오 수녀원'의 부지를 사들여서 '엘레오노라 형제의 피렌체 궁전(현 피렌체 빌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발생시킨것으로 보여진다. 더하여 더욱 놀라운 일은 이 부지 위에 궁전이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정원과 분수가 먼저 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 궁전을 지으려고 설계까지 마친 상황에서 우연히 꿈에 그리던 유능한 조각가를 만나게 되어서 그의 일정을 감안하다보니 우선 시급한 것이 꼭 그의 손길로 만들어진 분수가 필요했던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 분수를 만든 조각가이자 건축가가 '프란체스코 카말리아니' 정도였다면 아마도 그런 추론쯤 가능해지지 않을까? 프란체스코 카말리아니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조각가인 '바치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의 제자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입구에 두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서 있는데, 하나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이고 다른 한쪽이 바로 바치오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의 조각상이라면......... 이들의 복잡한 관계는 스승대와 제자대에 이르러까지 묘한 뉘앙스를 풍기기에 아주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다비드와 헤라클레스 조각상 사이에는 메디치 가문과 자치공화정부 사이의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사건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피렌체 여행기에서 다시 다르겠지만)
프레토리아 분수는 오리온 분수에 비해서 뒤늦게 시작되었지만 훨씬 먼저인 1555년에 완공되었다. 공사 시작 불과 2년만이었다. 이어서 피렌체 궁전도 완성되었다.
이런 사태를 모두 격은 후에서야 '바사리는 프레토리아를 최고'로 택했고 '버나드 바렌슨은 오리온 분수를 최고'라 평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치열함을 넘어서 처절한 경쟁이 명작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페드로 공작은 이 자랑스러운 자신의 궁전과 정원과 분수를 동생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하여 소식을 보냈다.(집들이에 초대) 하지만, 시칠리아에서 피렌체까지 먼 길을 온 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내심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처참한 이야기였다. '형.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멋있네. 하지만 최고는 아니야. 지금 메시나 두오모광장에 완성을 앞두고 있는 오리온 분수에 비하자면 말이야' 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자존심 강한 페드로 공작은 곧바로 일행을 이끌고 시칠리아 메시나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마무리 공사중인 오리온 분수를 실제로 보게되었다.
피렌체로 돌아 온 페드로는 곧바로 추가 공사를 발주했다.
프란체스코 카말리아니가 만든 '프레토리아 분수' 위에다가 후배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바르톨로메오 암마나티(Bartolomeo Ammannati)'가 만든 작품들을 더하게한 것이다. 현재 모습의 프레토리아 분수가 완성되었다.
궁전의 완성과 함께 페드로 공작은 나폴리의 가산은 물론 본국인 에스파냐 톨레도의 재산까지 모두 처문하고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아예 피렌체에 정착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과 혼인동맹을 맺기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피렌체의 정치 정세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피렌체 자치공화정이 시작되면서 메디치가는 베네치아로 망명생활을 떠났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페드로 공작 가문도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되며 안위에 대한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구원을 내민것이 동생 가르시아 알바레즈 였다. 페드로는 가족을 이끌고 나폴리로 도망쳤다. 동생 알바레즈의 공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동생은 맡은 지역인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주로 거주하였던 것이다.
사브나롤라와 마키아벨리가 등장하는 피렌체 자치공화국 시대가 지나가고 짧지않은 시간이 지나서 다시 메디치 가문이 복귀한다. 페드로 공작 가문도 피렌체로 복귀한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 있었고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만 갔다. 가문의 몰락이 눈앞에 놓였다. 결국 페드로 공작은 자신의 궁전까지 모두 팔고 고향 톨레도로 돌아가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소문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없지만 메시나 해협을 건너 팔레르모까지 전해졌다.
즉각적으로 팔레르모 시의회가 반응했다.
적어도 '프레토리아 분수쯤 되면 누가 보아도 오리온 분수 보다 확실히 수준이 높다 하지 않겠는가? 만들 수 없다면 사서라고 갖다 놓으면 안될것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더군다나 팔려는 사람이 페드로 공작이라면 지금 팔레르모에는 그의 친동생 알바레즈 부총독이 상주하고 있으며, 나름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연관되어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우루르 알바레즈에게로 몰려갔다.
'팔레르모가 프레토리아 분수를 구입할 수 있게 주선해 주십시요.'
돈 가르시아 알바레즈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결국 팔레르모 시의회는 프레토리아 분수를 구입하게 되었다.
구입이 확정되자마자 시의회는 시청사의 앞쪽으로 광장을 만들고 그곳에 분수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불협화음 발생하게 되었다. 광장 조성을 위하여 이미 들어서 있던 기존의 건물들을 강제로 철거하다시피 행정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소요와 말썽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레토리아 분수의 구입은 이미 결정이 나버렸지만, 지금 당장 분수가 위치해 있는곳은 바다건너 본토의 내륙 깊숙한 피렌체 였다. 오늘날처럼 배행기나 기차가 다니던 시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수가 마차 한 두대 분량으로 가능한것도 아니었다. 팔레르모 시의회는 프레토리아 분수 구입에 심혈을 기울여왔지만, 정작 이를 어떻게 팔레르모까지 가져갈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대안을 세운적이 없었다.
결국 최종대안으로 우선 프레토리아 분수를 분리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적은 부피로 나누어 분리를 한 후에, 마차에 나누어 싣고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이송하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다음으로 배편을 이용하여 팔레르모 항구까지 해상운송을 하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분수의 분리에서 운송으로 이어져 다시 조립하는 과정까지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땅한 건축조각가만 있다면 차라리 새로운 분수를 하나 만드는것이 오히려 비용이 절감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프레토리아 분수에 매료된 팔레르모 시의회 의원들은 요지부동으로 분해 이송 조립의 결정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오로지 비용이었다. 이제 의회의 시의원들은 분수의 이송비용 충당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불합리함도 생겨났고 횡포도 저질러 졌다. 사방에서 원성이 높아만 갔다.
프레토리아 분수는 총 644개의 돌덩이로 분리해 포장되었다.
1574년 5월 26일에 1차 선적물량으로 112개의 포장된 화물이 팔레르모 항구에 도착했다. 이어서 2차 선적물량으로 69개의 화물이 들어왔다. 뒤를 이어 속속 분리된 분수의 화물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팔레르모 시청사 광장에서 시작된 프레토리아 분수의 재조립 공정은 첫번째 분수 제작자였던 프란체스코 카밀리아니의 아들인 카밀로 카밀리아니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심하게 포장을 하였다고 해도 비포장 도로위로 마차를 통해 크고 무거운 돌덩이들을 운송하는 일에는 불가항력적인 한계가 분명히 있다. 또한 배에 싣고 내리는데 있어서도 오늘날의 크레인 같은 특수장비가 있지도 않던 시대였다. 너무도 당연하게 많은 조각상들이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파손되었다. 또한 오랜 시간 먼거리를 이동하면서 여러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통째로 사라지는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피렌체에서 분해하고 포장하여 운송은 시작되었는데 끝내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 화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피렌체 바르겔로 박물관에 전시중인 두 점의 조각상과 나폴리 돈 루이지 개인정원에 설치된 동상이 이 시기에 운송과정 중에 빼돌려진 프레토리아 분수의 부분들로 밝혀졌다.
결국 프레토리아 분수의 재조립과 복원에는 상당한 시간이 더 소요되게 생겼으며(1584년에야 완공), 이는 당연하게도 엄청난 초과비용을 요구하는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제 팔레르모는 서로간에 불신하고 질타하고 반목하는 파행으로 치닫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팔레르모 시의회가 부패한 지방자치단체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완성되어가는 프레토리아 분수를 지켜보게된 시칠리아 카톨릭교계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경악과 분노가 뒤따라 터져나왔다. 보수적인 카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볼때 분수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트립톤이던 강의 신들이던 님프들이던 하나같이 모두 심한 누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등장 인물들의 배경 또한 저급한 이교도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리이스 신화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엄격하고도 성스러워야 할 중세의 기독교적 이미지나 가르침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저급한 19금의 에로틱한 쓰레기들을 예술품이라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구입한것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분노한 팔레르모 시민들은 프레토리아 분수의 이름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렸다.
'폰타나 델라 베르고냐(Fantana della Vergogna)'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수치의 분수(Fountain of Shame)'가 된다.
프레토리아 분수와 콰토르 간티가 있는 팔레르모 올드시티의 중심에서 벗어나 항구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한다.
곧고 시원스레 뚫려있는 팔레르모시의 중심도로(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를 따라 마냥 걸어거기만 하면 된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보면 아주 커다랗게 위용을 한껏 뽐내고 있는 닮은 꼴의 육중한 건물이 나온다. '포르타 펠리스' 라는 이름의 해안쪽 성문이다.
팔레르모란 이름을 가진 도시는 여기 '포르타 펠리스(Porta Felice)'에서 시작하여 쭉 뻗은 중심도로를 따라 도심이 형성되고, 반대쪽의 끝자락에 왕궁과 함께 서있는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겠다.
팔레르모의 성 안쪽과 성 바깥쪽, 혹은 팔레르모 육지와 지중해를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건설된것 처럼,. 마치 당당하게 서있는 중세 기사의 용맹이 고스란히 엿보이는듯 하다. 르네상스와 바로코 양식의 진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포르타 펠리스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마리아노 스미글리오를 비롯한 여러명의 건축가들이 대를 이어가듯 만들었다.
스페인 태생의 부총독이었던 마르칸토 콜로나의 아내였던 빼어난 미모의 도나 펠리체 오르시니의 이름을 따서 '포르타 펠리스'라고 명명했다. 그녀의 가문은 세 명의 교황을 비롯해 34명의 추기경을 배출한 로마와 시칠리아를 뛰어넘어 유럽 상류사회에서도 최고 반열의 명문가였던 것이다.
안쪽으로 두 개의 분수가 놓여있는 포르타 펠리스는 현대에 들어서 벌어진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금의 모습은 상당수준으로 복구된 모습이지만, 과거의 거대한 성벽이 팔레르모 도심을 에워싸듯이 늘어서 있고, 그 중심에 어마어마한 위용으로 우뚝 서 있던 성문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것이 현실이다.
테레니아해의 성난 파도를 뚫고 팔레르모 항구에 도착하면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와도 같은 도시가 낯선 방문자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한다. 열려진 포르타 펠리스에 당도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게 뻥 뚫린 대로가 한없이 뻗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양편으로 유럽 최고의 화려한 도시가 펼쳐져 있다. 당시 유럽인들의 로망이 바로 그곳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아랍풍의 건물들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이 혼재해 들어서 있고, 멀리 동방에서 들여온 비단과 자기와 온갖 향신료들이 넘쳐났다. 터번을 두른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오가고, 태양빛에 검게 그을린 수염이 덮수룩한 터키인들을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상인들이 가득했다. 하얀 수염의 유대인들과 근육질의 그리이스 선원들이 도심을 오갔다. 현지인인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로 농산물을 가지고 나와 팔았고, 비단을 두른 부유한 귀족여인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시장 구경을 나오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상점들이 줄을지어 늘어서 있고, 화려한 마차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이 세상의 어느곳에서도 보기 힘든 구경을 하다보면 도심의 한복판에 콰토르 간티가 나타나고 프레토리아 분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의 중심에 카톨릭 대성당만이 있는것이 아니다. 인근으로 정교회 성당도 있고 유대교 예배당인 시그나기도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 그뿐인가. 저만치 허름한 건물은 여전히 이슬람식 모스크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팔레르모에서는 적어도 종교나 국가나 민족이 어떤 장애가 되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간에 공존을 꾸준히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팔레르모는 중세 이후 오랫동안 유럽 최고의 도시였던 것이다.
팔레르모의 항구지역을 '칼사(Kalsa)' 라고 부른다.
아랍의 정복시기에 가장 먼저 도시화가 시작된 항구에 인접한 거대한 상업지역이었다. 하여 이 주위에는 유독 아랍인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모여살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이슬람 문화가 은근하게 배어 스며나오는 지역이다. 근대 이후로는 항구의 변천사와 더불어 어부와 부두노동자들이 주로 생활의 터전을 삶고 살아왔다. 비록 지금의 항구 모습에서는 과거의 어촌 포구같은 이미지는 모두 사라지고 무역선과 대형 쿠르즈 선박과 호화요트들이 빼곡한 마리나로 변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부두노동자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밀려난 아랍인들과 도시의 빈민층이 주로 거주하게 되다보니 당연히 낙후되고 촌스런 동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현대에 들어서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곳은 새롭게 각광받기에 이른다.
현지인들에게, 또는 어디선가 정보를 얻고 일부러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크게 인기와 사랑을 받고있는 맛집거리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음식방송인이 직접 이곳을 찾아와 시칠리아 전통음식인 아란치니와 파니니를 소개한 적이있을 정도이다. 이곳 마리나 주변으로 이름만 맛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우리도 전통이 툭 툭 묻어나오는 많이 알려진 레스토랑을 찾아가 보았다.
물론 맛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세번의 이탈리아여행에서 먹어 본 정말 맛있다고 손가락으로 꼽았던 음식들 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죽어라 걸어다니는 우리 방식의 도시투어 와중의 휴식 시간으로는 아주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 어선들과 고기잡이 도구들과 그물들로 가득했던 항구와 접한 너른 평지는 이젠 아주 커다랗고 푸르른 체육공원으로 탈바꿈 되었다. 팔레르모 현지인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공원이다.
이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도시 북쪽에 있는 '마시모 극장'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팔레르모의 올드시티를 돌아본다.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나가니 '산타 시타' 교회가 나오고, 이어서 팔레르모의 명동거리라 할 수 있는 '로마거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 어디를 가나 대도시 번화가의 모습은 비슷비슷하겠지만,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고 오로지 행인들과 이따금씩 중세풍의 말이 끄는 마차가 여행자를 태우고 지나가는 이런 도시의 풍경은 결코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도심 중앙의 가장 번화가이면서도 건물과 상점들에 간판이 거의 없다시피한 도심의 풍경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누가 이곳을 시칠리아 현대 물질문명의 중심이라고 하겠는가? 고대로마의 흔적이 역력한 도로와 로마네스크 양식과 노르만 양식과 바로크 양식으로 한껏 치장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라임스톤의 건물들이 길게 열을 맞추며 늘어서 있을 뿐이다.
옛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겹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것이리라.
이런 길이라면 숨이 멋을때까지 한없이 걷고 싶다.
흡사 우리나라 포장마차 거리와 비슷한 작고 예쁜 노천카페들이 그득한 골목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다 보면 눈앞에 갑자기 웅장하다 못해 엄청나게나 거대한 녹색과 파앙색의 돔과 빨간 지붕을 가진 멋드러진 라임스톤 건물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팔레르모의 자부심이자 또한 팔레르모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즐겨찾는 장소이자 광장이다.
'마시모 극장(Teatro Massimo).'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 프랑스 파리의 팔레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 스위스 비엔나의 호프 오페라하우스 등과 비교되는 최고의 오페라하우스가 바로 여기 팔레르모에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럽 전체에서 세번째로 큰 오페라하우스라는 설명은 굳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런 정도의 극장이라면 적어도 로마의 판테온 근처거나 피렌체 두오모나 밀라노 대성당 옆에 있어야 하는것 아니야?' 라고 싶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변방이자 한쪽 구석에 치우친 시칠리아에서도 팔레르모에 이런 어마무시한 공연장(극장)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부럽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지금의 대한민국 위상 정도라면 이정도의 문화공간 서너개쯤은 보유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속으로 알찬 활용이 더욱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팔레르모 사람들이 마냥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예전에 조지아 트빌리시나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오페라 공연 관람을 간절히 원했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 카타니아와 팔레르모에서도 끝내는 오페라 공원을 관람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마시모 극장이 우리에게 훌쩍 다가 온 이유중에는 바로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의 영화 '대부 3'를 꼽을 수도 있겠다.
콜레오네 가문의 바람이 모두 이루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마이클은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고 전부였던 딸을, 마피아들간의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피말리는 싸움과 복수의 댓가로 잃게된다.
(대부 3)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여기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에서 촬영되었다.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고 가족들과 마시모 극장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데, 갱단이 몰래 다가와 마이클 콜레오네를 기습한다. 무사히 목숨은 구했지만, 대신 딸이 가슴에 흉탄을 맞고 절명............(1990년 촬영)
팔레르모의 베르디 광장에 세워진 마시모 오페라하우스는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 바티스타 필리포 바실레의 작품으로 건설 도중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르네스토 바실레가 완공했다.
이 건물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증기로 작동하는 타워 크레인이 발명되었고, 마시모 극장의 건설에 실제 사용되는 바람에 공사현장의 부근은 늘 초만원 사태를 이루기도 했다. 광장 어귀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마시모 극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자니 당시의 공사현장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것만 같다. 절로 실감이 들었다.
천연의 라임스톤만으로 지어진 극장은 아침과 저녁의 햇쌀 조명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과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곳에서 정말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심의 일몰을 맘껏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계단 위의 입구 양쪽에 놓인 두 마리의 사자 청동상은 너무나도 멋지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탐이 날 정도였다. 자꾸만....... 자꾸만....... 우리고장 탄금대 야외음악당 본관 건물에 있는 우륵선생의 부조상이 떠올랐다.
이렇게 절로 감동이 마구 솟아나게끔......... 만들면 안되는걸까?
오페라 관람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속에 마시모 오페라하우스를 뒤로하고 옛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팔레르모의 정취를 따라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사(zisa) 지역은 분명 팔레르모 도성의 밖에 있었던 주거지역으로, 아랍인들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도성에서 쫓겨난 빈민가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거꾸로 아랍인들이 노르만인들에 의해서 축출당한 후에는 쫓겨난 아랍인들이 인근에 모여 힘들게 삶을 이거가던 아랍인 집단 거주지역었다. 현대에 들어서야 도시 재개발 계획에 의해서 현대식으로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하였지만, 이 지역의 골목골목을 고루 살피다보면 채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옛 빈민가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알싸하게 어떤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분을 위하여 생필품을 부엌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여놓는 풍경도 볼 수 있었고, 온갖 낡은 물건을 수북히 쌓아놓은 현지인 어른은 더하여 심한 신체적 장애까지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으셨다. 낯선 여행자를 환하게 맞아주셨고 커피를 건네주시고 산진촬영까지 흔쾌히 허락해 주신다.
이 또한 분명한 팔레르모의 일부 모습이며, 그네들의 삶의 표정인 것이다.
어느민족 어떤 종교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실질적인 신(神)의 자비와 은총이 저분들을 포함한 모든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현실적으로 베풀어지기를.........
팔레르모 대성당을 건축할 당시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리석을 여럿 멀리에서 실어날랐는데, 지사 지역의 대로를 지나던 마차에서 대리석 돌덩이 하나가 땅에 떨어졌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그대로 그 대로변에 오랫동안 놓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콜로냐 로타(colonna rotta) 대로' 라는 지명이 생겨났는데 지금은 그 돌덩이가 사라지고 없다.
현지인들의 생활모습을 사실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으며, 꽃을 파는 노점상들과 대형슈퍼가 서너군데나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서, 숙소에서 이곳까지 약간 거리는 있지만 수시로 걸어서 오고갔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누오바 포르타를 지나 도심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가장 먼저 당도한 '볼로니 광장(Piazza Bologni)'에선 '시피오 리 볼시'가 제작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찰스5세'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의외로 찰스5세의 동상은 위엄으로 가득찼거나 용맹스런 장엄한 동상이 아니라, 조금은 희극적으로 풍자화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볼로니 광장은 팔레르모 역사에 있어서는 상징과도 같은 유서 깊은 명소라 할 수 있다.
아랍 왕조,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국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들이 대부분 이곳을 거쳐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세페 가라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왕국의 꿈을 역설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볼로니 광장을 찾은것은 촬스5세를 만나거나 주세페 가라발디를 만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볼로니 광장의 맞은편 건물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Collegio Massimo dei Gesuiti'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바로코 양식의 거대한 석조건물 벽에는 그렇게 표지판이 나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가장 깊은 안쪽 광장에 바로....... 그가 있었다.
'콜레지오 마시모'는 예수회(Gesuiti)에 의해서 만들어진 르네상스 시대의 고등교육기관(초급대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유명한 단과대학들에 비하자면 규모나 학위의 기준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로서는 일정한 기준에 의해서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기숙과 학업을 동시에 전담하도록한 시대에 앞선 교육기관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예수회에서 처음 고등교육기관을 만든것에는 나름 유능한 사제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지만, 점차 선교사업의 한 방편으로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재를 널리 양성하고자 과감하게 전환을 모색한 결과였다.
이렇게 예수회에 의해서 시작된 교육사업(콜레지오 마시모)는 여기 팔레르모 뿐만이 아니라 메시나와 이탈리아 본토에 몇몇 대학이 있었고, 더 나아가 해외에도 상당수의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가 바로 예수회에 의해서 탄생한 교육기관(콜레지오 마시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이해가 쉽게될 것이다.
팔레르모 도시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비아 레지아 델 카사로의 한 건물에 단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Collegio Massimo dei Gesuiti'가 있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가 예수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그가 예수회 회원으로서 펼친 업적이나 콜레지오 마시모와의 관계나 시칠리아나 팔레르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름 꾸준히 조사와 연구를 해 보았지만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거의 없다. 다만..... 예수회의 역사와 역활을 통해서 단테가 이런저런 일을 했을것으로 추정되며, 예수회의 고등교육 기관에 저렇듯 남보라는듯이 당당하게 단테의 동상이 서 있는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를 해 볼 요량이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앞마당에서 만났던 단테 보다도 훨씬 강력한 이미지로 느닷없이 훅 하고 다가 온 단테.......
팔레르모의 '콜레지오 마시모'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대충 이렇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교 산하의 여러 단체중의 하나인 '예수회(Gesuiti)'는 교황 직속이라는 매우 독특한 경우에 속하는 특별한 단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카톨릭 규율이 아니라 교황법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남성들만의 단체이다.
1547년에 처음 팔레르모에 도착한 예수회는 도시의 중심가에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하였고, 두 세번의 이전 끝에 현재의 자리에 터전을 마련했다. 본래 작은 교회가 있었던 땅과 인근의 민가를 사들여 수녀원을 건설하였다가, 후에 이를 교회와 학교(콜레지오 마시모)로 개축과 증축을 하였다. 교황의 명으로 예수회가 해산되고 세계 도처에서 예수회들이 쫓겨나는 사태를 맞아서 팔레르모 시의회가 이곳을 사들여서 학교와 주립도서관으로 전환시키기에 이르렀다. 점차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지원이 중단되면서 종국엔 퇴색된 시립도서관으로 까지 전락했다. 그러던것이 비교적 현대에 들어서면서 예수회가 복권 복위되면서 다시 돌아왔다. 현재는 절반 정도는 교회겸 박물관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주립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단과대학으로서의 명맥을 우지해 나가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만큼 주립도서관에는 귀중한 서책과 자료들이 상당수 보관되어있는데, 2020년 7월 들이닥친 폭풍과 홍수로 도서관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것으로 뉴스에 등장하기까지 했었다.
르네상스를 이야기하자면 '단테'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결코 빠트려서는 안되는 인물 중의 한명이다.
그런만큼 로마나 피렌체를 여행하다보면 거듭거듭 거론되어야만 하는 인물이기에 이쯤에서 단테에 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해두고자 한다.
아주 특별한 단체인 '예수회'에 대해서도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자. 어차피 예수회의 근원이랄 수 있는 바티칸에 가면 그때 '예수회'에 대해서 다시 거론할 기회가 생길것이다. '어쌔신 크리드'라는 영화를 보면서 '예수회'의 감추어진 단면을 떠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팔레르모에는 아랍인들의 향취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길어진 여행기로 인하여 부득이 다음 기회를 빌어보기로 하고, '라 마르토라나 그리이스 정교회 성당' 이나 아랍양식이 깊게 내재된 매우 독특한 양식의 '산 카탈로성당' 등도 소개하지 못하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어디 그뿐인가.
중앙역에서 항구를 향해 걷다보면 나타나는 팔레르모에서 가장 크고 멋진고 귀중한 '빌라 줄리아 공원(Villa Giulia)'에서 '천재의 분수(Fontana del Genio)' 이야기를 소상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점도 매우 아쉽다. 다만, 일전의 여행기에서 대충이나마 설명한 바가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다. 찾아본다면 어느정도 궁금증이 해소될테니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한번 더 팔레르모)를 써내려 갔으면서도 아직도 아쉽기만 한 것이 팔레르모 여행이랄수 있겠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팔레르모를 한번쯤 찾아가 보시라고........ 시칠리아에서 한 달....... 을 강권해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팔레르모에 왔다면 '몬레알레 수도원'을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바르셀로나에 갔다면 '몬세라트 수도원'을 빼놓을 수가 없는것 처럼 말입니다.
하여, 다음 여행기는 몬레알레 수도원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서둘러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 본토의 로마 테르미니역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찾아주시고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르네상스로 가는 열차를 타고..... (0) | 2020.11.29 |
---|---|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르만 양식의 성당 <몬레알레> (0) | 2020.11.15 |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신(神)들이 노닐던 언덕 '아그리젠토'에서........ (0) | 2020.09.30 |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기행) 낯선 이탈리아를 찾아서 팔레르모에 가다. (0) | 2020.09.16 |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화려하게 수놓은 우울한 바로코의 도시 '카타니아' (0) | 2020.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