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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화려하게 수놓은 우울한 바로코의 도시 '카타니아'

by 피안재 2020. 9. 1.

 

 

 

 

 

 

 

 

 

 

 

 

 

 

 

 

 

 

 

 

 

 

 

 

 

  똑같은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조각상이며 건축물을 만들었지만  여타의 다른 도시들과 카타니아의 분위기는 영 다르다.

  에트나 화산의 분출로 도시의 대부분이 오랜 세월동안 용암과 화산재에 덮여있었던 때문이다.  시칠리아인들은 화산으로 인해 오랫동안 페어가 되어 방치되었던 사라졌던 도시를 재건했다.  용암으로 뒤덮였던 지역은 검은 화산암의 언덕으로 변했지만,  화산재에 파뭍였던 나머지 도심은 어느정도 회생이 가능했다.  과거의 라임스톤과 대리석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건설된 옛카타니아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모든 건물의 담벼락과 담장은 검은빛 화상을 입었고 이는 과거의 화려함으로 회생이 불가능했다.  검게 탄 그을음을 털어내고 닦아냈다.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돌을 다듬어 채웠다.  이때 사용된 석재들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인근의 그리이스와 로마시대 유적들에서 석재를 꺼내다 자르고 다듬어 사용했다.  외부에서 새로운 화산암과 대리석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한 도시의 재건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었고,  결국은 도시를 뒤덮은 용암(화산암)을 자르고 다듬어 재건축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17세기 모든 유럽의 시대사조였던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도시로 재건하였지만,  이미 그을린 상처가 너무나 컸던 도시는 새로 끼워넣은 회색빛 화산암의 영향으로  우울하고 더하여 조금은 암울한 바로크의 도시로 완성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로 재탄생한 것이 바로 카타니아(catania)다.

  만약.....  카타니아 도심의 검게 그을린 화산재의 흔적을 모두 지워내고,  건물마다 박혀있는 회색빛을 라임스톤으로 바꿔넣을수만 있다면.......  카타니아는 아마도 시라쿠사 보다도 더 화려한 바로코의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코는 '화려함'으로 대변된다.

  카타니아 도심을 거니노라면 분명 바로코의 도시가 틀립없다.  다만 화려함 보다는 왠지 무엇인가 우울한 느낌이 생겨나는 것을 떨쳐낼 수가 없는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카타니아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과거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의 성실함과 근면성'을 생각한다면  약간은 그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현지인들의 삶을 건네다 보고 들여다 본다면 카타니아 여행은 이제부터라도 당신에게 또다르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 올 것이다.

  시라쿠사와는 전혀 다른........  카타니아의 바로코는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7세기 유럽을 지배한 새로운 문예사조는 '바로크 양식' 이었다.

  이전은 르네상스였으며, 이후는 신고전주의로 나타난다.  이 두개의 사조 틈새에서 바로코는 개혁과 반개혁이라는 엄청난 고뇌와 대립과 반목이 점철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바로코는 이전과 이후에 있을 문화와 예술분야의 거의 모든 장점들만을 넘치도록 받아들이 아주 특이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카타니아의 경우도 그랬다.

  코끼리 조각상이 있는 두오모 광장에서 북쪽으로 에트나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로마 원형극장의 잔해가 남아있는 본래의 중심가인 스테 시크로 광장이 나오고,  더 걸어올라가면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테 아트로 광장이 나온다.  도시 한가운데 북쪽으로 곧게뻗은 이 중심도로를 따라 쇼핑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딘가 모르게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를 연상케 해준다.

  이 거리에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은 제각각의 분리된 개별 건물들이 아니다.  이들 역시 바로코 스타일을 닮아 하나하나의 건물들이 모두 웅장한 하나의 성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네모 모양의 건물 안에 공터와 정원과 분수가 마련된,  스페인에서 흔히 만나던 이슬람 영향의 웅장한 건물들이다.  군데군데의 교회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런 하나의 독립된 궁전과도 같다.  역시 바로코 스타일 답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건물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발코니와 세련된 계단들과 웅장한 기둥들과 여기저기 흔하게 대리석 조각상들이 놓여있고 커다란 벽면마다 별과나 화려한 그림들이 내걸려 있다.  건물 소유자의 재산 보유에 따라 금과 은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 하겠다.

  교회의 경우도 앞서 이야기한 화려한 치장들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더하여 카타니아 바로코 양식의 교회들은 적지않게 허세까지도 멋으로 치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교회의 경우(바티칸 성당. 피렌체 두오모)는 교회의 웅장함을 나타나개나 상징으로 본당의 지붕이랄 수 있는 돔이 가장 높고 크고 웅장하다.  고딕 양식에서는 높고 뾰족한 첨탑이 이를 대신했다. 어떤...... 교회 모형의 표본이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파사드(교회 정문을 장식한 별도의 건물)은 본건물의 크기나 높이와 견주어서 비슷한 형태로 멋진 장식을 주로 나타내고자 했었다.

  하지만 카타니아에서 보여지는 바로코 스타일의 교회는 이런 전형도 거부했다.

  교회의 정문이 파사드가 본당 건물보다도 훨씬 높고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 까지의 르네상스 교회를 보면.......  파사드를 보면서 전체적인 교회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본당 위에 우뚝 솟은 돔의 위용에서 보다 큰 감동과 형용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느낌을 가졌었다면,  이제 바로코 양식의 교회에서는 외부에서 파사드의 높이만으로는 교회의 크기를 전혀 가늠하기 어려워 졌다.  돔도 보이지 않을만큼 크고 높고 화려한 파사드가 교회의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파사드의 웅장함에 놀라 안으로 들어가보면 의외로 작은 본당 건물에 당혹스러울만큼 놀란적도 있다.  이때 생겨나는 괴리를 내부의 화려함이 커버해 주는 것이다.

  '밖에서는 크더니만 실내에 들어와보니 엄청 작네' 하는 생각을 일시에 성당 내부의 화려한 장식으로 떨쳐내게끔 만드는 것이다.  '화려함을 추구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과신'을 '바로코 스타일' 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바로코 직전에 잠깐 등장하는 '매너리즘의 시대'를 이 부분에서 느껴보기도 한다.

  아무튼,  카타니아에서 만나고 느끼게되는  바로코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성녀 로살리아) 조각상.

 

(성녀 루치아)  조각상.

 

 

 

 

 

 

 

 

  카타니아 두오모(Cattedrale di Saint Agata)는 카타니아의 수호성인인 '아가타 성녀'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시라쿠사가 루치아 성녀의 고장이라면,  카타니아는 아가타 성녀의 고장이다.

  처녀의 몸으로써 기독교에 귀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시며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던 시대에 태어나 끝내는 모진 고문과 탄압속에 순교하신 분들이다.

  눈을 빼앗기는 형벌을 받는 루치아 성녀는 많은 그림과 조각상에 눈을 접시에 받쳐든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가슴을 제거당하는 형벌을 받은 아가타 성녀는 피뭍은 가슴을 움켜쥐거나 접시에 가슴을 받쳐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모진 고문과 처형도 비슷하지만,  사후의 모습도 이 두분의 성인은 비슷하게 함께한다.

  거기엔 지난번 여행기에서 빠트린 비잔틴의 조지아 마니아체 장군과의 사연도 함께 있다.  

 

 

 

 

 

 

 

 

 

 

 

 

  1693년 카타니아에 화산 폭발과 함께 대지진이 들이닥쳤다.

  당시 2만오천명이 살고있던 카타니아 도시 인구의 거의 대부분인 2만명의 시민들이 파뭍혀 사망했다.

  대성당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재앙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이날을 카타니아 사람들은 (아가타 지진)이라고 기억한다.

  아가타 성녀의 기념 축일은 2월 5일이다.  하여 카타니아에서는 해마다 2월 4일.5일.6일을 성대한 기념 축제일로 정해왔다.  대성당에 모셔진 성녀의 동상이 도심의 모든 골목골목과 가가호호를 순회하면서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행사를 아주 성대하고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온 카타니아 사람들이었다.(지난번 여행때 아가타 축제를 경험했음)

  1693년 2월 4일밤,  아가타 성녀 축일을 맞아 온 도시가 거리로 뛰쳐나와 불을 밝히고 춤과 음악으로 거리를 수놓고 있던 시점에 느닷없이 화산이 폭발하고 대지진이 몰아쳤던 것이다.  삽시간에 도시는 참혹한 죽음속에 파뭍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아가타 성녀'를 비난하고 원망 할 법도 하건만.........  그들은 무너진 대성당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결론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아랍인들(이슬람)이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9세기 경까지 카타니아 대성당 자리에는 웅장한 로마식 목욕탕이 들어서 있었다.  도시의 한복판 광장에 로마인들은 커다란 공동 목욕탕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뒷편의 종탑 넘어 수도원 쪽으로 돌아가면 옛 로마 목욕탕 건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것을 볼 수 있다.

  아랍을 몰아 낸 노르만 왕조는 이 목욕탕 자리를 허물고 그곳에 노르만 양식의 대성당을 지어 성녀 아가타에게 헌정했다.  그 이면에는 로마에 의해서 탄압을 받던 시기에 목욕탕 건물 일부가 기독교인들의 은신처(초대교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탄생한 노르만 양식의 카타니아 대성당이 대지진으로 페허로 변한 것이다.

  처참한 상황에서도 대성당의 재건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여러명의 설계자와 감독관들이 참여했지만,  현재의 대성당 모습은 누가 뭐라해도 당시 시칠리아 최고의 메시나 출신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장인이었던 '지롤라모(Girolamo Palazzotto)'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카타니아 대성당은 틀림없는 지롤라모의 훌륭한 작품이지만,  정문 파사드 하단의 육중한 여섯개의 기둥이 인근에 있는 '그리이스 극장'에서 가져 온 기둥이었다는 점에서.........  재활용일까?  파괴와 약탈의 증거일까?

  지롤라모의 바로크 양식을 채택한 대성당은 모양과는 다르게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역시나 당시의 지진 피해에서 나온 회색빛 화산암을 주재료로 사용한 점과,  건물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화산 폭발에 그을리고 무너져나간 흔적들이 사방에 산재하기 때문이리라.  종탑만은 바로크의 화려함을 어느정도 나타내주고 있는 듯 여겨진다.

  성당의 내부도 비교적 간촐하고 단순한 느낌이다.  바로코의 화려함과 과도한 장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소탈함이 오히려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아가타 성녀와 카타니아 출신의 유명인들인 음악가 빈첸초 벨리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성당 안에 잠들어 있다.

 

  지난 번 시라쿠사 여행기에서는 고대 그리이스 역사에 주안점을 두다보니,  여기가 시칠리아이며 루치아 성녀와 아가타 성녀를 함께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  나머지 카타니아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아가타 성녀를 살피다가 루치아 성녀와 연결지어 생각하다보니 불쑥 마니아체 장군 이야기가 떠오르는것이 아닌가?  뜬금없이 왜?

  지난 번  시라쿠사 여행기에서 마니아체는 시라쿠사 영토를 회복하지도 못했고,  마니아체 성을 건설한 사람도 아니라는 나의 소신을 피력한 적이 있다.  마니아체 성은 애초 시라쿠사가 그리이스의 폴리스로 생겨날 때 부터 성이 있었으며,  마니아체는 그저 아주 잠시 성을 차지했을 뿐이고,  지금의 성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서 완공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성녀들의 이야기와 엮어서 마니아체가 아주 잠시동안만 시칠리아에 머물렀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8세기 말에 시칠리아는 완전히 아랍인들(이슬람)에게 점령되었다.

  아랍인들은 시라쿠사를 페허로 만들었고,  북쪽의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하여 페허로 변한 시칠리아 남부에 대한 감시와 관리가 나름 소홀해 졌다.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비잔틴은 극도로 쇠락해 갔고 이슬람은 더욱 번성해 갔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038년 한무리의 비잔틴 군사들이 은밀하게 시라쿠사에 상륙했다.  이들이 바로 비잔틴 제국의 '조지아 마니아체 장군'이 이끄는 소규모 군대였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아랍 군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록 심하게 허물어졌지만 과거 군사적 요충지였던  시라쿠사 해안 성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랍 군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칠리아의 모든 중심은 팔레르모였고,  시라쿠사에서 팔레르모까지는 너무나 멀었다.  페허로 변한 시칠리아 남부에 대해서 북쪽 팔레르모의 아랍왕국은 너무도 무심했던 것이다.

  비잔틴의 황제 미카엘 4세는 마니아체 장군과 극소수의 군대를 시라쿠사에 파견한 것일까?

  시칠리아 영토 회복을 위하여 교두보를 마련하고 끝까지 사수하라고 마니아체 장군을 보냈을까?  그랬다면 아랍 정규군을 상대하기에는 비잔틴의 군세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지극히 빈약했다.

  시라쿠사에 상륙한 마니아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수의 군대만을 대동하고 은밀하게 '산타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에 잠입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수습해서 가지고 진지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카타니아의 로마 목욕탕에 잠입했다.  카타니아의 기독교인들이 로마 목욕탕의 깊숙한곳에 성소를 만들어 모임을 갖고,  성녀 아가타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니아체는 이곳에서도 '아가타 성녀의 유해'를 수습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시라쿠사의 진지로 돌아갔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아랍 초병들의 눈에 띄었던것 같다.  비잔틴 군대의 침입은 곧바로 팔레르모 아랍왕조로 보고되었고 토벌대가 급파되었다.

  영토 회복을 위해 교두보를 마련하라고 장수를 파견했다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둬 마니아체성을 재건을 했다던지, 아니면 마니아체 성에서 전원 사망했다던지 어떤 성스런 전투가 뒤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런 후속 조치도.......  전투도 없었다.

  '루치아 성녀'와 '아가타 성녀'의 유해를 수습한 비잔틴군은 어느틈엔가 바다로 나아가 버리고 말았다.

  성녀들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4세에게 받쳐졌다.

  루치아 성녀의 유해는 모처에,  아가타 성녀의 유해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조지아 마니아체 장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성녀들의 유해 확보' 였을까?  아니면 교두보 확보와 사수였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아랍군대를 대항한다는게 답이 안나오자 유해를 확보하고 이를 빌미로 후퇴를 감행한것일까?

 

  아가타 성녀의 유해는 비잔틴제국이 최후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고셀모'라는 군인과 동료들이 4차 십자군의 침입에 앞서서 유해를 수습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와서 카타니아에 돌려주었다.  지금 두오모에 안장되어 있다.

  제 4차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인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심중엔 두 명의 성녀 유해를 모두 베네치아로 가져갈 염두를 사전에 두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마자 성녀들의 유해를 찾고자 베네치아 군대가 온 도시를 뒤졌다.  하지만 이미 아가타 성녀의 유해는 고셀로가 확보해서는 성밖으로 달아났다.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찾고자 혈안이되었는데..........  자신들로서도 수호 성인이 간절히 필요했고,  베네치아와는 영원한 정적이며,  단돌로의 속셈을 미리 눈치채고 있던 제노아 공화국이 한발 앞서서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확보하고 제노아로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젊어서 시력을 잃고 장님의 처지로 비잔틴을 함락시킨 90줄의 노익장 엔리코 단돌로로서는 '눈의 보호 성인'인 루치아 성녀의 기적이 절실했던 사람이었다.  단돌로는 루치아 성녀의 유해에 올인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교황을 협박했다.

  교황은 제노아를 기독교에서 파문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어쩔 수없이 제노아는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베네치아로 보냈다.

  그러자 시라쿠사가 루치아 성녀의 유해 반송을 베네치아에게 요구했고,  교황에게 고소했다.

  교황은 판단 결과 베네치아가 시라쿠사에 유해를 돌려주는것이 타당하다고 실행을 명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여럿으로 나누어 유럽의 여러 도시와 교회에 일부분씩 나우어 주었고,  두개골과 주요 부위는 자신들이 차지한 채 나머지 일부만을 시라쿠사에 돌려주었다.(한마디로 성인 유해의 수난사라 하겠다)

 

  '이것이 성스러워야 할 기독교식 정의이며 사랑이며 양심인가?'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해 주어라'는 말씀은.......  그냥 찌라시에 적어 놓은 공염불 인가?

  '왼뺨을 때리거든 뺨에 닿은 부위 이상의 손바닥을 절단해 버리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함께 간 것으로 터무니 없을 만치 바가지를 씌워서 비용을 억지로라도 뜯어내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새로 쓰던가........

 

 

 

 

 

 

  '콰트로 간티(Quattro Canti)'.

  '콰트로 간티' 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구동성으로 팔레르모를 외친다.

  물론 팔레르모의 콰트로 간티가 유명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팔레르모의 콰트로 간티가 유일한 문화유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아니다.

  이제 여행기를 통해 카타니아의 콰트로 간티를 소개하고자 한다.

 

 

 

 

 

 

 

 

 

 

 

 

 

 

 

 

 

 

  '콰트로 간티(Quattro Canti)'는 쉬운말로 '네거리(교차로)'라는 뜻이다.

  뭐 생각처럼 거창한 그런 특별한 의미를 가진 특정한 유적을 상징하는 단어도 아니다.  삼거리도 있고,  사거리도 있고, 오거리와 육거리도 있다.  그저 그런 교차로 중에서 네개의 길을 가진 교차로를 뜻한다.

  중세 이후로 실용주의 사고를 가진 참신한 몇몇의 건축가들이 이런 깜찍한 생각을 해낸것이다.  콰트로 간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기하다.  '어쩜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싶어진다.

  사거리에 일정한 크기의 광장을 우선 조성하고,  교차로의 중심에서 바라볼 때 네군대의 허용면적에 똑같은 크기와 설계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조성하는 것이다.  물론 네군데의 쏙 닮은 건물들은 저마다 약간씩의 개성이나 특징을 가지게 만들었다.  윗쪽의 항공사진에서 보자면 사거리 네방향의 지형은 모두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건축가는 교차점에서 바라다보면 네군데의 건물이 모두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크기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카타니아의 콰트로 간티는 네거리에 화려한 발코니를 가진 네개의 궁전을 만든것이다.

  팔레르모의 콰트로 간티는 네거리에 화려한 외벽을 가진 3층 건물을 만들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네군데의 분수와 요정과 팔레르모의 위인이 제각각의 건물을 치장하고 있다.

  지금 카타니아의 중심은 두오모 광장이지만,  도시가 재건되기 전까지는 콰트로 간티가 있는 '요셉 만지니 광장'이 카타니아의 중심지였다.  이 중심도로는 두오모에서 카타니아의 남문인 '포르타 페르디난디아'까지 일직선 도로로 뚫려있다.  네개의 쌍둥이 궁전은 당시까지만 해도 카타니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 궁전들은 지금은 아주 유명한 피자집을 비롯하여 해산물 식당과 레스토랑으로 명성들이 높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이 네거리의 광장 가득 노천 카페가 펼쳐진다.  정말로 낭만 가득한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각개의 건물마다 정면에 흰색의 대리석 기둥을 8개씩 세워놓았는데,  이는 모두 근처의 로마 극장에서 가져 온 것들이다.  그리이스 극장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기둥들은 가져다가 대성당 파사드 공사에 사용하였고,  콰트로 간티의 쌍둥이 궁전에는 총 32개의 칼카라 대리석 기둥을 로마 극장에서 가져다 사용했다.

  이 쌍둥이 궁전들은 확연한 노르만 양식이지만,  은근하게 이슬람 양식이 가미되어 아주 색다른 향취를 풍긴다.  많이 퇴색되고 훼손이 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바라 볼수록 아름다운 매력적인 건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프란체스코 바타글리아와 스테파노 이타르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콰트로 간티인데,  이 건물의 실제적인 가치와 매력은 쌍둥이 건물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쌍둥이 건물들로 인하여 길게 늘어선 네개의 거리를 따라 비슷한 외관을 가진 건축물이 들어서게 하였고,  건물들의 출입구를 모두 비슷한 모양과 크기로 일정하게 도로를 향해 나도록 만들었다.  같은 블럭의 출입구 형태와 크기는 모두 비슷하다.  철저한 사전 도시계획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며,  네개의 도로 여덟개의 블럭마다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몰려 살게되었고,  과일가계는 과일가계 블럭에 늘어서 있고,  신발가계는 신발가게 블럭에 늘어서서 영업하게 되었다.  용도와 직업에 따른 도시 계획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 계획도시의 가장 뒷쪽 낮은 지대에  야채등의 농산물 시장과 바다와 인접한  사계절 수로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가장 낮은지역에 수산 시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 지오토. 바사리. 부르넬리스키. 브라만테. 깜비오 등의 공통점은 결코 미술가(화가)가 아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천재적인 건축가였다는 사실이다.  주업과 부업이 구분이 잘 안될 정도이다.

  또한 그 시대의 건축가는 아주 넓고 높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건축 설계에서 시공 기술에 대한 공학,  토목 공학은 물론 조경 기술과 인테리어 시공까지 건축에 대한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해야만 했다.

오늘날의 건축 설계 분야와 시공 분야가 나뉘어 지고,  토목과 건축이 분리되고, 주변의 환경을 담당하는 환경 공학과,  건물 하나에 그치지 않고 옆동네나 인근까지 나누어 생각하는 도시설계 공학분야 등으로 세분화 되었다.

  덕분에 다시는 부르넬리스키 같은 건축가는 인류 역사에 재등장 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두오모 광장의 한쪽 구석에는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아메나노 분수(Fontana dell'amenano)'는 조각가 '안젤리니(Tito Angelini)'의 작품으로  현지인들은 아메나노 분수라는 이름 대신에 '아쿠아 린 졸루'라고 부르길 더 좋아한다.  지금은 그저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아메나노 강의 추억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강'으로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그들만의 바램이 담긴것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시칠리아 청년이 소방호수 처럼 생긴 풍요의 뿔을 통해서 에트나 화산에서 흘러내려온 차겁고 맑은 천연수를 뿜어내리면 둥근 타원형의 쟁반같은 받침 가득 물이 차고 넘친다.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 내린다.  풍요로움이 차고 넘지틑 이 쟁반 모양은 바로 카타니아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폭포에서 쏟아진 물은 강을 이루고, 이 강물은 다시 바다로 흘러 합쳐지게 되는데...... 쟁반의 아랫쪽으로 두명의 트립톤(반인반어)이 바다에서 솟아나와 뿔고동을 통해서 또 다시 물을 뿜어 흘러내리게 한다.  아메나노 강물을 통해서 카타니아의 풍요로운 정서가 어떤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로 승화되는것을 나타내고자 하고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디를 가나 최고급의 카라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들과 분수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안젤리니가 만든 트립톤 조각상은 상당히 강한 이미지와 느낌으로 다가온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대성당의 분수대에서 볼 수 있는 넵튠의 강한 이미지와  로마의 통일궁 계단 옆의 분수대에서 보는 조각상만큼이나 아주 인상적이다.

  굳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된 미켈라나젤로나 도나텔로 같은  이름난 천재들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시골 광장 구석구석에 놓인 조각상이나 분수대들도 우리나라에 가져다 놓으면 무조건 국보나 보물 대접을 받을것만 같다.

  왜 우리에겐 이런 비슷한 조각상들이라도 없단 말인가?

  정말정말 아름답고 많이 부러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날,  카타니아 도심의 한복판으로는 에트나 화산에서 발원한 아메나노강이 흘렀다.  카타니아 도시 건설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수량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도시의 현대화에 밀려 제방 정리를 통한 소규모의 물줄기로 변했다가는,  마침내 도시의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천을 복개해서 도로를 내는것이 도시 현대화의 척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맥은 지금까지 이어져 차갑고 맑은 물이 두오모 광장가지 여전히 흘러들어와 아메나도 분수를 만들게되었고 여전히 에트나 화산을 천연수를 뿜어내고 있다.

  인근 카페의 나이 지긋하신 어른 말씀으로는 자신이 어렸을때 까지는 실제로 분수대 아래에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이 목욕도 했었다고 한다.

  분수대에서 떨어진 물이 다시 어두운 지하로 흘러들어가 그리 몰지않은 곳에서 카타니아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쪼그리고 엎드려서 지하 도랑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에 직접 손을 담구어 보았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정말로 차갑다.  그리고 물줄기가 워낙 세차게 흘러서 그런지 주변에 이끼도 끼지않았고 정말로 깨끗한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카타니아 사람들만의 어떤 사연이나 깊은 정서가 있겠지만..........  나는 차라리 이 아메나노 분수를 두오모 광장의 중앙으로 이전 설치하고,  현재 놓여진 코끼리 동상을 분수대 자리로 바꿔 옮겨놓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해 보았다.  그것도 꽤나 괜찮을법도 한데.........

  하지만 아마도 그들에겐........  에트나 화산이라는 성스러운 존재감과  화산폭발의 재앙을 극복한 자신들의 무한한 자부심이 코끼리 동상을 광장 한가운데서 두오모를 바라보게끔 만들어 설치한것이 아닐까?

 

 

 

 

 

 

 

 

 

 

 

 

 

 

 

 

 

 

  아메나노 분수대의 바로 뒷편이 그 유명한 '카타니아 수산시장'이다.

  시칠리아 사람들의 근면 성실함과 지중해 바다의 풍요로움을 절감할 수 있는 명소로 여행자들에게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이른 새벽부터 이곳은 왁자지껄하고 더없이 분주하다.  밤새 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들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 이 새벽시장을 위해서 일제히 달려오기 때문이다.

  오전 열시면 새벽 시장은 대부분 문을 닫는다.  이들은 이미 하루 일과를 마친것이다.  시장은 텅 비게 된다.

  새벽 수산시장의 주고객은 인근에서 해산물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가계에서 쓸 싱싱한 생선을 그날그날 새벽시장을 통해 직접 구매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카타니아의 현지인들이다.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새벽시장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닌다.

  다음으로는 시칠리아인들의 생생한 생활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찾아오는 많은 여행자들이다.  물론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게스트하우스 등지에 머무는 여행자들 중에는 실제 요리 재로로 해산물을 구입하기 위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무척이나 붐비는 짦은 시간에 여행자들이 들쑤시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대도 시장 상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기꺼이 환대해 준다.  무덤덤하게 무표정으로 일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부러 포즈를 잡아주기도 하고 함께 찍어주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려서 일까?

  하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국내 여행을 많이 해 본 여행자나,  아니면 수산시장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여행자라면........

  글쎄다.  '이게 절말 그 유명한 시칠리아 최고의 수산시장이 맞아?'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생겨날 것이다.

  좌판마다 가장 수북하게 쌓인것은 작은 새끼 정어리류, 아니면 고만고만한 크기의 새우가 대부분이다.

  문어 몇마리,  꼴뚜기 쬐끔.......  홍합은 조금 쌓여있고.......  뭐 특별히 차고 넘치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다랑어과 어류(참치)와 연어는 크기가 엄청나서 고등어 설듯이 토막토막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는 ........  별로 없다.(우리나라 동해나 남해나 서해의 수산시장을 생각하면 오해?  절대로 아니 됨)

  그럼에도 이들은  풍요로운 지중해 바다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한다.  

  연지에서 수산업과 시장에 종사하는 분들을 모셔다가 우리나라 수산시장을 좀 보여드렸으면...........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 수산물 해산물의 가격은 상당히 비싸다.  우리가 최고급 한우를 찾는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우리동네 시장에서 파는 3만원 정도 문어 한마리면 유럽에선 한 20만원은 줘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크기는 우리보다 좀 더 크지만.....  별로 싱싱해 보이지 않는 홍합을 갯수로 세어서 판다.  1개에 1유로(1300원 가량) 이상으로......

  유럽을 여행해 보면서 내가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한가지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모든 국가와 항구도시의 수산시장 하루 매출량을 모두 합쳐도......  우리나라 남해안(부산에서 충무를 거쳐 여수 순천만까지)의 수산시장 거래량을 결코 넘지 못한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중해의 어부들과 수산시장 상인들이 우리나라 어디든지 수산시장을 보고나면 기절초풍에 쓰러지고 말것이다.

  그들이 신에게 감사 기도드리는 '풍요로운 바다'와 '만선의 기쁨'은 우리와는 격이(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수산물 소비 세계 1위에 등극한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의 가격대에 맞추어 수산물을 소비한다면........  거의 지난번에 지급한 '재난지원금을 1주일에 한번씩 지급해야만 가능' 할것이라 생각된다.  몰론 지중해나 대서양 연안에서 주로 잡히는 참치나 연어는 싸도 많이 싸다.  우리나라에서 돼지고기 먹는 가격이면 참치나 연어를 실컷 먹을 수 있다.  참치의 뱃살이나 뽈살이나 부위 구별이 없다.  그냥 원하는 부위를 똑같은 가격(12유로~16유로)에 1kg을 뚝 잘라 준다.  참치 보다도 오징어류가 훨씬 비싸다.

  왜 그럴까?

  지중해에는 뻘(갯뻘)이나 연안바다(대륙붕)가 거의 없다.

  플랑크톤이나 해조류 등 기초 해양생물의 먹이 서식지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수산자원은 해수온도가 온화하고 먹이가 풍부한 연안바다에 서식한다.  딱 그런 명소가 우리나라 인근의 바다이다.  그런데 지중해는 다르다.  해안에서 아주 조금만 바다로 들어선다 싶으면 곧바로 수직낙하가 나타난다.  대륙붕이라는게 거의 없다.  지중해의 깊은곳은 수심 2천미터에 이른다.  이 깊은 바다에 대서양의 차가운 바닷물이 드나든다.  하다보니 심해자원인 다랑어류만이 주로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들은 고등어류나 가자미 종류를 열댓마리 잡으면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우리 어부들은 배 밑창 가득 셀수 없을만치 고기로 가득해야만 웃는다.  레벨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해가 중국 어선들의 침범과 삭쓸이로 자원이 고갈되어 버리면.......  자연히 우리 수산물 가격도 유럽만큼 올라갈 수 밖에........

 

 

 

 

 

 

 

 

 

 

 

 

 

 

 

 

 

 

 

 

 

 

 

 

  카타니아 도심을 산책하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그리이스나 고대로마의 유적들이 즐비한 시칠리아의 여타 도시들에 비하자면 본의 아니게(에트나 화산으로 인하여)  페허 위에 근대화의 길을 걸어와야만 했던,  조금은 색다른 시칠리아를 만날 수 있다.

  회색빛 건물로 가득한 거리를 걷다보니 카타니아의 하늘 마저도 잿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야 알게되었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나 라임스톤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웅장한 건물들과 칼카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만 보아오다가 갑자기 은은한 회색빛으로 수놓아진 바로크 도시를 감상하게되는 기회를 안겨준 카타니아에 대한 기억도 오랫동안 남아있을것만 같다.

  북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두오모 광장을 막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또다른 작은 광장이 등장하는데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채색된 예쁜 코끼리 동상이다.  역시나 이 작은 마당의 이름은 '코끼리 광장'이다.  거리의 악사가 버스킹을 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 코끼리 광장과 역시나 맞닿아있는 커다란 광장이 도로의 양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쪽을 '유니벌씨티 스퀘어(대학광장)이라 부르며 공립 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반대편으로 '산 조반니 광장'이 있는데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옛 궁궐 건물로 현재는 역사박물관과 연구소로 활용되고 있다.  1층에 실제 사용했던 귀족들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고, 친절한 경비 할아버지가 천천히 둘러보고 가라고 안내해 주는데  2층 계단 이상은 제한구역이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흩하다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들이 정말로 탐이 날 정도의 문화재들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벽에 나붙어 있는것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지정 안내판'이다.

  특별한 보관이나 보존 장치도 없고 정복입은 관리자도 없다.  심지어 접근금지 바리케이트도 없다.

  그냥 유네스코 지정 기념물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 사업에 올인들을 하던데,  여기서는 딱히 어느것이 왜 유네스코 지정물인지 이유도 궁금해지지 않고  구분도 가지 않는다.  어떤것이 진정 가치있고 더 귀한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거기다가......  대서양 시대를 열게한 신대륙 탐험 이후에 그 새로운 대륙을 '아메리카'라고 이름 붙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시칠리아 카타니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날 도심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알게되었다.  ㅋㅋㅋㅋ

  그리고 조금만 더 걷다가 보면........  아주아주 멋진 가문의 명패를 만날 수 있다.

 

 

 

 

 

 

 

 

 

 

 

 

 

 

 

카타니아 공립대학이 있는 '대학 광장'

 

산 조반니 광장 궁전건물의 실내 정원과 실제 사용했던 마차.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교황청이나 버킹검 궁전이나 베르사이유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 건물 등에서 교황청이나 황제나 왕가나 귀족들의 위장을 조각하여 위엄있는 장식품으로 건물의 정면이나, 측히 거대하고 웅장한 철대문의 중앙에 장식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깃발(휘장)에서 느껴지는것과는 전혀 다른......  정말로 그 위상이 느껴지게들 만들었다.

  그런데 카타니아 대학광장의 모퉁이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어떤 조각가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치 멋드러지게 만들어진 이 장식은 처음 만났을때 내 발걸음을 붙잡아 매더니만,  이번에도 도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조지아 트빌리시에는 내가 가지고 싶은 청동 조각상이 하나 있다.

  그리고나서 두번째로 나는 이 휘장을 상징화한 어떤 가문의 명패를 가지고 싶어졌다.  어쩌자고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오니 궁전(Palazzo gioeni)'은  지오니 가문의 안지오 공작이 가족들의 궁전으로 건축가 '바티스타 바카리니'에 의뢰해  완공한 가족궁전이다.  사적인 영역임으로 함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정말로 내부가 궁금했다.

  이어지는것은 카타니아 최고의 중심지 쇼핑거리가 나타난다.  명품 매장들도 즐비하다.

  그런데 명품매장 보다도 더 즐비한것은  바로 교회 건물들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여기저기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너무도 많아서, 혹은 잠겨 있어서 모두 들여다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종탑이 전망대로 사용되며,  카타니아 도시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교회를 찾아가보았더니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족히 30분 이상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서 패스.......

  잠시 멈춰섰던 발걸음을 재촉하면 곧바로  '맥도날드 광장(Piazza Stesicoro)'이 나타난다.  카타니아 모든 교통망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교차로인데  광장 한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스트 푸드 체인 맥도날드가 위치해 있다.  나의 카타니아 여행은 바로 여기 맥도날드 광장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실행된다.  왜냐면 가장 편하고 쉽게 커피나 간단한 요기와 무한정의 화장실 사용이 24시간 보장되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에서 확실하고 보장된 무료 화장실로는 맥도날드가 최고라고 나는 확신한다.

  힘들고 지치면 들어가 커피 한잔으로 편하게 쉴 수 있고, 보편적으로 1유로나 내면서까지 화장실 유료 사용이 불쾌한 한국인의 정서는(국내에서는 거의 맥도날드 이용 없음)  유럽 여행에서만은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밤이면 불야성처럼 불을 밝혀놓고 사탕 젤리 쵸콜릿등의 디저트나 주점부리를 파는 간이 매장으로 광장이 차고 넘친다.  이것들 달아도 너무나 달다.  군것질은 너무 달고,  음식은 너무 짠것이 이탈리아스러움이다.

  맥도널드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면 시칠리아 최고의 스트리트 마켓(노천 시장)이 열린다.  낮에는 기념품과 야채나 과일들이 성황을 이루지만,  밤이면 가죽제품에서부터  온갖 상품들이 요지경속 세상을 만드는 곳이다.

  잉 재래시장과 맥도널드 사이에 아주 높고 커다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로 시칠리아 자랑이자 자부심인 오페라의 거장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기념 동상이다.  화려하고 운장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우리에게 벨리니는 익숙하지 않은 음악가라 하겠다.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가 20세기 들어서 '마리아 칼라스'가 불렀다고 하여 매나아들이 찾아서 듣고는 했지만......  역시나 낯설다.

  하지만 카타니아 사람들의 벨리니 사랑은 아주 특별하고 유별나다.  시칠리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으로 '파스타 알라 노르마'가 있는데  바로 벨리니의 오페라에서 따와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가지와 치즈,  그리고 토마토를 넣어서 만든 비교적 소박한 파스타인 '파스타 알라 노르마'는........  사실 나에게는 별로였다는 느낌이다.

  '파스타 알라 노르마'의 명소들은 대부분 '벨리니 공원' 인근에 자리하고 있고,  세계적 명사들도 이곳의 레스토랑을 일부러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맥도날드 광장의 왼편 길건너에는 이름난 명소인 '그리이스 극장'이 지하에 가라앉아 있다.  페허 상태로 고대 그리이스 유적의 흔적을 겨우 간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냥 동네 골목 한바퀴 돌듯이 걸으면서 내려다 보는것이 전부이다.  상당수의 극장 석재들이 두오모 공사에 쓰여졌다.

  그리스 극장 주위로 고귀한 보물과 미술품들을 소장한 역사가 오래된 천주교 교회들이 여럿있는데......  외부의 모습으로만 보아도 부식과 훼손상태가 심각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어서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다보면 우체국이 나오고,  여기부터는 대중교통망이 점차 복잡하게 얽혀있고 차량이 무수히 많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카타니아 중심가와 쇼핑가는 차량 출입 금지 지역이다)

  그리고나면서 사방으로 빼곡하게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밀집되어 있는 동네가 나타난다.

  그러면  '벨리니 공원(Giardino Bellini)'에 도착했다는 뜻이된다.

  세계적 유명인들이 '파스타 알라 노르마'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두오모 광장에서 시작된 카타니아의 중심도로는 이곳에서 끝이난다.  쭉 곧게 뻗어나온 대로의 끝을 통일 이탈리아의 구국영웅 '가라발디 동상'이 떡하니 가로막고 서있다.  가라발디 동상을 마주하고 오른쪽은 파스타가 전문인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그리고 왼쪽은 벨리니 동상과 함께 커다란 공원이 들어서 있다.

  벨리니 공원은 상당히 면적이 넓은 편이다.

 

 

 

 

 

 

 

 

지오니 안지오 공작 가족궁전의 명패.

 

 

 

 

 

 

 

 

 

 

 

 

  '벨리니 정원(Giardino Bellini)'은 카타니아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언덕에 조성되어 있으며  몇개의 특징을 가진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스페인 아라곤 왕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시칠리아의 봉건영주가 된 '비스카리 가문(Biscari)'의 장자인 카스텔로가 이 언덕에 별장(비스카리 빌라)을 지으면서 인근의 숲과 너른 공터를 개인 소유의 공원으로 조성한것이 시작이다.  시칠리아는 물론 이탈리아 남부까지 이름난 정원사들을 초빙하여 아름다운 정원에 손색이 없게끔 아름답고 훌륭하게 조성하였으나,  카스텔로가 사망하였고  후계자는 이곳의 빌라나 정원에 관심을 전혀 두지않은 채 방치함으로써 점차 흉물스런 장소로 전락했다.

  빌라와 정원은 부동산 매물로 나왔으나  이미 너무나 오랜세월동안 방치되었던 탓에 정원이라 할 수 없을만치 훼손되어서 아무도 구입하려들지 않았다.

  하여,  결국은 카타니아 시당국이 매입하여 개인정원 이었던것을  공공의 시립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공원 재건사업을 벌이면서 카타니아의 자부심이자 자랑거리인 '빈첸초 벨리니 공원'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숲이 우거지고 온갖 열대성 다양한 식물군이 조성된 공원은 훌륭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카타니아 여행의 명소로 갖추어야 할 대부분의 조건을 대부분 이미 가지고있어 보이는데,  카타니아시의 재정이 넉넉치 못한 탓인지.......  제대로 공공공원의 역활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벨리니 조각상이 있는 공원의 입구는 아주 갈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분수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다.

  언덕을 올라가면 몇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저마다 제역활을 하게끔 구획정리가 되어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남쪽 언덕에는 오픈형식을 채택한 우리나라 정자 형태의 음악홀(della Musica,  스페인 론다 전망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이 있어서 여름에 클래식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콘서트의 후기를 읽어보면 참혹한 공원의 민낯이 그대로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공원으로서의 대부분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 벨리니 공원은 제 맡은바 역활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다.

  벨리니 동상이 있는 정문에서 시작하여 언덕위에 올라서 조금만 나아가면.......  딱 거기까지,  전체 공원의 절반에 좀 못미치는 부분만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공원이다.

  공원의 구역을 나누는 살바토레 언덕에서부터는 관리되지 않은 수목의 부러지거나 잘려진 가지들이 당바닥에 나뒹굴며 길을 막아서고,  정원은 제 모습과 기능을 잃은지 오래다.  중국 전시관은 누군가의 방화로 불에탔고, 다양한 동물이 살던 동물원은 페허로 그대로 방치되어 흉물스런 모습이다.  잡목만이 빼곡히 우거진 어느 야산을 올라가는 기분이다.

  카타니아 시당국은 대대적인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발표하였고,  그 일환으로 수년 전에 음악 홀에서 벨리니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였는데,  정작.......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한바탕 난리를 치루고야 말았다.

  한꺼번에 공원을 빠져나오려던 군중들은 후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는데.......  정문 반대쪽의 절반 이상의 지역은 극도로 빈약한 가로등 조명에 전혀 관리되지 않은 산책로와 길을 가로막은 나뭇가지들로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후문쪽의 조각공원은 후미지고 어둡고 암습하여 평소에도 부랑자들이 주로 서식지로 즐겨 사용하는 장소였다.

  같은 지역에 살아가는 시민들로서도 카타니아에 이런 우범지역 같은 장소가 있었는지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현재도 복원은 실행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정문쪽의 조경 관리에 까지만 여력이 미치는 모양이다.

  공원의 절반쯤은 지금도 야생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이고,  후문쪽 조각공원은 배짱있는 여행자들이나 이따금씩 찾아가고,  해가지면 현지인들의 발걸음도 뚝 끊긴다.  지난번 여행의 숙소가 바로 벨리니 공원 후문 근처였기에 직접 체험을 해보았었다.

  내가 살고있는 고향 충주에는 호암지라는 아주 훌륭한 시민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호암지는 벨리니 공원과는 다르게 호수공원이다.  하여 인근에 이런 정도의 조건을 갖춘 벨리니공원 같은것이 하나 더 있다면........  내 나머지 인생을 공원의 조경사업에 무료로라도 봉사하면서 살아가겠건만..........  부럽고 아쉽다.

 

 

 

 

 

 

 

 

 

(카타니아 출신의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

 

 

 

 

 

 

 

 

 

 

 

  맥도널드 광장 인근에서 현지인들의 데모 현장을 목격했다.

  인류가 수천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체험해 본 결과로는  민주주의 속에서의 자본주의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인류가 가진 근원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는 제도의 한계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개선과 발전이 절실하지만.......  부의 집중과 계층간의 갈등 심화와 극단의 개인주의와 커져만 가는 환경 문제로 세상은 점점 바람직한 방향과 반대로 흘러만가고 있다.

  저렇게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이유도 분명 있을것이고,  또 그것이 즉시 개선되거나 반영되지 못하고,  또는 분명하게 반대측의 주장도 있을것이기에 데모가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산다는 것이 정말로 힘들고 복잡한 문제이구나'라는 푸념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이들은 또 무슨 문제이지' 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맥도날드에서 광장을 곧바로 건너면 유명한 길거리 시장(스트리트 마켓) 지역이 나타난다.

  길거리 시장이 시작되는 고에서부터 제법 너른 도로인 이곳은 온통 차량 금지구역이 된다.  늘어선 죄판과  상품 진열대와 행인들롤 가득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에서는 각 도시마다 전통시장이 있지만,  팔레르모의 발라로 재래시장이 가장 큰 줄로만 알아왔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카타니아의 길거리 시장이 그보다 서너배는 더 커보였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가장 이슬람화된 곳이 팔레르모였기에,  중동 사람들이나 북아프리카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은곳도 당연히 팔레르모라고 생각했고 실제 경험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카타니아 길거리 시장은 유럽의 지방 시장이라고 보기보다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시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지중해 전역 중에서 북아프리카 튀니지와 가장 가까운곳이 시라쿠사나 이곳 카타니아이다.  그러니 당연히 아프리카계 유민이나 난민이 가장 많이 들어오거나 혹은 밀입국을 시도하는 곳일 수 밖에 없다.  엄청 많은 북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시장을 채우고 있다.  물건을 사가는 소비자로서도 있고,  조악한 물건들을 손에들고 다니며 팔고있는 흑인들이 무척이나 많다.  근자에 들어서면서 이 시장의 주변으로 점점 슬럼화 되어가는것을 걱정하는 현지인들도 만나 보았다.  아침에 시장인근을 찾아보면 주변의 공터에 종이박스를 깔고 밤을 지샌 흑인들과 공터마다 텐트를 쳐 놓고 무리지어 집단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일정한 거주지도 직업도 없는 유민 난민들이다.  낮이되면 시장 인근에서 허접한 아프리카산 기념품 같은것을 팔고있다.  그들에게도 의식주 해결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요원한 문제가 아닌것이다.  밤이되고 시장이 문을 닫으면 시장 주위를 배회하거나 고급레스토랑의 쓰레기통을 뒤진다.  힘들게 몇푼 모으면 공원 구석에서 끼리기리 술판을 벌인다.  이런 상황들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이젠 현실적인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것이다.

  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어떤 아프리카계 청년들이 야채나 과일 가계에 정식 취업을 해서 장사를 거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아르바이트 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들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을하고 정당하게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주 작은 구멍가계에서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식료품 가계를 연 창업인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유럽에 정착해서 돈을 벌고 싶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었으면..........

  '이건 틀립없는 쭝국싼이다.  멀리까지도 왔네.  여기 봐. 영락없는 쭝국싼이지'  하기에 가만히 살펴보니 그말이 맞는것 같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싼 값에 밀려들어오던 그 물건들과 똑 같은 수준의 허접한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지구상에서 중국인들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 이상으로 그들의 물건이 세상을 채워나가고 있는것으로 느껴진다. 

  여기 이 길거리 시장의 종착지는 '알베르토 광장(Piazza Carlo Alberto) 이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카타니아에서 가장 카타니아 스러운 광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광장으로서의 애초부터의 제역활을 제대로 하는 곳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광장으로 향하는 진입로 도로와 좁은 골목길들이 모두 길들이 모두 이 광장으로 향하게 되어있고,  이 광장 자체가 하나의 아주 커다란 전통 재래시장이 되는 것이.  그렇게 보면 아주아주 큰 광장이요 아주 거대한 시장이다.

  그리고,  그 광장의 중심부에 너무도 당연하게 '카르민의 마리아 교회(Santuario della Madonna del Carmine)'가 우뚝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어떤 이상향의 동산에 멋지게 꾸며져 서있는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사람들의 곁에 이어야 했다.  그것도 왕실이나 귀족의 교회가 아니라,  초기 교회는 당연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서민들의 주위에서 휴식과 위로를 기꺼이 베풀고 내어주는 장소였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초기에는 아주 너른 광장을 조성해야만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서면 광장은 한가운데 분수와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나면 광장의 대부분을 이용하여 시장을 형성케 하였다.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쳐도,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 해결해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처럼 대부분의 교회나 신자들이 도시에 몰려살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삼일을 걸려야만 도시에 나가고 교회에 드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소나 양떼를 몰고 어쩌다 도시에 나오면 너른 광장의 한 구석에 단도리를하고는 광장의 중앙 분수대에서 목을 축이고 세수를 하고 나서야 정갈한 마음으로 교회를 향했다.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나오면 시장으로 가서 가축을 팔고 필요한것들을 구입했다.  며칠씩 걸리는 수도 있었다.  시장의 숙소에 머물며 신앙생활과 사고파는 행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볼일을 모두 마치면 교회에 들러 감사 기도를 올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 초기교회 본연의 모습을 알베르토 광장 재래시장과 성모 마리아 교회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초기교회의 본모습이며 제대로 된 광장의 역활을 볼 수 있어서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카르민 성모의 성소(Maria Santissima Annunziata al Carmine)'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더하여 교황 바오로 2세는 '성모 마리아의 해'를 맞이하여 직접 이곳을 방문해서 예배를 주관하며 이곳 대성당의 위대한 신앙과 고귀한 존엄성을 찬양하면서  대성당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도메니코 대주교에게 봉헌하였다.  

  그럴 정도로 이 교회는 오랜 세월동안 카타니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고 도움을 베푸는 참그리스도교의 본분을 꾸준히 실천해 온 고귀하고 소중한 교회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진정한 교회는 저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당의 외부는 처음에는 화려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많이 수척해진.......  부식되고 훼손이 진행되어가는 모습이다.  교회가 들어서 있는 주변의 환경이나 허름해 보이는 교회의 외관을 볼 때......  흡사 80년대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던 '민중교회'가 유럽식으로 변형화되어서 이곳에 서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교회 내부는 커다란 세개의 별도 공간을 가진 결코 작지않은 교회이다.  본당에는 여러개의 별도 채플을 두고 있다.  실내 장식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대단히 많은 성화들과 제단들이 놓여져 있다.

  그동안 온통 바로코 양식의 과도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교회들만 보아와서인지,  적어도 내게는 여기 '카르민 성모의 성소'가 마냥 아늑하고 편안하고 친숙한 교회로 느껴졌다.

  한가지 의문은 '왜 입구를 철창으로 막아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야에 아프리카 출신의 난민들이 오갈데가 없어서 너무 자주 몰려들와왔나 하는 생각과,  시장이 한 없이 커지다보니까 교회의 출입구까지 잠식해 버리기에 신자들을 위해서 부득이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색다른 풍경이 아니겠는가?

 

 

 

 

 

 

 

이런 건물들의 느낌은 '여기가 팔레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벨리니 오페라 극장.

 

 

 

 

 

 

 

 

 

 

 

 

  카타니아가 낳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를 기리기 위한 '카타니아 벨리니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공연이 열리지 않을때에도 입장권을 끊어서 내부를 관람할 수가 있는데,  오늘은 문이 굳게 잠기는 날이다.

  유럽의 어떤 오페라 극장과 견주어도 무대장치나 실내의 화려한 인테리어등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카타니아의 자부심 덩어리라고 할 수 있겠다.  유럽 여타의 오페라 극장들에 비해서 한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적인 오페라를 감상 할 수 있는 곳으로 카타니아 벨리니극장과 팔레르모 마시모 오페라극장이 있는데.......  모두 시칠리아에 있다.

  기회가 닿으면 시칠리아에서 오페라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팔레르모에서 기약을.........

 

 

  이제 서서히 카타니아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된것 같다.

  그리스 극장이나 로마 극장을 비롯해 여러 교회와 인근의 경험해 본 유적들을 더 소개하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들마저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면 여행기를 2회분 정도는 더 연장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가보아야 할 곳이 많이 남아있기에 카타니아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오로지 자유여행만을 고집하는 나에게 있어 카타니아의 숙소는 가히 A 등급이었다.(이번 여행 최고의 호텔은 피렌체)

  자유여행에 있어서 매번 이런 정도의 숙소만 맞이할 수 있다면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것이다.

  카타니아 두오모와 카타니아 중앙역(버스 터미널도 인근)의 중간지점 역사지구에  위치한 숙소는 깨끗하고 쾌적했으며,  간단한 주방시설과 두 개의 룸을 제공해 주었다.

  모든것이 만족스러웠는데.......  딱 한가지.......

  카타니아 방어 성벽에 의지해 지어진 호텔은 모든 벽이 너무나 육중하고 두꺼웠다.  덕분에 실내에서 와이파이가 전혀 작동을 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출입문에 기대어 서야만 겨우 와이파이가 작동했다.  '까짓 그게 별 대수야?' 했는데.....  그 이유때문에 엄청난 사단이 생겨나고 말았다.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급성장염으로 챠밍여사가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이후로,  아마도 최고의 참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줄이야.......  모든것이 와이파이 단절에서 생겨난 일이었다.

  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카타니아에서의 마지막 아침.

  변함없이 새벽 산책을 나선다.  버스터미널에 들려서 낮에 팔레르모로 향하는 버스표를 예매 할 생각이다.

  카타니아의 새벽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맑고 쾌적한 하늘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역사지구의 웅장한 건물들을 빠져나가니 찬연한 빛깔로 에트나 화산 위로 아름다운 일출이 장관이다.

  버스 티켓을 예매하고 중앙역 광장으로 향한다.

  '카타니아 스러운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다.  이탈리아의 광장 구석이나 교차로 부근 등에는 아주 작은 미니 커피 숖(타바키)들이 서 있다.  주변의 건물에 작은 간이매점 처럼 들어서서 음료나 기념품이나 시내버스표를 파는 '타바키(간이 슈퍼)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아주 작은 컨테니어 박스 반동가리 정도에서 주로 커피와 음료와 간단한 아침빵을 파는곳이 지천이다.  변변한 의자도 없다.  쪽창으로 주문을 하면 커피와 빵이 한조각 나온다.  현지인들의 간단한 아침식사 대용이다.  그러면 서서 먹고 마시고 곧바로 제갈길을 간다.  아주 짧은 시간이 소요될 뿐이며, 그래도 가끔은 길게 줄을 서기도 한다.  우리로서는 너무나도 진하고 쓴 이탈리아식 에스페레소를 현지인들은 주로 마신다.  그때는 옆에 유리컵에 생수가 한잔 제공된다.  에스페레소가 나오면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면서 휘휘 저어주다가,  한순간 한입에 커피를 모두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아주 잠시 오물거리며 쓰디 쓴 커피맛을 음미하고는 꿀꺽 단숨에 삼켜 버린다.  그리고는 생수로 입안의 쓴맛을 어느정도 개운하게 씻어준 다음에 싹 돌아서서 제갈길을 간다.  씸플하다.

  그래서 나도 고대로 따라해 봤다.  ㅋㅋㅋ

 

 

 

 

 

 

 

 

 

 

 

 

 

 

 

 

 

 

 

 

 

 

 

 

 

  카타니아와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린 이제 버스를 타고 팔레르모로 이동한다.

  팔레르모까지는 2시간반을 이야기하지만 3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제법 먼 곳이다.

 

 

 

 

 

  ---  다음 이야기는 팔레르모에서 시작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