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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르만 양식의 성당 <몬레알레>

by 피안재 2020. 11. 15.

 

 

 

 

 

 

 

 

 

 

 

 

 

 

 

 

 

 

 

 

 

 

 

  자고로 한민족의 종교는 기독교도 불교도 아니었다.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종교이자 사상은 어디까지나 자연 숭배라고 하겠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백성들을 통치하는 일까지도 모두 자연숭배의 사상속에서 이루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하여 한민족의 정서속에는 인간을 천국화(天國化) 시키기 위하여 단군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사상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다가 종교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 유교라는 하나의 실천도덕 강령 같은것을 포함하여 유불선(儒佛仙) 사상이 함께 공존하는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천지신명을 믿고, 만물에 영혼이 있음을 믿고, 윤회(輪廻)를 믿는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현세가 아닌 내세를 믿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던 한민족의 정서와 사상체계에 일대변혁이 이루어졌다.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토속적 정서나 종교와 맞서서 배타성이나 대립의 각을 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조화와 융합의 길을 택했다.  어떻게 생각하자면 하늘보다도 땅보다도 더 소중한것은 인간이라는 가치관 아래 인간존중의 사상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연의 순리에 거역하지 말고, 현세의 그릇된 욕망에 현혹되지 말고,  원시반본(原始反本)의 시대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화(和)하고 경(敬)하며,  맑고(淸) 고요(寂)함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의 한민족 마음속에는 그러한 가치관과 종교적 사상이 소중하게 담겨져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종교적 사상체계가 더하여 졌다.  기독교가 전래된 것이다.

  그 속에는 자연을 정복하고 나와 다른 남과 경쟁해서 어떻게든 이겨야한다는 새로운 가치관도 포함되어 있었다.(좋게말하면 개척정신.  다분히 서구적인 사고를 말함)

  조화(調和)를 내팽개친 무한 발전시대의 달콤한 열매가 과연 인간을 언제까지  소중한 존재로서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것인가?

 

 

  내가 분명 어설픈 돌팔이 기독교인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에 마냥 우호적이거나 절대적인 '성령주의자' 이거나 '복음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흠모하고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일 수도 있겠고,  로마제국의 압제하에 데살로니카 근처에 살았던 농부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험준한 코카서스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서 겨우 텃밭을 일구고 양을치던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의 유목민이었다해도 상관없다.  교회랄것도 없는 산비탈의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 겨우 서있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무릎꿇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어제와 같은 오늘이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또 오늘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염원하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나를 기억해 주는 모든 사람들을 아무때고 항시 만날 수 있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함께 같은 하늘을.......  같은 신을 찬미하고 공경하는.......  그런 정도의 삶이면 좋겠다.  크고 화려한 교회도 필요없고,  획일화된 신분제도나 의식이나 제례도 필요없고,  그저 물흐르듯이 잔잔하게 우리네 삶의 시간 자체가 신앙생활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속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내가.......  유럽에 당도해서 느낀것은..........  엄청난 당혹감이었다.

  '교회(성당)가 도대체 뭐지?'

  '무슨 교회가 우리동네 구멍가계 보다도 많아?'  '이것들이 궁전이야?  예배당이야?'

  '이렇게 어마무시 크고 화려함은 정말로 신(神)을 찬양함일까?  아님 교회속 높은분들의 자기 과신 아닐까?'

  '교회당의 위세와 어마어마한 숫자에 눌려서 신(神)은 다시는 이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실꺼야.  그분은 이승에서 마굿간에서 태어나 평생 헛간과 허름한 여인숙과 광야에서 노숙 밖에 해 본적이 없으신데  이렇게 12성급 호텔들을 죄다 예약해 놓으면........  헐.......  모두가 쓰잘데 없는 짓들 이로고.............' 등등의 생각을 먼저 떠올렸었다.

  유럽여행이란........  찬란한 고대 문화유산이 즐비하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기독교 문화 유산'을 주로 만나게 되는데,  그 기독교 문화유산이라는게 실은 '교회로 시작해서 교회로 끝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늘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나는..........  또 교회를 찾아가고 있다.

  

  '현존하는 교회(성당) 중에서 노르만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평가를 받고있는 교회를 찾아서 말이다.

  하지만 요 대목에서 나는 앞선 표현을 약간 비틀어서 달리 표현해 보고 싶어졌다.

  '현존하는.......  처음부터 기독교 교회로 의도하고 노르만 건축양식을 택해 지은 교회중에서 결과적으론 가장 이슬람적인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나는 그 교회에서 노르만 양식 보다는 절대적인 이슬람 양식의 아름다움이 더 많이 확연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종탑의 십자가을 떼고 초승달을 올려놓았다면 나는 그냥 모스크(이슬람 사원)라 여겼을 것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과 여기 시칠리아에서는 매우 독특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융합된 멋지고 이색적인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다가 다시 교회로 회복된 경우도 있고,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처럼 교회가 모스크로 변형된 채 남아있는 곳도 있다.  영토의 주권자가 바뀌면서  수시로 모스크가  교회로, 혹은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속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처음부터 교회로 지어졌음에도 어느 틈에 당시 사람들 마음과 가치관속에,  혹은 건축에 대한 신기술 속에 이슬람 양식이 짙게 스며들어와 자신들도 모르게 녹아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고의 노르만양식 건축물'로 평가받는 (몬레알레 성당)은  처음 의도와 계획에 의해서도 철저하게 기독교식으로 추진되었건만,  드러난 결과로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교회로 개조한 것과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 또한 대단히 독특한 이력과 매력으로 다가온다.

  오늘, 우리는  시칠리아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인근의 (몬레알레 대성당)을 찾아 나섰다.

 

 

 

 

 

 

 

 

 

 

 

 

 

 

 

 

 

 

 

 

 

 

 

 

 

 

 

 

 

 

 

 

 

 

 

  포르타 누오바와 나란히 붙어있는 노르만 궁전의 성벽 바깥쪽으로 너른 잔듸밭에 열대야자수 나무가 빼곡한 커다란 공원이 조성되어있으니 바로 (독립광장) 이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오벨리스크가 인상적이다.

  팔레르모에서 이 광장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모든 교통수단들이 대부분 여기 이 광장을 한바퀴 돌고나서야 사방으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는 팔레르모 교통의 핵심지역이기 때문이다.  팔레르모의 모든 교통수단은 독립광장과 비교적 인근의 중앙역을 통과한다.  팔레르모 인근으로 향하는 대중교통을 이요하려면 무조건 독립광장으로 오면 된다.  만약 먼 외지의 시칠리아를 찾고자 한다면 무조건 중앙역으로 가면 된다.  시칠리아 전역은 물론 본토의 로마까지 연결되는 철도망과 버스교통망이 이웃하여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독립광장이 유독 팔레르모에서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광장 안에 멋진 카페인 '피에로 산토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주변 공원 경관만큼이나 썩 괜찮은 실내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친절한 직원에다가 맛이 일품인 커피와 함께 생과자와 아이스크림과 빵을 판매하고 있다.  늘 현지인들과 여행객들로 붐비는 멋진 휴식공간이라 하겠다.

  느긋하게 달콤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시칠리아 커피와 함께 누려본다.

  조금 무료하다 싶어질 즈음에 우리는 389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오!'

  '차오!'

  만원 버스안에서 현지인들과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나누고 서로 마주보면서 웃다보니 도심을 벗어난 버스는 급하게 이리저리 코너를 돌면서부터 서서히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는 곧 목적지가 가까와졌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팔레르모 독립광장에서 10km 정도 거리의 산자락에 위치한 몬테 카푸토(Monte Caputo) 지역으로 올라가면서는 버스창문 밖으로 방금 지나온 오렌지. 올리브. 아몬드 농장이 가득한 비옥한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현지인들이 팔레르모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여기는 골든 쉘 지역이다.

  팔레르모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간다.

  두툼한 목재문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꼬마들의 음성이 은은하게 울려 나온다.  팔레르모 초등학교 건물이다.

  언덕아래 평야지역을 가득채운 팔레르모 도시전경 너머로 테레니아해(지중해)가 은은하게 펼쳐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들은 비슷비슷하다고들 말하지만,  이곳에서는 무엇인가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팔레르모를 바라다 볼 수 있다.

  마을에 들어섰다 싶었을 때,  우리는 무작정 왼쪽의 골목 안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골목 안쪽으로 잡아끄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몬레알레 골목의 매혹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자가 몬레알레를 찾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대성당 때문' 이라는 이미 성립해 놓은 등식을 우리는 그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방향도 모른채 안쪽으로 안쪽으로 연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몬레알레에서의 모든 길은 대성당으로 통해 있었다.  이러저리 돌고 돌아 왔건만.......  결국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몬레알레 대성당' 이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에서 올려다 본 대성당의 뒷모습은 참으로 멋졌다.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핏 외부로 드러난 벽을 치장한 색감들은 흡사 피렌체 두오모를 잠시 연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랍(이슬람) 양식에서 느꼈던 바로 그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결코 노르만 양식의 미가 아니었다.  나는 첫순간부터 이스람의 향취에 젖어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돔 양식의 피렌체 두오모나 피사의 건축물들에서는  조화를 이룬 건물 전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로마네스크나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은 정면의 파사드 부분을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여서 화려하게 장식에 주안점을  두었을 뿐,  대부분 측면은 좀 부족하다 싶고 후면은 내버려두거나 방치된 느낌이 주로인데,  여기 몬레알레 대성당의 후미부분은 오히려 대성당의 정문부분보다도 열배 스므배 아름답고 멋지다.

  이제껏 내가 본 건축물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뒷모습이 이정도인 것이야?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오잖아.'

  청소년 시기에 흔하게 이런 에피소드를 우리 친구들은 나누곤 했었다.

  '어제 저녁에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가는데.........  흐메........  저만치 앞에 긴머리를 곱게 땋아서 내린 미끈한 뒷모습의 여학생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어?  이제껏 내가 본 중에 최고로 늘씬하고 예쁜 뒷모습이었어.  그래서 죽어라 발걸음을 빨리해서 따라갔지.  중앙시장을 지나치면서 겨우 따라잡아 슬쩍 앞모습을 흩겨보았는데.......  헐.........   그 모습이........  그 모습이...........?'

  결과야 뻔하게 둘 중에 하나 아니겠어?

  이런 쓰잘데 없는 생각을 몬레알레 대성당에 슬쩍 대입시켜 보면서 대성당으로 들어선다.

  '피식.........!!'

 

 

 

 

 

 

 

 

 

 

 

 

몬레알레 대성당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전경.  파사드 부분의 두개의 종탑중에서 하나는 미완성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윌리엄 2세가 건설해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했다.

 

 

 

 

 

 

 

 

 

 

  몬레알레(Monreale)는 '산'을 뜻하는 '몬테(Monte)'와 '왕'을 뜻하는 '레알레(Reale)가 합쳐진 이탈리아말로 (왕의 언덕) 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이곳에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몬레알레 대성당(Cattedrale di Monreale)'의 역사는 곧 '팔레르모 대성당(Duomo)'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팔레르모 대성당이 두오모로 승격되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같은 지역에 두 개의 대성당이 존재했던 아주 특이한 이력을 팔레르모는 가지고 있었다 하겠다.

 

  시칠리아의 기독교 역사는 그 뿌리가 아주 깊다.

  소아시아지역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전파되자면 필히 시칠리아 지역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정학적인 이유로 베드로가 이곳을 거쳐 로마로 전도여행을 떠났으며,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목에서 회심을 한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몰타와 시칠리아를 경우하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자면 시칠리아 기독교의 역사가 곧 초기 기독교의 역사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공인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로마의 국교로 성장한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바티칸)의 기독교는 결코 아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자마자 종교를 넘어 세속적인 권력과 부와  명예를 탐하는데(억압받는 민중의 신앙에서 하루아침에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지배세력으로 탈바꿈한 로마 카톨릭)  진력이난 로마정부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며,  더하여 로마 카톨릭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새롭게 '그리이스 정교회'를 로마 기독교의 지도자로 삼았다.  비잔틴의 역사는 그리이스 정교회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바티칸)은 이제 세상의 변방으로 전락한 로마에 유배된 신세로 전락해 절치부심 암암리에 재기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비잔틴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유수타니우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영토수복 전쟁을 벌이자 비잔티의 최고명장 벨리사리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532년에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로마 카톨릭의 보루와도 같았던 시칠리아 마저 그리이스 정교회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 카톨릭은 서둘러 주교를 팔레르모로 파견했다.  그들은 옛 그리이스인들이 무덤으로 사용하던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이때 세워진 초기 팔레르모의 교회가 교황 그레고리 1세 재위 시절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레고리 1세의 교황재위 기간이 (590년~604년)인것을 감안하면 6세기 말엽에 처음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팔레르모에 제대로 된 교회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겠다.  타민족이나 타종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비잔틴의 지배하에서 점차 로마 카톨릭 세력을 확장해 갔고 교회를 재건해 넓혀 갔다.  그 교회가 바로 현재의 '팔레르모 대성당(두오모)' 이다.

  하지만 AD. 831년 아랍의 이슬람 군대가 팔레르모를 점령해 버리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시칠리아 전체를 정복해버리자 상황은 이제까지와 전혀 달라져 버렸다. 

  아랍의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팔레르모 대성당의 기독교인들에게 성밖으로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팔레르모 도성 안쪽은 이제 온통 아랍인(이슬람)의 세상으로 변하게 된것이다.  하루아침에 대성당은 이슬람 예베당(모스트)로 개축되었다.  십자가는 내려지고 초승달 모양의 조형물이 올려졌고,  돔 형태를 갖춘 거대한 성전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같은 변화와 중축은 아랍이 시칠리아를 점령하는 241년 동안 계속되었다.  팔레르모는 유럽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유하고 호화로운 아랍방식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팔레르모 도성에서 쫓겨난 기독교인들과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교회를 빼앗기는 했지만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운 아랍의 지배방식 아래서  새로운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신앙생활의 자유를 당장은 허락하고 있다고 하지만,  만약에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반발하여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때까지도 기독교에 대해서 마냥 너그러울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기독교 수뇌부는 고심끝에 팔레르모에서 일단 멀리 떨어지기로 결정했다.

  팔레르모를 차지한 아랍인들의 시야에서 관심에서,  그리고 그들의 생활 기반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일단 안전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때 떠오른곳이 바로 북서쪽으로 10km 이상 떨어진 숲이 우거진 산자락에 위치한 '몬테 카푸토 지역' 이었다.  팔레르모의 도성 북문(포르타 누오바)에서 이곳을 가자면 수풀과 잡목이 우거진 들판을 한참 가로질러야 했다.  여러개의 개울과 깊은 강물을 건너야 했고,  언덕이 나타나면서 부터는 우거진 숲이 길을 가로막아 좀체로 앞으로 나아가기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데다가 언덕의 가파르기 또한 결코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숨어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거기에다가 이 언덕의 어디에서나 발치 아래로 팔레르모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가 안성맞춤이 천혜의 요새와도 같았다.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쫓겨나온 주교와 성직자들은 이곳에 오두막을 지으면서 처음 교회를 열었다.  그러자 인근에서 하나 둘 기독교인들이 몰려들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겨난 마을이 바로 '몬레알레'이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세웠던 허름하고 초라한 교회가 겸손하고 작은 교회라는 의미를 담은 '기리아키 아기아(Aghia Kiriaki)'로서 오늘날의 몬레알레 대성당의 전신이라 말할 수 있겠다.

  1072년 시칠리아 노르만 왕조의 시작이랄 수 있는 로러 2세에 의해서 아랍인(이슬람)들이 모두 추방되었고  시칠리아는 다시 기독교 왕국으로 241년만에 수복되었다.

  노르만족이 팔레르모를 차지했으므로 팔레르모 대성당은 모스크의 잔재를 모두 뜯어내고 다시 교회로 재건되었다.  몬레알레에 숨어지냈던 기독교인들이 모두 도성으로 몰려 내려오면서 산자락 마을은 방치되어 버렸다.  기리아키 아기아 교회에 대한 기록도 이 시기에서부터 사라진다.  팔레르모를 차지했던 미처 따라 도망치지 못한 아랍인들이 이제 도성 밖에서 빈민가를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로저 2세에 의해서 시칠리아가 기독교 국가로 회복되고 윌리엄 1세와 윌리엄 2세로 까지만 계승되는 '노르만 왕조'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몬레알레는 잊혀져만 갔다.

  그러자 아이러니 하게도 이번엔 이곳을 소수의 아랍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참으로 역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분의 뜻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가 살았던 텅 빈 거주지를 새롭게 차지한 아랍인들은 이곳에서 작게나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수레에 채소와 과일등의 농산물을 싣고 포르타 누오바를 지나 팔레르모 도성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며 살아갔다.  그러자 팔레르모 도성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야채와 과일을 제공해 주는 몬레알레의 아랍인들을 '바랏사람들(Ba'lat)'이라고 부르기까지 하게되었다.

  몬레알레는 모두 잊혀졌고  극히 소수의 야채상사치인 바랏 아랍사람들만 거주하는 산언덕이 되고 말았다.  초목과 숲은 더욱 우거져서 차차 팔레르모의  노르만 왕이나 왕족이나 귀족들의 사냥터로 각광받는 지역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시칠리아를 독립시킨 훌륭한 왕이었던 로저 2세가 사망하고나자 등극한 윌리엄 1세는 별로 왕의 자질이 없어 보인다.  업적도 기록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재위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태만인지 무능인지 시칠리아의 정세만 대단히 복잡하게 만들더니만 어느날 갑자기 죽어 버렸다.  후계자인 윌리엄 2세가 만 1살때의 일이다.  태어나서 돌이 지나자마자 왕이 된것이다.  윌리엄 2세가 13세가 될때까지 시칠리아는 그의 어머니와 고위성직자들과 귀족들에 의해서 대리통치가 이루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사건들이 벌어지고 지나갔다.  13세에서 18세까지 왕권 교육을 받게된 윌리엄의 목표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대로 왕권을 행사하는 '친정 회복' 이었다.  왕과 귀족들과 주교(종교지도자)간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게 된다.  왕은 노르만 궁전에서 정책을 펴지만,  이 정책은 인근의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주교외 와 귀족들의 연횡 끝에 전혀 다른 정책을 변질되기가 일쑤였다.  아버지 윌리엄 1세도 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의 횡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뿐더러  정적들은 오히려 국가의 재정까지 끌어다가 연일 대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증축 공사를 벌였다.  시칠리아는 윌리엄 가문의 왕국이 아니라 팔레르모 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몬레알레 언덕으로 사냥을 나갔던 윌리엄 2세는 숲속에서 잠시 낮잠을 자던 중에 참으로 희안한 꿈을 꾸게되었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  내가 기억하는 한......  이세상에서 가장 쎅시한 모습으로 그려진 성모 마리아가 아닐까?

 

몬레알레 대성당을 지어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고 있는 '윌리엄 2세' 조각상.

 

성당 내부에 안치된  윌리엄 2세의 무덤.

 

태어나서 '성모 마리아가 참 예쁘고 매혹적이다'라는 느낌을 처음 받았던 조각상......... (할리우드 여배우?)

 

 

 

 

 

 

 

 

 

  사냥에서 돌아온 윌리엄 2세는 즉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젊은 수도사들과 관리들을 모아놓고 목청껏 외쳤다.

  '사냥터의 캐롭나무 아래서 깜빡 잠이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더니 그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내게 명하셨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 건축에 관한 모든것을 직접 주관하실터이니 아무걱정 하지말고 나를 위한 교회를 지으라 거듭 말씀하셨다.'

  그러자 젊은 수도사와 관리들이 물었다.

  '어떤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교회 건축에 따르는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부담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마도 성모께서는 이교도의 손길이 미쳤던 대성당이 그리 탐탁치 않으신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이겠느냐?  적어도 대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노르만인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과 순종을 나타낼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를 지어 성모님께 받쳐야 하지 않겠느냐?  비잔틴과 아랍의 영역을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성모님을 기리는 위대한 교회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장인과 기술자들을 모두 모아 들여라.  새로운 교회의 건축에 따른 모든것을 성모께서 직접 주관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그 또한 성모께서 미리미리 예비하여 주셨을 것이다.  이 길로 사람들을 보내 내가 성모님을 알현한 사냥터의 캐롭나무 주변을 살펴 보도록 하여라.  반듯이 성모님께서 예비해 주신 어떤 증표가 있을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몇 몇 수사들과 기사들이 말을 타고 사냥터로 달려가 캐롭나무 주변을 살피던 중에 단단히 서로 얽혀있는 나무뿌리 안에서 커다란 궤짝을 발견하고 성으로 가지고 돌아와 모두의 앞에서 열어보니 궤짝 가득 황금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곧 성령의 현시였고,  신의 은총이 윌리암 2세와 몬레알레 언덕에 새로 지어질 교회에 내려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신비한 성령의 체험은 곧 온세상으로 퍼져나갔고  윌리암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서둘러 착공한 교회 건설터에 각지에서 끝없이 기독교인들의 방문과 헌금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시칠리아를 실제로 통치하면서 자기들 맘대로 주무르고 부와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팔레르모 대성당의 월터 오파밀 대주교와 왕실의 매튜 다니엘로 총리의 입장에선  느닷없이 벌어진 이 놀랍기도 하지만 웃기기고 한 이 씨츄에이션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애송이 철부지로만 여겼던 젊은 왕에게 보기좋게 얻어터진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성령의 은사가 정말로 나타났던 것일까?' 라는 의구심을 나는 아직도 떨쳐낼 수가 없다.

  왕 이면서도 전혀 왕 노릇을 전혀 할 수 없는 형기 왕성한 젊은이가 있었다.  자신을 철저하게 에워싸고 옴짝달삭 못하게끔 만들어 놓고는 세상을 저들 마음대로 주무르는 대주교와 총리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있다.  점차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총명한 젊은왕은 사태를 전환시킬 수 있는 사건과 절묘한 타이밍을 구상하면서 참고 기다려 왔다.

  외부에서 용병을 구해 올수도, 타국에서 군대를 끌어들이 수도 없었다.  그가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것은 보이지도 나타나지도 않고 있지만 분명히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운명보다도 더 지극히 높고 고귀한 믿음(신앙. 종교)을 이용한 방법을 타개책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엄 2세에게 정말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가르침을 내렸었을까?

  캐롭나무 뿌리에서 나온 금궤가 정말로 성령의 은총이었을까?

  혹,  그 꿈이 윌리엄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까?  그 금화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비자금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어찌되었건,  그 진위를 따지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미 모든 사태는 대주교와 총리와 모든 기득권자들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을 넘어서 이미 거센 파도처럼 커져서 윌리엄의 생각과 의도대로 흘러가버리고 있었다.

  이젠......  성모 마리아가 직접 다시 나타나셔서 부정을 하거나 그릇됨을 바로잡아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으로 이미 전개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174년에 윌리엄 2세 노르만왕의 명령에 의해서 착공된 몬레알레 대성당 건축은 1182년에 완공되었다.

  공사가 벌어지는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의 방문은 줄이 이었고,  현실에 성령의 은총이 내려졌었다는 기적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또한 영리한 윌리엄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서신과 인편을 통해 바티칸의 교황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종교적 신실성을 넘어선 탁월한 정치감각까지 발휘했던 것이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성령의 은사가 실재했고  그 결과로 위대한 교회가 건축되어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다는 사실 앞세서는 감히 교황도 외면하거나 모르는체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성당의 완공에 때마추어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몬레알레에 완공된,  본래  겸손하고 작은 교회를 추구하던 '키리아키 아기아 교회'를 새로운 '몬레알레 대성당(Cattedrale di Monreale)'으로 교회적 신분을 상승받았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이었다.

  당시로서 같은 교구(팔레르모와 몬레알레) 안에 두 개의 대성당이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 이 같은 초유의 사태를 무마하기 위하여  교구를 분리시키게 되고  더하여 팔레르모 대성당을 (두오모)로 승격 시키게 되지만........

  이 사태는 분명 윌리암 2세를 확고한 주권을 가진 시칠리아의 왕으로 입지를 확보시키는데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권력과 부와 사치와 향락을 누려본 대주교와 총리를 비롯한 기득권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대주교 월터 오파밀은 1185년 교황에게 팔레르모 대성당의 개축과 증축을 요청하고 허락을 받고자 하는 청원을 올렸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위용이 곧 윌리엄 왕의 정치적 업적으로 드러난 마당에 이를 능가하는 역사를 벌여서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높이고 공고히 해보고자 하는 노림수를 가진 청원이었다.  교황은 또 이를 허락했다.

  무리한 팔레르모 대성당의 공사가 벌어졌고  윌리엄 2세왕과 주교외 기득권자들 사이에 치열하고 점차 참혹해지는 대립과 마찰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왕의 주도권이 강해지자 귀족들 중 일부가 이미 내쳐진 아랍세력들을 끌어들여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계속 이어졌다.  이제 젊은 왕은 반란을 진압하기에 바빴다.  대성당의 무리한 증축공사는 이어졌고 왕국의 재정은 점차 고갈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 36세의 젊은 왕이 느닷없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1189년)

  그와 동시에 할아버지 로저 2세에서 시작하여 아버지 윌리암 1세를 거쳐 윌리암 2세로 승계되었던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도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윌리엄 2세에게는 아직 후사(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의 시칠리아는 유럽 왕실사회의 얽히고 섥킨 정략 결혼사의 결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시칠리아의 역사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하고.........

 

 

  콘스탄티노플(비잔틴)의 장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모자이크가 교회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 황금빛 모자이크 벽화에 실제로 순금 2.200kg 이 사용되었다는 참으로 믿기 힘든 사실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도대체 들어간 금값이 얼마야?'

 

 

 

 

 

 

 

 

 

이탈리아 조각가 (보난노 피사노)에 의해 완성된  몬레알레 대성당 정문.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가는 건물 좌측의 복도 기념품을 파는 상점 앞에 커다란 두 개의 조각상이 놓여 있는데,  같은 내용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같이 윌리엄 2세가 몬레알레 대성당을 지어서 성모 마리아에게 받치는 모습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상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고  딱 한 점의 (성모 마리아가 아닌 작품은?)  하고 퀴즈를 낸다면,  아마도 가장 많은 표를 받았을 작품이라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조각상이다.

 이 세상에 성모 마리아를 저렇게 젊고 아리따운 처자로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것이,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에서 만난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이란 베르니니의 조각상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여기 서있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 이었다.  

  다음으로 여행자는 12세가 말엽 이탈리아의 뛰어난 조각각이자 건축가였던 '보난노 피사노'가 제작한 (몬레알레 대성당의 정문)을 만나게 된다.  사실 정문임에는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성모상이 있는 측면의 출입문을 통해 성당의 내부로 들어가게되고 정문은 출구로 쓰여지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보난노 피사노'는 평생동안 이탈리아 중북부에 위치한 도시 (피사)에 머물면서  수많은 건축과 조각에 명성을 드높인 사람으로 누구나가 익히 잘 알고있는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을 만든 사람이다.  피사를 떠난적이 거의 없던 피사노가 몬레알레 추기경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멀리 팔레르모까지 와서 완성한 청동문인 것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내부는 일단 무척이나 화려하다는 첫인상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성당의 내부를 사방으로 슬쩍 한 번 둘러보고나면 (이게 뭐지?) (이걸 어디서 봤지?) (틀림없이 어디서 보았긴 보았는데?) 하는 생각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뭐 그리 특별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팔레르모를 나름 샅샅이 여행해 본 여행자라면  노르만 궁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르만 궁전 안에 왕과 왕족들만을 위해 루제로 2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작은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바로 그 노르만 궁전에 있는 '팔라티나소 성당'의 확장판 내지는 업그레이드의 소산이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2세는 할아버지 루제로 2세가 세운 가족성당 '팔라티나소'를 기본으로 하여,  혹은 할아버지의 작품을 능가하려는 어느 정도의 경쟁심을 가지고 '몬레알레 대성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기나 기본 골격의 구조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부 장식과 벽화나 모자이크화들은 아주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니지.  같은 성당을 아침에 보고 또 밤에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다.

  노르만 양식에다가 중세 카톨릭 양식(로마네스크)에다 비잔틴 양식과 아랍 양식이 절묘하게 더하여 졌다.  마치 문화와 예술의 공존을 바로 이곳에서 모색하고 있는듯 여겨진다.

  벽면 가득 예수 그리스도와 성가족들과 여러 성인들 외에 성서에 등장하는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모자이크화들이 빼곡하다 싶을 정도로 그려져 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모자이크화를 들여다보게되면 '노아의 방주로구나' '솔로몬의 명판결이구나' '십자가 처형이구나' '오병이어의 기적이구나' 하는 등등의 성경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게 되고 제법 쏠쏠한 재미까지 느껴볼 수가 있지 싶다.

  중세를 넘어서 근세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거나 쓰질 못했다.  기사들도 그랬고 심지어는 영주들 중에도 글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글은 주로 통치자나 성직자나 공무원이나 사용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성서의 내용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구전으로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다가, 처음 히브리어(유대어)로 기록되었다가 그리이스어로 번역되었고,  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가 근대 이후에 들어와 영어로 번역되었으니,  유럽의 기독교인이라 하여도 언어적 장벽은 언제나 존재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성직자들이나 읽고 가르침으로 이끌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교회 내지는 성직자들의 독점적인 악용과 파행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이런 현실 속에서 좀 쉬운 방법으로 성서의 이해를 전달하는 한 방편으로 이렇게 예배당의 벽면을 성서속의 내용으로 채운 벽화를 제작 설치하였던 것이다.  글자 보다는 그림이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의미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바램과는 다르게.......  뜻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그 그림의 진의를 왜곡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슬쩍......  '신(神)은 금을 참 좋아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또다시 찾아든다.

  동양이던 서양이던 여행을 하다보면 신과 연관되는 장소나 건축에는 항상 금이나 보석 같은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으로 치장되고 있으니 말이다.  금치장이 전혀없는 동굴이나 초막 같은 성역은 없는 것일까?  신이 외면해 버리셨나?

  모자이크화는 비잔틴 예술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 양식(미술사조)이다.

  오늘날 어떻게 보자면 거의.........  하나의 틀처럼.......  정형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하기야 소피아의 모자이크 벽화와  몬레알레 대성당의 모자이크 벽화에서 파생되었다 해도 무리가 아니지 싶을 정도로 대표적인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  예수의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고,  누구도 직접 마주앉아 초상화를 그려 남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남아있는 사진도 없다.  그러나 지금에 우리는 모두 수많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이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야' 하는 하나의 믿어 의심치 않는 틀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정형화된 틀 속의 진면목을 지금 이곳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성까지 따진다면야 당연히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그리스도 모자이크가 거의 원형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모습은 지금에도 복원작업중인 일부분적인 모습이다.  비잔틴이 멸망하고나서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현대에 들어서 조금 복원되는 과정에서 찾아 낸 그리스도의 모습이지만,  어쩌면 몬레알레 대성당의 벽화는  비잔틴의 멸망과 비슷한 시기에 소피아 성당의 원형을 본뜬 가장 완벽한 복사본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면  바로 그 근원이 '하기야 소피아의 그리스도 모자이크화'와 '몬레알레 대성당의 그리스도 모자이크화' 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의문은..........  예수의 진짜 모습은 어땠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의식하고 인정하는 영화나 교회나 기독교인 가정의 벽면에 나붙어 있는 그림속 예수의 모습은 절대로 아닐것이라는 것이다.(어쩜 지금 인정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서양인이 창조해 낸 식민사관 내지는 백인 우월주의의 결과가 아닐까?'

  히브리족은 발원은 유프라테스강 유역이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서 오랜 유랑을 떠나 소아시아 지역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모습은 당연히 이란인. 터키인. 시리아인의 모습이었어야지,  게르만이나 노르만 같은 화이트 계통은 절대로 아니었어야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그림을 보면 보다 확실해 진다.  유색인종에다가 대머리거나 덥수룩한 소아시아인들로 그림이 온통 가득차는데  유독 예수 한 사람만 순수한 게르만이나 노르만인의 표상처럼 하얗다 못해 눈이부시게 뽀얗게 그려진다.

  로마나 파리의 백인 전용 디너 파티장에 참석해도 전혀 인종이나 피부색에 차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테헤란이나 다마스쿠스나 이스탄불의 뒷골목에서 생업에 열심인 수염 덥수룩하고 피부 까무잡잡한 소아시아인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쉬울뿐더러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참 멋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내부의 풍부한 모자이크 장식이라고 하겠다.

  비잔틴과 베네치아는 물론 아랍(이슬람)의 장인들까지 모셔다가 휘앙찬란하다 느껴질 정도의 화려한 인테리어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눈부신 황금빛의 색채는 대성당의 본당 뿐만이 아니라 건물들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까지도 완전하게 덮고있으며  그 면적이 자그만치 68.220 평방피트에 달한다.  아기야 소피아 성당의 내부인테리어 면적에 이어서 두번째로 크고 넓은 모자이크 장식이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가 훼손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대부분 회벽에 덮여있어서 교회 내부장식이라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 치면,  세계 최고의 모자이크 실내장식을 원형에 가깝게 보유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몬레알레 대성당이다.

  그러한 몬레알레 대성당의 모자이크 장식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판토크레토(Pantocrator, 모든것의 통치자)' 라는 모자이크 벽화라고 하겠다.  그림속의 그리스도는 한쪽으로 고요한 시선을 보내면서 너그러운 몸짓으로 축복을 내려주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판토크레토,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판토크레토,  그리고 같은 이스탄불의 코라 성당에 역시 모자이크화로 그려진 그리스도 판토크레토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 우리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AD 6세기 경에 동방정교회 교회에서부터 시작된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대성당의 본당 내부 벽에는 구약성서의 내용으로 모자이크화가 가득 수놓아져 있고, 신약성서의 이야기는 통로와 트란셉트를 장식하고 있다.

  윌리엄 2세의 신앙심이 그만큼 깊었음인지,  할아버지의 업적에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았을 정도의 자신감과 욕망과 명예에 대한 집착때문이었는지,  아무튼 그런 덕분에 팔레르모 대성당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기독교 건축물을 팔레르모는 가질 수 있게된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사사건건 대립하고 반목하는 대주교와 귀족들과 관리들이 차지하고 있는 팔레르모 대성당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윌리엄은 몬레알레에 더 집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윌리엄 2세는 몬레알레 건설에 더 많은 이슬람 장인들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팔레르모 대성당보다 훨씬 아름답고 위엄이 넘치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작업장에 무슬림 성직자와 점성술사와 의사를 두기까지 하였다.  더하여는 궁전의 개인 서재에 코란을 보관하고 아랍어를 공부하였으며, 무슬림 장인들과는 아랍어로 소통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집착은  곧바로 십각한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과도한 노역과 세금 부과에 항의하던 팔레르모 대성당 중심의 세력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젊고 용맹한 왕은 곧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윌리엄의 대성당 건설을 계속되었고 반란은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몇년 후,  몬레알레 대성당은 장엄하게 완공되었지만 젊은 왕도 그리 오래가지 않아 요절하고 만다.

  후사가 없던 노르만 왕조는 몰락하게 되고,  시칠리아는 독일의 호펜슈타인 가문에 귀속되기에 이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분란과 반란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즉위 후에야 완전 소멸되었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황금빛 모자이크화 이면에는 속속들이 그렇게 암울하고 슬픈 배경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그리스도 판토크레토. 12세기 노르만 양식.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그리스도 판토크레토.  6세기 비잔틴 양식.(그리이스 정교회)

 

이스탄불 소재 코라 성당의  그리스도 판토크레토.  6세기 비잔틴 양식.(그리이스 정교회)

 

 

 

 

 

 

 

  

 

  대성당을 나서면 남쪽으로 문과 복도를 통해 이어지는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이면서도 건축학적으로도 보기드문 걸작으로 꼽히는 수도원의 일부인 회랑이 있다.  물론 회랑과 수도원도 대성당과 함께 지어졌다.

  어떤면에서 보자면.......  다분히 기독교적인 성스러운 예배당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내고 보자면.......  몬레알레는 서구적인(카톨릭적인) 건축이라기 보담은  거의 완벽한 이슬람 건축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만약에 하기야 소피아 성당 처럼 벽면의 모자이크화를 모두 덮어버리고 지붕 위의 십자가만 걷어낸다고 치면.......  그냥 스페인 그라나다의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는 아랍풍의 건축물이라고 나는 생각했을 것이다.

  회랑을 거닐다가 분수대를 앞에 두고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알함브라 궁전의 미로를 헤매다가 어딘가의 구석에 놓였음직한 정원에 들어선듯한 착각마져 들었다.

  아랍 양식의 대리석 기둥 108쌍(216개)와 아치형의 아케이드와 중앙의 쿼드가 뿜어내는 이미지는 분명 강렬한 이슬람의 문화였다.  건축에서도 무늬와 문양에서도 잘 정돈된 정원에서도 아랍 특유의 완벽한 대칭이 숨이 막혀올 정도의 엄숙한 아름다움을 그득 안겨준다.  우리는 지금 분명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몬레알레 대성당을 돌아보고 있지만,  마음은 다마스쿠스의 어느 부유한 사람 집의 내부 정원을 거닐고 있거나  세비아나 그라나다의 메스키타(교회로 개조된 이슬람 사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 절로 든다.

  회랑을 지나 비탈진 언덕쪽으로 가면 멀리 팔레르모의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수도원의 안뜰이 나온다.

  정원 한가운데 아주 커다란 캐롭나무 한 구루가 서 있는데.......  혹 이 나무가 먼 옛날 윌리엄 2세가 낮잠을 잤다고 이야기한 그 나무일까?    분명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캐롭나무였지만 끝내 사실을 확인까지는 할 수 없었다.

  몬레알레에서 내려다 보는 팔레르모의 탁트인 전경은 여행의 피로를 단번에 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윌리엄 2세가  즐겨 찾았던 무어인의 분수(왕의 분수).

 

수도원 안쪽의 정원에도 분수가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 철거되고 대신 놀이터 정원이 생겼다.

 

 

 

 

 

 

 

 

 

 

 

 

 

 

 

 

 

 

 

 

 

 

 

  몬레알레 언덕에서 팔레르모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든다.

  이젠 팔레르모를 떠나.........  시칠리아와 작별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아쉽다.  묘하게 파고드는 이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번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부터 (마르살라) (라구사) (모디카) (노토)는 이번에 꼭 가보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일정을 생각하자니  시칠리아에 더 이상의 일정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도 똑같이 그랬는데 말이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떠나려니 새삼스레 진한 아쉬움이 가득한것은 여전히 똑 같다.  혹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는 한 달쯤 머물면서 실컷 시칠리아에 취하고 나면 그때는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려나?

  감히 자신하건데...........  시칠리아 여행은 첫사랑의 여운만큼이나 고혹적이다.

 

  수도원을 나오면 다시 몬레알레 대성당의 출입문 앞에 있는 너른 사각형의 광장을 마주하게 된다.

  몬레알레를 관통하는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로명과 같은 이름의 광장은 마치 대성당의 일부로 여겨질만큼 아름답고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대성당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약속장소로 정하는 명소이기 때문이다.  팔레르모의 '마시모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한 에르네스토 바실레가 이 유서 깊은 대성당의 입구에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한없이 평온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작은 광장의 중심에는 '넵튠 분수'가 있다.

  둥근 대리석 연못 안으로 바다의 신 넵튠(트리톤)이 바다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의 분노를 잠재우기라도 할 듯이 초인적인 동작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영웅적이면서도 장엄하기까지한  남성적인 미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대자연의 때론 무자비하거나 처절한 폭력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서 저항을 넘어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승리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비록 작은 무수이지만, 개인적으로 크고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하는  아주 인상적인 예술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새삼 팔레르모 출신의 조각가 '마리오 루텔리'에 대해서 궁금증이 마구 샘 솟아나는 순간이다.

  굳이 건축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꾸불꾸불 굽어진 골목길 하나에서도,  언덕에 나있는 돌계단 하나에서도, 휑하니 텅비고 빛바랜 마을어귀 광장에서도............  예전엔 차마 알지 못했던 남다른 느낌이 전해져 온다.  이곳만의......  이들만의 독특한 옛스러움과 분위기와 생활방식이 있다.

  그런 느낌과 생각들의 끝자리에서..........  '이래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생겨났구나' 하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 오는것만 같다.  어느새 우리는 이미..........  르네상스에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고......  시간적인 여유도 아직은 좀 넉넉하기에........  몬레알레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산책을 한다.  하나같이 넉넉하고 자상한 현지인들을 참으로 많이 만나본 마을이라 기억에 남을것 같다.

  워낙 작고 예쁜마을이라 산책이라 해도 별반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마이클 잭슨을 유달리 좋아한다는 가족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스파게티와 피자와 샐러드와 맥주로 즐겁고 행복했던 팔레르모 여행이 무사히 마쳐지게 되었음을 우리끼리 자축해 본다.  이스탄불에서,  그리고 몰타에서, 다시 시칠리아에서........  가는 도시마다 또는 숙소가 바뀔때마다 무사히 도착함에 감사해서 쫑파티.......  떠날때마다 무사한 여행에 감사해서 쫑파티.......  우리 여행은 허구헌날 술파티가 전부다.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설 즈음에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몬레알레와 작벽을 고했다.

  정류장 코앞에 있는......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풍경이랄 수 있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햇병아리들이 하교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서서 구경한다.  우리 태리도 저들 병아리 속에 있지 않을까 하고 한참을 찾아보았다.

  햇병아리들은 희망이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병아리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분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이 언제까지나 저들에게 함께하시기를..........'

 

 

  팔레르모에 도착하니 도심에 어느새 땅거미가 짙은 그림자를 내리우고 있었다.

  사전 체크 아웃을 하고 짐만 맡겨놓았던 터라,  짐을 찾고 나서 짧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메모로 남기고 정들었던 팔레르모의 숙소를 나선다.  팔레르모의 악몽같았던 첫날 여정이 그새 며칠만에 먼 추억처럼만 느껴진다.

  이래서 여행은 참 오묘하고 위대한 힘을 지녔다고들 하는가 보다.

  중앙역까지는 결코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지만,  낯 동안의 일정 소화에 어느정도 피곤했고 또 짐이 있는 관계로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짦은 시간에 또 아주 유쾌하고 친절한 버스기사님들의 도움과 온정의 손길도 느끼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팔레르모 중앙역 맥도날드 매장에서 가장 멋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기차표를 보딩패스하고 하다보니 어느새 예정된 기차 출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정말로 팔레르모와  시칠리아와 정말로 작별을 하는 시간이다.

  짐을 챙겨들고 플랫폼을 지나 '바다를 건너가는 세계 유일의 기차'에 올랐는데.......  챠밍여사의 얼굴에 웃음이 잠시도 떠나질 않는다.  베트남에서 슬리핑 버스는 타보았는데........  ㅎㅎㅎ.......  침대칸이 있는 기차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호기심은 마귀할망구도 웃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이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시칠리아를 떠나 메시나 해협을 건너서 로마로 간다.

  '로마야.  기다려.  금방 우리가 달려갈께.'

 

 

 

 

 

 

  (르네상스 산책).  다음 이야기는 '르네상스로 가는 기차'편에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