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는 고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바탕 위에 그리이스와 로마문명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지역이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시칠리아의 남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시라쿠사, 카타니아, 타오르미나, 노토, 라구사. 메시나 등의 도시를 건설했다. 아그리젠토 역시 남부 시칠리아 문화권에 속한다.
한때 시칠리아를 점령한 아랍인들에 의해서 상당부분의 그리이스 로마 문화가 파괴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노르만 왕조 이후에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된 기독교(로마 카톨릭) 사람들에 의하여 '이교도 문화 배척' 이라는 미명하에 또한번 그나마 남아있던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의 문화재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런 수난을 여러차례 겪었음에도 '그리이스'와 로마'는 정녕 위대했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든지 사방에 널려있다시피 그리이스와 로마시대의 유적과 문화재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이스 문화가 어쩌면 본토 보다도 더 완성도 높게 남아있는 곳이 시칠리아가 아닐까 싶다.
아랍과 기독교에 의해서 파괴된 시칠리아를 재건하면서 '바로크 양식'이 추가 되었다. 시라쿠사와 카타니아에는 멋진 바로코 양식의 근대적 도시계획과 함께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양으로 발전해 온 시칠리아는 분명 이탈리아 본토와는 생활과 문화면에서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던지 '고대 그리이스'와 '고대 로마'와 '바로크'를 만날 수 있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던지........
딱 한 군데만 빼고........ Palermo.
팔레르모 역사에도 고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와 그리이스와 로마 시대가 분명하게 있었지만......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나마 사라진 제국 카르타고는 반도의 로마를 견제하기 위하여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군사적인 요충지로 삼았었다.
시칠리아가 이탈리아 본토와 다르다면, 팔레르모는 여타의 모든 시칠리아 도시들과 너무도 다르다. 전혀 다르다.
우리가 팔레르모에서 느낄 수 있는것은, 어쩌면....... '이슬람 문화'와 '노르만 문화'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것이다.
노르만 문화는 분명 유럽의 기독교 문화의 일부로 편입되는것이 맞겠지만........ 적어도 시칠리아에서...... 최소한 팔레르모에서 느끼는 노르만 문화는 아주 특별하다. 굳이 '노르만 문화나 양식'에 대해서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팔레르모를 여행하다보면 저절로 '아! 이런것이 노르만 문화구나' 하고 깨닫게 될것이다. 시라쿠사나 카타니아에서 '바로크'를 느껴볼 수 있었떤것 처럼 말이다.
이슬람과 노르만을 빼면 팔레르모는 빈 껍데기만 남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슬람과 노르만의 혼재'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이 세상에서 팔레르모가 유일 할지도 모르겠다는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론다.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비야)을 여행하다보면 우리는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접하게 된다. 분명 서유럽의 스페인이지만 여타의 다른 스페인 도시들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낯선 느낌들이 결코 싫어지지는 않는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세워놓은 리베리아 문명권 위에, 어느날 지중해를 건너서 새로운 이슬람 문명이 쳐들어 왔다. 아랍인들은 리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루투갈)를 확보한 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서남부(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진출할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유럽 진격은 결국 피레네 산맥에 가로막혀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다쳐도 아랍인(이슬람)들은 7백년 가까이 이곳 리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통치했다.
물론 그들이 떠나온 아프리카와 비슷한 환경의 안달루시아를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왕국을 세워서 말이다.
아랍인들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빼앗기는 했지만,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웠다.(어쩌면 역사상 가장 너그러운 통치이념을 가진것이 아랍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랍인들이 통치를 함에 있어서 경리 회계 분야에는 거의 유대인들을 등용했다. 유대인들의 민족성이나 종교에 대해서 별 관여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우수한 두뇌와 성실함과 정직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너그러웠다.
이 대목에서 흔히 이슬람을 이야기 할때, '한손엔 코란을 한손엔 칼을' 이라는 표현들을 많이 쓰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종교이던 전쟁이던 생활문화 이던지 도저히 따라가거나 비교가 되지 않는 이슬람에 대해서 비꼬고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이다.
기독교가 '사랑' 이라는 단어로 대변된다면, 이슬람은 '평화'라는 낱말로 대변된다.
결국은 뿌리가 같은만큼 그 근본 또한 닮았다는 뜻이다.
'한 손에 코란을, 다른 한 손에 칼을' 이라는 표현으로 폄하를 하자면, 인류 역사를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전쟁에 기독교가 개입되었으며, 기독교의 전쟁치고 '한 손에 성경과 다른 한 손에 칼을' 들지 않은 전쟁이 단 한차례라도 있었던가?
아!!!! 내가 기억하는 한....... 칼을 들지 않은 아주아주 커다란 위대한 전쟁이 꼭 한번 있었다.(팔레르모와 연관있는)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벌어지는 상당부분의 전쟁이 기독교 세계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손엔 다이아몬드와 에메럴드가 밖힌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엔 핵무기 버튼을 들고'
아랍인들은 영원히 리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여 아랍 방식의 도시들을 건설했고 수많은 이슬람 사원(모스크)을 지었다. 그 중에는 기존의 기독교 교회건물을 헐지않고 모스크로 개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하여 이사벨 여왕이 진두지휘하는 '카톨릭에 의한 스페인 국토회복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포루투갈이 에스파냐(스페인)로 부터 분리독립하였고, 마침내 스페인은 아랍인들을 지중해 건너로 내쫓는데 성공하여 영토를 완전하게 회복하였다.
승리한 이사벨 여왕이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인류 최초로 (종교 재판)을 만들어 실시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아랍인들이 체포되어 재판에 끌려나갔고 거의 대부분이 참형이나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 카톨릭정신'만이 참된 인간의 가치 기준이었고, 이교도는 모두 짐승과 다를바가 없었다.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교나 그리이스 정교회나 이슬람도 모두 사악한 이교도이자 악의 후손이었다. '로마 카톨릭'만이 정의이며 인간으로 살아갈 최소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여, 다음으로 모든 아랍의 문화를 철저하게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모스크와 이스람 건축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던 놀라운 문명 선진국인 아랍의 문화나 문화재를 모두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그러자 최대한 지워버리기로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은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코르도바 메스키타에서 보듯이 유럽의 종교계 관계자들이 보기에도 입이 딱 벌어질만큼의 위대한 건축물들은 어찌되었건 기독교식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다보니 카톨릭 문화 위에 이슬람 문화가 더하여졌고, 다시 여기에 카톨릭 문화가 덧입혀지는 아주 독특한 안달루시아만의 문화가 현존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혼재한 아주 특이하고 매혹적인 문화가 지구상에 유일하게 안달루시아에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는 지워진 그리이스와 로마의 문화 위에다 아랍인들이 약 2백년 가까이에 걸쳐서 아랍양식의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이어 등장한 노르만이 어느 정도는 털어냈으면서도 다 털어내지 못한 기반 위에 다시 노르만 양식이라는 문화를 덧 씌워서 아주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인 또 하나의 문화를 이곳에 남겨놓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시칠리아를 정복한 스페인(에스파냐)가 약 400년 동안 지배를 해왔다.
아랍인들에 의해서 생겨난 도시 팔레르모는 그 때부터 현재까지 시칠리아의 중심이었다.(현재 이탈리아의 5위 도시)
하여, 시칠리아가 이탈리와 본토와 사뭇 다르다고 한다면, 팔레르모는 다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 안달루시아와 많이 닮았다.
팔레르모를 거닌다는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거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절로 마구 생겨난다. 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이 더 강렬하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AD. 831년 아랍인들을 태운 함선이 느닷없이 팔레르모 앞바다에 출현했다.
북아프리카와 리베리아 반도에까지 영역을 넓혔던 비잔틴 제국이 본토인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유일하게 남아있는 해외 점령지였던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마디로 시칠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랍인들은 비잔틴의 시칠리아 최후 거점인 시라쿠사성을 포위하고 1년 반 동안이나 공격을 하였지만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카타니아를 거쳐 타오르미나를 지나 메시나 해협을 건너서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시라쿠사성은 난공불락이렀고 결사적인 저항은 그 어느도시보다 강력했다.
아랍군 지휘부는 절대적으로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그들은 시라쿠사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배를 몰고 서쪽으로 항진했다. 시칠리아의 모든 도시들을 포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목표로한 팔레르모에 들이 닥쳤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시대부터 팔레르모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다만 지형적인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이스와 로마시대에도 최소한의 병참기지를 두고 테레니아해의 감시를 주로 담당했었다.
거의 저항없이 팔레르모를 접수한 아랍군 지휘부는 탄성을 질렀다.
'이곳이야 말로 콘카도로(황금의 땅)가 아닌가?'
팔레르모는 아주 특이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분지다.
테레니아해를 향해 탁트인 시야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도시의 양쪽으로 뾰족 튀어나간 만이 조성되어있고 수심이 고른 백사장이 드넓게 펴쳐져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항구였던 것이다. 또한 해변에 인접한 대단히 넓은 분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농산물 생산이 아주 풍부했다. 거기에다 파피레토. 케모니아. 오레토 강이 분지의 곳곳을 고루 보살펴주듯이 흐르고 있다. 항구도시로서의 완벽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이스와 로마 조차도 천혜의 환경을 모두 갖춘 이곳 팔레르모를 외면했을까?
그것은 산(山) 때문이었다.
팔레르모는 해안가의 넓은 평야를 제외하고는 아주 험준하고 높은 산맥이 뺑둘러 감싸안고 있는 형국의 절대분지이다. 이 산맥은 몬테 펠레그리노. 라 파자타 등등의 산으로 첩첩이 둘러쌓여 있는데 그 높이가 해발 1.300미터에 육박했다. 우리나라 해안가의 제법 높은 산들이 해발 300미터를 조금 상회한다고 치면, 팔레르모를 둘러 싼 산맥은 그야말로 알프스 산맥과 다를바가 없었다. 육지를 통해 외부와 완전하게 단절되었다는 이유가 수많은 고대국가들이 팔레르모의 개발을 꺼린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인들에게는 이 분지가 천혜의 방어요새 역활을 해줄 수 있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 막 남의 땅을 침범한 처지로, 시칠리아 연합군의 육지를 통한 공격에는 안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은 해안 방어에만 힘쓰며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팔레르모가 시칠리아주의 주도(州都)로 탄생하게되는 시작이었다. 팔레르모를 안정권에 이르도록 건설한 아랍인들은 배를 타고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해 나가면서, 험준한 산맥 사이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팔레르모를 드나드는 아주 험준한 산악도로이다.
마침내 시라쿠사를 마지막으로 시칠리아를 완벽하게 점령한 아랍인들은 그 맺힌 한을 풀려고 시라쿠사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린다. 이후 약 170년간 아랍인들은 시칠리아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팔레르모가 있었다.
9세기경의 팔레르모는 유럽을 통털어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로 부상했다. 오늘날의 뉴욕이나 파리 같았다.
그 당시의 넘쳐나는 풍요와 화려함은 이제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의 숨결은 여전히 남아있다.
시칠리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당연히 시라쿠사다. 야경을 보면서 노천에서 와인을 한잔 하기에는 타오르미나만한 곳이 더 없을것 같다. 가장 강렬한 인상이라면 당연히 아그리젠토라 하겠고, 가장 매혹적이면서 느긋하게 여러날을 머물곳을 고르라면 기거이 팔레르모를 나는 선택하겠다.
팔레르모의 하늘은 다른 시칠리아 도시의 하늘빛과 다르다. 도심의 공기와 냄새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다름은 마냥 낯설고 이질적임이 아니라....... 언제 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익숙한....... 친숙한 그런 느낌이다.
팔레르모 중앙역이 보인다.
버스터미널이 기차역과 등을 맞대고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라는 생각 보다 그라나다 기차역에 막 내려섰을 때 느낌이 되살아 나는 것은.........
여기가 이탈리아여 아님 스페인이여?
확연히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어떤 낯선 느낌을 발견하셨다면........ 이미 팔레르모 절반은 돌아본것임........
'기차를 놓치고 천사를 만났다.'
어떤 분께서 출판하신 여행서적의 제목이다. 팔레르모에서 딱 그런 표현에 적합한 일을 겪었다.
'부킹 닷컴에 바람맞고 천사를 만났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매사가 마음먹은대로 술술 제대로 풀린다면 누군가는 재미없는 여행이라고 했다.
비극적일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여러 난관도 봉착해 보고 이를 다소 고통스럽게 극복해나가고 해야 비로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좋은 여행이라고 했다.
말은 참 그럴싸하고 나름의 깊은 속내도 느껴지지만........ 아이구야! 당하는 순간에야 어디........
인생도 여행도......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좋지않은 인연을 만나면 일도 꼬이고 죽도록 고생도 하고 눈물도 흘리는 것이고, 좋은 인연을 만나면 즐겁고 고통도 줄어들고 꼬인 일들도 하나하나 풀려나간다.
(내가 만났던 모든 소중한 인연들에게 조물주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이 함께하시길.........)
몰타 여행중에 미리 카타니아와 팔레르모의 숙소를 예약해 두었었다.
카타니아 숙소의 경우 모든면에서 썩 만족스러웠지만 단 한가지, 고대의 성벽에 기대어 지어진 숙소 건물은 모든 벽이 너무나 두꺼웠다. 하여 와이파이가 전혀 터지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출입문에 기대어야만 겨유 와이파이가 터질 정도였다. 여행중 로밍써비스 조차 하지않고 다니는 나의 습성상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카타니아에서 체크아웃하고 팔레르모로 이동하는 시간...... 숙소를 나서면서 확인을 해보니 부킹닷컴으로부터 이메일이 한통 도착해 있었다.
'고객께서 예약하신 팔레르모 숙소에 사정이 생겨서 연락을 바랍니다. 고객께서 허락하신다면 인근의 같은 수준의 호텔로 예약 연결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예약은 분명 성사되었고 결재까지 마친 상태였으며, 로밍서비스를 하지 않아서 숙소에서만 연락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분명하게 통지를 해 둔 처지였기에 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팔레르모를 이미 경험했던 처지라 에약한 숙소의 위치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작은 숙박업소들이 손님을 모집하면서 오버부킹을 곧잘 저지르곤 하기에 그런 정도라 생각했고, 그런 문제에 대한 대처는 나름 자신이 있었기에....... 직접 찾아가서 해결하리라 마음 먹었다.
팔레르모 터미널에 도착했다.
챠밍여사와 배낭을 기차역 구내의 맥도널드에 자리잡아주고는 예약한 호스텔을 직접 찾아나섰다. 이번 여행의 편의상 팔레르모 중앙역 인근에 숙소를 골라놓은 터였다. 5분만에 주소를 찾아냈는데 일절 안에서 대꾸가 없다. 빌라의 한쪽 계단 건물을 호스텔로 개조하여 운영하는 숙소였다. 행인을 붙잡고 부탁하여 현지 전화를 넣어봐도 전혀 응답이 없다.
'이거 말로만 듣던 호텔 사기 당한것 아냐?'
맥도널드로 돌아와서 로밍써비스가 되는 챠밍여사 폰으로 부킹닷컴에 연락했다.
애초의 숙소는 벽면에 곰팡이가 심하게 슬어서 더 이상 영업이 어려워 수리를 먼저 해야겠다는 보고를 업체로 부터 받았고, 새로운 숙소를 주선하려 했는데 너무나 늦어지기에 예약을 캔슬하시려나 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분명하게 사전 고지를 했고 입금 절차까지 마친 예약 확정자 처지로 '이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항의를 했다.
부킹닷컴에서는 사과를 하면서, 사전 예약 숙소에서 메모로 남긴 새로운 추천 호텔의 주소와 연락처를 불러 주었다. 하니 당장 어쩌겠는가? 따지는것은 나중일지라도 우선 숙소문제를 해결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새로운 숙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안내소에서 물으니 중앙역 출입문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는것이 최선이라 추천한다. 우리는 서둘러 시내버스에 올랐다. 기사님에게 받아적은 주소를 보여주고 가장 가가운곳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시내버스는 항구쪽으로 삥 돌아 나간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것이 보통인데 시내를 외곽으로 삥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는 예전 여행에서 내가 가보지 못했던 팔레르모 북쪽 외곽으로 달린다.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기사분이 사인을 보내 주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전혀 낯선 지역이다.
지나는 행인에게 주소를 보여주고 묻고 물어서 마침내 전형적인 스페인 안달루시아풍의 아주 커다란 빌라촌에 도착했다. 직사각형의 건물을 통로를 통해 들어서면 아주 너른 정원과 주차장이 나온다. 이제 소개받은 호스텔을 찾으면 된다.
건물의 모든 출입구와 차임벨에 나붙은 명패를 모조리 살펴 보았지만 우리가 찾는 호스텔 이름은 없었다.
참으로 난처하다 못해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챠밍여사 폰으로 받아적은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하는데....... 아뿔싸. 상대방이 영어를 전혀 못한다. 오로지 이탈리아어로 떠드는 소리만 들려온다. 어쩌다 드나드는 현지인을 붙잡아 보는데....... 영어 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부킹닷컴을 때려부수고 싶을 정도로........
그때, 저쪽 주차장에서 소형 승용차 한대가 다가왔다. 무조건 손을 들고 차량을 가로막았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창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아주 깔끔한 인상의 인텔리한 사내는 영어를 아주 훌륭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많이 흥분된 표정과 목소리로 나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모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내와 함께 다시 한번 모든 출입구의 명단을 일일히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호스텔 이름표가 없었다. 사내는 자신의 핸디폰으로 내가 받아적어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동안 이탈리아어로 열심히 떠드는 표정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처지를 이미 이해하고 나서 지금 숙박업체에 전화하는 그의 표정에 난감함이 피어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나에게 사내가 설명을 해왔다.
중앙역 근처의 업체가 곰팡이 문제로 사정이 생겨서 소규모 호텔들끼리 협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이곳의 협력업체에게 나의 예약을 부탁했었단다. 헌데 체크인 시간이 되어가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방금 전에 새로운 손님을 받았다는 대답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여러모로 미안하기는 한데 어쩔 수없게 되었으니 이해를 해달란다. 아울러 조금만 기다려 준다면 다른 협력업체를 통해 방을 구해보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젊은 사내의 친절에 감동하면서도, 부킹닷컴의 처사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여 직접 부킹닷컴에 다시 전화를 했다. 조금 지나 아까 통화한 담당자가 나왔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의 업체와 통화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조금만 기다리라는.........
젊은 사내가 자주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약속이 있어서 출타하는 중이라 했었다. 아마도 나에게 붙잡힌지가 족히 20분은 넘어섰을것만 같다.
'이미 너무나 크게 도움을 받았다. 고맙다. 약속이 있어서 바쁜분을 더 이상은 붙잡고 있을 수가 없겠다. 어떻게든 해결할테니 약속에 늦지않게 이만 가보시라' 말을 건넸다. 하지만 사내는 떠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어를 못하시잖아요? 업체에선 제 전화번호로 연락이 올 거에요.' 나를 위로하려 사내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잠시 뒤에 전화가 왔다.
사내는 내 수첩에 새로운 호텔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꼼꼼하게 적어 주었다.
'나쁜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시고 팔레르모에서 즐거운 여행을 하시길 바랍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사내는 떠나갔다. 늦어진 약속시간때문에 우리를 다음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남긴다.
--- 우리는 팔레르모에서 첫번째 천사를 그렇게 만났다.
여행지도에서 사내가 새로운 목적지를 손으로 가리켰을 때 나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정확히 알게되었다. 내가 이미 여러차례 지나다녔던 길목이었다. 다만..... 지금 위치에서는 도심의 반대쪽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왔던 길로 몇 블럭을 지나도록 택시가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숙소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타겠다고 한없이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보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는 아에 없다.
힘들고 지쳐만 갔다.
지나가는 남학생들 무리에게 길안내를 부탁하는 소리를 질렀는데, 학생들 모두에다가 지나가시던 육십줄의 여성분이 똑같이 돌아다 본다. 내가 영어로 설명을 하자 학생들은 멋쩍게 웃고, 여성분이 다가오신다.
이분은 아마도 초등학교 선생님을 정년 퇴직하신 분이 아니셨을까? 차분하고 자상하게 하나하나 설명을 참 곱게 해주신다. '도무지 택시를 찾아 볼 수가 없어요' 하자, '그랬을 거예요. 오늘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대통령이 아주 오랫만에 방문하셨거든요. 하여서 대부분의 도심이 교통통제 되었어요. 아마도 지금쯤 풀린것 같아요. 시내버스 노선만 외곽으로 순환하게 만들었고, 나머지 모든 교통은 차단되었어요. 아주 드물게 특별한 날에 고생을 겪으시네요?'라는 설명이었다. 여성은 두 블럭을 지나서 왼쪽으로 나 있는 도로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을것이며, 그러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것이라 조목조목 소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감사 인사를 나누고 그만 헤어지려고 했는데....... 챠밍여사의 힘들어 하는 표정을 살피셨는지 택시 타는곳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앞장을 서신다. 사양해도 소용이 없었다.
교차로에 당도하니 차량들도 사람들도 택시들도 사방에서 마구 솓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손을 흔들었지만 도무지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불가능해 보였다.
'그냥 마음 편하게 한 5분만 기다려 보실래요? 평소 내가 이용하는 콜택시 회사가 있는데 연락하면 5분쯤 후엔 도착할 거에요.' 택시는 15분 후에 도착했고, 그때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있어주었다.
트렁크에 짐을 싣는데 여성분이 운전기사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서 '기사님에게 목적지 주소를 확인시켜 주었어요. 확실하게 그 주소에 당도해야만 한다고...... 길이 막히지 않으면 10분 정도면 도착 할 거예요. 요금도 7유로 정도라 확인했으니까 참고해서 바가지 쓰지는 마세요. 무사히 가셔서 편안한 휴식 취하시길 바랄게요.' 마치 먼길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씨 같은 배려라고나 할까?
택시에 오르기 전에 기어코 챠밍여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너무나 고맙고 커다란 배려와 도움에 감격하고 만 것이다. 두사람은 짧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0분 뒤, 우리는 정확하게 주소에 적힌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요금도 7유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 우리는 팔레르모에서 두번재 천사를 또 그렇게 만났다.
노르만 긍전 뒷편의 재개발 대상 빈민가 지역이었다.
천년 전 아랍인들에 의해서 지어진 동네다. 이 근방의 모든것을 나는 이미 낱낱이 꿰차고 있다.
다만........ 당장 이 숙소에 들어갈 방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직 남아있다.
낡은 건물의 육중한 목재문은 굳건하게 잠궈져 있었다.
이 건물의 계단에는 4개층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맨 윗층에만 불이 켜져 있어서 차임벨을 눌러 보았는데, 들려오는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 뿐이다. 어느새 날은 한참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새로운 숙소로 주소와 연락처는 받았는데....... 정작 열쇠가 없다. 업체로 전화를 해보니 역시 들리는건 이탈리아어 뿐이다. 아프리카 오지에 간 것도 아닌 처지로 이렇게 난감한 지경을 처음 경험해 본다.
왁짜지껄한 소란과 함께 한무리의 사람들이 우리가 서성이는 골목으로 들어오더니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 중에 노란 패딩을 입은 금발의 중년 여성이 우리가 서 있는 옆건물의 문을 열고 있다.
다짜고짜 쫓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이 여성분이 영어를 아주 잘하신다.
현재의 상황을 설명을 하자, 여성분이 자신의 전화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끝내고는 아까 내가 눌렀던 4층의 차임벨을 누룬다. 이태리어로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삐 소리와 함께 육중한 나무 대문이 마침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칠흙같은 어둠뿐이다. 핸디폰 조명을 도움받아서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니 2층의 나무문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우리의 숙소라 가르쳐 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열쇠였다.
출입문의 왼쪽에 철로 만든 아주작은 우체통 같은것이 붙어있는데 숫자를 돌려 맞추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다. 뜬금없이 여성이 나에게 여권을 보여달란다. 여권번호 뒷 여섯자리가 열쇠함의 번호란다. 숫자를 바르게 배열하자 마침내 열쇠함이 열렸고 한웅큼의 열쇠꾸러미가 내 손에 쥐어졌다.
세상에나........ 이 금발 여성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끝내 숙소에 들어가지 못핼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챠밍여사는 금발여성과 포응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 우리는 팔레르모에서 그렇게 세번째 천사를 또 만났다.
밖에서는 솔직히 상당히 우려를 했었는데....... 숙소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아주 높은 천장과 별도의 두개의 룸과 널널하리만치 너른 화장실과 간이 주방을 겸한 아주 커다란 거실이 놓였다.
별 세개쯤 호텔이라 해도(외괸과 주변 환경은 빼고) 무방하지 싶다.
대충 짐정리를 마쳐갈 때, 부킹닷컴에서 전화가 왔다. 부아를 넘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생고생을 했던가? 점점 언성이 높아가는것을 느낄때쯤.......... 챠밍여사가 불쑥 나타나 한마디 툭 던진다.
'덕분에 천사를 세번씩이나 만났잖아? 그분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이번 한번쯤은 그냥 넘어가면 안될까?'
순간...... 오늘 하루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갔고..........
부킹닷컴에선 마무리 멘트가 들려왔다. '혹, 오늘 부득이 하게 비용을 지출하셨거나, 또 현재의 숙소에서 어떤 추가 비용을 요구하면 일단 사용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불을 하시고, 여행 후에 회사로 청구를 하시면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인사가 울려나온다.
우리는 팔레르모에서 하루에 세번씩이나 천사를 만났다.
밤새 꿈을 꾸었다.
팔레르모에 입성하기 까지 어제 하루의 일과가 좀 고달팠던 모양이다.
짐을 풀고 나서, 인근의 지리를 이미 잘 알고 있기에 혼자 나가서 이런저런 간단하게 저녁꺼리를 장만했다. 꽃도 사고, 와인도 두 병에다가 전기구이 통닭을 한마리 사고, 감자 튀김과 야채 샐러드를 샀다. 거기에다 피렌체 중앙시장이 유명한 내장버거를 또 두개나 샀다. 팔레르모의 모든 물가는 아주아주 착하다.
저렴한 비용을 들인 저녁 식사였는데 어찌나 푸짐하던지 절반은 남기고야 말았다.
그리고나서 모두 조금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근자에 들어서는 아주 모처럼 꿈을 꾸었다.
그것도 총천연색 파노라마 형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꿈이 좀 뜬금이 없게 느껴졌다.
꿈의 시작이........ 내가 느닷없이 로마 바티칸의 사도궁전을 들어가고 있는것에서 시작되었다. 여러개의 방들 중에서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을 전혀 주저함 없이 들어가서는 네개의 벽면에 철학. 신학. 법. 예술에 대해서 그려진 그림중에서 철학을 상징하는 벽 앞에 멈추어 섰다.
이 벽면에는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아테네 학당) 이라는 프레스코화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54명의 철학자가 등장하고, 그림속 배경의 두 기둥에는 아폴론과 아테네 여신의 석상이 놓여있다.
꿈속에서 아테네 학당은 3D의 입체적 공간으로 등장하였고 나는 그 철학자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통 아테네 학당만을 쏘다니다가 새벽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왜 아테네 학당이지?'
사실 나는 '라파엘로'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칭송받는 화가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유독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르네상스의 3대 화가' 하면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겠지만서도....... 나에게 있어서 솔직히 말해 라파엘로만은 별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또는 가장 비싼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그 해답으로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나리자) 라는 것이 하나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고, 가장 오랫동안 보존되어야 할 작품은 어떤것일까?
내 경우라면 당연히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되면 역시나...... 르네상스의 양대 산맥이 등장을 했고, 세번째인 '라파엘로 산치오'가 남았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라파엘로는 과연 무엇을 앞세워야만 (모나리자)나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확립한 수 있을까?
(아테네 학당) 이야말로 (모나리자)나 (천지창조) 못지않은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르네상스'는 인류 역사를 통털어서도 하나의 아주 위대한 문예사조였다. 그 르네상스중에서 회화분야를 대표하는 '3대 거장'이요 '3대 명품' 이라고 하겠다.
'르네상스'라는 것이 한마디로 표현될 수도 없고, 앞으로 천천히 수없이 논하겠지만........ '르네상스 주의' '르네상스 화풍' '르네상스 정신' 등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완벽한 르네상스 = 아테네 학당) 이라는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는 일체의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건축 = 피렌체 두오모) (르네상스 문학 = 단테의 '신곡') (르네상스 회화 =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르네상스 조각 =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이라 생각한다.
(아테네 학당) 이야말로 회화로 표현된 완벽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요약 내지는 집대성'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내노라 하는 절학자 인문주의자는 모두 등장하는 초대형 걸작이다.
다빈치의 모습을 한 플라톤은 학당의 한가운데로 걸어나오면서 자신의 저서인 <티마이오스>를 들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데아(형상)의 근원은 하늘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쪽에 팔꿈치를 대리석 위에 괴고 계단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헤라클레이토스는 영락없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존경심에서 그려 넣을 수도 있고, 비관주의자의 모습으로 그린것은 혹 라이벌 의식의 발로였는지로 모를 일이다. 왼쪽 하단의 피타고라스는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데 역시나 원주율을 계산하고 있는 모양이다.
플라톤 오른편의 녹색옷차림인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사람들을 모아놓고 민주주의를 설파하기에 여념이 없고, 플라톤과 더불어 고대 그리이스 철학의 양대 산맥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윤리학>을 손에 들고서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은 지상(땅)이라는 듯 손으로 땅바닦을 가리키고 있다. 중앙에 어깨를 나란히 자리한 인문과 철학계의 양대 지존의 위용이 자못 뭇사람들에게 저절로 존경이 우러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햇빛만 있으면 된다하던 디오게네스는 역시 게단 가운데 반쯤 드러누워 있고, 그에게 통나무집을 가리키고 있는 에우클레이테스의 얼굴엔 브라만테(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아주 야비한 브라만테)가 내걸려 있다.
그림의 맨 오른쪽 흰옷 입은 사람의 안쪽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 자신이다.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다보면 뜻밖에 이교도인 아랍사람이 터번을 쓴 채 등장하고 있다.
그는 실제 아랍인으로 '이븐 루슈드'라는 이슬람 학자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종교의 대립과 영토 확장을 위한 분쟁이 잦던 시대에,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속에 버젓이 이슬람의 학자라니........ 그것도 풀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그림속에 말이다. 왜 그랬을까?
쉽게 표현한다면 '이븐 류슈두'는 이탈리라 르네상스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찬연했던 고대 그리이스의 문학과 철학과 인문학과 수학과 천문학과 의학등의 지식과 지혜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모두 사라졌다. 철저하게 지워졌다.
로마 카톨릭(교황)은 오로지 교회가 주도하는 '기독교 신학'만을 필요한 학문으로 정의 내렸다. 나머지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기독교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폄회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폄하를 넘어 멸시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제 온 유럽에 찬연했던 그리이스 문화와 초기 로마시대의 문화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흔히 말하는 중세시대 1천년에 걸쳐서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달랐다.
지중해를 건너 리베리아 반도(에스파냐)를 점령하면서 아랍인들은 '고대 그리이스'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고 기꺼이 함께 했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예술과 문학으로 승화 시켜서 신에게 받치던) 실ㄹ 위대한 세상이 실제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아랍인들은 자신들도 그리이스 사람들처럼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알라신께 받치고 싶었다. 하여 아랍의 지도자들은 너도나도 할것없이 고대 그리이스에 매료되고 한마디로 올인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피타고라스를 무덤에서 다시 끄집어 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중해 건너 아랍지역으로 가지고 갔다. 이어서 모든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그리이스의 문학과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븐 류슈루'는 고대 그리이스의 자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데 크게 공헌한 이슬람 학자이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지식이들이 존경을 표했을 만큼...... 이 그림이 그 중표이다.
15세기 이탈리아(피렌체)의 지식인들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아랍을 통해 고대 그리이스에 관한 서책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하여 자비로, 또는 그룹을 통해서, 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노력으로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고대 그리이스와 초대 로마의 문화와 예술과 철학과 인문학에 관한 서책들을 내다버린지 1천년이 지나서 아랍으로 부터 들여와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새로운 물결이 이어서 (르네상스)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피렌체)에서 찬란하게 꽃피운 (르네상스)는, 사실은 아랍의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들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함께 아랍의 지식을 한가득 품에 안고 이탈리아로 도망쳐 온 선각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시대의 대변혁기에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한 피렌체의 문화적 정서적 경제적 토양이 기가막히게 딱 들어맞아서 거기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러한 '르네상스의 발자취'를 찾아 따라나선것이 바로 이번 나의 여행이다.
팔레르모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에 우리는 산책과 외식을 병행하기로 했다.
아침산책이야 집에서나 여행중이거나 꾸준히 변함없이 행하는 일례행사겠지만, 아침외식은 조금은 색다른 경우라 하겠다. 동남아를 여행중이라면 아침은 길거리 어디에선가 빨간 목욕탕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쌀국수를 먹는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으나, 지금 여기는 서유럽의 시칠리아 하고도 팔레르모가 아닌가? 나는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해를 건너서 북쪽부터는(동아시아에서 본다면) 유럽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조식을 제공하는 숙소에 머무는 것이 절반 정도이고, 전날 미리 아침을 준비하여두었다가 숙소에서 간단하게 해결하는 경우가 절반에 이른다. 근교로 일일 투어를 떠날경우 길에서 간단하게 커피나 빵 한조각으로 아침을 해결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터키를 포함한 유럽의 조식은 대부분 하나의 정통적인 격식처럼 정해져 있다.
막 구워낸 구수한 빵이 있고 후라이나 삶은 계란이 나온다. 썰은 오이 두조각에 방울 토마토나 혹은 썰은 토마토가 나오고 서너가지 치즈에다가 쨈이나 꿀이 쏘시지와 버터와 함께 나온다. 야쿠르트도 나온다. 거기에 주로 커피가 제공되고 혹간은 다른 전통차를 내어오기도 한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에서 그랬다. 이렇게 나오면 유러피안 스타일이라고 하겠다.
몰타 같은 곳에서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변형되어 나오기도 한다.
커피가 우선 중요하고, 토스트기에 막 구워내온 식빵에다가 살짝 구웠어도 어느새 딱딱해지는 베이컨이 추가로 등장한다. 너머지는 비슷한데 이렇게 나오면 아메리칸 스타일이 되는것이다.
아침은 대체적으로 간촐하고 씸플하게 느껴진다.
그런것에 비하자면 시칠리아식 아침은 아주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아주 진한 작은 에스페레소 한잔에 금방 짜낸 싱싱한 오렌지 쥬스 한잔(혹은 생수 한컵)에다 크로아상 하나로 아침을 대신한다. 오랜 전통의 시칠리아식 아침 식사다.
그런데...... 팔레르모의 아침은 아주 조금 다르다. 시칠리아식 인것은 분명한데......... 결코 간촐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여 이번 기회로 팔레르모식 아침식사를 맛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기대하시라.........
아침 산책으로는 유명한 팔레르모의 '발라로 시장(Ballaro Market)'을 둘러보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하기로 했다. 발라로 시장은 팔레르모 도성 안에 아랍인들의 점령 시기인 9세기경에 생겨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역사와 유래가 아주 깊은 전통시장이다.
시장은 팔레르모의 핵심이자 랜드마크인 두오모 길건너의 골목에서 시작하여 꾸불꾸불 골목길을 따라 이어져 내려가다가 팔레르모 중앙역 인근에서 끝난다. 정리되고 가다듬어진 도시계획에 의해 생겨난 현대적 시장이 아니라, 이슬람 시대에 도시가 생겨나고 발전해 나감에 따라서 주택들이 들어서고 골목길이 생겨나자 그 좁은길을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노천시장이라고 해야겠다. 이 시장의 특징은 팔레르모에서 이슬람이 쫓겨난지가 1천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아랍스타일의 재래 시장이 말그대로 명맥을 유지하여 내려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혹여 첫인상은, 아랍의 부랑자들과 근자에 지중해를 건너온 아프리카계 난민들로 인한 우범지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법도 하지만....... 이곳의 치안상태는 썩 훌륭한 편이다.
지명도로 치자면 아마도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 아닐까?
다만.....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느끼는 감정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는 지역이다.
그렇다고 팔레르모에 와서 발라로 시장은 안보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아침 산책을 대신하여 발라로 시장을 맛만 보기로 했다.
팔레르모식 아침식사는 그 다음이다.
발라로 시장을 가자면, 우선 그 유명한 포르타 누오바를 지나 노르만 궁전과 정원을 거쳐야하고 도심 중앙의 대로를 따라 팔레르모 두오모를 지나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모처럼만의 우리 아침식사 외식 자리도 두오모 바로 옆에 있기에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발라로 시장으로 아침산책과 아침 식사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간이었기에 거처야 하는 관광지는 모두 그냥 패스하기로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되돌아 갔다가 이곳으로 다시 찾아와야만 하는 첫날 여행 스케줄을 미리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를 보지 못했다면 이탈리아를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탈리아를 여는 열쇠가 시칠리아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괴테는 말했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에 의해서 지중해의 요충지로 거론되었지만 여러가지 지정학적인 이유로 그리이스나 로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8세기에 들어서 유럽으로 진출을 모색하는 아랍인들이 시칠리아를 탐냈지만, 시라쿠사를 중심으로한 남부 시칠리아의 저항이 강렬하자 아랍인들은 시칠리아 남부를 그대로 지나쳐 북서쪽의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교두보를 삼았다. 이때부터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한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중심을 넘어서 유럽 전역에서도 보기드문 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랍의 지배시기는 유럽역사에서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팔레르모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노르만 왕국의 성립 이후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노르만 왕조는 한마디로 북유럽의 극한지역에 살던 '바이킹의 후예'이다.
중세 유럽이 봉건영주들과 국가들 간의 다툼과 전쟁으로 일관되자, 마침내 북쪽의 무지막지한 바이킹을 용병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들의 잔혹함과 용맹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고도 남음이 있었다. 수많은 폐단이 발생하자 교황(로마 카톨릭)의 중재로 봉건 영주들과 제후들은 전쟁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은 멈춰졌지만 따뜻하고 풍요로운 지중해 문물을 접해 본 바이킹들은 고향인 북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졌다. 바이킹의 피해가 날로 커져가자 교황과 영주들은 그들을 한곳에 모두 모아놓고 감시하고자 떠올린곳이 시칠리아와 몰타였다.
시칠리아의 아랍인들을 물리치고 몰아 낸 시칠리아인들은 스스로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나름의 통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뜻하지 않은 교황과 유럽 영주들의 담합의 결과로 하루아침에 바이킹에게 왕국을 내주어야만 하는 비극적인 처사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의 아랍은 물리친 시칠리아 왕국이 하루아침에 같은 기독교에 의해서 몰락해 버린고 만 것이다.
바이킹은 시칠리아를 차지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정치와 권력과 제도와 문물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대적 우위의 군사력을 내세워서 유럽의 여러 제후들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유럽이라는 거대한 제도권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야만에 가까운 전쟁귀신 집단인 바이킹이 시칠리아를 차지한지 약 70년이 지나서 이들을 이끌 뛰어난 인재가 등장했다. '루제로 2세(Ruggero)'는 1130년에 독자적인 '노르만 왕국'을 창건하고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다. 이는 로마제국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역사를 통털어 전무후무한 대혁신이었다. 수많은 혼맥을 통하여 유럽의 최고 왕족의 반열에까지 오른 노르만은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해 전 유럽을 호령하는 최고 통치자에 으르게 된다. 누가 그들을 미개한 야만인 바이킹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때부터 시칠리아(노르만 왕조)는 유럽 역사의 전면에 대대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등장할 때까지 존속하게 된다.
걸출한 지도자 루제로 2세는 유럽인들이 스스로 자부하는 정치. 경제. 문화가 사실은 이교도인 동방의 아랍인(이슬람) 들에 비해서 실로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야만인으로 치부하는 아랍의 생활 수준이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 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제로 2세는 자신의 왕국을 다문화를 모두 자연스레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회로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노르만 사람은 주로 용병(군인)이나 축산(도축)의 일에 관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배(船)를 건조하거나 어업에 종사를 주로하고, 아랍인들은 농사를 주로 지었으며, 상업이나 회계 등의 전문적인 일은 주로 유대인들의 몫이었다.
루제로 2세는 그렇게 다양한 민족성과 종교성과 문화를 모두 포용하였다. 팔레르모는 아랍인과 유대인과 아프리카에서 건너 온 사람들과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융합하여 발전을 도모하는 당시까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하였던 최첨단 시스템에 의하여 무섭게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서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운 도시로 불리우게 되었다.
피렌체. 제노바. 베네치아. 나폴리 등도 이제 막 자치도시로서 형체를 갖추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으며, 프랑스나 영국도 국가 재정이 변변치 못한 미약한 국가 정도였으며, 이후에 유럽의 중심이 되는 합스부르크 왕가도 아직은 태어날 기미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이 세상에는 단 세개 정도의 도시만이 찬란하게 이름을 수놓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비잔틴의 수도)과 코르도바(스페인 땅에 아랍인들이 세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가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팔레르모(노르만 왕조의 수도)가 당시 세계적인 대도시에 포함되어 경쟁하였다.
팔레르모의 중심이었던 올드 시티는 커다란 성벽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네개의 성문을 설치했다. 현재는 북문 밖으로 몬레알레산 방향으로 새로운 도심이 건설되어 뻗어나가고 있다. 아울러 몬레알레 대성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명소나 유적들은 성벽 안의 올드시티에 대부분 놓여져 있다.
숙소를 나와 오늘은 팔레르모 도성 안의 유적과 유물을 구경하고자 발걸음을 옮겨본다.
허름한 동네 골목을 나와 대로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독립광장이다. 독립광장은 노르만 궁전의 뒷마당쯤으로 여기면 되지 싶다. 그리 멀지않은 팔레르모 중앙역과 이곳 독립광장이 모든 교통수단의 핵심이라 하겠다. 몬레알레 대성당에 가는 시내버스를 타는 곳도 이곳이다.
광장 공원의 중심에는 우리가 서너번 이용한 카페가 있는데 분위기나 커피맛도 일품이다. 주변으로 기념품 상점이나 작은 맛집들이 늘어서 있다. 꽃이나 기념품을 파는 노점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곳엔 현지인들까지 줄을 서는 통닭집과 피자집과 가축부산물 버거집이 특히 유명하다.
광장 옆으로 번듯하게 쭉 뻗어나간 도로는 멀리 몬레알레 대성당까지 이어지고, 반대로는 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항구의 남문까지 일직선상으로 시원하게 뚫려있다. 이렇게 남과 북으로 시원하게 뚫려있는 도로는, 도심의 중앙에서 동서로도 교차해 시원하게 기리이 뚫렸으며 그 분기점이 유명한 '콰트로 간티'가 되는 것이다.
여타의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도시 중앙의 핵심 도로 명칭은 어디를 가나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 이다.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황제 이름이 이탈리아 어디를 가나 넘쳐난다.
중앙로를 따라 팔레르모 올드시티로 발걸음을 옮기면 저만치 앞에 라임스톤의 웅장한 '노르만 궁전'의 뒷모습이 시야가득 들어온다. 그리고 왼쪽으로 이어붙인 듯한 뾰족한 지붕의 아랍풍 건물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며 다가오는데, 그것이 바로 팔레르모 도성의 북문인 포르타 누오바 이다.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가 유명한 이유는 성문 윗쪽으로 좌우에 두명씩 아랍인들의 모습을 부조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효를 간직하고 있는 현상범 포스터' 라고나 할까?
스페인의 왕(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로 불리우는데(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한복판에 있는 카를로스 궁전의 주인공), 외할머니였던 이시벨 여왕이 스페인 영토안의 아랍인들을 모두 아프리카로 몰아내자 쫓겨 간 일부 아랍인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튀니지 지역의 해적으로 급성장하여 스페인 식민지였던 시칠리아를 자주 약탈하자, 카를 황제가 직접 해적 소탕작전을 벌여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팔레르모에 세운것이 바로 '포르타 누오바'이며, 이때 포로로 붙잡아 온 해적들을 실제 모델로 하여서 부조를 만들어 이곳을 드나드는 해적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의 500년 가까이 저렇게 몹쓸 해적의 표상으로 내걸려 있는 운명은 또 무슨 운명인고?
살아서도 거칠고 힘겹게 살다가 참혹하게 이승을 달리했건만........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차마 비통한 해적의 굴레여.........
팔레르모 도시 자체가 노르만 양식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라서 그런지, 포르타 누오바를 올려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노르만의 기독교양식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이슬람 건축양식의 전형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이런 느낌은 자연스럽게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코르도바 메스키타를 떠올리게 만든다.
현명한 군주였던 루제로 2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70년 동안 시칠리아를 정복한 바이킹의 후예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이슬람(아랍)의 잔재를 뿌리뽑는 일' 이었다. 이슬람의 손때가 묻은 건축물이며 문화유산을 부수거나 헐어내 버렸고 일상의 생활속에서도 이슬람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지워버렸다. 이 같은 일들이 70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팔레르모 뿐만이 아니라 시칠리아에서 더 이상은 이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화나 문명의 뿌리는 들판의 잡초 보다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털어내고 지워버리고 소멸시키려 애썼지만...... 지금 당장 저렇게 포르타 누오바만 바라보아도 이슬람 문화가 연상되거나 떠오르지 않는가?
영토를 확보한 후에 잘 정비된 제도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훌륭한 지도자가 등장하면 국가는 탄생한다. 하지만 이런 국가는 역사에서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다. 그정도로는 국가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제대로 된 국가는 그 위에 창의적이고 열린 의식과 함께 빛나는 문화를 덧입혀야만 제대로 된 국가라 할 수 있다. 영원한 국가를 추구하던 제국들은 모두가 눈부신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시대를 앞선 간 남다른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간직했던 이슬람(아랍인)들의 숨결까지 모두 털어낼 수는 아마도 없었던 모양이다. 시대를 살던세속의 문화는 빛나는 창과 칼을 든 군사력보다 훨씬 위대하다.
포르타 누오바 옆으로 나란히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웅장하고 위엄 가득 넘치는 건축물이 바로 팔레르모 통치자의 거처였던 '노르만 궁전'이다. 팔레르모 역사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노르만 궁전(Palazzo del Normanni)'은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한때 유럽인들에게서 '중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불리워 졌었다.
9세기 경에 아랍인들이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시칠리아의 거점도시로 건설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총독관저를 세운것이 시초였다. 11세기에 아랍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루제로 1세는 아랍 스타일의 총독관저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흔적까지 제거한 뒤에, 그 위에 노르만 양식의 궁전을 지었다. 규모는 어마어마했으나 완성도는 아주 미흡했던것으로 전해진다. 뒤를 이어 등극한 현군(賢君) 루제로 2세에 의하여 지금의 왕궁과 정원이 완성되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열린 사고와 철학을 가진 루제로 2세는 노르만 양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노르만 양식과 고대 그리이스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고루 스며들어 있다.
이런 특별한 체험은 궁전 안의 '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에서 절감해 볼 수 있다. 카펠라 팔라티나는 흔히 '경당' 이라고 부른다. 교회이기는 하나 특별히 왕 개인과 가족들만을 위해서 세운 작은 예배당이라 할 수 있겠다. 화려한 금색으로 온통 치장된 예배당은 눈부신 모자이크와와 아랍 스타일로 치장된 나무 천장등이 어루러져 그야말로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있는듯한 착각마져 일으킨다. 안쪽 벽면은 온통 구약을 소재로 하는 모자이크화로 가득 채워져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성경 대신 벽화로서 구약의 내용을 이해살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이 부시게 화려함 속에서도 역시 노르만과 그리이스와 아랍의 문화가 혼용되어 전혀 또다른 세계를 폎치고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수가 있다.
팔레르모를 차지하고 있는 세개의 토착민을 모두 포용하고자 하는 루제로 2세의 철학과 가치관을 엿볼수가 있는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널리 펼친 사람이다.
고대 그리이스 양식의 기둥에다 로마의 기둥머리 장식을 채택하고, 비잔틴의 모자이크화가 빛을 발하고, 코르도바나 알함브라 궁전 양식의 아랍식 아치형 기둥들을 과감하게 채택한 것이다.
거기에다 군데군데 기둥에 기록을 위해 셔겨넣은 문자와 문양에소 세가지 언어(라틴어. 그리이스어. 아랍어)를 골고루 사용하였다.
많은 여행자들과 건축가들은 이 빼어난 팔라티나 경당의 아름다움에 무척이나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런데 왠지 나는..........
작은 공간에 3개 문화가 골고루 어우러지는 눈이부시게 빼어난 조형미와 아름다움은 인정하지만........
'팔라티나 경당은 몬레알레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 예행연습으로 만들어 본 조금은 어설픈 짝퉁.......'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팔라티나 경당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은....... 영락없는 몬레알레 대성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 너무도 강하다. 거기에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에 있어서는 도저히 몬레알레 대성당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자 생각이다.(어디까지나 나만의 느낌, 나만의 생각)
하여 이쯤에서 '노르만 궁전'과 '팔라티나 경당'에 관해서는 덮어두고 한 발 물러나고자 한다.
말미에 '몬레알레 대성당' 이야기와 사진을 접하고 나면 혹....... 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팔레르모 올드시티의 남북을 관통하는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를 따라 도심의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얼마 가지 않아서 왼편으로 웅장하면서도 장엄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많은 문화유적과 관광명소가 팔레르모 올드시티에는 즐비하지만 가히 이곳을 팔레르모의 랜드마크라 칭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충분하게 있을 것이다.
'팔레르모 두오모(Cattedrale di Palermo)'는 이 역사적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현지인들은 '비아 빗토리아 에마뉴엘 대성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에겐 조금은 낯설은 팔레르모시의 수호성인인 '성녀 로잘리아'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산타 로잘리아는 병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로잘리아 성녀는 살아있는 동안에 수많은 병자와 궁휼한 사람들을 돕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녀의 생과 죽음은 잘 알려진것이 없다. 평생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며 병자를 돌보다가 어느날 어느 외진곳에서 혼자 사망한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창궐한 흑사병이 시칠리아에 만연하게되었고 팔레르모의 시민들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팔레르모 시민들은 대성당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한다. 한 신도의 꿈에 로잘리아 성녀가 나타났다. 인근의 바닷가에 가면 시체가 하나 떠내려왔을 것인데, 바로 자신의 유해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 유해를 들고 도시를 세바퀴 돌면 흑사병 치료에 효험이 있을것이며, 팔레르모를 암흑에서 구원해 줄것이라고 말했다. 신도는 사람들을 모아 바닷가로 향했고 정말로 그곳에서 유해를 한구 발견하게 되었다. 유해를 수습하여 팔레르모 도심을 세바퀴 도는 운구행렬이 시작되었다. 모든 시민들이 몰려나와 행렬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위세를 떨치던 흑사병이 팔레르모에서 물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을 실제 경험한 팔레르모 사람들은 로잘리아 성녀의 유해를 대성당에 안장시키고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적은 그 후로도 시칠리아 전역에서 극심한 질병이 발생할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대성당의 앞마당 가운데 로잘리아 성녀의 대리석 조각상이 놓여있다.
대성당이 들어서 있는 장소는 본래 공동묘지였다. 그 아래로 자연 지하동굴이 있어서 로마제국의 탄압을 피해 숨어들어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가던 성소였다.
디아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탄압에 팔레르모에서 첫번째 순교자가 이 장소에서 생겨났다. 하여 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신자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이 성스러운 장소에 교회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교회는 서기 444년 레오 교황이 시치리리아의 성직자에게 보내는 서신에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팔레르모 대성당의 시초는 이미 그 전에 첫번째 순교자를 기려 탄생했던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최고 전성기였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불세출의 명장 벨리사리오 장군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나서 팔레르모의 성지에 있던 교회를 증축하였지만 뒤이어 침략한 반달족에 의해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하여간 반달족은 몽골과 비슷하게 무조건 문명이란 문명은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7세기 초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에서 파견된 주교에 의하여 지하동굴 위로 커다란 사각형의 비잔틴 양식을 따른 교회가 역사적으로는 두번째로 새로 건축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잔틴 양식에 따른 그리이스 정교회 건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831년 시칠리아를 정복한 이슬람(아랍)은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을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로 대대적인 개조를 한다. 종교적인 신앙활동에는 별반 제재를 가하지 않아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급격하게 성장한 팔레르모에 당시 약 300개의 모스크가 들어섰다고 하니....... 어떤 규모의 교회였던지 제대로 살아남을 방도가 전무했을 것이다. 이슬람은 300여개의 모스크 중에서도 대성당 자리의 모스크를 가장 중요시 하게 되었다. 증축을 넘어서 실로 어마어마한 위용의 새로운 이슬람 사원이 생겨나게 된것이다.
팔레르모의 기독교인들은 신앙활동에는 제재를 받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그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어주는 구심점인 교회가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주교는 교황청에 새로운 교구의 설립을 요청했고 이내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비교적 팔레르모 도심에서 멀리떨어져 아랍인들의 관심과 접근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하여 북쪽의 산자락 중턱에 교회를 새롭게 짓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몬레알레 대성당'이다. 아랍의 지배기간 동안 몬레알레 성당은 팔레르모 대성당의 역활을 수행했다.
11세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한 시칠리아 왕국이 아랍을 몰아내고 나서 빼앗겼던 팔레르모 대성당의 위엄을 되찾고자 새롭게 증축에 나섰다. 그들은 변형되었던 아랍 양식을 철저하게 제거해 내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 위에 과거의 영광처럼 다시금 비잔틴 양식의 옷을 입히고자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와중에 정치적. 종교적 이유를 들어 어느날 갑자기 노르만 왕국(바이킹)이 시칠리아를 차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노르만은 대성당의 증축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대성당은 망가진채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노르만 왕조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다. 루제로 2세는 대대적인 대성당의 증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위대하고도 장엄한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훌륭한 대성당의 완공이야말로 새롭게 등장한 노르만 왕조의 정치적 입지를 만방에 알리고 굳건히 해줄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잔틴 양식의 토대 위에 화려하게 아랍 양식이 가미되었고, 그 위에 눈이 부시도록 휘앙찬란한 노르만 양식이 더하여 졌다.
학자들은 건축학적이나 문화사적 분야에 있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성이 혼재된 개성이 상실된 별볼일 없는 건축물이라고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외부에 비하자면 실내는 그 반대로 오히려 혼합된 이미지만 남겼을 뿐, 지극히 단촐하고 조악한 느낌마져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거부할 수없는 역사적 현실성 위에 지금의 모습으로 밖에 완성될 수 없는 비운의 견축물이라 친다면......... 굳이 학문적인 접근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을 나는 갖는다.
다소의 이질적인 느낌과 불혐화음의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손 쳐도...... 내게는 어떤 경건함이 저절로 생겨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와 장엄함을 갖춘 더없이 아름다운 건축물로만 다가서는 느낌이다.
팔레르모는 결코 유럽 문화의 변방이 아니었다. 혼합된 깔끔하지만은 않은 그들의 문화도 분명 주류였다.
프레드리히 2세가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팔레르모는 분명하게 유럽의 수도였다. 이런 사조는 그 후로 약 2세기 동안 북유럽의 바이킹 문화와 서유럽의 게르만 문화가 융합된채로 등장했던 것이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거듭거듭 복원과 증축과 개축을 진행해 오고 있다.
대성당의 지붕에 한번 올라가 보라.
사방으로 팔레르모의 전경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고........ 건축양식의 혼합이 너무 과하다느니 개성을 상실했느니...... 하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시선을 사방으로 돌려보자.
비잔틴과 이슬람과 노르만 양식의 혼재된 극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이토록 아름다운 교회를 당신은 또 어디에서 보았는가?'
두오모는 경사로와 계단을 통하여 예배당의 지붕에 오를 수 있음은 물론 돔과 채광창과 화환까지 오고갈 수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종탑과 아케이브와 여러 뾰족탑들과 육중하면서도 아름다운 기둥들과 쿠풀렛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한마디로 황홀하기까지 하다고 말하겠다. 타시라비체 압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하학적인 다양한 문양에서 이슬람 건축 장식미의 정수를 느껴볼 수 있다. 건축학적 정통성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고....... '최고의 건축이란 이런것이구나'를 제대로 실감해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소이다.
팔레르모 도심의 파노라마 전망이 꿈결처럼 펼쳐지고 황금분지의 스카이 라인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저만치 팔레르모 항구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져있는 테레니아해의 수평선을 바라보자.
11세기 유럽의 중심이었던 중세의 대도시 팔레르모가 당신의 발아래 펼쳐져 있다.
두오모의 지붕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의 왼편으로는 가림막이 설치되어 통제되고 있으며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지붕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관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주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 두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나왔다. 그곳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최초의 근대인'으로 추앙받던 프리드리히 2세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프리드리히의 뒷쪽으로는 노르만 궁전을 지었던 노르만 왕조의 현군 루제로 2세가 잠들어 있다.
시칠리아를 이야기하고 팔레르모를 여행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를 빼놓을 수는 결단코 없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군주였다.
또한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프리드리히 2세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빼놓을 수도 없다.
시칠리아는 유럽 기사단의 전진기지이면서 십자군 전쟁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린곳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프리드리히 2세의 가문은 두차레에 걸친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유일무이한 기록을 간직한 아주 특별한 가문이기도 하다.
역사는 (십자군 전쟁)을 보는 관점에 따라 7차 또는 8차에 걸친 원정이었다고 본다. 그중에서 처음 시작이었던 1차 십자군 원정대만이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가 다시 빼앗겼으며, 이후로의 모든 원정은 실패로 끝낱다고 정의내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였을까? 성지 수복은 단 한차례 뿐이었을까?
드러난 역사가 모두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여 이제....... 적어도 내가 아는 십자군 원정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를 통해서 재조명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물론 이전의 팔레르모 여행기에서도 같은 내용을 피력한 적이 있다)
'십자군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의 절대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교도로 부터 수복하기 위하여 벌어진 위대한 성전' 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말로 그런 이유였을까?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적어도 내가 그때의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피력하는데 하루 정도의 시간을 할애애 줄 수 있는냐고 되물어 볼 것이다. 짧은 시간에 모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당연하게 나는 거절할 것이다. 도저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이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사명을 정당성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은 내부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교권과 황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이야기 하고 싶다. 그것이 진실이니까......
이제부터 나는 팔레르모와 프리드리히 2세에 관한 여행기를 쓰면서, 부득이하게 십자군 전쟁에 관해서 짧게나마 요약을 해서 부연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11세기의 유럽은 한마디로 '우물안 개구리의 처지'에 지나지 않았다.
신이 선택하고 축복내려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바로 유럽의 기독교 왕국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교회(교황과 성직자)는 타락하고 부패했다. 교회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교회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유럽을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럽 사회는 변방의 빈민가에 자나지 않았다.
유럽의 기독교 왕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위산간의 오지에서 유목생활이나 사막의 오아시스에 겨우 무리지어 붙어 살면서 유랑생활을 하는 동방(오리엔탈)은 야만인이자 저주받은 이교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유럽의 기독교 왕국이 오늘날의 개발도상국이라면 오리엔탈은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었다.
서구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나 문명의 뿌리를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에 두고 있으며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11세기 이후를 돌아보면 유럽 사회의 어디에도 그리이스나 로마는 없다. 오로지 오역되고 그럴싸하게 미화된 기독교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독교는 오로지 교회(교황과 성직자)만을 위한 종교였다. 그나마 그리이스의 건축은 그런데로 받아들여져서 로마의 신전으로 계승되었고, 기독교 공인 후 수많은 대형 교회들이 들어서는데 있어서 어느정도 계승 내지는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더하여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이 로마시대에도 건물과 광장을 치장하기 위하여 나름 이어져 내려왔다.
이렇게 지극히 단편적인 특정 분야에는 필요에 의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사실이지만, 기실 문화나 문명이라는 것은 외적인 것보다 내부적인, 정신적인 분야가 보다 근본적으로 중요시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이스 초기 로마의 그 어떤 철학이나 수학. 인문학. 문학. 천문학. 의학도 11세기 이후의 중세 기독교 왕국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은 오로지 하나, 교회가 주장하고 이끌어가는 제마음대로식의 '신학'만이 유일한 학문이었다.(그들의 현실은 실제론 개발도상국 수준이었다)
하지만 소아시아 지역의 동방 사람들(아라바인. 이슬람교)은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가 지중해를 건너 리베리아반도의 스페인 땅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과거의 찬란했던 놀라운 문화와 문명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아랍인들은 그제서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도 만났고 탈레스도 만났다. 그들은 그것들을 고스란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지고 와서 아랍어로 번역을 하고 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거기에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천문학과 연금술학을 접목시키고, 더 나아가 인더스 문명을 가져다가 융합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멀고먼 극동(중국)의 문명과 문물을 받아들여서........ 급기야는 종이와 화약을 유럽보다 훨씬 앞서서 사용하는 선진국 반열에 이미 올라 서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의 기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남긴 기록을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유럽은 아직도 판자집에 살면서 겨울을 두려워하고 있는 처지였는데, 아랍은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에서 중앙 난방을 하면서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11세기 교회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성직자들이 결혼을 넘어서 간통과 간음과 강간을 일삼기도 했으며, 성직을 사고 팔기도 하였다. 이는 과거의 교회(교황)가 성직자들에게 '무오류성' 이라는 절대적 신성을 부여하면서 생겨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성직자 내지는 성직은 절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는 모든것은 신을 대신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부여해 준 권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성직(자)의 무오류성'은 수많은 페단과 타락과 부패를 낳게 되었다.
교황은 신성(神聖)의 갑옷으로 중무장한 세속의 왕이나 황제와 다를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 교황(교회)에게 아주 특별한 (서임권)이라는 핵무기가 있었다. 성직자의 권리와 생활이 왕이나 봉건영주에 배해 못할것이 전혀 없던 시대에, 마음대로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이 교황(교회)에게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돈을 받고 성직을 매매했다. 큰 돈이 필요하면 많은 성직자를 임명하는것으로 대신했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뻔한 결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기독교 세상은 *판이 되어버렸다.
지각있는 세속의 군주들이 부패한 로마 카톨릭(교황)에 반기를 들었다. 서임권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역사는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의 대립' 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무소불위의 교황 권력에 가장 앞장서서 당당하게 맞선 사람은 유럽 최상위의 군주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였다. 하인리히는 세속의 군주들과 영주들을 모아서 교황의 무제한 서임권 행사는 부당하다고 제재할 것을 선언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즉각 하인리히 4세를 기독교 명부에서 지워버리는 파문을 단행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카톨릭을 정벌하겠다고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하지만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모든 세속의 군주와 영주들이 발뺌을 하면서 합세하지를 않았다. 종교적 파문이라는 것이 당시로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처벌이었던 것이며, 이면에는 교황의 노련한 정치적 수완을 펼쳤던 때문이다.
패배한 하인리히 4세는 엄동설한에 눈보라속을 무릎으로 기어가서 3일동안을 교황에게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다. 황권이 교권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제 세상을 다스리는 세속의 군주들 위에 절대적이며 유일한 교황의 새로운 권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 세상의 그 어떤것도, 누구도 교황을 막아서거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신의 경지에까지 막강한 권한과 지위를 획득한 교황은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남을 의식할 이유가 모두 사라졌다.
결론은 더한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이런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카놋사의 굴욕을 당한 하인리히 4세였다. 4년이 지나자 온 세상이 일제히 교황(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원성이 놓아져만 갔다. 때를 놓치지않고 하인리히 4세가 다시 들고 일어났다. 4년전과는 분명하게 모든면에서 달라져 있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그는 군대를 몰고 로마로 쳐들어 갔다.
교황은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하인리히의 수석 무장이 칼을 들고 예배당에 난입했다. 그리고는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교황의 뺨을 때리고 널부러진 교황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복수였다.
이번엔 황권이 승리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교황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는 오래지 않아 쫓겨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페위시켜 버리고 새로운 교황을 선임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또한 그토록 유명한 <아비뇽 유수> 사건이다.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이렇게 처절했던 '황권과 교권'의 끊임없는 마찰과 대립과 투쟁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급성장한 이슬람의 한 세력이었던 셀주크 투르크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어찌되었건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카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라는 3대 종파의 절대 성지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절대로 유럽이 아닌 소아시아 지역이라는 멀고도 먼 변방에 놓여있는...... 당시의 유럽 기독교인들 관심 밖에 나있는 별 볼일 없는 성지'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제국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니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팔레스타인 출신이어서, 그 이후로 성지 순례가 유럽의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로망이었다고는 하나, 당시 유럽에서 예루살렘을 오가는 성지순레는 2년 가까이의 시간과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행이었을 것이다.
11세기에도 성지 순례의 행렬은 꾸준히 이어졌다. 지중해의 풍랑으로 배가 파손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육로를 택한 멀고먼 여정에서 과로나 질병이나 간혹은 해적이나 마적들에 의한 피해도 발생했다.
셀주크 누르크의 예루살렘 점령은 유럽사람들이나 교황에게 있어서 커다란 화제꺼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그저 유명무실한 성지라는 명분이 있을 뿐, 그 멀고먼 소아시아 지역의 전혀 필요나 가치가 없는 불모지와 다름없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고있는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위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성장하고 있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세 앞에서 겨우 콘스탄티노플 하나로 명맥만을 유지하는 비잔틴으로서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잔틴은 교황 우루마노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여기에서의 구원은 군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교황은 단호히 거절했다. 멀고 먼 동방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유럽 영토안의 세속의 군주들을 어떻게하면 굴복시킬까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비잔틴 황제는 유럽 각지에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는 성지 순례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해 버렸다. 우리는 모두 힘을 합해서 이교도를 물리치고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신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라고 소문을 퍼트렸는데, 이 파장이 너무나 크게 발전해 나갔다.
이 사태때문에 결국 교황 우르마노스 2세는 '십자군 원정대'를 파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교황에게는 다른 깊은 속셈이 있었다.
교권과 황권이 극렬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십자군 원정'을 빌미로 강력한 라이벌인 유럽의 세속의 군주들과 군대를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으로 파병시키고나면 한동안 유럽은 그야말로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죄지우지 할 수 있게되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보다 확고하게 안정시킬 수 있겠다는 밑그림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가막히게 놀라운 발상이었다. 일거양득이며 일석이조이며 일타쌍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세속의 군주들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교황의 계책을 눈치챘던 것이다.
'성지 회복과 순례자 보호'라는 교황이 내세운 명분에 대해.......'누구 좋으라고, 당신을 어떻게 믿고' 라고 응수를 한 것이다.
첫번째 심자군 원정대는 꾸려졌지만, 단 한명의 군주도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기사들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상인들과 감옥에서 벗어나고픈 죄인들과, 거기에다 모두가 공히 원정대 참여의 댓가로 교황에게 약속받은 (면죄부)를 얻기 위하여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질적이며 지위와 명예를 가진 진정한 지도자가 부재한 군대가 꾸려진 것이다. 교황은 땅을치며 분노했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다소 엉성하게 짜맞추다시피 한 1차 원정대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당시 이슬람은 부족들간의 대립과 마찰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급성장하던 셀주크 투르크가 하루아침에 멸망해 벼렸고, 예루살렘은 어정쩡한 상태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어부지리 비슷하게 어찌되었던 '성지를 회복' 했다.
출발 당시 성지를 회복하면 비잔틴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었고, 교황은 만약 수복을 하게되면 예루살렘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두고 싶다고 밀명을 내렸었지만....... 아뿔싸. 1차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었던 기사들이 냅다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저들끼리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비잔틴도 교황도 땅을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분노에 치를 떨던 교황은 서둘러 2차 십자군 원정대를 선포했다. 이번 원정의 이유는 이교도가 대상이 아니라 '파문 시켜버린 1차 십자군을 정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모집하겠다고 선포하였으니......... 이 웃기지도 않는 시츄에이션들이 버젓한 기독교 역사라니........ 암튼 (예루살렘 왕국은 80년 이상 지속한다)
어이없게 무단 침입한 유럽의 기독교 군대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슬람은 뿔뿔히 흩어졌던 부족들을 하나로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전열이 정비되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서 이번엔 이슬람이 전쟁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왜냐면 기독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부족간의 다툼과 싸움이 후방에서 언제나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하는 영웅이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이집트를 기반으로 전 이스람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이쯤되자 위기에 봉착한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교황도 속셈을 숨긴 채 2차 십자군 원정대를 파병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유럽 본토에서 너무나 먼곳이었기에 지속적인 원활한 지원이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살라딘에 의해서 하나로 뭉쳐진 이슬람은 너무도 강해져 있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교도인 야만인들에게 기독교의 정예군대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저들이 어느때 유럽의 본토로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교황은 최고로 막강한 군대를 구성해서 적군인 살라딘의 이슬람을 완전히 궤멸 시키고 에루살렘을 다시 해방 시키겠노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제 3차 십자군 원정대'를 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시칠리아와 프리드리히 2세의 할아버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에겐 '용맹무쌍한 용사'나 '영웅'에 대한 선망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것 같다. 서구사회의 남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경향이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런 결과로 '아더왕 이야기'나 '롤랑의 노래'나 '아이반호'와 '로빈훗' 같은 영웅담들이 시공을 초월하며 오늘날에까지 뜨겁게 사랑받는 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서구 정신세계의 시초라 할 수있는 호머의 <일리어드>에 등장하는 불세출의 영웅 '아킬레스'에 대한 선망의식과 컴플레스의 발로라고 보는 시각이다.
'신들의 세계에 올라서 영원한 삶을 영유하기보다,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지언정 전대미문의 용맹을 떨치고 높아진 명성을 세상에 남기길 선택했던 불세출의 영웅'에 대한 존경과 시기심에서 파생된 남자들의 심리가 저렇게 수많은 무용담들을 쫓아 즐기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서구의 무용담 중에는 '붉은수염'으로 알려진 '바르바로사'의 전설같은 많은 이야기들이 서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있다. 바르바로사는 실존인물임에서 수많은 전설같은 무용담이 전해내려오는 것을 보자면, 얼핏 우리나라의 '암행어사 박문수'가 떠오른다.
'붉은 수염의 기사'로 알려진 바르바로사는 실존 인물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를 가리킨다.
붉은 수염을 휘날리면 전쟁터를 휩쓴 바르바로사가 명망이 높은 기사임에는 분명하지만, 기실은 그의 용맹과 업적이 너무나 과하게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그의 라이벌은 '하인리히 사자공'이었는데, 진실로 용맹하면서 훌륭한 사람은 바르바로사가 아니라 사자공이었다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사자공은 어디까지나 바르바로사 황제의 아랫계급인 영주 지위의 인물이었다. 오랜세월 두사람 사이에는 정적으로서의 다툼과 치졸한 싸움까지가 이어졌는데, 종국에 역사는 최고 지위의 황제였던 바르바로사의 손을 들어주어서 사자공의 위용과 업적까지도 모두 바로바로사의 몫으로 넘겨 치장하는데 쓰여졌다고 한다. 결과로 사자공을 치졸한 비겁쟁이 정도의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학계는 실제로는 두 사람의 역활과 업적이 뒤바뀌었다고 평가한다.
독일 왕국의 군주였던 바르바로사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시칠리아에 바이킹의 후예들이 세웠던 노르만 왕국이 2대(루제로 1세. 루제로 2세) 만에 남자 후계자가 없어서 대가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노르만 왕국은 유럽의 수많은 왕조들과 혼맥을 통해 동맹을 맺어왔는데, 후사가 없어 대가 끊기게 되자 그간은 혼인동맹을 통한 여러 후예들이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루제로 2세는 독일의 호엔슈타호펜 가문과도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는데, 그 호엔슈타호펜 가문의 수장이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지위와 혼인동맹을 앞세워 시칠리아의 통치권을 요구했다. 그러자 감히 그 누구도 그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으며, 끝내는 교황도 이를 승인했다.
프리드리히 1세 자신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독일을 근거지로 유럽을 통치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교황에게 대적해야만 하였기에 부득이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보내 통치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이슬람의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황은 서둘러 '제 3차 십자군 원정대'를 꾸렸다.
그 이면에는 처음의 십자군 원정대때 처럼 '교권과 황권'의 다툼속에서 세속의 군주들과 영주들과 그들의 군대를 가능하면 많이 선발하여 멀고먼 소아시아로 떠나보내고, 군사적 위험이 줄어든 틈새를 이용해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보다 굳건하게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 감추어져 있었다. 여기에 분명하게 교황의 표적으로 등장한것이 바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였다. 시칠리아를 원하는 그의 청을 교황이 들어준 바가 있었으며, 보잘것 없는 그의 아들을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해준데 대하여 무언의 보답을 요구한 것이다.
바르바로사로서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운 교황의 요청을 더 이상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하여 마침내 '제 3차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직'을 수락하였다. 정신적 군주 교황이 세속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1세에게 직함을 내려 임명하였던 것이다. 교권이 황권에 비해 우월한 지위라는 것이 비로소 교황의 바램과 속셈대로 이루어져 증명된 것이다.
유럽 최고 권위의 세속군주가 '성지 탈환'의 임무를 띤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렇게되자 수많은 군주들과 영주들과 기사들로써도 더는 내세울 명분이 없어졌다. 군주와 영주들과 기사들이 속속들이 십자군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전대미문의 군주들이 나서서 직접 이끄는 최강의 기독교 유럽연합군이 형성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명분과 바르바로사의 용맹이 수많은 군대를 몰려들게끔 만들었다.
바르바로사는 위풍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독일을 출발했다.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지원자들이 속속 행렬에 합류했다.
처음으로 군주들에 의해 조직을 정비하고 규율을 갖추고 엄격하게 훈련된 군사들이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발칸반도를 거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평원을 지나 소아시아 지역으로 진군했다.
이들을 지원 할 무기와 식량과 군수물자와 지원에 나설 해군이 메시나 해협과 시칠리아를 가득 채우고 남았다. 시칠리아는 십자군 원정기간 내내 원정대의 가장 중요한 병참기지이자 해군기지였던 셈이다.
이슬람을 하나로 통일한 술탄 살라딘은 3차 십자군의 이동정보를 낱낱히 살피면서 전 아랍지역에 군사 총동원령을 내렸다. 바야흐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최정예 군대가 전력을 갖추고 제대로 한판 전쟁을 벌이게 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전과는 너무도 판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본격적인 거대한 동서 문명의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 극단의 상황에서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고 만다.
발칸반도를 지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평원을 지나 비로소 본격적인 소아시아지역의 침공에 나선 십자군 원정대가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에 총사령관이자 유럽의 위대한 기사였던 바르바로사(프리드리히 1세)가 말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대는 크게 동요했고 진군은 멈추어졌다. 바르바로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원정대의 존망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것이다.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고 진군은 멈추어졌다. 그저 교황청으로 급보를 알렸으며....... 이제 그들은 교황의 다음 지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교황과 유럽 사회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수년 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군대가 6개월 이상의 행군을 한 끝에 이제 막 적진인 소아시아 지역에 발걸음은 내딛기 시작하였는데...... 총사령관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니........ 3차 원정을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뻔한 결과를 내다보면서 그대로 진격을 명할 것인가?
이쯤에서 원정을 멈추거나 포기할 수는 결단코 없었다. 이는 교황에게 아주 오랫동안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교황의 권력이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것이라는 예측을 충분히 가능케 했다.
대안이 제시 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계속 추진되어야만 하며,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총사령관을 뽑아서 진군을 계속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단, 거기에는 새로운 총사령관이 타계한 바르바로사 보다 더 뛰어나고 명망있는 후임자여만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교황과 교회는 자신들의 안위를 넘어서 사활을 걸고 온 유럽을 뒤져서 마침내 바르바로사를 능가하는 위대한 용사이자 지도자를 찾아냈다.
유럽 사람들은 그 뛰어난 지도자를 '라이언 하트(사자의 심장을 가진 용사)'로 기억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 1세'가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배를 타고 밤낮으로 항해한 그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달려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좌절에 빠져있던 십자군 원정대에 합류한다. 하루아침에 원정대는 바르바로사의 지휘때보다 훨씬 사기가 충만한 십자군으로 탈바꿈 되었다. 그만큼 리차드 1세의 명망이 대단했던 것이다. 사자왕의 지휘하에서라면 살라딘의 이슬람군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항상 가장 앞장서서 싸웠으며 패한적이 없는 위대한 용사였다.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병사들을 버리지 않는 진정한 군주였다.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군주인 살라딘 술탄과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영웅 사자왕 리차드 1세가 예루살렘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이들의 싸움은 하나하나 모두가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리차드는 질서가 잡히고 보급이 원활해진 체계화된 군사력을 앞세워 정공법을 택해 예루살렘으로 돌진했다. 살라딘은 적의 후방을 공격해 보급로를 끊는 작전에 주력하면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수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양측은 커다란 피해와 손실을 거듭해야만 했다. 막상막하 혹은 용호상박이라는 한자성어는 이 당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의 진격은 다소 무모할 정도로 목숨을 내건 초강수였다. 이슬람은 시간을 끄는 지연작전으로 전환하면서 전 아랍지역에 추가적인 군사력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서 유럽은........ 기독교 세력은 점차 보급이 줄어들더니 추가적인 군사력 지원에 깜깜 무소식이 되었다.
아마도 '성지 탈환'이 진정한 목적이었다면 온 유럽이 하나로 나서서 이 시기에 절대적인 보급과 군사적 지원이 뒤따랐어야만 했다. 다시는 이들만큼 용감하고 사명감에 불탔던 십자군을 볼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제대로 된 지원이 원활하여 예루살렘을 되찾고,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유럽 본토와 예루살렘 사이 인근의 지역에 보다 안정적인 세력권을 형성했었더라면....... 소아시아와 유럽의 역사는 오늘날과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성지 탈환'의 미명아래 세속의 군주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군대를 소아시아로 보내면서도........ 교황의 목적은 '유럽 영토안에 세속의 군주들이 가진 군사력과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줄여 공백 상태를 만들 목적'이 속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교황은........ 십자군이 모두 소아시아 지역에 영원히 발이 묶여있던가, 소멸되기를 원했을 것이라 보인다.
'적들은 규합되어서 벌떼처럼 몰려드는데........ 교황과 유럽은 십자군 원정대를 버렸다.'
사자왕은 끝까지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마침내 예루살렘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단 하루면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집결한 이슬람 군대가 이삼일이면 예루살렘은 물론 이 일대를 모두 포위할 수 있을만큼 막강한 위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살라딘과 사자왕이 모처에서 은밀하게 만났다.
살라딘 - 교황과 교회는 당신들을 버렸습니다. 물자는 바닦이 났고 오래 전에 보급은 이미 끊어졌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원군도 오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군주이자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쯤이면...... 당신만을 바라보면서 여기까지 온 얼마 남지않은 당신의 군사들도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모두 이곳에서 죽이시겠습니까?
사자왕 -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술탄에게도 우리의 공격을 막아 낼 능력이 없지를 않습니까? 술탄의 지원군은 며칠 뒤에나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면 우리는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살라딘 - 어질고 위대한 용사인 사자왕이시여.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따른 많은 병사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이 저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것은 오로지 죽음 뿐입니다. 그것이 교황과 교회가 약속한것처럼 성스럽고 자랑스러운 죽음이 결코 아니라는것을 왕께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알라신의 뜻도 저의 바램도 결코 아닙니다. 오만하고 타락한 교황과 교회의 그릇된 망상과 욕심의 결과입니다. 저들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것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술탄인 저로서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자왕이시여. 저들은 이미 충분하게 용맹을 증명하였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부디 이쯤에서 멈추시고 돌아가십시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저들의 목숨을 마지막 한명까지 끝끝내 이곳에다 버리시겠습니까? 누구의 뜻입니까? 저들의 죽음이 진정 당신의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교황과 교회의 그릇된 욕망과 판단의 결과겠습니까?
사자왕 -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신 용사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를 뿐입니다. 술탄의 크신 배려와 우려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전장에서 뵙지요...........
살라딘 - 예루살렘...... 예루살렘....... 예루살렘.......... 당신과 군사들에겐 정녕 예루살렘이 이 세상의 모든것 이라 생각하십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게만 된다면 모든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녕 사자왕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그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내일 예루살렘성으로 진격하시는 동안에 누구도 앞을 가로막지 않을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문도 열려있을 것입니다. 성 안에 저의 군대는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당신의 것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지켜볼 것입니다. 당신들이 예루살렘성 안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 볼 것입니다. 저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만 입니다. 저의 군대가 도착하면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전투가 아닌 참혹한 토벌전이 벌어지게 될것입니다. 성은 함락될때 까지 공격을 받게될 것이며, 함락된다면 성 안에는 그 어떤 생명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그것들이 당신들을 여기에 보낸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라면 기꺼이 그러하게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사자왕 - 술탄께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승리를 장담하시는 군요? 당신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살라딘 - 위대한 사자왕께서는 지금 '피해'를 말씀하시고, 저는 지금 '몰살'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 께서는 당장이라도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이나 하루 이틀이겠지요. 하지만 결코 예루살렘을 지켜내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 순간이나 하루 이틀에 밖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모두 거셔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교황청에서 보자면 너무나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의 변방입니다. 이 작은 도시 하나가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만큼 그렇게 중요하다면....... 차라리 이렇게 군대가 아닌......... 교황 본인 스스로가 보따리를 싸서 이곳으로 와서 여기에 살라고 하세요. 모든것을 고스란히 내어드린다 해도 교황은 결코이 멀고 먼 변방의 예루살렘까지 와서 살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위대한 왕께서도 이미 잘 아시고 계실것입니다. 그렇게 말로만 내세우는 교황의 성지가 당신 군대의 목숨보다 고귀한 것일까요?
그날 밤 사자왕은 본국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게된다.
필립왕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략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자왕의 분노는 하늘끝가지 치솟아 올랐다.
서신의 막바지에 적혀있는, 프랑스 침공의 부당함을 로마의 교황에게 알렸음에도 교황이 이를 묵인해주고 있는듯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글귀에서 사자왕은 절규했다.
애초 필립 프랑스왕은 군대를 이끌고 3차 십자군 원정대에 직접 참여했었다. 바르바로사는 필립왕을 최측근 참모로 임명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대가 발칸반도에 들어서면서 필립왕은 자신의 건강상의 이유와 왕실의 문제들을 이유들어서 갑자기 원정대에서 빠져나갔다. 함께 온 자신의 군대는 고스란히 남겨둔채 자신만 고국 프랑스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프랑스 군대는 그의 최정예 군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최정에 군대는 고스란히 파리 인근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바르바로사 황제가 이끄는 원정대에 유럽의 그 어느 국가도 섣불리 빠지거나 반대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모두가 앞장서서 참가를 했다. 하지만 유독 잔머리가 뛰어났던 필립은 이 상황을 하나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항상 영국의 위세에 눌려 이류국가의 왕이었던 자신을 이 기회에 영국을 앞도하는 유럽의 최강국을 만들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하여서 처음에는 가장 앞장서서 적극적이었던 십자군 원정대에서 슬며시 중간에 빠져나왔다. 거기에 영국의 수호신인 사자왕이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어 징발된 것이다. 그의 동생인 존 왕은 결코 필립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필립은 3차 십자군이 에루살렘 원정 여정에서 이슬람에 발목이 잡혀 자연 소멸되던가, 사장왕이 전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국으로 돌아와 군대를 정비하고 약성하기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서너달째 보급이 끊긴 십자군은 에루살렘을 목전에 두고 고사 위기에 직면했다. 더구나 전쟁을 끝내고자하는 이슬람의 후원군이 대대적으로 모여들어 십자군을 포위 고사시키는 작적에 돌입했다.
천우신조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필립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진격했다.
다음날 아침....... 사자왕은 모여든 십자군 원정대 앞에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위대한 용사들이여. 그대들의 헌신과 용맹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 시각부터 우리는 퇴각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여러분의 등 뒤로 떠오르는 태양이 서산너머로 지기전에 우리는 예루살렘을 탈활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내일 해가 질때까지 예루살렘을 사수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 나에게는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보다........ 이 순간까지 나를 믿고 따라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하여........ 나는 결정했다. 우리는 퇴각하여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에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나의 지도력이 부족하여 내린 결정일 뿐........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했고 당당했다. 비난과 책임은 모두 나의 몫이다. 교회의 파문도 감수할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돌아가는 길에 더는 단 한명의 생명도 잃지않도록 하는것 뿐이다. 여러분 모두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고픈 마음 뿐이다. 모든것은 나의 몫이며 나의 책임이다. 그간의 노고와 헌신에 감사한다.'
제 3차 십자군 원정은 끝이났다.
사자왕에 대한 살라딘의 존경과 배려는 실로 엄청났다.
십자군의 퇴로와 안전이 보장되었다. 살라딘의 군대가 철수하는 십자군을 호위하였다. 소아시아 지역의 누구라도 십자군을 따라 유럽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았다. 수많은 인파가 긴 행렬을 이루며 철수하는 십자군을 따랐다. 살라딘은 전사한 십자군의 장례를 도와주었다. 전사한 군인의 가족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제공하고 안전을 배려했다.
사자왕과 살라딘은 작별 인사로 '몇 년 후에 다시 전장에서 만나 멋진 한판 전투를 벌여보자' 약속하며 헤어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십자군 철군 소식을 접하고 기절초풍할 사람들이 유럽 본토에는 서넛이나 있었다.
첫번째는 교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황으로서는 십자군 원정대가 이슬람 군대에 의해서 깔끔하게(?) 몰살되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최소한 사자왕이 전사 정도는 해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숱한 고난의 원정길에서 전설같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의 목전까지 진격했던 불세출의 영웅 사자왕이 여전히 용맹스런 멀쩡한 군대를 데리고 유럽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교황과 교회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느닷없이 사자왕이 교황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봉기한다면 그를 추앙하는 수없이 많은 유럽의 기사와 군대가 동참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곧 재앙이었다.
다음은 필립 프랑스왕이었다. 치사한 노림수로 사자왕이 없는 틈을 타서 노르망디 지역과 잉글랜드 본토를 노렸었는데...... 그가 건재하다 못해 전 유럽의 영웅이 되어서 돌아온 다는 것이다. 그 도한 재앙이었다.
그 다음은 잉글랜드의 존 왕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인 형의 그늘에 가려서 늘 부족하고 망나니고 포악한 왕자에서 한동안 왕노릇을 즐겼었는데 이제 다시 형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사자왕 리챠드의 아우라가 너무나 컸던지라........ 어제까지 죽네 사네 싸웠던 프랑스의 필립과 잉글랜드이 존왕은 남몰래 서둘러 동맹을 맺는다. '우리는 사자왕의 귀환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는다'라는 동맹이었다.
결국 사자왕은 이 파렴치한 동맹으로 인해서 죽게 된다.
교황은 사자왕을 기독교에서 파문시켜 버린다. 그의 모든 지위도 박탈한다. 소수의 근위병만 대동하고 유럽을 관통하여 멀고 먼 고향 잉글랜드로 향한다. 동생인 존왕은 형의 귀국을 방해하고, 기다렸던 필립왕의 프랑스 군대가 이들을 습격한다. 사자왕은 붙잡혀서 오스트리아의 한적한 고성에 갖힌다. 교황의 묵인하에 사자왕이 십자군에서 귀국하던 중에 행방불명되었다고 불명예 전사처리된다.
이 대목에서 '기사문학'인 '흑기사 아이반호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자왕은 탈출에 성공한다. 자신을 추앙하는 군사들을 모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자신의 영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지만, 본토인 잉글랜드 존와의 외면 속에 프랑스로 진군하던 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간병기'로 꼽히던 사자왕 리챠드 1세가 숨을 거둔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꼽히는 술탄 '살라딘'도 갑자기 사망한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슬람 제국도 사분오열되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결국 사자왕과 살라딘의 리턴 매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붉은 수염)가 3차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고 소아시아지역으로 진격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십자군 총사령관은 사자왕으로 대체되지만, 교황의 막강한 권위에 맞서던 진정한 반대세력인 절대적인 세속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된것이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호엔슈타우펜' 이라는 절대적인 가문의 위상은 결국 바르바로사의 아들인 시칠리아왕 '하인리히 6세'를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인리히 6세의 가치관과 능력에 있었다. 그는 감히 나서서 교황의 폭정에 대항할 꿈조차 꾸지 못하는 서생이었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세속군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조상님의 은덕으로 시칠리아 왕이나 하면서 평안하게 살면 될 그릇의 사람이었다. 업적도 없이 업무에 치어살다가 오래지 않아서 죽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였을 당시 황세자의 나이가 겨우 3살이었다.
결국 황제의 지위는 삼촌(바르바로사의 작은 아들) 필립에게 돌아갔는데, 그의 성정이 불 같았고 잘 참지를 못하였는데...... 조카에게만은 유별나도록 많은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세속 군주의 영향력을 너무 강력하게만 추구하였던 때문인지, 교황의 사주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다음 황제는 교황의 공작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정적인 벨프 가문에서 오토 4세를 황제로 세웠다. 그런데 이 오토 4세는 너무도 심할만큼 죽자사자 '교황바라기' 일색이었다. 그 페단이 얼마나 컸는지 유럽의 세속군주연합에서 회의를 통해 오토 4세를 폐위시켜 버렸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통성은 다시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 되돌아 갔다.
바르바로사의 손자이자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이 어느새 성장한 것이다. 그가 바로 '프리드리히 2세'이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아닌 삼촌의 성정을 엎그레이드 해서 제위에 올랐다. 그는 논리와 경험을 대단히 중요시 했다. 대부분의 일을 황제의 권으로 내리 누르는 것이 아니라 끝장 토론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고 복종하게 만들었다. 대단히 사려깊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시칠리아를 떠나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시칠리아를 사랑했다. 드넓은 유럽을 통치하면서도 시칠리아에 머물면서 사신이나 특사나 친서를 통해 최고 세속군주의 위엄을 드러냈다. 교황(교회)으로서는 최고의 정적을 맞이한 것이다. 회유와 협박과 암살 위협이 뒤따랐지만 황제는 언제나 여유롭고 침착했고 논리적이면서 비판적이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지난 않았지만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논리를 바탕으로 한, 교황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비젼을 요구했다. 교황과 교회로서는 한마디로 미치고 가무라칠 지경이 된것이다.
전 유럽이 교황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안수기도를 바랬지만, 그 이면으로는 프리드리히 황제를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것이 실질적인 유럽의 현실이었다. 유럽을 재배하는 핵심은 로마의 바티칸이 아니라 변방인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였던 것이다.
교황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제 4차 십자군 원정대' 파견을 결의하고 총사령관에 프리드리히 2세를 임명했다. 하지만 시국과 정세에도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결정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교황은 그를 기독교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중세 시대에 교게에서 파문이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는 죽음 보다도 더 가혹한 처형이었다. 파문은 곧 이교도나 짐승이란 의미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대구조차 하지 않았다. 파문이 되었건 아니건 교황의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것이다. 모든 유럽인들에게 그는 그만큼 존경과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제 4차 십자군 원정대는 베네치아 공화국(엔리코 단돌로)에 의해서 계획되고 주도하에 실행된다. 전대미문의 치욕스런 기독교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시키며 십자군은 아군인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고 약탈하게 된다.(성스러워야 할 십자군 전쟁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치졸하고 야만적이고 추악한 범죄행위 였다)
결국 실패로 끝난 4차 십자군 전쟁은 유럽 기독교와 교황의 추악한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었고 이는 곧 교황권의 추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오만하고 추악한 집단(교황과 교회)는 이를 만회하겠다고 또다시 5차 십자군 원정대를 선발한다.
이번에도 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끌어들인다. 아마도 교황의 속내에는 프리드리히 2세도 앞선 사자왕의 경우처럼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주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프리드리히는 이번에도 거절한다. 교황은 또 그를 파문 시킨다. 이런 사태가 몇번이고 반복된다. 거기에 유럽 내에 벌어진 여러가지 정세에 맞물려 끝내는 프리드리히가 원정대의 총사령관을 수락하게 된다.
교황은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자신의 생각이 관철된 것이다. 더하자면 다시금 교황의 권위가 황제의 권이를 누른것이다.
드러난 현실은 그러했지만........ 프리드리히의 생각은 전혀 다른곳에 이미 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별명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근대인' 이다. 그는 중세에 살고 있었지만 그이 사고와 판단과 가치관은 이미 오늘날의 현대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온 유럽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에 그는 자신의 궁전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학자와 기술자 등의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국제정세에 관하여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씽크 탱크'를 이미 가동하였다는 말이다. 그는 교황청과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제후들의 동향을 넘어서,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지역의 이슬람의 정치와 경제와 군사와 환경적인 면까지를 총망라하여 데이타를 구축하고 있었다. 더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와 인도까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세계의 정세가 그의 책상 위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5차 십자군이 발칸반도의 육로와 메시나를 출발해 지중해를 건너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팔레르모의 연구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교황의 특사와 최후통첩이 도착했다.
그러자 마지못한 듯, 그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소아시아 지역 아크레로 갔다. 십자군 본대에 합류한 것이다. 그는 군대의 체계를 확인하고 엄한 규율아래 계획에 준해서 천천히 에루살렘을 향해서 진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서를 지닌 특사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다.
이십일 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커다란 장막이 하나 설치되었고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과 프리드리히 2세가 최측근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예루살렘의 지배자 알 카밀과 측근들이 이들을 맞이했다.
예루살렘을 두고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알 카밀 술탄 - 황제께서는 지금 저에게 순순히 예루살렘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얼마나 많은 재산적 피해를 서로 입었는지를 잘 아시면서 말씀니까?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이렇게 멀리까지 저를 불러 놓으시고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어디 한 번 빼앗아 보시지요?
프리드리히 2세 - 빼앗고자 하였다면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겠지요. 작금의 여러가지 정황이야 제가 이미 소상하게 서신에 적어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자왕이 아닙니다. 술탄께서도 살라딘 술탄이 아니듯이 말씀입니다. 적어도 저는 예루살렘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부득이 상황이 이쯤되었으니....... 서로간에 불필요한 손실이 없는 상태에서 잠시 저에게 내어주십사 하는 것이지요.
알 카밀 술탄 - 잠시 내어달라는 말씀중에 그 잠시가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프리드리히 2세 - 글쎄요. 그것은 저도 잘 알수 없습니다만........ 그 기간은 어디까지나 술탄께서 얼마정도의 시간 안에 왕국을 추스르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알 카밀 술탄 - 석달만에 다시 돌아 온다면........ 그때는 황제께서 다시 순순히 예루살렘을 내어주시겠습니까? 황제께서 약속해 주신다면 기꺼이 따르지요.
프리드리히 2세 - 예루살렘을 내어 주십사 하는것은 저의 요청이나........ 다시 예루살렘을 내어줄 것이냐는 제 권한 밖의 일이라 약속을 드리기가 어렵겠군요. 그런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을 뿐이고....... 아마도 교황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알 카밀 술탄 - 공정하지 않은 불평등 조약이라는 말씀이군요. 제가 이 용청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프리드리히 2세 - 그 어떤 이유로든 술탄께서는 반듯이 에루살렘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에루살렘을 확보하셔야만 할것입니다. 교황은 결단코 예루살렘을 내어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방법은 하나뿐이겠지요. 이전처럼 서로간에 피흘리는 전쟁이 또 다시 벌어질 수 밖에요........
알 카밀 술탄 - 어차피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지금은 저에게 순순히 예루살렘을 내어놓으라는 황제께서는 온전한 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프리드리히 2세 - 술탄께는 지금 단 한명의 군사도 한톨의 밀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시간도 시기도 술탄께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술탄께 예루살렘은 과연 무엇입니까? 기독교에 대항하여 예루살렘을 굳건하게 지켜냈다는 구실좋은 명분일 뿐입니다. 술탄께 여쭙고 싶습니다. 과연 예루살렘과 시리아 중에서 어느것이 더 중요합니까? 시리아는 술탄의 왕국이자 근본입니다. 술탄의 모든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탄께 시리아 왕국이 온전하면 예루살렘을 언제든지 다시 도모할 수 있겠지만,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시리아를 잃게되신다면........ 다시 되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와 싸우면서 낭비 할 군사와 식량이 적어도 술탄께는 없습니다. 시리아가 안정을 되찾고 술탄의 치세가 정히 예루살렘을 원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때 다시 예루살렘을 도모하십시요. 혹,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런 협상은 결코 필요치 않게 되겠지요. 그때는 사자왕 못지않게 멋지게 대항해 드리겠습니다.
알 카밀 술탄 - 전투 한번,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대로 예루살렘을 내어 드린다면 세상이 저를 조롱할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위대한 명예를 얻게 되겠지요.
프리드리히 2세 - 진정한 명예가 없는 허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순간의 비난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만회할 수 있겠지만, 무고한 생명은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카밀 술탄 - 황제를 위해 협정문을 작성해 서명해야 한다면....... 임의 양도 기간을 얼마로 했으면 좋겠습니까?
프리드리히 2세 - 시리아만 안정되면 술탄께서 내년에 돌아오실지 십년 후에 돌아오실지 하늘만이 아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때고 돌아오실터인데 효력도 없는 그 기간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알 카밀 술탄 - 제가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독교 성지 순례자에 대해서는 일체의 위해를 가하지 않고 나름 보호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예루살렘을 내어드린다 하여도 이슬람의 성지 순레자들에게는 똑 같이 어떤 불편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명시하였으면 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 - 그렇게 기록될 것이며 반듯이 그렇게 실행될 것입니다.
알 카밀 술탄 - 협정문이 작성되는대로 저에게 보내주십시요. 서명해 드리겠습니다. 열흘 안으로 에루살렘을 비워드리겠습니다. 굳이 따라나서지 않겠다는 사람은 두고 떠날것입니다. 그들에게 자비와 배려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원정대와 이슬람 수비대 사이에 평화 협정이 이루어 졌다.
'예루살렘을 이쯤이면 순순히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라는 프리드리히 2세의 친서를 처음 받아든 알 카밀 술탄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가마솥에 삶아서 질겅질겅 씹어 삼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나하나 그리고 조목조목 펼쳐지는 작금의 주변 정세와 술탄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파고드는 두려움에 치를 떨 뿐이었다. 귀신이 백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렇게 용이주도하고 신출귀몰하고 세상사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알 카밀 술탄은 시리아 왕국의 지배자였다.
살라딘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에 이슬람은 뿔뿔히 흩어져 작은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았다. 건 와중에 알 카밀이 제위에 오른 후 시리아 왕국은 승승장구했다. 세상의 곡식창고인 이집트를 도모하려 계획하던 중에 4차 십자군 이야기를 접했고,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한다는 것이 아랍인들에게 어떤 상징적인 권력으로 비처지는 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왕국을 굳건하게 완성하고 나서 기독교 세력에 당당하게 대항하면서 예루살렘을 수호하는 사람이야말로 살라딘 같은 이슬람의 최고 영도자가 되는 것이다. 알 카밀은 텅 비어있다시피 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문제는 그때 부터였다. 유목민족이 도시에 정착하여 지배를 한다는 것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부족과 소국가들이 끊임없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싸움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알 카밀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졌다. 예루살렘 하나만으로도 지겹도록 벅찼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시리아에서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 더하여 가문의 조카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다. 저마다 한 지역씩을 차지하고 왕국 전체를 노리고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시리아를 잃으면 모든것을 잃게된다. 가족도 재산도 영토도 지위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예루살렘이라는 뻘에 그만 발목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최근 정보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먼 동쪽에서 몽골족이 쳐들어와서 이슬람 부족들이 하나 둘 초토화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런 와중에 5차 십자군이 몰려왔고.........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2세의 친서가 도착한 것이다.
'예루살렘을 순순히 내어 놓으시고 서둘러 시리아로 달려가 왕국부터 추스르세요. 나머지 모든 일은 신의 뜻에 따르도록 하십시요...........'
'10년 동안 아무런 조건없이 예루살렘을 십자군 원정대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무상양도 한다'
인류 전쟁사에 신기원이 이루어 졌다.
단 한번의 전투도 없이, 단 한방울의 피흘림도 없이 예루살렘 성문이 열렸다.
이슬람 군은 썰물처럼 어디론가 모두 빠져나갔다. 예루살렘에 그냥 남아서 살고싶은 이슬람 사람들이 약간 남았을 뿐이었다. 제 5차 십자군 원정대가 마침내 목표한 '성지탈환'을 완벽하게 이뤄 낸 것이다.
십자군 지도부는 서둘러 승전보를 바티칸으로 보냈다. 예루살렘의 사후처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도착한 교황의 친서에는 '5차 십자군 전체를 모조리 기독교에서 파문한다'라는 명령서였다. 그들은 교황이 약속한 (면죄부)를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것은 면죄부가 아니라 '짐승'으로 ㄱㄱ하 시키는 파면장이었다.
이유는......... '이교도와 결탁하여 부정스러운 방법으로 무혈입성 했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과연 교회와 교황이 바라는 것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성지를 수복'하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교황의 바램은...... 치열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면서 십자군의 한 80% 정도가 전사하고, 이슬람 측에도 심각한 정도의 타격을 입혔으면......... 겨우 살아 돌아온 군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나서 교회에서 파문 시킨 후에, 이를 빌미로 또 차기 십자군을 만들어 승산없는 싸움터에 다시 파견하는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군사력이 유명무실하고 탁월한 군주가 부재한 유럽을 교황 마음대로 요리하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한 개인의 욕심과 떡고물을 기다리는 몇몇 추종자들의 타락과 그릇된 판단이 온 인류를 비탄에 빠트린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교황의 절대적이며 신성한 존엄에서 파생된 억지는 딱 거기까지 였다.
교황의 파문 결정에 프리드리히는 분개하면서 최종 결단을 내렸다.
기독교에서 파문당한 총사령관이 모조리 파문당한 제5차 십자군 원정대를 모아놓고 외쳤다.
'우리는 애초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다. 우리들의 헌신과 노력을 신(神) 께서도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애초 신께서 바라시는 성지수복을 목표로 삼았고 지금 이렇게 모두 이룬만큼 이제 우리는 처음 원정이 시작되었던 자리로 모두 무사하게 돌아가기로 한다. 여러분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교황께서 뭐라 생각하시든 더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 이상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여러분이 나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왔다면......... 나는 여전히 총사령관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라.'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성문을 나섰다.
그러자 십자군 원정대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예루살렘에 따로 떨어진 군대는 하나도 없었다. 신성함을 앞세운 교황은 군대의 정신세계를 넘어서 그들의 육체까지를 지배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들은 세속의 군주인 프리드리히를 추앙하고 따르고 있었다.
참으로 웃기고도 어처구니 없게........ 십자군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예루살렘을 그대로 두고 떠나왔다.
예루살렘은 한순간에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러자 곧 다시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차지한 이슬람은 시리아 왕국의 알 카밀은 아니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은 다시 6차. 7차. 8차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철수와 다시 이슬람 세력에 흡수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교황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끝내........ 프리드리히 2세의 말년은 대단히 불행해 진다. 그 배후엔 교황의 복수심이 작용했다.
위대한 선각자....... 최초의 근대인......... 그는 쓸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간다.
국가와 종교에 따라 음식문화가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나타난다.
다른곳과 다르게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다보면 가축의 부속물(내장 부위 등)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방법이 우리나라랑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에 자주 놀라고는 한다.
피렌체 여행에서 중앙시장의 내장버거가 여행자들 사이에서 아주 아주 유명한데, 사실 알고나면 피렌체 내장버거는 이류 프랜차이즈점에서 만드는 음식이라 할까?(딱히 그곳의 음식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 다른곳에서 경험한 바를 기준으로 판단한것임)
스페인의 부속물 요리는 짙은. 깊은. 오랜 전통의 맛이라기 보다는 다양성에 놀랐다. 가지가지 우리나라 처럼 거의 비슷하게 있을 부속물 음식은 죄 다 있었다. 간단하게 가볍게 접하고 먹을 수 있는 방향으로.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우는 손질이 좀 더 많이 들어간, 또는 별도의 조리가 필요한 부속물 음식으로 발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경우 부속물 음식에 관한한은 이탈리아가 훨씬 좋다. 일상에서도 가끔 이탈리아식 부속물 요리를 흉내내 보곤 한다.
그중에 하나인 '내장 버거'를 노르만 궁전 밖의 독립광장 인근의 전문 매장에서 팔고 있는데, 연일 현지인들로 길게 줄을 선다. 또한 바로 옆에 끝내주는 바베큐 치킨점이 있다.
내장버거에 관한 한 나는 팔레르모 독립광장 옆의 내장버거가 세상 최고의 맛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팔레르모에서의 저녁 식사는 항상 어찌나 행복하던지.........
아!!!! 돌아가고 싶다. 시칠리아로........
팔레르모의 내장버거와 바베큐 치킨과 오뎅 튀김과 감자튀김에다가...... 시칠리아 와인과 맥주........
한마디로 풍요롭고 행복한 맛이다.
거기에다 가격까지 어찌나 저렴한 편인지....... 매일매일이 만찬이다.
시칠리아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다.
---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여행기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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