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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신(神)들이 노닐던 언덕 '아그리젠토'에서........

by 피안재 2020. 9. 30.

 

 

 

 

 

 

 

 

 

 

 

 

 

 

 

 

 

 

 

  유럽에서 최초로 문명이 탄생한 곳은 그리이스다.

  고대 그리이스 문명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이집트 문화나 오리엔트 문화와는 전혀 다른 자유 시민들의 공동체인 폴리스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효시라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고스란히 로마를 거쳐 중세와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백인들은 그리이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민주주의의 선구자 내지는 개척자라는 하나의 관념으로 고착화 되었으며, 그런 관념에서 파생괸 극히 부분적인 그릇됨이 일부 사람들의 백인 우월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면  그네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민주주의와 고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존재하고 있다는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 또한 동양의 전제군주국가의 정치 구조나 제도와 상당히 닮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동양의 전제군주국가가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한 소수의 집권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제도로 나타났다면,  그리이스의 민주주의는 소수의 폴리스 시민들을 위하여 다수의 '노예'라는 노동력 공급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민주주의 도시국가로 평가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보자면,  그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실행한 그리스의 폴리스 중에서 대표적인 도시국가들이다.

  아테네는 폴리스를 다스릴 지도자를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서 선출했다고 자부한다.  전형적인 민주주의 방식의 시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투표(직선제)를 통해 특정인을 해마다 몇몇씩 추방하는 하향식 형태의 직선제였다. 시민에게 밉보이면 특정한 잘못이나 범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무조건 추방되거나 중도에 살해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선출된 통치자(지도자)들은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칠 수 없었고 민심을 살피는것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아울러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온갖 이권과 청탁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쥐고나서 추방될 경우를 준비해야만 하기도 했다. 점차 무역을 통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채노예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따져본다면 동양의 전제군주국가와 상당히 비슷한 현실이 전개되었을 것이란 가정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거기에다 스파르타를 살펴 보자.

  북쪽에서 내려 온 소수의 도리아인들이 정복자가 되어서 세운 폴리스가 바로 스파르타이다.  그들은 피정복인과 전쟁에서 끌고 온 노예 신분인 다수의 (헤일로타이) 위에, 상업이나 제조업에 주로 종사하는 소수의 중인신분인 (페리오이코이)를 두고,  상층부에 인구의 5~10%에 이르는 (시민)을 두었다.  이 시민이 바로 '스파르타인"이다.  모든 생산과 물류는 노예들이 담당했다.  특권층인 스파르타인들의 본분은 오로지 하나,  모든 시민을 용맹한 전사로 만들어서 강력한 군사강국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군국주의로 무장한 전형적인 전제군주국가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디에 민주주의가 담겨져 있다는 말인가? 

  노예제도를 극대화 시키고,  그 위에다 극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린 풍요와 자유로움이 민주주의란 말인가?

  그들이 가졌던 철학과 인문학과 천문학과 의학과 예술과 음악은 모두 최상층의 극히 일부의 시민들 이상만이 누리던 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이스 문화예술은 실로 위대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소수 특권층의 무한한 자유 의식이 이런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신을 믿고 따르면서,  때론 두려워 하고,  때론 더불어 함께하고, 또 때로는 신의 영역을 넘보기도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또한 그리이스인들이었다. 

  전쟁과 재난과 질병 앞에서도 그들의 사고에는 늘 여유와 자유로움이 넘쳐났다.

  그리이스인들의 그러한 자유로운 생각과 처신은 아마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가혹한 법률로도 구속할 수가 없었을것 같다.  어떤  느닷없이 들이닥친 운명 앞에 서면,  신을 올곳게 잘 숭배한 것이나 아니면 신을 외면하거나 경멸하며 살아온 사람이나......  이제 앞으로 펼쳐질 운명에는 별반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이미 이들은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졌다면  법률 앞에서건, 신 앞에서건  울고불고 뒤늦게 후회하고 몸부림 쳐봐야 별반 달라지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그런 운명이 들이닥치기 전에 열심히 살고 열심히 즐기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로마로 그대로 이어지고  훗날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는 조금 색다르게 각색되어서 '종말론'으로 탈바꿈 하게 된다.

 

  서양 문명사에서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는 고스란히 로마로 이어진다.

  서구사람들의 자부심에는 그리이스의 민주주의가 로마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말한다.

  하긴.....  로마는 열린 사회였다.  그것도 완전히 열린 사회였다.

  누구라도 로마인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누구라도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이렇게 본다면 틀림없는 민주주의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폴리비우스도 그렇게 말했다. '로마의 성장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강력한 시민의 군대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이라고.

 

  민주주의라.......

  실제의 그리이스인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질문을 해 본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리이스를 만나고 싶어졌다.  조르바라도 괜찮고  카잔차키스라면 더더욱 좋겠다.

  소설속의 주인공이던 작가이던 평범한 소시민이던, 그리이스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그리젠토)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신들이 노닐던 그 언덕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그 길을 걷고 또 걷다보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플라톤의 손짓을 이해할 수 있을것만 같고,  땅을 쓰다듬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날 수도 있을것만 같다.

  

  그들과 함께 들판에 나가 밀을 수확하고 돌절구에 빻아서 반죽을 하고  포도나무 숯불이 피는 화덕에다 빵을 굽고......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창고에서 짙은 향기가 물씬 풍기는 붉은 와인을 꺼내고......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야채 샐러드에 오렌지랑 사과랑 포도를 나누어 먹으며.......

  신전 위로 긴 꼬리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유성을 보고 수많은 별자리를 이야기하면서........

  밤이 지새도록 하아프의 은은한 선률에 실려 나오는 호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저만큼 떨어진 모닥불 뒷쪽으로 테세우스와 프로메테우스가 서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호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유리시즈가 아티카로 돌아가는 여정에 말이야............'

 

 

 

 

 

 

 

  아그리젠토를 여행하려면 팔레르모나 카타니아에서 일일 나들이로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유는 아그리젠토가 멀다면 좀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그런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있을 뿐더러,  팔레르모나 카타니아에 비하자면 아주 작은 소도시로서 여행자를 위한 여러가지 편의시설이 아직은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도상의 위치는 카타니아가 조금 더 가깝지만  팔레르모를 거점으로 아그리젠토를 다녀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다.  카타니아에서 아그리젠토 여행은 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팔레르모에서는 버스와 기차가 함께 운행한다.  소요 시간도 비슷하지만.......  일전에 팁을 드렸듯이......  카타니아에서 타오르미나는 버스가 편리하고,  시라쿠사 나들이는 기차가 편하다고 이야기 했던것처럼,  팔레르모에서 아그리젠토를 다녀오는 방법으로는 기차가 훨씬 편하다.

 

  새벽 산책을 대신해서 우리는 채 날이 밝기도 전에 숙소를 나섰다.

  노르만 궁전을 지나 성 안쪽으로 들어가 두오모 앞에서 대각선으로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발라로 시장을 경우해서 팔레르모 중앙역에 가는 방법이 내가 그동안 주로 이용한 방법이었는데,  오늘은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노르만 궁전과 성벽을 따라 외곽으로 돌아나간다.

  하루를 바쁘게 시작하는 현지인들을 만나고 즐겁게 아침인사를 주고 받는다.

  기차 시간도 알고 있는터라 우리는 서둘지 않고 그냥 아침 산책을 즐기듯이 팔레로 도심의 외곽을 걷는다.

  이윽고 팔레르모 중앙역이 나타나고,  표를 사고,  맥도널드에 들려서 커피랑 빵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오늘은 아그리젠토가 목적지 이지만,  이틀이 지나면 우리는 이곳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로마로 향한다.

  플랫폼에 나서니........  훅 하고  어디선가 시칠리아의 냄새가 듬뿍 페부 깊은 곳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기차에 타서는 로마로 가는 일정과 에매한 티켓을 확인하고  차후의 일정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기차가 아그리젠토 중앙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아그리젠토는 기차길이 언덕의 아랫쪽에 있어서 계단이나 엘레베이터를 타고 2층의 역사 대합실을 나오니 비로소 여기가 아그리젠토 라는 느낌과 생각이 든다.  광장 옆의 관광안내소를 가보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역사 광장 바로 앞 정류장에서 '신전들의 언덕'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노선이 다른 방향으로 버스가 있는데,  어느것을 타던지 '신전들의 언덕'으로 간다.  신전들의 언덕은 말 그대로 언덕에 길게 걸쳐져 있는데  헤라 신전이 있는 정문은 언덕의 윗쪽에 있고,  제우스 신전이 있는 후문은 언덕의 아랫쪽인 우측에 있다.  반대방향으로 나오면 되니까 어느 방향으로 버스가 향하던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가 탄 시내버스는 채 10분이 안걸려서 우리는 '신전들의 언덕' 후문 앞에 내려 주었다.

  이제 티켓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모든 여행 책자와 여행기에는 '신전들의 계곡'이라 쓰여져 있고 부르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집트 피라밋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왕가의 계곡' 영향이 아닐까?  하지만 아그리젠토의 계곡엔 아무것도 없다.  선인장과 아몬드 숲이 들어선 구릉지역이 있을 뿐이다.  계곡에선 그리이스 유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그리젠토의 그리이스 유적군은  양쪽으로 뻗어나가 흐르는 두 개의 강줄기 사이로 솟아오른 언덕 위에 길게 신전들이 늘어서 들어서 있는 장소이다.  당연히 계곡이 아닌 '신전들의 언덕' 이라는 표현이 맞다.

 

 

 

 

 

 

 

 

노르만 궁전을 외곽에서 바라 본 뒷모습.

 

 

 

 

 

 

 

 

 

 

 

 

 

 

 

 

  시칠리아를 우리나라 여행자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게끔 크게 공헌하신(?) 소설가 김영하 작가의 표현이 실로 압권이라 하겠다.

  '결국 시칠리아 도시들의 관광객 유치 경쟁은 압도적인 한 장의 이미지를 가진 아그리젠토의 승리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 장의 이미지'는 당연히 '콩코르디아 신전'을 가리킨다.

  매표소 지붕 너머로 콩코르디아 신전의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근데.....  콩코르디아가 누구야?  어떻게 그리이스 신전들 사이에서 저렇게 당당하고 온전하게 놓여 있어?'

  '그리이스 신화에 콩코르디아 라는 신이 정말 있었어?'

 

 

 

 

 

 

 

 

 

 

  그리이스인들은 지중해의 연안을 탐험한 후에 그리이스 본토를 연상시키는 지역적 환경을 우선 감안하고,  그 위에 바다에서의 접근성, 생활용수와 더불어 가축의 방목을 위한 푸른 초원이나 밀과 보리를 재배할 수 있는 경작지를 찾아내면 그곳에 도시를 세웠다.  물론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볼 때 인근에서 질좋은 대리석이나 다른 건축자재의 수급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들은 도심의 중심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필히 두었는데, 이것이 그리이스식 아크로 폴리스다. 도심은 튼튼한 성벽으로 에워쌓아졌다.  뿐만 아니라 언덕위의 아크로 폴리스 벼랑위에도 더욱 튼튼하고 견고한 내성으로 에워쌓았다.  그리고나서는 아크로 폴리스 위에 여러개의 신전을 세웠다.

  결국,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언덕'은 이곳을 새롭게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크로 폴리스' 였던 것이다.  그리이스인들이 신전들의 언덕에만 신들을 위한 사원을 지었던것은 아니다.  성밖의 바닷쪽으로 주로 지하세계(지옥)을 다스리는 신들의 사원을 짓기도 했으며,  그리이스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테네 여신의 신전은 여기 이 언덕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아그리젠토의 가장 높은 지대인 현재의 도심 가운데에 건설했었다.  다만 아테네 사원은 그 후에 파괴되어 사라졌고,  현재는 기독교의 교회가 들어서 있다.(시라쿠사 두오모를 연상하면 되겠다.)

  아그리젠토는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건설되어 그리이스 문화가 찬란하게 빛나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언덕에서 확인할 수 있는것은 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콩코르디아 사원과  헤라 사원이나 헤라클레스 사원에서 신전의 일부를 찾아볼 수 있을 뿐,  그 나머지는 거의 페허나 다름없는 잔해들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나마 남은 '그리이스 건축'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것이 작게나마 위안이라는 말이다.

  아그리젠토는 카르타고의 침공이 있기전까지 30만의 상주인구를 가진,  현대에 비추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대도시였다.  그 도시 한가운데 언덕에 아테네를 연상시키고도 남을 아크로 폴리스가 들어섰고,  그 위에 눈부신 여러 신들의 신전이 길게 언덕을 따라 이어졌던 것이다.  현재 언덕에는 발굴중인 것을 포함해 대략 7~8개의 사원이 들어서 있지만, 아그리젠토에는 20여개의 신전이 있었던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에도 활발하게 발굴이 진행중이다.

  실제 사람이 상주하던 찬란한 고대도시와 신전에는 당연히 수많은 귀중한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어야만 정상이지 싶다.  하지만 아그레젠토의 심장부였던 신전들의 계곡에서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것은 거의 대부분이 건축적인 유산과 부서진 잔해들 뿐이다.

  아그리젠토를 점령한 카르타고는 도시를 불지르고 파괴했다.  남자들은 모두 끌어다가 노예로 팔아버렸다.  여자들은 데려다가 자신들의 생활속에서 노예로 부렸다. 이 역사적인 고대도시는 모래와 잡초더미 속에 파뭍혀서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중세에 들어서서 이 잊혀지고 사라진 도시에 하나 둘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으미 현재의 신도심이다.  그리고 새로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가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중세 로마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다로 접근하기 위하여 길을 내던중에 모래더미 속에서 옛 도시를 찾아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상당히 파괴된 상태였지만  엄연한 고대 그리이스의 찬란한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사의 전부였던 시대에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는 야만적인 이교도의 문화이자 문명의 잔재였다.  1차의 카르타고의 파괴에 더하여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참혹한 2차 가해가 이루어 졌다.(당시의 기독교가 왜 고대 그리이스 문화를 파괴해야만 했는지는 이번회차 여행기 중간에 소상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다만, 새롭게 아그리젠토 최고 높은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던 기독교인들은 아직 자신들만의 교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유독 강렬하게 눈에 띄던 신전의 언덕 중간쯤에 위치한 '콩코르디아 신전'을 기독교 교회로 개조하여서 이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콩코르디아 신전만큼은 기독교의 파괴로부터 비교적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오로지 교회로 변형된 하나의 건축물 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전은 수많은 조각상들과 신전의 벽면을 장식했던 부조상들과 프레스코화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터인데.......  모두 알뜰하게 파괴되었다.  누가?

  20개의 신전이 세워졌던 인구 30만명이 상주하던 찬란했던 고대 그리이스이 도시 '아그리젠토'를 마음속에 상상해보면서 이제 발걸음을 '신전들의 언덕(Valle dei Temple)'으로 향한다.

 

 

 

  신전들의 언덕을 거닐다 보면 수많은 이야기과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눈길을 스쳐 지나간다.

  짧은 순간 파노라마 처럼 스쳐지나는 인류의 고대 문명사에는 여러 신들과 영웅들과 그 시대을 살다 간 수많은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과 절대적인 숙명과 이를 극복하는 용기와 더불어 사는 평화와 신에대한 감사가 수놓아져 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허물어지고 부서진 돌덩이 하나하나마다 쇠와 망치와 땀과 피가 서린 인간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고,  돌무더기 사이로 솟아나 있는 잡초들이 새싹을 튀우고 꽃을 맺었다가 누렇게 시들기를 과연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하는 알싸한 의구심에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도 한다.  이곳저곳에 우뚝 자리잡은 수천년을 산다는 올리브 나무들은 자신들의 재질보다 수십배 수백배나 강한 저 돌덩이들이 다듬어져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 위엄있게 솟아 올랐던 옛 신전들의 원형모습을 고스란히 모두 보았을 것이 아닌가?  2천년의 무상한 세월속에 풍화되고 부서져서 무심하게 땅바닥을 나뒹구는 그 찬란했던 신전들의 파편을 올리브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고 있었을까?

  '올리브 나무야.  올리브 나무야.  그날 신전들이 어떠했는지.......  모든 이야기를 소상하게 나에게 해 주렴...........'

 

 

 

 

 

  내가 배웠던 그리이스 문화와 건축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했던것이 그리이스식 건축양식에 있어서 특징이랄 수 있는 기둥의 형태였다.  원주의 형태를 생김새에 따라 3가지로 분리했던것이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바로 그것이다.  시험 문제에 여기 세가지에 하나 보태서 '마케도니아식' 하면서 '아닌것은?' 하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그것이 전부인 양 외웠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나는 그것이 모두 올바른 해석이며 정답은 아니었다는 학설을 접할 수 있었고,  지금은 나도 어느정도 새로운 학설을 인정하고 있다.  만약 지금 과거와 같은 문제가 나에게 출제된다면 나는 옆에다 <문제가 잘못 출제되었음>이라고 적은 다음 '틀렸음의 X'를 감수할 것이다.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원주)는 고대 그리이스인들만의 아주 독창적인 건축문화였다고 정의하는 학설에 대해서도 약간의 회의적인 시각을 나는 가지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나를 어떤.........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자부심에 떨게했던 유흥준 교수님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라는 황홀하리만치 멋진 글귀도, 언젠가 내가 알고있는 역사적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분리하여 동서양의 연대표를 만들어 보던 순간에.........  백일몽(말짱 도루묵?) 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후기 그리이스와 로마 초기의 건축물을 살피던 나는...........  '20미터를 족히 넘는 웅장한 돌기둥들이 기단 위에 처음 올려진 부분은 가늘고 차차 올라가면서 서서히 굵어지다가 어느 정도 높이 올라가면 다시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라는 글귀를 접하게 되었고,  당시의 수많은 건축물 사진들을 돋보기까지 들이대면서 살펴보니.........  무량수전의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유흥준 교수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어서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의 거인이 20미터나 되는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서있는 모습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무량수전의 기둥에서 '배흘림'의 의미를 찾아내긴 하였으나,  그리이스 신전의 허리가 볼록한 기둥을 무엇이라 그들이 불렀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다만 기원전 수세기 경에 만들어진 수많은 신전들의 기둥이 이미 배흘림 대리석으로 세워졌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리이스인들은 이런 엄청난 생각을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부터 하게 되었을까?

  아울러 이런 놀라운 사실들은 오로지 그리이스인들의 전유물이었을까?

  그리이스인들은 왜 사방에 이렇게 엄청난 위용의 신전들을 끊임없이 지어야만 했을까?

  더하여,  우리는 기둥의 형태에 따라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로 구분했지만,  좀 더 멀리서 가만히 바라보자면 왜 그리이스 신전들은 천편일률적으로 하나같이 똑깥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까?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아가 북북서로 항해를 계속해 나간다면 온통 바위뿐인 군도 사이에서 가장  큰 크레타섬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그리이스 본토의 남해안에 닿게되는 것이다. 

  선사시대 이후로 레바논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페니키아인들이 이 항로를 오가면서 해상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해상 교역의 중심은 나일강 유역에 자리잡은 이집트 문명이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이집트는 인류문명사의 최고 일류 국가였다.  나일강 유역의 밀과 보리를 비롯한 이집트의 모든 생활물자와 군사적인 기술과 정치 제도와 문화가 모두 교역의 상품이 되었다.  그것은 모두 초일류 국가의 가장 앞선 선진문물이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을 오가면서 무역을 통해 은연중에 시대를 앞선 이집트의 선진문물까지도 열심히 퍼다가 날랐던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고대국가 중에서 유독 이곳 크레타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일류 상품들 보다 건축과 제도와 군사력 등에 더 관심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집트의 앞선 제도와 우수한 청동을 생산하는것과 군사를 무장시키는 법과 제도를 통해 사람들을 다스리는 법에 관심을 가졌다.

  신화적인 인물인 미노스왕 등을 통해서 크레타에는 이집트나 지중해의 다른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문명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기원전 2200년에서 시작하여 1100년까지의 시기에 크레타섬에는 고유한 '미노스 문명'이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리고 '미노스 문명'을 '크레타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중에는 미노스 문명과 크레타 문명을 구분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부득이 이러한 경우에는  크레타섬의 초기 문명을 미노스 문명이라 하고 후기를 크레타 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크레타문명의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하여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는 시작된다.

  '미노스의 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크레타 문명은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래는 가늘고 윗쪽은 넓은 형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벽은 돌과 진흙을 섞어서 쌓아올리고 나무를 깍고 맞추어서 지붕을 얹었다.(흔히 우리가 아는 그리이스 건축과는 전혀 다른)  그것이 대부분의 주거형태였다.  당시로서는 원시 토템이즘 정도의 시대였기에 그들의 신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미노스 궁전의 일부가 남아있어 고대산 연구에 지대하게 공헌하기는 했지만,  목재가 주요 건축자재로 사용된 크레타의 건축물은 후대에 전해진 것이 거의 없다.  주로 도자기 형태나 소형 조각상등을 통해 당시 문화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크레타인들이 바다를 건너 그리이스 본토에 상륙하여 점차 해양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기원전 1100년 경에 커다란 환란이 들이닥치고 만다.

  크레타인들 보다 신체가 강건하고 보다 더 강력한 무기(철기)를 가진 용맹한 집단이 그리이스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삽시간에 그들은 본토와 크레타 인근의 모든 섬까지 차지해 버렸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자신들이 가지고 들어 온 문명에다가 본래 이곳에 존재했던 크레타 문명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역사는 이 낯선 침입자들을 (도리아인) 이라고 명시했다.  추측컨데 아마도 그들은 발칸반도에서 떠나온 용맹스런 부족으로  이미 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 문명)와 이집트 문명을 어느정도 받아들이 상태였다고 추측한다.

  이 낯선 침입자들은 무섭게 세력을 확장한 후에 떠날 생각은 어디엔가 떨쳐버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이 그리이스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었으며,  수세기가 지나자 그리이스는 본래부터 그랬던것 처럼 다시 하나로 섞이고 뭉쳐있었다.  이미 선진 문물을 거지고 들어 온 이들에게 페니키아인들은 부지런히 이집트의 선진 문물을 계속 퍼다날라 주었다.  비로소 지중해 연안에 이집트와 전혀다른 또 하나의 거대한 문명인 '그리이스 문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지배자 도리아인들은 새로운 건축방식을 도입해 대부분의 건축물을 거대한 대리석 석조건축물로 세우기 시작했다.  도리아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세워지기 시작한 건축물을 흔히 '그리이스 건축'이라 부르게 되며,  거의 대부분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하고 위엄이 넘쳐나는 도리아식 건축물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리아인이 세운 그리이스 건축의 백미는 당연히 <파르테논 신전>이다.

  이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도리아 양식의 절대적 최고봉이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이며, 아테네는 곧 그리이스다.

  두 차레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그리이스는 비로서 제국으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했고,  '그리이스 문명'은 인류의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되었다.

  그리이스가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하게되자 유럽의 절대강국으로 부상한 그리이스에는 수많은 유민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도리아인의 용맹한 군사적 기질과는 다르게 예술적 기질을 다분히 가진 이오니아인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그리이스 건축양식의 한가지인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이 도입되었거나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이스 건축 양식의 절대적일만큼 상당부분(90% 이상)은 여전히 도리아식 건축양식이다.

  아테네 한복판에 우뚝 솟은 아크로 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모든 건축물은 모조리 도리아식 건축물이다.  단 하나, 이오니아인들이 유입된 후에 건설된 아크로 폴리스로 올라가는 성벽의 양쪽에 새롭게 세원진 출입문이랄 수 있는 '프로필라이아'만이 유일하게 이오니아식 기둥을 채택했다.  이오니아식 특유의 세련미가 특징이다.

  이처럼 그리이스 건축에는 대부분의 도리아 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후기에 들어 약간의 이오니아 양식이 추가 되었다.  또 하나의 양식인 '코린트 양식'은 그리이스 건축에 등장하기는 하나 별반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코린트식이 별도의 전혀 다른 양식이 아니라, 이오니아인들이 창안해 낸 몇가지 종류의 파생된 양식의 하나로서 이오니아 양식의 변형쯤이라고 새롭게 결론지었던 것이다.(나도 이 주장에 동의 한다)

 

 

 

 

 

 

고대 그리이스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파르테논 신전'

 

아르메니아의 (가르니 신전). 파르테논 신전을 원형으로 하여 그 지역에서 나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태양신 미트라에게 헌정)

 

 

 

 

 

  그리이스가 멸망하고 로마가 등장한다.  동서로 나뉜 로마는 비잔틴으로 이어진다.

  로마 이후의 모든 건축물에는 오로지 코린트 양식의 원주(기둥)가 절대적인 대세를 이어 나간다.  로마 시대나 비잔틴 시대의 사원이나 크다란 교회나 기타 건축물에는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기둥 양식이 거의 모두 코린트 양식으로 대체된다.  길거리나 들판에 나뒹구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도 모두 코린트 양식의 파편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따금식 아주 먼 변방의 석재가 부족하거나 화려하게 기둥을 다듬을 석공이 없거나 하는 특이한 경우와,  단순미와 장엄함을 나타내야만 하는 특별한 경우에 도리아식 건축물이 간혹 보이기는 한다.  아니면......  시라쿠사 두오모의 경우처럼 기존의 도리아식 그리이스 신전을 교회나 모스크로 개조하는 경우에 기존의 도리아식 양식이 그대로 살아남거나 보존되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그리이스만의 고유한 건축양식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것이었을까?

  적어도 나는.......  이 또한 페니키아인들이 부지런히 퍼다가 나른 이집트의 고대 신전양식에서 전래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문명의 파급과 재생산의 결과라 본다는 말이다.

  피라밋은 이집트 문명 특유의 대단히 독특한 건축물이다.

  페니키아인들은 피라밋 건축에 대한 정보도 지중해 연안의 곳곳에 퍼트렸을 것이다.  그리이스인들도 알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대 태양 거석문화의 표본과도 같은 피라밋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집트인들은 피라밋의 외형적인 웅장함 못지않게 내부의 은밀한 용도가 어쩌면 더 간절한 필요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리이스인들이 생각하기에 피라밋이 갖는 웅장함은 나일강 유역의 드넓은 모래벌판 위에서는 그 위용이 빛나겠지만,  사방으로 바위산과 협곡뿐인 그리이스에 더 웅장한 피라밋을 세웠다고 하여도.......  별반 그 위용은  바위산 투성이의 그리이스 주변 환경에 파뭍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이스인들은 다른 방식의.......  혹은 다른 유형의 웅장하면서도 장엄하고 한없는 위엄을 뽐낼 수 있는 건축물을 나일강 상류의 이집트 신전에서 마침내 찾아냈다.  그리이스 지도자들이 추구하고 간절히 염원하는 건축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이스인들이 처음 소스라치게 놀란 건축물은 <아브심벨 사원> 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룩소르 신전>과 <하프세프수트 여왕의 장제전>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해답을 얻게 되었다.

  나일강을 발치에 두고 산허리를 잘라내어 만든 거대한 석상들은 까마득히 아래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이로움을 가득 안겨주면서 신(神)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며 두려움의 대상인지를 뼛속까지 절절히 느끼게 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자연을 초월한듯한 거룩하기까지 한 실제 살아있고,  또는 직전에 신의 세계로 입적한 절대자의 형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석상들은 정녕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존재의 지형이자 재림이었다.  거대 석상들 사이로 구멍처럼 만들어진 성소는 아무래도 좋았다.(그 이유는 차차 밝히겠지만)  거대한 초자연적인 모습의 석상만으로도 신전이 갖추어야할 그 모든것을 넘치도록 소화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룩소르 신전'에서 그리이스인들은 거대한 석상이 아니래도........  웅장한 석재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로만으로도 초자연적인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신전 건축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들은 기둥의 사용하기에 따라 거대함과 웅장함과 신비로운 무엇인가가 각각 모두 다르게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또한 '하프세프수트 여왕의 장제전'에서 열주(기둥이 늘어서는 모양)의 배치에 따라 건축물의 위용이 놀랍도록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들을 모두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자신들만의 방식의 건축물로 탄생시킨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인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모든 그리이스 신전 모형의 기본 전형이다.  모든 신전이 이 형태를 닮게 만들어진다.

  그리이스 신전들의 주안점은........ 무조건 웅장해야하고 그 웅장함이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위압감으로 이어져 존경과 복종을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이게끔 작용하게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당연히 극한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장식미도 더해진다.  그곳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신(神) 거하시는 절대성소라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도록 만들어 졌다.  나약하고 미천한 인간 존재 위에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초월적인 존재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실제는 그 대리권자인 통치자가 제 마음대로의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속셈이면서 말이다.

  신전 건축의 최고 주안점은 세속의 인간들이 절로 경외감과 복종심을 스스로 가지게끔 찍어 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가득 뿜어내면 최고라 할만 했다.  거기서 파생되는 복족심과 충성심은 고스란히 지배자(통치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신전 내부의 성역은 2차적인 문제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전의 성역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나 신전의 높은 관리자거나, 아니면 최고 통치자만이 성소에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가졌지 때문이다.  성소는 신이 거하는 최고 중요한 성스러운 장소이겠으나,  생각에 따라서는 통치자가 자신의 입맛에 따라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비밀스런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이스 신전 건축은 내부의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웅장한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어마무시한 돌기둥들이 빼곡할뿐인것이 사실이다.  실용성면에서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건축물일 뿐이다.

 

 

  하지만 이집트의 신전들과 그리이스의 신전들 사이에는 그 건축물을 세우고자하는 애초의 목표에부터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영생을 믿었다.  더불어 신과 같은 존재인 최고통치자(왕)와 일부의 사람들(왕족)이 '영원한 삶'을 살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거기에는 이승에서의 육신이 온전해야만 '영원한 삶'을 계속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하여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고  그 이승에서의 육신이 영원히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기묘하고 신비스럽고 보안으로부터 완벽한 거대한 신전을 짓기 시작한것이 바로 (피라밋 신전)인 것이다.  한마디로 피라밋은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이집트인들의 성스런 '영혼의 안식처'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이스인들의 '신(神)적 존재'에 대한 관심은 전혀 달랐다.

  이집트인들은 '사후(死後)에 맞이하게될 영원한 삶'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그리이스인들은 이승에 살아있으면서 영원한 삶을 추구했다.  죽은 영혼이 거대한 피라밋신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면서 신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영유하는 신들이 이승의 살아있는 인간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의 영원한 세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지극히 높은곳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는 신들을 불러내려서,  신들과 인간들이 서로 교통하고 교류하면서 또 하나의 이상적인 삶이 펼쳐지는 매우 특별한 세상을 그들은 추구하였다.  하여 하늘에서 불러내린 신들이 거할 처소로 신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신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축제를 벌이면서 이승에서도 천상의 신들의 세계 못지않은 이상향의 세계를 같이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집트신전이 망자(亡子)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에 들게하기 위한 '무덤'이었다면,  그리이스신전은 신과 더불어 천상의 세계와 별반 다름없는 이승의 세계를 구현하던 그리이스인들이 신들을 불러내려 머물게 하려던 처소(성소) 였다.  이집트 신전이 죽은자를 위한 건축이었다면,  그리이스신전은 산자를 위한 건축이었다는 의미이다.

   신전의 역사는 계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로마에 이르러서 끝판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판테온(Panteon)' 이야말로 '신전의 끝판왕' 이자 '최고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판테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만신전(모든 신들의 성전)' 이니 충분히 스스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죽은자와 산자를 통털어서 웅장하면서도 엄숙한 신전이 스스로의 굳게 잠겼던 문을 열고 내부의 깊은 성소로 사람들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로마 여행'에서 단 한곳만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판테온'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로마에서 가장 중요하게 꼭 보여줄 최우선의 것을 선정하라하면..... 당연히 '판테온' 이다.

  그리이스가 파르테논 신전이라면  로마는 당연히 판테온이요,  비잔틴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다.  이슬람은 좀 더 다녀보고 나서 결정하련다.

 

 

 

 

 

 

 

 

로마의 아그립바 장군이 완성한 '판테온' 로마 건축의 최고 백미라 하겠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그려진 '신전들의 언덕' 풍경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삼국지> 위서() 한전()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의 남쪽 지방에 '소도(塗)'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도는 하나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큰 나무를 세우고(솟대)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혹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오기 전까지 함부로 침범해 체포할 수가 없다' 는 부연설명이 뒤따른다.  한마디로 소도는  지신()이나 토템 신(totem) 등 귀신이 숭배되었던 아주 신성한 장소였던 것이다.  신들의 거처였던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나 장막(천막)을 '성소(所)'라 불렀으며,  그 안쪽에 언약궤를 모신 가장 깊숙한 곳의 절대신성한 지역으로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지성소( )'라 구분하기도 하였으나,대부분은 쉽게 '성소'와 '지성소'를  같은 의미의 '성스런 영역의 장소'로 같이 사용한다.

  시대와 민족이나 국가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소도' 혹은 '지성소'들이 규모와 가치부여와 체계가 함께 발전해갔으며,  이것들이 머지않아 '신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보겠다.

  신전(Temple)은 이후로 여러 유형으로 바뀌면서 발전해 나갔고, 전 인류의 역사속에서 항상 인간의 삶과 함께 해왔다.

  불교의 '사찰' 혹은 '절', 그리고 힌두교의 '만디르(Mandir)' 역시 '신들의 역역이자 신들이 거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유대교의 교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Mosque)',  기독교의 '교회(Chuch)' 등 모두가 '성소' 혹은 '지성소'를 지칭하는 같은 말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그리이스와 이집트의 신전을 추가하면 된다.

  이집트의 신전은 '죽은 자'를 위한 안식처였고,  그리이스의 신전은 '산 자'를 위한 신들의 거처였다.

  그런데 이 '산 자를 위한 그리이스식 신전'은 로마제국 새대에 들어서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에 의해서 엄청난 시련을 겪게된다.  로카카톨릭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리이스인들의 신관(神觀)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신성스럽고 엄숙해야할 신이란 존재를 인간들과 별반 다를게 없이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는 허접떼기 신(神)으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온 우주에서 오로지 하나뿐인 로마 카톨릭의 유일신인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들의 죄와 영원한 삶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 속죄양을 삼아서 무한한 자비로움과 온정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었지만..........  로마 카톨릭이 앞세운 하나님은 그렇게 무한정의 자비와 사랑만으로 똘똘뭉친 신이 절대 아니었다.  그분은 분노하시고 무서운 징벌을 내리시며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증오의 하나님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악의 덩어리인 인간은 속죄와 영생을 얻기위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교황과 교회지도자에게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다해야만 했다.  그리이스에서 퍼져나온 찬란한 학문과 예술은 모두 죄악의 산물이었다.  인간은 더 이상 아무것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따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교회(교황)의 가르침과 지시에만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다.  학문은 오로지 한가지,  교황이 주도하는 바 대로 신을 찬양하고 복종을 받아들이고 맹세하는 방향으로 신학 한가지만이 가치있는 진리탐구였다.  글을 알 필요도 없고,  소수의 성직자만이 글을 깨우치면 되는 세상이었다.  성서를 제 멋대로 해석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것은 최악의 범죄였다.  지체없이 화형에 처해졌다.  더하여 그들은 '종교재판'이라는 이승의 세속적 법률을 훨씬 능가하는 절대적인 심판대를 세워놓고  교회를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자들을 참혹하게 제거해 나갔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교황과 최고위 성직자) 입장에서 '신과 더불어 함께하는 인간세계'를 추구하던 그리이스 문화는 한마디로 불경이자 하나님의 폄하이며.  교권(교황의 권위)을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정적이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이스 문명과 초기 로마의 문명을 모두 기독교 최고의 정적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파괴하고 지워나갔다.

  로마 카톨릭이 지향하고 지켜내야만 하는 하느님은 오늘날의 성경에 기록된바와 같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로마 카톨릭(교황)만의 입맞에 딱 들어맞게 변형되고  날조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같은 일이 장장 1천년 동안 자행되었으며,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중세 암흑기 1천년' 이라고 기록했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이 이렇게 페허로 남아있는 이면에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로마 카톨릭이 조작한 엉뚱한 하나님의 전설'이 크게 작용한 바가 엄연하게 존재했던 때문도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 지형도.(참조)

 

 

 

 

 

 

 

 

 

 

  아그리젠토(Agrigento)는 로도스와 크레타섬에 서 온 사람들이 상륙하면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생겨나서 점차 임시 거주지를 넘어서 도시의 규모로 발전하게 되자 그리이스 본토에서는 이곳을 '아크라가스(Akragas)'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대의 아크라가스가 곧 아그리젠토가 된것이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한 시칠리아의 그리이스 군대와 튀니지 지역에서 지중해를 건너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던 카르타고 사이에 커다란 해전(히메라 전투)이 마침 아크라가스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이스 해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리이스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헤라클레스 신전과 제우스 신전을 짓기로 결정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아크라가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아크라가스는 상주인구 30만명을 가진 명실상부한 그리이스 대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그네들은바다를 내려다보는 얕은 언덕의 구릉평지에 도시를 건설했고,  도시 한가운데 두 개의 강줄기가 휘감아 도는 언덕을 벼랑위의 신성한 땅인 아크로 폴리스로 만들었다.  커다란 도시를 에워싼 성벽을 쌓고,  중심의 바위벼랑 위에 또 성벽을 빼곡히 둘러 쌓았다.  그리고 나서 바다를 향해 흘러내려가는 듯한 언덕(아크로 폴리스)에 하나 둘 신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Valle dei Temple)'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참조(지형도)의 1번이 정문이다.  정문은 언덕의 윗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탄 시내버스는 우리를 9번의 후문 앞에 내려주었다.  오늘은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 신전들의 언덕을 거닐어야만 하게되었다.

 

  후문을 통해 야트막한언덕을 올라 가장 먼저 맞이하게 되는 6번(참조) 지역은 신들의 언덕 중에서 '지하세계'를 상징하고 의미하는 지역(Tempio dei Dioscuri) 이다.  이곳에는 3개의 '페르세폰(지옥의 신 하디스의 아내)'과 '디오니소스(술과 쾌락의 신)'와 '데미테르(작물과 수확을 담당하는 대지의 신)'에게 받치는 제단과 함께 커다란 우물이 함께 놓여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곳 디오스큐리 신전 지역의 백미는 '카스토어와 풀루체 신전' 이라고 하겠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의 바람끼는 익히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 제우스가 그만 유부녀인 스파르타의 레다 왕비에게 그만 필이 꽂혀 버렸다.  제우스는 신령스러운 둔갑술(?)을 빌어 레다를 범했고.......  결과로 쌍둥이인 카스토어와 풀루체를 낳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여러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충분히 진한 호기심과 함께 창작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카스토어와 풀루체의 신전도 카르타고와 기독교인들에게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어 제대로 된 잔해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화에 너무나 깊이 매료된 학자들과 미술가와 건축가들이 모여서 추측되는 본래 사원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시도를 하게되었다.  이들은 주변에 흩어져있는 다른 사원들의 잔해들을 모아다가 내개의 지붕위에 약간의 지붕이 얹혀있는 지금의 건축물을 복원 내지는 재창조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본래의 사원은 정면 6개와 측면 13개로 구성된 사원이었을것으로 추정되지만,  부분적으로 복원된 사원의 기둥은 4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흔히 우리가 아그리젠토를 떠올리면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콩코르디아 신전(심지어 유네스코 엠블레까지)으로 당연히 귀결되겠지만,  놀랍게도 아그리젠토 현지인들이 자신들의 상징으로 꼽은것은 바로 이 '카스트로와 풀루체 신전' 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이런 사실은 나에게 결코 작지않은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들만의 인식과 자부심은.......  우리의 판단이나 기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이곳이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지역이라는것을 확인시켜줄 듯이 디오스쿠리 신전 지역의 외곽으로는 붉은 황토흙의 지반이 꺼진듯한 벼랑이 깊게 파인듯 휘감아 돌고 지나간다.  마치 지하세계와 지상의 그 어떤 다른 세계와 경계를 지어 구분해 놓으려 일부퍼 도랑을 파놓은 기분만저 든다.  이 붉은 황토 벼랑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고,  이 동굴들의 상당수는 로마시대, 혹은 그 이전에 신전들의 언덕이 생겨난 이후로 그리이스인들의 무덤으로 쓰였다.  또는 이 언덕에 건설된 아크로 폴리스의 하수도 시설도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신전들의 언덕 중간엔 대단위 공동묘지군이 유적으로 남아있고,  그 아래 지하의 동굴무덤은 기독교 박해 시절엔 예배당의 기능을 담당했던 카타콤베다.  그런만큼 지금 이곳의 주변은 은근히 지하세계(하디스의 지옥)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더우기,  깊은 황토골짜기 건너편의 드넓은 초원 위에  에트나 화산 입구에 대장간을 차렸던 헤파이토스의 신전이 잔해뿐인 돌무더기 더미로 남아있다.  바로 불칸 신전 지역이다.

  지하 세계의 지역에서 발걸음을 돌리면 언덕이 나타난다.

  이제부터 천상의 신들이 거처하는 올림푸스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상에서 올리폼스산으로 향하는 언덕 초입에 여기 신전들의 언덕에서 가장 큰 매머드급 제단이 있다.  인간들이 이곳에서 올림푸스의 신들에게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올리던 거룩한 장소다.  이 제단의 뒤쪽 언덕에 '모든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신전'이 건설되었다.  물론 지금은 아주 넓고 커다란 산더미 같은 돌무더기로만 남게되었지만 말이다.

  잔해로만 남은 제우신전의 페허를 바라다보고 있으면......  시간의 덧없음을 또한번 깊게 실감하게 된다.  저토록 거대한 돌기둥들도 새삼 세월의 덧없음에 처참한 몰골로만 남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카르타고와 기독교 문명의 그리이스 신전 파괴가 얼마나 치밀하고 극렬하였는지 뼈저릴만큼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어디 그 뿐이었는가?  무너진 제우스 신전의 석재는 현대에 들어서도 인근의 포르토 엠페도클 항구를 건설할때 건축자재로 반출되어 항만공사에 사용되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시련이라고나 할까?

  페허의 잔해뿐인 제우스 신전 앞쪽의 너른 공터에는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신전 건축을 위하여 개발한 장비(거중기)들이 고증을 거쳐 완벽한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  2천 600년 전에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사용한 건설장비들인 것이다.  중세의 공성무기들도 이런 장비에서 개량되고 발전되었을것 같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와 앞선 기술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신전의 주변으로는 커다란 무덤군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다. 바닥의 암반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는데 수많은 모든 무덤은 뚜껑이 사라졌고 그 내부도 텅 비어있다.  근대의 발굴당시 많은 도자기를 포함한 유물이 출토되어 근처의 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으며,  추측컨데 더 많은 상당부분은 도굴꾼에 의해서 유실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뿐 아니라,  신전의 관리를 위해 사제들이 머물며 기거하였던 숙소와,  제사를 위하여 만든 창고와 암반에 골을 파서 만든 고대 시대의 하수 시설이 여전히 충분히 사용될 수 있을만큼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놀라운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제우스 신전 터에는 신화속의 거인을 재현해 놓은듯한 거대한 인간 조각상이 땅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다. 이런 거대한 조각상은 하나뿐만이 아니라 조금 관심을 가져보면 여기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건축물의 기둥에, 혹은 기둥 대신에 사람 모양을 장식처럼 조각하어 육중한 지붕을 받치고 만드는 것을 건축 용어로 '텔라몬' 이라고 부른다.  텔라몬은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중의 한명으로 헤라클레스의 친구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스의 여행과 트로이 침공에 참여한 영웅이었지만 말년엔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신화에서 기인하였던 것인지,  신전들의 언덕 중심에 놓였던 제우스 신전의 복원도에는 기둥을 대신하는 텔라몬 조각상 여러개가 신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텔라몬 조각상들이 제우스 신전의 파괴와 함께 다른 건물의 파편들과 함께 돌더미 속에 파뭍혀 있던것을 학자들이 발굴하여 따로 그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놓았다.

 

 

 

 

 

 

 

 

 

 

 

 

제우스 신전 터.
이토록 거대한 기단(주춧돌) 위에 정면으로 7개, 측면으로 14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섰다.

 

제우스 신전의 예상 조감도. 신전 정면의 기둥들 사이로 천장을 떠맏치고 있는 조각상이 '텔라몬' 이다.
신화속의 거인. 또는 헤라클레스의 친구를 형상화한 '텔라몬'. 지금은 하나의 건축 용어가 되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에서는 그리이스의 내음이 은은하게 풍겨나온다.

  바로 에게해의 코발트빛 짙푸른 바다냄새다.

  바람은 거친 풍랑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오니아해의 온화한 기류와 합세하여 하데스의 천둥소리가 진동하는 에트나산을 힘겹게 넘는다.

  그러다가 바람은 다시 테레니아해를 목전에 두고 붉은 언덕에 신전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아무것도 바람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고요함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시간의 위로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다.

  잠시 머무는 동안 바람은 그곳에서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지않고 욕심없이 세상을 조용히 살고싶어하는 나그네를 위로한다.

  그런 바람은 먼 바다를 향해 다시 긴 여행을 시작한다.

  세상 저편의 누군가는 그것이 선택받은 대지 시칠리아의 바람이라고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유영속으로 그리이스의 바람이 분다.

 

  덧없음 이련가.

  하릴없이 모두가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영원히 사는 신(神)들도 어디론가 모두 떠나고  그들의 거처마저도 저렇듯 페허인데.........

  하물며 찰라같은 순간을 겨우 살다가 떠나는 나그네의 처지로야 어디.........

  널려진 돌무더기 사이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떫은 시칠리아 와인에 넘치도록 취해 볼까나?

  혹, 설잠에서 깨어나 무수히 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밤을 지샐지도 모를테니까?

  또 모르지?  코발트빛 바다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나 눈부셔 눈이 아파 죽을까봐 밝아오는 아침을 거절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폐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새벽 공기와 피부에 돋는 소름이 느껴짐은 아직은 산 영혼이 몸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는것.........  한없이 이어지는 나이브함에서 이쯤에서 그만 탈출해야 할 때가 되었음이렸다?

 

 

 

  생야일편 부운기 (生也一片 浮雲起)

  사야일편 부운멸 (死也一片 浮雲滅)

  부운자체 본무실 (浮雲自體 本無實)

  인생생사 역여연 (人生生死 亦如然)

 

  삶이란 무엇인가?

  한 편의 구름이 일어남이다.

  죽음은 무엇인가?

  한 편의 구름이 사라짐이다.

  떠다니는 구름 자체가 본시 알맹이가 없는 한낮  허상이렸으니

  인생사 삶도 죽음도 본시 그와 같은 것이니라.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에 서서 테레니아해를 내려다보고 잡초더미에 파뭍힌 옛 그리이스를 바라본다.

  제우스와 아테네와 헤라여신과 헤라클레스와 콩코르디아와 헤파이스토스는 저만치 높은 하늘의 구름 뒷편에 숨어있어서 보이질 않고 페허로 변한 신들의 대지엔 슬픈 전설을 간직한 돌기둥과 널부러진 돌더미많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성스런 언덕에서 매일매일을 그렇게......... 한무더기 별이 쏟아져 무서울것만 같은 밤과 들판에 가득피어난 들꽃들 위로 이슬이 내리는 영롱한 아침과 검푸른 파도가 서로 부딪쳐 하얗게 포말로 부서지는 낮을 바라 보겠지?

  그제도, 어제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까지고........

  살짝 질투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8개의 높은 도리아식 기둥만이 남아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은  신전의 언덕에서도 조금은 특이한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면으로 5개의 기둥과 측면으로 15개의 기둥이 말해주듯이,  다른 신전들에 비해 훨씬 길쭉한 모양의 형태를 가진 신전이었다. 아그리젠토에 아크로 폴리스가 건설되면서 제우스 신전과 헤라클레스 신전이 가장 먼저 건설되었다고 기록이 전하여 지는데,  그 시기가 대략 기원전 6세기 경으로  고고학자들은 실제로는 이곳 헤라클레스 신전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바로 뒷편에 보다 높게 건설되었고,  또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여 초기의 발굴자들은 이 신전이 아테네 신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으나  곧 아테네 신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테네 신전은 여기 신전들의 언덕이 아닌 아그리젠토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현재의 신도심 가운데에 세워졌으나,  로마시대에 카르타고에 의해 페허로 변한 아그리젠토에 새롭게 이주한 로마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토대위에 새로운 기독교 교회가 지어졌다.  지금 아테네 신전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아그리젠토의 아테네 신전이 남아있었더라면,  파르테논신전 못지 않았을 것이다.

 

  '신전들의 언덕'이 있는 지역은 대부분이 과수원 지역이다.

  신전들 사이를 오가는 길목 곳곳에서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올리브 나무들을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목나무를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가는 영원하고 신령스런 나무라고 부르는데, 올리브 나무는 수천년을 산다고 한다.  올리브를 그리이스인들에게 전해 준 아테네 여신이 왜 그토록 그리이스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올리브는 처음 열매를 수확하기까지 30년 이상이 걸린다 한다.  인간의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자신이 수확까지를 바라고 심을 수 있는 나무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가 성립된다.  올리브 나무는 자손들을 위해 훌륭한 선조들이 선물로 심는 나무인 것이다.

  여행중에 한 올리브 농장에 들려서 실제로 3000년을 넘겼다는 보호수로 지정된 올리브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농장의 주변으로 보호스는 아니었지만 근 3000년 가까운 수령을 가진 올리브 나무 여러구루를 확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이 싱싱한 올리브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고목에 되면 생산량은 줄어들지만 품질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아테네 여신)의 축복인가?

  먼 조상중에 한 분이 자손들을 위해 바위산에 500 구루의 올리브나무 묘목을 심고 30년을 정성들여 가꾸었다.  30년이 지나서 그 아들이 수확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장장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가면서 올리브 농장 하나로 가족들이 생계를 꾸려가면서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면........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고 볼 때,  100세대 이상이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아내려 갔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올리브 500 구루면 농장이다.

  거기다가 올리브는 아주 척박한 땅에서 주로 자라면서,  첫 수확 이후로는 그 어떤 품도(재배 경작 경비) 더는 들어가지 않는다.  혼자서 저절로 크고 매년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거름도 주지 않고 소독도 없고 풀을 뽑는것도 없고 인공수정이나 적과나 전지도 필요치 않다.  완전한 자립형 과수의 최고봉이다.  가을에 털어서 줍기 좋게 바닥에 장막을 깔거나 풀을 깎고 장대로 털어서 수확하는 것이 전부다.  그게 일년 농사의 전부다.

 

  그리이스의 신화나 역사나 문화예술이나 모든 학문은 바로 이 올리브나무에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리이스 문명의 찬란함은 오로지 이 올리부나무의 축복이었다.

  중세 로마의 카톨릭은 고대 그리이스의 모든것을 철저하게 배제를 넘어서 파괴하고 근원적인 제거를 시행했다.  신화는 지워져서 로마식으로 재창조 되었고,  모든 학문과 서적은 불태워 졌고  신전과 문화유산은 무너트리고 깨트려 버렸다.  그리이스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려 애썼다.  그런 로마로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그리이스의 잔재가 있었으니 바로 올리브와 포도 였다.  굳이 유럽의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서구사회에서 올리브유나 와인이 없는 생활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것이 현실이 아닌가?

  여러 종교에서 금지하는 음식들이 있듯이........  혹, 그리이스인들의 절대적인 식문화라 해서 중세 로마 카톨릭이 올리브유와 와인을 이교도 음식으로 규정해서 금지시켰다면.........  지금쯤 유럽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고 있을까?

  '신전들의 언덕' 여기저기에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표정에 담고있는 올리브 나무들이 제법 있어서 그 곁을 지나다니다 보니 이런 허접떼기 상념까지 떠오르게 되었나보다.........

  신전에서 아그리젠토 신도시를 올려다보게 되는 구릉지대에는 빼곡히 과실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가지마다 새하얀 작은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흡사 조팝나무를 보고있는 듯 하다.  조금은 낯설기만 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 농장의 주된 재배 과실은 다름아닌 (아몬드)다.  아그리젠토는 세계적인 아몬드 산지다.

 

 

 

 

 

 

 

올리브 농장이 아니라 아몬드 과수원이다.  초콜릿 속의 아몬드는 알아도 아몬드 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Villa Aurea.

 

영국의 군인이자 귀족인 알렉산더 하드캐슬 경.

 

 

 

 

 

 

 

 

 

 

 

 

 

 

  온통 뿌연 이날의 하늘은 제법 싸늘한 지중해성 계절풍으로 바뀌어 저절로 옷깃을 세우게끔 만든다.

  계속해서 언덕위의 신전들을 관람하면서 싸늘해진 해풍에 마냥 몸을 내맡겨야 하는 것도 서서히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여행 초기 이스탄불에서의 날씨에 비하자면 불편을 토로해서는 안되겠지만 시칠리아에서의 여러날 중에서 가장 날씨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그런 날이었다.

  이 언덕의 중간에 휴계실 겸 간이 카페가 있다. , 비수기라고 문을 닫지 않았기만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옮겨본다.

  헤라클레스 신전에서 몇걸음만 옮기면 우측으로 정원이 깔끔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진 아담한 별장 같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신화에 등장하는 어느 신의 후손이 대를 거듭하다가 오늘날의 현실속에서도 이렇게 신성한 장소에 버젓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로 건물은 딱 알맞은 정도로 기품이 넘쳐난다.

  '빌라 아우레아(Villa Aurea)'로 영국의 군인이자 귀족이었던 (알렉산더 하드캐슬 경)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다.

  하드캐슬 경은 고고학에 아주 관심이 많은 군인이었다. 퇴역한 후에 시칠리아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 아그리젠토에 필이 꽂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아그리젠토에 눌러앉아 살기로 결심했다. 헤라클레스 신전과 콩코르디아 신전 사이에 몇 채의 집이 있었는데(당시에는 이 신전들의 언덕에 많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 선택한 것이 바로 지금은 빌라 아우레아 이다. 하드캐슬은 이곳에 살면서 당대의 이름난 고고학자였던 '피로 마르코니(Pirro Marconi)'와 함께 신전들의 계곡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면서 쌍둥이 신전과 헤라클레스 신전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신전의 도굴을 막고 철저한 고증 후에 발굴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자금이 필요하다. 하여 그는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 발굴과 복원과 유지를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모습운동을 벌여나갔다. 후에 그는 아르리젠토에서 사망하였고 아그리젠토에 뭍혔다. 그의 열정과 열의와 헌신은 고스란히 인근의 아그리젠토 박물관과 신전들의 언덕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하겠다. 하여 그가 살던 거처는 현재 아그리젠토 고고학 기념관으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실제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지난 여행에서는 주인을 만나 빌라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외부에서만 지켜 솔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신전들의 언덕에 밤이 찾아오면 하드캐슬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틀림없이 밤하늘 어딘가에 별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빌라 아우레아에서 언덕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대로를 따라 채 몇걸음도 옮기기 전에........ 저만치 언덕 위에 강렬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주아주 매력적인 황금빛 건축물이 나타난다.

  김영하 작가는 시칠리아를 찾아오는 모든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최종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잡아끄는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그 표현에는 나도 충분히 동의한다.

 

  어떻게 본다면....... 파르테논 신전 보다도 더 그리이스 적인........ 그리이스 신전건축의 백미가 바로 그곳에 있다.

  '콩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은 너무도 당연하게 콩코르디아 여신에게 헌정된 신전이다.

  그렇다면 그리이스 신화 속에서 콩코르디아 여신은 어떤 신이었을까?

  의외로 '콩코르디아'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어도 그 여신의 존재에 관해서나, 그 여신이 어떤것을 상징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지금 남아있는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아름다운 그리이스 신전으로 파르테논 신전과 쌍벽을 이루는 콩코르디아 신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로마에서 만나보게 되겠지만, 포로 로마노에 가면 페허로 남았지만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콩코르디아 신전을 만날 수가 있다.

  세계 유형 문화유산을 보존하는데 앞장서는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UNESCO)'의 엠블레를 여기 콩코르디아 신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는 이 신전의 위용을 한층 더 높여주는 결정적 구실을 담당하기에 충분했다.

 

 

 

 

 

 

 

 

 

 

 

  '콩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을 올려다 보면서 잠시 여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시칠리아 여행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여행지가 아그리젠토라고 한다면,  여행자를 아그리젠토까지 강력하게 잡아끄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여기 콩코르디아 신전이라고 하겠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 고대 그리이스 건축의 정수를 우리에게 전하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그리젠토의 현지인들은 아그리젠토의 심볼로 콩코르디아 신전을 꼽지않고  겨우 기둥 네개만 남아있는,  그나마 제치의 기둥들이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부서진 석재들을 고르고 끼워맞추어 겨우 신전의 한 귀퉁이만을 세워놓은 쌍둥이 신전을 아그리젠토의 상징물로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어떤 생각과 가치관이 이렇듯 우리와 다른것인가?  이럴땐 그저 이렇게 표현해 볼 수밖에......... '난감하네'

  지중해연안과 소아시아 지역에는 콩코르디아 신전이 많이 흩어진채 오늘날에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아그리젠토의 콩코르디아 신전처럼 그리이스 시대에 만들어진 사원들은 아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신전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우리가 흔히 그리이스 신화속에 등장하는 콩코르디아 여신에 대해서 별다른 기억이 없듯이, 신화속의 주요 등장인물이 12신을 제외하고 별로 기억되지 못하는 수많은 신들중의 한명이 콩코르디아 여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왜?  왜 로마의 신전 유적중에는 콩코르디아 여신의 신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일까?  왜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들 보다도 콩코르디아 여신을 중요시 하였을까?

  그것은 로마 역사상의 매우 중요한 한 장면에 콩코르디아 여신이 등장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혹은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분기점에서 '리키니우스의 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 리키니우스 법을 로마인들은 콩코르디아 여신과 동일시하며 영원히 기억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시민권자들에게 리키니우스의 법률이 영원히 중요하였다면 그들에게는 콩코르디아 여신의 존재가 꼭 그만큼 소중하게 가슴속에 여원히 새겨져 있었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이스에는 없었고  로마에는 있었던 '리키니우스의 법'은 무엇인가?

 

 

 

 

 

 

 

 

 

로마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복구되기 전의 '포로 로마노 전경'
포로 로마노(포룸) 내에 있는 '콩코르디아 신전'의 남아있는 기둥과 잔해.

 

 

 

 

 

 

 

 

 

  로마는 사실적으로 따져보자면 고대 그리이스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이스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미노스. 크레타 문명을 거치는 동안에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북부에 머물면서 거의 원시부족국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이스가 도리아인들의 합세로 도시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머지않아 제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즈음에서야 로마는 이제 겨우 에트루리아 라는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제국으로 성장한 그리이스가 세계를 놓고 페르시아 제국과 두번의 전쟁을 치를 즈음에서야.......   로마는 공화정을 기반으로 비로소 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기원전 509년)

  집정관. 원로원. 민회 라는 삼각체제의 공화정을 수립하였다고는 하나,  귀족출신의 집정관(장관을 비롯한 행정부)들이 원로원(국회)와 늘 짜고치는 고스톱판이 되다보니 평민중심의 민회(지자체)는 항상 있으나마나한 존재일 뿐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입법.사법.행정)의 완성 위에서 꽃 핀다'고 열심히 떠드는 사람이 주로 국회의원들 뿐이고,  그들의 횡포를 제어하라고 만들어준 행정부(고위 공직자)가 저들과 짜고 포커판을 벌이는 형국이니,  로마시대나 오늘날에나 일반대중(평민)의 속은 타들어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이렇게 이천년을 훨씬 넘기고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타락이 로마제국을 결국 멸망으로 이끌었다면.........  작금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제 정신을 차리거나,  이 땅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영원히 추방시켜야 할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

  분노한 로마의 평민들은 마침내 (기원전 494년) 몬테사크로(시청광장?)에 모여서 촛불(파업)을 들었다.

  로마시민들이 든 촛불은 (평민의 병역 거부) 였다.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전면에는 항상 용맹한 로마의 군대가 있었다.  그 뒤에 훌륭한 정치가와 제도와 문물이 따랐고, 뒤이어 열린 사회적 가치관과 찬란한 문화와 예술이 뒷받침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평민 출신의 막강한 로마 보병군단이 없이 귀족출신의 로마 장교들만으로는 이민족과 전쟁을 벌일수도,  아니 로마를 지켜내기도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될것이 너무도 뻔해보였다.  과거 카르타고와의 참상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로마의 지도층이었다.

  로마의 지도층이 항복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로마는 '호민관 제도'를 창설했다.  평민들의 권익옹호를 위하여 평민들이 스스로 호민관을 선출하였고,  선출된 호민관은 나아가 집정관이 될 수있고,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평민 중에서 명망이 드높은 사람이나 전쟁에 나가 큰 공적을 쌓아 장군이된 사람이나,  평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호민관이 되고,  호민관이 원로원에 진출하고 더 나아가 집정관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황제가 되기도 했다.(실제로)

  이는 곧 평민계급의 힘이 몰라보게 커져만 갔다는 뜻이된다.

  드높아진 시민의식은 곧이어 대대적인 정치개혁에 대한 주장과 요구로 나타났다.(2500년전 로마시대나 오늘날이나....)

  시민들은 귀족들이 독차지한 주요요직을 평민들에게 더 많이 배분하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선출하는 집정관 마저도 시민들이 직접 뽑을 수 있게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국회의원들이 통치자를 뽑던 제도를 시민들의 직접 선출방식으로 바꾸자는 요구)  이는 모두가 평민 출신의 호민관 리키니우스가 입안한 새로운 법률이었다.

  귀족들의 거부와 거센 저항은 예측 가능한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미 단합된 평민의 힘을 맛본 시민들의 촛불의식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와중에 켈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로마의 존폐 위기가 찾아왔지만 시민들의 동의와 협조가 없이는 군대가 형성될 수가 없었다.  귀족들은 또 물러서서 양보할 수 밖에 없게되었다.

  '리키니우스의 법률'이 제정 되었다.

  이제 로마는 완전하게 열린 사회(현대의 민주주의 못지않은)라는 제도가 정착되면서,  대외적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로마가 주도하는 평화의 시대)'를 외치는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를 이끌어 가는 두 계급인 귀족들과 평민계급은 '리키니우스 법' 앞에서 협력하고 단결하여서 위대한 로마를 건설하자고 함께 맹세 하였다.  하여 이를 기념하고 증표로 삼기 위하여 로마의 한복판인 '포로 로마노'에 신전을 지었다.  하나로 뭉쳐진 완성된 로마인들이 세운 신전이 바로 '콩코르디아 신전'이었으며,  그 헌정 이유는 '콩코르디아 여신'이  바로 '화합과 조화'를 관장하는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의 '하모니(harmony.조화)'가 바로 콩코르디아 여신에게서 탄생한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찌 생각해 본다면 '콩코르디아 여신'은 사실 그리이스인들에게는 별반 중요하다거나 사랑받지 못하던 처지였는데,  리키니우스 법률의 재정으로 인하여 로마인들에게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절대적으로 추앙받는 신이 되었던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가..........  신전들의 언덕에 매료되어 생의 말미를 오로지 이곳에서 헌신했던 '알렉산더 하드캐슬경'의 경우만 보더라도,  집(빌라 아우레아)의 오른쪽에 가장 빛나는 '콩코르디아 신전'을 두었음에도,  왼편의 허물어져 잔해뿐이 '헤라클레스 신전'과 '쌍둥이 신전'을 더 아끼고 사랑하여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이와중에 함께 일하던 고고학자 '마르코니'가 언덕 위에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던 화려한 신전 주위를 발굴하던 중,  땅속에서 작은 표지석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표지석에 라틴어로 '콩코르디아 여신'이라 적혀 있었다.

  하여 그 신전의 이름을 '콩코르디아 신전'이라고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신전에서는 그 어떤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중세에 들어 카톨릭 교회로 사용되기 위하여 개조되면서 옛 흔적들조차 모두 사라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마르코니가 이 신전을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확정지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비난이 뒤따랐다.  현재까지도 가설 수준에서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규정된데 대해서 이를 믿지 않는 학자들이 여럿 있다.

  어쩌면......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 중에서.......  아그리젠토에 있는 20개의 신전중에서 밝혀진 이름의 신을 제외하고.......  남겨진 엉뚱한 신이 여기 이 신전의 주인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지금도 가능한 상태다.

  당장은...... 남겨진 것이 너무도 없는 상태에서 지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표지석이라도 출토되었으니...... 일단은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결론지어 졌다. 

  '콩코르디아 여신'은 '조화. 화합'을 상징하고 있지만,  신화속 여신의 삶은 그런 상징과는 동떨어져 있다.  

  신(神)도 불행해 질 수 있다고 친다면  분명 콩코르디아 여신은 불행한 신중의 하나일 것이다.

 

  'Each man bilives only his experience.'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동시대를 살다 간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 엠페토 클래스는 말했다.

  '사람은 각자가 직접 겪은 경험만을 믿으려 한다.'

 

 

 

 

 

 

 

 

 

 

콩코르디아 신전 앞에는 추락한 이카루스가 누워있다.

 

 

 

 

 

 

 

(추락한 이카루스) 청동상은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 작품이다.
이카루스 청동상 날개 뒷면에 있는 메두사의 조각상.

 

 

 

 

 

 

 

 

 

   신전들의 언덕에서 콩코르디아신전 앞에 나뒹굴고 있다시피한 이카루스의 청동상을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쌩뚱맞다'는 반응이었다.  비록 소재가 그리이스신화를 담고있다고 하여도 2천오백년이나 된 고풍스런 건축물 앞에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겨나는 청동상은 적지않은 이질감으로 다가와 여행자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신의 능력에 까지 도전한 인간 교만의 처절한 결말' 쯤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추락한 이카루스의 청동상은 꽤많은 화제와 관심속에 이제는 콩코르디아신전에 있어서나 혹은 아그리젠토 여행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유명 관광상품이 되어 버렸다.

  2011년 시칠리아 관광청과 고고학회는 아그리젠토에서 세계적인 조각 전시회를 열었다.

  당대 최고의 현대조각가중 한명으로 칭송받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작품들이 신전들의 계곡에서 고대 신전들과 함께 여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당시 이 전시회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화제와 이야기 꺼리를 만들어 냈다.  수많은 여행자와 아티스트들과 저널리스트들이 아그리젠토를 찾았다.

  조각전시회로서의 엄청난 성공의 신화를 만들어냈으면서 성황리에 전시회를 마친 추진위원회는 작가인 이고르 미토라이에게 특별히 요청하여 전시했던 한 작품을 남겨놓게되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카루스의 추락' 이다.

  하지만........  이고르 미토라이를 내가 아그리젠토에서 처음 만난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될 줄이야......

  혼자 떠났던 두번째 유럽여행에서 였을것이다.

  로마에 도착한 나는 이탈리아여행 안내책자와 준비했던 자료들을 모두 내던져 버렸다.

  달랑, 로마 시내지도 한 장이 내가 가진 여행의 준비물 전부였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과 튼튼한 두 다리와 주체하지 못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모르는 배짱이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테르미니역 앞에서 당당하게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로마의 도심 전부를 오로지 걸어서 샅샅히 둘러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3일만에 로마 전체를 패스할 결심을 했었다.  결론은적으로는 이틀반만에 바티칸 박물관을 제외하고 로마를 모두 섭렵해내고 말았다.

  그 시작으로 처음 방문한 곳이 테르미니역 근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이었다.

  다음에 이어질 로마여행기에서 다시 소상하게 다르게 되겠지만,  안젤리성당은 로마시대의 초대형 공중목욕탕의 일부를 교회로 개축한 것이며, 성당의 파사드(정문 건축)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 하여 더욱 유명해진 성당이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조각미술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작가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가 아닌 현대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라는 사실을 여행을 모두 끝내고 한참 뒤에서야 알게되었다.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 분수대가 있는 공화국 광장과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전경.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든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의 파사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의 왼쪽 청동문.
산타마리아 델리 아나젤리 성당의 오른쪽 청동문.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의 내부에 전시된  '이고르 미토라이'의 조각상 작품.

 

 

 

 

 

 

 

 

 

 

  도대체 이고르 미토라이가 누구이길래.........

  도대체 이고르 미토라이의 실력이 어느정도 이길래........

  감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로마에서 버젓이........

 

  로마 테르미니역 인근의 공화국 광장 앞에는 로마시대 어마어마한 크기의 초대형 공중목욕탕 건물의 일부분을 교회로 개축하는 역사가 벌어졌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회가 바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다.

  그리고 성당 정면부분의 파사드는 르네상스의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이다.  그 파사드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육중한 나무문이 양쪽에 놓여 있었다.  오랜 세월에 마모와 훼손이 심해서 부득이 문을 교체하게 되었는데.........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전통적인 목재로 된 문이 아니라,  21세기에 버젓이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대작가의 작품으로 교체한다고 하였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어쩌자고 르네상스의 전통을 대단히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로마에서.........

 

  2014년에 타계한 위대한 현대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의 작품 주제는 대부분 인체(人體) 이다.

  인체의 아름다움과 인체가 가진 취약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불완전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인체의 가장 이상적인 비율을 항상 추구하였다.  많은 고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조각상들이 훼손되고 부서진 모습에서 그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다.  하여 그의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었거나 신체의 일부분들이 훼손되거나 잘려나가기도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부러 땅에 파뭍히거나 훼손되어 방치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여기 아르리젠토를 비롯해 로마. 밀라노. 로잔. 크라쿠프. 바르셀로나 등의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들과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세계적인 일류기업들의 본사나 재단건물을 비롯해 유수의 대형 박물관 등지에서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의 혈통은 확실한 폴란드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3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전쟁 막바지의 참혹한 현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에 강제 노역으로 끌려 온 폴란드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프랑스 용병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포로가 된 폴란드인 이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폴란드 미술의 무한한 자부심이다.

  아주 잠시.....  사진 몇 장으로 이고르 미토라이의 작품세계를 슬쩍 엿보기로 하자.

 

 

 

 

 

 

 

 

 

 

 

 

 

 

 

 

 

 

 

 

 

 

 

 

 

 

 

 

 

 

  콩코르디아신전을 나서면서부터 헤라신전 앞까지는 시원하게 뚫린 제법 넓직한 포장도로가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아몬드 과수원 너머로 저만치 산자락에 아그리젠토 신도시가 병풍처럼 또는 그림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우측으로는 드넓은 평원과 그 사이의 구릉지대를 관통하는 지방 도로 위로 많은 차량들이 오가고 있다.  그 초록빛 평원 너머로 테레니아해가 드넑게 펼쳐진 지중해가 보인다.

  이 평원은 모두 지난날 아그리젠토의 중심이었던 도시구역이다.  가운데에 '신전들의 언덕'인 아크로 폴리스를 놓아두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도시(참조 사진 A.B.C.D)가 건설되었고 30만의 인구가 상주했던 장소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주변의 풍광은 대단히 뛰어나다.

  신전들의 언덕 중앙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반대편으로 아담한 휴계소가 등장한다.

  아그리젠토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심한 애증의 관계로 자주 토로되는 문제의 카페이자 기념품점이며 미니슈퍼이며 음식점인 '도릭 바(Doric Bar)'이다.

  착하지 않은 가격, 절대 맛있다고 표현할 수 없는 음식들, 매우 썰렁하고 휑한 분위기로 정평이 나서,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여행자들과 여행 안내 책자를 통털어 이곳을 칭찬하는 후기를 절대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휴계소이다.

하지만,  신전들의 언덕 일대를 통털어 유일한 휴계소이자 카페이자 음식점이며 기념품 가계라는 엄청나게 강압적인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이 부근에서 그나마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따끈한 커피나 맥주를 마실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나머지는 허접함이 묻어나는 그저그런 장소로.......  나머지는 무조건 그냥 패스.......

  이젠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언덕에서 마지막 휘날레를 멋지게 장식해 줄 '헤라 신전'으로 향하는 일만이 남았다.

  좀 떨어져 있고 약간의 경사진 언덕길을 한참이나 걸어올라가야만 하는 코스지만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이 언덕은 발걸음을 지대가 높은곳으로 옮겨가면 옮겨갈수록 아름다운 경치의 차도가 달라진다.  좌우를 살펴가면서 또 포장도로 옆으로 남아있는 고대의 유적들과 성벽을 살피다보면 발걸음은 이 언덕의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헤라신전의 입구에 당도해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영원불멸이라 여겨진 신(神)이라는 존재에 대한 선망이 너무나 절대적이었기에,  그 신들의 존엄과 절정의 아름다움과 불멸의 기상들을 생생하게 대리석 조각에 새기고 남겨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함께 생활하면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인간에게 영웅적인 서사시를 더하거나 신과 비견될 수 있을만큼의 지혜나 아름다움을 덧입힘으로서, 완전함과 불멸이 상징하는 신성(神聖)함을 은근슬쩍 훔치고자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전들의 언덕을 거닐면서 문득 떠올리기는.......  불후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올림푸스의 신들이 거닐고 있는 신전들의 언덕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자신들의 삶에 스스로 바치는 아름다운 송가(頌歌)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신들을 빌어 이렇게 아름다운 신전들을 짓고 시와 음악을 지어 바치고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로 절대적인 존경과 추앙을 받쳤지만,  사실은 슬쩍슬쩍 신의 영영까지 넘보고  때론 자신들의 존재를 결코 신들에 배해 뒤쳐질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리이스인들의 다소 우회적인 자화자찬의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신과 님프와 인간과 괴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던 역사 이전의 시대는 어떠했을까?

  단순히 신화라고 정의 내리는 그 시대에도 인간들의 기본적인 생각과 생활패턴과 추구하는 바는 오늘날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것만 같다.

  호머의 여행과 그의 기억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이 인류문명사로 치면 청동기 시대에 벌어진 사건의 나열이라 하겠다.  우리가 흔하게 선사시대라 하지만 뒤떨어진 구닥따리로 치부하는 고대시대에 그렇게 찬란한 문학과 예술과 신과 인간들의 교류와 무한한 상상력이 후대에 남아있는 빛나는 건축물이나 문화재 이상으로 저토록 영원할 수 있단 말인가?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시대로 변모해가는 발전의 이면에는 항상.......  앞선 시대는 뒤떨어진 암흑기 정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대가 철기문명의 후기쯤이라면 앞선 청동기 시대는 그저 문명의 암흑기나 원시 야만의 시대쯤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머가 지중해 바다를 건너 붉은 황토빛 언덕 위에 20개나 되는 신전(파르테논 신전과 비슷한 위용과 아름다움을 갖춘)이 길게 도열하듯 늘어서 있는 신전들의 언덕에 서서 작열하는 태양과 푸르다 못해 검푸른 테레니아 바다를 바라보면서 멀리 동족에서 불어오는 그리이스의 냄새가 배어있는 바람을 맞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청동기 시대에서는 신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듯한 고풍스런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그 안에 신과 영웅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환상과 전설로만 점철된 허구의 시대라고 폄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자.  어쩌면 지금 이순간 우리가 숨쉬고 있는 찰라같은 시간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떨어져나가고 지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환상과 전설로만 치부되는 그 청동기 시대의 역사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깊게 새겨져 영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 될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언덕에서도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모든 관심과 시선은 최종적으로 '콩코르디아 신전' 한 곳으로 귀결된다고 표현했다.

  그러했음에도 정작 아그리젠토 현지 주민들은 달랑 기둥 4개만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여기저기서 돌덩이들을 가져다가 끼워 맞추어 놓은 '카스토어와 풀루체 신전(쌍둥이 신전)'을 아그리젠토의 랜드마크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그리젠토 고대도시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오른 언적에 아크로 폴리스를 세우고,  그 성스런 지대에 여러개의 신전들을 지었으니 모든 신전들의 위치에서 둘러보는 주변의 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가능하다.  콩코르디아 신전 자체의 풍광만큼이나 그곳에서 둘러보고 내려다보고 멀리 보이는 테레니아해의 코발트빛 풍경까지 이루다해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리라.

  당연한 이유일 수 있겠으나......... 신전들의 언덕은 윗쪽으로 올라갈 수록 주변 풍경이 앞도적으로 상승한다.

  그런 언덕의 가장 윗쪽에 가히 아그리젠토 최고의 전망이라 할 수있는 멋진 풍경을 간직한 신전이 하나 서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와 추측되는 복원도를 가만히 살펴보자면,  여기 이 신전은 아랫쪽의 콩코르디아 신전과 닮아도 너무나 닮은 모습이다.  한마디로 완벽한 쌍둥이 건물의 신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신전은 카르타고에게 정복당한 후에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로마 시대에 복원되었으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또다시 참혹하게 파괴되어,  한 쪽면엔 6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반대 쪽으로 13개의 기둥이 잔해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아그리젠토의 풍경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그런만큼 여기 이 신전이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을때의 아그리젠토를 상상해 보는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지 싶다.  저만치 발치 아래에 있는 지금의 콩코르디아 신전을 고스란히 이 자리에 옮겨다 놓았을 때를 가상으로 하고나서 신전들의 언덕과 고대의 아그리젠토 구시가지를 둘러본다면.......  오늘날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쏠리는 관심과 시선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말것이다.

  비록 그것이 적절치도 않고 불가능하다 해도..........  기꺼이 나는 기둥들만 겨우 남아있는 이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썰렁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 자리의 신전을 아그리젠토 최고의 신전으로 꼽겠다.  콩코르디아 신전이나 카스토어와 풀루체 신전이랑 결코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결단코 <템플 D> 하고는 바꾸지 않겠다.

 

 

 

<템플 D> 명명된 이 신전의 실제 주인은 누구일까?
<템플 D>는 이런 모습의 신전이었다.  그것은 콩코르디아 신전과 거의 쌍둥이 같았을 것이다.

 

 

 

 

 

  <템플 D>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아주아주 신성스런 땅의 이름이다.

  혹,  당신은 이곳이 누구를 위한 신전이라고 생각되는가?  왜 템플 D 라고 부르는지 아시는가?

  더하여........   세상 사람들이 지금 그냥 지어 부른 신전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이 신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19세기 말엽이되자 일련의 고고학자들이 아그리젠토의 고대 그리이스 유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산업혁명 이후 제국으로 발전한 영국이 앞장서서 인류역사의 위대한 유산들을 싸그리 긁어모으기 시작한데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세계의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약소국에 대한 문화찬탈을 시작한 것이다.

  아그리젠토를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과 미술가들은 아그리젠토에 있는 신전들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하여 발굴된 유물과 고대의 기록들을 찾아내 '신전들의 언덕'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다.  지도 위에 신전 하나하나의 위치와 남아있는 잔존물에 대한 실측과 체계적인 정리가 뒤따랐다.  그러면서 언덕의 아랫쪽에서 시작하여 윗쪽으로 약식으로나마 발굴이 시작되었다.

 

 

  아크로 폴리스 황토빛 언덕 위로 잎이 무성한 올리브나무와 아몬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의 이곳저곳에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그 숲길 사이로 옷주름이 한없이 부드러운 튜닉을 걸친 사람들과 겨우 치부만을 가린채 거의 나신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신(神)인지 사람(人)인지 아니면 님프나 중간인인지 도무지 분갈해 낼 자신이 없다.

 

  '.......  황금빛 안뜰 한가운데 자리잡은 제우스의 주변으로 여러 신들이 앉아있다.  헤라 여신과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와 프로메테우스가 함께 와인을 마신다.  아테네가 정원 저쪽에서 다가오고 그 뒤를 헤르메스가 따라 들어오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주방의 불을 지피고 있고  대장장이 헤파이토스가 무엇인가 조리기구를 새로 만드는 모습도 보인다. 창고에서 술항아리를 꺼내고 있는 사람은 비록 뒷모습뿐이지만 그가 디오니소스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어 보인다.  어디 이름난 신들 뿐이겠는가?  이오와 다프네 아도니스와 피그말리온과 니오베 들도 테세우스의 영웅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마당 가운데 모닥불가로는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대한 앙금이 다 가시지 않았음인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옆에서 코웃음치듯이 웃고있는 남자는 분명 오디세우스가 틀림없다. 안티고네와 펠레로페의 모습도 보이고 메넬라오스와 엘렉트라도 신들 사이를 오가면서 인사를 나구고 있다.  그리고 저만치........  정원을 지나 올리브나무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람은 호머가 틀립없어 보인다.'

  이곳이 천상(天上)인지 아님 지상(地上)인지 구분한 수 있는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내게는 온통 황토빛 산언덕과 올리브 숲이 보일 뿐이다.

 

  이런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에 아주 심취해 있는 고고학자가 있었다.  그는 지금 아그리젠토 고고학 발굴단 일원이었으며,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 문학. 음악. 예술과 건축 모든것이 그가 생ㄱ가하고 추구하는 이상향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때문에 그는 아그리젠토 유적 발굴에 뛰어든 아주 명망있는 학자였다.

  그런 그에게 올림푸스의 12 지신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은 좀 특이하게도 '헤라 여신' 이었다.  아테네. 제우스. 아폴론. 헤라클레스. 아프로디테 보다도 실제 그리이스인들이 가장 좋아한 신은 (결혼)과 (출생)의 영역을 담당하는 헤라여신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는 실제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리이스 사람들이 올리브 열매를 전해 준 아테네를 가장 추앙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고 이미 입증된 사실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 가장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일을 관장하는 헤라여신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면 나름 그 또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질투)와 (복수의 화신) 이라는 측면이야 워낙 바람끼로 똘똘뭉쳐진 거룩한 남편을 둔 덕분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아크로 폴리스의 가장 낮은쪽에서 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헤파이토스 신전(불칸)에서 시작하여 지하의 세계 영역을 발굴 한 후에 가장 큰 제단이 놓인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고, 다시 헤라클레스 신전으로 옮겨갔다.  이 언덕에 20개의 신전 유적 흔적이 남아있으니 어디에선가 가장 멋진 헤라 신전을 꼭 발굴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그리고나서 큰 희망을 가지고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한때 기독교의 교회로 개축되어 오랫동안 사용했던 결과로 지붕은 사라졌지 만 신전의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그리이스 건축물에 헤라신전의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발굴 도중에 다른 고고학자에 의해서 인근에서 '콩코르디아'라는 표지석이 발견되면서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곳이 '콩코르디아 신전'이라는 쪽으로 기울여졌고,  종국엔 그렇게 결론이 났다.

  발굴팀은 언덕의 가장 높은 끝지점에 마침내 다달았고  이제는 달랑 신전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거기에다 아무리 발굴을 해 보아도 그 어떤 단서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이름없는 신전(無名神殿)'으로 남게될 형편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참여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마도 아프로니테의 신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그 의문(?) 가득한 의지의 고고학자는 뜻밖의 어뚱한 주장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이 무명의 신전이 '헤라 라시니아 신전(Hera Lacinia)' 이며,  올림푸스의 헤라 여신을 모시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위해 그가 제시한 증거는 바로........ 3세기 로마시대의 역사학자였던 '퀸토 풀비오 플라코(Pinto Fulvio Flacco)의 오래된 저서였다.  풀비오가 자전적 일기나 기행문 형식으로 써 내려간 저서에는 '어물어진 신전의 복원을 위하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너무도 아름다운 언덕에 서 있는 헤라 라시니아 신전의 대리석 지붕을 모두 뜯어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서있던 낡은 신전을 보수하기 위하여 낡은 대리석 지붕을 모두 헐어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그리젠토의 아크로 폴리스에 대한 언급도 없고,  신전들의 언덕도 거론하지 않았다.  더하여 인근에 여러 신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는 사실 기록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억지스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그리젠토에 마지막 남은 사원 하나가  주변 경치가 빼어나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지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헤라 여신에게 받쳐진 신전이라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완강하게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더 어처구니가 없는것은  그의 그런 억지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언덕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이 사원을 '헤라 신전'이라 부르고 그것이 모두 근거있는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다.  로마 신화에 근거해 (주노 신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 신전이 아프로디테 신전일 수는 있어도 결코 헤라 신전은 아니다.

 

 

 

 

 

 

 

퀸토 풀비오 플라코가 거론한 진짜 '헤라 라치니아 신전'

 

 

 

 

 

  퀸토 풀비오 플라코가 아그리젠토에 다녀갔다는 기록조차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어쩌면 풀비오는 평생 지금 헤라신전이라 불리는 이 신전을 멀리서나마 바라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풀비오는 역사학자 이전에 당시 로마의 해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러니까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군이이었다.  그는 해군 장군으로서 시칠리아 메시나 해협을 건너 우측으로 이오니아해가 바라다보이는 타란토 만 서쪽의 케이프 칼럼에 오랫동안 주둔하였다.  케이프 칼럼은 흡사 우리나라 진해를 연상하면 되는 로마 해군사령부가 위해해 있는 항구였으며, 케이프 칼럼의 옛지명이 라틴어로 '라치니아'이다.  이 항구의 언덕위에 고대 그리이스의 웅장한 신전이 하나 전해져 내려왔으나 역시 카르타고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페허로 변해 지금은 단 한개의 기둥만 남아있다.  그 신전의 이름이 바로 '헤라 라치니아 신전' 이다.

  결국 엉뚱한 항구도시 케이프 칼럼에 있는 '헤라 라치니아 신전'의 기록을 엉뚱한 곳에다 가져다 적용한 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헤라여신은 어디까지나 헤라여신이다.  헤라 여신을 모신 헤라신전은 많이 있어도,  지명을 가져다 붙인 '헤라 라치니아 신전'은 아그리젠토와 케이프 칼럼 뿐이다.  결국 '신전들의 언덕'에 헤라 신전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혹,  지금의 헤라 신전이 아프로디테 신전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금의 콩코르디아 신전이 헤라 신전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겨진 보다 확실한 근거 자료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콩코르디아 신전의 실제 주인은 누구일까?

  헤라 여신은 혹 아그리젠토에는 발걸음조차 못 내딛은것은 아니었을까?

 

 

 

 

 

 

 

 

 

 

 

 

 

 

 

 

 

 

 

 

 

 

 

 

 

  절대음감(音感)과도 같은 절대미감(美感)의 세계로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우리를 이끌어 간다.

  조각과 도자기를 넘어서 기둥만 남은 페허의 돌무더기 속에서도 그들이 구현해 냈던 경이로운 경지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감탄이 절로 흘러나온다.

  초기의 로마인들이 고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받았던  컴플렉스가 결코 무리는 아니었던듯 싶다.  감동과 흠모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았겠는가?  땀흘려 노력한다고 해서 절대적인 미감이 하루아침에 성취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초기 로마인들은 그리이스문화와 예술 중에서 적어도 조각에 대한 분야에서만은 감히 추월하거나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세상 어디에도 흔하디 흔하게 놓여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을 가져다가 새롭게 재전시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로마는 반듯이 극복해야만 할 대상으로 고대 그리이스 문화와 예술을 선정하고 특히 조각분야에 심혈을 기울인다.  로마의 도시마다 조각아카데미를 세우고 이름난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을 죽어라 열심히 복제 시킨다.  복제를 통해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서 그리이스를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거시적인 프로젝트였다.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르네상스 전후의 수많은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모두 이 '그리이스 조각 극복 프로젝트'의 산물이라 해도 좋을것 같다.

  아그리젠토 발굴에서 찾아낸 도자기나 일부 조각상들은 인근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아그리젠토의 무자비한 폭군 테론의 무덤.

 

 

 

 

 

 

 

 

 

 

 

 

  노숙자는 아니고 분명 여행자 처지일터지만.......  벤치가 없으면 저렇게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서 잘도 쉰다.

  그러면서도 지나치는 꼬마가 있으면 저렇게  곳바로 손녀 사진 찾아보기에 열중한다.  할머니는 분명 할마시인게 맞다.

  신전들의 언덕을 내려와 도로에 나서니 이제껏 잘 참아주었던 잔뜩찌프린 언덕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언덕위로 사정없이 몰아쳐 오는 바람도 심상치가 않다.

  돌아오는 시내버스 차창밖으로 멀리 헤라 신전을 올려다 본다.

  한동안 '신전들의 계곡'에서의 시간을 쉽게 털어내지 못할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인장들과 과수원 땅바닦을 넘치도록 가득채운 야생화들과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리아식 신전들의 나열은,  비록 그것들이 심하게 훼손 내지는 페허처럼 파괴도었다손 쳐도,  오히려 그로인해서 더욱 신비롭고 영롱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해주는것만 같다.

  인위적인 복원 보다는.........  더 이상의 훼손이 없기를.......

  과수원 사이로 아그리젠토 역사상 최고의 잔인한 폭군 테론의 무덤이 스쳐 지나간다.  아크로 폴리스에서 별도로 떨어져 있어서 가가지 가보지는 못했었는데.......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파릇파릇 생기가 돋아나는 이 요상스런 태리 할망구님.......

  기차여행은 뭐라 딱 꼬집지 않아도 묘한........  어떤 가슴뿌듯한 여운같은 그런 신기함이 서려있다.

  우린 이제 팔레르모로 다시 돌아간다.

  내일의 여행을 찾아서...........

 

 

 

 

 

 

 

 

 

 

 

 

 

---  다음은 '한번 더 팔레르모'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따끈함이 절실하던 아그리젠토 여행을 마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