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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시간도 마음도 와인처럼 숙성되는 바로크의 도시, 시라쿠사

by 피안재 2020. 8. 11.

 

 

 

 

 

 

 

 

 

 

 

 

 

 

 

 

 

 

 

 

 

 

 

 

 

 

 

 

 

  그리이스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파르테논 신전' 이다.

  기원 전 아테네가 도시국가로 형성되면서부터 도시 한가운데의 바위 언덕위에 성채를 쌓고 아크로 폴리스가 처음 건설될 때부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 신전이 그자리에 건설되었었다.  하지만 그 처음 만들어진 신전이 지금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니다.  처음 건설되었던  아테네 신전은 아테네의 역사가 처참하게 짓밟혔던 단 하루 동안에 페허로 파괴되었다.

  기원 전 5세기 경의 그리이스는 여러 도시국가가 성립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은 제 3 왕조의 시대였고, 또한 누가 뭐래도 당시 세상의 중심은 소아시아 지역인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현재의 이란) 이었다 할 수 있겠다.  페르시아는 당시에 문명이 들어선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다스리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그리이스 도시국가들은 그저 손톱에 낀 때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미개한 촌동네 하나쯤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컴플렉스는 여기에서 생겨났고,  반작용이 그리이스 로마 문명을 극대화하고 미화하여 백인우월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시기까지 유럽의 문명은 결코 동쪽의 소아시아에 배교될 수가 없었다)

  페르시아는 이미 이오니아해를 비롯해 터키 전역과 헬라스 지역(불가리아 남쪽 해안지역)을 직접 다스리고 있엇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점령지역은 너무나도 멀었다. 페르세폴리스(수도)에서 이 지역까지 오려면 밤낮으로 말을 달려 두달이 걸린다고 했다.  페르시아는 초기 그리이스 도시국가 시대의 이오니아에 퍼져있는 수많은 섬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여 이때 등장하는 것이 (참주 제도)이다.  르네상스를 이야기 하려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등장하는데  그 메디치가문이 바로 참주 제도의 전형이다.

  참주 제도란 현지의 주민이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거나 뽑아서 통치를 대행하는 제도이다.  세습되는 봉건 왕조와는 좀 결이 다른 제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주들이 현지인들의 추천으로 뽑혔지만,  뽑히고 나서는 본성을 드러내고는 악질적인 독재자로 변모하는 경우가 하도 비일비재해서,  겉으로는 좋은 제도가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자를 양산하는 치명적인 제도로 인정되고 있다.

  하여 페르시아는 이오니아해 대부분의 섬에 참주를 뽑아 다스리게 하고,  페르시아에 일정한 조공을 받침으로써 의무를 다하고,  주변에서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활을 맡겼다.

  헌데 참주들 간의 모함과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다.  밀레토스의 참주가 낙소스를 차지하고 싶어서 페르시아 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지원군이 온 것은 꽤나 한참만이었는데 그만,  합세하여 쳐들어 간 원정대가 낙소스군에 참패한 것이다.  지원군은 돌아갔고 밀레토스 참주는 난처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 하게 낙소스가 내분으로 허망하게 몰락하면서 시칠리아 타오르미나로 도망을 친 것이다.  낙소스를 거져 주운 밀레토스 참주는 거만해 졌다.  하여 느닷없이 페르시아로 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전 이오니아해의 여러 섬과 본토의 도시국가들로 번져나갔다.  정말 별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촌동네였지만......  이젠 대제국의 체면때문이라도 더이상 외면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게된 것이다.  다리우스 페르시아 왕(황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단 한번의 원정으로 제국이 변방의 분란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본떼를 톡톡히 보여주어야만 했다.  일부 기록에는 백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써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이스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그리이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하나로 재구성해보면 어떻게 될까?)

  가장 시급하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아테네였다.  스스로 그리이스의 맹주를 자신해 왔을 뿐더러,  페르시아의 포고문에 이오니아의 반란을 배후에서 사주한 아테네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라톤 전투'가 등장 한다.

  뿐만아니라 그리이스의 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아테네의 위대한 통치자(그러나 말년은 몹시 불행한) '플루타크 영웅전'의 히로인 '페리클레스'가 등장한다.  아테네의 수호 통치자 페리클래스와 총사령관 밀티아데스가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불멸의 전쟁담을 후세에 남겨주게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위세에 눌린 아테네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요 사면초가요 진퇴양란이었다.  그날 모처에서 페리클래스와 밀티아데스가 몰래 만났다.

  다음날 밀티아데스는 그리이스 전군사력의 절반이자 육군의 전부인 1만명의 정에군을 이끌고 일백리(42km 쯤)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 진을 쳤다.  (마라톤 경기의 효시로 알려지고있는  전령이 42.195km 를 달려와 승전보를 전했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그 전령은 실은 지금 아테네에서 약 150km 떨어진 스파르타에 막 도착해 있었다.

  전령은 스파르타에 페리클레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페르시아의 공격 앞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한데 그날이 스파르타의 국경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번뿐이 닷새간의 축제 기간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스파르타 왕은 지원을 거부했다.  전령은 이 사실을 한시라도 바삐 페리클레스에게 알려야만 했다.  군복도 벗어 던졌다.  무기도 버렸다.  그는 맨 몸으로 뛰고 또 뛰었다.  42.195 km를 뛴것이 아니라 밤을 달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울트라 마라톤' 150km를 달린 것이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가 남긴 말은 단 한마디였다. '스파르타는 오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죽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페리클레스는 곧바로 아고다 광장에 서서 전 아테네 시민을 대상으로 명 연설을 남긴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당장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듯이 이겨낼 것입니다.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후퇴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하는 아테네를 잠시 떠나야 합니다.  지금부터 모든 아테네 시민은 저를 믿고 서둘러 항구에 대기중인 함선에 오르십시요.  아테네를 포기 합니다.  버립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돈이나 보물도 모두 포기하십시요.  지금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것은  아테네 인의 생명과 자존심 뿐입니다.  반듯이 되돌아 올것입니다.  반듯이 되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가진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할 때입니다.  이대로 함선에 오르십시요.  시간이 없습니다.  단 한시간 후면 배는 떠날 것입니다.  남는것은  페르시아의 군대가 몰려오는것 뿐입니다.  나는 아테네 여신께 맹세합니다.  반듯이 다시 돌아올것이며  이제껏 보다 더욱 찬란한 아테네를 다시 건설할 것이라고........'

  그 길로 페리클레스는 스스로 앞장서서 함선에 올랐다.

  아테네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찌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아테네가 정작 위대한 것은.......  정확히 한시간 후에 모든 그리이스 함선들이 떠났다는 사실이다.  아테네 도심에 정막과 고요만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지도자를 그만큼 믿고 지지하고 따랐다.  그 점이 더 위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사실은 정탐병에 의해서 곧바로 마라톤 평원에 그리이스의 최정예 육군 1만명과 대치하고 있는 페르시아 사령부에 보고 되었다.  다리우스 왕 주재하의 비상 대책회의가 열렸다.  결론은 이러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래스는 뻔한 패배를 받아들이고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1만명을 보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고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목숨을 이 싸움터에 버릴 생각으로 온 용사들이다.  그들이 부모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진군을 막아선 동안에 페리클래스는 전투함인 함선에다가 피난민들을 가득 태우고 벌써 지평선 너머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아테네는 이미 텅 비었다.  죽음을 각오한 1만의 군대만이 끝까지 시간을 벌려고 저 자리를 지킬 것이다.' 라고 말이다.

  페르시아는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다.

  굳이 동귀어진(함께 죽자) 하자고 나오는 아테네 군대와 맞부딪칠 이유가 없었다.  적당히 대치하여 경계만 하고,  실제로는 군대를 뒤로 이동시켜 아테네 도시를 함락시키고 차지하면 이 전쟁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저 군대도 스스로 항복해 올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여 절반 이상의 군대를 빼돌려 배와 우회로를 이용해 아테네로 진군했다.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승리를 접수하러 가는 중이었다.

  아테네는 텅 비어 있었다.  아테네인을 태운 군함은 이미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  더우기 어찌나 급하게 내빼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집집마다 밥상에 차려진 음식이 그대로 있었고,   값나가는 금은보화를 챙겨 도망칠 겨를도 없었던 것으로 보일 정도로 모든것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이제 나머지는 승리를 자축하는 것 뿐이었다.  비록 원하던 그리이스 여자들은 빠졌지만  대신 수많은 금은보화의 전리품에다가 질 좋은 와인이 넘쳐났다.  페르시아군대는 소 잡고 돼지  잡고 말 잡고  닭도 잡고 승리의 축제에 들어갔다.  모닥불이 싫으면 말 그대로 도시를 불태웠다.  술에 취한 군대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 신전을 부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군대의 힘자랑에 아테네 신전이 부서지고 불에 타기 시작했다.  아테네 도시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그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약탈을 하고 파괴를 자행했다.  그런 축제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새벽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테네 도심은 여전히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승리에 도취했던 페르시아 군대는 술에 취해 여기저기 쓰러져 나뒹굴고  잠들어 있었다.  그들마다 품에 감싸안은 자루에는 값진 보석이며 진주가 가득했다.

  그때였다.  어제 지평선 너머로 아테네 사람들을 싣고 부랴부랴 도망쳤던 아테네 함선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인근의 섬에 물과 식량과 사람들을 모두 내려 놓은 아테네 해군은 절박한 각오와 함께 이제부터 국가의 미래와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 모든것을 내맡긴 것이었으며,  그들 맨 앞에 페리클래스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한편 날이 새기가 무섭게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마라톤 평원의 1만명 정예병 앞에서 총사령관 밀티아데스가 준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 밤에 우리 모두의 고향 아테네는 함락 되었다.  지금은 페르시아 군이 가득 들어 차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것을 잃었다.  하지만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는 모두 살아있다.  페리클레스가 저들의 침공에 앞서서 사람들을 모두 피신시키기로 했다.  어마어마한 페르시아의 공격 앞에서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여 총사령관인 나도 동의 했다.  우리의 자존심이자 우리의 모든것인 아테네는 지금 페르시아의 손 안에 있다.  하지만 빼앗을 수 있기에 나도 통치자의 의견에 동의했던 것이다.  통치자는 아테네 사람들의 안전만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자 부득이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너희들이 가졌던 재산 모두가 고스란히 지금 페르시아 군대에 손아귀에 넘겨져 있다.  어찌되었건 불가능하고 태산 같았던 페르시아 군대의 절반 이상이 지금 아테네 도시 안에서 밤새 승리에 도취해 축제를 벌이고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다.  오로지 이것을 위해서 통치자는 아테네를 과감히 버렸던 것이다.  분산된 적은 여전히 넘보기 조차 어려울만큼 막강하지만.......  그래도 페르시아 군대의 절반만이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게된 것이다.  날이 밝고 해가 뜨면 우리의 통치자와 해군이 전력을 다해 떠났던 아테네를 되찾을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적들은 비록 술에 떨어졌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는것을 알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내쫓으려는 아테네 군대는 어디까지나 해군이다.  아테네를 되찾는데는........  제군들의 부모와 형제와 자식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게 하는데는........   그리이스 최강의 용맹한 군대..... 여러분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눈 앞의 전투에서 당장 승리하는것만이 아니라, 되돌아 가서 해군과 합류하여 아테네에서 페르시아군대를 영원히 추방하기까지의 시간이다.  우리의 용기와 헌신이 곧 아테네의 미래가 될것이다.  제군들이여.  우리는 이제 돌맹이로 바위를 내리 치듯이 저 페르시아 대군의 진지로 선제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오로지 돌격이며 오로지 승리 뿐이다.  승리가 확신되면 내가 미리 통보한 일부 군대가 남아서 현장을 정리하고 포로 문제와 방어 태세를 확립한다.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이곳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승리하고 우리는 가족이 기다리는 아테네로 달려가야만 한다.  달려가서 그들을 지키기 위한 다음 전투를 치루어야만 한다.  그 뒤에........  살아서 지나간 이 순간을 다시 이야기 하자.  용맹한 아테네의 군사들은 나를 따라라.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아테네다.'

  아테네 군은 선제 공격을 감했했다.

  아테네의 함락을 통보받고 전쟁이 종말을 고했음을 이야기 나누며 전리품을 챙겨서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던 페르사아 군대는 순식간에 치명타를 입게된 것이다.  앞 뒤를 재고 물 불을 가릴 새가 없었다.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1만의 공격 앞에 6만명의 군대가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은 삽시간에 끝났다.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앞장 서서 뛰기 시작했다.

  7천명의 중무장 보병들도 뛰기 시작했다.  아테네까지의 거리는 약 42km지만 각개 병사가 무장한 갑옷이며 창과 칼과 방패의 무게가 족히 30kg에 가까웠다.  찌르고 내려치는 참혹한 전투가 방금 전까지 벌어졌었지만  그들에게 진짜 전투는 아직 시작조차 된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자신들의 영원한 고향 '아테네 탈환'이었다.

  혹 전열을 갖추어 페르시아 군이 다시 되돌아 온다면 미래는 여전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면한것은 이미 해군이 시작했을 아테네의 탈환이었다.  하여 마라톤 평원에 방어 진지를 구축할 필수 병력에  부상 당해서 뛸 수 없는 군사를 빼고 나머지 전체 7천 명의 군대가 중무장을 하고 지금 전투의 열기가 다 식기도 전에 다음 전쟁터를 향해 뛰기 시작한 것이다.  마라톤 평원의 전사들은 뛰고 또 뛰었다.

  과거 올림픽의 마라톤 기록이 3시간하고도 중반대를 넘는것을 보면,  중무장한 군사들이 마라톤 평원에서 뛰기 시작하여 아테네에 도착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적을 창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도전은 끝내 성공했다.

  통치자 페리클레스의 작전은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아테네 군의 페르시아군 토벌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고 아테네 외곽에 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지원군이 가세하면서 도심 공방전으로 전세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페르시아 군대가 나누어 졌다고는 하지만 숫자나 군사력면에서 절대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에,  감히 그 누구도  마라톤 평원에서 그리이스 군이 승리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마라톤 평원의 군대가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그 먼거리의 시차를 뛰어 넘어서 방금 아테네의 성 밖에  도착을 한 것이다.  기적이었다.  오늘날의 그 어떤 가정을 들이댄다 하여도 그것은 달리 기적이란 표현 밖에는 더 이상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그리이스 최강 아테네 육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페르시아 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부터 시작한 과감한 살륙전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페르시아 군대는 이란땅에 도착할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아테네는 처참한 모습으로 불에타고 허물어졌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도 불타고 허물어졌다.  아테네 신전의 피해는 특별히 더 컸다.  적군인 페르시아인들이라고  아테네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몰랐겠는가?

  하지만 피해가 참혹하리만치 큰만큼 아테네인들 마음속에 새로운것이 자리잡게 되었다.  '세상은 이제 아테네의 것' 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감히 대제국 페르시아에 대항할 마음조차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테네는 그러했고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페리클래스는 다시 아테네 시민들 앞에 섰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재산상 손해를 입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사과했고,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으로 신전들이 파괴된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그리고 반성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더욱 굳건한 아테네를 약속했고 새로운 신전 건축을 약속했다.  아크로폴리스는 새롭게 재건되었고,  특히 새로운 아테네 신전인 지금 모습의 파르테논 신전을 새롭게 건축했다.

  페리클레스 시대를 그리이스의 최고 전성기라고 역사가들을 적고있다.

 

 

 

 

  이렇게 아테네가 페르시아라는 대제국과 유럽의 문명권을 놓고 한판 전쟁을 벌이는(기원 전 480년 경) 사이에,  사실은 그리이스의 코린트인들이 건너와 세운 시라쿠사에서도 커다란 변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당시의 지중해 정세를 살펴보자면  시라쿠사 역시 그리이스 영역에 속하는 초기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고는 있으나,  아직 우리가 흔히 폴리스 라고 하는 도시 국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에는 해당하지 못하였고,  또 기록에  참주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소속은 그리이스 동맹에 속하데 밀레토스 처럼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서 참주를 두고 간접 통치를 하던 시기로 나는 이해하고 생각한다.

  참주제도(추천제 통치자)는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효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제 왕조처럼 세습이 법률로 보장되지 않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치 기간을 늘리려고 하고,  재위 기간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것을 누리고 축적하려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애를 쓸 껏이다.  그것이 독재자를 양산하게 되는 모순이 되는것이다.  오늘날에도 무소불위의 대통령 중심적인 권한에 집중하면,  단임제. 삼선 금지제도가 아니면 곧바로 종신 대통령이나 총통이 마구 생겨날 것이다.  역시 독재자 엘리트 코스가 되는 것이다.

  테릴루스는 시라쿠사의 참주였다.

  그런데 아주 못된 참주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였다.  견디다 못한 시라쿠스의 시민들이 군인들과 합세하여 쿠데타을 일으켰다.  선봉자는 용맹한 겔론(Gelon) 형제였다.  혁명은 성공하였고 시민들은 투표로서 형인 겔론을 새로운 참주로 임명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겠는가?  시라쿠스의 전체역사를 통털어 가장 악락한 독재자가 겔론이었을 줄을......

  후세의 평가를 전하기 이전에........  겔론에게 쫓겨 도망친 전 참주 테릴루스는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나름 시라쿠스를 잘 다스려 왔으며 겔론 형제는 자신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복원할 수만 있다면 그는 영원토록 시라쿠사를 자신이 좌지우지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찾아낸 묘법이 바로 지중해 바다 건너 튀니지 지역의 카르타고의 힘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의 군대를 끌어들여 겔론 일파를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영구집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테릴루스는 마침내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고 카르타고의 군대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 온 카르타고의 군대가 오르티지아 섬 건너의 '히메라(Himera)'에 상륙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우연찮게 한 어부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겔론에게 입수되고 말았다.  형인 겔론은 정치적 수단이 탁월했지만  동생 겔론은 단순하고 용맹이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이스와 카르타고의 엄청난 충돌 같았던 사태는  겔론의 기습공격으로 어이없게도 너무나 쉽게 결론이 나고 카르타고는 바다건너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전쟁은 아주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만  이미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겔론으로서는 이 기회를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다.(세계 역사 속에서 독재자의 기본적인 패턴은 항상 어떤 정해진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그가 이룩한 실로 어마어마한 업적인 것으로 치장하기 시작한다.  독재자의 기반을 여기에서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이스 내에서도 변방의 아주 별볼일 없는 시라쿠사에서 탁월한 지도자 겔론이 새롭게 부상해 지중해를 호령하는 카르타고의 대군을 일시에 궤멸해 버린 대역사를 창조해 낸 것이다.  겔론은 이 히메라 전투를 사방에 엄청나게 과장해서 기록으로 남기는데 혈안이 된다.  심지어 히메라 전투를 페르시아 해군을 격퇴시킨 살라미스 해전에 비교하는가 하면, 전설의 테르모 필레 전투(영화 300의 배경)에 비견되는 엄청난 승리였다고 자화자찬을 여기저기 늘어 놓는다.

  전형적인 독재 예찬론자였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한 페리클래스가 아테네를 재건하면서 아크로 폴리스에 새로운 아테네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을 짓는다는 소식을 겔론도 접하게 되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는 곧 승리를 상징하면서 또한 그리이스의 정신이기도 했다.  겔론은 자신의 미래에 그 아테네 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닭았다.

  하여, 자신의 위대한 업적인 히메라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시라쿠사에도 승리를 상징하는 '아테네 신전'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겔론이 세운 이 신전을 오늘날에 우리는 '시라쿠사 대성당(Duomo di Ciracusa)'라고 부르는데,  본래의 이름은  (Cattedrale Metropolitana della Nativita di Maria Santissima)이 맞다.

 

 

  아무튼 겔론은 자신의 독재자 이력을 가리고 업적을 후대에까지 전해주기 위해서 엄청난 대역사를 벌인것이다.

  수백년 전 코린트인들이 처음 당도한 오르티지아는 시칠리아 바닷가의 육지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작은 섬에 지나지 않았다.  육지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고립 내지는 여러가지 불편이 따르겠지만  오히려 육지의 성들이 일부러 해자를 건설하는것에 비하자면 스스로 방어하기에 커다란 장점도 있는것이다.  일직부터 해양문화가 발전했던 그리이스인들은 곧 오르티니아과 육지의 가장 가까운곳에 방벽을 쌓아올리고 나무 다리를 설치하여 육지와 원활하게 교통하게 했다.

  오르티지아는 아주 작은 화산섬이었다.

  도시의 건설과 함께 코린트인들은 섬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언덕에 제단을 만들기로 하였다.  훗날 도시가 모두 건설되고 융성해지면 자연적으로 신전들이 지어지겠지만,  초기의 시기에도 올림푸스의 신들에게 제물을 받치고 기도를 올릴 제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이스 도시국가들이 발전해 나가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오르티지아의 가장 높은 언덕에 바위산을 깍아 평탄화 작업을 하던 고린트인들은 깨달았다.  오르티지아섬 자체가 하나의 대리석 광산이었던 것이다.  굳이 육지 저쪽에서 대리석을 가져다 쓸 이유가 없게된 것이다.  신전의 석재를 현장에서 자급자족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평탄 작업에서 생산된 대리석은 필요한 양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여 그들은 확보된 평지 아래의 지하로 대리석을 채취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라쿠사의 제단'은 아주 깊고 크고 너른 지하 공간 위에 건설되었다.

  참주 겔론은 오르티지아에서 신전을 짓기에 이미 들어서 있는 제단의 터 보다 좋은곳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그는 독재권력을 휘둘러 기존의 제단을 모두 파내 버렸다.  그리고 아주 어마어마한 평지(현재의 광장)를 조성했다.  그 위에다 '아테네 신전(Athenaion)'을 도리아식 건축으로 짓기 시작했다.  시라쿠사에 처음 상륙한 그리이스인들은 코린트인들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자신들의 코린트 문화가 존재했었다.  도리아식은 단순하지만 장엄하고 웅장한 미를 추구한다.  이오니아식은 약간 건축의 크기를 줄여가는 대신에 아기자기함을 더한다고 할까?  여기에 화려함을 더한것이 코린트식 문화였다.  하지만 겔론은 도리아식을 고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했다.

  르네상스에 등장하는 파사드의 장미창에 해당하는 지점에 청동으로 만든 아테네 여신의 방패를 은도금해서 내걸었다.  외형은 단순한 도리아식 건축이었지만  겔론의 욕심이 크게 작용했던만큼 본토의 파르테논 신전에 버금갈만큼 내부에는 수많은 화려한 장식들로 치장되었다. 벽면에 걸린 카르타고와의 기병전을 모사한 벽화는 후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가 기록으로 남길만큼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급성장을 거듭한 시라쿠사는 그리이스 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되고,  번영을 구사한 끝에 아테네를 능가하는 도시라는 평가마저 얻게된다.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로 향하던 배들은 오르티지아의 아폴로 신전을 벌리서 발견하게되면 비로소 위험한 항해에서 벗어났다고 안도와 함께 아테네 여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시라쿠사를 떠나는 배들은 아텐 여신의 방패가 보이는 곳까지 와인을 마시며 신을 찬양했고,  신전이 시야에서 사라져가면 꽃을 바다에 던지며 여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시라쿠사 대성당(두오모) 전경. 좌측의 건물은 시라쿠사 시청사로 아르테미스 신전이 나란히 있던 자리이다.

 

 

 

이토록 사무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또 있을까? 이것이 '바로크'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이 건물의 실제 주인이었던 '지혜의 여신 아테네'에게 한쪽 벽면을 허용하고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위의 사진처럼 성인의 유해를 모셔 놓은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유명하거나 유해 보관이 많을 수로 훌륭한 교회라 여긴다.  또한 이 성인들의 유해는 수많은 치유를 비롯한 기적을 행한다고 믿고 있다.

  유럽의 모든 교회와 도시와 국가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가지고 있다.  수호성인의 위대한 신비로운 힘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때마다 나는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되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특히 대한민국의 타종교를 질시하다 못해 멸시하는 '성령 제일주의 기독교인들'에게 말이다.  지금 보듯이 저렇게 유럽 기독교인들의 '성인 유해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과연 '기독교 성령' 인지 '토테미즘적 미신' 인지 묻고 싶어진다.  그들에게도 호통을 내치시고들 유해를 거둬 납골당으로 보내야 하는것이 아닌가?

  지나친 수호성인ㅇ 대한 유럽사람들의 맹신은,  성인의 유해를 두고 전쟁을 불사하고 빼앗고 훔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유해를 분배해서 나누어 차지하기까지 한다.  그 어디에도 절대 신성(神聖)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왜 기독교를 유일신 종교하 하는가?  신은 하나이고 믿음의 대상도 하나이어야만 하는것이 아닌가?

  기적을 행한다는 성인들의 유해가 난무하는 세상........  힌두교와 다를바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의 기적은(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  구약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른 한번으로 족하고,  신약에서는 죽어서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의 기적 한번이면 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적이 너무 비일비재하고 많이 일어나면 신성함이 떨어지고 점점 더 큰 놀라운 기적이 아니면 인간들은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성인들의 유해가,  또는 성인들의 명성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인가?  설혹 성인들과 연계해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치자.  그것 또한 성인이 행함이 아니라 성인 뒤에 계시는 전능하신 분의 배려와 허가가 있어야 기적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를 여행하면......  신은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그분 한 분 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분의 권위와 존엄과 기적을 행하는 능력 등을 모두 허락을 받은 신의 대리인들이 차고 넘친다.  과거의 성인에서 현재의 지도자까지 말이다.  나는 그들이 말해 온 유일신이 그 중에 어떤 분을 가리키는지,  내가 아는 그분만이 유일신인지 헷갈린다.

  성인이 무한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성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것에는 문제가 있다.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넘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게 신이지 뭐야?  그게 바로 신인 것이다.  그럼 신이 엄청나게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  신은 하나인데 신앙은 여럿이다?  이렇게 되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표상' 아닌가?

  기독교의 유일신은 하나다.  하지만......  권한을 위임받은 진짜 신보다 훨씬 진짜 같은 존재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헐!

  내가 그릇되었나?

  내가 아는 기독교는 저들의 기독교와 다른것인가?

 

  이럴때면 나는 저 멀고 깊고깊은 카즈베기 산자락의 작은 정교회들이 그리워진다.  그곳에서 초대교회를 만났다.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다.

 

 

 

 

 

 

 

  어찌되었던 겔론의 바램대로 아테네 신전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 바램도 헛되이 기원 전 212년에 시라쿠사는 로마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오랫동안 시라쿠사를 염원했던 로마였기에,  로마가 점령한 이후에도 지중해로 뻗어나가려는 해상 전초기지로서 시라쿠사는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다.  그렇게 시라쿠사는 번영을 구가함에 변하가 없었지만  아테네 사원을 비롯한 여러 그리이스 사원들의 처지는 도시의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문제는 독재자들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독재자는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신전을 치장했는데,  새롭게 등장한 로마의 독재자들은  신전의 부속물들을 뜯어서 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로마가 선발한 시칠리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의 신전 찬탈은 극에 달했다.  그 폐해가 어찌나 극심했던지 원성이 마침내 로마의 원로원에까지 전달되었다.  원로원은 순회판사(암행어사)에 '마르크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를 파견한다.  그런데 키케로는 이미 시라쿠스를 다녀간 적이 있고  누구보다도 시라쿠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키케로는 그리이스의 플라톤 사상을 로마 역사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로마가 기독교 왕국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어려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함께 공부하였으나  그는 플라톤에 더욱 심취하였다.  그는 이 플라톤 철학을 더욱 깊게 연구하기 위하여 젊은날 그리이스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두루두루 여행을 한 경험이 있었다.  더우기 플라톤이 서너 차례나 찾아와 학문을 연구하던 시라쿠사는 키케로의 여행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시라쿠사에 암행을 나온 키케로는 현재의 총독 베레스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만한것인지를 세세하게 깨달았다.  아테네 신전의 방패도 사라졌고,  카르타고와의 기병전 벽화도 뜯겨져 사라져 버렸다.  더하여 신전의 피해는 아테네 뿐만이 아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도 거의 초토화 지경이었다.  로마로 돌아 온 키케로는 사정을 원로원에 보고했고,  원로원은 시칠리아 총독 바레스를 소환했다.  바레스는 잘못을 모두 부인했고,  이에 키케로는 '바레스 반박문' 이라 불리는 장문의 명 연설문을 통해 바레스의 위선과 파행을 낱낱이 탄핵하기에 이른다.  바레스는 로마에서 영원히 추방되었고,  키케로는 일약 법무관(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며,  다음으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오르게 된다.

  신전은 껍데기 뿐인 텅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고 이백여년이 지나자 고대 그리이스 문화와 신전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이 점점 심화되기 시작했다.  신전은 사악한 이교도의 잔재이며 미신이라는 새로 주입된 관념이 이런 만행을 정당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모든 신전이 파괴도고 허물어 졌지만  아테네 신전만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로마로 전도 여행을 떠난 베드로가 여기 시라쿠사를 경유했었다는 사실과,  로마의 관리로 소아시아에 파견되던 바울도 여기를 지나쳤고,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바울이 사도가 되어 로마로 돌아오면서 또 여기 시라쿠사에 들려서 전도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두 신전의 지하 동굴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는 일리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일부의 사제(수사)들은 로마 카톨릭이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첫 교회를 열고자 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처음 시칠리아에 복음을 전한 이 장소에도 교회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아테네 신전은 외형이나마 그대로 보존 할 수가 있었고,  이제 이 신전은 기독교의 예배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기 6세기 경까지 시라쿠사의 기독교인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도리아식 신전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벽돌을 쌓아 막고 양쪽으로 8개의 아치형 창문을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목재 지붕을 이용해 신전을 세개의 본당이 있는 비잔틴 성당으로 개축한 것이다.  마침내 새롭게 탄생한 비잔틴 성당을 640년 '조시모(Zosimo)' 주교는 시라쿠사 대성당이라 이름짓고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였다.

  비잔틴이 쇠토하면서 서고트족과 반달족이 다녀갔다.  하지만 교회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9세기에 아랍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였는데,  아랍은 시라쿠사를 회생 불능의 상태로까지 철저하게 파괴했다.  아랍에게 시라쿠사는 그만큼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시라쿠사는 도시로 건설되기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다.  다만 대성당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아랍인들은 대성당에 대해서만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지극히 일부만 손을 보고서는 그대로 모스크로 활용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흔적을 제거하고 이슬람 모스크로 개축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잠시 빌어서 사용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140년의 아랍 지배동안 대성당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지하동굴에서 시라쿠사에 처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아랍세력인 이슬람교 치하에서도 원형을 보존하면서 살아남은 대성당은 정작 기독교도인 노르만에 의해서 아랍 세력이 모두 물러간 다음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노르만 왕조는 대성당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했다.

  중앙 본당의 벽면을 더 놓이 올리는 공사가 일어났고,  여닫는 창문을 달았다.  대성당의 전면 외관도 대폭적으로 수정하여 완전 노르만 양식의 파사드를 만들어냈다.  고딕 양식의 육중한 문을 설치했으며 장미창을 만들었고,  더하여 종탑을 완성했다.  대성당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의 노르만식 성당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여기에는 아마도 로마 카톨릭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찌 본다면 노르만 왕조야 말로 교황에 의해서 이곳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전까지 시라쿠사 대성당은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어디까지나 그리이스 정교회의 교회였다. 그러던것이 노르만의 시칠리아 회복과 함께 이제는 엄연히 로카 카톨릭에 속하는 교회의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정교회의 흔적이 남아있는 비잔틴 양식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여 노르만 양식으로 과감하게 대폭 수정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대성당의 곳곳에는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요한 기사단의 마크와 같은 십자가)  모두 제거되지 않은 채로 몇몇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억지로 그리이스 신전의 흔적을 모두 지워낼 수 없었던 것처럼  정교회의 흔적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하지만.......  어느날 이 노르만 양식의 파사드가 저절로 파괴되었다.

  1542년 지진으로 종탑이 부서져 버렸다.  응급 복구를 한 후,  종탑을 무시하고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693년의 대지진으로  대성당의 전면부인 노르만 양식의 파사드 전체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시라쿠사 두오모 위원회는 거의 60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대성당의  완벽한 복원과 파사드 재건축에 몰입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에 성당 복원 분야와 파사드 재건축 분야에 나누어서 건축 공모가 열렸다.  그런데 두 분야 모두에서 시칠리아 북부 트리파니 출신의 안드레아 팔마가 우승했다.  이제 모든 권한은 팔마의 손으로 넘어갔다.

  재능과 패기가 넘치던 '안드레아 팔마'는 마침내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눈이부시도록 멋지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파사드는 이제껏 내가 본 최고의 건축물이 틀림 없다.

  팔마는 파사드의 완성을 위해 기꺼이 팔레르모 출신의 마라비티를 초청했다.  그리고 마라비티는 정문 계단 옆의 왼쪽의 사도 베드로와 오른쪽의 사도 바울 동상을 완성 시켰다.  엄청난 개성과 강렬함으로 시선을 잡아 당기는 작품이다.

  한편 파사드의 두번째 중앙문으로 들어가면 벽면을 등지고 3개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운데가 바로 성모 마리아 동상이다.  이 아름다운 대성당은 바로 그 동상의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것이다.  왼편은 시라쿠사의 수호성인이자 이곳에서 순교한 루치아 성녀의 조각상이고,  오른쪽은 시라쿠사의 첫번째 주교가 된 성 마르티안  동상이다.

  대성당을 나오면서 어떤 아쉬움에 한번 더 뒤를 돌아보니 칭칭 꼬인 덩굴을 형상화한 시칠리아 바로코 양식의 전형이랄 수 있는 화려한 출입문 양쪽의 기둥이 시야에 확 들어 온다.  참으로 아름답다.

  바티칸(베드로 대성당)의 제단에는 교황만이 오를 수 있는 연대가 있고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가 4개의 기둥에 의해 떠받혀 있는데,  마치 베르니니가 만든 그 기둥을 연상 시키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성당을 나와서도 진한 감동에 쉽사리 이 광장을 벗어날 수 없을것만 같아 광장 건너편의 카페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커피와 오렌지 쥬스와 크림빵으로 요기를 겸하면서 말이다.

  카페 우측의 그리이스 궁전 건물 또한 대단히 유서 깊은 명소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폴레옹이 몰타를 점령하고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로 향했을 때,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나폴레옹의 유럽 귀환을 막기 위하여  영국의 넬슨 해군 제독과 시칠리아 왕이 밀약을 성사시킨 유서 깊은 장소인데 말이다.

 

 

 

 

  두오모 광장은 더없이 평온했다.

  따사로운 햇쌀이 강력하게 내려 비추지만  파라솔 그늘 아래 우리에게는 아주 온화한 지중해성 바람결이 겨우 느껴질 뿐이었다.  광장은 분명 교회와 오랜된 건물들로 빼곡하게 둘러 쌓여진 닫혀진 공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기 두오모 광장에 땅바닥이든 계단이든 카페 의자에든 가만히 앉아있노라면 이 광장이 닫힌 공간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사라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디에서도 이런 특별한 느낌을 가져본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갇힌 공간이 분명하건만 내게는 사방으로 탁 트인 공간으로만 느껴진다.  광장 저편의 막아선 건물들은 거친 파도와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바람과 낯선 재난이나 나쁜 짐승들로 부터 이곳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주 적당하게 설치된 보호막 정도로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왠지 모르게 이 광장은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면서 붙잡아 두려는 신기한 마법을 부리는가 보다.

  혹.....  모니카 벨루치가 어디선가 나타나 불쑥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아닐까?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저기 저만치 방금 골목길로 접어들간 여인이 말레나는 아니었을까?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도 시칠리아 영화 (말레나)는 한번씩 감상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영화 '말레나'는 바로 이 광장에서 쵤영되었다.
모니카 벨루치의 젊었을 때 모습. 사진빨에 속지 말자. 오십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ㅎㅎ 지금은 중후하게 나이 들었다.

  

 

 

 

 

 

  대성당 앞쪽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어쩐지......  우리가 대성당을 나올 때,  보안 요원들 숫자가 늘어났고 붉은 끈으로 된 바리케이트를 치곤 하기에 아마도 교회에 어떤 행사가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분위기를 보니 아마도 결혼식이 열릴려는가 보다.

  동남아를 여행하면서는 많은 결혼식을 보았다.  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자리잡고 음식을 나누고 축제를 즐기며 진심어린 축하를 건네기도 했다.  모두가 세상 어디서든 통하는 넓은 오지랍 덕분이다.  하지만 유럽의 결혼식을 지나가면서 구경은 했지만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서 시칠리아 기독교식 결혼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별수 있나?  궁금하면 못참는 오지랍을........

  여행자 복장이 너무도 분명해 보이기에 직접적인 하객으로 변신 할 수는 없고.......  여성 보안요원에게 당당히 다가가 결혼식에 참가하고 축하해 주고 싶다고 요청했다.  거절 당할 줄 알았는데  예식과 가족들의 진행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협조해 준다면 허락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최대한 예의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여행자들이 제지당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입장을 허락 받았다.  결혼식 상황에서는 대성당의 입장료도 면제였다.  곡 결혼식을 보고 싶어서 나는 두번째 입장료도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나처럼 덩치가 큰 동양인이 많지 않아서인지 내가 입구에서 여성 보안요원과 이야기 하는것을 모든 보안요원들이 본 모양이다.  나와 마주치면 살짝 웃으면서 그냥 길을 비켜준다.  나는 성당 안에서 이 사람들이 예식에 앞서서 어떤 모습들로 어떤 일과 절차를 진행하는지를 세세하게 살폈다.

  한참 지나서 잘 차려입은 한쌍이 등장 했는데 아무리 살펴도 나이들이 좀 많다.  그럼 구혼이나 재혼인가?

  내가 다소 묘한 표정을 짖자 이를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보안요원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가르쳐 준다.  신부측 부모님이란다.  오늘 결혼식은 신랑보다 신부가 나이가 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우여곡절을 좀 격기는 했지만,  어쨌든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이 눈치 빠른 아저씨는 내게 부연 설명까지 해 주고는 슬쩍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다.

  신랑과 신부가 도착했다.

  허락되고 약속된 여러명의 카메라 맨이 신랑 신부의 앞과 뒤를 채웠다.  나도 그 틈새로 셔터를 눌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통로 맨 앞쪽에 서서(누가 봐도 하객이 아닌 여행자 차림) 코 앞가지 다가온 신랑 신부에게 큰 목소리로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라고 덕담을 건넸다.  신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살짝 옅은 미소와 함께 '땡큐'라고 대답해 왔다.

  카톨릭의 예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절차들이 있었고 소요 시간도 우리네 결혼식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모두가 참으로 진지했고 엄숙하게 진행 되었다.  우리네 결혼식 처럼 눈도장 내지는 시작만 보고는 피로연장으로 서둘러 직행하는 그런 분위기와는 완전하게 달랐다.  오로지 신랑 신부의 밝은 미래를 축원하는 작고 엄숙한 축제의 장이었다.  어떤 행사에 있어서 이렇게 진진함을 피부로 느껴보기도 아마 오랫만이지 싶다.

  나 역시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롭게 부부의 연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위해 내 방식대로 나의 신에게 진지하게 기도했다.

  

 

 

 

 

 

 

 

 

 

 

 

 

 

 

 

 

 

 

 

 

 

 

 

  앞 여행기에서  시칠리아의 르네상스를 설명하면서 '안토넬라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었다.  또한 그러면서 아직 시칠리아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관짓고 포괄시키는 작품이 하나 더 남아있다고 예고 했었다.  그런데 현지에서 경험해 보니 어처구니 없게(?)도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  본래는 하나가 맞는데 두개로 변모한것이 과정이 내가 보고 느끼기엔 이건 분명히 사기(?)라 호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언질한 대로 남은 화가는 한명이고 작품도 하나이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이 두개로 늘어났던 것이다.

  시라쿠사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관지어서 만나 볼 화가는  전에 '몰타의 미첼란젤로'라고 이야기 했던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로서 르네상스의 3대 천재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만약 부오나로티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카라바조와 비교하는데 어떤 심정이십니까' 묻는다면.....  적어도 만년에 '론다니의 피에타'를 제작하던 만년의 원숙한 부오란로티라면 '나로서도 영광입니다. 카라바조는 아직 갈 길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 않았을까?

  만약 카라바조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부오나로티에게 비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고 묻는다면 지체없이,  '그런 지나간 과거와 비교한다는게 불쾌하군요.  나 카라바조는 그대로 오리지날 미켈란젤로 라구요.' 라고 호탕하게 대답했을것만 같다.  카라바조에게는 부오나로티 같은 만년의 인생이 여물어가는 그런 원숙함의 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오모 광장의 환상적인 노천 카페에서 꿈결같은 휴식을 취하고 이제 서서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낯익은 포스터 한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어쩔시구?

  이건 완전히 사기 아냐?

  야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나네.........

 

  대성당 맞은편으로 광장을 조금 지나친다 싶으면 우측으로 (Palazzo della Sovrintendenza ai Beni Culturali di Siracusa)라는 건물이 나온다.  굳이 번역한다면 '시라쿠사 문화 유산 감독 관청' 이라고 부를 그 건물에서는 지금 한 화가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바로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특별 전시회> 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만 2년 전 내가 앞서 시라쿠사에 갔을때도 같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 전시회 포스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전시 기간만 분명하게 새로 새겨졌을 뿐이다.

  포스터에는 전설로 여겨질만한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The Crucifixion of Saint Andrew)이 부분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2년 전에도 그랬다.  모든게 너무도 똑 같다.  오로지 바뀐것은 날자 뿐이다.

  처음 시라쿠사를 방문했을 때.......  카라바조가 와 있다는데......  미국까지 찾아 갈 수도 없는 처지에......  특별 전시회라니......  그래서 일부러 표를 끊고 들어가 보았다. 당시 7 유로 였나?  맞는것 같다.  <카라바조 특별 전시회>에 특별히 걸린 그림은 단 3점 있었다.  그리고 카라바조의 그림은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이 유일했다.

  밀려드는 실망감,  그리고 배신감.........  그게 7유로 라니.........

  유럽 애들의 이 사기성(?)은 어디서 나오는거지?

  이 세상에서 조상님들의 은덕(?)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나 스페인 아닐까?

  옳고 그름이나 지배냐 약탈이냐를 떠나서 조상님들이 수많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무수히 남겨 놓았고,  그 덕분에 문화 예술의 절대 강대국으로 수많은 여행자들로 부터 엄청난 수익을 창조하여 그럭저럭 수월하게 먹고사는 나라 아니겠냐는 말씀이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대가 끊기면서 소유한 예술 작품과 건물을 피렌체 시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는데,  해마다 200만에서 250만 명의 여행자가 우피치 미술관을 찾는데,  1인당 입장료가 24 유로 정도라고 계산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익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다.  이런 헤택이 가장 큰 나라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이고,  그 뒤에 영국,  프랑스와 동유럽 국가가 뒤를 있는다고 본다.

  감히 그런 나라에서 이런 찌질한 사기성(?) 전시회를 빌미로 거대한 수익을 노린다니?

  한편으론 카라바조라는 절대적인 상품성이 여전히 엄청난 매리트를 창조한다는 말씀이고.....  이것도 하나의 장사라고 해야 할까?  왜냐면 이 작품이 이곳이 원래 소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빌려 온거다.  장기 임대 형식인데......  도대체 얼마 기간 동안 빌린것인지......  임대료는 얼마인지?  이렇게 판을 벌이면 1년에 얼마정도 수익이 창출되는지 궁금할 뿐이다.

 

 

 

 

 

 

 

 

 

 

시라쿠사 문화유산 감독 관청의 카라바조 특별 전시회 포스터(거의 드러내놓고 하는 나쁜 장사거나 사기라고 본다)

 

 

카라바조의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 클리브랜드 미술관 소장.

 

 

 

 

 

 

 

  '성 안드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로마군에게 붙잡혀 그리이스의 파트라스에서 십자가 형에 쳐해졌다.

  밧줄에 묶여진 채로 십자가에 매달렸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목숨이 살아있었다.  군중들은 총독 관저로 몰려가 로마에서 파견 된 통치자 에게게아스에게 안드레의 죄를 사해주고 석방해 줄것을 요청했다.  군중들의 동요가 심상찮은것을 느낀 에게에아스는 군인들로 하여금 안드레의 석방을 지시했다.

  한편 이 상황을 알게 된 안드레는 주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주를 따라 십자가 형을 받음이 더없는 영광스러운 길인데 갑자기 사면을 받게되자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허락해 주소서.' 로마의 간수가 다가와서 그의 밧줄을 풀고자 다가섰을 때,  갑자기 간수의 손에 마비가 왔다.  그리고 아무도 십자가의 안드레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안드레는 그대로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다.

  훗날 안드레는 성인으로 추대 되었다.

 

  카라바조는 이 절박하고 긴박했던 상황을 마치 종군기자가 찍은 극적인 순간의 단 한장에 사진처럼 재현해 냈다.

  카라바조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여기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에는 매우 독특한 사연이 한가지 내재되어 있어서 잠시 집고 넘어가기로 한다.

  애초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을 카라바조에게 주문 의뢰한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면 카라바조의 경우는  주문 의뢰자에게 작품 인수를 거부당한 경우가 빈번하였고,  결국 그 작품은 다른 누군가에게 팔렸을테니까 말이다.  다만 나폴리에서 오랜 시간을 영사관 부사령관(해외 주재 무관)으로 근무한 '후안 알론소 피멘텔 드 에레라 공작'이 어찌되었건 이 작품을 나폴리에서 스페인으로 가지고 떠났다.  이후,  약 300년 동안 이 작품에 대해서는 잊혀졌다.  누가 어디에서 소장하고 있는지.......  또는 이 작품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조차 의문 부호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온 유럽에 또는 온 세상에 엄청나게 뜨겁게 '카라바조 열풍'이 불게 되었다.  수많은 수집상과 미술 애호가와 박물관이나 갤러리 운영자들이 이야기로만 저해오는 전설 속의 카라바조 작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오랜  조사와 추적끝에 드러난 것이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이었다.

  그런 결과로 유럽에는 '카라바조의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으로 보여지고 알려진 3개의 작품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의 오랜 연구 끝에 비엔나와 톨레도를 거쳐 밀라노에서 발견된 2개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진품이 아니라는 결론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최종적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소장된 '성 안드레의 십자가 처형'이 카라바조가 그린 진품이라고 판정했다.  300 년 만에 작품의 저자가 '카라바조'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작품은 스페인에서 여러 경로를 거치다 1976년에서야 우연히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스페인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카라바조의 작품 목록에 비교적 근자에 추가 된 작품이며.......  혹 더 나올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다.

  왜냐면 가장 최근으로는 2014년 프랑스  남부 툴루스의 한 시골농가 다락방을 수리하던 중 낡은 그림 한점이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곧바로 이 작품의 연구와 함께 복원에 들어갔는데,  오래지 않아 이 작품이 사라졌던 카라바조의 유디트(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진품이라는 결과를 발표했으며,  세계 미술계는 들끊기 시작했다.  당시 판매 예상 가격이 1천900억원 이었다.  로마에 가면 진품을 볼 수 있다.

  미술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혹 길거리 도깨비 시장에서 이런 진품을 발견할지도..........

 

 

 

 

 

 

 

 

시라쿠사 두오모와 앞 광장.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 파사드 전경.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의 불(조명) 꺼진 제단.

 

 

 

 

 

 

 

  여간해서는 남에게 시비쪼로 험한 말을 건네지도 않는 천성일 뿐더러,  웬만해서는 '그럴만 하겠거니' 또는 '오죽 그랬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능하면 좋게 생각하고  또 좋게 넘어가고자 하는 천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에 서서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의 정문(파사드)을 바라복 있노라니......... '에이 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는 삐딱한 어깃짱스런 마음이 불쑥 솟아난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한계성을 가진 생각과 표현의 테두리 안에서 내 맘대로의 감정풀이를 이 대목에서 좀 해보고자 한다.(어디까지나 지극히 내 개인적인 주관)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La Chiesa Saint Santa Lucia alla Badia)'은 사실 지극히 별 볼일 없는 교회 건물이다.

  속된 표현으로, 적어도 유럽을 여행한다고 하면 동네마다 골목마다 쌓이고 널린게 교회이고,  그렇게 널린 동네 교회라도 막상 들어가보면 엄숙하고 장중하고 건물 자체에 배어있는 오랜 역사에 감탄사를 절로 터트리고 만다.  유럽 여행에서 겪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라 하겠다.   그런데 알라 바디아 성당의 경우는 매우 달랐다.  지극히 예외적인 경험이었다.  아마도 시라쿠사에서 대성당(두오모)가 더 유명한지,  아니면 알라 바디아 성당이 더 유명한지는 쉽게 판단이 나로서는 서질 않는다.  두오모를 찾는 사람은 반듯이 서둘러 알라 바디아 성당을 찾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라 바디아 성당을 찾아가기 위하여 도시의 중심에 이정표 처럼 우뚝 서 있는 두오모를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이유로 슬쩍 찾았다가,  이내 속내는 두오모 지척에 붙어 있다는 알라 바디아 성당을 찾기 위함인지도 모를겠다.

  시라쿠사의 두오모가 바로코 건축 양식의 진수라는 이제까지의 부연 설명은 그렇다치고.......  어떤 이유로 수많은 여행자들은 앞다투어 알라 바디아 성당으로 향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산타루치아의 순교(Communio and martyrdom of Saint Lucia)'라는 카라바조의 유명한 그림이 알라 바디아 성당의 제단에 걸렸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게 아니라고' 어떤 이유를 댄다해도,  사람들이 알라 바디아 성당에 가는 이유는 '카라바조 때문'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다.  더하여 그게 진실이라고.......

 

  시칠리아 시라쿠사에는 '세상에 이런일이'에나 나올법한 어떤면으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특이한 과거사가 하나 있다.

  교회가 교회를 고소한 사건이다.  내용은 '본래의 내 물건을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고소인측은 시라쿠사의 '산타 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Chiesa di Santa Lucia al Sepolcro)' 이었고,  소송 대상자는 바로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 이었다.  소송의 내용은 본래 고소인측의 소유 재산인 '카라바조의 산타루치아 순교'라는 제단화를 돌려달라는 소송이었다.

  이탈리아 법원은 참으로 난처해 졌다.  이것이 세속의 재산권 다툼이 아니라,  종교적 영역인 성역(聖域)에서 불거져 나온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세속의 법률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다면,  중세 시대 이후에 불거진 수없이 많은 다툼들을 현대적 법원이 세속적인 법률 잣대를 디밀고  사사건건 끼어들 수 밖에 없게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것이라 판단했다.  하여 법원은 일체의 내색도,  일체의 반응도 내비치지 않고 세월만 보내기로 일관했다.

  기다리다 지친 알 세폴크로 측은,  그럼 성역의 일이라면 교황청이 판단을 내려달라고 바티칸에 고소장을 디밀었다.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흘렀지만.......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교황청은 여전히 침묵 중이다.

  왜?

  엄연히 기록에 근거한 소유권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판명되는데.......  법원도  심지어 교황청도 마냥 판결을 유보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로마 카톨릭이 안고 있는 엄청난 모순이 숨겨져 있다.

  거기에 더하여........  하필이면 당장 제기된 소송의 내용에 '루치아 성녀'라는 존재가 더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럼 이번 소송의 핵심인 '산타 루치아의 순교'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은 누구(어느 교회)의 소유가 맞느냐?

 

  백번 천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산타 루치아의 순교'는  (산타 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의 소유가 맞다.

  그냥 돌려 주면 된다.  교황청이 나서서 그만 돌려주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돌려 주지도 않고,  교황이라는 카톨릭 내에서의 절대적인 범 우주적인 권세와 권능을 가진 교황께서 '이쯤이면 그냥 돌려주는게 맞겠다' 라는 그말을 못하실까?

  글쎄다.  이런 정도의 상황에서  바티간의 보물이랄 수 있는 '천지창조'가 혹 대상이었다 해도 교황은 '어서 돌려 줘' 하셨을 것이다.  루우브르의 '모나리자' 였다고 해도 이 상황이면 '돌려 줘'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대상이 하필 왜 '산타 루치아'냐고?

  오랜 세월 전에도.......  '산타 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은  교황에게 진정어린 탄원이자 고소장을 낸 적이 또 있었다.  대상은 '베네치아 공국'이었고,  내용은 역시나 '루치아 성녀'에 관한 고소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교황은 베네치아의 행태를 심하게 꾸짖으면서, 카톨릭 최고 책임자의 입장에서 엄숙하게 정당한 해결을 명령했다.  하지만 상황은 교황의 생각대로만 되지 않았다.  엄청난 파행이 자행된 것이다.  그런데 종국에 교황은 나서서 그 퍄행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잊혀지거나 덮혀지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다시 터진 것이다.  역시 '루치아 성녀'에 관한 문제였다.

  과거에 문제를 분명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 핸디캡 위에 또 같은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장차 이문제는......  또 수많은 비슷한 문제들을 끊임없이 유발시킬것이 뻔하다.  교황청은 외면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절대로 신의 뜻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황은 세속 위의 절대적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실상은 우리 도시의 시전 잡배 이하였던 것이다.

 

 

  '루치아 성녀의 순교'에 대해서는 지난 여행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피력한 바가 있어서(지난 이탈리아 여행기 참조)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하고 루치아 성녀의 순교 이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루치아 성녀는 순교했다.'

  고문과 순교의 과정에서 눈을 제가당하는 시련을 겪었기에 특히 눈과 관계한 아픈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낳기도 했다.

  그리이스 시대 시라쿠사는 모든것이 오르티지아 섬이 중심이었으나,  도시가 발전하게됨에 따라 북쪽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 중심의 새로운 도심이 생겨났다.  권력이나 어느 정도 부를 갖춘 사람들이 오르티지아 섬을 벗어나 새로운 도심에서 여유롭고 넉넉한 전원생활을 영위하면서 비교적 가까운 그리이스 원형극장에서 음악이나 연극을 관람하고,  나란히 들어선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를 즐겼다.  그 신흥 도심의 중심에 비교적 일찍 들어선 교회가 바로 '산타 루치아 알 세포크로 수도원' 이었다.  특히 이 교회는 로마의 기독교 탄압시기에 교회의 지하로 여러갈래로 뻗어나간 상당히 길이가 긴 지하동굴(카타콤베)를 가지고 있었다.  루치아 성녀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순교 한 이후에 바로 이 자리에(동굴 위에)  그녀의 무덤이 생겼다.  비록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던 시기였지만,  당당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루치아 성녀는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의 좋은 표상이었다.  하여 그녀의 무덤은 그 당시에도 신성한 장소였던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그 무덤 주위로 수도원이 들어섰고,  피렌체 세레당을 연상케 하는 루치아 성녀의 무덤이 만들어 졌다.  그곳은 절대 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의 영역이자 그리이스 정교회 영역이었던 시라쿠사에 비잔틴 세력이 급격히 쇠락하던 8세기 말엽부터 등장한 아랍 세력이 마침내 시라쿠사를 점령해 버리고 만 것이다.

  아랍의 득세가 하루 이틀에 끝날것이 아님을 인식한 비잔틴 출신의 마니아쿠스가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수습해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 가서 비잔틴 황제에게 받쳤다.  황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모처네 유해를 모시고 받들게 했다.

  제 4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차지해 전쟁물자를 확보한 이후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출정하였는데,  4차 십자군 원정을 좌지우지하던 베네치아 상단은 처음부터 이집트 원정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발칸반도를 지난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단의 회유에 넘어가 우방인 콘스탄티노플(비잔틴)을 침략하고 만 것이다.  이때 실질적인 비잔틴 제국은 망했다. 베네치아 상단과 십자군이 급조한 라틴왕국은  좀 더 비잔틴의 이름으로 지속적인 지배와 약탈을 위한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잔틴은 몰락했고 이제 세상은 베네치아 상단의 세상이었다.  직전까지 콘스탄티노플을 주무르던것은 제노바 상단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것이다.

  쫓겨나는 제노바 상단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마지막으로 확보한 것이 모처에 있던 '루치아 성녀의 유해'였다.  그들은 유해를 가지고 제노바로 돌아갔다.
  뒤이어 들이닥친 베네치아 상단은 콘스탄티노플을 싹쓸이 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통째로 털어 날랐다.  베네치아 마르코 성당의 2층에 놓인 4마리의 청동마상도 불루모스크 옆의 로마 전차경기장에 놓였던것을 훔쳐간 것이다.

  그 베네치아 싹쓸이파의 두목은 92세의 풍운아 '엔리코 단돌로' 였다.  그는 실제로 그 나이에 함선의 돚을 걸치는 마스트를 타고 넘어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오르는 기적을 만든 불세출의 풍운아 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싹쓸이한 그에게 남은 한가지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루치아 성녀의 유해'였다.  실은 그가 젊은날 베네치아 상단의 공무원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근무했었는데,  이유없이 그 때에 시력을 잃은것이다.  그는 장님인 베네치아 상단의 최고 통치자 (도제) 였다.  그는 혹시나 루치아 성녀의 유해가 뿜어내는 신기로 자신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92세에)  그런데 아뿔싸.......  성녀의 유해는 이미 제노바에 도착해 있었다.

  엔리코 단돌로는 대단히 치밀하고 용의주도하며 끈질긴 사람이었다.

  원수지간인 제노바 상단으로부터 성녀의 유해를 되찾을 방법을 궁리하던 중,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단돌로는 교황에게 협조를 넘어 거의 협박을 해댔다.

  4차 십자군의 경우 당시의 시대상화이 좋지 않았고 영주들의 반발이 거셌고,  교황으로서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으며,  더우기 전쟁 준비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교황은 어떻게든 십자군 원정은 무조건 치뤄야하겠는데  나서는 놈이 하나도 없고,  투자 할 자금이 절대 부족이었다.  이 틈새를 이용한 것이 베네치아 상단이었고, 핵심은 단돌로였다.

  양자간에 2년의 시간을 전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4차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베네치아 상단이 선지급하며 준비하는 것이고,  교황은 2년의 사간동안 모금을 통하여 출발 전까지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2년 후,  전쟁 준비는 마쳤는데  여전히 교황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교황은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외상을 값는다는 재계약하에 원정대는 마침내 출발했고,  베네치아 상단은 십자군의 최고 지도부 자리에 떡하니 자리를 펴게 되었다.  그들은 멀고 긴 전쟁은 필요치 않았다.  가까운 지척에 보물단지가 있지 않은가?  베네치아 상단은 십자군 지도부에게 식량을 비롯한 기본 필수 물자에 대한 비용 지급을 즉시 해달라고 조건을 걸었다.  교황도 돈이 없는데  원정중인 군대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럼 콘스탄티노플이라도 쳐서 일단 어느정도의 비용을 충당해라.  아니면 식량이고 나발이고 없다.  이렇게 해서 우군인 비잔틴을 십자군이 쳐들어갔고,  알맹이는 베네치아 상단이 싹쓸이한 것이다.

  하지만,  교황이 약속한 원정비용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원정비용의 이자 탕감을 조건으로 교황에게 제노바 상단을 압박해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뺏어오도록 종용했다.  교황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까짓 자신과 상관없는 유해를 뺏어다 건네주고 금전적인 압박에서 한동안이라도 벗어나고픈 생각 뿐이었다.

  단돌로의 노림수는 정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치아 성녀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고스란히 넘어 온 것이다.

  온 베네치아가 열광했다.

  베네치아는 서둘러 '산타루치아 교회'를 건축했다.(현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기차역 자리)  경축식도 성대하게 치루었다.

  이제 '성녀 루치아'는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상단의 수호성인이 된 것이다.(알렉산드리아에서 마가의 유해를 훔쳐올 때 까지)

 

  이렇게 몇날이고 축제로 들썩이던 베네치아에 교황으로부터 출석요구가 떨어졌다.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산타 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으로부터 '루치아 성녀의 유해 반환소송' 고발장이 접수되었다는 통보였다.  원소유주가 분실과 약탈과 저들끼리의 거래에 제동을 걸고 유해의 반환을 요청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최고의 법률가와 변호사와 자문단으로 구성해서  반론을 제기했다.  시라쿠사 수도원의 주장은 아주 예전부터의 기록된 바에 따라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것에 그쳤다.  베네치아는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이 재판에 변수가 생겼다.  어떤 결론이 나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픈 교황은 흔한 말로 배심원 제도를 추진했다.  그런데 이 배심원에 유해를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한 제노바가 중심세력이었던 것이다.  '내가 못가진다면 너도 절대로 가질 수 없어'라는 복수심이 작용을 했다. 다른 배심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의 기고 만장하는 꼴을 보느니 애초의 소유권자인 시라쿠사가 가지고 가' 하는 심정이었다.  배심원 만장일치로 시라쿠사가 승리했다.

  자신의 책임을 슬기롭게(?) 모면한 교황은 시한을 정해서 유해를 돌려주도록 명령했다.

  베네치아로서는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린 꼴이 되었다.

  하지만 92세의 엔리코 단돌로가 누구인가?  어떤이는 그를 악마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끝내 이 사태를 엉뚱한 국면으로 이끌고 만다.  그는 온 유럽에 선언한다.

  '루치아 성녀는 시라쿠사만이 아니라  지성인이자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가까이에 모시고 받들고 가르침을 받고싶은 너무나도 훌륭한 성인이다.  베네치아는 그분의 성스러움을 기리고 받들고 싶어서 유해를 모시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를 들어, 태어난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라쿠사에서 성녀의 유해를 모두 되찾아 가려하고 있다.  나는 진정으로 이분을 가까이 모시고 받들고 싶다.  이것이 어디 나만의 생각이겠는가?  하여 나는 결심했다.  내가 지옥의 불구렁텅이에 빠진다 해도 나는 나의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나의 마음처럼......  진정으로 루치아 성녀를 모시고 받들고 싶은 사람이나 교회는 모월 모시 모처로 오기를 바란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하지만 불같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성인의 유해를 시라쿠사로 보내드리기는 하되........  먼 곳에서도 그분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나 교회들에게도 그런 영광스런 기회를 공유하고자 한다.'

  뭐.....  길게 늘여서 장황하게 설명은 했지만......  요지는 뭐냐?

  '이대로 성녀의 유해를 고스란히 시라쿠사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나 혼자서 나누기는 책임이 너무나 크니까......  나랑 비슷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오면.......  성녀의 유해를 분할해서 나누어 주겠다'  대충 이런 요지다.

  성스런 분의 유해라서 이렇게 억지로 분해하듯 나누어서라도 가져야 겠다,  이게 당시의 기독교관이었다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  죽어서도 자신의 유해조차 온전하게 보존하기 어렵다는 전례를........

  남의 시신에 손을 대서까지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한다면.......  동양 사상에서는............  최소 '후레자식들'

  베네치아는 결국 성녀의 유해에 손을 댔다.

  두개골을 비롯한 중요 유골은 끝내 베네치아의 산타 루치아 교회에 봉안하였고,  분리한 여러 유해를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고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눈 후에 남은 것만을 모아서 시라쿠사 수도원에 반납(?)하였다.

  우리나라를 여행하다보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여러군데 있듯이,  유럽 여러나라를 여행하다보면 루치아 성녀의 유해를 모신 교회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성스러운 기독교인 다운 모습일까?  신(神)께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허접한 일들을 신성함을 들어 허락하셨단 말인가?

  교황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유발한 베네치아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떤 처벌이나 요구도 하지 않았다.

  교황도 때론 신 처럼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세상이 저절로 순응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에게 배운바 대로.........

  

 

 

 

 

 

 

 

 

 

 

 

 

 

 

 

 

 

  1608년 9월 28일 저녁무렵, '산타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Chiesa di Santa Lucia al Sepolcro)'의 수도원장과 운영 위원들은 대예배실에서 방금 달포가량의 몰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알프레도 수사와 보고회 형식의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애초 출장의 목적이었던 부분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수도원장은 기다렸다는듯이 자신의 개인적인 질문을 사전에 전제하고는 던지기 시작했다.  도한 이는 함께한 운영 위원들 모두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훌륭하게 맡은 바 소임을 충실하게 완수해주신 알프레도 수사님께 수도원을 대표해 감사를 드립니다.  알프레도 수사님.  혹시 대성당을 방문하실 시간이 있으셨던가요?'

  '아직도 부분적인 내부 수리중이라  약간의 통제가 이루어져 개인적 기도 시간을 대성당에서 갖지는 못하였지만 대예배는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기사단장님의 배려로 대성당의 이모저모와 지하 예배당까지 모든것을 둘러볼 수 있는 영광스런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오호. 기쁘고도 진심으로 경하드릴 만한 시간을 가지셨군요?  알프레도 수사님.  수사님 보시기엔 어떻던가요? 성 요한 대성당이 정말로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흡족해 하실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까?'

  '일전에 수도원장님께서 말씀하시길  로마 교황청을 실제로 방문해보니 주심께서 진실로 기쁘고 흡족하게 받아주실 교회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교황청을 가보지 못하였고  이번에 겨우 요한 대성당을 보았기에 어떻게 타당성 있는 비교 분석에 준해서 올바른 설명을 드려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여......  로마 교황청을 다녀 오셨고 이번에 저와 함께 요한 대성당을 둘러보신 한 수사님의 표현으로 답변에 대신할 까 하옵니다.  교회의 규모나  참여한 예술가들의 명망이나 보관된 예술품이나 보물들로 치자면 이 세상에서 교황청을 따라 올 교회는 어디에도 다시 있을 수가 없겠지만,  아무리 그렇다쳐도.......  로마 교황청에 못지 않은 교회가 바로 요한 대성당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오호라.  은연중에 뼈가 있는 표현을 하신것이로군요.  못지 않다..........  그렇다면 수사님?  알프레도 수사님 눈에 비친 요한 대성당의 빼어남이 과연 어떤것이었습니까?  몹시 궁금하군요.  천천히 하나하나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원장님께서 그리도 궁금해 하시니 어찌 말씀 아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술이나 건축학적으로 부족한 저의 식견으로는 대충 서너가지 정도의 놀라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당의 기둥들이었습니다.  성당 내의 모든 기둥들은 실제의 순금을 입혔습니다.  그렇게 순금을 입은 기둥들이 지금 이곳의 예배당처럼 빼곡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아울러 기둥 주위와 천장에 이르기까지 여백의 공간은 모두 순금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금빛으로 번뜩이는 공간의 화려함은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둘째로는 아치 형태의 지붕 천장을 수놓고 있는  마티 프레티의 벽화에서 느껴지는 우아함과 성스러움이었습니다.  세레자 요한 성인의 일생을 천장 가득 수려하게 수놓았습니다.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림자가 창틀이나 문틀을 나오도록 그려져 있었서,  그 천장화는 그냥 하나의 틀에 갖혀있는 미술 작품이 아니라 살아 행동하는 열려진 공간을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세번째로는 대성당의 바닥입니다.  405개나 되는 형형색색의 가공된 대리석판들이 가문의 휘장과 업적들의 기록하고 기리며 405명의 기사 무덤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들은 이 405명의 기사들 무덤을 밟고 지나다니며 생겨나고 벌어지는 것이지요.  정말이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더 없이 화려하고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더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하나의 공간을 연출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카라바조의 (세례요한의 참수)라는 엄청나게 큰 벽화에서 뿜어나오는 절대로 거역할 수없을것만 같은 어떤 성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대성당의 여러개의 채플들 처럼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게 만들었다지만,  저의 작은 소견으로는........  요한 대성당을 치장하기 위하여 카라바조의 그림이 걸려있는것이 아니라........  이 초대형 그림 한점을 보관하기 위하여 대성당이 필요했던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더랬습니다.  대성당은 세례자 요한께 헌정된 교회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그림 하나로 왜 세례자 요한께서 이 정도의 교회를 헌정받으실만한지를........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감히 바라기는.......  원장님께서도,  이 자리의 운영위원들 모두도 언젠가 꼭 요한 대성당의 카라바조 그림을 볼 수 있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모여든 모든 사람이 장탄식과 함께 짙은 아쉬움에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어허.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 정도였단 말씀입니까?'

  '적어도 당시의 저에겐 분명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로고........  그래 카라바조란 화가는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혹 몰타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뜻밖에.......  카라바조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곧 요한 기사단의 법률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을것이라 했습니다.'

  '감옥에요?  세례 요한의 그림을 그려서 대성당의 완공에 아주 크게 기여를 한게 아니었습니까?'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수배를 패해 몰타로 도망친 현삼범 신분이었습니다.  도망쳐 살기 위해서 로마의 교황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몰타의 요한 기사단을 찾아가 내부 치장 공사중인 대성단의 제단화를 그리겠다고 자청했던 것입니다.  기사단에선 익히 카라바조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지라 고심 끝에 제단화를 그리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세례 요한의 참수)라는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기사단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감탄과 감동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카라바조는 몰타의 유명인이 되었다.  기사단장은 카라바조를 대신하여 로마의 교황에게 카라바조의 사면을 요청했다.  교황은 어쩔 수 없어서 사면을 시켜주었고,  요한 기사단은 카라바조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그런데.......  족쇄에서 풀려나자마자 카라바조의 핏속에 숨어있는 부정적인 근성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연일 술에 빠져 살고 노름판을 기웃거리고 싸움질을 일삼다가 종국에는,  기사단의 고위 간부와 실갱이 끝에 흉기로 찔러 지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기사작위는 취소되었고  중대사범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집행 유예'가 소멸 내지 정지되듯이,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받은 사면권도 취소되는 경우에 해당되었다.  그는 수많은 범죄에다가 살인죄까지 추가된 중범죄자 처지로 다시 전락한 것이다.

  '나도 일찍부터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듣고는 깊이 흠모하였던 처지였으나,  또한 그가 흉포한 광기를 가진 지극히 이중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참으로 가슴아파했던 적이 있었소.  오늘 이순간까지도 나는 여기 저렇게 텅 비어있는 우리 수도원의 제단을 매일매일 바라다 보면서.........  혹시 주님께서 이러한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셔서 혹 카라바조를 이곳에 보내주시기라도 한다면.........  그가 도박꿈이던 폭력적이던,  아님 살인자의 죄를 쓰고 있다고 하여도  저 텅 빈 제단을 채우는 날까지는 이 몸이 모든 책임을 감수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하나.....  이제 모두 부질없는 꿈이 되어버렸군요.  아마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저 제단을 채울 수 없을것만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수도원장의 허물이자 부족함 때문이겠지요.  상화이 그쯤 되었다면........  카라바조에 대한 헛된 꿈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네요.'

  '송구스럽습니다.  수도원장님.'

  '아닙니다.  이게 어디 알프레도 수사님의 허물이겠습니까?  늙고 무용지물인 이 사람의 허물이지요.  그래도......  수사님을 통해 요한 대성당의 생생한 소식과,  카라바조에 대한 소식을 소상하게 들을 수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확하게 열흘이 지났다.

  아직 새벽 미명이 밝기도 전인 가을비만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이른 새벽에 수도원장이 기거하는 별관의 문을 누군가가 요란하게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누구십니까?' 안으로 부터 수도원장의 지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원장님.  운영위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원장님께 급히 말씀드리고 상의 여쭐일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이른 시간이 아닙니까?  운영위원들께서 함께 오셨다면......  수도원에 무슨 사단이라도 났습니까?'

  삐걱 소리와 함께 육즁한 나무 대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젓은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수도원장의 모습이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에 급한 기별을 받았습니다.  해안 초소에 귀한 손님이 당도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비까지 내리는 야심한 밤에 귀한 손님이라니요?  교황청에서 특사라도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마도 원장님의 기도가 하늘에 통하였나 봅니다. 원장님께서 그토록 고대하시던 손님이 오셨습니다.'

  '내가 기다리던 손님이라니요?  나는 주님 말고는...........'

  '위험한 손님이 몰타로 부터 도착했습니다.  수도원장님을 직접 뵙고자 한답니다.'

  '그럼........  카라바조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말씀입니까?  몰타 감옥에 갇힌 사람이 어떻게..........'

  '탈옥했다고 합니다.  우리 수도원에 제단화를 그려 받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오! 주여.............  어찌 해야만 하겠사옵니까?  부디 이 시험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원장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이제 카라바조의 제단화를 이곳 수도원에서도 가질 수 있게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황청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기사작위를 가진 카라바조라면 그랬겠지요.  그는 지금 엄연히 기독교계로 부터 징벌을 받고있는 흉악범입니다.  그런 그가 제단화에 갈급한 우리에게 지금 선악과를 덥썩 안겨준 것이라고요?  아시겠습니까?  몰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여기 시라쿠사 입니다.  몰타와의 모든 교역이 이곳에서 이루어지지요.  거기에다 요한 기사단은 아주 특별한 단체입니다.  로마 교황청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행동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지요.  벌써 기사단의 추격대가 카라바조를 뒤쫒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요한 기사단의 형벌은 시효가 없습니다.  영원히 추적하여 징벌을 내리고야 맙니다.  이중에 기사단에 대적하고자 나설 분이 있으십니까?  기사단의 추격을 피해 카라바조를 숨겨주고 그림을 받아 낼 방도를 가진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제단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카라바조가 스스로 찾아왔을 정도라면......  몰타의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아내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  주여!'

  '그럼 지금 당장 카라바조를 포박하여 몰타로 돌려보내야만 할까요?'

 '제단화를 그려 성전에 헌정하겠다고 찾아왔다고 하나,  이미 상처 입은 동물이 제 몸하나 어디 숨기고 건사 할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목숨이나 보전하려고 찾아 온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만 하는 수도원에서 그 또한 무자비하게 실행에 옮기기에도 적절치가 않아보이고.........  어쩌자고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날이 밝기 전에 어떻게든.......  사람들 이목이 두렵습니다.  원장님.'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대처를 잘해야만 합니다.  일단은 암의 이목을 피해서 은밀하게 수도원의 지하 동굴로 피신 시키세요.  동굴이 여러갈래로 아주 깊으니  추격대라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목숨을 부지하게끔 피신시켜주고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물과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만나지 않을것이며  어떤 제의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깊이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혹  요한 기사단 측의 동향에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불쑥 우리에게 찾아 올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여러분들도 비밀 유지에 힘서 주세요.  일단 그 사내를 안심시키고 부족한대로 동굴 속에서 안정을 취하도록만 배려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몰타 감옥을 탈출한 카라바조는 시라쿠사의 알 세폴크로 수도원에 겨우 찾아들게 되었다. 

  

 

 

 

 

 

 

 

 

 

 

 

이렇게 소상하게 안내 포스터를 보여준다. 하지만 제단의 그림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별도의 성금을 지불하면 제단이 환하게 조명이 들어 온다.

 

 

 

 

 

 

 

 

 

 

 

 

 

  '이보시게 카라바조.  잘 기억해 둬.  간수들의 점호가 끝나면 자네 감옥의 창살이 부서질거야.  그럼 곧바로 창을 넘도록 하게. 기다리던 사람이 자네를 해안으로 데려가 어떤 고기잡이 배에 태울거야. 뱃전 바닥에 누워 기다리면 그가 자네를 시라쿠사의 항구까지 데려다 줄꺼야.  우린 거기까지야.  자네가 그려준 그림 값의 미지불금을 우리가 대신 회수했고 그 비용으로 미리 약속한 거기까진 무사히 데려다 주겠네.  그리고 명심해 두게.  알 세폴크로 수도원의 제단화가 비어있다네.  수도원 원장님이 유명한 화가에게 제단화를 오래전부터 신청한다고 했는데 아직 미완일세.  그게 자네에게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해 알려주는 것이네.  단 수도원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닐세.  시라쿠사를 넘어 시칠리아는 물론  로마 교황청에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한는 큰 어른일세.  자네 처지에 득이될지 실이 될지는 자네 운명이라 생각하네.  카라바조 부디 행운을 비네.  우린 여기까지야........'

  그날,  그렇게 카라바조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몰타 감옥에서 탈옥하여 무사히 시라쿠사에 도착하였고 마침내는 알 세폴크로 성당 지하에 숨어들게 되었다.

  일 주일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카라바조는 수도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카라바조는 제단화를 그려 헌정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더 이상 서로의 감추고 싶은 속내를 들춰내본들 무엇하겠는가?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을.......

  일 주일이 지나도록 수도원에, 그리고 시라쿠사 항구 전역에 몰타의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어떤 낌새도 없었다는것이 카라바조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는 기회를 가지게 만든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시라쿠사 항구나 도심에 요한 기사단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카라바조를 탐문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최악으로 치닷아 심했다면 남몰래 카라바조를 제거해서 어딘가 뭍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카라바조는 사면이 가림막으로 설치된 수도원의 제단에서 대형 제단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밤이면 지하동굴에 숨고 낮이면 제단화를 그렸다.  그렇게 1608년 10월에 (산타 루치아 성녀의 매장)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요한 기사단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었다.  카라바조가 수도원에 숨어들은 며칠 후에 요한 기사단은 모든 사태를 파악했다.  다만........  시칠리아는 물론 몰타에서까지 존경받는 수도원장이 텅 빈 제단화에 오랜 숙원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쉽게 추격이 가능했으며,  비록 범죄자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남다른 그의 재능이 어떤식으로든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눈 차원이라면 법의 집행을 잠시 미뤄주자는 생각에서 서너걸음 물러나 감시만 하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결과로 카라바조 인생 후기의 비극적인 걸작으로 일컷는 (산타루치아 성녀의 매장)은 완성되었다.

  (카라바조의 화풍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피렌체 쯤에가서 본격적으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수도원장의 속마음 만큼이나 카라바조로서도 이 지나친 정적과 고요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상대가 누구인가?  저승 사자도 피해간다는 요한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아무런 낌새초차 없다?

  역사적 사실을 기초해 이야기 한다면 카라바조는 (산타루치아 성녀의 매장) 이라는 제단화를 불과 2개월 안쪽에 완성했다는 추론이 성립하게 된다.  세로 408 X 가로 300 센치의 대형 벽화를 말이다.

  물론 너른 공간을 차지하는 여백이 많이 있긴 하지만 등장 인물 하나하나의 세세한 표현력을 살피노라면 이제까지의 관념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이런 대형 벽화를 2개월만에 완성한다니...... 역시 카라바조는 천재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공사 기간을 두고 나눈 토론은 유명하다.

  교황 ---  미켈란젤로야 이 그림이 완성되는데 얼마나 걸리겠냐?

  미켈란젤로  ---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유?   그림의 주제와 작업 기간은 내 맘대로 맡겨주세요.

  교황 --- 너, 당장 죽을래?  내가 3년 기다려 줄께.  알았지?

  미켈란젤로 ---  다빈치는 벼름빡에 쪼그만한 그림 하나 그려도 3년 걸린다는데......  저건 운동장이 잖어유. 30년 해유.

  교황 ---  절대 안돼.  넌 천재 잖어.  3년 안에 마쳐.

  미켈란젤로 --- 그럼 지금 당장 절 죽이세유.  3년엔 못해유.  5년 하자구요.

  교황  --- 좋다. 대신 단 하루도 어기면 안돼?  5년.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는 4년 만에 완성되었다.

  역으로 다빈치의 그림 하나가 3년 걸리는데......  카라바조는 대형 제단화를 뚝 딱 2달만에 그렸다는 사실......... 헐.

 

  하지만......  제단화에도 가만히 살펴보면 작가인 카라바조의 두려움과 쫓기는 초조함이 등장인물의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 역시 이 고요와 정적이 어쩌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한다는........

  아득하기만 하지만  언제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치명적인 두려움...........

  천재이지만 카라바조로서도 이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산타루치아 성녀의 매장) 제단화를 완성한 카라바조는 서둘러 시라쿠사를 떠난다.

  몰타의 요한 기사단의 영역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그는 이틸리아 본토와 가장 가깝게 통하는  메시나로 도망친다.

  하지만 아뿔싸........  시라쿠사에서는 낌새조차 느낄 수 없었던 요한 기사단의 추격대가 메시나에는 사방에 깔려 있었다.  카라바조는 그들이 자신을 찾으려 혈안인줄로만 알았지,  그들이 손바닥 안에다 두고 지켜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위기를 느낀 카라바조는 은신처를 마련해 숨어들었다.

  비록 쫓겨다니는 신세이지만 은신처에 숨어서 자신의 작품에 열광하는 지지자들의 주문을 받아 숨어서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여 1609년 메시나의 은신처에 숨어서도 (나사로의 부활)과 (목자들의 경배) 라는 두 작품을 완성한다.

 

 

 

 

 

 

카라바조 작 (나사로의 부활)

 

카라바조 작 (목자들의 경배)

 

'카라바조는 역시 카라바조다'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본토로 넘어갈 궁리를 하였지만  요한 기사단에 의해서 해상로는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더하여 추격대에 의한 위기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메시나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카라바조는 서둘러 팔레르모로 도망친다.  그곳에서도 카라바조는 시라쿠사와 마찬가지로 산 로렌초 예배당을 찾아가 제단화를 그려 헌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안위를 의탁하게 된다.  하여 산 로렌초 예배당의 제단화인 (성 프란체스코와 성라우렌티우스의 경배) 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작품을 실제로 감상할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이미 지상에서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마피아의 한 실력자가 유독 이 그림에 필이 꽂혀서 반 강제적으로 이 그림을 뺏어갔다.  훗날 결찰의 일제 소탕작전 와중에 이 그림을 그만 소각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헐.  그게 얼마 짜린데..........

  팔레르모에서의 카라바조는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외부 생활도 영위하면서 다소......  쫓기는 자의 심정을 잃어버렸던듯 하다.  그리고 본토의 여러곳으로 부터 작품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몇몇 지인들로 부터 어쩌면 교황청의 사면을 다시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교황청의 사면을 받게되면  요한 기사단의 체포령에서도 벗어나게 된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있는 수단을 동원하어 교황청에 열결을 시도했다.

  교황의 최측근으로부터 일련의 확고한 답변을 받았는데,  그 댓가가 자신의 뛰어난 작품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사면을 댓가로 한 뇌물성 그림을 팔레르모에서 그렸다. (골리앗의 목을 들고 서 있는 다윗)이 바로 그 그림이다.  아이러니는 그림의 다윗은 젊은날의 카라바조이고,  목이 잘린 골리앗은 지금의 카라바조 모습이다.

  아마도 카라바조는 이 당시......  자신이 과거의 한없이 자유뷴망했던 로마시대의 젊은날로 돌아간듯 착각했었던것 같다.  자신이 지금 당장 도망자라는 현실 직시 감각을 상실했었나 보다.

  카라바조의 최후와 관련된 여러가지 가설 가운데......  나는 이 시점을 주목한다.

  천재와 광인의 사이에서 자신의 그릇된 천성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카라바조를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보던 요한 기사단의 추적대가 들이 닥쳤다.  그들은 카라바조란 존재에 대해서 본인 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막 완성한 (골리앗의 목을 들고 선 다윗) 그림 앞에 카라바조를 끌고 가서는........  죽이지도 않았고,  체포하여 몰타로 끌고 가지도 않았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 '죽음 조차도 너에게는 큰 자비라서' 라는 이유를 들이대면서.........  카라바조의 얼굴에 칼로 난도질을 했다.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내린 것이다.  대신 목숨을 살려 둔 것이다.'

  어찌되었건........  저승사자 보다 더 무서운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일단 생명은 보전 받았다.

  이젠 이 그림을 가져다 받치고  교황으로부터 사면만 받게되면 예전의 활기차고 자신에 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거기까지였다.  1610년,  37세로 요절했다.

  광기로 똘똘 뭉쳐진 천재의 최후는.........  허망했다.

 

 

 

 

 

 

 

 

(성 프란체스코 성 라우렌티우스의 경배) 팔레르모 산 로렌초 성당 소장 중 소멸.

 

(골리앗의 목을 든 다윗) 모두가 자신의 얼굴 모습이다. 우피치 미술관 소장.

 

 

 

 

 

 

 

 

 

  '성녀 루치아의 성지' 처럼 여겨지고 있는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 아' 성당의 파사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성당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시라쿠사의 여러 교회중에서 제법 심하게 부식되고 있는 부분들이 보이고, 보수가 시급해 보인다.  실내를 살펴보아도 습기로 인한 바닥의 손상이 여기저기 눈에 딘다.  심지어 2차 대전중에 제거된 파사드의 발코니는 다른 곳에서 발코니를 가져다가 크기에 맞게 잘라서 붙인것이다.  이 교회가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것은, 1646년 극심한 기근이 시칠리아를 참혹하게 활퀴고 지나갔을 때 많은 신자들이 이 교회에 모여 시라쿠사의 수호 성인인 루치아 성녀에게 간절하게 구원의 기도를 올리면서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기도중에 창문을 통해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들었고, 비둘기를 따라 바다로 나가보니 밀과 콩과 야채와 과일을 가득 실은 배가 해류를 따라 떠밀려 왔다고 한다.  이 날을 기리고자 매년 5월이면 축제를 열고 비둘기와 메추리를 하늘로 날려보낸다.

  본당 옆의 후관에는 '루치아 성녀'에 관한 그림과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루치아 성녀 매장)은 성녀의 유해와 함께 '산타루치아 알 세폴크로 수도원'에 본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작품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결국은 아주 심하게 훼손이 진행되고 말았다.  수도원 관계자들과 시라쿠사 시당국은 이 작품의 보존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자 했다.  물론 몰타의 '세례 요한의 참수' 처럼 피렌체의 전문 복원 집단에 의뢰할 수도 있겠지만,  훼손의 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피렌체까지 운송 과정에서의 안전문제도 있었지만  뒤따르는 엄청난 비용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던것이 사실이다.

  이때  대안으로 등장한것이 시라쿠사에서 자체적인 복원 방법이었다.  당시 시라쿠사에는 로마의 귀족이었던 벨로모 가문이 소유했던 궁전을 시당국이 매입하여 미술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수도원을 떠나 벨로모 미술학교로 옮겨졌다.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었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복원(현재 모습)이 완성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약 2년간 그림은 그대로 벨로모 궁전에 보관되고 전시되었다.  미술학교는 '벨로모 주립 박물관'으로 전환되었고,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구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불쑥.....  벨로모 주립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산타 루치아의 매장'이 인근의 '산타루치아 알라 바디 아' 성당의 제단으로 옮겨져 내걸리게 된 것이다.  그 과정과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속내막이 없다.

  이 순간에도 알 세폴크로 수도원의 본래 그림이 걸려있었던 제단은 텅 비어있다.  그림이 본래의 위치로 돌아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알 세폴크로 수도원'의 반대와 반환 요구가 강력하게 제기되었고  현재 소송중이라는 사실 뿐이다.

  무슨 이유로 느닷없이 '알라 바디 아' 성당으로 옮겨지게 된 것일까?

  솔로몬의 지혜를 빌린다면.......  누가 주인일까?

 

 

 

 

 

 

 

 

 

 

 

 

 

 

 

 

 

  알라바디아 성당을 지나 산타루치아 도로를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번엔 약간 우측으로 굽은 내리막길이 나오고  조금 아래로 걸어가노라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공터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아레투사의 샘(Fontana Areyusa)'은 시라쿠사 여행자들에게 하나의 오아시스다.  사막에만 오아시스가 있는것이 아니라 바로코의 도시를 구경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바쁘게 움직이기만 하고 미처 심신을 쉬게해 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이곳에 도착하면 무조건 좀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니 육지의 오아시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앞서 아르키메데스 광장에서 만났던 '달이 여신'이며 '사랑의 여신'이기도 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는 (아레투사)라는 시녀이자 님프이기도 한 아리따운 여인이 항상 따라다녔다.  아레투사 또한 모시는 아르테미스를 닮아 빼어난 미모에 사냥을 즐겼으며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사냥을 마친 아레투사가 땀으로 범벅이된 몸을 씻고자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강물에 뛰어들었는데......  아뿔싸,  '강의 신' (알페오.Alfeo)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목격을 하고는 그만 첫눈에 아레투사에게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알페오는 인간 남자로 변신하여 아레투사를 스토킹 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그녀를 차지해 버리고 말겠다는 집요한 집착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알페오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어짜피 자신이 아닌 인간 남자로 변신할 것이라면 테세우스나 프로메테우스나 아폴로 같은 미남으로 변신 할 일이지, 하필이면 골라서 변신한다는 것이 수염 덥수룩하고 우락부락한 도적놈으로 변신을 할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알페오를 나타낸 조각상들을 보면 하나 같이 추남에 추물이다)

  무조건 싫었다.  아레투사의 입장에선 이유가 없이 무조건 알페오가 끔찍하도록 싫었다.

  그래서 아레투사는 도망쳤다.  달아나고 또 달아나서 '엘리스의 땅'까지 도망쳤다.  엘리스는 그리이스 남부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있으며 최초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피아 근처의 시골마을이다.  참으로 멀리도 도망친것이다.  하지만 알페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줄기가 있는 곳이면 그는 세상 어디까지든 마음대로 쫓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레투사는 주인인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땅을 갈라서 물길을 만들어 아레투사를 숨겨주었고,  물로 변한 아레투사는 그 물길을 따라 아주 빠르게 멀고도 먼 시라쿠사까지 보내주었다.  하여 도착한 곳이 오르티지아의 바로 여기 아레투사 샘물인 것이다.   아르테미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르티지아를 육지에서 갈라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강의 신인 알페오는 바다물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레투사는 샘물에서 나와 비로소 님프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신화라도 거기서 끝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의지의 사나이 알페오가 오르티지아 섬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이 바다를 어떻게 건넜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짐념의 사나이 알페오는 지금 오르티지아의 '아레투사 샘물'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아레투사가 샘물에 나타날 때가 있겠지.  그때는........ ㅎㅎㅎ'  라고 벼르면서 말이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바다와 거의 맞닿아 있는 저지대에 맑은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할 밖에......

  물웅덩이의 안에는 차고 넘칠만큼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혹 알페오가 민물고기 속에 숨어서 어떤 어부의 도움으로 바다를 건넌것은 아닐까?  또한 물웅덩이를 가득 채울듯이 갈대 같은것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사 시간에 배우던 '파피루스'이다.  인류 최초의 종이라 할까?  중국 사람들은 대나무를 얇게 자르고 펴서 엮어 '죽간'을 종이대신 사용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이 파피루스를 잘게 잘라 엮어서(김밥 만드는 대나무발) 종이를 대신했다.

  아레투사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저렇게 맑은 샘물이 연일 펑펑 솟아난다는 말인가?  불쌍한 알페오.....

  그럼 도대체 아레투사는 어디로 갔나?  시라쿠사 어부한테 시집이라도 갔나?

  

  근대의 역사에 여기 아레투사의 샘물은 기록으로 또 등장한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평정한 후에 이집트 곡창지대를 노리고 아프리카로 침공해 간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에 무한한 자원까지 확보하게 된다면 프랑스는 무적군대가 될것이며,  이어서 러시아를 침공하려 준비중인 것이다.

  프랑스의 영원한 라이벌은 영국이었고,  영국에는 해군제독 넬슨이 있었다.

  넬슨은 유럽연합군을 이끌고 추격해 와서 절대 우위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이집트 고립 작전에 돌입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는 한 프랑스 군대는 더 이상 유럽에서 아무짓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이는 그대로 적중한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에서 완전 고립되었다.  지중해는 완전 차단되었고  이제 프랑스의 운명은 과연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마침내 유럽연합군에게 나일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혈혈단신으로 프랑스 함선이 아니라 고기잡이 배에 숨어서 혼자 겨우 아프리카를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 아프리카 고립작전의 시발점이 바로 여기 시라쿠사였다.  넬슨은 시라쿠사에서 봉쇄작전에 대하여 연합군에 명령을 내렸고,  영국함선이 정박해 있던 시라쿠사에서 아레투사의 샘물로 봉쇄작전 내내 사용할 식수를 공급받았다.  넬슨 자신이 아레투사 샘물에 경의를 표하며 신에게 승리를 기원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그 식수통에 숨어들었다면 알페오는 혹 지금 영국 어딘가 있는것이 아닐까?

 

 

 

 

 

 

 

 

 

달아나려는 아레투사와 어떻게든 붙잡아 어떻게 해보려는 알페오.

 

 

 

 

 

 

 

 

 

 

 

 

 

  아레투사의 샘물을 지나 오루티지아 섬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마니아체 성에 이르는 해변길은 정말로 낭만이 가득 차고 넘친다. 

  거부할 수 없을만큼 마구마구 쏟아져내리는 지중해의 눈부신 햇쌀과 푸른 이오니아해가 그야말로 끝이 안보이도록 광활하게 시야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해안도로는 일몰 명소로 알려져 해질녁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잡아끄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만큼 한낮에 쏟아져내리는 눈부신 햇쌀은 여행자의 발걸음에는 좀 지나치다 싶을만큼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럽 사람들이 선글라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것은 이런 찬란하도록 눈부신 지중해 때문이 아닐까?

  해안 방파제 산책길 옆으로는 올망졸망 아기자기한 카페와 해산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겨울철 비수기 때문인지 문을 열고 영업하는곳은 줄어들었지만,  이 푸른 이오니아해를 바라보면서 에스페레소 한잔 마시며 잠시 여유를 찾아도 좋을듯 싶다.

  햇쌀이 너무 찬란해서일까?  아니면 우리는 아직도 햇쌀을 즐기는 방법에 있어서 좀 서툴러서일까?

  유럽사람들은 저마다 눈부신 햇쌀에 그대로 노출되는 노천 카페의 빈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붉게 얼룩진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채 햇쌀을 즐기고,  동양인 모습의 사람들은 모두 햇쌀을 피해 파라솔이나 실내에 자리를 잡는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아주 자주 접하게 되는 '태양을 즐기는 방식의 차이'를 또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하여 우리는 부러 노천카페에 유럽인들 처럼 앉았는데........  너무 과한 햇쌀은 영 부담스러운것이 아니었다.

  해안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니아체 성'이 있고  거기를 돌아서면 해변가에 외관이 거의 페허로 변한 '스피리토 산토 교회'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앞의 해변가에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사롭기만 한 지중해성 기후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삼삼오오 가족 혹은 연인들이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것을 볼 수 있다.

  해안길을 계속 따라가면 처음 오르티지아섬으로 통하던 '움베르토 다리'까지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다시 발걸움을 도심의 골목길로 향하게 걷는다.  오랜 세월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바로코 스타일의 이 아름다운 도시를 좀 더 즐겨보기 위함이다.  사방 어디에서건 큰길만 찾아다니면 모든길은 하나같이 시라쿠사 두오모(대성당) 광장으로 통하게 되어있다.  더 많은것을 보기 위해선 아직 가보지 않았던 느낌으로 다가오는 낯선 골목으로 계속 발걸음을 올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라쿠사 여행'이요 '오르티지아 산책'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비록 남의나라 역사이기는 하지만,  마니아체 성에 대하여 와전되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느껴진 점에 대하여 바로잡고 가고자 한다.

  흔히,  역사나 전쟁 용어 중에 등장하는 '정복'과  '정벌'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쳐들어가서 빼앗은 뒤에 차지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정복'이다.  소유권 이전 등록이 완료된 것이 정복이다.  하지만 쳐들어가서 적들을 소탕하고 목적한 바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하여 잽싸게 다시 빠져나오면 '정벌'이다.  영토나 정권을 가로챌 목적이 아니라 적을 섬멸하는것이 주 목적인 것이다.  이건 소유권 이전이 안된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세종대왕 당시 왜구가 하도 말썽을 부리자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도록 정벌을 내보낸 적이 있다.  이종무는 대마도를 정벌하였지만,  정복하지는 못했다.

  '마니아체성(Castello Maniace)'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으려면 '정복'과 '정벌'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기에 꺼낸 말이다.

  마니아체성 입구에 한무리의 여행자들이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반갑게도 한국인 패키지 여행자들이었다.

  본의 아니게 여행자들 틈에 섞이게 되어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을 듣게되었는데........

  '시라쿠사가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하게 되자 끊임없이 아랍의 해적들이 사방에서 출몰하게 되었다.  하여 아랍 해적들을 막기 위하여 비잔틴의 장군 마니아체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성을 건설한것이 바로 마니아체성이다'라는 설명이었다.  돌아와서 이것저것 책자와 여행사 안내책자를 살펴보아도 대부분 정말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있는 역사적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어쩌지?

  여행책자나 우리들은 '마니아체성' 이라고 부르고 찾아가지만,  현지인들은 다른 이름으로 같은 성을 부른다. '프리드리히 2세 성'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팔레르모 여행에서 다시 거론되겠지만  시칠리아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다.  그리고 지금 형태의 완전한 마니아체성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비잔틴의 장군 '마니아체(George Maniakes)'가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의 성을 탈환했다는 기록된 시기가 1038년 이다.  책자나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자면 1038년부터 마니아체가 시라쿠사를 탈환하고 비잔틴의 영토로 복원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어디에도 시라쿠사가 다시 비잔틴 영토로 환원되고 옛영화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여 나는 마니아체 장군에 의해서 비잔틴의 일시적인 정벌은 성공했지만  결코 영토의 회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리이스가 본토에서 멀리떨어진 시라쿠사에 폴리스를 세웠다.

  그들은 오랜 전통처럼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줄 성채를 건설했다.  그 초기의 그리이스식 방어진지가 훗날 마니아체성이 되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지중해의 많은 지역이 해적들이 노리는 표적으로 전락했다.  시라쿠사도 그랬다.  하지만  시라쿠사 오르티지아의 그리이스식 성채와 지금은 사라진 육지의 마르케토성은 상호보완을 해가면서 수많은 아랍 해적들의 침입을 막아냈다.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아랍의 해적들이 아니라 본격적인 아랍 이슬람 군대가 시칠리아를 목표로 전격적인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827년~828년,  근 1년동안 아랍의 군대가 시라쿠사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세력이 극도로 약해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에서 이슬람의 공격에 대항하는 시라쿠사에 어떤 지원군도 보내오지 않았다.  끝내 시라쿠사는 자체적인 방어력만으로 이슬람의 거센 공격을 무사히 막아냈다.

  시라쿠사는 적어도 이슬람의 정규군 공격에 대해서 난공불락이었다.  이슬람 지도부는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시칠리아 정복을 위해서 '선 시라쿠사 격파 후  치고 올라가기'에서 '시라쿠사 우회 후 최후의 목표를 시라쿠사로 새로이 설정'하는 작전 변경을 했다.

  이슬람의 함선들은 시라쿠사를 북서쪽으로 그대로 지나쳐서  시라쿠사와 정반대쪽인,  그리이스 시대부터 북부 시칠리아 해안 방어를 위해 성채만을 쌓아놓았던 팔레르모로 들이닥쳤다.  이슬람은 아주 손쉽게 팔레르모를 점령하였고  이곳을 시칠리아를 넘어 유럽으로 향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해안방어 초소에 불과했던 팔레르모는 하루아침에 이슬람의 중요 거점이며 거대한 이슬람식 도시로 번성해 나갔다.  이제 이슬람은 팔레르모를 거점으로 동쪽과 서쪽의 양방향으로 시라쿠사를 향해 진격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879년 5월  시라쿠사는 마침내 이슬람 군대에 의해서 점령되고 말았다.  고대 그리이스 폴리스 시라쿠사는 사라졌다.  50년 전 전투에서 원한이 사무쳤었는지 이슬람 군대는 시라쿠사를 거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파괴하여 페허로 만들었다.  이슬람에 의해서 시라쿠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신 팔레르모가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도시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칠리아의 문화 경제 예술등 모든 중심이 팔레르모로 이동해 간 것이다.

  1038년 비잔틴의 장군 마니아체가 방치되다시피 한 시라쿠사에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시칠리아 이슬람의 중심은 모두 북쪽에 있었던 이유로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시라쿠사는 과거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영토에 비잔틴의 깃발을 다시 꽂은 마니아체로서는 곧 이슬람의 군대가 나타날것이라는 뻔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 무너쳐 빈터로 남아있는 옛 성채에 진을 치고 나름의 방어 전쟁을 준비했을 것이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바다와 육지에서 이슬람의 정규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니아체가 상상했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정규군 모두를 끌고와서 대적해야만 할 그런 위풍당당한 위용의 이슬람 군대였던 것이다.  추가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는것으로 보아........  전황을 나름 가늠해 본 마니아체는 어둠을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내뺀것으로 보인다.

  1039년에도 1040년에도 시라쿠사엔 이슬람의 깃발이 나부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제 시라쿠사라고 이슬람의 방어군이 진을 치지 않았겠는가?

  노르만인들이 시칠리아에 들어와 자신들의 노르만 왕국을 세우고 정복 전쟁을 벌여 마지막으로 시라쿠사의 이슬람 군대를 바다 건너로 내쫓은것이 1085년이다.  그때까지 시칠리아 전체는 완전히 이슬람의 영토였다.

  하여.......  마니아체성을 건설한 사람이 비잔틴의 마니아체 장군이라는 이야기는 맞지 않는다.  그는 잠시(한동안)  점령을 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13세기에 들어서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전문가들을 불러모아서 마니아체성을 완벽한 성채로 새로 지을것을 명령했다.  성내에 왕궁까지 갖춘 엄연한 통치자의 권역으로 재조성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놀라운 비사를 가지고 있는 프리드리히 2세는 역사가들이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명명했다.

  중세봉건시대의 권력과 사치와 향락에 물든 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정치 종교 권력 예술과 문화 등에 탁월한 식견을 가졌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남다른 식견과 넓은 통찰력과 통치를 넘어 비젼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미래형 통치자였던 것이다.  유럽에는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도........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었나 보다.  평생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의 신분이 독일의 왕이자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도 평생 시칠리아에 머물면서 특사나 서신을 통해 제국을 다스렸다.  교황이 황제 임명식을 약속하며 로마로 초청했지만 끝내 그는 가지 않았다.  4차 십자군 전쟁(나누기에 따라 혹 5차) 때문에 발칸반도를 지나 소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의 목전에까지 출타한것이 시칠리아를 떠난 유일한 외출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에겐 온통 시칠리아 뿐이었다.

  팔레르모 여행이기에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것이다.

  너무 일찍 시대를 앞서 태어난 그는.......  아마도 근대와 현대의 중간쯤에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은 중세 봉건제도라는 사회와 질서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사방에서 혁명과 폭동이 일어났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로마카톨릭(교황)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교황의 권위 앞에 당당히 맞설 그 어떤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교황들은 사사건건 프리드리히 2세의 눈치를 살피거나 재가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교황이 아무리 절대적인 명분과 권위를 앞세워도 프리드리히 2세는 눈도 껌뻑하지 않았다.  그는 대놓고 교황을 성토했고 그릇됨을 나무랬다. 황제의 세속적인 권한을 약화시키려 무던히도 애썼고,  심지어 교회에서 파문도 여러번 시켰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교회에 의해서 파문을 당한다는 것은 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결이나 마찬가지였으나  프리드리히는 파문 정도는 우습게 받아들였다.  그는 여전히 모든 유럽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세속의 권력자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권력을 앞세우는것은 오로지 교황과 다툴때만 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무기는 누구하고든 어떤 문제에 관해서관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 끝장토론으로 결론을 낸다는데 있었다.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철할줄 알았고,  반론에 앞서서 이해시키고 내려진 결론에 대해서 상대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항상 노력하였다.

  성역의  절대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교황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에서 직접 마주대하고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 후에 최선의 방책을 찾아내는........  선각자이자 근대인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없는 유럽은 교황 마음대로였고,  제후와 영주들은 교황의 노림수에 따라 사분오열되어서 툭하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거기에 콜레라가 창궐하고  기근에 혹독한 세금징수에...........

  프리드리히의 본거지였던 시칠리아에도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새롭게 부상하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지지하는 세력들간에 분쟁이 커져만 갔던 것이다.

  1448년 시칠리아 방어군 사령관이던 '지오반니(Captain Giovanni Ventimiglia)'는 시칠리아의 모든 유력인사들을 마니에체성 안의 궁궐 파티에 초대했다.  한창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파티 중간에 지오반니가 따로 불러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초청된 시칠리아의 유력인사들이 모두 처참하게 살륙되었다.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 앙주 가문을 지지한 사람들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페인의 아라곤 가문을 지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후 스페인 아라곤 가문의 식민지가 되었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마니아체성에서 벌어진 시칠리아판 '한명회의 살생부' 라는 비극이 자행된 것이었다.

  

 

 

 

 

 

 

 

 

 

 

 

 

 

 

 

 

 

 

 

 

 

  샌드위치의 변신은 무죄?

  당신은 샌드위치의 어디까지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혹 '샌드위치에도 품격이 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폴로 신전까지 나와서 움베르토 다리를 건너다 보면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기차역쪽을 바라보는데.......  왠지 이대로 오르티지아섬을 떠나서는 안될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어느덧 시간도 제법 흘렀고 이 상태로 카타니아까지 가자니 틀림없이 배가 몹시 고파질테니까 말이다.  예전처럼 가는 도중에 카페에 들러 아란치니에다 맥주를 생각도 해보았는데......  그래도 시라쿠사까지 와서 말이다.

  하긴 일부 여행책자에서는  '시라쿠사에서는 꼭 권장하고싶단 생각이 드는 음식이 별로 없다.  기것 해산물 레스토랑이지만 가격대비 우리가 기대하는 수치와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신전 우측 골목길이 오르티지아 스트리트 마켓이다.  노점상들 구경이라도 하면서 주점부리라도 하고 과일이라도 사서 기차에서 먹어야지,  혹 맘에드는 식당 있으면 여기서 이른 저녁을 아예 해결하기로 하고........  그래서 노점 거리로 들어섰다.  튀김 주점부리를 해보았는데......  향신료가 우리랑 다르고 이들은 튀김까지도 우리 입맛에 비하자면 짜다.

  심심풀이로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시장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는데.......  '저건 또 뭐야?'

  한산한 시장거리에 유독 한군데에만 사람들로 붐빈다.  앞쪽의 공영주차장까지 사람들이 가득하다.

  식육점과 치즈판매점 같은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판매대 말고 옆으로 제법 근사하게 치장한 실내 레스토랑도 있는데(물론 사람들로 가득차있었음),  오히려 밖의 노천의자와 테이블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그제서야 책자에서 '노천시장 안쪽에 아주 유명한 샌드위치 가계'가 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그 샌드위치 가계였다.

  '보르데리 샌드위치(Caseificio Borderi)'라고 스트리트 마켓 끝자락 안쪽에 있다.  혹 시라쿠사에 가신다면 꼭 가보시길.

  샌드위치라는게.......  빠게트가 되었던  식빵이 되었던 겹쳐놓고 그 사이에 햄이던 소시지던 베이컨이던 치지와 야채와 토마토를 끼워 넣어서 먹는 간식 아니야?  샌드위치라는게 까짓거 가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했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이런것두 샌드위치라 할 수 있는거야?'

  우리는 노란 종이에 사서주는 반토막 샌드위치랑 맥주를 마셨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그동안 세번 이탈리아 방문에서 먹어 본 음식중에서 최고로 맛있다.  거기다가 무슨 생일잔치라도 되는지 우루루 몰려든 가족친지들이 시킨 샌드위치는......  도저히 설명을 못하겠다.(아래 사진으로 대체)

  단지 샌드위치일 뿐인데......  끝내주는 비주얼과 사람들의 행복에 겨운 표정과 함성들........

  파티의 주최자인듯한 넉넉하게 생긴 아저씨는 사진을 찍는 내가 여행자임을 알아보시고  접시에 자신들의 음식을 한접시 그득 담아주시는데......  우리가 사서먹은 샌드위치보다도 더 푸짐하다.  그리고 그 맛은.........  비싼게 더 맛있다는 말이 맞는가봐..........  우루루 몰려가서 저들처럼 저렇게 푸짐한 음식파티 시켜준다면........  담에 시라쿠사에라면 패키지라도 따라 나설것만 같다.

  그래.  맛있고 행복한 음식파티라면.......  저 정도는 해야지.........  폼만 내는 호텔식 뷔페.........  썩 꺼져 버려.

 

 

 

 

 

 

 

 

 

 

 

 

 

 

 

 

 

 

 

 

 

  오르티지아섬의 시라쿠사 올드시티를 모두 둘러보고나서 다시 육지로 나아가다보면  산타루치아 다리 옆 광장에 실물크기의 커다란 조각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이스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이며 공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 동상' 이다.

  물질의 비중을 이용하면 비록 같은 무게를 가진 물체라 할지라도 각기 다른 표면 면적을 가지게 된다는 논리로 왕의 금관에 이물질을 넣어 속였던 연금술사의 비리를 밝혀낸 후에 '유레카' 라는 유명한 말을 소리치며 알몸으로 목욕탕을 뛰쳐나가 아르키메데스 광장을 뛰쳐다닌 세기의 스트리퍼였다.

  시라쿠사에서 로마군대에 의한 그리이스의 멸망을 목도하게되었으며,  기하학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자신을 모시러 온 로마군 장교가 마침 땅바닦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중에  원을 밟고 상부의 명령을 전달하려하자, '원을 밟지마, 이 XX야' 하면서 들고있던 나뭇가지로 장교의 얼굴을 후려쳐서  순간 분노한 장군의 칼날아래 무참하게 세상을 달리했다.

  아르키메데스를 시작으로 이번 여행기에선 고대 그리이스의 수학과 자연과학에 대해서 논의를 해보려고 애초 준비를 했었는데.......  시라쿠사의 여행기가 너무나 길어졌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기가 길어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금년 안에도 이번 여행기를 못끝내지 하는 우려가 생길 정도이다.  코로나만 잠잠해지면 내일이라도 다시 뛰쳐나갈 판인데 말이다.  하여 그리이스 수학과 자연과학은 어절 수없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하겠다.

  고대 그리이스는 문학과 예술뿐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에 등장하는 대부분 지식의  용광로였다.  한마디로 보물창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이스는 멸망했고 로마가 새로 등장했는데.......  로마는 문학이나 미술이나 군사적 필요성 외에는 그다지 그리이스의 지식이라는 보물단지를 등한시 했다.  무지일 수도 있고 뒤떨어졌다는 열등감일 수도 있겠다.  특히 로마군대의 토목 건축을 위한 계산법 활용을 빼고는,  로마는 수학분야에 거의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지중해로 영역을 넓혀간 아랍인들은 달랐다.  자신들 보다 시대를 앞서가 뛰어난 학문을 이룬 그리이스 문명을 존중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의 수학과 자연과학과 천문기술은 고스란히 아랍인들에게 건너가 더욱 심도있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아랍인들은  그리이스인들의 철학과 인문학과 예술에도 매료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들어선 유럽에선 거의 사라지다시피,  혹은 파괴해 버린 고대 그리이스 문명이 오히려 이슬람 국가들인 아랍권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운것이다.

  십자군 전쟁을 역사는 유럽의 백인사관 중심으로 이야기하지만,  당사자였던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개인 야만인이라 불렀던 동방의 이교도들 문화와 생활이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의 생활보다 훨씬 부유하고 풍요로왔던 것이다.  아랍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비하자면 유럽은 그야말로 거의 야만의 수준이었다고 깨닭은 것이다.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은 비로소 자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가를 뼈져리게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아랍은 정치와 종교가 열려진 사회였으며, 세상 어디의 누구의 앞선 기술이던 기꺼이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개선하였던 것이다.  그리이스 수학과 자연과학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 인더스 문명과  더 나아가서는 중국 황하문명권의 선진문물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용한 결과였다.

  유럽은 이제 서둘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혈안이 되었다.  허겁지겁 고대 그리이스 문물을 찾아보니 이미 자신들이 철저하게 파괴하여 버린 후였다.  하여 어쩔수 없이 이교도이자 적국인 아랍을 통해 사라진 그리이스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럽 사회의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을 하게되는 것이다.

  비단 수학과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지각있는 선각자들이 고대 그리이스의 문학과 예술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복원' '재생' '과거로의 회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 고대 그리이스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글쎄다.  많이 아쉽다.

  고대 그리이스와 아랍의 수학과 자연과학 만으로도  여행기 1회분은 채울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벨로모 주립박물관도 건너 뛸수밖에 없었고, 더욱 아쉬운것은 육지의 '고고학 공원'과 '디오니시오의 귀'로 알려진 천국의 채석장을 소개하지 못하게된 것이다.

  신시가지에 있는 기적을 나타냈던 '눈물의 성모 승천 교회'는 지난번 여행기로서 대체하고자 한다.

  오르티지아섬 박에 산재한 유적들도 가능한 찾아서 소개해보려 하였건만.......  또 다시 다음을 기대해 본다.

  움베르토 다리를 건너서 우리는 오전에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카타니아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걷고 또 걷다가 역사가 느껴지는 카페가 있어서 들려보았다.  그런데 간판과는 다르게 아주 현대적인 분위기였다.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하고나서 나오려니 벽에 걸린 장식에 눈길이 간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 감상중인 침팬치라.........  ㅋㅋㅋ  누군지 몰라도 참 멋지게 그렸다 싶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 쇼윈도우에도 같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똑 같지는 않은지.......  비슷한 류의 그림들을 자주 볼 수가 있다.  암튼 당시엔 쬐끔 감동적이었다.

 

 

 

 

 

 

 

 

 

 

 

   --- 시라쿠사 여행기를 마칩니다.  다음 여행기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