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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타오르미나 정상에 서면 '시로코' 향기가 난다

by 피안재 2020. 7. 26.

 

 

 

 

 

 

 

 

 

 

 

 

 

 

 

 

 

 

 

 

 

 

 

  북아프리카 지역 사하라 사막에서 발원하는 '시로코(Sirocco)'는 고온건조한 바람속에 대단히 거친 사막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거칠고 뜨거운 열기는 지중해를 건너면서 엄청난 수분을 흡수함과 동시에 거센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고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로코는 드넓은 지중해를 건너면서 온순해지고 다정다감해지는 부드러운 바람결로 변한다.

  시칠리아의 날씨와 환경은 모두 시로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시로코는 연중 가뭄 걱정을 덜게끔 알맞게 비를 뿌려주고,  1년에 300일 이상 더없이 맑고 푸르른 하늘과 풍성한 일조량을 보장해 준다.  한겨울에도 과일과 곡식이 열매를 맺는 따뜻한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토양을 제공해 주고,  무더운 한여름에도 어디든 그늘에서 들어서면 선선한 시로코가 항상 불어온다.

  나일강 유역을 '인류의 곡창지대'라고 부른다면, '시칠리아는 유럽 최고의 곡창' 이다.  어떤이는  폴란드 지역의 한없이 너른 들판과 초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것은 온통 밀과 해바리기 뿐이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밀과 보리와 올리브와 오렌지와 레몬과 아몬드와 포도를 비롯한 인간이 즐기는 모든 식재료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식량자원의 보고이다.  더하여 풍요로운 지중해 바다에 둘러 쌓인 해산물의 천국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풍부하고 기후와 토양마저도 비옥하다면  한마디로 지상낙원?

  낙원이라 불리는 곳에는 선사시대 이후로 분쟁과 싸움이 멈춘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  인간사에 탐욕의 정점엔 낙원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언제나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의 남쪽과 서쪽 해안에 서면 막 지중해를 건너오는 바람결에 '사하라 사막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라쿠사나 마르살라나 팔레르모에선 아프리카의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쪽 한참이나 윗쪽 타오르미나의 산정상에 오르면 지중해를 건너 온 사하라의 숨결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은은하게 시칠리아의 향기가 풍겨나온다.  은은한 사람의 체취처럼 말이다.  오렌지 꽃으로 만든다는 시칠리아의 향수 '자가라(Zagara)' 향기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더하여 레몬과 아몬드와 올리브 향기도 느껴지고,  더 깊은 속에는 시칠리아 와인의 숙성되면서 내는 짙은 은근한 향기도 있다.

  타오르미나 산정상에 오르면 온통 코발트빛 이오니아해가 두 눈과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난다.  그 너머에 크로아티아와 발칸반도가 금새 손짓하면 다가 올 것만 같다.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메시나 해협이 아득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좁은 해협 건너로 이탈리아 남부 특유의 경관을 간직한 칼라브리아 지역이 늘어서 있다.  조금만 더 시선을 돌리면  이제까지의 이오니아해(이탈리아의 동쪽 바다)와는 색깔마저 다른 티레니아해(이탈리아의 서쪽바다)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너머엔 그 바다를 에게해라 부르는 그리이스 사람들의 영토이다.

 

  태양의 땅 시칠리아.  그리고 그리이스인들이 찾아낸 낙원.  타오르미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유럽의 여행자들이 찾아들기 시작하면서 복원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19C 말엽의 타오르미나 성 아우구스틴 교회 광장.

 

 

 

 

 

  9세기 경에 시칠리아를 정복한 아랍인들은 비잔틴이라는 기독교 왕국이 오랫동안 지배했던 도시들을 모조리 짓밟거나 파괴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파괴가 극도로 심했던 곳이 바로 타오르미나였다.

  왜 유독 타오르미나 였을까?

  그 진위야 확실히 밝혀진것이 없지만.......  이후 19 세기에 들어 와 다시 유럽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복원과 복구가 이루어지고,  유럽의 여행자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타오르미나는 페허이다시피  버려지고 잊혀진 도시였다.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이 작고 협소하고 짧은 움베르토 거리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뉴욕이나 파리나 도쿄의 번화가를 방불게 했었다니  실로 믿기지가 않을 뿐더러  새삼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Porta Catania를 통하여 Corso Umberto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이스도 로마도 아랍도 스페인 까지도,  더하여 본토의 이탈리아의 흔적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어디서나 흔한......  여기는 시칠리아이며 타오르미나의 움베르토 쇼핑가일 뿐이다.

  해질 무렵이 되니 21세기의 움베르토 거리는 점차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곳의 일몰 풍경이 또 압권이지 않은가?

  우선 우리의 발걸음은 무심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계단으로 향한다.

  계단이 끝나는 자리엔 예날 귀족들의 저택과 왕궁과 팔라초가 부러 은둔한것처럼 감추어져 있다.

 

 

 

 

 

 

 

 

 

 

 

 

 

 

 

 

 

 

 

 

 

  이 화가 양반께서 끼니인지 주점부리인지 알 수는 없다만은 뭔가를 드시고 있었다.

  모두 둘러보고나서 가만히 작품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심정은.......  '야가 지금 밥은 제때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철학과 생각과 가치관이 담긴 미술작품을 보고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화가의 그림에서 굳이 시장성이나 대중성을 논한다는것 자체가 부당한 처사이겠지만........  나도 어디까지나 취미 수준 정도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어깨에 내걸려있는 당장의 가족문제만 아니라면,  이참에 훌훌 털고 가출해서 타오르미나에 둥지 틀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볼까?  한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을만큼 물감이랑 캔버스도 창고에 쌓아놓았겠다......  쌀 떨어져 다급해지면 선정적인 누드화라도 그리지 뭐.........  ㅎㅎㅎㅎ

 

 

 

 

 

 

 

 

 

 

 

 

 

 

 

 

 

 

 

 

 

 

 

 

 

 

 

 

 

  혹시라도 막차를 놓칠 수 있다는 가정하에 그 직전의 카타니아행 버스표를 예매해 둔 상태였다.

  시작때부터 마음으로는 좀 서둘러서 산 정상의 (사라센 성)까지 올라 볼 계획이었지만, 타오르미나의 유적들을 이잡듯이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보니  역시나 우리에게 시간은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몰타를 거쳐 시칠리아에 왔고, 적어도 계획상으로는 나폴리. 로마. 피렌체. 피사. 친퀘테레. 시에나. 오르비에토. 베네치아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에서  시칠리아에서의 일정을 늘려서 타오르미나에서 1박을 욕심내 볼 처지가 아니었기에 더 서둘러야만 했다.  남아있는 일정과 계획도 집중과 선택이 몇 번이고 필요한 이번 여행이었다.

  최소한 시칠리아에서만 20일 정도의 일정을 잡는다면 타오르미나에서 묶어갈 수 있을것이다. 

  아니면 이탈리아에 한 1년 정도 머물 수 있다면 정말로 근사한 인생 여행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점심 식사도 간촐하게 했던 처지라......  무엇이든 요기라도 하면서 잠시라도 쉬어 갈 공간이 필요했다.

  챠밍여사는 힐끗힐끗 골목길 한쪽으로 길게 늘어선 노천 카페를 힐끔 거린다.  그 속내야 뻔하다.  조금이라도 저렴하고 타인의 눈치를 안보면서 잠시 쉬어갈 곳을 찾는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날의 날씨는 좀 흐린편이었으면서  바람이 많이 불어서 쌀쌀하게 느껴진 날이었다.  오래 걷다보니 서서히 지칠 시간이 되었고,  힘이들면 더 추워지는 것이다.  잠시일망정 따뜻한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다가 내가 아주 멋진 장소를 찾아냈다.

  유리문 안으로 멀리 지중해가 보이는 아주아주 멋진 전망을 가진  좀 수준이 있는 카페겸 레스토랑으로 보였다.  그래서 손으로 가리켰는데,  건물을 기웃거리던 챠밍여사가 기겁을 한다.  메트로폴 호텔이었으니까 옛날 우리식으로 옮긴다면 '타오르미나의 중앙 여관' 쯤이라고 할까나?  그런데......  명패에 달려있는 별이 다섯개다.  손사래를 치면서 거부하는 챠밍여사의 귀에다 대고 내가 한마디 귀뜸을 한다.

  '나 비축해 둔 비상금이 좀 있어.  지금 가지고 있고.......  이럴때 아니면 언제 별 다섯개를 이용해 보겠니?  그것도 타오르미나에서..........'

  와!!!!!!

  무슨 돌 침대 광고가 아니라........  진짜 별 다섯개라는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것인지 제대로 절감했다.

 

 

 

 

 

 

 

 

 

 

 

 

 

 

 

 

 

 

 

 

  이제까지의 사진은 휴식을 취한 뒤 나올때 쯤,  브레이크 타임때 사진이다.

  우리가 쉬러 들어갔을 때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움베르토 거리 아래쪽의 벼랑위에 들어선 건물들의 풍경이 대부분 이러하리라는 것은 직잠하고 있었다.  고급스런 호텔과 레스토랑은 모두 벼랑쪽으로 들어서 있고,  거리 오른쪽의 계단 위로는 나믈 저렴하고 허름한 카페  레스토랑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 서 있다.

  발코니에서 에트나 화산쪽으로 붉게 노을이 물들어 갈 시간이면 이 카페는 분위기를 갈아 입는다.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테이블이 바뀌고 응정 세트가 교체되고,  개스 난로가 몇군데 들어서고, 가운데에 공간이 만들어지고 구석 창문가에 무대가 꾸며진다.  해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벽까지 은근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재즈의 선율이 흘러 넘치는 타오르미나 최고의 재즈 바로 교체되는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카페나 레스토랑을 이용했던 여행자들은 모두 물러나야만 한다.  이 멋진 공간이 재즈 바로 변신하면,  턱시도나 드레스 차림의 선남선녀 재즈와 와인 마니아들이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 온 이들만의 룰이다.  우린 턱시도나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처지라서......

  여기 이 메트로폴 건물은 복합 공간이다.

  재즈바와 오성급 호텔과 고급 귀금속 매장과 갤러리를 포함한 타오르미나 다운 고급스러움으로 그득한 공간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화장실을 오가면서 보고 느끼게 되는 매우 고급스럽고 독특하면서도 품위있는 공간일 것이다.  화장실은 지하 2층의 동굴 구조물 안에 있다.  럭셔리하고 아주아주 고급스런 분위기의 화장실이다.  지상의 재즈바와 호텔 후런트를 빼고......  아래쪽은 모두 동굴의 연속이다.  옆 건물도 동굴 사이로 문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 동굴의 채광과 환기를 위한 창문도 틀은 나무문이지만 장식이고  실제는 작은 삼각형 구멍이 전부이다.  그 구멍으로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엘레베이터가 연계되어 있지만 나는 굳이 계단을 바꿔 이용하면서 긴 복도를 거쳐간다.  볼 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건물 전체가 작은 개인 박물관이자  개인 미술관이다.  '이런 정도를 별 다섯개라 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들어오면서는 몰랐지만  지하 동굴 건물을 살펴보면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나우마치아(Naumachia)로구나.  외부에선 차단된 고대 로마유적을 이렇게 우연하게 경험하게 되는구나.'

  카페로 돌아 온 나는 발코니로 나가서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나우마치아' 라고 생각한 나의 확신이 정확이 들어맞았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타오르미나의 중심에서 북쪽 메시나 문쪽으로 약간 치우친 메트로폴에 있다.  움베르토 거리의 총 길이는 약 200 미터 정도이다.  나우마치아는 메시나 문에서 길이 122 미터에 높이 5미터의 벼랑 쪽으로 벽돌을 쌓아서 길게 동굴 형태로 만든 터널식 로마 건축물이다.  하여 그곳을 나오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지하로 내려갔다.

  나우마치아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 였다.  외부에선 겨우 일부 흔적만 볼 수 있지만.......  이들은 그 유적을 이렇게 훌륭하게 실생활에서 멋지게 이용하고 있는것이다.  로마 군인들의 위대함이 거부할 수 없는 중압감 처럼 느껴진다.

 

 

 

 

 

 

 

몹쓸 여행자의 포즈로 거만함의 극치라고 지적받음..... ㅋ

 

 

 

 

 

 

 

 

 

 

 

 

 

 

 

 

 

 

 

  이역만리 멀고먼 남의나라 타오르미나의 '나우마치아(Naumachia)'는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처럼 역사속에 편입시켜서 나름의 이득을 취하고 있다' 라고 보는 사람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의 역사이고 이탈리아의 문제인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나의 가치관과 역사에 대한 인식과 쓸데없이 넓기만한 오지랍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문제 제기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일이라고  태연하면서도 무심한척 넘어가 버리는 현실 인식 또한 크게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여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영 찝찝한 나우마치아에 대하여 짧게라도 내 생각을 피력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타오르미나의 나우마치아를 거론하려면 먼저, '오데온(Odeon)'을 먼저 이야기 해야만 하겠다.  그래야 설명과 이해가 다소나마 쉬울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밤바라(Antonio Bambara) 라는 대장장이가 자신의 집 뒤 공터에 텃밭을 일구기 위해서 괭이로 돌더미를 파헤치다가 우연히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잔해를 발견하였다. 1892년 6월의 일이었다.  대장장이 소유였던 이 불모지 터는 타오르미나 포르타 메시나 바로 안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 교회'와 담장도 없이 뒷쪽에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교회 관계자와  관청에다 신고를 했다.

  타오르미나 자체가 워낙 유서 깊은 도시였기때문에 관계자드은 심혈을 기울여 1년간 준비 절차를 마친 후에 비로소 발굴에 들어갔다.  발굴된 유적은 워낙 훼손이 심각해 원형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반원형의 극장이었다.  아주 작고 어찌 보자면 볼품도 별로 없어보이지만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하자면  고대 그리이스의 신전이 있던 터 위에,  기원전 21년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지어져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헌정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오데온(로마의 극장)은 스타일이나 구조에서 인근의 그리스 극장을 쏙 빼닮았다.

  근처에 멀쩡하고 규모가 엄청난 그리이스 극장이 있음에도 로마인들은 굳이 이 작은 로마극장을 성 안에다 또 세워야만 했을까?  그리이스 극장을 두 번에 걸쳐 둘러볼 때마다 나는 이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카타니아에도 그리이스 극장과 로마극장(오데온)이 인근에 존재하지만......  카타니아의 경우와 타오르미나의 경우는 너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카타니아의 경우는 후대에 지어진 오데온이 크기 못지않게 시설이나 모든면에서 그리이스 극장을 엎그레이드한 것이라 보겠는데,  타오르미나의 경우엔 우선 크기에서 비교가 안될만큼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을 뿐더러 시설면에서 뒤떨어 진다.  그리이스 극장이 세종문화회관 이라면 오데온은 신촌의 작은 소극장이라 하겠다.  로마라는 대제국의 자존심과 위용이 넘쳐나던 시기였는데.......  왜 이렇게 그리이스 극장과 비교하여 옹색하고 창피스러울 건물을 지어야만 했을까?

  내가 찾아낸 결론은 간단했다.

  그리이스가 멸망하고  신흥강국 로마는 이제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타오르미나는 그리이스 극장을 제대로 사용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리이스 시대에는 인근의 사람드이 모여들어 극장을 횃불로 가득채우고 연극을 공연하고 열광하며 축제를 즐겼었지만,  로마시대의 타오르미나는 극히 소수의 귀족들과 부자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휴양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로마의 귀족들과 권력자들과 부호들은 따뜻한 남쪽의 지중해 연안에서 노후를 즐겁게 즐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은 곳곳이 화산 활동이 활발한 관계로 항상 마음 편하게 지내지는 못하였다.  품페이의 경우가 좋은 본보기였다.  하여 시칠리아를 찾았지만,  대부분의 남쪽 도시들은 에트나 화산의 영향권에 들었고,  동부의 타오르미나 경우는  해안가이며 산지였기에 비교적 안전하였고,  바다를 통해 접근하기가 용이했다.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곳을 노후를 위한 조용한 휴양지로 삼게되었고,  소수의 치안 유지를 위한 군대와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해 줄 노예들만이 이곳에 머물 수 있었다.  그것이 로마 제국내에서 가장 작은 도시이자 가장 풍요롭고 살기좋은 도시 타오르미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만을 가지고는 거대한 그리이스 극장을 채울 수가 없게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시대상 속에서 극장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이스 극장이 노래를 하고 연극을 하는 주요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면,  로마는 검투 경기라는 신종 오락게임을 만들어 활성화 시켜서 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어했기에 더더욱 극장은 꼭 필요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야만 로마의 권위와 황제의 칙령과 제국의 승리를 알릴 수가 있었고,  또 여론을 수렴하고 반란을 예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권력에서는 한 발 물러나 노후를 즐기려는 귀족과 부호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힘이 로마에 전달되고 발휘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인구가 적다고 타오르미나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는  제국의 위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고 초라한 소극장을 성 내에 만들어 선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옹색한 소극장에서 검투 경기가 벌어졌으리라곤 생가하기가 좀 힘들어 보인다.

  그저 연로하고 쇠약해진 원로들을 위해서 연설회나 연극 공연이나 위로연 파티가 자주 열리지 않았을까 싶다.

  오데온(로마 소극장)의 위상을 분명하게 나름 밝혀 놓았으니.......  이제 그 위에다가 나우마치아의 진실을 밝혀 보자.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보면 콜로세움에서의 검투사들의 검투 경기가 등장한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경기 뿐만이 아니라 맹수들과 검투사들의 경기도 벌어졌고,  기독교인들은 맹수에게 던져주거나 화형을 시키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물을 끌어들여서 거대한 수상 무대로 만들어서는 해상 전투를 재현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함선들이 부딪치고 화염에 휩싸이는 해전이야말로 언제나 로마인들이 가장 뜨겁게 반응하는 최고의 전쟁 소재였다.  이렇게 콜로세움에 물을 끌여들여서 인공적으로 벌이는 해상전투 무대가 바로 '나우마치아(Naumachia)' 이다.

  그 같이 어마어마한 해상 전투의 무대가 타오르미나에 만들어졌고  실제 행해졌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오르미나 어디에도 물을 가둘 수 있는 원형극장(콜로세움)은 없다.

  다만,  타오르미나의 기록된 역사 안에 '나우마치아'라는 단어는 몇몇 등장한다.

  타오르미나에서 '나우마치아'란 단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나우마치아'란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곳에서도 해상전투 연극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로마 제국시대의 타오르미나 사람들이 그리이스 극장을 활용할 수 없는 규모라서 어쩔 수 없이 성내에 손바닥만한 오데온을 지어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어마무시한 나우마치아를 벌이고 소화해 낼 수 있었다는 말인가?  영화에소도 나오지만.....  검투 경기 자체도 흥행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황제와 권력의 배후도 있어야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경비가 소요되고  이익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오르미나에 실제 전함 수준과 크기를 갖춘 배가 건조되고,  그 배가 떠서 전투를 벌여야하는 무대가 꾸며져야 하고,  바닷물을 퍼 올려서라도 배를 띄워야 하는데........  그런 무대가 설 마당이 어디있으며,  그 어마어마한 투자비며.........  이 작교 협소한 도시와 추측되는 인구 수에서  과연 흥행이 이루어질까?

  혹,  오데온을 물로 채워서 연기자들이 알몸으로 물 위에 엎드려서 장난감 배를 가지고 인형극 같은 해상전투를 펼쳤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랬다쳐도......  로마에서 권력의 한복판에 살면서 이미 실제 콜로세움에서 나우마치아를 경험했던 원로들이 낙향 삼아서 타오르미나에서 살고 있는데,  장난감 인형 수상극을 나우마치아네 하면서 공연을 펼치면.......  누가 가서 관람이나 할까?  

 

  타오르미나 여행 도중에 나는 한 장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림 옆에 적혀있는 설명 중에 분명하게 '나우마치아'가 쓰여져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그제서야 나는 아주 조금은  '타오르미나에서의 나우마치아의 의미'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것이 있었다.

  타오르미나에서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던 그런 어마무시한 해상전투 연극 무대는 절대 없었다.

  '도시 개발'이 있었을 뿐이다.

 

 

 

 

 

 

'나우마치아(Naumachia)'가 등장하는 타오르미나 풍경화.

 

 

 

 

 

 

 

  그러면 이제 타오르미나의 나우마치아 유적을 직접 만나보기로 하자.

  '나우마치아(Naumachia)'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포르타 메시나를 들어서 왼편으로 꺾어서서  '그리이스 극장(Teatro Antico di Taormina)'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따라 오르지 않고,  바로 아랫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 놓은 여행자 골목이 나온다.  타오르미나 특유의 노란색이 유독 많이 들어간 도자기 타일 장식으로 주변이 온통 꾸며져 있어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골목이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곧 다시 합류하게 되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측으로는 길고 높은 붉은 벽돌 담장이 쳐저있고,  아랫쪽으로는 벼랑길인데 그 사이사이에 담장이 쳐지고 터를 넓혀서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 있어서서 달리 벗어날 방도도 수월치 않을 정도다.

  철망으로 출입을 통제하는것 처럼 담장 흉내를 내놓고 철문이 하나 내결려 있는데 거의 열려져 있다.  그리고 그 철문 옆에 '나무마치아 유적' 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높게 쌓아놓은 성벽이라면 성벽 같고,  창문이 없는 창고라면 창고 같은 건축물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다.  앞으로 작은 포장도로가 깔려있고 현지인들이 중요 통로로 사용하는 길이라는 것을 단박에 깨닫게 될 것이다.  공원은 안되더라고 작은 정원들이 길게 가꾸어져 있고,  중간중간에 간이 커피숖 같은 카페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시선을 들어 보면 이 붉은 벽돌의 담장이 높이 5미터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 담장 위에 들어선 건물(집. 상가)들이 바로 움베르토 거리의 상가이며 카페이며 호텔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건축물이 '나우마치아' 이다.  포르타 메시나에서 시작하여  움베르토 거리의 한복판에 설치된 빗토리오 에마뉴엘 광장(발코니)까지 약 12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 같은 건축물의 이름이 '나우마치아' 이다.

  'Naumachia'가 원형극장에 물을 가두어 놓고  실제 크기의 함선과 군대를 분장 등장시켜서 실제 해상 전투를 재현하는 수상 연극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뜬금없이 이 타오르미나의 붉은 벽돌 담벼락의 이름에 '나우마치아' 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여러가지 학설과 억측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붉은 건물의 정체(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거의 정설처럼 이 건축물은 물을 가두기 위한(나우마치아 공연을 위해서) 시설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대략적인 건물의 구조는 흑백사진(참조)에서 처럼 돌이나 벽돌로 여러개의 아치형태 기둥을 길게 늘어세우고 옆면을 벽돌로 막고 천장을 만들어 씌워서 하나의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건축술이었다.  이 아치형태의 갯수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건물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다.  옆으로 같은 방식으로 이어 붙여서 크게 할 수도 있고,  방향을 타원형으로 틀어나가면 원형극장의 형태도 되는 것이다.  천장을 만들어 덮고 그 위에 또 같은 방식의 아치가 더해지면 고층건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와 형태가 타원형으로 이루어지고 고층으로 이루어져 완성된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자재의 무게(하중)을 견디게 하는 일대 혁명이 아치형의 등장이었으며,  도한 코크리트라는 신기원의 건축자재를 발명한것이 로마 건축의 실로 위대함이라 하겠다.  콜로세움의 내부 사진도 여러장 있지만,  단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로마시대 만들어졌으나 심하게 훼손된 아르메니아 건물의 흑백사진(참조)로 쉽게 이해를 돕고자 하여 퍼왔음을 밝혀둔다.

  타오르미나의 나우마치아는 왜 움베르토 거리를 따라 거의 일직선상으로 220미터 가까이나 늘어서 있을까?

  이 건물이 수상 연극을 위한 무대였다면 담장이 끝나는 빗토리아 에마뉴엘 광장에서 어떻게든 산 정상을 향해 또 하나의 방어벽이 설치되어 물을 가두는 공간을 만들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220미터의 담장 외에는 다른 덧붙일만한 시설물의 잔해조차 전혀 없다.  최소한 사방댐 비슷한 형태의 구조물 비슷한거라도 있어야 물을 가둘것 아니겠는가?  아울러 전체 로마제국의 건축사를 통털어서   검투 경기를 위한 콜로세움은 지중해 연안 뿐만이 아니라 북아프리카나 소아시아 지역까지 로마군대가 주둔하는 도시에는 대부분 세워졌으나,  모두가 타원형이었다.  그 타원형의 건물(콜로세움)에 방수 시설을 보강하여 물을 끌여들여 수상무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커다란 강이 흐르는 오늘날의 대도시(파리.런던. 로마. 서울 처럼)였다면 그냥 흐르는 강물 위에다 수상무대를 꾸며보기라도 했을지 모르겠지만.......

  오데온은 그리이스 극장의 축소판이었다.  그리이스 극은 외벽과 천장까지 갖춘 완벽한 건축물이었다.  이를 본따서 축소된 규모의 오데온을 지었다면,  차라리 오데온의 외벽을 보완하여 소극장을 만들어서 미니 수상연극을 했다면 나름.........

  어찌어찌해서 타오르미나의 나우마치아 안에다 물을 끌어들였다고 치자.  이 담벼락의 놓이만큼 산자락까지 모두 호수가 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벼랑 위에 겨우들어선 협소한 타오르미나에서 어찌되었던 이렇게 크게 댐을 만든다면 기껏 만들어 놓은 오데온을 비롯해서 많은 것들이 물에 잠겨야 한다.  그럴 경우 나우미치아  면적을 제외하면 타오르미나라는 마을 공간은 최소한의 일부 공동체의 생활유지 공간에도 못미치게 되는 것이다.  붉은 벽돌의 조합으로 사방댐의 수압을 견뎠을까?

 

  지극히 최근에 들어서, 현재의 나우마치아 벽돌 담벼락에서 아래로 약 18미터 되는 지점에 기존의 나우마치아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소규모 담벼락이 그리이스 시대에 만들어졌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크기는 좀 작고 훼손이 아주 심한 형태의 건물 기초 형태지만 비슷한 거리차를 두고 길게 늘어선 화산암 돌덩이를 쌓아만든 담벼락이 분명했다.  그리이스인들은 이 공간안에다 작은 연못도 조성했고  트실한 배수구도 여럿 설치했으며,  그 설치한 담벼락으로 생겨난 평평한 공간 위에다 텃밭을 일구기도 하고 생활 공간을 짓기도 했다.  저장 창고도 여럿 있었다.

  이러한 근거에다가 위에 있는 '나우마치아'의 이름이 들어간 풍경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추론이 가능해 진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거대 자본가와 건축 사업가와 부동산 업자가 엄연하게 존재 했었다.

  지중해 연안의 바위벼랑 중턱에 매달린 아주 작고 협소한 타오르마나라는 도시(마을)이 풍광이 뛰어나고 사계절 온화하며,  한가롭고 조용하게 지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명소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게 된것이다.

  로마는 권력과 야망과 성공의 도시였다.  또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권력 다툼이라는 이면의 참혹함과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그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아는 원로들은 로마로 부터 멀리 떠나거나  로마로 부터 잊혀지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로마로 부터 멀리 벗어나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떨어져 노후를 지내기에 최고로 적합한 명소로 타오르미나가 귀족사회와 부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로마의 거대자본과 부동산업자들의 빼어난 촉각이 타오르미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투기대상으로 타오르미나가 떠올랐고  실질적인 난개발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포르타 메시나에서 포르타 카타니아에 이르는 약 200미터라는 짧은 공간에 새롭게 신도시를 건설하기에는 절대적인 지형적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나마 중간지점인 빗토리아 에마뉴엘 광장 발코니에서부터 4월 광장까지는 나름 어느정도 평탄함을 유지하고 있고,  이미 관청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과 백성들의 주거 공간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북쪽으로의 절반 정도 공간은 그야말로 난개발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대의 그리이스 사람들이 석축을 쌓고 흙을 다져 넣어서 평평한 공간과 연못과 창고와 주택을 지은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타오르미나의 열악한 환경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신도시 건설의 새로운 방법을 착안하게 된 것이다.

  포르타 메사나에서 빗토리아 에마뉴엘 광장까지 약 220미터의 거리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서 길고 거대한 창고 같은 공간이 생겨나는 옹벽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옹벽의 안쪽을 높이만큼 흙과 자갈로 메꾸고 다져서 마차가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코르소 움베르토, 그러니까 움베로토 거리라는 타오르미나의 척추에 해당하는 중심 도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전망이 좋은 벼랑쪽 옹벽 위에다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고급 빌라를 길게 늘어서 건설했다.  본래 설치한 옹벽은 이제 고급 빌라의 지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식량과 와인을 저장하고  유사시엔 방공호로 활용이 가능해 졌다.  앞전에 우리가 경험한 메트로폴 호텔과 레스토랑의 본래 사용 용도가 로마시대에 이미 비슷하게 활용된 것이다.  아니지.  그게 본래의 목적이었다.  부동산업자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미터 정도 늘어선 고급 빌라의 반대편에 나름 품위있는 고급 별장을 군데군데 지어서 분양했으며,  이 고급 빌라들의 기본적 품위있는 생활 영위를 위하여  중심도로를 따라 길게 시장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고급 휴양도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이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줄 교회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권력에서 한걸음 물러난,  명예와 부를 갖춘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도시가 완성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왜 '나우마치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까?

  이런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부동산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게 '진짜' '진실' '양심' 같은 단어를 작금의 현실에도 기대하기 힘들지 않은가?  '피도 눈물도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먹고 튀면 그만' 이라는 용어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혹, 누군가 타오르미나에 투자를 유도하면서 제국 황제의 생각으로 나우마치아를 치를 수 있는 거대한 타오르미나를 새로 건설한다고 사기를 쳐서 투자금을 모았거나,  사업 허가의 과정에서 나우마치아를 팔았을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본다.  예사 도시에서는 감히 거행하기 힘든 나우마치아를 거짓으로 꾸며대서 타오르미나에 투자자를 끌어 들였고,  나우마치아 흉내를 낸것 같은 도시 계획으로 최고급 빌라촌을 완성했고,  분양 과정에서 차후에 황제의 명으로 안쪽에 나우마치아가 들어 설 것이라고 거짓 홍보를 해서 완판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디쯤에서 '나우마치아'가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타오르미나 역사에 해상연극무대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기나 투기의 방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론 매우 탁월한 도시 개발 계획이 있었고 실행되었기에  지금의 타오르미나가 생겨났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의 유명 여행지 곳곳에서 깜직한 피노키오 매장을 볼 수가 있다.

  하긴 어디 이탈리아 뿐이에겠는가.  스페인에서도 몰타에서도 여행자가 몰리고 또 어린아이들이 존재하는한 피노키오 매장은 번성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도시마다 규모나 매장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마치 스타벅스 매장 비슷하다고 할까?  나는 피노키오 매장 중에서  오르비에토 매장과 여기 타오르미나 매장이 나름 깜찍하고 매력이 넘쳐나 보였다.

  하지만,  둘러보다보면 결코 가격대가 그리 만만한 장난감 매장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될 것이다.  언제나 우리 예쁜 손녀 태리 생각에 들러보고는 할머니는 시간가는 줄 모른다.

  면세점이나 세계적인 브랜드 매장을 기피하는 편이다보니  쭈욱쭈욱 통과를 해버리고 수공예품 매장도 간간히 둘러보는데,  핸드메이드에 대한 이들의 유별난 자부심 때문일까?  가격이 만만치 않다.

 

 

  타오르미나 여행의 막바지에 마주친 한무리의 어르신들.......  현지인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하긴 그토록 유명한 타오르미나의 일몰을 보기 위하여 너두나도 전망이 빼어난 발코니로 달려들 갔는데,  이렇게 골목 깊숙한 공터에 앉아서 사그러져가는 햇쌀 한줄기를 붙잡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과거의 찬란했던 타오르미나 역사에 비하자면,  저분들의 눈에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무한의 자유분방함을 드러내며 이곳을 찾아드는 여행자들이 더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여행자들의 웃음과 떠들고 즐기는 모습이 오히려 더 부유함과 여유로움의 드러나는 모습으로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날 정도이다.  세상의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듯.....  그렇게 타오르미나의 한 세대들이 저물어가는것 같아서 조금은 안타까웠다.

  타오르미나 사람들......  아니 시칠리아 남자들은 거칠코 투박하다고 한다.

  거친 바다와 수많은 외세의 침략 앞세서 나름 자신들만의 처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결과였으리라.  그런 결과로 이 풍요로운 자연과 옥토를 두고 그들은 서둘러 시칠리아를 떠나야만 했었다.  영화 (대부)의 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시칠리아 남자들의 가슴 한구석에는 자신만의 바다........  자신들만의 고향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시칠리아를 떠날 수 밖에 없지만........  떠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 올 순간을 꿈꾸기 시작한다고 했다.

  현지인들이 손바닥만큼 남아있는 햇쌀을 나누어 즐기면서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공간........  그곳이 진정한 타오르미나 현지인들의 소중한 장소이리라.  화려하고 유명한 유적이나 카페나 호텔이나 상점은 모두 여행객들에게 내어주고,  자신들은 이렇게 골목 안쪽 가장 조용하고 허름해 보이는 공간에서 최소한의 휴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리라.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 교회(Chuch of Saint Catherine of Alexandria)'의 무엇이 현지인들을 편하게 찾아오게 하고 쉼터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일까?  도시의 중심인 두오모도 성 요셉 교회나 성 안토니오 교회에서와는 무엇인가가 다른.......  어떤 현지인들만의 매우 독특한 공간 이란 느낌을 받았다.

  시칠리아에서는 시칠리아 태생의 성녀인 산타 루치아 성녀가 산타 아가타 성년가 크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  그런데 이곳 타오르미나에서만은  멀고 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건너 온 카테리나 성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남달라 보인다.

  이 작은 광장,  카테리나 성당 앞의 분위기는 타오르미나의 어느 장소와도 사뭇 다르다.  현지인의 정서가 느껴진다.

 

 

 

 

 

 

 

 

 

 

 

 

 

 

 

 

 

  잉글베르트 험퍼딩크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보다보면 '열네 천사'에 대한 잃어버린 아이들의 기도가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열네명의 천사는 카톨릭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분들이며, 인류를 구원하고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뒤에 부활하신 구세주를 따르다가 처녀의 몸으로 순교하신 성녀들을 가리킨다.  아이들의 기도에도 나오듯이  이 거룩한 성녀들의 숭고한 정신과 가르침은 비단 종교 속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유럽 사회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까지 아주 커다랗게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다는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성녀(Saint Catherine of Alexandria)'는 이 거룩한 '열네 천사'에 속하신 분이다.

  이 분의 이름에 항상 알렉산드리아가 따라붙는것은 그 분이 그곳 출신이고 그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며, 카톨릭의 교회력 안에는 다른 카테리나 성녀가 더 계시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출신지가 따라붙게된 것이다.

  '성녀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에게는 꿈 같은,  혹은 전설 속에서나 가능하지 싶은 수많은 이야기가 늘 상 따라 붙는다.  카톨릭력 안에서의 순교는 그렇다치고라도........  그녀가 현세에 다시 등장하는 것에서 부터,  여성 중심의 별도의 민간 신앙처럼 뿌리깊게 유럽사회 전역에 퍼져나간 것하며,  수많은 기적과 이변을 만들어 냈다.  14세기쯤의 후기 중세 시대에는  종교를 벗어나 유럽 곳곳의 지역적인 문학에도 등장하게 되고 예술에도 등장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되었으나, 불미스런 사이비 집단과도 같은 의심을 사기도 하였다.  세상 각처에서(특히 동방 정교회에 뿌리를 둔 지역들) 전대미문의 기적들이 카테리나의 이름으로 생겨나고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력(기념일을 기록하는 달력)에서 카테리나의 기념일을 삭제하였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성녀로서의 직위를 박탈했다고 하겠다.

  하지만 비교적 근자에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성녀 신위를 회복시켰고,  그 기념 축일은 12월 24일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성녀는 서기 300년대,  기독교가 아직 로마의 국교가 되지 못해 탄압의 대상이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주지사(고위관리) 콘스투스의 딸로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관심이 깊던 그녀는 그 관심 분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던 중에 숨어다니며 신앙활동을 하던 기독교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현신하면서 부터 스스로 기독교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의 기독교 박해가 너무도 가혹해지자 카테리나는 황제를 직접 찾아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황제의 지나친 폭정과 잔인함에 대해 정면으로 꾸짖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독교 교리와 그리이스 스토아 철학에 근거한 힐책에 말문이 막혀버린 황제는 당시로서는 로마의 최고 지식인 집단이자 자신의 싱크탱크이자 변호단인 50인을 불러서 카테리나와 논쟁을 벌이게 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이 끝장토론에서 카테리나가 승리한다.  50인의 황제 변호인단은 치욕적인 패배에 앞다투어 줄행랑을 쳤다.  그들중 서너명의 변호인이 스스로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 피력하면서 카테리나를 옹호하다 그자리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로마라는 대제국 안에서,  그것도 신의 지위에 버금가는 황제 면전에서 그의 통치 행위를 비난하고 꾸짖었으며,  로마의 지식 체계를 한순간에 난도질 해버린 이 사태의 파장은 대단히 컸다.  로마의 위상이 흔들릴 정도였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그녀를 투옥하고 고문할 것을 지시했다.  이교도의 모함이었음을 시인하고 황제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고문이 자행되었다.  인류역사에 고문이 등장한 이후로 생겨난 모든 방법이 총 출동하는 전대미문의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물과 음식조차 주지않고 연일 잠을 재우지 않고 온갖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꿋꿋하게 이 사태를 버텨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위로와 평안을 내려주었고  비둘기가 먹이를 물어다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고 전해온다.  이 처절한 사태를 지켜보면서 새롭게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막센티우스 황제의 아내 '발레리아 막시밀리아'가 있었다.  막시밀리아 황후가 친히 고난속의 카테리나를 찾아가 접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그녀 또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막시밀리아의 배려 속에 200명 정도의 여성들이 카테리나를 만나게 되었고  모두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이들 200명의 여성들 중에 상당수가 머지않아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이후로는, 어느 다분히 기독교적인 사가가 꾸며서 넣은 이야기겠지만.......  황제는 카테리나가 배교를 하기만 하면 자신의 후처로 청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자신이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으며,  당연히 그 정혼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을 했다고 역시 전한다.

  분노한 황제는 마차를 이용한 압슬형(능지처참 비슷하게)에 처하지만  느닷없이 마차 바퀴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이때부터 성녀의 그림에 마차바퀴가 등장하면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황제는 친히 그녀를 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참수형을 명령했다.  잘려진 그녀의 목에서는 우유빛 액체가 흘러 나왔다고 전해온다.

  카테리나가 태어나 순교하기까지에도 이미 여러가지 기적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서기 300년 경 로마에 의해서 참수형에 처해진 그녀의 시신이 어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들판에 내다 버렸는지,  공동묘지에 묘비명도 없이 대충 묻어버렸는지도 알 수없고  사라지고 기억에서 지워졌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동방정교회 일부에서만 신화처럼 전설처럼 카테리나의 일화가 전해져내려왔을 뿐이었다.

  500년이 지나서 9세기 경에 모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십계명 돌판을 선물받았다는 성스러운 시나이산 중턱의 수도원 부근에서 작은 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라는 작은 표지와 함께 발견된 유해의 목 부분에서는 여전히 우유빛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건축한 비잔틴 제국 최고 전성기의 황제 유스타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성녀 카테리나 수도원'을 짓도록 명령했다.  당시의 비잔틴은 옛 로마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발칸반도에서 스페인의 리베리아 반도까지를 차지한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 시대에 최고 통치자 유스타니우스가 '성녀 카테리나'를 기리고 받들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대대적인 건축사업을 벌였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이슈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뱃길을 통해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파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 열풍'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녀에게 헌정되는 무수히 많은 교회가 여기저기에 생겨났다.  도처에서 성녀 카테리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고  수많은 이변과 기적이 생겨나고 퍼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모습 뒤에 마차바퀴가 등장하면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가 틀림없다.  주로 한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손에는 칼을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미혼 여성들과 장인, 교육자, 철학자,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나이 산의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수도원을 순례하면 사진의 '알렉산드리아 성녀 카테리나의 반지'를 준다고 한다.

 

 

 

 

 

 

 

 

 

 

 

 

 

 

 

 

 

 

 

 

 

 

  Porta Massina를 나서면 이제 서서히 타오르미나 여행을 마쳐간다는 의미이다.

  산꼭대기 사라센 성과 교회를 올라가 보지 못한 아쉬움은 너무나도 크지만,  이번 여행기에는 싣지 못할 정도로 도시므이 곳곳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기에 다소나마 위로를 삼아본다.

  삼거리 카페에 잠시 들러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나서 터미널로 향해야 하는 시간인데,  채 가시지 않는 얕은 아쉬움과 약간의 시간적 여유로 인하여 갑자기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간다.  터미널을 지나 조그만 내려가면 빼어난 뷰를 자랑하는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비수기에는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기에 쉽게 접근하기가 용의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지난번 여행에서 나는 가파른 계단과 언덕을 뛰다시피 하면서 기어코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런 아쉬움을 이곳 전망대가 다소나마 덜어줄 것이라고 믿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솔라 벨라(Isola Bella)'.

  '이솔라 벨라를 보지 못했다면,  타오르미나를 다녀왔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 초록빛 숲과 빨간 지붕.........  아름답다.

  달리 더 어떤 말로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집에 사는 사람은 그렇다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글쎄다.  어디에다 기준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솔라 벨라는 엄연한 사유지다.

  타오르미나와 시칠리아가 특별 관리를 하는 지역이지만 엄연하고도 분명하게 사유지다.  소유자들이 지금 그곳에 실제로 살고 있다.  저런 별장 하나 가져 봤으면........

  이솔라 벨라를 이야기하자면 타오르미나 두오모 아래로 벼랑쪽에 위치한 참으로 멋드러진 숲과 품위있는 건물이 숨겨진듯한 완전한 영국식 정원이 있는 '빌라 코뮤날레(Villa Comunale)'를 빼놓을 수가 없으며,  코뮤날레를 이야기하자면 한 여성과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빌라 코뮤날레 정원 사잇길.

 

빌라 코뮤날레를 직접 만들었으며 이솔라 벨라를 구입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가꾼 영국여성.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한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아주아주 여왕을 짜증나게 만드는 애물단지 황태자가 있었다.  훗날 장수하는 어머니 덕분에 60세가 되어서야 '에드워드 7세 영국왕'에 등극한다.  이 양반이 펼생동안 벌이는 몹쓸짓꺼리 중에 하나가 바로 여성 편력이었다.  귀족 유부녀에서 시작해 영화배우와 사창가 여인에 이르기까지 밤하늘의 별을 세는것보다도 더 많고 어렵게 여성편력을 벌여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빅토리아 여왕의 눈에 참신하고 좀 색다른 분위기로 사교계에 막 등장한 한 여성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플로렌스 트레벨리안(Florence Trevelyan)'이란 이름을 가진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다.  첫눈에 반하는 경우만 있는것이 아니라,  첫눈에 적색경보가 번쩍이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여왕은 뜬금없이 이 젊은 여성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뉴페이스가 등장하자마자 항태자의 색끼가 또 발동을 시작한 것이다.  즉각 여왕이 끼어들어서 이들을 떨구어 놓았고,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쎈 여왕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밝혀진것이 없지만...... 암튼 플로렌스라는 애송이 여성을 기필코 영국땅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온갖 풍문이 영국 왕실 주위에서 나돌았지만,  정작 이해당사자인 '플로렌스 트레벨리안' 별반 대수롭지않게 처신하면서 영국을 떠나 찾아 온곳이 시칠리아였고  다름아닌 타오르미나였다.

  이곳의 풍광에 깊이 빠져 든 플로렌스는 페허가 된 그리이스 신전터를 매입하여 그 위에 전통적인 영국식 정원을 만들었다.  더하여 바로코식 현대 건물을 지어서 아예 터를 잡고 눌러앉아 버린 것이다.  도로를 내고 꽃과 나무를 심고 하는 것이 그녀의 모든 일과가 되어버렸다.  타오르미나 일대의 공원 조성에 그녀가 크게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 아가씨가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다.  타오르미나 태생의 정치가이자 현 타오르미나 시장이었던 '살바토레 카치올라'와 결혼했다.  그들은 평생을 여기 타오르미나에서 살았다.

  플로렌스가 38세의 아줌마이던 시기에(1890년)  이솔라 벨라를 돌아 본 플로렌스는 그 빼어난 풍광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모래와 작은 돌멩이들로 겨우 육지와 힘겹게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이 무인도를 플로렌스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다.  이후로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약 17년을 그녀는 이곳에 온 정렬과 애정을 쏟아 붓는다.   빨간 지붕이 달린 그녀가 거주할 집을 직접 지었고 예쁜 정원을 꾸몄다.  토착 지중해 식물들로 가득했던 섬에다가  비지중해성 나무를 옮겨 심고 희귀 관목을 옮겨 심었다.  잔디를 심고 꽃밭을 가꾸었다.  숲 조성이 완성되자 다양한 지중해 조류들이 모여들었고, 깜직한 도마뱀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플로렌스 트레벨리안'이란 대영제국의 귀족여성이 화려하게 영국 사교계를 휩쓸면서 사는게 행복했을까,  아니면 어찌되었던 쫓겨난 처지로 여기 타오르미나의 대자연속에서 단조롭겠었지만 조용하고 우아하게 산것이 더 행복했을까?

 

  나 라도 저런 이솔라 벨라 정도 하나쯤 갖게된다면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타오르미나의 청소부가 될 지언정 이곳에서의 삶을 기꺼이 택하겠다.

 

 

 

 

 

 

 

 

 

 

 

 

 

 

 

 

 

 

 

 

 

  뭘 어쩌겠어?

  계단을 내려왔으면 다시 올라가야지.

  전망대의 풍경에 푹 빠져있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사실도 깜빡하고 있었다.

  서둘러야지.  해도 저물었는데  이러다 버스 놓치면 큰일 나는거지.......

  죽어라 쫓아가서 겨우 카타니아행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시칠리아의 야경은...........  깜빡 졸았나 싶었는데.......

  버스가 카타니아 터미널에 도착하고 있었다.

 

 

 

 

 

 

 

 

  ---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칠리아 여행기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

 

 

 

 

Good bye - Taorm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