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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아테네' 보다도 더 그리이스적인 도시 '시라쿠사'

by 피안재 2020. 8. 2.

 

 

 

 

 

 

 

 

 

 

 

 

 

 

 

 

 

 

 

 

 

 

 

  고대 그리이스와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  이들 3국가의 역사는 지중해의 역사 자체였고 나아가서는 유럽의 역사이자 세계사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지중해를 통해 세상 밖으로 뻗어나가고자 했던 이 강대국들이 세력 확장의 교두보로 삼으려 모두가 탐내던 땅이 있다.  좀 더 소상하게는 너른 면적의 영토였다기 보다 그곳에 있는 도시 하나를 꼭 차지하고 싶어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싶다.

  그리이스와 카르타고와 로마가 모두 탐냈던 땅은 시칠리아였고,  그중에서도 시라쿠스를 간절하게 원했다.

  시칠리아를 나름 제대로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입을 모은다. '시칠리아는 태양의 땅' 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축복받은 시칠리아에서도 에메랄드 처럼 가장 빛나는 보석은 바로 시라쿠사'라고 입을 모은다.

  나도 그 말에 충분히 동감한다.

  오죽하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그리이스 도시로는 시라쿠사가 으뜸이다' 라고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 까지 그렇게 말을 했겠는가.

  '시라쿠사(Ciracusa)'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시라쿠사는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Delian League)에 가입해 있는 여러 폴리스(도시국가)들인 스파르타. 테베. 델리움. 코린트. 크레타. 마케도니아. 밀레투스. 에페수스에 비하자면 가장 늦게 동맹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도시국가가 되었다.

  '그리이스'라고 흔히 부르는 도시국가들의 연합은 곧 델로스 동맹의 다른 이름이라 보면 될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리이스의 영역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그리이스 반도와 크레타를 중심으로하는 섬들과 윗쪽으로 트리키아 해를 따라 돌며서 키프로스를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주로 현재 터키 영토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포카이아. 리디아. 에페스. 밀레토스.  그리고 로도스섬에 이르는 해양국가 였다.  오늘날의 그리이스 영토에서 터키의 서쪽 해안지방까지)

  그런 그리이스가 처음으로 에게해 지역을 벗어나 더 넓은 지중해를 바라보게되고 찾아낸 곳이 시칠리아였으며,  그 중에서도 유독 시라쿠사 지역의 매혹에 빠지게 되어 그곳에 제대로 된 그리이스 도시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지정학적 잇점을 잘 살려나간 시라쿠사는 오래지않아 아테네의 아성을 위협하는 가장 각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이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플라톤이 이곳에 수년을 머물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시라쿠스를 빼놓고는 델로스 동맹의 유지를 논할 수 없을만큼 급성장한 시라쿠사는 다음으로 아테네에 필적할만한 아름다운 도시 건설에 매진한 결과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후대에 남겨주게되는  당시 인구 3십만의 그리이스적인 대도시였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전성기의 그리이스는 멀리 대서양의 초입인 지브롤터 해협(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와 나일강 인근에서 내륙의 흑해까지를(터키의 일부지역 포함) 식민지로 다스렸던 명실상부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을 거점으로 해상강국 카르타고가 급부상을 해왔다.  지중해로 확장하려는 카르타고의 첫 목표는 당연히 시라쿠사였다.  카르타고는 차근차근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데,  델로스 동맹은 가맹국들간의 다툼으로 동맹으로서의 효과를 전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건너 쳐들어왔고 겨우 몇개 폴리스의 지원을 받은 시라쿠사는 응전에 나섰다.  시칠리아의 남쪽 해안 아그리젠토 앞바다에서 마침내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시라쿠사가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가 바로 '신전들의 계곡'으로 유명한 아그리젠토 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온통 그리이스 차지였고  그들은 그것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델로스 동맹이 한참동안 잘 나가자 동맹의 중심에 서서 패권을 휘두르던 아테네가 점점 거만해져 갔다.  동맹의 수장이 아테네가 아니라 아예 아테네가 처음부터 동맹을 소유한 것처럼 이끌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지못하고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다.  분노한 아테네는 동맹의 힘을 빌어서 스파르타를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스파르타가 델로스 동맹을 탈퇴하기에 이르렀고, 테베. 코린트. 마케도니아가 스파르타의 편을 들어서 펠레폰네소스 동맹이라는 새로운 연맹체를 탄생시켜 버렸다.  시라쿠사를 비롯한 여러 폴리스들이 중립으로 남기도 했지만,  이제 그리이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레폰네소스 동맹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된것이다.

  27년에 걸친 피말리는 내전인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들을 분열시켰고 그리이스는 아주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내닫게 된다.  이제 폴리스 밖의 지중해 상황을 살피거나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고 군사력도 정치지도력도 바닦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이스라는 존재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과거의 뼈아픈 패전을 교훈으로 삼았던 카르타고가 무섭게 성장했다.  오래지 않아서 과거 그리이스 연맹이 차지했던 지중해 연안의 모든 영토와 해상 무역을 카르타고가 독점하게 되었다.  그저 명맥만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과거 그리이스의 몇개 폴리스를 카르타고는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강대국으로 급성장을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도시 국가가  알프스 이남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로마였다.

  그리이스가 지중해 전체를 휩쓸고 다스리는 동안에 조금 뒤늦게 출발한 로마는 부딪혀봐야 크게 손해만 날것 같아서 그리이스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잔뜩 움츠리고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에도 벅찬 부족국가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그리이스의 몰락 소식을 듣고는 서서히 남쪽으로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해양민족인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을 차지하고자 했지  내륙의 영토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목민족 출신인 로마는 달랐다.  그들은 물과 너른 초지가 있는 평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이스가 몰락한 이후로 내륙의 영토는 그야말로 무주공산 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알프스 이북과  숲과 늪지로 가득한 프랑스나 독일 영토에 대해서는 일단 차후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 이들에게는 따뜻한 날씨가 보장되는 새로운 거점(도시)가 필요해진 것이다.

  다시 남쪽으로 말발굽을 돌린 로마는 반도의 끝자락인 메시나에서 조만치 코앞의 바다 건너 풍요로운 땅을 발견했다.  시칠리아였다.  더하여 섬의 남쪽에 전체 그리이스 영토에서도 최고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 시라쿠사가 건재하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그리의스의 찬란한 영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라쿠사'가 로마는 꼭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좁은 메시나 해협에는 지중해에서 최고로 막강한 카르타고의 해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으로 해군의 절대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시라쿠사에 가려면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었으니까.

  이리하여.......  로마는 허겁지겁 해군을 양성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 시라쿠사 때문에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니발이 나오고 스키피오가 등장하고........  결론적으로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지중해의 패권은 물론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고대 그리이스의 마지막 폴리스 '시라쿠사'를 하나하나 만나보기로 하자.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라쿠사 전경(구글에서 퍼 옮. 드론이 없어서)

 

 

 

 

 

 

 

  시칠리아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빼먹지않고 꼭 전해주는 말이 있다.

  시칠리아에 가면 동쪽은 카타니아  북쪽은 팔레르모에 거점을 두고 주변 도시나 관광지는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닐것,  교통은 알려진것과는 다르게 도로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렌터카 이용을 권하고 싶지만 경제성을 고려해서 가능하면 시칠리아의 전 버스노선은 상당히 수준급이기에 열심히 버스를 이용할 것이며,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타오르미나는 꼭 버스,  시라쿠사는 꼭 기차......... 알림 끝.

 

  이렇게 권고하고 다니면서  그제 우리는 타오르미나에 기차를 타고 갔다.  그냥 그날은 기차를 타고 싶었기에......  물론 결과야 '버스를 탔어야 하는건데' 하는 후회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오늘 시라쿠사에 가자면 당연히 기차를 타야만 한다.(지난 경험으로도)  그런데.......  아침 산책이 길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기차역에 왔더니만.......  쬐끔 전에 시라쿠사행 기차가 떠나고 말았다.  어쩌겠어?  후다닥 지척에 있는 버스터미널로 달려갔지.  금방 떠나는 버스가 있더군.  그래서 표를 끊었지.  뛰어가서 버스에 올랐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시라쿠사는 당연히 기차가 더 편하고 좋아'  그게 정답이야.

  주요 관광명소가 있는 오르티지아 섬으로 가는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시라쿠사 버스터미널이 기차역보다 쬐끔 가깝다고 해야겠다.  뭐 따지고 할것없이 아주 약간......  시라쿠사의 기차역이 관광지로서의 명성이나 드나드는 관광객 숫자에 비하자면 참으로 작고 볼품이 없다.  아주 쬐끄만 시골 간이역 수준이다.  그럼 버스터미널은 다르냐?  아니다.  우리가 보편 타당하게 생각하는 그런 버스터미널은 아예 없다.  커다란 공원 담장 옆에 그냥 내려준다.  컨테이너 박스가 매표소이자 터미널 사무실이다.

  이런 수준을 '그리이스 식'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이것 참 난감해 지는거지?

 

 

  며칠 전,  사석에서 나의 여행기를 꾸준하게 읽어주시는 지인으로 부터 느닷없이 총탄이 날아오는것 같은 질문을 받고는 잠간동안 당황스러워 했던 일이 있었다.

  '이스탄불, 몰타를 거쳐 시칠리아까지 왔는데  도대체 르네상스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  르네상스 산책이라는 부제를 꼭 붙일 이유가 특별하게 있었나요?'

  평소 언변가도 아니고 달변가는 더더욱 아닌 처지로  이러쿵저러쿵 질문에 답을 늘어놓고 이해 시키기까지는 500cc 생맥주를 두 잔이나 더 비우면서 타는 속과 입술을 적시고 난 후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명 관광지 답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를 세세하게 살펴보고 싶었고,  주된 목적지가 이탈리아라면 당연히 르네상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꽃피운 르네상스가 이미 오래 전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역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름 서설을 늘어놓기도 했고,  몰타에서는 몰타의 미켈란젤로를 만나 보았다.  물론 피렌체나 다른 도시에서 반듯이 꼭 다시 만나야 하는 인물이기에 그냥 맛보기 정도로 (세례 요한의 참수)를 만나보았다.  그 다음이 지금의 시칠리아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가 아닌가요?  왜 르네상스가 안보여요?'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 시칠리아는 아주 멀리 떨어진 까마득한 변방이었어요.  이탈리아와 연관 지으면 안되요.'

 

 

 

  서양미술史는 르네상스 시대를 1350년~1600년 경으로 함축 시켜서 보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문예부흥' 이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복원' '그리이스 문화로의 회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신만이 존재하는 중세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되돌아 보고 사랑하자'는 운동이자 새로운 시대 사조였다.

  아무튼 이 새로운 사조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을 피워냈으며,  종교 개혁에 저항하면서 다시금 인간을 존엄한 신 앞에 무릎꿇게 만들고 싶은 교황청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지금의 바티칸을 새롭게 만들었고, 보다 많은 교회들을 치장하면서 로마에서 또 한번 예술적인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는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로 우뚝 선 베네치아에 의해서 나름 좀 더 새로와진 르네상스가 펼쳐지는 것이다.  세상은 빠르고 무섭게 변해갔다.  종교 개혁 운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선박기술과 항해술의 발전은 신대륙을 발견하게되어 새로운 재화와 자원이 쏟아져 들어오고,  서양 경제의 중심이 이탈리아가 주도해 온 지중해 무역에서 점차 대서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 변화의 물결과 물자 운송의 길을 따라 르네상스는 이제 알프스 너머의 나라들과 대서양을 지나 영국을 거쳐 북유럽에 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급부상한 이슬람(오스만 제국)이 점점 유럽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당시의 유럽 상황을 들여다 보게되면......  십자군 전쟁 이후로 유럽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분쟁과 전쟁이 멈추어 본적이 없었다.  그 시대상황 안에서 가장 복잡하게 얽혀있고 분열되어 있고 열강들의 집요한 탐욕 앞에서 무기력한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 였다.  아니지......  이탈리아는 국가도 아니었다.  이탈리아라는 국가는 당시에 아예 없었다.

  신성(神聖)을 앞세우고는 있지만  세속의 군주만도 못한 교황들의 천인공로할 만행이 자연스럽게 숱하게 자행되던 로마 카톨릭(바티칸)이 재배하는 세속의 영토인 교황령이 중부의 로마를 차지하고 있었고,  볼로냐와 베네치아와 발칸반도 지역 일부(크로아티아 해안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의 교황령이란 일개의 도시국가 쯤으로 여겨도 무방하지 싶다.

주로 북쪽 롬바르디아 지역의 대도시들인 (피렌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들은 주민 자치기구를 만들어 대표자를 선출하여  어느정도의 민주주의를 닮은 공화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공화국들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처럼 커다란 자본을 기반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면서 참주라는 세습적인 통치방법을 동원해 전제정치를 펼치기도 하여,  순수한 공화제도와 참주제도가 부딪쳐 분쟁과 암살과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들의 가장 큰 과오는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이탈리아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알프스 근처로는 (밀라노 공국)과 (사보이 공국)이 있는데  이들은 아직 봉건제도에 입각한 전제왕권주의라 보면 이해가 쉽겠다.  이 와중에 밀라노 공국의 경우는 교황령의 베네치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를 막역한 배후로 연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당시로서 가장 큰 영토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나폴리 왕국)이었다.  나폴리에 거점을 둔 봉건왕국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까지는 관할하였는데,  나폴리 왕국은 하나의 완전 독립된 군주제가 아니라,  사실은 스페인의 식민국가였던 것이다.  나폴리 왕국의 통치자는 언제나 스페인의 왕족이 부임하면서 다스렸던 것이다.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이 혼란의 와중에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역사의 아리러니라 할까?  인류 역사의 대변화나 대발견은 항상 혼란과 환란의 시기에 생겨났다.  평화롭고 풍요로우면 변화를 꺼리고 놀고 마시며 줄기려는 향락문화만 발전한다.  죽기살기로 다급해져야만 인간은 무엇인가를 찾고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아주 특이한 존재다.

  이 르네상스가 로마에 내려왔다가는 그냥 북쪽의 베네치아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는데,  유럽대륙 서쪽 끝에 있는  실권자 스페인은 당시 '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운동'으로  리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을 몰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여 르네상스가  스페인까지 전해지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스페인에서 곷피운 르네상스가 스페인의 함대에 실려서 긴 항해끝에 시칠리아에 도착할 시기는..........  르네상스는 이미 끝이 나고 바로코 시대가 마무리되면서 유럽 본토에 로코코 시대가 시작될 무렵이 되고말았다.  한편 반도 본토에서는 이탈리아의 소국연합과 스페인이라는 초강대국의 다툼속에서도 르네상스가  뒤늣게나마 나폴리에서 상당히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폴리가 스페인 관할하의 왕정시대였던 만큼  르네상스는 나폴리의 귀족과 부자들만의 문화라는 한계에서 그냥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시칠리아는 그저 먼 국경 근처의 촌동네였을 뿐이다.

  그것이 시칠리아에서는 르네상스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라면 이유이다.

  하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히 있기는 있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성처녀 수태고지)  팔레르모  팔라초 아바텔리스 소장. 1476년.

 

 

(수태고지)  시라쿠사 벨로모 주립박물관 소장.  1474년.

 

 

 

 

 

 

 

  '수태고지(Annunciation)' 제목의 두 작품 모두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가 그린 그림이다.  이름 뒤의 메시나는 그의 출신 지명에서 나온것으로, 그는 시칠리아의 북쪽 메시나에서 출생했다.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받는 화가는 아니지만  안토넬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분명하게 한 사람으로,  봇티첼리나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베네치아파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젊은시절 안토넬로는 어렵게 나폴리로 미술공부를 위하여 떠났다.  그곳에는 그는  폴랑드르 회화파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그림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특유의 화풍을 폴랑드르 회화라 부루는데 이들은 그림에 있어서 기초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회화의 시작은 소묘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채색은 그 다음이다.' 라는 짧은 명제만으로도 이들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화풍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반 아이크 형제하면 그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들이 바로 현대적인 유화의 창시자라 불린다는 점이다.  그전까지의 그림은 대부분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벽면이나 천정에 그려졌거나, 달걀 노른자에다가 안료 가루를 이겨서 나무 패널에 주로 그림을 그리는 템페라화가 주류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반 아이크 형제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유화(油畵)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아마유(亞麻油)에다 여러가지 색상의 수지(樹脂)를 혼합하여 칠하는 방법으로 벽이나 천장이든 나무 패널이든 돌이든 도자기든 타일이든 어디에나 그림을 그릴수 있는 새로운 유채화 기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또한 이 기법은 그동안의 프레스코화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거나  템페라화 보다도 명암처리가 더 풍성해져서 '마티에르(matiere, 질감)'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 새로운 기법의 등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르네상스가 아니라 아직도 동굴속의 옹색한 벽화 정도를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훗날 발명되기야 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이나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폴랑드르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유채화 기법을 피렌체로 가져와 르네상스의 모든 화가들이 사용하게끔 만든 사람이 바로 안토넬로 메시나 였다.

  거기에다가 한 가지 더.........  안토넬로는  우리가 흔히 '조르조네'라고 부르는 '조르지오 바바렐리(Giorgio Barbarelii)'와 가깝게 교류하였다는 사실이다.   32세에 요절한 베네치아 출신의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크게 성장하여 베네치아 화풍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독특하고 위대하고 현란한 화가라 할 수 있겠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에서 다시 다룰 예정이라 생략하기로 하고.......  그의 천재성이 너무도 유명했던 때문일까?  당시에 이미 엄청난 숫자의 그의 그림들이 팔려나갔다.  그가 일찍 요절하였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훗날.....  대부분의 작품들이 위작임이 밝혀져 항상 화재에 오른다.  실질적인 그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위작을 가장 많이 배출한 화가가 아닐까?  하지만 조르조네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그림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벽이나 천장이나 아니면 나무 패널에 그림을 그려야만 하던 시대였는데......  조르조네가 어느날 새로운 그림 판대기를 만들어 나왔다.  캔버스였다.

  질긴 캔버스 천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림에 대한 크기가 자유로워 졌다.  한 벽면 이상으로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가지고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림이 놓여질 지정된 자리에서 꼭 그림을 그려야하는 이유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작업하기 편리한 어느 공간에서든 그려서  옮겨가면 되게 된 것이다.  갤러리는 캔버스의 등장으로 생겨나게된 신풍속도일 것이다.  새로운 문화 환경과 공간이 창조된 것이다.

  요절한 조르조네의 이 캔버스 제작 방법을 잽싸게 피렌체와 로마로 옮겨온 사람도 안토넬로 였다.  (우피치 미술관)이나 (프라도 미술관) (바티칸 박물관)의 그림들이 캔버스에 그려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림을 한 장소에 모으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박물관 하나에 소장된 그림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감상하려면.......  지구를 서너바퀴......  죽을 때까지 몇 작품이나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요 대목에서  안토넬로 메시나의 감각과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은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  참으로 아쉬운게 피렌체나 베네치아나 나폴리나 세상을 쥐고 흔드는 장사꾼들의 도시에 살면서도 정작 본인에겐 장사꾼의 기질은 빵점에 가까웠는가 보다.  생각해 보자.  '유채화 물감' 이나 '캔버스' 같은 획기적인 신상품이자 인류 역사가 끝나기까지  영원히 소요될 발명품을 얼른 슬쩍 권리 이전을 해서 먼저 특허(등기)를 내고 상표권을 가졌더라면.........  굳이 그림쟁이 안하고도 웬만한 그림 박물관 하나는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시칠리아 르네상스의 전부냐?

  아니다.

  이제 오르티지아 섬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또 하나의 위대한 르네상스를 만나보기로 하자.   추----울----- 발.

  &&&  지인에게만 -----  '르네상스 나왔지유?' '르네상스가 등장하면유.....  이만큼 이야기가 풍성해져유.'

 

 

 

 

 

 

 

 

 

 

움베르티노 다리를 건너면  오르티지아가 시작된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오르티지아 섬의 외곽 해안선을 따라 방어 성벽을 쌓았었다.  우르비카 성문 자리 유적.
오르티지아 섬에 닿으면 가장 먼저 (아폴로 신전)이 여행자를 맞는다.  시라쿠사 여행의 시작점이다.

 

 

 

 

 

 

 

 

  시라쿠사의 여행은 대충 두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그리이스의 고대도시 시라쿠사 자체였다고 할 수 있는 '오르티지아 섬(Island of Ortigia)' 으로 시라쿠사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이 오르티지아 섬 위에 세워졌던 찬란한 고대도시가 바로 아테네를 능가했다고 전해지는 최고의 그리이스적인 도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시라쿠사 여행에서 찬란한 그리이스 문화를 느껴보고자 한다면 어느정도의 역사 공부가 사전에 준비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 찬란한 고대 그리이스 문화와 유적들은 특정 사람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것은 거의 흔적 정도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대 역사와 문화를 조금만 알고 시작한다면  충분히 그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유적들의 가치와 위대성을 온 가슴으로 충분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고대 그리이스의 흔적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절대 그렇지가 않다.  오르티지아 섬 위에 세워졌던 고대 그리이스가 사라졌다면,  그 사라진 자리에 바로코가 가득 자리잡고 있다.  17세기 유럽에서 대유행을 불러온 바로코 미술과 건축이 이렇게 특정한 일정 공간 위에 빼곡하게 절 정리된채 들어서 있는 지역이 내가 알기론 거의 없다.  지금 오르티지아는 온통 바로코의 도시다.  그 바로코의 숲속을 거닐다 보면 언듯 몰타의 수도 발레타를 거니는 기분도 충분히 느껴볼 수 있다.

  바로코는 화려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고 무척이나 아름답다.

  시라쿠사에서 바로코 양식에 흠뻑 도취해보면서 그 사이사이에  흔적으로 남은 유적들을 통해서 고대 그리이스를 유추해 보는 즐거움을 느껴보기를 나는 간절하게 기원해 본다.

  둘째로는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의 고고학 공원 일대를 다른 하나의 권역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리이스 극장이 페허로 남아있다.  그리이스 전체에서도 이렇게 큰 야외극장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기원전으로도 아득한 고대의 시대에 약 1만5천명을 수용했다는 거대한 극장은 한마디로 불가사의라고 하겠다.  고대 극장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시라쿠사의 전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라 하겠다.  이곳에 모여든 1만5천명의 그리이스인들은 화려한 무대에서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를 연극으로 관람하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근에 역시 커다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이 페허인 채로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광기서린 검투경기를 즐겼다.

  이렇게 거대한 석재 건축물인 극장들이 이곳에 들어 설 수 있었던것은  인근이 모두 대리석을 생산하는 채석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시라쿠사의 대리석은 고대 그리이스 시대에서부터 매우 뛰어난 품질로 유명했었다.  카타니아에서도 타오르미나에서도 멀리 팔레르모 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와 그리이스 본토까지도 수출되던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풍부한 지하자원이었던 것이다.  하여 이 광산의 이름을 '천국의 채석장' 이라 부를 정도였다.  채석장 입구의 까마득히 커다란 구멍을 '디오니시오의 귀' 라고 이름지을 정도로 시라쿠사의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유머와 재치까지도 겸비한 선진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시라쿠사에 도착하면 서둘러 오르티지아 섬으로 향한다.

  아마도 그것이 '시라쿠사 여행의 정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시라쿠사에 오면 그 정석을 그대로 따른다.  시라쿠사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오르티지아 섬까지는 도보로 약 15분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나름 가까운 거리다. 곧게 뚫린 중앙도로를 그냥 똑바로 따라가면 된다.

  로마나 밀라노나 나폴리나 베네치아의 화려한 도시 산책을 기대하지는 말자.  굳이 우리나라로 표현하자면 시골의 작은 읍내나 면소재지를 거닌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수수하고 약간은 촌스럽다고나 할까?  작은 구멍가계와 또 그런 수준의 기념품 가계들이 늘어서 있고,  장사가 될까 싶은 정도의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즐비한데,  놀랍게도 그런 가계들 마다 적지않은 현지인들이 이용하고 있더라는 현지 사정을 직접 목격하게된 것이다.  아란치니가 많이 보이고 에스페레소를 즐기는 현지인들이 많다.  거기에 특이한 한가지는  지나치는 젊은 여성들마다 거의 대부분 손에 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아마도 이탈리아 여성들은 한국 여행하기가 결코 쉽지만 안아 보인다.  대부분 엄청난 꼴초 같아 보인다.  이탈리아 길거리는 온통 담배 꽁초들이 사방에 널려있기가 대부분이다.  담배에 관한 그네들만의 특별한 의식과 개념이 아닐까?

  그럼에도 현지인들의 표정이 참 밝고 친절하다.  눈만 마주치면 누가 먼저라 할 것없이 그냥 '본 조르노' '차오' 라고 인사를 건네고 받는다.  이런 길거리 산책이 나름 커다란 매력으로 자주 다가오곤 한다.  시라쿠사가 바로 그랬다.

  그렇게 걷다보면 오르티지아 섬에 가까워질 수록 기념품점이나 카페들도 커지고 고급스러워지고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속된 말로 본정통에 가까워지니까 노는 물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광장이 나타나고 운하가 앞을 가로 막는다.  그 위에 커다란 두개의 다리가 놓였다.  누군가는 굳이 3개라 우기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움베르티노 다리'가 주요 통로이고,  조금 옆에 '산타루치아 다리'가 보조 역활을 한다.  나머지 하는 그냥 곁다리 하나가 더불어 슬쩍 붙어있다.

  아르키메데스 동상이 서있는 우측의 광장으로는 젊은 현지 연인들이 많이 낭만을 즐기고 있다.  왼편으로는 베네치아나 발레타의 수상 요트장을 방불케하는 마리나가 있고,  그 뒤로 눈에 탁 띄는 아주 커다란 관청 같은 건물은 시라쿠사에서 나름 유명한 '오르테아 팔라스 호텔' 건물이다.  규모가 엄청나다.  별은 4개반이라니까 나머지는 상상에 맡겨야겠다.

  폰테 움베르티노를 건너면 비로소 '오르티지아 아이슬랜드'에 도착한 것이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라쿠사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양쪽으로 너른 '에마뉴엘 판카리 광장'이 여행자를 맞는다.

  시라쿠사 1일 투어 가이드들이 상주하는 작은 여행사 사무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렌터카 업체며,  제법 분위기가 짱나는 노천 가페들과 기념품점이 가득하다.  이곳의 해산물 레스토랑들은 꽤나 유명하다.

  광장의 옆으로 길게 그리고 깊게 패여나간 유적이 나타나는데,  그리이스의 디오니수스 왕은 여기 오르티지아 섬을 방어하기 위하여 섬의 해안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배가 접안하는 포구와 육지로 드나드는 이곳에 성문을 만들었는데,  육지와 교통하는 최고 중심의 이곳이 '포르타 우르비카(Porta Urbica)'였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쓸쓸함을 더해준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광장을 지나가면  비로소 시라쿠사가 고대에는  그리이스였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유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폴로 신전이다.  오르티지아의 여행은 여기 아폴로 신전에서 시작하고 다시 여기 아폴로 신전에서 끝을 맺는다.  드넓은 공터와  겨우 서 있는 석조물이나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석조물 하나하나의 크기에서 이곳에 서 있던 본래의 아폴로 신전이 얼마만한 규모였는지가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 이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역시 그리이스구나 라고 할 수 있지!'

 

 

 

 

 

 

 

 

 

 

 

 

 

 

 

 

 

  시라쿠사의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은 처음 그리이스 본토에서 코린트인들이 건너와 방어 진지를 구축한 후에 주변의 풍부한 자연환경 덕분에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게 되자  이 소식을 접한 더 많은 그리이스인들이 속속 모여들어 오르티지아 섬을 항구 도시로 건설을 마쳐갈 즈음인 기원 전 6세기 경에 만들어 졌다.  한세기 반만에 코린트인들은 에게해를 벗어난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 처음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도시가 생겨나고 안정이 되자 가장먼저 신전을 짓게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폴로 신전이다.  그리이스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  그런데 신들의 왕이라는 제우스는 지존으로 대접을 받기는 받지만 석 그렇게 달가운 신은 아니었던것 같다.  그리이스 신화와 연관지어서 가장 사랑받은 신은 바로 아폴로였던것 같다.  하긴 '태양의 신'이니 우리가 하루인들 태양의 보살핌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고 살 수는 업지않겠는가?  하지만 그리이스인들의 마음속을 슬쩍 들여다 보면 그들의 자부심이자 가장 공경하는 신은 '아테네'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이스 최고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건국 후 국가의 이름 공모에서도 제우스나 헤라나 아폴로나 아프로디테 등을 물리치고  아테네 여신의 이름을 자신들의 국가명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보면 굳이 별도의 다른 설명이 필요없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그 여신의 거쳐였으니........ '지혜의 여신' '전쟁의 여신' 거기에다가 그리이스인들에게 올리브 나무를 선물한 여신에다가......  아프로디테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빼어난 미로를 갖추었으면서도 영원한 독신을 고수하였으니.......  용맹한 남성 전사의 시대인 그리이스에서 어찌 절대적인 추앙을 받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나라도 아테네를 빼놓고는 그리이스 신화 자체를 거부해 버릴지니........ 제우스는 왕이긴 하였지만  인간 세속의 짐승남을 능가하는 말썽(?)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시라쿠사가 아테네를 능가하는 그리이스적인 도시였다고 하면  당연히 이곳에도 아테네를 능가할만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는 뜻이된다.  적어도 12개의 신전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라크사에서 나 같은 여행자가 확인할 수 있는 신전은 대략 3개 정도이다.  당장 아폴로 신전이 있고,  사냥의 여신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로마 신화에서 다이아나 여신으로 불리는데,  로마인들은 유독 아르테미스 여신을 추앙한 것으로 보여진다.  민족성에 따라 취향이나 개성도 달라지는 것일까?  다음으로는 역시 아테네 여신이 있다. 시라쿠사의 중심은 아테네 신전이었다.  아테네 신전을 오르티지아 섬의 핵심 중앙에 건설하고 나서 나머지 도시 계획과 건설을 진행했다.  역시 그리이스인들의 중심에는 아테네가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해 지자 강대국과 부자들은 본격적으로 남의 유산과 유적들을 탐을 내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로마가 싹쓸이 한것은 이미 2천년 전부터 시작된 문화재 약탈행위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이젠 닥치는 대로 무게 크기가 상관없는 대량 약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한것인  고고학 연구와 박물관 문화다.   역사를 재해석하고 보물과 유적의 훼손을 막기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약소국에서  귀한 문화재들을 약탈하기 위해서 생겨난 학문이 고고학인 것이다.  어디에 어떤것이 있으며,  어떤것이 어떤면에서 더 가치가 큰것인가를 가려서 약탈의 선후를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표적 약탈문화의 산증인이  '대영제국 박물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귀한 문화재를  싹슬이 해갔다.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대영 박물관에 정작 자신들 영국의 문화재는  불과 10%에도 못미친다.  싸그리 빼앗고 훔친 인류의 귀한 문화유산들이다.  이를 위해서 세계적인 석학들을 꼬득여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목록을 만들었고,  제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훔치고 약탈을 했다.  그러자 뒤질세라 프랑스 독일이 뛰어들었고,  훗날 이 분야에  미국이 후발주자로 실로 위대한 업적을 기록한다.

  영국은 이집트 스핑크스에서부터 파르테논 신전은 아예 한쪽 벽면을 통째로 뜯어가기도 했다.  영국은 특히 그리이스 문화재와 초기 로마의 문화재를 탐냈다.  그런 그들이었으니 어찌 시라쿠사에 간첩(고고학자)를 파견하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보고서엔 비교적 아주 상세하게 아폴로 신전의 근황이 잘 담겨져 있다.

  '심하게 부서지고 쓰러진 석재 기둥들의 일부만 남아있을 뿐 고대의 신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임.' 지금의 신전 담벼락을 이용해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신전의 남은 기둥이 누군가의 집 기둥이 되었고,  신전의 벽이 남의 집의 담장이 되어 있었다.  신전 안으로도 빼곡하게 낡고 허름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어느 페허위에 들어선 산동네 움막집단 거주지역의 모습이었다.  17세기 두 차례 지진의 여파도 있었고,  비잔틴 시기에는 그나마 신전의 원형은 유지되어서 교회로 사용되었다.  아랍의 점령시기에는 모스크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가  다시 기독교 세력이 회복한 후에 모스크 철거 과정에서 파괴가 자행되어 신전의 원형모습을 찾지 어려워 졌다.  스페인 점령기간 400년 동안에는 남아있는 지붕을 이어 붙이고 덧대어서 주둔 군대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스페인군이 물러가자 방치되어서 페허로 전락하였고,  그 와중에 빈민들이 몰려들어 초라한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페허인 아폴로 신전의 예상 복원 조형물.

 

 

 

 

 

 

  애초 그 페허의 자리엔 이런 모습의 거대한 신전이 들어서 있었다.

  통일 이탈리아가 들어선 후에야 시라쿠사 출신의 고고학자 파울로 오르시가 중심이 되어서 유적 주변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남은 여생동안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운동에 앞장 선 결과로 지금의 시라쿠사 유적들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적게남아 그리이스 유물과 문화재가 남았는것은 오로지 파울로 오르시와 그와 함께한 일부 학자들의 공로이다.  그들의 헌신적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금 시라쿠사에 남아있는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이나 아니면 미국의 박물관을 쫓아다니며 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신전 복원에 힘쓰고 있는 연구소의 기록과 사진들을 보자면  실로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음을 짐작 가능케 한다.   현대적 기술과 장비가 동원된다 해도,  과연 저런 자재들을 구할 수 있을까?  또 얼마만한 비용이 소요되어야 할까?

  아마도 복원은 힘들것 같다.

 

 

 

 

  2천 팔백년이 라는 시간이 잔잔하게만 흘러지나가며 크게 굴곡지지 않은 나이테를 고스란히 자국처럼 남겨놓은 고대 도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역사적인 도시치고 질곡의 사연들을 한 처럼 품고있지 않는 도시가 과연 있을까?

  인간의 상상이 극한에 치닫고서야 겨우 찾아 낸 고대 도시 마츄비추에도 비정한 역사의 추한 모습이 담겨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한시도 역사의 기록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도시의 진면목은 과연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수치로만 따질 수 있을 뿐,  지나버린 천년 이천년의 시간에 담긴 잔상들을  어찌 다 살펴볼 수 있느냔 말이다.  

  그저 수많은 시간이 스쳐지나간 도시라는 어감 속에는  어떤 빛 바랜 빈티지한 아름다움이 가득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 년 전, 팔레르모에 아침 기차에서 막 내려섰을 때 그때는 꼭 그런 느낌이었다.

  무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  익숙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는 표현이 다 안되는 무엇인가 확연이 다르게 확 느껴지는 그런 느낌,  멍하니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던 순간이 그 아침에 팔레르모 중앙역 플랫폼에서 있었다.

  '이건 뭐지?  이제껏 내가 가졌던 시간들과,  이제껏 내가 보고 느꼈던 그 많은 경험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빛 바랜, 덕지덕지 시간의 흔적들이 여기저가 나붙어 있는 빈티지한 아름다움........

  그런것들이 가득했어야만 했다.

  적어도 2천 8백살의 나이를 먹은 시라쿠사라면.........  팔레르모 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이미 가졌었다면.......

  당연히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시라쿠사는 나의 간절한 그런 바램들을 저버렸다.

  시라쿠사엔 '빛 바랜 빈티지한 아름다움은 없다.'

  사라졌다기엔........  어쩜 애초부터 아예 없었을 수도.......

  시라쿠사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뿐이다.

  '바로코.'

  시라쿠사엔 온통 바로코 뿐이다.  넘치다 못해 벽에도 천장에도 하늘에도 하수도에 까지 바로코가 널려있다.

  그럼 도대체 '바로코가 뭐야?'

  바로코가 궁금해지면........  시라쿠사엘 가면 된다.  시라쿠사엘 가면 바로코를 만날 수 있으니까.

 

 

 

 

 

 

 

 

  

 

 

 

 

  시라쿠사의 눈부시게 밝고 화사하면서도 마냥 푸근한게 느껴지는  도시 분위기는 누가 뭐라해도 라임스톤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때문인것 같다.  발레타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가졌던 온화하고 여유로왔던 분위기와 많이 닮았다.  그리고 그런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나는 '바로코 스타일' 이라고 표현 하겠다.

  카타니아나 타오르미나가 잿빛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면,  시라쿠사는 온통 라임스톤 분위기로 가득하다.  밝고 화사하고 따스하고 더하여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과거의 오랜 시간은 오히려 타오르미나가 간직하고 풍겼던것 같다.

  시라쿠사엔 그런 오래된 고대의 분위기나 안내 표지판이 붙어있는 고대 유적지를 벗어나면 전혀 느껴지지가 않은다.  이곳은 그냥 밝고 생기 넘치는 현대적 도시 분위기로 가득하다.  현지인의 모습과 여행자의 모습을 구분할 수가 없을것만 같다.

  지아꼬모 마테오티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거리 이름에서 벌써 현대적인 이탈리아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가?  아마도 시라쿠사의 명동이라 생각하면 될것 같다.  향수. 보석. 명품의류. 가방및 주얼리. 드레스 전문점의 쇼윈도우가 아주 인상적이다.  웨딩 숖과 기념품점이 있고 휴대폰 매장. 커피숖. 피자가계.  해산물 레스토랑과 여행사. 약국. 그리고 여기저기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얼핏 현대적인 분위기와 인테리어로는 타오르미나 움베르토 거리보다도 더 도시적이라 하겠다. 

  카타니아의 명품 거리도 현대적이지만 회색빛 도시 분위기에 가려져 있다면,  팔레르모도 나름 음울한 분위기가 약간 느껴진다고 하면,  아마도 시칠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분위기의 중심가는 아마도 시라쿠인것 같다는 나의 생각이다.

  이렇게 현대적인 도회지 골목길을 걷고있는데 갑자기 시야 가득 어떤 섬광처럼 다가서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팔라초 그레코(Palazzo Greco)'.

  요즘의 한국식으로 해석하자면 뭐 '그리이스 회관' 쯤으로 표현하면 될까?

  하지만  시라쿠사가 고대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지중해의 최강 도시국가로 빛나던 시절에 지어진 궁전 건물이다.  이 부근으로 통치자의 집무실이나 숙소로 쓰이거나,  아니면 귀족이나 대부호들의 호화 저택인 궁전이 많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 건물 또한 그런 궁전 건물들 중의 하나이다.  내부를 모두 공개하지 않아서 궁전의 고급스런 면모를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정문 앞에 놓인 '사슴을 사냥중인 사자 조각상'은 한 눈에 고대 그리이스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너무 충분한 강력한 분위기를 내뿜고 서 있다.  철책 안으로 사용이 중단된 작은 분수대에는 긴 기둥위로 야누스나 페드라를 연상 시키는 사면 인물 조각상이 서 있는데 미처 그 내용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시라쿠사시 당국에서 관리중인 '그리이스 궁전' 중에서 관련된 사람들에게만 개방되는 공간이 일부있다고 해서 문을 두드려 보았는데,  우리가 찾아간 당일은 휴관일이었다.  실내를 돌아보지 못한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국립 고대 연극 연구소(National Ancient Drama Institute)'라는 단체가 이 궁전을 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만 오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고대 그리이스 극장'이나 '로마 원형 경기장' 등 외부에 그대로 방치되었던 시라쿠사의 고대유적들은 1952년에 되어서야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하지만 시라쿠사 사람들의 그리이스 최대의 극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상당하고도 실질적으로 활동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1800년대 후반부터 이미 시라쿠사의 고고학자와 문학자들은 '고대 그리이스의 연극'을 부활시키고자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고  여러가지 문화활동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고 한다.  그 연구의 중심이 바로 이 궁전을 사용하고 있는 주체들이다.

  고대 그리이스 연극 복원에 나선 이들은  당시 실제로 공연되었던 연극의 대본과 무대와 배경 등을 찾아냈고,  이를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3년마다 한번씩 여름 시즌에 실제의 고대 그리이스 극장 무대에서 연극 축제를 벌여왔던 것이다.  1900년대 초반을 지나서는 세계 각처로 부터 커다란 관심과 지원과 참여에 힘입어 2년에 한번씩 그리이스 연극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과거의 공연 포스터만 보아도  이미 나의 눈길 저너머로 고대 그리이스의 연극이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바다에서 풍어를 이루고 들판에서 곡식을 수확한 사람들은 묻어둔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퍼내고는 올림프스 산정상의 신들을 초대한다.  제우스는 출타중이지만 헤라와 아폴로와 아테네와 아르테미스와 비너스가 기꺼이 참여해 축제를 인간들과 함께 나눈다.  프로메테우스는 오늘도 인간들에게 또 다른 불의 사용법을 설명하고  어디에선가 음악소리와 함게 노래가 흘러나오고 대지가 온통 흥겨운 축제에 빠져드는........  오늘만큼은 타민족과의 전쟁도 대자연의 분노도 없는........

  아무때고 시즌을 맞춰서 다시 찾아와  고대 연극 축제를 한번 경험할 수 있었으면........

 

 

 

 

 

 

 

 

 

 

 

 

  여기에 A 라는 분수와 B 라는 분수 이렇게 2개가 있다고 치자.

  2년 전 어느날 나는 A 라는 분수 앞에서 서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있는데......  내가 분명히 봤는데......  너와 쏙 
빼닮은 분수를 틀림없이 봤는데  그게 어디더라.......' 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B 라는 분수 앞에 가서는  또 '거 참 이상하네.  어디서 봤더라?  야랑 닮은게 있는데......' 라고 중얼 거렸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그저께 또 A 분수 앞에서서 또 '거 참.  사람 환장하겠네?  야랑 사촌이 어딘가 있는데.......' 했다.

  또 그러다가 오늘 B 분수 앞에 서자마자 갑자기 떠오른 어떤 번뜩임에..........' 이것 참 난감하구만!!!!!!'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발에 차이는 돌부리 만큼 많은것이 분수다.  종류도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 부지기수라 그것을 다 제대로 기억하기도 힘든것이 현실이지만 코 앞에다 두고 '남매 분수의 진실'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나 원 참.

  그리스 궁전을 지나 가던 발걸음을 조금 더 옮기다보면 교차로와 함께 자그만한 아르키메데스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의 가운데 아름다운 분수대가 모습을 나타낸다.

  '다이아나 분수(Fontana di Diana)' 라고 현지인들이 부른다.

  이 분수대의 물이 한참을 흘러내려 마침내 도착한다는 바닷가 옹달샘 분수대를 설명할 때는 아르테미스 여신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내용에 별 관심이 없는 여행자들은 두개의 분수가 전혀 상관이 없는것처럼 느껴진다.  헌데 아니다.  이 두개의 분수는 나름 이유있는 어떤 사연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의 통일이 안이루어진 것이 문제다.

  유럽을 여행하는 비라틴어권의 여행자는 부단히 노력을 해야만 한다.  영어도 그런쪽의 이해에는 별반 도움이 되질 못한다.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냥의 여신' '달의 여신' 이름은 '아르테미스 여신'이다.  그리고 로마신화는 그리이스 문명을 부러워하여 로마 위에 짝퉁 신화를 만들어 슬쩍 덧씌운것이다.  능력이 안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제국이라는 자존심은 짝퉁 소리가 싫어서 신들의 이름을 싸그리 바꿔서 로마식으로 붙이고 나중에 몇몇의 신과 스토리를 끼워넣어서 새로운 위대한 창조적 작품인척을 했더랬다.  하지만 엄연한 짝퉁이다.  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의 로마식 이름이 '다이아나' 이다.  신분과 활약상은 짝퉁이니까 그런대로 아주 비슷하다 못해 똑 같다.  그러면 둘 다 아르테미스로 하던지,  아니면 둘 다 다이아나로 할것이지.......  유럽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명칭의 통일이 안된다.    교황. 황제나 왕. 성(城). 성인  등등의 이름을 죄다 다르게 부르고 적는다.  유럽을 한바퀴 돌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열가지 신화로 나뉘어서 둔갑해 등장을 한다.  때론 같은 나라  같은 언어권에서도 방금 앞전의 분수대 이름처럼 달리 부르기가 다반사다.  유럽을 제대로 알면서 여행하려면  그리이스신화의 신들 이름이 로마신화에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와  유명한 교황이나 황제나 화가나 위인들의 이름이 때론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지독한 혼란을 격게된다.

  일례로, 온갖 유럽 전체의 역사에 수도없이 등장하는 스페인의 정복왕 위대한 '카알 5세 황제'는  독일 왕을 겸했는데  거기에서는 카를로스 1세 왕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 할 때는 또 겸직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신분이었고 이름은 '카를로스 1세 황제' 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존재다.  그러다보니 내용을 아는 사람들도 가끔은 이탈리아 이야기를 하면서 스페인에서나 통하는 이름인 '카알 5세께서' 라고 말하고 기록을 한다.  이런것......  사람 여러번 미치게 만든다.

  EU 연합 차원에서 호칭을 통일시켜서 사전을 하나 발간하던지,  알렉산드리아의 카테리나 성녀 처럼 출신지나 아니면 주민등록번호를 뒤에 붙이든가 해야지.........

 

 

 

다이아나 분수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 전경.  사진에는 아르키메데스 광장이라고 써 있다.
프로세르피나 분수 전경.   카타니아 중앙역 광장에 있다.

 

 

 

 

  아무튼......  현지 사람들이 '다이아나 분수'라고 부르니 부러 나는 '아르테미스 분수'라고 한다면 아마도 더 헷살리겠다.

  이 '다이아나 분수'가 앞서 말한 B에 해당하는 분수이고, A에 해당하는 자매분수는 카타니아에 있다.

  아주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프로세르피나 분수(Fontana di Proserpina)'가 바로 그것이다.

  다이아나 분수는 화려하면서도 극적이고 대단히 아름답다.

  유럽에 수많은 분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빼어난 조형미를 한껏 뽐내고 있는 아주 인상적인 분수이다.  그런 아주 인상적인 강렬함이 나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아주 빼어닮은 분수가 어딘가 또 있는데) 하는 뉘앙스를 뇌리에 자극으로 남겨서 결국 그것을 찾아내게까지 만들었다.  일반적인 보통의 여행자들 중에서 이런 정도의 감각과 탐구에 대한 열의를 가진분들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방식,  나 같은 유형의 여행자를 말함이다.  가이드나 책자에서 어떤 기본적인 가르침이나 물음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가는 유형을 말한다.

 

  이 두개의 분수에서 공히 느껴지는 극적인 공간구성과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전체적인 조형미와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하나의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우리만치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우선 나의 시선과 마음을 강하게 잡아 당겼다.

  하지만 곧바로 버려지다시피 카타니아 중앙역 광장 한구석에 방치된 프로세르피나 분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 살피던 나에게 더욱 놀라운 충격과 허탈감을 안겨준것은,  물을 가두고 물이 차있어야 하는 분수대의 아랫쪽 공간 마감부분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인상과 동시에  이 분수대 전체가 콘크리트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었다.  물이 뿜어져 나오지 않아 말라붙어있는 조각상 하나하나에서 마른 콘크리트 특유의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프로세르피나를 강제로 지옥으로 납치하는 극적인 장면묘사나 너무도 빼어났기 때문에 더더욱 실망감의 컸고  그것은 이내 더욱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에서......  그것도 대리석이 흔한 시칠리아에서......  콘크리트 분수라니........  저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대리석 분수대였다면 아마도 유럽 전체에서도 최고의 클라스에 당연히 속했을텐데........

  이제껏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에서 허구헌날 발에 채이는 허접한 분수들도 모두 대리석이었다.  콘크리트 분수는 처음이었다.  한국의 초등학교 분수대도 아니고 말이다. 이게 말이 돼? 격앙될만큼 엄청난 충격이......  우리나라 노는 일손이 늘고있는 어느 대리석 공장에 내가 여유만 있다면   프로세르피나 분수를 하나 돌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넣고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 시라쿠사의 다이아나 분수를 보면서 '참 예쁘게 잘만들었다' 하면서도 '이거 어디서 본것하고 비슷한데' 했었다.  비슷하긴 한데,  사람을 너무나 충격에 빠트린  프로세르피나 일것 이라고는 감히 연결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부러 프로세르피나 분수를 찾아가 한참을 머물렀다.  온통 아쉬움과 안타까움 뿐이었다.  이 정도의 작품을 콘크리트라니......  이제라도 대리석으로 새로 만들면 안될까?  엄청난 작품이 될텐데........

  그러다가 오늘......  다이아나 분수를 다시 대하는 순간  그 닮은 대상이 바로 프로세르피나 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확신으로 다가왔다.

  하여.......  '그렇다면 이것도?'  하면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살펴보노라니........  헐!!!  다이아나 분수도 사실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분수였다.  그동안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다른 질감으로 보이고 느껴졌었는데......  아니었다.  이 분수도 사실은 전체가 콘크리트로 만들어 졌는데  다소 완성도가 더 높았다.

  지난번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콘크리트로도 이런 완성도의 분수가 만들어 지기도 하는구나' 하는 신기한 마음과 색다른 존경심과 공경이 생겨났다.  그동안의 큰 기대에 비하자면 아주 작은 실망감이지만 결코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둘 중에 하나의 복원을 대리석으로 계획한다면.......  나는 당연히 카타니아의 프로세르피나 분수를 개작하라고 강하게 권고할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프로세르피나는 개작되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했을까?

  당연히 돈 문제다.  제작비에서 엄청나나 못해 산술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차이가 나지 않겠는가?

  시칠리아나 이탈리아 본토에서 대리석은 흔해보이지만,  아주 품질이 뛰어난 대리석은 보석 못지않게 가격이 비싼 재료였다.  시라쿠사 자체가 지중해에서도 이름난 대리석 산지였음에도 말이다.

 

 

 

 

 

 

 

 

 

 

 

 

 

  '다이아나 분수(Fontana di Diana)'가 자리잡고 있는 '아르키메데스 광장(Piazza Archimede)'은  고풍스러운 기품이 깃들어 있는 작은 광장으로 '오르티지아의 우아한 거실'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 위대한 천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시라쿠스 출신의 진정한 그리이스인  '아르키메데스(BC 287 ~ 212)'에게 헌정된 공간이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시라쿠사 행정부 건물과 은행들이 들어서 있으며,  ,  페이스트리로 아주 유명한 상점을 비롯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카페들이 주변으로 가득하다.  잠시 쉬면서 커피 한잔 마시고 나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라쿠사 여행에 돌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를 가진 공간이다.  아폴로 신전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이미 온통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시라쿠사의 바로코 골목길을 지나왔지만,  본격적인 바로코는 바로 여기에서, 눈이 부실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건물들과 발코니와 벽면에도 고급스럽게 치장을 가미하고 다들 독특한 개성을 지닌 문을 감상하면서 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심신이 새롭게 충전되어감을 느낀다면 잠시 광장으로 나아가 다이아나 분수를 감상할 수도 있다.  분수대에서 둘러보는 광장의 주변은  이런것이 바로코 건축이 만들어내는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로구나,  혹은 이런 분위기가 바로코구나 하는 체험을 제공해 줄것이다.

  '줄리오 모세티 부자(Giulio Moschetti)' 는 여러 작품을 공동 작업으로 완성했으며  다이아나 분수 또한 두사람의 공동작업에 의해서 비교적 최근이랄 수 있는 1906년에 완성되었다.  완성 당시의 사진을 보면 분수대 아래로 아르키메데스 광장을 상징하는것 같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도형 위에 분수대가 설치되었는데,  도로 포장을 바꾸고 야간 조명을 위한 시설을 설치하면서 도형은 사라져 버렸다.

  다이아나 분수의 배경이 되는 아레투사 요정의 이야기는 멀지 않은 장소에 같은 배경을 가진 유적이 또 있으니 거기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이렇게 멋진 작품의 분수를 만든 모세티 부자의 이야기는 카타니아의 자매 분수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을것만 같아,  카타니아에서 여기 다이아나 분수의 이야기와 함께 다시 논해보기로 하겠다.

  커피도 마셨겠다,  잠시 쉬었겠다,  이제 다시 가던 발걸음을 재촉해서 시라쿠사의 바로코 속으로  퐁당 빠져들어 보자.

 

 

 

 

 

 

 

 

골목길로 접어드는 한 건물의 모서리에도 이런 정도의 장식물이 설치되어 있다.  어찌 바로코 스럽지 않겠는가?

 

 

 

 

 

 

  

 

 

 

시라쿠사의 모든것은 이 장소를 기점으로 만들어졌다.  고대 그리이스 시절에 왼편은 (아테네 신전)  오른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으신 뒤 사흘만에 부활 승천함으로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 구원'이라는 대단원의 역사가 완성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제부터는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구원의 길을  찾아가야하는  새로운 시작의 역사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도래 앞에서  초기 기독교에는 대단히 중요한 세 사람이 등장한다.

  베드로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그들이다.

  로마 카톨릭의 시조이자 수장이 되는 '베드로'는 사실,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복음을 유대인 사회에 국한 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로 몰아세운 고리타분한 유대의 율법과 구태의연한 유대교 신앙을 새로운 복음으로 대체시켜서,  유대인들만으로 하여금 우선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열려진 신앙의 문 내지는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와는 전혀 다르게,  구약의 세계에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 이어져내려온 유대민족에세 신약의 세계를 먼저 한정적으로 완성시키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베드로는 유대인 이었다.

  하지만 '바울'의 신앙은 달랐다.  바울은 엄연한 로마인이다.

  바울은 예수의 열 두제자도 아니고 생전에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일도 없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고  일생동안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다니며,  '기독교인의 진정한 사명은 예수께서 주신 복음을 온누리에 전하는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나아갈 방향과 올바를 목표의식을 확고하게 심어준 사람이다.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사도'라 부르는것에 전혀 의심이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의 취지와 뜻에 따르자면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사도'란 열 두제자를 의미하며,  이는 예수 생전에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붙여지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어느정도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느끼기 시작하였을 때 가장 큰 의문점중에 하나가 '사도 바울이야 말로 초대 교황이 되었어야 하지 않아?' 라는 의문이었다.  성인이 되어 한참 기독교 역사에 심취하였을 때는 '초대 교황은 막달라 마리아가 되었어야 했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대 교황은 버젓이 사도 베드로의 몫이 되었다.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내 나름으로 이야기를 꺼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성 아우그스티누스'야 말로 사도 바울 못지않게 기독교 역사에 크게 기여한 분이시다.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집대성한 사람이다.  그에 이르러서야 기독교의 이론적인 체계가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제서야 혹 누가 기독교 교리나 신앙에 대해서 따지고 들면 이론적 체계하에서 번듯하게 토론 내지는 답변을 해줄 수 있는 근거를 모두 마련하였다는 뜻이다.  아우그스티누스의 기독교 역사철학은 중세 시대까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하기까지 말이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집대성한 역사철학은 그대로 올바르고 진실되게 쓰여지지 못한다.  아무리 진리를 아름답고 진실되게 명문화 시켰다해도,  누군가가 어떤 명분을 앞세워 그 명문화된 진리를 그릇되게 해석(오역)하여 남용한다면 애초의 취지와 다르게 사태는 엉뚱하게 흘러가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역사에는 두 가지의 나라가 존재한다.

  하나는 신성(神聖)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다른 하나는 세속(世俗), 그러니까 곧 사람의 나라이다.

  시간의 개념이 탄생하는 태초까지는 두 나라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있었지만,  못된 천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탄이 천국에서 추방되면서 사람의 나라(世俗)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람의 나라란 사탄의 나라이거나 사탄이 재배하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 구세주로 이땅에 오신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된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굳이 여기까지의 논리에 대해서는 특별한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덧붙이기를 '바울이 말한 기독교인의 신성한 사명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이를 이끌어 줄 존재로 12 제자와 같은 사제(교회)의 필요성을 명문화 해서 남겼다.  그러자 신께서 주관하시던 일을 나약한 인간이 집행하다가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이 생기자,  '성스러움과 덜 성스러움의 차이는 사제의 직분에 달려 있는것이지 사제 개인의 품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그런 모든것 까지도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오로지 성스러움으로 이끄실 것이지 아무런 걱정을 말아라 하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다.

  이는 곧바로 '사제는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못한다'는 '사제직의 무오류성 원칙'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어서 곧바로 '교회의 무오류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초기 기독교의 어수선하고 비합리적인 가치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잽싸게 제도권에 편승해 신앙을 핑계로 추월적인 권력의 정점에 치고 올라가 자리잡은 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수장 '교황'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바티칸'이다.

  이런 결과의 증거는.......  역대 교황님들의 화려한 업적과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성스러운(or 상스러운) 이력으로 대처한다.(검색하시면 얼마든지 세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중세까지의 기독교에서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드물었다.  아예 글을 모르는 사제들도 많았다.

  처음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것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추기경이나 대사제나 왕족이나 일부 귀족이 아니라면 굳이 글을 알려 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나서서 보통사람들의 성경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성경은 양피지에 필사본으로 만들어져 곁표지에 금박과 온갖 보석들로 장식했다.  성경은 공경의 대상일 뿐이지 열람이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극소수의 수도사들이 성경을 열람했는데 어디까지나 필사본을 만들기 위함이지 공부하고 연구하고자 함 때문이 아니었다.  성경을 연구하거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자는 이단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화형에 처했다.  실제 그러했다.(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신앙활동에 대해서 많은것을 이야기해 준다)

  원죄설에 입각해 태어나면서부터 씻을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은 감히 성스러운 성경에 입을 맞추거나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성경은 오로지 교회(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이자,  많은 영주나 황제나 기사들이 교회(교황)에게 복종의 의사를 나타낼때  성경에 입을 맞추거나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출 수 있는 정도였을 뿐이다.  신의 뜻이 궁금하거나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이 궁금하면 교회(교황)에게 문의하면 된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신(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의심하지도 말라.'

  '교회(교황)는 신(神)게서 택하셔서 허락하신 대리인이다.'

  십자군에 나가 성지를 회복하라면 창들고 나서고,  불모지의 땅을 개척하라면 가서 삽질을 하고, 1/10을 받치라면 기쁘게 내면 되고,  면죄부를 사라 하면 사채를 끌어다가라도 사면 그만인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이 생각이나 깨달음을 갖출 짬이나 기회를 허용하면 안된다 생각했다.  그저 필요에 의해서 기르는 가축 수준이면 충분했다.  그것이 장장 1천년 동안 '중세'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교회의 만행에 정당성을 명문화해서 부여해 줄 때까지,  로마 카톨릭이 아닌 지중해 건너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이스 정교회에서는 수 백년 동안 기독교 교리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런 결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관이 정립이 된것인데,  교권(敎權)을 움켜 쥔 교황은 이런 논쟁들이 자신들의 권위에 대단히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자기들만의 리그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동방 정교회의 논쟁에는 항상 그리이스 철학과 역사관과 문화 예술이 저마다의 관점에서 제기가 되곤 했다.  하여 이번엔 교회(교황)의 주도로 '고대 그리이스와 고대 로마'에 관한 모든것(역사. 철학.예술)에 대한 파괴와 삭제가 시작되었다.  중세식 기독교 신앙(교회 중심의 무조건 복종) 외에는 모든것이 이단시 되었고 불경 퇴치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제 로마 카톨릭 권위가 미치는 세상(유럽 전지역)에서 고대 그리이스나 초기 로마에 관한 모든것은 사라졌다.  소멸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찬양 찬미하고  교회(교황)의 권위를 공경하는 미술 조각의 시대가 된 것이다.  역사 철학은 이미 죽었다. 

 

 

 

 

 

 

 

 

 

 

 

 

 

 

 

 

 

 

  이제 유럽의 기독교 영토에서 고대 그리이스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산 증인이듯이,  사실 역사적인 고대 유적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이교도들의 유산이라는 미명하에 보다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이스 신전들 중에서 극히 일부를  보수해서 교회 건물로 사용하게된 것 빼고는,  지난날 로마가 카르타고를 역사에서 철저하게 지워내고자 했듯이,  이번엔 교회(로마 카톨릭)가 그리이스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고자 칼을 빼든 결과였다.  동방 정교회의 명맥이 그나마 버젓이 유지되고 있는 그리이스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소아시아지역 정도가 로마 카톨릭의 막강한 권한에서 그나마 비켜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랍인(Arab)들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그리고.......  이쯤되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슬람'과 '아랍'을 구분하고 역사를 들여다 보는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무슬림'이라는 단어에는 '이슬람'과 '아랍'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본디 '이슬람'과 '아랍'은 확실하게 구분지어 주어야만 한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기독교(카톨릭. 개신교. 정교회)는 모두 '유일신 하나님'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들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성서의 구약에 뿌리를 둔 반면에 신약은 인정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신약의 '부활의 역사'를 기반으로 태어난 종교라는 점이 다르다. 

  AD 610년 마호멧이 하나님(알라)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고, 평화와 평등 그리고 우상숭배의 타파를 내세우며 범세계적으로 등장한 신흥종교가 바로 (이슬람교) 이다.  이 이슬람교리를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흔히 (무슬림) 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 신자를 말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예언자 마호멧이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마호멧의 최측근인 4사람이 돌아가면서 통치를 하는 '정통 칼리프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이들 사이에 후계자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일어나 암살과 전쟁이 뒤다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리게 된다.

  내분으로 치닫아 쇠락해진 서기 661년 경에 우마이야 부족출신의 리더가 등장해 주변을 통일시키고 정복전쟁을 벌인 끝에 세습 군주제인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게 된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긴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 당나라와 접경 지역에서부터 북아프리카 서쪽으로 끝없이 영토 확장을 꾀한다.  튀니지와 모로코를 지난 아랍 군대는 마침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리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인 에스파냐(스페인)의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게까지 세력을 넓히게 된다.  이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프랑스)까지 침공하였으나  마르텔의 군대에게 패하여 국경을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패배한 전쟁은 중세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의 점령지역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군주의 영햑력이 직접 파급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자 내부적으로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증가하더니,  마침내 시아파와 결탁한 반란 세력들이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압바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통치기술은 우마이야 왕조의 체재와 제도를 훨씬 엎그레이드 한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이들은 일대 혁신으로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범 이슬람 제국'을 지향 했다.   이제까지의 이슬람은 태생적이거나 지역적이거나 아랍인 다운 특정한 사람들의 종교였으나,  이 시기부터 이슬람은 누구든지 (아랍어를 사용하고 아랍어로 된 코란을 읽으면) 아랍인이자 범 이슬람교인,  다시 말해서 무슬림이 될 수가 있게된 것이다.  이 때부터를 역사가들은 진정한 '이슬람 제국' 이라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특이한 에외가 발생한다.  바로 이란 이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시대부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란지역 사람들은 오히려 전통 칼리프 시대를 염원하면서 '아랍인 주도의 이슬람 제국'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방식 그대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하여 이 시대에도 이란은 '아랍인' 범주에서 제외 되었다.

  또한 이 때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간 이슬람이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부분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고집하였기에 '아랍인' 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만을  아랍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압바스 왕조가 멸망하고는 트르크 계통이 주도권을 잡게되고 오래지 않안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터키(오늘날의 터키 민족)이 오랜 세월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권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아랍 세력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 격변의 시기 가운데, 이슬람 역사의 변천과정 중에......  놀랍고도 새로운 파장이 생겨나게 된다.

  스페인 영토까지 점령한 우마이야 왕조의 학자들이 그곳에서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과 역사와 예술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으며  소아시아 지역 동방의 문명권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가히 혁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대해서 이슬람 학자들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통치자는 이 귀한 학문과 자료들을  본토라 할 수 있는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부지런히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다마스쿠스의 학자들은 이 신문물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지난 여행지 터키 베벡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유대인. 그리이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지식인들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이스의 문헌들은 모두 그리이스어와 헬라어로 써 있었다.  이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랍인들 이었다.  이 언어적 장벽을 넘어서려면 양쪽의 언어를 모두 구사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동서 문화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이었으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2개 국어를 하는 (모자라브인)과, 반대로 이슬람교도 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한 (무데자르인)이 중용 되었으며,  유대인 가운데는 3개국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십자군 전쟁이 약 2백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유럽의 봉건 영주들과 기사들은 교황의 말대로 '성지를 동방의 미개한 야만인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성스런 사명으로 멀고먼 예루살렘을 향했던 것이다.  그렌데 막상 동서 문명의 충돌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뻐져버리고 말았다.  미개하고 야만적이어야 할 동방의 사람들이 이미 유럽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신문명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럽이 한참이나 야만이고 미개했던 때문이다.  그들은 별자리를 이용해 야간에도 이동을 하고 배가 운항 했다.  뜨거운 사막의 텐트 속에서 싱싱한 과일을 즐기고 커피를 마시고 심지어 어름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화살이 박힌 병사의 뇌수술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합금 기술의 발전으로 가볍고 날카롭고 휘어진 긴 칼은 십자군의 무기를 압도했다.  더하여 그들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은 수백년간 우물 안에서 저들끼리 창 칼들고 패싸움만 일삼느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십자군이 예루살렘까지 온 것은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은 너무나도 멀리있고 형이상학적인......  늘 교회(교황)의 뒤에 가려진 막연한 신이었다.  교회를 통해 신은 항상 수많은 것을 약속해 왔지만......  약속이 이루어 진것은 거의 없었다.  하여 이의를 제기하려면.......  그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되었다.  그에 대한 교회(교황)의 책임추궁은 상상 초월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슬람은 달랐다.

  그들의 알라 신앙은 구율 자체는 대단히 엄격해 보였지만,  그 규율 안에서의 모든 생활은 지극히 평온했고 자연스러웠다.  술탄에서 마굿간 청소부까지 신 앞에서는 지위나 권리나 생활이 별반 차이가 없는 평등이 주어졌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늘 자비로웠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늘 분노에 차 있을 뿐이었다.  정작 십자군들은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고 그 이상의 의문을 가지면 안되었지만.  이슬람의 군인들은 생활 전반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을 찬양하고 그런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기독교의 신은 늘 공포스럽고 잔인하고 강요가 뒤따르지만(교회가 하는 짓이겠지만),  이슬람의 신은 군사들에게 늘 평안과 자비와 위로를 내려주었다.

  무슨 차이일까?

  기독교의 신은(교회)는 오로지 무한한 복종과 헌신만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슬람의 신은 달랐다.  이슬람의 아이가 태어나면 코란을 가지고 언어와 글자를 깨우쳤다.  그들의 배움에 시작은 코란을 읽고 암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코란과 언어를 가리키는 율법학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고대 그리이스 철학과 사상에 정통한 학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코란을 교육하는 사이사이에 그리이스 철학과 사상들이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알라)은 하나뿐인 유일신으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그 존경과 찬양하는 방법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사이가 자유로왔던 고대 그리이스의 사상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절대 복종과 강요가 아닌 온당하고 합리적인 질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신 신에 대한 토론이 가능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찬양하는 방법을 찾고,  그 속에서 신이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스스로 찾아냈다.

  이슬람의 신은 완전 오픈된.......  자유로운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교회(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너무나도 멀리있는 무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십자군 원정대 안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의문점을 가슴에 안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수 백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들은 갈급했다.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와 철학과 예술이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수밴년 동안 너무도 철저하게 교회의 주도하에 강제로 소멸시켜버린 결과였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모여서 성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지중해를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고대 그리이스에 대한 책들을 역수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몇 몇 책이 상인을 거쳐 들어왔다.  그런데 책 내용이 모두 아랍어로 써 있었다.  하여 라틴어와 아랍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장사치들을 찾았다.  글을 안다는 것과  번역을 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동화책을 번역 통역하는 것은 비록 가능하다 해도........  전문적인 철학과 역사를 번역 통역한다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고도의 수준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잔틴 제국이 멸망했고,  서유럽으로  스페인의 국토회복 운동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스페인의 이슬람 왕조가  이사벨 여왕에 의해 톨레도가 수복되고 코르도바를 거쳐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으로 쫓겨가기 시작하였을 때,  톨레도 대성당의 당시 대주교가 유럽 개혁의 최고 선각자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톨레도 대성당은 당시까지 스페인을 통치하던 아랍 왕조의 궁전이었다.  7백년 가까이 스페인을 다스린 권력이 기거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던 장소였다.  이사벨 여왕이 너무도 무섭게 들이치자 아랍왕은 채 도망 준비를 하지 못해 부랴부랴 겨우 몸만 피해 달아나기에 바빴다.  여왕과 군대는 무섭게 뒤를 추격해 갔다.  어지럽혀진 왕궁이자 톨레도 대성당을 여왕을 빼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대주교 였다.  성당에쌓인 수많은 문서와 보물들과 예술품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주교의 눈에 들어 온것은 바로 수북히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들이었다.  그 책들은 모두가 아랍어로 쓰인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과 역사책들이었다.  이제 유럽의 영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대주교는 성당의 문을 모두 철저하게 잠궈버렸다.  그리고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몰래 성당의 한켠에서 번역 작업을 시켰다.  그리고 유럽에서 학문이 뛰어난 몇 몇 학자들을 몰래 초빙했다.  대주교를 잘 아는 로마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가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심어린 우려가 담뿍 담겨있는 서신을 대주교에게 보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 알게된 교황이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가 도착해 보니 대성당은 아주아주 깨끗하게 잘 정돈된 교황 성하의 우려와 배려가 가득한 톨레도 대성당으로 변해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 여왕이 돌아오시고 나서 수많은 서류와 서책을 광장에 내놓고 사흘밤 낮으로 불태웠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번역에 참여했던 사람은 단 한명도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유럽 각지의 깊은 산속 수도원에서는 하나 둘 학자형 수도사들이 꾸준히 고대 그리이스에 관한 책을 찾아내고 라틴어로 번역하고  필사본을 만드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이 거룩한 노력들이 바로 스페인에서도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한 과정이 바로 여기 시칠리아가 관련된 일이다.

  시칠리아는 노르만 왕조에 의해서 기독교 세력권으로 회복되기까지 약 140여년 정도를 이슬람의 지배하에서 보냈다.  팔레르모에서 볼 수 있겠으나,  당시 시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 또한 상당히 선진 문물로 가득한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의 학자들이 수없이 오고간 지역이었다.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이스 철학 역사 책들이 시칠리아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와중에 노르만 왕조가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이슬람은 바다건너 아프리카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직 수많은 이슬람 사람들이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시칠리아 전역에 흩어져 살았고,  이후의 지배자들은 세금만 제때에 바치며  민족이나 국가나 종교를 굳이 문제삼지 않았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이 몰락했다.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자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지식인들은 달아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가까운 도망처가 시칠리아 였다.  시칠리아에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책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오스만이 확장하여 유럽 본토로 북상하자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책들을 들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게 된다.  이들로 인하여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책들로 인하여 중세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깨어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믿는 사람이다.

  유럽에서 사라졌던 고대 그리이스는  지중해 저편의 이슬람에 의해서 아랍어로 재탄생 했다가,  다시 이탈리아에서 이번엔 라틴어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 바로 <르네상스> 다.

 

 

 

 

 

 

 

 

 

 

 

 

 

 

 

 

 

 

 

 

 

 

 

 

 

 

 

 

 

 

 

 

 

 

 

  르네상스에 대해서야 이제 본토로 건너가면 주야장창 석달열흘을 죽어라 떠들어도 미처 다 설명할 수가 없을정도겠지만,  시라쿠사 하면 죄다들 '바로크의 도시' 내지는 '바로코적 도시' 하니까 이쯤에서 바로크에 대해서 살짝 집고 넘어가 보자.  여기서 살짝은  앞으로 가면서도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계속 나올테니까 말이다.

  그럼 바로크가 도대체 뭐냐?

 

  '지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의 모습이 바로 바로코야.  사방을 잘 둘러 봐.  이 세상에 이렇게 푸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아름답고 탁 트인 광장을 보았어?  드넓은 광장과 두오모와 광장을 둘러서 있는 건물들과 이곳의 공기와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 여유로운 공간의 정취가 바로 바로코야.  숨을 깊게 들이 쉬어 봐.  바로코의 향기가 코끝을 통해 페부 깊속한 곳까지 가득 스미어들거야.  바로코는 바로 그런거야.'

 

 

 

 

 흔하게 서양 미술사에서는  (로마네스크 미술) ---> (고딕 미술) ---> (르네상스 미술) ---> (매너리즘 미술) ---> (바로크 미술) ---> (로코크 미술) ---> (낭만주의 미술) ---> (인상주의 미술)  의 순서로 연대별 나열을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술)에는  회화. 조각. 음악. 문학과 건축에까지 이르는 예술분야를 총망라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문명의 흐름이나 사조를 딱 잘라서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하는 구분은 상당히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게되기에 그런 방식의 구분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나름의 시각이나 타당한 이유를 근거로 저마다의 구분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내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나는 (르네상스)를 3단계로 구분짓는데, 마사치오나 지오토의 시대를 르네상스 초기로 본다면,  천재들이 즐비하게 주렁주렁 등장하는 전성기를 르네상스의 중기로 보고,  아주 잠시 르네상스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러 일그러트리기인 매너리즘의 시대는 확실하게 르네상스의 말기에 포함시킨다.  더하여 매너리즘 뿐만이 아니라 르네상스 말기의 종착점은 카라바조에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카라바조로부터 바로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들도 많이 접하지만,  바로코가 카라바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카라바조가 완전히 바로코 라고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라바조에게서 강력한 인상을 받은 폴랑드르의 루벤스를 나는 바로코의 시작이라고 본다.  하여 나는 중세 이후의 거대한 혁명이었던 르네상스는 카라바조 대에서 그 명맥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바로크(Baroque)' 라고 문자로 적어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참으로 난감하고 그냥 망막한 기분'이 든다.

  '바로크가 뭐지?' 오히려 나 자신에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훗날 프랑스에서는 바로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그러진 진주'라는 표현을 썼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 바로크 라는 주장도 있다.  충분히 그런 일면이 있음도 공감하지만,  그렇게만 단정 짓는다면 직전의 사조인 매너리즘에 대한 표현처럼 부정적 의미가 다분히 담긴 빗댄 표현과 다를바가 없어보여 꺼려진다.  처음 표현은 '매너리즘'이란 표현 자체가 은근히 깔보고 무시하는 표현이었다면,  후대에 연구 활동이 활발해진 이후로 매너리즘 시대를 누구도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도 그런 맥락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기는 한데,  딱히 다른 설명할 길이 없다.  어찌되었건 '바로크' '로코크' 하면 쪼금은 깜찍하고 고급스러운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지?

  나라면 차라리 '바로크는 르네상스의 천재들에 의한 천편일률적인 타성에 반기를 든 후대 비천재들의 미술사조) 쯤으로 정의 내리고 싶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인류 문명사에 다시는 없을 위대하고도 찬란한 혁명이었다.  또한 수많은 천재들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어떻게 저렇듯 절묘한 시대, 하필이면 피렌체에 저렇듯 많은 천재들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셨단 말인가?

  천재들이 많들어 낸 새로운 세상은 저렇듯 영롱하며 영원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르네상스는 일류 문명사에 있어서 저렇듯 가장 찬란하며 또한 가장 오래도록 영원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신께서 아마도 깜빡 하셨음은........  신께서 천재들을 모두 일시에 쏟아놓으시는것만은 아닌듯 싶다.

  적어도 서너 더댓쯤은 텀을 두면서 보내셨다면  르네상스는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것은 다분히 '바사리' 때문이다.  바사리가 어느날 꿈에 나타나 살짝 귀뜸을 해주고 갔다.

 

 

 

 

  고대 그리이스와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 이들 3국가의 역사는 지중해의 역사 자체였고 나아가서는 유럽의 역사이자 세계사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지중해를 통해 세상 밖으로 뻗어나가고자 했던 이 강대국들이 세력 확장의 교두보로 삼으려 모두가 탐내던 땅이 있다. 좀 더 소상하게는 너른 면적의 영토였다기 보다 그곳에 있는 도시 하나를 꼭 차지하고 싶어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싶다.

  그리이스와 카르타고와 로마가 모두 탐냈던 땅은 시칠리아였고, 그중에서도 시라쿠스를 간절하게 원했다.

  시칠리아를 나름 제대로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입을 모은다. '시칠리아는 태양의 땅' 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축복받은 시칠리아에서도 에메랄드 처럼 가장 빛나는 보석은 바로 시라쿠사'라고 입을 모은다.

  나도 그 말에 충분히 동감한다.

  오죽하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그리이스 도시로는 시라쿠사가 으뜸이다' 라고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키케로 까지 그렇게 말을 했겠는가.

  '시라쿠사(Ciracusa)'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시라쿠사는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Delian League)에 가입해 있는 여러 폴리스(도시국가)들인 스파르타. 테베. 델리움. 코린트. 크레타. 마케도니아. 밀레투스. 에페수스에 비하자면 가장 늦게 동맹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도시국가가 되었다.

  '그리이스'라고 흔히 부르는 도시국가들의 연합은 곧 델로스 동맹의 다른 이름이라 보면 될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리이스의 영역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그리이스 반도와 크레타를 중심으로하는 섬들과 윗쪽으로 트리키아 해를 따라 돌며서 키프로스를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주로 현재 터키 영토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포카이아. 리디아. 에페스. 밀레토스. 그리고 로도스섬에 이르는 해양국가 였다. 오늘날의 그리이스 영토에서 터키의 서쪽 해안지방까지)

  그런 그리이스가 처음으로 에게해 지역을 벗어나 더 넓은 지중해를 바라보게되고 찾아낸 곳이 시칠리아였으며, 그 중에서도 유독 시라쿠사 지역의 매혹에 빠지게 되어 그곳에 제대로 된 그리이스 도시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지정학적 잇점을 잘 살려나간 시라쿠사는 오래지않아 아테네의 아성을 위협하는 가장 각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이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플라톤이 이곳에 수년을 머물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시라쿠스를 빼놓고는 델로스 동맹의 유지를 논할 수 없을만큼 급성장한 시라쿠사는 다음으로 아테네에 필적할만한 아름다운 도시 건설에 매진한 결과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후대에 남겨주게되는 당시 인구 3십만의 그리이스적인 대도시였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전성기의 그리이스는 멀리 대서양의 초입인 지브롤터 해협(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와 나일강 인근에서 내륙의 흑해까지를(터키의 일부지역 포함) 식민지로 다스렸던 명실상부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을 거점으로 해상강국 카르타고가 급부상을 해왔다. 지중해로 확장하려는 카르타고의 첫 목표는 당연히 시라쿠사였다. 카르타고는 차근차근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데, 델로스 동맹은 가맹국들간의 다툼으로 동맹으로서의 효과를 전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건너 쳐들어왔고 겨우 몇개 폴리스의 지원을 받은 시라쿠사는 응전에 나섰다. 시칠리아의 남쪽 해안 아그리젠토 앞바다에서 마침내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게 시라쿠사가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가 바로 '신전들의 계곡'으로 유명한 아그리젠토 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온통 그리이스 차지였고 그들은 그것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델로스 동맹이 한참동안 잘 나가자 동맹의 중심에 서서 패권을 휘두르던 아테네가 점점 거만해져 갔다. 동맹의 수장이 아테네가 아니라 아예 아테네가 처음부터 동맹을 소유한 것처럼 이끌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지못하고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다. 분노한 아테네는 동맹의 힘을 빌어서 스파르타를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스파르타가 델로스 동맹을 탈퇴하기에 이르렀고, 테베. 코린트. 마케도니아가 스파르타의 편을 들어서 펠레폰네소스 동맹이라는 새로운 연맹체를 탄생시켜 버렸다. 시라쿠사를 비롯한 여러 폴리스들이 중립으로 남기도 했지만, 이제 그리이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레폰네소스 동맹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된것이다.

  27년에 걸친 피말리는 내전인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들을 분열시켰고 그리이스는 아주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내닫게 된다. 이제 폴리스 밖의 지중해 상황을 살피거나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고 군사력도 정치지도력도 바닦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이스라는 존재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 틈을 타서 과거의 뼈아픈 패전을 교훈으로 삼았던 카르타고가 무섭게 성장했다. 오래지 않아서 과거 그리이스 연맹이 차지했던 지중해 연안의 모든 영토와 해상 무역을 카르타고가 독점하게 되었다. 그저 명맥만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과거 그리이스의 몇개 폴리스를 카르타고는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강대국으로 급성장을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도시 국가가 알프스 이남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로마였다.

  그리이스가 지중해 전체를 휩쓸고 다스리는 동안에 조금 뒤늦게 출발한 로마는 부딪혀봐야 크게 손해만 날것 같아서 그리이스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잔뜩 움츠리고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에도 벅찬 부족국가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그리이스의 몰락 소식을 듣고는 서서히 남쪽으로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해양민족인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을 차지하고자 했지 내륙의 영토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목민족 출신인 로마는 달랐다. 그들은 물과 너른 초지가 있는 평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이스가 몰락한 이후로 내륙의 영토는 그야말로 무주공산 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알프스 이북과 숲과 늪지로 가득한 프랑스나 독일 영토에 대해서는 일단 차후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 이들에게는 따뜻한 날씨가 보장되는 새로운 거점(도시)가 필요해진 것이다.

 

  다시 남쪽으로 말발굽을 돌린 로마는 반도의 끝자락인 메시나에서 조만치 코앞의 바다 건너 풍요로운 땅을 발견했다. 시칠리아였다. 더하여 섬의 남쪽에 전체 그리이스 영토에서도 최고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 시라쿠사가 건재하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그리의스의 찬란한 영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라쿠사'가 로마는 꼭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좁은 메시나 해협에는 지중해에서 최고로 막강한 카르타고의 해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으로 해군의 절대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시라쿠사에 가려면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었으니까.

  이리하여....... 로마는 허겁지겁 해군을 양성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 시라쿠사 때문에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니발이 나오고 스키피오가 등장하고........ 결론적으로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지중해의 패권은 물론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고대 그리이스의 마지막 폴리스 '시라쿠사'를 하나하나 만나보기로 하자.

 

 

 

 

 

 

 

 

 

 

 

 

 

 

 

 

 

 

 

 

 

 

  시칠리아에서 바로크 양식을 갖춘 최고로 아름다운 건축물은 (팔레르모의 몬레알레 대성당)과 (시라쿠사의 두오모)라고 대체적으로 의견을 모은다.  덧붙인다면 이탈리아 전체를 통털어서도 최고 수준급이다.

  광장이 주는 이미지와 의미까지를 포함한다면 몬레알레 대성당의 외관은 시라쿠사 두오모에 절대로 못미친다.  시라쿠사 두오모의 외관은 가히 바로크 양식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시라쿠사 두오모는 몬레알레 대성당의 화려한 내부에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내부 장식은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 보다도 더 화려하고 엄숙하고 장엄하다.  시라쿠사 두오모의 내부는 지극히 단촐하고 정적이다.  그 이유로는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 사원의 골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에 특별히 바로코식이든 로마네스크 식이든 어디 덧붙일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벽돌을 좀 조잡하게 샇아 올려서 벽들을 만들었기에,  고대 그리이스 신전이 주는 웅장함과 장엄함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리이스 건축이 이제까지도 당당한 위용으로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놀라움과,  그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는 후대 기독교 건축가들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는 아주 감격스럽고 멋진 공간이다.

 

 

 

 

 

 

 

 

  --- 이 멋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그에 서려있는 고대 그리이스 문화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나가기로 하겠습니다.  딱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