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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시칠리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by 피안재 2020. 6. 14.

 

 

 

 

 

 

 

 

 

 

 

 

 

 

 

 

 

 

 

 

 

 

 

  시칠리아를 제대로 보고 느끼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것이 최고의 여행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러자면 우선 이탈리아 지도를 펼쳐놓고 시칠리아를 찾아 볼 일이다.  이탈리아 지형이 장화를 신고 공을 차는 형상을 닮았다고 친다면,  거기에서 공에 해당하는 모양이 시칠리아라고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두 개의 지점에다 빨간 싸인펜으로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표시를 해두는 것이다.  하나는 팔레르모이고 다른 하나는 카타니아다.  이렇게 두군데의 지명에 표시를 해 두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칠리아를 여행할 준비는 모두 마쳐진 셈이다.

  이제 남은것은 두 도시를 두고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것인지 시칠리아 여행의 '시작점과 끝점'을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팔레르모로 인(in) 해서 카타니아에서 아웃(out) 하는 코스 선택이 다분히 효율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 역시도 예전 첫번째 시칠리아 방문에서는  로마에서 팔레르모로 들어가 카타니아를 통해 몰타로 들어갔었다.

  팔레르모에서 아그리젠토. 트리파니 염전. 체팔루를 보고나서 카타니아로 옮겨서는 시라쿠사. 라구사. 모디카. 타오르미나. 에트나 화산들을 찾아보는 여행코스가 일반적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보편타당성에서 벗어나 거꾸로 스케줄을 잡아 올라가게 되었다.

  이미 지나버린 앞선 스케줄이 예전의 여행과는 정방대였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 몰타를 이미 거쳐오는 우리의 일정상 이번엔 시칠리아 여행의 시작을 카타니아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카타니아에서 팔레르모를 거쳐서 나폴리에 들려서 로마로 올라갈 예정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내 경험에 의해 결론짓는다면........  어디서 시작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시칠리아 여행은 미완성의 아주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테니까.........'

  시칠리아는 비록 섬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또는 생각할 수 있는 허용치 보다 훨씬 크다.  남한 면적의 1/4,  또는 제주도 면적의 13배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숫자일 뿐........  실제로 다녀보면 너무나 큰 섬이다.

  그 섬에 사방으로 빼곡하게 온통 그리이스의 문명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그리이스 본토보다도 더 그리이스다운 섬이다.  그 위에다가 로마의 문명이 덧씌워졌고,  120년 정도 아랍(이슬람)의 정복 시기는 너무도 강렬하게 이슬람 문명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 놓았다.  다시 노르만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명들이 흡수되면서,  시칠리아는 유럽의 모든 문명들이 혼재하면서 매우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남겼다.  이는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의 문화와도 어딘지 모르게 닮은듯 하면서도 확연하게 무엇인가 다른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탈리아라는 나라 전체가 문명의 보고이다 보니 남쪽 끝에 치우쳐 있는 시칠리아는 오랜세월동안 적지않게 홀대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말이다. 시칠리아를 빼고 난다면.......  이탈리아도 사실은 별 볼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시칠리아 자체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로마나 피렌체나 베네치아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매우 다양하고 색채가 뚜렷한 독립적인 단일 문화권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하여 시칠리아는 언제나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로지 시칠리아 한 곳만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을 이제껏 나 역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경유지였다.  겨우 몇 군데만 잠깐씩 둘러보고 떠나갈 뿐이다.  시칠리아만을 제디로 둘러보고 느껴보고자 한다면.......  아마도 족히 한달은 오로지 시칠리아 안에서만 죽어라 싸돌아 다녀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시칠리아는 한 번에 끝낼 여행지는 결코 아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내가 지나간 길에는 언제나.......  마음 한조각씩을 흘려놓았다.

  일부러........  아쉬움이 그리움이 되고,  그런것들이 겹누벼져서 마음이 답답해지면........  나는 흘려놓은 마음 조각을 주우러 다시 돌아갈테니까..........

 

 

 

 

 

 

 

 

 

  이른 새벽 시간에 카타니아 폰타나로사 공항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에약해 둔 개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이른 체크인을 부탁했음에도 앞선 투숙객이 있어서 8시반에 짐만 먼저 보관해 주기로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 중심가까지 시내버스로 10분에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가운 거리에 공항이 있다.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아침식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오리지널 시칠리아(이탈리아)식으로 말이다.

  진하다 못해 한약처럼 쓴 에스페레소와 즉석에서 짜낸 오렌지 쥬스 한 잔,  거기에다 크로아쌍 한 개면 그게 시칠리아식 아침식사의 전부다.  난 현지인 폼을 잡으면서 진자 에스페레소와 쵸코 크림이 든 크로아쌍을 주문했고  챠밍여사는 아메라카노 한 잔에 순수 코로아쌍을,  조카는 오렌지 쥬스에 순수 크로아쌍을 주문한다.

  이탈리아노 처럼 나름 우아하고 폼나게 아침 식사시간을 즐겨보려 하였건만...........  '우리가 시방 아침식사라고 뭔가 먹기는 먹은거니?  이래가지곤 배낭 메고다니기가 힘에 부칠것 같아'.

 

 

 

 

 

 

 

 

 

 

 

팔레르모에서 단테를 만났다.  제수이트교 단원이었던 단테를 시칠리아에서 만날줄이야.

 

 

 

 

 

  유럽 문명사에 아주 커다란 한 획을 단테가 그었다.

  단테를 알고  만난적이 있고 <신곡>을 몇 번이나 읽었는가로 사람의 지위와 수준을 가늠하는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삼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한 단테는 지금도 버젓이 살아서 여기저기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하물며 이탈리아에서는 더 말할것도 없다.

  유럽을........  적어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단테)를 꼭 먼저 만나보시라 권하고 싶다.

  단테를 만나고 나면 여행이 더욱 풍성해 질 것이다.

 

 

 

 

 

 

 

 

누가 베드로이며 누가 바울인가?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을 여행하고자 한다면 '교회'에 대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으리라.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 신앙활동' 속에서만의 '교회'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 속에서의 교회는 무엇이며,  실제했던 역사속에서 교회의 역활과 평가는 과연 어떤것인지........  이를 세속이 아닌 성속의 '신성한 믿음생활' 이라는 한계에 가둬두고 보지 않고,  한번쯤 펼치고 펼쳐서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의미와 참뜻을 헤아려보려 한다면......  보다 진솔한 기독교 문명사를 만나 볼 수 있게될 것이다.

 

 

 

 

 

 

 

 

 

아가타 성녀와 루치아 성녀.  시칠리아에는 유독 성녀가 많이 있다.

 

 

 

 

 

 

 

  유럽에는 기독교를 위해서 헌신하다 순교한 성인이 많이 있다.  그 중에는 여성으로서 같은 길을 간 성녀들도 있다.

  시칠리아 출신의 성녀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성인과 성녀들은 크게는 일개 국가의,  혹은 대도시의,  또는 대성당이나 어떤 특정한 가문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수호성인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고 엄중한 문제이다.

  나는 여행중에 많은 교회나 많은 수호성인들을 대하면서 간혹........  중세의 '성상 파괴운동'을 다시금 떠올리곤 한다.  만약 당시의 종교회의에서 지금과 반대되는 결론을 얻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 더해서 우리나라의 과열하다 못해 과격한 소수의 절대 기독교인(?)들이 타종교를 비방하면서 그들의 신앙 대상인 조각상에 '미신이나' '우상 숭배'다 하면서 린치를 가하는것에 대해서,  이렇게 온 유럽에 만연한 수호성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성자의 실제 유골을 전시하면서 기적을 열망하는 종교관은.......  어디까지고 우상이고 어디까지가 신성함인지 묻고 싶다.(그럴때마다 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떠올린다)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성인이나 성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씩 알아가는 노력이  전통과 역사,  그리고 유니크한 스토리를 중시하는 여행자에게 보다 커다란 선물로 되돌아 올 것임을 나는 알고있다.

 

 

 

 

 

 

 

 

 

카타니아 수산시장 앞 분수대.  유럽은 길가다 발에 채이고 사방에 널린게 대리석 조각상들이다.

 

 

 

 

 

 

 

 

 

 

 

  어차피 유럽 여행의 상당부분은 '기독교 역사'와 '기독교 미술'이 차지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바로코와 로코코 미술을 거치면서 비로소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유명 미술관이나 유명 박물관에 가야만 꼭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예술에 대한 지적 성숙이 무르익어 간다는 맹신을 과감히 버려주기를 간곡하게 바란다.  길모퉁에 버려진듯 놓였건,  공원의 수풀속에 가려져 있건,  부서져 쓰레기통에 기대어 있건.......  누군가에게는 열정과 헌신이 담긴 예술 행위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가치는 차후에 생겨난 부과물이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면 모두 훌륭할 것이라는 망상은 버려라.  지금 길거리에서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창조행위는 모두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이다.  피카소도 렘브란트도 고갱이나 고호도 처음에는 모두 저들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모나리자'를 보려고 두 시간 줄을 서느니,  나는 길거리 화가들을 만나고  골목 안쪽의 빛바랜 고풍스런 작은

 아틀리에나 갤러리에서 낯선 그림들을 요리조리 살펴가면서 천천히 하나하나 둘러보는 나만의 시간이 훨씬 즐겁다.

  서양 미술사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식견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아주 한적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유명한 작가나 그림은 '그냥 패스해 버려' 라고 말한다.

  유명 작가나 작품은 나름의 이론 공부를 하면서 책이나 영상으로 마스터하고.......  세상에 다 드러나지 않은,  남들이 즐겨 찾지않는  그런 그림과 조각의 매력에 빠져보시기를.........  약간의 미술사 공부는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팔레르모의 전통음식  내장 버거.(한국 여행자에겐 피렌체 중앙시장 내장버거가 유명하지만,  팔레르모와 절대 비교 불가)

 

음식을 때로는 직접 해서 먹기도 한다.  거의 현지인 처럼.........

 

 

 

 

 

 

 

  여행을 시작하면서 가진 지론중에 한가지가 '무조건 현지 음식을 그때그때 먹어본다' 라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여 우리 여행에는 미리 따로 준비해 가는 먹거리가 전혀 없다.  하지만 여행을 계속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그만큼 달라졌음인지  유명 여행지에서는 우리 음식재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여 조리실이 있는 숙소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따로 장을 봐다가 우리 스타일의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기도 한다.

  서양 음식에 물려서 우리식 식사를 해보려고 일부러 장을보고 요리까지 했는데........  이건 한국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유럽 스타일도 아니고..........  뒤죽박죽 짬뽕 스타일?  에이 그래도 품위 있게.........  '퓨전?'

 

 

 

 

 

 

 

 

 

 

 

  우리의 건강이 허락하고  우리의 두 발이 더는 못견디겠다고 포기하지 않는 이상, 자유로운 이상을 꿈꾸는 우리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떠나는 비행기표와  예정된 귀국일자만 확실하게 갖추어지면........  낯선것들을 만나서 낯설지 않게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걷는 우리의 여행은 언제까지나 진행형이다.

  우리네 인생에 대한 바램처럼......  여행이 계속 될 수록 지고가는 배낭의 짐을 하나씩 하나씩 줄이고 덜어나가는 지혜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슬기롭게 터득중이다.

  혹, 언젠가는 맨몸으로 지구 한 바퀴?

 

  '멋진 곳을 찾아다니며 좋은 사람들 만나고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게 여행이지....... 에서 다소 엎그레이드 된것인지..........  공부도 하고 깨닫는것도 많다고 하면........  챠밍여사 왈.   '개뿔!!!!'.......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있고  늘 함께 손잡고 다니고,  아직은 함께 갈 곳이 많이 남아있어서 행복한 것이 나의 여행에 대한 지론이자 사명이다.'

 

 

 

 

 

 

 

 

 

 

 

 

 

 

 

 

 

 

 

 

  카타니아 폰타나로사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올랐다.

  바야흐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카타니아의 풍경을 잠시 감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것이 있어서 챠밍여사에게 물었다.

  '시칠리아 하면 떠오르는게 무엇이 있어?'

  '(씨네마 천국)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영화 (대부)에 배경이 되는곳이 시칠리아라며....... 마피아?  그리고......  테마 기행에 나왔던 아란치니 생각이 나는 정도.......  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라.........  ㅎㅎ'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칠리아' 하면 그냥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커다란 섬' 이라고만 인식한다.

  시칠리아는 분명하게 이탈리아의 영토이고,  그러다 보니 모든것이 '이탈리아풍' 일색 일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토의 '로마인'(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자랑스런 로마시대의 주역)에 견주어 '시칠리아인'이 훨씬 앞서서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으며,  시칠리아인은 로마인과는 다른 훨씬 위대한 민족이다라는 확실히 다른 자부심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처럼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지역들이 이탈리아에도 있는데,  북쪽의 풍요로운 롬바르디아 지방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분리독립을 꾸준하게 요구해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칠리아의 일부 사람들도 '자신들은 로마와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분리독립을 추고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시칠리아인이 내세우는 그들만의 독특한 '자부심'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드러나지 않는 역사까지 염두에 두고서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신은 시칠리아 하면 어떤것이 떠오르시나요?'

 

 

 

 

 

 

 

 

 

 

 

 

 

 

  시칠리아(Sicilia)를 근자에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만들어준 계기로는  소설가 김영하씨의 시칠리아 기행문과  방송인 백종원씨의 음식 프로그램 방송도 나름 크게 한 몫을 했다고 본다.(방송의 힘은 상상 그 이상이니까)  특히 김영하씨의 여행기는 상당한 지적수준과 품위마저 엿보이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또한 (세계 테마 기행)이라는 교육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몇번이나 시칠리아를 다루었다.

  하지만 '방송은 어디까지나 방송'이다.

  이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르네상스 산책 / 시칠리아 기행)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알림.  이번 회차의 글에서는 이해를 위하여 구글을 통해 사진 여러장을 퍼왔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합니다.  바로 위의 백종원. 김영하님의 사진처럼......  시칠리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득이 필요한 사진은  이번 회차에만 빌려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명에 필요해서 저에게 없는 사진을 이번 회차 글에 사용하고자 합니다.  다른 목적이나 용도에는 쓰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글이나 여행기에는 오로지 제가 직접 촬영한 시진들로 사용될 것입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한 지명이다.'

  하지만 '시칠리아인이 꼭 이탈리아인일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현지인을 여럿 만나 보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해답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고 보겠다.  '시칠리아가 이탈리아 영토에 병합된 것은 불과 160년 전의 일이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장구할진대,  시칠리아 역사가 이탈리아 역사에 포함된 세월이 비교적 최근의 19세기에 들어서였다니.........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럼,  그동안에 시칠리아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160년 전에 불쑥 바닷속에서 튀어 나왔단 말인가?  수천년 동안 유럽의 역사에 수시로 등장하면서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기록해 왔던 시칠리아가 아니었던가?  시칠리아는 로마의 영토가 아니었던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로마제국과 이탈리아를 구분해서 역사들 살펴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로마가 이탈리아이고,  이탈리아가 로마라고?

  로마가 기원전에 국가의 기틀을 형성하고 제국으로 발전한것에서 기원 후 5세기에 서로마가 멸망했다고 치자면,  순수한 이탈리아 반도 안의 로마 역사는 불과 6백년에서 7백년에 불과하다.  동로마가 건재하지 않았느냐고?

  로마제국의 쇠퇴기를 맞아 중흥을 위해 부득이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했고 동로마 제국을 세웠다.  동로마가 들어선 콘스탄티노플은 이탈리아 영토가 아니다.  터키 영토의 이스탄불인 것이다. 거기에다 터키가 유럽에 속하느냐?  아니면 소아시아에 속하느냐?  터키 스스로는 유럽에 속하기를 희망하지만  EU(유럽 연합)은 여전히 터키를 내치고 있고,   세계 지리부도를 펼치면 터키는 분명 아시아에 속하는게 맞다.  이러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곧 동로마는 비잔틴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근 1천년의 제국을 이룩했다.  로마는 위대했지만 제국의 완성과 시대를 이끌어 간 것은 비잔틴이었다.  로마 시대에 시칠리아는 한동안 로마의 영토였다.  하지만 더 오랜 시간동안 시칠리아는 결코 이탈리아 영토가 아니었다.

  이런 측면에서.......  시칠리아의 역사는 분명하게 이탈리아의 역사와 다르다.

 

시칠리아가 역사의 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한 사람들은 역시나 지중해 역사에서 중심 축이나 다름없었던 '페니키아인'들 이었다.  시칠리아의 풍부한 물산은 페니키아인들의 커다란 자산이었다.  하지만 그 페니키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몰락해 버렸다.

  페니키아인들의 노고에 힘입어 새롭게 부상한 도시국가들이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면서 지중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피니키아인들은 소아시아에 만개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나일강 유역에서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이집트 문명을 퍼다 날라 주었다.  아테네. 스파르타. 트로이가 포함된 도시국가 연맹은 그리이스라는 위대한 고대 국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지중해는 이제 온통 그리이스의 영해였다.  제국으로의 기틀까지 마련한 그리이스는 이제 자신들의 영토 밖에다 새로운 그리이스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자원이 넘쳐나는 시칠리아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시칠리아는 새로운 그리이스로 탄생했다.  남쪽 끝의 항구도시 시라쿠사는 아테네 보다도 크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이스인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출신이었다.  아무도 그를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그리젠토. 카타니아. 타오르미나 등이 그리이스인들이 세운 대표적 고대도시다.

  로마의 등장은 그리이스 보다 약간 뒤지지만,  그리이스가 문명을 꽃을 활짝 피우는 동안에,  고작 그들은 지금의 로마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별 볼일이 없었던 일개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서서히 체재와 제도를 갖추고 국가로 발돋음을 하려 꿈틀거리던 시기였다.

  시칠리아인들의 자부심에는 이 시기의 역사인식과 가치판단이 아주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칠리아인들이 지중해를 호령하며 위대한 문명의 한복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정작 로마는 아직 출생 신고서에 잉크도 안마른 상태였다는 이야기다.

  그 후에.......  그리이스가 연맹 내에서의 내분으로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오랜 피말리는 전쟁의 결과로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그 틈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한 로마가 그리이스가 차지하고 있던 지중해 제해권과 영토를 잠식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로마는 국가를 넘어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서야 로마는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식민지로 다스린다.  물산이 풍부한 시칠리아는 곧바로 로마의 식량창고로 성장하게 된다.  이제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려 발돋음하는 중에.......  페니키아를 이어받아 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을 근거로 성장한 카르타고와 대결하게 된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의 풍요로움에  눈독을 들인것이 이유였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로마가 승리하고 명실상부하게 지중해의 패권을 독차지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서 로마로 갈라지면서는 처음에 서로마에 속하였으나,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한동안 이리저리 치이고 빼앗고 빼앗기는 질곡의 세월을 시칠리아는 보내게 된다.  반달족도 다녀가고 고트족도 다녀가고........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맞아 유스타니우스 황제시절 '옛 로마영토 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시칠리아는 이제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된다.

  비잔틴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게되자 9세기에 등장한 사라센(아랍)이 시칠리아를 빼앗아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 빼앗는 과정에서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가 아랍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건설되었다.  약 140여년 동안 시칠리아는 아랍(이슬람)의 세력권 안에 놓였다.

  십자군 전쟁과 연계하여 북방의 노르만(바이킹)족이 지중해 연안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시칠리아에서 노르만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약 400년간 노르만족이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통치한다.

  아마도,  내가 알고있는........  '역사상 시칠리아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최초의 근대인'이 등장하였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의 군주였다.  그렇게 보자면 이 당시의 시칠리아는 독일의 영역이었고,  이는 곧 다시 프랑스로 모든 주권이 넘어각 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분쟁이 시작되면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스페인이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이후로 약 400년 동안 시칠리아를 직접 통치한다.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의 영토가 된 것은 불과 160년 전인 1861년의 일로서,  시칠리아에서 부터 이탈리아의 독립 무장투쟁을 벌인 가라발디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남부를 거쳐 로마로 진군하고,  이탈리아 북로 롬바르디아에서 같은 독립 투쟁을 벌인 왕족 에마뉴엘 2세의 남하와 맞물려 중부 로마에서 합류하게 된다.  가라발디는 시칠리아에서 나폴리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자신이 회복한 모든 영토와 주권을  에마뉴엘  2세에게 받친다.  최초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마침내 성과를 이룬것이다.  이탈리아는 이렇게 이 때가 되어서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탄생하였으며,  그제서야 시칠리아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영토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시칠리아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통일된 이탈리아 이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북쪽 롬바르디아 지방(밀라노. 베네치아. 제노아) 에서는 이탈리아 경제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이루어짐에도 전체 이탈리아를 세금으로 먹여살려야 하는것에 분개해 꾸준히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중부 로마나 피렌체 사람들은 오늘도 '위대한 로마제국'의 유산(조상님 은덕) 아래서 여행 관광사업을 기반으로 희희낙락 놀며 먹고 살면서  '로마나 피렌체가 이탈리아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통에  이곳을 제외한 이탈리아 사람들 모두가 원망한다.

  그러자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로마 보다도 앞선 위대한 시칠리아인의 당당한 후예라 외치며,  자급자족이 충분한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시칠리아의 분리 독립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

  '시칠리아의 역사에 이탈리아는 아주 잠시의 진행형일 뿐이다.'

  '시칠리아는 그리이스에 가깝고,  아랍 문명이 어느정도 스며있는 스페인과 닮았다.'

 

 

 

 

 

 

 

 

 

 

 

 

 

 

 

 

 

  (인류 4대문명)은 모두 강을 끼고 탄생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에 역사에 등장하는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를 빼고,  하나로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대륙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극동의 황하문명을 제외하면  소아시아 지역과 인접하고 있는 곳에서 모두 발생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사시대 이후로 인간이 출현한 이후에 사람이 모여 살만한 장소가 모두 여기였다는 말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유럽'은 '문명'이라는 구호 아래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 살 곳이 못되었다는 의미다.

  유럽의 백인들은 이러한 고대역사에 엄청난 컴플렉스를 가졌다.  그래서 이후에 생겨 난 그리이스와 로마를 어마무시 할 정도로 위대하고 찬란하게 치장했다.  유럽 사관에 입각한 백인 우월주의가 이때 생겨난 것이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쪽의 소아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 속에 '저급한 사람들' '유색인종들'의 의미를 담아 부르게 된것이다.

  '물(水)을 다스리는 자가 세상을 얻게되리라.'

  커다란 강을 끼고 생겨난 도시나 국가의 통치지들이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하는 일이 '치수(治水)' 였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강물에 물길을 열어주고 제방을 쌓고 농지를 만들고 사람이 기거할 장소를 제공하는것이 통치자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책무였다.

  4대 문명의 발생지를 관장하는 통치자들은 일단은 치수에 성공한 재배자들이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은 어디일까?

  '인류의 공식창고'라 불리는 대자연의 축복이 가득한 그곳은 다름아닌 나일강 유역이다.  아주 오랜세월동안 온 유럽인들을 먹여살린 곳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나일강 유역엔 대자연의 축복만 있는것이 아니다.  대재앙도 언제나 함께 해왔던 것이다.

  '나일강의 범람'이 바로 재앙이었다.

  주기적인 나일강의 범람은 잘 정돈된 경작지를 하루아침에 헐어버렸고,  수확을 앞 둔 밀과 보리를 쓸어내려 갔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것을 한 순간에 빼앗아 버리고 간 것이다.

  이집트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대자연의 재앙에 대항 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그 패해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주기적인 범람의 날짜와 불어난 물의 수위와 침수된 지역을 기록으로 남기고 데이터로 활용했다.  거대한 근본 물줄기는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가 없지만,  인간의 힘과 지혜를 합치면 개량과 선조치로 그 패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 노력의 결과로 그들은 어느때 쯤 강이 범람할 것인지,  어디가지 침수 될 것인지 등을 미리 예측할 수가 있게되었다. 좁아진 물길을 넓게 만들었고  꼭 필요한 곳에 제방을 쌓았다.  침수에 약한 곡식이나 야채는 강에서 멀리 벗어난 언덕위에서 재배하게 했다.  어느정도 세월이 흐르자 이집트 사람들은  거대한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을 멀지감치서 남의 일 들여다 보듯이 여유까지 생겨났다. '때가 되었으니 자연의 신께서 잠시 짜증을 내시는 것이라고......  곧 지나갈 것이라고.......'

  대자연의 축복과 재앙은 주로 함께 움직인다.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슬기롭게 극복하는 민족은 문명국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에 저항하고 좌절하는 민족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대홍수의 범람과 함께 나일강 상류에서 떠내려 온 붉은 황토에는 질 좋은 영양분이 가득했다.  별도로 거름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수시로 범람때 마다 복토와 개토가 동시에 저절로 이루어 졌다.

  어디 그뿐인가?

  본래 지구가 생겨났을 때,  애초에 바다였던 나일강 유역의 낮은 해수면은 비만 오면 가라앉았던 염분 성분이 솟아나와서 모든 농작물이 타거나 말라죽는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강의 범람은 수시로 이런 염분기를 말끔하게 청소해 주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생산된 호밀과 다른 농산물들이 바로 페니키아인들을 통해 멀리 그리이스와 로마에 가지 수출되었던 것이다.

  나일강의 곡창지대가 없었다면......  유럽은 제대로 사람이 살 곳이 못되었거나,  한참 뒤에야 문명이라는 것이 생겨났을 것이다.

 

  요 대목에서 페니키아인들은 왜 쓰잘데 없는 일(짓?)을 했을까?

  페니키아인들은 본래 레바논 지역에 뿌리를 둔 소아시아 민족이었다.  선박 건조기술과 항해술이 남달랐던 그들은 지중해 전역을 오가면서 장사(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들이 처음 시작한 당시의 레바논 지역에는 예루살렘 지역이 포함된다.  어쩌면 유대민족의 뛰어 난 상술은 이 시기에 페니키아인을 보면서 깨우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를 이룬 페니키아인들은 부족이나 민족간의 분쟁이 잦은 레바논 지역을 벗어나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튀니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 때,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던 낙후된 환경의 소수민족 중에 카르타고 부족이 있었다.  카르타고 부족은 페니키아인들을 따라 다니며 심부름(?)을 주로 하면서 장사도 배우고 배를 다루는 기술도 점차 습득하게 되었다.  페니키아가 눈부시게 번성하자 지중해 각지에서 해적들이 등장해 약탈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는 페니키아의 거점 도시를 빼앗는 경우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페니키아인들은 이같은 상황에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낼 군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등장한 것이 용병(호위무사) 제도였다.  이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하게 되었고  용병에 의한 피해가 자못 심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와 일부 부족의 지도자들은 카르타고 부족을 군인으로 훈련시켜서 용병(호위무사)으로 재취업 시키게 된다.  월급과 대우 차이가 어마어마 했을 테니까.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군사력을 체계적으로 갖추게된 카르타고가 급격하게 몰락한 페니키아를 대신해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것은 역사의 숙명일까?

 

  조금 되돌아 가서........

  페니키아인들이 선박을 이용해 지중해 일대만 다니면서 해상무역을 한 것이 아니었다.

  소아시아 지역의 내륙에는 이미 훨씬 전부터 '카라반'이라는 무역상들이 이미 엄연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과 같은 곡식과 소금만이 사고파는 자원이 아니었다.  선진 문명과 신기술과 새로운 발명품들이 훨씬 귀하고 값나가는 상품이었다는 것을 이미 페니키아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앞서있는 이집트 문명의 모든 기술과 정보는 그대로 페니키아인들의 주요 거래품목 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은 내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인 페르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때 페르시아 지역에서 들어오는 지식과 정보와 물자에는 한걸음 더 건너 뛰어 인도 지역(인더스 문명)의 문화와 물자 뿐만이 아니라 아주 멀리 극동의 중국으로 부터도 신기한 물자와 기술과 정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페니키아는 현대에서나 봄직한 가히 세계적인 최첨단 토탈 비지니스 쎈터였다.

  한곳에 오래 방치된 곡식은 썩기 마련이다.

  기술이나 정보도 마찬가지다.  페니키아인들은 세계 4대 문명권에서 발생한 모든 기술과 정보와 물자들을 지중해 전역으로 부지런히 퍼다 날랐다.  그런 상거래가 아주 오랫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별 의미없이 꽤나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소비자로서만 전락하던 지중해 유역에서 처음으로 지혜와 선각자 기질을 가진 미래형 지도자가 나타난 것이다.

  당시 지중해 전역은 아직 초기 청동기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고있는 지역에서 다들 고만고만한 부족들이 세력다툼이나 벌이는......  유럽은 아직 문명이나 국가가 태동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기원 전 2000년 경, 크레타 섬의 한 젊은 지도자는 페니키아인들이 가져오는 이집트의 선진 문물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가 보지 못한 이집트라는 나라와 인근의 소아시아 지역 정보에서 부터,  그들의 앞선 기술과 생활 터전과 그들의 신앙관과 왕의 통치 체제에까지 깊이 몰두하고 연구했다.  실로 그것은 꿈이자 하나의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꿈을 계속 꾸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페니키아인이 놀라운 선물을 안겨주었다. 구리와 주석의 성분 비율과 제조 방법에 따라서 그 강도가 천차만별이라는 이집트의 선진기술을 가르쳐 준것이다.  

  젊은 지도자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신기술을 적용해 만든 새로운 청동검은 이제까지의 그 어떤 검들보다 강하고 날카로왔다.  그는 용맹한 자신의 부족을 신기술로 무장시켰다. 분열과 다툼으로 이어지던 크레타 섬을 통일하였고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정치. 군사. 예술을 집약시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였으니,  그가 바로 크레타의 미노스 왕이다.

  미노스 왕의 등장은  곧 (그리스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청동기 시대의 그리이스에는 미케네. 테베. 필로스. 크노소스 같은 부족 국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간에 계속된 치열한 다툼과 경쟁을 통해 이들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강력한 도시 국가들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가장 먼저 아테네가 도시국가를 건설했고,  이어서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베. 에레트리아. 할키스.  그리고 시라쿠사가 등장했다.(여기에는 BC 1200년에서 BC 1100 사이에 전설과 같은 역사를 남긴 트로이가 빠져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것은 그리이스의 도시국가 목록에 엄연하게 '시라쿠사'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듯이 고대 그리이스에서 트로이가 건설되었던,  현재 터키의 영토인 에게해 연안은 그리이스의 영토 '이타카'였다.  터키 에게해 연안과 키프로스는 말 그대로 그리이스 였던것이다.  하지만 시라쿠사는 아니다.  시라쿠사는 바다를 통해 너무나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의 남쪽 끝에 자리한 항구도시 였던 것이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는 모두 커다란 강을 끼고 생겨났다.

  하지만 반도의 끝자락에 매달려 척박한 환경을 가지게되었고 사방으로 온통 바위산과 섬으로 이루어진 그리이스에는 나일강도  황하강도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도 인더스강이 품고있는 대평원과 마실 수 있는 물이 없었다.

  국가를 건설하고 번영을 구가하며 문화를 창조하고 제국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근원적인 바탕이 그리이스에는 전혀 없었다.  생존에 급급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루하루 연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슬기로운 그리이스인들은 남다른 세계관과 용맹스런 투쟁정신과 거친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바다를 정복하기로 했다.  풍요로운 강줄기가 없는 대신 한없이 드넓은 바다를 발판으로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 나갈 개척정신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들은 페니키아인을 통해서 드넓은 이 세상엔 자신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뛰어난 민족과 국가와 막강한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네 수준의 부족들 끼리 싸우고 빼앗는 것으로는,  언젠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사방에 흩어져있는 막강한 세력들 앞에 무용지물이란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이스 연맹) 이라는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로 새롭게 탄생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의 적은  적어도 그리이스 영토 밖의 다른 국가나 다른 군대였던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군대를  최강의 용병으로 성장 시켰으며,  그리이스 라는 기치아래 모이면 모두가 아군이며 한편이 되었다.

  그리이스 군대는 앞서 페니키아인들에게 배운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막강 해군을 양성한 후에,  당당하게 지중해로 나섰다.  그리고나서 모든 지중해 연안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거대한 강줄기나 평원이나 곡창지대는 비록 없었지만......  이를 지중해 연안의 식민지역을 개척함으로서,  그곳에서 생산된 물자들을 그리이스 본토로 수송해 감으로써.......  4대 문명의 발상지가 가졌던 지리적 자연적 한계를 역발상의 지혜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렇게 생겨난 풍요와 부를 통해서 신전을 짖고 도시를 새로 건설하고........  바야흐로 (그리이스 문명)을 창조해 나갔다.

  유럽 영토에서 그제서야 처음으로 문명이 시작되었고.......  유럽인들의 정신세계가 여기에 뿌리를 두게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가진 지리적 자연적 한계를 그들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진과 가뭄 피해와 태풍 피해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지진이 가장 무서운 장애였다.

  하여 그들은 새로운 그리이스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이스 본토에 회복할 수 없는 재난이 불어닥친다면.......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고......  그때부터 새로운 그리이스를 또 건설해야 한다.  언제 닥칠지 모를 그런 재앙에 대비해  그리이스 본토와 쏙 닮은 장소를 찾아서 미리 또하나의 새로운 그리이스를 건설해 놓은다면.......  그것이야 말로 앞날에 대한 강장 완벽한 보험이 될것이라 판단했다.

  그리이스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지중해 연안을 샅샅이 뒤지고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이스 본토와 쏙 닮은........  아니  그리이스 보다 더 그리이스 같은.........  더하여 그리이스 본토에는 없는것들이 차고 넘쳐나는.........  풍요로운 축복의 땅을 찾아내게 되었다.

  '시칠리아.'

  그리이스인들이 마침내 찾아낸 곳이.......  그리이스 본토 보다도 더 그리이스적인 땅이 바로 시칠리아 였다.

  최고급의 대리석을 품은 바위산이 넘실대는 시칠리아는 말 그대로 영락없는 그리이스 였다.  거기에다 시칠리아에는 드넓은 평원이 옥토로 가득했고,  바위산에 올리브 밖에 모르던 그리이스인들에게 오렌지와 석류와 방목을 할 수있는 드넓은 초지와 밀과 보리를 재배하는 대평야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에트나 화산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사시사철 맑은 생활용수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시칠리아는 말 그대로 지상낙원 이었다.

  그리이스인들은 새로운 그리이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아테네를 닮은 남쪽 해안에 그리이스식 거대도시 시라쿠사를 건설했다.  기원전 700년 경에 새롭게 건설된 시라쿠사는 본토의 아테네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최고 최대의 도시였다.  이 시기의 시라쿠사가  그리이스 역사의 도시국가 목록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 본토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신전들을  시칠이아에서는 한곳에 모아 건설하기로 한 곳이 아그리젠토다.  제우스에서 헤라나 헤라클레스 신전까지  그리이스 본토가 가진 올림프스 산의 신들을 모신 모든 신전을 아그리젠토의 '신들의 계곡'에 한곳에 모아 건설했다.

  시라쿠사가 너무 방대해 지자 좀 떨어진 북쪽에 카타니아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고,  멀리 북쪽으로 이오니아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바위벼랑 위에 귀족들을 위한 휴양도시 타오르미나를 건설했다.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트리파니에 거대 염전을 건설해 소금을 조달케 했으며,  시칠리아의 방어를 위해 반대쪽인 북서쪽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한 방어 거점으로  팔레르모를 건설하기도 했다.

  시칠리아는 엄연히 그리이스 였다.  그리이스 보다도 더 그리이스적인 도시들이 시칠리아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리이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바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출신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르키메데스를 이탈리아인 또는 시칠리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는 엄연한 그리이스 시민이었던 것이다.

  

  시칠리아는 이렇게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본토가 아닌 곳에 또 하나의 완벽한 그리이스의 도시국가로 역사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오늘날로 치면 뉴욕쯤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시칠리아(Cicily)'다.

 

 

 

 

 

 

 

 

 

 

에트나 화산은 이 순간에도 살아서 움직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고 활발한 활화산이다.

 

 

 

 

 

 

 

 

  시칠리아를 더욱 시칠리아답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자연환경으로 (시로코)와 (에트나 화산)을 꼽을 수가 있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는 앞서 거론한 (나일강의 범람)을 그 예로 들을 수 있겠다.

  수시로 폭발하여 뜨거운 용암을 사방으로 분출하는 에트나 화산과   지중해를 건너 불어오는 습하고 뜨거운 바람은 때론 엄청난 폭풍우를 동반하기도 하고,  때론 사하라 사막의 모래 먼지를 가득 싣고 날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재앙이다.  그 피해를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재앙 덕분에 시칠리아는 더 풍요로와지고 늘 새로와지고 있는 어이러니한 대자연의 섭리를 우리로서는 다 이해하기도 감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저 적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잠시 그리이스의 대서사시인 호머의 시대로 되돌아 가보아야 하겠다.  아주 잠시만.......

 

  그리이스 신화를 읽어내려 가다보면  제우스 신이 괴물 티폰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힘들게 제압한 티폰의 능력을 알기에 제우스는 고심 끝에 바다 건너 아주 크고 장엄한 산속 깊은곳에 가두어 놓게 된다.  제우스에게 굴복 당하였기에 다시 세상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망을 견디지 못해 수시로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제우스가 티폰을 가두어 놓은 바다 건너의 산이 시칠리아섬의 에트나 화산이며,  그가 몸부림 칠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분출되는 것이라는 전설이 시칠리아에는 전해 내려온다.

  그럼 에트나 화산이 티폰의 감옥이라는 데에서 이야기가 모두 끝이나느냐 하면.........  아니다.

  에트나 화산 분화구 옆의 지하동국 속에는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기술자이며 장인(人)이라 할 수 있는 '헤파이스투스(Hephaistus)의 대장간'이 그곳에 있다.

  올림프스 산에 거하는 12신 중에 한명인 헤파이스투스는 신화속의 신들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인류 문명사에 크게 공헌하신 신이라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신화 속의 신들이 모두 헤파이스투스 같은 성품을 가졌다면.......  그리이스 신화는 재밋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졌을 것이다.  서구유럽 문명사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불구의 몸이었지만(자신의 없어진 다리를 스스로 쇠로 만들어 붙이고 절름거리며 살았다)  온화한 성품을 간직하면서 신들의 세계에서 나름 가장 공평하게 균형을 갖추면서  오로지 장인으로서 철을 다루는 기능인으로만 살고자 했던 아주 특이한 존재이다.

  누구든지 헤파이스투스에게 잘 보여서 그가 부탁을 받아들이게만 된다면.......  세상의 그 어떤 왕도 부럽지 않고,  세상의 그 어떤 무기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저면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모든 핵무기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초월적인 무기를 헤파이스토스는 만들어 낼지 모르겠다.  굳이 생명 공학에 매달리지 않아도......  그는 인체의 모든 부분을 대처할 바이오 첨단 의학에도 이미 신기원을 이룩한 분이다.  자신의 다리도 만들어 붙였고, 팔이 없는 펠롭스에게 태권 브이의 쇠주먹을 만들어 달아준 신의(神醫)인 것이다.

  헤파이스투스가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몇번 뚝딱거리기만 하면........  헤르메스가 시공을 초월해 날아다니게 만들어준   날개달린 모자와 샌달을 비롯해, 아킬레스의 창과 방패, 헬리오스의 불의 전차, 에로스(큐피트)의 활과 화살,  거기에다 어마무시한 제우스의 번개가 모두 헤파이스투스가 만든 것들이다.

  하나 더하자면........   프로메테우스가 불(火)을 훔쳐서 나온 곳이 바로 헤파이스투스의 대장간에서 였다.  그러니까 에트나 화산의 불이 프로메테우스에 의해서 인간에게 전해지면서 부터.........  인류는 하나의 종(種)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는 것이다.  물론 신들 세계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그는 세상의 끝에 있는 코카서스의 카즈베기산 중턱 바위동굴에 매달려 영원히 낮에는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먹히고  밤에는 쪼아먹힌 심장이 다시 되살아나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졋다.  프로메테우스를 매달아 놓은.......  어느 누구도 풀 수 없는 쇠사슬과 수갑 역시 헤파이스투스의 작품이었다.  훗날,  인간을 가엽게 여긴 프로메테우스의 처신을 이해햐는 영웅이 등장해서 그가 카즈베기 산을 찾아가 아테네 여신에게 빌려온 활과 화살로서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쪼아먹는 독수리를 죽여버림으로써  프로메테우스가 다시 자유를 얻고 올림프스산에 올라가게 만들었는데  그 영웅의 이름이 헤라클레스이고  그가 아테네에게 빌려 온 활과 화살 역시 헤파이스투스의 비밀 병기였다.

 

  이쯤되면.......  (그리이스 로마 신화)와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를 한 번 진지하게 다시 읽어 볼 마음들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2013년 가을,  에트나 화산이 분출했다.  그리고 그 해에만 이어서 14번의 폭발이 이어졌다.

  2016년에도 폭발했고,  지난 해 여름(2019)에도 또 폴발했다.

  시칠리아가 역사에 등장하면서 부터 시작된 에트나 화산의 폭발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이 있다.

  하지만 1693년의 악몽을 시칠리아인들은 영원히 잊지못할 것이다.  그것은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겨났던 품페이 최후의 날을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1693년의 에트나 화산 폭발은 시칠리아 섬의 절반 가까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 중에서 이 대재앙을 홀딱 뒤집어 쓴 곳이 바로 카타니아다.  당시 상주인구 2만5천명 정도의 시칠리아 최대도시 카타니아에 불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카타니아 도시 전체가 검은 화산재에 덮인 산언덕으로 변했다.  2만명의 시민이 그 화산재에 파뭍혀 산화했다.  그날 카타니아는 아비규환 지옥이었고,  그날 이후 카타니아는 검은 화산재 언덕만 남긴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1세기 반이 지날동안 카타니아에는 사람의 그림자 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검은 화산재 언덕 위에 파란 풀들이 하나 둘 자라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카타니아 여행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카타니아는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도시 전체에 검은빛 끄을음에 묻어있다.  그리고 도심 어디에나 짙은 슬픔과 아품들이 배어있고, 그 아픈 세월의 퀘퀘함이 코끝에 전해져 온다.

 

 

  '시로코(Sirocco)'는 아랍어 '쇼로그(shorg)'와 '샤르키아(sharkia)'에서 생겨난 말로 '동쪽'을 나타내며,  여기에서는 '남동풍'을 뜻한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발생한 건조하고 뜨거운 열풍으로 40도 정도의 열기를 품고 있다.  모래와 짙은 먼지를 동반하는 시로코는 지중해를 건너면서 습기를 빨아들여 가끔은 무서운 폭풍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 시로코가 지중해를 건너면서 온화하며 고온다습한 바람으로 변신을 거듭한 끝에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 골고루 퍼져 상륙하게 된다.  시로코로 인해서 지중해 연안의 유럽이 춥지않고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게되며  한겨울에도 초목이 자라고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어 가게 되는 것이다.  1월의 한겨울인 지중에 연안 어디에나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오렌지들을 볼 수 있는것은 모두 이 시로코 덕분이다.  스페인의 석류나 올리브와 아몬드 또한 마찬가지다.

  하여 이 사하라 사막에서 지중해를 건너 오는 바람을 부르는 명칭도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

  이날리아는 '시로코(sirocco)', 스페인에서는 '레베체(leveche)',  그리고 알제리에서는 '사뭄(samum)' 등으로 불린다.

 

 

  이처럼 에트나 화산의 분출이나  모래 먼지가 섞여 날아오는 시로코는 커다란 장애이자 때론 재앙이 되지만,  그것들로 인해서 또 인간에게는 얻어지고 생겨나는 것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헤택과 재앙은 늘 함께 다닌다.

  핵심은 이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유익한 쪽으로 미리미리 대처하느냐에 딸려 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치수를 바탕으로 해서 이집트 문명이 위대하게 건설된 사례를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과일로 오렌지를 꼽는다.  시칠리아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오렌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어디를 가나 길 가에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심겨져 있다.

  1월 초순의 한겨울임에도 가로수마다 노란 오렌지들이 탐스럽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공원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사방으로 당바닦에 나뒹구는게 오렌지다.  한마디로 지천이다.  그런데 동네 골목을 지날 때 마다 구멍가게 가판대에 수북하게 올려져 있은것 또한 오렌지다.

  '거참 희안하네.  몰래 따서 훔쳐가는게 아니라  지천에 널려 나뒹구는게 오렌지인데  미쳤다고 가계에서 돈주고 사먹는단 말이야?  이사람들 바보들 아니야?'

  궁금하면 못참는 성질이라........  공원 한적한 곳에 진을 치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이 없을 때 크고 작익어보이는 노란 오렌지 하나를 낼룸 집어서 깨물어 먹어 보았다.

  에테테테테테테.........  우이....... 씨.

  쓰다.  그냥 쓴 정도가 아니라  사약(死藥)을 모르고 한모금 넙죽 받아마신 꼴이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는 정원수로 가꾸어진 전혀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초적 품종이다.  부디 속지 마시길.....  절대로 호기심 조차 갖지 마시길..........

 

  오렌지 나무를 '아란쵸(Arancio)' 라 하고,  과일은 '아란챠(Arancia)' 라고 부른다.  스펠링 하나 다르니가 굳이 따지고들지 않아도 말은 다 통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시칠리아 오렌지 하면,  속이 붉은 '불러드 오렌지' 혹은 '레드 오렌지'라고 불리는 품종이 오리지날이다. 과즙이 풍부하고 당도도 높아서 즉석에서 생과일 쥬스로 짜서 먹는것이 일반적이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성가신 물병 대신 오렌지 몇 알을 배낭에 넣고 다니면서 갈증이나면 쪼개서 붉은 속살을 물어뜯다 보면........  꼭 시칠리아 오렌지를 찾는 습성이 어느새 생길지도 모르겠다.  오렌지 하면 '델몬트'가 떠올랐지만.......  이젠 아니다.  오렌지 하면 어디까지나 속이 씨뻘겋다 못해 피가 묻어나오는것 같은 시칠리아 오렌지가 진짜다.

 

  시칠리아는 대표하는 주점부리가 바로 '아란치니(Arancini)'다.  황금색 동그란 모양이 오렌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흡사 둥근 고로케 튀김이라고 해야 할까?  둥근 모양 외에도 콘 처럼 생긴 것도 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것은  흔하게 그냥 '아란치니'라고 부르면 통하지만........  카타니아 지역에서는 남성 명사인 '아란치니'라 부르지만,  반대쪽 팔레르모 지역에서는 여성 명사를 붙여서 '아란치네'라고도 부른다.  지역세가 여기도 있긴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올갱이' '올뱅이' '다슬기'  등으로 지역마다 달리 부르는 명칭처럼 말이다.

 

  '자가라(Zagara)'는 '오렌지 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또한 '시칠리아의 향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해마다 봄이되면 오렌지 꽃향기가 시칠리아를 온통 휘감는다.(우리나라 오월의 아카시아. 밤꽃 향기처럼)  이 향기를 담은 시칠리아의 명품 향수 이름 또한 자가라 이다.

 

  시칠리아에는 (Mandorla Siciliana)라 해서 '아몬드(Almond)'가 많이 생산된다.  세게적인 품질을 자랑한다.

  특히 아그리젠토의 아몬드가 유명하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계곡을 여행하다보면 도로의 양편으로는 아주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심겨져 있지만,  울타리 넘어 하얀 꽃으로 만발한 이름모를 나무들로 가득한 과수원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것을 보게된다.  꽃은 벚꽃을 닮았고  나무는 매실나무 비슷하다.  이 나무가 바로 아몬드 나무이다.  해마다 2월이면 아그리젠토에서는 아몬드 축제가 열린다.

 

  지중해 연안 어디에나 가시가 송송 뻗어나온 선인장들이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몰타에서는 바위산과 선인장 뿐이라고 했었던 것처럼........

  학명이 '오푼티아(Opuntia)라 불리는 손바닥 선인장을 말한다.  본래의 뜻은 '인도의 무화과'라는 의미의 (Fico D'India)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백년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 자란 열매는 냉장고에 넣었다가 차갑게 해서 껍질을 벗겨 그냥 먹기도 한다.  주로 식용 약용으로 쓰이며 현지인들은 술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멕시코 데낄라 처럼)

  지중해를 떠오르게하는 풍경 중에는 항상 이 선인장 군락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모습들이 항상 담겨져 있다.

  거기에다가  '시칠리아 와인'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이쯤이면 이제 시칠리아를 제대로 둘러보기 위한 사전 준비는 어느정도 갖추어진것이 아닐까?

  하여 다음 이야기에서부터  '카타니아'를 시작으로 제대로 시칠리아를 살펴보기로 해야겠다.

 

   ----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카타니아 새벽 수산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