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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페허에서 부활한 기적의 도시 '카타니아'

by 피안재 2020. 7. 8.

 

 

 

 

 

 

 

 

 

 

 

 

 

 

 

 

 

 

 

 

 

 

 

  카타니아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도심의 뒷쪽으로 든든한 배경처럼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아 있는 (에트나 화산)을 바라보게 된다.

  3.329 미터의 에트나 화산은 화산이 분출할 때마다 화산재가 쌓이기도 하고  바람과 눈보라에 쓸려내려가기도 해서 높이가 늘 유동적인 이 순간에도 실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높은 활화산이다.  

  보기에는 그저 넉넉해 보이고 든든해 보이는 거대한 산이지만,  사실 에트나 화산과 카타니아는 골이 아주 깊은 애증의 관계이다.

  시칠리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 에트나 화산의 폭발과 피해는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1616년과 1693년의 폭발은 섬의 동쪽 지역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 중에서도 1693년의 폭발은 치명적이어서 카타니아는 도시 전체가 고스란히 용암과 화산재에 파뭍혀,  하루 아침에 지상에서 완전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카타니아에 살고있던 2만명의 사람들이 화마에 갇혀서 목숨을 잃었다.

  카타니아는 사라졌다.  지상에서......  그리고 모든 기록과 기억속에서 조차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누구도 이 저주받은 땅에서 더이상 터전을 삼고 살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은 인간을 궁휼이 여겨 우리의 머릿속에 망각이라는 것을 슬며시 숨겨 놓았다.

  세상에는 잊어서는 안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때론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시칠리아의 동쪽 해안에 검은 흙과 돌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산언덕(무덤) 위로 어디에선가 바람에 날려 온 씨앗들이 파릇파릇한 새싹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한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라진 도시 (카타니아의 영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타니아의 부활을 염원하고 있었다.  화산으로 인해서 도시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지 약 2백년이 지나서야 카타니아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아주아주 많은 시간과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하는 기념비적인 대역사였다.  하지만 곧 이 계획은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게 된다.  카타니아 뿐만이 아니라 시칠리아 동부지역을 총망라하는 '시칠리아 재건 프로젝트'로 사업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카타니아(Catania), 라구사(Ragusa), 노토(Noto), 모디카(Modica), 시클리(Sicli), 칼타지로네(Caltagirone) 등의 도시들이 이 프로젝트에 의해서 새롭게 정비되고 건설되었다.

  문명사적으로 근대로 접어들던 이 시기는  이탈리아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이 정형화되고 도식적이며 기계적이기까지 한 르네상스에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던 시기을 지나,  그에 대한 반감으로 아주 잠시 매너리즘을 시대를 지나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조인  바로코 미술과 건축이 정점을 향해 질주하던 시기였다.  이 세상은 바로코가 이니면 이제 막 로코코로 넘어가려 하는 시기였다.

  바로코는 추상적인 현대미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미술이나 문예사조를 흡수했다.  이 세상에 이제것 있어왔던 모든 사조들이 바로코에는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카타니아에,  그리고 시칠리아에 세로운 도시 계획안을 들고 찾아온 건축가와 미술가들은 모두 바로코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유의 화려함과 그로데스크를 추구하면서도 무한대의 웅장함을 추구하는 건축양식이 이시기에 건설된 모든 건축물에 반영되었고,  이 건축물들의 치장에 역시 바로코 미술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모든것을 아울러 '시칠리아의 바로코 스탈일' 이라고 한다.

 

  카타니아에 들어서면 저도모르게 어떤 비장감이 생겨난다.

  카타니아의 어디를 가도 화산폭발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카타니아 도시 재건축자들은 파내도 파내도 끝이없는 검은 화산재를 모두 걷어냈다.

  용암이 흘러와서 동네를 덮어 생겨난 언덕은 그대로 두고 언덕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화산재 속에서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건물들은 최대한 그대로 재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화재로 불탔거나 무너져 내린 건물들은 모두 헐어 냈다.  헐어낸 자재들을 새로운 건축물에 자재로 재활용 했다.  매몰이 심하면 그대로 덮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심을 건설했다.

  18세기형 바로코 스타일의 새로운 카타니아가 탠생하게 된 것이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답고 활기에 찬 젊어진 도시가 바로 지금의 카타니아다.

  하지만 카타니아의 비극적인 역사를 아는 시선으로 도심의 이곳저곳을 살피노라면.......  어떤 비애 같은것이 느껴진다.

  도시의 하수도나 낯선 지하실이나 너른 공터에서 화산재에 파뭍였던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유적과 건물 터와 성곽과 도로의 잔해들이 사방에 널리어 있다.  살아남은 오래된 건물에는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을림으로 얼룩진 석재들이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의 기초작업 부위에,  혹은 벽면이나 계단 어딘가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광장과 대로변의 화려한 바로코식 최근에 지어진 건물을 제외하고는.......  카타니아의 골목길이나 도심의 뒤쪽에는 여전히 화마가 남긴 처첨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디선게 매퀘한 냄새가 느껴지는것만 같다.  어딘가 모르게 을씬년 스럽고 처량한 느낌을 차마 떨쳐낼 수가 없다.

  카타니아는 오늘도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무거움과 떨쳐 낼 수 없는 아픔으로 내게 다가온다.

  나는 그 곳에 있다.

 

 

 

 

 

 

 

 

 

 

 

 

 

 

 

 

 

 

 

 

 

 

  2년 만에 다시찾은 시칠리아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코발트빛 바다를 한 조각씩 담고 살아간다는 시칠리아 사람들.......

  나도 내 가슴 깊은곳에 손을 넣으면 짙푸른 파란색 물감이 묻어날것 같은 한적하고 외진곳의 바다를 하나 담고싶다.

  메시나에서 본토를 바라보고 왼편 프랑스 쪽의 티레니아해를 담을까,  오른쪽 그리이스가 건너다보이는 이오니아해의 바다에서 고를까?  검푸른.......  쪽빛........  나는 그냥 코발트빛이라는 어감이 좋다.

  2년 전에도 가슴속에 바다를 담고 돌아가지 못했는데........  어느새 내 가슴은 코발트빛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번 혼자서 카타니아를 찾았을 때는 언덕 위쪽 (벨리니 공원) 뒷편에 숙소를 얻었다가  도심의 정 반대쪽에 있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배낭을 메고 드나드느라 엄청 고생을 좀 했었다.

  경험에서 우러난 최선의 선택으로  대성당 뒷편으로 터미널 기차역과 중간쯤에 해당하는 장소를 물색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숙소를 몰타에서 예약하고 찾아 온 길이었다. 

  전날 사용자가 있어서 이른 체크 인은 안되고 오전 8시반쯤에 짐만 먼저 보관하도록 해주겠다는 배려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상황이었다.  공항에서 에스페레소와 크라상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이용해 카타니아 시내로 들어섰다.  원형 교차로가 있는 (바스카리 궁전) 앞에서 내렸다.  시내 안까지 들어가자면 한참을 우회해 돌아간다.  카타니아 모든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노선은 이곳 수산시장과 지척인 바스카리 궁전을 무조건 통과한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현지인들과 환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길을 건너고 골목을 누빈 끝에 예약한 숙소에 무사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아주 젊은 부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 매니져였다.

  11시에 체크 아웃이기에 청소와 정리를 하면 12시 반쯤에는 숙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안내를 해준다.  이제 배낭을 키핑해 주어야 하는데.......  얼씨구,  안내 데스크 옆이나 빈 창고가 아니라 자신들이 타고온 미니자동차(마티즈나 모닝 정도)에 싣는데.......  우리 짐으로 차가 꽉 찬다.  이거 아무래도 넘 심하지 싶다.

  이곳엔 민가를 개조해 2개의 호텔방을 운영하고 있으며,  카타니아 전체에 6개의 호텔방을 쫓아다니면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좀 있다가 방을 정리정돈해서 짐을 안에 고스란히 들여다 놓을테니 아무걱정말고 카타니아 여행을 즐겨보라고 환하게 웃으며 나름 자상하게 안내를 해준다.  예비 열쇠를 받아들고 발걸음을 도심 안쪽으로 옮겼다.

  밝은 표정들에다 상대에 대한 자상한 배려심과 성실함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다만......  다만 아직 들여다 보지 못한 숙소가 나름 깨끗하고 아늑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만이 남았을 뿐이다.

 

  두오모 광장(Piazza Duomo) 주변으로는 여기 카타니아를 집어 삼켰던 화산암을 그대로 가공해 건축재로로 사용한 푸르스름한 회색의 장엄하고도 화려한 모습의 바로코 양식의 외관을 갖춘 대형 건축물들이 빼곡하게 둘러 서 있다.  서로들 쏙 닮은 모습들이다. 낡고 허름하거나 그을음이 남은 오래된 건물이 없이 온통 새로지은 깔끔한 건물들로만 광장 주위가 가득한것은.......  이 부근이야말로 에트나 화산 폭발로 어느것 하나 온전하게 남아남지 않은 가장 극심하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모두 걷어내고 털어내고 싹싹 긁어낸 뒤에 완전히 새롭게 지어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번듯하고 화려함 뒤에는 그런 짙은 아픔이 서려있는 것이다.

  광장의 한 복판에는 높은 기념탑이 있는데 유독 까만 코끼리 상이 눈에 들어온다.  코끼리는 카타니아의 상징이다.  그 코끼리를 만든 검은 돌은 이곳을 뒤덮었던  굳어진 용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카타니아의 도시 재건에 코끼리가 크게 기여를 했다고 한다.

  광장의 맞은편에는 진정한 카타니아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성 아가타 대성당(Cathedral of  St. Agatha)' 을 만날 수 있다.  어떤이는 편하게 '카타니아 두오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일대가 카타니아의 심장부이다.  관공서와 칼리지(예술 대학 등)들과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모여 있다.  인근에 설치된 '델리 엘리판티 광장(Palazzo  degli Elefanti)'과는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인도 코끼리 광장에는 에전에 보지 못했던 파랗게 채색된 아름다운 코기리 한마리가 새롭게 설치되어 있어 무척 반다웠다.  시청이 이 광장에 있고,  많은 행사와 길거리 음악회와 전시회 뿐만이 아니라 시위와 집회가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에트나 화산의 녹아내린 만년설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뒤로 유명한 카타니아 수산시장이 있는데 슬쩍 들여다보니 시간이 이미 파장 분위기가.  하여 우리는  이 광장에서 한불럭 뒤에 지금은 지나가는 기차 철로가 놓여진 로마시대 수도교와 성곽 인근에 들어서는 벼룩시장(도깨비 시장)을 들려 보기로 했다.

  현지의 분위기,  현지인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장소로 이런곳만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거래만 있는것이 결코 아니다.

  파는 사람은 서민이고 사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라는  자본주의의 통념도 이곳에서는 무색한 용어일 뿐이다.

  때론,  이런 장소와 분위기가 아늑한 휴식처처럼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을테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어머니 품속 같은 은은한 향수가 자리하고 있다면,  거친 세상을 좀 경험한 인생에는 사람 같은 냄새를 풍기며 나름 좀 거시기(?)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릴것 없고, 거칠것 없고,  내 뱉는 대로의 언어와 손가락질,  있는 그대로의 희로애락을 그때마다 나타나는 표정으로 온전하게 드러내는 진솔한 삶의 모습들이 나는 한없이 친숙하게만 느껴진다.

  마음의 고향을 찾는다면.........  이 소탈한 삶의 현장 또한 마음의 고향이 아닐까?

 

 

 

 

 

 

 

 

 

 

 

 

 

 

 

 피터 플램프톤의 1976년(고1 시절) 발매 앨법이다.  아!!!  세월이 야속하구나........

 

 

 

 

'아니유.  너무 비싸........  깍아주우우우우유 이잉........?'  애교 덕이었을까?  깍기는 깍았다.

 

 

다 헤진 낡은 인형 4개를 사고 저리도 좋은지.......  헐.

 

 

 

 

 

 

모서리가 심하게 훼손된 전형적인 로코코 시대의 패널화.  정말 정말.......  사고 싶었다.

 

 

 

 

 

 

 

 

  누가 나에게 여행을 통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나는 자신있게 이렇게 대답하겠다.

  '포기는 빠를 수록 좋은 것이다' 라고 말이다.

  길림길에 이정표를 붙잡고 서서 어느쪽으로 갈것인가는 마냥 하없없이 붙잡고 서 있는다고 해결날 일이 아닌것이다.

  두 발을 가진 몸뚱이 하나로는 어차피 한 쪽으로 밖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포기는 확고한 결정을 뜻한다.  비굴한 체념을 미화해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포기가 바르면 빠를 수록 앞으로 당면해야 할 상황들에 대한 대처와 계획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기함과 동시에 털어버린 결정(떠나 보낸 결과)에 대해서는 절대 머뭇거리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탈것인지 배를 탈 것인지 티켓팅을 마쳤다면  더는 고심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장면을 시킬까  짬뽕을 시킬까 고심에 고심만 하다보면 음식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음식이 이미 나왔다면  그것이 짜장면이던 짬뽕이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모두가 이미 내가 선택한 결과인것을........

  하지만 일이나 생활함에 있어서 어떤 목표나 계획에 대해서는 나는 아주 집요한 끈기형 인간이다.  다만 여행의 중간에서 생겨나는 선택의 순간들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이다.

 

  카타니아 벼룩 시장에서 만난 목판에 그려진 패널화는 한 눈에 막연하나마 어떤 가치와 품껵이 느껴질만한 참으로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시칠리아가 바로코 시대의 예술로 온통 치장되었다고 한다면, 이 그림은  그런 시칠리아에서 바로코가 막 지나가던 로코코의 시작점에서 만들져다고 볼 수 있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림의 테두리 부분은 심하게 훼손된 채였다.  한 순간에 눈길을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가격도 물어 보았다.  전혀 비싸지 않았다.  거기다 흥정도 충분히 가능한 분위기였다.

  구입하고픈 충동이 마구 일어났다.  태어나서 딱 하나의 그림을 앞에 놓고 '사고 싶다'고 어떤 간절함이 생겨나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에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만약 그 그림이 종이에 그려졌다면 사서 둘둘 말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캔버스화였더래도 과감하게 테두리를 칼로 오려서 그림만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문제는 나무판에 그려진 패널화였다.   크기가 흔히 우리가 겸상을 하고 식사를 할 때 쓰여지는 작은 밥상 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크기의 나무 판때기를 들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해낼 자신이 없을 뿐더러,  당장 어디 우체국 찾아가서 DHL(소포)로 부칠 생각을 해보아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덕분에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당시의 아쉬움을 달래본다)

  벼룩시장에 들리면  역시 현지의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표정과 목소리가 가장 반갑다.  거기에서는 어떤 진솔함과 소박함과 정겨움이 담뿍 묻어난다.

  내 경우는 낡은 쥬얼리 액세서리나 소품들을 가끔 구입하고 주로 구경을 하는 편인데......  챠밍여사는 오늘처럼 저렇게 낡고 헤지고 심지어 때가 많이 탄 인형이나 수예품 같은것에 매료된다.

  헤진 인형을 수북히 쌓아놓고 골라골라 파는 곳에서 한참을 고른 끝에 인형을 4개나 구입했다.  

  '헤진곳은 손질하면 되고 때가 탄곳은 정성들여 세탁해 주면 돼.  우리 대형마트나 백화점에 있는 머리 노랗고 눈이 파랜 서양 인형들......  그거 다 가짜야.  그게 어디 인형이니?  장난감 장식품이지?  잘 봐.  이게 진짜 서양 인형이야.  이게 유럽의 어린아이들이 진짜로 가지고 놀던 진진짜짜 인형이라고.......    사람 냄새 나는 진.짜.인.형.  어때?'

  여행을 마치고 그 인형들은 정성들여서 곱게 손질을 해서는 지금 내 서재에 책을 기대고 앉아 있다.

  챠밍여사가 내 서재를 청소하는 날이면 그 인형들을 털이개로  툭 털다말고 나를 돌아보면서 한 마디  던진다.

  '얘네들 그래도 유럽에서 태어난 애들이라고.....  시칠리아에서 태어들 났다고........ 땟깔이 다르잖아? ㅋㅋㅋ.'

 

 

 

 

 

 

 

 

 

 

 

 

 

 

 

  카타니아는 시칠리아의 제 2의 도시로 불리는만큼 결코 다른 도시에 비해서 작은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사를 통한 패캐지 여행에서는 카타니아를 주변의 여러 도시를 찾아가기 위한 시칠리아 동부의 주요 거점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대개 카타니아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의 타오르미나나 시라쿠사와 노트와 라구사,  그리고 에트나 화산을 여행하기 위한 필수 경유지쯤으로 여기기가 일쑤다.

  하여, 카타니아의 경우 반나절, 혹은 한나절 정도의 시간 소요로 여행을 마무리 짓는 실정이다.

  물론 거기에는 1669년의 화산 폭발로 용암이 카타니아의 상당 부분을 집어 삼켰고, 1693년의 대지진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었거나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던 나머지 도심을 쑥대밭으로 무차별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의 도시 재건을 현재의 중심가인  두오모 광장 주변을 중심으로 펼쳤었기 때문에,  카타니아의 볼거리들이 대부분  두오모 광장 주변에 포진해 있기 때문 또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카타니아의 볼거리나 문화 유산이 18세기 이후에 들어선 바로코 양식의 건축뿐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로 아주 비극적인 오판이다.

  카타니아가  비록 화산재 속에 파뭍혔다고는 하나,  현재 도시의 크기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기원전 8세기경 그리이스에서 온 이오니아인들에 의해서 건설되면서 였다.

  어찌보면 카타니아는 조금 남쪽의 시라쿠사의 백업 도시였다고 볼수도 있겠다.

  그리이스인들은 메시나. 아그리젠토 등 시칠리아의 여러곳에 거점 도시를 만들었지만,  처음 그들이 가장 공을 들여 세운 도시는 시라쿠사 였다.  오르티지아 섬에 신전을 세우고 거대한 항구도시로 발전한 시라쿠사는 명실상부로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대등한 세력을 갖춘 도시국가로서 그리이스 연합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오르티지아 섬은 아주아주 작았다.  하여 시라쿠사 사람들은 오르티지아는 무역항의 역활을 수행하는 신전들의 영토로 남겨두고 다리를 건너 언덕 위에다 주거지와 새로운 거점도심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도시의 영역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하여 시라쿠사 보다 약 10년 뒤에 북쪽의 인근으로 시라쿠사를 지원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되었으니 그것이 카타니아다.

  이렇게 카타니아가 시라쿠사에 이은 시칠리아 최고의 고대도시국가로 등장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본토에는 어떤 도시도 없었다.  로마의 경우  이제 막 사람들이 모여들고 한참 싸움을 시작하던 부족 집단 수준이었다.  피렌체도 나폴리도 베네치아나 제노바도 없던.......  이탈리아 본토는 그야말로 아직은 야만의 씨족이나 부족 중심의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시칠리아가 자신들 나라의 한 지역이라 여기고 있지만,  시칠리아 사람들은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와 별반 상관이 없는  그냥 시칠리아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카타니아의 고지도에 의하면 카타니아는 도심을 둘러싸고 바다와 해자를 파서 갖춘 견고한 성으로 둘러쌓인 성채도시 였다.  특히 8세기 후반부터 바다를 통해 출몰하는 이슬람 해적들은 시칠리아 전체의 커다란 숙제이자 두려움 이었다.  하여 견고하게 성을 쌓았는데,  고지도의 왼편 아랫쪽으로 바닷가에 철벽 방어진지로 축성된 것이 바로  '우르시노성(Castello Ursino)'이다.

  본래 카타니아 성채의 일개 성곽이었던 것을,  시칠리아 해상 방어의 교두보로 삼고자 125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잘 알려진 '프리드리히 2세'가 지금 남아있는 모습으로 재건하였다.(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는  팔레르모 편에서 다시)

  이 성채는 실로 엄청난 난공불락의 요새로 위명을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너오는 이슬람 해적들에게 떨치게 된다.

  당시 카타니아 동쪽의 바다에서 한참을 올려보아야만 하는 까마득한 바닷가 바위벼랑 위에 우뚝 솟은 우르시노성은 침략자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고 실질적인 위력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리 크지도 않아서 성채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견고하게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웅장함은 가히 위력을 짐작케하기에 충분하다.  프리드리히 2세가 계획한 바 대로,  우르시노성이 온전한 이상 카타니아는 안전을 보장 받았다.

  그러던 와중에 1669년 에트나 화산의 폭발로 용암이 이곳가지 들이 닥쳤다.

  흘러드는 용암을 굳건한 성벽이 끝가지 벼텨주었다.  사람들은 바닷물을 길어다 흘러드는 용암에 뿌려 굳게 만들어 흐르는 용암의 불길을 다른곳으로 돌렸다.  대자연의 재앙에 과감하게 도전하였다.

  성채를 비켜 흘러내린 용암은 바닷가 바위벼랑을 타고 넘어 바다로 쏟아졌다.

  현재,  우르시노 성은 카타니아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직선거리로 약 1km 정도를 들어와 있다.  아니......  누가 성을 번쩍 들어 옮긴것도 아니고........  이곳을 덮친 용암이 바다를 1km 정도나 메꾼것이다.

  검게 그을린 우르시노성은 여전히 웅장한 모습으로 지금의 평화스런 카타니아의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대자연의 재앙과 그날의 참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극히 평화롭고 조용하다.

  중세 시기동안 이 웅장한 성채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정치범과 종교적 범죄자들이 주로 수감되었다.

  지금은 '카타니아 문명 박물관'으로 재단장 되어,  인근의 화산재 속에 뭍혀있던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유물에서부터 화산이 폭발하던 바로코 시대의 발굴도니 유물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예전의 방문에서도.........  이번 방문에서도.........  (카라바조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렇게 많은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 각처에서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전시회와 쎄미나가 열리고 있다.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미술가는 아마도 '카라바조'일 것이다.  이스탄불....... 몰타.......  시칠리아........  그리고 이후의 나폴리와 로마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도 '카라바조' '카라바조' 였다.  나도 짝퉁이라도 카라바조의 작품 하나 쯤 가지고 싶다. 아니 둘.......  셋..... 넷이나 다섯쯤...........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을 닮았다.'

  우르시노성을 만들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인근의  그리이스 로마 원형극장의 석재를 무제한 반출 할 것을 명령했다.  하여 두 군데의 고대 유적지는 심하게 훼손될 수 밖에 없었다.

  시라쿠사 대성당을 만들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아폴론 신전을 허물었다.

  이집트 침공을 위해서 나폴레옹은 로마 콜로세움을 헐어 그 안의 고정핀인 납을 수거해 총알을 만들었다.

  로마 카톨릭은 바티칸의 지붕 완성을 위해 판테온의 동판 지붕을 뜯어갔다.  그 바티칸의 지붕을 최종 마무리 완성시킨 사람은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멜리어 드 시네르 수르고 (Melior de cinere surgo)'.

 

  '페르디난도의 문(Porta Ferdinandea)'의 꼭대기에 매달린 불사조(피닉스)에 새겨져있는 문장이다.  이는 또한 쓰여진 그대로 카타니아 사람들의 긍지를 여실히 보여주고있는 자부심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의미는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라는 뜻으로,  에트나 화산의 폭발로 도시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꿋꿋하게 시칠리아인의 기상을 오늘에 보다 확고하고 분명하게 되살려 놓았다는 그네들만의 무한한 자부심의 표현이라 하겠다.

  포르타 페르디난도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양 도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남대문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시칠리아 동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언덕위에 아주 커다란 도시가 나타났다.  다가가면 아주 넓고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갖춘 팔레스 트로 광장 (Piazza Palestro)이 나타나고,  광장의 저편으로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라쿠사에서 가져 온 백색의 대리석과 에트나 화산 폭발의 잔해인 용암(화산암)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성문은 웅장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뽐내고 있다.

  1768년 페르디난도 대공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성문이기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지인들은 대부분  '포르타 가리발디 (Porta Garibaldi)',  그러니까 그냥 '가라발디의 문' 이라고 부르고 있다.  1862년 이탈리아의 구국영웅인 '유세프 가라발디(Giuseppe Garibaldi)가 최초의 이탈리아 통일왕국을 외치며 무장봉기(무장 혁명)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라발디는 여기 카타니아에서 무력투쟁을 통해 외세를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통일된 단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봉기했다.  삽시간에 시칠리아를 통합한 후에 메시나 해협을 건너 나폴리로 진군했다.  가라발디의 무장혁명은 온 이탈리아 반도를 뜨겁게 들끓게 만들었다.  그러자 이탈리아 왕족이었던 에마뉴엘 4세가 북쪽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역시 무장 혁명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세력은 로마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같은 영역 위에 두 마리의 호랑이..........  하지만 가라발디는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와 자신을 따르던 군대를 고스란히 왕족인 에마뉴엘 4세에게 헌정하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최초의 이탈리아 통일왕국이 이룩된 것이다.  하지만.......  통일 왕국의 명분은 성립되었으나 외세의 간섭은 거듭되었고 지방색이 뚜렷한 이탈리아의 진정한 통일은 여전히 미진하다고 판단되자,  가라발디는 다시 군대를 모아서 무장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가라발디는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가라발대 문을 통해 안쪽으로 시원스레 나있는 도로를 다라 쭈욱 언덕을 내려가셤 곧바로 두오모(아가타 대성당) 광장에 도착한다.  그만큼 카타니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셈이다.  하여 이 도로의 이름 또한 '가라발디 대로' 라고 이름 붙였다.  야경이 아름다운 이 성문에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부분은 찾아가는 여행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자 한다.

 

 

 

  가라발디의 문에서 되돌아서 왔던 길을 도심쪽으로 조금 옮기다 보면  그야말로 중세스런 분위가가 물씬 풍기는 낡고 허름한 골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풍경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지난 여행에서 이미 이 골목들을 샅샅이 섭렵했던 터이라  조금은 익숙한 풍경들이지만, 그 풍경들을 나름 즐기면서 왼편의 골목 깊숙한 곳을 서성이다 보면.......  이제까지의 골목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고대 역사 유물관 비슷한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함부로 발길을 내딛기가 어딘지 모르게 좀 무안해지는......  여기저기 통행 제한 표시가 보이기도 하면서 육중한 돌 담장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 성벽을 따라 골목을 좀 돌아가면 퐁화작용으로 인한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낡은 계단과 함께 작은 통로가 보인다.  두께가 엄청나보이는 낡은 작은 쪽문은 그대로 열려진 채이다.

  조심스레 하나 둘 계단을 오른다.

  나는 이미 이 계단을 오르면 오래된 올리브 나무가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너른 후원 마당이 나온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 후원의 담장쪽으로 길게 늘어선 중세풍의 단층 건물들이 여학생 기숙사이고 앞쪽의 5층 놓이의 건물이 1층은 기념품 마켓. 식료품점.  카페. 서점들이 들어서 있고 2층 부터는 강의실이나 연구실등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있다.

  이곳은 대학교 후원 마당이다.  카타니아 주립 종합대학이다.

  카타니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다.

  처음 카타니아를 굳이 오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장소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이곳.........

  본래는 수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수도원과 성당 건물이었다.  물론 지금도 일부는 그런 종교시설로 쓰이고,  고고학 연구실과 박물관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현재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카타니아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지혜와 슬기를 가르치는 대학교로서의 역활이 대부분의 주어진 역활이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다.  하긴,  처음 이 수도원과 성당의 설계에서부터 염두에 둔 것이   로마의 바티칸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로마인들의 바티칸에 뒤지지 않는 시칠리아인들만의 성당을 가지고 싶었던 사람들........

  'Chiesa & Monastero di San Nicola(수도원과 산 니콜라 성당)'.

  이곳을 제대로 두러보려면 운이 좀 따라줘야만 한다.

  중요한 역사 유물이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된 시간, 제한적인 장소가 유독 많은 곳이다.

  지난 여행에서 상당한 시간을 이곳을 서성이면서 보냈다.  하지만 역시나 아쉬움 속에 발걸음을 올겨야만 했다.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기는 지난 여행에서 보지 못했던 곳을 조금이나마 더 둘러볼 수가 있었다.  학생들을 만나면 환하게 웃어보이고......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질문도 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본다.

  카타니아가 아니라  시칠리아에 다시 가게딘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다시 찾아서 나머지 못본 구역을 제대로 모두 둘러보고 싶다.

  시칠리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장소를 찾으라면.......  나는 바로 여기라고 답하겠다.

  성당 파사드의 앞마당이 '단테 광장'이고 도심에서 성당으로 향하는 주도로 이름이 '단테 알리기에로' 이다.  팔레르모도 아니고 키타니아와 단테는 또 무슨 연관일까?

 

  'Chiesa & Monastero  di San Nicola(수도원과 산 니콜라 성당)'

 

 

 

 

 

 

 

 

 

 

 

 

 

 

 

 

 

 

 

 

 

 

 

 

 

산 니콜라 성당 전면의 파사드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았다.  그 앞이 단테 광장이다.
현 카타니아 주립대학(산니콜라 성당과 수도원) 전경.

 

 

 

 

 

  'Chiesa & Monastero di San Nicola(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을 이야기하자면 아주 간략하게나마 '성 베네딕토회'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왜냐하면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이 베네딕토 수도회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베네딕토 수도회는 조금은 특별한 단체의 성격을 띠고있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토 신부의 이름에서 출발된 '베네딕토 수도회'는 로마 카톨릭(바티칸)에 소속된 카톨릭 종교단체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수이트회(예수회)나 기타 여러 단체들이 세계각처에 지부를 두고 중앙집권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지시와 통제를 받는것과는 다르게, 완전하게 벗어나있는 독립적인 아주 특별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그들의 모토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라' 이다.

  교회가 세속의 일에 직간접적으로 깊게 관여하거나 종교적 업적을 내세우려 무엇인가 부당함을 행하기보다는,  기도와 명상으로 자신들 스스로를 신 앞에 당당하게 내어놓고 다가가기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치는 사람들이다.  하여 세상으로부터 헌금이나 물품과 같은 그 어떤 도움도 받지않고 의식주 모두를 스스로 해결한다.  청빈과 금욕은 그들이 최우선으로 중요시하는 사항이다.  흔히 중세 시대상 속에서 산속 깊은곳에 허름한 수도원을 짓고 텃밭을 가꾸고 곡식을 재배하면서 오로지 기도와 명상에 힘쓰는 청빈한 수도사의 모습.......  그것이 바로 베네딕토 수도사들의 사람의 모습인것이다.

  이처럼 베네딕토 수도회의 흔적은 주로 깊은 산속이나 변방의 국경지대나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오지에 많이 남아있다.  그런 베네딕토회의 발자취가 유독 시칠리아에는 많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산 니콜라 성당이 그 중심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산 니콜라 성당은 전 세계에서도 베네딕토회의 이념과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시칠리아에서 베네딕토 수도회의 발자취가 기록으로 13세기에 등장하는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이 시칠리아에 처음 발걸음을 내딪은것은 12세기 말엽이 아닐까 추측된다.(시칠리아에 대해서 이정도 깊이로 다루는 학자나 책자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하여 어디까지나 많이 부족한 한 여행자의 답사에 의한 경험과 탐구의 결과라는 전제를 두고자 한다)

  당시 유럽은 정치. 경제. 종교적인면에 있어서 극한의 공황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바로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보는 학자에 따라 7차, 혹은 8차, 많게는 12차 까지 거론한다) 의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시칠리아는 비록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고는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다.

  제후들의 봉건국가들과 다툼 일로에 있던 로마 카톨릭과 비잔틴의 정교회는 서로를 파문하기를 일삼던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으니, 로마 카톨릭의 일파(?)가 비잔틴의 영역인 시칠리아에 들어오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청빈과 기도만을 추구하는 베네딕토회가 템플이나 요한기사단 처럼 십자군 원정대에 참여해서 어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당시 중요 군사적 교통로였던 시칠리아에 들어왔을리도 없다고 본다.

  아마도 시대적. 정치적. 종교적 공황 상태에서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나 둘 국경이자 변방이자 오지인 시칠리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본다.

  또한 이는 비잔틴의 정교회 입장에서도 정적인 로마 카톨릭의 그 어떤 단체보다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길과 가장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 였기에 어느정도 그대로 묵과하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칠리아에서도  당시 카타니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기원 전,  그리이스인들은 자신들의 영토 밖에다 아테네를 능가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해서 시칠리아 남부에 '시라쿠사'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그 규모가 어느정도 였느냐?  아테네가 천재지변으로 무너진다면 아테네 시민 모두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시라쿠사로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영위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그리이스인들이 마음속에 담고있는 이상향 같은 도시였다.  실제로 아테네를 능가할 정도였다는 기록도 있다. 

  시라쿠사는 그리이스 연방의 7개 손가락 안에드는 명실상부한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계획상의 지리적 한계성이 드러나자 10년 후에 그리이스인들은 시라쿠사의 백업 도시로 북쪽 인근에 새로운 도시를 하나 더 건설하였으니 바로 카타니아였다.

  그리이스가 멸망하고 새롭게 영토를 확장한 로마는 옛 그리이스의 모든 영광을 지워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하여 하루아침에 시라쿠사는 로마에 의해서 궤멸되었다.  로마는 시라쿠사는 역사에서 흔적조차 지워버렸지만  시칠리아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했다.  하여 그들이 선택한 곳이 바로 카타니아였다.  페허로 방치되다시피한 그리이스 원형극장에서 보듯이 로마는 그리이스를 모조리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했다.  결과로 카타니아는 시칠리아 최고의 부유하고 번성한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  로마가 둘로 나뉘고,  서로마가 멸망하자 당연하게 시칠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비잔틴의 절대군주 유스티니아 황제 사후에 급격하게 쇠락의 기미를 보이자 시칠리아는 그야말로 무풍지대이자 변방으로 전락했다.  서서히 아랍인들이 접근해 왔다.

  비잔틴의 자존심은 카타니아를 중심으로 거세게 아랍에 항거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작전을 바꾸었다.  시칠리아의 남동부 해안을 포기하였는지  그대로 건너 뛰고 북서쪽의 해상 방어기지였던  팔레르모에 상륙한 것이다.  팔레르모에 거점을 확보한 아랍인(이슬람 군대)들은 서서히 육지를 통해 남진했다.  그리 오재지 않아 시칠리아는 아랍인들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당연히 카타니아는 또 한번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첫 요충지였던 팔레르모를 아꼈다.  팔레르모는 곧 이슬람식 도시로 새롭게 건설되었고,  이는 현재가지 시칠리아의 대표 도시가 되는 첫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로마 카톡길의 수장 교황이 무한의 야심을 발하는 가운데 유럽의 봉건주의 사회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아비규환의 파국속으로 치닫게 된다.  이 불란은 결국 북쪽의 바이킹족(노르만 족)을 벌러들여 남하시키게 되고..........  시칠리아는 노르만 왕조의 최초 거점이자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핵심 거점이 줄곳 팔레르모가 된다.

  이어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시칠리아에 베네딕토 수도회 수도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베네딕토회의 수도사가 처음 시칠리아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카타니아 지역의 한 부자가 거대한 농장을 베네딕토 수도회에 기증한 일이 있은 다음으로, 이 농장을 관리하기 위하여 수도사를 파견하면서 생겨난 일이었다.  수도사들은 농장 관리를 위하여 에트나 산자락에 '산 비토 수도원((벨 파소)'를 시칠리아에서 처음으로 지었다.  처음으로 베네딕토회의 정식 거점이 생긴것이다.  1136년엔 노르만인이 '산 레온 교회'를 지어 역시 베네딕토회에 기증하였다.  1150년에 또 다른 종교인이 거대한 목초지와 포도원을 기증하게 되자 베네딕토회는 이 광범위한 농장과 시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산 비토 수도원'과 '산 레온 교회'와 모든 포도밭과 땅을 하나로 통합하여 '산 니콜로 라 레나 디 니콜로시 수도원( San Nicolo la rena di Nicolosi)' 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를 '산 니콜라 디 바리(San Nicoloa di bari)'에게 헌정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은 카타니아에 위치해 있는것이 아니었다.

  성인의 이름과 지명이 포함된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처음 성당과 수도원이 생겨난 곳은 지금의 카타니아에서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져 있는 당시의 부자나 고위 관료들이 주로 기거하는 소도시 '니콜로시(Nicolosi)' 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 커다란 재앙이 닥쳐왔다.  에트나 화산이 폭발했고  뿜어져나온 붉은 용암 덩어리가 고스란히 내콜로시를 덮쳤다.  성당과 수도원은 용암에 파뭍혔고 수도사 대부분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후로도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은 꾸준히 수도원과 농장의 재건을 위해 노력을 하였고,  그 때마다 화산은 이들을 향해 대재앙을 내렸다.

  1578년,  또 다시 닥쳐온 대재앙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송두리채 빼앗겨버린 수도사들은 마침내 중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총독 조반니 델라 세르다에게 정식으로 청원을 넣은 것이다.  청원의 내용은 성당과 수도원의 이전과 건축에 있어 허락과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의 식민지베하에 있었으며, 세르다는 스페인에서도 아주 명망이 드높은 가문 출신의 시칠리아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 상태였다.  그는 시칠리아를 무리없이 통치하기를 원했으며 그러자면 무엇인가 자신이 시칠리아에 공헌할 수 있는 업적이 필요했다.  더우기 본국인 스페인의 경우 이사벨 여왕의 지휘하에 마침내 이슬람 세력을 유럽 영토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카톨릭의 국가'를 한참 재건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시칠리아가 인근의 이탈리아가 아닌 멀고 도 먼 지중해 저편의 스페인과 흡사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세르다 총독은 새로운 명령서에 서명하였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세웠던 언덕에 'Chiesa & Monastero  di San Nicola(수도원과 산 니콜라 성당)'을 새롭게 건축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페허로 남아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유적을 돌과 흙더미로 덮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세르다 총독의 야심이 가미된 새로운 성당의 건축는 당연히 시칠리아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하며 화려해야만 했고,  나아가서는 전체 유럽을 통털어서도 결코 흔치않을 대역사였다.  성당 건축에는 오랜 시일과 경비가 요구되었다.

  웅장한 자태로 위용을 한것 드러내기 시작한 니콜라 성당은 그만........  1669년의 에트나화산 대폭발로 인하여 회복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되었다.

  공사는 일체 중단되었다.  스페인 식민정부로서도 더 이상은 도저히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은 페허된 모습으로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제 역사속에서 비운의 건축물로 기억으로만 남겨질 위기였다.

  그러자,  또다시 베네딕토 수도회가 나섰다.

  반복되는 대재앙을 반듯이 극복해야 하는 일이 신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해주신 사명이라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회는 스페인 식민정부로 부터 남겨져 있는 상태 그대로 모든 권리를 인수하게 되었다.  회복불능의 페허에서 또다시 재건이 시작된 것이다.

  이 숭고하고도 위대한 프로젝트에 로마의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콘티'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조반니는 현재의 엄청난 크기와 높이의 성당과 수도원을 계획하였고, 르네상스풍의 회랑을 비롯해 이슬람식 정원을 만들었으며, 카타니아에서 가장 높은 전마아대를 품은 멋진 돔을 완성하였다.

  프로젝트의 모든 계획은 그가 받았다는 영감과 계시에 따른것이었으며,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다분히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을 염두에 둔........  바티칸에 못지않은 건물을 짓고싶다는 그의 간절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조반니 사후에는 그의 제자인 '카를로 폰타나'와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던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프로젝트를 계승하였다.

  이런 숭고하리만치 불굴의 정신으로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성당과 수도원에 1693년 대지진이 들이닥쳤다.  일부 구조물이 붕괴되었고 본당의 돔이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수도사들과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굴복하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다섯 차례에 걸쳐서 지진 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설계 변경을 추진하였고 이를 그대로 반영했다.

  무너지면 다시 쌓는 집념과 의지의 재건축은 시일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많은 경비를 발생 시킨다.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의 모든 건축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으로 웅장한 정문의 파사드 건축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마침내 재정적인 파탄이 닥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재정의 고갈은 끝내 성당과 수도원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야 말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뭇솔리니의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반도를 거쳐 유럽의 심장으로 쳐들어가기 위해서 시칠리아는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시칠리아를 탈환한 연합군은 바로 이 곳,  니콜라 성당을 지휘 본부로 삼았던 것이다.  웅장하고 튼튼하기가 더 없이 훌륭한 요새였기 때문이다.  하여 이탈리아 군대와 독일 군대의 엄청난 폭격이 이곳에 가해졌다.  2차대전으로 인하여 니콜라 성당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상당 부분이 회복불능일만치 파괴되었던 것이다.  하여 어떤 이들은  성당 정면의 부서지고 그을린 외부 모습을 2차대전 폭격과 연계시키곤 한다.

  하지만 아니다.

  폭격으로 어느정도 손상이야 입었겠지만서도.......  워낙 웅장하고 튼튼해서 파사드는 폭격에서도 끄덕 없었다.

  지금의 모습은 치명적인 재정난으로 미처 파사드(건축물의 정문부분)를 완성하지 못한 흔적이다.

  1797년 성당 건축에 석재(대리석)를 납품하던 회사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물량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외상 거래가 누적된 때문이다.  파사드의 건축은 차일피일 뒤로 미루어졌다.  1866년,  법원은 석재 납품회사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들은 지금 남아있는 상태 그대로의 재산 가압류를 신청했으며 허락이 떨어졌다.

  결국......  베네딕토회로서도 재정 고갈의 상태에서 손을 떼게 되었으며, 카타니아 지자체 정부가 이를 사들여서 현재는 '카타니아 종합 대학'으로 운영하고 있다.  성당과 수도원과 대학의 기능이 적절하게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보기드문 현장인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없는 참으로 멋진 대학 캠퍼스라고 해야만 하겠다.

  카타니아 시 정부는 계속적으로 성당과 수도원을 복원하고 있다.  1999년에는 돔을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아울러 끊임없이 미완성인 성당의 파사드 부분을 마저 완성짓자는 의견과 시도는 거듭 반복되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요원한 일 만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채권자는 아직도 엄연하게 남아있으므로........

 

  복원과 본래 계획대로의 완성이 가능할까?

  '내가 카타니아를 찾는 이유는........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이 있기 때문이다.'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Chiesa & Monastero di San Nicola)' 건물은 가로 71m 세로 105m에 높이가 66m나 되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크고 높은 카톨릭 성당이다.  돔의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면 그야말로 에트나 화산을 비롯한  카타니아 인근의 빼어난 전망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처음 설계 단계에서부터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을 염두에 두었던만큼, 라틴 십자가 형태의 레이아웃 위에 장대한 돔과 3개 본당의 코린트식 기둥들이 떠바치고 있는 아치 형태의 천장과 높은 높이로 올려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들로 인해 정면과 측면으로부터 강렬하고 산란된 빛이 쏟아져 들어와 그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엄숙하고도 신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여러개의 채플이 나뉘어 들어서 있는데  성당 자체가 숱한 수난을 격어온만큼 채플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들도 보존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본당 후미의 한 공간을 배려하여 1차 2차 세계대전에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공간 자체가 심하게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럽의 카톨릭 성당을 찾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해시계를 볼 수가 있다.(곧 로마에서도 보게되겠지만)

  주기를 확인하고 표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중세 이후 지동설과 천동설이 격렬하게 맞붙은적이 있어서  교회 내부에 해시계를 설치한다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 대부분의 해시계는 르네상스 이후에 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 사연을 담은 해시계가 이곳 산 니콜라 성당 본당에 엄연하게 설치되어 여행자의 호기심을 북돋운다.  1841년에 완성된 해시계는 독일의 '볼프강 폰 월터스 하우젠'과 덴마크인 '크리스티안 피터스'에 의새서 만들어 졌다.

  높이 23미터 91센티 7밀리미터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성당의 두 채플 사이에 설치된 약 40미터의 대리석 벨트위에 떨어져 내린다.  기 빛줄기로 하여 시간. 요일. 월이 표시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지혜에 감탄하게되고 어떤 신비로움을 잠시나마 느껴보기도 한다.

 

  산 니콜라 성당에는 아주아주 중요한 기독교 성물이 하나 보관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하지만 아쉽게도 두번째의 방문에서도 나는 이 고귀하고 성스럽고 호기심이 가득한 성물을 직접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성물이 혹 로마 바티칸이라면 모를까......  카타니아의 낡은 성당과 수도원에 왜 보관되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카타니아 산 니콜라 성당 지하 수장고에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때 직접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못' 하나가 보관되고 있다.  예수의 몸에 박혔던 그 못에는 당연히 예수의 피가 흘러 맺혔을 것이다.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은 본래 고대 그리이스의 아크로폴리스가 있던 자리 위에 세워졌다.

  그런 이유로 성당과 수도원과 인근의 대지는 온통 그리이스 유적군이다,

  성당과 수도원 입구 마당에,  그리고 성당과 수도원의 마루바닥 아래 그대로 고스란히 그리이스 유적들이 뭍혀있다.  복도의 여기저기에 놓여있는 유리 구멍들을 통해 땅속의 그리이스 유적들을 여기저기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사방에서 지하 유적 유물들을 발굴 조사하고 있으며(성당 복원과 함께)  지하층을 도서관과 유물 저장고와 박물관과 고고학 연구실로 만들었다.  어느날 붉은 용암덩어리로 뒤덮인 재앙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지하에 당시의 유적과 유물들을 고스란히 보관했다가 현대의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전하여 주는 아이러니를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니콜라 성당의 지하는 어마어마한 그리이스 유적 박물관이다.

  다만,  대부분의 공간이 특정한 때에만 일부 오픈을 하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어서 차마 진한 아쉬움속에 지극히 일부만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던........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이 나를 강력하게 잡아끄는 매력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것으로 두 가지 때문에 나는 기꺼이 이곳을 다시 찾는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그 첫번째는 계단이다.

  계단의 용도는 누구나가 아는 것이고  꼭 그 용도에 맞게끔 대리석으로 우아하게 양쪽 방향으로 닮은꼴의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의 카타니아 주립대학(수도원)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양 옆으로 땅 속에 고대 그리이스 유적들이 웅덩이처럼 파여져 있고,  그 사이를 지나 건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름답기가 황홀할 정도인 이 계단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 회랑을 통해 강의실들이 길게 늘어 서있고,  곧바로 계단을 지나쳐 나아가면 낡은 목재문을 통해 수도원의 안마당인 정원이 나타난다.  이 계단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좋을까?  아래서 올려다보는 계단의 아름다움과 장엄할 정도의 우아한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있는 천장과의 조화는 또 어떻하면 좋단 말인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면 메디치 가문을 위한 채플이라 할 산 로렌초 성당이 있다.  성당의 영역 안쪽으로 정원을 지나면 유명한 도서관이 하나 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계단이라고 할 수 있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계단'이 그곳에 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감히........  나는 '카타니아 주립대학의 계단'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계단' 못지 않게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존에 지대하게 힘써야하는 상징적인 기념물로서가 아니라,  주립대학의 계단은 애초의 목적에 맞게 현재에도 엄연하게 진행형인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복도(톨로. 회랑) 이다.

  아주아주 큰 직사각형의 긴 회랑을 두개나 가지고 있는 수도원 건물은 2층 또한 같은 크기와 용도와 전망을 가지고 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주아주 커다란 목재 창문들은 그 중 하나를 열어보려고 해도 나 같은 남자가 온힘을 다 써야만 겨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겨우 열릴 지경이다.

  어느 창문에서나 안쪽을 보면 느낌이 전혀 다른 두 개로 나뉘어진 실내 정원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가 있다.  바깥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서는 에트나 화산도 보이고,  카타니아 도심의 일부도 내다 보이고,  2층에서는 멀리 카타니아 바다의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햇뼡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마다 서너개씩의 책상을 내어다 놓고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앉아 책을 보고 토론을 한다.  그런가 하면 복도의 구석에는 달랑 혼자 앉아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두개 정원의 사이를 지나는 회랑(복도)에는 현대식 철골 구조물을 이용해서 멋진 사다리 계단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통로의 윗쪽과 아랫쪽 공간들을 활용하여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 열람실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멋진 공간이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공간인가?

  산 니콜로 성당과 수도원은 숱하게 대재앙을 겪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베네딕토 수도회의 정신과 노력은 저렇게 카타니아의 젊은이들에게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풍요한 축복으로 남게되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젊은 모습들이 부럽다.

  왠지 모르게 이 공간은........  나에게 한없이 포근하고 마냥 머물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숨겨져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살금살금 숨을 죽여가면서 이곳저곳을 무던히도 싸돌아 다녀본다.

  복도에서 눈이 마주치거나 마당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말을 건네본다.  이 낯선 여행자를 젊은이들은 전혀 낯설지 않게 친절하게 대하여 준다.  실내 정원으로 향하는 열려진 쪽문을 가르켜 주기도 한다.  문구점과 편의점을 함께하는 마트에서는 잠시나마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대학교(수도원)을 나서면서 돌아보니.......  이 어찌 진한 감동이 울려나오지 않을 소냐?  발코니 창문 하나하나 마다 숙련된 장인의 정성과 노력이 가득 담겨있다.  이 건물의 세세한곳까지 모든 구석구석들이 모두 하나 하나 예술 작품이다.

 

  단테의 광장에 서서 미완성의 파사드를 올려다 보면서.........  한참을 머물러 본다.

  단테 알리기에리 도로를 따라 옮겨지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러면 또 되돌아 본다.

  그런데.......  도대체 왜 여기까지 '단테야?'

  단테가 뭘 어쨌다고?

 

 

 

 

 

 

 

 

 

 

 

 

 

 

 

 

 

 

 

 

 

 

 

 

 

 

 

 

 

      ㅡㅡㅡ  카타니아를 아직 절반정도 밖에 돌아보지 못하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길어져 버렸네요.  일단은 이쯤에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다음 여행기에서는 먼저 '타오르미나'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뒤에 팔레르모로 떠나기 전에 다시 카타니아 여행을 마무리 하기로 하겠습니다.  찾아주시고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