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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천국에서 잠시 휴식을 가져보는 것은 어때? 타오르미나 에서.......

by 피안재 2020. 7. 10.

 

 

 

 

 

 

 

 

 

 

 

 

 

 

 

 

 

 

 

 

 

 

 

 

 

 

 

  어디에나 흩날리는 꽃잎과 은은한 오렌지 향기, 그리고 푸르다 못해 검게까지 느껴지는 코발트빛 바다, 거기에 더해 수천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고대의 유적지, 라임스톤과는 빛깔도 질감도 전혀 다른 제멋대로의 돌맹이들을 켜켜히 쌓아올려 은근한 잿빛을 담고있는 낡은 건물들, 따갑게 내리쬐는 햇쌀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다냄새를 고스란히 품고있는 시원한 바람,  거기에다 좁은 골목길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정겹게 먼저 인사말을 건네온다.

  '본 조르노 (Buon giorno)!'

  할아버지는 자신을 조상대대로 이 섬을 지키며 살아 온 시칠리아인의 진정한 후예라고 소개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의 커다란 섬(흡사 우리나라 제주도)이 분명하지만,  얼핏 할아버지의 안중에는 이탈리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보이기까지 한다.  할아버지에겐 온통 시칠리아에 대한 무한한 애정뿐이다.

  할아버지에게는 시칠리아인의 자부심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그는 그냥 올곳은 한 시칠리아인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그 자부심이......  그런 차이를 조금씩이나마 느껴가고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뒷쪽으로 하얗게 만년설에 뒤덮인 에트나 화산이 병풍처럼 한 폭의 그림인양 늘어서 있고,  앞으로는 드넓고 마냥 짙푸른 이오니아 해의 멋진 장관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올려다보아야만 하는 깎아자른듯한 바위벼랑 위(해발 250m) 타우루스 언덕위에 서서 우리는 지금 넋이 무단가출을 해 버린 사람의 포즈로 주체할 수 없는 (타오르미나)의 아름다운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천국에서 잠시 휴식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여행을......  마침내 타오르미나에 온 것을 자축이라도 하려면 어떻게 하지?

  '화장 없이.....'

  '나는 지금 바람을 보고 있다우.......'

  시칠리아에는 이렇게 '화장 없이' '나는 지금 바람을 보고 있다우'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적 특색을 갖춘 와인이 실제로 생산되고 판매되고 있다.

  어쩜 좋아.......  와인의 이름에서 조차도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맛과 향기가 저절로 풍겨나는 걸.........

 

  지금 우리는 타오르미나에 있는거야.

  달리 표현한다면........  '우린 지금 작은 천국에 서 있는거야.'

  어때?  시칠리아 레드 와인 한 잔....

 

 

 

 

 

 

 

 

 

 

 

 

 

  타오르미나는 고대 그리이스의 눈부신 번영과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채 역사 속에서 잊혀진 도시였다.  

  그리이스가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와 비잔틴 시대까지는  시라쿠사와 더불어 번영을 누렸지만, 962년 타오르미나를 점령한 아랍인들(이슬람 세력)은 도시 전체를 페허로 만들어 버렸다.  잔존하는 기독교 세력들이 바위벼랑 위에다 도시를 요새로 만들고 끝까지 저항할것을 우려해서 벌어진 일이다.  타오르미나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아랍인들은 사라진 도시의 산꼭대기에 아랍식 성을 쌓아서 방어기지로 삼았다.  이후로 노르만 왕국과 스페인과 프랑스의 손길이 모두 거쳐갔음에도  옛 고대 그리이스의 영광은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떨어져 가파른 바위벼랑 위에까지 힘들게 올라가야만 하는 타오르미나의 중요 거점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저 산자락에 의지해서 목축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만을 위한 촌락으로 전락한 것이다.

  1786년 독일 출신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한 사내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왔다.  그는 그만 시칠리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에도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는 분명히 달라보였던 것이다.  시칠리아는 또 하나의 사라진 그리이스였으며,  팔레르모에서 그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하고있는 착가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영혼은 어느새 시칠리아의 무한한 매력에 하염없이 깊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그에게 현지인 안내자가 이오니아 해를 바라보는 시칠리아의 남동부 해변에 빼어난 경치를 가지고있는  바위벼랑 도시가 있다며 추천을 해주었다.  다만 오랫동안 방치된 도시라 머물곳이 마땅치 않을 뿐더러  오고가는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을것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그는 낡은 수도원을 임시 거처로 삼기로 하고 마침내  그 바위벼랑 도시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타오르미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넋이 어디론가 무단가출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기꺼이 말해주겠다.  여기 타오르미나 라고.'

  고국으로 돌아간 그 사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때 타오르미나에서 충격으로 맞이했던 아름다운 풍광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작가로서도 정치가로서도 어떤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사내는  한적한 장소를 골라서 들어앉아 과거의 여행을 기행문으로 써서 책으로 편찬(1816년) 하였으니, 그책이 바로 (이탈리아 기행)이다.  그리고 그 사내의 이름이 바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다.

  괴테가 쓴 '이탈리아 기행'은 전 유럽의 상류사회에 엄청난 쎈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중세에 '단테'의 (신곡)을 몇번이나 읽었느냐,  일상의 생활과 대화에서 신곡을 얼마만큼 대입시키거나 활용하는 가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과 지성의 크기를 가늠하던 시대가 있었다면,  19세기 유럽의 상류층이나 지성인이라면 (이탈리아 기행)을 읽고 어디어디를 다녀 보았는가가 그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상류층이나 지식인이라면 이미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나 밀라노 등의 도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거나 다녀 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전혀 생소한 장소였다.  느닷없이 유럽의 상류사회에 시칠리아 여행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괴테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찬양해 마지않은 (타오르미나)에 대한 호기심과 열기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되었다.  삽시간에 아주 작은 바위벼랑도시 타오르마나가 시칠리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부티가 나는 새로운 도시로 도약하는 결과를 낳게되었으니 말이다.

  내노라하는 유럽의 상류층과 부호들이 타오르미나를 찾아서 오랜 기간 머물게 되었고 낡은 집들을 수리해서 자신들의 저택으로 만드는 공사가 벌어졌다.  괴테가 머물렀던 날고 허름한 수도원도  대부호가 사들여 화려한 호텔로 개조했다.

  불과 200m 남짓한 타오르미나의 중심가 '움베르토 거리'엔 세계 유명 브랜드의 상점과 음식점과 숙소가 생겨났다.  그 이후로 타오르미나의 실제 물가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비싸다.  일부 품목의 여행자가 느끼는 체감 물가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해도 무방하다.  내노라 하는 유명 패션 브랜드는 이 좁고 작은 골목안에 모두 있다.

  괴테 자신도 자신이 쓴 책 한권이 이런 사단을(?).....  파장을 불러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러시아제국의 니콜라스 1세가 멀고 먼 이곳은 찾아 한동안 머물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예 이곳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했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와  작곡가 리차드 바그너도 타오르미나를 찾아 오랫동안 머물렀다.

  독일의 화가 오토 겔링은 타오를미나를 찾은 첫순간에 그만 이곳의 치명적이며 매혹적인 정취에 퐁당 빠져버리고 말았다.  영혼까지 저당잡힌 겔링은 독일에 있는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허물어진 팔라초 (타오르미나 옛 시청)를 사들여 호텔로 개조하고는 시칠리아 여인과 결혼까지 하면서 아예 이곳에 눌러 앉았다.  그는 평생동안 타오르미나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노력하였는데,  베를린과 파리에서 열린 그의 미술전시회는 유럼 상류사회에 또 한번 타오르미나 열풍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를 비롯한 타오르미나 광풍에 휩싸였던 유명인사를 모두 거론한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지금 나의 시선과 가슴은......  1786년 막 이곳에 도착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꼭 닮았다.

 

 

 

 

 

 

 

 

 

 

 

 

 

 

 

 

 

 

시칠리아의 북동부에서는 어디에서나 에트나 화산이 보인다.

 

 

 

 

 

 

 

이솔라 벨라 해변까지 오가는 케이블 카.  겨울철에는 운행을 중단한다.

 

 

 

 

 

 

 

 

 

 

 

 

 

 

 

 

 

 

 

 

어둠 속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포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조금 들었을 뿐이지만  조금은 그 음악이 더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녀를 보내 줄 수 있었는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알고 싶읍니다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그것을 보았다면

가 지금 어둠속에 앉아 있고

Taormina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한다고 전해주세요

 

지나버린 젊은 시절의 사랑은 

무지개의 색깔처럼 빛났습니다.

욕망은 숨을 고르고

화산의 경사면에선 사랑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입맞춤을 여전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메시나 레드 와인 같이 붉고 달콤했던 추억

지금 그는 어둠속에 앉아 있습니다.

Taormina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거의 평생 그의 곁에 머물렀지만

함께 해변을 따라 걸었을 때

거의 평생 그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녀는 "오직 당신뿐"이라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각자의 삶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어쩌면 그들은 둘이 아닌 영원한 하나였을 것입니다

 

군중은 황제를 향해 환호를 보냅니다

손을 들어 뭇 사람들에게 인사하십시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방랑자 였어요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고 난 지금

군중은 이제 더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와서 보고 정복했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만  함성 소리가 울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짙은 어둠속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Taormina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종소리를 듣고

영원히 공명하는 신과 인간 사이에 나눈 대화를 모두 기억합니다

수수께끼같은 고대시대의 모든 꿈들

시실리와 스파르타가 등장하고 때론 여성을 가운데 두고 전쟁을 벌입니다

고대 역사의 안개 속에서는

카르타고의 군함이 출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어둠속에  앉아 있습니다.

Taormina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어둠속에 홀로 앉아

Taormina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기원전 3세기 경에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타오르미나의 산꼭대기에 건설된 고대 그리이스 극장에서 해마다 여름밤에 열리는 음악회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여름음악 축제로 너무나 유명하다.  유서깊은 고대 유적에서 펼쳐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나 오페라 공연은 이루 형언하기 힘들정도의 벅찬 감동을 안겨주기에 해마다 여름축제의 밤이되면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기고 있다.

  빛나는 한여름밤의 음악축제에 2013년은 클래식 음악축제가 아니라 지극히 예외적인 특별한 행사로 락 콘서트가 같은 장소에서 펼쳐졌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이자 Rock-group 'Dire Straits'의 리더인 Mark Knopfler 가 락 페스티발을 펼친것이다.  노플러는 이 뜻깊은 공연에 락 음악계에 최고 레전드라 할 수 있는 대선배를 공연 파트너로 초청했다.  이 공연에 기꺼이 동참한 대선배는 노플러 보다 이틀이나 먼저 타오르미나에 도착해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뜻깊은 공연을 준비하였기에 공연 후에까지 존경과 찬사가 그치지를 않았다.  이 공연 덕분에 더우 유명해진 호텔 빌라 안젤라에 도착한 노플러는 이미 서너차례 함께 공연했던 평소 존경하는 선배가 먼저 도착해 공연 준비를 하는것을 보고는 정말로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거기에는 공연에 관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음악을 대하는 진지함이나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나 사람의 가치와 먼 인류의 미래까지를 늘 염두에 두고 또 항상 진지함으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고있는 신념과 철학에 대해서도 크게 감명을 받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절하기까지 한 그 대선배는 바로 Bob Dylan 이었다.

  이때의 공연을 통해 노플러가 밥 딜런으로 부터 받은 감동과 깨달음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엄청나게 컸다.

  2013년 7월 16일의 공연 후,  노플러는 모든 일상을 던져버리고 혼자 세계 도처를 여행하게 된다.  1년 반 가까이를 혼자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는 것이다.  때론 오토바이를 타고,  아니면 주로 걷거나 버스를 타면서 험난한 여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노플러는 그 여행중에 느꼈던 생각과 감흥을 솔로 앨범에 고스란히 담아서 내놓게 되었으니 2015년에 발표한 (Tracker) 앨범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여행의 시작이 되었던 타오르미나에서의 깨달음을 (Light of Taormina)에 은은하고도 애잔한 연주와 노래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 후,  노플러는 밥 딜런과 단 둘이서 아메리카 대륙을 두 번이나 여행했다.

  하여, 앨범 (Tracker)의 의미는 사전에 나오는 '추격자' '사냥꾼'의 의미 보다는 인간애와 진리를 찾고자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지 싶다.

 

  타오르미나를 여행하고자하는 당신에게  마크 노플러의 (Light of Taormina)를 작은선물,  혹은 시칠리아 여행 준비물로 전해 드리고 싶다.  그리이스 극장에 서서 검푸른 이오니아해를 바라보면서 한 번 들어보시기를..........

 

 

 

 

 

 

 

 

 

 

 

 

 

 

  타오르미나를 여행하기 위해선 이탈리아 본토에서 메시나 해협을 건너 곧바로 타오르마나로 향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칠리아 여행자들은 서쪽의 팔레르모에 숙소를 정하고 아그리젠토. 체팔루. 트리파니. 마르살라 등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고,  동쪽으로 카타니아를 거점으로 해서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라구사. 모디카 등을 당일치기로 여행하는 방법이 보편적이다. 이 두 도시를 중심으로 시칠리아의 모든 도로망이 방사선처럼 뻗어나가 있기 때문이다.

  카타니아에서 타오르미나를 여행하는 방법으로는 자가용이 아니라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겠다.

  카타니아의 동쪽 해안가 약간 외곽지역에 (카타니아 중앙역)이 바다를 끼고 자리잡고 있다.  기차역 앞 광장 건너편에 약간 떨어져 (카타니아 버스 터미널)이 나름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여러개의 버스회사가 별도의 부스를 설치하고 있는데, 이 중에 '인터버스(interbus)' 사가 타오르미나 노선을 담당하고 있다.  타오르미나까지는 기차나 버스나 모두 1시간 조금 넘게 시간이 소요되는데,  여러가지 여건상 '타오르미나는 버스' '시라쿠사는 기차'라고 나는 강추하겠다.   타오르미나행 버스는 여행자를 언덕위의 도시 입구 부근까지 곧바로 데려다 주지만,  기차는 타오르미나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하는 바닷가에 내려주기 때문이다.  기차역에서 도시 중심인 움베르토 거리까지는 약 4km 에 이른다.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목동들이 다니던 아주아주 가파른 벼랑길을 택해 아찔한 등산을 시도하는 여행자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이따금씩 오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던가,  그것도 아니면 같은 카타니아에서 출발한 인터버스를 기다려 타고 올라가야만 한다.  별도의 요금이 추가되는 것은 필수........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유.......

  지난 번 혼자 여행에서는 왕복을 버스로 하였기에 이번에는 카타니아 중앙역에서 타오르미나로 향하는 레지오날레(이탈리아 보통 기차. 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이스 유물이 몇 점 전시되어있는 카타니아 기차역역을 돌아보고 한참동안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함께 온 여행자 한 팀은 목동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등산을 시작한다.  지중해(이오니아해)를 코 앞에 끼고있는 기차역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운치있고 아름답다.  거개를 돌려보면 도로를 건너 깍아지른듯한 바위벼랑 저만치 한참이나 위쪽에 장나나감 소품을 길게 늘어놓은것 같은 타오르미나가 올려다 보인다.

  기차역에서 타오르미나 중심부까지 이르는 해안도로와 가파른 언덕길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아말피 해변 도로나 카프리 해안도로를 무색케 할 정도이다.  흔하게 말해서.......  007 시리즈를 보다보면 항상 환상적인 지중해 해안 드라이브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 장면을 실제 촬영하면서 지금 직접 보는 듯 하다.

  동공을 최대한 크게 넓히고 한껏 벌어진 입은 아예 닫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  한참을 그렇게 꼬불꼬불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노라면,  버스는 아주 작은 공터에 멈추어 서서 사람들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타오르미나 버스터미널이다.

  타오르미나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카타니아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한 후에 미리 버스티켓을 예약해야만 한다.  마지막 버스까지 표가 모두 팔리거나 하면 낭패를 겪을 수 있음이요,  
ㄸ이곳에서의 체루하고자 하는 시간을 잘 못 맞추게되면 버스를 놓치거나,  아님 오랫동안 무료하게 버스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막차 바로 앞 시간대의 표를 예매했다.

  버스 티켓까지 예매를 마쳤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 시간까지의 자유로운 타오르미나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언덕을 걸어 오르노라면 우측으로 이오니아해의 푸른 해변이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지역에 최초로 들어섰던 고대 그리이스의 도시 '낙소스(Naxos)' 그 해안선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작은 공터와 함께 커다란 박스형 건물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데 케이블 카 정류장이다.  타오르미나 도심과 해변가 명소인 이솔라 벨라를 연결해주는 케이블 카는 비수기인 겨울철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  이곳에 서서 해변을 내려다보니.......  지난 여행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파른 계단길을 죽어라 뛰듯이 하여 이솔라 벨라를 다년 온 기억이 새롭다.

  좀 더 올라가면 좀 더 너른 공터와 함께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가로막는 성벽이 늘어서 있고,  가운데로 작은 성문이 나타난다.  '포르타 메시나(Porta Messina)' 라고 불리는 타오르미나의 북문이다.  타오르미나는 북문인 이곳 포르타 메시나에서 남쪽에 있는 남문인 '포르타 카타니아(Porta Catania)' 사이의 약 200M 조금 넘는 골목길인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 거리에 관청과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별장이 들어서있는 아주아주 작은 유양 목적으로 바위벼랑 위에 들어섰던 성채 도시였다.  하긴 도시랄 것도 없겠다.  시골마을 중에서 그나마 약간은 크고 폼나는 부촌이었다.

  본래는 이곳 바위벼랑 아래 해안가에 '낙소스(Naxos)'라는 작은 도시가 기원 전 8세기경에 시라쿠사와 카타니아에 이어서 건설되었다.  하지만 워낙 작은 도시였던 낙소스는 이오니아 해에 무섭게 등장한 아랍인 해적들에 의해서 거듭거듭 수탈을 당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쇠퇴하더니 몰락하고 말았다.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타니아나 시라쿠사로 이주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낙소스를 지배하던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고 카타니아나 시라쿠사에 이방인으로 흡수되기를 거부했다.  하여 몰락한 낙소스의 부와 권력을 가진자들이 스스로의 자구책으로 깍아지른 바위벼랑 위에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것이 바로 타오르미나가 되었다.  그곳은 소수의 군사력만으로도 해적들에게 대적하기에 더없이 좋고 훌륭한 천험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리이스 전역으로 소리없이 퍼져나갔고,  사방에서 엄청난 부를 소유한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하여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서 이 작은 도시는 전체 그리이스 연방 중에서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휴양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제까지 발견된 고대 그리이스의 유물들을 가만히 살펴보다보면........  그 당시 번영을 누리던 이곳의 화려함이나 현지인들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타오르미나는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이상향으로 꿈꾸던 지상낙원이었으며........  가히 작은 천국이었으리라........

 

 

 

 

 

 

 

 

 

 

 

 

 

 

 

 

 

 

 

 

 

 

 

 

 

 

 

 

 

타오르미나 그리이스 극장 여름 음악축제.  오페라 공연 장면.

 

 

 

 

 

 

 

 

    '테아트로 그레코(Teatro Creco)' 라고 적혀있는 안내표지판을 따라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그리이스 극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반원형 극장의 관객석 위쪽의 너른 마당을 올라가면 '빌라 코무나일' 또는 '트래블리언 가든'이라 불리는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있는 공공 정원이 있다.  나 라면 차라리 하늘 정원이라 부르겠다.

  이 정원에서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검푸른 이오니아 해와 낙소스만의 끝이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있는 해안선 풍경은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않을 참으로 멋진 그림 같은 풍경이다.  또한 고개를 돌리면 허물어진 그리이스 극장 너머로 하얀 눈에 덮인 에트나 화산이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풍경에도 품격이 있다면 지금 이곳에서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고 있는 이 풍경이 아닐까 싶다.

  타우루스 언덕이라 부르는 좁은 바위벼랑 사이에 마을을 건설한 것도 시기할 따름이건만,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반원형의 거대한 극장을 세운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쉽게 되지를 않는다.  이런 불편한 생활터전 위에다 기어코 극장을 세워야만 했을까?

  물론 공공 토론과 회의의 장소로도 쓰였겠지만,  의식주 해결만으로도 벅찼을 고대시대에 이 극장에서는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또 어떤 연극을 공연했었을까?

  객석 높은곳에 앉아보면......  등 뒤로는 검푸른 이오니아 해가 끝없이 펼쳐져있고,  앞쪽 무대 뒤로는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에트나 산이 마치 무대의 배경인양 장엄하게 우뚝 서 있다.  그 위에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르고,  무대 주위로 많은 횃불을 밝혀놓고 펼쳐지는 연극이며 아련한 하아프 선률에 따라 흘러 나오는 호머의 오딧세이 모험이야기가  시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콘서트가 아니었을까?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시를 상상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어떤 거룩하고 신성한 황홀경에 빠져드는 심정이 된다.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어떤 방법으로, 왜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여기 이 가파른 산자락에 극장을 세워야만 했을까?

  기원전 3~4 세기에 지어졌으리라 추정되는 반원형 형태의 그리이스 극장은 관객석 끝까지 직경이  약 106미터에 이르며, 35 미터의 반원형 무대를 갖추고 약 10.000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노천 극장이었다.

  오랜 세월로 인하여 페허의 모습으로 변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무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형의 모습을 아직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멋지고 귀한 인류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 용도에 있어서는 해마다 콘서트와 오페라 무대가 펼쳐지고 있으니.....  여전히 번듯하게 제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애초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설계했고 건설했던 극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 끝에 승리한 로마인들은 이 극장을 로마식 건축으로 수정 보완을 감행한 것이다.  뿌리는 ㄱ대 그리이스 극장이었지만  남아있는 형태는 다분히 로마식 극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극장의 중요성은 훗날 카이사르(시저) 암살 후, 로마제국은 통치권을 두고 벌어진 품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쟁후에 다시 한번 대대적인 추가 보완공사를 벌이게 만들었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로마인들을 자신의 절대적 권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이 극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거대한 극장에서 펼쳐지는 검투사들과 맹수들과의 싸움이나 검투사 끼리의 목숨을 건 결투가 모두 통치자 옥타비아누스의 배려 속에서 벌어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매료되고 바져들었던 것이다.

  이 참혹하고 처절한 검투 경기가 벌어지는 경기를 '베나티오네스(Venationes)'라고 불렀다.

  타오르미나의 이 가파른 언덕 위 극장에서 베나티오네스(검투 경기)가 벌어진 것이다.  주변의 아주 먼곳으로 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기를 관람하고 열광하면 옥타비아누스 황제의 이름을 외쳤다.

  공공 정원 아래쪽으로 만든 커다란 동굴(비공개 지역)과 지하의 수많은 공간에서 노래하는 악사와 연극배우 대신에,  검투사들과 무서운 맹수들이 한판 대결을 준비했던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유물 중에 물을 들여오는 수도관 시설과 방수 시설을 위한 것들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만들었었다.  왜냐하면 '베타티오네스'에는  검투 경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콜로세움에서 보듯이 실제로 극장에 물을 끌어들여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실제 크기의 함선을 가져다가 포에니 전쟁이나 고대 페르시아 전쟁의 해상 전투장면을 재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요즘 쓰는 속된 표현으로........ '정말 미친 무대'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야말로 '팍스 로마나' 다운 짓이 아니었을까?  하여 타오르미나의 그리이스 극장에서도 그런 공연이 가능했을까가 대두되었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는 '절대 불가능' 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어 진다.  이 높은 산꼳때기 극장 무대에 바닷물을 퍼다 날라서 수상 무대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의 과학 시설과 장비로도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이스 극장을 나서면 타오르미나를 제대로 보기 위하여 유명한 움베르토 거리로 걸어들어가야만 하는데.....  불과 200 미터 남짓한 음베르토 거리를 후다닥 둘러보는 것으로 타오르미나 여행을 마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울것만 같아서,  움베르토 거리 아랫쪽의 바파른 비탈에 겨우 달라붙어 있는 느낌의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고 계단을 내려선다.

 

 

 

 

 

 

 

 

 

 

 

 

 

 

 

 

 

 

 

 

 

 

 

 

 

 

 

 

 

 

 

 

 

 

 

 

 

 

  이국적인 느낌이 확 풍겨온다.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풍경이지만 그래도 어딘가는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것은 왜일까?

  아랍 문화권을 여행하다보면 올드 시티 메디나의 끝없이 갈라지고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헤매던 기억만큼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을 절실하게 느껴지게하는 그 이상의 풍경은 없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같은 좁은 골목길이지만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이국적인 느낌으로 벅차게 다가오는 이 풍경들을 달리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같은 골목길이지만 너무나도 확연하게 다른 이 느낌은 물론 우리나라 골목길 풍경과도 너무나 다른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세상 어디의 골목길이든지,  골목길은 모두가 수많은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있고 아스라한 추억들이 수놓아져 있고  또한 무척이나 정감어리고 아름답다.

  그곳에 실질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 의해서 필요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생겨났기에 아름다우며,  크게 인위적 인공미가 가미되지 않은 소시민들의 작은 정성과 손질과 꾸밈으로 해서 생겨났기에 더 소중함으로 다가온다.

  타오르미나 사람들은 좁은 성채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다보니 좁고 가파른 계단식 골목길을 사방으로 빼곡히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기에 사람에 직결되는 이 소중한 계단식 골목길에 '살리타 카스텔로(Salita Castello)' 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역사적인 유적지나 도시를 방문하게되면 '시간이 멈춘 도시' 라는 등등의 표현들을 즐겨한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익히 잘알고 있다.  수억만년의 시간속에서 인간이 지금의 존재로 등장한 것은 불과 수천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즐거운 여행지에선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지금 타오르미나에서 난 그 순간을 좀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졌다.  찰라처럼 짧을지도 모르는 내 인생이지만,  나는 내 인생의 상당부분 시간을 여기 타오르미나에서 이대로 흘려보내 버리게 된다해도 전혀 아깝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라고.........  나는 이런 순간이.......  이런 여행이 마냥 즐겁고 좋다.

 

 

 

 

 

 

 

 

 

 

 

 

 

 

 

(4월 광장)은 타오르미나의 뜨거운 심장이다.

  

 

 

 

 

 

  어찌나 따사롭고 눈부신 햇쌀이 넘쳐나도록 한없이 쏟아져내리는지 숨이막혀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지중해의 모든 햇빛을 한 군데로 모아서  그날은 온통 타오르미나의 4월 광장에만 쏟아지는줄 알았다.

  탁트인 앞쪽으론 이오니아해의 검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있고,  우측 뒷편으론 눈 덮인 에트나 화산이 우뚝 솟아있다.  어디 그뿐인가?  좌측으론 허물어진 그리이스 극장이 건너다 보이고 발 아래로 해안선이 끝없이 폎쳐저있는.......  이 세상에 이만한 풍경이 어디 흔하겠는가?

  모자이크식 대리석으로 품위마져 느껴지도록 바닦이 꾸며진 이 광장은 타오르미나의 진정한 심장부이자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의 뷰 포인트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6개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나는 이 4월 광장을 떠올리면 기슴이 뜨거워지고 숙연해 진다.

  비교하여,  그제 어제 오늘 TV 화면마다 등장하는 대한민국의 당면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상당한 수치심과 함께 쪽팔림을 떨쳐낼 수가 없다.

  지금 TV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초등학교 바른생활 시간에 무엇을 배웠을까?' '정답은 이미 모두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와 있었는데'........  한심하고.......  막막하기만 하고..........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타오르미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광장의 실제 이름은 광장 한 켠에 서 있는 교회의 이름에서 따서 'Sant' Agostino' 였으며, 1448년에 완공된 유구한 역사가 서려있는 광장이었다.  어찌나 아름다운 공간으로 완성되었는지 19세기 이후에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이곳을 '시칠리아 최고의 아주 우아한  거실'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이 광장의 이름은 1860년 4월 9일에 이르러서 '4월 광장(Piazza-IX-Aprile)'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1860년 4월 9일에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1860년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은 오매불망 한 사람의 구국영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쥬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유럽 열강들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국가로서의 존립자체를 상실한 지경이었다.  이탈리아의 명맥을 이어내려오던 사르데냐 왕국 마저도 이들 열강의 시녀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이 암울한 시기에 등장한 가리발디는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한 독립운동)'을 주창했다.  사분오열되어 깊은 수렁에만 빠져있던 이탈리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르봉 왕가를 비롯한 침략 열강들의 가리발디에 대한 경계심에 이어 음모와 심지어 신변상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폴리에 머물면서 '이탈리아여 깨어나라. 하나로 뭉치자'고 외치던 가리발디에게 점차 서서히 위험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에선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먼 시칠리아로 달아나 우선 안전을 기해야 한다고 권하기 시작했다.

  이때,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다.

  시칠리아는 가리발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반듯이 시칠리아로 올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무장 혁명을 통한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을 시작할 것이라 믿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가 시칠리아에게 부여한 하나의 거대한 숙명이라고 시칠리아인들은 믿었다.(이 부분이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불가사의함의 의미가 바로 이 '4월 광장'의 이름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1860년 4월 9일.

  타오르미나의 두오모(대성당)에서 예배가 마쳐가는 즈음에 성당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가리발디가 마르살라에 도착했다.'

  나폴리에서 신변의 위협에 처했던 가리발디가 위험을 무릎쓰고 나폴리를 벗어나 메시나 해협을 건너서 마침내 시칠리아 북쪽의 소도시 마르살라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제부터 가리발디의 안전과 무장독립 투쟁은 오로지 시칠리아인들의 몫이 된 것이다.  모여있던 타오르미나 사람들은 일제히 광장으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러댔다.  타오르미나의 미래와 시칠리아인의 자부심과 이탈리아의 독립운동에 하나가 되어서 과감히 뛰어들기로 이미 작정했던 터였기 때문에 울려퍼지는 함성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날을 기념하고자 광장의 이름을 '4월 광장'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사태는 모두가 헛소문이었다.

  가리발디는 아직 나폴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엄청난 위험 앞에서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한달 뒤,  5월 9일 에서야  가리발디는 마르살라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시칠리아인들의 간절한 바램대로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무장 혁명을 시작하였고,  삽시간에 시칠리아 전체를 통일하고 메시나를 건너 오래지 않아 나폴리까지 점령하게 된다.  승리를 거듭하며 북상한 끝에 로마에 도착한 가리발디는 북쪽에서부터 남하한 몰락한 사르데냐 왕국의 혈통을 가진 샤르마뉼 4세에게 자신이 점령한 영토와 군대를 받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이탈리아 통일왕국으로 건국된 것이다.

  실제로 가리발디가 시칠리아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 이지만,  그것이 헛소문에서 시작되었건 말건.........  타오르미나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헌신은 분명 4월 9일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간직한 진정한 역사인 것이다.  하여 그들은 이 광장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영원히 '1860년 4월 9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결의한 날' 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자긍심인 것이다.

  지금 그곳엔 아름다움과 멋드러진 낭만이 가득 차고도 넘쳐 흐르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 청산'을 부르짖으면서......  정권이 바뀌면 정통성도 보는 시각도 확 바뀌고 달라져야만 하는 부끄러운 역사관이 얼마나 무지하고 수치스러운 일인지를 저들은 모른다.  존엄한 역사에 지연과 학연, 종교, 개인적 편견과 가치관이 끼어드는........  천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한심한 식견을 중시하는 천박한 이 시대의 대한민국 일부 지식인들의 처사에 부아가 치밀고 구역질이 날 뿐이다.  우물 안에서 최소한의 제 영역을 먼저 확보하려고 혈안인 그들에겐 더 너른 세상도 어떤 비젼도 더 이상 필요없어 보인다.

  저 정도의 부류들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이 순간만은 '참으로 쪽 팔린다' '존심 상한다' 하지만,  이마져도 저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요즘 귀신은 뭐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저런것들 안 잡아 먹고.......'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도 (시칠리아 여행) 까지는 엄두를 못내거나  빼먹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인게 현실이다.

  근자에 들어서 새롭게 각광받는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과 한세기 반 전에만 해도 시칠리아가 어디에 붙었는지,  또는 이탈리아 영토인지 스페인 영토인지 아니면 프랑스 영토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분했다.

  시칠리아는 절반인 50% 정도는 이탈리아를 닮았고  30% 정도는 영락없는 그리이스 이며,  나머지 20% 정도는 스페인을 닮지 않았을까 라고 나는 생각하고있다.

 

  시칠리아에 왔으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선호하는 여행지가  아그리젠토 아니면 타오르미나 이다.

  타오르미나에 와서는 가장 먼저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그리이스 극장을 향한다.

  나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적이나 고대 건축에 관심이 깊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극장 자체보다는 오히려 주변 환경에 눈길을 빼앗긴다고 하겠다.  벼랑 아래로 검푸른 이오니아 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 하얗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에트나 활화산이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거기 까지다.  이 정도면 어느정도 타오르미나에서 꼭 보아야 할것은 대충 다보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여기에 더할것이 있다면 쇼핑이다.  이제는 어느정도 중저가 브랜드들도 많이 들어서 있지만,  파리나 뉴욕이나 런던에 있는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는 모두 입점해 있다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 작은 마을에.......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이 자자한 움베르토 거리를 오가면서 쇼핑 삼매경에 빠져보려고 부러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있을 정도다.

  그렇게 해서 길이가 겨우 200 미터 남짓한 움베르토 거리를 왕복하면서 쇼핑을 끝냈다면.......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 겨울철에 바닷가 이솔라 벨라에 다녀오지 않을거라면 타오르미나에서는 더 할일이 없다고 판단들을 하고 서둘러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거의가 그렇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여행이란 눈과 귀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에 담아가고 싶어질때에서야 비로소 당신은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고대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지친 현대인들에 기꺼이 휴식을 내어주는 작은 천국이 바로 타오르미나> 라고 하겠다.

 

  '나의 시선은 하얗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에트나 화산을 지나  긴 산악지대를 흘러내려서 암벽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도로에서 멈춘다.  그 도로의 끝은 메시나에서 이오니아 바다 때문에 끝이 날 것이다.  시선을 돌려 바윗덩어리 암벽을 따라 내려가면  칼라브리아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해안선을 만나 볼 수가 있다.  그 너머에 카타니아와 시라큐사가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을 감시하는 작은 구름조각들이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점차 어두우어지는 그림자 위로 찬연하게 피어나는 붉은 광선들의 축제를 바라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는것이 좋을 듯 싶다.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겠으나  낯선 이방인에게는 그 벅찬 감동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황홀할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는지는.........   나의 넋은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말 조차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  피안재.

 

  괴테도 모파상도  알렉산더 뒤마도 모두가 나와 같은 벅찬 감동으로 충격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이미 천 년 동안 살았던것 같은 느낌을 받게될 것입니다.' 라는 DH 로렌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대 그리이스라는 국가는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온통 바위투성이뿐인 아주 험준한 산악국가였다.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리적인 한계성을 돌파하기 위하여 바다로 나선것이다.  거친 바다를 헤치며 정복에 나선 그들은 그제서야 해안가 언덕에 정착하게되었으며, 도시 국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리이스 연맹'이라는 명실상부한 위대한 고대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그들은 찬란한 문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유럽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은 이 세상 어디에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접근성만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면 무조건 터를 닦아 광장을 만들었다.  해안가이면 방파제를 만들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했고,  산 정상이라해도 성벽을 쌓아 도시를 건설했다.

  터만 생기면 광장을 만들었고,  광장이 생겨나면 신진을 짓고 원형 극장을 만들고 분수대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이고 사방으로 조각상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해도해도 너무한것이 참으로 불가사의한 대역사를 너무도 많이 벌려놓았다.

 

  '짝퉁 그리이스'를 표방한 로마인들도 처음에는 고스란히 그리이스를 따라 하다가,  제국으로 성장하고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나름 새로와지려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용맹한 로마의 군인들은 원정을 떠나면 가장 먼저 길(도로)을 만들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모두 로마 차지' 라는 자부심과 원대한 포부가 갖춰졌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사람이 생활하기 좋은 터전' 이라는 개념은 사치이자 낭비였다.  그들은 교통상 중요한 길목이거나 군대가 주둔하면서 방어하기에 용이한 전략적인 장소에 요새를 건설했다.  군사적 목적이 최우선 이었다.  하여 험준한 산언덕이나 바위 벼랑을 등지거나  벌판을 굽어 내려보는 산등성이를 우선 선택했다.  이런 군사요새란 달리 말하면 보편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 시장경제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면서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기에는 아주아주 부적절한 땅이란 뜻이다.

  하지만 로마의 군대는 달랐다.

  적들로 부터 방어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이면 무조건 수용했다.  목책을 두루고 막사를 지었다.  시간이 지나 그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거점확보가 되면........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 쌓인 성채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도로를 확충하고  다리를 놓고 수도교를 놓아 멀리서도 끊이질 않는 생활용수를 확보했다.  생채의 중심에 커다란 광장을 만들고,  광장의 한쪽에 거다란 성당(두오모)을 건설했다.  중심에 휴식처이자 생활용수를 공급해주는 분수대도 반듯이 생겨났다. 그리고나서 광장의 반대편에 시장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금을 받치는 사람들에겐 항상 성문이 열렸고,  그들은 교회와 시장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민족들이나 마적떼가 나타나면 성 안으로 대피했으며,  로마군은 이들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다.

  이런 행위들이........  이런 도시 건설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지중해를 벗어나 소아시아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과 북쪽 브리테니아 까지 퍼져나간 것이다.

  용맹한 전사이기 이전에 로마 군인들은 의사이며 지질학자이며 천문학자요,  토목 기사이며 건축가였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문제를 스스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만능인들의 집합체였다.  위대한 로마는 그들에게서 모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곧 시칠리아 와인에 대해서 거론하게 되겠지만, 로마의 군인들은 1인당 하루에 약 3리터씩의 와인을 소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의 술기운에 모든 일이 가능했을지도.........  백인대(100명의 군인 집단)가 하루에 20km씩 2개월을 진군한다고 치자.  매일 저녁 그들의 숙박지에 300리터의 와인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목적지에 닿으려면 약 1만8천 리터의 와인이 필요해진다는 말이다.  요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아주아주 커다란 탱크로리(유조차)가 비슷한 용량일 것이다.  군인들은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들고 진군한다.  그들에게 막사와 식량을 조달해 주는 보급부대는 따로있다.  주로 노예와 하인들이 담당한다.  그들도 군인들과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지금처럼 보관 용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항아리를 마차에 싣고 움직이거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와인을 담아 수송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와인은 끊임없이 조달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술기운에 승승장구 했다.

  이쯤되자 토탈메이커인 그들에게서 한가지 기발한 묘안이 떠올랐다.

  로마 군대가 진군하는 뒤를 따르는 보급 마차에는  포도나무 묘목을 가득실은 수레가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군인들은 진지를 구축하고 나면 주변의 언덕에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허구헌날 비가 내라고 일조량이 절대 부족한 영국에서만 시도는 했으나 실패하였고,  로마가 점령한 모든 영토에 포도나무가 심어졌다.  와인 자급자족을 시작한 것이다.  로마와 비잔틴이 몰락하고 유럽에 봉건 영주 시대가 벌어졌을 때,  흔히 유럽의 영주란........  로마군대가 건설한 성채도시를 하나 둘쯤 차지하고 나서 주변의 너른 포도 농장을 소유한 사람으로 본다해도 별로 틀린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이들 영주들의 가문이 추구하는 취향과 토질과 일조량에 따라 유럽의 다양한 와인이 생겨난 것이기도 하고........

 

  여기 타오르미나가 딱 그짝인것이다.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도시가 생겨나고  극장이 생겨났다.(신전은 모두 허물어져 사라졌지만)

  로마인과 비잔틴인들에 의해서 많은 교회가 들어섰고 더욱 커다란 도시로 발전했다.  물론 포도나무도 심겨졌고 나름 품질이 우수한 와인이 타오르미나에서 생산된다.

  이슬람 세력(아랍인)에 의해서 도시는 초토화 되었다.  타오르미나라는 아름다운 휴양도시를 아예 싹쓸어버린 이슬람인들은 마을에서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바위산 꼭대기에 (사라센 성)을 쌓고 기독교인들의 저항을 굴복시켜나갔다.  그러자 그들 이슬람 사람들에게 빌붙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타오르미나 보다 한참이나 높은 사라센 성 주위로 몰려들어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바위산 꼭대기에 병풍처럼 늘어선 마을들은 이때 생겨난 것이다.

  엄연히 그곳들은 다른 마을이다.  타오르미나는 염격하게 움베르토 거리를 중심으로 들어서 있는 마을에 국한된다.

  역사는 이쯤 되었으면 어느 정도 되었다 치고..........

 '4월 광장'에 서서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면........  타오르미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대부분 한 자리에서 가깝게 바라다 볼 수 있다.

  북쪽 언저리의 '그리이스 극장'과 까마득한 하늘쪽의 '사라센 성'과 남서쪽의 '에트나 화산'만은 여기서도 멀리 바라다 볼 수 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가장 먼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두오모'와 '분수대'일 것이다.

 

 

 

 

 

 

 

 

 

 

 

 

 

 

 

 

  '두오모 분수대'<지도 15>는 대성당 앞에 놓여져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본래는,  4개의 기둥 위에 물줄기를 내뿜는 海馬(머리는 말. 꼬리는 물고기)가 있다해서 '네 기둥 분수(quattro-fontane)'라는 이름을 본래 가지고 있다.

이 분수는 스페인이 통치하던 식민 시기인 1635년 행정관의 요청에 의해서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 졌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이 분수를 바라보자면 흡사 우리나라식으로 연꼿을 형상화시킨 분수가 아닐까 싶어지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분수대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관을 쓴 (켄타우로스)가 한손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을,  다른 한 손엔 지구를 들고있는 귀여운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당시의 스페인은 '절대적인 카톨릭 국가'였음에도 이렇게 그리이스 신화가 담겨있는 귀엽고도 아름다운 분수대를 만들다니.......  자못 신기할 따름이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몸체는 말(馬)이며 머리 부분에 사람의 상체가 붙어있는 형상' 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분명 '몬스터(괴물)' 이겠으나,  신화에서는 괴물로 보지않고 인간과 다른 엄연한 '하나의 지성체'로 그려지고 있다.  말 형상의 몸체는 왕성하고도 활발한 활동력을,  사람 형상의 상체는 '지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켄타우로스는 불행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비운의 존재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올림푸스 신전에서 제우스가 주관하는 파티가 열렸는데,  인간의 대표로  익시온이 초대된다.

  그런데 아뿔싸.......  인간인 익시온이 그만 첫눈에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 여신에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이 낌새를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가 그만 눈치를 채고 만 것이다.  괴씸하게 생각한 제우스는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당겨서 헤라로 둔갑시킨 다음 익시온의 침실로 들여 보낸다.  가엽은 익시온은 그만........ 헛것인지 꿈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덥썩...........  헤라를(구름을)  범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9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지나서.........  구름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켄타우로스 이다.

 

  거룩한 성범죄(?)로 익시온은 지옥의 구렁텅이로 내던져지고.........  켄타우로스는 훗날 헤라클레스와 마주치게 된다.  켄타우로스의 몸체인 말(馬)이 고대나 현재나 '왕성한 성적 활력'을 은근히 상징하고 있어서 켄타우로스 역시 여자 문제를 숱하게 야기 시킨다.  하긴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익시온이 인간의 몸으로 구름(헤라 여신)을 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졌으니........  혹,  그 이야기를 듣고 헤라가 익시온을 몰래 받아들였다면.......  올림푸스 신전에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났겠지만 서도........  (불륜은 인간사에만 있는것 아닌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성범죄가 성립?)

 

 

 

  '두오모(Cathedral of Taormina)'<사진 14번>는 타오르미나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공공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비잔틴의 영토이었던, 노르만 왕국의 소유였건, 아니면 스페인과 프랑스의 영토였건, 이탈리아 통일왕국이 수립된 후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던건 간에,  이 백여년 간의 이슬람 통치를 빼고는 시칠리아 전체가 항상 기독교 왕국에 속했던 것이다.  타오르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슬람 세력을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낸 13 세기경에 타오르미나의 현재 위치에 처음으로 교회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고 볼품없는 교회였다.

  14 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성 니콜라스(St. Nicholas)'에 대한 추모 열풍이 불어닥쳤다.  당시 유럽은 페스트(흑사병) 이라는 대재앙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발병해 실크로드 중계무역선을 통해 소아시아를 거쳐서 전파된 흑사병은 지중해의 시칠리아를 기점으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벗어나거나 떨쳐낼 수 없는 가혹한 대재앙이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흑사병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치명적인 참상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신에게 구원을 간절히 요청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교회로 달려 갔다.  초대교회대부터 이미 사람들은 신에게 간절하고도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지만  항상 그 기도에 응답이 돌아온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내 앞에서 옆에서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나가는 상황 앞에서 그들은 새로운 기도의 대상을 찾았다.  그 처음 대상이 (성모 마리아)였다.  한없이 자비로운 어머니의 손길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생명의 불꽃을 꼭 지켜주리라 믿고 기도했다.  이 당시부터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새롭게 재조명 되면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대부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 되었다.  파리의 노틀담 사원에서 보듯이 유럽 전역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마구마구 드어선 것도 아마 이 시기부터 였을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칠리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마구 쓰러져 가는 상황이 되자.......  이젠 성모 마리아 한명으로는 부족하다는 믿음이 어디로부터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무한한 자비로움 보다도, 더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도의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성 니콜라스(St. Nicholas)'인 것이다.

 

  왜?   이 참혹한 상황에서 힘겹게 찾아낸 기도의 대상이  (니콜라스 성인) 이었을까?

  아주 쉽고 간단 명료하게 설명을 하자면........  그분의 이름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세인트 니콜라스(Saint Nicholas)'를 빠르게 자꾸만 반복하다보면  영어식 발음이 변형되면서, 익히 우리가 잘 알고있는 어떤 이름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인물이 맞을 것이다.  그 인물의 본명이 (성 니콜라스)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것이다.

  페스트라는 대재앙 앞에서 처음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분의 자상한 배려와 보살핌이 너무도 간절했던 것이다.  남몰래 굴뚝을 타고 넘어다니면서라도 아픈자 굶주린자 소외된자들을 어떤 상황이나 신분이나 가진 정도나 심지어 국가나 종교까지도 따지지 않으면서 구원의 손길을 내주시던 분이 아니셨던가?  그 분이라면 이 간절한 기도에 꼭 응답을 해주실것이라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이런 열망은 페스트의 확산과 함께 널리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생동안 오로지 약자와 병자와 소외된 자를 구원하고자 앞장 섰기에 훗날 성인의 반열(Saint)에 오른 니콜라스였지만,  그 분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항상 뒤따른다.  그리고 딱 한 번의 예외로는 주교의 신분으로 다른 성직자를 죽을 정도까지 흠씬나게 두둘겨 팬 전설같은 일화도 있다.(아멘)

 

  타오르미나에도 흑사병(페스트)이 휩쓸고 지나갔다.  아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수백년간이나 주변에 항상 머물면서 사람들을 하나 둘씩 쓰러트렸다.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저주였다.  인간에게 내리시는 신의 진노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간절하게 교회(기도)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은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교회를 더 크게(신께서 기뻐하실 정도로) 다시 짓기 시작했다.  '타오르미나 대성당(Cathedral of Taormina)'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으며  '성 니콜라스 디 바리(San Nicholas di Bari)' 에게 헌정 되었다.  여기에서의 '바리(Bari)는 이탈리아 본토의 남쪽에 있는 이오니아해를 통해서 발칸반도와 바라보고 있는 남부 도시를 말한다.  현재 '성 니콜라스'의 유해가 이곳 교회에 안장되어 있다.  하여 이탈리아 사람들은  '성 니콜라스'를 부를 때마다 항상 (바리의 성 니콜라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를 따져본다면 터키 사람들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성 니콜라스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다.  더더욱 시칠리아 사람도 결코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터키 사람이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스칸나비아나 노르웨이 숲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따뜻한 터키 남부 사람이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St. Nicholas)'는 AD. 270년 경에 터키 남부의 고대도시 Patara 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식민지였지만 엄연한 터키 사람이었으며, 안틸랴와 페티에가 있는 터키 남부 해안의 리카인 지역 사람이다.  부유한 집안의 사람으로 일찍 부모를 여위자 가진 재산을 모두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역시 고대도시 칼레 인근의  현존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 성지인 '미라(Myra)'로 거처를 옮기고 기독교 신앙(그리이스 정교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사제가 되었다.  '미라'는 사도행전에도 로마로 압송하던 사도 바울이 거친 파도를 피해 잠시 정박하였으며, 이때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기록되어있기도 한 곳이다.  니콜라스는 이미 사제가 되었으나 늘 주변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느라 그 자신과 주변인들은 항상 매우 궁핍하게 살아갔다.

  한 마을에 나이가 찬 딸을 셋이나 둔 집이 있었는데,  너무나 가난하여 결혼을 시킬 형편이 되지 못하자 결국 딸들을 집에 가두어 놓았다가 머지않아 사창가에 팔아버리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성인은 주변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딱한 사정을 전하고 성금을 모았다.  딸들의 집이 굳게 잠겨있자 성인은 굴뚝을 타고 몰래 집안으로 들어갔다. 딸들 앞에 금화가 든 주머니 세개를 내어놓고는 사라졌다.  딸들은 각자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이 일화가 후대에 전하여 지면서 '산타할아버지는 굴뚝타기의 명인'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미라(Myra)'는 초대 교회의 성지로 대성당이 있고 주교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런 미라 대성당에 주교가 사망했다.  교회는 회의를 열고 후임 주교를 물색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신부가 기도중에 '내일 아침 교회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제를 주교로 삼으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하여 모인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 여겨 뜬눈으로 아침을 기다렸다.

  마침내 아침이 되어 삐걱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성당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그만.......  아뿔싸........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은 빼먹기가 일쑤이며,  사제의 처지이면서도 남루한 행색으로 저자거리의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느라고 늘 바쁘고 온갖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항상 뒤따라다니는.......  대표자 회의에서도 죽어도 주교가 되면 안될 사람이라고 콕 찍어서 미리 거명했던 바로 그 사람.......... 니콜라스 였던 것이다.

  결국 니콜라스는 미라 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신의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주교 니콜라스는 더없이 훌륭했다.  사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에 힘썼으며 새롭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로 미라 교회는 넘쳐났다.  기행에 가까운 그의 봉사활동도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로마황제의 박해로 감옥에 갇혔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 따라 해방되는 기연을 가지기도 했다.

  이때까지의 기독교는 그야말로 '초대교회'라 분명하게 구분짓고 싶은.........  예수의 실제 활동과 사도들의 활동과 기독교적인 관습과 전통이 순수한 상태로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던 약 300 여년의 시기였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 편승한 수도 로마에 가까이 있던 기독교 사제들의 기득권(?) 행사로 (로마 카톨릭)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에서 파생되어 나온 기독교는 그리이스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였다.  로마 제국의 정신세계를 소수의 로마 카톨릭이 차지하고 지배학 된 것이다.  다수의 그리이스 정교회는 이런 로마 카톨릭의 처사에 분노하였다.

  신의 뜻이었을까?

  서로마는 멸망하여 로마 카톨릭은 고립되었고,  새로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그리이스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흩어지고 갈라지고 산만한 기독교를 체제화 하기 위하여 여러차례의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제 1차 종교회의가 터키 북부의 니케아(이즈닉)에서 열렸다.  우리가 흔히 '니케아 종교회의'라 부른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쟁점은 (삼위일체론)이었다.  하나님과 성령은 신성한 것인데......  여기에 예수라는 존재는 과연 신성한 것인지 신성하지 않은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미라 교회의 대표로 참석한 니콜라스 주교는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가 모두 신성하다고 믿는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서 아리우스파의 한 성직자가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난 피조물이므로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분노한 니콜라스 주교는 공식 회의석상임에도 뛰쳐나가서 죽기 직전까지 마구 두둘겨 팼다.  그로서는 신성 모독을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회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공개회의 였던 것이다. 니콜라스 주교는 곧바로 근위병들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감옥에 갇혔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그리스 정교회 최고회의 최종 결론'에 따라 '삼위 일체론을 정설'로 확정하였고,  이를 비잔틴 황제의 칙령으로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되었다.  '피조물인 예수'를 자장하던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이쯤되었으니......  이제 니콜라스 주교의 석방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날밤에 니콜라스 주교는 감옥에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예수는 그에게 성경을 주었으며,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인물화에 나오는 어깨 띠 같은 복장.  정교회 성직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통 복장)을 어깨에 걸쳐 주었다.

  다음날 회의에 참석한 사제들과 근위병들이 니콜라스 주교를 석방하기 위해 감옥 문을 열었더니......  평복 차림으로 끌려갔던 그가.......... 오모포리온(오늘날의 전통적인 정교회 사제복)을 걸치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이것은 니콜라스 신부에게 따라 붙는 수많은 기적 중의 하나일 뿐이다.

  AD. 343년 경에 니콜라스 대주교가 사망했다.

  그는 '미라 대성당(Cathedral of Myla)'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분명하게 미라 대성당에 있었다.

 

  해마다 12월 6일이 되면 미라에서는 지금도 축제가 벌어진다.  그들은 그 축제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St, Nicholas day  December 6)

  '12월 6일은 성 니콜라스의 날' 이다.  서방 기독교 국가의 크리스마스는 여기에서 생겨났다.

 

 

  니콜라스 대주교를 따라다녔던 많은 기적이 벌어진 이야기들과 약자와 병든자와 소외된자를 끝까지 돌보고자 했던 기행은 그를 마침내 성인(Saint)의 반렬에 오르게 했고,  전 유럽 사회에 전설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결과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경과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느닷없이........  1087년 이탈리아 바리 출신의 상인들에 의해서 '성 니콜라스'의 유해가  이탈리아 남부 이오니하 해변의 항구도시 '바리(Bari)'로 옮겨가고 만 것이다.

  '소정의 기부금을 받고 넘겨주었을까?' '훔쳐 갔을까?'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마르코 유해'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게 점령당한 후,  이슬람에 의해서 훼손당할까봐였다고 말은 하지만........ 분명히 훔쳐서 베네치아까지 가져갔다.

  시라쿠사 출신의 '루치아 성녀(산타루치아)'의 유해는 온갖 수난을 모두 당하고 나서도(훔치고 강탈하고 심지어 유해에 난도질까지) 아직 한곳에 온전하게 모셔지지 못한 상태다.  유해를 잘라서 배분까지 한 신성한 교회들끼리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정당성과  나머지 유해의 지분에 대해서 대립 중이다.  거기에 더해서 잠시 빼앗았다가 다시 빼앗긴 교회들도 여전히 자신들의 소유 지분을 주장하고 있다.  더 쪼개고 나누어 가져서라도 성인의 유해를 보관한 성스럽고 고귀한 교히라고 세상을 향해 떠들어 대고 싶은가 보다.  

  아무래도 성인의 반열에 오르려면 죽어서 남긴 유해까지도 분해되고 나뉘어지고 훔치고 빼앗는 과정에서의 불합리한 경우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성인이 될 수 있는것인가?

  하지만 니콜라스 성인의 유해는 11 세기니까  엄연히 비잔틴 제국 시대에 기독교 국가들 끼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성인의 유해를 사고 팔 지는 않았을 테고........

  하긴 기적을 행한다고 소문이 뒤따르는 성인의 유해는  유럽의 모든 교회와, 도시와, 국가들의 최고이자 최우선의 목표였다.  살 수만 있다면 억만금도 지불하고,  안되면 훔치고,  그것도 안되면 강탈을 수도없이 감행했다.  성인의 성스러운 유해를 위해서라면 교회끼리 다투던,  도시끼리 쌈박질을 벌이던,  아니면 국가끼리 전쟁이라도 불사할 작정들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를 빼어오던 훔쳐오던 돈을 주고 사서라도 가져다가 '수호 성인'으로 저마다 삼았다.  그 수호성인이 자신들의 가정과 도시와 국가와  교회를 지켜준다고 뼛속까지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미 거론되었던 것처럼........  성스러운것은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뿐이다.  기독교 믿음 행위나 제반 모든것이 '삼위일체'에 속해있는 것이다.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성 니콜라스가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된다.  니콜라스 위에서 역사하시는 신의 영역에서 기적이 펼쳐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이런 '수호성인'에 대한 맹신이 너무도 심하게 사방 곳곳에서 넘쳐난다.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자주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신의 절대적인 영역에서 행해지는 어떤 기적이 아니라면........  국가마다 도시마다 거창하게 조성된 수호성인에 대해서나 교회 안에 수북히 쌓여있는 조각상들에 대해서나......  그것이야 말로 유일신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라고......  그게 미신(토테미즘)과 다를바가 무엇이 있나?  그 잡다한 것들에 신성(神聖)을 억지로 부여하려 드는 생각이나 행위가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당신들이 신이라 생각하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야?'

  

 

 

 

 

타오르미나 두오모와 두오모 분수대 옛날 사진.

 

 

 

 

  타오르미나 대성당은 (Sicilian Romanesque - Gothic) 양식이라는 시칠리아만의 매우 독특한 형태 건축물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라틴 십자가 형태의 기반 위에 3개의 본당과 양쪽으로 늘어선 6개의 작은 제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핑크빛 타오르미나 대리석으로 만든 6개의 모 놀리식 기둥은 나뭇잎과 물고기로 장식되어 로마네스크식 나무 천장으로 만들어진 본당의 지붕을 받쳐주고 있는데 16세기의 건축기술치고는 대단히 뛰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흔히 고딕양식의 단점으로, 높은 천장을 위해 육중한 기둥들을 많이 세워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반면에 그만큼 실내가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고딕 양식을 간직한 여기 두오모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건물을 통털어 단 두 개의 작은 채광창만이 설치되었으며,  이 건물의 자랑거리리기도 한 출입문 위로 시라쿠사에서 대리석을 일부러 가져다가 다듬어서 커다란 장미문양의 창문을 내걸었다.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 대부분의 교회 정문인 파사드에는 스테인글라스로 아름답게 꾸며진 아름다운 장미창이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밀라노 두오모.  오르비에토 두오모.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 등등) 

  지금은 로마카톨릭(바티칸)에 소속되어 있지만........  시칠리아 대부분의 교회들이 오랫동안 그리이스 정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들을 포함해 타오르미나의 인구 숫자와 교세 등등의 교회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서, 16세기부터 최근까지도 '타오르미나 대성당(Cathedral of Taormina)'으로 불여왔다가  1980년에 이르러서야 '산 니콜라스 두오모( St. Nicholas Duomo of Taormina)로 교회의 신분이 격상되었다.  대주교가 상주하는 타오르미나의 본당이 된것이다.

  비교적 단촐하게 내부를 치장한 두오모는 핑크빛 대리석들이 내뿜는 어떤 강렬함이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끌기도 한다.  성 제로니모와 성 세바스티안의 사이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등장하는 여러개의 패널화가 놓여있다. 세바스티안은 주로 온몸에 화살이 잔뜩 꽂힌 모습으로 등장하고,  제로니모는 성서 번역가로 주로 책상에 안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가타 수녀와 산타루치아 수녀의 모습도 만날 수 있고,  세례 요한과 성 니콜라스도 만나볼 수 있다.  출입구 우측에서 만나게 되는 아가타 수녀의 조각상은 몹시 인상적이다.  주로 그림으로 접하거나 카타니아 대성닥 담장 안쪽에 나란히 서있는 커다란 아가타 수녀와 산타루치아 수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담고 있다.  웬지 조금은 낯설다.  슬프고 애절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도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이다.  로마에서 만나는 '황홀경에 빠져있는 수녀상'과 함께 가장 크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온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말이다.

 

  타오르미나의 두오모를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과연 교회일까?   관청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피렌체의 베키오 궁전처럼  윗부분의 뾰죽뾰죽 튀어나온것이,  중세의 팔라초(Palazzo.관청)는 통치자들의 집무실이자 때론 생활 궁전이기도 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방어요새이자 성채였던 것이다.  보통의 교회가 아니라 신분이 분명한 두오모의 처지이면서도 지붕의 작은 십자가만 없다면 영락없이 관청 건물로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오모의 주변으로 확실하게 교회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건물들이 여럿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이 없다면......  아마도 4월 광장에서 '두오를 찾아보라' 하면 영락없이 다른 교회를 지목하게 될 것이다.

  타오르미나가 협소하고 물자 조달에도 한계가 있다보니.......  대부분의 도시 공사나 교회가 지어질때면....... 어쩔 수없이 '고대 그리이스 극장'의 석재들을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이슬람이 정복하고는 도시 자체를 페허로 만들었고,  산꼭대기에 사라센 성을 지을 때  가장 많이 석재들을 반출했다고 하니.......  뭔들 제대로 남아나겠는냐고?

 

 

 

 

 

 

 

 

 

 

 

  감히....  타오르미나 최고의 명소라고 외쳐봄직한 풍광이 아닌가?

  여기 발코니에 서면 대성당도 왕궁들과 관청도 전혀 부럽지가 않다.

  어떻게 타오르미나의 중심가인 움베르토 거리(북쪽 메시나 문에서 남쪽 카타니아 문 사이의 성채)를 벗어난 외곽의 4월의 광장 옆으로 가장 좋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이 자리는 당연히 두오모나 팔라초(통치자 관청)이 있어야만 할 자리로 여겨진다.

  타오르미나에서 웨딩 사진촬영지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소이다.

 

 

 

 

 

(성 요셉 성당)

 

 

 

 

 

 

  (Chiesa di San Giuseppe of Taormina)는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요셉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굳이 이 대목에서 세속(육신)의 부친이라는 부연 설명을 해야하는 내 자신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기독교인이라면......  혹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마리아와 요셉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있으리라.

  그렇다면 요셉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타오르미나의 요셉 교회를 찾고나니 잊고지냈던 많은 생각들이 마구 솟아나기 시작한다. 요셉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찾았고,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학생들도 지도했었으니,  나름으로는 일찍부터 성경에 대해서 어느정도 지식은 가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지식이었다.  기존의 교인들로 부터 배웠고  또 그들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것이 올바른 신앙이라 믿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요셉)을 새로운 시선으로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것은 군대를 막 다녀온 24살 때의 일이었다.  더하여 (요셉) 말고도 또 한사람 (가롯 유다)에 대해서 참으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그 시기에 생겼기 때문이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교회에 돌아오니,  신학대학을 막 졸업하고 첫 목회지를 찾아온 초짜(?)  전도사가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학생회 지도교사, 신설된 대학부 선배, 성가대........   교회내에서의 많은 활동을 그 분과 함께 해나가야만 했다.  목회자와 지도교사로 여러가지 행사를 치루어나갔다.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 그분의 하숙집으로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작은 책상 위에 약간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는데...... 그중에서 유독 한권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 니코스 카잔챠키스 지음.  안정효 번역' 이었다.

  책을 빌려서 단숨에 읽어내려 갔는데......  실제로 내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다.  (희랍인 조르바) (영혼의 자서전)도 이어서 읽어보아야만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써 내려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나는 (요셉)과 (유다) 라는 두 사람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의 그 느낌과 기억을 지금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책의 주인과 다음해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9개월 7일을 조금 넘겨서 태어난 아들이 있는데,  우리에겐  어떤 천사의 수태고지도 없었다.  대충봐도 80% 정도는 나를 쏙 빼다박은 다행스런(?) 아들이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숱하게 만나고 발에 차이는 것이 성화(聖畵)다.  그 중에서 유명한 작품도 많이 있고  숫자상으로도 가장 많은 그림이 '그리스도의 세례' 이거나 '수태고지' 일 것이다.

  '수태고지'는  혼인을 앞 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임신 사실을 알려주면서 그 태중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그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더 없이 성스럽고 고귀한 '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   고 하는 사건을 기록화로 남기고자 하는데서 생겨났으며 세상엔 수도 없이 많은 수태고지란 제목의  작품들이 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성스러운 분위기의 은밀한 장소에서 천사와 성모 마리아가 어떤 교감을 나눈다.  감히 누구도 침범 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성스러운 시간적 공간이다.   이 만남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대로다.

  그럼 이 '수태고지가 오로지 마리아에게만 있었을까?'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 풍습에 혼전 순결은 절대적일만큼 대단히 중요했으며,  마리아에게는 이미 약혼한 정혼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요셉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초야를 치루지 않은 신부가 이미 임신을 했다고한다면........  이는 당연히 파혼 사유가 될것이며,  유대 율법을 위반한 것이며,  아마도 쫒겨나거나 돌팔매질을 당할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사히 결혼식을 하였고  당연한듯이 아들을 낳았다.  요셉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아마도 사실은 요셉에게도 이미  '수태고지'가 있었던 것이리라.

  마리아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 천사가 곧바로 요셉에게도 그 사실을 설명하고 이해를 당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사의 고지라 해도 그렇지...........  그게 어디 쉽게 이해되고 허용될 일인가?

  이 당시 요셉이 실제 가졌을 인간으로서의 진진한 고뇌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아주아주 깊이있으면서도 잔잔하게 적어내려 간다.

  요셉에 대한 하일라이트는 아마도......  예수가 구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 광야로 떠나기 직전에 요셉의 목공소에서 벌어진 풍광을 섬세하게 그려내려간 일일 것이다.

  요셉은 열려진 작업장의 창문을 통해서 오늘도 변함없이 들판으로 걸어나가는 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천사의 고지는 분명하게 있었느나  성장 할 수록 자신을 하나도 닮지않은 아들.....  유대 사람들과 함께 마을에 살고있으면서도 전통의 유대 관습을 별로 중요시 하지 않으며 주윗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성인이 된지 한참이나 지났으면서도 결혼은 전혀 생각치도 않는 아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전혀 고심하는 흔적조차 보여주지 않는 아들........  이따금씩 뜬금없이 예비된 자신을 길을 가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기나 하고......  도대체 자신이 더 알지 못하는 비밀은 무엇인가?  아내 마리아는 그런 아들에게 모든것을 순순히 허락하면서도......  요셉이 아들의 삶에 관여하는것은 어떤것도 허락치않는 분위기로 이제까지 평생을 살아왔다.  과연 마리아의 생각과 확신은 무엇일까? 언제까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야만하는 요셉은 스스로에게 오늘도 또 묻는다.  '마리아와 아들을 위해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라고.......

  성서에는 (요셉)에 대하여 별반 부연 설명이 부족하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인간 아버지로서 인간인 아들을 걱정하는 너무도 애잔하리만치 인간적인 요셉의 인간적 부성애에 대해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려나간다.

 

  (가롯 유다)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가장 큰 죄를 지은 영원한 죄인이자 악당이다.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은 범죄자이자 불한당이다.

  과연 그럴까?

  신(구세주)이 무소불위의 전지전능을 이미 갖춘 완전함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유다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적들의 손에 이끌려 고난을 당한 뒤에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뒤에 부활함으로써 참으로 원대한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다.

  이 부활의 사건이 완성되어야만 인류는 구원을 얻게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기독교(카톨릭. 정교회. 개신교)가 탄생한 것이다.  부활 사건이 없다고 하면  기독교는 존재 할 수가 없는 종교이다.  단 유대교나 이슬람교 등은 예수의 부활과 관게없이 존재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미 모든것이 신의 뜻에 따라 구체적으로 스케줄이 다 잡혀있었던 것이다.

  그 부분을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젤롯당(열심당원) 당원이었던 유다는 신비한 힘으로 사람들을 잡아끄는 예수에 대해서 만약 그가 젤롯당원이 된다면 뭇 사람들을 쉽게 끌어들여 무장투쟁으로 로마에 대항하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의 해방이 훨씬 수월하겠다고 판단해 접근을 한다.

  반면에 예수는 서서히 때가 도래하여 머지않아 자신이 고난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는 반듯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할 배신자가 필요하였고,  그 대상으로 유다가 꼭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접근을 허락한다.

  유다를 설득하는 예수는 이스라엘과 인류의 진정하고도 영원한 해방을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그 엄청나고도 어처구니 없는 임무를 미래의 피해당사자가 직접 유다에게 요청한다.  유다로서는 믿기도 힘들뿐더러  그 치욕스러운 못된짓을 당당한 무장투쟁가로서 도저히 자신은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거절한다.  예수는 거듭거듭 부탁을 하고......  유다는 거듭거듭 거절을 한다.  더하여 유다는 이 사단이 훗날 자신에게 어떤 결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되고 몹시 두려워 한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어떻게든 자신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일(행위)을 유다에게 강요하게 된것이고......  마지막에 유다는 어띠되었건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묘하고도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머지 결론이야 성경에 기록된 바 대로 이루어진다.

  과연 가롯 유다는 배신자이며 범죄자일까?

  아니면 부활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게 공헌한 거룩한 희생자일까?

  이런 유다의 인간적인 고뇌가  '최후의 유혹'에는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 명을 더 예로 들라하면 바로 '막달라 마리아' 이다.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가장 이미지가 훼손되고 존재의 가치가 극도로 폄하된 '막달라 마리아'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육신을 통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하게 한 거룩한 모성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했고 헌신했으며 기독교의 탄생에 가장 크게 기여한 숭고한 여성 동반자라 할 수 있겠다.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 시리즈'를 통해서 드러내고 밝혀내고자 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진실한 모습을 책 속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바티칸에 의해서 금서(禁書)로 지정되었으며,  한때 카잔차키스는 숨어 도망다녀야만 했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중세 이후의 교회 대부분이 리틴십자가 형태의 기반 위에다  중앙으로 거대한 공간(예배장소)를 만들고  윗쪽으로 본당과 제단을 만들고 양쪽 옆으로 길게 여러개의 채플을 만드는것이 하나의 원형처럼 여겨졌다.  건물 자체의 지붕은 주로 바실리카 양식이 채택되었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교회들이 본당 위로 거대한 돔을 만들어 얹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나 알프스 인근의 교회들은 여전히 뾰족뾰족 탑이 하늘에 닿을것만 같은 고딕양식을 고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타오르미나의 요셉교회은 전형적인 초기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고 있는 좀 특이한 교회이다.  16세기 요셉교회가 만들어질 당시 치고는 상당히 구식(유행에 뒤떨어진) 스타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외형을 슬쩍 감추고 있는 듯한 시라큐스에서 가져온 하얀 대리석의 작은 파사드를 제외하면  교회는 단순하게 하나의 사과상자 모형이다.  아주 씸플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 단순한 구조 안에다 내부는 바로코 양식을 빌어 화려하게 치장했다.

  타오르미나의 많은 교회 중에서  이 처럼 고딕양식의 분위기를 살짝이라도 갖추고 있는 나름대로 우아한 파사드를 가진 교회는 별로 없다.  더하여 좌우 대칭이 아름답게 빛나는 우아한 대리석 계단과 발코니를 가진 교회로는 타오르미나에서 거의 유일하다.  어디 그 뿐인가.  기품이 넘쳐나는 종탑도 별도의 건물로 보여질만큼 타오르미나에서는 특별한 느김으로 다가오는 교회였다.

  타오르미나라는 협소한 지리적 한계성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코고 높아서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바위벼랑 중턱에서 온 세상에 한껏 드러내는 중세 이후 만연한 흔한 교회의 위상에는 절대적으로 못미치겠지만  나름 커다란 교회들이 갖추는 것들은 모두 갖춘 타오르미나의 유일한 교회가 아닐까 싶다.

  나도 처음에는 이 교회가 '타오르미나 두오모' 인줄로  알았었다.

  처음 타오르미나를 혼자 방문하였을때 당연히 가장 먼저 두오모를 찾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여행에선 두오모가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들이 도시마다 다 다르게 있기 때문이다.  두오모를 살펴보면 그 도시의 분위기와 역사를 느낄 수 있

  메시나 문을 들어서면서 부터 나의 눈길은 두오모를 찾고 있었다.  헌데 도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메시나 문의 바로 오른쪽에 고풍스런 교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얼핏 '이게 타오르미나 두오모구나' 싶었다.  하여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니었다.  두오모의 낌새조차 엿볼수가 없었다.  하도 궁금해서 배낭을 벗고 여행책자를 찾아보니 '성녀 카테리나 교회'였다.  이탈리아에 카테리나 라는 이름의 성녀는 여럿이 있다.  하여 잘 구분을 해야함 한다.  근데 이분은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 였다.  세계사에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후 세운 도시로 전설속의 등대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유명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에 안치된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의 유해에 대한 사건과  이곳에 헌정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로 기억되고 있다.

  아주 약간 실망한 느낌으로 교회를 나와 부랴부랴 200 미터 남짓의 움베르토 거리를 지나 반대쪽의 카타니아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두오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시의 규모나 교세를 따져 마을 규모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의 타오르미나라서 두오모라 불리워지기는 좀 그럴수도 있겠으나  그럼 어디 대성당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추측은 타오르미나의 대성당이 두오모로 격상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를 가나 두오모는 항상 그 도시의 중심에 존재한다.  헌데 타오르미나의 중심 도심 움베르토 거리를 다 지나도록 교회다운 교회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카타니아 문을 나섰다.

  얼씨구?

  교회가 하나 둘이 아니다.  거기다 팔라초와 거대한 건물들이 사방으로 늘어서 있다.

  '이게 뭐야? 움베르토 거리는 그냥 상점과 주거 공간이고  교회와 관청들은 모두 성 밖에 세워졌다는 것야?  그럼 유사시엔?  교회와 관청과 궁전을 다 버리고 몸만 성 안으로 도망치는건가?'  암튼 타오르미나는 좀 엉성해보이는듯한 그런 도시구성이 이루어져 있다.

  두오모 분수대에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당연한듯이 '이곳이 두오모구나'  하고 찾아 들어간 곳이 바로 '성 요셉 교회'였다.  하지만 아니었고.......  삼 세번 하는 심정으로 찍은곳이 진짜 '타오르미나 대성당'인  두오모 였다.

  두오모에 비하자면  한 세기 이상 뒤떨어져 세워진 요셉교회지만 당시의 유행이다시피한 파사드 상부의 스테인글라스로 치장되는 장미창은 없다.  대신 십자가를 든 예수의 조각상이 있고,  그 아래로 중앙에 해골 문양이 놓여있는데,  영락없는 카라비안 해적들의 깃발에 그려진 그 형상의 원형처럼 보인다.  이런 문양은 죽음, 혹은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간간히 기독교 건축물에서 장식으로 쓰여지는 것을 본 적은 있으나,  이곳처럼 교회의 정면 한복판에 번듯하게 달아놓은것은 처음 접하는 광경이다.

  내부의 장식은 바로코 양식을 표방한 바 대로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수의 삶을 표현한 8개의 패널화가 전시되고 있고 요셉과 예수의 프레스코화도 벽과 처장을 장식한다.  요셉의 조각상도 있고.......  5개의 구역으로 나뉜 벽면 전체를 꽃을 모티브로 한  형상과 날개 달린 천사의 형상으로 치장하고자 한 프레임은 방문자에게 어떤 신성함과 근엄함을 동시에 요구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절로 생겨날 정도였다.

 

 

 

 

 

 

 

 

 

 

 

광장의 예쁜 소녀는 부러 설치한 인형 조형물이 아닐까?

 

 

 

 

 

 

 

 

 

 

  혹,  이 예쁜 소녀는  타오르미나 지자체에서 일부러 광장의 장식처럼 내놓은 천사가 아닐까?

  화가 할아버지 앞에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참으로 깜찍하고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광경은 소녁의 몫이 아니라  뒤에서 뿌듯함으로 바라보고 있는 엄마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기웃거리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몫으로 보인다.  소녀의 표정은 어색하다 못해 다소 힘겨운 표정인데 반해,  이를 바라보는 주윗사람들의 표정은 더 없이 유쾌해 보이니 말이다.

  오지랍 넓은 내가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칠리가 없다.

  나는 불쑥 소녀의 시선 앞에 나타나  화가 할아버지의 시선 높이에서 무척이나 놀란 표정으로 잠시 그림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는 외쳤다.

  '화가 할아버지.  지금 겨울왕국에 나오는 공주님을 그리고 계신게 맞나요?'

  순간 주변에서 폭소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소녀의 엄마도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아에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굳었던 소녀의 표정에도 해맑은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맡은바 사명을 다한 군인의 심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녀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포르타 카타니아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엔 나도 기필코 예쁜 우리손녀 태리랑 손잡고 와야지.  나도 저렇게 뒤에 서서 팔짱끼고 서 있고 싶다고......'

 

  아쉬움에 광장 발코니 넘어 이오니아 해를 한번 더 바라보고,  태양이 서산 넘어 기웃거리고 있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도저히 시간상 오늘 올라가보기는 틀렸을것 같은 마음에 산꼭대기 정상의 사라센 성도 한번 올려 쳐다보고는  움베르토 거리를 향한다.

  카타니아 문 남쪽에 하나 더 있는 성벽의 일부였던 '시계탑과 메쪼성문(Torre dell Orologio)' 이나,  아랍인들이 타오르미나를 점령하였을때 통치자의 궁전이자 집무실로 성벽에 이어붙여서 만든 '팔라초 코르바하(Palazzo Corvaja)' 등등을 비롯해 아직 소개해야 할 타오르미나의 명소가 많이 남았음에도........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져서,  혹 훗날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되고 여행기를 또 쓰게된다면  그때 지면을 빌어 보다 세세하게 다시해 볼 생각으로 줄여야만 하겠다.

  물론 오데온을 비롯해 움베르토 거리 중간에 남아있는  유적지나 명소에 대해서는 좀 더 이어나가 볼 생각이다.

  하여.......  이쯤에서 '타오르미나 앞이야기'를 접기로 하고,  곧 '타오르미나 뒷이야기'를 새롭게 이어나가기로 해 본다.

  카타니아 성문 안쪽의 움베르토 거리 주변의 이야기중에서도 '화가의 계단'을 먼저 찾아가보려 한다.

 

 

 

 

 

 

 

 

 

 

 

 

 

 

 

  ----  찾아주시고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