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 순례자들을 지켜주게.
기독교인들과 똑같이 이슬람인들도 지켜주게.
필요한 가치가 있기에 그러는 것이 아니네. 그것이 옳기 때문이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발리안'에게 예루살렘의 왕 '보에몽 4세'는 그렇게 당부한다.
무엇으로 부터 지켜달라는 말인가?
기독교인과 이슬람인 모두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위험(세력)은 무엇인가?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점령하고 약탈한 이슬람 광신자들이 기독교 성지순레자들을 약탈하고 학살하여 (성지 회복)이라는 거룩한 명분하에 생겨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역사책엔 분명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실제..........
십자군 전쟁은 정말로 성전(聖戰)이었을까?
<영화 속 줄거리>
"유럽(프랑스)의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
아이를 사산한 충격으로 자살한 아내 때문에 괴로워하는 '발리안'이 사는 마을에 한무리의 십자군이 나타난다. 이십년 전에 제 1차 십자군 전쟁을 떠나면서 당시 이 마을에 살던 대장장이의 아내를 유혹하여 몰래 정을 통했던 '고프리'가 인생의 후반기를 살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해결하고자 불원천리를 찾아 온 것이다. 발리안은 바로 고프리의 부정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였다.
고프리는 에루살렘 탈환 전쟁에서 숱한 공을 세워 지금은 어엿하게 예루살렘 인근에 자신의 영지를 왕으로 부터 하사받아 '이블린의 영주'가 되었다.
고프리는 발리안에게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한다.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이 이룩해 놓은 부귀를 나눌것을 청한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과 함께 삶의 의미를 잃은 발리안은 고프리의 제의를 거절한다.
고프리가 떠나고 나서 발리안은 아내의 사후 처리에 이복동생의 부정이 있었음을 알아채고는 분노하여 동생을 살해한다.
발리안은 앞서 떠난 고프리를 뒤쫓아간다.
형제를 살해한 죄와, 자살을 하면 심판의 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기곡교 교리에 따라 영원히 지옥을 떠돌 아내의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에루살렘으로 따라가기로 한다. 십자군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최남단 메시나에서 배를 타기 위해 가던 중, 조카(고프리의)의 습격으로 싸워 위기에서는 겨우 벗어날 수 있었으나, 고프리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게된다. 메시나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자신의 삶이 다하였음을 느낀 고프리는 아들 발리안을 기사로 서임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이블린의 영주' 지위를 물려준다.
지중해의 험한 파도에 휩쓸려 배가 난파되고, 사막에서의 모진 고난을 겪은 끝에 마침내 발리안은 예루살렘에 당도한다.
예루살렘의 왕 보드엥4세도 만나고 고프리의 수하들을 만나 물려받은 이블린에 정착한다. 예루살렘 왕 보드엥의 누이이자 '뤼지냥 기'의 아내였던 '시빌라 공주'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탐욕으로 가득찬 레날드가 이슬람 상단을 무차별 공격하자, 마침내 아랍 세력을 하나로 통일한 '살라딘'이 직접 이 전쟁에 등장하게 된다.
24세로 요절하게 되는 '비운의 영웅' 보드엥은 문등병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는 자신의 건강도 아랑곳 않고 밀려오는 살라딘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짖물러 고름투성이의 몸을 말안장에 끈으로 묶고 사막을 가로질러 진격한다.
발리안은 60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항해 돌격을 감행하고, 결국엔 이슬람군의 포로가 된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드엥 왕이 군대를 이끌고 현장에 도착한다. 보드엥과 살라딘은 단독 협상을 벌여 '양측에 득 보다는 모두에게 실이 없는 선택'을 한다.
다시 광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1차 십자군이 성지를 탈환하고나서 거의 일백년 가까이를 기독교와 이슬람은 평화롭게 공존해 왔던 것이다.)
보에몽이 마침내 나병으로 요절했다.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모든것이 오래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후계자가 없었던 보에몽은 조카인 시빌라의 어린 아들을 '보에몽 5세'로 왕으로 세운다. 하지만 이 유약한 어린 아들도 외가집 핏줄을 받아 태어나면서 부터 나병 환자였다. 채 몇달이 지나지 않아 보드엥 5세도 죽고 의부이자 시빌라 공주의 남편인 '뤼지냥 기'가 예루살렘 왕에 등극한다. 영웅심과 탐욕으로 뭉친 새로운 왕인 기는 이슬람과의 전쟁을 자청하여 아랍상단을 습격하여 약탈하는가 하면, 살라딘의 누이동생을 이교도라 하여 살해한다. 아울러 눈에 가시 같은 발리안에게도 암살자를 보낸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기의 십자군은 철저하게 궤멀되고 예루살렘의 왕인 기마저 포로로 잡힌다.
살라딘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온다.
발리안은 남아있는 소수의 기사단과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을 모아서 합심하여 이에 대항한다.
마침내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예루살렘 공방전'이 펼쳐지는데.........
(알림) 이번 '십자군史'에 사용되는 사진 자료는 모두 (NAVER)를 통애 구하여 사용함을 알립니다.
크게 나누어 7차에 걸쳐 벌어진 십자군 전쟁에서 초기 1차.2차.3차의 전쟁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후로 벌어지는 대부분의 전쟁은 모두 그저그런 자질구레한 냄새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 중요한 3차까지의 전쟁에서 주인공은 단 두 사람, 바로 (보드엥 4세)와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유일한 이방인(이교도)일 정도로 기독교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반면 '비운의 영웅' 보드엥은 태어날 때부터 나병(문등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무 이른 16세에 전쟁에 참여해 너무도 혁혁한 성공을 맛보는 바람에 젊은 혈기로 인해 몇번의 실수와 아품을 겪게되지만, 그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의 자질과 성품을 갖추었다. 이슬람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살라딘)을 맞아 당당하게 맞섰던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 역사속의 너무도 젊은 영웅이었다. 살라딘과 보드엥은 서로 적이었지만 상대를 존경했고 상대를 배려했다. 숱한 전설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내려 온다.
하지만 보드엥은 천형과 같은 나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24세에 요절한다. 그가 나병에 걸리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적어도 예루살렘은 100년은 더 기독교의 성지로 빼앗기지 않고 남았을 것이라고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 - 교황 우루바노 2세
History>
10세기 이후 비잔티움은 급격하게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1세기 초 황제 바실리우스 2세 치세(재위 976~1025) 아래서 잠시나마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듯 보이던 비잔틴 제국은 바실리우스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1071년 소아시아의 만지케르트에서 이슬람으로 종교를 개종한 셀주크튀르크와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는 등 제국의 영토는 더욱 축소됐다. 이제 과거 위대한 제국의 위상은 모두 사라지고 없고, 콘스탄티노플 하나를 겨우 차지한 일개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아울러 기독교의 성도(聖都) 예루살렘 역시 수니파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제국 내부적으로도 비잔티움의 황제와 제국 동부의 실세였던 유력 가문들 사이의 알력이 깊어진 탓에 외부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제위 다툼 끝에 1081년 동부 유력 가문들의 후원을 받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재위 1081~1118)가 신임 황제가 됐으나 제국을 괴롭히고 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알렉시우스는 나름 명석한 두뇌와 주변 정세의 흐름을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가진 정치가였다.
알렉시우스는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나서 제국의 재건을 이룩하자면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로마의 교황을 끌어들이기로 계획을 짰다. 하여 알렉시우스는 피렌체에서 열리는 성직자 회의에 정식 비잔틴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를 통해 그는 교황으로 하여금 약 600명에서 1.000 명 정도의 기사단을 파견해 줄것을 요청했다. 많은 숫자의 대군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 일망정 자신의 배후에 로마 교황청이 후원자로 버티고 서있다는 요식행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제위를 노리는 내부 세력이나, 외부로 점점 조여오는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부터 한동안 자유로울 것이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뜻밖의 사절단을 맞이한 교황 우루바노로서도 크게 놀람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교황에 즉위한 뒤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동안 비잔틴과 동방정교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고 언젠가는 꼭 집고 넘어가야할 사안이었던 것이다. 교황은 장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알렉시우스의 도움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하지만 교황이 속마음까지 진짜로 거절하거나 내친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궁지에 몰린 알렉시우스가 쫓아와서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사정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참에 콘스탄티노플(비잔틴 제국)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또 종교적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 기독교계를 양분해서 나눠가지고 있는 정교회를 어떤식으로든 손보아 줄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교황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알렉시우스가 그리 호락호락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황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비잔틴의 황제 자리를 스스로 고스란히 교황에게 가져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도 역시 교황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렉시우스가 기묘한 한가지 꾀를 생각해 내게 되었다.
이번엔 알렉시우스가 직접 로마로 달려가 교황에게 알현을 청했다. 머지않아 살려달라고 쫓아올거라 예견했던 교황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알렉시우스를 만나주지를 않았다. 뜸을 들여서 기선을 충분하게 장악하려는 속셈이었다.
교황이 이렇게 나올것이라는 것을 알렉시우스 역시 일찍부터 알아채고 있었기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일대를 넘어다니면서 각 지방의 영주들과 백성들에게 피끓는 절규와도 같은 하소연을 했다.
“이방인들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달하는 대부분 영토를 점령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밖히신 기독교의 성지가 이교도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이 기독교의 성지를 파괴하고 성지를 순레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약탈과 학살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나는 교황님의 도움을 얻어 성지를 되찾고 순레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도움을 청하려고 로마에 왔다. 기독교인들이여. 이교도들에게 맞서서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지원군을 보내달라. 내가 가장 먼저 앞장을 서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알렉시우스의 꽁수가 온 유럽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자로서의 의무감이자 사명감이자 어떤 사명감 같은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적이 효과를 낳게되었다. 알렉시우스 자신도, 교황도, 그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돌발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던것이다.
유럽은 삽시간에 온통 '성지 탈환' '성지 회복' 이라는 광풍에 휩싸이고 만다.
여기에는 어떤 생각이나 어떤 사리판단이 필요가 없었다. 모든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럽의 성직자 회의는 그해 11월 말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전격적으로 이슈화했다. 교황 우루바노 2세는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프랑스 등지에서 온 주교 및 기사(귀족) 무리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성지탈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이 이교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마저 이교도들에게 훼손당하고 있다.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의 싯을 수 없는 수치이자 불명예이며, 유럽의 모든 귀족들과 영주들과 기독교인들은 힘을 합쳐서 이슬람을 물리치고 성지를 회복하여야만 한다.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성전이며, 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신다.'
이에 대해 청중으로부터 교황조차 예상하지 못한 열띤 반응이 일어나 “이것은 신의 뜻이다(Deus Le Volt)”라는 거대한 함성이 클레르몽 성당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유럽은 유사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집단 최면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바야흐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교황 우루바노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이용하여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확대시키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비잔틴이라는 제국을 자신의 영역 안에 편입시키게 되면,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세속 군주들의 위세를 꺽는 좋은 본보기가 될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또한 1054년 상호간의 파문으로 인해서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동서 교회의 분열을 수습차원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정교회에 대하여 우위를 선점하고 싶었다.
그런가 하면 호시탐탐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꾀하는 호전적인 기사들과 영주들을 멀리 유럽 밖으로 떨쳐냄으로써, 한시적일망정 유럽 내부의 평화와 공존을 영위할 수 있을것이라 판단했다. 전 유럽 안에서 국가 이전에 영주들간의 분쟁과 전쟁이 끊이질 않아 툭하면 교회가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분쟁의 결과는 교회에 대한 불신과 왕권 찬탈 음모가 성행하게 되었고, 좀 더 확대되면 왕조간의 집단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내부의 전쟁은 곧 교황의 권위에 교황청의 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이를 막고자 외부로의 전쟁과 호전적인 무리들을 외부전쟁에 내몰아내는 것이 최선의 방책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하는 모든 이슬람 지역의 영토와 재화를 교황청이 차지하려고 처음부터 게획을 세웠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부유한 귀족들과 사제들의 재산을 위탁받아 관리하면서....... 대다수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또한 엄청난 부를 차지하는 합법적인 수입원이될거라 예측했다.
교황의 이러한 속내는 결국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못한' '미완성의 군대'를 전쟁터로 내모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군주(왕)들은 교황의 이런 음흉한 계획을 어느정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에는 단 한 명의 군주도 참석하지 않는다.
'성지 탈환' 이라는 거룩하고 신성한 과업 보다도 교황의 음흉한 계략에 맞서서 자신들의 왕국을 보호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는 뜻이다.
아울러 교황이 신이 부여한 '신권'은 가지고 있으면서 세속의 권력인 '황권'을 노리고 있었지만, 이미 살펴 본 바처럼, 적어도 당시까지는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그렇게 많이 먹혀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날리아. 오스트리아 등등의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있었으나........ 단 한 명의 군주(왕)도 십자군 원정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유럽 전역을 뜨겁게 몰아치고 있는 광풍'성지 탈환'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엄연한 현실이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교황은 이번에도 또 '면죄부' 카드를 들고 나온다.
'성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을것이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죄에 대해서도 사함을 받을 것이다' 라고, 더하여 십계명의 제 1 규율인 '살인하지 말라'에 있어서도, '이교도는 짐승이므로 살인의 죄를 범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라는 해괴한 법률적 해석을 내놓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1차 십자군은 이런 이유로 유독 사회적 부랑자와 범죄자와 오갈데 없는 떠돌이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교황 우루바노 2세의 집요한 선동은 군주(왕)을 끌어내는데는 실패했으나, 유럽의 유력한 제후(영주)들을 참여시키는데는 성공을 거두었다.
교황의 속셈을 눈치 챈 군주(왕)들은 십자군에 참여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나, 제후(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성지를 탈환하면서 이교도의 영토를 차지할 기회를 엿볼수가 있고, 전공과 영지확보를 통해서 자신도 군주(왕)이 될 수 있다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다는 유혹이 매력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다수의 제후들은 이를 위해 참여를 하게된다. 그리고 상당수가 뜻을 이루게 된다.
툴루즈의 '레몽'. 부용의 '고드푸루아'. 볼로듀의 '보드엥'. 타란토의 '보드엥'이 그 대표적인 제후(영주)들로 나름의 목적과 야심을 가지고 이 3.000km나 되는 멀고도 험난한 원대한 원정에 참여를 하게된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대'를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여 교황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유럽의 군주(왕)중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자 끝내는 주교였던 아데마르(Ademar)로 하여금 총사령관을 맏도록 하였다. 또한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비잔틴의 알렉시우스가 물자 지원과 군대동원을 조건으로 공동 총사령관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이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교황과 알렉시우스는 모종의 협약을 남몰래 체결했다.
교황은 1차 십자군의 출발일을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로 잡아 놓았다.
그런데 이에 앞서 사이비 종교인이라 할 '은자 피에르'가 '하느님으로 부터 십자군전쟁에 나서라는 서신을 받았다'라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상당한 무리를 모아 한발 앞서서 오합지졸 군대랍시고 몰고 예루살렘을 향해 먼저 출발한 사건이 있었다. 이 황당한 사태는 앞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십자군 원정대'는 각자 출발을 하게 된다.
각 영주들이 전투 준비를 갖추는대로 개별 출발하여서 1차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서로들 먼저 출발하여 '성지 입성' 이라는 첫 영광을 차지하려고 서둘렀다.
경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 국경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까지 향하는 육로이다. 나머지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육로로 간 다음 다시 여기 메시나에서 배를 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는 경로였다.
위그 백작과 보에몽이 이끄는 군대,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를 중심으로 한 군대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경로를 택했고, 고드프루아를 비롯한 볼로뉴 3형제와 툴루즈의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군대는 육로를 통해 전진했다.
가장 먼저 출발한 위그백작은 군대가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바리에서 배를 타고 발칸반도로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모든 배가 죄초되고 비잔틴 군의 도움으로 겨우 뒤라키움 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잔틴을 구하려 왔다가 오히려 비잔틴에게 구운을 입게된 것이다. 그런데 내외의 위기로 경황이 없을 비잔틴군이 어떻게 발칸반도에 나와있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은자 피에로가 선동하여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앞서 떠난 민중 십자군은 얼마 가지 못해서 모든 식량과 물자가 바닦나 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인근의 마을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고 약탈했다. '거룩한 성지 탈환을 위해 먼 길을 가는 성스런 군대에 헌납하라'는 것이었다. 더하여 약탈을 포함한 저들의 모든 만행이 '신의 뜻'이라고 외쳤다. 참다 못한 헝가리 왕이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했다. 겨우 살아남은 무리들은 서둘러 유럽을 벗어났다. 비잔틴의 영역에 들어서면서도 이들의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애초부터 '성지탈환'이니 어쩌니를 도모할 재주도 염치도 없는 그들이었다. 그저 부랑자와 범죄자들을 몰고 약탈하면서 유량을 다니는 양아치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비잔틴의 알렉시우가 분노하여 군대를 파견하자 이들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눈을 피해다니며 약탈을 계속했다. 한심한 이들의 행태에 마음을 놓지 못하던 알렉시우스는 유럽으로 부터 십자군이 행군해 오는 모든 항구와 도로에 군대를 파견하여 십자군이 행패를 보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뜻밖에 위그 백작과 일부 그의 군대를 구출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위그 백작은 심히 위축되었다. 이제 겨우 출발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 때 빼끔히 고개를 디밀며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사기꾼 은자 피에르 였다. 피에르는 지난 과정에 용서를 구하며 위축되어 있는 위그 백작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청한다. 풍랑으로 대다수의 군사를 잃은 위그 백작은 은자 삐에르와 민중 십자군이란 허울을 눌러 쓴 양아치무리를 넙쭉 받아들인다. 십자군에 닥칠 파란을 미리 예고하는 전조였다. 이에 용기 백배를 얻은 거만한 프랑스의 왕자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오만의 극치를 이루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데........ 영특한 알렉시우스가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알렉시우스는 위그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해서는 마침내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야 만다. 유럽의 정치판에서 '충성 서약'이란 결코 가볍게 보거나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교황은 이들을 보내면서 끝가지 교황의 명령에 따르며, 성지 회복으로 생기는 영토와 재물을 모두 교황에게 받칠것을 약속 받고 이들을 출정 시켰는데, 알렉시우스는 한 술 더 떠서 잃어버린 비잔틴의 영토를 모두 회복 시켜 줄것이며, 점령한 이교도의 영토에 출전한 영주들 자신이 차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영주들이 점령지를 차지하는 것을 막으려 주교를 총사령관으로 딸려 보낸 것인데, 알렉시우스는 아예 충성 서약을 통해 공증까지 해 놓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각자 출발을 달리했던 '십자군 원정대'가 모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을 했다.
알렉시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위그 백작을 앞세워 원정대 수장들의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위그 백작이 나서서 설득하는 나름의 명분과 구실을 갖춘 요구에 다들 수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고드푸루아가 태클을 걸고 나섰다.
자신은 이미 출정 전에 위그 백작의 형인 프랑스 왕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출정했다고 말했다. 기사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명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느냐고 정식으로 따지고 나선 것이다.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지시 받은대로 성스러운 과업에 따라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지 이제와서 갑자기 자신에게 또 한번의 충성을 강요한다면 이 사실을 본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알리고 별도의 처신에 대한 승인을 받을 문제라고 따지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알렉시우스는 당황했다. 집요하면서도 은밀하게 계획된 이 음모가 밖으로 새어나가 교황이나 유럽의 다른 군주들에게 퍼져나가게 된다면 그것은 뜻밖의 새로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을 앞세워 남의 집의 귀한 가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주인을 배반하고 나를 따르라 강요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어떻게 하든 고드푸로아를 납득시키거나 찍어 눌러서 오늘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고드푸로아가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알렉시우스를 사악한 뱀에 비유하면서 부당함을 외쳤다.
알렉시우스로서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무조건 끝장을 보아야만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연회장은 이제 같은 편 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변할 상황 이었다. 알렉시우스는 모든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 성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식량을 비롯한 모든 지원을 당장 중당하라고 외쳤다. 이제 십자군 원정은 중도에 끝장이 난 것이다. 비잔틴의 지원 없이는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이 불가능하며, 본국으로의 귀향 또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드푸로아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둘러선 영주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 탈환은 차후의 문제라고 호소했다. 돌아가서 기독교 군대를 재 정비해서 유럽의 분란을 초래하는 비잔틴을 먼저 정벌을 한 후에, 다시 '성지 회복'에 나서자고 설득했다.
셀주크 투르크에게 몰려 제국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 6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서, 6만의 십자군이 하루아침에 콘스탄티노플로 몰려 오더니, 이제 콘스탄티노플 혼자서 전 유럽의 군대(십자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어야만 하는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재에 나서는 영주들이 노력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양측은 한 발씩 물러났다.
그리고 결론은, 알렉시우스는 애초의 약속대로 군대와 식량의 지원을 계속하기로 하여 원정은 지속되며, 고드푸로아는 전쟁으로 영지를 확보하게 된다 하더라도 자신이 차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애초의 충성맹세 와는 약간 다른 '총사령관에게 서약'의 형식을 빌어 합의 했다.
다음날 알렉시우스는 서둘러 십자군을 모두 배에 태워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지역으로 보내 버렸다.
두려웠던 것이다. 고드푸로아를 대하고 보니 저들이 맘만 먹으면 아무때고 여기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자신의 왕조를 몰락시키고도 남을것만 같았다. 늑대(오스만 투르크)를 막으려고 호랑이(십자군)을 불러들인 꼴이 되고 말았다. 후회막급이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에서 화면에는 실존 인물이었던 고드푸로아가 등장하지 않는다.(이유는 차차 설명하겠지만)
하지만 주인공 '발리안'의 아버지로 나오는 '고프리'가 바로 고드푸로아의 수석 기사로서 함께 숱한 전투를 치루었으며, 이 고프리의 모습에서 고드푸로아를 연상하면 될 것같다. 1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가장 용맹하고 늘 전투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고드푸로아 였다. 그는 중세 기사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 옆에 '이블린의 영주 고프리'가 함께 했었다고 생각하면 어느정도 이해가 쉬울것이다. 어떤면으로는 그냥 고프리를 영화속의 각색된 고드푸로아로 보아도 될것 같다. 고드푸로아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도 고프리를 통해서 하려고 한다.
숱한 우여곡절을 격고나서야 원정대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하지만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고난을 미리 예견해 볼 수 있는 출발이었다.
교황의 심복으로 총사령관에 임명된 아데마르 주교가 비잔틴군의 오인사격으로 중상을 입어 데살로니카로 이송되었다. 그런가 하면 6만이나 되는 십자군 군대의 등장으로 심각하게 자신의 처지를 걱정해야만 하게 된 알렉시우스는 자신이 먼저 요청했던 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성지탈환 도중이나, 어쩌면 그 이전이라도 어찌될지도 모르는 돌발상황들 앞에 차마 자신의 왕국을 한시도 비워놓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마지막 십자군으로 합류한 보에몽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선대부터 이어져내려온 원수지간이었던 것이다. 보에몽은 용병으로 내려왔던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인 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와 발칸지역 일부를 차지한 보에몽 부자는 끊임없이 비잔틴을 침범하고 약탁하였다. 분노한 비잔틴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보에몽 부자를 이탈리아로 부터 완전히 쫓아내 버렸다. 쫓겨난 보에몽 부자는 비잔틴에게 복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발칸 지역의 떠돌이 신세였던 보에몽에게 십자군 원정소식이 전해지자 앞장서서 어찌어찌 군사를 모아서 가장 뒤늦게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어찌 한시인들 알렉시우스가 마음편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왕국을 절대 비워둘 수가 없었다.
결국 '제 1차 십자군 원정대'는 전쟁을 총괄하고 수반할 리더를 갖지못한 채 고만고만한 영주들로만 구성되어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총사령관이 없는 군대는 위계질서가 있을리 없고, 전술이나 작전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저 제각각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실현할 막연한 환상에 젖은 오합지졸 군대였다.
십자군 원정대의 첫 전투는 '니케아'에서 벌어졌다.
이미 은자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을 처참하도록 궤멸시킨바 있던 니케아의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십자군의 본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대라고 할 수도 없는 민중 십자군의 실체를 이미 보았던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였다. 그는 본진을 이끌고 말라트야의 투르크군을 정벌하려 성을 비우고 떠났다. 아르슬란은 투르크와의 전투중에 소식을 듣게 된다. 6만의 십자군 정예군대가 이미 니케아를 포위공격하고 있다고........
왕비와 자녀들을 니케아에 두고 나왔던 아르슬란은 사태를 파악하고 나서 구출을 시도하지만 불가항력임을 깨닫게 된다. 아르슬란은 인근의 코니아로 도망치면서, 성 안의 수비대에게 밀사를 보낸다. '상황에 따라 적정히 행동하라'가 전부였다.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니케아 성은 십자군 손에 떨어질 상황이었다.
이 기막힌 타이밍을 이용하여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의 치밀한 계략이 전선의 틈새를 파고 든다. 알렉시우스의 군대 장수는 자신들이 포위를 맡은 지역의 성문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이 상황에서 니케아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항복해 온다면, 아르슬란 가족의 안전은 물론 수비대의 안전까지를 보장해 주겠다' 라는 조건 제시였다. 십자군 원정대를 한 한 명도 성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십자군이 물러난 후에 성 안의 왕비와 수비대와 백성들을 모두 안전하게 코니아로 보내주겠다고 회유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어둠을 틈타 비잔틴의 군대를 실은 배들이 항구에 도착했다.
날이 밝아 전투를 재개하려고 성벽에 접근하던 십자군은 모두 놀라 자빠졌다.
니케아의 성벽 위로 온통 비잔틴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수하들을 통해 술과 음식과 재화를 보내 십자군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비잔틴이 배반했다고 함성을 외쳐댔다. 이제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고 만 것이다. 비잔틴과 십자군은 무늬는 한 편이되, 결코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는 애초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비잔틴의 배신으로 보급이 모두 끊긴 십자군 원정대의 현실은 가혹했다.
니케아를 떠난 십자군의 다음 목표는 안티옥(안티오키아) 이었다.
유럽에서 나고 자란 십자군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구릉으로 이어지는 아나톨리아 고원을 행군하기란 전투보다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광활한 고원은 몇날을 걸어도 맨 그냥 그자리 같았다. 거기에다 복수를 다짐하던 아르슬란은 숙적 다니슈멘드와 동맹을 맺었고, 기독교의 침입에 놀란 투르크 족까지 가세하여 성전(지하드)를 선포하며 끊임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 왔다. 보에몽을 습격한 아르슬란의 연합군을 레몽과 고드푸로아가 도와 구원해 주게되고, 여기에 시리아의 기병대까지 합세하게 되었지만 합심한 십자군은 이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는 곧 이슬람 세계 전체를 커다란 충격에 빠트리게 된다.
1097년 10월 21일 보급품 부족으로 처참한 몰골이 된 십자군은 마침내 안티오키아의 성벽이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
하지만 가혹한 지형과 날씨, 바닦난 보급물자, 끊이지 않는 적들의 기습........ 수많은 사상자를 낳게 되는가 하면, 이때부터 십자군 안에서 상당수의 탈영병이 발생하게 된다. 콘수탄티노플을 떠나올 때 6만이었던 군사의 수가 4만으로 줄어있었다.
살아남는 길은 안티오키아를 스스로 점령하고 우선적으로 시급한 보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4만 명의 십자군이 유서깊은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성지 안티오키아는 인구 4만에 거대한 성벽과 4백개의 망루를 갖춘 철벽 방어진지로서 당시로 부터 약 10년 전에 급격하게 성장하며 팽창해 오던 신흥 강국인 이슬람 종교의 투르크가 점령한 상황이었다.
---- 안티오크 성.
산과 강을 끼고 건설된 길이 12km에 이르는 거대 성벽에 둘러쌓인 안티오크는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오론테스 강이 흐르는 서쪽이 지중해와 아주 인접해 있어서 언제든 보급물자를 지원 받기에 수월한 지리적 잇점까지 모두 가진 최첨단 방어 요새였다. 하여 웬만한 대군으로도 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걸쳐 이 지리적 요충지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견교하게 증축에 증축을 더해왔던 때문이다. 하여 근자에 급성장하면서 급격하게 팽창해오던 투르크족이 변방의 마지막 국경으로 삼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려 끝까지 차지하고자 했던 뜻은 다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크의 지배자 '야기 시안'은 장기 지구전을 준비했다. 십자군의 보급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20만의 주민이 머물던 도시는 거듭되는 전란과 이슬람의 확장으로 주민의 수는 4만으로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사는 6.7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보급이 끊어지고 구대의 실질적 통솔자가 없는 십자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십자군이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는 인근의 모든 이스람 도시국가들에게 구원의 파발을 보냈다. 하지만 반목과 파벌싸움으로 얼룩진 이슬람은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 주는 자가 없었다.
레몽은 이슬람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서둘러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고드푸루아와 보에몽은 일단은 포위전을 펼치면서 상황을 살펴볼것을 주장했다.
자신이 십자군의 실질적 지휘자라고 여기는 레몽과 보에몽의 다툼은 사사건건 대립하기에 이른다. 십자군은 지휘체계에 혼선을 맞이한 것이다.
십자군은 구역을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12km나 되는 지역을 모두 에워싸기는 병사의 수가 모자랐다. 성의 남동쪽에 있는 실푸스산 방향으로 구멍이 뚫렸고, 야기 시안의 군대는 이 틈새로 무한정 식량을 실어 날랐다. 오히려 하루하루 지난수록 십자군의 식량이 바닦나기 시작했다.
야기 시안은 인근의 이슬람 도시들에게 거듭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여전히 이슬람 세력은 갈갈히 짖어져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눈치만 보는 상황으로 아무도 선듯 나서주지 않았다.
십자군은 십자군대로 유럽의 각지에 보급을 요청하여 중간에 제노바 함대로 부터 약간의 식량을 보급받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턱없이 모자랐다.
레몽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속하게 기습 공격을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여기 안티오키아를 어떻게든 자신의 영토로 삼고 싶었던 보에몽이 이를 극구 반대했다. 가장 많은 수의 용맹한 군사를 거느린 레몽의 군대가 앞장서서 기습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그 순간 안티오키아는 레몽의 차지가 될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보에몽은 어떻게하든 레몽을 안티오키아에서 떨쳐내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한편 보에몽은 안티오크 성내에 첩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10년 전 야기 시안이 난공불락의 안티오크를 점령했던 방법을 자신도 똑같이 써보고자 함이었다. 성내의 불만 세력을 찾아나섰다.
이제 어쩔 수없이 십자군은 식량 확보를 위하여 인근의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약탈 지역은 점 점 먼지역까지 넓어져 갔다. 하렘크 요새를 점령하고는 투르크인 2천명을 잔인하게 학살하기까지 했다. 어디까지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식량 사정은 점점 나빠져갔고, 여기에 레몽과 보에몽의 대립은 점점 치열해져 갔으며, 십자군의 횡보와 약탈이 심해지자 주면의 이슬람이 하나 둘식 단합하여 연합군을 구성해 안티오크로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비잔티 황제 알렉시우스의 대리인으로 참전했던 타티시우스 마저 닥친 상황에 위기를 느껴 비잔틴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보에몽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잔틴 황제를 배반자로 규탄하면서, 설사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하여도 비잔틴에게 돌려 줄 수 없다고 은근히 자신의 속셈을 들춰내 보이기도 하였다.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에서 발목이 잡혀 있고, 갈등과 반목의 이슬람은 뿔뿔히 흩어져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같은 이슬람인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무주공산으로 방치된 예루살렘을 힘 하나 안들이고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파티마 왕조는 무슬림 시아파였고 소아시아 지역에서 뿔뿔히 흩어져 십자군과 대립하고 있는 무슬림은 대다수가 수니파였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투르크인들은 다마스커스와 알레포와 모슬로 도망쳤다.
이 급변하는 사태에 대해 모술의 지배자 '카르부카'는 그것이 곧 '이슬람의 위기'라는 각성을 하게 된다. 카프부카는 곧 '알라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위기를 타파하자'는 격문을 주변 국가에 보내 투르크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티오크를 구원하기 위한 연합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안티오크를 에워싸고 있는 십자군에 전해졌다.
수많은 병사들이 질 겁을 먹고 십자군 진영을 이탈했다. 은자 피에르도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혀 왔을 정도였다. 지휘부는 모르겠으나 대다수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성지 탈환'의 신성한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 이 위기의 상황에서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보에몽의 꼼수가 그만 실제로 효력을 나타낸 것이다.
인티오키아의 수비대 대장 피루즈를 매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기독교 교도인 피루즈는 야기 사안의 눈 밖에 밀려나서 자신의 위치가 심각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피루즈는 자신 가족의 안전과 보상을 요구했고 보에몽은 기꺼이 이를 수락했다.
그날 밤 보에몽은 십자군 지휘부를 소집하고 자신의 작전을 피력했다. 동시에 자신의 단독적인 계략과 선공으로 안티오크를 점령한다면 안티오크의 지배권을 자신이 가지겠다는 서류에 지휘부가 성명 약속할 것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십자군 출정 당시의 서약'을 주장했지만, 이미 칼자루는 보에몽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보급이 완전히 떨어진 상황에서 우선은 성의 점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가 서명을 했다.
그날 밤, 피루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하여 보에몽의 군사들이 가장 앞장서서 안티오키아 성을 들이쳤다. 나머지 십자군이 뒤를 따랐다.
안티오키아 성이 완전하게 점령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성 밖에서의 굶주림과 추위가 얼마였던가? 그들은 피의 복수를 주저하지 않았다.
투루크인들을 눈에 띄는대로 모조리 잡아 죽였다. 또 이 와중에 어쩔수 없이 사태에 휘말린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리이스 정교회 신도들도 무참히 학살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약탈을 감행했다. 안티오키아에서 거둬들인 실로 엄청난 전리품으로 모든 보급품 문제를 해결했다.
죽어라 달아나던 안티오키아의 지배자 야기 시안은 아르메니아 주민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잘려진 그의 목은 십자군에게 받쳐져 성문에 효수되었다.
해가 바뀌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군대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니케아에 이어서 안티오키아 까지가 기독교 수중에 들어왔다. 인근의 에데사와 알레포도 자연스레 수중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동안 승리를 갈구했던 십자군은 승리에 축배를 들며 성대하게 잔치를 벌렸다.
이제 다음은 예루살렘이다..........
하지만...........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생각 같지만 않았다.
--- 십자군이 저지른 안티오키아 대학살.
십자군에 대항하는 투르크(Truk) 부족의 영문 표기는 바로 터키(Truky)이다. 터키 인구의 95% 이상이 투르크 족이다. 투르크의 역사는 곧 터키의 역사가 된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게 귀결되는것은 아니지만........ 터키인들은 자기 민족의 유래를 흉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작부터가 유목민이며 기마민족이었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핏줄 속에 몽골의 지배자 칭기스칸의 피도 섞였다고 주장한다.
고대시대 바이칼 호 유역에서 만주 지역까지 넓게 퍼져있던 흉노는 대단히 호전적인 유목민 부족이었다. 그들은 말을타고 생활했으며 말 위에서 화살을 쏠 줄 아는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따뜻한 계절에는 초원을 따라 이동하면서 소와 양을 먹였고, 겨울이 닥치면 따뜻한 남쪽으로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약탈 원정을 떠났다. 그 대상지역은 바로 중국이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들의 약탈은 참으로 잔인하고 공포스러웠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들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었다. 이 악순환은 중국의 왕조가 바뀌면서도 게속 이어져 내려갸다가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강병해진 중국은 이들 흉노족을 토벌하기 시작한다. 만리장성 이북을 호령하던 흉노는 사분오열로 나뉘더니 하나 둘씩 멸망하거나 초원의 북쪽으로 쫓겨 갔다. 하지만 흉노의 씨를 말려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중국은 계속 토벌대를 파견했다. 결국 흉노는 시베리아 대륙을 휘감아 돌아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면서 역사의 장에서 점차 사라졌다.
흉노가 사라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투르크인이 세운 날 돌궐(突闕)이 마침내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중국의 동북지방과 몽골의 국경인 흥안령에서 시작해 서쪽으로는 이란지역 카스피해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제국의 덩치가 커지자 동.서돌궐로 나뉘어 지더니 시간 차이를 두고 모두 멸망하였다. 하지만 이란 지역에 넓게 퍼진 투르크 인들은 거듭 거듭해서 왕조를 열었다.
그 가운데 셀주크 가(家)가 통솔하는 투르크가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1055년에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이는 곧 셀주크 투르크가 서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바로 '제 1차 십자군'이 소아시아 지역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시기를 '기독교대 이슬람의 종교 전쟁'이니 하면서 확대 해석내지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분히 섣부르고 부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기독교의 유럽은 교황과 별도로 군주(왕)가 있어서 각각의 나라를 다스리는 독립된 국가의 개념이었지만, 이슬람은 그보다 아주 작은 가족중심의 부족단위 집합이었다.
셀주크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맞지만, 많은 인구가 모여 국가나 도시를 구성하는 유럽식의 국가 개념이 없었다. 대도시도 없었다. 기껏해야 오아시스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소부족 하나와, 가족을 이끌고 떠돌아 다니면서 수백 수천의 양을 기르며 유랑하는 수많은 소부족중심의 구성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축에게 풀을 뜯기는 초지나 물을 확보하기 위해 부족과 부족들이 끊임없이 서로 반목하고 분쟁이 끊이질 않던 시기였다.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 국가라고 하였으나, 그 이슬람 종교의 역사 또한 막 시작된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짧았다.
이렇게 보자면 '제 1차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연합군'이 '이슬람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룬것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이슬람의 기됵교 성지 순례단 탄압'을 구실로 '유럽의 기독교 연합군'을 꾸려서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가는 도중에 각 지역에 실제로 그 지역에 거주하던 현지인 부족들을 상대로 살륙 약탈 전쟁을 치룬 것이다. 연합군들이 일개 부족들을 그냥 마구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애초부터 '성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티오키아를 구하려고 급하게 투르크 연합군을 구성하여 달려오던 모술의 카르부가는 에데사에서 3주나 발목이 잡혀 있었다. 에데사를 지나쳐 안티오키아로 향하던 중에, 고드푸로아의 동생 보드엥이 손쉽게 에데사를 점령해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카르부카는 즉시 에데사를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갔으나 3주가 지나도록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때 전령이 달려와 안티오키아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게 된 카르부가는 그 즉시 군대를 빼내서 안티오키아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시간에 십자군은 이미 성문 안으로 쳐들어 가고 있었다. 만약 카르부가가 에데사를 그냥 지나쳐 안티오키아로 향했다면......... 십자군은 완전히 궤멸되었을 것이다.
분노한 카르부가는 안티오크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위기를 느낀 십자군 선봉대가 성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카르부카의 이슬람 정에병을 당하지 못하고 대패하여 겨우 살아서 성 안으로 도망쳤다. 카르부카는 철저히 성을 에워싸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십자군을 모두 굶겨 죽이기로 작정했다.
성을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성 밖에 있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펼져지고 있었다. 여러번 성문을 열고 작은 전투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판판히 격퇴당했다. 닥쳐온 위기와 절망적 상황에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집단으로 탈영하기 시작했다. 탈영의 무리에 섞이어 있던 블루아의 영주 에티엔은 달아나던 중에 노상에서 구원군을 몰도 달려오던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를 만나게 되었으나 '전쟁은 이미 끝이 났고 안티오크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도망 처지의 자신을 합리화 하기위한 거짓말을 알렉시우스에게 늘어 놓았다. 결국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알렉시우스가 군대를 돌려 콘스탄티노풀로 돌아갔다.
하루하루 겨우 버텨내면서 알렉시우스의 구원군만을 기다리던 십자군에게 마침내 이 소식이 전해졌다. 십자군은 이구동성으로 에티엔을 저주했으며, 목전에서 회군한 알렉시우스를 향해 '배신자'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알렉시우스와 맺었던 협약의 서약서를 찢어서 내던지면서 '이제 더 이상 서약 따윈 필요 없다. 이제부터 점령한 영토와 재물은 모두 우리 차지다. 두고 보라. 기필코 비잔틴에 복수하고야 말테다' 라고 증오를 가슴에 새겼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중의 문제였다.
서약을 무효화 하던......... 복수를 다짐 하던........... 당장 그들은 지금 전투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일단 살아나야 다음이고 뭐고.........
그때였다.
또 한 번의 기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3년 전 여행기 아르메니아 게르하르트 수도원편에서 다루었던 '롱기누스의 창'이 등장한다.)
'피에르 바르톨로뮤'란 하급 군관의 꿈에 '성 안드레이'가 나타나 여기 안티오키아의 건물 어딘가에 '롱기누스의 창'이 보관되어 있다고 계시를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부상에서 회복해 데살로니카에서 돌아와 있던 아데마르 주교와 십자군 지휘부는 냉소를 흘렸다.
십자가에 못밖힌 예수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로마군 백부장 롱기누스가 자신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성창(聖槍)은 분명하게 콘스탄티노풀의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는것을 그들은 알렉시우스가 서약을 강요하면서 실물을 이미 보여주었었기 때문이었다. ( 이 성창을 비롯해 성궤와 성배에 신비로운 능력이 실재한다고 믿어서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실제로 특수 부서를 만들어 이 성물들을 찾아다녔다.) 아데마르와 지휘부는 이것이 은자 피에르와 군관 바르톨로뮤가 꾸며내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외면해 버렸다. 그런데 낡은 교회 건물을 바닦을 파헤치더니 낡고 훼손이 심한 창을 하나 꺼내오는 것이 아닌가. 막다른 코너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십자군 병사들은 그것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성창' 이라는 점에 커다란 기대와 함께 사기가 한껏 고무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신기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바야흐로 이제부터는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였다.
성창의 등장으로 한껏 사기가 오른 십자군은 병석에 누운 레몽을 제외하고, 보에몽의 지휘하에 고드푸로아. 베르망두아. 탕그레르에 아데마르 주교까지 말에 올라 성문을 활짝 열고 성밖으로 돌진해 나갔다. 카르부가는 성문 앞의 곳곳에 정예병을 매복시키고 성문이 열리면 단번에 쳐들어가 전쟁을 끝낼 결심이었는데.......... 뛰쳐나오는 군대는 그가 이제껏 보아왔고 상대해 왔던 그 십자군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듣고 본적도 없을 뿐더러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투루크 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이건 기적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마음 한구석으로 카르부가의 주장에 분명한 메세지와 명분이 있어서 마지못해 나섰던 아미르를 비롯한 투르크 영주들은 이 싸움에서 자신들이 이기게 되면 탁월한 통솔력을 바탕으로 카르부가가 절대 군주가 되리라는 두려움들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던 터라, 싸움에 밀리게 되자 서로 앞다투어 카르부가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미 군세를 되돌리기에 때가 늦은것을 깨닭은 카르부가도 도망를 쳤고, 이날의 패배는 그로하여금 모술의 통치권 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보에몽은 노골적으로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예루살렘이 탈환되지 않은 시점에서 마치 모든 전쟁이 끝난것처럼 전리품 잔치를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레몽이 맞섰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점점 격렬해 졌다. 그 때 이 두사람 사이를 중재하던 허울뿐인 충사령관 아데마르 주교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러자 모든 지휘관들이 한 목소리로 '주교의 사망 소식을 교황에게 서둘러 알리고, 그 답신을 들은 후에 다시 논의 하자. 하여 답신이 오기까지는 예정대로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진군하자'로 일치되었고, 두 사람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잠시 분란이 봉합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태가 해결되려면 교황이 직접 예루살렘까지 와서 해결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교황은 로마를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손도 안대고 코를 풀 생각 뿐이었다. 여전히 화약고의 불씨는 살아 있었다.
안티오키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비잔틴의 알렉시우스에게도 전해 졌다. 알렉시우스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간에 드러난 모든 분란의 화살이 일시에 자신에게 모두 날아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아주 깊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하여 서둘러 진군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십자군 지휘부 간의 분란과 대립 때문이었다.
진군은 고사하고 안티오키아 주변의 영지를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약탈만을 자행하고 있었다.
고드프루아의 동생이긴 하지만 천성이 너무도 다른 보두앵과 바이킹의 후예인 보에몽의 조카 탕그레드가 터키 남부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본대를 떠났다. 가는 도중에 탕그레드는 300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투루크군이 차지하고 있던 타르수수를 공격했다. 성의 점령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느닷없이 보두앵이 이끄는 2.500명의 군대가 나타났다. 보두앵은 탕그레드를 도와준다면서 성 안에 먼저 입성하여 자신의 깃발을 성문에 내걸었다. 탕그레드는 분노하여 항의 했지만, 보두앵은 이 성을 자신이 차지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절대적 열세에 놓인 탕그레드는 어쩔 수 없이 타르수수를 넘겨주고 자리를 떠났다. 탕그레드가 떠나자 마자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르는 그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군이 달려왔다. 보두앵은 탕그레드가 약속에 불복하고 성을 다시 빼앗으려 돌아오는줄 알고 지원군 300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이 사건은 십자군 전체를 경악에 빠트리고 말았다.
이젠 이슬람의 투르크만이 적이 아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믿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십자군은 본래의 목표를 상실했다.
이 상황에서 에데사의 지배자이던 토로스가 보두앵에게 지원을 요청해오는 일이 생겼다. 십자군 본진에서야 친형인 고드프루아가 있는한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겠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질병으로 모두 잃고, 거기에 가뜩이나 타르수수의 사건으로 남들의 눈총이 따거웠던지라 보드앵은 이를 수락하고 서둘러 에데사로 떠났다. 후계자 없이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끌어들인 보두앵이었는데 그만.........
토로스는 보두앵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죽는날까지만 영화를 누리기를 원했는데, 에데사의 주민들이 당장 보두앵을 군주로 모시겠다며 토로스를 끌어내려 찢어죽이고 말았다. 보두앵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에데사를 차지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에데사 주민들의 주선으로 아르메니아의 공주와 재혼하여 일개 기사의 신분이던 자신의 처지를 귀족으로 승격시키는 경사까지 겹쳤던 것이다.
애초의 약속대로 라면 당연히 에데사는 비잔틴에게 돌려주어야만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그 약속을 지킬리가 만무했다.
보드앵이 에데사를 차지한 소식이 십자군 진영에까지 전달되었지만, 여전히 십자군 본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소유 지배권 문제가 우선 해결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앞장서서 앞으로 진군해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기다림에 지친 속내막을 전혀 모르는 군사들의 동요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군대가 광장에 모여 하루빨리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지휘부의 답변이 늦어지자 모여든 군대가 병장기를 땅바닥에 풀어 놓았다.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고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외쳐댔다.
군대가 없이 지휘부만 남겨지게된 십자군은 당황했다.
그리하여 급기야 허겁지겁 서둘러서 병장기를 챙겨들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자가했다는 소식이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하나의 놀랄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투르크의 전 부족이 십자군에게 협상을 제의해 온 것이다.
십자군이 여기까지 자체적인 보급문제를 제외하고 그나마 수월하게 진군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세세하게 작은 부족단위로 쪼개진 트르크 족들이 끊임없이 서로 반목과 대결을 벌이고 있던 스스로의 문제에 기인한 바가 대단히 컸다. 그리고 그 이면에 더 크게 내재되어 있던 이슬람의 근본적인 약점이 마침 이 시기에 이르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십자군이 상대한 모든 투르크 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었으며, 좀 더 파고들어가면 모두가 '수니파'였던 것이다.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집트를 기반으로 하는 파티마조가 무주공산이었던 예루살렘을 중간에 꿀꺽해 버렸는데, 파티마조가 바로 이들의 신앙적 원수집단인 '시아파'였던 것이다. 그동안 '알라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군을 저지하려고 숱한 싸움을 벌여왔는데...... 아무리 그렇기로 이제 신앙의 원수 '시아파'를 위해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니파'의 소아시아 투루크 족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는 동안에 자신들을 약탈하거나 살해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십자군의 진군을 가로막지 않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난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요지경 속인 인간들 세상사가 아닌가?
투르크 족의 길 안내까지 받아가면서 마침내 레몽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시리아로 진군했다.
심지어 다마스커스의 수니파 이슬람인들은 길을 가로막은 시아파인 파티마의 군대를 십자군이 격하하는 것을 보고 환성을 기르며 박수를 보냈다.
야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일부의 지휘부가 이쯤에서 예루살렘 보다 먼저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모든 물자가 풍부한 이집트 카이로를 먼저 점령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의 수도였다. 하지만 이때의 십자군은 안티오크에서 서로 영지를 차지하려고 혈안이던 그때의 십자군과는 사뭇 달라진 십자군이었다.
바야흐로 숙원 사업이던 '성지 탈환'이 목전이었던 것이다.
6월 6일에 예수의고향 베들레헴을 차지했다. 6월 7일에 예루살렘이 건너다 보이는 몽조이 언덕에 도착했다.
하지만 모든것이 그렇게 순탄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뛰어난 무장이었던 예루살렘 총독은 장기전에 돌입하여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십자군을 맞았다. 여러차레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이슬람 수비대의 방어진지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위기를 직감한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가 대규모의 구원부대를 파견했다.
이제는 십자군이 양쪽에서 협공을 받아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된 상황이었다. 이젠 어디로 달아날 곳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돌격 뿐이었다.
13일과 14일간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15일에 이르러 고드프로아가 직접 성벽을 타고 넘어서 성의 일부를 점령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렌의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십자군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나자 폭도로 변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리고 장장 6주에 걸쳐서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백성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살륙을 저질렀다. 말고삐까지 피에 흠뻑 젖도록 사람들을 죽여 나갔다. 예루살렘 도성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저자거리는 온통 피바다로 변해갔다. 이슬람인만 죽인것이 아니었다. 정교회와 같은 기독교인은 물론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약탈이 뒤를 따랐다.
예루살렘은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했다. 성스러운 하나님의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귀의 탈을 쓴 살인자와 강도들 뿐이었다.
2만 오천구의 시체가 거리에 나뒹굴었다. 여인과 아이들과 노인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이 같은 만행이 45일 이상 계속되었다.
십자군 지휘부는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지 탈환'
'성지 회복'
누가 누구로 부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 모든것이 정녕 '그 분의 뜻' 이었노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점령군으로 변한 십자군들은 이제 이 점령 지역을 스스로 차지할 생각에 몰두했다.
애초 원정을 시작하면서의 약속대로라면 일단은 비잔틴의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반환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교황이 탐탁하게 여길 사안도 아니었다. 교황의 의도는 일단 위급한 알렉시우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비잔틴을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들고, 비잔틴의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이 흡수 병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지의 모든 영토와 재화를 자연스럽게 교황 자신이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점령군인 십자군은 '원정도중 배반한 비잔틴에게 한치의 땅도 내어줄수 없다'는 명분을 전면에 내걸고 버텼다. 그 속내에는 다음으로 교황에게 내어줄 생각도 없고 자신들이 모두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기에 속지인 예루살렘을 빼앗긴 파티마왕조가 대군을 편성하여 카이로를 떠났다는 정보가 도착했다.
더는 속내를 감추거나 차일피일 미룰 사안이 아님을 자각한 십자군 지휘부는 결단을 내렸다.
'1차 십자군 원정대'를 통털어 가장 명망이 있고, 또한 신분이 높으며 가장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있던 레몽에게 '예루살렘의 왕' 자리를 내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미 예루살렘의 주요 요새와 건물들을 차지하고 있던 레몽은 '왕 자리는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처지였기에, 체면상 이를 몇번 거절한 뒤에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지휘부의 제의를 일단 정중히 거절하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다급하기만 했던 십자군 지휘부는 그것이 레몽의 진심이라고 믿고 덜컥 고드푸로아에게 왕관을 받쳤다. 고드푸로아 역시 상황을 살피건데 체면상 넙죽 받아들이기에는 블편하였던 지라 왕관을 거절하면서도, 예루살렘 군사동맹의 수장 자리인 '성묘의 수호자'라는 직책은 수락을 했다. 이쯤되자 레몽이 다시 격노할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레몽은 요단강을 순례한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전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다. 나에게 왕 자리를 내줄 생각이면 찾아오라는 계산에서 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떠나 얼마되지 않아 아스칼톤에서 마주친 이집트 파티와 왕조의 대군을 보고는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다.
안티오키아에서 4만의 군대였지만, 정작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1만오천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성지를 회복하고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십자군 병사들은 서둘러 고향으로 대부분 돌아가고 없었다. 참혹할 정도의 찌는 무더위와 모래바람과 전쟁뿐인 유대광야 보다는 산과 숲과 흐르는 강물과 모든것이 풍요로운 유럽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상이라 여겼던 때문이다.
이제 예루살렘엔 3백명의 기사와 약 2천명의 병사들만이 남아있는 상황에 이집트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침 교황의 특사로 피사의 대주교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어떻게 하든 예루살렘을 세속의 군주에게 넘어가지 않고 교황의 손에 쥐어주려고 혈안인 사람이었다. 그러서는 일단 예루살렘의 군사적 실권을 쥐고있는 고드푸로아를 어떻게하든 자리에서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그마저 신성한 교황의 뜻이었는지, 1100년 7월 18일 고드푸로아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대주교 다임베르트의 농간에 의해서 곧 성지가 교황에게 넘어갈거라 염려한 고드푸로아의 측근들은 곧바로 에데사로 비둘기를 날렸다.
예루살렘으로 달려온 보두앵은 베들레헴의 강림 교회에서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보두앵 1세이다.
보드앵 1세는 카이세리아와 아르수프를 점령하고 이어서 아크레 까지를 차지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일강 삼각주까지 차지하고 카이로를 도모하던 중에 풍토병에 걸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보두앵 1세는 죽기 전에 친 동생인 볼로뉴의 외스타슈를 지목하였으나, 외스타슈는 왕위를 거절하고 그냥 유럽에 남아있고 싶어 했다. 결국 왕위는 에데사를 지키고 있던 사촌동생이자 이름이 같은 보드앵에게 돌아갔다. 그가 보두앵 2세가 되었다.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리며 야심을 떨쳐내지 못하던 비잔틴의 알렉시우스가 마침내 군대를 몰아 쳐들어 왔다. 우선의 목적은 안티오키아 였다. 알렉시우스의 집요한 야심에 치를 떨던 보에몽은 조카 탕그레드에게 안티오키아를 넘겨주고 서둘러 이탈리아로 갔다. 프랑스 왕의 딸인 콩스탕스 공주와 결혼한 보에몽은 프랑스 이탈리아 연합군을 구성하여 비잔틴의 알렉시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진격을 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와 연합한 베네치아군에게 완전 궤멸되어 버린다. 이 후로 떠돌아 다니던 보에몽은 결국 실의에 빠져 홧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아플리아에서 생을 마감한다.
레몽은 예루살렘을 떠나 트리폴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군대로 항구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지만, 트리폴리의 함락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제 1차 십자군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목표였던 '성지를 탈환' 했고, 이 후로 급격하게 성지순례단이 늘어나서 유럽 귀족사회의 유행처럼 번저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모두 끝난것은 아니었다.
비잔틴의 알렉시우스 황제는 여전히 소아시아 전역이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수시로 싸움을 걸어왔다.
자신의 야욕이 빗나간 교황은 예루살렘을 차지한 '1차 십자군'을 정벌하기 위하여 '또다른 십자군'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요지경 속이었다.
거기에다........ 이번 전쟁을 '이슬람의 위기'로 느낀 전 투르크인들이 부족과 종파를 뛰어넘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엔 여전히 검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진짜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Movie >
2005년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역사와 전쟁을 다룬 대서사시 같은 영화를 발표했다. <킹덤 오브 헤븐>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폭싹...... 망해도 너무 망했다.
나 역시 개봉일에 맞추어서 영화관을 찾았는데........ 엄청나게 나를 실망시켜준 손에 꼽히는 졸작 중의 졸작이었다.
엄청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 외에는 전혀 기억에 남는게 없었던 어설픈 헐리웃 영화였다.
특별히 실망인것은 (반지의 제왕) 인기에 힘입어 주연으로 승선한 '올랜도 블럼'의 캐스팅에 대한 실망도 컸다. 대하 역사드라마에 걸맞게 좀 더 중량감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남자 주연이 절실하게 필요한 영화였다. 꽃미남 마켓팅으로 최소한의 기본 흥행을 보장받으려는 심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다 스토리 설정이 너무 엉성하게 연결되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마치 수학 방정식이라도 여러번 풀고 나서야 겨우 이해가 될만큼 난해한 전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한마디로 정말 짜증나는 영화였다.
그래서 <킹덤 오브 헤븐> 이라는 영화를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1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어느날 일이었다.
친구 사무실에서 커피를 얻어마시며 표지가 다 찢겨나간 낡은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킹덤 오브 해븐의 감독판' 영화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흥행에 완전 참패한 영화를 감독이 재편집을 해서 내놓았는데 영화의 런닝타임에 49분 가량의 분량이 추가되었다는 기사였다. 사실 가끔 감독판이라는 새로운 버전의 영화가 등장하지만, 그간의 내 경험으로는 특별히 '감독판'이라고 해서 새로운 재미를 느껴본 기억이 별로 없었기에 큰 기대른 없었다. 다만 49분이나되는 분량의 새로 추가된 필름에는 과연 어떤 압도적 장면들이 혹시나 담겼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는 했다. 말이 49분이지 간단한 킬링타임용 영화로 본다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져서 마침내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을 찾아내서 장장 3시간에 걸쳐 영화를 모두 다시 보았다.
감동.
벅찬 감동.
남자 주연배우에 대한 아쉬움 빼고는 정말로 완벽한 대서사시로 다시 태어났다. <킹덤 오브 해븐>의 어디까지나 '감독판'은 <벤허>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명작이다.
< Kingdom of Heaven>은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의 주인공 중의 한명인 '고두푸로아'를 도와서 기사로 참전했던 '이블린의 영주 고프리'가 성지탈환 후 20년 이상 지나서, 사생아로 세상에 태어나게한 아들 '발리안'을 찾아서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의 어느 시골마을을 찾아오는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스토리 또한 실제 역사에 있었던 사건을 다룬다.
다만, 영화라는 특별한 장르속에서 시대와 인물과 사건을 다루다 보니 다큐멘터리식의 실질적인 점근방법과는 어느정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아마도 그런 부분들이 바로 감독의 역활이자 권한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한 캐릭터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끌어 가야하는 영화의 특성상, 어느정도의 변형(왜곡과는 다른)과 구도 수정 내지는 실제의 시대적 순서를 되바꾸거나 일부를 빼거나 끌어들이는 등등의 시도로 전체적 스토리와 감독의 주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와 실제의 역사가 전혀 다른 허구의 사건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 (발리안)과 (시빌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 이다.
두 사람 모두 실제 당시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지만......... 두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도 않고, 또 사랑할 수도 없는 그런 사이였다.
예루살렘 공방전의 당시 발리안의 나이는 약 45세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영화속에서는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의 동생으로 나오는 시빌라 공주는 실제로는 보두앵 4세보다 1살이 많은 누나였다. 결국은 보두앵의 죽음과 동시에 예루살렘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당시 24세의 나이로 보두앵이 죽었으니 시빌라 공주의 나이는 25세였다. 45세의 올랜도 불롬(발리안)과 에바 그린(시빌라 공주)가 실제 사랑하는 사이이기에는 당시 나이 차가 너무나 컸다. 또한 발리안은 그 전에 보두앵 3세의 누이와 재혼을 한 사이가 되었으니, 법률적으로 조카와 삼촌 관계가 성립되기에 '근친상간'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역사에 실제 드러난 바에 의하면 '발리안'은 그렇게 꽃미남도 아니었고, 그렇게 정도를 걷는 우국충정의 사내도 아니었다. 씀씀이도 헤프고 욕심도 많았던........ 영화속에서 발리안 50%에 거랑말코 같은 기 뤼지냥 50%를 섞어놓은 정도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기발한 발상과 영특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것은 분명하다. 허우대 멀쩡하고 말주변 좋고 여자와 재물을 탐하는 꽃미남은 바로 기 뤼지냥이었다. 잘생긴 나쁜 남자가 바로 기 뤼지냥이었기에 요부 시빌라가 뤼지냥에게 빠졌던 것이다.
시빌라는 결코 청순가련형의 지고지순한 고고한 여인이 아니었다. 어려서 일찍부터 남자에 대한 사랑을 알게되었고, 몇 번의 결혼 외에도 수많은 남성편력을 가진 요부였다. 많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란만장한 생을 살게되는것은 어쩌면 그녀의 남성편력에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사 재해석 속에서는 발리안과 시빌라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에 연관 지어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는.어.디.까.지.나.영.화.다.
역.사.와.영.화.스.토.리.는.다.를.수.있.다.
영.화.를.실.제.역.사.로.인.식.하.는.오.류.는.범.하.지.말.자.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 일이었다. 원정대 중에는 군주(왕)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소아시아 전역을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두려는 교황과, 과거에 자신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 호시탐탐 예루살렘을 노리는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의 야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십자군은 갑자기 사망한(과로사) 십자군 전쟁의 영웅 '고두푸로아'의 동생 '보두앵'을 서둘러 '예루살렘 왕'으로 옹립했던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십자군 원정대 지휘부의 왕국이 되었다. 스스로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유럽과 비잔틴으로 부터 독립을 한것이다. 이 예루살렘 왕국이 하나로 단합된 이슬람(투르크)에게 성지를 다시 빼앗기기 까지 90년 동안 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지배하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 시작에 20살 조금 더 된 아들 발리안은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던 1096년 쯤에 태어난 것이다. 예루살렘 공방전이 1188년이라고 보면 성벽 위에서 칼을 들고 싸우다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넘어가서 살라딘과 협상을 벌이는 발리안의 나이가 90세가 넘어야만 한다. 이렇게 <캉덤 오브 헤븐>은 시공을 뛰어넘는다. 영화만이 가진 특권이다. 영화로 치자면 시작부분이 고프리가 장성한 아들을 찾아 오는데서 시작하고, 십자군의 예루살렘 철수로 끝이나니까......... 70년의 역사를 발리안과 시빌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중심축으로 2년 내지는 3년의 시간으로 함축시켜서 마법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 해놓았다고 보야야 하겠다.
나병이라는 워낙 독특한 치명적 캐릭터를 가진 보두앵 4세였기에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겼지만, 레몽 3세인 '티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나 '고프리(리암 니슨) 등은 9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처음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고 주도했던 먼 과거의 영웅들을 그대로 여전히 그려놓고 있다. 레몽도 고두푸로아도 보에몽도 모두 적어도 7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그려지고 있다. 보두앵 가문만이 손자가 왕위를 물려받아 제대로 그려지고 있다.
아마도 이런면에 있어서는 역사를 전혀 모르고 그냥 영화속의 스토리 전개에만 빠져보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게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 을까 하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발리안'에게 어느날 갑자기 등장하여 자신이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고프리'를 따라 예루살렘의 십자군에 합류하기로 한다. 자신과 아내의 속세에서의 죄를 사함받고자 택한 고행이었다. 그때 이들을 습격하는 고프리에게는 조카요 발리안에게는 사촌 형이 되겠다.
예루살렘 인근 이블린에 영지를 가진 영주 고프리가 죽게되면, 후사가 없는 이유로 고스란히 동생과 조카가 유산을 차지할거라 믿어왔는데 느닷없이 고프리가 아들을 데리고 등장하게 되었으니 당장 이들 부자를 모두 죽여서 이블린을 차지하려는 수작이었다.
이 전투에서 화살에 맞는 부상을 당한 고프리는 아들 발리안에게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죽는다. 실제 역사에서 에루살렘을 전령한 후에 곧바로 갑자기 죽게되는 고두푸로아의 이미지가 그대로 떠오르게 된다.
메시나 해협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리안은 지중해의 험한 풍랑으로 배가 죄초되고 홀로 살아남아 예루살렘으로 간다. 여정 중에 신분을 숨긴 투루크인(이슬람 귀족)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고 훗날 그에게서 구은을 입게된다. 영화에선 세세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이 신분을 숨긴 이슬람인이 실제 역사에선 바로 살라딘의 오른팔이라 불린 서기관(비서)이었다.
발리안은 예루살렘이 입성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전우였던 티베리아스도 만났다. 티베리아스는 발리안에게 있어서 죽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마침내 보두앵 4세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 고프리가 죽기전에 가장 먼저 신신 당부하던 말은 바로............ '예루살렘 왕에게 영원히 충성하라' 였다.
고프리가 고두푸로아에게 충성을 다한 기사였던 것처럼, 발리안도 보두엥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고프리가 아들을 찾아 오는 초반부 화면에 고프리의 일행으로 등장해서 중상을 입은 고프리를 치료해주는 사제(신부)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점차 전쟁이 치열해지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그 사제의 손에 무기(칼)가 쥐어지고 직접 참혹한 전투에 직접 참가하게 되는 무명기사(데이빗 슐리스)가 대단히 인상적으로 그려지는데, 그의 복장이 항상 검은 의복에 정사각형 모양의 흰 십자가를 앞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가 바로 (요한 기사단) 단원이다.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부터 실제로 예루살렘 성 안에 존재했었다. 초기의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지 않았다. 오로지 적이나 아군을 가리지 않고 아프거나 부상당한 성지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한 구호단체의 사제들이었다.(오늘날의 적십자의 효시라 할까) 그러던 요한 기사단이 '하틴의 뿔 전투' 이후로 손에 무기를 들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공방전의 시기 부터는 이슬람군이 십자군 군대중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전사들로 돌변하면서 모든 전쟁에 가장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예루살렘 공방전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전 이후로 '요한 기사단'은 모든 이슬람 군대에게 '저승 사자'를 넘어 '검은 악마 군단'으로 불려지게 된다.
아울러 이 당시까지만 해도 기사단 역사에 또 하나의 중심축이 되는 '템플 기사단'은 그 당시까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템플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의 이야기는 이후로 차차 다시 풀어가기로 한다.
한 편..............
'분열된 이슬람이여 단합하자.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몰아내고 성지를 탈환하자.'
예루살렘 성벽 넘어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로 뭉친 이슬람 부족들이 외치는 함성이 모래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리고 그 거센 함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갔다.
하나의 같은 신을 두고 그들은 처절하게 대립하고 증오하고 혈투를 벌였다.
그들이 벌이는 행함은 모두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신이 전쟁을 종용하였는가?
전쟁 기획자인 인간들이 신을 끌어들였는가?
------ 다음으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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