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은 친구로 대하라.
친구는 미래의 잠재적인 적으로 대하라. "
------ Who (?)
성지(聖地) 예루살렘은 다시 기독교인들의 품으로 되돌아 갔다.
하지만 교황의 생각은 달랐다. '성지 회복'이 아니라 '이교도 보다 더 나쁜 배신자들'이 거룩한 성지를 탈취해 간 것이다. 거기에 보태서 저들끼리 제멋대로 왕국을 세우고 왕을 옹립하고 성지의 소유권을 새롭게 자신들이 쟁취하였노라고 만방에 드러내놓고 공표한 것이다.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교황의 권위와 명령이 아예 먹히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악귀(惡鬼)에 비유했던 이교도로 지칭한 '이슬람'의 치하에서 분명 제1차 십자군 원정대가 탈환한 것이니, 애초의 십자군 원정 목적은 달성되었던 것이라 모든 유럽인들이 하나같이 기뻐하고 있는 상황에 자신의 깊은 속내와 배앓이를 차마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럽은 온통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신께서 원하시던 바를 이루었으니, 이제부터는 무한한 은총과 신의 축복이 한겨울 내리는 눈보라처럼 광명천지에 내릴 것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승인하고나서,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찾아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성지 순례'가 다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교도들이 차지하고 들어 앉아 영원히 찾아갈 수 없을것만 같았던 (성지 예루살렘)이 다시 기독교인의 품으로 되돌아 왔으니 백년 천년을 기다려왔던 사람들 처럼 너도 나도 '성지 순례'라는 '엄숙한 신앙생활의 과업' 대열에 뛰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예나 천민이 아니라면, 조금만 좀 산다 싶으면 너도 나도 '성지 순례'를 떠났다. 로마를 기점으로 대략 3.000km에 이르는 멀고도 험난한 고행의 길을 1년이고 2년이고 상관없이 모두들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사정은 여전히 녹녹치가 않았고, 성지를 오가는 여정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기독교 제국인 유럽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광야와 사막 한가운데 뚝 떨어진 고립된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립무원의 사막에는 여전히 광야를 떠도는 유목민들과 먼 나라를 오가면 장사를 하는 캐라반들 뿐이었으며. 그들의 대다수가 투르크인이었으니. 곧 이슬람 사람들 이었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거점 도시인 에데사. 모술. 안티오크 등의 성채를 벗어나면 그 어디건 모두가 이슬람 영역이었던 것이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로 떠나왔던 6만의 군대중에서 최종적으로 예루살렘 공성전에 참여해서 성지를 탈환하고 약속되었던 '면죄부'를 성취한 군사의 수는 1만 오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성지탈환 후 예루살렘 왕국이 들어서고 정세가 안정을 되찾자 군인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목표는 '성지의 탈환' 이었지만, 이면의 실질적인 목적은 '면죄부의 획득' 이었다. 오늘날의 가치관과는 다르게 중세 시대에는 '인간은 탄생의 순간에서 부터 시작하여 살아 있는 자체가 죄악덩어리'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가치관이 개인과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시대였기에 '면죄부의 판매'가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이미 면죄부를 획득했다고 믿는 군사들은 사방에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열악하고 황량한 사막과 광야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면죄부'를 이미 획득한 그들에게 '허울뿐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연일 울퍼대는 '성지 예루살렘' 보다는 길거리에서 빌어먹을 지언정 푸른 강물과 초원이 넘실대는 유럽의 고향이 더 절실했다. 결국 십자군은 뿔뿔히 흩어졌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고향 앞으로......'를 외치며 떠나갔다.
예루살렘에는 고작 30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병사만이 남아 치안을 유지하고 왕국을 수호해야만 했다.
'성지 순례.'
유럽에서 예루살렘 까지의 약 3.000km에 이르는 여정이 고대로 순탄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훗날의 십자군 원정대 처럼 이탈리아 대륙의 남쪽 메시나 해협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서 곧바로 예루살렘 인근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는 있겠으나, 중세 시대의 지중해는 툭하면 '신의 노여움'에 비교되는 아주아주 험난한 바닷길이었다. 아마도 열에 일곱에서 여덞은 풍랑에 좌초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선박의 수준이나 항해술이 오늘날의 입장에선 가히 상상할 수 조차 힘들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건장한 남성 장정이 약 8개월에 걸쳐 죽을 고생을 해야만 '성지 순례'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여 대다수의 성지순레자들은 1년 반에서 2년 반...... 심지어는 3년 이상을 소요해서 성지순례 길에 나섰다. 거기에다 성지순례자들은 혈혈단신으로 달랑 혼자 여행하는 여행자가 아니었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을 수록 가족까지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그러자니 당연히 수발을 들어 줄 노비들도 여행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여 1명의 성지 순례자다 하면 통상적으로 20명 정도가 함께 움직이는 대규모의 부족 이동 규모 정도였다. '1년에 5천명 정도의 성지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다녀갔다'고 한다면 적어도 10만 명 정도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많은 사람이 그 오랜 기간을 여행하려면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움직이는 비용은 과연 얼마나 들까?
제 1차 십자군 원정단 병사의 예루살렘 원정 비용이 평균적으로 추산컨데........ 오늘날 중간 간부급의 공무원 월급 8개월치가 소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치면......... 펄 펄 날고 뛰는 젊은 군인의 여행 비용이 대략 2천만원에서 3천만원 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20여명의 가족과 노비들이 2년에서 3년 정도의 여행을 하자면 그 여행경비 총액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그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가지고 다녔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숱한 치욕과 오욕으로 점철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적 약탈전쟁'은 뜻밖으로 인류 역사에는 획기적으로 아주 커다란 기여를 하는 대이변을 연출하게 된다.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메릴 린치 등등....... 이 이름들을 듣게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가?
이 이름들이 바로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면 믿겠는가?
이들은 모두 '베네치아 상인 조합'의 후손들이다. 그들의 뿌리는 바로 '십자군 전쟁'과 '성지 순례'까지 올라가게 된다.
성서의 (십계명) 중에 다음과 같은 계율이 있다.
"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이 계율은 인류문명사적으로 살펴볼 때 분명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농경사회 중심이었던 고대 시대에는 수요와 공급을 당사자간의 물물교환을 통해서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도시와 국가가 형성되면서 물물 거래에서 벗어나 통화(화폐)가 등장하는 시장경제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시장이 생겨났고, 그 사이에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물물 거래의 시대에서 교역(무역)의 시대로 발전한 것이다.
시장 경제를 통한 '이윤의 추구'와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계율'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고민의 시작은 기독교의 시작초기라 할 수 있는 고대의 유대인들 때 부터 이미 제기된 문제들이었다.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오랜세월동안 깊은 고뇌에 빠졌지만 딱뿌러지는 해답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세상은 자연스레 시장경제쪽으로 흘러 변해만 가는데..........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스러운 절대적 진리의 모음이기에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전제를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들까지 굳건하게 믿고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그러기에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진리이다. 성서의 오류를 따지거나 그릇됨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신성한 종교로서 존재의 가치와 모든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그때 그때 적당히 얼머무리는 방식으로 상황을 넘겨왔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 파는 상인들을 보고 대노한 것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 준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이용해 장사판을 벌여서 이문을 취하고, 그 이문을 종교지도자들이 상납받아서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그런 종교 행위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종교지도자들은 한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덧붙여서 노동을 하던 장사를 하던....... 벌어들인 것의 1/10을 자진 기부하는 '십일조'를 더욱 강력하게,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강조하게 되었다.
아울러 계율로 금지한 '타인의 재물을 탐하지 마라'는 '고리 사채 대금업자'라는 한정된 직업에 국한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당한 노력이나 댓가없이 그저 금전을 미끼로 더 큰 타인의 재물을 착취하는 행위를 계율로 금하고 있다'라는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수요와 공급 사이의 틈새를 노려서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장사와,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에 상응하는 이자를 받아들이는 거래 사이에....... 그 애매모호한 한계성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장사이고......... 어디까지가 고리대금업인가?
사채업자가 금전이 아닌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포함한 쌀로 되받거나, 비단을 빌려주고 이자를 보탠 비단으로 돌려받는다면....... 이는 과연 합법인가?
이런 상황이 도래하자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은 성서에 적혀있는 '타인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계율을 고쳐서 '타인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기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1천년이 흐른 중세 시대(곧 기독교 역사 1천년 이상 기간동안)에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계율이 문제가 되면 '타인의 재물'이 아니라 '타인의 아내'라 해석했고, 고리대금없자나 사채업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경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경계했다.
그러던 중세시대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유럽의 정치권력과 교황이 짜고 일으켰고) '성지 순례'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 두가지의 시대적 변화 뒤에 그야말로 제대로 된 거상(巨商)이 비로서 역사의 전면에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의 수송과 보급물자를 후방에서 지원해 주는 임무를 띠고 비로소 역사책에 기술되기 시작하는 집단으로 서로 라이벌인 '베네치아 상인 조합'과 '제노바 상인 조합'으로 대표되는 거상들이었다. 안티오크 공방전에 물자가 절대 부족한 십자군에게 약간이나마 식량을 조달해 주어서 한동안 숨통을 트이게 만든것이 바로 제노바 상인들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왔다갔다 하는 대 변혁기에 기발하게 발상의 전환을 꾀하며 교황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 바로 '베네치아 상인' 이었다.
유럽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지 탈환'이라는 커다란 숙원사업 앞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십자군 원정을 추진한 교황의 공로이자 업적' 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베네치아 상인은 교황을 면전에서 우선 추켜 세웠다. 신을 찬양하고 성지를 순례하고자하는 숭고한 신앙심이 모여서 머지않아 이교도들을 모두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온 세상에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거듭 칭송했다. 그러다가 말미에........ 성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더 많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산재해 있는데....... '오가는 여정의 숙박이나 음식이나 도로사정이나 배편 이상으로 순례자들을 가장 힘들게 괴롭히는 고통을 덜어 줄 방법을 오랜시간 고심한 끝에 교황 성하의 가르침과 윤허를 얻고자 찾아뵈었습니다'고 말끝을 흐렸다.
교황으로서도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순례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안이라고? 그거야 말로 신께서도 바라시는 일이 아니겠는가? 주저하지 말고 말해 보라.'
'순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 앞장을 서면 그의 가족과 수발을 드는 노비들과......... 어림잡아 스므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움직이게 됩니다. 성지까지 거리가 예서 3.000km 이고 오가는 기간만도 평균 2년 남짓 소요되는 먼 여정입니다. 그 먼 길에...... 먹고 자고 움직이자면 모든것이 돈이 들어가야만 하겠는데........ 그 모든 과정동안 쓸 돈을 한꺼번에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여간해서 보통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로 금과 은이나 보석들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를 노리고 순례자들을 해치는 노상강도들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형국입니다. 하여...........'
'연일 들려오는 이야기일세......... 허면 방도가 있겠는가?'
'성하께서 윤허하여 주시면 저희 베네치아 상인조합이 나서서 이를 해결할까 하옵니다.'
'어떻게?'
'여기 로마에서 성지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마다 이미 저희 베네치아 상인들이 자리를 잡아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를 이용한다면.......... 먼저 성지 순례를 떠나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순례행에 소요된다고 생각하는 금액의 부동산이나 재물을 저희 상단에서 맡아서 보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보관시킨 재화만큼의 증서(전표. 어음)를 발행하겠습니다. 베네치아 상인 조합의 직인을 찍어서 정식 문서로 말씀입니다. 그러면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기간중에 언제 어디서든 저희 베네치아 상인 사무소에 들리면 그 증서에 적힌 한도내에서 아무때고 금전으로 찾아서 쓰게될 것입니다. 재화나 재물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 그 노고를 공짜로 해준단 말씀인가?'
'아닙니다. 먼곳까지 수많은 지부를 꾸리고 사람을 시켜 운영하자면 약간의........ 아주 약간의 수수료는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성하님의 윤허를.........'
'예끼. 그거야 말로 고리대금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십계명에서도 분명하게 금지한 고리대금업을 나보고 승인해 달라고?'
'교황 성하. 고리대금업이라니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한 성스런 사업이옵니다. 성지 순례를 더욱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서운하옵니다. 신께 찬양을 올려야 하는 거룩한 사업에 어찌 장사꾼의 그릇된 욕심이 낄 수 있겠습니까? 돈놀이를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순레자들의 고충을 좀 덜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자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업무처리 비용만을 충당하겠습니다.'
'처음엔 최소비용이라고 하겠지. 점점 돈을 만지다 보면..........'
'성하께서 윤허만 해주시면.......... 매 분기마다 저희 상인 조합을 통해 발행하게 되는 전표의 기록 장부를 보여드리고......... 매 분기마다 전체 운영 자금의 1/10 을 '십일조'로 헌납 하겠습니다.'
'뭐....... 뭐......... 무엇이라고? 십일조를 내겠다고?'
'그렇습니다. 베네치아 상인 조합의 이름으로 성실하게 스스로 꼬박꼬박 십일조를 헌납하겠습니다.'
'콜. 그렇다면 어디 되는 방향으로 생각 좀 해 보자꾸나. 단........ 십일조는 매분기에 해당하는 주일에 예배당에서 공식적으로 낼 필요는 없다. 알겠느냐? 내가 긴히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업을 벌이는 것이 많으니......... 험 험........ 그쪽으로 쓸 수 있게......... 분기마다 그냥 내 사무실로 은밀하게 직접 나에게 가져오면 되느니라. 알겠느냐?'
이렇게 해서 기독교 역사는 물론 인류 역사를 통털어서 처음이자 정식으로 (금융 산업)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교황은 칙령을 발표했다.
'성지 순례를 위한 사업으로 베네치아 상인조합의 금융업무를 허가한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사업으로 결코 이익을 쫓아 남의 재물을 탐하는 십계명에 위배되는 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 채권 발행. 증권 시장. 거기에 선물 시장에 어느정도 독과점까지. 기업 인수 합병. 보험업에 까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활동하는 그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다국적 투자은행이 등장한 것이다. 계율로 절대 금시하던 일이 교황의 승인으로 처음 합법성을 갖추게 된것이다.
그동안의 중세 시대는 교권(교황)과 황권(군주)의 다툼이 끊이지 않던 전쟁터였다. 그러던 시대에 이날부로 또 하나의 새로운 권력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날 시작된 새로운 세상은 교권(교황)과 황권(군주)의 다툼 사이에 상권(자본가)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권력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베네치아 상인 조합은 '현대적 종합 금융회사'를 능가하는 인간의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었다.
실제의 그들은 글로벌 금융 산업 뿐만이 아니라 초현대적 군수산업(무기 산업. 죽음의 상인) 분야를 처음 개척한 선구자들이기도 했다. 이익이 필요하면 전쟁을 만들어 내고, 그 전쟁의 틈새에서 더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 내던 사람들이 바로 베네치아 상인들이었다.
' 제 4차 십자군 전쟁' 시기에 들어가면........... 의도는 '성스러운 성지 회복' 이요. 기획자는 '교황'이 되며 진행자는 '유럽의 군주들'이 되지만......... 그 시작의 배후와 전쟁 국면의 전환이나......... 역사에 가장 극랄하고도 치욕스럽게 기록되는 그 이면에 바로 베네치아 상인 조합의 음모가 짙게 도사리고 있었다.
교황이나 왕들이 높은 곳에 올라 위엄을 뽐내면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어쩌면 모두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미 세상은 거대 자본이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는 세상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 이야기는 차차 뒤에서.......)
그들은 집단 내에서 서로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 적은 친구로 대하라. 친구는 미래의 잠재적인 적으로 대하라. "
이 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이 사리사욕의 차원에서 절대적 불변의 가치를 지닌 '십계명'의 계율에 손을 댄것은 '타인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외에도 또 있었다.
십계명의 첫번째 계율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에도 손을 댄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결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聖戰)'이 아니라는 것은 애초부터....... 적어도 원인 제공자인 (알렉시우스 비잔틴 황제)와 이해당사자인 (교황 우루바노 2세)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잘 알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모두 끝난지 1천년 가까이 자나는 동안에 그 누구도 치욕과 오명으로 가득찬 '십자군 전쟁'을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오래전에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졌거나 기억조차도....... 더는 그 누구의 입에 다시 담기도 꺼려지는 아프고 어두운 역사였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쟁의 책임을 묻는 과정과 이스라엘의 건국문제가 불거지면서 느닷없이 '십자군' 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이 과포장되고 기독교 국가들이 하나같이 뭉치듯이 밀어부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와 이교도간의 대립'으로 재점화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 The Grusades : 십자군) 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다시 등장하고 재조명되면서 거룩하고 성스럽게 미화작업이 이루어졌다.
부러 감추어 놓았듯이 가려졌던 1천년의 시간동안 인류의 역사서에는 분명하게 십자군에 대해서 (Robbers from Europe : 유럽에서 건너온 강도들) 이라고 분명하게 정의를 이미 내려 놓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성전(聖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신의 뜻은 결코 없었다.'
어렵게 황제에 즉위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열악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자리 조차도 불안할 수 밖에.......
한때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에 근접할 정도로 위대한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던 비잔틴 제국은 몰락의 길을 재촉한 결과로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하나를 겨우 차지할 정도로 일개 도시국가로 전락한지가 이미 오래였으며, 거기에다 새롭게 신흥제국으로 급부상하며 점차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셀주크 투르크 앞에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기로에 서있던 상황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마다 참패를 거듭해야만 했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영리한 알렉시우스는 교황 우루바노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실로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 이었다. 하지만 시침을 뚝 떼고 교황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서 외면해버렸다.
다급해진 알렉시우스는 직접 로마를 직접 방문해서 교황 알현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거절 당했다.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알렉시우스는 잔머리를 굴린 끝에 로마와 인근의 유럽을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목청을 돋우어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교도들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겼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지를 빼앗기는 이런 참사가.......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기독교인들이여 궐기하라. 나는 빼앗긴 성지를 되찾기 위하여 교황님께 군사를 요청하러 왔다. 기독교인들이여 일어나라. 우리모두 달려가 성지를 탈환하자. 성지를 되찾는 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락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 농성이 뜻밖의 엄청난 광풍과도 같은 결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이제는 교황으로서도 마냥 모르는 척 하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이 모든것이 교황의 의도대로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알렉시우스의 어릿광대짓을 보면서 교황은 나름으로 이런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첬째, 이번 기회에 알렉시우스를 굴복 시켜서 아직은 제국의 기틀을 쥐고 있는 비잔틴을 차지하고야 말리라. 둘째. 기독교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를 이번 기회에 통합 시키되 로마 카톨릭을 대표하는 교황 자신의 권위 안으로 흡수 통합하고야 말리라. 교권(교황)과 황권(군주)이 분리되어 있는 유럽사회와는 다르게 동방 정교회는 비잔틴 황제의 권위하에 교회가 움직이니 그 또한 알렉시우스를 먼저 처리하면 될것이다.
셋째. 재주는 알렉시우스가 부리고 모든 이득은 교황인 자신이 차지한다는 게산 하에, 변방의 군주가 요청하는 파병요구에 맞추어 교황의 이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이교도를 섬멸하고, 예루살렘 까지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교황청에 복속 시키고 더불어 수반되는 엄청난 재물을 모두 손에 넣는다. 넷째. 이 원대한 야망의 실현에 골칫꺼리인 유럽의 군주들과 그들 휘하의 군사들을 동원함으로써 전쟁 기간동안 유럽의 안정과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며, 원정군 자체를 교황의 권위 아래 두어서 사간을 두고 차차 예속 시킨다.
결론은........ 이 전쟁의 결과로 '교황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위대하며 영원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절대 권력을 혼자 독차지 한다.'
1095년 12월 27일. 마침내 프랑스 클레르몽 교단회의에서 교황 우루바노 2세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선포" 했다.
그러자, 교황의 무리한 독선을 견제하고자 유럽의 군주들이 '교황의 십자군 동원령'에 성경의 계율을 들어 제동을 걸었다.
바로 십계명의 첫번째 계율인 '살인하지 말라' 였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순전히 억지였다.
예수께서 살아 계사던 로마 지배하의 예루살렘이나, 예수 사후의 에루살렘이나, 나아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 이전이나 그 이후나........ 기독교 역사에서 하루라도 전쟁으로 인한 살인과 방화와 약탈이 없었던 날이 과연 몇날이나 될까? 십자군 원정이 추진되던 그 순간에도 온 유럽은 국가와 국가 간에, 영주와 영주간에 끊임얺이 전쟁과 살륙이 자행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군주들은 거창하게 '살인 하지 말라'는 계율을 들고 나왔다. '교황이 시킨다고 피터지게 싸우러 나가기는 싫다'는 표현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황이 한 수 떠 뜨고 나왔다.
'이교도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이다. 사탄과도 같은 짐승을 죽이는것이 어찌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교도를 죽이는 것은 결단코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이다.' 라고 교황 우루바노 2세는 외쳤다.
아.
멘.
할.렐.루.야.
마침내 1099년 7월 15일 성스런 십자군 원정대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
굳게 잠긴 예루살렘 성문을 부수고 성 안으로 들이닥치는 순간부터.......... 42일간에 걸쳐...........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 찾아내어 끌고나와서 처참하게 살륙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와 심지어 여인들과 뱃속의 태아까지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이 모두 짐승은 아니었다.
2만 오천명이나 되는 살륙된 생명중에서 짐승(이교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수의 유대인이 몰살되었다. 그들은 결코 짐승이 아니었다.
상당수의 정교회 기독교인이 살해 되었다. 그들도 짐승은 아니었다.
특별히 종교가 없던 장사치들과 노예들과 여행자들이 피살되었다. 누가 그들을 짐승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부의 이교도(이슬람교인)가 특별히 유독 잔인하게 살해 되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영광을(알라)' 외쳤다.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울부짖으며 순교하는 그들을 짐승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2만오천이나 되는 생명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피살되었다.
십자군의 지휘부는 누구도 나타나 이 만행을 저지하지 않았고, 피의 살육은 6주간이나 지속되었다.
다만 티베리우스(레몽) 만은 이 참혹한 참상을 더는 볼 수가 없어 소수의 예루살렘 주민을 몰래 성밖으로 피신시켜 살륙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살해된 자들의 피가 기사단의 말고삐와 말안장을 흥건히 적시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살인 이었다.
그런데 교황은 그 살인자들에게 자신이 이미 약속한 (면죄부)를 내주었다.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성스런 신의 과업을 완수하였다고...........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트리폴리 백작이자 1차 십자군 원정대의 핵심인물인 레몽 3세 '티베리우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신은 핑계였을 뿐...........' 이라고..............
교황은 왜 그렇게 '유대인의 말살'에 집요하게 매달렸을까?
십자군 전쟁을 통털어 교황은 끊임없이 유대인들을 이 지구상에서 씨를 말리도록 종용한다. 이는 20세기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찌가 폴랜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이용하여 '인종 말살정책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 또는 침묵으로 묵인한 역사적 사실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숱한 신비로운 전설과 수수께끼를 낳은 '템플 기사단의 숨은 비화'에서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자신을 '서자'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교황의 입장에선 고대 유대시절부터 오랜 세월 불문율처럼 전통으로 전해내려 온 '장자권'에 대하여 어떤 상당한 컴플렉스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로마카톨릭(전체 기독교)이 탄생에서 부터 태생적으로 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한계성에 대하여 스스로 엄청난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타개하는 한 방편이 유대인 말살이라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신은 오로지 한 분 뿐이다. 유일신 '하나님'이다.
이 하나뿐인 신을 여러 종파가 자신들의 방식과 교리를 내세워 저마다 '자신들만의 신'이라 외치고 있다.
근본이 한 뿌리임에도 저들은 아예 모르는 타인 보다도 멀거나........ 아예 금수만도 못한 철천지 원수로 서로를 증오하고 영원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모두가 공식적으론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적개심을 불태운다.)
유대교. 이슬람교. 넓은 의미의 기독교( 카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수 천년 전........ 인류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분명히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을 떠돌던 아주 작은 부족인 '히브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지엄한 표정으로 '히브리 민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미래'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약속하신 일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행되고 실현되었는지가 기록으로 남겨졌으니 그것이 바로 (구약 성경)이다. 그 분의 말씀이 그대로 기록된 책이 바로 구약 성경이다.
이 구약성경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존재는 공히 모든 종교가 공감하고 인정하고 있다.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성서'는 모두가 공인하는 신앙적 근원이자 살아계신 신에 대한 그 증표인 것이다.(이슬람은 구약 성경의 상반부인 모세5경 까지를 코란에도 기록하여 인정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수천년 동안 '유일신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며 내려오던 유대민족은....... 하나님께서 장남이 아닌 차남 다윗(이스라엘)에게 장자권을 덥썩 물려주는 무리수(?)를 두시는 바람에 (이스마엘)이 무리에서 이탈하는 대 참사를 낳게된다. 문제가 붉어졌을때 하나님께서 조기 진화를 해 주셨어야만 했는데 이얘기 저얘기 들어주다 보니 어느새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져나가 수습불가의 사태를 촉발하게 되었다. 시작이야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이스라엘(다윗)은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이를 묵과해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분의 선택과 은총이 자신들에게 내려졌다고 여겼다.
하루아침에 거지꼴로 내쫓긴 이스마엘(이슬람)은 사막에서 굶어 죽었어야만 했는데, 하나님께서 방랑하는 그들에게도 나타나 우물도 챙겨주시고 미래를 약속하며 축복까지 해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실수를 깨닭으시고 이제사 제대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 라고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수천년간 다툼과 분쟁과 전쟁은 계속되었는데....... 이해 당사자인 신께서는 여전히 침묵 중이시다.
그 분께서 직접 나서셔서 중재 내지는 판결을 확실하게 내려주셔야 하는데.......... '신의 뜻(?)은 수천년 째 오리무중 이다.'
거기에다 더욱 심각하게......... 정확히 2018년 전에 '신약 성경'이 등장한 것이다. '기원 후' 라는 의미가 곧 예수의 등장을 의미하기에........
유대 땅 나사렛에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 분이 어떤 분이시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냥 보통의 유대 남성이냐? 선지자(종교 지도자)냐? 메시아(구세주)냐?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라는 존재를 많은 기독교 선지자 중의 한 명으로 본다.
하지만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존재를 메시아(구세주)로 인정한다. 모든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한 사건'의 결과로 탄생된 종교이다. 엄연히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뿌리는 같으나 교리상의 근본부터가 전혀 다른 종교이다.
더 쉽고 간략하게 다시 설명을 하자면........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예수라는 존재가 있거나 없거나' '부활을 했거나 못했거나' 아무런 이해관계나 상관이 전혀 없는 ' 그들 방식으로 그들만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없어도 그들은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 기독교(카톨릭. 개신교. 정교회)는 이들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가 반듯이 구세주' 여야만 하고. 더하여 반듯이 '부활에 성공한 구세주' 여야만 한다. 이미 그 시작부터가 '예수의 부활' 이라는 전제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기반 위에서 탄생한 종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반의 이면에는 내가 이미 제기했던 '교황의 종교적 장자권에 대한 뿌리 깊은 컴플렉스'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아주아주 오래 전 여기 이 지구상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유대 人씨'라는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의 조상중에 아주 훌륭하고 성실한 분이 계셔서 밤낮으로 애쓰신 결과로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수십만평의 옥토를 개간하시는 등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어 놓으셨다. 어느정도 뜻을 이루었다 싶으신 조상님께서는 모든 재산을 법원에 등기까지 모두 마쳐 놓으신 후, 멀리 여행을 떠나시면서 당부하시기를 '삶은 순리대로 선하게 살아갈 것이며, 재산에 관해서는 무조건 장자가 우선권을 가지고 행사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것이다' 라고 당부하시고는 어디론가 떠나가셨다.
그 후, 그 조상님은 백년이 지나고 이백년이 지나도 도대체 돌아올 기마조차 없었다.
하지만 인씨네 후손들의 삶은 전혀 지장이 없었다. 꼬박꼬박 조상님 말씀대로 장자에게 우선 상속권을 유지하면서 더불어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대의 어느날 이었다.
같은 인씨 피붙이긴 분명하지만 아주 멀고 먼 일가친척인 한 남성이....... 멀고먼 타지에서 그 조상님을 만났고 그 분의 유지를 받아서돌아 왔다고 주장을 했다.
조상님의 유지 내용은......... '그동안 인씨 가문의 장자를 중심으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잘먹고 잘살아왔으니....... 이제 그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하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인근 고을의 모든 사람들......... 김씨나 이씨나 문씨나 최씨를 가리지 않고........ 또 애나 어른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막대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다름아닌 유대 人씨 가문의 조상님'입네 하고 세번 되뇌이기만 하면 무조건 모두 1/n 씩 무조건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을 하루아침에 무조건 그냥 내어 놓으라는 격이었다.
그렇다면 하물며....... 유언장이나 공증된 재산분할 청구 서류나 녹음된 육성 파일이나 조상님의 간단한 서신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먼 피붙이가 조상님을 만났고, 직접 그분에게서 그 같은 유지를 들어왔다는 말 뿐이었다.(이거 효력 있나?)
어떻게 해야 할까?
재판으로 가야할까? 누가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법리적인 당위성이 있을까?
만약에.........
유대 인씨 가문 구성원 모두가 조상님의 그간의 은혜에 감격하여 스스로 '전 재산 포기 각서'를 한명한명 낱낱이 서명 날인해서 법원에 제출해서 스스로 재산권 포기를 하고 사회에 양도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 인씨 가문은 그 누구도 재산권을 포기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미치지 않고서야)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씨들의 재산을 빼앗을 아무런 인륜적 법적 권리가 없었음에도 '어디선가 재산을 모두 나누어 가지랬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면서 막무가내로 인씨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인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 둘 똘똘 뭉쳐서 체계적으로 대항하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자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무단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고 가로채는 처지로서도......... 인씨 가문에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굶어서 길거리에 나앉는 사정를 앞세워 사정할 법도 하지만 이미 상식과 양심의 선을 넘어선 동네 사람들은 급기야 '인씨 재산 압수 공동 분할 배분 위원회'를 설립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 위원회 위원장으로 로마 바티칸에 거주지를 두고있는 '교황'을 선출하였던 것이다.
이미 사단은 벌어졌고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어버린 상황에......... 문제의 핵심인 '저 놈의 장자권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그것이 바로 교황의 고민이었다.
조상님이 유대 인씨 가문에 적어준 등기 서류(구약 성경)가 문제였다.
방법이 없을까?
"
'상속권 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위의 상속권자를 모두 죽여버리면 해결된다'
이 같은 시도는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약 500년 전에 이미 이슬람이 분열의 길을 걷게되면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이슬람의 유일신 알라로 부터 선택받은 예언자 마호멧의 신적영역(장자권)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빼앗기)하기 위하여 실제로 상속권을 가진 마호멧의 핏줄 전부를 모조리 살해했다. 이제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의 핏줄은 지상에서 영원히 단절되었다 . 신으로 부터 기름부음(선택)을 받은 특별한 신분의 핏줄이라는 개념을 파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리되어지는 사건의 발단이었다.
상속권을 가진 핏줄을 모두 제거하면 더 이상 신의 선택이나 핏줄에 연연하여 상속권(기득권)을 따지고 드는 문제에 대해서 새롭게 지위와 권력을 찬탈한 자로서는 명분상으로라도 한결 자유로울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이 또한 알라의 영광을 위하여 숱한 전장을 함께 누볐던 마호멧의 최측근에 의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그래서 어미 뱃속의 태아까지 꺼내어 살륙함으로써 지구상에서 '이슬람의 구원자 마호멧'의 혈연은 완전하게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생리적 핏줄은 분명하게 끊어졌지만........ 마호멧으로 시작된 영혼의 핏줄이 이어져 내려와 시아파와 수니파의 전쟁은 영원히 진행되어질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살인을 계획하고 주도한 그들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지하드(성전)는 이 살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데서 처음 시작되었다.
교황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같은 이슬람의 전례를 알게 되었다.
혹시나 유대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구약 성경은 우주 저편 어딘가의 동화 같은 이야기 일뿐..........
처음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고 약속한 하나님의 기록은 모두 자연 소멸될 것이고......... 오로지 신약 성경만이 근본으로 남게되고........ 그렇게 되면 교황은..........
'신의 장자권 등기 서류건 문제에 대하여' 더이상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될것이다.
법원의 등기서류 보관소를 파괴할 생각도 해 보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서류상으로 발행된 문건이 바로 그 문제의 '유대인 등기권리증'이라서 실현이 불가능했다.
성지(聖地) 예루살렘.
신께서 유대민족을 위하여 마련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상징되는 유대교의 성지이다.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반란과 전쟁이 끊이질 않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생활의 중심을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등지로 옮겨갔지만, 그래도 예수께서 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전체 기독교에 있어서 정대적 성지임은 분명했다.
또한 이슬람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선지자 마호멧이 승천한 절대 성지이다. 초기에 이슬람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를 올렸었다. 훗날 소아시아의 전통부족들을 포섭해 나가는 과정에서 메카로 성지의 우선 순위를 옮겨갔던 것이다.
중세까지 예루살렘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잊혀져 있었다. 그저 순례자들이나 찾아가는 멀고먼 이방의 도시였을 뿐이다.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다툼이나 분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지리상의 놓여진 위치가 유럽에서 뚝 떨어진 소아시아 지역의 변방으로 예루살렘 주변의 영토는 대부분 아랍 사람들이 차지하고 생활해 오고 있었다. 아랍사람들이 점차 이슬람 종교화 되어갔지만 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커다란 도시였다. 하지만 정치적 지배세력은 아랍인 부족국가들이 바뀌어가면서 지배를 했다. 세금을 내며 거주를 했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누구도 타인의 종교를 탄압하거나 배척하거나 배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타 종교간에 절묘하게 타협과 공생 공존이 가능했던 아주 신비로운 땅이었다.
이슬람 교도들도 일생에 한번 메카를 다녀가야 하듯이 당시에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녔다. 유럽의 기독교인들도 에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왔다.
하지만 종교간의 마찰이나 다툼은 거의 없었다.
예루살렘 인근의 광야를 떠돌며 생활하는 베두인과 같은 약탈과 도적질을 일삼는 극히 일부의 불온 세력들이 사막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종파를 가리지 않고 여행객들과 오아시스 인근의 도시들을 약탈했다. 종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저 살기위해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했다. 어디까지나 소아시아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생겨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치안의 문제였다.
이러한 현실을 알렉시우스와 교황은 백배 천배 부풀려서 종교간의 전쟁으로 까지 확대 변질 시켜나갔던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 흉계에 넘어가 소아시아 지역의 이슬람인들을 야만적인 미개인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살아가는 환경이 척박한 사막지역이었을 뿐이지 그들은 결코 야만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문학과 천문학과 의학을 비롯한 과학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훨씬 유럽을 앞선 문명국이 이슬람이었다.
영화속에서도 나오지만, 사막의 무더위 속에서 물이 떨어지자 타고다니던 말을 죽여 피를 마시던 십자군에게......... 살라딘은 아이스 박스를 열어서 고산지대의 빙하에서 가져온 얼음을 건넨다. 고도의 문명국인 유럽인들은 당시까지 여름에 얼음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은 종교적 시설의 파괴와 약탈을 금지 시킨다. 살인과 방화도 금지한다.
왜?
그는 살라딘이었으니까. 살라딘의 이름으로 발리안에게 약속을 했으니까.........
<킹덤 오브 헤븐>에서 성묘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떼어내고 초승달 모양의 이슬람 표식을 내걸기는 하지만 이교도인 그가 기독교를 대하는 모습은 너무도 성스러우면서 인상적이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점령지인 성묘 교회에 들어선 살라딘은 바닥에 나뒹굴던 십자가를 손수 주워서 책상위에 다시 세워 놓고, 교회의 바닦에 묻혀있는 십자군 영웅들의 묘지를 밟지 않으려 조심조심 비켜서 지나간다. 놓여진 기독교의 시설들을 모두 그대로 놓아둔채 한쪽 구석에 양탄자를 깔고 엎드려 자신의 신에게 이날의 승리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린다.
참으로 크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이 장면들은 결코 영화이기에 특별하게 연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살라딘은 실제로 그렇게 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슬람측을 살펴보자면 살라딘 만이 그렇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예언자 마호멧이 죽은지 6년이 지난 서기 638년 2월에 마침내 이슬람의 통치자 우마르는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 우마르는 공손하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호위 무사도 없이 혼자 쓸쓸한 발걸음으로 예루살렘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더기를 걸친 이 까무잡잡한 노인을 소아시아 전역을 통일한 이슬람제국의 통치자라고 눈여겨 살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는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교회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간 우마르는 성묘 교회 안에서 울려나오는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문 앞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배가 끝이나고 신자들이 예배당 밖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 누구도 문앞에 우뚝 서서 무엇인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이 노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칼리프를 알아 본 화려한 미사복 차림의 예루살렘 대주교가 쫓아나와 성당의 열쇠를 건네주면서 내부로 들어가 기도할 것을 권했다.
그는 이 성당(성묘 교회)의 새로운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지 예루살렘의 정복자 이자 새로운 주인 이였었 것이다. 대주교는 이교도의 우두머리에게 성당의 운명이 달린 열쇠를 건넨 것이다.
이슬람의 칼리프 우마르는 대주교가 건네준 열쇠를 되돌려 주었다.
우마르는 성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이제껏 서있던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는 두 팔을 들어 알라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종교를 폄하하거나 비하할 목적으로 함부로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행위를 근절하도록 명하였다. 이후로 성묘 교회는 이슬람의 지배하에 처해 있으면서도 영원히 기독교 예배당으로 남게 되었다. 우마르 자신은 물론 이슬람의 병사들도 전쟁시가 아니면 비무장에 경건한 마음을 갖추고야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살인을 서슴치않게 저지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기독교인들 이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군 이었다.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까지 십자군이 자나가는 길목마다 살인과 방화와 약탈이 이루어졌다.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무차별적 살인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살인 행위도 정당화 시켰다.
'신께서 그렇게 하라 시키셨고 신께서 그 결과에 기뻐하셨다.' 라고 말했고 또 그렇게 기록했다.
비록 종교간의 갈등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손 치더라도....... 일단 생명은 중시되어햐 하고, 상대의 신앙에 대해서 멸시와 파괴는 삼가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이슬람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점에 있어서 상대의 신앙에 존경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정작 문제는 기독교인 들이었다.
승리자가 되면 무조건 이교도에 대해 무엇이 되었든 무조건 뿌리채 뽑아내야 한다는 그릇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슬람의 (이)자만 내비쳐도 무조건 허물거나 모조리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것이 '신이 부여하신 성스런 과업이라고 생각' 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슬람 성전(모스크)을 군마를 기르는 마굿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 마호멧의 무덤 위에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까지 해야만 했을까?
이슬람이 점령하는 기독교 도시의 교회마다 양계장을 차리고, 바티칸 성당을 소.돼지 잡는 도축장으로 사용한다면..........
아뭏튼 기독교로 대표되는 십자군은 그런 만행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영원히 승리가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거라 착각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 결과는........... ?
너무도 뻔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차지했다는 사실에 즈음해서도 이슬람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저런 부족이나 왕조들이 수시로 바뀌어가면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통치를 해왔었기 때문이다. '누가 차지한들 어떠랴?' 하는 시선들 이었다. 이넘이나 그넘이나 세금만 내면 예루살렘을 수시로 드나들거나 신앙 생활에 전혀 지장을 초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차지한 에루살렘' 보다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또 그 아래로 수십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분쟁을 일삼고 있는 이슬람 자체의 불안과 서로간의 반감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처럼 그들은 '또 그저 그려러니........... ' 했다.
그러나 이번엔 확실히 상황이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예루살렘을 기독교인이 차지하고 들어앉아 세금을 기독교인이 가져가는 것 까지는 모르는 척 묵인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를 마굿간으로 사용하고, 마호멧의 무덤 위에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슬람 교도의 자존심 문제를 넘어서..........
'알라 신에 대한 모욕이자 능멸' 이었다.
이슬람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부족과 정파를 뛰어넘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들 사이로 마침내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이슬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중동지역 시리아의 북부도시 알레포를 다스리는 총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자 장기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모술의 총독이며 영주였던 카르부가에게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보호를 받던 장기는 카르부가가 죽자 그의 가산과 지위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모술을 지배하는 영주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장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이슬람이 사분오열로 갈라진 틈을 타고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자 장기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정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기독교 세력의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 방화를 지켜보다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고 마호멧의 묘지 마저 훼손되는 것을 보고는 분노하여 사방으로 분열된 이슬람의 단합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성스러운 알라의 신전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자'고 외쳤다.
소아시아의 여기저기에서 이슬람인들이 몰려 들었고 무장을 해나갔다. 아직 군대로서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니면서, 역시 대다수의 십자군이 고향으로 돌아가 방어력이 취약해진 십자군을 기습 공격했다. 수시로 치고 빠지는 소규모 게릴라전이 예루살렘 인근의 전 지역에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위기에 직면한 예루살렘 왕조의 십자군은 대처할 방도를 찾았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에 당도하는 중요 길목마다 튼튼하게 성채를 쌓고 들어앉아 소수의 군사들로 다수의 이슬람 군사를 대적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방어진지로 불리어지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성' 같은 철옹성들이 이때 만들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둘러 로마의 교황과 유럽의 기독교 사회에 구원군 파병을 요청 하였다.
1101년과 1122년의 경우처럼 비정규 '십자군 증원군'이 예루살렘에 파병되었다. 십자군 병사들이 대부분 교향으로 돌아간 시점과 비교하자면 열배 이상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긴 하엿지만.......... 점차 하나로 규합되어가는 이슬람 세력에 비하자면 여전히 격차가 상당한 열세였다.
이 틈새를 노려서 급부상하는 또 하나의 거대세력 '베네치아 상인 조합'이 보다 본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실질적으로 상당히 비중있게 참여를 한다. 베네치아 상인의 요구이자 목표는 오로지 한가지였다. 예루살렘은 물론 비잔틴까지를 포함하는 무역특권을 보장 받기 위한 투자였던 것이다. 십자군 군대의 전투와 현상 유지에 실질적으로 막대한 투자와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에도 무역 특권을 약속했던 비잔틴 황제는 배신을 했고, 교황은 분명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어디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물자 보급이 점차로 엉망이 되어갔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이슬람 군대는 점점 강해져 갔고.......... 그와 반대로 이제 십자군 내부에선 오랫동안 곪아터졌던 불만들이 폭발했다. 십자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기의 이슬람 군대가 기독교 왕국의 하나인 에데사를 공격해 함락 시켰다.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된 십자군 원정대는 장기의 에데사 공격에 대하여,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지원을 거절했고, 예루살렘의 구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에데사가 이슬람 수중에 함락되고 난 후였다. 에데사를 점령한 장기의 이슬람 군대는 지난날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와 에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저질렀던 만행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피의 복수를 원했다. 과거보다 더 처참한 약탈과 방화와 살륙이 벌어졌다. 에데사는 십자군 기사와 병사들과 기독교인들의 피로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었다.
소아시아에 처음으로 수립되었던 십자군 국가는 그렇게 붉은 피보라 속에 사라져 갔다.
비로소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제대로 된 전쟁터에서 기어코 마주치고 만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전쟁의 이슬람측 당사자들은 모두 최전선에서 이교도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었으며. 반대로 기독교측 전쟁의 당사자인 교황과 비잔틴 황제는 아주아주 먼곳에서 마치 전쟁놀이를 즐기고 있듯이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른 것이었다.
아마도 누군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신 앞에 맹세하건데....... 단 한순간도....... 단 한번도........ 전쟁을 종용하거나 전쟁에 참여해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는 야만적 행위를 한 적이 결단코 없어. 나는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 가르치고 늘 깨어서 기도했을 뿐이야.' 라고........
에데사의 점령과 피로 얼룩진 복수극의 소식은 온 유럽을 극도의 혼란과 공포속으로 몰아 넣었다.
위대한 십자군이 세운 '하나님의 왕국'이 이교도의 손에 소멸되었다. 기독교 세계는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1145년 12월 1일 새로운 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목청을 돋구고 교서를 발표하였다.
'1차 십자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성지를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십자군 원정대의 결성'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가 경악과 충격에 빠진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미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에 의하여 성지 예루살렘이 탈환된지 50년 가까이가 흐른 지금, 성지에 대한 관심과 어떤 목적의식이 처음의 그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십자군 결성 추진은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었다.
'십자군에 동참 자체가 구원' 이라는 '면죄부'의 효력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집요한 교황의 설득과 협박에 못견딘 유럽의 군주와 영주들이 하나 둘씩 십자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이라는 거대한 함선에 수많은 군주들이 함께 승선을 하기는 했지만........ 동상 이몽........ 그들은 저마다 다 다른 이유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만 웅장한 하나의 거대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멀고 먼 원정길에 올랐다.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중에 역시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의 영지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잔틴의 군대가 직접 나섰다. 이교도와의 전쟁은 나중일이고 우선 기독교세력과 비잔틴 제국이 맞서서 전쟁을 벌이는 형국이 되었다. 비잔틴은 이제 십자군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때고 강도로 돌변하게 되면 십자군과 이슬람 군이 결코 다를바가 없다고 깨닫게 되었다. 비잔틴은 어떻게 하든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떼어놓을 궁리만 했다. 그러자 십자군 내에선 '이교도 만도 못한 배신자'라는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서로간에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사이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혼란의 시기에 이교도의 우두머리 '이마드 앗 딘 장기'가 갑자기 사망했다. 자신이 부리던 노예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장기가 죽고 없는 에데사의 탈환을 놓고 십자군 내에서 고성이 오고갔다. 각자의 생각과 목표가 시작부터 서로 달랐기에 당연한 결과의 돌출이었다.
분란속에 감행된 에데사 공략은 실패로 끝났다. 에데사를 포기한 십자군은 급격하게 줄어든 숫자의 군대를 이끌로 초라한 모습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곧 또다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한 2차 십자군은 서둘러 명에회복을 위한 거대한 싸움판을 벌일 계획에 몰두하고, 이미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지역의 특성에 맞게 현지화를 터득한 예루살렘 수뇌부는 사방의 이교도 틈새에서 원만한 타협을 견지하고자 하고.......... 연일 대립만 거듭하던 이들 십자군 원정대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감행해......... 예루살렘과 아주 사이좋게 지내오던 우방 도시 다마스커스를 느닷없이 쳐들어 간다. 하지만 허겁지겁 서둘기만 하는 통에 제대로 된 전략조차 부재하던 십자군은 그만 거꾸로 이슬람에게 대패하여 다마스커스 공략에도 실패하고 만다.
결국 원대한 꿈으로 시작된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중도에 포기하고 쓸쓸하게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모든 실패의 원인은 비잔틴의 배신 때문이다. 반듯이 복수하고 말겠다'는 다짐만을 남겨 놓고서 말이다.
한편, 밀려오는 기독교 세력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슬람의 단결을 촉구하던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죽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선 시대를 앞서가던 뛰어난 지도자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비록 장기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이슬람 역사에 남겨놓은 족적은 너무도 크고 분명했다.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장기의 죽음과 함께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며 오랜세월 유목생활을 유지해 왔다. 비록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정치적인 통치는 하고있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정교회)인들에게 함께 성지로 추앙받는 예루살렘에 대해 특별하게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있었다. 무한한 종교적 자유를 허락했다. 배교나 전교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십자군의 침공와 무차별적인 약탈과 살인과 방화를 겪으면서, 비로소 이슬람은 같은 하늘 아래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또하나의 거대한 기독교 세력이 유럽지역에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이슬람도 하나로 뭉쳐서 기독교의 무차별적인 침략으로부터 성지와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교도들을 세상끝까지 몰아내고 '위대한 알라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을 이룩해야'만 하겠다는 사명감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맑은 물이 모여들어 사방으로 강물이 되어 넘쳐 흐르고 푸른 초원과 드넓은 농토를 가지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도 소아시아 지역까지는 탐내는 이교들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아 '알라께 영광을 돌리는 정복 사업'의 야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교황과 알렉시우스 비잔틴 황제는 자신들만의 사적인 야욕을 앞세워 잠자는 사자였던 거대한 이슬람의 콧잔등에 불을 지른 꼴이 되고말았다.
'누르 앗딘'은 노예에게 암살당한 '이마도 앗 딘 장기'의 둘째 아들이다.
'범은 범새끼를 낳는다'는 말처럼 누르 앗딘은 아버지 장기를 능가하는 정치적 수완과 자질을 타고난 기재였다.
장기의 사망으로 시리아 지역을 형과 분할해서 나누어야 했던 누르 앗딘은 서쪽 지역인 알레포를 분할 받았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이슬람의 결속을 추진하여 수많은 셀주크 투르크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고 결국에는 아데사와 다마스쿠스까지를 포함하는 시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아버지 장기는 죽으면서 누르 앗딘에게 두 명의 쿠루드족 위대한 용사를 남겨주었는데, 그들은 바로 장기의 심복이었던 두 명의 용사 형제로서 형인 '나짐 앗 딘 아이유부'와 '아사드 앗 딘 시르쿠' 였다.
다마스쿠스를 차지한 뒤에 형 아이유브가 죽었다. 형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조카 (유세프)를 삼촌인 시르쿠가 누르 앗딘에게 천거하였고, 영민함과 성실함을 타고난 유세프는 곧 누르 앗딘의 눈에 들어서 최측근(비서실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날로 영토확장과 번영을 거듭한 누르 앗딘은 이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과 버금갈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누루 앗딘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리게 된 곳이 바로 이집트 였다. 파티마 왕조의 급격한 쇠락으로 거의 무주공산이다 시피한 이집트에 눈독을 들이는 지도자는 많았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을 때, 누르 앗딘은 과감하게 '이집트 통합' 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감행키로 했다.
그저 먼저 쳐들어가서 차지만 하면 그 뿐이겠는데....... 문제는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용맹한 무장은 무수히 많은데...... 그래도 한때 제국이었던,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국 이집트를 점령하고 치안을 확보하려면 그만큼 명망이 있는....... 어느정도 격이 맞는 장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유브'만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는데......... 결국 장기 왕조를 대표하는 수석 무장인 '시르쿠'가 차선책이긴 한데........ 시르쿠는 형과는 전혀 달라 다혈질에 괄괄한 성격이면서 지극히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거기다 귀가 얇아서 툭하면 하찮은 일로 분쟁을 곧 잘 만들어 내곤 했다. 이런 시르쿠를 보냈다가 혹시나 말썽을 일으키거나, 더 조심스러운것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기에 그를 따르는 군사가 무척이나 많은데 혹시나 불온세력의 꾀임에 넘어가 혹시라도 그가 딴 맘을 먹게되면........... 누르 앗딘은 오랜 장고 끝에 기어코 기발한 묘책을 찾아냈다.
누르 앗딘은 비서실로 사람을 보내 유세프를 불렀다.
누르 앗딘 - '유세프야. 내가 긴히 너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다.'
유세프 - '새삼스럽게 부탁이라니요? 폐하께서는 술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놈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을 내리시면 됩니다. 따를 것입니다.'
누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 싶구나.'
유 - '하명만 하십시요. 소인은 이미 폐하의 사람입니다.'
누 - '내가 이번에 이집트 원정을 추진하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너의 삼촌 시르쿠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해야 겠는데.........'
유 - '현명한 선택을 내리셨네요. 머지않아 이집트가 폐하의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삼촌께서 한동안 집을 비우시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이 삼촌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아무일 없게끔 집안을 잘 돌볼것입니다. 폐하께서도 마음 놓으세요. 소인이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누 - '그 그 그게 아니라.......... 유세프야. 시르쿠의 나이가 육십이 넘었는데 너는......... 그게 말이다...........'
유 - '연세는 있으시지만 삼촌께서는 지금도 젊은 군사 못지않은 체력으로 하루도 걸르지 않으시고 마술 궁술을 연마하시거든요. 또 수하의 부관들이 잘 모실것입니다. 괜한 걱정이세요.'
누 - '그래서 말인데........... 유세프야. 너가 삼촌을 모시고 이집트에 좀 다녀오련?'
유 - '이집트요? 제가요? 에이~~~~~~~~ 폐하께서 괜한 농담을......... 전쟁은 군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소인은 싸움이라곤..........'
누 - '누가 너보고 전쟁하라던? 그냥 가기만 하면 저절로 성문을 열어줄테니 삼촌도 안싸워도 될것이야........... 그냥 삼촌 안위도 생각해서 너가........'
유 - '싫어요. 소인은 절대로 아무데도 안갑니다. 소인은 그냥 여기 다마스쿠스에 콕 쳐박혀서 폐하만 받들어 모실것입니다.'
누 - '그러기에 내가 부탁이라고 안했느냐? 부탁이다. 유세프야. 이번 한번만 날 위해서 이집트엘 좀 다녀와 주렴.'
유 - '싫어요. 소인은 군인도 아니고요........ 사막을 건너 행군할 자신도 없어요. 소인은 군인이 아니잖아요? 전 전쟁이 정말로 싫습니다. 안갈래요.'
누 - '한 번만 부탁 좀 하자. 유세프야. 이번만 후딱 다녀오고 나면 다시는 너를 어디 파견 보내지 않을께. 내가 약속하마. 각서라도 써줄까?'
유 - '삼촌만 보내셔도 되니까 마음 푹 놓으시라니까요? 소인은 죽어도 못갑니다요.'
누 - '정말 못가? 만약에....... 내가 직접 이집트까지 친히 나선다면 너는 어떻할테냐?'
유 - '그래도 저는 안갈래요. 폐하께서나 속히 다녀 오십시요. 그동안 소인이 밤잠을 안자고서라도 황궁을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저는 안갈랍니다.'
누 - '넌 내 수행비서잖아. 내가 가느니데도 안 따라 나서겠다고? 죽을래?'
유 - '폐하를 모시는 신하가 어디 저 하나랍니까? 저는 장부나 기록하는 필부일 뿐입니다. 용맹하고 헌신적인 군인들을 데리고 가십시요. 저는 그냥 다마스쿠스나 돌보며 페하께서 속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누 - '다마스쿠스를 확 없애 버린다?'
유 - '그냥 다녀오시라니까요? 그럼 저는 부서진 다마스쿠스나 다시 세우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소인은 못 떠납니다.'
누 - '당장 이 자리에서 파면 시켜 벌릴까부다.'
유 - '파면 된것으로 알고 소인 물러 갑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시옵고 이집트에 잘 다녀오시옵소서............'
누 - '너만 파면인줄 아니? 네 삼촌도 함께 파면이야 파면.'
유 - '네에? 삼촌이 왜요?'
누 -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조카를 두었으니 너의 보호자인 삼촌도 반역죄의 처분을 각오해야 하겠지. 아니 그러냐?'
유 - '반역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소인이 이집트에 가기 싫다고 했다고 반역이라니요? 거기다 삼촌까지..........'
누 - '내맘이다 왜? 내가 이 상황을 삼촌에게 죄 다 설명하고 파면을 시키면......... 꼭 반역으로 몰아서 사형을 안시킨다 해도........ 네 삼촌이 허구헌날 널 불러다가 달달 들볶을테니....... 너에게는 아마도 사형보다 더 심한 고초이겠구나. 나도 알지. 네 삼촌이 어떤지를...........'
유 -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폐하씩 되셔가지고 힘도 빽도 없는 나약한 신하를......... 엉 어엉 엉 흑흑흑'
누 - '냐악하고 힘도 빽도 없는 놈이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왕에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냐?'
유 - '치사하십니다. 폐하씩 되셔가지고........ 갑니다. 가요.......... 이집트에 간다고요........... 대신 신의 이름으로 약조해 주십시요. 이번만 이라고........'
누 - '나 술탄 누르 앗딘은 알라신의 이름으로 이번에 유세프가 이집트 출장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는 동의 없이 어디로든지 출장을 강요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한다. 됐냐? 이번만은 무조건 너가 이집트에 다녀오는 거다?'
좀 치사하리만치 유세프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까지해서 기어코 그를 이집트 원정에 딸려보내기로 하긴 했지만 내심으론 십년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죽은 아비 아이유브는 무장이면서도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였다. 인품이며 재능이며 어느 하나 남에게 뒤지지 않는 그런 뛰어난 신하였다. 그것은 장기와 누르 앗딘까지 이어져 내려온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 남은 동생 시르쿠는 전혀 다른 용맹만 갖춘 단순한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기극히 단순하면서도 다혈질에 괄괄한 싸움꾼이었다. 반면 아이유브가 남겨 놓은 유일한 혈육인 유세프는 삼촌에게 부족한 다른 반쪽만을 가진 순진한 사내였다. 지극히 총명하고 예리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계집아이 만큼 온순하고 내성적이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제방에 틀어밖혀서 장부를 정리하고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소식과 정보들을 정리했다. 다마스쿠스 도성의 내부사정은 물론 시리아 전역의 상황을 손바닦 보듯이 들여다보는 재주가 유세프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중과 생각들을 함부로 쉽게 입밖에 내지 않는 철저합도 있었다. 오직 왕에게만 자문을 했다. 시장의 동향에도 철투철미하여 수요와 공급을 원활하게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어린나이 임에도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젊은 인재가 대장군 시르쿠의 조카이며 작고한 아이유브의 아들이라는 점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이런 영특한 인재의 발굴과 등장은 누루 앗딘에게도 아주 커다란 축복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르쿠가 1만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이집트를 정벌하려 나선다면.......... 유세프가 측면에서 모든 정리를 알아서 잘 해냐가줄 것이다. 첫째는 혹시나 모를 주위의 꼬득임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는 일에 대한 우려이다. 사리분별 공명정대를 최상의 과제로 생각하는 유세프를 제거하면서 까지 시르쿠가 반란을 꾸밀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불손 세력의 접근은 유세프 선에서 저절로 모두 걸러지게 될것이다. 충분히 유세프는 그럴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의 문제이다. 이집트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독거리는 일을 시르쿠에게선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면 우선 관리들 중에서 누르 앗딘에게 충성할 자와 돌아설 자를 구분하여 차후에 일어날 지도 모를 돌발사태에 대처하여야만 하며, 왕궁의 곡식창고와 재물창고를 열어 일부를 베풀어 줌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얻고 안정을 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풍요로운 이집트 재물에 대해 냉정하게 사심없이 집행 할 사람이 유세프 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라면 분란없이 잘 해낼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집트 국내외의 정세외 경제 사정을 신속하고도 명확하게 파악하여 보고서로 작성해 누루 앗딘에게 올려야지만 실태를 파악하고 나서, 후속 조치들과 이집트를 대리해서 다스릴 그곳에 맞는 총독을 선임해서 파견하게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임총독이 파견되면 인수인계를 마치고 유세프가 다마스커스로 돌아오게 될것이라는 계획이었다.
다마스쿠스를 출발한 만오천의 군사는 사막을 건너 마침내 이집트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전투는 없었다.
파티마왕조에 환멸을 느낀 이집트 백성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파티와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려 점령군에게 내다 바쳤다.
무혈입성 이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뛰쳐나와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시르쿠는 황궁을 접수하고 매일 성대하게 축하연을 벌렸다.
유세프는 그야말로 눈코뜰새도 없이 바빴다. 그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누르 앗딘'의 이름으로 이집트 백성들에게 베풀어 졌다.
이집트 점령 사실과 현재까지 파악된 1차 보고서가 사신을 파견해 다마스쿠스의 누루 앗딘에게 전해졌다.
이집트는 이제 누루 앗딘의 영토가 되었다.
시르쿠도 유세프도 하나같이 모두 예정되었던 계획표대로 어느 하나 차질없이 착착 잘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누르 앗딘으로서는 이제 이집트에 파견한 '총독을 누구로 선임'하느냐가 남은 과제였다.
'누구를 총독으로 보낼까?'
딱........ 거기까지 였다.
사람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연일 승전 파티에 열을 올리던 점령군 총사령관 시르쿠가 갑자기 폭식에 의한 급체로 사망했다.
유세프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해 사신을 파견했다. '시르쿠의 급작스런 사망과 신입 총독의 급파를 요청'하는 서신과 함께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지만 촌각을 다투는 긴급사항이었는지라 횃불을 앞세우고 사신이 요란한 발발굽 소리를 울리며 이집트 성문을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수백기의 호위대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신과 호위대의 발발굽 소리가 다 사그러지기도 전에............ 이집트의 성벽 위로 누군가의 이름이 서서히 불리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의 거대한 함성 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
라.
딘.
살라딘.
살라딘.
살라딘. 살라딘. 살라딘. 살라딘................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마침내 유세프가 몰려든 군중들 앞에 나섰다.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세프 이븐 아이유브 를 원합니다.'
'내가 바로 아이유브의 아들 유세프 입니다. 이렇게 몰려와서........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라흐 앗 딘 유세프........ 당신을 이집트의 왕으로 원합니다.'
'나는 아마드 앗 딘 장기의 아들 누르 앗딘의 신하입니다. 지금 나에게 반역을 하라는 것입니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영원히 누르 앗딘의 신하일 뿐입니다.'
'우리는 누루 앗딘을 믿을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고 왕으로 받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라딘 당신을 우리의 왕으로 원합니다.'
'불가 합니다. 나는 이미 누루 하딘에게 사신을 보내 삼촌의 유고를 보고했습니다. 곧 새로운 총독이 올 것입니다. 누루 앗딘에게 충성하십시요.'
'우리는 살라딘을 원합니다. 당신의 정의감과 공평함과 사려깊음이야 말로 알라의 위대함을 만세상에 알리게 할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이 되어 주십시요.'
'나는 반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히 누르 앗딘의 신하일 뿐입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버렸습니다. 부디 이집트를 구원해 주십시요.'
'물이 엎질러 지다니요. 새 총독이 올때까지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요. 오늘 일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총독은 오지 않습니다. 곧 누루 앗딘의 군대가 쳐들어 올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자를 지난 밤에 보냈는데 총독이 오질 않는다니............ 유세프는 자신이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모여든 군중 사이를 헤치며 삼촌 시르쿠를 모시던 장군들과 이집트의 고위대신들이 한 사람을 포박해서 앞으로 끌고나오고 있는데, 살펴보니 다름아닌 지난밤에 자신이 보고서와 서신을 주어 다마스쿠스로 떠나보낸 사신이었다.
'다마스쿠스로 술탄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사신이 포박되어 끌려오다니.......... 당신들 모두 역도가 아니요?'
'네. 저희는 모두 이미 역도입니다. 살라딘을 이집트 왕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지난밤에 반역을 도모한 역도들이 맞습니다.'
'뭣이라고요? 내가 언제 이집트를 탐냈단 말씀입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누루 앗딘의 신하일 뿐입니다.'
'살라딘 께서는 누루 앗딘의 신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누루 앗딘은 이제부터 결코 살라딘님을 자신의 신하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요? 나는 결단코 반역을 꾀한적이 없소. 알라께서 내려다 보고 계시단 말씀이요.'
'살라딘께서는 역모를 꾸미신 일이 분명 없으시지만, 저희들이 이미 살라딘을 모시고 역모를 저질렀습니다.'
'역모를 저지르다니........ 내가 모르는 역모가 어디 있단 말씀이요?'
'살라딘 께서 누루 앗딘에게 보내는 서신과 보고서가 끌려온 사신과 함께 저희 손에 있습니다. 대신 저희가 역모를 작정한 새로운 서신이 지금 누루앗딘에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뭐요? 사신과 보고서를 바꿔치기 했다는 말씀이요?'
'살라딘의 이름으로 선전 포고를 누루하딘에게 보냈습니다.'
'뭐요? 내 허락도 없이 말씀이요?'
'그렇습니다. 포고문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다마스쿠스의 누루 앗딘 왕에게. 출병한 우리 군사들과 모든 이집트의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살라흐 앗 딘 유세프님을 새로운 이집트의 왕으로 모시기로 하였소. 그간 나누었던 정과 돈독했던 관계를 생각하여 서로간에 불필요한 오해와 분쟁이 없이 각자의 영토와 나라에서 자신의 백성을 잘 다스리면서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고자 하는데 부디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이오. 살라딘 왕을 모시는 신하 일동이라고 여기 모여든 관리들과 저희 군관들이 모두 나서서 서명까지 해서 보냈습니다.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사옵니다.'
'이 나쁜 사람들. 나도 모르게 내 이름으로 그런 포고문을 써서 다마스쿠스로 보냈단 말씀이요? 모두........ 모두 용서할 수 없소.'
'모두가 이집트의 안정과 알라의 영광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통촉해 주십시요.'
'못하오. 절대 못하오. 내 즉시 다시 소상한 지금의 내용을 편지에 적어서 누루 앗딘님께 보내야 하겠스. 만약에....... 이번에도 사신을 가로막거나 서신을 가로채려 한다면 이자리에서 내 스스로 그대들이 저질러놓은 반역의 죄를 물어 자결할 것이요. 알겠소? 누루 앗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운 분이시라 이런 나의 진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실 것이요. 나는 분명히 경고 했소? 새총독께서 부임하시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시요. 명령이요. 나는 누루앗딘의 신하로서 나의 길을 갈 것이요.'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라딘님의 충절이야 세상이 이미 다 아는 바겠으나, 이미 의심을 품은 누루앗딘에게 자비나 배려는 절대 없습니다. 이제라도 대의를 품으셔야만 합니다.'
'절대 불가 하오. 썩 물러 가시요. 아니면 지금 즉시 내가 이집트를 떠나겠소.'
군중들이 모두 물러갔다.
유세프는 서둘러 장문의 글을 써서 서둘러 다마스쿠스로 떠나 보냈다. 그의 엄포가 서슬이 시퍼랬는지 아무도 이번 사신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번 떠났던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운 총독도 오지 않았다.
젊고 패기 넘치며 세상을 모두 자신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에 사로잡힌 누루앗딘의 눈에 구구절절한 살라딘의 부연 설명은 처음부터 아에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 아끼던 유세프가 배신했다는 사실에만 치가 떨릴 뿐이었다.
그렇게 이집트에 가기 싫다고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더니만은 처음부터 이미 딴 속셈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빠드득 빠드득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감쪽 같이 속았던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던 누루앗딘은 서둘러 2만오천의 군대를 모아 이집트를 정벌하라고 출병 시켰다. 처음 보낸 군대의 거의 2배나 되는 병력이었다. 이집트를 정벌해서 모든것을 불살라버리라고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살라딘의 죽은 시체라고 꼭 가져올것을 명령했다.
두문불출하면서 누루앗딘의 용서 편지와 새총독을 기다리던 유세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분노한 누루앗딘이 사신을 능지처참에 처했으며 2만오천의 군사로 토벌대를 보내서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애초 시작이야 그렇게 다마스쿠스를 떠나지 않겠다는 자신을 내쫓다시피한 누루앗딘에게 있다 하겠는데........ 지금 자신의 죽은 시체라도 끌고오라고 어마어마한 대군을 파병했다는 현실 앞에......... 유세프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전쟁을 모르는 유세프로서는 그저 누루앗딘의 대군 소식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차라리 다시 용서를 구하면서 자결을 해 버릴까?'
죽음을 택하면서 까지 용서를 구하면 아무리 누루앗딘이라도 좀 더 소상하게 내막을 알아보고는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성문을 통해 무장한 군대가 절도있는 군기를 앞세우면서 긴 행렬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집트 만세'
'살라딘 만세'
'이집트 만세'
'살라딘 만세'
구름처럼 또다시 군중들이 몰려들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삼촌 시르쿠를 따르던 장군들은 누루앗딘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터라 곧 토벌군이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방호에 주력하면서 나아가서 싸울 선발대로 이집트 주력군을 포함해 일만을 선발해 누루앗딘의 군대를 마중나갔다. 일만의 살라딘 지지군과 이만오천의 누루앗딘 군대가 맡붙었는데.......... 처음부터 누루앗딘의 군대는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들도 살라딘에 대해서 너무나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도 벌어지기 전에 누구앗딘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상당수의 병사가 투항해 왔다. 누루앗딘의 군대는 뿔뿔히 흩어졌고 지휘부는 패전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속에 철수를 감행하여야만 했다.
'알라께서 원하시는 길이 정년 이 길뿐이란 말씀이십니까?'
유세프로서도 더 이상은 자신앞에 이미 벌어진 운명에 대해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알라의 뜻대로 하소서.'
유세프로 살아온 시간을 접고........... 그는 그 순간부터 '위대한 살라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이제 이슬람은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며 역사에 등장한 살라딘이 바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속에서 분열되고 목적을 상실한채 우왕좌왕 하던 예루살렘 수비대와 제2차 십자군 원정대를 '하틴의 뿔' 전투에서 실로 완벽하게 궤멸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예루살렘 공방전'이 벌어지고......... 예루살렘은 성지 수복 90년 만에 다시금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바로 이 역사적 사건의 전 후에 포커스를 맞추어 스펙타클한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하틴의 뿔' 전투는 한마디로 (십자군 원정대)의 영혼까지도 탈탈 털어간 이슬람의 대승이었다.
살라딘의 등장이 이슬람에겐 축복이었겠지만.............
보두앵 4세의 너무 이른 죽음(24세에 나병으로 요절)이 기독교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3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살라딘은 새로운 라이벌 '사자왕 리차드 1세'와 숱한 무용담을 전투를 통해서 낳게 되지만..........
살라딘의 진정한 호적수는 바로 보두앵 4세였다.
누군가 말하길........ '보두앵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예루살렘은 적어도 100년은 더 기독교의 수중에 있었을 것' 이라고 했다.
발리안 - '당신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살라딘 - '모든것이라 할 수 있지.'
살라딘 -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신(神)의 부재(不在)가 전쟁을 키웠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 다음 기회에 시간적 심적 여유가 좀 더 생긴다면 다음 이야기를 이어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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