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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모든 시름을 던져버리고 '카타니아'에 취하다.

by 피안재 2018. 5. 6.

 

 

 

 

 

 

 

 

 

 

 

 

 

 

 

   기원전 2.800년 전,  그러니까 반만년 전에 이미 동지중해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온화한 기후는 일찍부터 지중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로 하여금 과실나무를 재배하게 하였고,  수확한 과실로 과실주를 담구고  금속을  다룰줄 알게하였으며  도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이것들을 배에 싣고 지중해를 건너 동쪽으로 나아가  곡물과 교환하였다.

  곡물 재배에서 시작된 황하문명이나  인더스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그 기원에 있어서 좀 다른 유형의 문화가 지중해에서 생겨난 것이다.  여타의 문명발상지는  풍부하게 물이 흐르는 강유역에서 발생하였지만,  온통 바위산뿐인 지중해 연안에서는 양떼를 키우던 유목민에서출발하였던 이유였다.  그들은  곡물을 재배할 토지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일찍부터 해상무역을 통하여 생존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에서 발생한 최초의 문명을 꼽는다면,  에게해를 중심으로  탄생한  '미노아(Minoa) 문명'을 가리키며  그 중심에  '크레타(Creta) 섬'이 있다.

  이 미노아 문명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그리이스 문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모든 문명은 강유역에서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탄생하였지만,  그리이스 문명만은  척박한 땅에서 과수재배와 해상무역을 통해서 독특학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것이다.  그런 결과로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독특한 정신문화 세계가  점차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사고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문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조와 문명이  마침내  지중해를 건너 여기 카타니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 시칠리아에는 청동기 시대에 시크리 인, 시카니 인, 엘류미 인 이라고 불리는 종족들이 토착민이었다.  그들이  시칠리아의 중요 지하자원인 주석을 크레타 사람들과 거래하면서 미케네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독특한 자신들만의 고대문화를 지녔었다.

  그러던 중에 기원 전 8세기 경에  본격적으로 그리이스 인들이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상육하여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이스 인들이 첫발을 내딛고 도시를 건설하며 처음 터전을 마련한 곳이 시라쿠사였다.  카르타고 인들이 모튜(식민도시)를 건설 할 즈음에는  시칠리아의 원주민들은  내륙으로 밀려나갔고  해안 지역은 완전 그리이스화 되었다.  시라쿠사이(시라쿠사), 게라(제라), 메가라 히부라이아, 낙소스 등이 그 당시에 생겨난 그리이스 도시들이다.

  20 여년이 흐르면서 세리누스(세리눈테), 아크라가스(아그리젠토), 세게스타(세제스타) 등의  도시가 더 생겨났고,  이 지중해 연안에 생겨난 그리이스 식민도시를 모두 묶어서 '마그나 그라에키아'라 부르면서  그리이스 본토에서 관리 감독하였다.  기원 전 4세기 부터는 첸투리베 등에서 독특한 시칠리아식 도기를 만들어 냈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부터는  한마디로 '로마의 곡창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에트나 화산이 재앙과 축복을 모두 내려 기름지고 비옥하고 너른 옥토가 시칠리아 전역에 널려있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는 유럽에서도 꼽히는 곡창지대인 것이다.

 비잔틴과 노르만 시대를 거치면서 시칠리아는 매우 독특하고 색다른 유럽적 요소에다가   이슬람 파티마조의 전통까지 스미어 드는  그야말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아주 독특한  색다른 문화를 가지게 된다.  바야흐로 동서 문화의 융합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밤새 내리던 비가 모두 그쳤다.

  아주아주 상쾌한 아침이 나를 맞는다.  싱그러운 이 새벽 아침............

  시칠리아를........  카타니아를  좀 더 깊이있게 느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타니아 다운  가장 활기찬 모습은 어디일까?

  날이 밝기가 무섭게 나는 숙소를 나섰다.

  부지런하고 정겨운 카타니아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카타니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활기차고  가장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로............

  피.시.마.켓.(새벽 수산 노점 시장)

 

  피시마켓은 '아메나노 분수(Fontana dell  Amenano)'  바로 뒤에서  새벽 시장이 벌어진다.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은  시칠리아를 거치면서  카타니아를 비롯한 여러도시들을 자신을 닮은 태양빛으로 채색 시켰다.

  투명한 듯 보이는 백색광의 태양빛이  프리즘(시칠리아)를 거치면서  빨주노초파남보의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들로  변화하sms 것처럼 말이다.

  카타니아는 그렇게 형형색색의 태양빛을 닮은 빛깔들로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찬연한 햇쌀이 대지를 비추기 시작하면  카타니아는  하나 둘씩  태양빛을 닮은 형형색색의 옷들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태양이 매일매일 새롭게 카타니아를 채색하는 시간이다.

  두오모 광장의  검은 코끼리 동상 분수대 기단 어귀 벤치에 앉아서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면서,  어서 태양이 나를 짖누루고 있는 싸늘한 아침 그림자를 거두어가고 나를 온전히 따사로움 속에 잠시라도 머물게 해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려 본다.  그러자 이내 아침 그림자가 점 점 짧아지더니 마침내   온 세상에 고루고루 따사로운 지중해의 햇쌀이 풍요롭게 쏟아져내리기 시작한다.

  생기를 되찾은 활기찬 카타니아의 아침 얼굴이 마침내 드러났다.

  아름답다.

  평온하다.

  이 아침에 살아서 숨을 쉴 수가 있고,  온전히 나의 두 발로 걸어서 지금 여기 카타니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조물주의 은총에 감사할 밖에........

 

 

  카타니아의 상징은  두오모 광장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검은 코끼리 동상이라 하겠다.   에트나 화산의 화산석을 이용해 까만 코끼리 조각상을 만들어 높다랗게 탑의 중간부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 탑의  기단에 걸터 앉아서 사방으로 둘러보는 카타니아는 절말로 멋진 모습이다.  하나 같이 18세기 이후에 새로 건축된 바로코풍의 건물들이 멋진 조형미를 뽐내며 빼곡하게 둘러서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유럽의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와 있는 느낌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심신을 추스르면서 마음의 눈으로 돌아보자면  사방으로 온통   그리이스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마음속으로 말이다.  그 옛날 이곳은 완벽한 그리이스의 도시였다.  지금 나의 시선이 닿는 그 모든 장소들의 발치 아래에는  고대 그리이스 건물들의 잔해와 유적들로 가득 차 있다.

  1693년의 에트나 화산 분출때  고대 그리이스 도시였던 카타니아는 도시 전체가 완전히 화산재 아래 파뭍혔다.  당시 약 2만오천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카타니아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검은 화산재에 파뭍힌 도시가 18세기에 들어서 새로 재건된 것이  지금의 카타니아인 것이다.

  도심의 어디에나 발길 아래는  고대 그리이스의 유적들이다.

  카타니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두오모의 경우도  성당의 바닦 공사를 하다가 나온것이  그리이스의 목욕탕이었다.   지금도 성당 회랑의 바닦에서  그리이스 목욕탕 유적을 실제로 볼 수가 있다.

 

 

  카타니아의 심장  '카타니아 두오모(Duomo di Catania)'는  시칠리아를 이슬람 세력으로 부터 되찾은 노르만 왕조의  루제로 1세가 '아가타 성녀'를 모시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이 성당은 1693년의 대지진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711년에 지금의 모습인 바로코양식으로 완전 재건축 되었다.

  성당 내부는 외형에 비해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그냥 방문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휴식처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가타 성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며,  또한  카타니아의 자랑인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를 비롯한 여러 카타니아 출신 유명인들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성당 정면부의 위쪽 중앙에 '아가타 성녀'의 조각상이 놓여있고,  후면의 종탑은  아름답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성녀 아가타'의  이름은 선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가테(agathe)에서 유래한다. 그녀의 순교 연대는 불확실하나, 아마도 로마 황제 데키우스의 박해 기간 도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독교의 성녀로서, 축일은 25일이며, 보통 자신의 잘려나간 가슴이 담겨진 접시를 받쳐들고 있거나 쇠집게를 들고 있는 젊은 여인으로 묘사된다.  유모·간호사·종 주조자·시칠리아의 직조공·카타니아·산악 안내인·유리 제조공·불과 날씨·처녀·양치는 여자·수유하는 여인들의 수호 성녀이다.

그녀가 죽은 후 1년이 지나 카타니아는 화산 폭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를 무척 두려워하면서 즉시 아가타의 무덤으로 달려가 화산의 불꽃을 향해 서서 아가타의 생전의 수건을 들자 즉시 화산 활동이 중지되어서 마을은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가타는 용암분출이나 지진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구해주는 존재로 공경받게 되며 또한 역설적이게도 가슴을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는 이유로 수유하는 여인들의 수호성녀가 되었다.

 

 

 

 

 

 

 

 

 

 

 

 

 

 

 

 

 

 

 

 

 

 

 

 

 

 

 

 

 

 

 

 

 

 

 

 

 

  매년 2월 5일은 '아가타 성녀 순교 기념일'이다.

  다른 한 마디로 하자면  '카타니아 최대의 축제일'이다.

  꽃과 휘장으로 치장된  아카타 성녀의 조각상을 모신 행상을 이끌고  카타니아 도심의 모든곳을 샅샅이 찾아다니는  축제 행렬이 벌어진다.  카타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거리로 나와 이날을 기쁘게 맞이한다.  카타티아의 수호성녀인 아가카 성녀의 보살핌이  여기 카나니아와  모든 주민들의 가족들 위에  큰 은총으로 늘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축제를 벌인다.

  그런데 내가 카타니아를 여행하던 1월 말에 벌써 '아가타 성녀 순교 기념 축제'가  전야제처럼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아주 우연하게 시내 투어를 하다가 목격하게되었다.

  시장통 한켠에서  요란하게 브라스 밴드의 연주가 울려퍼져나오고 있었다.

  궁금하여 쫓아가 보았다.  어찌나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는지.........

  아가타 성녀를 모신 꽃상여를 스므명 남짓한 장정들이 가죽 어깨끈을 이용해 걸머메고 시장 골목을 순회하고 있었다.  꽃상여 앞으로 이들을 이끌어 안내하는 무리가 앞서고,  꽃상여의 뒤로는  밴드 부대와  어떤 단체에 속한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구경하는 현지인들과  여행객들로 가득찼다.

  몇 몇 방송국 취재진의 모습도 보였다.

  꽃상여가 어느 상점 앞에 머물면  안에서 상점 주인들이 쫓아나와 목청 높여 환영을 하며 우두머리를 가계 안으로 안내하고,  그 가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일련의 의식이 진행되었다.  의식을 마치면  다시 꽃상여를 둘러메고 다음 상점으로 이동했다.  꽃상여의 무게가 엄청나 보인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설날 행해지는 '복을 비는 세시풍속'과 비슷하다 보면 되겠다.

  하지만 모여든 인파와 행사의 열기는 엄청나게 뜨거웠다.

  그리고......  그 꽃상여 뒤로  꼬마들이  아기자기하게 종이박스로 꽃상여를 만들고는 귀여운 퍼포먼스를 벌이 듯이  뒤를 쫄쫄거리며 따라 다니고 있다.

  이 열기로 보아  2월 5일의  축제일에는 어떤 장관이 벌어질지가 사뭇 궁금해 진다.

  하지만 2월 5일 이면..........  나는 이스탄불에 머물 시간이 아닌가.............  못내 아쉽다.

 

 

 

 

 

 

 

 

 

 

 

 

 

 

 

 

 

 

 

 

 

 

 

 

 

 

 

 

 

   ' Congratulations on your graduation greeting !'

  멀숙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꽃다발을 들고 몰려다니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오모 광장 인근의  카타니아 오페라하우스 앞이다.

  손에 샴페인 병과 잔을 든 사람이 눈에 띄는가 하면,  모여든 사람들 너머로 여기저기 머리에 월계수 가지와 꽃으로 치장된 화관을 쓴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이 궁금한 상황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졸업식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학위식을 마치고 당사자와 축하객들이 모두 광장 거리로 몰려나온 것이다.

  그네들의 오랜 전통이자 풍습이라고 했다.

  광장이나 거리 한복판에 서서 샴페인을 터트리고 졸업축하의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마신 샴페인 잔을 그대로 바닦에 내동댕이 쳐서 깨트려 버린다.  그동안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회와 국가의 배려와 보호속에서 공부에 전념했던 시간들에서 벗어나,  이제 부터는 비로소 성년이자 스스로 책임을 모두 지는 엄연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는 의미의 퍼포먼스란 설명이었다.

  낯선 여행자가 축하 인사와 함께  카메라를 내밀자  기꺼이 환한 웃음으로 화답해 준다.  '온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카타니아 여행중에 길거리에서 졸업식 축하 인사를 건네고  샴페인까지 한잔 얻어 마셔 보았다.  물론 잔을 깨트리진 않았다.  내가 졸업생이 아니니까.......

  이런게 나의 여행 방식이다.

  나는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고,  세상 모두가 나의 친구이니까.........

  알.럽.트.래.블.

 

 

 

 

 

 

 

 

 

 

 

 

 

 

  내가 자유여행만을 오로지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 때문............

  계획되지 않은..........  이런 많은 일들과.........  진솔한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의미의 지향하는 바와  타임 스케줄이야 있지만은..........  세세한 일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누가 잡아당기지도 않고.......  그저 내 눈길과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면 그 뿐이다.

  쉬고 싶으면 아무데나 앉아서 쉬고........  먹고 싶으면  커피든 맥주든  햄버거든 옥수수든  그냥 편하게 맘껏 먹는다.

  궁금하면 쫓아가 들여다 보고........  궁금하면 물어보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우리랑 똑 같다.  친절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걱정은 모두 붙들어 매도 된다.  차도  커피도 빵도  과일도......  그리고 오늘 이렇게  도로 위에서 삼페인까지........ 참 잘도 많이도 얻어먹고 다닌다.

  그러고 보면 나란 존재가 참으로  '안면 박치기( face to face)'에는  강한 면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낯선것을 낯설지 않게 여기기 위해 떠난 여행인데.......  별반 낯선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대신,  가끔은 내 주위에 항상 머무는 어떤 익숙한 것들이....... 이따금 아주 낯설게 느껴져서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경우가 종 종 있다.

 

 

 

  아주아주 너무도 편하게 모든것 다 내려놓은 채,  그냥 터벅터벅 카타니아 이곳저곳을 서성대면서  이곳의 정취에 그냥 푹 빠져보는 하루.........

  많은 카타니아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일상에 도취되어 간다.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

  시장과 도심의 번화가에만 사람이 있는것이 아니다.  오다로 떨어진 후미진 뒷골목의 작은 카페앞 노천 테이블에도  멋지게 이탈리아식으로 차려입은 멋쟁이 중년 남녀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긴다.  저절로 멜랑꼬리한 내음이 풍겨져 나온다.  파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거리와 시장,  그리고 사람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방으로 멋진 교회들,  정감어린 골목들..........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카타니아.

  공원과 분수와 머리가 잘려나간 조각상들과  허물어진 고대 그리이스의 유적들.

  도심에 있는  '로마 콜로세움'은  커다랗게 파헤쳐진 웅덩이처럼 방치되어 있다.  규모야 작았겠지만 .......  그래도 실제로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가 열리던 멋진 곤축이었는데 그만......... 화산과 지진에 허물어진고,  후대의 카타니아에 들어선 멋진 건물들,  카타니아 두오모와  우르시노성을 비롯한 대역사가 벌어질때마다 이곳의 돌들을 건축자재로 마구 가져다 쓰다보니 정작 콜로세움은 페허가 되다시피 변했다.

  마냥 걸어다니기에 카타니아는 환상이었다.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새로운 카타니아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카타니아의 자랑인 '빈센쵸 벨리니'는 솔직히 우리에겐 낯선 음악가가 이닐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카타니아에 발을 내디뎠다면 '아가타 성녀'와 '벨리니'를 빼 놓고는 카타니아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으~이~구~~~ 벨리니 삼촌.  '오페라 노르마'가 뭔지  도무지 기억에 없는데요......... ㅎㅎㅎㅎㅎ

 

 

 

 

 

 

 

 

 

 

 

 

 

 

 

 

 

 

 

 

 

 

 

 

 

 

 

 

 

 

 

 

 

 

 

 

 

 

 

 

 

 

 

 

 

 

 

 

 

 

 

 

 

 

 

 

 

 

 

 

 

 

 

 

 

 

 

 

 

 

 

 

 

 

 

 

 

 

 

 

 

 

 

 

 

 

 

 

  '우루시노 성(Castello Ursino)'은  5차 십자군 전쟁을 이끌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215~1250)이자  시칠리아 왕을 겸했던 프리드리히 2(1194~1250)가 세웠으며 당시에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여겨졌다. 세운 목적은 하나,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에서 지중해를 건너와 약탈을 일삼는 해적들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이를 막기 위하여 카타니아의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철옹성이었다. 카타니아에서 수도가 팔레르모로 이전하면서 점점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또 화포 중심의 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군사적 기능이 약화되자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1693년의 지진을 견뎌냈다.  카타니아의 도심 전체가 용암과 화산재에 모두 파뭍혔지만 유독 이 성채만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흘러내린 용암은 카타니아 전체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했으나 에트나 화산 폭발과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지금은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직선거리로 약 2 km 안쪽에 자리 잡았고  주위엔 거리와 상점들로 둘러싸여 있다. 17세기에 만든 해자 또한 화산재로 채워졌다. 지난 역사를 기억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참으로 신기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성 안에는 카타니아시립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이 성채를 바라보면서.......  이 도심의 중심지역인 이곳이 과거에는 바닷가 해안 바위벼랑이었던 것이다.

 

 

 

 

 

 

 

 

 

 

 

 

 

 

 

 

 

 

 

 

 

 

 

 

 

 

  'Carretto Siciliand' 라 불리는 것이 시칠리아에는 있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왕족과 귀족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타던 마차가 유럽에서는 흔하였지만,  같은 마차라도 '시칠리아의 카레또'는 좀 특별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교통수단으로서의 커다란 사륜 마차뿐만이 아니라,  오렌지. 생선. 치즈나 기타 과일들을 실어나르던 인력거 처럼 생긴 작은 마차에도 온통 알록달록하도록 독특한 무늬와 채색을 입혔다.  시칠리아인들과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문화유산이다.  밝은 색상의 전통 문양과 그림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실용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소품으로도 크게 각광받고 있다.

  이 화려하게 채색된 마차를 '시칠리아 카레또'라고 부른다.

  골목 투어를 하던 중에 아치 형태의 거다란 문 안쪽의 너른 공터에  카레또가 놓여 있었다.  궁금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 성당의 뒷마당이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만든 가방이며 액세서리며 타일이며 장난감이며 미술작품이며 타일조각이며.......  매우 다양한 물건들로 소박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나 하나의 물건마다 만든 사람의 정성과 땀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사람들과 이웃인지 손님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느 멋진 미술 전시회에 초대받아 온 느낌이었다.

  이런것이 카타니아적인 것이구나 하는 작은 탄성이 마음속에서 울려나왔다.

 

 

 

 

 

 

 

 

 

 

 

 

 

 

 

 

 

 

 

 

 

 

 

 

 

 

 

 

 

 

 

 

 

  카타니아의 벼룩시장과 야시장.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 인사 나누고 이야기 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던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남아있는 카타니아 이야기'를 모두 풀어 놓기에는 아직도 장황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어서......  부득이 이쯤에서 카타니아 여행 이야기를 줄여야만 하겠다.  분량이 너무나 많아서이다.  아쉽지만 말이다......  남겨 놓은 이야기는  언제고 내가 다시 시칠리아를 다녀오게 되면 그때에.......

  저녁 무렵에 '포르타 가라발디(Porta Garibaldi)'에 다녀온 이야기로 카타니아와 작별을 해야만 할까보다.

  성채 도시였던  카타니아의 남쪽으로 향하는 가장 중요시된 성문이 바로 '포르타 가라발디' 이다.  팔레르모의  '포르타 누오보'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카타니아 두오모(중앙 광장)에서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한참을 가다보면 웅장한  성문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통일 영웅  가라발디의 이름을 딴 성문이다.

  오가는 길과 골목들도........   깜찍하면서도 앙증맞은 중세 기사 캐리컬쳐 간판으로 치장된 상점이 너무도 예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불쑥 나타나신 할아버지.........  '그거 내가 직접 만든 것인데......  어때?  멋져 보이는가? 자네 어디서 왔어?'  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나던 산책길.........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혹여,  카타니아에 가시거든  '포르타 가라발디 인근 산책을 꼭 해보세요.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아주 멋지거든요.' 라고.........

  '카타니아 두오모를 등에 지고 똑바로 앞으로 나가시기만 하세요.'

 

 

 

 

 

 

 

 

 

 

 

 

 

 

 

 

 

 

 

 

 

 

 

 

 

 

 

 

  유독 아쉬움이 참으로 많이 남았던 '카타니아'와 '시라쿠사'.

  언제고 다시 갈 수 있기를...........

  두 번 이용했을 뿐이지만  처음부터 단골이 되어버린  카타니아 숙소 앞  피자집.  그집 피자 정말 맛있었다.  이틀에 두끼니 저녁을 멋지게 해결해주었던  단골 아닌 단골 가계..........  피자 만드는 시범까지 보여주던 직원들........ 친절한 꼬마 할아버지.......

  벨리니 동상이 있는 광장의  맥도널드 길 건너편  케밥집.......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먹던 기억.........  황홀한 맛이었다.

  카타니아 역 광정의 간이매점의 카푸치노 커피 한잔........  서서 마시는 그 정취와 심오함 마저 느껴지던 카푸치노의 진한 향기.........

  알 럽 트래블.  알 럽 카타니아.

  꼭 다시 만나자.  땡큐.

 

  카타니아 폰타나로사 공항에서 몰타로 향하는 심야 비행기에 올랐다.  그나마 어렵게 겨우 구한 비행기 티켓 이었다.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자정을 넘긴 시간에 나는 덩그러니  몰타 공항에 내던져 졌다.

  그래도 좋다.

  여행은 늘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은근 슬쩍 무언가에 설레는 기대감으로 가득찼을테니까..........

  나는 이런 내 방식대로의 여행이 한 없이 좋다.

  (알 럽 트래블 / 몰타)

 

 

 

 

 

 

 

 

           --------  (이탈리아 여행기)를 모두 마치면서.......  다음에는  (몰타 여행기)가 이어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