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야. 유레카. 유레카라고..........'
백주 대낮에 멀쩡하게 생긴 사내가 알몸으로 도시 한복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 자신이 알몸 상태라는 것도 모른채 '유레카'만을 외치면서 환호하듯이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채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삼백여년 전에 그리이스의 영역이었던 시칠리아라는 섬의 '시라쿠사'라는 도시 '오르티지아'라는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저 백주대낮에 벌거벗고 날뛰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지역사회에서 낙인찍힌 망나니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지성인 반열에 올라있는 아주 멀쩡한 사람이었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해야겠다.
'찾았다. 내가 마침내 찾아냈어............ 찾았다고............'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말고 뛰쳐나와 그가 찾아냈다고 외치는 이 사건의 발단이자 결과를 후세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부른다.
사실 '부력의 원리'는 그 이전에도 이미 등장했던 학설이었으나 '목욕탕 사건'으로 인해 그의 이름과 함께 인류역사에 거창하게 기록으로 남게된 것이다.
아울러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논리상의 이 '부력의 원리'를 이용하여 물질의 밀도와 부피를 알아냈다손 치더라도, 그 차이의 계산에 사용된 물의 양의 차이를 환산해서 측정(환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너무도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린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배경이 된 사건의 발단과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난해한 속내용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재구성해보기로 한다.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히에론 왕은 멋진 왕관을 가지고 싶어서 연금술사 장인 개딱지에게 14kg의 순금을 주어 왕관을 만들게 했다. 몇달이 지나 개딱지가 멋진 황금 왕관을 만들어 히에론에게 받쳤는데....... 왕에 생각에 아무래도 개딱지가 순금의 일부를 떼어먹고 다름 금속을 함께 녹여 넣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떠나질 않았다. 저울을 가져다 무게를 재어보니 틀립없는 14kg이 나오긴 나왔다. 저울 숫자가 틀림없이 나오긴 나왔지만 그렇다고 의심이 풀린것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왕은 동네에서 제일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아르키메데스를 불러다가 '이 금관의 무게가 14kg인데 모두 24k 순금이 맞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찰랑찰랑 물이 그득한 욕탕에 아르키메데스가 몸을 밀어 넣자 욕탕 밖으로 물이 넘쳐 흘렀다. 그는 문득 '얼마만큼의 물이 흘러 넘치는 거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고, 탕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결론에 도달한 것이 바로 '내 몸뚱이의 부피만큼 넘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뭐 요즘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수준이라 하겠으나 2천삼백년 전에는 대수학자나 풀 수있는 어려운 난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요 정도에서 그쳤으면 산수 좀 하는 초등학생이었겠으나, 그는 그리이스의 대수학자였으니 뭔가가 달라도 좀 달랐을 것이다. 하여 그는 탕속에서 장고에 들어갔다. 두 시간 후.........
예를 들어 키가 197cm에 몸무게가 82kg인 통뼈를 가진 마른명태와 키가 169cm에 몸무게가 82kg인 복돼지가 각자 목욕탕에 들어간다면 누구의 탕에 물이 더 많이 넘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같은 몸무게 이니까 같은 양의 물이 넘칠까? 절대 아니다. 뼈와 살은 질량에 있어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물은 살이 쪄서 표피면적이 더 넓은 복돼지의 욕조 물이 더 많이 넘치는 결론을 확인한 아르키메데스였다. 그리고 그것이 곧 '유레카'였다.
잔잔한 수조에 14kg의 왕관을 집어넣었을 때 23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졌다면, 다음에 다른 14kg의 어떤 모양이든 무게만 정확한 순금 덩어리를 넣었을 때에도 23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진다면 양쪽 순금의 농도는 같다. 하지만 순금에선 23방울이 떨어졌는데 왕관에서 19방울이나 혹은 30방울의 물이 떨어졌다면 그 차이만큼 다른 무엇인가가 섞인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이기는 한데...... 무슨 수로 그 양의 차이를 환치할 수 있느냔 말이다.
하여,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천재성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하나로 치부하는 것은 매우 애통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정말로 위대한 수학자가 틀립없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말했다.
'나는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어.'
요즘 영약한 애들은 '물구나무 서면 되지' 하겠지만..........
'지구보다 큰 지렛대와 받침목만 주면 간단하게 지구를 들어 올려 보여주지' 라고 그는 대답했다. 논리상은 분명 맞는 말이다.
나사선의 원리를 이용해 펌프를 만들어낸 사람이 그 였고, 그가 창안한 구분구적법은 오늘날의 수학 '적분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이미 그리이스는 쇠락하여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갈 무렵, 시칠리아가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절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지중해로 문을 돌려 메시나 해협을 건너 온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벌였던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시기였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를 지지하였으며,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던 아르키메데스에게 요청하여 지렛대와 도르래를 이용한 투석기며 기중기 등 가공할 신무기들을 만들어 카르타고군을 지원하였다. 고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로마군은 우회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트로이 목마 전술'을 응용하기로 한 것이다. 싸움에 지친 로마군은 서둘러 퇴군하였고, 승리에 도취된 시라쿠사 사람들은 밤새 축제를 열고 술파티를 벌였다. 그러자 술파티가 끝나갈 즈음에 로마군이 되돌아 와서 마침내 시라쿠사 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모든 로마병사들은 신무기들로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카르타고를 지지한 아르키메데스의 처형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총사령관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수학적 천재성과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재능을 아껴서 로마를 위해 쓰고자 '그를 꼭 살려서 내게 데려 오라'고 병사들에게 명했다. 명령을 받는 병사들이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실에 도착하였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패전국의 전범인 처지로 로마의 병사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것에는 아랑곳 않고 땅바닦에 커다랗게 원을 그려놓고 작대기로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면서 계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지친 군관이 다가가 사령관의 통지서를 전달하려 하였는데.......... '에이 C8....... 한참 계산하고 있는데......... C8 왜 원을 밟고 지랄이야 지랄이.' 하면서 들고 있던 작대기로 군관의 뺨을 후려치고 말았다.
싹.둑.
아르키메데스는 그렇게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카르타고의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고 죽은 그리이스人 이었다.
시라쿠사(Siracusa).
처음 이번 여행을 게획하고 준비하면서부터 시칠리아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으며, 또한 가장 크게 기대를 했던 곳이었다.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시칠리아에서 단 한 곳을 선택하라면........ 나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단연코 시라쿠사를 꼽았을 것이다.
'한 때는 그리이스 였으며 내노라하는 바로코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이며.......... 거기에 오르티지아의 낭만까지.........'
키케로가 말하길 '시라쿠사는 세게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그리이스적 도시' 라고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 때는 그리스 본토의 심장인 아테네 보다도 더 크게 번영과 영광을 누렸다는 시라쿠사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카타니아에서 시라쿠사를 다녀오기는 버스나 기차가 비슷하지만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좀 더 편리하다고 하겠다. 시간은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카타니아 센트럴 역 광장의 가판대에서 진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고나서 시라쿠사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시라쿠사의 역사는 곧 지중해의 역사다.
지중해를 스쳐간 수 많았던 그 모든 민족들이 탐냈던 도시가 바로 시라쿠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기원전 8세기 그리이스인들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지금으로 부터 2천8백년 전의 일이었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이스 본토 이외에 이탈리아 반도의 남단(시칠리아)를 포함하여 지중해 유역에 '마그나 그라에키아'라는 광역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시라쿠사가 있었다. 시칠리아의 풍부한 자원과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연결되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에 힘입어 일찍부터 최고로 각광받는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해 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오르티지아(Ortigia)가 있었다. 오르티지아는 시라쿠사의 아주 가까운 앞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고대 그리이스 시대엔 바로 이 섬을 중심으로 모든 문화와 문명이 들어서고 번성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라쿠사의 고대역사는 바로 오르티지아섬의 역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는 세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화 되었으며, 이 오르티지아 지역을 그냥 (구도시)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대에는 분명히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섬이었다.
시라쿠사 중앙역에서 나와 너른 움베르토 1세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저절로 다리를 건너 오르티지아에 당도하게 된다.
시라쿠사의 역이나 버스터미널(인근)에 내리면 시내버스도 있지만, 대다수 자유여행자들은 그냥 걸어서 오르티지아까지 이동한다. 시간은 약 20분 정도.
육지에서 섬을 건너간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여타의 도시에서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듯이 그냥 무덤덤하게 다리를 건너면 노천 카페들이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광장이 나오고 그 앞에 수천년의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티지아 섬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아폴론 신전(Tempio di Apollo)'이다.
아폴로 신전은 현재 거의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
태양의 신 아폴로를 모시기 위해 기원전 6세기경에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세원진 신전이었으나, 로마제국이 이곳을 점령한 후,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르티지아섬의 많은 교회(성당)들과 공사를 벌일 때마다 마치 채석장처럼 신전의 돌들을 가져다 사용하면서 신전은 앙상한 뼈대와 잔해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초적인 터의 형태는 완벽하게 남아있고 내벽과 외벽의 구분이 드러나 있어서 과거 번영을 누리던 시기의 아폴로 신전을 상상해 내기에는 무리가 없어보인다. 이 지중해의 바다 한가운데 벼랑위로 도리아식의 멋진 신전이 우뚝 솟아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도 위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멋진 그리이스 신전을 말이다.
'아폴로 신전'을 지나 우측으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로코식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오르티지아의 속으로 들어섰는가 싶으면 이내 아리따운 여신의 조각상이 서있는 아기자기하리만치 몌쁜 분수대와 작은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의 이름이 바로 '아르키메데스 광장'이다. 그가 이 부근의 목욕탕에서 느닷없이 '유레카'를 외치면 알몸으로 뛰어다녔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분수대 위의 아름다운 여신의 이름은 '다이애나' 이다. 그래서 이 분수를 '다이애나 분수'라 부른다. 혹시나 '영국 황실의 비운의 황태자비 다이애나'를 떠올리는 여행객들이 있다는 이야기와, '다이애나라는 여신이 어디 있었나' 하는 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다이애나'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로마신화가 그리이스 신화를 리메이크 한 것이라면 다이애나는 바로.......... 그리이스 신화속에 나오는 너무너무 매력적인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을 뜻한다. 이탈리아식 다이애나 분수는 고대 그리이스식 아르테미스 분수인 것이다. 아르테미스는 영원한 처녀성의 상징인 여신이다. 거기에 사냥과 숲과 달의 여신이다. 참으로 매력이 넘치는 여신이 아니겠는가.
오르티지아는 참으로 아름답다.
어느 골목 어느 광장에 들어선 건물이건, 하나의 창문, 하나의 발코니, 하나의 테라스 마다 시라쿠사만의 무엇인가 남다른 멋이 느껴진다.
시라쿠사는 '매혹' 그 자체이다.
그리고 나서..........
움베르토 거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그리 오래지 않아 넓은 광장이 나온다.
참으로 멋진 '두오모 광장(Piazza Duomo) '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멋진 광장을 볼 수 있을까? 내 기억으로 단연 최고 압권이다.
주변은 온통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멋진 바로코식 건축들로 가득하다. 도심 한가운데 건물들 사이로 만들어진 광장이지만, 조형물에 가로막힌 답답한 느낌이나 한정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치 멋지게 조각된 라임스톤의 숲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시라쿠사 두오모(Duomo di Siracusa)'.
팔레르모의 몬레알레 대성당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쌍두마차 바로코 건물로 널리 알려진......... 실로 너무도 아름답고 경이롭기까지 한 성당이다.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보다 여기 시라쿠사 두오모가 훨씬 아름답고 너무도 멋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라임스톤이 전해주는 묘한 색감과 질감'이 너무도 신비롭고 아름답고 멋지다.
팔레르모의 라임스톤 보다 남쪽 시라쿠사의 라임스톤 색감과 질감이 훨씬 부드럽고 밝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감흥은 다음 여행지 '몰타'에서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보게 된다.
기원전 8세기경에 지중해를 건너 시라쿠사에 도착한 그리이스인들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480년에 이곳을 노리고 침략해 온 카르타고의 침략을 그리이스인들은 모두 합심해 물리쳤으며,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도시의 한복판에 도리아식으로 그리이스 신전(神殿)을 세웠다. 아테나(Athena)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기원전 415년에 그리이스는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포네소스 동맹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으며, 두 동맹 간에 벌어진 전쟁(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를 차지했다. 이 전쟁에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를 지지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아테네가 시라쿠사를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도 전 도시인이 합심하여 물리쳤다. 하여 비록 시라쿠사는 그리이스 본토에서 멀리떨어진 '마그나 크라에키아(식민 도시)'였으나 본토의 아테네나 스파르타에 못지않은 자부심과 긍지로 똘똘 뭉쳐진 지중해 건너 건설된 또 하나의 그리이스였던 것이다.
기원전 398년에는 '인류 역사의 대석학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하고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시라쿠사 역사에서 아주 특별하게 기억되어야 할.......... 사도 바울이 로마로 선교여행을 향하던 중 여기 시라쿠사에 들려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 시라쿠사에 전파된 기독교는 점차 온 시칠리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시라쿠사인들은 오르티지아 도심 한복판에 서있는 그리이스 신전을 교회(성당)으로 개조하게 되었다. 고대 아테나(Athena) 신전터의 남은 골조를 활용해 빈 공간을 채우는 식으로 만든 초기 교회 건축이었다. 이 건물은 이미 신전이던 시절부터 그리스는 물론 소아시아의 에페소,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까지 알려져 전 지중해에 유명한 건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 위대한 건축물은 실로 2천오백년 전에 처음 시작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인 것이다.
그 후로도 시라쿠사가 속한 시칠리아는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이번엔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가게 되었다. 서기 878년에는 결국 이슬람이 시라쿠사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 교회 건물은 자연스럽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1085년에 노르만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에는 또 다시 순리처럼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면서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청으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현재는 '그리이스 정교회'에 속한 기독교 종파로 성당의 곳곳에서 십자가의 상하좌우 길이가 같은 그리이스식 십자가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가 있다. 노르만 왕국은 성당을 확장하여 그리이스 신전의 골격 위에 거대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목조(木造) 지붕을 올려 크고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으며 벽면의 여러곳에 모자이크를 설치했다.
1693년 대지진으로 성당의 정면 부분이 커다랗게 손상되자 아에 대대적 공사를 벌여 부서져 정면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었다. 바로 현재의 모습이다.
이 처럼 시라쿠사 두오모는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이슬람 모스크, 기독교의 교회로 변모하면서 사용된 그 자체로만도 역사의 숨결이 한시도 멈추지 않는 위대한 건축물인 것이다.
유명한 일본인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결코 좋아하지는 않지만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임에는 분명)는 시라쿠사 두오모에 관해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라는 책자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시라쿠사 두오모는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고대(古代) 신전이었던 전력(前歷)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라고 했다. 나도 100% 공감하는 부분이다.
카톨릭 교회에 의해 '성녀'로 추앙받은 분들이 상당수가 있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시칠리아에서 태어났거나, 시칠리아와 연관되어 높이 추앙받고 있는 몇몇 분들을 일상에서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내가 말하는 '추앙'을 이곳 현지인들을 살펴본 결과로 신앙적인면에 있어서는 가히 적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성녀 루치아(Santa Lucia)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살았던 인물이다.
어머니가 병들자 카타니아에 있는 교회 묘지에 찾아가 어머니가 낫게 하기 위하여 평생 하느님의 종으로 남을 것을 다짐했고, 결혼을 거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렇지만 다짐 전 상태에서 이미 약혼한 상태였는지라 약혼자가 루치아 성녀를 고소했다. 결국 루치아 성녀는 감옥에 갖히게 되었고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다 끝내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를 거절하여 두 눈을 뽑히고 매음굴에 버려치는 처형을 받게되었다. 하지만 천사들이 나타나 눈을 돌려주었고, 신기하게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매음굴로 끌고 갈 수가 없게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마녀라 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불을 붙였지만 그녀는 타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는 칼에 찔려 순절하였고 후에 기독교 성녀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루치아 성녀를 상징하는 그림 등에서 그녀는 대개 한 손에 자기 안구가 들어있는 잔 또는 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녀 루치아는 시력을 수호하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 아가타(Agata)는 팔레르모와 카타니아가 모두 그녀의 출생지라고 주장할 정도로 시칠리아에서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아가타 성녀는 황제 데키우스가 시칠리아를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로마인 장관이 한 눈에 반하여 접근해오자, 이미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살기로 약속했노라고 거절했고, 종국에는 감옥으로 끌려가 온갖 고문 끝에 마침내 유방이 잘리는 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 뒤 화형장으로 끌려갔으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자마자 불을 붙이자마자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 이 현상에 놀란 집정관의 부하 군인들이 화형을 중단하고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그녀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아래의 성녀 사진 2장은 퍼옮)
유럽의 크고 이름난 교회를 찾아가보면 놀랍게도 시체나 유골(뼈)을 전시하듯이 그대로 드러내놓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나 여기 시라쿠사 두오모의 경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태평양 연안의 고대 원시부족에게서나 볼 법한 그런 풍광이 섬찍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왜 그랬을까?
중세시대의 유럽사람들은 명망있는 성직자의 유골에 신통한 힘이 간직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묘사되었던 바 대로 히틀러(나찌)의 군대가 성물(예수의 유품)에 힘입어 어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자 '성궤' '성배'를 찾고자 혈안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로 유럽사람들의 생각속에는 그러한 어떤 절대적 믿음이 아주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무수한 헛소문과 무수한 사기행각이 온 유럽을 실제로 휩쓸고 지나갔다고 한다. 초기 십자군 전쟁 당시 실제로 '롱기누스의 창'이 역사 전면에 재등장하지 않았던가.(이 내용은 아르메니아 여행기 편에서 세세하게 이미 다루었었다)
예수는 지상에서 여느 왕이나 황제처럼 살다가 간 것이 아니었기에 그와 연관된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흔히 말하는 것이 처형장에 끌려가면서 입었던 옷 '성의', 최후의 만찬에 썼던 '성배', 옆구리를 찔러 생사를 확인한 '롱기누스의 창' 정도가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거나 가져다가 사기를 치려면........ 십자가 처형때 머리에 썼던 가시 면류관 '성관', 십자가 맨 위에 써 붙였던 직함인 모든 왕중의 왕이라 적힌 '성패', 목수로 재직시 썼던 대패 '성기',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려 타고 다니던 당나귀의 순혈을 보유한 '성마' 등등 가져다 이런저런 스토리를 맞춰 사기를 칠 꺼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가 있겠다. 어쩌면 작금의 유럽 사회에서도 먹히지 않을까?
그래서였을까?
성인(이름난 성직자)의 유골은 신비로운 힘을 가진 성물로 여겨져서 대형 교회와 도시들간에 이 유골을 서로 차지하려고 온갖 음모와 다툼이 극에 달했다 한다. 성인의 유골을 모신 교회에서는 기적이 자주 일어나고 신도들의 기도가 잘 받아들여진다고 믿었다. 임종을 앞둔 유명한 사제를 서로 자신의 도시나 교회에 모시고 와서 미리 훗날의 유골을 차지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무덤의 유골을 도굴해 가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 모셔진 유골을 훔쳐가고, 사실이 드러나면 그 시신의 소유권을 두고 지역간 분쟁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한마디로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성인의 유골을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이었다.
이런정도라면 예수는 부활을 하기 싫었어도 부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닐까?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그의 시신은 온전하게 한 순간도 남아있었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이 지상에는 그가 머물곳이 어디에도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중세 시대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상을 들끓게 한 어마어마한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후 로마의 탄압은 극에 달했고 12제자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지하로 잠적했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너무도 극랄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초기 기독교의 부흥은 유대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의 세력이 비교적 미미한 변방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 사후 기독교가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려낸 곳은 알렉산드리아, 에배소, 데살로니카, 안티옥 등이 주요 거점이었다. 그 중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경우는 313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여지고 난 후 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구심점 역활을 톡톡히 해낸 역사적인 도시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인들의 성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도난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도난당한 사람은 사람이 아닌 교회였고 도난당한 물건은 한 구의 시신이었다. 누군가 할짓이 없어서 교회에 안치된 시체 하나를 훔쳐간 것이 아니었다.
핵심은 그 시신이 과연 누구의 시신이었냐 하는데 있었다.
대대적인 수사와 온 유럽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재적인 수배령이 떨어졌다. 주먹만한 크기 이상의 모든 이동물품에 철저하게 조사가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리아는 해상무역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밖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와 해상로가 차단되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유대교는 유대교대로, 정교회는 정교회대로, 또 이슬람은 이슬람대로 철저하게 조사와 추적에 착수했다. 자칫 덤탱이를 쓸 경우에 엄청난 댓가를 치룰 각오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범인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와 절대적 권력을 차지한 (베네치아 상인 조합)이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강하고, 심지어는 교황의 권위 앞에서도 떡 하니 서서 버틸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진 베네치아가 왜 '시신 한 구'에 그렇게 무모할 수도 있는 목숨을 걸었을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교황 아니면 베네치아 상인 뿐' 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극히 미미해졌다. 그렇다면 결론은 베네치아 인데.......... '심증은 가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급부상한 막강세력 베네치아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온 유럽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에 이르는 모든 해로와 육로를 철저하게 차단시켜버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내 걸렸다.
그러나 모두 다 소용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지나자 베네치아가 먼저 아주아주 성대하게 축제를 벌였고 그 훔쳐온 시신을 세상에 공개했떤 것이다.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완공 기념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난당한 시신은 예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마르코(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의 시신이었다.
세상의 무역을 좌지우지하는 신흥 해상왕국 베네치아였지만, 역사가 짧은 베네치아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외부에 내세우거나 자랑할 만한 인물이 전혀 없었다. 하여 베네치아 상인 조합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마가의 시신을 훔치기로 작정했다. 마침내 시신을 손에 넣은 그들은 각 종교와 모든 유럽이 나선 차단막을 통과하기 위하여 마차위에 실은 거대한 통속에 시신을 감추고 그 위에 도축장에서 막 도축한 돼지고기들을 넣어 덮어서 수많은 검문소들을 통과해 마침내 베네치아까지 무사히 운송할 수가 있었다. 유대인이나 이슬람인들처럼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이제 막 도륙하여 피로 범벅된 돼지고기를 좋아할 리가 만무했던 까닭이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은 처음부터 성인 마르코의 납골당으로 지어진 건축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건축이 처음 계획되기도 전에 이미 시신을 훔칠 계획을 먼저 완성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집요함과 철저한 사전 계획성이 베네치아 상인의 기본 성격이다.
'마가(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 이다.
성자의 시신 도난 사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위에서 언급한 성녀 루치아(성녀 산타 루치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모진 고문 끝에 두 눈을 빼앗겼고, 마녀라고 화형도 당할 뻔 하였으며 결국 칼에 찔려 순절하는 온갖 고역을 다 당해본 루치아였는데, 장례를 치룬지 오래되지않아 누군가가 묘지를 파헤쳐 시신을 훔쳐가고 만 것이다. 시라쿠사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총력을 다해 시신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도둑들은 오래전 부터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해온 비잔틴 사람들로 결국 루치아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밀반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의 도둑질을 숨어서 살피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또 몰래 약탈하여 가지고 가 버렸다. 그러자 또 기다렸다는 듯이 '도둑놈의 도둑질한 물품을 흠치는 것은 절대로 도둑질이 아니다' 라는 이상한 명분 아래 베네치아에 안장된 루치아의 시신을 이번엔 나폴리가 또 훔쳐간다. 나폴리 또한 이미 베네치아가 했던 대로 대성당을 짖고 그 안에 루치아의 시신을 안장하고는 '성녀 루치아를 나폴리의 수호 성녀'로 세상에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때부터 교황 주재하에 종교회의가 연일 열리기 시작한다. 한바탕 전쟁(성전)을 불사한다는 각오하에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제각각 나름의 명분을 앞세워 '성녀 루치아의 시신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연한 도둑들끼리 모여서 벌인 참으로 염치없는 싸움이 아닌가?
결국 성녀의 시신은 다시 원점인 시라쿠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라쿠사 두오모의 옆에 서 있는 '산타 루치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시신을 훔치지는 않는다. 대신 '후손이 발복한다'는 믿음으로 묘터를 훔쳤다.
그러나 서양에는 명당에 대한 믿음이 없는지라 시신을 훔쳤다.
헐............
광장에서 두오모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우측으로 좁은 골목을 건너 서있는 건물이 바로 '산타 루치아 성당'이다.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밀라노까지 도난 반출되었다가 겨우 돌아온 성녀 루치아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다.
이 성당에 모신 루치아 성녀의 살아서의 삶과 죽어서의 삶이 너무도 고난에 찼던 때문일까? 성당 외부의 깔끔하고 멋진 모습과는 달리 실내의 분위기는 무언가 좀 어둡고 스산하고 을씬년스럽다. 분명 이제껏 수없이 보아왔던 이탈리아의 여타 성당의 분위기와는 어딘가가 확연이 다른 느낌이다. 거기에 더하여 막 성당의 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미안합니다. 시급한 수리가 필요해서 2시간 정도만 페관하겠습니다'라고 문앞에서 안내를 한다. 사다리와 수리기사들이 우루루 안으로 들어간다. 성당안이 더더욱 어두워 졌다. 아마도 어디 전기시절에 문제가 생긴것 같다. 하여 부랴부랴 고개만 삐쭉 안으로 디밀어 보고는 밖으로나올수 밖에 없었다. 2시간 후에 다시 찾아올 수 있으려나?
성당 안으로들어가 '산타 루치아 알라 바디아(Santa Lucia alla Badia) 교회의 제단화'로 알려진 '카라바조의 (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감상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르네상스 회화의 개척자'로 너무도 잘 알려진 '카라바조'가 말타(Malta)에서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감옥에 갖혔다가 탈옥하여 시라쿠사로 도망쳐서 숨어살던 시기였던 그의 말년에 남긴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더더욱 아쉬울 밖에..........
골목 어귀에 있는 노천 카페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시칠리아의 대표 주점부리 그란치니와 맥주를 한병 주문했다. 그 맛이 환상적이다.........
저만치 앞에 펼쳐져있는 햇쌀이 가득한 두오모 광장을 물끄러미 하염없이 바라본다.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
1943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그리고 바로 이곳 두오모 광장.............
제 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밀려가기 시작했을때...........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너무도 매혹적인 한 여성이 이곳에 있었다.
13세살 소년에서부터 80세가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자들은 시선은 묘한 눈꼬리를 남기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모든 여자들은 그녀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껴 치를 떨며 시기를 넘어서 온갖 추잡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여인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그 어떤 잘못을 한 적이 없다.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외로움이 엄습하는 쓸쓸한 밤이면 낡은 레코드로 음악을 들으며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남편과의 즐거웠던 지난날의 추억을 부둥켜 안고 밤이 새도록 혼자 실내에서 춤을 추는것이 전부였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 그만...... 13살의 꼬마 (레나토) 마저 이 아줌마에게 첫눈에 반해 그만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레나토에게 여인은 그저 어떤 성스러운 여성으로 비쳐졌는지도 모르겠다. 소년 레나토의 마음속엔 온통 아줌마 뿐이었다. 소년의 낙은 오로지 멀리서 숨어서나 혼자 몰래 아줌마를 살피는 즐거움이 세상의 모든것이 되어버렸다.
레나토가 아니었어도....... 적어도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있을것(?)이 없거나........ 이 세상에 당당하게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어째 표현이 좀 어색해진다)
그러던 중에 남편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든다. 그리고 곧 세상에서 하나 남았던 혈육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너무도 매혹적인........ 한 여인.
어떻게 남자라면 그런 그 여인에게 마음이 쏠리지 않고 다음으로 거시기........... 머시기 하지...............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여인은 곧 법정에 서게된다.
주변의 남성들을 꼬득여서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는 같은 도시에 사는 뭇여성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고발이었다. 여인은 사실대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결국 무죄로 방면 되었다.
비록 홀로되었지만........ 여인은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여인이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마을의 모든 상점에서 그녀에게만은 그 어떤 물건도 팔지 않았다. 여자들의 과도한 극성이 그녀는 돈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구입할 수가 없었다.
살아가기 위해선 무엇인가 일을해서 돈을 벌어야 했으나......... 그 어느곳에서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취직시켜주는 세탁소나 공장이나 편의점의 주인들은 아내들의 등쌀에 못이겨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수가 없었다.
마을의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남편이나 남동생이나........ 모든 남자들을 그 여인과 결부시켜 매사를 '부정' '매춘'으로 선입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파시스트 정권을 이끌도 뭇솔리니가 실각하고 히틀러의 독일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했다.
점령지를 차지한 독일군들은 승리자의 지위(?)를 마음껏 누리기 시작했는데....... 그 점령군의 우월적 입장에서도 이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점령군은 이 여인과 시간을 가지고 싶었고 대화를 하고 싶었고 식사나 술을 함께 마시고 싶어했다.
세상에 혼자가 된 여인........ 돈도 떨어지고........ 일자리도 허락되지 않는 여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가지 밖에 달리 더는 없었다.
여인은 독일군에게 웃음을 파는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본래 도시에 함께 살아왔던 남자와 여자들의 시선에서 점차 애증이 교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어떻하든 산 목숨은 이어나가야 했다.
그러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독일군이 항복하고 연합군이 상륙해왔던 것이다.
도시의 모든 여자들이 몰려와 그 여인을 길거리로 끌어냈다.
두둘겨 패고 머래채를 끄들어 댕기고 뺨을 때리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피투성이가 된 여인을 이리저리 질질 끌고다니며 거듭거듭 린치를 가했다.
기세 등등하고 눈에 살기마져 그득한 여인들의 눈빛에는 온 도심의 남자들 마음속에 보다 확실하게 어떤 이정표를 세우거나 강력하게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고자하는 의미가 짙게 담겨있어 보였다.
'남정네들이여 똑똑히 보아두소. 이게 갈보의 최후요. 그래도 이년의 저주스런 몸뚱이를 탐내겠소?'
'남의 남정네를 유혹하는 년, 원수인 독일군에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팔던 년의 최후를 똑똑히 보아두시요.'
결국 그 여인은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13살 소년의 여린 마음을 보듬어 주면서 그렇게 여인은 그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나서 얼마 지나고.........
마을에 한쪽 팔을 잃은 전쟁상이용사가 한 명 불쑥 나타났다. 죽은 줄 알았던(전사 통지서까지 받았던) 그 여인의 남편이었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몰려나와서 그녀의 험담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덮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자신들이 그녀를 못살게 굴고 매춘부로 낙인찍어서 강제로 내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집단적 히스테리의 발로였다고 할까.
그녀는 태생적으로 음란하고 온갖 추잡한 부정을 서습치않고 저지르다가 스스로 설 자리를 잃고 창피해서 도망을 친 여인으로 전락했다.
하나 같이 못된 그녀의 지난 행각을 고발해 오면서 남편은 괴로와 했다. 어찌 고통 스럽지 않겠는가?
그 총알이 빗발치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기필코 살아돌아와야만 했던 이유와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더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그냥 죽어버릴것을...........
그런 남편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을 지켜보던 소년은 용기를 내서 남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아저씨. 저의 이름은 레나토라고 해요. 나이는 13살이구요. 아저씨.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절대 믿지 마세요. 저는 모두 보았고 그 말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아요.............'
소년은 자신이 아줌마를 짝사랑하게된 사연과......... 아줌마와 마을에서 벌어졌던 시간과 사건들을 처음에서 부터 아줌마가 떠나는 순간까지의 모든 일을 사실대로 적었다. 세상 남자들의 탐욕과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벌인 집단적 광란에 대해 소년의 순수한 시각에서 바라다 본 진실을 최선을 다해 써내려 갔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엔 이렇게 적었다.
'아저씨. 너무 속상해 마세요. 아줌마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 사람은 오로지 단 한사람....... 아저씨 뿐인것을 저는 잘 알아요. 아줌마는 아저씨가 살아계신것을 모르고 멀리 떠났지만........ 아저씨와 처음 만났던 곳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아저씨를 생각하면서 살겠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아저씨는 아줌마를 찾아낼 수 있을 것에요. 레나토 올림.'
소년의 편지를 받은 남편도 도시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도 이제 지난 시절을 거의 잊어가고 있을 즈음에 소년의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아저씨와 아줌마가 나란히 팔장을 끼고 도시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쏟아지는 사람들이 시선을 아랑곳 하지않고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소년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레나 아줌마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뻐..............'
'언제고 아줌마는 꼭 당당한 모습으로 아저씨와 함께 돌아오고 싶었을 거야.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당당한 주부이니까......... 아저씨도 아줌마를 위해 꼭 돌아오고 싶었을 거야. 사랑하니까..........'
<위에 나열한 영화 말레나의 장면 사진들은 네이버를 통해 퍼 온 사진들 입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정말로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 영화 (말레나)가 대부분 여기 시라쿠사에서 촬영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영화를 보다보면 이 자리 이 광장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의 풍광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참으로 멋지게 여러번 등장한다.
'말레나'와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 정말로 멋진 하모니를 이룬 한폭 한폭의 그림이 파노라마로 울려퍼지던 주옥같은 기억속의 명소이다.
실제 와서 보니 이 가슴벅찬 느낌이란 실로...............
이제 오르티지아를 휘감아 돌고있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섬의 끝자락에 우뚝 서서 오랜 세월동안 여기 시라쿠사를 지켜낸 성채를 찾아보기로 길을 나선다.
이탈리아의 가장 남쪽 끝자락이기도 한 이곳에 서서 똑바로 이오니아해를 건너 바라다 보면 그 끝엣 금방이라도 그리이스가 모습을 나타낼것만 같다.
시선을 오른편 남쪽으로 돌려 가만히 살펴보면 저만치 수평선 너머로 금방이라도 몰타(Malta)가 지척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그 몰타의 뒷편으로 지중해를 가로질러나가면 곧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튀니지에 다다르게 된다.
시라쿠사 두오모를 나와 온통 라임스톤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 사이로 난 골목길을 이리저기 기웃기웃 거리다 보면 비로소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즈음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나게 된다.
요정의 전설이 서려있는 '아레투사 분수(Fontana Aretusa)' 이다.
처녀이자 사냥의 여신이며 달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hemis)'의 시녀 '아레투사'가 강에서 사냥을 마치고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된 강의 신 '알페오(Alfeo)'는 첫 눈에 그만 아레투사에게 반하고 만다. 알페오는 인간으로 변신하여 아레투사에게 접근하지만, 왠지 무조건 그가 싫었던 아레투사는 엘리스의 땅까지 도망쳐 오게된다. 하지만 한순간에 그만 사랑에 눈이 멀게된 알페오가 포기하지 않고 끝내 쫓아오자 아레투사는 주인인 아르테미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땅을 갈라서 그 안에 아레투사를 숨겨주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물로 변한 아레투사는 시라쿠사까지 흘러가 여기 웅덩이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웅덩이에는 이미 강물로 되돌아간 알페오가 물로 변하여 끝내 아레투사를 차지하려고 이 웅덩이에 먼저 숨어들어 지키고 있었다.
'강의 신 알페오를 피해 물의 요정이 숨어든 아레투사 분수'는 낭만을 찾는 젊은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시라쿠사의 대표 명소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속의 낭만적인 이야기 일 뿐, 직접 보게되면 실망을 금할 수 없을만치 작고 보잘것이 없는 물웅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괜히 거창하게 소문만 났을 뿐이다. 이번 여행에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차라리 우리나라 태백의 '검룡소'가 아레투사 분수 보다 98배는 더 멋지다. 아레투사가 지중해를 건너고 인도양을 헤엄쳐서 한반도에 이르러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검룡소에 숨어들었다고 소문을 내면 안될까?
오르티지아 섬의 끝에 자리한 마니아체 성(Castello Maniace)
은 한눈에 봐도 군사적 요충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는 곳이다. 성벽의 근처에만 이르러서도 사방을 둘러보게되면 이오니오 바다를 한눈에 내다보며 메시나 해협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알겠다.
이 성은 고대 그리이스 시대에 본토의 아테네를 능가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던 시라쿠사의 코 앞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 위에 세워졌으며, 1038년 비잔티움제국의 장군 게오르제 마니아케스(George Maniakes)가 아랍의 지배를 받던 시라쿠사를 포위하고 정복한 후에 이곳에 처음으로 요새를 세웠다.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마니아체 성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실로 천험의 해안 절벽위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왕을 겸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명으로 (1232년 ~ 1240년)에 걸쳐 건축가 리카르도 다 렌티니(Riccardo da Lentini)가 다시 성채를 더욱 튼튼하게 증축했다. 1288년까지 아라곤의 페테르 3세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며 1305~1536년에는 시칠리아왕국의 많은 여왕들이 거주하였다. 15세기에 감옥이 되었고 16세기에는 항구와 도시를 방어하는 요새 역할을 하였다. 1704년 화산 폭발이 일어나 크게 손상되었으나 다시 복원하였다. 이후로 현재까지는 이탈리아 해군이 사용하고 있으며 극히 일부는 여행자에게 개방하고 있다.
성채의 내부에 있는 제단과 일부 전쟁 시설들은 '요한 기사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시라쿠사에는 몰타를 기점으로 활약했던 요한 기사단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용맹하고 위대한 요한 기사단의 이야기는 '몰타편'에서 다루기로 미루어 두어야만 하겠다.)
마니아체 성의 경우는 애초에 오르티지아 섬의 앞바다에 더 작은 암초 위에 세워진 방어요새로 해자위에 다리를 놓아 건너다녔으나, 화산폭발로 일대의 해안 지형이 엄청나게 변하였고, 해자가 메워져서 어느때부터 인가는 오르티니아 섬과 하나가 되었다.
검푸른 지중해를 끼고 돌면서 아름다운 옛 바로코풍의 도시골목들을 지나치는 길은 마치 화사한 봄산책을 하는 듯 마냥 즐겁다.
눈부신 햇쌀과 반짝이는 은빛 바다와 라임스톤의 도시와........... 해안길에 나와있는 아름답고 정겨운 노천카페들..........
시.라.쿠.사.는.낯.선.여.행.자.의.천.국.이.다.
마니아체 성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휴일에는 군인들도 쉬어야 하기 때문인가 보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성문 앞 광장의 바닷가 담장앞에는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아가씨 둘이 허탈해하며 멍하니 바다를 건너다 보고 있었다. 저 앞으로 곧장 바다를 헤엄쳐 건너가면 그리이스의 크레타 섬에 닿을텐데............
다시 발걸음을 옮겨본다.
마니아 성채를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쯤이야 걷다보면 어느새 저절로.......... 시라쿠사의 골목과 아름다운 풍광이 위로해 줄거야.............
여기가 시라쿠사야? 베네치아야?
오르티지아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간다.
언제 다시 시라쿠사에 올 수 있으려나? 나 살아서...........
이곳에서 하루쯤 머물지 못한것이 벌써부터 못내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이틀쯤 머물면서 시라쿠사를 제대로 즐기고, 하루쯤은 인근의 '라구사'에 다녀오지 못한것이 너무도........ 너무도 안타까웠다.
나 돌아가면......... 시라쿠사는 그리움으로 남을것이다............. 아주 오래오래............
'키케로'가 한 말에 나는 120% 절대 공감한다. 눈 부신 보석같은 도시가 바로 시라쿠사라고.........
안타까울만치 너무도아쉬운 시라쿠사.
오르티지아와 반대편으로 중앙역을 지나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시라쿠사의 본정통이라 할만한 바로코 건물들로 가득찬 '노토(Noto)지역'이 나온다. 이곳은 고대 그리이스의 도시가 아니라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고 비잔틴과 노르만에 의해서 재건된 '바로코 시라쿠사'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노토에는 건물 하나하나의 바로코 장식과 창문과 발코니, 그리고 발코니를 떠받치고 있는 코르벨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바로코식 치장이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인근의 '고고학 공원' 또한 시라쿠사 여행의 백미라 하겠다. 산 조반니 카타콤베도 곡 들러보고 싶은 장소였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허용된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오르티지아에서 걸어 나와 신도심을 둘러보고 시라쿠사 중앙역에 들러 카타니아로 돌아가는 표를 사려고 하는 시점에 이미........ 사진에서 처럼 땅거미가 이미 길게 드러눕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허탈함에 그냥 도로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다음을 기약 할 수 있을까?
시라쿠사는 언제나 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시오라고 속삭여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얼마나 더 살고........ 얼마나 더 돌아다닐 수 있을까? 온전히 나의 두 발로 걸어서..........
안.녕.시.라.쿠.사.잊.지.않.을.께.꼭.다.시.만.났.으.면.좋.겠.다.고.마.워.
----- 시라쿠사 편이 좀 길었네요.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긴....... 카타니아를 마저 둘러 보아야겠지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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