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젠토를 다녀와서 막 팔레르모 센트럴 역사에 내렸을때 나는 잠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저녁이 찾아들 시간이었지만 아직은 찬란한 햇쌀이 여전히 그대로 내려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시장이나 마트에 들려 장을 보아서 숙소로 돌아가 맛있는 저녁을 해결하고 나서 쉬었다가 밤에 (마시모 오페라하우스) 야경을 보고, 인근의 시장 골목에서 벌어지는 야간포장마차를 들려 볼 생각이었다. 내일은 카타니아로 이동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헌데........ 아직은 하늘이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 빛나고 있는 시간이다.
헐.
허니 어쩌겠어?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멀리 떨어진 구시가지의 끝 '포르타 누오바'로 달려간다. 이슬람 해적의 포스타를 보면서 안녕하신가를 묻고는, 성문을 지나 '독립 광장'의 끝자락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머피의 법칙'은 여지없이 시칠리아에서도 변함이 없다. 급하게 서두는만큼의 반대로 근처에 버스표 판매소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있기는 한데 '파트 타임'으로 저녁 7시에나 연다나 어쩐다나........
길 건너 다른 노선의 정류장 버스판매소까지 뛰어가서 왕복 2장의 표를 겨우 구해서 다시 되돌아 온다.
연실 시계를 보면서 조바심을 내본다. 갈 수는 있으려나? 가서 잠깐이라도 들여다 볼 수는 있으려나?
저녁 퇴근시간에 맞물려 거리는 온통 자동차 주차장이다. 거기에다 좀처럼 신호등을 찾아보기 힘든 나라이다 보니 차량기리 꼬리를 물고 맞물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선은 어디서나 항상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389번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어찌나 반갑던지........
조바심 끝에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는 채 10m를 나아가지를 못한다. '어이구 속터져...........'
옆에 참 인상이 깔끔해 보이는 대학생쯤의 예쁜 아가씨가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것저것 당장 궁금한것을 물어 보았다.
'몬레알레를 가는 여행자인데 항상 도로가 이렇게 막히나요? 이런 상황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혹 두오모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어여쁜 시칠리아 아가씨는 상냥한 미소에 목소리까지도 이탈리아스럽게 예쁘고 사근사근했다.
'저녁되근 시간이라 이 시간엔 항상 지금처럼 좀 막혀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서 시가지를 빠져나가면 다시 쌩쌩 달려갈 거예요. 넉넉잡아 20분이면 몬레알레에 도착할 거에요. 달리던 버스가 가파르게 언덕을 올라가면서 심하게 이리저리 몸이 쏠리기 시작하면 몬레알레에 거의 도착해 가는거예요. 그러면 내리실 준비를 하시면 될거에요. 그리고 시간은......... 두오모가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깝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예배당 안은 문을 닫아도 성당을 둘러보실 수는 있으니까요. 몬레알레의 멋진 노을과 야경을 즐기실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는 곧 버스에서 내려 손을 흔들어주면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이렇게 저렇게 내 몸쭝이를 흔들기 시작했을때 나는 내가 목적지에 다달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가씨 설명 대로였다.
몬레알레 초입의 삼거리 버스 정류장에 내리고 나니 이미 찬란했던 햇쌀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뉘엿뉘엿 저녁햇쌀로 변해 있었다.
서둘러 언덕길을 올랐다.
저만치 마을 위로 몬레알레 대성당의 종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몬레알레 대성당(두오모).
몬레알레는 팔레르모 시가지에서 약 10km 떨어진 가파른 산언덕위에 자리잡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카푸토산 중턱에 해당하는 몬레알레는 발아래로 팔레르모 시내와 콘카도로(황금 조개껍데기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다.
처음 이곳은 팔레르모의 왕족이나 귀족들을 위한 사냥터였다.
사냥을 즐기던 부유한 사람들이 이 풍광이 빼어난 언덕위에 하나 둘 별장을 짖게 되면서 마을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자만을 위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유한 작은 전원마을로 남아있다.
몬레알레의 어원은 바로 이탈리아어로 '산'을 듯하는 몬테(Monte)와 '왕'을 뜻하는 레알레(Reale)가 합쳐서 만든 (왕의 언덕)이란 뜻이다.
그러나 해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 몬레알레를 찾는 이유는 별장에서 묶어가기 위함도 아니요, 사냥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오로지 하나 바로코 역사를 통털어 가장 아름답다고 불려지는 '몬레알레 대성당(두오모)'를 보기 위함이 모든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 산자락 비좁은 언덕에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하며 웅장한 대성당이 들어서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이슬람의 침입' 때문이었다.
비잔틴 왕국에 속했던 팔레르모에 이슬람이 침공해 와서는 점령해버리고 이슬람 왕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세운 도시와 교회들을 헐어버리고 이슬람식 도시 건설을 꾀했다. 무자비한 파괴가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타 종교인의 신앙생활 자체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신앙적 생활은 그대로 보장해 주었지만, '우상 숭배만은 철저히 금하는 이슬람식 교리'에 의해 기독교 성전은 허물어야만 했다.
이 당시에 수많은 기독교 건축물들이 파괴되었지만 단 하나의 건물만은 그대로 살아 남았다. 이슬람인들 조차도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너무도 빼어나다 못해 뛰어남의 경지를 넘어선 이 아름다운 건물만은 도저히 허물어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팔레르모 대성당(두오모)' 이었다.
이슬람인들은 두오모의 종탑에서 십자가를 떼어내고 이슬람의 초승달 모양을 내걸었다. 제단와 기독교 조각상들을 철거했고, 성화가 그려진 벽은 회칠을 해서 덮었다. 그들은 두오모를 증축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릴 수 있었고, 개종을 강용 받지도 않았지만 기도를 드릴 장소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팔레르모 도심에서 쫒겨나게된 주교는 좀 여유있는 자들의 배려로 여기 몬레알레로 옮겨와 머물게 되었다.
주교가 머물고 있는 이곳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도를 드릴 장소가 필요하다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정말로 교회가 생겨났다.
그 교회가 바로 (몬레알로 대성당)인 것이다. 이 대성당이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진 것은 8세기경의 노르만 민족이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던 시기였다.
과감하게 종교의 틀을 깨고 신앙의 자유를 표방했던 노르만인들은 이 교회가 이슬람양식과 비잔틴 양식의 혼합된 독특하고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라 할만한 '노르만 건축양식'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도록 하는데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그들 노르만인들의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성 때문이었다.
팔레르모 시내 안에 있는 (팔레르모 두오모)는 계속적으로 이민족의 문화와 종교가 겉옷을 껴입듯이 덧칠을 해 탄생한 것이라면, 여기 (몬레알레 두오모)는 애초의 건설 초기단게에서 부터 다양한 종교와 건축양식과 문화를 혼재해서 독특하고 새로운 노르만 건축양식으로 탄생했다고 굳이 구분을 해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노르만인들은 처음 그들이 이곳에 용병으로 내려왔고, 교권과 황권의 다툼과 영토 확장 전쟁과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등을 목격하면서 나름 깨달은 바가 있어서, 모든 인종과 문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보다 큰 틀에서의 이상적인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마음먹었던 민족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이상을 건축에서도 그대로 반영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여 예배당과 수도원을 연결시켜주는 회랑의 다양한 장식 문양들은 모두가 실제 이슬람 조각가의 작품으로 오리엔탈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온다. 그리고 성당 내부의 아치와 화려한 모자이크 미술품들은 모두 비잔틴 미술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성당의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대리석 문양들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기독교와 이슬람의 절묘한 조화라는 느낌이 가슴에 확 와닿는다.
이 세상 어느곳에서 이런 오묘하고도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문화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겠는가?
몬레알레 대성당은 그야말로 노르만식 건축양식의 백미이다. 그 안에서 이슬람문화와 비잔틴 문화를 찾아내서 맛보는 즐거움은 어디까지나 여행자의 몫이자 커다란 기쁨이며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몬레알레 두오모에 막 도착했을무렵 상황은 페관시간에 임박해 있었다.
여행객들이 입장하는 옆문은 활짝 열려있었으며, 검표 관리원도 자리에 없고 옆의 매표소도 굳게 잠겨 있었다.
입장료 6유로를 내고 싶어도 낼 곳이 없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여행객들도 안내 고지를 받았음인지 모두 빠져나가고 서너명만이 남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몬레알레 두오모의 상징인 황금빛 모자이크가 장엄하게 여행객의 전신을 압도해 왔다.
성당 안에 머물렀던 시간이 한 5분쯤 되었으려나?
제단에 촛불을 대신하는 작은 촛불모양 꼬치등과 비상구 안내등 외에 모든 불이 순식간에 일제히 꺼져버렸다. 칠흙같은 암흑이 어디선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이다. 이렇듯 인증샷이나 찍고 돌아서려고 다니는 여행이 결모 아닌데 말씀이다.
'나 살아서 언제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정말로 꼭 다시 와보고픈 버킷 리스트에 올려 놓아야만 하겠다.'
밖으로 나와서 수도원쪽으로 발길을 돌려보니 공터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모여서 축구 시합을 한다. 잠시 앉아서 그들 모습을 바라다 본다.
'세상이 저렇게 아이들 마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도원도 페관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몬레알레 대성당)을 결코 만나 본게 아니다. 그냥 몬레알레 언덕을 다녀가고 있을 뿐이다.
'지극히 높은 곳의 거룩한 그분이시여. 이 어리석은 여행자를 굽어 살피사.......... 언제고 다시 몬레알레에 다녀갈 수 있게 허락하소서.'
성당 출입구의 아아치형 긴 회랑에는 한쪽으로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서 있고 반대편으로는 두오모의 조형물을 받쳐든 굴리엘모 2세의 조각상이 서 있다.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가 여기 몬레알레 대성당을 건축해서 성모 마리아에게 받쳤다는 상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벽면으로는 이곳이 '로마 카톨릭'에 속한 교단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에 속한 교회라는 상징으로 좌우의 길이가 같은 정사각형의 십자가가 여기저기 벽면마다 새겨져 있으며, 건물의 높은 벽면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휘장 문양이 창연하게 내걸려 있다.
그 앞쪽의 성당 입구 광장에는 역시나 이탈리아답게 멋진 분수가 있다.
포세이돈과 암피트리테 사이에 태어난 반은 인간이고 반은 물고기인 (트립톤)의 조각상이 놓여진 아주 멋진 분수대 이다.
뿜어져 나오는 분수 위로 멋진 청년모습의 트립톤이 거대한 물고기를 힘껏 나꿔채고 있는 모습이다.
옆으로는 성녀 세실리아의 동상도 보인다.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어둠이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거기에 아주 짙은 먹구름이 몰려와 마치 이무기처럼 또아리를 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떻고 또 저런들 또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처지야말로 말그대로 완전 자유여행자가 아닌가.
막차 놓치면 걸어거자 뭐.
걸어가면서 장난 삼아 손을 계속 들어보는거야. 혹시나 알아? 그러다 끝내 아니면 그땐 택시 타면 되지 뭐. 남은 스케줄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냥.몬.레.알.레나.더.기.웃.거.려.볼.래.ㅎ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면서 한참을 기다려 다시 시내버스에 올랐다.
출발지점이었던 포르타 누오바에 내려서는 ....... 이번엔 '굿나잇'이라고 해적 현상범들에게 인사를 건네본다.
그러고는......... 반쯤 미쳐가고 있는것은 아니었는지......... 한참을 돌아서 숙소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마시모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내친김에 오늘 오페라 공연이라도 있다면 즉권을 사서 다소 무리겠지만 관람을 강행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 공연장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미 두 세번 지나치면서 살폈었지만 대단히 웅장한 건물이다. 우리 세종문화회관도 좀 더 특색을 갖추면 안될까 하는 아쉬움이 절로 든다.
마시모 오페라 하우스는 이탈리아에서도 손에 곱히는 공연장이다.
세계적인 역량있는 음악가들이 이곳에서의 공연을 무척이나 희망하곤 한다고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본토와는 다르게 매우 저렴한 가격에 관람권을 구할 수 있는 세게적인 명소 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아르메니아 예레반 오페라 하우스나 시칠리아 마시모 오페라 하우스 공연이라면 배고픈 배낭여행자라 해도 한번쯤은 꼭 공연을 관람해 보시라 강추하고 싶다. 결코 흔한 기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저렴한 고마운 곳들이다.
마시모 오페라하우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장소를 낯설게 생각하겠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장면속에서 '아! 거기가 바로 거기였어?' 라고 하실 분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마리오 푸조'의 소설을 '프란시스 코플라' 감독이 3부로 제작했던 영화 (대부 시리즈)의 3편에 등장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꼴레오네 가문의 뒷 배경이 '마피아'였으며, 그 마피아가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시칠이아였으니 사실 별반 놀랄일만은 아닌듯 싶기도 하다. 영화 분량(런닝타임)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의 장면들만이 실제 이곳 시칠리아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었다.
시칠리아를 고향으로 두고 멀고 험한 태평양 건너의 신대륙에서 정착해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살아가고자 하는 이탈리아 이민세대들의 고난사를 다룬 영화였다. 한 가족의 고난과 역경, 성공과 비극을 다룬 현대사를 대표하는 대서사시였다.
마시모 오페라하우스는 (대부3)에서 '비극'을 적나라하게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는 아주 인상적인 장소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부와 명예를 모두 이룩한 '마이클 꼴레오네'의 인생역정 마지막 지점에서 그는 신(神) 보다도 더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던 딸을 바로 이 오페라하우스의 게단에서 경찰 복장을 한 괴한의 총탄에 의해서 잃게된다. 그의 아버지대에서 부터 그토록 갈구하던 '성공'이 끝내 한 순간에 모두 물거품으로 변해가는 수많은 이유와 수많은 사연과 아픔과 고뇌와 후회가 한 순간에 모두 교차해 지나간다.
왜?????????? (영화는 차후에 다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절망 가득한 눈망울로 포효하듯 울부짖던 마이클 꼴레오네(알 파치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인근 산책을 하고 짐을 꾸리고 '피비오'와 만나서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젠 팔레르모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낭을 짊어지고 '팔레르모 두오모'엘 잠시 그냥 다시 들려 본다. '혹시나 프리드리히 2세를 잠시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해서.
떠나는 길이라 생각하니 지름길 대신 가장 번화가 도로만 삥 돌아서 걸어본다.
콰트로 칸티에서 샐카도 찍어보고 프레토리아 분수도 들려 본다.
그러고는 배낭의 무게가 뻐근하게 어깨에 전해져 올 시점에서야 발걸음을 팔레르모 센트럴로 옮긴다. 역으로 가지만 오늘은 기차를 탈 생각이 아니다.
버스터미널이 역사와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 마저도 예약이 없는 어설픈 배낭여행자였기에.......... 그런데 도착해 보니 10분 후에 떠나는 버스가 있다. 헐.........
팔레르모에서 카타니아까지 2시간반이 걸리는 익스프레스(SAIS) 버스 가격이 13.5 유로다.
그래서 이것저거 따질것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날름 버스에 올랐다.
그리곤........ 추~~~~~~~~ 울~~~~~~~~~발.
굿바이 팔레르모. 카타니아야 기다려라. 이 몸이 가신다~~~~~잉.
--------- 다음 이야기는 카타니아에서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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