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는 '로마'를 비롯한 여타의 다른 이탈리아 지역들과 사뭇 다르다. 차라리 스페인 남부의 한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생겨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말하길 '팔레르모는 로마와 닮았고, 카타니아는 밀라노랑 닮았다' 라고 하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시칠리아라는 독특한 환경이 이탈리아 본토와는 전혀 다른 이색적인 문화를 남겼는데 어떻게 이들의 문화를 본토와 빗댈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결단코 아니다. 팔레르모는 팔레르모일 뿐이고, 카타니아는 오로지 카타니아일 뿐이다' 라고.
'팔레르모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빈티지한 도시라면, 카타니아는 모던함이 풍겨지는 멋스런 도시' 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하겠다.
신(神)이나 대자연은 간혹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과 커다란 축복을 주었다 빼앗고, 또 주었다 빼앗고는 한다.
심술꾸러기 처럼 말이다.
인류역사에서 이처럼 축복과 재앙을 늘 업보처럼 안고 살아온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권이었다. 이제는 애스완댐 건설 이후 치수사업의 성공으로 나일강의 범람을 까마득히 잊고 살게 되었지만 말이다. 대자연은 몇 년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나일강을 범람시켜서 인간이 영위하던 삶의 터전모두를 하루아침에 싹 쓸고 지나갔다. 이렇게 연이어 일어나는 재앙뿐이라면 이집트 땅에는 아무도 살지않는 페허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범람하는 홍수는 나일강의 상류로 부터 질 좋은 풍부한 토양을 쓸고 내려와 나일강 유역에 흩뿌려 놓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름진 옥토가 이 범람의 덕분에 항상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온 지구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농토를 나일강 유역의 평원으로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속된 표현으로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다른 지역의 삼년 내지는 사년 농사의 소출을 얻을 수 있는데 누가 나일강을 떠나겠는가 말이다. 그것은 재앙이며 동시에 축복이었다.
시칠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을 통털어 가장 높은곳(해발 3.350m)에 위치한 살아있는 에트나 화산은 기원전 2.700년 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이자 대장장이인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에트나 화산 분화구인 것이다.
1669년에 거대한 용암을 분출한 에트나 화산활동은 카타니아를 현실세계의 역사에서 까맣게 지워버렸다. 카타니아는 사라졌다.
붉은 용암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도시의 도로와 골목골목으로 념쳐 흘러들었고, 주변의 들판과 언덕을 포함한 카타니아 인근지역 전체를 까만 화산재가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도심에 거주하던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화염속으로 사라졌다.
카타니아는 사라졌다. 역사에서 지도에서 모두 사라졌다. 수북히 쌓인 검은 화산재만이 구릉과 언덕과 황량한 벌판을 이루는 생명체라곤 살지않는 지역으로 하루아침에 변해간 것이다. 이후로도 꾸준히....... 그리고 현재까지도 화산은 활동을 빈번하게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막대한 피해를 양산시키고 있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뒤 100여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카타니아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까맣게 뒤덥은 용암과 화산재를 뚫고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녹색의 생명체에서 느끼는 벅찬 감동처럼 다시 찾아 온 사람들은 그들의 피와 땀과 정성과 노력과 카타니아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용암더미와 화산재 위에 생명의 씨앗들을 뿌리고 가꾸면서 건물들을 하나 둘씩 새로 짖고 물을 끌어오고 도로를 닦고 교회를 지었다. 위대한 인간 승리였다.
카타니아의 대부분의 건물은 이 재난 덕분에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나름 모던한 이탈리아식 분위기를 가진 세련미를 뽐낸다. 재난을 견뎌낸 일부의 건물들은 대부분 웅장하게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지어진 석조건축물들로 그 역시 오랜시간과 정성을 들여 복원에 성공한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도시 어디서나 하수도 정도의 깊이만 파고나면 옛 유적들이 나온다. 신전이며 집터며 도로와 하수시설들이 모습 그대로 화산재 아래 묻혀있다. 그야말로 문화유산의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다만 개발과 보존이라는 명제 앞에서 일단은 파뭍힌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미 그 유적더미 위로 들어선 고층빌딩과 현대식 주거환경과 도시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기원전 6세기 경부터 그리이스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시라쿠사)에 처음 도시를 세웠고, 이어서 (카타니아)를 새로운 시칠리아의 거점도시로 발전 융성 시켰다. 이어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삼으면서 지중해의 중요한 해상 무역전진기지 역활을 하였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들어서는 눈부시게 번영을 누리던 당시로선 최첨단의 항구도시였다.
이슬람이 세력을 넓혀오자 기독교 세력은 카타니아와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거세게 항전하였으며, 결과로 이곳의 점령을 포기한 이슬람은 바다를 돌아가 북서부의 해안가에 새로운 거점으로 팔레르모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카타니아와 시라쿠사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여 카타니아를 그대로 통째로 삼켜서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고, 시라쿠사는 정복자 이슬람에 의해서 기둥뿌리 하나 성하지 않을 정도로 무참하게 파괴되었던 것이다.
비장하면서도 아름답고, 젊으면서도 활기가 넘쳐나는........ 참으로 매혹적인 도시 '카타니아'.
-- 카타니아에서의 마이 호텔. 골목 윗쪽의 노랑 초록 깃발 건너편 빌라형 게스트하우스.
탁월한 선택. 유쾌한 착각. 땀으로 얼룩지는 걷기 여행.
팔레르모에서 선물처럼 우연으로 인해 멋진 숙소에서 묵었던 휴유증이었을까?
당연히 카타니아에서도 그런 행운이 함께 할 것이라 믿었었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게 대충 이러했다. 팔레르모 센트럴(역)과 숙소(호텔)는 도심의 정반대 방향에 놓였었다. 매일 타지로 나들이 하기위해 역과 터미널까지 걷기에는 제법 상당한 거리였지만, 팔레르모의 모든 유적과 문화재를 굳이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매일매일 지나가면서 또 만나볼 수 있는 즐거움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팔레르모 호텔을 체크아웃 하기 전에 카타니아의 호텔을 한 번 검핵해 보았고, 한 숙소를 선택해서 주소를 메모해 두었었다. 터미널과 역사에서는 반대편에 떨어져 있지만 대부분의 유적과 문화재가 도심 중심에 모여있는 카타니아에서 또 오가면서 누리는 여행자의 즐거움을 만끽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팔레르모라면 두번째 도시인 카타니아 도심을 가로질러 걸어다니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에서였다.
어디까지나 이 때까지는 너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때까지는 말이다............
카타니아의 어느곳에서나 하얀 눈을 터번처럼 머리에 쓴 에트나 화산의 멋진 풍경이 보인다.
어떤 멋진 여행을 예감하면서 2시간반의 버스여행 끝에 카타니아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조금 낙후된 어느 시골 장터의 뒷골목 같은 허름한 공터가 터미널이었다. 매표사무실은 조금 떨어진 건물의 1층을 서너개의 회사가 구분되어 운영하고 있었다. 흡사 감곡터미널 정도라고 할까..........
20kg에 육박하는 배낭 2개를 앞뒤로 메고 버스터미널 부스를 찾아다니면서 다음날 부터 있을 근처여행지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찾아서 메모한다. 그리고는 다시 큰 길을 건너 약 300m쯤 떨어진 카타니아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시 시간표를 확인해 메모하고 나오는데......... 업무를 보는 역사는 작아보이지만 역사 건물 자체는 엄청나게 크고 이슬람의 분위기가 확 느껴지는 멋진 건물이다. 역시 카타니아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전혀 어긋남이 없게 느껴졌다.
센트럴역 광장 옆으로 멋진 분수가 있는데 어디에도 안내판이 없다.
잠시 분수대 주변을 돌아보면서 조각상을 감상해 보았는데....... 추론되기는 아마도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이 암피트리테로를 유혹하고 범하는 장면으로 여겨지며, 그들 사이에서 트리톤 이라는 반은 물고기요 반은 인간인 자식을 낳게되는 그리스 신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분수는 뿜어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주소와 지도를 들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이탈리아에는 어느 도시나 중심 도로는 무조건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 를 따라 걸으면 무조건 그 도시의 중심부에 닿는다. 팔레르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현대적인 도시가 나타난다. 수많은 교회와 상점들을 지나노라면 광장들도 보이고....... 그렇게 걷다보면 카타니아의 심장부 카타니아 두오모(아가타 두오모)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대.
여기가 바로 (카타니아)다. 마침내 내가 그곳에 서 있다.
전신이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1월 말의 카타니아는 영상 12도에서 14도를 웃도는 온화하고 포근한 지중해성 기후이며 날씨였던 까닭이다.
카타니아의 상징인 검은 코끼리 동상이 서있는 광장의 한켠으로 늘어서 있는 노천 카페에 자리하고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해 마신다. 이건 생맥주가 아니라 생명수다.
오.마.이.갓.아.멘.
땀이 식기를 기다려 교통 순경에게 내가 가진 주소와 지도에서의 목표지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재차 기운을 내 배낭을 다시 짊어졌는데........ 글쎄....... 여기서 부터는 오르막길이다. 로마시대의 포장도로가 현재에도 사용되는 돌맹이가 빼곡히 박힌 좁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자동차 사이를 헤집고 오르고 또 올라간다. 운치와 낭만적인 여행은 이지 저만치 아래 광장에서 내버렸다. 꾸불꾸불 언덕길은 계속되었다.
한참을 오르고 나니 그제서야 '베르니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이고 뭐고 땀에 흠뻑 젖은 채 횡단보도 앞에서 아주 잠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아이고야. 이 거리를 감수하고 여기에 묵으면서 매일 터미널과 역을 오가야 하는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최소한 중간은 넘더라도 두오모나 피시마켓 정도의 거리로 숙소를 옮겨야 하는 것이 아냐?' 다분히 일리가 있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그때...... 횡단 보도 건너의 건물이 마트가 아닌가. 제법 규모가 있는 대형마트였다. 옆을 돌아보니 정말로 앙증맞을 정도로 아름다운 과일가게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대형 베이커리로 보이는 마트 건너의 가계도 아주 커다란 대형 마트였고, 베이커리는 마트 안의 일부 코너였다.
현지인이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마트나 재래시장이나 일반 음식점들이 가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배낭여행자에게는 아주 커다란 위안이 된다.
비록 터미널과 거리는 상당했지만 동네의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약국을 지나 외부에 간판조차 없고 액자 크기의 안내판이 전부인 호텔(게스트하우스)를 마침내 찾기는 기가막히게 찾았는데........ 얼씨구 호텔앞 골목길 건너편에 피자 가계다. 나중에 알고보니 인근에서 상당히 유명한 피자 가계였다. ㅎㅎㅎㅎㅎㅎ
더 생각 할게 뭐 있어?
4층짜리 복합건물 3층만을 가족끼리 운영하는 아주 작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의 더블룸을 4일동안 이용하기로 한거지 뭐. 마침 방이 딱 하나가 남아있었다.
공존(共存).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Chiesa&Monastero di San Nicola)........ 그리고 카타니아 종합대학.
공존이다.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비슷한 의미의 '공생'이나 '상생'의 의미 보다는 꼭 공존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어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초기 기독교회는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교회(성당)라는 장소가 신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받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미명 아래 오로지 크고 화려하게 치장되어야 하고, 더 높은 종탑을 세워야 하고, 더 많은 신도를 모아 자신들의 지상에서의 업적을 증명해 보여야만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형이하학적인 보수집단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이 상처투성이의 낡은 교회는 나에게 많은 생각과 아련하나마 신에 대한 구원이나, 인간이 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가지 방편으로서 나름으로 한줄기의 빛과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천년 전 유대땅에서 벌어진 구세주의 행각은 가히 혁명이었다.
천지개벽이라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유대민족은 이 혁명적인 발상을 도저히 납득하거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았다. 하지만 예수는 다시 부활했다. 혁명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혁명은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영토 전쟁이 아닌 인간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싸움에 위기를 느껴 기독교를 참혹하게 탄압했다. 그들은 지하로 숨었다.
'카타콤베'는 '생활공동체'였다. 또한 그곳이 '교회'였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잤다. 우리는 그때 까지의 시기를 '초기 교회'라 한다.
시대상황과 정치성이 결부된 설교나 종파에 따른 각기다른 해석이 필요치 않았다. 그저 조상대대로 전통처럼 내려온 구약과 예수의 행적에 대해 옛이야기를 전하듯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그랬음에도 이념이나 교리에 대한 대립이나 다툼이 거의 없었다.
또한 카타콤베는 '학교'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글을 깨우쳐주고 , 지하동굴 밖으로 나가 굶주린 이리떼처럼 기독교인을 사냥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학교였다.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나 313년이 지나면서 교회는 변했다. 아니 심하게 변질되었다.
억압받던 사람들의 종교에서 하루아침에 로마제국이라는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한 것이다.
근본을 망각한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앞장 섰다. 자신들의 처지와 입맛에 맞게 교리를 앞세워 정당성을 내세우며 기독교를 새롭게 재창조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것을 차지했고, 세상의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그것들을 유지하며 마음껏 누리기를 원했다. 초대교회는 까맣게 잊었다. 아니 파뭍지 않으면 언제고 장애물이 되리라 여겨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어느 순간 기독교(예수를 따르는 대다수의 종파)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보수집단으로 전락했다. 이제 그들에게 혁명은 이단이요 절대적 악이 되었다. 지동설이 그랬고 종교 개혁이 그랬다. 생명 공학이라는 분야가 그들의 신성에 위협으로 다가서기 시작했고....... 훗날 누군가가 '타임머신'이라도 개발하게 되면 그들은 그때는 정말 아주 심각하게 위기를 절실하게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것을 하루아침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신의 재림?
인간의 구원?
허구한날 그들이 외치는 것처럼 기독교 자체에 지금........ 재림이나 구원에 대해 한 웅큼 정도의 관심이라도 있을까? 오로지 구실이자 방패막이일 뿐이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치지한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 한 가지도 내놓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거대한 괴물덩어리일 뿐이다.
그런 오늘날의 슬픈 현실 속에서........
산 니콜라 성당과 수도원은 교회이자 학교이다. 카타니아 종합대학이 바로 이 성당이다.
오전에는 이방인에게 방문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겨울 방학중이라 내부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성 니콜라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1578년 세워진 성당과 수도원은 1669년에 있은 '에트나 화산'의 폭발로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 파괴되었다. 한동안 버려졌던 이곳을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사들여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베네딕트 수도회(Benedictine Order)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313년)가 되면서 권력과 세속적인 일탈에 맛을 들여 변질되어 가던 시기에서 약 300년 후인 529년에 성 베네딕트가 이탈리아의 몬테 카시노에 창립하여 전 유럽에 전파된 수도회의 일파 이다. 이들은 기독교(로마 카톨릭)의 세속적 변질을 우려하고 두려워 하여, 청빈함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성경공부에 몰두하는 등 엄격한 수도생활을 기본으로 하였다. 한편 성경공부와 함께 다방면의 학문적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수많은 학자와 인재를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로마카톨릭과 같은 변질된 교회가 아닌 초대교회의 전통과 구세주의 가르침이 세상에 전파되고 펼쳐지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오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윌리엄 수도사(숀 코널리)가 바로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대표적 케이스의 모습이라 할만하다. 그런가 하면 윌리엄이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라고 지목했던 늙은 사제 '호르헤'의 광기 서린 모습이 바로 당시 '로마 카톨릭'의 모습이었다.
살인사건의 발단이 된 '이리스토텔레스'의 '시편'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그런가 하면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시리즈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 또한 바로 '베네딕트 수도회' 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교회와 학교가 함께 공존하는 아주 특별한 현장이다.
교회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역사의 현장 바닦이 아닌 높은 곳에서 권력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만의 지위를 누려왔다.
이제는 달라질 때가 되었다.
교회와 학교. 교회와 병원.......... 이런것이 초대교회 모습의 일부가 아닐까?
이제 교회 스스로가 내려놓으 것을 내려 놓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연일 매스컴에 화제가 되는....... '미투 사건에 성직자 연류' '대형교회의 당회장을 세습 상속하려는 문제' '성금의 투명하지 않은 사용' 등 등 너무도 많은, 경악할 일들이 교회에서, 그것도 대형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당신들에게 신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당신에겐 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건 아무 상관이 없겠지? 필요하면 언제고 떨쳐거나 내버릴 수 있는 신이 당신에게 필요한 신일 테니까......'
'혹시 당신들과 신을 구분 못하는 경지에 이미 이르른것은 아닐까?'
산 니콜라성당(카타니아 종합대학)의 건물 안 지하나 마당의 지하 곳곳에는 고대 그리이스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발굴과 조사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처럼 카타니아의 어디를 가나 화산재와 용암을 걷어내면 고대의 문명이 모습을 보인다. 실제의 그시대 도시 모습은 어떠했을까? 나는 몹시 궁금하다.
베네딕트회에 의해서 재건된 교회는 2차 세게대전당시 연합군의 지휘부로 사용되면서 파시스트군과 독일군의 폭격으로 또 다시 심하게 파괴되었다. 현재 교회와 대학의 정문 부분에 참혹했던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쟁 후 베네딕트 수도회에 반환되었던 것을 카타니아 시가 사들여서 복원작업을 거쳐서 '카타니아 종합대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해맑은 젊은이들의 대학 캠퍼스 생활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가 있다.
카타니아 종합대학(산 니콜라 성당)의 정문을 거쳐 본관 건물로 들어서면 비잔틴과 이슬람 약식이 혼재된 멋진 노르만 양식의 대리석 계단이 나타난다. 마치 이것은 건물의 부속인 계단이 아니라, 이 계단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건축물인듯 싶어질 정도였다. 씸플한 멋이 그대로 살아있는 멋진 계단이었다. 사방의 벽면에 시칠리아와 성서속의 이야기를 부조로 새긴 조각 장식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눈에 띈 것이 바로 아가타 성녀의 부조였다.
카타니아 출신의 아가타 성녀는 동정녀의 몸으로 신앙을 지키려다가....... 마침내 가슴을 절단당하는 참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카타니아를 거닐때에는 어디서든 자신의 발 아래 또 하나의 고대도시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골목길을 따라 걷노라면 표지판에 (그리스 로마극장과 오데온)이라는 간판이 나타난다. 골목길 양편으로 길게 실제로 사람들이 주거하고 있는 건물들 앞에 불쑥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고 할까. 잠시 당혹해 하면서 주변을 살피다보면 주거건물의 열려진 커다란 출입문 안쪽으로 역사책과 사진으로만 많이 접해보던 낯선 풍광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리이스인들이 만든 반원형의 극장이다. 로마시대엔 오데온(Odeon)이라는 공연이 실제 열리던 오늘날의 오페라 하우스나 극장 같은 곳이다.
에트나 화산의 분출 이후로 다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땅을 깊게 파서 그 속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하여 돌덩이가 나오면 파서 내다 버리거나 건축자재로 사용하면서 하나 둘 건물을 짖기 시작했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땅속의 고대 유적들은 오랜세월 그렇게 방치되었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여기저기서 재개발과 도로와 상하수도 공사를 하다보니 그동안 방치했고 외면했던 고대의 유적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잊혀졌던 역사와 묻혀있는 유적 유물둘의 고고학적 가치에 대해서 재고하기에 이르렀다. 늦은감은 있지만 그들은 보존과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이렇게 현대적 주거시설과 고대유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절묘하게 또 하나의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문화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이색적인 풍경이다.
현대적 도시인의 삶속에 녹아든 고대 문화의 옛 정취라고나 할까............ 그리스 로마극장과 오데온을 만났다.
카타니아는 '교회 집약적 도시'라 하겠다.
시칠리아에서 팔레르모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라 하지만, 우리의 시각으로는 결코 그렇게 큰 도시라 하기가 좀 뭐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도심의 어느 골목을 가던 사방에 교회로 넘쳐난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가 다 그렇지 뭐' 하겠지만 카타니아에선 유독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카타니아는 '아카타 성녀의 도시'라 하겠다.
시칠리아 출신으로 순교하여 성녀로 추앙받는 네 명의 여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가타 성녀는 여기 카타니아의 '수호 성녀'이다. 이제 카타니아를 여행하면서 어디에서건 더 많은 아가타 성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카나니아는 오페라의 거장 '벨리니의 도시'라 해도 무방하다.
어디를 가나 벨리니 동상을 흔하게 볼 수 있고, 카타니아 사람들과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의 99%는 벨리니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게 음악이란 '벨리니로 부터 시작되고 또 벨리니로 종결된다' 라고 보아도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벨리니에 대한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벨리니는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한 음악가가 아닌가..........
카타니아에서 가장 넓고 크고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찾는 공원도 바로 '벨리니 공원' 이다.
카타니아 역사에서 카타니아를 위해 헌신하고 공을 세운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 카타니아는 너무도 많은 추억과 여행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멋진 도시입니다.
하여 차차 나누어서 더 하기로 하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벼랑위 아름다운 도시 (타오르미나)를 먼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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