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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에서는 제발 길을 잃어버리셨기를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더 늦기전에 지도책과 가이드북을 저만치 내던지시라고 권하겠습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뒤따라 눈길을 보내고...........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확연한 반응을 내보이기 전에........
이미 저만치 내달리기 시작하는 발길을 따라 그냥 그런 여행을 하세요.
얼굴 가득 따사로운 햇쌀이 가득하고, 들길 따라 늘어서듯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선인장들이 자연의 푸르름을 속삭이고, 내딛는 발길마다 돌부리 걷어차이듯 고대의 유적들이 포근한 미소로 여행자를 반기는 언덕을 돌아서노라면......... 꿈속에서 잃어버렸던 코발트빛 바다와 나만의 작은 모래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 오랜 세월 전 어느 여행길에서 툭 하니 마음 한조각 어딘가에 흘려 놓고 왔었는데, 무심한 듯 과하지 않은 이 소박하고 평화로운 지중해의 어느 바닷가에서 다시 만날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온통 파스텔 톤 햇빛으로 채색된 시칠리아에서 모처럼 자질구레한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시칠리아의 '체팔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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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인근의 '체팔루'를 찾는다.
체팔루는 팔레르모에서 기차로 약 50분이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아주 작고 평화로운 지중해(더 정확히는 티레니아해)에 접해있는 어촌마을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해변의 경치로 언제나 무척이나 맣은 여행자가 몰리는 인기 여행지이다. 겨울을 제외하면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로 늘 넘쳐난다.
하지만 나는........ 체팔루를 여행하려는 여행자라면 차라리 겨울을 권하고 싶다. 아니면 비가 제법 내리는 날이나...... 아뭏튼 한산한 날을 권하겠다.
아주 작고 비좁은 체팔루를 넘쳐나는 인파속에서 즐기기란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체팔루는 좀처럼 아주 드문 한산하고 적막한 날에 천천히 걸어서 둘러보아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1월 하순이라는 비수기를 골라서 선택한 나에게 체팔루는 정말로 소박하고 정겹고 아름답고 고즈넉함과 한적함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시네마 천국>
체팔루를 여행하려고 생각하는 여행자나 이미 체팔루를 다녀온 여행자라면 누구나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 체팔루를 먼저 생각한다.
(엔니오 모레꼬네)의 서정적인 선율과 함께 '토토'와 '알프레드'를 떠올리면서 몇번씩 보았다는 사람들의 장면 장면의 회고를 듣노라면 어느새 나도모르게 지난날의 그 감동이 그대로 느껴지고는 한다.
영화속의 배경 마을인 (잔카르도)의 작고 소박한 어촌마을 풍경속에서 주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감독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한 노스텔지어를 한아름씩 안겨준다.
적어도 체팔루를 이미 다녀 온 여행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체팔루에서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드를 만나 보셨습니까?'
'영화속의 (잔카르도)가 (체팔루)가 맞던가요?'
'토토가 그리워 하고 다시 찾아 온 고향이 '체팔루'가 맞았던가요? 토토가 뛰어다닌던 골목이랑 정이 넘치던 이웃들과 소박하고 평안했던 그 토토의 고향이 맞았나요? 알프레도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그 골목길이 거기에 있었나요?"
어쩌면 이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오래된 과거의 시간이었기에, 이웃들도 떠나고 마을의 모습도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그 이웃들도....... 그 골목들도....... 이 곳. 체팔루에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체팔루의 곳곳을 돌아보면서 영화에서 보았던 추억속의 장소를 얼마나 찾아보고 만나보았나요?
혹시..........
'이상하다? 영화는 다섯번이나 보았는데 이상해......... 영화속의 장소랑 너무도 달라........ 내가 기억하는 장소가 여기엔 하나도 없어...........'
이렇게 생각해 보시진 않으셨나요?
'이상하다? '시네마 천국'은 체팔루에서 찍었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사랑하는 우리아들 짱구에게는 기가막힌 이력이 하나 평생 따라붙고 있다. 아들 바램이야 이제 이쯤됐으면 아빠가 잊어버렸으면 하겠지만, 워낙 특출난(?) 아빠의 기억력은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제 어미가 헌신해서 아들을 카나다로 어학연수를 보내주었는데 카나다로 떠나는 국제선을 처음 타던 날, 분명 입국 수속을 마치고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비행기를 못탔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어찌어찌해서 항공사의 배려로 다음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떠났지만서도........ 아 글씨 이넘이 누구를 닮아서 그랬는지......... 면세코너에서 시계에 필이 꽂혀서 시계 구경을 하다가 비행기를 그냥 먼저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헐.
커튼 밖으로 날이 훤해지기 시작하자 마자 팔레르모의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아그리젠토)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기차 시간도 넉넉했다.
숙소에서 마시모 오페라하우스쪽으로 접어들었다가 도심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을 택해 팔레르모역으로 갈 참이었다.
이미 도시 전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 지름길로 가는것도 문제가 전혀 없었고, 시간도 충분하리만치 넉넉한 상황이었다. 역 주변의 간이 커피숖에 서서 간단하게 커피와 빵 한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할 생각으로 그 시간까지도 염두에 두고 출발했던 것이다.
붉은 가로등이 켜진 어둑어둑한 골목 골목의 교회당에서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곧 잘 마추쳤고, '차오' 내지는 '본 조르노' 하면서 아침인사를 주고 받는다. 상큼하고 신선한 아침이 저절로 나를 활기차고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길다란 골목을 몇 개 지나쳤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몰려다니듯이 이골목 저골목으로 왔다 갔다를 하시는데 손마다 검은 비닐 봉다리나 장바구니를 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여기 팔레르모에서 가장 사람냄새 풍기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발라로 시장)이라는 것은 여행 정보를 통해서 이미 꿰차고 있었고, 오늘 저녁과 내일 새벽에 들려볼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발라로 시장은 새벽에 열려서 점심 시간이 지나면 폐점들을 하고, 그 이후 저녁무렵 부터는 유명한 길거리 간이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루는 것으로 이미 유명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밤과 새벽에 나누어 꼭 들려볼 생각이었는데, 지금 이 나들이 길의 시작 초입에서 그만 (발라로 시장)을 거쳐 지나가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관광지도에는 팔레르모 역사 건너편 뒷골목에서 시작하여 그도심 중심의 팔레르모 두오모까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발라로 새벽 시장이 들어서 있다고 했다. 나는 이미 시장의 초입을 조금 지나쳐서 옆 골목길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네 전통재래시장과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무언가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낯선 이국의 풍경에 짙한 호기심이 절로 솟아났다.
새벽부터 하루의 생활을 바쁘게 시작해야만 하는 소시민들의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어디를 가나 가장 보기 좋았다. 어쩌겠는가?
나도 아들 짱구처럼 내 본분과 지금 내가 준비했던 계획들을 아주 잠시 그만 잊어버렸다. 어느새 카메라를 꺼내들고 발걸음을 지나쳤을 시장의 초입인 두오모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시장을 새로 들어오며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한다.
'챠오' '본 조르노'
이거 내가 어느새 현지인 된거 아닌가?
채소가계에서 짬을 내서 차와 빵조각을 드시던 노인분께 아침인사를 환하게 건넸더니, 단박에 찻잔이 내게 불쑥 튀어 나온다. 우리네 녹차와 홍차의 중간쯤 되는 맛을 가진 '모닝 티'를 다 얻어 마시고 빵도 얻어 먹는다. 어느새 절반 쯤은 이미 시칠리아인이 된 듯한 기분이 절로 든다.
소시민 들이다.
거의 대다수가 절대적 서민들이다.
우리나라 종로의 (피맛골) 사연 처럼, 이곳이 본래 오래전부터 이슬람지역이었다. 비잔틴과 노르만인들이 지배를 하게되면서 이슬람인들은 구도심의 가장 후미진 뒷골목으로 쫒겨나듯 밀려나온 것이다. 상당수의 사람들 행색에서 최하층의 이슬람인 모습을 본다. 넉넉하지 못한 유럽인들도 있다. 이따금은 여행자와 자전거를 끈 제법 부유한 현지인들도 잔뜩 물건을 사서 들고 지나간다.
옷차림과 행색들은 남루하다해도 현대인이 분명하지만, 이곳 (발라로 시장)은 여전히 수백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감추었던듯 내보여 준다.
수백년 전의 모습을 한 시장 골목을 걷노라면 중간을 뚝 잘라 가로지르는 대로(차도)가 나오고, 도로를 건너서 또 이어진 좁은 골목을 들어가면 또 시장이 시작되고....... 대로가 나오고 길을 건너면....... 또 골목 안쪽으로 시장이 이어진다. 계속 반복이 된다.
참치.
지중해에서는 고급 품질의 참치가 많이 잡힌다. 황다랑어를 비롯한 최고급의 참치는 거의 99% 일본으로 급속 냉동되어 수출된다. 우리나라 일식집에서도 고급에 쓰이는 청새치나 기타 약간의 품질이 덜한 참치들이 재래시장의 좌판에 나오는데......... 정말 기가 막히다. 냉동이 아닌 싱싱하게 잡아서 바로 가져온 참치가..... 그냥 우리나라 고등어 잘라서 판매하듯이 토막으로 잘려서 무게로 판매된다. 이 사람들은 참치를 회로 먹지 않는다. 두툼하게 잘라서 스테이크로 요리해 먹는다. 그 참치의 가격이........ 가격이......... 1kg에 11유로다. 생물 연어의 경우엔 1kg에 9유로에 판매된다. 우리나라 삼겹살 보다도 싸다.
천.국.이.다.
다음날 실제로 참치 절반 500g을 6유로에 샀다. 식당에서 삼겹살 200g 가격이 얼마인가? 삽겹살로 치면 참치 2인분 반에 8천원 안쪽이다.
근데 문제는.........
대한민국표 소금에 약간의 참기름과 짭쪼름한 포장김이 없다는 것이다.
헐.
냉동실에 20분 넣었다 꺼낸 참치는 우리나라 일식집에서 먹어본 참치보다 고급이 분명한데........ 올리브유에 이태리 소금 섞어서 찍어먹는 참치는 확실하고도 뭔가가 좀 이상스럽다. 결국은......... 다 못먹었다. 결국 후라이팬에 스테이크 처럼 살짝 구워서 야채 샐러드랑 함께 나머지를 해치웠다.
정말 눈물 나도록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시칠리아에 가게된다면...... 참기름.소금. 포장김은 신주단지 모시듯 꼭 챙겨 가련다.
그러면 뭐해?.....................................
(아그리젠토행 기차)는 떠나간지 이미 오래 전 인걸...........
메모장을 뒤져 다음 기차 시간을 살펴보니 10분 정도 남았다. 후다다닥......... 팔레르모역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음 기차는 열시가 넘어서나 있다.
헐.
오늘 아그리젠토 가기는 다 틀려버렸다. 누가 짱구아빠 아니랄까봐........... 그넘의 시장이 기차를 그냥 보내버렸다. 그것도 두 대씩이나..........
1월 하순의 엄동설한에 열리는 새벽 재래시장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중해의 날씨가 얼마나 포근하며 모든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시장 한 켠으로 흡사 우리나라의 대장간을 연상시키는 아주 작은 철공소가 있었다. 주름이 한가득한 할아버지가 새벽부터 무엇인가를 갈아서 다듬고 계셨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무슨 연장 같았다. 인사를 하고 잠시 구경 좀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대뜸 옆에 주전자에서 차부터 한잔 따라서 건네주신다. 철공소 사진을 서너장 찍고나서 할아버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 죽어라 자신의 모습 사진만은 사양하신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셨나보다. 더는 실례가 될것 같아서 정중히 감사 인사를 드리고 돌아나왔다. 기억에 남는 어른이셨다.
골목을 돌아나오면서 하늘을 보니 낡고 허름한 이 골목에 사방으로 위성 수신기 접시(?)들이 지천으로 매달려 있다. 모로코의 빈민층 지역에서 유럽의 TV 방송 시청을 위해 건물 옥상 가득 위성안테나가 설치되었던 사진이 떠올랐다. 여기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 이리라.
현대 문명의 눈부신 발전과 점점 커져가는 빈부의 심한 격차와 갈등이라...........
'정녕 현대인에게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냥 웃지요........'
발라로 시장에서 나와 넓은 도로를 건너면 (팔레르모 중앙역) 역사 앞에 케사르 광장(줄리어스 시저)이 있다. 중앙에 거대한 동상이 있는데 광장의 이름때문에 고대 로마의 황제 케사르 동상인가 하면서 다가가 보니 근대 이탈리아를 통일한 (빗토리오 에마뉴엘 황제)의 동상이 거대한 모습으로 서있다. 에마뉴엘 황제는 이탈리아의 통일과 부흥을 외치면서 반도의 북부에서 왕국을 세우고 통일 운동을 벌였다. 한편 평민 출신인 (가라발디)가 이곳 시칠리아에서 부터 통일운동을 일으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했다. 가라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이탈리아 남부를 왕족이자 황제인 빗토리에 에마뉴엘 황제에게 헌납했다. 비로소 이탈리아는 로마 이후에 처음으로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 기념 동상인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멋진 이슬람 양식의 미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팔레르모 중앙역이다.
기차정거장 건물이기 이전에........ 참으로 아름다운 이슬람 양식의 유산인 것이다.
아그리젠토로 가는 기차는 이미 떠나갔고..........
그럼 이제 오늘은 뭘 하지?
헐.
천하태평인 나는 일단 간이 매점에 가서 카푸치노 커피에 빵을 하나 사서 창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아침을 해결했다.
중앙역사를 기웃거리듯이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기차시간표 전광판을 살펴보았다. 있었다.
(체팔루)로 가는 기차가 곧 있었다.
기차표 자동판매기에 가서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바꾸고 자판을 두드려 본다. 유로화를 기계에 넣고.......... 쨘 하고 체팔루행 기차포가 나온다.
신기하다.
외국에 가면 어디서건 기차표건 시내버스표건 창구던 자동판매기던 척 척 표를 잘 구해서 싸돌아 다니는데, 왜 서울만 가면 지하철 승차권 자동판매기에서 헤매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국말이 어렵긴 어려운가봐.............. ㅎ
아그리젠토는 내일가면 되지...........
오늘은 우선 체팔루다. 가자 체팔루로...........
'시네마 천국'을 기대하고 (체팔루)를 찾아갔는데 왜 체팔루에선 시네마 천국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시네마 천국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작은 어촌마을 (잔카르도)는 여기 (체팔루)라고 하기 보담은 좀 더 내륙에 있는 (팔라초 아드리아노)라고 보는것이 옳다.
인상적이었던, 성장한 토토가 고향을 떠날 때 배경으로 등장하는 기차역과 스산한 바닷가가 등장하는 장면이 여기 체팔루다. 그리고 체팔루의 중심가에 위치한 광장에다 셑트장을 짓고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유리시즈'를 상영하던 장소가 체팔루다.
나머지의 두오모 광장이나 뛰놀던 골목길, 그리고 엄마에게 들켜 혼나던 분수대랑 토토와 알프레도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던 시골길 등의 모든 장면은 바로 '팔라초 아드리아노'에서 촬영했다. 그러다보니 체팔루가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인것은 맞지만, 영화속 인상적인 장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소는 여기 체팔루가 아니라 팔라초 아드리아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체팔루에서 시네마 천국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들다고 해야겠다.
'시네마 천국'이 그리우면 (체팔루)가 아니라 (팔라초 아드리아노)로 가라.
그럼 체팔루엔 왜 갈까?
소박하고 아름다우니까.
지극히 평범하고 소탈하고 예쁜 말씨와 아름다운 친절을 가진 진짜 이탈리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그냥 발길 닿는대로 무작정 걸어다니기에 딱 그만인 작은 해변마을이 지중해를 통털어 체팔루 말고 더 있을까?
걷다보면 어디선가 곧 끝날것만 같은 제각각 모양과 느낌이 다른 골목들과 하늘위로 내걸린 빨래들, 열려진 창문으로 내다보며 여행객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과 낡은 삼륜차에 실려 온 싱싱한 야채와 과일들..........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 같은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들.
거기에다 이슬람과 노르만,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두오모는 앙증스러울만치 작고 아담하고, 마을 뒤에 우뚝 서서 역사의 변천을 모두 지켜본 아름다운 바위절벽 '로카'와, 바닷가에 넉넉하게 자리한 '마리나 광장', 어느 화가의 캔버스에나 올려있을것 같은 하얀 백사장과 낭만적인 푸르른 바다............
체. 팔. 루. 는. 언. 제. 나. 한. 산. 하. 고. 아. 름. 답. 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체팔루에서 호젓하게 혼자 느껴보는 모처럼만의 여유.
이런 시간이 좋다.
나는 이런 여행이 정말로 좋다.
간혹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굵은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는 흐린 날씨지만 나는 그냥 좋다.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만나고 싶다.
체팔루야. 오늘만은 날 위해서 너의 가슴을 열어주렴.
고. 마. 워. 체. 팔. 루.
체팔루가 좋다.
시칠리아가 마냥 좋아진다.
노르만의 나라. 시칠리아.
프리드리히 2세는 왜 평생토록 시칠리아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을까?
그는 시칠리아의 어떤것이 마음에 들었을까? 그가 그토록 사랑한 시칠리아는 어떤 나라였을까?
* history&culture>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200년 동안이나 이어진 (십자군 전쟁)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7차에 걸친 전쟁이었다고 결론내리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9차나 10차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는 복잡한 전쟁이다.
그런가하면 이 전쟁은 발단의 원인이 된 시대상황과 1차.2차.3차 까지의 전쟁 이면을 들여다보고 나면 나머지는 사실 별개 아니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쉽게 이해가 되는 정쟁이다.
이 초기 전쟁의 복잡다난한 상황들을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 (킹덤 오브 해븐)에서 철저한 고증에 입각해 세세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다. 영화는 이미 1차 전쟁의 결과로 정복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다시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기는 3차 전쟁의 직전까지를 총 망라하고 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개개인물상을 흥행을 위해서 약간 비틀어 꾸며냈다는 점 외에는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낸 대 서사시 이다. 내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도무지 헷갈리고 스토리 연결이 되지 않아 크게 실망한 영화였지만, 다음에 '감독판'이 다시 올려진 것을 보고났을 때 감동은 '벤허' 이상이었다. 처음 극장판은 나중의 감독판에 비해 약 50분 분량을 가위질한채 상영되었다. 하여 영화 전체의 구성미가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감독판은 실로 완벽했다.
'십자군 전쟁사'가 궁금한 사람은 꼭 (킹덤 오브 해븐. 감독판)을 보도록 강추하겠다.
하여 다음에 기회를 보아서 영화 (킹덤 오브 해븐)의 내용을 토대로 '십자군 전쟁사'의 초반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200여년에 걸쳐 7차에서 9차가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사에서 실제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전쟁은 단 두번뿐이다.
1차원정단은 1099년에 에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이후 약 100여년 동안 지배를 하다가 '하틴의 전투'에서 패한 후, 1187년 이슬람의 새로운 영운 (살라딘)에게 성지를 빼앗긴다. 이후 원정은 계속되었으나 6차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약 15년간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난 다음까지(1244년) 예루살렘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된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슬람 세력이 점령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뿌리는 바로 독일 호엔슈타우펜가(家)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집안이었다.
하여 그의 직함은 '독일의 왕' 이자 '시칠리아의 왕' 이며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그의 직위였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났으며 4살 때, 갑자기 서거한 아버지 '하인리히 6세'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 왕에 등극했다. 그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의 정략적인 지원하에 26세의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황제의 즉위식을 위해 독일을 방문하는 등의 행적 외에는 생의 대부분을 시칠리아에서 보냈다. 그의 시칠리아 사랑은 유별난던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이름을 물려준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또한 유럽 역사상 아주 위대한 '독일의 왕' 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였다. 역사는 그를 프리드리히 1세 라는 공식 직함보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라고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 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를 '유럽의 관운장' 이라 생각하면 쉬울것 같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가 길고 붉은 수염을 휘날렸다는데서 유래된 별명이다. 그는 유럽 역사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용맹하고 노련한 기사이자 왕이자 황제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직접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를 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
(살라딘)이라는 길출한 인물이 이슬람에 태어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 십자군을 물리치자 유럽 사회는 심하게 요동쳤다. 하여 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대군을 이끌고 살라딘에 대적할 장수를 뽑지 못하는 고민을 교황과 유럽사회는 하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였다. 그의 나이 70세에 육박한 고령의 기사였다. 1차 2차 원정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그는 철저하게 준비를 마쳤다. 1189년 10만의 3차 십자군을 이끌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풀을 거쳐 에루살렘으로 진군했다. 그의 출현에 살라딘과 모든 이슬람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기사였다.
그런데 그만......... 행군 도중 살레프 강에서 도강하던 중에 낙마를 했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슬람은 크게 안도했고, 유럽 사회는 급하게 새로운 총사령관을 찾아내야만 했다. 하여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유럽 역사상 항상 부동으로 NO1 위치를 고수하는 불세출의 영웅 리차드 1세(사자왕)가 부랴부랴 대타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대 기독교의 영웅 리차드 1세'가 등장하는 (제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이 내용 또한 다음 기회에......)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전히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익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 살라딘도 사망했다.
1217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5차 십자군을 내보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출정을 요구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전쟁의 속내막을 이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교황이 시킨다고 쉽게 전쟁에 나갈 위인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저런 핑계로 게속 참전을 거부하자 화가 난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 시켜 버린다. 그래도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끈질긴 교황의 회유와 협박에 마침내 전쟁에 참여하기로 하여 장도에 오르긴 했는데....... 십자군 본진과 합류하기도 전에 그만 풍토병인 장티푸스에 걸려 병을 핑계로 중도에 귀국하고 만다. 그 소식에 교황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십자군은 처음엔 기세가 등등했으나 첫싸움에서 시리아 지역의 이슬람군에게 패하자 제풀에 사기가 꺾여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 귀국해 버린다.
아예 시작을 아니한 것만도 못한 5차 원정대였다.
10년이 지나서 새로운 교황으로 등극한 그레고리오 9세는 프레드리히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만들어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도록 명령했다. 핑게를 댔다. 화가 난 교황은 황제를 파문 했다. 그래도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래서 복권 시켜주고 화가나서 파문 시키고를 수시로 반복했다.
교황의 최후통첩에 굴복한 황제는 느긋하게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군대를 꾸리긴 꾸렸다. 그리고 '나 출정한다'라고 외치면서 지중해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지 않고 터키 남부를 지나 이슬람 지역으로 향했다.
이슬람 영토 해안에 도착한 황제는 전투 준비는 하지않고 서신을 적어 예루살렘의 이슬람 왕에게 보냈다. 당시 에루살렘의 지배자는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하마드 빈 알 아딘'으로 그는 사망한 '살라딘'의 조카였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호위병 서넛만 데리고 예루살렘 인근까지 직접 갈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둘이 직접 만나서 합시다.'
예루살렘 성에서 저만치 내려다 보이는 벌판에 천막 하나를 달랑 쳐놓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빵(총사령관) 두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곳까지 직접 오시다니........ 진즉이 기별을 주셨더라면 저도 그쪽으로 출발을 했었을텐데요..........'
'술탄께서 마중나오신다고 하면 우리 애들이 가만히 믿겠습니까? 군대를 모조리 이끌고 쳐들어 온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도 군대를 모조리 끌고 와야 할테고........ 괜히 죄없는 애들 피곤하게 할게 무엇이겠습니다. 그냥 우리 대빵끼리 끝내면 될 일을.............'
'대빵기리 끝내자 하시면.......... 혹 저랑 일대일로 맞짱을.............."
'허허....... 이거 우리가 어디 사춘기 청소년입니까? 맞짱을 트게............ 적어도 우린 지성인 답게......... 말로 풀어야지요. 대화로.............'
'대화로 풀자 하시면........... '
'딱 뿌러지게 말해서............ 이제 에루살렘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요."
'뭐라구요? 예루살렘을 내 놓으라고요?'
'맞습니다. 오랜세월 예루살렘을 잘 가지고 살아오셨으면 이제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셔야지요. 이제 그만 내 놓으세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냥 내 놓으라니요?'
'그럼 또 죽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죽어야 내 놓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건 싸워봐야 알겠지요?'
'싸울 자신은 있으시고요?'
'알라께서 보호하시는 한 이슬람은 이교도에게 절대 지지 않습니다. 언제든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에이........ 뻥이 심하시네......... 내가 이미 다 알고 왔다니까요? 우리기리 서로 안면 붉히지 말고 그냥 넘겨 주실래요? 아니면 우리가 계속 해안에 진을 치고 지켜보고 있을테니....... 저 사막 너머에 우글거리고 있는 동족들 칼에 죽으시겠습니까?'
'동족의 칼을 맞다니요?'
'선왕(살라딘)께서 돌아가신 뒤 이슬람이 갈갈이 찢어져서 서로 반목하고 죽이고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 같이 여기 에루살렘을 차지해서 '살라딘'의 영광과 업적을 자신의 등에 업고 행세하려고 안달이지요? 내가 여기 오지 않았어도 당신은 이미 바람 앞의 등불 입니다. 나 역시도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니 이쯤에서 예루살렘을 나에게 넘기세요. 내 현재의 예루살렘엔 손하나 까딱하거나 저지레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 부족들을 안정시키고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세요. 모든 이슬람 부족들이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당신에게 창을 겨누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슬람의 공적인 기독교가 다시 에루살렘을 차지했으니 적어도 이제부터 한동안은 그들 모두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게 될것입니다. 그게 당신과 부족이 살아나는 방법입니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 수 있잖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예루살렘은 우리 이슬람에게도 신성한 성지 입니다. 성지를 빼앗긴 수모를 감당하란 말씀이십니까?'
'빠앗기다니요? 카밀 왕에게 제가 잠시 빌리는 것입니다. 당장 저하고 싸워서 이길 승산이 희박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군사만 죽겠습니까? 성내와 인근의 이슬람인들이 수없이 많이 죽을 것입니다. 이슬람 성전이 모조리 파괴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모두의 안전을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인들의 성지순레는 앞으로도 자유로울 것이고 아무런 위해 행위도 절대 없을 것입니다. 성전과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받고 예루살렘을 저에게 평화적으로 위임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언제고 내가 다시 권위를 되찾은 후에 예루살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때는 어떻하시겠습니까? 비워 주시겠습니까?'
'그때는 그때가서 다시 지금 처럼 대화를 통해 상의를 하면 되겠지요. 우리의 입장이 서로 반대로 변해있다면 당연히 저는 에루살렘을 비워드릴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떠나겠습니다. 준비를 갖추고 떠나자면 보름쯤 걸리겠습니다.'
'항상 신께서 함께 하시기를......... 그럼 저는 이곳에서 이십일 동안 꼼짝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십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칼끼리 한번 부딪혀보지도 않고, 군대가 마주서서 고함소리 한번 질러 보지도 않고,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뀌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에루살렘에 입성했다.
그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인들이 몰려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 줄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당신처럼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통치를 해 주어야 평화가 찾아올것이라는 생각과 믿음에서 나온 청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길길이 날뛰면서 치를 떨었다.
교황이 십자군을 편성해 보낸 뜻은 예루살렘을 점령해 교황 자신의 영토에 귀속시키고 예루살렘의 재산을 교황 자신이 차지할 생각이었는데......... 쌈질 한번 안벌이고 성지 예루살렘을 프리드리히가 날로 통째로 삼켜버렸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교황은 황제를 교회에서 파문 시키고 서둘러 군대를 꾸려 출정 시켰다.
십자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교황의 군대가 출전한 것이다. 거기에다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을 토벌군에 대장으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개판 이었다) (아니지...... 개**들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싸우지는 않는다)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교황이 보낸 십자군(웃기는 토벌대) 대부대를 중간에서 아주 쉽게 몰살 시켜 버린다. 교황은 또 군대를 모았다. 서둘러 다시 토벌대(십자군)를 파병시켰는데 이들이 예루살렘까지 가다가 말고 지레 겁을 먼저 먹었는지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교황으로선 대략난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교황은 사신을 보내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복권 시킨다.(이 정도면 참으로 웃기는게 교회에서의 파문이요, 또 참으로 가치 없는게 교권의 회복인 것이다) (이거 뭐 유치원 아이들 말장난도 아니고서리...........)
그러면서 '좋아 일단 10년 동안 프리드리히 너가 예루살렘의 왕 노릇 해. 인정해 줄께. 10년 지나면 다시 의논 하기로 해.' 하면서 교황이 손을 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콧방귀도 안꾸면서 10년 동안 예루살렘 왕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기간이 지나서도 5년을 더 꿋꿋하게 버텨낸다.
15년간 예루살렘을 실제로 차지했던 것이다.
평화적으로 차지한 최초의 사례이자 기독교의 마지막 예루살렘 성지 점령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는 영원히 이슬람의 차지가 된다. (이스라엘 건국때까지)
1250년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서 사망하였다.
야만의 시대와 별반 다를게 없는 중세 시대를 산 사람이라고 하기엔 보기 드물게 시대를 매우 앞서간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 이슬람인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습득하여 시칠리아에서 노르만과 비잔틴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계몽군주)라 부르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정신은 독일의 통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에도 밀알이 되어 계승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간 영웅이었다.
지중해의 진주 체팔루.
시칠리아의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그사람 혼자만의 바다를 한조각씩 선사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바다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시칠리아의 지중해다.
바쁜 일상의 현대인들이여. 지루한듯 한가로운 시칠리아의 평화로움 앞에 백기를 들어라.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모두 네것이 되리라.
길을 잃지 않고 늘 곧은 길을 통해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참된 인생'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길을 잃어본 여행자의 발걸음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결단코 '참된 인생'을 운운할 자격초자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여행자의 발길 앞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행복'이란 녀석이 그저 여기저기 빨래처럼 널리어 있다. 여기 체팔루의 좁은 골목길 하늘에 내걸린 빨래줄에처럼 말이다.
시칠리아는 말이다............
누구나 한번은 꼭 가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하지만...........
한번에 그칠 여행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알. 럽. 시. 칠. 리. 아.
알. 럽. 체.팔. 루.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아그리젠토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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