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간혹 받고는 한다.
- 한국에서 오셨다구요? 그럼 당신의 종교는 붓다(불교) 입니까?
- 아닙니다. 저는 크리스찬 입니다. 크리스찬 중에서도 Protestant(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한국은 붓다의 나라가 아닙니까? 여행 책자를 보니까 붓다 이야기와 문화재가 많던데......
- 한국은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도 불교가 천오백년 이상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보니 한국인의 정서 속에, 그리고 생활문화 속에 수많은 문화재와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상적인 것들의 상당부분이 불교문화재인 경우가 되었지요.
- 그렇다면 당신처럼 서양에서 건너간 종교라 할 수 있는 크리스찬의 수는 아주 적겠군요?
-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불교인 수가 무척이나 많은 편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성공회 등이 있는데 이들을 모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합쳐서 판단한다면 오히려 불교인들 숫자보다 많습니다. 그 외에도 소수의 이슬람이나 무속신앙등 많은 종교가 산재해 있으나, 나름 조화를 이루면서 상대방의 종교와 신앙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그럼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얼마나 되었나요?
- 예언자 모하메드로 부터의 시간을 따져도 천오백년 가까운 시간이 이슬람의 역사이겠으나,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아쉽게도 이제 겨우 백삼십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 당신은 우리 이슬람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 당신과 나, 그리고 이 지구상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찬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당신과 내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이라고 똑 같이 생각하고 믿고있는것 처럼 말입니다. 이슬람은 평화를 상징하고 기독교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소중한 가르침에 포함된 내용들입니다.
주로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엄청난 친근감이 생겨난다.
한국을 떠나 올때 극구 말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어느새 아스라히 사라지고 난 후이다. '왜 굳이 테러가 발생하는 위험한 지역으로 가느냐'며 걱정하고 염려해 주던 사람들....... 이렇게 한마디를 던져본다.
-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야. 저들의 믿음과 나의 믿음이 별반 다르지 않아. 살며시 다가가보면 우린 모두가 형제며 가족이며 이웃사촌들인걸......
'신은 하나다.'
이는 오늘날 이 땅위에 살고있는 약 32억8천만명에 가까운 인구의 (신앙고백)이며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여호아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에 뿌리를 둔 종교들(유대교.카톨릭교.개신교.이슬람교.정교회 등)에게는 진리인 것이 틀림없겠으나, 다신교 신앙에 근본을 둔 힌두교나 불교, 그리고 여타의 무속적인 신앙에 근본을 둔 다른 수많은 종교에게는 터무니 없는 낭설일 뿐이다. 무신론자를 포함하여 유일신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인구가 또한 30억 인구를 넘어서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진리)란 어떤 조건이나 어떤 상황에 놓아도 그 가치나 의미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 '참된 이치'를 의미한다.
결국 '신은 하나다'라는 명제는 진리 이기도 하고 또 진리가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런 상황이 되면 대략 한국의 기독교 입장에서는 '사탄''이단''우상숭배' 등의 용어를 앞세워 상대를 저주하고 질타한다. 어쩌면 지극히 일부의 성령론자들로 대변되는 소수자들의 파행일 수도 있겠다.
신앙이란 각자의 믿음이다. 인간 개개인이 신께서 부여해주신 고유의 숭고함을 간직한 채 세상에 태어났듯이, 그들 개개인의 신앙 또한 숭고하고 소중한 것이다. 타인의 신앙을 존경해야 할 것이며, '전도의 사명'이란 미명아래 타인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마치 어떤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타인의 종교를 비방하고 멸시하고 배타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그 사람이 믿는 신이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영생도 천국도 없으며, 그가 입으로 내뱉은 저주와 화가 그 자신에게 영원히 미칠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유일신 신앙'을 따르는 종교들은 그들의 근본에 대하여 유독 집념이 강하다.
오랜 역사속의 이야기들도 그러하고, 작금의 현세에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그 집념을 본다. 'all or nothing'식이다.
유일한 신인 그분은 지극히 위대하시고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분의 요구는 어떤 상황 어떤 방법으로든 반듯이 실현되어야 하며, 자신들은 그 과업의 실현에 특별히 선택받은자들 이라는 식이다. 그런 천부인권적인 우월주의 신앙 앞에는 배려도 존경도 공생도 사랑도 평화도 없다.
어떤 학자들은 '지구의 미래''인류의 미래'에 대해 연구발표를 통해 과학의 놀라운 발전만큼이나 쓰레기와 환경문제 등 많은 닥쳐오는 상황들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것이 주지의 사실이며, 그 중에는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또 하나의 재앙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다. 유구한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그 안에서 신앙의 갈등이나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분쟁과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종교간의 분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인류사 속에 벌어진 대부분의 분쟁과 전쟁은 특정 하나의 종교, 여호와를 아버지라 부르는 유일신앙을 같은 한 뿌리로 둔 종교간의 분쟁과 전쟁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그것들을 (종교전쟁)이라고 부르지 말고, '하나뿐인 유일신 하나님의 가족사 안에서 후손들 간에서 벌어지는 골육상쟁' 이라고 하는것이 옳지 않을까?
지인들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영화 (그을린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거야? 아니 계시기나 한거야?'
'더 큰 뜻이 있으신 것이야. 우리가 모르는.....'
'신이게시다면 이쯤되면 직접 나타나서 해결하셔야 하는것 아니야? 맨날 테러로 애매한 사람들만 죽어가고.....'
'우리가 그 분의 숭고한 뜻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니?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려다 보고 게셔.......'
'누가 보았대? 이메일이라도 왔대? 카톡이라도 왔냐고? 염려말고 기다리라고 하더냐고?'
'네 믿음이 부족한거야. 더 간절하게 기도해봐. 언젠가 들어주실거야.'
'교회도 성당도 항상 그런식이지...... 그러니까 무신론자들이 점 점 늘어가는 거야....... 항상 그런식이니까....... 무책임하니까........'
나에게도 질문이 들어왔다. 심지어는 이슬람의 분쟁에서 테러이야기와 더 나아가서는 시아파와 수니파에 관해서 까지도. 에전에 내가 몇번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쓴적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날 별로 이야기 한 기억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가슴속이 꽉 막힌듯 답답해져만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스스로를 칭해 돌팔이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비록 교회를 찾아 에배를 본 기억이 거의 이십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으나, 나는 분명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크리스찬이다.
고모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첫발을 내디딘 십대때 이후 이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그것을 잊어 본 적은 없다.
고모님이 워낙 신실하신 신앙인이시기에 그분의 배려속에 고운 청년신앙인으로 자라났다. 자라서는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반과 학생회를 맡아 지도하기도 했다. 많은 분들께 큰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 번번히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 주의 교회 단체점심식사 메뉴는 내가 요청한 것으로 나왔을 정도였다.
대학에 가서 격동의 79년. 80년을 겪었다. EYC 왈동에 적극 참여했고, 이념 써클에 쫓아다니게 되었다. 현장(?)업무도 관여했다.
그 와중에서 가장 나를 끌어당긴 부분은 (해방신학)(제3세게신학) 분야였다. 어떤 목마름을 갈구 하듯이 나는 새로운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학생은 징집유에 대상이었음에도 영장이 나와 징집되어 강원도 인제의 최북방 철책을 오르내리는 부대에 근무했다.
재대를 하고 고향에 돌아왔을때, 많은 분들이 나에게 참으로 많은 기대를 보이셨다. 교회 안에서 더많은 소중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들 하셨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미 어느정도 변해 있었던것 같다. 세상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그때 챠밍여사를 만났다.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기위한 첫 소임지로 내가 다니는 교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예전에 맡았던 주일학교 학생회 성가대를 그녀와 함께 했다.
언젠가 그녀의 숙소에 식사를 초대를 받고 갔던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방 한쪽 벽으로 신학에 대한 서책들이 책장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방 벽에도 가득 책이 쌓여있었으나 책의 내용에 있어 성향이 전혀 다른 듣도 보도 못하던 책들이었다. 목사님 서고에서 보던 책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독 내 눈에 띄던 책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고려원)에서 발행된 보랏빛의 고급양장본의 두툼한 책이었다. 책장을 넘겨보니 소설이었다. 안정효 선생님이 번역을 하셨고, 작가는 N. 카잔챠키스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바로 그 책이었다.
그날 그 책을 빌렸고 읽고난 후에는 참으로 커다란 감동과 충격에 빠졌다.
카잔차키스는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가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다. 그날 이후 그의 모든 작품들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나서 이념써클에서 읽었던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다시 읽어보니 의미와 감회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챠밍의 책장에서 김교신 선생님도 만났고...... 언젠가는 그 방대한 분량의 (성서주해)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이 모든 서책들이 좀 더 나에게 가까이 있어야만 했다.
다음해에 우리는 결혼했고..... 벌써 33년이 되었다.
결혼 후에 목회일을 접은 챠밍은 아주아주 소박한 일반신앙인으로 돌아갔다. 성가대 피아노 반주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는 점차 교회일에서 손을 떼고 교회밖의 일에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다만 학문적인 열정은 게속되었다.
신학적인 논리와 논쟁에서 내가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자 챠밍이 우려섞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부터라도 그 학문적 열정으로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다시 해 보면 어떻겠냐고....... 그러나 그렇게 까지는 하고 망설이던 나는 거절했다.
- 충만한 지식과 열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자칫 교만으로 빠지게 되거든, 난 당신에게 그런면이 있음을 보기에 걱정이 돼.
-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냥 평상시 궁금했던 것들에 한동안 몰두했던것일뿐...... 그냥 평범하게 열심히 노력하며 살거야.
- 그럼 예전처럼 차분하고 젊잖은 신앙인으로 돌아가...... 학생회 교사도 다시하고.......
그 후 한동안 다시 예전의 신앙생활을 되찾았는데....... 그만 교회에 커다란 분란이 터졌다.
연속해서 서너번의 분쟁이 생겨났고, 그 때마다 교회가 분리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교회일을 많이 맡아보고 있던 우리는 항상 원치않는 가십거리에 떠오르게 되었고, 어떤 선택들을 강요 받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동한 교회 안에서 함게했던 모든 사람들과 어떤 연관도 없는 곳으로 교회를 떠났다. 신앙적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는 다른 어느교회에서도 안정적인 정착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지난 교회에서 어떤 역활과 일을 했었는지 이미 모두들 알고 있었고, 부담을 넘어설 정도의 관심과 기대들을 보여주고 있기에 다시 발걸음을 돌려 유랑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아주 교회를 나왔다. 아니지. 정형화된 성전을 뛰쳐나온 것이다. 그 길이 오늘 이순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내는 아주 먼 시골의 개척교회에 적을 두고...... 오로지 어린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지금은 도심의 제법 커다란 교회에 안주하면서 아주아주 소박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신학적 신앙적 관심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지만....... 절대 나에게 교회가자는 등의 보편타당적인 신앙인들의 생활을 강요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한때 나에게 '그것이 바로 교만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이제는 서서히 더 많이 공감해가고...... 점점 내 성향의 신앙으로 동화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의 생각과 나의 가슴은 항상 초대교회를 간절히 그리워 한다.
이 말은 현재의 기성 기독교 신앙을 그리 달가와 하거나 에쁘게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신앙이 결코 옳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전제도 포함한다. 어쩌면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현재의 세태를 여실히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점차 쇠락해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극한의 정점을 넘어선 것을 신앙적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득 되돌아 보니 어느새 너무도 멀리 지극히 높은 분의 시야에서 멀여져왔고 이제 점차 그분의 관심에서 조차 사라져가고 있을을 알 것이다. 어쩌면 바티칸을 포함한 지극히 일부의 개신교지도자들은 신이 있건 없건, 혹은 오시던 안오시거나 못오시던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미 그들만의 방어체계를 나름 갗추어 놓고 세상사람들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다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토피아로 치장된 아주아주 거대한 방산기업같은 형태로 말이다. 하늘 나라를 외치는 그들은 정말 하늘나라를 알며 그러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의 속내는 아무리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늘나라가 있다해도 쉽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천국이 아무리 좋은들 한없이 달콤하고 향기롭고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 지상의 기독교 왕국만이야 하겠느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부족한 나만의 소견을 피력해 보는것 뿐 임을 거듭 밝혀든다.
내가 지난 여행으로 동유럽(코카서스)를 찾은것은 단지 여행의 의미만이 아니었다.
후기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그것은 초대교회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곳에서 보았다. 참 신앙인의 모습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속에 배어있었다. 신약성서 속의 예수가 거닐던 발자취와 이웃에게 전하던 이야기와 삶의 모습들이 그곳에는 여전히 지극히 평범한 일상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그곳의 사람들과 초대교회의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멀지 않은 날에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그곳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지난해에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내도 그곳에서 지극이 높은곳의 그 분을 꼭 만날것이라고 믿고있다.
위의 그림은 터키 이스탄불의 탁심광장 한 구석의 담벼락에 그련진 그림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대하는 순간....... 그 찰라 같은 짧은 순간에 나는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 전율을 감지했다.
기독교라는 조각배 위에 에루살렘의 유대인. 메카의 이슬람인. 바티칸의 카톨릭교인. 서울의 기독교인. 아테네의 정교회인들이 함께 은혜의 바다를 떠다니면서 기도와 찬양으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다가, 가끔은 서로 머리끄댕기며 죽자살자 싸우기도 하다가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 쓰러져가는 모습이아닐까?
무한한줄 알았던 드넓은 은혜의 바다는 결국....... 신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작은 유리병속이며, 그나마 코르크 마개로 꽉 막현버린 단절된 세상임을 저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어쩌면.
일단..... 어서 신이 다시 내려오셔서 급한대로 코르크 마개라도 열여 주셔야 구원의 희망도 되살아 나고, 하찮은 생명도 연장이 되고...... 그래야 기도와 찬양도 이어질것인데.........
신은 과연 다시 내려 오실까? 코르크 마개를 당장 빼줘야 겨우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게신것은 아닐까? 코르크 먀개를 아예 제거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걸까? 혹여 아예 병을 깨트려 버려줄 생각은 애시당초 없으셨던것은 아닐까?
병 밖의 드넓은 세상과 바다를 사실대로 알려주면 나약한 영혼들이 혹여 혼비백산 모두 놀라 기절할까봐, 간혹 불어오는 모진 강풍과 높은 파도에 쓸려갈까봐 극진히 보호해 주시려 일부러.......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높고 귀하신 생각과 은총으로 유리병 속에 가두어 보호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멀고 먼 이국땅의 낯선 골목에서 비내리는 새벽에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신앙인(신도)를 가지고 있는 몇 몇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물론 다수라는 의미가 어떤 우월성이나 정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하면서 짬을 내야하고, 이번의 경우는 오래된 메모장과 노트까지 다시 꺼내 뒤적이며 작업을 해야하다보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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