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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그래피티) 누가 그들을 하찮은 길거리 미술가라고 말하는가

by 피안재 2019. 7. 27.



























   '뱅크시 당하다(Banksy-ed)'


  2018에 생겨난 이 신조어를 알고있다면 당신은 분명 신세대(?)다.

  불과 일년 전,  세계적인 미술품 시장인 소더비 경매에서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세기의 놀랄만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놀랍고 충격적인 세기말적 사태에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매가 끝난 후 책임자였던 수석 디렉터 앨릭스 크란크의 입에서 짧은 비명처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모두 뱅크시 당했군요((We’ve been Banksy-ed).'

  알았어도 그게 큰 자랑거리는 아니고,  또 몰랐어도 그게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그게 어떤 사건이었고  어떤 의미였는지는  이제 천천히 하나하나 짚어 볼 생각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미술관을 찾는가?'


  즉답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답변을 굳이 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적어도 자기 자신속의 내면에게는 진실한 답변을 한번 쯤 해줄 수 있는 당신을 기대한다.

  유명 미술관에 길게 줄을 서서 찾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 화가의 작품 앞에서 꼭 인증 샷을 날려야 했던 자신의 속내를 말이다.

  이번 글은  짧게나마  그런 이야기를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오래전부터 가져왔던 생각을 정리해 보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고자 한다.

  이번 여행중 '톨레도 여행'에서 잠시 만났던 아주 인상 깊었던  길거리의 '엘 그레코의 후예'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세계적인 관광명소  뉴욕 센트럴 파크에는 주변으로 수많은 노점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간이 매점과 기념품점과 꽃집과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들 중간에  아주 오랫동안 이곳 센트럴 파크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미술품 판매상 할아버지가 있다.  낡은 미술관계 서적이나 뉴욕의 길거리 화가들이 그린 낡고 허름해 보이는 작품들과  뉴욕의 명소를 프린트 해 온 사진들을 가판대 위에 진열해 놓고 판매를 하는 할아버지였다.

  어느날(2013년)  불쑥 자신의 신분과 얼굴을 가린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을 화가 지망생이라고 소개한 이 청년은 직접 그린 25점의 그림을 내밀었다.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딱 3시간 동안만 할아버지의 가판대 위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진열해 놓고 대신 팔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판매 결과에 관계없이  보상을 하겠다는 말이 뒤따랐다.

  조건은......  딱 3시간 동안만 판매한 후에  팔리지 않은 작품은  자신이 다시 회수해 갈것이며,  가격은 오로지 작품 1점당 60$ 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였다.

  파리만 날리고 있던 할아버지의 처지였고,  또 청년이 가지고 온 작품을 살펴보매  유명하거나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름 어느정도 작품성은 있어보였기에   두말 않고 그 청년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 들였다.

  할아버지는 즉시 간이 가판대를 깨끗하게 비우고  청년이 가지고 온  25점의 작품을  자신의 경험대로 잘 보이게끔 전시를 하고는 판매에 들어갔다.

  1점 당 60달러라는 청년이 가지고 온 가격표를 내 붙였고,  사진 촬영만은  사양한다는 안내문도  내걸었다.

  청년은  사라졌다가 정확히 3시간 뒤에 다시 나타났다.

  전시된 그림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크게 관심을 보이거나 흥정을 심하게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꽃을 사들과 가던 할머니가 손주의 방에 걸어주면 좋겠다며 거금을 털어  2점을 사갔다.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탓다는 아가씨가 자기방에 걸어두고 싶다고  1점을 사갔다.  그렇게 해서 3시간동안  총 7점의 그림만이 겨우 팔려 나갔다.

  별로 대소롭지 않다는 듯 청년은 팔리지 않은  그림들을 수습하고는 오가는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오늘 그림을 팔아 모은 총금액인 420 달러가 고스란히 쥐어져 있었다.  사라지는 청년을 할아버지는 다소 미안한 마음으로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청년이 사라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 할아버지로서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센트럴 파크 일대가 한바탕 난리통에 빠져버리고 만것이다.

  인산인해로 교통은 마비되고  수많은 카메라 세례와 저마다 명함을 꺼내든 소위 잘나가는 상류층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민 핸디폰에는  SNS를 통해서 생중계된 자신의 가판대와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할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을 비롯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가판대에서 팔렸던 그림들이 어떤 그림이었으며.......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를  아무도 알지 못햇던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방송국들과  이 세상의 모든 유명 미술관들과  최고급 미술품을 사고파는 초특급 브로커들에겐 정말로 경악스런 하루였다.

  과거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 댱했을 때도 이처럼 뜨거운 열광의 도가니 같은 상황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긴.....  누구보다 놀란것은 당연히  그 가판대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다음으론 얼떨결에 그 그림을 구입했던  손주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첫 월급으로 그림을 산 아가씨였을 것이다.

  나도 역시 미술관을 가끔은 찾아가지만.......  특별히 별다른 관심이나 욕구를 가지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본인 같은 사람은 그날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계에서 벌어진 아주 특별한 해프닝일 뿐이었다.(시간이 한참 지난 뒤 어느 잡지에서 겨우  그 소식을 접하기는 했으니까)

  그날 밤 영국 BBC 방송에선 특별 뉴스를 내보내면서  그날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벌어진 사건을 아주 소상하게  게스트의 해설까지 덧붙여가며 전했다.  그리고 그 방송의 중간에........  '그날 전시된 25점의 작품중에서  7점의 작품이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적어도 1점당  3만1천달러(3.478만원)의 가치는 지금 당장 이자리에서 보장한다'고 방송했다.  고정가 60달러에 실제로 판매된  작품이 실상은 3만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창작자인 그 청년의 사인이 담긴 진품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날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지금까지 그대로 소장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쩌자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도대체 그 청년은 누구인가?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


  2018년.  5년 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판매 된 그림과 비슷한 수준의 그 청년이 직접 그린 그림 (소녀와 풍선)이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 올려졌다.

  낙찰가는  14억9천만원 이었다.

  60달러  x  (???????) = 3만 달러 ----------  5년 --------------->     15억원 !!!!!!!!!!!


  할.렐.루.야

  아.멘.
















  (공지 사항)

  " 이번 기회를 빌어 (그래피티의 실상과 현실)을 이야기해 보고자함에 있어서,  집필자인  본인이  여행을 하면서 구경한 그림은 많았으나,  이번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그래피티 그림을 접할 기회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하여 부득이하게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통로로 많은 검색을 통해 많은 정보와 그림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혹  저작권에 걸리는 사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글이.....  상업적 이용이라거나  다른 특정한 이익을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평소  그래피티에 대해 가졌던 필자의 관심과  나아가서는 조금 긍적정이고 미래지향적인 측면에서 한번쯤 내 입으로 (그래피티의 세계)를 거론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면서,  그 이해와 그래피티의 실상을 좀 더 소상하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각각의 사전 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타인의 그래피티 사진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거듭 밝히지만  개인적 이익이나 상업적 이용 목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글의 소재와 이해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게재하게 되었음을 미리 분명하게 밝혀 두고자 합니다.  원작자분들의 이해를 바라며,  이의를 제기해 주시면 그 즉시 삭제하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9. 07. 27.   피안재."









 

  박물관(미술관)은 인류의 역사를 보관하고 연구하고 보존하는 장소였다.

  인류의 앞선 세대가 후손에게 물려준 무상의 자원이  유적과 유물이며 미술품이었다.  그 어느 선조도 오늘날의  특정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지정해서 인류의 문화재를 부러 남겨 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여 박물관(미술관)에 소장된 문화재나 예술품들은  그 나라나 민족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자부심을 더 크게 넓혀가기 위해서 발굴에 앞장서는가 하면  남의 역사와 함께 문화재를 강탈하는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다.

  여기에 현대에 이르러 자유 시장경제가 도입 되었다.

  미술품을 중심으로  돈으로 자부심을 포함한 그 모든것들을 사고파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젠 시장 경제를 넘어서 거대한 자본이 오고가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민족적 자긍심은 어디에도 없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국가와 역사적 진실과 가치를 말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는 오로지 '돈'이다.

  박물관(미술관)을 통하여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더 많은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술품을 다루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작품에 가격표를 붙이고 그것을 더 비싼 가격에 매매가 성사되도록 거래시장을 활성화 시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격이 삐싸면 더 좋은 예술품이다 라는 전제하에 열심히 외부적으로 홍보를 하여,  비싼 입장료를 내고도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방법을 찾아내고 홍보하고 전시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온갖 마술(?)을 부려서  예술이나 문화재를  한차원 높은곳에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대중들의 곁에 자신들의 헌신적 노력의 결과로 가까이 내려오게 만들었다고 목청을 돋우어 선전하면서........  기실은 옆구리로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결코 적지않은 댓가(마치 어린아이의 코 뭍은 돈을 빼앗듯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돈'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든지 스스로 순수하게 돈을 가지고 오면,  그들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특별하게 꾸며놓은 공간에서,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의 미술품이나 문화재를 보여준다.  그것이 박물관이요 미술관인 것이다.

  왜 선진국의 대부분의 명승지는 입장료를 받는가?  선진국 일수록 입장료가 더 비싼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선진국일수록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한  거대 자본이 유입되었고   기존의 가치를  저버린 거대한 산업체로 변모하였기 때문이다.

  동유럽 후진국의 상당수 명승지나 교회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입장료 대신 자발적인 성금을 걷는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인간적인 모습인가?


  영국 런던의 대영 박물관은  그야말로 영국인들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지구상의 모든 역사와 위대한 유물이 대부분 거의 모두 이곳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흔히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벌어졌던 인류의 모든 역사가 이곳에 들어있다'고 말 할 정도이다.

  실제 내용상으로도 그렇기는 한데.......  이 박물관에 소장된  영국의 역사는 채 10%에도 한참이나 못미친다.  나머지 90%를 훤씬 상회하는 전시 미술품이나유물들은 모두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 시대)에 세계 각지로 부터 모두 빼앗거나 훔쳐 온 물건들이다.

  그런 도둑의 보물 창고에 세계 각지로부터 연일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혹시 그곳에서 자기나라 선조의 유물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기쁜 마음에 박수를 치며 인증샷을 찍기에 바쁘다.  그것이 왜 그곳에 놓이게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박물관(미술관)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대중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럼,  당신은 왜 박물관에 가는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세기적 해프닝을 연출했던 의문이 청년이 이번엔  대영 박물관을  찾아갔다.

  여전히 신분과  얼굴을 감춘 청년은 영국이 자랑하는 대영 박물관 내의 '역사 유물관'을 찾아갔다.  전시를 관람하던  청년은 주머니에서 사전에 준비해 간 손바닥만한  깨진 암갈색의  돌판을 꺼냈다.

  작은 돌판에는 청년이 직접 매직펜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관리자의 눈을 피해 이 청년은 고대 그리이스 부조상 아래  자신의 돌판을 슬쩍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애 다른 작품들 처럼  해설표지판까지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는일 없었다는듯이  인파에 휩쓸려 슬며시 박물관 밖으로 사라져갔다.












  흡사 알타미라 동굴의 신석기 시대 벽화를 보고 있는듯한  분위기의 이 돌판에는 분명히  원시인이 대형마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트를 끌고 쇼핑을 하고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카트를 끌고 쇼핑을 하는 원시인'이 제목으로 해설표지에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8일 동안  아무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수많은 관람객이  이 작품(?) 앞을 지나갔다.  더러는 이 위대한 고대유물에 감격스러웠거나  감탄해마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조의 놀라운 지혜에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가이드는 자신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라도 했던던 것처럼  더 열을 올려 이 유물을 자랑했을 수도 있다.

  이곳을 지키는 관리자들도 수없이 지나다녔다.  큐레이터와 연구원들도 이곳을 지나갔다.

  8일이 지나가도록 그 누구도  이 진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9일 째 되는 날........  SNS를 통해서 한 청년이 대영박물관의 한쪽 벽면에 손바닥만한 돌판 하나를  남몰래 설치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그 즉시  박물관은 폐쇄되었고  전문가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온 세계의 매스컴이 들끓었다.

  결국,  대영 박물관과  영국 국민들은  그동안 지켜온 자부심에 영원히 지워지지않을 아주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가?'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

  '그날,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얻었는가?'



















  대영박물관을 최고의 보안등급아래 잠정페쇄시키고,  당대 최고의 미슬감정사와 고고학자와 관계자들이 몰려들어서  문제의 그 돌판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떼어내서는 우루루 연구실로 몰려갔을 것이다.  온갖 방법의 실험이나 검증을 통해 진위여부를 밝히고자 온갖 노력을 경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 결론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진실을 알게된  그들.......  그자리에 모인 수많은 관계자와  박물관 측과 영국 국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영국에게 역사적인 유물을 수도없이 빼앗기고  오래전 부터 끊임없이 반환을 요구하는 이집트나  그리이스 사람들은 혹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정작........  그 사라진 청년은 어떤 표정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았을까?



  그의 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오늘날과 같은 미술시장 형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고,  거대 산업으로 발전한 미술시장의 가장 커다란 수혜자라고 볼 수도 있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채 이백년이 안된 비교적 짥은 역사를 가진 미술관이지만,   현대에 들어서서  미술 시장이 형성되고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산업으로 발전해 가면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미술관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미술관이다.  그만큼 급성장의 뒤에는 여러 어두운 이면의 아야기들도 뒤따른다.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선사시대 이래의 인류역사의 산물인 세계 각국의 유물 총 200만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이 미술관의 자랑은 회화로서, 회화에는 앨그레코, 렘브란트, 페르멜 등의 인상파와 그 이후의 현대에 이르는 작품에 명작이 많다. 또한 수많은 장서와 정기간행물은 물론 사진 슬라이드를 보존하고 있다.

  이번에도 청년은 신분과 얼굴을 숨기고 미술관에 관람객으로 위장하고 술어들어 갔다.

  대영 박물관 사태도 있었기에   미술관의 보완장치도 최첨단으로 보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최첨단 보완장치도  청년의 기행을 막지는 못했다.

  아마도 청년은  미술관 안에서  미술관 큐레이터나 연구원으로 변신(?)을 했던 듯 하다.  청년은 태연하게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 자신이 미리 준비해간 그림 하나를 벽에다 걸어놓고 역시 해설 표지를 붙여 놓은 후에  태연하게 미술관을 빠져 나왔다.

  그랬음에도 아무에게 들키지 않았다.  미국이 자랑하는 대표 미술관의  최첨단 보안장치를  그야말로 한 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며칠 뒤,  또 한번 SNS에 생난리가 벌어졌다.

  지난번에 영국에 이어서  이번엔 미국에 재난이 불어닥친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가장 자신있게 자랑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들 전시 공간 가운데  듣도 보도 못한 매우 이질적인 작품이 버젖이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 같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현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대가 언제였던가?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전시된 그림중에  현대에서나 봄직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방독면을 착용한 여인의 그림이 버젖이 여러날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기괴한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에  그곳을 지나간  관람객들의  미술에 대한 소양이나 수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인상파 그림과 현대화를 구분은 할 줄 아는것인가?

  미술관의 관계자들 눈에는 그것이 인상파가 아닌 추상화 쯤으로 느껴졌었나?

  어느것이 진품이고 복사품이기 이전에,  어떤것이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할 수준의 명화이고  어떤것이 쓰레기로 치부되는 그림 쪼가리란 말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

  누가 그림에 가격을 책정하고  누가 그림을 보여주는 댓가로 돈을 요구하는가?



  그 청년은 말했다.

  '돈으로 환산되는 예술을 비판하기 위해 나는 사건을 벌인다.  그리고 나의 그런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술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멋지게 전시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높은것이 결코 아니다.  길거리 예술도 당연히 존경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길거리 예술가다.'

















  뱅크시(Banksy)는 분명하게 자신을  '거리의 미술가(street artist)'라고 말했다.

  그래피티를 포함해서  흔하게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포괄적 예술 행위를 (거리 예술)이라고 부른다.

  거리 예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것은,  아마도 70년대 전후로 미국의 하렘가와 뉴욕의 지하철을 중심으로 번져간 뉴욕의 그래피티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시작은 그저 반항적인 청소년들이 지하철이나 담벼락,  허물어진 집이나 간혹 남의 눈에 잘 쯰는 누군가의 부동산(건물)에 몰래 침입해서 감쪽같이 스프레이로  어떤 기괴한 형상이나 이름을 스프레이로 남기고 도망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이런 행태는 점점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어 갔다.

  현대식 도시를 계획 건설하고 있는 정부(지자체)나 그래피티의 피해를 경험하게 된 주로 부유한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거리의 예술가들은 그야말로 노상강도나 도심의 테러리스트와 별반 차이가 없게 받아들여 졌다.  거리예술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의 모든 정부와 지방자치제들과 새로운 시대적 가치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80년 대 들어서 세계 여려나라에서  새로운 법률이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도시 정비사업에 관한 지침과  도심의 벽에 심하게 마구잡이로 (낙서)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규제와 단속에 관한 법률이 거의 매일 새로 생겨났고  점점 강화 되어갔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거리의 낙서)에 대하여  그것이 과연 '예술인가? 아니면 범죄인가?' 하는 새로운 논쟁이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정부와 부동산 업자들에게 '거리의 낙서'는 분명히 법을 위반하는 중대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강력한 단속과 처벌을 요구했다.

  반면 미술계는 그들과 입장이 사뭇 달랐다.  '거리 미술'도 새롭게 등장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하고 이를 서서히 제도권 안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 때가 온것'이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서로간에 극단의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는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기현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예술인가?  낙서인가?'





  방금 예술의 전당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감상하고 거리에 나선 사람이 있다고 치자.

  '공주는 잠못 이루고'의 여운이 아직 귓전을 간지럽히고 있는 그의 발걸음 앞에 연말연시면 간혹 볼 수 있는 어느 트로트 가수의 연말 디너 쇼 공연을 홍보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디너쇼 홍보 팜플렛을 건네 주었다.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만약에 그가 당신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손사래를 쳐서 거절했거나  팜플렛을 받기는 받았으데  곧 가까운 휴지통에 꾸겨서 넣지 않았을까?

  좀 더 걸어서(눈길이어서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지하철에 들어섰는데  한 젊은 아가씨가 추위에 언 손을 후후 불면서 길거리 음악회(버스킹)를 하고 있었다.  서너명의 사람들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면   당신의 발걸음 멈춰서고  그 버스킹이 귓전에 들어왔을까?  아니면 귀찮은듯 그냥 지나쳤을까?

  좀 더 들어가니  이번엔 아예 수염까지 더부룩한 노인네급 사내가  어설퍼 보이는  팝송을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씁쓸함에 저절로 혀를 찼다.

  '꼬라지 하고는........  젊어서 뭔 지랄을 하다가 그 나이 먹고서 겨우 길거리서 노래질이야?'

  그럴 수 있겠다.  어쩌면 나라도  그런 정도의 입장이 된다면 그럴 수 있겠다.  만약  투란도트를 보고 막 밖으로 나온 당신이라면 과연 어땠을까?

  그런데 말이다.

  만약에  그 노래하던 노인이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쯤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반응 말이다.


















                              ***  이번 여행중에  톨레도에서 만난  거리 미술가들.  누가 이것을 낙서라 할 수 있는가?












  카라바조의 명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길거리에서 재현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원본을 담은 작은 사진 한장을 중간쯤에 붙여놓고  두 아가씨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미술이 이렇게 쉽고 간단한거야?' 라는 생각이 절로 생겨날 정도였다.  그림은 완벽에 가깝게 재현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마무리에서는  자신들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누가봐도 '똑 같은 그림'이 아니라 '재구성된 그림'이었다.  이를두고 '리메이크 작업' 이라 한다. '패러디 작품'이라고도 한다.  하비만 분명 '복제나 복사'하고는 다른 의미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길거리 낙서가 아니다.

  하나의 창조적 예술행위인 것이다.  누가 이들에게 파렴치한 행위라고 욕을 하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들은 범죄자나  테러리스트가 결코 아니다.

  누가 무엇을 근거로 이들을 체포하고  이들의 작품을 훼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세상이 어쩌다가........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상황이 실제로 뉴욕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미국의 자랑이자 상징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르네상스 특별전시회) 개막전 행사에 초대되어  오색 테이프 컷팅을 마치고  몰려드는 기자들의 질문과 플레쉬 세례를 겨우 마친 은발의 노신사가 어둠이 내려앉은 길거리로 나섰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수많은 언론의 표적이 되어왔다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런것을 즐겼고 그런것들이 자신의 작품활동에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갔다.  틀림엇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고는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한다든가,  아니면 사인을 요청해 올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지극히 운이 좋은 미술이나 연예전문기자가 쫓아와 특별 단독 인터뷰를 하자고 분위기 좋은 카페나 와인바로 가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오늘은  그냥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인터뷰를 하자고 허용할 참이었다.  더 많은 대중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게 될테니까 말이다.

  싸늘한 겨울바람에 그의 은색 머리결이 살며시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얼핏 프랑스 뉴웨이브 선구자 (미쉘 뽈라레프)나  그램 록의 선구자 (데이빗 보위)를 연상시키는 이 은발의 예술가는 ......  많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기는 한데.......  실은 이 은발 머리는 가발이다.  이 초로의 신사는 청년시절부터 심하게 대머리를 앓았고  그때부터 쭈욱 은발의 가발을 착용해 왔다.

  오늘따라  이 은발의 예술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참 싱겁고 조금은 씁쓸한 날이라 생각했다.

  그가 환하게 불이 밝혀진 백화점 앞을 지나가려는데 사람들이 제법 무리지어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하여 호기심에 슬쩍 넘겨다 보았는데.......  한 흑인 청년이 아트지 위에다 매직으로 마구 낙서를 해대더니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  그야말로 해괴망측한 거리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것이 보였다.

  '쯧쯧쯧.  지가 그림에 대해서 뭘 안다구........  예술이 길거리에서 아예 깡그리 망가지고 있구나.........  쓰레기나 가지고 장난질이나 치고있고.......'

  노신사는 혀를 찼다.  자신과 같이 세계적인 미술가의 시선과 가치관에서 보자면  참으로 한심하고 괴씸하기까지 한  매우 불편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어두고 나온  '봇티첼리'며 '뒤러'며 '라파엘로'의  훌륭한 명화들을 놔두고  이 추운 거리에서  저렇게 한심한 작자의 장난질에 현혹되고 있는 모여있는 사람들이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흑인 청년의 그림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청년은  뒷편에 서 있는 은발의 노신사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방금 완성한 그림을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제가 그린 작품입니다. 10달러 내면 드릴께요.  사세요.'

  '왜 내가 그 그림을 사야하지?  내가 소장한 미술품만으로도 집이 차고 넘쳐?'

  '아무리 미술품이 차고 넘쳐도  제가 그린 이런 그림은 없으시잖아요?  후회 안하실거예요.  사세요.'

  주먹으로 한대 쥐어박고 돌아서고 싶은 모욕감마저 들었지만,  늘 뭇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 온 그간의 오랜 경험으로 꾸욱 참고 또 참았다.  세계 최고의 미술가가 한낮 이런 길거리 부랑자와 미술에 대해서 논한다는게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미술은 제대로 된 미술가들 끼리 거론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나보고 이 그림을 사라...........?  그래 얼마라고?'

  '특별히  10달러만 내세요.'

  '10달러라고?  그렇게나 많이?  자네는 이 그림이 10달러의 가치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엔   전혀 정성이 들어가 있어 보이질 않아.  대충 대충 적당히 얼머무려 그리고는  10달러를 무조건 내라?  나는 그 가격에는 못사겠네.'

  '헐.  정말로 가관이시네요?'

  '뭐라고?  젊은 사람이 말 버릇하고는..........?'

  '내 그림에 정성이 부족하다고 하셨어요?  그럼 아저씨 그림은요?  아저씨가 그린 그림 어디에 정성이 그렇게 담겨 있나요?  얼기설기 대충 그려놓고 이미 유명세를 탔노라고 싸인만 떡 하면.......  한점당 무조건  억 억 억 하신다면서요?   거기가 컴퓨터 프린터를 이용해  한 작품을 똑 같은 여러 작품으로 복사해서 팔기도 하신다면서요?  일억짜리 그림 하나로 사억도 만들고 오억도 만드는 아저씨 그림엔 복사기가 정성인가요?  이건 복사기에서 나온 그림이 아니라구요.  진품이예요. 지금 막 그려낸.........'

  '이 녀석이 정말 미쳤나?  내가 누군지 알고있으면서 부러 시비를 걸어오는거야?'

  '앤디 워홀.  허풍선이 화가.  그게 당신 이름 아닌가요?"

  '좋다.  결코 이대로넘기지 않겠어.  네 놈은 누구냐?'

  '장 미쉘 바스키아.  뉴욕 길거리에선  바스키아 하면 다들 알고 있지요.  진짜 그림을 그리는  거리 미술가라고들 부른답니다.'


  은발의 노신사는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 이었다.  20세기 팝 아트의 선구자이자 대명사로 불리는 예술가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한 대기업의 미술품을 통한 부동산 축재의 화제속에 (눈물)이 들어가는 그림으로 아주 아주 널리 알려진적이 있는 작가다.

  흔히 말하길.......  캔버스에 점 하나만 찍어 놓고 워홀 이라고 싸인만 하면 ........  적어도 수천만원은  문제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유명인사였다.








                                                










  워홀은 어서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철없는 길거리 부랑자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면서 체면을 구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세계 최고의 미술가 워홀이  길거리 화가  바스키아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언론사 기자들까지 몰려들고있는 실정이었다.  더 이상 얽혀들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대예술가가 길거리 화가에게 밀려 쫓겨갔다는 이야기는 죽기보다도 더 싫었다.  자칫하다가는 워홀 일생 최대의 치욕을 겪게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생각을 굴렸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바스키아.  나는 자네에게 화가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는 하지 않았네.  충분히 소질을 엿볼 수 있었어.  다만 그림에 대해서 자네가 좀 더 정중하게 열의와 성의를 다해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네.  그리고 자네가 곧바로 내 그림을 혹평을 했는데......  뭐 그럴수도 있겠지.  팝 아트라는 세계를 자네는 아직 잘 모를테니까 말일세.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자네에게 내가 하는 작업인  팝아트의 세계를 한번 보여주겠네.  그렇게 되면 자네의 안목도 훨씬 달라지게 될거이야.'

  '워홀.  그렇게 멋진 말로 상황을 비켜라려고만 하지 마요.  컴퓨터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은근슬쩍 작품입네 끄집어내는 것이  팝 아트랍면,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후다닥 실제로 그려내는 내 그림은 스트리트 아트 아니겠소?  당신이 아티스트라면 나 또한 아티스트요.  자신있다면  지금 맞짱을 뜹시다.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서로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누가 더 예술에 적합한지는  대중이 판단할 것입니다.  어때요?'


  결국 이들은 이날,  소수의 사람들만 대동하고는 워홀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서로 마주보는 장소에서  커다란 캔버스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표출해 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대의 적업 진행을 관찰도 의심도 비교도 하면서 말이다.  새벽녁에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해, 그리고 상대의 미술활동에 대해 한없는 존경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32살이나 앞선 워홀은  바스키아의 멘토가 되어주고 최대 지원자가 되었다.  스승이자 친구가 된 것이다.

  이 날 이후  앤디 워홀은  자신의 창작세계와 미술계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범위에서  바스키아를 모두에게 소개해 주고 전시회도 열어주고 언론과 제도권의 미술계에 소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는 곧 바스키아의 성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길거리 미술이  '제도권 미술계' 안으로 진입하게 되는 첫 사레가 된 것이다.

  바스키아를 통해 길거리 미술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기 시작했고,  미술품 시장에서  거래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17년 5월의 뉴욕 소더비 미술품 경매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가 그린 (무제)가  1248억원에 낙찰되었다.

  앤디 워홀의 그 어떤 작품도 바스키아의 이 작품 낙찰가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이제부터 바스키아는 '검은 피카소'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누가 1248억원 짜리 그림을  '길거리 낙서'라고 조롱할 수 있는가?








                                 ***  장 미쉘 바스키아의 1982년 작 (무제). 1248억원에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이미 앞서서  수많은 거리의 화가들이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대 변화의 시기를 맞아  장 미쉘 바스키아가  처음으로 미술계라는 제도권 안에 정착을 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선 낙서와 예술 사이에서 창작활동과 단속의 악순환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80년 대 초를 바스키아만이 대변하고 있었던것은 결코 아니다.  또 한명의 걸출한 아티스트가 바스키아와 나란히 한 시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역시 앤디 워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거리화가다.  바스키아는 물론  오노 요코(존 레논의 아내이자 행위 예술가)와도 많은 교류가 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화가가 되겠다면서 뉴욕으로 가출했었고,  해링은 피츠버그의 예술 전문학교와 뉴욕의 시각미술학교에서 공부했었지만 제도권 미술교육에 염증을 느껴 자퇴했다.  그리고 거리로 나섰다.  바스키아와 해링의 등장은 뉴욕 미술계는 물론 시당국에도 커다란 위험으로 다가왔다.  이들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고  이들을 추종하는 또다른 수많은 젊은 거리의 화가들이 뉴욕의 곳곳을 도배하다시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문제로 까지 비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만큼 뉴욕은 새로운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탈바꿈 되어가고 있었다.

  주로 칠판 같은 검은 배경위에  하얀 분필로 낙서하듯이 쉽고 간단하게 그려내는  해링의 작품은   신발 의류 도자기 등 새로운 산업의 디자인으로까지 변모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렘가에서 청소년 보호를 위해 해링은  칠판 위에 하얀 분필로 '청소년이여.  절대로 마약만은 하지 말자' 라는 제목의 작품을 남기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에게는 경법죄 조항을 들어 32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곧 그의 미완성 그림이 있는 장소는 뉴욕 청소년들의 성지가 되었다.  그가 남기려던 교훈의  파장이 각종 매스컴을 통해 의외로 너무너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 그림을 완성시켜 달라'고 뉴욕 시장이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제도권과 기성세대가 낙서로 폄하하던 그림이  바야흐로 세상이 필요로하는 진정한 미술 작품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바스키아와 해링 모두.........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이후........  그래피티 미술계는 한동안 깊은 침묵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피티 세계를 이끌던 두 명의 스타가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리의 낙서'라고 폄하되던 그래피티를  '미술 시장' '미술 전시장'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이끌었던  바스키아와 해링이 떠나고 없는 90년대는 거리 예술계에 있어서는 적막함 그 자체였다.

  보다 더 유명한 스타가 없었고  더 유명한 일화를 남기거나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피티 세계의 저변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넓게넓게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벽화 마을'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산꼭대기 판자촌 마을이 도시개발 사업에 따라 모두 헐리게 되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온 나라 안에 퍼져나갔다.  삶의 터전을 잃거나 빼앗기게된 판자촌의 서민들이 연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들은 거리의 미술가(그래피티)들이  이 산동네를 찾아가 무너진 담장이며 축대며 허름한 벽면에다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조건적인 도시 계획에 의한 강제 철거 저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역사적 현장의 그래피티를 찾아보기 위해서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들었다.  '벽화 마을'이 탄생한 것이다.

  도시 개발 계획은 취소되었고  이제 벽화마을은 뜨거운 관광명소로 탈바꿈 되었다.

  그러다보니  묵호의 등대마을,  청주 벽화마을  등등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났고,  통영의 동피랑 마을을 모티브로 하는  벽화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거리미술 또한  제도권 미술에 비해 하나도 손색이 없는 하나의 소중한 예술이다'라는 취지로 글을 쓰고 있는 마당에.......  적합하지 못한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너무 넘쳐난다.  자칫 식상해 질 수도 있겠다.  외부에 그저 흔하디 흔한  덧칠 처럼 그려져 있어서 혹 언젠가 쉽게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걱정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딱히 뭐라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무 넘쳐난다.  낙서가 아닌........  지칫 새로운 공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 스럽다.



  내가 벽화마을을  처음으로 접한것은 챠밍여사와  말레이시아 페낭의 올드 시티인 '조지타운 여행'에서 였다.

  길거리 그림이 아닌 하나의 예술로 승화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이 조지타운의 '그림 찾아보기 트래킹' 이었다.

  이미 세계적인 여행상품으로 많이 알려진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장소에 마구잡이식으로 벽화를 더 많이 그리지 않았다.

  딱 처음 시작하면서 생겨났던 그만큼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리잡은 그림들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는데에만 정성을 쏟았지,  더 많은 유행꺼리를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넘치는 것은  결코 부족함만 못하다는 것을 그네들은 잘 알고 있었다.

  페낭 이외에서도......  몰타.  이스탄불 등에서도 인상적인 벽화들을  만난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너무 난발하듯이 차고 넘친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로지........   대한민국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의 벽화들.



                                  ***  몰타  슬리에마 지역 주차장 벽면 그래피티.



                              ***  이스탄불  상점 셔터에 그린 그래피티.












  21세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밀레니엄에 대한 구호와 갈망이 첨예화하던 90년대에 들어서 가장 유명한 벽화는  아마도 아래의 그림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부르벨이 무너져 내린 베를린 장벽의 한 모퉁이에 그린 그래피티가  전 세계의 뉴스시간에 방송되면서 대단한 화제꺼리가 되었었다.

  제목은 '형제의 키스'였다.

  소련 공산당 브르즈네프 서기장과  동독의 호네커 수상이 '저물어 가는  사회공산주의 혁명의 마지막 그림자를 부둥켜 안고 몸부림을 치는 그릇된 동지애'를 빗대어 풍자한 그래피티였다.

  그랬다.  그래피티의 참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저것이 바로 그래피티다.

  우리가 언제 '제도권 안쪽의 미술계'에서 저런 호방함과 적나라함과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입을 기대할 수 있었던가?

  우린 아무도 저 작품 '형제의 키스'에 가격을 책정하지 않고도 충분히 편하고 즐겁게 언제든 찾아가기만 하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중이다.

 

  '주여. 저들의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고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 주소서.'























  바스키아와 해링이 떠난 이후에 '제도권 미술' 내지는  '미술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자본을 축적한 '미술 산업계'가 새로운 돌파구로  그래피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돈줄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피티 예술가들은  여전히  제도권으로 들어가는것에 대해 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술 산업가들이  거리의 예술가들을 그대로 두고 볼리가 만무해진 것이다.  새로운 돈벌이를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헤드 헌터를 앞세워  돈이 될만한  거리의 예술가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이해는 간다.

  우리가 식상할 정도로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래피티에서 벗어나........  미술계가 돈벌이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멋진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부터라도 그들중 한명을 모셔다가  우리집 거실 벽을 멋진 그래피티로 장식하고 싶어지는 욕구가 간절하게 일어날 지경이니 말이다.

  이제부턴.......  작가나 지명도에 상관없이........

  이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제도권이 탐을 내는 진정한 그래피티가 아닐까?

  과연 그래피티의 끝은 어디일까?

  절로 그래피티의 품격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을  이제 편하게 감상해 보기로 하겠다.

  프라도 미술관이 아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아니다.

  우피치 미술관도 아니다.

  루우부르 박물관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열려진 공간.........  이 지구상의 어느 광장 끝.......  골목 어귀.........  우리 살고있는 도심의 뒷골목 어딘가에 찾아가기만 하면 이 정도의 예술작품들이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그래피티'라고 부른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특히 이탈리아 같은 카톨릭 국가의 한적한 뒷골목이나 소도시를 여행하다보면  골목 어귀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을 모셔 놓은 아주 작은 기도처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 아주 오랜 옛날 동네 어귀마다 있던 서낭당 쯤으로 여기면 될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추스르고 잠시나마 기도를 올리고 지나간다.

  지극히 자연스런 그네들만의 일상인 것이다.

  어느 시골의 낡고 허름한 기도처에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성모 마리아의 사진은 틀립없이 어느 유명한 명화를 인쇄해서 걸어놓은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밖에서 내결렸음인가?  너무 낡고 위태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어느날........  이곳을 지나가던 한 길거리 미술가가  모두가 잠든 밤시간을 통해 뚝딱하고  그래피티로 그림을 하나  옆의 빈 벽면에 완성시켜 놓았다.

  우리 아주 잠시만........  가만히  사진속의 양쪽 그림을 살펴보자.

  어느쪽이 더 성스러운 느낌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가?

  할렐루야.

  아멘.


  이젠 그래피티를 어떻게 보존할꼬?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스타작가 두명이 떠나간 뒤 그래피티 미술계는 한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침체기를 격게된다.

  현실적으로는 '벽화마을'이라는 새로운 시류에 편승하여  그래피티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는 놀라운 기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산업 디자인 분야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런 시대적 변화속에서 일부 평론가들은  '그래피티의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다분히 어둡고  비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저질스럽거나 불량스러운 의미를 가진 (길거리 낙서)라고 폄하되던 (그래피티)가  (스트리트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적 제도권에 진입하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피티의 정체성이 회복되기 힘들만큼 오염되었다'라고 비판을 서슴치 않는 시선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미술 시장'이라는 거대한 제도권 안으로 진입을 하고,  일반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동안  그래피티 라이터들이 추구하던 '그래피티만의 독창성이나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호소하던 것과 같은 초창기의 본질적인 의도와 창작열이 심하게 훼손되었다'라고 의심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지자체와  여행 업계의 입맛에 맞게 벽화마을이 남발을 하고,  거리 예술의 순수를 외치던 작가들이  산업 디자인 쪽으로 특허와 지적초상권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돈과 명성에 점차 눈을 뜨게된 것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그래피티의 성향까지 분석해가며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대중들의 입맞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쪽으로 선회해가고 있다.

  심지어는 '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서 단시간에 유명해지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법도 감수하겠어' 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래피티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래피티의 출발은 기본적으로 불법행위에 정체성을 두고 출발했다.   남의 권리를 침해하고  사회 시설이나 공공의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바탕에는 분명 '불법적인 것은 돈이 되지 못한다'는 명제가 깊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제는 '불법적인 것이어야 돈이 된다'라고  자본주의 이념을 바꾸어야만 할까?


  그나마 우리나라 대중들은 그래피티에 대하여 조금은 아주 특이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것을로 보여진다.

  몇몇 유명 그래피티 스타작가들의 전시회가 여러번 열렸고,  그래피티 작품들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잘 알고 있고,  또 문화와 예술을 보는 식견이 상당히 너그러운 특징을 가진 우리민족 정서상.........  그래피티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나와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스트리트 아트'로 충분히 인정하는 분위기 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화(웹툰)나 게임이나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대해서도  대부분 너그러운것 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그래피티는  스트리트 아트의 연장선'에서 보는 반면,  사방에 그려져 있는  '벽화 마을'의 벽화들은  그래피티로 보지 않으려는 성향들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화마을의 그림들은  그저 마을이나 골목의 풍경을 아름답도록 치장해 놓은것이고.......  예술로 까지 치기에는 좀.......  그렇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도시 재정비 내지는  미화사업의 일종이랄까?)

  띡히 뭐라고 선을 그어서 설명하기에는 좀 난해한 무엇인가가 있다.


  하지만 그래피티의 출발은 근본적으로 전혀 달랐다.  뿌리가 전혀 달랐다.

  그래피티는 태생적으로 사회제도나 정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탄생한 것이다.  이런 견해차가 생겨나는 모든 이유는 단 한가지,  그래피티를 남기는 장소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이제와서는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속에 엄연한 '스트리트 아트'로 대접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반대론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전히 공공기물을 심하게 훼손하고  자신의 영역 내지는 자신의 여향력이나 흔적을 남기려고(태깅)  여기저기에 낙서를 남기는 수준에서 시작했기 대문이다.

  그래피티를 '멋있는 그림'으로 보았다면  당신은 보편타당한 심성을 가진 평범한 대중일 수 있겠으나, '부당한 낙서'로 보았다면  아마도 시청 군청의 공무원이거나  도시개발업자 아니면  부동산 업자거나 그래피티로 도배된 건물의 소유주가 아닐까 싶다.


  이것을 단지 견해의 차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로 볼 수 있을까?









  그래피티에 대한 다양한 의견차와  저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의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2.000년을 전후헤서  또 한명의  위대한  그래피티 라이터가 새롭게 등장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불법적인 낙서에서 시작한  그래피티의 태생적 정통성과 그래피티가 가진 한계성과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사회적 불법성까지 모두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시작은 인터넷 상에서  다분히 반사회적인 메세지를 쥐 그림을 통해 충자하면서 삽시간에 유명세를 타게되었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원시인, 영국 최대의 할인마트 '테스코' 깃발에 거수경례하는 꼬마들.  커다란 자루에 무엇인가를 가득 훔쳐담고 나오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최루탄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  동성애자 경찰의 키스하는 그림 등을 통해서 통렬하게 자본주의의 속성을 비판하고 사회주의 문제를 고발했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장벽을 찾아가 하루밤 사이에 커다란 개구멍을 그려놓기도 했다.  그는 사회 뿐만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을 비판하면서 적극적인 정치적 성향까지도 있는 그래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뱅크시(Robert Banksy)'가 바로 그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진짜 그의 이름은 아니다.

  그가 처음 그래피티계에 등장한지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정체불명의 아티스트 이다.  '뱅크시'는  그가 작품에 남긴 서명일 뿐이다.

  아무도 뱅크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영국인 남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들어서  대략 두사람으로 압축되어 정체를 캐고는 있으나.........  아니면  같은 생각과 그림 솜씨를 나누어 가진 어떤 숨겨진 단체(동아리)일 수도 있겠다는 의견도 있다.



  영국의 한 작은 도시에 공터 옆으로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버릴것 같은 허름한 이동주택이 하나 있었다.

  그 동네의 주민들이나 관할 관공서 직원들에게는 천하의 애물단지가 바로 그 낡은 이동주택이었다.  늘상 쓰레기 불법투기가 그 이동주택 주위에 이루어 졌고,  동네의 미관과 환경에도 부정적인 영향의 끼쳐왔다.  불량청소년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동네 주민들과 관청이 나서서 증개축이나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지극히 가난한 주인은  짐수리 비용도 없을 뿐더러,  그나마 이곳을 떠나서는 어디에 등을 붙이고 돌아누울 곳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사회문제로 이슈가 되었고 여러 매스컴에까지 소개되었다.  강제 철거 절차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날 밤........

  한 청년이  야음을 틈타 그 낡은 이동주택을 다녀갔다.

  다음날 아침  동네 사람들은  그 낡은 이동주택의 벽면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림의 한쪽 끝에 분명하게 이렇게 써 있었다.

  '뱅크시가 그렸다.'

  연일 온갖 매스컴과  수많은 인파들이 그곳으로 들이 닥쳤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오랫만에 불쑥 나타난 뱅크시의 그림을 보려고 아우성들이었다.

  불과 며칠 뒤,  마을 주민들과 관공서 관계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동주택의 철거'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동 주택과 뱅크시의 그림을 잘 보존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였다.

  그 이동주택과  뱅크시의 그림은  모든 영국인들의 재대한 관심속에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다.

  더하여.......  그 이동주택은  현 시세에 비하여 50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부동산 가치를 보유한,  그 마을에서 가장 비싼 건물이 되었다.


  뱅크시야.  넌 도대체 누구냐?  어디서 뭐하고 있냐?

  나를 한 번 만나주면 안될까?

  나랑 사진 한장만 찍어주라......... ㅋㅋ

















                                    ***  얼굴 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  20년 가까이 자신을 숨기며 살고있다.


































  '미술관에 걸린 고가의 그림들이 당신을 위해서,  또는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뱅크시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가서  부자들의 뒷주머니에 찔러주고,  그들이 자랑하듯 내미는 부자들의 장식장 일부를 잠시 구경하는것이 바로 미술관이다'라고 뱅크시는 힘주어 비판한다.

  '진정한 예술은 누구나가(비용을 댈 돈이 있건 없건간에)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대하고 즐길 수 있는 공공의 재산이 되어야 한다.  그래피티는  예술을 대중의 곁에 함께하고 함께 공유하고 함께 즐기는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인류역사 초기의 예술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미술계라는 제도권을 거부한다.

  미술작품에 금액을 책정하고  그것을 사고팔면서 거대한 자본시장으로  변질된, 제도권의 예술이라는것이 극히 일부 사람들만의 부의 축적과 즐길꺼리가 되는것을 거부한다.


  이런 비판을 서슴치 않던 뱅크시는  세상이 온통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을 때,  또 한번 미술계와 미술자본시장을 향해 엄청난 저주를 퍼붓는다.  세상 여기저기에 뱅크시가 그려놓은 그림들이 연일 화제가 되고,  도심 골목의 벽화들을 지우기에 혈안이던 지자체와 정부가 이제는 뱅크시의 그리만 발견되면 안전망 펜스를 치거나 안전 유리로 벽화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공터의 커다란 벽면을 단장해 톻고는 뱅크시에게 와서 그림을 좀 그려달라고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뱅크시의 그림이 그려진 마을의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기현상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뉴욕의 길거리 미술가판대에  정식으로 뱅크시의 부연 설명까지 붙어있는 그림이 등장했다.  정체불명의 청년은  노점 상인에게 이번에도 역시 60달러에 액자에 담겨있는  뱅크시의 서명과 편지가 적힌 봉투와 함께 그림을 넘겼다.  액자의 아래로는 직장에서 쓰는 작은 종이 분쇄기가 달려이었었다.  '이 그림은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쓰레기 정도의 그림입니다.  이 가판대의 한구석에 오래오래 걸려 있거나  어느 허름한 대중식당의 출입문 옆에 걸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이 그림이 부자들의 욕심에 의해서 미술관으로 옮겨지게 된다면......  그림은 아래의 분쇄기에 의해서 소멸되고 말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 그림을 파는 이리에 있어서 단 하나의 조건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쓸모없는 쓰레기 수준이라고 했다.  그 림이 바로 (소녀와 풍선)이다.

  이 그림을 가지고  부자들이 돈지랄을 하면  그림이 저절로 망쳐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뱅크시는 자신의 그림이 제도권(거대 미술시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만류하였음에도..........

  이러한 특이한 상황이 오히려 부자들과 미술시장을 크게 동요시키고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소녀와 풍선)은  이사람 저사람 손에서........  이 미술관 저 미술관으로  옮겨다니기 시작했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미술품 시장인 (소더비 경매장)에 올려졌다.  뱅크시의 경고를 염두에 둔  미술시장은  최고의 기술자들을 불러다가 조심스레  액자에 붙어있던  종이 분쇄기를 제거했다.

  소더비 경매에 올려진 (소녀와 풍선)은 그자리에서  14억 8천만원에 낙찰되었다.

  그 낙찰이 성사되는 순간에........  갑자기 그림 (소녀와 풍선)이 분쇄되어서 액자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미술관이 액자 아래의 분쇄기를 제거했지만,  이를 예견한 뱅크시는 자신이 특수 제작한  액자 안쪽에 또 하나의 분쇄기를 숨겨놓았던 것이다.  뱅크시의 원격조정에 의해서  약15억원의 그림이 페지로 갈기갈기 찢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계적 결함으로 그림은 딱 절반만 부서지고 말았다.

  경매를 중계하는 티비 방송에 의해서 이 희대의 기가막힌 사건은 온세상으로 급속도로 펴져나갔다.

  결매 물품의  절반이 망가져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크게 손상되었음에도,  낙찰자는  망가진 그 작품을 위해 약속대로 기꺼이 15억원을 지불했다.








  다음날 뱅크시는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사전에 자신이 경고했던 바처럼,  액자에 숨겨둔 분쇄기를 통해서  그림을 파괴하는 여러번의 사전 시험을 했었음을 알리는 동영상을 올렸다.  세상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미술 시장과  미술 산업과 부자들과  그 뒤에서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판을 넘어서 조롱하고 우롱했다.

  현재의 미술계(예술계 전반.  미술시장)가 가진 허세와 위선적 가치관, 그리고 추잡하게만 변해가고있는 예술이라는 생태계를 호통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구입하는 이들에게 '쓰레기를 사서 모으려는 부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붓는 뱅크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하던 그의 작품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  그때마다 치솟는 그림의 가격..........
  '이런것이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흐름이자 미래의 모습일까?'










  유럽 여행길에 한 고급호텔의 머리맡에 사방으로 오리털이 날리는 그림이 저렇게 사실처럼 그려져 있다면.......  제대로 잠이 올까?

  그럼 당장 후런트로 전화해서 방을 바꾸어 달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만약에 그 그림이 뱅크시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면.............

  단신은 과연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을까?

  아니면 인증샷에  동네방네 전화로 자랑하고  유튜부 올리느라 밤을 꼬박 새웠을까?

  그럿도 아니면  벽지를 잘 자르고 베껴서 그림을 통째로 가지고 왔을까?

  아니다.

  차라리 대출을 받아서  호텔을 인수하는게 더 싸게 먹힐지도 모르겠다.  ㅎㅎㅎㅎ









  변두리에 폐가 비슷한 커다란 창고를 당신이 소유했다고 치자.

  부랑배 같은 무리에게 임대를 주었는데,  기간도 지났는데 월세도 잔뜩 밀려있고  연락도 두절되고.........

  애물단지 창고를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 부지로 팔아야 하겠는데.........

  만나서 내쫓을 심산으로 찾아가서 창고문을 강제로 열고보니..........  저렇게 (크림튼 미술관)으로 변신해 있었다.

  이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것이 바로 (그래피티의 세계)다.

  누가 이것을  '거리의 낙서 나부랑이'라고 폄하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예술(Art)이요,  이들이 바로 예술가(Artist)다.


































  뱅크시에게서 보았듯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추구하는 것은  길거리 예술의 태생적 한계만큼 오로지 사회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지를 의도적으로 담아내려 애쓰고 있는것일까?

  우리나라 헌법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건물 주인의 허락을 받지않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형법상 재물 손괴죄에 해당된다고 말이다.


<형법 제366조 (재물손괴 등)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거기에다 (공용물 파괴죄)  (무단 침입죄) (광고물 마단부착의 경범죄) (2인 이상이 함께 활동하다 잡히면 가중처벌) 등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들은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
  자신이 살고싶어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 생각과 그림들을 다른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즐기길 원하며,  그 속에서 작지만 함께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세상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더욱 복잡하게 얽혀지고 사방으로 단절되고  보이지 않는 통제속에서 가지지 못한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한 방편이  바로 그래피티라고 말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이 이 낮은자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온통 돈으로 도배된 미술관이나 제도권에는  진정한 예술이 설 자리가 점 점 줄어들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대한민국에도 뱅크시 같은 진정한 예술가가 나와야 한다'고.........
  과연 뱅크시가  대한민국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동안에 왜 뱅크시가 없었을까?


  굳이 결론을 내가 내릴 문제는 아니다.
  그럴만한 자격이나 경륜이나 소양도 갖추지 못했으니까........
  뱅크시 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대한민국에는 버젓하게 내세울만한 예술가가 적을까?'
  앞에서 그래피티를 설명하면서 상대개념으로 부정시하게 표현한  거대자본이 등장한 미술시장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게 분명하게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대한민국만이 특별하게 더 기지고 있는 부정적인 원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여기까지 쓰게 된 동기이기도 했던.........  2019년 7월 31일자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의 기사를 읽고 크게 느기는 바가 있어서,  그동안 그래피티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메모해 놓았던것들과   연계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유명 그리피티 아티스트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곧 잘 열리곤 한다.  그러나 이미 제도권 안에 정착한 기존의 예술가들은  길거리 예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레벨이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분과 수준이 다른것일까?
  그런 시점에서 정상혁 기자의 기사를 접하고는 서둘러 이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조선일보에 실린  정상혁 기자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보고자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 입에서  길거리 예술을 수준이 차이가 난다고 쉽사리 내뱉을 수가 과연 있을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영감탱이야.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엉뚱한데서 다른 구실을 찾으려 하지마. 모든것은 당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어.  당신이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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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비전공자 1점, 미술대학 졸업자 2점, 대학원 졸업자 3점…. 작가의 학력과 인지도 등을 점수화해 미술품 가격을 산정하는 '계산법'이 30일 공개됐다. 국내 처음으로 미술품 가격 책정 매뉴얼을 마련한 것이지만, 기준 요소가 구태의연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이날 발표회를 열고 '한국 미술품 시가 감정을 위한 모형과 매뉴얼'을 선보였다. 이번 연구는 "소장품 가격 변동의 근거를 마련해달라"는 정부미술은행의 요청으로 2개월에 걸쳐 본격 추진됐다. 계산법에는 정성·정량 평가가 모두 포함된다. 먼저 정량(定量) 요소로는 ①학력 ②연간 전시 활동(대관·기획·초대전) ③인지도(수상·소장 이력·언론 보도) 등 항목별로 1~3점을 부여한다. 합산된 수치를 작가 활동 햇수에 대입해 10호(53×45.5㎝) 크기당 통상 가격을 산출한다. 여기에 감정위원 12인의 정성(定性) 평가가 더해진다. '작품성'(재료·주제·제작 시기)을 -4점부터 4점까지 채점하고, '시장성'(환금성)을 고려해 경매 낙찰 성적 및 미술은행 작품 대여 횟수 등을 적용하면 최종 가격이 나온다. 작가 경력이 30년 이상이고 모든 항목 만점을 받을 경우 통상 가격은 300만원이 된다.

  하지만 작가의 학력 차등 배점이 차별 요소가 될 수 있는 점, 언론 보도 역시 기사 크기나 매체의 중요도 판단은 정성적 요소인 점, 여전히 작품 크기가 가격 기준의 중심에 놓인 점 등 공신력 문제도 제기된다. 김영석(성신여대 석좌교수) 감정위원장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 모델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라며 "1%가 아닌 수만명에 달하는 99% 작가의 거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계산법은 이날부터 적용돼 11월쯤 정부미술은행 소장품 가격 재책정이 완료될 예정이다. 미술은행 관계자는 "논의 후 문제가 있다면 항목 수정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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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려 주시고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스페인 여행기.  세비야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