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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변산반도 - 나그네 되어 변산의 품에 들다

by 피안재 2013. 5. 20.

 

 

 

 

 

 

 

 

 

 

 

 

 

 

 

 

 

 

 

 

 

 

 

   邊山半島.

  

   전라북도 서남부의 해안에 돌출한 반도의 지형을 일컷는 이름이다.

   동쪽으로는 김제시와 정읍시에 인접해 있고, 북쪽은 부안만(새만금방조제)과 남쪽으로는 곰소만에 접해있고 서쪽은 바로 서해바다이다.

   대체적으로 부안군 하면 바로 이 변산반도가 차지하는 면적이 그 대부분이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지역을 외변산이라 부르고, 내륙의 산과 골짜기를 낀 지역을 내변산이라 부른다.

   변산반도에는  일컬어 삼변(三邊)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는데, 해안가에서 모진 해풍을 견디며 자라난 곧고 큰 소나무인 변재(邊材)가  하나이고, 이곳에서 나는 난초를 으뜸으로 여겨 변란(邊蘭)이라 하니 두번째요, 이곳에서 나는 자연산 꿀을 변청(邊淸)이라 하여 그 다음으로 치니, 이곳 변산반도에서 생산되는 가장 중요한 세가지 특산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귀하디 귀하게 여겨왔다.

 

 

 

 

   17일은 석가탄신일이요. 18일 토요일과 19일 일요일로 이어지는 황금같은 연휴를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으랴 하고 진즉부터 이날을 기다리며 여행계획을 짜 왔던 터라 변산반도를 찾아 길을 떠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단 그 황금같은 연휴가 어찌 우리에게만 해당이 될까 싶어 혼잡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늘 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 출발을 조금 서둘렀다.

   퇴근을 하자마자 부랴부랴 캠핑짐들을 챙긴다. 이러한 서두름과 야간이동이 이젠 전혀 낯설지가 않아 말로만 서두는 것이지 실은 평소와 다를바가 전혀 없다.

   비로소 아파트를 떠나면서 시작한 여행의 첫걸음이 겨우 도착한 곳은 10km 정도 떨어진 충주 중앙탑공원이다.  왜냐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선인들의 금쪽 같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다.

   '돈을 아예 갈퀴로 긁어 담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업중인 식당에 들러 막국수를 먹고 떠나기로 했다.

   '아줌마. 여기 막국수 비빔은 보통이구요 물은 곱배기로 주시는데요. 꿩고기 왕만두도 한 판 주세요.'

   우리 두 사람의 식성에 우리 둘이서 스스로 핀잔도 주고 놀라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서 슬슬 금강산 비슷한 곳을 찾아 출발을 하였다.

   주덕쯤에 오면서까지는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 음성Ic로 해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난번 태안반도 여행때처럼 탈 줄 알았는데, 웬걸 내비게이션이란 양반이 죽어도 좌회전을 하라고 우긴다.  '아마도 뱅글뱅글 좀 돌리려나 보다' 하면서 증평Ic를 향해 달린다.  오창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올라 좀 달리다 경부고속도로를 슬쩍 맛보고 다시 호남고속도로에 올라 한참 내달리다 보면 아마도 전주 언저리 어디서 내리라 하겠고, 다시 지방도로를 타고 부안을 지나 변산을 들어가겠구나 하고 차를 몰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만.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나만의 여행 노하우라고 여겼던 일들이 이젠 보편 타당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오창Ic에서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미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한 사람이 수고해서 장거리 야간이동을 하고나면 전체여행의 일정에 한나절 이상은 버는것이란 평소 나의 지론을 어느새 저들도 모두 알고 있었나보다. 오창에서 청주 구간을 두 시간 이상을 허비해서야 겨우 지나치게되는 실로 황당하기 까지 한 어처구니 없는 처지를 겪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말이야. 지난번 올라오면서 서해대교 막히는 것 보았잖아.  그때에 비하면 이정도야 뭐........ 아마도 우리가 오늘 서해고속도로를 탔다면 이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거야.  그러니 이만한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야하지 않겠어? 거기다 내가 이렇게 사전에 과자도 잔쯕 챙겨왔으니까 다행이지 뭐. 크크크크.'

   사람을 어르고 달래려 하는 말인지 불난 심뽀에 휘발류를 뿌려대는 것인지 옆에 앉아 작금의 심각한 사태를 살피던 왕짜증여사가 내 가슴속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지 콕 콕 찔러본다.

   '괜챠녀. 까지꺼 뭐. 날 새기 전엔 가겠지 뭐. 안그려? 아에 조오오기. 졸림방지 센터에 차 세우고 자다가 갈까부다.'

   '나도 괜찮아. 그런데 당신이 피곤해서 그러면 내가 운전하고 갈께.'

   '잉? 그냥 냅둬. 괜챠녀. 기필코 채석강 까지 모실텡게루.'

   웬놈의 과자 봉지는 그렇게 작은지.  한 개씩 만 먹으라고 또 티격태격 한다. 옥신각신 하다보니 차들이 좀 빠진다.  대전을 지나며 호남고속도로에 오르니 비로소 교통체증이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졌다. 

   대전.

   우리 아들이 체류하고 있는 언제부턴가 갑자기 정겨워진 도시가 아닌가.

   '짱구모친. 아덜은 지금 모하고 있을까?  엄마아빠가 대전까지 왔는데?'

   '피곤할테니 쉬고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짧은 일정으로 일본까지 갔는데 그냥 쉬겠어?  절대 그럴 놈이 아니여.'

   '칫. 당신 기준으로 아들을 보지 말래니까? 모범청년이예요 아들은.'

   '핏. 늑대여 푸른늑대. 모범청년의 탈을 쓴 늑대여. 내가 맹글었는데 모를까봐? 아마 술 한 잔 하고 있을거여.  아무리 일본이라도 우리나라 쏘주가 인기라니까...... 참이슬에 스시를 먹고 있을거구먼.'

   '아님. 아들은 회 별로 안 좋아 함. 술도 별반 즐기지 않음.  가끔 어쩔 수 없어 많이 마실때도 있지만."

   자나치며 돌아보니 아덜이 없는 대전은 썰렁하게만 느껴진다.  일본회사에 다니고 있는 아덜은 본사 초청으로 오늘저녁 비행기로 일본에 갔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의 재미난 말싸움은 아들에 대한 가십거리로 이어지다가 끝내는 또다시 아들 여자친구의 신상털기로 이어지고, 차는 어느새 부안을 지나 적벽야영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삼십여년 만에야 비로소 아들을 놓고 왕짜증여사가 처음으로 인정한 한 마디, '오래오래 아들을 놓고 생각해 보니까 일단 씨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것 같아.'

   '기럼 기럼. 어디 씨도 보통 씨냔 말이여. 씨가 좋으니깐 저런 놈이 맹글어졌제. 크크크크.'

   '내 말 끝까지 들어보라니깐?  그럼 내 밭은 보통 밭이여?  밭이 그만하니까 저렇게 길러놨지.  그러니까...... 좋은 씨가 절반. 좋은 밭이 절반, 그렇다는 말이여. 내 말은.'

   '그러면 이제...... 커갈수록 제 애비를 쏙 닮아간다는 소리가 속상하게 들리지만은 않겠네? 후후후후.'

   '내가 언제 속상하다고 했어?  절대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몇가지 있다고 했지?'

   '이제껏 아들이 좀 서운하게 하면 나 한테 닥달하듯이 화풀이 하는것은 앞으로도 이해하겠는데....... 아들이 멋있어 보일 때는 나에게 감사해라.  내가 저렇게 설계했으니깐.'

   '아이고 잉간아. 내가 아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눈물흘리고 공을 들였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니?  당신이 나한테 백배 천배 먼저 감사해 놓고 나서 이야길 꺼내. 아이고.'

   적당히 끝냈어야 했는데,  결국 본전도 못 건졌다.

 

 

 

   부처님 오신날 아침.(17일)

   지난밤에 늦게 도착해 싸이트를 겨우 구축한데다가, 해변이며 불이 모두 꺼진 상가일대를 모두 섭렵한 다음 기어코 술판을 벌인 후에야 새벽에 잠이들었던 관계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밖은 눈이 부실정도로 밝아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아침을 해먹고 있었다.  서너시간 겨우 자고도 늦었다고 서둘러 일어났으니, 참으로 우리는 남들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새벽형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아침을 (짱구모친 캠핑형 A코스)로 해치우고나니 남들이랑 설것이하는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다.

   옆 사이트에서 오로지 자신들의 캠핑장비 자랑으로 밤을 새던 두 쌍의 팀에겐 영 우리가 아이러니 연구 대상인지 요상한 눈초리로 연실 우리를 살피는 눈빛이 역력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들이 겨우 휴식을 차리며 여기저기 아이들이 나와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커피잔을 나누며 발에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었다.

 

 

 

 

 

 

 

 

 

 

 

 

    내변산

 

   선경(仙境).

   선경이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선경 속으로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들어섰다.

   내변산탐방안내쎈터 주차장에 차를 주차키고 돌아서자마자 돌아서 올려다보니 온통 초록으로 뒤집어 쓴 산봉우리 위로 커다란 바위머리 하나가 덜렁 올려져있다.

   코끼리 형상을 한 인당바위라 하는데 요리조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에겐 코기리 형상이 보이질 않는다.  혹시 반대편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볼 때 코끼리 형상이 보이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코끼리 형상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향하는 길목 표지판 가장 가까운 곳에 실상사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왠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이었다.

   숲길로 들어서서 도랑을 건너려 예쁜 다리를 건너고 숲모퉁이를 돌면서 느끼는 감정은 '구중궁궐 처럼 깊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내변산은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비록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실로 깊고 깊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생겨나왔다.

   10여분 숲길을 오르자 너른 공터가 나오면서 눈 앞에 실상사의 정경이 마침내 전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절은,  내가 어디선가 들어서 희미하게 기억하는 그 실상사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실상사는 지리산자락 남원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였다.

   달랑 미륵전과 삼성각만 놓여있는, 어딘가 절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암자라 하기에도 그런 모습으로 내변산 선인봉 아래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한 때는 제법 커다란 가람이었다는데 6.25 전란통에 모두 소실되었다 한다.

 

 

 

 

 

 

 

 

 

 

 

   실상사를 지나 다시 선경에 드는 숲길을 오르노라면 주변 풍광이 뛰어난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이주이 바로 봉래구곡으로 불리는 지점이다.

   옥녀봉과 선인봉, 그리고 쌍선봉에서 흘러내린 시원한 물줄기들이 모여 마침내 직소폭포를 만들며 한바탕 신명난 물보라 춤을 추어댄 후에 분옥담과 선녀탕을 거치면서 기암사이로 절경을 만들어 놓고 여기 봉래구곡을 지나 백내천을 만들며 암지로 흘러내려가는 것이다.  아홉구비를 돌아 흘러내려가면서 시원한 물줄기가 만들어 내는 계곡의 풍미는 옅은 봄가뭄으로 하여 어느정도 빛을 바랬다고 하겠으나, 처음 선경을 찾은 나그네에게는 그저 황홀한 느낌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월명사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접어들면서 길의 폭은 좁아지고 돌부리가 돋아있는 언덕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작은 언덕길들이 숲길을 더욱 정겹게 한다.

   그렇게 그렇게 조금을 더 오르노라면 또 하나의 선경이 갑자기 시야 앞에 불현듯 나타나 가로놓이게 된다.

   직소호.

   내변산 중턱의 골짜기에 인공으로 보(직소보)를 막아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 연못을 직소호라 부른다.

 

 

 

 

                                                 ---  봉래구곡의 전경

 

                                      --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직소보와 직소호.

                                           

 

 

 

                                              -- 직소호 전망대에서 내려와 호수면을 끼고 산책하듯 걷다보면 다시 직소폭포로 가는 언덕길이 기다리고 있다.

 

 

 

 

 

   직소호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끔 전망대가 최적의 장소에 잘 꾸며져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서 호수를 끼고 도는 길은 모두 데크로 새로 통로를 만들어 산책하듯 거닐기 아주 좋게 잘 꾸며져 있다.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이런 걷기 편하면서도 절경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호사도 누리게 되나보다.  본래의 모습으로 놓여진 자연도 좋겠지만, 이러한 약간의 인공들은 사람들이 더 쉽게 또는 더 가깝게 자연에 다가갈 수 있게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보태기는 하되 충분하지 않을 정도만큼 만, 꾸미기는 하되 자연의 원형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아주아주 적당히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등허리에 땀이 차이는 느낌을 겨우 가질만큼 약간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비로소 폭포인가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폭포가 아니다.

   숲길에서 옆의 아래쪽으로 몇십걸음 옮기면 나타나게 되는  분옥담과 선녀탕이다.

   그들의 경치 또한 빼어나고 굽이치는 시원한 물줄기에 땀이라도 씻고 싶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원한 폭포소리에 당장 눈앞에 폭포가 어른거리게 되니 어느새 발걸음은 다시 언덕길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마침내 직소폭포가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직소폭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매창의 시가 저절로 생각이 났다.

   님을 사모치게 그리워 하는 매창의 마음이 절실하게 여기 직소폭포에 묻어나와 하염없이 흘러내려가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했다.

   여기 이 직소폭포에 두 사람을 더해서 말이다.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던 기생 매창(이계생)이 한사람이요, 다른 한사람은 대쪽같은 선비로 널리 알려졌던 바로 촌은(유희경)이라.

   스믈 여덟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그만 깊은 사람에 빠지고 만다.  여기 직소폭포에서 두 사람은 흠뻑 사랑에 취했다.

   그러나 때가 조선 중기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촌은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모질기가 그지없다.  그 세월을 견디며 매창이 촌은에 대한 사모치는 사모의 정으로 지은 시구가 절창이다.

   결국 매창은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촌은은 매창이 죽은 뒤로 스물다섯해를 더 살았다.

  

 

   직소폭포를 내려와 다시 내변산탐방안내소 주차장까지 이르는 동안에도 과연 매창과 촌은의 뒷부분 이야기는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등산은 절대 아니다.

   산책길은 아주 조금 넘는다.

   적절한 산세에 아름답기까지 한 절벽, 그리고 맑은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계곡.

   그야말로 선경을 거니는 길이다.

 

 

 

 

                               -- 모질기(?)가 그지없고 무자비하기(?)까지 한 왕짜증여사.  매창이 같은 연모에 정이 좀 팍팍 솟아나시길........

 

 

 

 

 

 

 

 

 

 

 

 

 

 

       격포 수산시장

 

    내변산에 다녀오는 길에 격포 수산시장에 들렸다.

   지난번 태안반도 여행에서 여러 포구를 들렸으나 동해나 남해 같은 포구다운 포구를 보지를 못하여서 솔직히 별반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규모에 있어서는 주문진항구에는 조금 못미치겠으나 묵호항 보다는 오히려 훨씬 컸다.  대포항 못지않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모로 경이롭기까지 할 정도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격포항이었다.

   사람들이 붐벼서 매우 복잡하였고, 포구는 대부분 배들이 조업을 나가서 조금 썰렁했으며,  연안부두에서는 위도로 가는 배가 출항하고 있었다.

 

 

 

 

 

                         

                          

                         

                         

                         

                          

 

 

 

 

 

 

                                                                                                            --  2013. 05.17.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