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타오르던 모닥불도 모두 사그러지고 을씬년스러운 한기가 뼈속까지 파고들었다.
하늘은 온통 반짝이는 별들의 꽃밭이다.
온 세상의 별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차가운 모래위로 그냥 벌러덩 드러눕는다.
달리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달리 떠오르는 생각도 없다.
지나온 삶의 궤적이야 어떻하든, 지나온 발자욱은 이미 바람에 모두 쓸려갔고 다시 앞으로 나갈 방향에는 티끌만한 그 어떤 흔적도 없다.
마음의 염원을 가로막는 것은 인위적이든 아님 숙명 같은 천연의 장매물이든 간에 그 어떤것도 존재치 않는다.
불멸에 대한 명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무한함과 그냥 마주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무한정 까지.......
그때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거리듯 아련하게 피어나는 상념이 하나 있다.
神 과의 조우.
거대한 자연 앞에 서게되면, 인간은 이미....... 절대 신을 버릴 수 없다.
-- 모항과 모항해수욕장의 새벽전경.
변산반도여행 2일째를 시작하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어제가 석가탄신일 이었기에 대부분의 사찰이 신도들과 여행객들로 많이 북적였을것이란 전제하여 사찰여행을 하루 미루어 계획을 하였었다.
격포야영장의 사이트에서 18km 정도 떨어져있는 천년고찰 내소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격포에서 내소사를 찾아가는 길은 포구 입구에서 좌회전을 하여 내변산의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도로와 우회전을 하여 해안길을 따라가는 해변도로가 있는데 그 최종적 길이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여 우리는 이른 아침의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기로 하였다.
참으로 상큼하고 멋진 해안의 절경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 마치 남해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격포야영장과 더불어 이곳 변산반도에서 성수기가 아닌 지금의 시즌에 야영이 허락되는 유일한 모항해수욕장 전경이 은은한 해무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예쁜 해변의 모습이었다.
해수욕장은 격포보다도 작아 마치 손바닥만해 보였으나 잘 정돈된 해변과 해변언덕 소나무 숲에 빼곡히 들어앉은 캠핑촌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보였다. 격포에 비해 모항해변은 좀 더 체계적인 개발의 손길이 나름 조화롭게 이루어진 모습이었다. 언젠가 꼭 한번 다녀가야겠다.
능가산 來蘇寺.
내소사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 첫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은 '무엇인가가 좀 아쉽다' 라는 느낌이었다.
다분히 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에서였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허전하고 아쉽다.
물론 조금만 더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것은 오히려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 일수도 있겠고 또는 세상이 그렇게 변해간 것을 어찌하겠느냐마는.
사람의 발길이 너무 쉽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풍광에 취하다 보니 어느틈엔가 해안가를 돌아 내소사 팻말이 서 있는 주차장까지 이르게 되었고,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 내소사의 일주문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거칠것이 없이 그냥 내친걸음으로 너무도 쉽게 다가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도심의 사찰이 왠지 정감이 덜 가는 것처럼, 조금만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섰으면 안됐으려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아울러, 빼어난 풍광으로 널리 알려진 내소사의 전나무숲길 이래보았자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길이가 겨우 수백 걸음이라 못내 아쉬움이 더할밖에.
150여년씩 수령이 꽉 찬 약700여 구루의 전나무 숲이라는데, 사람의 발길이 뜸 할때 기념사진 한 장으로 멋진 풍광을 모두 담아낼 수는 있겠으나, 소중한 사람과 숲길을 거닐고 추억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안타깝다 하겠다.
'자고로 절이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고 쳐도, 적당히는 발품을 팔고 힘에 겨울만한 노력으로 찾아갔을 때, 갑자기 쨘 하고 숲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야 절이라고 할만하지 않겠는가.' 라고 혼자 푸념을 늘어 놓으며 일주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나는 뭔가가 아쉽다는데 이 양반은 마냥 즐겁고 행복하단다. '냅둬. 보기만 좋구만. 이만한 절이 어디 흔해?'
- 내소사는 여타의 절들 처럼 '템플스테이'를 하고 있었는데, 정감가득한 승방에 여행자의 신발이 하나 가지런히 놓였다.
--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창살은 해남땅 대흥사의 천불전 연꽃무늬 꽃창살과 더불어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매우 빼어나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전통 사찰양식중 백골의 미를 한껏 잘드러내 주고 있다. 백골이란 단청을 하지않은 목조재질 그대로의 멋을 간직한 건축물을 말한다.
장엄하고 근엄한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여기 대웅보전의 풍광이 자꾸만 눈 앞에서 겹쳐진다. 또한 비록 단청은 하였으나 오랜세월 그 색이 은근하게 바래져서 참으로 색다른 멋을 풍겨내던 해남땅 두륜산 대흥사의 천불전 모습이 새삼 그리워진다.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서도 이렇게 웅장하고도 장엄한 목조건축물을 세울 수 있다는 그 시대의 장인들의 솜씨와 정신에 새삼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각나느 것이 그 장인들도 꽤나 개구장이 같은 심술통을 달고 있었나보다.
강화도 마니산의 전등사 처마밑에는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이 버젖이 사찰건물의 일부로 전해져 내려와 뭇 관광객들의 호기심까지를 자극해 너도나도 한번씩 힘들여 찾아본다.
여기 내소사 대웅보전에도 그런 심술통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장인이 여기 대웅보전을 지을 때 사미승 하나를 놀려, 사미승이 가지고 놀던 목재조각 하나가 부정탔다고 빼버렸다고 한다. 저렇게 빼곡하도록 숱한 나무토막들이 자르고 다듬어지고 조각이 되어 정교하게 끼어들어 맞았는데, 어딘가 분명 나무조각 하나가 빠진곳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개를 바짝 쳐들고 종종걸음으로 대웅보전을 뺑글뺑글 돌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누군가가 입증을 하여야만 하지 않을까?
-- 보살님들 표정이 참으로 해맑다. 다들 어느정도 득도를 이루신 표정들이시다.
참으로 반가운 모습들이다. 어쩌면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그토록 보고싶었던 모습 중 하나이기도 하다. 너무도 반갑고 정겨운 모습이다.
석가탄신일이 가까와 오면 도심의 사찰이건 산중의 고찰이건 연등을 내건다.
그런데 하나 같이 내 어린시절 보았던 그런 연등들이 아니다. 비닐로 만들어져 이미 여러해를 내걸었는지 시커멓게 때가 잔뜩 끼어있고 전기불이 들어 앉았다.
하늘하늘 매달려 바람에 나부껴야 할 연등들이 전기줄과 밧줄에 동동 엮여져 있는 모습이 영 안스럽게만 느껴졌었다. 어디를 가나 한결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내소사의 연등은 달랐다. 바로 내가 어린시절 보았던 그 연등이었다.
어린시절 흔히 습자지라고 부르던 얇디얇은 한지에 고운 물감을 들인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는 바로 그 연등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진짜 연등이다.
그리고 석가탄신일이 하루 전이었는데, 단 하루가 지났는데 온 경내에서는 스님들과 보살님들이 내걸린 연등을 걷어내시느라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스님 한 분과 여러 보살님들이 해맑은 미소로 모여앉아 연등을 하나하나씩 해체하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정겹다.
바스락 바스락 제각각 색갈이 다른 연꽃잎들이 하나 둘 찢겨져 나간다. 뼈대만 해체하여 회수를 하고 있다.
일년 후에는 또 새로운 연잎으로 등을 만들어 내걸기 위함이겠다. 쌓아놓고 아낀다고만 대수겠는가. 사찰은 역시 사찰만의 멋과 향기가 있어야지.
-- 경내에서 탑돌이를 하시는 저 아주머니의 오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 경내를 더욱 환하고 생기있게 만들어 주는 느티나무와 활짝 피어난 꽃.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경내 한 켠에는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 아담한 가옥이 하나 있어 들어가 보았다.
이렇게 다양하고 당장 가지고 싶어질 정도로 예쁜 물건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전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림으로 대신하려 셔터를 여기저기 눌러댄다.
그리고 벽에 내걸린 손수건이라 해야하나, 보자기라고 해야하나, 아님 액자에 넣어 걸어둬야 할 그림이라고 해야하나,
아름다운 글귀와 문양이 너무도 아름다워 또 다시 셔터를 눌러댄 후, 느린걸음으로 전나무 숲길을 되돌아 나와 내소사 방문을 마무리 했다.
곰소염전
내소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곰소염전이 있어서 들려 보았다.
제법 무더워진 날씨속에 여기저기서 몇몇의 염부들이 소금을 만들고 있었다.
염전 입구에 위치한 염전엔 스무명 남짓의 여행객들이 가까이 다가가 소금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있다. 여기저기 연실 셔터가 눌러지고 있다.
힘들어 보였다.
막장이라고 하던 탄광의 갱도안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나, 뙤약볕 아래 소금을 캐는(만드는) 일이나 별반 다를것이 없어 보였다.
한 여행객의 아이가 염부들이 소금을 실어 나르는 도구를 가지고 놀다가 잠시 위험한상황을 만들었다. 주인 염부가 노발대발 화를 냈다. 그 아이의 부모나 일가친척이거나 또는 어느 여행객이라도 '이거 아이에게 좀 심한것 아니야' 싶었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화를 내는 그 염부의 심정에 공감이 더 갔다.
여행객에게는 흔하지 않은 볼거리이겠으나, 그 염부에게는 이 소금만드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지만 꼭 해야만 하는 노동(생업)인 것이다.
여기는 그 분들의 밥줄이 걸린 일터요, 생계를 해결해 주는 소중한 장비들인 것이다. 놀이터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닌것이다.
어느곳에서나 '들고 나는 흔적을 내지 않으려 애쓰는 참 여행객의 최소한의 기본'이 많이 많이 아쉽기만 하다.
'곰소리' 하면 왠지 그 이름부터가 정겹게만 느껴진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바로 곰소항의 주소이다.
곰소항.
곰소염전을 구경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들려보았다. 왕짜증여사께서 볼일이 이곳에 있으시다고 해서.
시장으로 들어서는 다소 협소한 골목어귀에 차를 주차해 놓고 내리자마자 '포구어시장이구나' 하는 느낌이 우선 코로 가득 느껴졌다.
그리고 어디든 어시장에서 풍겨나는 특유의 그 짭쪼름한 느낌이 이곳 곰소항에서는 조금은 색다르게, 조금 조금 더 진한 짭쪼름한 맛으로 느껴져 온다.
그것은 아마도 이곳이 다름아닌 젖갈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어시장의 비린내를 포함한 특유의 냄새에 젖갈만의 독특한 냄새가 더하여졌기 때문인것 같다.
-- 곰소어시장은 손바닦만큼 작고 협소하다. 그런데 그 빼곡함이 더 아름답고 정겹게만 느껴진다.
-- 고사리와 마늘쫑을 다듬고 계신 아주머니들. 연실 속닥속닥 정담을 나누며 일손은 마냥 바쁘기만 하다.
젖갈이 싱싱하다?
야채나 과일이나 해산물이나 고기가 싱싱하다고는 하겠으나, 삭힌 젖갈이 싱싱 하다 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긴 한데 어떻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굳이, '정말로 맛깔 스럽다' 라고 하면 될려나.
정말 그랬다.
시장 크기도 작고 협소하고, 그 안에 수산물 어패류며 건어물에 젖갈을 파는 상점들이 정말 빽빽할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 앉았고, 바닷가쪽 뒷골목으로는 횟집들이 또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 빼곡하고 협소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활기있어 보이고 정감이 가득 서려보이고 반가운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마치 외갓집 광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어디 어느 항아리 안에, 벽에 걸린 어느 소쿠리 안에, 선반 위에 놓인 어느 광주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서 나를 반겨주려나. 곳감일까? 고염일까? 아님 호박엿일까?
그런 정겨움과 그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열심히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구경을 하며 돌아나녀본다.
장을 보는데 여간 까다롭지 않은 시각을 가진 왕짜증여사께서도 오늘따라 유심히 이것저것을 살피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신다.
장을 한바퀴 모두 돌아 본 연후에야 돌아 나오면서 이미 점찍어 두었던 가계로 찾아가서는, 또다시 눈으로 쓰윽 한 번 맛보고 시식하라고 건네주는 젖갈 한조각을 천천히 음미하듯 맛을 본 연후에야 은근하게 미소를 짓는다. 됐다. 그러면 합격이다. 그렇게 젖갈을 구입하고 나오다가는, 다시 되돌아 들어간다.
'아저씨. 여기 바구니에 담긴 것으로 치자면 1키로에는 얼마쯤 되는 거예요?'
돌아서서 나를 보며 황홀해보이기 까지 하는 묘한 미소를 흘리더니 만, 우 ------- 와아. 키조개와 소라가 담긴 조개를 한봉다리 산다.
'어제 격포수산시장에서 살까 말까 했었는데, 거기서는 1키로에 만오천원이라 했거든. 그런데 저기 한 바구니면 2키로도 훨씬 넘겠다. 완전히 횡재하는 기분이야. 거기다 어제보다 훨씬 싱싱해 보이거든. '
왕짜증여사는 싸게 구입한다는 기분에 셈을 하면서도 횡재한 기분이고, 나는 어느어느 놈이 곧 내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횡재한 기분이고.......
곰소항을 나와 돌아오는 길은 내변산의 산허리를 돌아오는 내륙의 길을 택해 드라이브를 즐겼다.
산길 군데군데에 앙증맞을 정도로 잘 꾸며진 전원주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어느집 들어가는 초입에 양귀비꽃(개량종)이 한무더기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차를 세우고 셔터를 눌러보았다.
그리고, 격포야영장 캠프로 돌아오는 그 즉시 화덕에 숯불을 피우고는 방금 전 곰소항에서 사온 조개들을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그리고......
또 그리고........
왕짜증여사와 나는........
조개구이를 안주로 벌건 대낮에 술판을 벌렸다.
'이거 우리 둘이서는 도저히 다 못먹을거야' 하던 그 많던 조개들도 바닥을 드러냈고, 또 그 안주의 양에 비례하게끔 술병도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 조금은 무덥던 봄날. 시뻘건 대낮같은 오후에. 조개구이를 안주삼아서. 쏘맥으로 잔치를 벌렸다.
이몽룡이 출두하던 날에 변사또가 벌인 술판이 전혀 부럽지가 않았다.
헌데.......
그날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이 지날 때까지.......... 엄청나게 고생했다. 왕짜증여사가 낮술에 된통 호되게 혼났던 하루였다.
변산반도 여행의 둘째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채석강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불글의 의지로 뭉쳐진 왕짜증여사. 그 그림들은 여행 후기(채석강편)에 다시......
--- 2013. 05.18.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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