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담아낸 풍경과 화폭에 그림으로 담아낸 풍경에는 분명히 어떤 다른 맛과 느낌과 의미가 남다름이 존재하겠지만 도무지 나는 지금 그 차이를 딱 부러지게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만 같다. 수묵화를 그리시던 어떤 선생님께서는 내게‘그림 속에는 여백의 미가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그리는 사람은 풍경 뒤에 가려진 사연을 담아내기도 한다네’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선생님께서 내게 애정을 가지시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음에도, 끝내 나는 화가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진 작가가 되지도 못했다.
꽤나 오랜시간 독학을 하다시피 하면서 들로 산으로 사진을 찍으로 싸돌아다니기는 했으나, 영 소질이 없었음인지 나의 사진은 늘 거기서 거기인 모양새다. 누군가가 ‘캠핑이 장비빨 이듯이 사진도 어느 정도는 장비빨이여. 허구헌날 입문자용 기본 카메라만 눌러대니 어디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오겠니? 초고가 비싼 장비로 무장하고 사진동호회라도 쫓아다녀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는 거여. 맹충아.’라고 나를 놀려대던 친구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난 내 멋에 산다.
비싼 장비를 살 돈이면 어디로든 훌쩍 여행을 한 번 더 떠나겠다. 내게 있어서 사진은 그냥...... 두고두고 나의 여행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게 최소한으로 기록해 두는 정도의 의미이면 충분해. 내가 무슨 작품 사진을 찍어서 책을 내거나 어디에 내다 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죽어라 많이 찍다보면 어쩌다 작품 비스무리한 것도 나오지 않겠어? 냅둬. 난 그냥 이제껏 해왔듯이 내 방식대로 살래.
그랬었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쭉 그래왔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확 달라졌다. 여전히 장비빨이야 달리 아무것도 더 갖춰진 것이 없지만 그래도 이젠 멋진 사진을 한 번 제대로 찍고싶다.
이젠 기록사진 정도로는 안될 것 같다. 강렬하게 때론 잔잔하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CF의 한 장면같은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
우리 태리랑 세리를 제대로 렌즈에 담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속에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함축시켜 담아내고, 그것이 훗날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억으로 담겨지기를 바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설레발은 지금 내게는 전혀 필요치 않다. 그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고, 많은 순간들을 사진에 마구마구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찍는 것은 어디까지나 할아버지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그것을 오래오래 보관해주고 기억해 주는 것은 오로지 훗날의 녀석들 몫일 뿐일테니 말이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속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게 묻어나기를 내맘 속으로만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함께 산책길을 걷고, 물장구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풍등을 날리고, 공항 패션으로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지나고, 괌에서 호핑 투어하고, 트래비 분수에서 동전을 뒤로 던지고, 피렌체 두오모 종탑을 걸어서 오르고, 몰타 해변 바위 벼랑에서 다이빙도 하고, 돌로메티에서 남알프스 트래킹을 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손잡고 걷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예배도 참석하고,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는 배에서 ‘나타샤 댄스’를 할아버지가 들려주고, 앙코르 사원에서 태리가 흉내내는 안젤리나 졸리도 만나보고, 코카서스의 대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보여주고 싶어. 그 모든 시간들을 사진에 담아 우리의 추억이 소록소록 묻어나는 사진첩을 만들어 선물처럼 태리랑 세리에게 남겨주고 싶구나.
그런 많은 시간속에서 우리가 함께 있고, 서로 바라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할아버지의 남은 시간속에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거야. 더 이상 할아버지의 소원은 필요치 않을거야. 지금까지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럼에도 아직은 조금만 더 가보고 싶어. 사진을 열심히 찍으면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단다. 할아버지가 내손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마지막 사진은 어떤 게 좋을까 하고 말이다.
‘숙녀로 성장한 너희들과 펍(PUB)에 가서 할머니. 태리. 세리.그리고 할아버지랑 넷이서 생맥주 마시는 사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단다. 엄마 아빠는 옆 테이블에 떨구어버리고 말이야.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가나라 가나라 아주 가나
나나니 나려도 못노나니
아니리 아니리 아니노네
에야 디야 에야 나나니요
오지도 못하나 나도 가마.
꽤나 오래전에 <대장금>이란 TV 드라마에 배경음악으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오나라)라는 곡의 가사이다.
구구절절이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신세를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벌(나나니)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었다.
한동안 자주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때는 어디까지나 <대장금>이란 인기 있는 드라마의 아련한 회상과 기억 속에서 였을뿐이다.
그런데 근자에 어느 순간....... 이 노래가 불쑥 떠올라 어떤 전율처럼 나 스스로 크게 놀란적이 있다.
누군가 말하길 ‘나이들면 괜히 센치해지고 멜랑꼬리해 진다고 하더니만 지금 내가 바로 그 짝인건가?’하는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개뿔! 멜랑꼬리는 무슨? 쓰잘데 없는 가을병이지.’라고 챠밍여사라면 당연히 푸닥꺼리 해야한다고 난리도 아닌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러게, 개뿔 맞네? 이 나이에 가을은 무슨? 가만...... 나에게 아직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란게 남아 있기는 한가?’
오라고 오라고 한들 오더냐
가라고 가라고 한들 가더냐
나나니 벌처럼 하염없이 기다려도 님과 어울리지 못하니
아니구나 아니구나 사랑이란게 다 뜻때로 되지는 않는구나
어이구 어이구 이를 어찌하나
오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나도 그곳으로 데려가려무나.
‘할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허우대 멀쩡한 아들이 하나 있으니 자연스레 언젠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속내가 어떤 것인지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저 내게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께서 손자라면 사족을 못 쓰다시피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뭔가 변하기는 하나보다’라고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당신, 태리 세리가 커 갈수록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변해? 모르겠는데?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 같을 건데?’
‘많이 바뀌었어. 신통하리만치........’
‘멋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지. 병아리들이 커서 사춘기가 되고 아가씨가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랑 안 놀아줄 거 아니야? 그때까지 어떻게든 늘 보고 싶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뿐이야.’
‘지나칠 정도라고 생각될 때도 있으니까 문제지? 문득 문득 서운할 때도 있어.’
‘헐!!! 할아버지가 병아리들 사랑한다는데 할머니가 서운하다니? 질투해?’
‘질투해. 언제는 나뿐이라더니 이제는 아예 안중에도 없나봐. 갤러리가 저게 뭐니?’
‘갤러리? 허허허허. 내리 사랑이라잖아. 갤러리도 조금씩 내 주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갑자기 다 뺏어가는 것 같잖아?’
‘태리한테 할머니가 그런다고 문자 보낼까?’
‘할머니 죽는 꼴 볼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좋기는 해. 너무 예쁘잖아.’
우리 집 내 서재의 한쪽 벽면은 온통 챠밍여사의 여행사진 갤러리다.
여행을 다녀 올 때마다 자동으로 갤러리가 엎그레이드 되어왔다. 갤러리의 주인공은 그동안 오로지 챠밍여사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병아리들과의 캠핑사진이 한 장 붙었다가 두 장이 되고 세 장으로 늘어가는 추세다. 당연히 한정된 벽면에서 그 수만큼 할머니 사진이 밀려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걸 할머니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할망구야. 그런 게 자연스런 우리의 인생살이야. 비워주고 덜어내는 것을 배워가야지. 그것도 모르니? 이 공간(우리 집)도 애초부터 병아리들 몫이라고 자기가 해놓았으면서....... 우린 지금 애들 거 빌려서 쓰는 처지잖아?’
태리야. 세리야. 아무 때고 오고 싶으면 오렴.
갈 때는 좀 더디게 가고 뒤 좀 돌아봐 주렴. 다음 이라는 약속이 너무 길게만 느껴져.
써핑해야지? 흘림골 주전골 트래킹 해야지? 울릉도 캠핑 가야지? 담에 오면 보조바퀴 없는 성인용 자전거 배워야지? 할아버지가 창고에 청소년 자전거 새 거로 할머니 몰래 사 놓았어. 함께 조립해서 바퀴에 바람 넣고 공원에 가서 연습해야지? 겨울방학엔 서울 가서 연극이나 뮤지컬 한 편정도 보고 싶고, 국립 중앙박물관도 가야하지? 여울낚시 해야지? 거기에다 충주 올 때마다 시립도서관에 가서 노는 법 배워야지? 할아버지가 사는 동안 너희에게 꼭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은 오로지 두 가지야. 재미있게 여행하는 방법과 책과 함께하는 즐거운 생활이란다. 이 두 가지만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로 남겨 둘 거야. 거기에다가 하나 더하자면 그것은 너희 몫이자 하기 나름으로 주위에 많은 친구를 사귀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래. 할아버지가 너희에게 간절하게 당부하고 싶은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란다.
할아버지가 ‘손녀 바라기 바보’라고 놀림을 받아도 좋아.
오래오래 너희들과 손잡고 걷고 함께 여행하고 마주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어서 자라서 함께 생맥주 마실 수 있는 예쁜 숙녀로 성장한 너희를 볼 수만 있다면........
아내는 꾸불꾸불한 옛길을 좋아한다.
길을 나서면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를 타고 쌩쌩 달려가는 것보다, 아주 먼 옛날에 처음 생겨나 오로지 사람이 걸어서 다니던 불편하고 협소한 그런 옛길을 좋아한다. 살아가는 것에 열심이었고 찌들기만 했던 생활이었겠지만 그 사람들은 거친 호흡소리와 땀과 눈물이 서려있는 그 길을 따라가면 산들바람에 취하고 여전한 자연의 푸른 생명력에 감동하고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그리면서 어느 정도는 숙연함으로 먼 길을 아주 천천히 가는 것을 좋아한다.
길을 나서면 우선 의자를 가장 뒤에까지 빼고, 안전벨트를 맨 다음에 두 발을 걷어 올려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반쯤 창문을 열고는 커피와 다이제스티브 비스켓을 즐기면서 한껏 여유를 부리다가, 그것마저 지루해질 즈음이면 우리 병아리들 이야기로 한껏 달아올라 수다를 떨다가, 그것도 지치면 아들 며느리를 난도질하는 이바구로 넘어가기가 다반사다.
어디든 굳이 날아가듯 차를 몰고 빨리 가야만 한다면 아내는 애초부터 그 길을 여행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며, 그런 여행이라면, 어쩌면 아예 따라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 아주 가끔은 아주 옛날 왜정시대에 있었다는 벌목을 위한 임도를 따라 고개를 넘다가 되돌아 나오기도 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무작정 바닷가를 따라만 가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그럴 여유도 짬도 없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뭘 먹이고, 고속도로 내려서면 어디 하나로 마트에 가서 병아리들이 맘에 들어 하는 음료수와 과일도 새로 사야하고, 저녁에 뭘 먹고 싶어 하는지 물어봐서 장을 봐야하고, 목적지에 당도하기 전에 어느 휴게소든 들려서 하루 한 번은 뽑기 해주어야 하고....... 암튼 정신이 없다. 예전엔 사전에 미리 푸짐하게 장을 미리 보았었는데...... 애들 입맛과 관심이란 게 너무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토마토를 무척 좋아하기에 한 박스를 사서 챙겨왔더니 이번엔 웬걸 한참 비쌀 때 블루베리 타령을 하고, 블루베리를 챙겨왔더니 바나나를 찾는다. 밀키스를 좋아하기에 잔뜩 사왔더니 처음보는 낯선 어린이 음료로 날마다 입맛이 바뀐다. 하여 결론은....... 미리 사지 말자. 그때그때 데리고 가서 물어보고 사자. 어떻게든 좋아해서 실컷 먹어주기만 하면 고맙겠다. 병아리들과의 여행은 그저 편안한 일상처럼 이미 익숙해지고 자신이 생겼는데....... 다만, 때마다 끼니 챙겨 먹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염병할...... 지금 날씨가 이게 뭐야?
거기 지극히 높은 곳에 앉아계신 양반! 정말 자꾸 이럴 거유?
금산 캠핑 폭싹 망하게 했지, 싸인이 안 맞았던 효도여행 때도 비를 뿌려댔으면서, 오늘까지 이러시면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사단을 한 번 내보자는 겁니까? 시방?
캠핑장을 예약할 때부터 이후로 비 소식은 없었다. 그제까지도 일기예보는 온통 쾌청이었다. 그러더니 어제 아침에 느닷없이 흐림이 떴다. 저녁에 비 소식으로 바뀌더니 약하게 5mm 정도의 비만 뿌리고 그친다고 했다. 그래서 별 지장이 없겠구나하고 안심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고에서 짐을 꺼내다가 차에 싣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은 흐린 얼굴이고 나머지 반은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냥 지나가려나 보다하고 안심을 했다.
개뿔!!!!! 안심은 무슨? 하늘에 계신 그 양반 요즘 심사가 뭔가 잔뜩 뒤틀리셨나?
차를 몰고 충주 시내를 벗어났다고 생각할 즈음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지 소나기가 아니고 운전에 지장을 줄 만큼 폭우가 내리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헐! 어린이 집에 우리 작은 병아리 데리러 가야하고, 큰 병아리 학교에서 걸어서 올 텐데 이를 어쩐다. 우산을 챙겨갔을까?
‘아빠. 날씨가 장난이 아닌데 괜찮으시겠어요?’아니나 다를까?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덜. 아빠가 아직은 현역이야. 뭐든지 잘 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병아리들과 이미 한 약속이고, 녀석들이 많이 기다렸을 텐데 좀 더 신경 써서 조심하면서 계속 해야지. 걱정 마.’
‘그건 잘 알지요. 뭐든지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것은...... 빗길 운전 조심하세요.’
‘애들 옷은 많이 챙겨 넣었니? 추워질 것 같아. 장화도 챙겼지?’
‘네. 애들 짐은 잘 챙겨 놓았어요. 엄마가 보시고 부족하겠다 싶으시면 옷장에서 더 챙겨 가시면 될 거에요.’
‘그래. 우리가 더 챙겨서 잘 다녀오마. 대신 너희도 좋은 시간 보내렴.’
우리가 병아리들을 뺏어가고 나면 2박3일간 아들과 며느리는 또 어떻게 좋은 시간을 보내려나? 늘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지난번엔 일단 아침마다 늘어지게 잠을 실컷 잤고,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하고 영화 관람을 했다고 했는데...... 그래. 일단 내일 아침에 실컷 늦잠이나 자두렴. 병아리들 아침은 할머니 할애비가 잘 챙길 테니 염려하지 말고. 우린 그 시간에 바다에 나가 있을 거야.
충남 태안군 남면 마검포길 313-30 번지의 해안가 소나무 숲을 차지하고 있는 마검포 힐링 캠핑장은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까다로운 캠핑장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해넘이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소문이 났지만, 소나무 숲속에 구축한 싸이트에서 하루 온종일 내다보는 탁 트인 서해 바다조망 또한 일품이다. 오토캠핑, 차박캠핑, 글램핑 등의 다양한 시설만큼이나 조개잡기 체험과 인근의 바다낚시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만의 조용하고 오붓한 캠핑’을 모토로 하고 있는 만큼, 지인들과 떼로 몰려와 왁자지껄 시끄럽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치 않고 요란을 떠는 캠퍼들은 대놓고 출입금지를 시키는 캠핑장으로 악명이 드높다. 간섭하고 제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입장과 동시에 준수해야 하는 사항들을 사전에 철저히 고지시키고 이행 약속을 해야만 캠핑장 입장을 시킨다. 약속을 근거로 정해진 규칙에서 조금만 어긋나거나 벗어나면 즉석에서 쫓아내 버리는 곳으로 아주 유명하다.
거기에 더하여 그런 규정 내용이 가히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마검포 힐링 캠핑장의 출입 정원은 성인 2명에 어린이 2명까지가 허락되는 정원이다. 어린이가 셋인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허락되지만, 할머니, 삼촌, 이모 등등의 2명 이상의 성인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출입금지다. 그럼 두 팀으로 나누어 캠핑을 몰래 오면 되지 않느냐? 헐!!! 그것도 절대 불가다. 이웃사촌끼리 혹은 친목회에서 두 팀으로 모르는 사람인척 와서 나름 각자 캠핑을 한다고 해도, 중간에라도 그들이 함께 사전 작당(?)을 해서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하고 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싸이트를 구축하며 시작한것이라면..... 저녁에 바비큐 자리가 합쳐지고 모여서 술자리를 시작하는 순간 즉석에서 두 팀 모두 강제 철수 당한다. 실제로 곧 잘 목격되는 믿기 힘든 상황이다. 정말로 쫓아낸다. 애초부터 전혀 의도가 없었는데, 와서 싸이트를 구축하고 나서 우연히 만나고 보니 정말 가까운 지인이거나 친척이라면.......... 어쨌거나 쫓겨나지 않으려면 아예 못보거나 모르는 사이로 지내다 밖에 나가서 아는척 하는 수 밖에 없다. 혹 운영자 사무실에 같이 찾아가서 주인 앞에서는 아는척 하고 사무실을 나서면서는 절대 모르는 척 한다면 모르겠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이 캠핑장의 최고 원칙이자 덕목은 오로지 한 가족 중심의 조용하고 오붓한 캠핑이다. 신혼부부가 와도 한 가족이다. 우리처럼 흔치않게 할머니 할아버지랑 손녀 둘이와도 한 가족이다. 일단 성인은 2명 이상이 절대로 안 된다. 이러다가 우리 아들하고 며느리가 잠시 들르러 와도 입장 금지다. 캠핑장 내에서는 절대로 합류해 어떤 행위도 할 수가 없다. 면회를 하려면 일단 캠핑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 혹, 할머니 할아버지랑 엄마 아빠랑 바톤 터치(교대)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허락해 주지 않을까?
왜 이렇게 까다롭냐?
캠핑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세운 원칙이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는가?
자제해 달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아니다. 대놓고 이런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아예 관심을 갖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걸 어쩌겠는가? 운영자가 저렇게 최소한의 소가족단위로 진정한 캠핑을 원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기꺼이 먹고 사시겠다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달리 어찌해 볼 도리는 없다.
8시 이후로는 아예 문을 닫아 걸고 입장도 시켜주지 않는다. 이미 자리를 잡은 가족캠퍼들에게 소란스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하지만 당장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부터 알면서 기꺼이 찾아가지 않는가?
다소 무리한 억지로만 느껴지는 저런 원칙이 오히려 좋은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마냥 좋았다. 그런 원칙이 존재하는 곳이어서 더 좋았다.
다만...... 그날...... 아니 이번 여행 내내...... 날씨가 지럴(?) 이었다.
'거!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양반! 이번까지만 봐주는 거유? 날씨 가지고 장난치지 마슈? 엘로우 카드유!'
정오쯤에 충주를 출발해 이천 어린이 집에 들려 작은 병아리를 픽업하는데 벌써 선생님들도 다 알고 계시며 몰려나와서 날씨 걱정을 해주신다.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며 캠핑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로 벌써 제법 유명세를 타는 신세가 되었다. 순전히 우리가 우리 병아리들 좋아서 하는 일인데 말이다.
‘이런 험한 날씨에도 가시나 봐요?’
‘아이들과의 약속이고 녀석들이 가고 싶어 하니까요. 비 때문에 녀석들과 더 특별한 추억이 만들어지겠지요.’
‘손녀들이 너무 좋아하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작은 병아리를 체포(?)했겠다. 짐 챙기러 아파트로 향한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싸놓은 병아리들 여행 가방을 열고는 다시 점검을 한다. 장화는 담겨있고, 다용도실에서 우비를 찾아오고, 비 때문에 옷가지들을 추가한다. 할아버지는 큰손녀 방에서 이것저것 살피다가는 거실 창문으로 23층 저만치 아래 롯데마트 버스 정류장만 쳐다본다. 큰 병아리가 그 정류장을 통해 집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기어코 전화를 걸어본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지금 한참 돌아서 걸어오는 중이란다.
‘태리야. 할아버지가 데리러 갈까? 어디쯤이야?’
‘기다려요 할아버지. 금방 뛰어 갈게요. 5분이면 도착해요.’
십 분쯤 지나자 땀에 절고 비에 젓은 큰 병아리가 뛰다시피 들어와 품에 안긴다.
크크크크크크. 왜 사냐 건? 할아버지는 이 맛에 산다!!!!!!!
병아리 두 마리가 다 무사히 내 품속에 들었으니....... 내일 모레까지는 누가 뭐라해도 무조건 우리 차지다.
출.발.해.볼.까.
그런데 우.이.씨.
비가 점점 더 내린다. 이거야 정말......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심하게 내린다.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의 걱정스런 전화까지 오지 않는가?
‘걱정하지 마렴. 병아리들은 우리가 잘 지킬 게.’
2시간 반 정도를 예상한 이동시간이 거의 5시간 반을 넘기는 고난의 행군이 되고 말았다. 폭우로 변한 날씨도 문제였지만, 서해안 고속도로는 물론 이 일대 전부가 주말 정체가 극심해진데다가, 중간 중간에 교통사고들마저 발생해 거의 고속도로 주차장을 방불케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음인지 병아리들은 투정 없이 느긋하게 버텨주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터지는 화장실을 써야하는 생리현상이 발생하였으니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겨우겨우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아가니 거기도 북새통인데...... 한 수 더 떠서 여자화장실은 길게 줄을 섰을 정도다. 오 마이 갓. 이를 어쩔 거냐? 할아버지 용기를 내서 어린 병아리를 품에 안고 남자화장실로 뛰어간다. 어찌어찌 해서 위기를 넘기고 나오니 어린 병아리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 볼에 뽀뽀를 해준다.
이.런.게.사.는.보.람.이.아.니.겠.어.임.무.완.성.
안면도에 들어서서 허겁지겁 하나로 마트를 찾아가 이것저것 먹거리 살림을 챙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면서 변해가는 녀석들 취향과 입맛을 위해서 이젠 사전에 잔뜩 사재끼는 장보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그때그때마다 녀석들이 하자거나 고르는 대로 한다.
오늘같이 날, 어두워지고 인정사정 없는 비바람 속에서 어떻게든 텐트를 설치해야 하는 오토캠핑이었다면 지금쯤 어찌했을꼬?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만은 일단은 안심이다.
텐트를 가져오지 않아 짐이 절반 이상 줄어든 하프 글램핑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등 떠밀려 떠났던 강릉 솔향기 캠핑 때 글램핑을 처음으로 해 보았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여파로 병아리들 데리고 모처럼 멀리 가는 여행인데 혹시나 모르니까 이번에도 그냥 글램핑으로 가자고 우기는 할망구를 이길 수가 없어서 절충안으로 하프 글램핑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텐트와 타프와 테이블이 빠지는 대신 천막으로 제작된 텐트를 빌려 사용하는 캠핑이라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텐트. 타프. 테이블이 빠지면 사실은 캠핑 짐의 대부분이 빠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짐 이래야 이부자리와 먹거리 밖에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환절기 걱정으로 겨울용 석유 난로를 가져가야만 했고, 난로가 가면 석유통이 따라가야 하고, 병아리들이 좋아하는 불멍을 위해서 사전에 충주에서 잘 마른 참나무 장작을 뭉텅이로 사다가 다시 더 말려놓았으니, 얼핏 내려놓은 짐만큼 새로운 계절적 짐이 추가되었다고나 할까? 거기다가 늘 해왔던 습관처럼 이런저런 것 꺼내다가 빈자리 채운다고 싣고, 특히나 작은 병아리를 위해서 그동안 모아둔 아기자기한 유리 조명까지 죄 다 꺼내다 보니 이번에도 내 차량의 빈자리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글램핑 천막 앞에다 차를 붙이고 러그를 먼저 꺼내 바닦에 깔고 이부자리를 밀어 넣는다. 거기다가 이것저것 조명 도구를 하나씩 하나씩 밝혀주니 우리 병아리들 불놀이에 빠져 아예 저녁 식사 생각도 없다며 노는데 만 혼을 빼앗긴 꼬맹이들처럼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과일과 빵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이젠 본격적으로 할머니랑 한바탕 가족대전을 치룬다. 언제부턴가 큰 병아리가 커가면서 할머니랑 붙어서 힘자랑으로 이겨보려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그런 손녀의 도전을 또 할머니가 모조리 다 받아 준다. 거기다 작은 병아리가 언니 편에 가담하여 덤벼드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할머니가 밀려나는 수준이라고 해야겠다.
캠핑장의 매너타임 시간이 되어 놀이 자제를 시키고 나서 옆에 엎드려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해서........ 포시즌 님프 이야기를 꺼낸 것까지는 기억하겠는데......... (아주 잠시 깜빡 졸았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는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5시가 아닌가?
헐!!! 평상시대로였다면 애들을 재우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밤새도록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면서 잠버릇이 남다른 병아리들을 제자리로 끌어다가 이불을 덮어주다가 뜬 눈으로 새벽을 맞는 것이 당연했었는데....... 아뿔싸.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세상모르고 먼저 잠이 들고 말았나 보다. 웬걸? 할머니도 나랑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참으로 다행인 것은 병아리들이 언제까지 놀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제 자리에서 지금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제 뭐가 그렇게 힘들었거나 피곤했던 거지?
헐!!!!!!
한참을 더 기다려 천막 밖으로 새벽 미명이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이부자리(이너텐트)를 털고 거실로 나왔다. 조용조용 애쓰며 물을 끓여서 모닝커피를 준비하는데 불쑥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나 자신도 어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단다. 40년을 부부로 살면서 이런 경우를 처음 겪어본다. 어처구니가 없다.
‘애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힘들었다고 자장가 불러서 먼저 재워주었나 봐.’
모닝커피를 마시다 보니 밖이 어느 정도 환해진다. 슬며시 내다보니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여전하고, 무엇보다도 아침 기온이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피부에 느껴 진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인가 봐. 긴 여름 뒤에 있으나 마나 한 짧은 가을은 어제까지고 오늘부터는 이제 겨울이여.’
이쯤에서 산책을 나가봐야 하겠다. 서해안 조개를 싹쓸이 하겠다고 여기까지 몰려온 우리였는데 이거 아무래도 조짐이 안 좋아 보인다. 물때가 아무리 좋으면 뭐해.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물색이 탁하고 기온차가 심하면 모두 꽝인 것을.
겉옷을 걸치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텐트에서 나와 소나무 숲을 지나며 채 아직 깊은 잠에 들어있는 다른 사람들 텐트를 구경하면 지나치는데 등 뒤에서 ‘할아버지’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우리 큰 병아리가 이 시간에 벌써 일어나다니? 아직 한참 잠들었어야 하는데?
‘그냥 눈이 떠졌어요. 할아버지 따라 산책 갈래요.’
‘많이 추어졌어. 할머니한테 가서 겉옷 하나 달래서 입고 와. 그냥은 추워서 안돼.’
손녀 손을 잡고 소나무 숲을 지나 백사장을 지나 밀물이 들어오고 있는 뻘의 저만치까지 들어가 본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아무도 없는 여기 서해 바닷가 마검포 해변에서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손녀와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아무도 윤태리를 막을 수 없다. 지금 이 새벽 바다엔 윤태리와 할아버지와 갈매기 뿐이다.
Oh, happyday!!!!!!!
서해안 여행의 백미는 누가 뭐하고 하던지 일단 갯벌체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대목에서 무조건 전제해야만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갯벌체험은 검은 진흙탕 뻘에 들어가 꼬막을 잡거나 갯바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굴을 채취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그것들은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리얼로 펼쳐지는 (극한체험) 내지는 (체험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끼리 시간을 내서 여행지에서 어디까지나 경험과 즐거움을 전제로 하는 갯벌체험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바닷물이 저만치 빠져나간 해수욕장 저만치 안쪽에서 비교적 손쉬운 놀이로 조개잡이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정도라는 점을 사전에 분명하게 거듭 밝혀두고자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놀이를 넘어 즐거운 여가활동이 되고, 한걸음 발전하게 되면 장비가 동원되고 온갖 랜턴과 써치가 등장하는 본격적인 야간 해루질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해루질에 깊게 푹 빠지다 보면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밥벌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드는 해루질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해루질 전문가들이 서해안 바다에서 잡아내는 해산물은 참으로 다양하다.
여행자들이 흔하게 잡아 볼 수 있는 맛조개. 동죽. 백합 조개, 골뱅이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대왕조개, 새우, 가리비에서 꽃게나 낙지나 키조개까지 잡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렴하고 허름한 어부라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처럼 보편타당한 선에서 여행자들이 말하는 갯벌체험이나 해루질이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동죽이나 백합 조개를 호미나 갈퀴로 캐는 정도를 말하고, 어린 자녀들과 소금통을 들고 구멍을 찾아내 맛조개를 잡아보는 새로운 경험 정도를 바라고 시작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멀리까지 빠져나간 바닷물을 쫓아가다 보면 아주 가끔은 골뱅이나 꽃게 새끼들을 공짜로 노획하는 짜릿한 즐거움을 느껴볼 수도 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에 몽산포에서 첫 갯벌체험에서 동죽을 대충 작은 양동이로 하나 가득 잡아낸 경험이 있는 할망구 입장에서는 마검포 해변의 결전을 포부도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할아버지의 바람은 맛조개 잡는 체험을 시작으로 호미질을 통해 조개를 잡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면 되겠고, 해변을 오고 가다가 갯벌 속으로 숨어들지 못한 골뱅이 두 개만 주울 수 있으면 충분하지 싶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 병아리들이다.
이번 여행을 오기 전부터 이모나 엄마 아빠나 주변으로부터 갯벌체험에 대해서 귀가 닳도록 사전에 충분히 듣고 왔던 터라...... ‘조개야. 꼼짝말고 기다려. 내가 다 잡아 주겠어’를 이미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할아버지 새벽 산책에까지 따라와 해변 답사까지 마쳐두었으니 말이다. 아침 식사도 별반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해변에서 벌어질 조개와의 한판 대결만을 생각하며 전의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웬만해선 우리 윤 태리를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상황은 그러했음에도 현실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기운이..........
아침 산책을 마치고 텐트로 돌아오던 중에 해변을 살피시던 현지인 어른 두 분을 관리실 건물 앞에서 이미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이런 날 바닷가에 나가도 될까요? 조개를 좀 잡고 싶어서요.’
‘이런 날씨에는 아무것도 안 나와요. 괜한 힘 쓰지 말고 바다에 안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우. 이런 날은 낚시도 꽝이유.’
‘물때가 아주 좋을 때라 해서 기대하고 왔거든요?’
‘물때가 아무리 좋으면 뭐해? 바람 때문에 물결이 일렁이고 물이 탁하고, 물이 탁하면 고기고 꽃게고 조개고 다 나오지를 않는다우. 이따 보시유. 바다에 기대어 먹고사는 현지인은 하나도 안 보이고,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놀러 온 사람들이나 몇몇 쏘다닐테니....... 이런 날은 아무것도 안 나와유. 혹시 바람이 자서 밤 바다는 괜찬은지 일기예보에 귀기 울이며 술이나 한 잔 하는 것이 상책이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어쩌겠는가?
우리 병아리들은 벌써 조개와의 한 판 대전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을........
아니!!!! 그보다 먼저...... 벌써 할머니와 병아리들 간에 한바탕 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을..........
‘윤 태리. 일어났으면 세수하고 머리 손질부터 해야지? 얼른 와.’
‘윤 세리. 옷 갈아입고 아침을 먹어야 바다에 나가지? 어서?’
손녀를 둘 씩이나 둔 할머니는 어디까지나 병아리들이 곱고 아리따운 숙녀로 자라주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기에 언제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침 일과를 강조하건만, 병아리들은 벌써 장화를 꺼내다 신고는 포부도 당당하게 저들 방식의 출정식을 거행하고 있다.
식전댓바람부터 붙잡으려는 할머니와 도망치는 병아리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기어코 할머니 손에 붙잡혀 텐트 속으로 사라지는 병아리들........
‘태리 세리. 아침을 뭘 먹을까? 할아버지가 준비해 줄게. 오늘 아침엔 뭐가 좋을까?’
‘간장 계란밥 주세요.’
‘또 간장 계란밥? 그건 우리 캠핑 때마다 맨날 먹는 거잖아. 오늘은 다른 거로 해줄게. 스프 끓이고 토스트 만들까? 아니면 빵을 버터 살짝 발라 구워서 딸기 잼 발라줄까?’
‘아니요? 간장 계란밥 먹고 싶어요.’
‘저도요. 할아버지. 간장 계란밥 주세요.’
이러면 할아버지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 캠핑 가족의 오늘 아침은 언제나처럼 또 그냥 간장 계란밥이다. 스프도 필요 없고 오뎅탕도 필요 없고..... 하지만 미역국만은 허락된다. 어른중에 누가 미역국을 좋아했지? 별도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침 식사는 어디 끼어들 자리도 없다. 관리실에 가서 전자 렌지에 햇반 두 개 데워와서, 그리들에다가 계란을 오믈렛처럼 볶듯이 익혀 햇반을 투하하고 섞으면서 약간의 소금을 뿌린 듯 아닌 듯하게 하고, 맛김을 수북하니 부셔서 섞어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옅은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끝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고만큼이 우리 병아리들이 아주 좋아하는 아침 식사 레시피다. 이젠 할아버지가 아주 기가 막히는 간장 계란밥 미슐랭(?)셰프가 되어 버렸다. 할아버진 파스타도 잘하고 카레도 잘하고 웬만한 주부보다 요리 잘하는데?
거기다가...... 우리 병아리들이 입만 짧은 것이 아니라 양도 아주 적다. 하여, 두 병아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이 고스란히 할머니 할아버지의 오늘 아침 일용할 양식이 되는 것이다.
헐!!! 거의 매번 이런 식이다.
이번 여행을 떠나올 때도 나름의 기대는 있었다.
해변에 텐트를 치고 나서........ 해가 지면 일단 삼겹살을 스모크 향을 입혀가면서 실컷 먹고, 배가 부르다 싶으면 소맥을 곁들여 조개구이를 안주로 삼아 불멍과 함께 즐겨보자. 금년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해변캠핑이니 바다회를 시켜서 제대로 심야 만찬까지 필수 코스로 누려 보리라고 다짐을 했었건만........ 이것도 저것도 다 싫고 먹을 생각이 없다는 녀석들을 앞에 놓고 파티는 무슨........ 비상용 소시지 하나 데쳐놓고, 테이블 아래 숨겨서 소맥을 제조하면서 이래저래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병아리들 놀게 두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먼저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이 바로 지난밤이었다.
왜? 우리는 병아리들과 캠핑만 나오면 다이어트에 몰입하게 되는 거지?
우리 캠핑은 언제나 운명적 강제성을 가진 극한의 살 빼기 교실인가?
에게게.......
겨우 이게 뭐야?
동죽 조개를 한 스므개쯤 캤을라나? 나머지는 아예 구경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 불행이 우리뿐은 아니었다. 세찬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체험 삶의 현장)에 나온 몇몇 여행객들의 바구니 역시 텅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 옛날이여!~~~~~~~~ 그 많던 조개는 다 누가 잡아갔단 말인가?
한겨울 시베리아 벌판 못지않은 바람 덕분에 이게 갯벌체험인지 남극탐험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추운 날씨 불문하고 우리 병아리들이 어찌나 즐겁게 갯벌과 노는지 정말로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병아리들을 바다와 강제로 떼어놓듯이 하며 텐트로 돌아왔다. 원없이 즐겁게 노는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임마. 너희들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 눈밖에 난단 말이야. 그럼 다음 여행이 크게 지장을 받게된다고..... 이런 날씨가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야. 그러니까 날씨가 좋아져서 해가 나오면 그때 다시 들어오자. 알았지?' 할아버지와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고 난 후에서 마지못해 해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병아리들......
상황은 그렇게 정리가 되는 듯 했지만....... 텐트에 도착하기 까지는 그때부터도 한참이나 시간이 더 걸린 다음이었다.
다 나오고 나서 느닷없이 조개가 들은 통에 물갈이를 해주어야 겠다는데...... 다시 한참을 되돌아가서 기어코 물갈이를 하고, 저만치서 열심히 땅파기를 하는 가족을 보고는 기어코 궁금해서 다가가 그분들 조과를 염탐해 보고....... '우린 이렇게 큰 것도 잡았는데'라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다 나와서 호미와 갈퀴 씻는다고...... 할아버지가 대신 씻어준대도 기어코...... 또 장화 닦아야 한다고 다시 물에 들어가고........
시방, 야들이 누구를 닮은거여?
애비여? 아님 에미여? 이런 승질머리가 절대 할아버지는 아닐테고...... 그럼 할머니 아니여?
웬만해선 우리 태리. 세리 감당하기가 벅찰거여. 암!!! 뉘집 딸래미들인데......
텐트로 돌아와 따뜻하게 몸을 덥히게 우선 난로부터 피워놓고 녀석들에겐 코코아를, 할머니 할아버지는 커피를 타서 마시는데도...... 영 가만히 앉아서 마실 생각들을 안한다. 연실 텐트 밖에 놓아둔 조개가 담긴 통을 살피러 드나드느라 여념들이 없으시다. 그런 손녀들의 재롱가득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니 불쑥.......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나 저나 잡아온 몇 마리 안되는 저 조개들을 장차 어떻게 한다?'
잡혀 온 조개들의 운명과 어찌되었건 지금 조개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우리 병아리들의 판단과 선택은 어떻게 될까?
어디식당에 가서 바지락 칼국수를 사먹거나 조개구이를 먹는 것은 뭐 그저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방금 제 작은 고사리 손으로 호미질을 해서 겨우 모래를 파서 끄집어낸 조개들을 다짜고짜 장작불 화롯대에 올려서 뜨거워 몸부림 치듯이 입을 떡 떡 벌리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앞으로두고두고 할아버지를 식인종 야만인처럼 바라 볼 것이 너무도 뻔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저녁에 초 일류 셰프를 자부하는 할아버지 솜씨로 조개가 들어간 파스타를 만들면 눈치를 채지 못하고 맛있게 먹어줄까? 그러다 나중에 '내가 잡은 조개 어디있어'라고 하면 어쩌지? 지금의 폼새를 보자니 당연히 집에 가지고 가서 기른다고 할 터이고...... 그렇게 가져가보았자 아들 며느리가 어떻게 나올지 역시 파노라마처럼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데......... 그럼 도대체 어떻하지?
어떻하긴 뭘 어떻게 해?
솔로몬의 지혜를 빌려 찾아낸 답은 오로지 하나뿐인걸. 방생. 살려주어야지.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 바다의 것은 다시 바다에게로.......
다음날 모든 철수 준비를 하고 난 후에 태리. 세리.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넷이서 조개가 담긴 통을 앞에 놓고 한참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토론을 이어나갔다. 끝까지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았음에도(야들이 누구 손녀인가 하면 바로 나의 손녀여.귀엽고 사랑스럽고 총명한 나의..... 아니 우리의 손녀들이여!)......... '그럼, 다시 바다에 놓아주고 갈래요'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할아버지가 바다에 놓아주고 올께.' 했음에도 동시에 둘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저희가 놓아주고 싶어요' 하니 어쩌겠는가? 다시 일가족 모두가 일제히 바다로 향한다.
'여기쯤이면 모래 속으로 파고들어가 살 수 있을거야.'라고 백사장 중간쯤에 도착해 몰려오는 파도를 가리키며 말을 해주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동시다발로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젓는다. '왜?'
'바닷물 속에 놓아주어야 잘 살 수 있을거예요.' 하면서 이번에도 동시다발로 파도치는 바다 깊숙한 곳을 가리킨다. 허니 어쩌겠는가?
제 녀석들이야 크록스 샌들 차림이니 바닷물이 춥도록 차갑다는 것만 극복하면 되겠지만 서도....... 헐!!!! 할머니 할아버니는 기어코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바짓 가랑이 걷어 올리고........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하이고야. 밀려와 부딪치는 파도에 이미 걷어올린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들었는데...... 야가 야가...... 짝은애가....... 고사리 손으로 기어코 조개를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내서 살려주겠단다. 거기다 파도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작별인사까지 하면서 말이다.
'바다로 돌아가 씩씩하게 잘 살아야만 해. 다 크면 다시 만나자?'
세리야 뭐라고? 이게 시방 뭔 말이여? 다시 만나자니? 그럼 나중에 기어코 여기에 다시 오겠다는 선언인 것이고, 다시 만나려면 또 조개잡이를 해야만 할 것이고...... 그 다음에 다시 캐내서 재회를 하고나면......... 그 다음엔 뭐를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지? 이거 난감하네? 시방 다시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여.
이렇게 복잡할거면 아예 다음번엔 진짜 갯뻘로 꼬막이나 잡으러 갈까? 다신 조개잡는다는 소리 안 나오게.
그나저나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점심 때가 되었나 보다.
여태 갯벌체험을 했으니 쉬 배가 고프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뭘 제대로 먹은것이 없지 않은가? 병아리들이 먹다가 남긴 것들로 겨우 끼니랍시고 때우면서 연명을 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삼겹살 파티에, 조개 구이에, 바다회에, 닭강정은 무슨.......... 우리 병아리들이 생각이 없으셔서 안 드시겠다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만 신나게 마구 시켜서 소맥하고 파티를 벌여? 그렇게 되면 어찌되었든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좋겠지만 서두....... 가자마자 아들 며느리한테 민원청구 들어올게 뻔한데...... 우리는 그냥....... 우리 병아리들이 무엇이든 먹고 싶어지실 때까지 그냥 인내하면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할아버지 밥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어도 돼요?'
'아이스크림? 되지. 되고말고. 밥만 맛있게 많이 먹으면 곧바로 아이스크림 먹는거지.' 하면서도 속으로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말고 햄버거나 돈가스는 안되겠니를 목청껏 외쳐본다.
'그럼 밥 많이 먹으면 뽑기도 해주실거예요?'
'뽑기? 물론이지. 하루 한 번은 뽑기 하기로 약속했잖아? 오늘은 점심 먹고 뽑기 하지뭐.' 하면서도 속으론 생선구이집 다녀와서 뽑으면 안되겠니 라고 속으로 하소연을 해 본다. '이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또 다이어트 하게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거 고난의 행군이 계속 반복이구만.
'그럼 오늘 점심은 어떤것으로 맛있게 먹어볼까? 태리야, 파스타 어때? 세리는 돈까스 어때?차라리 불고기 먹으러 갈까?'
이렇게라도 넘어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고기 2인분에다가 오징어 볶음이나 돼지 두루치기 정도면 좋을것 같은데 말이다........ㅎㅎㅎ.
'할아버지. 저는 자장면 먹고 싶어요.'
'언니야, 나도 자장면.'
헐!!!
개뿔!!!!!
하얀 쌀밥에 고기는 무슨....... 오고가면서 어디 김밥집이라도 열심히 찾아봐야만 하게 생겼다.
마검포 해수욕장까지 빗속을 다섯시간 넘게 뚫고 와서 자장면이라니........ 얘들아. 그럼 할머니 할아버지는 짬뽕 곱배기 시켜도 되겠니? 탕수육도 하나 시킬까?
마검포의 캠핑장을 벗어나 국도를 한참이나 달려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만리포 해수욕장이다. 이번 여행에서 만리포는 애초부터 스케줄에서 빠져있던 휴양지였다. 그랬음에도 어쨌거나 지금 우리는 만리포 해변에 도착하고 있었다.
만리포에서 들러야 할 장소를 확인하고는 인근에 있는 (만리포 전망대)에 먼저 올랐다.
세상사 모든것이 그저 신기하고 그 모든것에 마냥 끊임없이 강한 호기심을 보이는 우리 손녀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녀석들의 목마름을 어떻게든 최대한 해결해주고 싶고, 엄마 아빠의 취향이나 성향과 달라 혹시나 녀석들이 접해보지 못할 수도 있는 세상의 나머지 모든것들을 내가 아직은 온전한 상태에서 손을 이끌어 보여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순간 내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이자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부 눈치를 챈 낌새지만 말이다. 하기사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을 할머니가 있어 마음 놓이고 든든한것도 사실이지만.......
만리포는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표적인 휴양지였다. 대중가요 가사에도 등장했을 만큼 가히 만리포 해수욕장의 인기는 엄청났었다.
기약적인 경제발전 덕분에 생활수준이 나아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저와 관광여행이 붐을 이루면서 서해안 전체가 관광대중화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긴 대한민국 어디인들 개발의 붐을 피할 수 있었으랴만.
그러나 해안가의 휴양지와 레저산업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로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불어 닥쳤던 것이다. 기장연속이었던 남북한의 대립과 마찰 속에서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해안가를 삥 둘러 철통처럼 지켜왔는데, 급격한 경제 수준의 차이로 안보상황이 나아지자 전국각지의 해안가 군사시설지역이 해제에 해제를 거듭하며 자유 수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도시의 그린벨트 지역은 풀기가 어렵지만, 해안선을 따라 최소한의 군사지역을 제외한 모든 해안선이 제재에서 풀리면서 새로운 개발붐이 일어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군사지역으로 접근조차 불가능해서 소문으로만 듣던 해안절경이 아주 빼어난 지역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쏠리기 시작하더니 마구잡이식 난개발까지 뒤따르기 시작했다. 해안가 관광 레저산업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들이다.
선유도까지 배가 아닌 자가용을 가지고 들어가는 상상을 누가 해보았겠는가? 신시도를 비롯한 무수한 섬들에 레저단지가 들어서고 위락시설이 길게 줄을 서서 늘어설 줄을 염라대왕이신들 아셨을까? 거저 준대도 소용이 없다던 섬자락의 땅떼기가 대도시 중심가의 땅값을 추월할 줄 누가 있어서 알았겠는가?
대천 해수욕장, 만리포 해수욕장, 몽산포 해수욕장이 메인이라면 꽃지 해수욕장이나 춘장대 혹은 천리포 해수욕장 등을 내 추억 속에서는 다음차례의 후보군에 넣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엔 메인도 후보군도 없다. 보고 즐길만한 시설이 알차게 들어서서 무조건 찾아오는 관광객이 차고 넘치는 데가 메인인 것이다.
어쩌다보니 지금 우리가 차를 한참이나 달려서 만리포에 당도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늘 일정대로였다면 여기에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쳐야만 했었다.
그럼 예정에도 없던 만리포 해수욕장을 왜 찾아왔느냐?
그것은, 그 속내막이 무엇인가 하면....... 오로지, 순전히, 전부가..... 자장면 때문이다. 만리포까지 찾아 온 이유는 딱 하나........ 손녀들이 원하는 자장면을 먹기 위해서다.
그럼 마검포에는 자장면이 없냐? 아니다.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서산이나 홍성에도 이름난 자장면집이 즐비하고, 까짓 군산이 오로지 짬뽕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자장면도 기가 막히다 는데 까짓 맘만 먹으면 못갈 것도 없었다. 마검포에서 만리포 거리나 군산 서산 홍성 거리나 별반 차이랄 것 까지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내비게이션 신세를 져 가면서 만리포에 왔다.
왜냐고? 만리포 자장면을 먹으려고 말이다.
본래의 오늘 스케줄에는 여기 만리포 외곽 도로를 그대로 달려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늘 오후에 우리 가족의 여행 목적지는 바로 (천리포 수목원) 이었다. 천리포 수목원의 가을 축제가 바로 오늘 시작하여 11월 3일까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북페어)가 열려 책을 낸 작가분이 직접 강연과 좌담회를 개최하고,(책 바슴, 곳간 대공개)가 열려 평소 가까이서 접하지 못했던 소중한 책들이 선보이고 방문객에게 현장에서 판매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 더하여 가장 기대되는 평상시에 대중에게 쉽게 공개되지 못했던 수목원의 (비밀의 정원)이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다.
내가 우리 병아리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친해지게끔 꼭 만들어주고 싶은 그런 공간이자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더하여 저녁에는 야외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이 준비되어 있다. 현대화된 도시의 생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 부닥치게 되는 인간과 동물들의 대립과 마찰과 상처와 아픔들을 어떻게 하면 조화롭고 슬기롭게 더불어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가득 서려있는 작품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
우리 병아리들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무언가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천리포로 향해야 하는 중에 잠시 만리포에 들리게 된 경우라고 해야겠다.
자.장.면.때.문.에.말.이다.도.대.체.어.떤.자.장.면.이.기.에.그.러.느.냔.말.이.다.
이제 만리포 자장면을 먹으러 내려가 볼까?
헐!!!
여전히 웨이팅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도대체 어떤 자장면이기에 저러는 거지?
근데 문제는...... 문제는........ 엄청나게 춥다. 바닷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니 먹기는 해야겠는데......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내 차는 길건너 저만치 윗동네에 있기에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기도 여의치 않고......
'할아버지 괜찮아요. 많이 춥지는 않아요. 우리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릴래요.'
흐메. 우리 큰병아리는 번번히 할아보지 속을 어찌나 잘 들여다 보는지.......... 아주 옛날에 신구 선생님이 모 광고에 나오셔서 '니들이 알어?'라는 아주 유명한 멘트를 날리셨는데......... 언제부턴가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니들이 핏줄이 땡긴다는 말 뜻을 알어? 난 알어. 맨날 경험하니까. 내가 누구냐구? 내가 이래봬도 태리, 윤태리 할아버지여.'
-- 자장면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일하느라 조금 바쁜시기이네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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