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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등 떠밀린 '샐프 효도 캠핑' (일단 가야지 뭐. 어쩌겠어?)

by 피안재 2024. 9. 1.

 

 

 

 

‘엄마 아빠 어디 안가?’

아침나절에 뜬금없이 불쑥 아들에게로 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단다.

‘갑자기 왜?’

‘그냥...... 여름이 아직 남았는데 어디 안 가시나하고?’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태리 방학도 아직 남았고 해서 그냥....... 엄마. 전화 온다. 좀 있다 다시 할께.’

 

 

딱, 거기까지였단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거기까지 그런 대화가 전부였단다.

그런데 아들이라면 무조건 꺼뻑 죽는 엄마가 그때부터 오만가지 생각을 해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어디 안 가라니 가긴 어딜 가?’ ‘태리 방학이 무슨 상관이지?’ 등등, 이 세상에서 엄마가 아들에게 가질 수 있는 수 천 수만 가지의 우려를 한 순간에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쿨하고 손이 큰 엄마지만......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심각해지고 끝장을 어떻게든 봐야만 한다.

다시 전화한다던 아들의 전화는 오지 않고....... 수 천 수만 갈래의 짐작과 추리는 끝날 줄을 모르는데....... 혼자 생각에 얼핏 집히는 게 있었더란다.

‘아니...... 아들이 어떻게 그 일을 알았지?’

순간 이 용맹무쌍한 엄마는 전후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아들에게 자폭의 카카오톡 문자를 쏟아 보내기 시작했다.

‘응! 아들이 알고 있었구나. 엄마랑 아빠랑 이번 여름에 너무 바빠서 아직 제대로 휴식 한 번 못 취했었단다. 그래서 아빠가 말을 꺼내기에 짬을 내서 단 둘이 캠핑 한 번 가지고 계획을 세웠단다. 19일에 출발해서 2박 삼일 캠핑 다녀 올 생각이었는데 아들이 알았나보네? 태리가 방학이 길어서 무료하대? 그럼 할아버지에게 말하면 되지. 알았어. 내가 아빠랑 다시 상의해서 병아리들 데려가면 어떻겠냐고 이야기 해볼게. 다른 별일은 없는 거지?’라고 뜬금없는 해명이 아닌 자백 폭탄을 보내버리고 말았단 이야기였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둘만의 캠핑은 그냥 막연한 계획으로, 오늘 아침에도 이 캠핑을 그냥 진행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 미지의 상태였던 것이다. 대충 날자는 잡아 예약을 했지만, 나도 아내도 현재 진행 중인 현장 상황이 몹시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현장 상황이 예약해둔 일정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아 취소를 할까하고 아침까지 상의를 했던 상태였던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 한창 작업을 하던 중에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분히 따지는 투였다.

‘당신 우리 캠핑에 대해서 아들과 사전에 이야기 했어? 병아리들 데려가고 싶으니까 살짝 아들과 짜웅을 한 거야? 할머니를 협박하라고?’

헐!!!!

이게 시방 무슨 뚱딴지같은 억지여? 내가 언제 그놈하고 어떤 짜웅을 해? 하이고야. 그놈이 엄마 몰래 아빠하고 짜웅을 할 놈이여? 턱도 없지. 아무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시방...... 이게 무슨 상황이래? 무슨 일이 생긴 거여? 느닷없이 아들 이야기가 거기서 왜 튀어나와?

헐!!!! 못 참겠다. 아닌 척 말은 늘 그렇게 하지만...... 나도 아들 일이라면 절대 못 참지.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얼씨구, 오늘은 직빵으로 답장이 온다.

‘아들 무슨 일 있니?’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엄마가 아들과 통화하다가 끊겼다고, 태리 방학이 어떠니 하던데? 겡구랑 너희들 무슨 스케줄 생겼니?’

‘아니야 아빠. 아무 일도 없고, 겡구(아참, 며느리 애칭)랑 특별한 계획도 전혀 없는데? 그냥 무더위가 너무 오랫동안 심해서 엄마 아빠도 어디 다녀오면서 쉬시면서 일하시라고 안부전화 한 건데?’

‘그랬니? 정말 별일 없는 거지? 네가 바로 전화 안하니까 엄마가 이래저래 별 생각을 다했는가봐.’

‘갑자기 회의 소집이 있었거든. 지금 회의 끝나요. 밖에 나가서 엄마한테 바로 전화할게. 엄마가 아빠랑 캠핑 갈 거라고 하시던데 어디든 좀 편하게 쉬었다 오세요. 텐트 말고 카라반이나 글램핑하면 더 편하잖아?’

‘그건 아빠 취향에 따른 거고...... 엄마한테 바로 전화 해줘라.’

하이고야!!!!!

아무 일도 없다는데........ 통화 하려다 회의 때문에 전화를 끊었다는데....... 그새를 못 참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결국...... 모처럼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고 그렇게 강조해 놓고선, 아들에게 술술 ‘엄마 아빠만 캠핑을 갈려고 생각했는데 자꾸 돌이켜 보니 병아리들이 눈에 밟히는 상황이어서 아무래도 너희에게 이야기나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술술 자백을 해 버리면 어떻게 하니? 이런 마누라를 믿고 40년을 살았으니....... 헐!!!

저녁에 퇴근하면서 집에 가서 한 번 따져보아야겠다고 벼르며 귀가를 서둘렀는데, 거실에 거나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다. 미안한 일을 저질러서 사과하는 뜻에서 차려놓았단다.

우리 집이나 아들네 집이나 온통 여우세상인 것이 더욱 자명해 진다.

내가 아들과 엄마 몰래 짜웅이라니....... 나 죽기 전까지 그런 짜웅이 딱 한번만 이라도 가능하다면 내가 더 소원이 없겠다. 하이고야!!! 아들이 엄마를 재끼고 아빠 편을 든다고?

‘뭐!!!! 아들도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점점 아빠를 감싸고도는 느낌이 생긴 것도 사실인 것 같던데 뭐.’

‘다 개뿔이여. 그래봤자 엄마에 비하면 까마득히 한참 뒤여. 핏줄이니까 좀 그래 보이는 거지...... 개뿔. 짜웅은 무슨 얼어 죽을 짜웅........’

‘어찌되었건, 이제 따 뽀록이 났는데........ 19일에 그냥 갈 거야?’

‘이 마누라가? 짜웅은 자기가 아들이랑 다 해놓고는...... 엉뚱하게 내게 뒤집어 씌워? 19일로 밀어붙이면...... 이제 와서 우리 둘이만 갈 거여? 안가면 모를까 이제 와서 둘이는 못 간다고 나설 거 아니야? 모처럼 우리 둘만의 여행이니 어떠니 해놓고....... 이제 와서 대놓고 공개적으로 병아리들 데리고 가야한다고 하는 것 아니야? 당신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을...... 당신 바람도 속으론 그럴 거면서...... 아녀? 태리할아버지?’

'이럴때만 태리할아버지?'

술을 마시다 말고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예약한 캠핑장 사이트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예약을 취소해 버렸다. 이건 따지고 생각해서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벌써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아닌 것처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취소했어. 아들에게 통보해 줘. 방학 끝나기 전에 마지막 주에 무조건 캠핑장 예약 새로 할 터이니 수.목.금.토.일 해서 4박5일쯤 우리가 병아리들 데리고 있겠다고 통보해. 내 일정도 알아서 거기에 어떻게든 맞출 터이니 당신도 알아서 조정하고. 내가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새로운 예약과 스케줄 맞추어 놓을께. 여기서 이야기 끝!’

아무러면 어때?

우리 병아리들이 4박5일 동안 우리 품안으로 들어온다는데...... 지난 것은 지난 것이고, 오해가 있었던 것은 오해가 있었던 것이고.....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병아리들과 함께 추억여행을 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때쯤이면 여름방학 여행 성수기도 지난 시기이고, 국립공원 자연 휴양림과 캠핑장들의 여름 성수기 추첨제 시즌도 막 끝나는 시점이 아닌가? 좀 때가 늦은 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복불복이 아니겠는가?

밤을 새워가면서 죽어라 온갖 싸이트 검색을 해 본다. 이럴 때 당연히 최고의 목표는 강릉지방 연곡 솔향기 캠핑장이다. 동해안에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장소로 이만한 곳이 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었고, 가까이는 지난겨울에 눈보라 속에서 겨울캠핑을 감행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멀리는 북쪽으로 설악산과 속초와 고성 지역을 여행하는 교두보로서 손색이 없으며, 남쪽으로 정동진과 무릉계곡과 울진 삼척과 영덕지역까지를 커버할 수 있는 교두보이기도 하다. 내륙으로 대관령의 목장이나 육백마지기에서 오대산 월정사까지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곳이 바로 주문진 연곡에 위치한 솔향기 캠핑장이다.

더더군다나 지금....... 내가 굳이 동해안을 고집하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이번 방학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 큰병아리 태리에게 써핑(Surfing)을 체험시켜 주고 싶어서 오래전부터 녀석이 어서 성장하기만을 기다렸던 이유가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도서관을 가까이 하면서 책을 사랑하게 되는 방법, 힘이 좀 들어도 땀을 흘리며 산봉우리에 올라 드넓은 대자연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지게 되는 성취감을 알게 해 주는 것, 써핑을 경험하게 해서 혹시나 인생의 취미가 되지 않을까 확인하는 것, 노지 캠핑을 넘어서서 비박을 경험시켜 주고 싶고, 혹시나 기회가 된다면 할아버지도 못 해본 바다낚시를 함께 해보고 싶은 것, 세계여행의 시작은 할아버지가 가이드가 되는 이탈리아 여행으로 꼭 시작하게 해주는 것, 함께 밤새워 야간 기차를 타보거나 슬리핑 버스를 타보는 것,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고, 사진 찍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고,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면서 밤새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 등등이 내가 남은 인생에서 큰손녀 태리와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이다.

하여, 태리에서 동해안에서 써핑을 체험하게 해주려고 부단히 애를 써 왔지만 시기와 시간이 잘 맞지가 않아서 이제껏 미루어 왔다.

무조건 동해안에 거점을 잡아야 한다. 최근에 들어 써핑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양양까지 굳이 올라가지 않더라고, 솔향기 캠핑장이 있는 연곡의 사천진 해수욕장에 서너 개의 서핑클럽이 운영하는 것을 직접 확인도 이미 해두었다. 체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문의를 끝냈다. 이제 여름 시즌에 솔향기 캠핑장을 얻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다.

예약이 성사되면 태리를 데리고 캠핑장에 들어가는 날 좀 일직 서둘러 사천진 써프 클럽에 들러서 체험 프로그램에 먼저 참여 시키리라. 이론 강의가 있고 지상 훈련이 있고 바다에서 실제 체험학습이 이어지고 나서 자유 연습시간이 주어지는 순이다. 강사님에게 안전에 대해 잘 부탁을 드린 후 교육을 맡기고 나서 내가 혼자 캠핑장 입장을 하고 싸이트를 구축하면 될 것이다. 준비를 모두 마쳐놓은 후에 다시 데리러 가서 보드에 올라서려 애쓰는 모습을 실컷 지켜보다가 마치면 캠핑장으로 데려가 멋진 저녁시간을 만들어 주리라. 다음날도 보드를 타고 싶다면 다시 클럽으로 가서 교욱 프로그램을 다시 하던, 아니면 보드만 빌려서 실컷 놀던 해주고 싶고, 철수하는 날 까지도 보드를 더 타고 싶다면 함께 가서 보드를 빌려 바다에 들어가게 해준 후에 캠핑장에 돌아와 싸이트 철수를 완료한 후에 다시 캠프에 가서 실컷 물놀이를 즐기게 해 준 후에 함께 집으로 귀가하면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정도면 서핑 체험은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좋은 취미가 되어 평생 동안 즐기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이번 체험 이후에 태리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할 차후 문제인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램과 임무는 거기까지일 뿐이다. 손녀가 자유롭게 체험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지난 캠핑도 물난리로 애들 고생을 시켰는데, 이번 여행은 좀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텐트가 아닌 제대로 된 방에서 재웠으면 좋겠어.’ 라는 할머니 이야기에 속이 뜨끔해 진다.

목표를 솔향기 캠핑장 카라반이나 글램핑장에 두고 찾아보는데 어디에도 그 시기에 예약 가능한 숙소가 보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완전 매진 상태였다. 결국 강릉 인근의 리조트와 호텔과 방갈로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데....... 불쑥 솔향기 캠핑장의 글램핑 장소가 수요일 목요일 가능으로 뜬다. 누군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예약 취소를 한 모양이다. 더 따져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수요일 목요일 글램핑장을 예약해 버렸다. 혹 누군가가 금요일 하루만 더 해약하는 사태가 벌어져 우리가 예약을 하게 된다면, 솔향기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태리에게 써핑을 체험하게 해주고 나서 토요일에 충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일요일에 저들 집으로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정히 카라반이나 글램핑장 취소가 없다면 하루쯤은 그냥 일반 캠핑장을 추가로 예약해서 텐트에서 지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하여 일단 이틀간의 글램핑은 예약이 되었고...... 아직 며칠간의 여유가 있으니 차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현재 한달 반 이상 진행 중인 식품회사 증축 및 개축작업의 일정을 부득불 조정해야만 했다. 지난 달 열흘 이상 지속된 우중에는 위험을 무릎 쓰고 외부작업에 매달려야 했고, 그후로 지속된 사상초유의 폭염에는 창문도 없는 공장 시설에서 내부 공사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야말로 가혹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제 서서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공기 단축의 재촉을 받는 시점에서....... 헐....... 이유 불문하고 휴식의 사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아무리 밥벌이가 중요해도 내겐 우리 병아리들과의 시간과는 바꿀 수가 없다. 절대로...... 다행히 다른 파트의 공정과 맞물리는 텀을 이유로 우리 팀이 며칠 자리를 비워주고 휴식을 취하기로 스케줄 변경을 했다. 그리고 세리 할망구의 스케줄도 대대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다.

이젠 모든 준비 끝. 병아리들과 솔향기 캠핑장으로 향 할 준비가 마쳤다.

그런데........ 오 마이 갓!!!!!

헐!!!

이거슨 아니지라!!!!!!

‘아빠. 다음 주 여행에 문제가 좀 생겼어요.’

‘무슨 일 있니?’

‘아니고요. 태리가 모레 개학한대요. 제가 방학기간을 착각했나 봐요. 지금 겡구한테 확인하고 알았어요. 그냥 엄마 아빠만 다녀오셨음 좋겠어요.’

‘그랬구나.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뭐. 병아리들 잘 이해시켜 주렴. 다음을 기약하자고. 알았다. 아들. 괜찮아.’ 라고 대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아들. 네가 아빠 맞아? 어떻게 그런 일을 착각할 수가 있어?’라고 호통 내지는 힐책을 하고 싶었다.

아내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리려고 하니 이미 소상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상의도 엄마가 항상 먼저라니까?

‘다음 주가 개학일이고, 겡구는 이번 주말인 오늘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나봐. 아들이 겡구랑 구체적 상의 없이 우리랑 이야기 했었나봐. 놀라게 해주려던 것이라는데..... 하여간 우리 집 남자들이 좀 문제이긴 해. 당신도 이해해라. 모르긴 몰라도 똑 부러지는 우리 겡구에게 아들도 이미 호되게 혼나고 있을 걸?’

아이고! 우리 아들이 며느리에게 제대로 혼나고 있을 상황을 떠올리고 나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딴엔 모두 기쁘게 해주려고 나름 수작을 좀 부려 본 것인데, 올바른 사나이인 우리 아들은 그런 수작에 좀 서툴잖아? 아빠에게 그런 잔머리라도 좀 제대로 배워둘걸........’하면서 저절로 수그러든다. ‘이럴때 왜 잔머리는 유전이 안 되었을까?’

그나저나...... 그럼 다음 주 예약을 어쩐다?

이미 스케줄을 변경한 현장을 어떻게 하지?

에이 몰러.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병아리들도 없는데...... 차차 생각해 보자. 아무렴 어때?

 

시간이 흐르더니 화요일 저녁에 퇴근을 했고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병아리들과 계획했던 여행 당일이 도래한 것이다.

주말까지 나는 휴식기간으로 이미 사전 약속이 되었고 세리할머니도 일정 조정으로 우리 모두 백수의 처지가 되기는 했다.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여행당일 아침을 맞이했다.

모닝커피를 연거푸 두 잔씩 마신 후에 세탁기를 돌려놓고 거실에 길게 누워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눌러본다.

‘캠핑장 예약비용이 아깝기는 하지만...... 병아리들 없이 가면 무슨 재미야? 다 잊어버리고..... 좀 쉬었다가 나가서 맛있는 거 잔뜩 사다가 요리해 먹으면서 며칠 집에서 그냥 푹 쉬자. 산책이나 하고 영화도 한 편 보고....... 그걸 이번 여름휴가라 생각하지 뭐.’

‘헐! 이번만은 병아리들 떼어놓고 우리 단둘이 모처럼 오붓한 캠핑을 해보자 더니....... 이제 와서 병아리들 없으면 재미없으니 그냥 모두 잊어버리자고? 거랑말코 녀석. 이게 다 아들 녀석이 조치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려고..........’

‘아들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내가 당부했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우리 아들이 어디 번번이 이런 사고를 저지르는 애야? 언제 이런 적 있어? 개도 지 새끼들 이라면 끔찍이 아끼는 녀석인데 그만 착오가 있었던 거지. 아들에게 이런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잖아. 자꾸 아들 험담 할 꺼여?’

‘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그넘은 내 아들이기도 해. 아빠가 아들 험담도 못하냐? 그놈의 절반은 엄연히 내꺼 라고.’

괜히 이러다가 엉뚱한 일로 아침부터 부부싸움 하겠다.

시간은 넘쳐나고........ 계획은 아무것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예약은 아직 살아있고........ 만약 여행을 떠났다면 서둘러 새벽에라도 출발을 했으련만........ 한나절이 되어가도록 거실에 드러누워 TV 채널만 뒤적이는 처량한 신세라니.........

캠핑장 예약은 아직 살아있다. 아들 연락을 받고 취소하려니 페널티 적용으로 50% 비용이 공제되는 상황이었고, 지금은 취소를 하나마나 되돌려 받을 금액이 빵 원일뿐이다.

‘뭐 하고 싶은 것 있어?’

‘없어. 쉬다가 마트에나 다녀와야지. 장보기 해야 할 것 아니야?’

‘송계라도 드라이브 다녀올까? 외식하고.’

‘그러려면 차라리 천천히 강릉을 가겠다. 그냥 국도 타고 터덜터덜 가다가 하나로 마트 나타나면 거기서 간단히 장을 보고........ 병아리들도 없겠다. 그냥 드라이브라 여기면서 가다보면 강릉 도착하지 않겠어?’

‘많이 심심하구나. 모처럼 일부러 만들어 놓은 휴식 시간인데...... 이렇게 집에서 벌렁 누워만 있으니 더 지루하고 시간도 안지나가고........’

‘글램핑 여행이니까 창고에서 힘들여 장비를 새로 꺼내지 않아도 되잖아? 세면도구만 챙기라 하지 않았어? 이대로 그냥 맨몸으로 출발하면 되겠네? 지갑만 챙기고.’

‘그렇기는 하지. 난 카메라와 수영복만 챙기면 되지. 바다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그럼 우리 지금부터라도 슬슬 드라이브나 할 겸해서 출발해 볼까?’

‘콜!!!! 국도 타고 가다가 점심도 길거리에서 아무거나 먹으면 되겠지 뭐. 곤드레밥 아니면 막국수겠지 뭐. 느릿느릿 차근차근 준비 합시다.’

< 산상의 화원 >(함백산 천상의 정원)

지난주에 캠핑을 떠났더라면...... 이번엔 나르시스 돔ex 에다가 티케 타프를 더해서 창고에 넣어둔 캠핑 살림을 바라바리 싸들고 산골짜기를 향해 출발했겠지만...... 원치 않게 아들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 떠나는 캠핑이라지만....... 이번엔 글램핑이여, 글램핑......... 세면 도구에 카메라랑 읽고 싶었던 책이랑 핸디폰 충전기랑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가 챙겨가는 전부여 전부. 웬만하면 끼니는 외식으로 해결하던가...... 아니면 우리가 집 떠나면 무조건 가장 챙기고 가장 감사해하는 보물단지 하나로 마트가 대한민국 곳곳에 수를 놓듯 배치되어 있는데 더 무엇을 걱정한단 말인가? 숙소만 확실하고 근처에 하나로 마트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모든 여행준비는 이미 다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이여!!!! 걱정 붙들어 매셔.

그동안 어른을 모시거나 누구를 초대하면 방갈로나 글램핑장을 얻어드리기는 했어도 우리가 글램핑을 직접 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도 준비가 이렇게 없다시피 대충 해도 되는 것이 글램핑이고, 날씨에 따라 텐트 상태를 체크해야하고 비나 눈을 맞은 뒤에는 여행에서 돌아와 캠핑 장비를 다시 말리고 점검하고 추슬러야 하는 고된 노역에서 말끔하게 해방시켜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지내는 동안에 한없이 쾌적하고 편리한 것에 익숙하게 된다면......... 어쩌면....... 이제 내 캠핑 살림을 하나 둘 당근마트에 내놓고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가 맨날 청춘인지 알아요. 이젠 차차 맞춰가는 거야. 글램핑이나 카라반으로 바꿔가야 한다니까?’ 라고 꾸준히 들어왔던 마눌님의 잔소리가 부쩍 늘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나는 아직 현역이라니까? 당신 때문에 못 나다니는 것이지. 비박 하고 싶다니까?’

‘하이고, 할아버지가 되어놓고도 여전히 아들 나이인줄 알아요. 곧 경로우대증 나올 노인네면서. 이제 현실 인정해서 허세는 내려놓으시고 제발 철 좀 드세요. 사고치지 말고.’

‘아니라니깐? 내가 태리 할아버지여. 아직 현역이라고........’

이랬던 저랬던 어쩌다보니 다소 엉거주춤한 상태로 여행을 출발을 하기는 했다. 복장마저도 대충....... 반바지에다 조리를 신고서 말이다. 마치 어디 마트를 가거나 중앙탑에 막국수 먹으러 가는 폼으로 말이다.

무조건 국도를 고집하면서(마눌님이 천천히 꾸불꾸불 시골길을 가는 지방도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제천을 지나고 영월에 들어서서 길거리 휴게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애초엔 막국수나 곤드레 밥을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눈에 딱 뜨인 부산 밀면에 꽂혀버렸다. 대박! 썩 훌륭한 밀면 맛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곤 다시 출발......... 사북을 지나 도계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접어들었는데 길가 안내 간판에 <두문동재>라고 적혀있다. 그럼 여기가 바로 두문동 고개라는 말인데......... 두문동 고갯길 이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함백산 초입이 있고, 그 언덕에는 <산상의 정원>이 있지 않았던가 하는 기억이 팍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한 때 야생화에 빠져서 곰배령 <천상의 화원>과 여기 두문동재 <산상의 정원)을 일부러 찾아오곤 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제법 시간이 흐른 먼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언제는 야생화를 보겠다고 그 먼데서 찾아와 놓고는, 지금은 지척에 두고서도 이렇게 무심하게 그냥 지나쳐 간다고? 이 계절에는 무슨 꽃이 피는데?

헐!!!!!

두문동 고갯길 정상에서 유턴을 급하게 해버렸다.

‘왜? 길을 잘못 들었어?’

‘아니? 여기가 두문동재라잖아. 함백산 산상의 정원 다녀갔던 기억이 나서 들려 보려고.’


'에게게. <산상의 정원>이 뭐 이래? 그 많던 야생화는 다 어디로 간거야?'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느 해 오월에 야생화를 보겠다고 부러 여기 두문동재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바로 그해에 엄청나게 큰 동해안 산불의 여파로 오월이면 해제되는 산불예방 임산금지 기간이 무기한 연장되는 바람에, 두문동재 입산 허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관리인의 도움으로 등산로 입구 안쪽까지 살짝 들어가서 막 피어나는 엘레지 꽃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었다. 귀하다는 흰색 엘레지를 찾아내 보여주시며 사진 찍으라던 관리자께 이제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쉬운 발걸음이 하도 기가 막혀(?) 기어코 초여름에 다시 여기 <산상의 정원>을 찾았었는데....... 하필 그날이 태풍이 대관령을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언덕 가득 온갖 야생화들이 만발해 있었건만....... 세찬 바람에다가 폭우가 어찌나 퍼부었는지 그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흠뻑 젖은 등산화에서 물을 털어내면서 돌아서야만 했었다. 폭우가 내렸으니 제대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그 역시나 아쉬움일 밖에.....

그래서 오늘, 아무 생각 없이 동해안으로 지방도 여행을 하던 중에 고개 정상에서 마주친 <두문동재>라는 안내판에 퍼뜩 정신이 들어서 부리나케 유턴까지 해가면서 겨우 다시 찾아 온 두문동재 <산상의 정원>이었는데...... 아뿔싸. 산자락이 온통 그저 평범한 풀밭이다.

올라오는 길가에 피어난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더 정원스럽다고 해야 할까?

우리 동네 마즈막재나 달천 강변도 지금 여기 풍경보다는 예쁘지 않을까? 우리동네에는 달맞이 꽃이 피기 시작했을테니 말이다. 다듬어진 오솔길이 전부인 풀밭을 지나노라면 정말로 ‘어쩌다 들꽃 하나...... 저쩌다 들꽃 둘’을 겨우겨우 마주칠 뿐이다.

‘이거 태백시가 너무한 거 아니야? 두문동재 산상의 정원은 6월 7월용입니다. 8월에는 별로 기대하지 마세요. 6월 7월이 지난 헛탕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고 안내 광고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긴....... 관람이 공짜였으니 공고 책임을 묻기도 좀 그렇고...... 하긴 인터넷 검색이나 블로그 검색도 안하고 찾아온 내 책임이지 뭐.

아무리 그렇다고 덮어주려고 해도......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이게 어디 꽃밭이냐고? 풀밭이야 풀밭. 소나 양에게도 먹이지도 못하는 잡초만도 못한 잡풀 밭이라고?

거기에다가 또 날씨마저 오락가락 하더니만 끝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안되려니.......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오르막길에서 멋있게 보이던 산자락의 거대한 풍차 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고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는데....... 쓰.으.버.얼. 어느새 비구름이 가득 몰려와 흑백 사진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풍차는 보이지도 않고......... 쓰.으.바.알.

우리나라 철도 역사에서 희귀하고 아련한 추억 같은 수많은 스토리가 가득한 도계역이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몇몇 아는 사람만 겨우 기억할 뿐인 옛 이야기를 추억하면서...... 뻥 뚫린 자동차 전용 터널과 새롭게 놓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니 반대방향으로 올라가고 있는 화물열차를 만났다. 그런데 이 신형 전기 전동열차는 기세가 등등하게 속도를 내는 폼이....... 지난날 연기 꾸역꾸역 내뿜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겨우겨우 숨 가쁘게 올라가던 영동선 도계역의 철도 역사를 배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긴, 그 옆에 반대편으로 차를 몰로 씽씽 달리고 있는 나도 있는데......

'너그들. 기차도 고갯길이 힘들면 올라가다 빠꾸해서 숨을 고르고 다시 치고 올라간다는 이야기 들어봤어? 기차도 빠꾸가 있다니까? 그게 영동선 도계역이여.'

아래로 좀 더 내달리다보면 하고사리역이 나타난다. 옴팡지게 고생만 잔득했던 <무건리 이끼계곡>이 있는 곳이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는지라, 어떨 결에 다시 한 번 이끼계곡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는 한데....... 마눌님 표정을 보니 ‘NAVER!!!’가 틀림이 없다. ‘뭐야? 그게 지금 마냥 편하게 쉬러 가는 거니? 그건 등산이잖아? 아니 극한체험이지? 차 돌려. 집에 갈래.’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하다. 오늘의 복장이나 신발 상태도..... 이끼 계곡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좀 더 내려오면 <환선굴> <대금굴> 이정표가 등장하는데...... 하도 웨이팅 줄이 길어서 예전에도 그냥 돌아섰었는데...... 거기다 하이고야, 동해시가 가까워질수록 사방팔방 온통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있던 길이 가로막히고, 없던 길이 생기고, 내비게이션도 자꾸 틀린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임시 표지판을 따라 이리저리 돌고 또 돌고 지나다보니 어느새 <환선굴>을 한참 지나고 동해시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암을 들러볼까? 무릉계곡 입구까지만 가볼까? 하다가 결국 내린 결론은 묵호 등대가 있는 바람의 언덕을 가보기로 했다.

얼마 전 TV에서 바람의 언덕 마을에 동해시에서 개설한 재능기부촌 영상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언덕 전망 좋은 곳에 만든 원룸 형태의 민박집을 1년에 10만원 남짓 요금에 임대를 해주는 내용이었다. 대신 입주자는 일주일에 일정 시간의 재능 기부를 동해시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조건이다. 여행자들에게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 등등 자신이 가진 다양한 재능을 사회봉사 형식으로 기부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득 나도 그곳에서 한 1년만 휴식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나 사진을 찍어주는 재능 기부를 하면서 1년 정도면 내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을 한 편 써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평생 2~3년만 전업 작가로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꿈’일 뿐이다. 내겐 머물러야 하는 곳과 해야 하는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그것이 나의 꿈 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우선엔 우리 병아리들이 있지 않은가.

시간도 제법 지나서 캠핑장 입실 시간도 가까워 오고...... 오면서 밀면을 먹기는 했지만 서서히 허기가 몰려오기도 하고........ 묵호 등대에 들려 잠시 쉬면서 뭐라도 먹은 후에 좀 둘러보고 캠핑장으로 갈 생각에 묵호 항구 어귀에서 등대 방향으로 언덕길을 올라간다.

 

 


<묵호 등대(바람의 언덕)>

'와! 상당히 예쁜데?'

'누군가 말하길 여기가 (한국의 에즈)래. 우리가 니스 여행에서 찾아갔던 산꼭대기 마을 에즈 말이야.'

'헐!!! 그건 아니지? 예쁘긴 하지만...... 에즈 만큼은 절대 아니다.'

'어허. 그건 진실의 영역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냥 애국심의 영역이여. 여기가 한국의 에즈라니까?'

‘그넘의 애국심 타령은 툭하면 튀어나와....... 바다가 아니잖아? 저게 지중해 바다랑 같아보여? 아녀. 때깔부터가 다르다니까?’

‘날이 흐려서 그렀지. 햇살만 제대로 비추면 지중해라니까?’

‘아니라니까? 사하라 사막의 바람이 지중해를 건너오면서 품는 그 향기가 여기엔 없잖아. 시로코가 없어. 사하라 냄새가 전혀 없잖아?’

‘헐!!! 이 할망구가 유럽 좀 다니더니 많이 늘었네? 마구 갖다 붙이는 것 봐?’

‘동해안 중에서 나름 예쁜다 하면 맞겠는데, 어디 에즈나 타오르미나나 몰타에 비교하니? 갖다 붙일 데다 갖다 붙여. 지중해가 욕해. 개뿔. 애국심은 무슨........’

헐!!!! 졌다!!!!

유럽에 단단히 쇠뇌당한 마누라를 당해 낼 재간이 더는 없다. 파사드며 시로코며 마르살라며...... 처음 유럽에 모시고 갈 때랑은 전혀 다르다. 그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벨이 한참 업 되어 버렸다. 태리 데리고 이탈리아 갈 준비를 따로 몰래 하고 있는 거 아냐?

'여기, 언덕 골목에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많이 있네. 한군데 골라서 들어가 잠시 쉬어가자. 바람이 거세지고 비는 오락가락하고 우산을 폈다 접어다 해야하고....... 커피 한 잔 어때?'

'일단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좀 더 저쪽으로 해서 다시 주차장에 올라가 보고 나서....... 커피는 시방 무슨....... 나도 좀 허기가 지는 것 같애. 캠핑장에 가기 전에 뭔가 먹기는 해야잖아? 가는 길이면 차라리 강릉 중앙 시장에 드르자. 거기서 주점부리 하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저녁에 먹을 거리도 좀 사면 되잖아. 그리고 나서 하나로 마트만 들리면 모두 해결되는거 아냐? 지난번에 갔던 연곡 하나로 마트 크고 좋던데. 거기만 가면 한꺼번에 모두 해결될 수 있을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돌아보고 차라리 중앙시장 들리자. 어때?'

칫!!! 어떻긴 뭐가 어때야? 벌써 명령은 다 내려놓고 이제와서 무슨...... 내 의견을 물어보는 척 하면서......... 옛 썰! 충성!!!!!

묵호등대가 엄청 핫 플레이스라는 소식은 늘 듣고 있었다.

여름 성수기가 막 끝났고 평일의 우중충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여행객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청춘남녀들이다.

젊음은 역시 좋은 것이다. 아무렴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아울러, 역시나.......

왜 이곳이 핫 풀레이스가 되었는지는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잘 정비된 예쁜 동네이고 젊은이들에게 잘 어울리도록 아기자기한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문득 <해파랑 길>이 떠오르는데, 모르긴 몰라도 여기가 더 사랑받는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래전에 나는 한 번 아주 잠간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많이 변했지 싶고, 아내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그동안 동해안 여행을 자주하면서 언덕 아래 묵호항이나 어시장은 이미 여러 번 다녔었다. 그러면서도 여기 언덕 위는 이상하리만치 올라볼 기회가 없다가, 아무런 계획 없이 지방도를 이용해 연곡 솔향기 캠핑장까지 해안 길을 따라 올라가던 중에 얼마 전의 방송이 생각이 나서 찾아올라 본 길이었는데, 와서 다시 보니 예쁘게 새롭게 변한 풍경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아마도 다음에 병아리들과 오게 되면 곧 다시 찾아오지 싶어진다. 왜냐면 근처의 하슬라 아트센터를 꼭 병아리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뒤로하고 다시 해안도로에 올라 북쪽으로 향한다.


대학 1학년 때였던 1979년이니까 벌써 한 45년 전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유수이고 인생이 참 무상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게 되고 말지 않았는가? 청춘이 잠간이라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아득히 먼 과거를 회상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해 가을이 지나서 격변의 12.12 사태가 일어났지만..... 갓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의 1학년 1학기는 그냥 미친 것 같은 노도의 광풍과도 같은 시기였던 것 같다.

같은 하숙집에서 만난 대학 선후배들 넷이서 강릉으로 늦겨울 바다여행을 떠났다. 아득하기만 하지만 그날의 풍경은 더도 덜도 말고 딱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흑백 풍경사진으로 풀어서 펼쳐놓은 것과 꼭 닮았었다.

저녁에 청량리에서 떠난 강릉행 비둘기호 열차가 12시 직전에 원주역에 도착해서는 정확히 12시 9분에 출발했다. 당시는 통금이 있던 시대였다. 대부분 서울 사람들이 친구들이라 통금에 익숙했지만, 통금이 없는 특별구역 충주에서 살아 온 나는 그 통금이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는 타지 하숙 생활이 무척이나 어색했었다. 친구 집에서 놀다보면...... 외갓집에서 외할머니 제사를 자정을 넘어서 지내다 보면 새벽 한 시고 두 시고 터덜터덜 집에까지 어떻게든 가면 그만인데, 이넘의 딴 동네에 와보니 11시 반만 되면 사방에 호로라기 소리며 작은 사이렌이 난리극성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이를 어기면 크게 죄인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방학 때 친구를 우리 집에 데려와 자정을 넘기며 싸돌아다니다보니 녀석들 표정이 한없이 신기해하고 안절부절 하던 기억도 새롭다. 녀석들은 통금이 없는 것을 신기해하고, 나는 통금 시작 소리를 신기해했으니 말이다.

원주 역 앞 길 건너편 지하에 커다란 음악다방이 있었다. 내가 처음 DJ를 배웠던 (무아 다방)이다. 강릉행 기차를 기다리며 다방이 문을 닫는 밤 열시까지 죽치고 앉아 버틴다. 문을 닫으면 일단 역으로 향한다. 무조건 역사 가까이에 있어야만 한다. 정확히 열한 시 반이 되면 통금을 알리는 예비 사이렌과 호각소리가 요한하고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뛰는 수준이 된다. 그리고는 이내 온 세상이 고요 속에 잠기고 만다. 자정이 되면 다시 호각소리가 나고 역전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쏟아져 나와 순찰을 돌기 시작한다. 치외법권 지역인 기차역을 향해 어슬렁거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꼼짝들 말라고 호통을 친다. 세상은 이제 순라꾼들의 천지로 변한 것이다. 이제 돌아다니다 걸리면 무조건 범죄예비자 내지는 범죄피의자로 전락하고 호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근데 이게 말이다. 멍청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정식 DJ가 되고나서, 마지막 타임을 끝내고 원주 터미널 근처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하게 되면.... 일부러 시간을 버티다가 자정에 통금이 시작되면 일부러 하천변이나 골목길을 통해 순라꾼들을 피해서 숨어 다니는 재미에 빠졌으니 말이다. 나중엔 길과 방법과 요령까지 생겨서(장발 단속 때 어깨 밑에까지 머리도 기르고) 의례히 그런 재미로 밤에 쏘다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통금에서 빠져나온 기차가 동쪽을 향해 달린다. 제천과 단양에서는 역시나 통금이 없는 천국이라 기차가 도착하고 나서 역으로 죽어라 뛰어 와 겨우 울라 타는 승객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영월이나 정선을 지날 때면 추운 역사에서 세 시간을 떨었느니 네 시간을 기다렸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내 고향 충청도가 자유해방지역이자 왜 살기 좋은 양반지역인지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밤 열차가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바닷가 울진 삼척을 지나치는 시간에 맞춰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한다. 동해에 일출을 바라보면서 기차는 묵호를 지나 강릉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정동진? 그때도 역은 있었고 기차는 잠시 멈추었다가 지나갔겠지만 현지인이 아니라면 아무도 정동진을 지나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그때엔 (정동진)이라는 관광명소가 생겨나기 전이었다.

겨울 아침 7시 좀 넘어서 기차는 강릉역에 도착했다.

당시 강릉의 최고 번화가는 역 건너편에 있는 동부시장이었다. 강릉행 고속보스도 동부고속과 중앙고속이었을 정도로 강릉의 대표 번화가는 동부시장 일대였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새벽에 문을 연 동부시장 국밥집에서 선지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경포대를 향했고....... 지금의 유명 고한광지 경포대는 그때는 없었다. 오로지 우뚝 솟은 건물이라곤 단 하나...... 경포대 관광호텔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백사장이 꽁꽁 얼어붙은 춥고 썰렁한 겨울바다........ 낭만은 방금 전에 벌써 얼어 죽어 버렸다. 하나도 추위 둘도 추위 마지막도 추위........ 전망 좋은 카페? 먹다가 죽을 카페 같은 거 어디에도 없다. 겨우 난로가 피워있는 버스 정류장 옆 빵집에 들어갔는데....... 춘천서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여자 둘을 만났다. 유독 밝히는 형이 과감하게 돌진을 했고....... 춘천 K대학 3년과 코리아은행 춘천지점에 근무하는 친구사이란다. 따지고 보니 나보다는 두 살씩이나 연상.... 그러니까 누나다. 찝쩍은 같은 하숙집 형이 했는데..... 여름에 춘천 초대받아 다녀 온 사람은 나 하나였으니........흐흐흐. 그리곤 더 이상 아무런 기억이 없다.

어찌나 추웠던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점심 때 서둘러 동부고속 버스를 타고 원주로 되돌아 왔던...... 아주 흔치않은 당일치기 기억이 서린 곳이 바로 여기 강릉이다.

당시 강릉엔 재래시장이 세 개가 있다고 했는데 동부 시장이 으뜸이라 했고, 바다와 그나마 가까워서 수산물 시장은 중앙 시장이 그 다음이고, 약간 외곽지로 서부시장이 있다고 들었었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런데 도시가 확장되고 재래시장이 쇠퇴되기 시작하면서 동부시장 자리는 그냥 도심 상업지역화 되어 버렸고, 느닷없이 동해안 관광사업 활성화와 맞물려 모든 영광과 번영을 지금의 중앙시장이 차지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남대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니 바로 1번 통로다. 중앙시장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로 곧바로 접근할 수 있는 늘 붐비는 장소다.

유명 관광지화 된 이후로 두 번째 중앙시장 방문이다.

오늘은 강릉 중앙시장이 우리에겐 스페인의 마요르 시장이고 보케리아 시장이다.

어디 맘껏 즐기고 누려보자.

늘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배짱뿐이었지만, 오늘은 현금도 좀 있어. 마눌님 맛있는거 사주고 싶었거든. 내 맘 알지?

우이씨!!! 호떡이 디지게 맛있었는데 그만....... 지나가던 사람에 부딪혀서 절반을 땅바닥에 떨쿠고 말았다.

남을 치고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제 갈길만 가려는 사내에게 울화가 치밀어 한바탕 따지려 드는 찰라에....... '태리 할아버지. 땅에 떨어트린 것부터 얼른 치워야지요?'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러면 안돼! 태리할아버지잖아'하는 표정의 마눌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빤히 쳐다본다.

'그렇지. 내가 태리할아버지지. 여기서 사고치면 안돼!'

넙쭉 쪼그리고 앉아서 뭉텅 짤려나간 널브러진 호떡을 줍고 있는 나......... 왜 태리할아버지 소리만 들리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일까?

'어??? 저거 쿠우쿠우(qooqpp) 아니야? 충주엔 없어졌는데 강릉엔 아직 있네?'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내 무척이나 낯익은 풍경의 <연곡 솔향기 캠핑장>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별장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드나들었던 곳이라고 언제부터인지 꽤나 친숙해진 느낌이다. 뭐 어때? 저렴한 비용 덕에 예약하기가 어렵다는 단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냥 이곳 솔숲 사이에 우리의 농막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피어나고 머무는 동안 맘껏 즐기면 그뿐일 것을......

캠핑장을 그냥 지나쳐 다리를 건너 좌회전으로 연곡을 향한다. 우리 맞춤형 시장터인 연곡 하나로 마트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항구 수산시장의 회를 제외하면 필요한 것은 모두 여기 하나로 마트에 다 있다. 이런 대형 하나로 마트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는 커다란 장점은 솔향기 캠핑장이 가진 장점이자 매력의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국내여행에서 가장 다행이자 행운이랄 수 있는 두 가지만 꼽으라 한다면...... 하나는 자연 휴양림이 곳곳에 잘 설치되어 있다는 점(추첨제로 전환된 이루로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지만), 다음으로는 전국 지방 곳곳에 어디든지 하나로 마트가 골고루 빼곡하게 들어 서 있으며 몇 가지 지방적 특색 있는 물품까지 포함시키며 부족한 품목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작정 집 떠나온 캠퍼나 여행객들에겐 그야말로 보물창고라는 점이다.

소주와 맥주와 몇 가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드디어 솔향기 캠핑장에 입장 절차를 밟는다.

관리소를 나와 쭉 뻗은 보도블록을 따라가면 저만치 앞에 푸른 동해가 넘실넘실 거리는 멋진 풍광이 나타난다. 그 앞에 초록빛 옷을 입은 곰 세 마리 가족이 변함없이 어정쩡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짱구 곰, 태리 곰, 세리 곰.........'

이 푸근함과 익숙함과 안락함과 반가움은 다 어디서 나오는 뭐란 말인가?

지난 번 우리가 머물렀던 A-135번 데크에는 다른 사람이 이미 노란 미니멀 텐트로 싸이트를 구축하고 있었다. 다시 보고 생각해 보아도 가장 명당이 A-135번이 아닐까 싶다. 한걸음 뒤에 있는 것이 주차된 차들이 바다 뷰를 방해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지대가 약간 높기에 더 좋은 시야 확보가 가능해 진다. 그리고 따가운 햇살과 해변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에 대해서도, 작은 한걸음 후퇴한 것이 놀라울 만큼 안정감을 주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숲의 바깥 가장자리와 숲속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울러 그런 것은 경험이 풍부하거나 아니면 익히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비밀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명당 데크가 적어도 우리에겐 필요가 없다.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

오늘 우리는 그냥 캠핑이 아니라 글램핑이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우리가 굳이 글램핑을 선택할 리가 없겠지만, 소중한 병아리들을 데리고 온다는 가정하에서 좀 편하게 해주려고 과감하게 글램핑을 선택했는데, 아뿔싸!!!!....... 그넘(?) 아들의 착오로 부득불 ‘등 떠밀려 억지로 선택한 샐프 효도캠핑인 글램핑’인 것이다.

'헐! 팔자에 없는 줄 알았던 글램핑이라니........ 크크크크크. 아덜 이넘!!!'

그러다 보니 따로 챙겨 온 것이 거의 없다.

수건에 칫솔 치약과 밖에서 고기 구워 먹겠다고 그리들이랑 버너와 개스, 바닷물에 빠질 생각으로 여벌 반바지, 틈틈이 독서는 해야 하는 탓에 두꺼운 책 한권과 필수품인 안경, 거기에다 갤럭시 탭을 추가하면 나름 내가 챙겨온 물품은 그게 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아마도 나 태어나서 캠핑을 가든 여행을 가든........ 가장 간소한 차림에 간단한 준비물임이 틀림이 없다. ‘이러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면 아예 캠핑은 때려치우고 글램핑이나 카라반으로 바꿔? 차라리 캠핑카를 알아 봐?’

대충 짐 정리를 마치고(정리 할 것도 없으면서) 해변 백사장으로 향한다. 세찬 바람에 비가 오락가락 한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다고 밀려드는 파도에 발을 적셔보고 나서, 세리 할머니가 모래에 '태리 세리 사랑해'를 쓰고 있는데 그만....... 태리를 쓰고 한걸음 옮겨서 세리 이름을 쓰는 사이에 심술쟁이 파도가 밀려와서 태리 이름을 쓸고 도망쳐 버리고 만다.

헐!!!!

가랑비가 제법 거세어지는데 우리 숙소인 G608호는 그래도 약간 숲 안쪽이라고 바람은 거의 느끼지 못하고 부슬부슬 비만 내리는데, 그나마 작은 파라솔 안쪽은 말짱하다. 그 작은 말짱함을 믿고 오늘 저녁은 밖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서 먹기로 하고 중앙시장에서 장을 봐온 것들을 모두 꺼낸다.

‘강릉 가면 일단 시원하게 물회를 먹기로 하자.’

‘이 계절엔 어떤 회가 제철이지? 모처럼 바다에 왔으니 민물 송어회가 아닌 바다회를 배터지게 한 번 먹어보자.’

‘아파트에선 못 구워먹었던 장어를 숯불에 제대로 한번 구워먹어 봅시다.’

‘새우도 구워야 하고 조개구이도 해먹어 봐야지.’

시장에 들어갈 때 까지도 우린 저녁에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었다. 그래서 하나로 마트에서도 우리 주량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술을 구입했다.

그래도 바닷가에 나와서 푸짐한 해산물 한상을 안주로 하는 건데...... 어디 술이 쉽게 취하겠어? 마시다 모자라면 좀 그렇잖아.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일단 사고 보자고.

그렇게.......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강릉 중앙 시장을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두 바퀴나 돌면서 이것저것 주전부리까지 했는데........

아뿔싸!!!!!

내륙의 촌넘 입맛이란게...... 어디 가냐고? 그게 어디 쉽게 바뀌냐고?

헐!!!

순대. 족발. 오징어 새우튀김 한 보따리 잔뜩.(우리 동네 충주 장날이면 다 나오는 뻔한 지극히 현실적인 소주 안주들)(언제든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아주 익숙한 그저 그런 안주들)을 멀리 강릉까지 와서 특별히 고른답시고 돌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골라서 구입한 꼬락서니라니......... 아무래도 우린 바다회 보다는 싱싱하고 향기가 소록소록 나는 민물 송어 체질인가 봐. 바다회에서는 괜히 후꾸시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거기다가 술잔도 양푼만한 대접이다.

'물컵 있잖아. 이건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는것 아니야?'

'그냥 앉어. 오늘은 이렇게 마셔보는 거야. 나 지금 칼 잡고 있는거 안보여? 콱!!!!'

깨갱!!!

어느 안전이라고.........

아덜! 엄마 대접이 하얗다고 그냥 생수잔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라. 사이다에 소주 탄 쏘사 대접은 엄마 잔이고, 맥주에 소주 탄 카라멜 색 대접은 아빠 쏘맥잔이여. 아빠만 혼자 미친것 처럼 마시는 것이 절대 아니란다. 엄마의 무서운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마시는거여. 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릉 바닷가까지 와서 에게게게....... 충주 오일장터에서 파는 안주 뿐이네??????

헐!

서울 샥시도 충주서 40년을 살더니만 이젠 아예 내륙 촌댁이 다 되었나벼?

--- 길어져서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