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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몽펠리에(Montpellier)는 어떻게 가장 살고싶은 도시가 되었을까? (2부)

by 피안재 2024. 3. 23.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아주 오래전부터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국제법상으로도 프랑스가 스스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인다. 내 개인적 소견으로는 프랑스가 <모나리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이 턱없이 빈약하고 억지 주장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다빈치가 다시 돌아와 누구 손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 지금의 상황이 그냥 유지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프랑스가 멸망하지 않는 한 <모나리자>는 계속 루브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코앞 반대편에 걸려있는 파울로 베로네세의 초대형 작품 <가나의 혼인잔치>의 경우는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분명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소유가 확실하다. 이탈리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이 전리품으로 약탈해간 작품이다. 가로 9.9m 세로 6.8m의 대형 작품을 빼앗아 가기 위해 가운데를 잘라 2등분으로 가져가 루브르에서 전문가를 동원해 복원했다.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망한 후, 연합군은 국제회의를 통해 모든 영토를 나폴레옹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전쟁 피해 배상과 함께 약탈해온 문화재와 미술품도 모두 원주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것으로 협약했다. 하지만 뺏어온 문화재와 미술품이 너무나 방대해 원소유주 판별이 어려웠고, 개인 소유의 경우 전쟁으로 통해 소유권을 주장할만한 후손들이 모두 사망하는 경우처럼, 어느 교회에서 약탈을 했는데 전쟁 통에 그만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어 미술품이나 문화재를 돌려줄 곳이 없어진 경우들이 너무나 허다하여....... 그렇게 원주인이 찾아가지 못한 수많은 문화재와 미술품이 지금 루브르 미술관을 채우고 있다. 속속 권리를 주장할 후손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문화대국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하는 프랑스가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다. <가나의 혼인잔치> 경우 전쟁 직후 반환을 요구하였고, 돌려주는 것이 당연했으나........ 그림이 너무나 초대형이고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당장 복원 작업이 필요하다면서........ 완벽하게 복원이 되고 운송수단이 좋아지면 언제든 돌려주겠다고 프랑스가 약속하면서 시간 끌기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싸워서 이겨 빼앗아 되찾아가기 전에는 절대로 <모나리자> <가나의 혼인잔치>는 루브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파울로 베로네세의 미술가로서의 명성이나 작품성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내면에는 이 화가나 작품이 바로 르네상스(Renaissance)를 대표한다거나 상징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발생국이자 진정한 르네상스의 보고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르네상스의 변방이자 불모지였다. 그런 프랑스가 <모나리자> <가나의 혼인잔치> 같은 르네상스의 진수를 보유함으로써 그들은 이탈리아 못지않은 르네상스 미술품을 소장한 초일류 문화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대결에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값비싼 미술품이나 문화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프랑스 아비뇽 북쪽에는 아주 험준한 바위산 ‘몽 방투(Mont Ventoux,)’가 있다. 해발 1912m에 이르지만, 프로방스 해안지방 자체가 지대가 워낙 낮은 터라 평원에 우뚝 솟아오른 방투 산은 ‘프로방스의 야수’ 혹은 ‘프로방스의 거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았던 험준한 산이었다. 프로방스 역사에서는 1336년 4월 26일 페트라르카가 동생과 함께 최초로 방투 산 정상을 올랐다고 적었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했을까? 날짜를 적어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말이다.

 

이탈리아 최고 북단 산악지역을 흔히 사우스 티롤 지방이라 부르는데, 유럽 알프스 산맥의 남쪽이 이탈리아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 깊은 산중에 걸쳐있는 천하 절경의 장엄한 바위 지대를 돌로미테(Dolomite)라 부른다. 오늘날 최고의 스포츠로 각광받는 암벽등반(알피니스트)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고, 14세기 인물 페트라르카를 인류 최초의 알피니스트라고 부른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출생으로 여기 돌로미테의 암봉 대부분을 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와 비슷하게 1336년에 페트라르카가 돌로미테를 등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인류 최초의 알피니스트(암벽등반)가 시작된 시기를 자기 동네라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페트라르카가 등산을 하고 내려오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고 산등성이의 작은 연못에 허리를 굽히는 순간........... 인류의 문명사에 한 획을 긋는 거대한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그 역사의 이정표마저도 서로 자기네 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우기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대대적인 광고와 주장은 프랑스가 더 열심인데......... 여론의 향방은 다분히 이탈리아 쪽을 응원하고 있다. 혹, 언젠가 타임머신이 발명되면 그때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등산을 마치고 하산을 하던 중에 갈증을 심하게 느낀 청년은(당시 32세) 물웅덩이를 발견하고는 엎드려 물을 마시려는 찰라......... 웅덩이에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얼핏,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맑고 기품이 넘치는 온화한 미남자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하여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죄인이며, 어찌하여 영원이 구원받을 수 없는 악의 뿌리라고 하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청년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하늘의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수면 저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눈부신 햇살이 반사되어 비춰오지 않는가. 동시에 청년은 밝은 섬광으로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자신의 변모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야. 영원이 벗어나거나 씻을 수 없는 죄인이 어떻게 저렇게 밝고 환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저 모습이야 말로 신께서 약속하신바대로 구원을 받은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건 모두 교회와 신학이 잘못된 것이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더럽고 추악하고 영원한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오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시고 다시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건 잘못된 거야. 교회와 신학이 잘못 깨닫고 모든 인간을 영원한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아 떨어트리고 있는 거야. 인간이 잘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야. 그래.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 것이야.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허락하신 소중한 존재들인 것이야. 우린 그동안 그것을 깨닫지 못했어. 교회와 신학의 이야기대로 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었던 거야. 그분께서 이 땅까지 다시 오셔서 직접 내리신 약속은......... 교회와 신학도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이젠 우리 인간 모두가 스스로 깨달아야만 해. 우린 죄인이 아니라 선택받아 구원된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야.’

청년은 풀밭에 그대로 드러누워 하염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가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은 아까 산 정상에서 올려다보던 그 하늘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도 마음도 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보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인류 문명사 또한 이 순간부터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cco)의 깨달음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많은 역사와 미술사 학자들이 말하기를........ 르네상스(Renaissance)는 바로 이 순간........ 페트라르카의 독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왜 이야기의 서두에서 느닷없이 르네상스 타령이 이리 길어졌냐고?

그러게 말이다. 안티고네를 마무리 하려다보니....... 느닷없이 르네상스가 불현듯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리카르도 보필(Ricardo Bofill)에게 고대 그리스 문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몽펠리에에는 그리스와 로마가 없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어떤 그리스나 로마도 몽펠리에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같은 사실은 (몽펠리에 재개발)이라는 대 역사를 주도하는 조지 프레쳐 시장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프레쳐에게 그리스와 로마가 없는 몽펠리에는 커다란 아쉬움이자 어찌해 볼 수없는 안타까움이지만, 거꾸로 프랑스 역사와 문화 속에서 그것은 역발상으로 하나의 커다란 자부심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프레쳐 시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프랑스 정부와 협상에서 ‘프랑스 정부가 앞장서서 어느 도시보다 더 몽펠리에를 아끼고 돌보아야 할 의무’에 대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자료를 전제로 정부를 압박했다.

‘몽펠리에는 프랑스에서 몇 안 되는 순수한 프랑스의 자존심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파리나, 마르세유나, 니스나, 아를 같은 도시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프랑스만의 정통성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 이유는 ‘몽펠리에에는 그리스나 로마가 없다’라는 이유였다. 수도 파리(paris)는 로마 장군 줄리어스 시저의 갈리아 원정에서 생겨난 도시다. 로마가 갈리아 식민지배의 중심지로 건설한 도시가 바로 파리다. 거기다가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르네상스의 절대 추종자였던 루이 14세는 파리의 도시구조 자체를 ‘테베가 유역의 로마’를 복사 해다가 ‘세느강 유역의 파리’로 복제도시를 만든 것이 사실이 아니었던가? 제 2의 도시인 마르세유는 그리스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개척한 식민도시로 시작했다가 로마의 지중해 해군 총사령관 폼페이우스에 의해 완전 해군 기지이자 요새로 탈바꿈되었다. 그 외의 내놓으라하는 대도시 치고 바닷가는 그리스, 내륙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거점으로 탄생하고 성장하지 않은 도시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멀리 영국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은 물로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지역까지에 걸쳐 로마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도시가 거의 없을 지경이 아닌가.

하지만....... 몽펠리에는 달랐다. 몽펠리에에게만은 그리스도 로마도 없었다. 비교적 인근의 아를. 아비뇽. 오랑쥬들도 로마에 의해 도시가 생겨났지만, 몽펠리에는 여타의 도시들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몽펠리에는 모든것이 순수한 프랑스 산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프랑스의 자부심이자 정통성이라고 프레쳐는 역설했다. 하여, 몽펠리에 역사지구의 보존과 개발에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처음엔 외면과 거절을 당했지만, 몽펠리에가 변모하고 전 유럽의 이슈꺼리로 떠오르자 프랑스 정부의 생각도 변해갔다.

몽펠리에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도 300년 가까이 지나서, 스페인 영토의 이슬람이 유럽 침공을 감행해 기독교와 전쟁을 벌였다 패해서 달아난 8세기경에 처음 생겨났기에 어디에도 그리스나 로마의 흔적이 없었다.

프랑스의 시작이랄 수 있는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생겨난 도시였던 탓에...... 오로지 프랑스(스페인 지배 시기는 짧지 않게 있었지만 , 그것들도 이제는 엄연한 프랑스 역사)인들에 의한 프랑스식으로 성장한 도시였던 것이다. 더욱이, 늦게 시작하였지만 지리적 잇점을 살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기간에는 프랑스 전체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의 경제력을 가진 명실상부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도시였던 시절도 있었다. 교황청이 로마로 되돌아가면서부터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걸어서 20세기 초엽엔 프랑스 전역에서 25 위정도 순위로 전락하게되었고, 역사에서 조차 잊혀져가는 그런 초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도시가 ‘몽펠리에 대개혁’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프레쳐 시장을 선장으로 삼아 다시 한 번 드넓은 지중해를 향해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시작했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서 인구 28만의 12위 도시에 올라섰다. 2023년 인구 30만에 육박했고, 유명한 관광도시 스트라스부르를 재치고 마침내 7위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프레쳐 시장은 정부의 관심과 투자를 끌어오기까지는 죽어라 '몽펠리에야 말로 순수한 프랑스식 정도 도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때까지만 이었던것 같다.

아마도 '그리스나 로마가 없는 문화와 예술은 르네상스가 빠진 인류 문명사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그 전에 이미 충분히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몽펠리에의 과거(역사지구)와 미래(오디세움 지구와 포트 마리안느 지구)의 중간에 이들을 연결하는 시간의 통로(안티고네 회랑)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물의를 불러 일으키면서까지 불러들인 스페인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이 건설할 안티고네(Antigone)가 전부 그리스 건축의 정수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신고전주의 양식이었으니 말이다. '몽펠리에에는 그리스도 로마도 없다. 적어도 안티고네 이전까지는 말이다. 지금 몽펠리에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예술의 숨결이 잘 녹아들어 새로운 생명체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몽펠리에의 미래다.' 라고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안티고네(Antigone)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실물 크기의 조각상 복제품들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을 빼면 하나같이 고대 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상들이다. 비록 복제품들이라 해도 야외의 공간에서 쉽고 편리하게 마주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대표 미술품들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색적이면서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진품이 아니면 어떤가? 따지고 보면 루브르에서 진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그것들도 따지고보면 99% 이상이 모두 복제품 인것을........ 이런 점에 있어서는 머지않은 언젠가...... (레플리카. 리메이크 등의 내용으로 미술품 복제에 대해서 다시 다루어 볼 생각)임을 거듭 여러번에 걸쳐 밝혀둔 바가 있다. 또한 가만히 살펴보자니....... 복제품이라는 제재나 로얄티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대부분의 조각품이 그리스 정부의 정책과 다르게 프랑스가 도굴했거나 밀반출한 작품들인데다가, <모세상>의 경우만 해도 율리우스 2세 교황이 발주자이자 소유자인 것은 맞다 하겠으나 미켈란젤로에게 작품 대금을 제대로 완납했는지는 따져 볼 부분이 많이 있다. 성스러운 교회당에 있는 작품을 복사했기로서니....... 로얄티를 교황께서 받겠는가? 아니면 하늘나라에서 성금으로 받겠는가? 법정에 누가 권리자로 출두할 수 있을지........

안티고네의 보행자 도로를 걸으면서 나는 문득 '여기가 포로 로마노(Roman Forum)라면?'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내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 졌다. '그럼 여기는 어디라고 해야할까?' 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그래.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신전 광장 모습이 아마도 저런 모습이었을 거야' 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의 심장이었던 포로로마노의 경우는 현제 폐허로 남아있지만, 수많은 신전과 원로원과 개선문 등으로 총총하고도 빼곡하게 장엄하고 웅장한 도시형태였지만, 고대 도시국가 형태였던 그리스는 신전들도 여기저기 흩어지듯 떨어져 배열을 해 놓았었고, 과밀함 보다는 터지고 열린 공간 신전 광장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신전의 입구에 시장이나 시민들이 모여 자유 토론을 벌이는 아고라가 설치된 이유도, 어느 정도 신전 내부 광장은 경건성이나 독자적 공간의 개념이나 성역으로서의 신성함을 간직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신전의 내부는 물론 벽면과 곳곳을 아름다운 조각상들로 장식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우리가 걷고있는 안티고네는 아크로폴리스 신전 어귀의 어느 모습을 참 많이 닮았을 것만 같다. 우리는 지금 고대 그리스 신전을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눈부신 햇살이 조각 구름에서 막 벗어나 쏟아져 내리는 것은, 혹....... 저 구름이 포시즌(계절)이며, 그 구름 사이로 봄의 님프가 지금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한동안 함께 지내던 봄의 님프에게 임무를 건네주고 겨울의 님프가 다시 저 구름 사이를 통해 올림푸스로 올라갈 것만 같다. 또 한 번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전망대에 서서 레즈 강 건너의 시청(Hôtel de région Occitanie Montpellier)을 바라보고 섰다.

이대로 레즈 강을 건너서 시청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벌서 제법 많은 시간을 안티고네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오늘은 느릿느릿 좀 쉬면서 재충전을 하는 날로 계획을 했던 터라........ 아내의 표정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점심은 언제 먹을거야?'하지 않는가? 오늘 점심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을 해 둔 바가 있었기에 아무래도 오늘 안티고네에서 연장되는 신도심 여행은 일단 차후로 미우어야만 할 것 같다.

몽펠리에 재개발을 맡은 조지 프레쳐 시장이 역사지구와 코미디 광장의 정비를 마치면서 안티고네 건설을 위해 주변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을 참여 시켰다. 초기에 일부 지역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지금 현재에 안티고네가 없는 몽펠리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의 상징이자 대표 명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몽펠리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고 있는 가장 프랑스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임기 6년의 시장과 현지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서 1차 개발의 목표로 50년의 시간이 걸리는 재개발 계획을 세웠다. 그 뒤로도 거듭 계속될 2차 3차의 지속적인 개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대역사였다. 프랑스 역사상 단일 프로젝트로서는 최대이자 최장의 개발 사업이었다. 그런 대역사를 국가 차원이 아니라, 퇴보해서 부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도시 경제 순위 25위권의 소도시 몽펠리에가 벌인 것이다.

모든 부정적 여론의 끝이 정조준하는 곳은...... 당연히 프레쳐 시장이었다. 프랑스 정치의 중심축과는 거리가 먼 외골수적인 급진좌파 성향의 정치가가 바로 그였가 때문이다. '임기가 고작 6년인 시장이 얼마동안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저런 허무맹랑한 게임을 벌이는 것이냐?'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 라고 온 프랑스와 유럽에서까지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를 아주 짤막하고도 단호하게 잘라서 대답한다면........ '임기 6년의 조지 프레쳐 시장은 24년간 몽펠리에 시장을 연임했다' 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대답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사망으로 퇴임한 것이 아니다. 몽펠리에 재개발을 어느정도 안정 궤도에 올려놓은 시점에서, 하나의 도시 몽펠리에가 아니라 한 단계 상위개념의 지방자치기구인 랑그독. 루실론 지구( Languedoc-Roussillon)의 재개발 사업 의뢰가 들어 온 것이다. 이제 소도시 몽펠리에는 자치적인 자신만의 도시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인 랑그독. 루실론의 개발과 공존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사회적 사명이 부각되었고, 그것은 당연히 몽펠리에 시민은 물론 프레시 시장으로서도 책임의식을 가져야만 하는 상위 단계의 ....... 그러니까, 일개 시장에서 이제는 도지사로서의 역활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레쳐는 올라가고, 그가 선발해서 오랫동안 함께했던 후임자가 새로운 시장이 되었고 2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리카르도 보필에게 맡겨진 안티고네 건설 프로젝트에는 애초부터 안티고네는 물론 레즈 강 건너에 세워질 시청(Hôtel de région Occitanie Montpellier) 건설까지가 제기된 약속이었다. 안티고네 건설이 한참 가속도를 받고 있었을 때, 프랑스 정부의 재원지원 거부와 정책적 외면으로 인해서 사업 자체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 위기에 처했을 때, 프레쳐 시장은 유럽을 넘어 온 세상에 환경적 도시의 연구와 개발이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고 널리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래지향적이며 친 환경적인 모범적 사레의 미래지향적 건축으로 시청을 짓게다고 선언했다.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거대한 사업인 시청 건설을 당장 동시에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온 세상은 이제 머지않아 몽펠리에가 파산할 것이라고 조롱을 퍼부었다.

안티고네 건설 사업만으로도 벅찼던 보필은 프레쳐 시장에게 미래지향적이며 친환경적인 새로운 시청의 건설에 앞서서 새로운 인물에게 시대적 사명에 걸맞는 그런 시청 건물을 설계할 사람을 공모하자고 요청했다. 보필 자신과 자신의 설계회사를 뛰어넘어 몽펠리에가 지향하는 그런 가치관과 이상에 맞는 프로젝트 설계를 공개 응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몽펠리에의 재개발은 온 세상의 조롱을 받으며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있었지만....... 몽펠리에가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친환경 건축과 신도시 건설에 세상의 연론과 달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과 건축학계에서 만은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세계적인 건축가와 건축회사와 건축학교가 이 프로젝트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뜻밖의 놀라운 대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진행과 공개심사에 세상은 젊은 학생과 젊은 건축가들이 몰려와 지켜보기 시작했다.

최종 심사의 결과....... 리카르도 보필보다 6살이나 많은 선배인 프랑스 건축가 클로드 주베르( Claude Joubert)가 선정되었다. 보필은 주베르의 설계에 크게 감동했고 이후로 건설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공동의 책임자 역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 결과로, 어떤 안내서에는 종종 새로운 몽펠리에 시청 역시 리카르도 보필의 작품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굳이 건설작업 까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건축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몽펠리에 신시청을 설계한 사람은 클로드 주베르가 분명하다. 주베르의 몽펠리에 시청 건축에 관해서는 뒷부분에서 기회가 생기면 다시 소상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안티고네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유럽 광장의 끝이 당연히 시청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착시 현상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는 했지만...... 안티고네와 시청 사이에는 레즈강(Lez)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윗쪽이든 아랫쪽이든 삥 돌아가야만 시청에 이를 수 있다.

몽펠리에는 과거(역사지역)와 미래(신도시가 시작되는 시청) 사이에 이 둘을 연결해주는 시간의 통로 개념으로 안티고네라는 아주 특별한 회랑(공간)을 건설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청의 코 앞에서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의 진행에서 이곳에 다리 하나 놓는것은 어쩌면 돌맹이 하나 손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 아주 간단한 작업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리가 없다. 연결이 끊겼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지금까지도 알려주 않고 있다. 알고 싶다.

어쨌거나 여기 안티고네는 프레쳐 시장과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이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예찬을 담아 몽펠리에에 안겨준 커다란 선물인 것이다.

보필은 왜 이 신성한 장소의 이름을 안티고네(Antigone)라고 붙였을까?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소포클레스(Sophocles)가 쓴 비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왜 그녀의 이름을 붙였을까?

 

 

 

 

 

안티고네 전망대에서 트랩을 탔다.

몽펠리에의 가장 외곽에 해당하는 좀 떨어진 지역으로 점심을 먹으로 가려고 서둘러 이동을 했던 것이다. 몽펠리에 코미디 광장 주위 이야기를 하면서 4개의 트램 노선을 이야기 했었는데, 지금 노선처럼 시내 중심 노선에 연장되어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두 개 노선이 더 있다. 그러니까 세세하게 따진다면 정확히는 몽펠리에서 6개의 트램 노선이 운행중이라 할 수 있다. 몽펠리에 트램의 최고 장점은 우선 편리성이다. 배차 간격이 짧고, 타고 내리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고, 자주 운행하다보니 그렇게 붐비지 않고, 쾌적하며. 기존의 도심 골목을 휘감듯이 천천히 지나가다 보니 정취가 남다르다.

몽펠리에에서는 도심이던 외곽이던 어디를 가도 치안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이 전혀 없다. 사람들도 여유로와 보이고 친절하다. '프랑스에선 무조건 프랑스어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언어장벽에 부닥치면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서로 먼저 핸디폰 번역기들을 두드려 댄다. 처음 느껴보는 잔잔한 감동이다.

그래서 오늘의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트램 정류장에 내렸는데, 아뿔사........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정류장이다. 스페인도 아니고 앙티브나 생 폴 드 방스도 아닌데 뜬금없이 또 피카소라니? 거기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한적한 시골 어딘가에...... 마을은 논길 저만치 민가 몇 채만 겨우 보이는 텅 비고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 덜렁 내동댕이처진 듯........ 그런 분위기의 텅 빈 정류장에 우리만 내렸다.

헐!!!!!

식당이 부근에 있다고?

썰렁!!!!

<Marché du Lez는 2016 년 Lez 강 유역에 개장 한 도시의 마을입니다. 현재에는 프랑스에서 거의 유일하게 7,500m² 이상의 생활 공간을 갖춘 3층 공연장입니다. 공간, 바, 레스토랑, 옥상 (2층 연결), 할레 구르망드 (푸드코트), 스포츠 놀이터, 보살핌, 웰빙, 벼룩시장 및 재활용, 상점, 푸드트럭, 스타트업, 코워킹, 워크랩 등, 이 혁신적이고 예술적이며 문화적이고 미식 놀이터인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라는 여행 안내서를 보고 부러 찾아 온 길이었는데...... 어디에?

정말로 이런 어처구니가?

주변으로 온통...... 한창 주거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어느 시골의 재개발 지역에 내린 느낌이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때문인지....... 주변 건설 단지의 진면목이 당시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은 무조건...... 식당을 찾아서 아내를 좀 쉬게 해주면서 민생고를 해결해 내야겠다는 일념 뿐이었었나 보다. 눈 앞에 당장 크레인이 돌아가고 있고 훼느가 쳐져있는 그 너머로 몽펠리에의 발전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꿈에도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아니 이런 깡촌에 신개념의 최신식 트램이 놓여있다니.......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잖아? 누가 있어야 길이라도 물어보지?' 라는 느낌이 솔직한 고백이었다.

어쩌겠는가? 핸디폰을 꺼내 내비게이션을 켰다. 오늘의 목적지를 입력했다. 실같은 점선이 저만치 앞쪽을 가리킨다.

헐!!!

포장도로는 분명 맞지만 상태가 별로인...... 먼지가 꾸역꾸역 날리는 허름한 도로가 그쪽으로 쭉 뻗어있다. 차도와 인도의 구별도 없는 비포장 도로 비슷한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간다. 목적지가 700m 앞에 있다고 안내가 되어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식당 비슷하게 생긴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왜 우리나라에도........ 시골 농로 사이로 한참을 돌아가면 딱 한 채있는 막국수 맛집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려려니 하고 또 걷고 또 걷는다.

'얼씨구 이게 뭐지?' 거대한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고속도로가 아닌가. 우리가 그제 마르세유에서 플랙스 버스를 타고 달려왔던 그 고속도로였다. 이 길의 반대쪽으로 가면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나온다. 세상에나...... 여기야말로 완전히 몽펠리에의 끝자락 경계가 이니겠는가? 그런데 내비는 고속도로 아래로 계속 가라고 가리킨다. 솔직히 이쯤에서 포기할까 말까 고심이 되었다. 그럴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가지 왔고...... 내비에서도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하니 가보기는 좀 더 가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긴가민가 미심쩍어 하면서 고속도로 굴다리 아래를 지나 좀 더 나아갔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산자락을 넘자마자 길 옆으로 작은 마을 하나가 얼기설기 엮여있는 모습의 시골 장원이 불쑥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딱 그런 경우라고 해야 할까? 뼈만 앙상한 플라타너스 고목들이 둘러싸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빈티지한 모습의 커다란 건물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보니 내가 여행 안내서에서 보았던 사진의 풍경과 똑 같은 오늘의 목적지였다.

'Halles du Lez'

몽펠리에의 젊은 대학생들과 배낭여행자들에게 꽤나 알려져 있는 몽펠리에의 명소였다. 비수기인 겨울이라서 좀 그렇겠다 싶었지만, 사실 이곳은 항상 젊은이들의 함성과 축제 파티가 끊이질 않는 명소로....... 혹, 우리나라 90년대 2.000년대 초기의 김포 백석마을 분위기라 이해하면 조금 쉽지 않을까 싶다. 2002년 월드컵 스페인 전을 (people 475)의 지인들과 함께 백석의 한 카페에서 응원한 적이 있었다. 그게 마지막 방문이었지만 말이다.

몽펠리에의 백석마을을 찾았다.

 

 

푸드코트가 정말로 마냥 행복한 이유는......... 이것저것 골라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 체중관리는 당연히 내일부터.........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다.

여러가지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역만리 떨어진 프랑스의 푸드 코트에서 느껴보는 음식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 그리고 음식에 대한 욕구......

만약 숙소에서 코미디 광장 정도의 거리였다면....... 매 끼니를 모두 이곳에서 해결했으려만........ 아쉽다.

2019년에 문을 연 ‘레알 뒤 레즈(Les Halles du Lez)’는 몽펠리에 여행의 새로운 명소로 최근 뜨겁게 떠올랐다. 우리로 치자면 약 30여개의 부스로 만들어진 포장마차촌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자부심과 독창성으로 가득한 젊은 셰프들이 모여서 프랑스의 정통 요리는 물론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를 내놓아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음식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적어도 음식에 관해서만은 정통 보수를 고수하는 프랑스인들의 기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푸드 코트의 등장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신개념 음식문화의 등장이라고 할만하다. 특정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 해당 음식을 최고로 만든다는 유명 레스토랑을 부러 찾아가 기다려서라도 기어코 먹어야 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이제는 무작정 푸드 코트로 가서 그곳에서 내놓고 있는 다양한 최고의 음식을 고르고 군중들 속에 아무 테이블에나 함께 섞여서 재능 있는 최고의 세프들이 독창성과 자부심을 담아내는 최고의 음식을 그냥 편하게 앉아서 마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모르는 음식의 내용에 대해서 웨이터나 세프에게 직접 묻고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다. 부스를 돌아다니다가 코앞의 조리대에서 셰프가 직접 요리하고 선보이는 음식을 직접 보면서 고르고, 궁금하면 한참 요리중인 셰프에게 다가가 직접 물어보면 친절하게 시범까지 보여주며 설명을 해준다. 요리 방법과 들어가는 재료를 직접 살펴보면서 얼마든지 다양한 요리를 맘껏 고를 수 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두세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이런 푸드 코트의 모습은 엄청 큰 충격이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가히 혁명이었을 것이다.

푸라그라 같은 프랑스 정통요리는 물론 비건 요리는 물론 멕시코 음식, 스페인 음식, 베트남 음식에서 일본의 스시까지 최고 품질의 요리로 대중들 앞에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부부에게는 이런 풍경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유럽여행을 이어오면서 이미 몇 차례 이런 유럽식 푸드 코트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최초는 마드리드였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지역에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전통시장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시민들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생필품이 이곳을 통해 제공되었다. 우리나라 전통 재래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의 현대화가 이루어지고 주거생활환경이 개선되었지만 재래시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도시는 명동이나 압구정처럼 변했는데, 인근의 재래시장에서는 야채와 과일만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육류 시장도 당연히 함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도축까지 재래시장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 닭. 돼지가 시장에서 거래되고 인근 창고에서 도축되었으며, 이렇게 상품화된 육류가 시장의 가판대에 올려 져 시민들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혼잡하고 도축으로 인한 생활환경이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결국 정부는 도시 환경 개선의 목적으로 가축시장과 도축 시설을 먼 교외로 옮기게 하였으며 재래시장의 개선과 정비에 막대한 투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동안 쫓겨나는 시설 등에 의지하며 생계를 이어 온 소규모 식당과 노점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농촌지역의 대도시마다 소시장이나 가축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컸으며, 그 시장 주변에서 순댓국. 육회. 곱창집. 설렁탕집 등이 크게 성업 번창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드리드의 도시 현대화 과정에서 더럽고 파리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쓰레기가 넘쳐나고 냄새가 장난이 아니고 온갖 폐수가 넘쳐나는 재래시장은 어느새 기피대상 1호로 떠올랐던 것이다. 가축시장과 도축 시설을 외곽으로 이전하고 개선 정비하는 과정에서 노점상과 소규모 음식장사의 구제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이다. 산 미구엘 시장의 성공 소식은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마드리드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꼭 이만큼 절실한 상황이 바르셀로나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 시당국과 진보 성향의 건축가와 실제로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젊은이들이 모여서 산 미구엘 시장을 모티브로 바르셀로나 방식으로 토착화 시킨 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여행의 핫 플레이스로 여행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라 보케리아(La Boqueria) 시장’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유명세는 보케리아 시장이 훨씬 더 타고 있는데, 내용면이나 인상적이기는 산 미구엘만 못하다는 것이 적어도 우리 부부의 솔직한 평가다. 미구엘 시장은 언제나 혼전한 상태와 모습으로 시장의 본분과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보케리아 시장은 처음 방문 시 절반 정도만 상점이 열렸고 시장 주위가 온통 공사장이었다. 3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갔을 때, 예전보다 더 많은 상점이 휴업이거나 심지어 여기저기 폐점 상태로 굳게 닫혀 있었다. 시장 주변과 자체의 공사 역시 더 넓어졌다. 시장의 절반이 못되는 정도만이 열려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몰려드는 여행자는 이전보다 오히려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굳이 다른 여행자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랬음에도 어쨌거나........ 도시가 커지고 현대화되어 갈수록 이런 재래시장의 정비와 개선의 가장 바람직한 이상 모델로 미구엘 시장이나 보케리아 시장이 여겨졌다.

그런 결과는 리옹의 HALLES BOCUSE, 암스테르담의 FOODHALLEN, 리스본의 MERCADO DE RIBEIRA 시장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점차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점차 재래시장의 본질에 현대적 디자인이 가미된 건축물이 생겨났고, 그 지역의 특성이나 민족적 정통성이 가미되는 현대적인 하나의 개선된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까지 살펴 본 시장의 공통점은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어 내려온 재래시장의 재개발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런 사례를 지켜보던 몽펠리에의 젊고 창조적인 세프 몇 명과 도시 계획을 주도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에이전시와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 건축가와 지역 예술가들까지 모여서 실로 엉뚱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선례에서 지켜본 전통 재래시장의 재개발이 아니라, 한적하고 소외된 도시 외곽지역에 미구엘이나 보케리아 시장이 가진 특성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형태의 독자적인 농산물 판매 시장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애초의 목적은 우리나라 농촌지역의 소규모 재래시장처럼 만들어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소비자와 직거래 하는 시장 마당의 역할로 시작을 하되, 어차피 시장에는 판매자가 되었던 소비자가 되었다 유통업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사람이 모여들면 음식을 먹을 곳이 필요할 터이니, 이 농산물 유통센터의 주변에 미구엘. 보케리아 시장과 같은 푸드 코트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몽펠리에 도시 재개발 사업>의 영향이 컸다.

역사지구를 재정비했고, 안티고네 건설을 통해 미래에 대한 염원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최첨단의 현대식 시청을 통해 미래에 대한 염원을 확신으로 바꿨다. 이어서 건설한 오디세움 개발은 현대식 대도시도 충분히 친환경적이고 인본주의가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여기에 연결하여 포트 마리나 개발은 그 도시와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삶이 지속적인 안정과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먹거리 사업........ 친환경적인 미래 산업이 꾸준히 생겨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과거에......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디세움 지역의 상당부분과 포트 마리나 지역의 절대 다수가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피폐한 지역이었다. 몽펠리아가 도심 안쪽에서부터 계속해서 발전 지역을 넓혀나가자 이제는 도심 변방의 포트 마리나 지역 외곽에 이르기까지 몽펠리에 재개발의 범주에 실질적으로 포함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몽펠리에 농산물 시장’을 계획한 창조적인 젊은이들은 바로 그곳, 포트 마리나의 외곽 경계는 처음부터 아주 자연스레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차량들의 소음 때문에 가장 소외되고 개발에서 배재되었던 곳이 바로 이들이 노리는 장소였다. 버려진 장소가 당연히 땅값이 싸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버려진 이 지역이 얼마든지 유용하게 재활용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내고 싶기도 했다.

‘몽펠리에 재개발’ 사업은 결코 50년이 되었다고 중단되거나 멈추질 사업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1단계 개발이 완성된다면....... 오디세움 지역이 가득 채워질 것이고, 이어서 포트 마리나 지역이 가득 채워질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포트 마리나를 지나 해안지역까지의 개발을 몽펠리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포트 마리나가 채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 포트 마리나(Port Marianne)가 끝나고 해안 쪽의 라테(Lattes)가 시작되는 고속도로 근처 지역을 선점하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는 것은 다분히 미래지향적이자 틀림없이 훌륭한 투자가 아니겠는가?

하여 결국 그들은 Port Marianne과 Lattes 사이의 부지에 몽펠리에 농산물 시장(Marché du Lez)의 문을 열였다.

대단위 단지의 마당과 1층에서 실제로 농수만물 유통과 판매를 시작하였고, 이어서 푸드 코트 사업이 단계에 오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야말로 멋진 성공을 그들은 이루어 냈다.

'Halles du Lez'를 성공으로 이끈 주역들. 그들의 창의성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참으로 멋진 장소였다. ​

몽펠리에 푸드 코트 프로젝트 ‘레알 뒤 레즈(Les Halles du Lez)’의 실질적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알렉상드르 테시에 (Alexandre Tessier)는 이곳의 푸드 코트가 이미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나서 다음 단계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구상 내지는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다.

여행자들이 즐겨 찾고 머무는 몽펠리에 시내의 역사지구 경계지역이랄 수 있는 캄바세레스(Cambacérès)에 ‘할레 노바(Halle Nova)’ 라는 간판으로 곧 색다른 유형의 푸드 코트를 선보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2024년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파리의 르 부르제(Le Bourget)에 있는 미디어 빌리지(Media Village)에도 이들이 추진하는 방식의 푸드 코트가 열릴 예정이며,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속시킬 계획이다. 더불어 북프랑스의 도빌(Deauville)과 릴(Lille)에서도 지금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다.

언제고 다시 프랑스를 여행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면, 아마도 이들에 의해서 프랑스 전역에 생겨나고 성업 중일 다양한 푸드 코트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해 볼 생각이다.

여행자라면 충분히 기대해 볼만하다고 하겠다.

 

푸드 코트를 나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황량하기만 한 시골길을 말이다.

파블로 피카소 역에 도착해서야 이 트램 정류장이 이제껏 보아왔던 무수한 정류장 중에서 거의 Top에 꼽힐 만큼...... 한적한 듯, 고즈넉한 듯, 그야말로 분위기가 짱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철길 양쪽으로 포장도로가 있고 그 너머로는 온통 펜스에 가려진 공사 현장들 뿐이다. 이렇게 예쁘고 분위기가 넘치는 트램 정류장에 손님이라곤 달랑 우리 둘 뿐이다. 우리가 지척에 도달했을 때 막 트램이 떠났고, 아직 다음 트램은 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주변으로 사람이라곤 변함없이 우리 둘 뿐이다.

‘휘어진 소나무가 있는 정동진역?’

‘택도 없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정동진 정도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이 없다.

그때였다. 푸드 코트 방향에서 역시나 아주 예쁜 트램이 오고 있다. 몽펠리에 트램 3호선이 이곳을 지나다니는 트램 노선이다.

소리 없이 사뿐히 트램이 멈춰 섰고 문이 열리는데 내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타는 사람도 당연히 우리 둘 뿐이다. 트램 안쪽엔 여기저기 더러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몽펠리에를 지나는 A9 고속도로 너머까지 연결되는 교외선에 해당되는 트램 3호선이 정차하는 몽펠리에(Montpellier)의 레이몽 뒤그랑(Raymond-Dugrand) 거리에 있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정류장은 몽펠리에 전체를 통 털어 가장 이용률이 낮은 역이다. 아직 주변 개발이 시작단계이기 때문에 이용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도시 개발 계획에 의해 개발 이후를 대비해 미리 트램 노선을 건설해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양쪽의 차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주변의 풍경은 온통 한창 건설 중인 현대적 도시의 모습이 전부다. 오랫동안 황무지 상태로 방치되었고,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매연 등으로 개발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던 지역이다. 건축기술과 자재의 발전으로 환경적 측면에서 소음과 매연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되자, 지금 가장 뜨겁게 개발 열풍이 불어 닥치고 있는 지역이 바로 포트 마리나 지역이고 바로 이곳이 포트 마리나의 끝자락에 해당되고 있는 것이다.

신도시 개발 지역에 미리 설치된 트램은 이용자가 거의 없는 가장 한적한 정류장이었으며, 몽페리에는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가장 아름다운 정류장이었다.

물끄러미 주변 풍경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트램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다른 지역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언뜻.......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몽펠리에 시내로 가는 여전의 외곽지역 모두가....... 어디인들 한창 건설공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 지역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으로 어디나 한창 도로가 건설되고 건물들이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초고층 건물은 없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건물들 크기나 면적이 심상치가 않을 정도로 크다. 도로는 쭉쭉 뻗어나간 바둑판을 연상시켰고, 거대한 건물과 건물들 사이에는 그 면적들 보다 훨씬 넓은 녹지의 숲지대가 놓여있다. 이상적인 전원생활 거주단지의 모습이다. 특이하게도 그 어디에서도 공장시설로 보이는 건설현장은 없다. 사무용 건물과 상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주거시설로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아파트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 보이는 건물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모양의 건물도 없다. 심지어 쌍둥이 빌딩 같은 것조차 없다. 아파트와 빌라와 관공서와 학교와 병원 건물임은 쉽게 알아볼 수 있겠는데...... 우리가 익히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건물들과는 전혀 다르다. 최첨단 시설의 공장 시설들은 대부분 애초부터 해안 지역으로 한정해 따로 건설했고, 지금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나........ 지구상의 최대 건축학교 실습현장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말로만 들어왔던 (몽펠리에 재개발 50년)의 현재 진행형인 실제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흔하게 말로만 해왔던 ‘에코 시티’ ‘에코 프로그램’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몽펠리에는 그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이것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정말로 엄청난 충격을 넘어서 헤아릴 수 없는 감동으로 밀려들어 왔다.

내게 떠오르는 감동을 아내에게 열심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트램 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점점 목소리가 커져갔나 보다. 아내가 내게 눈을 찔끔거려 보였기 때문이다.

교외지역을 급하게 휘감으면서 돌아가자 갑자기 레즈(Lez) 강줄기가 트램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아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트램이 멈추어 서자 다짜고짜 손을 잡고 그곳에서 내렸다. 포트 마리안 지역을 지나온 트램이 막 오디세움 지역으로 들어서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냥 다자고자 내린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말이다.

내린 이유는 오로지 하나....... 막 완성되었을 싶어 보이는 오디세움 지역의 신도시 풍경...... 주변의 건축물들 때문이었다. 사방으로 너무나 멋진 현대 건축의 결과물들이 정마로 멋지고 예쁜 위용을 서로 뽐내며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이 순간 트램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받았던 충격이,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축을 보면서 받았던 충격보다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질러 놀고 나서......... 다짜고짜 트램에서 내리고 나서 아내에게 지금의 내 느낌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레즈 강변을 따라 갈 수 있을 만큼 시내 쪽으로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여유 있고 한산한 쉼이 있는 오늘 하루를 애초 계획했건만.........

여지없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걷고 또 걷는다. 가진 건 시간하고 배짱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몽펠리에는 21세기 최대의 건축 실험장이다. 그것은 대단히 성공적인 미래지향적 실험장이다. 푸른 녹지가 대부분 그대로 살아있고, 친환경의 아주 멋진 건물들로 숲을 이룬다.

왜 몽펠리에가 지금 ‘가장 살고 싶은 도시’가 되었는지 절실하게 느껴보는 순간이다.

레즈 강변을 따라 걷다보니 아까 우리가 떠나왔던 시청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다시 안티고네를 지나 숙소까지 이대로 걸어갈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표정을 살피니.......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쌩쌩한 세리 할머니가 되어 있다.

 

 

안티고네와 시청사가 모두 완공된 시점에서 2.000년 9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사이클론이 몽펠리에를 덮쳤다. 폭우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레즈 강을 따라 북상한 시속180km/h에 이르렀던 EF2 토네이도에 의해 치명타를 입은 몽펠리에의 충격은 컸다. 매우 이례적인 자연재해였지만......... 프레쳐 시장과 몽펠리에 시민들은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부터 몽펠리에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언젠가 레즈(Lez) 강 유역의 정비와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았다.

하여 그들은 포트 마리나 지역의 개발과 더불어 레즈 강 정비와 개발을 동시에 진행했던 것이다. 강유역의 물길을 재정비하고 낮아진 수심을 회복하는 레즈 강 사업은 막대한 추가 비용과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했지만.......... 결과적으론 포트 마리나 지역과 해안 지역의 개발을 위해 언젠가는 반드시 투자되었어야 할 것들을 소급적용한 결과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물길이 안정화 되면서 전체적인 도시 개발이 안정화 되었고 다방면에 긍정적인 많은 효과를 드러냈다. 이 역시 대단히 중요한 성공 사례의 하나가 되었다.

레즈 강 유역의 정리와 개발은 우선 수질이 좋아졌고, 쾌적한 환경의 수변 공원이 물길의 길이만큼 양쪽으로 조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생 식물이 자라고 수중 생물과 조류들이 서식처로 사용하는 숲이 조성되고 시민들이 그곳에서 산책하고 운동을 하는 공원(Esplanade de l' Europe)을 통해 사회적 건강비용의 막대한 절감효과마저 나타냈다.

몽펠리에의 미래가 마냥 궁금해 진다.

 

 

 

 

 

 

 

 

 

-- 여기까지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단히 더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다음이야기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