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시저는 자신 휘하의 최정예 13군단을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세계 최강의 로마군대가 둘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한 것이다.
갈리아 총독인 시저가 거느린 8개의 군단은 역사상 가장 용맹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기병대 중심의 육군이다.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해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치던 에스파냐 총독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로마 해군 전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지중해 전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육군을 포함하여 대략 10여 개의 군단이 폼페이우스 편이었다.
이렇게 로마 전투력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군대가 둘로 나뉘어 일촉즉발의 내전사태로 마주친 것이다.
원로원의 요청으로 폼페이우스는 급한 대로 로마의 북쪽을 수비하던 2개 군단을 파견해 남하하는 시저의 군대를 막도록 했다. 하지만 이들 군대는 애초에 갈리아 원정 초기에 승기를 잡자 급격하게 시저의 군사력이 확장되는 것을 우려하여 원로원이 원정대에서 2개 군단을 떼어내 북쪽 국경을 지키도록 떼어냈던 군대였다. 폼페이우스는 바로를 시켜 이들 2개 군단을 지휘하여 시저를 막도록 명령했지만, 정작 시저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들 군인들 모두가 시저의 편에 가담하기를 청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바로는 도망쳤고 이제 시저는 13군단에 뒤쫓아 온 갈리아 원정대 12군단이 합류했고, 수비대에서 이적한 군대를 포함해 대략 4개 군단의 막강한 위용을 갖추고 남진을 강행했다.
로마 남부 지역의 군대가 허겁지겁 차출되었고, 본진이랄 수 있는 에스파냐 원정군이 소집한 폼페이우스가 7개 정도의 군단을 갖추고 시저 군단을 막아섰다.
노련한 크라수스와 원로원은 이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었다. 이번 내전은 누가 승리하던지 로마 전체 군사력의 태반을 점령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잃게 만들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스팔타쿠스 반란의 여파와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전으로 인한 전력 손실은 넓어 질대로 넓어진 광범위한 국경선을 지켜나가기에 역부족과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울러 두 마리 호랑이가 다투어 하나만 살아남게 된다면 이는 곧 절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강력한 독재자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저도 폼페이우스도 자신들의 군대를 본래의 주둔지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마지막엔 합의가 된다. 시저의 야심대로 시저는 집정관에 오른다.
역사에 기록된 시저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삼두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전이 모두 끝나고 정리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피를 흘리는 참혹한 전투는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음모와 암투와 오히려 더 참혹하고 잔인한 권력쟁탈전으로 변모한...... 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내전은 계속되고 말았다. 정적 중에 하나가 죽으면 끝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틀린 말이다. 그들의 유언을 받들고 영향을 받은 다음대의 지지자들에게 까지 이들의 내전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절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이들의 대결은 다시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코르피니움 전투로 다시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된다. 전투에서 승리한 시저는 이제 로마를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로마를 극적으로 탈출한 폼페이우스는 허겁지겁 시칠리아로 탈출했다. 그에게는 해군 중심의 주력부대가 여전히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저는 브루투스로 하여금 급하게 해군력을 양성하고 함선을 축조하도록 명령했다. 시저에겐 최강의 육군이 있었지만 해군력에서는 극히 미미한 정도였고, 폼페이우스에겐 육군은 시저보다 강하다 할 수 없겠지만,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해군력의 거의 대부분이 폼페이우스의 휘하에 거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시저는 이 전쟁이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측근들로 하여금 로마 원로원을 감시하고 통제하게끔 심복을 심어 통치와 조절과 신속한 보고를 하도록 만든 후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갈리아의 중심인 파리시(현 파리)에 머문 것이 아니라 중심 거점을 남프랑스에 두었다. 왜냐하면 폼페이우스가 지금은 시칠리아에 머물고 있지만, 폼페이우스의 직책이 에스파냐 총독인 것처럼 상당수 폼페이우스의 지지기반과 군사력이 에스파냐에 근거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시저의 군대가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품페이우스의 육상을 통한 북진에 대비하고, 이런 장기대치로 시간을 버는 만큼 속히 자신 휘하의 해군력을 증강시켜 시칠리아의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한 계책이었다.
브루투스가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해군력 증강에 레피두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가담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들은 시저의 해군을 이끌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때를 같이하여 용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그리파(판테온을 건축한 군인)가 합류해 선봉에 서서 진격을 개시했다.
위기에 몰린 폼페이우스였지만 오랜 세월 해적 소탕에서부터 시작된 풍부한 해상전투의 경험은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상 전술가이자 전략가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더하여 해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상의 전쟁에서도 젊어서는 제갈공명 못지않은 실력을 뽐냈었다. 실제로 그의 별명이 전쟁천재였으니 말이다. 싸움에 관한한 그는 언제나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뛰어난 인재였던 것이다.
시칠리아의 남부로 밀려나면서 폼페이우스는 지상 전투를 회피하면서 장기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메시나 해협으로 군대를 보내 시저 군대의 보급선을 공격했다. 시저측이 서둘러 함선을 건조하고 해군을 양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보급선 시스템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사실을 파악했던 것이다. 한구석으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폼페이우스 군대에게는 열려진 지중해를 통해서 연일 보급품이 원활하게 조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그리파는 서둘렀다. 두 번의 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온통 상처뿐이 승리가 되고 말았다.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건재했던 것이다.
정황을 깨달은 브루투스가 증강되어오는 해군력을 동원하여 남쪽의 열려진 지중해를 통해서 폼페이우스 진영을 드나드는 보급선을 목표로 하자 전황도 서서히 다시 변해가기 시작했다. 결국 해상봉쇄를 염려한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건너갔다. 그리스에서 육군을 재정비한 후에 전 해군력을 동원하여 삽시간에 지중해를 건너 최단시간에 다시 로마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에게는 지중해 전역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어스 13세를 왕위에 오르게 만들어 주었고,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왕조들에게 친분을 쌓고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자신의 업적이자 유산을 적극 활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집트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전쟁 물자를 보내왔고, 로마 진격에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여 동참하겠다고 약속을 해왔다. 여전히 로마는 초강대국이었으며,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실력자의 편에서 공훈을 어느 정도 세워야만 이후로 자신들의 국가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로마의 든든한 지원과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는 누가 뭐라 해도 로마의 실질적인 핵심 권력자는 여전히 폼페이우스라 여겨졌던 때문이다.
시저 진영에서도 전쟁의 판세를 고심하면서 결국...... 이런 폼페이우스의 야심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폼페이우스의 전략을 타파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을 우선순위를 두고 조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폼페이우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장먼저 조치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마르세유 점령.’
무엇보다 서둘러 마르세유를 공격해 폼페이스의 전력에서 이탈시켜 시저의 해군 주둔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참모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왜??????
시저 진영에서도 전쟁의 판세를 고심하면서 결국...... 이런 폼페이우스의 야심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폼페이우스의 전략을 타파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을 우선순위를 두고 조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폼페이우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장먼저 조치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마르세유를 확보하자.’
서둘러 마르세유를 공격해 폼페이우스의 전력에서 이탈시켜 시저의 해군 주둔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참모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왜??????
지중해 해상지배권을 차지하고 있는 폼페이우스는 비록 지금 당장 그리스로 피신해 있는 처지였지만, 여전히 로마군대의 해군력은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주력부대가 비록 에스파냐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막강한 해군력 장악은 어쩌면 시저의 용맹한 육군전력 보다도 더 빠르고 원활하게 세상 어디로는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갈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시저의 육군은 이동과 보급에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서둘러 해군력을 양성하고 있었지만...... 항해와 해상전투 경험 면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인 그리스로 폼페이우스 세력을 몰아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천재적인 전략가인 폼페이우스의 육군 전력도 그리 호락호락 넘볼 처지는 결코 아닌데다가 그 너머로 이집트와 동방의 지원군대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에스파냐의 정예부대가 함선을 타고 언제든 불시에 시저 군대의 측면이나 후방에 상륙해 양면작전을 펼칠 우려가 항상 존재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핵심에 고대 그리스 이후로 난공불락의 해군요새로 명성이 자자했던 마르세유가 시저의 갈리아 원정대의 턱 밑에 둥지를 틀고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갈리아 전역에서 아마도 가장 먼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이고 작은 도시국가로 발전한 곳은 파리가 아니라 엄연히 마르세유였던 것이다. 로마가 건국하던 시기에서 조금 지났을 때 이미 그리스는 멀고도 먼 지중해의 한복판, 대서양으로 나가는 갈리아 지역의 중심에 마살리아(Massalia )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가 바로 지금의 마르세유이다. 마르세유 역사지구에 여러 개의 신전을 건설했고 아테네나 시라쿠사에 버금가는 해상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해군 전력 양성과 주둔에 필요한 난공불락의 최적 요새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끝자락 페니키아인들과 카르타고에 의해서 문명화된 에스파냐 사이의 거대한 갈리아 지역이 숲과 늪지대로 가득한 야만의 지역이라 무관심과 버림을 받은 영토였지만, 지중해 연안의 마르세유만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이미 그리스의 고대도시국가처럼 건설되었고 해군 요충지 목적의 그리스 식민지였던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는 마르세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스팔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함에 있어서도 강력한 로마의 해군력이 반란군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반란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을 쌓은 해군 지휘관이 바로 폼페이우스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로마는 마르세유를 점령하고는 요새화에 박차를 가했다. 역사지구의 그리스 신전과 주거시설을 헐어버리고 성을 쌓아 방어진지를 만들고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해안지구를 정비하여 함선을 수리하는 벙커를 만들고, 부두를 해군력 증강을 위한 무기고와 식량창고로 개조하였다. 그리고 항구로 진입하는 포구 양쪽 바위벼랑 위에 대대적으로 높고 두터운 성벽을 쌓아 요새화를 대폭 강화시켰다. 깎아지른 듯 거대한 바위암벽이 병풍처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해안 포구를 감싸 안고 있는 마르세유의 아주 독특한 지형은 열려진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이곳을 침략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다. 그 항구에 최강 전력의 함선이 정박해 있고, 먼 바다에 척후 활동을 위주로 하는 서너 척의 함선이 늘 떠있다면, 아마도 과거의 막강한 카르타고 함대라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마르세유 항구가 시저의 갈리아 원정군 턱밑에 도사리고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저는 브루투스로 하여금 해군 양성과 함선 건조를 서둘도록 명했고, 아그리파로 하여금 어떻게든 폼페이우스의 지상군을 그리스 반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서서히 몰아붙이게 명령을 내렸다.
시저는 휘하의 최정예 12 군단과 13 군단을 직접 거느리고 마르세유를 향했다. 시저의 원정군이 이 시기에 주둔하면서 작전본부로 삼은 곳이 바로 아를(Arles)이다. 그리고 시저의 2군단이 후방 지원군으로 주둔한 곳이 아를과 아비뇽의 중간지대인 오랑쥬(Orange)였다.
시저의 마르세유 점령은 그야말로........ 엄청남 시련이었고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만큼 마르세유는 천험의 난공불락 요새였다. 마르세유로 쳐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바다를 통해서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해상에서는 여전히 폼페이우스의 해군력이 우세했다.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최정예 선봉대가 마르세유 항구 양쪽 입구에 설치된 난공불락의 성벽 앞에 상륙했다. 그들은 오늘날에나 가능할 정도의 튼튼하고 깊은 참호를 마치 수로처럼 길게 파들어 가면서 성벽에 접근했다. 그리고는 지하로 들어가 성벽의 주춧돌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머리위로 엄청난 화살 공세를 막아내면서 말이다. 여러 개의 주춧돌을 빼내자 비로소 거대한 성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격군은 그 틈새에 어마어마한 화력을 폭발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무너진 성벽을 넘어갈 공성무기를 만들어 들여왔다.
상황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방어 사령관이었던 폼페이우스 측의 장군이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했다. 이 사실은 즉각 아를의 시저에게 보고되었다. 시저는 폼페이우스 군대 또한 같은 로마군대임을 강조하면서 피아간에 자칫 발생할지도 모를 다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의 민심과 피해를 줄이려고 소수의 경비부대만 마르세유 안으로 들여보내 빼앗은 함선만 지키도록 했다. 이틀 후 자신이 도착하여 성대하게 입성 퍼레이드를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폼페이우스 휘하의 장군과 부하들은 여전히 시저의 적이었던 것이다. 거짓 항복이었다.
파티가 벌어졌고 승리에 도취한 경비병들이 술에 취했을 즈음, 항복했던 폼페이우스 측의 군인들이 몰려나와 경비병들을 죽였고, 성벽 아래 설치되었던 폭발물을 제거했다. 선벽을 타 넘으려던 공성무기를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잠시 빼앗겼던 함선에 무기를 싣고 항구 밖으로 내보냈다. 항복 이전의 전시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었고, 빠져나간 함대로 인해 양쪽에서 협공이 가능해진 것이다.
시저의 분노는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총공세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또다시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고 시저 군대에 실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하지만 끝내 시저군은 성벽을 타넘어 마르세유 안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폼페이우스 군이 항복을 청해왔다. 시저는 이번에도 흔쾌히 저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어떤 보복이나 약탈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폼페이우스의 지배 하에서 군대를 포함한 지배층이 거주하던 상류층 거주 지역을 그야말로 들풀 외에는 제대로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초토와 시켜버렸다. 이제 마르세유 항구 안에서 해군을 위한 부두와 창고와 시설 외에는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시고 불태워 버렸다. 마르세유에 기반을 두고 살던 사람들은 이제 마르세유를 스스로 떠나거나, 어디든 움막을 치고 고기를 잡는 것으로 새로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오랜 세월동안 지중해 대서양 연안의 최고 교역항구로 발전해 오던 마르세유의 교역권을 모두 박탈해 버렸다. 그만큼 마르세유에 치가 떨렸음이었을 것이다. 지중해의 모든 교역권을 그동안 정든 아를로 넘겨주었다. 지중해에 아주 가깝게 위치한 넓고 깊은 론강의 하구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아를을 정식 무역항구로 지정한 것이다. 이후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마르세유는 오로지 해군 병참기지 역할만 맡게 되었다.
대신 마르세유는 시칠리아를 제외하면 지중해 최고의 국제 무역항구가 된 것이다. 사람이 몰려들고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 서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도시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갈리아 총독의 관저와 통치 사령부 등이 모두 아를에 설치되었다. 로마는 갈리아 지역을 통치하면서 제국의 위엄과 통치력을 내보이기 위하여 이곳에 원형 경기장을 건설했고, 이를 통해 너른 갈리아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차 로마에 동화되어 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원형경기장은 다분히 정치권력의 통치 수단의 하나로 생겨난 것이다. 피지배 세력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피가 난무하는 결투를 통해 극한의 오락성에 빠져들게 만들고, 때론 피를 흩뿌리는 정적 제거를 통해 로마에 굴복하도록 만들어진 놀이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극장은 달랐다. 그것은 대다수의 대중을 위한 시설이라기 보나는 소수의 로마 지배계급을 위한 조금 수준을 높인 문화센터였던 것이다. 횃불을 밝히고 무대에 올라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통해 로마인, 또는 로마의 지배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 원형 경기장에서 정신을 마취시키고 피의 절규를 부르짖는 일반 민중들을 현혹하고 세뇌시키는 장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문화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와 신분을 다짐하게 하고, 다른 어느 정도의 지적 욕구를 가진 대중들로 하여금 앞장서서 로마에 공헌하고, 로마인 신분을 얻게 되면 적어도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는지를 은근하게 내비춰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내전에 승리한 로마 6군단의 퇴역장군들이 주로 이곳 아를에서 터를 잡고 노후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여 아를에는 대중을 위한 원형경기장과 지배계급을 위한 로마극장이 함께 건설되었다. 인근인 오랑쥬는 시저의 측근들인 2군단의 근거지였는데....... 내전이 끝나고 군대에서 정년퇴직한 고위직급들이 체류하는 동안 오랑쥬의 자연과 생활환경에 취해서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오랑쥬에 집단 안주하면서 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의 자신들의 말년을 위해 인근에 프로방스식 포도나무가 아닌 로마식 포도나무를 심고, 다른 전쟁터에서 경험한 바에 의해 고급 오렌지 품종을 이곳에 가져다 심었다. 그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이 지역을 (오렌지 마을)로 부르기 시작해 오랑쥬가 되었다. 이들은 여가 선용을 위해 로마극장을 이곳에 건설했다. 와인과 오렌지만큼이나 시나 음악과 연극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세상에 남아있는 로마극장 중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의 원형에 가까운 극장이 바로 이곳 오랑쥬에 남아있게 된 이유이다.
시저는 원대한 야망을 가졌지만 끝내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기고 죽었다.
대신 그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제국 황제에 올라 모든 명예와 영관을 싹쓸이 갔다. 아를에 원형 경기장을 건설하고, 또 아를을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프랑스 파리에 못지않은 프랑스지역(갈리아 지방)의 최고 도시로 만든 사람이다.
로마를 벗어나 서쪽으로 가면 아를이 있고, 피레네를 넘어 리베리아 반도에 이르면 톨레도가 있었다. 그것이 서유럽이었다. 서로마가 멸망할 때 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아를은 그저 작디작은 프로방스 지역의 한 소도시일 뿐이다. 그것도 빈센트 반 고흐에 의해서 명맥을 이어내려오고 있는 관광도시로서 말이다.
아를의 옛 영광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어쩌면...... 믿을 수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를의 원형경기장과 로마극장과 함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로마 크립토포르티쿠스(Cryptoportiques d'Arles)는 아를 중심부의 지하에 거대한 아치로 이루어진 동굴형태의 건축물인데, 아마도 유사시 대피소와 전략물자 보관 장소가 아닐까 추측된다. 마르세유가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만큼, 시저 또한 자신의 주둔지인 이곳을 요새화 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용도로 생각하고 있다.
아를 원형경기장과 로마극장이 서있는 오튀르 언덕을 내려와 중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좁을 골목길을 걷다보면 옛 건축물들 사이로 제법 너른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이 나온다. 이 광장이 바로 아를의 중심인 것이다. 아마도 시저가 설치했던 갈리아 원정대 총사령부 막사도 이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 전통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왔고 지금은 아를 시청사(Hôtel de ville Arles)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시청의 우측으로 생 트로피 교회(Saint-Trophime church)와 성 안나 교회(Church of St. Anne) 교회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아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여기 생 트로피 교회에서 있었다. 십자군 정쟁이 한창이던 중세에 교황의 무자비한 폭정에 정면으로 마주 선 인물이 있었는데 독일 왕이었던 바르바로사(Barbarossa)였다. 흔히들 바르바로사 하면 지중해에 출몰하던 해적 중에 몇 몇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서 혼동이 되고는 하는데....... 본래 바르바로사 라는 뜻이 ‘붉은 수염’을 뜻하기에, 독일 왕 바르바로사가 너무나 유명한 왕이자 기사였던 까닭에 그 이후로 수염이 붉은 특출난 사람들을 대부분 그냥 쉽게 바르바로사로 불렀던 것이다. 독일왕 바르바로사가 원조 붉은 수염 영웅이다. 유럽의 정통 왕가 족보 혹은 정통 기사 인명에서 보면 실제로 가장 용맹했고 눈부신 전공을 세웠으며 교회와 교황에게 당당히 맞선 인물로 바르바로사란 이름이 당당하게 실려 있다. 바르바로사에 견줄만한 인물로 그의 뒤를 이어 십자군 전쟁을 이끌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1세 정도 뿐이었을 정도였다. 이 바르바로사가 황제 승계 내분에서 승리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즉위한다. 그런데 그 즉위식을 로마로 가서 교황 앞에서 치르기를 거부하고, 여기 아를의 생 트로피 교회에서 거행했던 것이다. 어쩌면 신권(神權)을 거머쥔 교황과 기반인 로마를 거부하고, 황권(黃權)의 중심이며 그 근원지가 로마가 아니라 로마를 벗어난 갈리아 서쪽이 중심이라고 만천하에 이를 선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대 최고 용맹한 기사였던 프리드리히1세는 제3차 십자군원정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육로를 택해 발칸반도를 지나 터키의 영역으로 진입하던 중에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진군하는 군대 행렬에서 떨어져 말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에 말에서 떨어졌으나 입고 있던 너무나 무겁고 육중한 갑옷 때문에 익사했다는 설과, 평소 수영을 너무나 좋아했던 왕이 강에 이르러 휴식 중에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익사했다는 설과, 교황의 음모로 독살되었다는 설 등이 무성하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바통을 이어받아 살라딘과 전설적인 영웅담을 무수하게 남긴 새로운 영웅이 바로 사자왕 리차드1세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 아를에서 꼭 찾아봐야만 하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다지 아를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그리 인기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흔적이 바로 여기 아를 시청사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망설임 없이 청사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이 있었지만 우리는 직접 그것을 찾아 사방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별반 힘 안들이고 우리가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꺾이는 구석에 호젓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쉽기로....... 계단을 가로막는 바리게이트가 쳐 있어서 계단을 올라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가 입구 쪽의 안내원을 쳐다보자 ‘접근금지. 올라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옅은 미소로 우리에게 대신 답을 해온다.
‘개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루브르에서 제대로 보아두었을 것을......’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혼잡한 루브르가 아니라도...... 혹 아를에서라면 여유 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레 보드 프로방스 여행이 좌절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기대로 한 것 부풀었었는데 말이다. 이런 젠장 할......... 오늘은 하나같이 제대로 되는 게 없네? 개뿔!'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 훨씬 더 아주 오래전인 까마득히 아득한 그 아주 먼 옛날........ 하루는 하늘나라 신(神)들만이 모여 사는 올림포스 산에 경천동지할 놀라운 소문이 전해졌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까마득히 떨어져있는 어느 외딴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상이 세워졌는데, 그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려고 그리스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바람에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아프로디테 여신(이후로는 비너스 여신으로 표기)은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신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이다. 올림포스 신전을 거닐면서도 비너스(아프로디테)는 헤라나 아테나 여신 앞을 지날 때도 콧날을 치켜세우면서 은근히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추었다.
그러자 이런 비너스의 도도한 모습을 시기라도 하는 듯이 저만큼 비켜 지나가던 헤라 여신이 아테나 여신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흘리는 이야기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크도니스의 조각상 이야기 들었지? 세상에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 벌거벗은 모습이래? 조각상의 치부를 보려고 세상 사람들이 죄 다 몰려가고 있대.’
‘저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 조각상이 어느 여신을 빼다 박은 듯이 똑같다면서요? 어떻게 하나? 얼마나 흉측할까?’
순간 비너스는 하마터면 발을 잘못 내딛어 넘어질 뻔하였다. 그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무리 신이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여자의 몸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옷이 완전 벗겨진 상태로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이라면....... 이건 비극이자 대단히 심각한 절망이 아니겠는가? 비너스는 즉시 거느리고 있는 님프를 코도니스로 보냈다. 직접 가사 사태를 목격한 님프가 돌아오기는 했는데...... 차마 쉽게 보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확인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것이........ 너무나 똑같습니다.’
‘이런 경을 칠........ 그래 그 조각을 만든 놈이 도대체 누구라더냐?’
‘아테네 사람 프락시텔레스(Praxiteles)라는 조각가입니다.’
‘그놈이 언제 어떻게 여기 올림포스 산에 올라와 내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단 말이냐? 그게 가능한 일이냐?’
‘인간이 이곳에 올라올 수도 없을뿐더러 여신님의 옷을 벗은 모습을 훔쳐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올림포스의 어떤 놈팽이가 내 벗은 모습을 훔쳐보고 지상에 내려가 세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몸을 훔쳐보았단 말이냐?’
‘그것도 절대로 불가한 일입니다. 저희 님프들이 여신님을 24시간 에워싸며 지키고 있는데....... 그것은 제우스신이라 해도 그렇게 훔쳐보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구석구석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똑같이 조각을 하자면...... 한두 번이나 잠깐 보아서는 그렇게 똑같게 만들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헐!!!!!
듣고 보니 더욱 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 아니겠는가?
여신의 목욕탕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작업실에서 모니터를 봐가면서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설혹 그렇다 해도 어떻게 똑같이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아무리 저작권 시비나 초상권 침해가 아직 법률제정이 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시대였다고 하지만, 감히 여신의 누드를 허락도 받지 않고 만들어 공개하여 이 같은 치욕을 안겨준단 말인가? ‘프락시텔레스 이놈은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몇 날 밤을 뜬 눈으로 지낸 여신은 끝내 더는 참지 못하고 노파로 변신을 한 후에 지상으로 내려갔다. 둥근 보름달 아래 코도니스 마을 광장에 도착해 텅 빈 광장에 우뚝 서있는 조각상을 마주하고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쩜....... 어쩌면 이렇게 닮다 못해 영락없이 똑같단 말인가?
오독한 콧날과 가지런한 입술은 물론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매끄러운 피부에다가 볼록 솟아난 가슴이며 신체의 크기까지 영락없이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순간 핑하고 서글픈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놈이 도대체 얼마나 내 벗은 모습을 훔쳐보았단 말인가?’
분했다. 치가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디선가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놈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의뢰받은 작품이 아직 남아있어서 아테네로 돌아가지 않고 마을 밖의 작업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길을 안내해라. 내 이놈을 아주 요절을 내리라.’
똑. 똑. 똑.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손에 정과 망치를 든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누구신지요?’라고 사내가 물었다.
‘여신의 신전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세상에 나도는 소문을 듣고 궁금하여 여신께서 보내셨네. 젊은이가 소문의 조각상을 만든 프락시텔레스인가?’
‘쌀쌀하고 밤이 깊었으니 잠시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 그리고..... 세상에 나도는 이야기는 모두 헛소문입니다.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 개의치 마시라고 여신께 전해 주십시오.’화롯불에 놓인 냄비에서 따끈한 차를 목기에 따라 건네주면서 프락시텔레스가 말했다.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신은 아무리 기억회로를 되돌리고 또 돌려보아도 도무지 이 사내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완전히 낯선 초면의 제멋대로 자란 수염이 더부룩한 평범한 사내였던 것이다.
‘젊은이는 비너스 여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미천한 석수쟁이가 감히 어떻게 여신을 뵐 기회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만 봤을 뿐....... 감히 바라기는 살아서 여신님을 한 번만 뵐 수 있다면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면서 정말로 그 분께 바치는 그럼 조각을 해보는 것이 저의 소원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디 가능하겠습니까?’
프락시텔레스의 답변을 지켜보면서 여신은 지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은 이제껏 일면식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혹?
‘그렇다면...... 자네가 이 조각상을 만드는 중에 혹...... 올림포스의 어떤 신에게서 비너스에 대해 조언을 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신께서 이 미천한 석수쟁이에게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떠도는 소문은 모두 그냥 입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 한 번도 만나거나 남의 조언도 받지 않았음에도 저렇게 닮았다는 조각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바꾸어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한 번도 여신을 뵌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마을에서 조각을 의뢰해 왔는데 세상에 이목을 끌만큼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이었다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오면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들과 제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생각과 기대를 조각에 그대로 옮겨 본 것뿐입니다. 제가 그렇게 조각 하나를 완성했는데 느닷없이 세상 사람들이 여신을 닮았느니 어쩌느니 자기들 마음대로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은 실제로 여신을 본 사람들일까요? 진짜로 여신을 만나 본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여신을 정말로 만나 본 사람이 제게 와서 닮았느니 어쨌느니 한다면 저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겠지만........ 이제껏 여신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는 모두 헛소문일 뿐입니다. 감히 말씀드리는 건데....... 비너스 여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나 조각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어쩌면 여신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프락시텔레스는 바보! 비너스가 지금 네 앞에 이렇게 있잖아. 바보야!’ 라고 말이다.
그제야 여신은 적지 않게 안도감이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우연일 뿐이다. 프락시텔레스도 입방아를 찧는 세상의 그 숱한 사내들도 어느 하나 자신의 본 모습을 대해 본 자가 분명히 없지 않은가? 그런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라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아뿔싸.........!!!!!!!
프락시텔레스가 하던 작업을 마저 하겠다며 돌아서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는데......... 오 마이 갓!!!!!!
아직 마감 단계까지 공정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해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단 또 다른 여인 조각상의 얼굴모습이 여신 자신의 본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세상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라면 탄복하고 있는데....... 지금 프락시텔레스의 작업공정이 여신상의 앙증맞게 부풀어 오른 가슴부위를 정과 망치로 다듬는 작업이었다. 망치소리와 함께 대리석 조각이 아주 잘게 부서져 튕겨 나가면 아주 정교한 가슴 모습이 다듬어지고 있는데........여신 자신의 진짜 가슴이 새롭게 정형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날 만큼 경을 칠 정도로 크게 놀랐다.
화들짝 놀란 여신은 그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허겁지겁 프락시텔레스의 오두막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노인이 떠났음을 알아 챈 프락시텔레스가 다가와 밖을 한 번 둘러보면서 이렇게 혼자 중얼 거렸다.
‘비너스 여신의 신전에서 왔다니까 차마 내가 다 말을 못했지만......... 내가 미쳤다고 비너스 동상이나 만들고 있겠느냐고? 하여간 착각도 자유겠지만 분수를 알아야지. 예쁘다 예쁘다 하니깐 비너스는 정말로 제가 세상에서 젤 예쁜 줄 알아요? 근데 아니거든? 지상에도 여신들보다 열 배 백 배 넘게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거든? 광장에 조각상이 비너스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아니거든? 그건......... 비너스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 갈만큼 예쁜....... 므네사레테(Mnesarete)가 진짜 모델이거든........ 여신보다 더 예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ㅎㅎㅎㅎ.’라면서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뒤돌아서 하늘도 올라가던 비너스가 이 소리를 만약에 들었다면....... 올림포스산 바위벼랑에 몸을 던져서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프락시텔레스와 함께 므네사레테를 찾나내서 능지처참을 했던지 영원한 신의 형벌을 가했던가 말이다.
아테네의 유명한 창녀이자 당대 그리스의 최고 부자그룹에 오른 프리네(므네사레테)는 프락시텔레스의 모델로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초기와 중기 2개 그룹으로 각각 3명씩이 등장하여 두각을 나타내는데....... 전기 그룹의 대표는 <원반 던지는 사람>을 조각한 미론을 꼽을 수 있고. 중기는 <크도니스의 비너스>를 만든 프락시텔레스가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크도니스의 비너스>는 그리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누드 조각상이다. 그리스의 조각은 올림픽 승자들을 완벽한 신체비례에 따라 최고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오로지 남성 중심의 예술이었다. 신전의 여신들은 아름다운 얼굴과 균형미를 갖춘 드레스에 몸을 감춘 여신의 모습으로만 드러났다. 극히 예외가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아테나 여신이 있을 뿐이었다. 남성의 누드는 칭송을 받았지만, 여성의 누드는 치욕과 모멸을 상징할 뿐이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여자는 남자를 위한 도구이거나 성노리개였을 뿐이다.
그런 문화적 토양 위에서 파락시텔레스는 과감하게 남성처럼 옷을 모두 벗어던진 <크니도스의 비너스>를 만들어 공개했다. 찬반양론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때부터 그리스 조각에 여성 누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크도니스의 비너스>를 필두로 프락시텔레스에게 수많은 여성조각상 의로가 쏟아져 들어온다. <아를의 비너스> 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그러니까 비너스의 원조는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크도니스의 비너스>이고, 이를 시작으로 프락시텔레스는 많은 비너스 조각품을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그런 이유에서 시작되어 루브르가 자랑하는 ‘비너스의 끝판왕’이랄 수 있는 <밀로의 비너스>를 프랑스는 어떻게든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려 노력을 넘어, 왜곡까지 시도했었지만...... <밀로의 비너스>는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이 아닌 그리스조각의 후기라 할 수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시기인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밝혀졌다.
<코도니스의 비너스>는 이곳 아를의 고대 로마극장 복원공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사방에 조각나 부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를 복원 수리하여 아를 시청사의 계단에 전시하였던 것을, 프랑스 정부가 대대적인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루브르. 오르세. 퐁피듀 센터를 개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따라 복원된 조각상을 루브로 가지고가 전시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복제품을 만들어 현재 아를 시청사 계단에 전시중이다.
그리스 조각사에 대해서는 이미 (르네상스 산책) 곳곳에서 조금씩 다루었던 적이 있고, 언제고 좀 한가한 시기가 오면 좀 더 심도 있게 한번쯤 제대로 다루어 볼 계획을 가지고 있기에 훗날을 기약하고자 한다. 프리네에 대해서도 다각적으로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아마도 그 이야기의 중심은 프락시텔레스가 될 것 같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를에 주말 장터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를 첫인상이 마치 유령도시라 생각될 정도로 적막과 매서운 추위뿐이고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강아지 한 마리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썰렁하더니 원형경기장에 이르러서야 간간히 지나가는 현지인과 몇 몇 여행자들이 보일 뿐이었다.
시청사 앞 공화국 광장에 이르러서야 제법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반대편 골목투어를 하다 보니 나타나는 대로에........ 와!!!!! 어마어마한 시골 주말장터가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인파가 몰려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차고 넘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세상에나....... 아를 현지인과 인근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지금 이 장터에 몰려있다. 나는 왜 이런 분위기가 마구마구 좋아지는 것일까?
우리는 무작정 ‘걸어서 시장 속으로’를 감행했다.
이제야 진짜 아를(Arles)을 만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알 럽 아를.
우리나라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전통 재래시장은 주로 오일장 형태이지만, 유럽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주말시장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평일에도 소규모의 상설시장 형태를 기본으로 깔고있지만 말이다.
역사가 유규한 전통시장에는 동서양 어디를 가나 진한 향수 배어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아련한 그리움 같은 그런 분위기와 정취가 있다. 그곳에는 온갖 물건이 거래되는것만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전해지고 호기심 가득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 넘친다. 인류가 떠돌아 다니면서 사냥에 의존하던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한 곳에 체류하며 먹거리를 채취하고 고기를 잡고 나중엔 씨앗을 뿌려 재배하기 시작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수렵생활을 병행하면서 모든 잉여 생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인류의 문명사 시작이 어쩌면 시장에서 부터였는지도 모를일이라는 말이다.
수렵이나 어업을 통해서였던 씨앗을 뿌려 재배를 했던 자신에게 필요한 이상으로 남게 된 물품을 필요한 것으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일단 다른 물건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마주쳐야만 수월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자면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마을에서도 사통팔달로 드나들기에 편한 교통의 요지에 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활동이 반복되면서 점차 시장이 마을이나 도시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근으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와 어느 정도 부를 창출한 사람들이 장사와 생활을 병행하기 위하여 좋은 집들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을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이어서 이 중심지에 점차 교회와 관공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물론 이슬람 지역은 유사하기 하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슬람은 가장 먼저 워낙 척박한 지역이다 보니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에 사원을 무조건 지었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일생에 한 번은 메카에 가야하는 신앙활동 방식으로 사막과 바위산을 돌아다니며 목축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하루에 다섯 번 기도 시간은 엄수하고 있자만 사나흘 혹은 일주일 걸려서라도 사원에 들리고 기도 시간에 참석을 한다면 메카 방문이 언제일지 몰라도 자신의 신앙이 언제나 정당하고 올바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일주 일에 한 번, 아니면 열흘이 걸려서라도 가장 가까운 곳에 사원을 찾아 알라신께 기도를 드리는 노력을 하나의 엄숙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하여 무조건 세상 곳곳에 일단 사원을 짓고자 했다. 며칠을 걸려 사원을 찾아가면서 일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커다란 신의 선물이 바로 사원 주위에 형성된 시장이었다. 일주일이나 한 달에 먼 장소의 사원에 기도를 하러가면, 그곳에서 생활에 필요한 일주일 혹은 한달치의 장을 볼 수 있었다. 시장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수익의 일부를 사원에 바쳤고, 사원은 이 돈으로 먼곳에서 찾아온 방문자들이 며칠이고 부담없이 머물다가 떠나갈 수 있도록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 이 시장이 커져서 마을과 도시가 생겼고, 훗날 카라반이 되고 점차 마을과 도시를 연결하여 실크로드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장은 요지경 신천지였을 것이다.
어촌의 어부가 도라지. 더덕. 명이나물. 취나물을 먹게 되었다. 산속의 화전민도 고등어와 꽁치를 먹을 수 있게된 것이다. 사막을 떠도는 목동도 시장에 가면 포도와 대추야자와 오렌지를 먹을 수 있게된 것이다. 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열린 마법상자였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이상으로 생겨난 잉여물자를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게 필요한 것과 맞바구는 물물교환에서 시작된 시장은 이내 전문 장사꾼인 거간꾼이 등장하게 된다. 싸게 사들였다가 꼭 필요해서 비싼돈을 내고라도 사야하는 사람에게 이문을 붙여서 상거래를 하는 전문가 집단이 등장한 것이다. 이 노련한 집단은 점차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넘어서 인위적으로 생산을 조절하는 방식으로까지 세력을 넓혀가면서 오늘날 방식의 자본주의 시장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적 상업주의가 가세한 시장의 탄생 이후로의 역사는 참으로 재미가 없다. 비정하고 그저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어떠게 보자면 가장 추악한 장소로 변해버렸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 까 싶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찾고싶은 시장은........ 장날이 되면 가지고 있는 가장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달걀꾸러미와 여섯마리 새로 태어난 강아지와 말린 고추 포대를 머리에 이고 아낙이 고개넘어 찾아가던 그 장터를 말한다. 꼴두새벽에 꼴을 쑤어 잔뜩 먹인 아비가 날이 새면 소를 끌고 산굽이를 몇 개나 넘어서 고을 나들목의 우시장으로 소를 팔러 나갔다가, 저녁이면 푸대종이에 둘둘말린 되지고기랑 꽁치 한 손을 사서 술냄새 푹푹 풍기며 다녀오던 그런 시장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적어도 이런 옛날 시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세대는 아마도 나보다 조금 늦게 태어난 세대까지 한정되지 않았을까?
현장일(노가다)을 하는 처지다보니 공휴일과는 친하지 못한지라...... 어쩌다 쉬는날이 장날이 되면 가끔 오일장터를 찾아간다. 주로 구운 김이나 과일을 사고, 아니면 마눌님이 김치 담구신다고 하면 배추나 충각무우를 사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미니 족발이나 호떡을 사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가........ 아니 아내와 나는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던지 항상 그곳의 시장을 먼저 찾아다니는 편이다. 어느나라 어느 도시를 가던 시장은 언제나 포근하고 훈훈하다. 그러고 언제나 어떤 아련한 그리움처럼 호기심피 팍팍 솟아오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풍경과는 전혀 다를테니까 말이다.
주말 시장이 벌어지는 도시 중심의 광장 인근에 소규모의 노점 상설시장이 평일에도 항상 열리기도 한다. 주로 꽃을 팔고 아침 새벽에는 갓구운 빵가계가 아침나절 정도만 장사를 한다. 역시나 유럽 주말시장의 최고 매력은 온갖 꽃들과 감탄이 절로 터져나는 여러가지 갖 구운 빵들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치즈가 아닐까? 옆으로 해산물 노점이 등이 해가 저만치 떠오를 때 까지만 열린다. 주말이 되면 아침부터 오후 1시 정도까지만 대대적인 주말 상설 시장이 열린다. 오후가 되면 상설시장이 문을 닫고, 다시 본래 자리를 잡고 있던 주변 상점들이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카페와 레스토랑도 있고 기념품점과 여행사들도 있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묵시와 인정 속에서 서로 윈윈해 온 것이다. 열두시 반 정도가 되면 서서히 상설 매장들이 노점을 접기 시작하면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주면을 아주 깨끗하게 물을 뿌려가면서 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한다. 대부분의 상설시장이 정부나 지자체의 관리와 점검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한다. 완전 시장 주변의 상일들과 노점상인들 간의 자치적인 논의와 협의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유지되어 나간다고 한다. 우리는 실제로 노점을 철수하는 과일가계와 그 자리에 그제서야 오후 장사를 여는 카페에서 함께 인수인계하듯이 철수도 돕고 새로 내어오는 테이블 정리도 도와주는 그들의 모습을 실제로 경험했다. 우리도 조금 거들면서 기운이 센 내가 과일 상자를 미니트럭에 실어주고 카페 테이블을 직접 가져다가 도로 옆에 설치하고 우리 자리를 삼았다. 오렌지 두 개를 주시고 떠나는 노점상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딱히 뭐라고 딱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현지의 시장이 정겹고 한없이 친근하다.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의 시장을 그냥 지나친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전통시장과 차이점을 굳이 찾고자 한다면.......... 그네들의 시장은 밝고 탁트인 깨끗한 환경이 유독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잘 정리 정돈된 확연히 차이가 느껴지는 그들의 진열방식 또한 매력적이다. 아울러 모든 물품에 대해서 철저하게 정찰제 가격표시가 되어 있다. 재래 시장에 오면 인근에서 실제로 재배하고 가공한(생산자 또는 가문의 명예를 내건) 최고 품질의 물건들이 실제로 인터넷이던 근처의 마켓이나 점포에서 파는 물건들에 비해 확실히 저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가격표를 내걸고 먼곳에서까지 찾아오는 현지인 고객들 앞에 놓여진 것이다. 거기에다 그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너무도 친절하고 여유롭고 자상한 모습이다. 자부심과 여유마저 느껴진다. 어느 백화점이나 대형마켓이나 다른 어는 거대 점포에선 도저히 마주치거나 구입할 수 없는 최고품질의 저렴한 핸드메이드 물품이 이곳에서 버젓이 판매되고 있기에 대를 이어 꾸준히 주말장터만을 찾는 연세 지긋한 고객들로 넘쳐나는 것이리라.
같은 전통시장이지만....... 분위기도 멋도 실제로 느껴지는 체감도도........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르다. 부럽고...... 가슴이 아파온다.
꽃. 빵. 과일. 치즈. 하우스 와인. 소시지......... 유럽을 가면 우리가 골목길을 순회하듯 배회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곳에 전통시장 혹은 주말 시장이 있으니까 말이다.
절대적인 여행 비수기에 해당하는 1월의 아를 주말시장에는 누가보아도 이곳에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여 지는 현지인들로 가득 넘쳐났다. 그런 짐작은 딱 한 장면으로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빵을 고르고 있는 할머니를 뒤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고, 고개를 돌린 할머니는 이내 시장으로 들어서는 한 가족에게 다가가 연실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는 듯 보이는 프랑스식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그러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아는 체를 하며 다가들 오고 악수를 하고 뽀뽀를 하느라 바쁘다. 어디 그뿐인가? 길게 늘어선 노점상 주인들도 오가는 모든 사람들과 연실 인사를 나누는데, 그것이 상인과 소비자 관계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저 이웃사촌을 간만에 모처럼 시장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무척이나 반가운 모습들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도시 였나? 프랑스 출신의 방송인 말이다. 딱 그 모습들이다. 프랑스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하면....... 멜랑꼬리한 불어 특유의 갬성(?) 보다는....... 좀 유별나 보일 정도로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온통 시장이 수다쟁이 경연장이다. 물건이 필요해 사러 나온 것인지, 밀린 수다를 떨려고 나온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어쩐지...... 여기까지 오는데 온 도시가 너무 썰렁하더니만.......
그랬음에도 1월 아를의 주말시장은 너무나 추웠다.
길게 늘어선 노점 뒤편으론 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가고, 테이블 사이로 가스난로가 켜져 있음에도 이 사람들이 굳이 싸늘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바깥 테라스나 노천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나 와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이유를 도무지 나는 모르겠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특히 마르세유 사마르테인 카페를 통해서 어느 정도 프랑스식 카페 문화에 빠져들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이런 정도까지는 좀 무리이지 싶다.
추우면 아무 카페나 찾아들어가 왁자지껄한 현지인들 사이에 비집고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알랑제 커피를 마신다. 합석도 좋고 자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서서 마시기도 한다. 별로 여행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인사도 나누고 ‘코리아’‘k-pop’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껴보기도 했다. 아를에 와서 처음으로 온전한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일상을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가 고파서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가 따끈한 프랑스식 음식..... 퐁듀라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비집고 들어가 앉을만한 식당이나 테이블이 나타나질 않는다. 어디나 만석이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여 지는 프랑스인들이 주말 점심은 반듯이 외식을 해야겠다고 하필 아를의 주말장터를 찾아 모여든 것처럼...... 식당마다 빈 테이블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시장 뒤쪽 골목 안쪽까지 돌아들어가 겨우 빈 테이블이 있는 역시나 붐비고 있는 식당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아뿔싸!!!! 터키 식당이다. 오로지 터키 음식이 전부인 오리지널 터키식당이다. 프랑스 소도시까지 와서 겨우 찾아낸 것이....... 케밥이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방향의 골목 어귀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왠지 낮이 익어 보인다 싶었더니....... 아를 하면 각종 여행 안내서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아를 여행의 명소 중에 명소라고 알려져 있는 바로 그곳의 입구가 아닌가?
어차피 오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려고 다니다 보니 얼떨결에 저절로 여기까지 당도하게 된 것이다.
중세의 성문을 연상시키는 육중한 석조 기둥 위에 (HOTEL DIEU)라고 적혀 있다.
본래의 이름은 (Hôtel-Dieu-Saint-Espirit)지만 오히려 (Arles의 Old Hospital)로 더 많이 불려 지게 되었으며, 그 이유에는 고흐(Vincent van Gogh)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사고를 저지르고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됨으로써 부터였고 심지어는 (아를의 반 고흐 병원)으로 통하기도 한다.
아를 시정부에는 16세기 당시 32개의 산하 자선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흐가 아를에 머물 당시 이 건물은 의료 시설....... 그러니까 시 보건소나 시립병원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아를 시립 주민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흐는 이곳에서 한 달은 입원을 했고 한 달은 통원치료를 받았는데, 그 기간 동안 유명한 아를 병원을 소재로 하는 두 점의 작품과 담당 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초상화 한 점을 남겼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오해를 낳기도 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대표화가이자 자신만의 정서를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표현주의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는 이제 역사상 최고의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대표적 유명화가라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정말로 미안하게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인상적인 화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이상하리만치 유독 후기인상파 화가들에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다. 사람마다 주관적인 취향과 관심이 다를 수 있듯이...... 내 자신으로서도 딱히 왜 그런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인상주의의 시작이랄 수 있는 쿠르베(Gustave Courbet)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다음 여행지인 몽펠리에를 아비뇽을 재끼고 선택한 이유에도 그곳에 가면 쿠르베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이 나름 작용을 했다. 고흐의 표현주의 보다는 쿠르베의 리얼리즘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 루브르에서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화가의 아뜰리에>를 보고나서 부쩍 <안녕, 쿠르베씨> 라는 작품이 궁금해 졌다. 그 작품이 지금 몽펠리에에 전시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관심을 가지기로는........ 아내인 챠밍 여사가 유독 좋아하는 모네(Claude Monet)라고 하겠다. 모네가 불러일으킨 ‘생채의 혁명’은 언제가 커다란 감동으로 밀려온다. 이번 여행에서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감흥은 루브르에 비해서 조금도 뒤질 것이 없었다. 아마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네의 수련 시리즈는 찾아다니면서 라도 아내에게 계속 찾아서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마네의 일부작품 까지는 관심이 쏠리지만 르노아르나 드가. 그리고 후기의 고갱. 세잔. 쇠라. 모로. 뭉크의 작품에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아직도 아주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 여기 아를 보다는 레 보드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을 가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곳에서 고흐의 작품을 현재적인 전시 방법과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화려하게 재해석된 감상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고흐거나 모네거나 클림트라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아를을 찾아가면 고흐를 떠올릴 수 있는 새 장소를 열을 올리며 쫓아다닌다. 첫 번째는 ‘고흐 정신병원’ 이고, 둘째는 ‘고흐 카페’이고, 셋째는 ‘고흐 여인숙으로 알려진 레스토랑 카렐 (Restaurant Carrel)’ 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바로 ‘고흐 병원’으로 알려진 아를의 병원이다. 아를 하면 고흐를 먼저 떠올리고...... 고흐하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정신병이 심각했으며, 자신의 귀를 잘라냄으로써 아를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아를 도심 초입인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않은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으로 아를에 정착했으며,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가장 강력하게 창작열이 불타올라 아를 체류기간 동안 흔히들 우리가 고흐의 대표작품으로 기억하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대표작품을 이곳 아를에서 완성시켰다. 그렇게 아를에서 새로운 희망과 건강을 되찾은 고흐는 절친 고갱을 초청했고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갈들이 시작되더니 불화가 점점 커져서 끝내는 자신의 귀를 잘라냈고, 고갱도 떠났다. 이때 치료를 받은 곳이 그림에 등장하는 아를의 명소가 되어버린 시립병원이다. 이후로 건강은 물론 정신질환이 급격히 악화된다.
하여, 결국엔 스스로 아를에서 좀 떨어진 생 레미의 수도원(Saint-Paul de Mausole)으로 자진해서 찾아갔다. 그곳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정신병 치료시설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어디서 어떻게 유래가 되기 시작했는지...... ‘아를 병원’을 많은 여행자들은 단순하게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자면 별 문제도 아니고 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고 해서 탈이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만....... 고흐 병원은 이제 시립 복지회관이 되었고, 정신 병원은 여전히 수도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사실을 쉽게 외면 할 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오늘날 최고로 비싼 대접을 받는 유명 화가이다. 그의 작품이 대단히 비싸다는 것 외에....... 정말로 고흐의 인생을 알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여행자들은 그리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는 사무칠 정도로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견디다 못해 스스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결론 정도까지 말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의 작품밖에는 팔리지 못한 운이 지지리 없는(?) 혹은 시대적으론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화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절대적인 여행 비수기에 해당하는 1월의 아를 주말시장에는 누가보아도 이곳에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여 지는 현지인들로 가득 넘쳐났다. 그런 짐작은 딱 한 장면으로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빵을 고르고 있는 할머니를 뒤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고, 고개를 돌린 할머니는 이내 시장으로 들어서는 한 가족에게 다가가 연실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는 듯 보이는 프랑스식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그러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아는 체를 하며 다가들 오고 악수를 하고 뽀뽀를 하느라 바쁘다. 어디 그뿐인가? 길게 늘어선 노점상 주인들도 오가는 모든 사람들과 연실 인사를 나누는데, 그것이 상인과 소비자 관계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저 이웃사촌을 간만에 모처럼 시장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무척이나 반가운 모습들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도시 였나? 프랑스 출신의 방송인 말이다. 딱 그 모습들이다. 프랑스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하면....... 멜랑꼬리한 불어 특유의 갬성(?) 보다는....... 좀 유별나 보일 정도로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온통 시장이 수다쟁이 경연장이다. 물건이 필요해 사러 나온 것인지, 밀린 수다를 떨려고 나온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어쩐지...... 여기까지 오는데 온 도시가 너무 썰렁하더니만.......
그랬음에도 1월 아를의 주말시장은 너무나 추웠다.
길게 늘어선 노점 뒤편으론 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가고, 테이블 사이로 가스난로가 켜져 있음에도 이 사람들이 굳이 싸늘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바깥 테라스나 노천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나 와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이유를 도무지 나는 모르겠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특히 마르세유 사마르테인 카페를 통해서 어느 정도 프랑스식 카페 문화에 빠져들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이런 정도까지는 좀 무리이지 싶다.
추우면 아무 카페나 찾아들어가 왁자지껄한 현지인들 사이에 비집고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 알랑제 커피를 마신다. 합석도 좋고 자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서서 마시기도 한다. 별로 여행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인사도 나누고 ‘코리아’‘k-pop’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껴보기도 했다. 아를에 와서 처음으로 온전한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일상을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가 고파서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가 따끈한 프랑스식 음식..... 퐁듀라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비집고 들어가 앉을만한 식당이나 테이블이 나타나질 않는다. 어디나 만석이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여 지는 프랑스인들이 주말 점심은 반듯이 외식을 해야겠다고 하필 아를의 주말장터를 찾아 모여든 것처럼...... 식당마다 빈 테이블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시장 뒤쪽 골목 안쪽까지 돌아들어가 겨우 빈 테이블이 있는 역시나 붐비고 있는 식당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아뿔싸!!!! 터키 식당이다. 오로지 터키 음식이 전부인 오리지널 터키식당이다. 프랑스 소도시까지 와서 겨우 찾아낸 것이....... 케밥이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방향의 골목 어귀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왠지 낮이 익어 보인다 싶었더니....... 아를 하면 각종 여행 안내서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아를 여행의 명소 중에 명소라고 알려져 있는 바로 그곳의 입구가 아닌가?
어차피 오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려고 다니다 보니 얼떨결에 저절로 여기까지 당도하게 된 것이다.
중세의 성문을 연상시키는 육중한 석조 기둥 위에 (HOTEL DIEU)라고 적혀 있다.
본래의 이름은 (Hôtel-Dieu-Saint-Espirit)지만 오히려 (Arles의 Old Hospital)로 더 많이 불려 지게 되었으며, 그 이유에는 고흐(Vincent van Gogh)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사고를 저지르고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됨으로써 부터였고 심지어는 (아를의 반 고흐 병원)으로 통하기도 한다.
아를 시정부에는 16세기 당시 32개의 산하 자선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흐가 아를에 머물 당시 이 건물은 의료 시설....... 그러니까 시 보건소나 시립병원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아를 시립 주민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흐는 이곳에서 한 달은 입원을 했고 한 달은 통원치료를 받았는데, 그 기간 동안 유명한 아를 병원을 소재로 하는 두 점의 작품과 담당 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초상화 한 점을 남겼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오해를 낳기도 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대표화가이자 자신만의 정서를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표현주의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는 이제 역사상 최고의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대표적 유명화가라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정말로 미안하게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인상적인 화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이상하리만치 유독 후기인상파 화가들에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다. 사람마다 주관적인 취향과 관심이 다를 수 있듯이...... 내 자신으로서도 딱히 왜 그런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인상주의의 시작이랄 수 있는 쿠르베(Gustave Courbet)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다음 여행지인 몽펠리에를 아비뇽을 재끼고 선택한 이유에도 그곳에 가면 쿠르베를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이 나름 작용을 했다. 고흐의 표현주의 보다는 쿠르베의 리얼리즘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 루브르에서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화가의 아뜰리에>를 보고나서 부쩍 <안녕, 쿠르베씨> 라는 작품이 궁금해 졌다. 그 작품이 지금 몽펠리에에 전시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관심을 가지기로는........ 아내인 챠밍 여사가 유독 좋아하는 모네(Claude Monet)라고 하겠다. 모네가 불러일으킨 ‘생채의 혁명’은 언제가 커다란 감동으로 밀려온다. 이번 여행에서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감흥은 루브르에 비해서 조금도 뒤질 것이 없었다. 아마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네의 수련 시리즈는 찾아다니면서 라도 아내에게 계속 찾아서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마네의 일부작품 까지는 관심이 쏠리지만 르노아르나 드가. 그리고 후기의 고갱. 세잔. 쇠라. 모로. 뭉크의 작품에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아직도 아주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 여기 아를 보다는 레 보드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을 가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곳에서 고흐의 작품을 현재적인 전시 방법과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화려하게 재해석된 감상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고흐거나 모네거나 클림트라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아를을 찾아가면 고흐를 떠올릴 수 있는 새 장소를 열을 올리며 쫓아다닌다. 첫 번째는 ‘고흐 정신병원’ 이고, 둘째는 ‘고흐 카페’이고, 셋째는 ‘고흐 여인숙으로 알려진 레스토랑 카렐 (Restaurant Carrel)’ 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바로 ‘고흐 병원’으로 알려진 아를의 병원이다. 아를 하면 고흐를 먼저 떠올리고...... 고흐하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정신병이 심각했으며, 자신의 귀를 잘라냄으로써 아를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아를 도심 초입인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않은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으로 아를에 정착했으며,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가장 강력하게 창작열이 불타올라 아를 체류기간 동안 흔히들 우리가 고흐의 대표작품으로 기억하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대표작품을 이곳 아를에서 완성시켰다. 그렇게 아를에서 새로운 희망과 건강을 되찾은 고흐는 절친 고갱을 초청했고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내 갈들이 시작되더니 불화가 점점 커져서 끝내는 자신의 귀를 잘라냈고, 고갱도 떠났다. 이때 치료를 받은 곳이 그림에 등장하는 아를의 명소가 되어버린 시립병원이다. 이후로 건강은 물론 정신질환이 급격히 악화된다.
하여, 결국엔 스스로 아를에서 좀 떨어진 생 레미의 수도원(Saint-Paul de Mausole)으로 자진해서 찾아갔다. 그곳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정신병 치료시설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어디서 어떻게 유래가 되기 시작했는지...... ‘아를 병원’을 많은 여행자들은 단순하게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자면 별 문제도 아니고 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고 해서 탈이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만....... 고흐 병원은 이제 시립 복지회관이 되었고, 정신 병원은 여전히 수도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사실을 쉽게 외면 할 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오늘날 최고로 비싼 대접을 받는 유명 화가이다. 그의 작품이 대단히 비싸다는 것 외에....... 정말로 고흐의 인생을 알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여행자들은 그리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는 사무칠 정도로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견디다 못해 스스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결론 정도까지 말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의 작품밖에는 팔리지 못한 운이 지지리 없는(?) 혹은 시대적으론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화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보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운명의 친구 폴 고갱을 만났지만, 고갱 마저도 자신을 떠나자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신이 준 선물, 결국 고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초인적인 창작열에 몰두한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고뇌하여 한 발 한 발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가는 반 고흐의 모습을 시종일관 화사하면서도 애잔한 추억처럼 슬픔에 한없이 빠져들도록 이끌어가는 영상미속에 프랑스 아를에서부터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줄리안 슈나벨 감독에 의해 빈센트 반 고흐의 눈부신 마지막 나날을 담은 기록이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 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2019년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서 관람이 가능하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감상했다.
고흐의 화가로서의 인생 발자취를 통찰해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했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고흐 역을 맡은 윌리암 데포(William James Dafoe)와 사제 역을 맡은 매즈 미켈슨(Mads Dittmann Mikkelsen)이 평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연기파 배우였던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데포의 명연기는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는 후보에는 올랐으나 수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한 번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분명 반 고흐에 대해서 새로운 깨달음과 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관심 때문이었다.
하여, 잘 알려졌건..... 혹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족하다고 시인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 내가 반 고흐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절치 않고 더 부족함만을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강력하게 반 고흐를 사랑하거나, 반 고흐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를 추천한다.
아마도..... 반 고흐라는 화가를 충분하리만치 더 알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애초의 목적지였던 레 보 드 프로방스 방문은 아쉽게 무산되었지만, 나름 아를에서의 여행은 즐거웠다. 특히나 프랑스 주말시장의 새로운 면모를 느꼈고 현지인들의 삶 속에 풍덩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마르세유로 돌아가는 시간에 맞추고자 이제는 천천히 아를 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아무리 그렇기로 아를 하면 떠올리게 되는 고흐 카페(le café van gogh arles)를 여기까지 와서 안 가보기도 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역으로 곧장 갈수 있는 길에서 옆 골목으로 살짝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좀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조금 돌아나가자 이내 처음이 아닌 듯 매우 익숙한 풍경이 시야 가득 다가왔다. 코흐가 이곳을 그린 풍경의 제목은 ‘밤의 카페 테라스(Café Terrace at Night)’였다.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88년 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모습은 그림속의 등장하는 시설과 색채가 그대로였는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가 없다. 하긴 그간 고흐가 다른 그림에서 그랬듯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같은 색채로 그렸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 장소의 모습과 색채가 그림속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구조변경이 되었고 색깔도 달랐다고 한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일 수 있겠고....... 어쨌거나, 프랑스 문화성과 아를 시는 1990년에서 1991년에 걸쳐서 여기의 카페를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다시 구조변경을 하고 색채 또한 그림과 똑같게 칠했으며 옛 모습처럼 다시 카페로 운영하면서부터....... 정말로 많은 여행자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게도 이날....... 우리가 찾아간 주말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긴 겨울 휴식기간 이라고 한다.
세상에나........
고흐 때문에 먹고산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아를이라면...... 다른 관공서나 여행지는 설사 문을 닫는다 해도..... 적어도 고흐와 관련된 명소는 일 년 365일 무조건 문을 열고 여행자들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대한민국이라면 너무도 당연했을 것을...... 여긴 프랑스....... 프랑스에선 프랑스 엿장수 맘대로........
아쉬움을 넘어서 영 개운치 못한 씁쓸한 여운 속에 발걸음을 아를 역으로 돌린다.
서둘러 마르세유로 돌아가 남은 도심 여행을 마저 강행하여야만 한다.
사마르테인 카페의 분위기와 커피가 벌써 그리워진다.
내일은 마르세유를 떠나 몽펠리에로 이동하는 예정일이다. 아직 이동할 차편도 예약하지 않았다. 일단은 서둘러 마르세유로 돌아가야만 한다.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아듀. 마르세유>로 이어가겠습니다.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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