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그곳에 가서 일주일을 살라한다면? 기꺼이 이스탄불.(istanbul)
누가 나에게 그곳에 가서 한 달을 살라한다면? 감격스럽게 피렌체.(Florence)
누가 나에게 그곳에 가서 일 년을 살라한다면? 차라리 아예 눌러 앉아 그냥 살래. 몽펠리에.(Montpellier)
몽펠리에 여행은 결코 짧지 않은 나의 여행 이력에서 선명하게 한 획을 긋는 하나의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몽펠리에 여행 이전과 몽펠리에 여행 이후는 앞으로 펼쳐질 나의 여행에 있어서 여행의 질적인 면과 추구하고픈 성향과 여행 목적지 선정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몽펠리에 여행은 감동이었고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언제라도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이제부터 써내려갈 글은 정말로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곳 몽펠리에(Montpellier)에 퐁당 빠져버린 솔직한 나의 고백이라고 미리 밝혀두고 싶다.
애초 이번 여행은 (파리 – 니스 – 마르세유 – 바르셀로나)를 근거지로 하고 그 주변을 둘러보는, 어디까지나 남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방점을 찍고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뭔가가 빠진 듯....... 어딘지 모르게 여행 스케줄이 허전해 보이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하고...... 새로운 여행지를 하나쯤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여행에서 굳이 마무리를 국경을 넘어 바르셀로나에서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가우디의 유작 성가족 성당의 내부를 지난 여행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에서였다. 하여 파리로 들어가 남프랑스 여행을 실컷 하다가 빠져나오는 시점에서 아주 잠간 바르셀로나에 들려서 서서히 완공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내부를 살짝 들여다보고 빠져나오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근처까지 간 김에 말이다. 주된 목적은 오로지 남프랑스의 코트다쥐르와 프로방스를 질릴 정도로 실컷 누리고 즐겨보자는 것이 전부였다.
하여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새로운 여행지 하나를 추가하기로 했는데....... 아비뇽과 툴루즈와 몽펠리에를 후보지 목록에 올려놓고 고심을 시작했다.
아비뇽은 처음부터 마르세유와 아비뇽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고심했을 정도로 강력한 후보지였다. 교권과 황권의 다툼에서 밀려난 로마가톨릭의 교황이 76년간이나 쫓겨나 유배생활을 했던(아비뇽 유수) 제 2의 교황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유명한 역사도시다.
툴루즈는 중세 시대를 통 털어 파리의 중앙권력과 늘 마찰을 빚어오던 최대의 대립권력 중심지였다. 특히 카타리파로 대표되는 로마가톨릭의 정통성과 권위를 전면 부정하는...... 흔히 ‘기독교 이단’의 진원지로 낙인찍혀 ‘역사상 인류 최초의 집단 학살’을 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파리의 프랑스 군왕에 맞설 정도의 재야권력을 가진 툴루즈 영주가 그런 카타리파의 지지자가 되어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서자, 교황이 프랑스 왕이 직접 이끄는 십자군을 파견하여 수 십 년에 걸쳐 전면전쟁을 벌인다. 툴루즈 산악지역인 카르카손 성채에서 저항하다가 끝내는 카타리파는 몰락한다. 이 전설 같은 역사의 이면에 예수 사후에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유럽에 도달한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들 카타리파를 이끌던 사람들이며, 성배를 포함한 기독교 보물에 관한 여러 전설이 생겨났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소설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다.
처음에 아비뇽으로 쏠렸던 나의 관심이 ‘카타리파’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나름 열심히 공부해왔던 터라 카르카손 성채에 꼭 가보고 싶었고, 카르카손을 가자면 툴루즈에 거점을 두는 것이 그나마 가장 유리하기는 했는데....... 툴루즈가 프랑스 서쪽의 지중해와 대서양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아주 깊숙한 산악지역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단점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주 우연하게 떠오른 곳이 바로 몽펠리에(Montpellier)였다. 정말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몽펠리에에 대해서 들어본 기억도 아는 바도 전혀 없었다. 아스라한 기억 어딘가에 아주 희미하게 몽펠리에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언제였는지조차 모르겠지만...... 프랑스 프로축구 스포츠 뉴스에서 몽펠리에를 본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것도 이강인이 뛰는 지금의 프랑스 리그가 아니라, 지네디 지단과 루이스 피구가 뛰던 시절의 프랑스 축구 스포츠뉴스에서였다.
그랬을 정도였는데, 프랑스 남부에서 니스와 마르세유를 제외하고 근거지로 삼고 주변을 돌아볼만한 새로운 거점 도시를 찾는 중에......... ‘몽펠리에는 작은 파리라고도 불린다.’라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서 니스는 코트다쥐르의 중심지이고, 마르세유는 프로방스 지역의 중심지라고 불리는데 이들 도시는 모두 지중해 연안의 동쪽 지역인 이탈리아 방향에 해당된다. 이곳을 제외한 서쪽의 스페인 방향을 랑그독 지방이라 부르는데 몽펠리에와 툴루즈가 바로 랑그독 지방의 대표명소라는 설명이었다. 툴르즈가 랑그독 지방 산악지역의 대표도시라면 몽펠리에가 랑그독 해안지방의 대표도시라는 부연설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교육의 요람이며 특히 의과분야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적혀있었다.
순간 어떤 전율처럼 ‘그래 이거다. 무조건 몽펠리에다’....... 그렇게 몽펠리에는 이번 여행의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베리아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를 차지한 이슬람교의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영내로 침입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에게 패하여 피레네 산맥 너머로 도망쳤고(737년) 이후로 급속도로 침체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 전쟁터가 바로 이곳 몽펠리에 근처였다. 이후 레콩키스타(스페인 국토회복운동)가 이사벨 여왕의 등장과 함께 거세게 벌어졌고, 끝내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밀려난다.
이슬람의 침공에 과감히 맞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기독교를 수호한 주인공은 프랑크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재상 샤를 마르텔이었다. 그의 아들 피핀에 이르러 무능한 메로빙거 왕조는 멸망했고, 피핀이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마르텔의 손자)이 바로 카를링거 왕조의 최고 전성기를 이끄는 샤를마뉴 대제인 것이다.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직접 황제의 자리를 하사 받음으로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쳤지만, 그후로 라이벌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1세에 밀려 평생 2인자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슬람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을 접해본 유럽의 봉건영주들과 로마가톨릭 역시도 마찬가지로 경악을 금치 못했고 깊은 고심에 빠져들었다. 이교도이자 야만인들이라고 치부해왔던 이슬람이 오히려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 걸쳐 눈부신 선진문물을 가졌고 이를 적극 활용하며 새로운 세상을 오랜 세월동안 펼쳐왔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동안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예술과 철학과 의학과 과학을 꾸준히 계승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로마가톨릭 주도의 신학만이 진리이자 전부라는 명제 하에 다른 모든 분야를 철저하게 탄압해 왔던 것이다. 신학 외에는 모든 것이 신성 모독이며 신성불가침을 해하려는 의도로 받아 들여 졌다. 참혹하고 악랄한 종교재판과 처벌이 정의이며 최고 진리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던것이 이제 동서의 교류 또는 동서 문명의 충돌을 통해서 그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지성인들이 교회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을 통해 고대 그리스 사상과 철학과 문화와 예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유럽의 지성인들에 의해서 유럽의 곳곳에 (대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럽이 신학의 그늘에서 허덕일 때,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선진 문명을 연구 계승 발전시켜서 이슬람식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이 바로 이슬람의 대학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슬람의 선진 문명과 문물을 연구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유럽에 대학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던 초기의 대학이 바로 여기 몽펠리에에 있었다는 사실은...... 몽펠리에가 그저 그런 흔한 도시가 아니라는 의미로 급격히 내 가슴에 슬며시 다가왔다.
그때부터 몽펠리에에 대해서 공부면 할수록 더욱 매력적이고 꼭 가보아야만 하는 여행의 새로운 목적지로 내 가슴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하여, 비행기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여행지로 파리나 니스 보다 오히려 몽펠리에를 꼽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선택과 기대에...... 몽펠리에는 너무나 훌륭하게 보답을 해주었다.
누가 나에게 지금 당장 다시 뛰어가고픈 여행지를 하나 고르라 한다면...... 몽펠리에!
인생 모두를 정리하고 조물주의 부름을 기다릴 장소를 하나 고르라면....... 몽펠리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못되었다. 그런 곳이 지구 저편에 있다......... 몽펠리에!
누군가 프랑스 여행에 대해 물어 온다면, 파리도 좋겠지만 실제로 훨씬 더 좋은 곳은 바로...... 몽펠리에!
위의 사진 14장은 구글 이미지를 통해 옮겨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길게 (몽펠리에 여행)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내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만 꾸려나가겠지만........ 전문가가 아니기에 사진에 문외한 정도인 수준의 내 솜씨로는 도저히 몇 장의 사진속에 몽펠리에의 진솔한 모습을 담아 고스란히 전해드릴 자신이 없어서 부득이 시작하는 즈음에 먼저 제대로 몽펠리에의 진면목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몇 장을 골라서 계재해 본다. (만약 이의 제기를 받는다면 언제든 삭제하겠음)
아슬아슬하게 겨우 마르세유를 빠져나와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정말로 아주 우연하고도 신통한 일이었겠지만, 하루 전날 마르세유에서 기차표를 예매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몽펠리에까지 무사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철도를 포함한 운송노조의 파업으로 마르세유 기차역이 그냥 문을 닫고 멈춰 섰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멈춰 선 것이 아니라 완전 폐쇄였다. 테제베(TGV) 마저도 역사의 폐쇄로 끊어졌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차라리 이번엔 버스타고 가볼까?’ 라고 단순한 호기심 발동에서 시작된 플릭스 버스(FlixBus) 선택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낳을 줄이야? 운송노조의 파업도 경찰의 철통같은 도심 저지선도, 오스트리아 비인을 출발해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여기 마르세유에 들러 몽펠리에에 잠시 정차했다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까지 운행하는 국제노선의 플릭스 버스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남프랑스의 해안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이윽고 우리의 오늘 목적지 몽펠리에에 도착했는데........ ‘헐!’ 그리고 또 ‘헐’
몽펠리에 버스 터미널이 아니고 도심 외곽지역 고속도로 진출입로에 가까운 사빈느(Sabines)정류장이다. 여기에서의 정류장은 우리나라 시내 곳곳이나 시골 도로변에 있는 아주 흔한 시내버스 정류장을 가리킨다. 벤치 두 개에 비를 피하는 플라스틱 지붕을 가진 그런 정류장 말이다. 국경을 넘나들면 유럽의 유명한 대도시를 오가며 연결해주는 국제선 버스가 시 외곽의 간이 버스정류장에 잠시 정차를 해서 약식으로 버스터미널의 역할을 한다? 가히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로 그런 간이 정류장 부스 앞에 국제선 버스가 멈춰 섰고 우리도 서둘러 내려서 티켓을 제시하고 짐칸에서 배낭과 캐리어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스페인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을 새로운 손님으로 태웠는데, 여기까지 올 때도 만석이었고 다시 떠날 때도 만석을 꼭 채우고 떠나간다. 그리 오래 멈추지도 않는다. 또다시 먼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처럼 말이다.
헐!!!!!
닷새 후에 우리는 다시 이 장소에서 방금 출발한 버스와 똑 같은 버스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동한다. 하여, 단순하게 몽펠리에 숙소에서 여기 사빈느 정류장을 어떻게 오가는지를 미리 경험해 보기 위해서 기차가 아닌 버스를 택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실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 우리의 무사여행에 커다란 힘을 보태주었던 것이다.
일단 현재의 상황과 위치를 파악하고 몽펠리에의 대중교통 노선에 대해서 이해를 해 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방금 여기에 제법 많은 여행자들이 함께 내렸기에 많이 붐비고 소란스런 상황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 건너편으로 도심 외곽은 새로운 상권처럼 느껴졌다. 인접 상가에 카페와 레스토랑과 여행사 간판이 즐비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메고 도로를 건너 한 카페를 찾아 들었다. 노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는 커피를 주문했다. 언제나처럼 커피 알롱제에다가 뜨거운 물을 별도로 부탁한다. 그러면 결국 에스페레소에 물을 타서 설탕을 조금 넣는 아메리카노 커피 비스무리가 되는 것이다.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일단 허기를 면하고 화장실 사용을 하고, 여행 계획서를 꺼내 예약해 둔 숙소에 대해 검색하고 나서 버스 정류장과 등지듯 마주하고 있는 트램 정류장에 가서 노선도를 통해 몽펠리에 대중교통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노 프로블럼. 애브리 싱 이스 화인!!!!!!
유독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트램이 참 예쁘다. 이제껏 여러 나라에서 보아 온 트램 중에서 가장 예쁘다. 그리고 참으로 다양하다. 노천카페에서 서둘러 숙소를 찾아 나설 생각도 잊은 채 멍하니 연실 오가는 형형색색의 트램만 쳐다보고 있다.
사빈느는 모든 몽펠리에 트램의 종점이자 기착지이며 차고이며 정비소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몽펠리에에 운행하는 4개 노선의 모든 트램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일단 이곳에서 시내까지 같은 노선으로 들어가다가 갈리는데, 그중에 3개의 노선이 몽펠리에 기차역에서 나뉘어져 각자의 노선을 찾아간다. 다시 말해서 몽펠리에 여행은 트램만 이용할 수 있고, 몽펠리에 기차역만 찾을 수 있다면 거의 대부분이 저절로 해결된다고 보면 된다.
걸어서도 충분한 몽펠리에 여행........ 그야말로 이 도시는 지상 최고의 트램 천국이다.
내가 찾아가는 유럽의 여행지마다 대략 몇 가지의 필수적인 선택요소가 반듯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몽펠리에에는 어이없게도 우선순위로 꼽는 두 가지 요건이 없다. 하나는 로마(Roma)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르네상스(Renaissance) 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두 가지가 몽펠리에에는 없다.
몽펠리에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300여년 가까이 긴 중세 암흑기를 거친 후에 유럽을 침공한 이슬람 세력을 프랑크 왕국의 재상 마르텔이 눈부신 승리로 저지하게 되면서부터 전쟁터 인근의 작은 어촌마을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기에 로마 가도도 없고 원형경기장이나 로마극장이나 신전도 없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갈리아 지방의 서쪽 끝자락에 놓인 이유로 르네상스 영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이슬람 문명이 스페인지역에서 몽펠리에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 피렌체까지 흘러들어간 다음에 찬란한 문예사조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만, 아쉽게도 그 찬란한 문명의 혜택이 갔던 길을 통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르네상스를 쫓아 이 길을 지나갔던 스페인 지역의 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서 약간 정도의 새로운 문예사조가 흔적을 아주 조금 남긴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몽펠리에가 비록 르네상스의 눈부신 성공과 영광을 함께하거나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몽펠리에 사람들 가슴속에는 르네상스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역사와 미술사 학자들이 말하기를....... ‘르네상스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의 독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했는데........ 르네상스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이자 시인인 페트라르카가 바로 여기 몽펠리에 대학 법학부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몽펠리에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최초로 생긴 대학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슬람의 선진 문명에 감복한 몽펠리에 지역의 유지와 교회가 앞장서서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이슬람권으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지식과 교양을 가르쳐야만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앞선 의료기술을 체험한 유명한 의원(의사)들이 이곳을 지나치다 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의 후원을 받아 장기 체류하면서 젊은 의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비뇽으로 이주해 온 교황청을 따라 왔던 훌륭한 학자들을 교회가 초빙해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학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교육의 열기가 점차 유럽 각 지역으로 파급되면서 중세시대 봉건영주국가에서 정식으로 임명하는 고등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등록된 유럽 최초의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이 설립한 볼로냐 대학이다.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에 파리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이 설립했다. 실질적으론 최초라고 인정받는 몽펠리아 대학의 경우는 한참 뒤인 1220년에야 스페인 마요르카 왕국 소속으로 정식 대학 인가를 받게 된다. 이 대목에서 왜 프랑스 대학이 스페인 왕국에 소속되었느냐? 이에 대한 역사는 차차 논의하기로 하겠다.
이처럼...... 로마 역사도 없고 르네상스도 없는 몽펠리에를 내가 왜 예외의 경우로 굳이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그 또한 몽펠리에 대학과 연관 지어서 몽펠리에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매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느 여행 잡지나 SNS나 블로그에도 없는 내용과 표현으로...... 지극히 내 개인적인 주관적 관점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결론지은 그 이유를 이쯤에서 먼저 간략하게 피력하고 나서 차차 여행기를 통해서 몽펠리에에 ㄷ대해서 다시 세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하자.
몽펠리에(Montpellier).
몽펠리에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좀 특이하게 나의 주목을 잡아끈 대목은 (1993년 이후로 몽펠리에의 인구가 유럽 전역을 통 털어 으뜸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라는 대목이었다. 어느 특정 지역의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현재의 시점에서 그냥 단순하게 보거나 쉽게 지나칠 문제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갑자기 무슨 실리콘 밸리가 새로 들어 선 것도 아니고, 정동진처럼 영화나 매스컴을 통해 벼락 맞듯이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둔갑한 것도 아니고, 두바이처럼 어떤 목적을 가지로 새롭게 건설된 신도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프랑스 전역에서 여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주하고 살아가는 터전으로 몽펠리에를 선택하고 앞다투어 사람들이 몰려오는가가 당장 나에게 무척이나 궁금한 숙제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싫은 곳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불편한 곳을 절대 안식처로 선택하지 않는다.
내가 몽펠리에에 체류할 시기의 도시 인구가 약 28만 명을 조금 넘어선다고 했다. 한 도시의 실질적 거주인구가 30만 명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어느 정도 모든 분야에 있어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람들이 모여 더불어 살만한 도시가 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몽펠리에는 이제 그런 요건과 자격에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참으로 뜻밖의 놀라운 비교가 첨부되어 뒤따르고 있었다.
28만 명 몽펠리에 인구의 절반이 평균연령 35세 미만의 세계에서 꼽힐 만큼 젊은 도시라는 사실이었다. 도시 공학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학문적 잣대를 투입하고 들이댄다 해도 과연 이런 결과가 오늘날 가능하다는 말인가? 한때는 ‘작은 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몽펠리에가 지금은 ‘가장 젊은 도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가장 사랑스러운 도시’로 불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몽펠리에에 무엇이 있어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변신이 가능하단 말인가?
거기에 더해서...... 기가 막힐 사연 하나를 더하자면.......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8만 5천을 조금 넘는 인원이 모두 학생이라는 사실이다. 몽펠리에의 다른 이름은 ‘젊은 대학도시’다.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이를 절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그들 속에 묻혀서 함께 지내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 아름답고 살기 좋은 몽펠리에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몽펠리에는 좋은 여행지로서가 아니라 좋은 쉼터로 찾아가라!’
몽펠리에에 도착해 우선 가장 기쁘고 반가운 것은 여행이 아니라 날씨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도록 따사로운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랗고 투명한 하늘과 겉옷을 벗어버려도 포근함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천국의 날씨가 우리를 환영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20여 일에 걸친 이번 프랑스 여행 강행군의 여독이 결코 만만치가 않아서 사실 우리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20일중에서 날씨가 쾌청했던 날은 단 하루, 그것도 카시스(Cassis)에서의 한나절 정도가 거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남프랑스 코트다쥐르와 프로방스 지역의 연중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과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는 말짱 도루묵이거나........ 개뿔!!!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20일 내내 한나절을 제외하고는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잔뜩 찌프린 날씨거나, 흐린 하늘에 미스트랄이라는 알프스에서 지중해로 불어 내려오는 계절풍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연일 쏟아지듯 불어오고 있었다. 현지인들 입에서도 ‘지구 온난화로 생겨난 예측불허의 날씨’라고들 한탄을 흘려놓았을 정도였다. 해마다 점점 혹독한 겨울 추위가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과거의 온화하고 따뜻한 남프랑스 날씨에 대한 기대가 차고 넘쳐서 그 흔한 패딩 하나 챙기지 못하고 바람막이 점퍼로 여기까지 버텨왔으니....... 지칠 때도 되었지 싶었던 것이다.
‘날씨 천국’ 몽펠리에!!!!!!
감격스럽다는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옅은 코발트빛 하늘에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름 한 점이 없다. 우리가 도착한 오후의 기온이 섭씨 14도 정도에 머물고 있다. 햇살아래 나서면 따사로움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고, 그늘에 들어서면 약간의 선선함이 느껴진다. 거기다가 무슨 놈의 햇살은 저리도 눈이 부신단 말인가. 그동안에는 모진 바람과 먼지 때문에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면 여기서는 산산이 부서져 마구마구 쏟아져 내리는 가시광선 때문에 선글라스를 꺼내 써야할 지경이다.
‘여긴 절대로 프랑스가 아니야. 이 겨울에 프랑스에서 이런 날씨를 가진 도시는 절대 없을 테니까....... 이게 어떻게 프랑스야? 이건 영락없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날씨잖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마을 생김새는 프랑스인데 옷 입고 나온 폼은 틀림없는 스페인이네?’
‘왜 그런지 가르쳐 줄까? 중세 초기까지 이곳은 스페인 영토였으니까. 영화 <엘시드>에 나오던 발렌시아의 마요르카 왕국이 오랫동안 이곳을 지배했었어. 나중엔 이사벨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도 왕의 아라곤 왕국이었던 것이지. 훗날 재정 상태에 쪼들린 아라곤 후대 왕이 여기 일대를 프랑스 왕에게 팔아버림으로써 그대부터 지금의 프랑스가 된 거야. 아마도 스페인 왕이 땅은 팔았어도 하늘을 팔지 않았었나봐. 근저당만 설정하고...... '
올드 시티(역사지구)의 경계에 형성된 현대적 상권 건물의 안쪽 깊숙한 2층에 숙소를 잡고 대충 짐을 내려놓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다시 나왔다.
모처럼의 햇살이 너무도 그립고 반가웠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이 비교적 아주 가까운 인근에 모두 위치해 있기에 살짝 맛보기를 하고 싶었다.
제각각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치장한 앙증맞도록 예쁜 트램들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몽펠리에 구도심의 골목 사이고 연실 드나드는 모습이 가히 신기할 정도였다. 어떤 환상적인 미니어처 도시를 만들어 놓고 기차놀이 대신 트램 놀이를 하는 것이라 할까? 무단 횡단이라는 의미가 이곳에서는 필요치가 않다. 그곳은 그냥 도시공원이고 어디는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이고 이따금씩 장난감 트램들이 오고가는 것이다. 길을 잃지 말라고 도로마다 땅바닥에 길게 철로 금을 그어 놓았다. 이리저리 꾸불꾸불하게 말이다. 오가는 행인들에게 거의 장애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장난감 트램들은 4량 혹은 5량 정도로 길게 늘어서 오고가는데 천천히 사람이 뛰어가면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속도에다가 유독 눈에 확 띄는 것은...... 지상고가 아주 낮다는 사실이었다. 어찌나 낮은지 거의 땅바닥에 닿아서 기나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의 트램 정류소는 지면의 높이보다 25cm 정도 높게 블록 위에 길게 설치되어 있는데, 도로에서 오르기에는 그냥 평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완만하다. 고 정도 아주 약간 높여 놓은 정류장에 트램이 정차하고 문이 열리면 트램 실내의 높이와 정류장의 높이가 기가 막힐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유모차나 목발을 짚고 있거나 두 돌이 막 지난 꼬맹이라도 트램을 이용하는 게 문턱이 있는 안방이나 화장실을 들어가는 것보다도 훨씬 편하고 수월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느낌으로 1분 전후로 이어져 오는 트램의 배차 시간은 거의 혼잡이라는 느낌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오로지..... 우리나라로 치자면 명동쯤이라 해야 할까......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코미디 광장의 틂 정류장만이 좀 예외적으로 혼잡한 느낌이라고 할까.
몽펠리에는 역사지구(구도심)은 어디를 카메라에 담던 거의 대부분 트램이 배경처럼 나타난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트램들이 장식처럼 배경처럼 도심의 곳곳을 수를 놓으며 지나다닌다. 어디에서도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다.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그런 느낌을 말이다.
그 역사지구에서는 트램 외에는 차량을 볼 수가 없다.
역사지구 전체가 오로지 오가는 사람과 트램 에게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차량 통행 불가지역이다. 그러니 사람들 걸음걸이가 그리 서두는 것도 없어 보이고 주행하는 차량의 위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유로움과 여유가 도심 곳곳에서 묻어난다.
어쩌다 앰블런스나 순찰차가 있기는 하지만, 순찰하는 순경도 우체부도 주로 미니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다만 이른 새벽에서 아침까지는 청소차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미니트럭들이 구도심 여기저기에서 눈에 띤다. 낮에는 리어카와 개량된 손수레 차량이 물건을 실어 납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외는 오로지 트램 뿐이다.
이처럼 몽펠리에 역사지구는 오로지 인간 중심 도시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역사지구에서 대략 2km 떨어진 지역에 신도시가 활발하게 건설되고 있다. 아마도 세상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초현대적 도시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그런 초현대적 신도시 건설에도 최고의 주안점은 친환경 그리고 친인본주의가 최고의 덕목으로 추구된다. 넓직한 도로와 차량과 버스 같은 대중 교통이 구도시와 신도시를 원활하게 운행하고 있는 반면에........ 사전 철저한 도시 계획 하에 구도시와 신도시의 사이에 공원과 여러 문화시설과 사회공공 시설들이 멋진 조형물처럼 건설되어 하나의 커다란 통로처럼 연결되도록 만들었는데, 그 통로의 인근이 거의 모두 숲과 강물과 잔디밭으로 된 공원이다. 구도심에서 시작된 이 연결 통로의 끝이자 신도심의 시작되는 곳에 초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웅장한 시청 건물이 한껏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인간이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
도시라는 공간에 모여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친환경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
역사를 기리고 보존한다는 것........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곳에 가면 그런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바로 몽펠리에(Montpellier)에 가면......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듯 건물 내부의 모든 벽들은 무척이나 두꺼웠다. 높은 창들의 외부창문 틀은 역시나 두터운 목재로 만들어졌고 내부 창은 샷시로 꾸며졌다. 1층이 상가로 된 4층 건물이었음에도 건물의 가운데 중정(내부 실내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서내 개의 화분을 벽에 매달았고 여행자들이 주로 흡연실로 이용하는 듯 보이며 걸터앉을 수 있는 나무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아무튼 이런 육중한 건물의 안에서도 조금 협소해 보이지만 창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개를 들면 아무 때고 파란 하늘을 직접 올려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숙소를 나와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아 라임스톤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루가 보인다. 12세기에 몽펠리에는 하나의 성채도시였다. 역사지구를 뺑 둘러 에워싸듯 성벽을 만들어 둘러치고 군데군데 망루와 성문을 만들어 외부와 소통하였다. 오늘에 그중에서 두 개의 망루가 남아있는데, 투르 데 팽(Tour des Pins)과 투르 드 라 바보트(Tour de la Babotte)가 그것들인데 지금 숙소 바로 옆에 남아있는 망루가 바로 라 바보트 이다. 이 망루 옆을 돌아 안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곳에 바로 몽펠리에의 중세 시대가 펼쳐진다.
라 바보트를 지나 곧게 펼쳐진 트램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왼편으로 거의 정삼각형의 형태를 띤 숲을 만나게 된다.
스퀘어 플랑숑 공원(Square Planchon) 이다. 공원의 앞쪽 건너편이 바로 몽펠리에 중앙기차역이라 할 수 있는 세인트 로흐(Gare Saint-Roch – République) 기차역이다. 그러니까 몽펠리에의 로흐 기차역 앞 광장에 만들어진 시민공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공원은 이름의 프퀘어 플랑숑에게 헌정되었는데, 와인의 나라 프랑스에 1910년경에 포도나무에 치명적인 필록세라 라는 포도나무에 치명적인 병이 발생하여 포도농사는 물론 와인산업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몰렸을 때,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쥘 에르 플랑숑이 필록세라를 박멸하는 처방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였다. 하여 이 공원에 그의 이름을 명명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세인트 로흐 기차역에는 테제베(TGV)도 정차한다. 그만큼 남프랑스 교통에서 운송과 물류 중심지로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몽펠리에의 도시 전체를 빼곡히 거미줄 망처럼 트램 노선이 뻗어나가고 있고, 그 모든 노선의 트램은 반듯이 이곳 기차역을 거쳐 간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지정한 대중교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다시 발걸음을 왼쪽으로 옮겨서 조금만 걸어가면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주변의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파리의 어딘가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내 넒은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많은 인파와 노천카페의 형행색색 파라솔이 길게 늘어서 있고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는 버스킹 연주와 노래가 들려온다.
몽펠리에의 핫 플레이스이자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나는 지점인 코미디 광장(Place de la Comédie)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식하는 희극(코메디. 개그)의 느낌 때문에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방식의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대학로 광장) (소극장 광장)으로 이해하면 맞는다고 하겠다. 오페라 하우스, 시민 극장, 영화관 등이 들어서 있는 몽펠리에 문화 예술의 중심지에 위치한 광장이 코미디 광장인 것이다.
마르세유에서 10번 가까이 드나들었던 사마르테인 카페를 연상시키는...... 몽펠리에 코미디 광장에서 단박에 한 눈에 쏙 들어온 영화관 카페(Café du Théâtre)의 노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현지인들 사이에 파묻혀 커피를 마신다. 자못 환상적이라 해야겠다.
광장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 많은 사람들과 건너편으로 끊임없이 오가는 예쁜 트램은 아름다운 풍경의 덤인가? 거기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포근한 날씨........ 몽펠리에의 첫인상은 모처럼만의 한없는 여유와 행복감이다.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육중한 나무 창문을 열고 중정을 통해 올려다 본 하늘은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코발트빛 하늘 한 조각이 찔끔 내려다보며 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 온다.
새로 찾아 온 여행지 몽펠리에의 잠시 맛본 어제 오후의 따사로움이 긴장을 모두 무장해제 시켰음일까? 아니면 근 20여일의 강행군이 어떤 한계를 드러냈음일까? 챠밍 여사가 미열이 있는 상태로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준비해간 상비약을 복용하고 좀 더 쉬기로 했다.
밖으로 혼자 나섰다. 여행 중에 아침 산책은 눈발이 날리던 폭우가 쏟아지던 의례히 해오던 하루의 시작이며 이제는 떼어내기 힘들 정도의 습관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고풍스런 건물들 지붕 사이로 벌써 눈부신 햇살이 듬뿍 쏟아져 내린다.
숙소 코앞의 도로 양쪽이 모두 마주보고 있는 트램 정류장(Observatoire)이다. 몇몇 학생이나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트램을 기다리고 있고, 저만치 예쁜 트램이 다가오고 있다. 그 간격이 채 2분이 되지 않아 보인다. 저만치 골목 사이로 트램이 사라졌다고 싶으면 다시 반대편으로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트램이 보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봉주르(bonjour)!’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다. 그들 역시 환한 미소와 함께 ‘봉주르’ 라고 화답을 해온다. 누가 현지인이고 누가 여행자인지 적어도 이런 아침 풍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가 그냥 이 순간엔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아침을 맞고 있는 이웃인 것이다.
트램 철로를 따라 쥬 드 뽀므가를 걷는다. <몽펠리에 개선문>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산책을 나선 것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프롬나드 뒤 페이루(Promenade du Peyrou) 광장이 나타나는데 굳이 번역을 한다면 ‘돌의 광장’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광장의 주위로 몽펠리에의 상징과도 같은 멋지고 이름난 명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개선문(Arc de Triomphe)과 몽펠리에 대성당(Cathédrale Saint-Pierre), 헌법재판소(Tribunal Judiciaire de Montpellier), 법원. 시청. 몽펠리에 대학교. 루이 14 세의 승마 동상과 생 클레망스 수로(Aqueduc Saint-Clément)를 비롯한 몽펠리에 여행의 대표적 명소들이 대부분 이 주변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가벼운 아침산책길이었고 나중에 아내랑 다시 이곳을 세세하게 살펴볼 것이기에 지금은 그냥 트램 철로를 따라 올드 시티(역사지구)를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몽펠리아 대학은 대성당과 접해있다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이웃해 있었다. 이곳이 유럽에서 처음 대학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생겨난 장소일 것이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짐작했던 것처럼 그 시작은 아마도 여기서 의대 분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몽펠리에 대학이라고 해서 커다란 캠퍼스가 이곳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대학의 본관 건물은 훗날 이곳에서 조금 아래쪽 왼편에 위치한 몽펠리에 식물원 영역에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나, 중세 이전인 초기에 대학들은 지금의 대학 캠퍼스나 운동장을 가지지 못했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서울대처럼 의대는 마로니에 공원에 농대는 수원에 있던 것처럼, 대성당의 한 구석을 비워서 의료분야 강의를 시작했으면 점차 그곳이 의대가 되었고, 서너 불럭 떨어져 시청 사무실 하나를 비워서 법학을 강의했으면 나중에 그곳이 법대가 되었고, 강변의 창고를 비워서 기하학과 토목학과 건축학을 강의했으면 그곳이 공대가 되었다. 몽펠리에 대학은 하나였지만, 강의동이나 단과대학은 도시 이고저곳에 흩어져 소위 대학문화라는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성당에 붙어있는 초기 의대 건물에 들어섰는데...... 오늘날의 여타 우리나라 대학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관리자가 산책 나온 낯선 여행자를 단박에 알아본다. 다소 멋쩍은 아침 인사와 함께 출입구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고, 양해를 구한 뒤 건물 안쪽의 작은 휴식공원이랄까 잔디밭을 잠시 밟아보는 것으로 몽펠리에 대학 구경을 마쳤다. 학문의 요람인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장소에 대한 갖추어야 할 예의가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나 후세들이 살아갈 미래는..... 오로지 교육을 통해 이어져 나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 관리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누구나가 그렇게..... 뒤늦은 후회를 반듯이 한다는데....... 기회 있었을 때 공부 열심히 할걸........ 아주 잠시 머문 몽펠리에 대학을 나서면 만감이 교차한다.
대성당 건너편 언덕길 조금 아래에 몽펠리에에 현재 남아있는 두 개의 망루 중에서 숙소 옆에 있는 투르 드 라 바보트(Tour de la Babotte) 말고 다른 하나인 투르 데 팽(Tour des Pins)이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다. 멀리서 올려다보며 지나치려는데 성채에 이어붙인 허름한 건물에 여러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이른 아침에 말이다. 그곳의 입구처럼 보이는 성벽에 빨간 십자가 간판이 붙어있다. 다름 아닌 (프랑스 적십자 안내소)라는 간판이었다. 더 궁금하여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들어가 보았더니, 한 사람이 불쑥 나에게 빵을 하나 건네준다. 다름 아닌 몽펠리에 빈민 구제소라고나 할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십자 구호 봉사활동이 벌어지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들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힘들도 지친 표정들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다. 저기 적십자 단체처럼 말이다.(잠시 서서 기도와 묵념)
여행 중에 철도 공무원에게 들은 말인데....... 이날 적십자 구호소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지금 몽펠리에의 새로운 근심꺼리로 등장해 점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지금 몽펠리에는 1993년 이후로 꾸준히 인구가 늘어가고 있는 자못 신기한 도시다. 외부에서 몽펠리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꾸준히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인구의 절반이 35세 이하이며, 인구의 25%가 학생들이다. 해외에서 유학을 온 대학생 숫자만도 9천 명을 넘어서 거의 일만에 육박하고 있다.
예전엔 ‘남프랑스의 작은 파리’로 불렸었지만 지금 그 말을 기뻐하는 현지인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지금 몽펠리에는 ‘젊은 도시’ ‘대학의 도시’로 불린다. 더불어 ‘예쁜 도시’ ‘평생 살고 싶은 도시’로 불린다. 그 이유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차차 더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렇게 살기 좋은 도시로 평판이 자자해지면서 외지에서 찾아드는 사람들 중에는.......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유민(?)이 섞여있게 된 것이다. 살만 하다는 부자들이 많고, 거주 인구가 많고, 따뜻하고, 숲과 공원이 많은 도시라면......... 빈민이나 난민들에게도 썩 훌륭한 사업장(?)이 아니겠는가? 춥고 비가 자주 오는 치안 부재의 파리나 마르세유에서 구걸이나 소매치기나 부랑자로 살기보다는....... 신흥 낙원 몽펠리에가 구걸이나 소매치기나 부랑자로 살아가기에 훨씬 좋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1년에 300일 이상이 눈부신 햇살과 온화한 기후가 보장된다면 길거리 노숙생활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신흥 부자 도시라는데 말이다.
지금 당장 몽펠리에 시와 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부분이 바로 치안과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 분위기 조성이다. 조례에 의해 구걸이나 불법노점상이나 노숙을 절대 금지하고 철저히 단속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발전 못지않게 현재 가지고 있는 장점을 계승 발전시키되 불안과 불만의 요소들을 아예 처음부터 완전하게 제거하겠다는 방책이다.
하여 여기 몽펠리에세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모습이 있다.
역사지구(올드 시티)에는 차량이 들어 올 수 없다. 앰블런스나 소방차 정도가 어쩌다 들어올 뿐이다. 경찰의 순찰도 미니 오토바이로 대체되었고 우체부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노숙자. 소매치기. 부랑자들에게 있어서 몽펠리에 역사지구는 그야말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단속자도 없고 싸이렌 경고도 없으니 죽어라 도망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전투 군인들이다. 전투복에 전투모를 쓰고 완전 무장을 넘어 허리에 권총을 차고 두 손에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전투태세로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이 일개 분대 정도 규모로 수색작전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흩어져 일사분란하게 주변을 살피며 진격을 한다. 도심(역사지구)의 곳곳을 마치 수색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남녀 군인들이 짙은 선글라스를 모두 쓰고 인파를 헤치며 진군하는 모습은....... 경찰의 치안력과는 절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곳의 순찰군인들에게는 경찰의 치안권을 넘는 공공의 안정을 위한 군대의 자위권이 더하여 주어지기 때문이다. 불시에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다. 비슷한 모습을 이스탄불에선 자주 보아왔지만, 좀 다르다. 이스탄불에선 엄청난 긴장감이 동반되어 다가오는데....... 몽펠리에 순찰대 모습은 마치 아이돌 공연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멋있다. 쭉쭉빵빵 멋진 젊은 남녀가 제복에다 화력 무기로 중무장을 하고 일제히 멋진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일렬로 넓게 흩어져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교신하면서 도심 전역을 샅샅이 흩어나간다. 우리 같은 여행자에겐 아주 이색적인 멋진 이벤트 정도로만 느껴졌을 뿐인데...... 노숙자나 소매치기나 부랑자나 말썽꾼들에게는 당장 저승사자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오며 보편타당한 경찰권을 훨씬 초월하는 가공할 위력의 대상이기 때문이란다. 총기 사용을 본 적은 없었지만 상황에 다라서 저들은 언제든지 실탄 사격을 할 수 있는 허락과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현지의 한 젊은이가 말해주었다.
오늘 오후에 우리는 직접 순찰중인 멋진 그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함부로 나대거나 죄 짓지 말자! 군인과 경찰은........ 차원이 다르다.
이 지역 전체가 역사지구로 보존대상이 되지만 아마도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예 성벽이 남아있는 안쪽지역과 바깥쪽 지역의 보존 대상 급수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성벽에 에워싸여 있는 옛 몽펠리에 도심은 보존을 위해서 개축이나 보수에 까지도 나름 까다로운 허가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고, 성벽 바깥으로 골목길 하나를 건너면 여기저기 수리 보수작업 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이 너른 지역 전체가 보호 관리를 받고 보존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만은 한 눈에도 충분히 느껴 질만큼 몽펠리에 역사도시는 인상적이다. 청소차와 야채 과일을 납품하는 미니트럭(삼륜차)이 이따금 눈의 심심찮게 띈다. 점점 지나가는 행인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나 보다.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보다는 시작이 삼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늦어 보인다. 그 작은 차이가 오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서두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인다. 대한민국의 아침과는 다르다.
지나치며 흘깃 들여다보니 낡은 대문에 메모가 붙어있다. 손으로 쓴 작은 손 편지 같다.
‘저게 뭐지’
오지랖만 딥다 넓은 쓸데없는 이넘의 넘쳐나는 호기심을 도저히 통제할 방법이 없어서 기어코 다가가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헌데 자꾸만 들여다보면 뭐해? 자꾸 쳐다본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어? 꼬부랑글씨라도 어려울 판에 불어를 알아?
외출하니까 택배를 옆집에 맡기라는 것일까? 마트에 가니까 식탁에 피자 먹고 나서 학원 잘 다녀오라는 말일까? 아니면 정중하게 신문 사절하는 글일까?
이거 볼수록 자꾸 궁금하네?
하여 기어코 사진에 담아서 숙소에 돌아가 인터넷 도움을 받아서 기어코 메모 내용을 확인했다. 궁금하면 못 참는 이넘의 쓸데없는 기질을 두고 또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말이다. 혹 이게...... 저작권이나 인권침해는 아닐 거라는 전제와 바램 하에....... 대충, 부동산 중계업자가 집주인에게 남긴 메모로...... ‘혹 집을 세놓을 생각이 있으시면 유학 온 학생이 집을 구하고 있으니 연결시켜 드리고 싶어요. 연락주세요.’
라 블랑케리 성문(Porte de la Blanquerie)은 오늘날 올드 게이트(Old Gate)라 불리는 몽펠리에라는 성채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연결해주는 성문 중의 하나이다.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주변의 풍경에서 단박에 진자 도시의 안쪽으로 들어섰구나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느낌이 뭉실뭉실 절로 피어오른다. 왼편으로 마치 언덕을 오르듯이 라임스톤 계단 위에 둥근 돔 지붕을 가진 아주 거대한 건물이 한껏 위용을 뽐내며 나타난다.
아고라 몽펠리에 댄스 홀(agora montpellier danse)은 1357년 Saint-Gilles 수녀원 건설되었다. 17세기 혁명 때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으나, 이를 보수하여 이후로 어린 소녀들을 위한 보육원으로 활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부터는 여성 수감자를 위한 교도소로 운영되었다. 크고 넓고 방대한 원형의 홀은 중앙에서 소수의 관리원이 삥 둘러 수많은 수감자를 감시하기에 아주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이곳을 군대의 막사로 사용하였다. 1986년 몽펠리에 당스 페스티벌 (Montpellier Danse Festival)이 열렸는데, 이곳 아고라에서 쿠르 데 우르술린 (Cour des Ursulines)이라고 불렸던 경연이 펼쳐졌다. 하여 그 이후로 시에서 관리하는 춤 연습과 공연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역사적인 명소가 바로 아고라이다. 여행자의 발걸음을 잡아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라 하겠다.
이제부터는 좁고 가파른 골목이 이어지는 중세풍의 낡고 협소한 도심 뒷골목의 분위기가 꾸불꾸불 사방으로 이어져 나간다. 대성당과 몽펠리에 대학의 도심 안쪽 통로인 중세시대의 대학촌과 대학로인 것이다. 학생들이 육중한 낡은 나무문을 힘들게 밀치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띈다. 슬쩍 들여다보니 흡사 우리나라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랑 똑같다. 문 뒤로 정복을 입은 수업 가득한 노인 수위가 들어오는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다.
아마도 7백 8백 년 전에는 몽펠리에에서, 아니 유럽에서 가장 핫한 학문을 향한 열기로 뜨거웠던 지역이 바로 이 자리였을 것이다.
방금 들어간 이탈리아 피렌체 복장을 한 학생이 혹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아니었을까? 이곳과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가 돌로미테에서 알피니스트 등반을 마치고 하산 길에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어쩌면 르네상스는 훨씬 뒤에, 혹은 피렌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가 하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턱수염이 멋진 저 청년은 혹시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가 아닐까? 그가 맞는다면 달려가 2024년에 대한민국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물어보고 싶다.
아니 저 노인은 혹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교수가 아닐까? 인류는 스스로의 인체에 대해서 무한한 궁금증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인체는 조물주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신성불가침 논리의 신학에 가로막혀 있던 시대에 죽음을 각오하고 공개적으로 동물 해부학이 아닌 실제의 인체를 가지고 해부학의 토대를 마련한 노교수가 아닐까?
그들의 고귀한 숨결과 자취가 이 도심의 이 골목 저 골목에 흩어져 묻어나고 있다. 기꺼이 나 또한 그 시절로 흘러들어가 그들의 자취를 따라 여기저기를 거닐어 본다. 내가 유럽의 뒷골목 산책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마냥 하염없이 걷다보니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코미디 광장이다. 바로 지금 몽펠리에의 중심이며 현실인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 온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광장 곳곳에 열고 있는 노천카페에 벌써 현지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모닝커피와 크로아상 등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있다. 활기찬 아침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방금 물청소를 끝낸 광장 모서리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진한 에스페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몽펠리에에 벌써 흠뻑 취한 것만 같다.
어제 오후에 도착했으니 이곳에서의 둘째 날이지만, 진정한 몽펠리에 여행은 이제 첫날이 시작되었다해야 하겠다. 마냥 가슴이 설레어 온다.
- - 다음 이야기에서 (몽펠리에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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