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를 여행하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코트다쥐르하면 가장 먼저 니스를 떠올리고 프로방스하면 가장 먼저 아를을 떠올린다고 한다. 이는 당연히 꼭 찾아가야 하는 남프랑스 여행 버킷리스트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트다쥐르 여행의 중심에 니스가 오른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니스에 거점을 두고 생 폴드방스나 앙티브나 모나코와 칸이나 에즈 등의 이름난 관광명소를 얼마든지 당일치기로 충분히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를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를에 검점을 두고 주변 도시를 오가며 여행할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를 여행은 거의 대부분이 마르세유나 아비뇽에 거점을 둔 여행자들이 당일치기로 여기 아를을 주로 다녀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를을 프로방스 여행의 중심에 놓는 것일까?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진 론강 하구에 위치한 도시 아를(Arles)은 도대체 어떤 도시란 말인가?
사실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아를은 우리에게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꼭 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도시가 결코 아니었다. 프로방스 여행 스케줄을 진행하다가 보니 어쩔 수 없게 잠시 경유하게 된 남프랑스의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프로방스 여행에서 아를을 꼭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일까? 도대체 아를의 어떤 무엇이 그토록 수많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특히나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젊은 여행자들을 그토록 매료시키고 잡아당기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아를을 다녀왔다는 우리나라의 젊은 여행자들에게 물어 보았다.
‘아를을 여행한 이유를 한 가지만 꼽는다면?’
‘고흐.’
‘아를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빈센트 반 고흐.’
‘아를 여행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제외하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신병원. 론강. 고흐 카페 등 고흐의 발자취.’
‘고흐를 빼고 아를에서 보거나 느낀 것은?’
‘완벽하리만큼 원형을 보조하고 있는 로마 원형 경기장.’
‘다른 것을 꼽는다면?’
‘아를은 그냥 고흐, 고흐 하면 아를. 귀를 잘라 붕대로 감싼 자화상이나 해바라기나 고갱과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엮어주는 소소한 배경......’
‘아를여행에서 시저와 폼페이우스, 신성로마제국의 바르바로사, 그리고 아를의 비너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함. 관심 없음.’
아! 어쩌란 말이냐? 답답한 가슴을........
아! 어찌 이토록 다르단 말이냐? 아를(Arles) 하나를 두고서 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아를은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타기 위한 경유지일 뿐이었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원형보존이 거의 완벽한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이 남아있으며, 작은 소도시 곳곳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가슴 아픈 흔적들이 아로새겨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있어서는 아를과 마르세유의 적대적일 정도의 라이벌 의식이 로마시대 시저와 폼페이우스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제 3차 십자군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바르바로사가 이곳 아를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이는 곧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과, 예루살렘 멸망 후 유대인 디아스포라 당시 처음 유대인들이 찾아들어 정착한 곳이 아를이었으며, 중세까지 특히 유대인 문제에 관한 역사가 곳곳에 점철된 장소가 바로 아를이라는 사실과,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품과 기술이 밀로의 비너스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보다 앞서 어쩌면 더 위대했을지도 모를 아를의 비너스가 바로 이곳 그리스 극장에서 발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 관심이 높았을 뿐이다. 내가 아를에 들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적어도....... 빈센트 반 고흐보다는 후자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면서 시작되는 론강은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 남쪽을 향해 아주 멀고도 먼 여정을 계속하다가 여기 아를을 굽이쳐 지나면서 마침내 지중해로 흘러들어 간다. 바다와 비교적 가깝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깊은 수심과 드넓은 강폭과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천혜의 환경 조건은 로마시대 이후로 아를를 아주 중요한 해상거점과 육상 거점을 동시에 소화해내는 프로방스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로마제국은 아를을 갈리아 지방의 작은 로마로 건설하였으며 수많은 권력자들이 대단히 중요시 하는 제국의 거점도시로 발전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경우 발칸반도 출신이었지만, 이스탄불로 천도하기 전까지 상당한 시간을 여기 아를에서 체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로마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감행하고, 서로마가 결국 패망하면서 함께 아를의 번영도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오늘은 그 아를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마르세유여행에서의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사실은 아를이 본래의 목적지가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레 보 드 프로방스(Les Baux de Provence)'.
사실 오늘 우리가 찾아가고자 하는 소도시 여행의 목적지는 바로 '레 보 드 프로방스'이다. 마르세유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17km를 달려오면 아를(Arles)에 도착하고, 기차역 앞 광장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바로 레 보 드 프로방스가 위치해 있다.
사실 비교적 가까운 근자에 들어서 ‘레 보 드 프로방스’가 갑자기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해마다 150만 명 이상의 여행객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프로방스에서는 비교적 고지대로 불리는 불쑥 솟아오른 평원에 깎아지른 듯 200m 이상의 바위벼랑을 등지고 그 안에 폭 숨어들 듯이 놓여있는 아주 작은 산골마을이었으며,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의 숫자가 겨우 290명 정도였으니 말이다. 굳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강원도 산골 오지 중에 오지 깊은 산중턱에 자리한 화전민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레 보 드 프로방스는 그렇게 남프랑스의 최고 오지에 놓인 후미지고 외딴 아주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이런 레 보 드 프로방스가 아주 먼 옛날부터 이렇게 깊고 후미진 산골에 그나마 자리를 잡고 소수의 주민들이 삶의 명맥을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채석장 때문이었다.
뽀얀 빛깔을 가진 양질의 석회암이 이곳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이다. 우수한 석회암은 대리석 못지않을 정도로 뽀얗고 아름다운 무늬와 재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리석에 비해 훨씬 무른 재질을 가고 있기에 가공하기에 매우 수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여 무게를 견디어야 하거나 외부에 놓여 질 조각 작품의 경우에는 대부분 대리석을 이용하지만, 건축물의 내외 마감재나 실내의 부도와 같은 조각에는 양질의 석회암을 주로 사용하여왔다.
바로 이 양질의 석회암 생산을 위해 찾아든 인부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마을이 바로 레 보 드 프로방스였던 것이다. 한때는 200여 미터의 바위벼랑 아래 언덕배기에도 제법 커다란 마을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건축자재의 등장으로 인하여 점차 그 수요가 줄어들면서 경쟁력을 상실해가던 채석장은 마침내 1935년 문을 닫았고 채석장은 폐쇄되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론가 떠나갔다. 더 이상 먹고 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레 보 드 프로방스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도 점차 잊혀 져 갔다.
그런데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처럼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조차 까마득하게 잊혀 진 채석장에 한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툭하면 프랑스 문단과 예술 문화계에 끊임없이 물의를 일으켜왔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에 까지 다방면에 자신의 놀라운 역랑을 경주해 오던 희대의 실험적 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r가 불쑥 채석장에 나타나 자신이 새로 만들고 있는 영화 >오르페우스의 유언> 시퀀스를 찍는다고 촬영에 돌입한 것이다. 워낙 유명한 아웃사이더 천재 예술가였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세인들의 최고 관심사였던 이유로, 이 화제를 통해 엉뚱하게도 채석장 주변의 빼어난 경관이 세상에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사람들이 다시 이 오지의 자연경관을 찾아와 감탄사를 늘어놓았고 그 소문은 점차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이곳에 터전을 잡았으나 먹고 살 길이 막혀 떠났던 사람들이 속속 돌아와 식당을 열고 숙박업을 시작했다. 바로 지금의 레 보 드 프로방스가 다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 여행자들 속에 유명 잡지의 편집장이자 자신의 매체를 가지고 있던 알베르 플레시가 있었다. 플레시는 채석장에 체류하는 동안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새로운 사랑에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플레시는 ‘이미지 대성당(Cathedrale d’Imiges)’라는 이벤트 회사를 차리고 채석장 동굴 안쪽의 커다란 석회암 벽면에 거대한 이미지를 투사하는 새로운 방식의 갤러리를 열었다. 그 이벤트는 해마다 새로운 주제로 바뀌어 나갔다. 하지만....... 반향이 기대했던 이하였다. 결국 하나의 작은 지역축제 정도로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계속된 경영 악화는 끝내 새로운 ‘공간문화(Culturespaces)’라는 회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히 되었다. 그곳에는 이제와는 전혀 다른 또 혁신적인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보수를 마친 ‘이미지 대성당(Cathedrale d’Imiges)’은 오랜 세월 석회암을 캐낸 높은 천장과 기둥을 이루는 벽면을 이용해 새롭게 4.000 제곱미터 이상의 전시를 위한 스크린(벽면)을 만들어 냈다. 이 벽면과 천장과 바닥이 모두 3차원 스크린이 되고, 몽환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거대한 슬라이드 프로섹션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빛의 향연’이 여기 이 아주 특별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2012년 Culturespaces는 야심찬 계획아래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끝에 채석장의 재개관을 온세상에 널리 알렸다. 채석장 전시회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깨달음의 채석장(Carrières des Lumières)’ 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꾸며진 ‘까달음의 채석장’ 첫 전시회의 제목으로 ‘빛의 화가 고갱과 반 고흐 展(Gauguin, Van Gogh, the painters of colour)’을 개최하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경천동지(驚天動地)’ 라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결과로 해마다..........
290명 정도의 현지인이 거주하는 오지의 산골에....... 해마다 150만 명이 넘는 여행객들이 지금 찾아오고 있다.
거기에 더 놀라운 것은........ 1년 365일 매일 개관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왜?
주민들도 쉬어야 하니까. 파티도 즐기고 휴가도 떠나야 하니까.
얼씨구?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엄청난 좌절을 격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것이여?
오.마.이.갓.레.보.드.프.로.방.스.여!!!!!!!!
우리는 아침 일찍 서둘러 마르세유 생 샤를 역(세인트 찰스 역)으로 가서 아를 행 기차에 올랐다. 안내판을 살펴보니 아를은 중간 기착지로 이 열차의 종점은 몽펠리에 생 로흐 역이었다. 달리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내일 오후에 우리는 이 열차의 종착지인 몽펠리에로 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여행 스케줄대로라면 말이다. 아직 몽펠리에 행 교통편은 예약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다.
열차는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아를에 도착했다.
아를 역에 도착해 마르세유로 돌아갈 기차시간표를 확인한 후에 대합실을 막 나서려는데....... 아뿔싸........ 한 시간 전에 떠나온 마르세유랑 날씨가 천지차이다. 세찬 바람이 예사가 아니다. 어제 마르세유 방향 칼랑크 트래킹에서 마주했던 미친 듯이 성난 미스트랄의 오늘은 아를을 찾아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또다시 ‘패딩만 가지고 왔었어도’ 하는 타령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마눌님을 대합실에 그대로 모셔두고 길 건너의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은 말 그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세찬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대기하는 버스도 한 대도 없었다. 정류장에 설치된 여덟 개 정도의 부스를 찾아다니며 레 보 드 프로방스로 가는 시내버스 시간표를 찾았다. 여행 잡지와 인터넷에서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이삼십 분 후에 레 보 드 프로방스 동네 입구에 도달한다는 기사를 출발 전에 확인하고 또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얼씨구?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비어있는 부스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A4에 버스 시간표를 내붙여놓은 곳은 달랑 세군데 뿐이었다. 거기에다 세군데 부스의 버스 시간표 어디에도 레 보 드 프로방스란 이름표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뜻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워 할 즈음에 정류장으로 버스 한 대가 들어왔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세 명을 사람이 내려서는 대합실로 들어갔다. 다시 출발하려는 버스로 달려가 기사 분에게 물어보았다.
‘레 보 드 프로방스를 가려는 여행자인데 어디서 시내버스를 타나요?’
‘레 보 드 프로방스요? 저쪽 건너에 있는 8번 부스에서 기다리면 올 거예요.’
감사 인사를 드렸고 버스는 다시 출발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8번 부스에 가서 살펴보는데 앞 뒤 어디에도 어떤 안내나 시간표도 붙어있지 않다. 더 이상 들어오는 버스도 없다.
‘잘못 되었다. 이건 뭔가 심상찮은 문제가 생겼다는 징조가 틀림없다.’ 라고 생각한 나는 대합실로 가서 아내에게 당면한 불길한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현지인들에게, 그리고 구내매점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아뿔싸!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여기는 프랑스다. 아!!!! 갑자기 영어권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안되겠다 싶어서 창구가 닫혀있는 매표창구로 다가가 안쪽의 직원들을 향해 문을 두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창구 직원들은 영어가 통했다.
‘여기 버스 정류장에서 레 보 드 프로방스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오늘 버스 운행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직원이 끼어들어 말해주길........ ‘지금은 비시즌 이예요. 추위 때문에 여행객이 확실학세 줄어드는 비시즌에는 레 보 드 프로방스가 전체적으로 모두 문을 닫고 긴 겨울 휴가에 들어가요. 3월 말쯤 봄소식이 들려오면 다시 문을 열어요. 그러다 보니 비시즌에는 시내버스도 운행하지 않는 것이지요. 찾아간다 해도 모든 상점과 식당들이 굳게 닫혔고 극소수의 현지인들만이 체류하고 있을 거예요. 당연히 빛의 채석장도 비시즌에는 폐관을 한답니다.’ 라고 알려 주었다.
덜컥....... 커다란 실망과 함께 좌절감이 다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데 가만....... 나름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는 역무원들 중에도 누구는 이런 지역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고, 또 누구는 전혀 알지 못한단 말인가? 프랑스 공무원 세계의 한계인가? 아니면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철저하고 세상 밖 다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 우리나라라면 지역사회의 이슈나 이렇게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관광업 분야에 어느 정도의 소양이나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긴 과거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에서 쿠알라 수도 터미널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 하였는데도 모르는 교통경찰이 태반이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한 국가 수도의 종합 버스터미널이 옮겨갔는데도 교통경찰 열 명 중의 한두 명 만이 그런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우리를 몹시 당혹시켰던 아제 사 까마득한 옛 추억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레 보 드 프로방스 하나를 보겠다고 그 먼 길을 달려왔는데 정작 도착하고 나니 겨울이라 마을 전체가 폐쇄되었고 길고 긴 겨울방학에 들었다니 말이다. 상심. 좌절. 허탈.
그 넘의 패딩타령(패딩 하나만 가져왔어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고 버텨낼 수 있었는데)이 또 터져 나올 정도로 아를의 날씨는 마르세유에 비해 혹독하리만치 추웠다. 지중해의 무자비한 말썽꾸러기 폭군이랄 수 있는 미스트랄의 원조 격이 바로 여기 아를 인근이라고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걸려들어도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런데 걸려 든 것은 어쨌든 그렇다 치고........ 당장 지금부터 오늘 일정을 어떻게 소화해 나가지?
헐!!!!!
그나저나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한다?
어쩌긴 뭘 어쩌겠어?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고난을 마주치게 되면...... 더 내려놓고 그 고난에 마주치기 보다는 그냥 그 고난 자체를 즐기자. 그런 것 또한 여행의 일부분이고 좀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추억이리니.........(늘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짐을 싸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아를 역을 나와서 주변을 살피니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저편으로 광활한 공간이 눈에 가득 몰아쳐 들어온다. 론강 하구가 틀림없어 보인다. 옷깃을 여미고 강변으로 향했다. 강폭이 상당히 넓다. 과연 중세시대까지 지중해의 항구를 대신할 만큼 내륙의 교통중심이자 온갖 물산이 몰려들던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된다. 다만 지금 현재에도 이토록 드넓어진 강폭을 유지하고 엄청난 수량의 강물이 아주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를의 쇠락과도 연관이 있는, 론강의 상류에서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흘러내려온 토사가 강바닥에 쌓여 수위를 낮게 만들었고 심지어 이 부근에 삼각주가 형성될 정도로 지형이 변하면서 큰 배가 강의 상류로 자유롭게 오르내리지 못하게 되었고, 홍수로 범람이 자주 벌어지면서 국제 교역항구로서의 위용을 점차 잃어갔던 것이다.
아를의 잔뜩 찌푸린 날씨에다가 강줄기를 타고 북쪽에서 몰아닥치는 성난 미스트랄의 횡포는 가히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발걸음을 도심으로 옮겼다. 일단 어디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라도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도시가 너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해 보인다. 지나가는 행인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지나가는 차량도 아주 이따금 겨우 눈에 띨 정도다. 어느 이름 모를 적막강산 오지마을에 찾아든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낙엽이 모두 지고 앙상한 몸뚱이만 혹한에 내맡긴 포플러 나무 숲이 둘러싼 공원 안쪽에 원형 로터리가 놓였는데 여기까지 오고 나니 간간히 시내버스와 승용차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라막띤느 광장의 회전 교차로 주변 공원은 아를인근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혼들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설치된 추모공원이다. 공원을 가로질러 도심의 안쪽으로 향하려다가 고개를 돌려 아를 역 방향을 살피다보니 저만치 카페가 보이지 않는가? 생각이고 뭐고 더 따질 것 없이 서둘러 라 카페(brasserie pizzeria le france)에 찾아 들었다. 생각보다 넓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매력적인 레스토랑 겸 카페였는데......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다. 달랑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다. 젊은 여성이 아주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고 난로 옆으로 안내해 준다. 아내는 아메리카노 커피와 크로아상, 나는 에스페레소 커피에 쇼콜라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며 몸이 좀 녹았고 컨디션이 좀 회복되었다 싶어졌을 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아주 귀여운 꼬맹이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략 한 일곱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는 여기 카페 주인의 아들이었다. 어찌나 귀엽던지..... 우리 태리 세리가 너무나 보고 싶어진다. 이어서 프란다스의 개를 닮은 덩치 좋은 멍멍이랑 이 카페의 주임 셰프라는 여주인의 남편이 들어왔다. 아들과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어디서 왔느냐? 이런 날씨를 알고 찾아 온 것이냐? 아를의 겨울과 지금 시즌에 대해서 나름 소상하게 알려 준다.
우리가 찾아 온 본래의 목적이 레 보 드 프로방스였다고 하자 벌써 얼굴 가득 애석하다는 슬픈 미소를 하나 가득 담아 보여주면서........ 레 보 드 프로방스에 실제로 상주하는 현지 주민은 서른 명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서서히 시즌을 접고 산을 내려온다고 한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한 것 늦춰서 크리스마스 때 까진 체류하다가 연말을 맞아 옛 고향을 찾아오는 가족 친척들과 성탄절을 보내고 나면 장기 겨울 휴가를 떠나고 마들 전체가 긴 동면에 들어간다고 한다. 치안과 화재 등을 관리하는 담당자가 수시로 드나드는 것 외에는 완전 유령도시로 변한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이런 지역적 특성에는 ‘빛의 채석장’으로 널리 알려진 채석장 전시관도 포함이 되어 폐관된단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마을이 다시 열리고 ‘빛의 채석장’도 새로운 기획으로 다음 시즌을 맞이한단다. 자신들이 찾아 갔을 때는 ‘클림트 특별 전시회’였는데 ‘고호전시회’못지않을 정도로 실로 압권이었다고 한다.
요즘에도 간혹 굳이 레 보 드 프로방스를 꼭 가보아야겠다고 하면서 여기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찾아가 아주 잠깐 마을을 한 바퀴 훌쩍 둘러보고 다시 택시로 돌아오는 사람을 보기는 했는데....... 비추란다. 그냥 유령도시 같을 뿐이란다.
덕분에 이제 아주 홀가분하게 레 보 드 프로방스를 떨쳐낼 수가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것....... 오늘은 오로지 아를(Arles)이다.’
참으로 친절한 카페 라 프랑스의 가족들과 작별하고 아를 도심으로 향한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기병 관문(Porte de la Cavalerie)이다. 이 성문을 통과하면서 부터가 진정한 아를의 도심이라 할 수 있다. 아를 자체가 중세 이후로 전형적인 성채도시(요새)화 되었기 때문이다. 아를 이라는 성채 도시의 가장 중요한 북쪽 출입구가 바로 기병 관문이었다 할 수 있다. 이 성문의 위용과 멋스러움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보수 공사가 중단된 이유로 가림막이 둘러쳐 있고 여러 가지 공사 자재와 장비들이 널려 있어서 아쉽게도 거의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를에 들어섰는데....... 어째 이곳도 유령도시가 되었나 싶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낡고 허름하고 썰렁함 그 자체였다.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 간판이 사방에 나붙어 있지만 모두 굳게 문이 잠겼고, 카페. 기념품점. 의상실 등등 어느 도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틀림없이 도시 구색을 갖추긴 갖추었는데........ 마치 어디 도시 재개발 구역이 아닌가 싶고....... 동남아 어느 후진국의 뒷골목을 거니는 것 같고...... 어느 허름한 구시대의 영화촬영장 세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다시 꾸며져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로 재현되는 1940년대 정도의 무늬도시 말이다. 정말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도 사람 하나 없고, 열려진 점포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낡고 퇴색되어 보이는 아를 도심의 진입로는......... 자못 엄청난 실망감으로 시작되었다.
‘이러고도 아를이 이름난 여행지라고? 고흐는 무슨......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면 두 갈래 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어느 쪽으로 가나 종국에 조금 지나 원형경기장 인근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있는 길이다. 두 갈래로 나뉘는 길목에 나름 빈티지한 멋을 한껏 풍기고 있는 건축물의 전면에 멋진 커다란 둥근 원형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라 하겠다.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림의 아래로 에워 쌓인 철 구조물 안으로 작은 분수대가 놓여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당연히 한 겨울이라 분수는 볼 수가 없지만 말이다.
폰테인 아메드 피초(Fontaine Amedee Pichot)라는 이름의 이 분수는 파리에 있는 생 미셀 분수의 영향을 받은 같은 이름의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수이다. 그리고 분수 위쪽의 둥근 동전모양의 벽화는 여기 아를 출신의 화가 폴 발제(Paul Balze)가 타일을 잘게 잘라 붙여 만든 모자이크화로 본래는 파리에 장식되어 있었다. 아메드 피초는 이 벽화를 아를에 전시하기 위해 고가로 구입을 해서 이 건물 외벽에 붙인 다음 아래에 자신이 직접 분수대를 만들었고 이 건물을 폴 발제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 쪽을 골라 유령도시 같은 골목길을 따라 쭈욱 걸어 나가면 마침내 아를에서 가장 유명한...... 아를의 상징과도 같은.......아를의 어느 곳에서나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조금은 왜소한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o)을 닮은 웅장한 로마시대의 건축물을 마주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사람들을 뜨문뜨문 마주칠 수 있다. 처음에 잠시 지나가는 연세 지긋한 현지인들이었고, 이 건축물을 둘러보다가 자리를 비울 즈음에서야 여행객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까지 든 생각은 ‘아를 인구가 한 100명 정도가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아를은 한산하고 고요했다.
아를의 아레나(Arena of Arles)는 얼핏 규모면에서 로마 콜로세움의 절반 조금 넘어 보이는 크기에서 오는 왜소함은 좀 느껴질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3번 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완성도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 고대 로마의 유산인 것이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그 장엄함과 엄청난 위용을 느껴보기는 했지만, 유적지가 파괴되고 유실되어서 제대로 된 로마 원형경기장의 본모습과 활용도를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면, 여기 아를의 아레나를 둘러보고 나면 로마 콜로세움은 원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서기 80년에서 90년 사이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건축이 2.000년이 훌쩍 지나간 현재에 이렇게 버젓이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위용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로 로마의 건축술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더군다나 연일 세계 도처에서 정복전쟁을 벌이던 로마의 처지로 수많은 점령지마다 건축가와 토목 기술자와 엔지니어들을 따로 파견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그 모든 일을 로마의 군인들이 떠맡아야만 했던 것이다. 로마의 군인들은 한 명 한 명이 전투원이자 건축가였고 토목기사였으며 엔지니어였다. 진격하여 영토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로마로 향하는 도로를 건설했고. 요새를 국축한 후에 신전을 짓고 통치를 위한 관공서를 짓고 이를 점차 확장시켜서 도시를 건설했다. 필요하면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수로를 이용해 물을 끌어왔다.
오늘날의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지역에 걸쳐 각 나라의 수도나 이름난 대부분의 유명한 거대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이 시기에 로마의 군대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로마(특히 로마의 군대)가 21세기의 인류에게 남겨 놓은 위대한 것은 문화. 정치 제도. 도시 건설만은 아니다. 유형의 유산을 넘어 그들이 후대의 인류에게 남겨 놓은 무형의 유산은 더욱 더 위대한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로마를 로마의 군대를 찾아다니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유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일생동안 약 1.100 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약 900점이 완성된 상태의 유화이고, 나머지 200점은 스케치와 같은 습작들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간략하게 (홀랜드 시절) 이라 하여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벨기에를 오가며 그림을 배우던 시절에서 한동안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시기까지를 가리키고, 나이 만 30세가 되어 비로소 전업 화가로서의 길을 걷고자 했던 시기를 (뉘넌과 안트베르펜 시기)라고 한다. 아마도 고흐에게 있어서 가장 힘겨웠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략 약 3년의 이 시기에 음독자살 시도도 있고, 부친 사망도 뒤따르고, 성 추행범으로 세상의 조롱과 멸시도 받게 된다. 어둡고 자학적인 작품 200여점을 이 시기에 그렸지만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생활고에 술독에 빠지게 되고 고흐의 심신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다음이 (파리 시절)이다. 견디다 못해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파리로 와서 몽마르트에 거주하면서 세잔. 로드레크. 그리고 고갱을 만났다.
하지만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짙은 병력과 생활고 등으로 결국 요양을 위해 프로방스의 아를로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를 (고흐의 아를 시대)라고 부른다.
마지막 생명을 불꽃을 활활 불태웠다고 해야 할까? 고흐는 아를에서 엄청난 창작열을 발휘했다. 우기가 흔히 고흐하면 떠올리게 되는 작품의 거의 대부분을 이 시기에 아를에서 완성 시켰다. 아를에서의 고흐를 빼고 나면 어쩌면 나는 고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를을 방문한 고갱과의 갈등 직후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엔 아를을 떠나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 병원을 나와 파리로 되돌아갔지만 얼마 후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고흐는 살아서 900점의 유화를 완성해 남겼지만 생전에 팔린 그림은 단 한 점이 전부였다. 지금은 최고가의 특 A급 대접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하나는.........
아를을 걷다보면 여기저기 고흐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마다, 과거에 그곳을 그렸던 고흐가 남긴 작품들이 여기저기 흔하게 나부끼고 있지만........ 사실은......... 아를에는 고흐의 작품 진품이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그래도 되나? 고흐하면 아를이라면서?)
고흐의 작품을 만나려면 무조건 파리에 가야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우리가 흔히 고흐하면 떠올리는 작품 다수가 전시되어 있다. 다음은 네덜란드 미술박물관에 가면 또 다른 고흐의 작품들이 다수 걸려있고........ 나머지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갤러리들을 뒤져가면서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적어도 미술관이라면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소장하지 못한 것은 그리 험이 되지 않겠지만(왜? 교회 우선권이 존재하는 작품들이니까)........ 고흐. 모네. 샤갈.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그 미술관의 격이 달라지는 세상이 지금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아를엔 고흐의 진품이 단 하나도 없다!!!!>
그저....... 고흐를 추억하는 멋진 모습을 담아 인풀루언서(influencer)로 유명세를 떨치고 싶은 유저들로만 가득 넘쳐난다. 어쩌면 그들에겐 고흐의 작품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름 자신의 취향해도 멋지게 꾸미고 싶은 고흐의 과거 흔적과 스토리만이 더 중요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론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에 속하는 아를은 비교적 지대가 낮고 고른 평지에 해당한다. 그러한 아를에서 오튀르 언덕은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해당한다. 아를을 점령한 로마제국은 이 언덕에 가장 먼저 로마 극장을 세웠다. 카베아(Cavea) 라고 불리는 반원형 계단식 관람석을 가진 극장은 고대 그리스시대 극장의 원형과 전통을 로마시대에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아있지만 석조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33열에 1만 명을 수용하였으며, 무대 뒤로 세워진 높은 부벽들은 온통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상들로 장식되었는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를의 비너스>가 바로 여기 로마 극장의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역사와 미술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면 <아를의 비너스>에 대해서 별반 감흥이 없을 수 있겠지만....... 혹 <아를의 비너스>가 같이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는 <밀로의 버너스>의 원본(?) 쯤이라고 한다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쉬워질지 모르겠다. <아를의 비너스>에 대해서는 조금 후미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역사에서는 아를의 로마극장이 세워진 연대를 기원전 1세기 말이라고 한다. 이를 나는 좀 더 분명하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줄리어스 시저의 통치 말기) 혹은 (시저 암살 직후)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 이유 또한 다시 거론하겠지만 말이다.
아를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은 아마도 로마 극장이 완공되고 나서 연이어 착공되지 않았을까 싶다. 기원 후 90년경에 완공되었으니 말이다. 훼손이 심한 로마 콜로세움을 완전하게 보수공사를 마친다면 바로 여기 아를의 원형경기장 모습이 될 것이다. 크기만 조금 작을 뿐이지 로마시대에 건설된 원형경기장의 본래 모습을 여전히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2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석조건축물에서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까지 실제로 검투사들 간의 결투와 맹수와의 대결을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을 공개처형하는 등의 장소로 사용되었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민족의 침략으로 아를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다행이도 원형경기장만은 거의 원형대로 남아, 그 이후에는 기독교 시대를 맞아 원형 경기장 안에 예배당이 2개 설치되었고, 관의 주도로 212채의 주택을 연립 형태로 설치하여 실제로 주민들이 주거하였으며, 경기장의 열려진 아치에 돌을 쌓아 막고, 현재 정문 위에만 남아있는 애드온을 경기장 상부 전체에 삥 둘러 설치하여 군인들의 대기소와 무기소와 방어막으로 삼아 완벽한 요새화를 주진하였다. 추가 설치되었던 애드온과 아치를 막았던 돌무더기와 원형 경기장 안에 들어섰던 주택과 교회는 1825년에 완전 철거되면서 본래의 모습 그대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밖에도 아를에는 도시의 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하회랑이 인상적인 로마가 남겨놓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연재까지 남아있다.
이를 기반으로 조금만 주의 깊게 생각해 본다면....... 기원전 1세기 말에서부터 서로마 제국이 급격히 쇠락해가는 4세기 말까지 아를은 갈리아 지방은 진정한 정치적 종교적 수도였던 셈인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나는 깊게 공감하고 있고 나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 이러한 나의 관심과 확신을 바탕으로 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 수도이자 제1의 도시인 파리에서 과연 어떤 로마의 역사적 유물이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가? 파리에서 과연 고대 로마의 유산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다음으로 프랑스의 제2도시인 마르세유에서는 과연 어떤 로마시대의 유산이나 유적을 찾아 볼 수 있는가? 거의 없다.
왜 프랑스에서 가장 유래와 역사가 깊은 파리와 마르세유에는 고대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점령하고 온갖 로마식 유적을 무수히 남겼음에도 이곳에는 남겨진 문화유산이 전무한 것일까?
어떻게 마르세유 인근의 소도시 아를에 로마제국의 유산인 로마극장과 원형경기장이 남아있게된 것일까? 더하여 비교적 아를에서 인근이랄 수 있는 오랑쥬에는 또 하나의 로마극장만이 덜렁 남겨졌단 말인가?
왜 파리나 마르세유가 아닌 변두리의 소도시 아를과 오랑쥬라는 말인가?
나름 공부를 늘 하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사실에 대해 소상한 설명이나 안내를 해주는 것을 여행 잡지에서도 블로그에서도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보지 못했다. 이런 느낌과 궁금증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대 로마와 고대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서 파고 또 파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제나 프랑스의 중심에 우뚝 섰던 제1. 2위의 도시 파리나 마르세유에도 없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원형경기장이나 로마극장이 변방의 소도시 아를에는 모두 건설되었고 인근의 오랑쥬에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있는 로마극장이 세워졌느냐?
내 나름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 하에서 이것을 설명하자면....... 나는 그 이유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겠다. 바로 로마라는 고대국가를 실질적인 제국으로 만든 장본인 ‘시저’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사속에서 커다랗게 한 획을 그었던 로마(Roma)의 역사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레물루스 쌍둥이 형제가 테베강변의 캄피돌리아 언덕에 부족국가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정치와 권력의 태생적인 한계이자 속설처럼 통치 권력을 놓고 쌍둥이 형제는 대립했다. 형인 로물루스가 끝내 동생 레물루스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였고, 그것이 곧 고대국가 로마가 탄생하는 순간이 되었다. 권력 앞에서는 형제지간뿐만이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부부지간에도 타협이나 양보가 없는 피도 눈물도 없이 사방으로 피바람이 난무하는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초가 로마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호시탐탐 권력을 넘보는 자들과 무자비한 탄압과 그에 따른 피의 보복으로 얼룩진 왕정국가로 이어지던 로마는 보다 넓은 세상을 건너다보면서 왕정국가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독재 권력의 탐욕과 부패가 국가의 존망을 너무나 쉽게 허물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여 로마는 공화정이라는 어느 정도 권력 간의 상호견제가 가능한 정치제도를 새롭게 만들어 정착시키면서 위대한 로마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중해 전역을 석권하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멀리 소아시아 지역의 메소포타미아 유역까지 진출한 로마는 이제가지와 전혀 다른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해야만 넓어 질대로 넓어진 영토와 도처에서 준동하는 반란과 더 나아가 새로운 정복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치체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창안해 낸 정치체재가 바로 (제국주의)였으며, 이 제도를 확신에 차서 추진한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시저’였던 것이다. 공화정의 로마를 로마제국으로 만들고, 원로원의 감시 하에 세 명의 집정관에 의해 상호 견제 속에서 국가를 통치하던 것을, ‘황제’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모두 집대성 시켜서 보다 간결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제국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시저의 정적들과 원로원의 절대다수는 로마제국으로는 발전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권력을 움켜쥔 황제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의 전횡을 저지를 수 있고 딱히 이를 제지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에 은근히 반감을 가졌다. 이는 곧 ‘시저가 독재자 꿈을 꾸고 있다’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결국 시저는 반감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되었다. ‘부르투스 너까지........’ 라는 명언을 남기며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르투스는 ‘나는 시저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다’라는 말로써 로마 공화정을 위해 독재자 시저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시저는 죽었다.
시저는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로마제국을 탄생시키지도 못했다.
하지만 역사와 세상은 그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라고 적었고 분명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시저 황제’라는 뜻이다. 그는 암살되었지만 끝내........ ‘영원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암살된 시저의 뒤를 이어받은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을 완성하였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시저의 공덕을 높여 칭송했던 때문이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이며, 그가 바로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인 것이다.
서기 1000년, 2000년, 3000년을 밀레니엄이라 하여 세상은 온갖 잡다한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오곤 했다. 서기 1999년 12월 31일에 벌어진 온갖 밀레니엄 사태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름으로 따져보자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주 특별한 존재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서기 0년이라 하면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분기점이며, 세상은 그 기준 시점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을 삼고 있다. 예수 탄생 이전을 기원전(BC), 탄생 이후를 기원후(AD)로 나누어 구분한다. 그런 와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즉위가 기원전 27년이었으며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기원후 12년인 아주 특별한 밀레니엄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것이다. 아울러 로마의 역사를 통털어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황제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바로 그런 그의 시대에 예수가 태어났다. 예수가 공생의 길에 접어들기 이전 어렸을 때 사망함으로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나,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던 역사가 바로 그의 통치치하였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분명 ‘시저’다.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통해 숙적 카르타고에 승리함으로써 명실상부 로마는 이제 그리스가 지중해 전역에 걸쳐 지배했던 영토와 제해권을 고스란히 확보하게 되었다. 로마의 영토는 이제 지중해 전역과 북아프리카 지역과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소아시아지역에 까지 진출하였지만........ 아직 치명적인 걸림돌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로마의 북쪽 국경을 노리고 침범해오는 이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 서쪽으로 숲지대와 늪지대에 출몰하고 있는 실로 어마어마한 면적의 영토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지척에..... 그것도 등 뒤에 실로 어마어마한 공포의 적이 존재하며 호시탐탐 로마를 유린하려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간 결코 짧지 않는 시간과 수많은 전쟁을 통해 지중해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우뚝 선 로마지만 알프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두려움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알프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적들을 ‘짐승 같은 야만인’의 뜻을 담아 골족(Gaul) 이라고 불렀고, 그 야만인들이 사는 너른 지역을 갈리아(Gallia) 라고 불렀다. 고대 유럽의 부족과 민족과 혈통을 구분하고 나누어 부른다는 것이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라 간략하게 다시 표현하자면........ 골족은 유럽 전역에 골고루 퍼져있던 켈트족에 속하는 소수 부족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이들이 알프스 너머의....... 오늘날의 영토로 구분해 본다면, 프랑스 전역을 시작으로 스위스 일부 지역과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포함하는 폴랑드르 지역과 라인강 건너의 독일 지역의 상당부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대단히 광활한 영역을 가리킨다. 로마가 속한 이탈리아 반도 전체 면적의 세배가 넘을 정도로 광활한 숲지대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개척지 상태로 위험한 적들의 영영으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는 늘 이 지역을 마냥 놓아둘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미지의 야생의 영역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드넓은 갈리아를 지나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풍요로운 에스파냐가 나온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 왔었지만, 로마의 다른 그 누구도 한니발이 지나쳐 온 것처럼 갈리아로 영역을 넓혀볼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치열하게 권력암투가 벌어졌을 때 시저는 그야말로 절대 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시저에게는 자신을 옹호해줄 정치기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군인으로 승승장구해 온 시저에게 믿을 곳은 오로지 자신의 군대뿐이었다. 무자비한 정적들의 집단 공세로 당장 목이 잘려나갈 시점에서 시저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내가 나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갈리아 정벌에 나서겠다.’
장내에 순식간에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다. 모든 원로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제껏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던, 감히 그 누구도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갈리아 정복 원정을 스스로 자진해서 떠나겠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시저를 어떻게 몰아세우고 죽여 버릴까를 곰곰이 궁리하던 사람들에게 시저가 스스로 불쏘시개를 짊어지고 불구덩이 속이로 뛰어들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굳이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골치 아픈 문제를 쉽게 풀게 생겼으니 말이다.
시저의 입장에선 진퇴양단의 순간에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겠다는 결정이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군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이 있었으며 그것이 그가 가진 마지막 보루이자 비장의 무기였던 것이다.
모두가 그 길을 극구 만류했지만....... 시저는 보부도 당당하게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시작과 함께 어마무시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전쟁신이 등장한다. 최첨단 공성무기를 장착한 체계가 잡힌 붉은 망토와 철갑을 두룬 로마군대와 짐승 가죽을 걸치고 도끼와 몽둥이와 농기구로 무장한 이민족과 처절한 전투를 펼친다. 당시의 로마군 지휘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막시무스 장군이었고, 그들의 상대가 바로 갈리아의 반란군이었다. 시저가 갈리아 정복을 성공했지만 그 후로도 갈리아 지방의 반란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때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랬다. 숲이 우거 질대로 우거지고 늪지대가 사방에 깔려있는 야만의 대지(로마인들은 그렇게 불렀다)에 군대를 이끌고 처음 나선 사람이 바로 시저였던 것이다.
시저의 첫 목표는 파리시였다.
켈트족의 한 소수부족이었던 골족이 세느강 상류의 삼각주에 거주지를 만들더니, 점차 세력을 넓혀가며 부족국가 파리시(Parlsi)를 세우며 점차 시테섬에 성벽을 쌓고 요새화 시켜 나갔다. 갈리아 지역의 반군 핵심이 파리시(현 프랑스 파리)였던 것이다. 세력을 거듭 확장해 나간 갈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수시로 로마의 북쪽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감행하고 로마인을 살해하는 등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너무나 잔혹했으며 그 결과로 갈리아는 공포 그 자체가 되어갔다.
하지만 시저에게는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잘 훈련되고 용맹한 자신의 군대가 있었다. 여러 번 죽음의 목전에 이르는 위험을 맞이하기는 하지만 시저의 군대는 끝내 온갖 고난을 넘어 마침내 파리시를 점령했다.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시저는 곧 로마에 승전보를 보냈다.
온 로마가 승리에 도취했으며 축제를 벌이고 시저의 이름을 외쳤다. 하루아침에 시저의 위상이 달라졌던 것이다. 원로원은 시저의 군대가 승리자가 되어 로마로 개선한 뒤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를 쫓아낸 자신들에게 보복을 가해올까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하여 반란군 잔당까지 완전 소탕할 것과 갈리아 전역을 완전 점령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이미 자신감에 충만한 시저는 호쾌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과거 한니발이 거두었던 성과보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서쪽으로 계속 진격해 나갔다. 거듭된 승리로 시저의 명성은 높아만 같고 정복지에서의 자원자들에 의해 그의 군대도 커져갔고 마침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여유를 갖게 된 시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을 설계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매카니즘적인 보다 정교한 체계를 갖추었다. 군대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온화한 기후와 청명한 날씨 속에서 용맹한 군대로의 훈련을 계속했다.
시저는 이제 로마의 자랑이자 미래 권력이 되었다. 그럴수록 정치권력을 움켜줬던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정적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시저의 눈부신 성공에 두려워한 원로원은 시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들의 편을 불러들였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Gnaeus Pompeius Strabo)가 바로 그 이다. 역사는 그를 시저의 최대 정적이자 로마 역사상 최고의 해군 장군이라 기록하고 있다. 더하여 로마 최고 명문가 출신의 완전한 금수저 출신 군인인 것이다.
검투사 출신인 스팔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로마의 토벌 사령관은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였다. 위기를 넘긴 로마가 반란군 진압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스페인에 파견되었던 폼페이우스가 이 사태를 기회로 권력에 접근할 기회로 삼고자 자신의 해군력을 모아 급거 귀국해서 스팔타쿠스 반란의 마지막 진압에 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삼두정치의 핵심 권력인 집정관에 임명된다. 시저의 분노는 대단히 컸다. 갈리아 원정의 성공으로 내심 시저가 노린 것도 바로 집정관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의 최고 권력은 누가 뭐래도 세 사람에게 모여졌다.
로마 최고의 부자이자 온갖 부정부패와 금권정치로 자신의 권력을 가장 확실하게 다지고 있는 크라수스와, 금수저 출신으로 타고난 해군 지휘관이며 지중해 전역을 확보하고 자신의 관활 하에 두고 있는 로마의 실질적 해상 지배자 폼페이우스가 다음이고, 눈부신 성공으로 급성장 하긴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와 질시로 마주 먼 변방에 강제로 머물로 있는 갈리아 총독 시저였다.
크라수스의 배후조정과 폼페이우스의 침묵 하에 원로원은 시저를 제거하기로 음모를 세웠다. 일부 원로원 회원이 시저의 갈리아 원정 과정에서 집단학살과 약탈과 부정축재가 뒤따랐다고 시저를 고발했다. 원로원은 시저에게 로마의 원로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했다. 시저 휘하의 군대를 고스란히 주둔지에 남겨두고 혼자 로마의 법정에 출두해 직접 해명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최소의 호위무사만을 데리고 시저가 로마에 입성하면 억지 죄를 뒤집어 씌워 즉시 죽여 버려야 한다는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었다.
시저와 그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음모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원로원의 출두 요구에 불응하면 반역으로 몰리게 되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갈 수 없다면 살해당할 것은 너무도 뻔한 상황이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절체절명(絕體絕命)의 함정에 빠진 시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저는 자신 휘하의 용맹한 군대를 몰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분명 반란이었고 틀림없는 쿠데타였던 것이다.
--- 다음 이야기에서 (아를 속편)으로 이어나가겠습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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