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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커피와 미술> Cafe "베벡의 벅스처럼"에 걸려있을 그림들

by 피안재 2023. 5. 28.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이런 카페 하나 차릴까?’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던 중에 베벡에 있는 스타벅스에서의 일이었다. 옥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보면 검푸른 마르마라 해의 파도가 테라스까지 넘실거린다. 우리나라 방식의 카페문화와 서구방식의 카페문화 차이를 실감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분히 서구식 카페문화를 지향하는 편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만 아니라면, 내 방식대로 나만의 시간과 생각의 자유를 한껏 펼치고 누리고 즐기고자 한다.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장소나 공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내가 발 뻗고 쉴 수 있는 크기 정도의 공간이면 되고, 약간은 한적한 듯 여유로운 공간이면 좋겠다. 그래야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따사로운 햇살과 연푸른 빛깔의 풍경이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을 것만 같다. 나는 푸른 숲을 좋아하는데...... 그 숲에 들어있는 것 보다는 조금 높은 언덕에서 그 숲의 전체를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드넓은 숲의 머리위에 나풀거리는 햇살과 바람의 일렁임을 자연의 속삭임처럼 귀 기울여 엿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분위기라면 하염없이 멍 때리는 일에 젖어들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낮잠에 빠져들지도 모르겠다.

  ‘마담. 여기 커피 리필 되나요?’

  그런 카페 분위기에 커피 리필까지 된다면 설혹 마담이 뺑덕 어미를 닮았다 해도 어찌 마냥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커피 값이 싸야 당연히 좋은 카페다.(어디까지나 내 생각)

  나는 커피를 엄청 줄기는 사람이다. 가끔은 집에서 내려서 마시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커피에 맛을 잘 구분하지도 못할뿐더러 굳이 고급 커피를 찾거나 즐기는 타입도 아니다. 젊어서 맥심을 마시다가는 어느 순간 쵸이스가 마시고 싶어졌고, 쵸이스가 좀 깔끔하다 싶다가도 갑자기 맥심의 구수함이 그리워지기도 했을 정도가 거의 전부라 하겠다. 시골 파견에서 매일 믹스 커피만 마시다가 슈퍼에서 발견한 아주 오래된 맥스웰 화인이 어찌나 반갑던지 감동이었던 적도 있었다. 터키의 전통 커피도 마셔보았고 이탈리아의 길거리 에스페레소도 마셔 보았다.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서 모든 커피는 다 그저 보통의 커피일 뿐이다.

  프랑스 카페에서 서너 번 드나들면서 안면을 익혔다고 카페 알롱제를 굳이 따로 시키지 않고 그냥....... ‘커피. 아메리칸 스타일’ 이라고 말해주면 씨크한 남자가 툭 던져주듯이 내려놓고 휙 돌아서는 좀 어중간한 커피...... 에스페레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메리카노도 아닌....... 그래. 아무렴 어때? 딱 그 정도면 그냥 감사할 따름이지. 어쨌든 커피잖아. 나를 위한 커피.

  나에게 있어서 커피는 딱 그런 느낌 그런 정도라 하겠다.

  고급일 필요도 없고 부담스런 찻잔에 내어주지 않아도 되고 당연히 값은 저렴할수록 좋은 커피가 아니겠는가.

 

  베벡의 스타벅스 테라스에서 느닷없이 챠밍여사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카페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것이다.

  ‘다행이 우리가 모두 건강하니까 지금의 현장 일을 각자 알아서 잘 해오고 있지만 언제까지 계속할 수만은 없을 것 아니야? 나이 들고 기운 떨어지면 지금의 일을 손에서 놓아야 할 날이 올 것 아니냔 말이야. 아프지만 않는다면 밥을 굶는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냥 들어앉아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살수는 없지 않겠어?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은근히 카페나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지금 여기에 와보니 막연하게 했던 생각이 아니라 정말로 해볼까 싶어지네.’

  ‘사방에 동네 골목 구멍가계만큼 여기저기 늘어나는 게 온통 커피숍이며 카페 든데?’

  ‘그건 멋과 폼을 재면서 비교적 쉽게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여가선용은 물론 공익적 성격의.........’

  ‘아이고 머리야. 지금 카페가 아니라 무슨 대대적인 공익사업을 벌이겠다는 거야?’

  ‘아니? 아주 쉽고 간단한데?’

  ‘노인네 둘이서 카페를 차리면 과연 손님들이 찾아올까?’

  ‘안 오면 어때? 우리 둘이서 노는 공간이면 되지? 밥만 안 굶으면 되는 것 아냐?’

  ‘그건 그래. 그 정도가 되면 슬슬 여행을 포기하게 되겠지. 아무렴 우리가 밥이야 굶겠어?’

  ‘어디 변두리에 터만 넓고 경치 좋은데 있으면 대충 수리해서 카페 하나 열면 되지 뭐. 당신 직업이 건축이니까 그건 알아서 할 테고....... 어디 멀어도 상관없잖아. 오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뭐. 대신 주차장은 그래도 넉넉해야 하겠고...... 당신이 알아서 꾸미면 돼. 그림이랑 우리 그동안의 여행 사진들로 여행 스케치나 여행 갤러리 분위기를 살려주면 될 것이고, 멜랑꼴리한 음악이 항상 흐르도록 해주고..... 그런 건 당신 주특기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고, 이따금 그림이나 사진 바꿔서 분위기 새롭게 해주면 돼. 그렇게 해놓고 나면 실컷 책이나 읽던지 글을 쓰던지 당신 맘대로 해. 카페 운영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정말이야? 만들어서 꾸며주고 나면 난 내 맘대로 쉬어도 되는 거야?’

  ‘정말이야. 나이 잔뜩 먹고서 무슨 떼돈을 벌 것도 아니고...... 아들이야 충분히 저들 앞가림하며 잘 살 텐데. 우리가 짐이 안 되려면 죽는 날까지 그냥 놀고 쉬고 그러면서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뭐.’

  ‘다 좋긴 한데...... 그러자면 여행을 포기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그럼 우리가 언제까지고 마냥 지금처럼 배낭 메고 걸어서 쏘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우리 스스로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까지 뿐이야.’

  ‘그리니까 좀 더 열심히 다녀야지. 카페는 기운 떨어지면 이야기고.......’

  ‘하이고. 자기는 맨날 청춘인줄 알아요? 카페 차리고도 여유만 생기면 언제든 떠날 수 있거든요?’

  ‘그럼 당신이 카페 운영하고 나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겠네?’

  ‘네. 제발 열심히 돈 좀 벌어오세요. 늙어서도 여행 떠나게요.’

  이것 봐라? 가만히 살펴보니 챠밍여사가 카페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부터 우리에겐 다소 막연하나마 언젠가는 우리만의 우리 방식의 카페에 대한 기대가 점점 구체적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그동안의 우리 여행 기록을 더듬어 챠밍여사 생일 선물로 앨범을 만들어 보았다. 1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두 번째 권까지 만들었는데, 아직 두 권은 더 만들어야 이제까지의 여행 기록이 정리가 될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가자면 도대체 몇 권까지 만들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행 기억을 사진으로 담아서 엮어놓고 보니 챠밍여사가 무척 좋아한다. 책이라는..... 종이라는 질감이 주는 아주 묘한 감동이 있다.

  ‘카페 만들 때 그대로 쓰면 되겠네? 너무 마음에 들어. 고마워. 감동이야.’

  ‘우리 세상 떠나면 아들에게 영정사진 따로 만들 필요 없다고 말해 줄 거야. 그냥 이 앨범을 펼쳐서 올려놓아 달라고 할래.’

  암튼 어찌되었건 장차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여행 앨범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야 할 모양이다.

  “베벡의 벅스처럼”

  언젠가 우리가 꾸려나갈 카페의 이름이다.

  그날 우리는 아예 내친김에 카페 이름까지 작명을 해버리고 말았다.

  더불어 커피 가격의 기준도 베벡의 스타벅스 커피 가격을 기준으로 삼기로 약속했다. 우리나라 커피 가격이 너무나 비싸서 서둘러 정한 기준이다. 당시로서 약 2.500원에서 3.000원 사이였다. 2유로에서 2.5유로 선.

  폼 나는 비싼 고급 카페가 아니라 편하게 쉬고 누리는 진짜 로컬 카페만이 가지는 적정선들을 그 자리에서 이미 대충이나마 정해 버렸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 나폴레옹 홀에 있는 기념품 매장에서 챠밍여사가 쇼핑을 하고 있던 차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넌 어떻게 맨날 박물관 아니면 미술관이냐?’

  ‘어떻게 우리가 통화할 때마다 그렇게 되네?’

  ‘그래. 오늘은 또 무슨 그림들을 보는데?’

  ‘여기에 전시되는 것은 모두 보려고 애쓰면서 죽어라 쫓아다니고 있지 뭐.’

  ‘파리 갔다고 하니까 우리 마누라가 <모나리자>는 잘 있느냐고 물어본다.’

  ‘보기는 했는데 내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그림이라서 그냥 지나쳐 버렸어.’

  ‘뭐라고? 기다려 봐라....... 파리까지 가서 <모나리자>를 안 볼 거면 도대체 너는 무슨 그림을 찾아다니는 건지 물어보란다. 너는 유명한 화가 중에서 누구를 좋아하는데?’

  ‘ 다 좋아하지 뭐. 그러니까 이렇게 쫒아 다니지.’

  ‘너. 내가 진난 번에 물어봤던 거 아직 기억하지? 우리 마누라가 이번에 이사하면 거실에 그림을 하나 걸고 싶어 하는데 추천해 달라고 했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직 추천 안 해줬다? 지금 해주라. 누가 좋겠니?’

  ‘그림을 건다는 건 말이야. 그 공간에 실질적으로 사는 사람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야. 그러니까......’

  ‘집들이 올 때 우리마누라에게 거실에 걸으라고 네가 그림을 하나 선물한다고 치면 설마 대충 골라 오진 않을 것 아니야? 네가 손가락으로 꼽는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에서 하나 골라 줄 것 아니냐고? 알았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 너하고 취향이 엄청 다를 텐데?’

  ‘알아. 알고 있다고. 당연히 그럴 테지. 그러니까 화가하고 제목만 좀 가르쳐 줘. 그것으로 집들이 선물 받은 것으로 쳐 줄게. 나머지는...... 내가 인터넷을 뒤지던 화방에 부탁을 하던 어떻게든 구해서 걸을 테니까? 문자로 보내 줘. 혹시 못 구하는 것도 있을 테니 서너 작품 화가와 제목을 보내 줘. 설마 <모나리자>라고 적어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 <모나리자>는 나도 싫어. ’

  챠밍여사는 여전히 손녀들 선물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통로에 서성거리며 잠시 소위 내가 자장 좋아하는 그림을 떠올리며 친구에게 보내 줄 그림 목록을 생각해 보는데...... 헐!!!!! 어떤 것은 친구가 이사 갈 집보다도 더 커다란 그림이어서 안 되겠고, 너무 어두운 소재의 그림이라 거실에 걸어 놓기가 뭐해서 안 되겠고, 환상적인 누드 그림은 친구 녀석은 좋아하겠지만 손자 손녀랑 친구 와이프를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하겠고......... 무난하기는 아무래도 <모나리자> 밖에 없어 보인다. 헐! 어쩌지?

 

 

  카페 “베벡의 벅스처럼”을 지금 당장 공사 시작한다면.......

  적어도 실내의 벽면 중에서 삼면은 바닥부터 시작되는 통유리 창을 통해 밖이 그대로 보이고 모든 풍경이 자연스레 하나의 시선에서 연속성을 가지도록 만들고 싶다.

  남은 안쪽의 벽면 하나에는 통째로 내가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회화작품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작품이라고 찬양해 마지않은 한 폴랑드르 화가의 작품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물론 별도의 아주 크고 높은 전시공간을 따로 짓지 않는다면 이 작품을 그대로 전시 할 수는 없다. 작품의 크기가 가로 440cm X 세로 343cm에 이르는 대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그림은 여러 개의 목판으로 분리 구분되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림을 상단과 하단으로 분리를 한다면, 충분히 하나의 벽면에 가득 채워서 전시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누가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 최고의 작품 하나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두 번째 작품에 비하면 폴랑드르 화가 작품의 크기는 또 별거 아닐 수도 있겠다.

  내가 두 번째로 중요하게 아끼는 작품의 크기는 가로 770cm X 세로 500cm나 되는 피렌체 출신의 화가 작품이다. 내가 아끼는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품 두 개 중의 한 작품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은 축소해서 가질 수밖에 없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만은 크기를 어떤 비례로 축소한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나 의미까지 축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렌체에 가면 볼 수 있는 세 번째 작품은 내가 아끼는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가로 314cm X 세로 203cm 크기의 이 작품도 역시나 그리 만만한 크기의 그림은 결코 아니지만, 갤러리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크기라 하겠다. 내가 개인 갤러리를 꾸민다면 반듯이 이 그림이 가장 먼저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을 챠밍여사도 벌써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은 독일 드렌스덴에 가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가로 175cm X 세로 109cm로 그나마 가장 적당한 크기의 작품이라 해야 하겠다. 막상 “베벡의 벅스처럼‘에 전시를 하고나면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될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으로 해서 퍼져나간 영향력과 비슷하면서도 유명한 작품이 너무나 많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물 크기로 재현한 이 작품을 직접 보게 된다면........ 모든 것이 점차 달라지고 말 것이다.

  다섯 번째 작품을 보려면 로마의 한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이 화가의 작품은 매번 교회와 세상에 엄청나게 커다란 편지풍파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 작품도 역시나 그랬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어쨌거나 지금 버젓이 교회의 제단에 걸려있는 것이다. 가로 150cm X 세로 260cm로 결코 만만하지 않은 크기의 이 제단화는..... 글쎄다. 내 눈에도 그렇게 성스러워야 할 전통적인 성화(聖畫)로는 보이지 않고, 지극히 매혹적인 회화작품으로만 보이고 느껴지니.......... oh my god!

  “베벡의 벅스처럼”에는 무조건 이 다섯 작품은 걸리게 될 것이다.

  열 작품, 스무 작품은 못 걸겠느냐 만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을 우선순위로 꼽으라면 무조건 이 다섯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들춰 보여준 적이 없는 나만의 생각과 비밀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너스 탄생> <천지창조><최후의 심판> 등이야 말로 명화가 아니냐고 말하는데..... 나 또한 그런 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다만, 내 취향과 내 판단을 기준으로 내가 생각하고 아끼는 그림의 기준과 순위는 많이 다르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모든 그림을 좋아하고 그 그림의 가치를 존경한다. 단지 지금은 “베벡의 벅스처럼” 이라는 개인적 전시공간이라는 가정 하에서 내가 큐레이터라면 하는 가정 하에서 내방식대로의 나만의 갤러리를 꾸며보고자 하는 것이다.(기껏 고르고 고른게 그정도야? 취향도 참 특이하네 라고 해도 뭐라 드릴 말씀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정말로........ 내가 아끼는 그림중에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이나 (프라도 미술관)이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헐..... 내가 다분히 마이너리티 적이거나 언더그라운드 적이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놀랍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그림 중에서 다섯 번째 그림을 먼저 만나 보기로 하자.

  ' 미켈란젤로야. 성모님 그림 들고 밖으로 나와 봐. 어서.'

 

 

 

  묻고 싶다.

  이 그림을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선입견 없이 감상하고 난 순간의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묻고 싶다.

  이 그림은 성화(聖畵)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까? 어떤 성경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성화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여인과 아이의 머리에 희미하게...... 노란 고무줄 머리끈이 막 벗겨져 공중으로 날라 가고 있다고 친다면........ 이 그림은 지극히 보편타당한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상황을 바꾸어 관찰해 본다면 과연 어떤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그림이 지금 미술시장에 나오게 된다면..... 100년 전에 벌어졌던 <모나리자 파동>을 훨씬 능가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전 세계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과 부자 갤러리들이 전재산에 사채까지 얻어서 덤벼들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들을 걸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다손 쳐도, 의외로 이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을 수 있다. 이유는 일단 교회가 소장하고 있고, 다음은 교회가 다른 작품들 처럼 드러 내놓고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림을 딱 봤을때...... 우선 교회스럽지가 않다. 뭔가 성령이 넘치고 은혜가 마구 쏟아져 내려와야 하는데....... 이거 주머니 뒤져서 나오는데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선이라도해야 할 모양이 아닌가?

  교회는 일단 무조건 받기만 하는 곳인데..... 저 그림처럼 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점점 늘어 반복된다면 언젠가 교회가 쪽박 찰지도 모르니...... '저런 그림은 내놓고 자랑하지 마. 불경이야 불경!!!!!'

  20세기 중반에 한 유명한 미술평론가가 한 말을 기억한다.

  ‘화가와 그림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껏 그 어떤 화가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견줄 수 있는 위치까지는 감히 오르지 못했다. 그만큼 다빈치의 위치는 확고하다. 다만 한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대등하게 겨룸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그를 추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를 떠올린다. 20세기의 미술계 역사는 온통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가득 채워졌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자 한 신문 사설 난에 이렇게 기사가 올라왔다.

  ‘20세기라는 일백년의 시간동안에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미켈란젤로 메리시의 특별 전시회나 세미나나 학술발표회가 열리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이것은 시대적 열풍을 넘어선 그야말로 광풍이라고 밖에 더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미켈란젤로 메리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이는 그의 열풍이 다음세기까지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고 적었다.

  내가 아내와 약 한 달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이스탄불에서 학술회의, 몰타 발레타에서 쎄미나, 시라쿠사 특별 전시회, 밀라노 특별 전시회, 베네치아 특별 전시회를 모두 같은 시기에 직접 목격하였었다.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특별전시회는 나를 충격에 빠트렸는데, 거창한 특별전 포스터를 보고는 안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시라쿠사 대성당 광장 맞은편의 작은 미술관이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 메리시의 작품은 그리 알려지지도 않은 단 두 작품이 전부였다. 실망과 분노가 치솟을 정도였다. 정확히 10개월 뒤에 이번엔 아내와 함께 다시 시라쿠사를 찾았는데....... 아뿔싸! 똑같은 특별전시회가 그때까지도 계속 열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이 특별전시회 요금을 지불하고 입장하고 있었다. oh my god!!!!!!

  허긴 300m 정도 광장 건너편의 산타루치아 성당을 찾아가면 미켈란젤로 메리시의 유명한 작품 <루치아 성녀의 매장>을 공짜로 볼 수 있으니(성금을 내야 불이 켜지지만) 시라쿠사에서 세 작품은 만나 볼 수 있는 것이 되겠다.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 안에서도 미술에 대해서 좀 아네 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이 화가의 열풍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주문 받은 지 대략 2년 만에 완성된 위 그림의 제목을 화가는 ‘Our Lady of Loreto(로레토의 성녀)’ 라고 붙였다. 하지만 그림을 의뢰한 주문자로부터 내용이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인수 거부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의 제단에 설치할 목적으로 본시 주문된 것이라 교회로서도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로레토의 성모>는 온통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던 서민들이 유독 이 그림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서민들 스스로 이 그림에 ‘Madonna of the Pilgrims(순례자들의 성모)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림을 보려고 우르르 몰려들 정도였다.

  결국 교황청은 이 그림을 교회의 제단에 설치하도록 허락했다.’로레토의 성모(Madonna of Loreto)라는 이름으로 본래의 자리에 안치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의 제목에 반듯이 들어가야만 했던 로레토(Loreto)가 과연 무엇인지와 왜 다른 여타의 성화들과는 느낌부터가 전혀 다른지, 도대체 왜 주문자와 교회는 그림을 불경스럽다고 했는지, 반대로 서민들은 그렇다면 왜 좋아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아울러 그림을 주문받은 시기는 제각각 모두 다르지만 미켈란젤로 메리시는 세 작품을 동시에 제작하고 있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해 볼 때 아마도 나보나 광장 인근의 좀 후미진 곳에 제법 크고 넓은 작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어떤 작품은 작년에 주문 받았고, 어떤 작품은 5년 전에 주문 받아서 동시에 같이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세 작품 모두가 1605년 가을(10월)쯤 완성을 끝냈거나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로레토의 성모> <성 안나와 아이와 함께 있는 성모> <성모의 죽음>은 같은 시기에 함께 제작된 작품의 제목들이다.

  <로레토의 성모>는 완성되어서 비교적 인근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Basilica of St Augustine)에 이 시기에 납품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 시점을 시작으로 하여, 이 그림의 내용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 그림으로 해서 벌어졌던 사건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그 전에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는 화가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피에타>와 <다비드> 조각상을 만든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년) 이고, 19세기 중반 이후에야 재조명된 또 하나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년)라는 희대의 말썽꾼이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전자의 천재를 ‘미켈란젤로’라 부르고, 후자의 새로운 천재를 그냥 ‘카라바조’ 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다루는 미켈란젤로는 바로 후자의 카라바조임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로레토의 성모(Madonna of Loreto)> - -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作. 1605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대가 느닷없이 광장으로 물밀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햇살에 번쩍이는 모리옹(morion) 투구위로 순백의 크레스트(crest. 투구의 깃)가 휘날리며 플레이트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대 선봉장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자거리 좌판대 사이로 무작정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같은 플레이트 갑옷차림 이었지만 붉은 크레스트를 꽂은 이십 여기의 기마대가 그 뒤를 따라 무섭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네 필의 백마가 끌고 있는 초록색 마차가 한 대가 기마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마차의 뒤로 다시 여섯 필의 기마대가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눈에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초록색 마차의 문에 황금으로 새겨 넣은 휘장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바티칸이 소유한 여러 대의 교황전용 마차 중에서 크기나 장식에서 가장 작고 소박한 마차였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광경은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목격할 수 있었지만,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에 새로운 집무실과 숙소를 만들어 이사를 간 후에는 아주 이따금씩 어쩌다 볼 수 있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데 오늘은 교황청에 무슨 사단이라도 났는지 교황의 호송 행렬이 몹시 급할뿐더러 시장의 상인과 행인을 배려하는 평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공을 목전에 둔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in Vaticano)이 새롭게 건설되기 이전까지 교황의 집무실이자 주거지는 테베강 건너 로마의 남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 조반니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of St. John Lateran)였으며, 성지인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교황의 직무를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해왔던 것이다. 전 세계 로마가톨릭의 총 본산이자 절대 성지로 추앙받는 바티칸(교황청)이지만, 그런 바티칸도 차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교회의 권위와 신성함에 있어서는 가히 라테라노 대성당이 한수 위라고 할 수 있겠다. 교황의 주거지와 집무실이 바티칸으로 옮겨지면서 이 같은 출퇴근의 광경은 어느 때부터인가 로마 시민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런 교황의 행렬이 느닷없이 나보나 광장에 들이닥친 것이다.

  번쩍이는 플레이트 갑옷과 모리옹 투구로 용맹함을 과시하며 온갖 냉병기들로 중무장한 교황 근위대(Pontificia Cohors Helvetica)의 위용은 언제보아도 늠름하고 막강한 위용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었다.

  기마대와 교황의 마차행렬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몇몇 노점의 가판대가 거친 말발굽에 쓸려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행인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차의 커튼은 굳게 닫힌 채 안쪽에서 아무런 기척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차행렬이 저만치 광장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근위대 한 명이 말을 타고 되돌아 와서는 놀라 넘어진 사람과 가판대가 파손된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변상을 했다.

  그러자 이내 광장은 어느 때처럼 평온을 되찾았고 시장은 본 모습대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는 누구도 교황이 어디를 향해 저리도 급하게 가야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한 때 로마에서 가장 번화하고 번창했던 곳이 바로 여기 나보나 광장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폐허로 변해 잡초더미 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소나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이곳을 누가 로마제국 시대의 도미티아누스 경기장(Circo dell'imperatore Domiziano)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렸던 콜로세움과는 다르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스포츠 행사와 축제 공연이 연일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기마창술대회의 가장 유명한 승리자가 바로 전설적인 용병 체사레 보르자였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매머드급 복합 스포츠 센터였다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화려했던 도미티나누수 경기장 인근도 함께 파괴되고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제국의 위세에 눌려 지냈던 수많은 이민족들이 쳐들어와 복수의 파괴를 무자비하게 마구 저질러 버린 것이다.

  옛 로마제국의 영광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신전이며 궁전이며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폐허의 잡초더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제대로 서있는 돌기둥들이 지금 포로 로마노에 그나마 남아있는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세월이 흘러 폐허로 변한 고대 로마라는 도시 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옛 신전이나 궁궐이나 관공서의 흔적들에서 건축자재로 쓰기 위하여 마구 훼손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도시의 한쪽으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면, 도시의 어딘가에서 유적들이 그만큼 훼손되었던 것이다.

  다시 로마로 모여든 사람들이 인근의 캄피돌리오 언덕 인근에서 재래시장을 만들어 염명해 오고 있었던 것을 , 유입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시장의 협소함을 타개하고 또 캄피돌리오 언덕의 유적 보호와 관공서 설치 등의 이유로 텅 빈 공터로 남아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있던 장소로 시장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곳을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다분히 빈민가 재래시장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서부터 약 40년이 지나게 되고, 교황 이노센트 10세가 즉위하면서부터 나보나 광장의 운명은 180도 바뀌어 바로 지금,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교황을 태운 마차의 행렬이 멈춘 곳은 나보나 광장을 지나쳐 조금 도시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Basilica of St Augustine)이었다. 성당 앞의 너른 광장에는 이미 십여 대의 마차들이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황의 마차가 성당의 파사드(정문) 앞에 도착하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쫒아 나와 길게 도열하듯 늘어서기 시작했다. 모여든 사람들의 복장이 색깔별로 나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 하나같이 사제의 복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은 수도사 복을 입었지만 그들 앞으로 진홍색 옷을 입은 주교들이 섰고, 맨 앞쪽으로 붉은 사제복을 걸친 추기경들이 교황의 마차를 향해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교황 근위대가 마차를 철통같이 에워쌌고 주변 정황을 두루 살펴 본 후에야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근위대장의 부축을 받으면서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교황에 즉위한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시에나의 몰락한 명문가인 보르게세 가문 출신의 교황이었다. 전임자인 레오 11세 교황이 역사상 최고 단명의 기록을 남기며 즉위한지 불과 27일 만에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순간까지, 바티칸에 어떤 특별한 연고나 지지기반을 가지지 못한 시에나 출신의 카밀로 보르게세 추기경이 교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바티칸은 추기경들 간의 파벌시대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 로마를 연고로 바티칸 내에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는 카이사르 바로니우스 추기경과 남부 토스카나 지역인 몬테풀치아노 출신의 로베르트 벨라르미네 추기경 사이의 대립과 마찰이 극한에 이를 지경이었다.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리고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선 연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로니우스 추기경과 베라르미네 추기경 누구도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양대 파벌은 결국 절충을 선택하기로 했다. 로마나 바티칸에 어느 파벌에건 한쪽으로 기우는 연고나 연줄이 없는 중도적 인물로 타협을 보았으며, 그 결과로 뜻밖에 카밀로 보르게세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바오로 5세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본래 법룰가 출신이었던 새로운 교황은 즉위하자마자 트리엔트 공회의에서 결의된 교회법에 따라 불필요하게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주교들을 자신들의 관할지역과 교회로 돌려보내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파벌들의 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득불 취한 조치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추기경과 주교들은 사목중인 지역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으며, 교황의 부름이 있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만 로마에(바티칸)에 체류할 수 있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교황이 서둘러 집행한 일은 조카(누나의 아들) 스키피오네 카파렐리(Scipione Caffarelli)를 측근으로 불러들인 일이다. 교황은 조카의 성씨를 자신의 가문인 보르게세로 바꾸게 했다. 여간해서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스키피오네 보르게세(Scipione Borghese)로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그는 추기경에 올라 바티칸에 상주하는 교황의 최측근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진 양아들 이라고 치면 될 듯싶다.

  스키피오네 보르게세는 보르게세 가문은 물론 바티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바야흐로 교황 다음의 2인자가 된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해야만 자신들과 가문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시작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자신들만의 세력 확장을 위해 머지않아 추기경은 자신의 친구 스테파노 피그나텔리(Stefano Pignatelli)를 불러들여 추기경에 임명하지만, 추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한참 지나야 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교황 바오로 5세가 마차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다가와 무릎을 꿇고 반지에 입을 맞춘 사람은 바로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Francesco Maria del Monte) 이었다.

  경황 중에 교황으로 하여금 로마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부근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Basilica of St Augustine)에까지 허겁지겁 달려 올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모두 말썽꾸러기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때문이라 해야 하겠는데, 그런 카라바조의 재능을 발견하고 교육시키고 지금처럼 교회의 사업에 깊게 관여하도록 만든 후견인이자 후원자가 바로 몬테 추기경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단단히 말썽이 생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의 카발레티 경당(Cavalletti Chapel)의 재건사업에도 처음부터 몬테 추기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카라바조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의 중대성을 결코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 가장 먼저 교황 앞에 나서서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동조를 얻고 싶은 것이리라.

 ‘성하(聖下)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교회에 관한 일인데 어디든 가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요즘시국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만큼 교회로 인한 잡음이나 말썽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그게 어디 직분을 가진 우리들만의 바람대로 모두 이루어지겠습니까? 모두 주님께서 예비하신 일이니 그저 말씀대로 묵묵히 노력하고 헌신하는 자세로 따라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좀 더 차분하게 주변을 두루 살피면서 매사에 신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하께서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이번 카발레티 경당의 일에 관해서 소상하게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추기경께서 문학과 예술을 아끼시는 만큼 나 또한 문학과 예술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경께서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두 사람의 몇 마디 말에 혹하여 쉽게 일을 그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카발레티 가문에 관해서나 카라바조에 관해서나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습니다. 카발레티 가문의 상속인들과 교회 사이에 마찰이 생겼는데 교황인 내가 어떻게 모른 체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이단을 저지르는 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교회를 사고팔며 장사를 한다고 주장할 테니까요. 하여 서둘러 진화하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원대한 과업은 차질 없이 꾸준히 계속 진행되어 나가야 하니까요. 모든 것을 충분히 생각하고 찾아 온 것입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차분하게 좀 기다려 주세요. 원만하게 잘 해결될 것입니다. 그래 지금 카발레티 가문의 법률 집행인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로시 미망인께서는 지금 저의 집무실에서 보르게세 추기경과 만나고 계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의 주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 스키피오네가 미망인을 먼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어쩌면 스키피오네 선에서 사태가 마무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주교가 안내를 해주게. 여기까지 왔으니 잠신 만나 위로라도 전해준 다음에 바로 카발레티 경당으로 가야겠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 사람들은 몬테 추기경과 함께 카발레티 경당에 가서 잠시 기다려 주면 좋겠소.’

  교황 바오로 5세는 근위병들의 호위도 만류한 채 주교만을 앞세우고 주교 집무실을 향했다.

  주교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삐걱 소리와 함께 육중한 나무문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려낸 것은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이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검은 상복차림의 여인이 주교 뒤에 서있는 교황을 알아보고는 뛰어 달려가 앞에 엎드려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뺨을 비벼대면서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세속의 나이로 육십을 훌쩍 넘긴 미망인이었지만 마치 부모님 품에 뛰어든 소녀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교황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여인의 어깨를 쓰다듬듯 어루만지며 교황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픔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 이미 내가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댁으로 돌아가셔서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주님께 기도하세요. 주께서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여기일은 나에게 맡기도록 하세요. 곧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교황은 여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섰다. 주교가 앞장 서 교황을 카발레티 채플로 안내했다.

  전통적인 라틴십자가 모양의 구조를 가진 성 아우구스티투스 성당의 본당으로 들어섰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중앙 본당은 마치 높은 둥근 아치를 둘러선 기둥들이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며 아치의 천장엔 성모마리아의 생애가 그려진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동쪽 십자가 머리 부분에 본당 제단이 놓여있고, 양 팔에 해당하는 측변 본당에는 각기 다섯 개 씩의 작은 예배당(채플)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통로의 첫 번째 예배당 앞에 지금 약 스무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는 물론 이탈리아 전체에서 나름 부자이자 실력자로 꽤나 명망을 가졌던 에르메스 카발레티(Ermete Cavalletti)가 2년 전에 구입한 카발레티 채플(Cavalletti Chapel)이다. 에르메스는 교황청의 공증인이자 사도회의 회계사가 그의 직업이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는 교회(교황청)였고, 훗날 메디치 가문처럼 교황청의 돈을 맡아 운영하는 은행가가 실질적으로 현금을 만지는 실세 부자였다. 교황을 대신하여 이 교회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지금으로서는 교황의 조카인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회와 은행 사이의 법률적 대리인(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법원 등기소)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공증인이었으니........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돈 보따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교회역사(구약성경의 역사 + 신약성경의 역사)를 통 털어서 가장 큰 폐단을 양산해 낼 것이 자명하기에 가장 철저하게 금하고 멸시한 것이 고리대금업(훗날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바꿨지만)으로 십계명에도 분명하게 적혀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무조건 살인만큼이나 절대 금기한 불문율이었다. 이것이 중세 시대에 들어서서 은근슬쩍 은행업으로 성형수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급기야 불법의 고리대금업이 합법의 은행업으로 변신하는데 교회가 지대하게 공헌을 했음은 물론, 은행업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교회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오로지 비밀금고만을 사용했고, 교회의 은밀한 돈을 가져다가 메디치 가문 같은 초일류 은행가들이 합법을 가장한 온갖 악행을 통해 교회의 비밀금고 개수를 꾸준히 늘려나갔다. 교회와 은행가 사이의 비밀스런 거래를 성립시켜 주고 관리해주면서 수수료와 떡고물을 공증인이 챙겼다. 세상의 모든 돈은 모두 그 세 부류의 손에서 놀아났다.

  은행가 부류와 공증인 부류의 부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대놓고 왕족이나 귀족들보다도 더 설쳐대며 돈 자랑을 하는 세상이 도래하자 드러내놓고 돈 자랑을 할 수 없었던 교회 입장에선 점점 아니꼽고 꼴사납게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황권(皇權)의 도전을 겨우 물리치고 겨우 교권(敎權)을 확립해 놓았더니 이번엔 재권(財權)이 교권을 우습게 보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제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상단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저지른 만행은 교권의 침해를 넘어 존폐의 위기로까지 내몰렸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교회는 부자(재권)들을 길들일 수 있는 묘책 찾기에 몰두하고 매진에 매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가 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찾아낸 묘수가 바로 ‘연옥(煉獄)’ 개념의 재등장 이었다.성경의 어디에도 없는 연옥을...... 외면하고 내버렸다시피 한 외경(外經)에 달랑 몇 줄 달려있는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아주 고부가가치를 지닌 신소재 상품처럼 전면에 내세워 장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세에 정말로 교황청이 나서서 교회를 사고팔았다’는 진실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 선데이 서울이나 일간지 하단의 ‘사건사고란’에나 ‘무슨 무선 교회나 절간이나 암자를 사고팔았다’라는 기사가 실렸지....... 요즘의 시대에서 ‘교회나 사찰을 사고팔았다’라고 떠들어대면 불경죄 내지는 특정 종교로부터 엄청나게 지탄과 야유와 법적 책임까지 묻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권력과 명예로 교회에 도전하고, 은행가와 공증인과 거대시장상인들이 상상초월의 부를 축적하면서 청빈과 근면과 성스러움으로 가면을 쓴 교회의 아성에 도전하자 비장의 무기로 ‘연옥’을 교회는 꺼내들었다.

  거기다가 마침 단테의 <신곡>이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 순간 모든 상황 속에 <신곡>의 글귀를 가져다 많이 잘 인용하는 사람이 신분과 지성과 교양의 수준을 가름 하는 척도로까지 확산되었으니, 모든 유럽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신곡>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그 <신곡> 속에 ‘연옥’이 아주 넘치도록 세세하게 잘 그려져 있었기에 교회는 횡재를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에르메스 카발레티 같은 공증인 부자가 되었던, 메디치 같은 은행가가 되었던, 엔리코 단돌로 같은 장사꾼은 우두머리가 되었건, 그들이 가진....... 그들이 돈을 벌어들이던 그 모든 방법들이 성경 말씀대로 하자면 하나도 정상적이거나 당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돈을 번다는 방법 자체가 이미 남의 것을 어쨌거나 빼앗는 것이라고 교회가 판단을 내려 버린 것이다. 십계명을 크게 어겼으니 절대로 천국에 올라갈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쌓아놓은 부를 가지고 이승에서 사는 동안만이라고 행복을 향유하고 싶으나.......... 교회가 말하기를........ 천국에서의 하루가 이승에서의 천년과도 같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떠들어 댔다. 여기서 십 년을 호강을 한들 그 댓가로 지옥에서 천 년 만 년을 고행과 악행을 감내해야만 한다면.......... 어떻게든 살 궁리를 찾아야 한다. 짧은 이승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무슨 수를 서서라도 지옥행만은 무조건 면해야 한다.

  그러자 교회가 다시 한 번 부자들의 심장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쉽다’라고 말이다.

  다른 말로 100%...... 1.000% 확실하게 돈 가지고 까분 놈들은 천국 갈 생각을 포기하라는 사망선고였다.

  그러면서 말미에 아주 작은 글씨로 교회가 이렇게 썼다. ‘그렇다고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소식을 들었으니 이제 부자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교회 앞에 달려가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만한 일을 하면 돼. 그럼 구제받아서 천국에 올라갈 수 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만한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런 비밀은 누설을 안 하려고 했는데....... 모든 사람이 죽으면 심판을 받아서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천국에 갈 사람이야 곧바로 올라가겠지만, 지옥으로 내려가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이전에 한동안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면서 이승에서의 지나온 삶을 반성도 하고, 앞으로 받아야 할 벌에 대해서도 마음가짐을 하는 별도의 특별한 시간이 주어지게 되지. 이승에서 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께나 교회에 얼마나 헌신하면서 노력했는지에 따라서 연옥에서 머물게 되는 시간이 짧을 수도, 아주 길 수도 있게 나누어진다. 하지만, 육신은 이미 죽었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스도를 위한 커다란 사업이나 역사를 벌였다면, 그리고 이승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면서 이미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명복을 빌어준다면.......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지켜보시고 감복을 받으셔서 연옥에서 꺼내 천국에 올려 보내시기도 한다는 말씀이네. 어찌 아니 그러시겠는가? 우리 주님은 사랑이신 것을........’

  ‘그런 사업이나 역사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교회를 대리인으로 내세우셨으니.......... 어디에 주를 찬양하는 교회를 짓는데 봉헌을 한다든가........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수도사나 수녀들을 위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농장을 기증한다든가, 크고 낡은 교회의 예배당들을 하나씩 불하받아서 최고의 예배당으로 새로 꾸민다든가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 낡은 교회가 하나 있네. 누군가가 나서서 이승에서 번 쓸모없는 돈을 투자해 예배당을 보수하고 최고의 예술가들을 초빙해 더없이 아름답게 꾸몄다고 치면. 그가 죽은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빼어난 예배당을 찾아와 감동받고 감탄하고 그 예배당을 남겨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 기도소리들이 모여서 우렁찬 함성이 되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이미 죽은 지옥으로 가야 마땅할 영혼을 가상히 여기셔서 다시 구제해 주신다는 말씀일세. 어떤가? 이것이야 말로 구원의 복음이 아니겠는가?’

 

 

 

  교황 바오로 5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발레티 채플의 제단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젖혀지고 카라바조가 그렸다는 문제의 제단화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지극히 짧은 탄성소리와 함께 모여든 뭇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단화로 향했다. 모두들 뚫어져라 그림을 응시했다. 꽤나 오랫동안 더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과 교요가 예배당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림 속에 있는 네 명의 인물이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빛에 점차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허름해 보이는 낡은 집 문설주에 기대어 한 여인이 어디선가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을 가득 받고 있는 아이를 품안에 안고 서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발치앞에 겸허한 모습의 두 방문객이 무릎을 꿇고 손을 합장한 채 여인과 아이를 올려다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모르게 어두침침한 분위기로 가득해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의 자세와 몸짓은 너무도 자연스러울뿐더러 볼수록 어떤 편안함까지 자연스레 느껴질 정도였다.

  ‘다소 어두침침한 느낌은 있지만....... 성모와 아기 예수께서 가난한 순례자들을 만나고 계시는 그림으로 내게는 보여 집니다. 법률 대리인께서 이의를 제기하신 저 그림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누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다분히 불경스러운 그림입니다. 심각하게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법률 대리인께서 그 점을 이미 분명하게 지적하셨고 화가인 카라바조의 강력한 처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조반니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가 나서서 짧고 강력한 어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제단화에 대해서 매우 단정적인 폭탄발언을 토해낸 것이다. 그는 로마에서 일찍부터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았고 명망을 얻고 있는 유명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카라바조가 로마에 나타났고 그의 주위로 젊은 화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한 순간 대놓고 ‘발리오네를 괜찮은 화가로 인정하는 동료 화가를 하나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여전히 모든 것이 서툰 화가 지망생 정도일 뿐이라고 우리는 생각 한다’고 대놓고 비판을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발리오네는 자존심과 화가로서의 자신의 지명도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하여 카라바조와 그의 패거리를 직접 고소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그 일로 2주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지만 감옥을 나온 이후로는 더욱 대놓고 발리오네를 실력이 형편없는 화가로 악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로 평생을 그들은 철전지 원수로 상대를 능멸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 주문했던 제단화에 대한 소식을 접하자 그 순간부터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물고 뜯기를 일체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카라바조가 그린 제단화에 대한 교황주도의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카발레티 가문 상속자들을 회유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가 카라바조를 완벽하게 몰락시킬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자신이 새로운 제단화를 맡아 실력을 보여줌으로서 세상에 자신이야말로 카라바조를 능가하는 실력 있는 화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법률 대리인께서 계약 해지와 제단화 제작비용 환급을 넘어 화가의 처벌까지 요청했다는 말씀입니까?’

  교황이 뒤를 돌아보면서 재차 묻자 마지못해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의 주교가 다시 나섰다.

  ‘그렇습니다. 카발레티 가문은 그림의 인수거부를 이미 천명하셨으며, 차라리 다른 화가로 하여금 새로운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하겠으니 선 지급한 그림 제작비용의 전부를 환불까지 요청한 상태입니다. 이 사태의 해결 상황에 따라서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의 피에타 예배당(Cappella della Pietà)의 사후문제도 검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카발레티 채플 차원을 넘어서 키에사 누오바로 까지 문제가 확대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분명히 여기 카발레티 가문의 진정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인은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로레토를 직접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단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성모님의 놀라운 은총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화가에게 로레토에서 체험한 성모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한 기쁨의 순간을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감동으로 전할 수 있는 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모님의 은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둡고 침울하고 지저분함으로 가득한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미천한 작부 레나가 전부일 뿐입니다.’

  ‘성스러움이 어디에도 없다...... 로레토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레나만 있다........’ 교황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교황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어느새 일제히 제단화 속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고즈넉하면서도 매끄러운 비너스 조각상을 연상시킬 만큼 매혹적인 여인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맞네. 레나가 틀림없어. 어쩐지 낮이 익더라니........’

  ‘처음부터 레나가 맞다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성모님의 모습을 레나로 그렸을 것이라고는.......’

  ‘그래. 틀림없네. 레나라고 불리는 마달레나 안토네티가 맞아.’

  ‘카라바조와 마달레나가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성모님 얼굴을........’

  ‘작년엔가? 나보나 광장에서 카라바조가 공증사무소 직원을 도끼로 내려친 사건이 있었잖아? 모두 쉬쉬 했었지만 사실은 카라바조와 공증 사무소 직원 사이에 레나가 끼어서 생긴 사건이라 소문이 파다했어........’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이 법률 대리인이 성모의 얼굴이 레나인 걸 알아차리면서부터 생긴 일이래.’

  둘러 선 사람들의 입에서 너도나도 하나같이 레나라는 이름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조반니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는 표정관리에 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쾌재를 불렀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넌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그러기에 상대를 따져가면서 까불어야지 그러다간 내 손에 죽는다고 그때 분명히 말했지? 창녀를 싸고 돌더니 기어코 레나(Maddalena Antognetti)와 함께 지옥까지 길동무 하게 되었구나. 날 원망하지 말고 네 팔자를 원망해라. 안녕.’

 

 

 

 

 

 

 

 

 로마 교황청의 공증인이자 사도회의 회계사인 에르메테 카발레티(Ermete Cavalletti)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로마의 유명 인사이자 실세였다. 주교나 추기경은 물론 교황까지도 언제든지 필요하다 싶으면 알현할 수 있었으며, 로마가톨릭(교황)의 모든 재산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의 재정을 추기경들은 알 수 없었고, 추기경들의 재정을 주교들은 알 수 없었으며, 주교들의 씀씀이나 활용할 수 있는 재산에 대해서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 알 수 없었지만, 카발레티는 대부분의 재산 내막을 속속들이 모두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그런 비밀스런 정보가 곧 그의 힘이자 역량이었으며, 이것들을 이용해 그는 아주 커다란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볼로냐의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나 회계사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로마의 귀족이자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로시 가문의 수장이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결국 카발레티는 로시 가문의 여식인 오린지아 로시(Orinzia di Jacopo de' Rossi)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 로시 부인이 실로 어마어마한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카발레티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로마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로 로마에서 카발레티는 승승장구하게 되었지만, 정작 카발레티와 장인의 숙원은 이보다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카발레티는 자신의 뛰어난 직업적 역량과 처가인 로시 가문의 위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상을 점차 교황청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대대로 로마에 뿌리를 둔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전통의 귀족가문 체시 가문 출신인 바톨로메오(Bartolomeo Cesi, 1566–1621) 추기경으로부터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의 아주 커다란 영지를 구입하여 카발레티 궁전(Palazzo de' Rossi-Cavalletti)을 지었다. 이 일로 비로소 카발레티는 로마 포폴로의 일원이 되었다. 외부 이주민이 아닌 확고부동하게 로마에 뿌리를 내린 명망 있는 로마시민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의 내친걸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임 교황의 개인 금고지기로 불렸던 비트리치(Pietro Vittrici) 추기경이 관할하던 발리셀리아의 성모 마리아 성당(Vallicella di Santa Maria)이 중창되어 새로운 교회라는 의미를 가진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성당 십자가 통로 오른쪽 두 번째에 있는 베드로 예배당(Cappella della Pietà)을 구입하면서 대대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카발레티는 결국 그토록 바라던 교황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황청의 공증인을 맡았고 나아가 로마가톨릭 사도회의 회계 담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성직을 염원하지 않은 이상, 왕족이나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평민의 신분으로 이루고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사라는 것이 길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르네상스 시대의 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백 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나대는 구나’라고 말이다.

 

  카발레티에게 그만 원인모를 병마가 찾아들었던 것이다.

  백약이 무효였다. 오늘날 처방으로 치자면....... 치료 불능의 말기 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허무가 밀려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마당에 부와 명예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동안 쌓아놓은 성공과 재산도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가져갈 수도 없는 것들이 아닌가?

  결코 떨쳐 내거나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깊은 고심 끝에 그는 홀로 길을 떠났다. 더 늦기 전에 순례자여행을 떠나고 싶어진 것이다.

  순례자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그는 혼자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도대체 성지순례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성지순례를 해야만 한다고 그 아우성들을 치는가?’ ‘성지순례에서 얻어지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하는 의문들을 끊임없이 가지고 또 가졌다.

  왜냐하면....... 남들이 그렇게 간절히 갈망하는 성지순례라는 것이 그에게는 늘 너무도 평범한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직장이 성지였고 그의 집 또한 성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성지에서 아침에 일어나고 성지에서 잠을 자며 살아왔는데....... 아무리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어 보아도 성지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중세 사람들에게 성지순례(聖地巡禮)는 대략 세 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첫 번째 성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나고 자라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루살렘 성지다. 두 번째 성지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야고보가 묻혀있는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이다.

  남들이 일생에 한 번은 찾아가 기도함으로 어떤 성스러운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성지가 카발레티에게는 직장이며 생활터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몸소 느끼고 있는 그에게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 콬포스텔라는 너무나 먼 곳이었다. 혹 죽을 각오로 간다고 해도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세주의 대리권자로 인류를 구원하고 병마에서 해방 시켜주며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안내해 주는 교황은 바로 여기 바티칸에 있었다.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를 찾아간다 해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재림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명확한 구원에 대한 해답을 그곳에서 얻을 수 없다고 카발레티는 생각했다. 그제 아침만 해도 업무 정리차원에서 만났던 교황은 카발레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기독교의 절대성지에서 구세주의 대리권자인 교황으로부터 직접 병마와 싸워서 이겨 내라고 격려와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그제와 비교해 어제가...... 어제와 비교해 오늘 아침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구원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어떤 희망도 없이......... 그냥 혼자 있고 싶어졌다.

  ‘이보시게나. 자네에게 내가 부탁이 하나 있네. 나를 로레토(Loreto)까지만 데려다 줄 수 있겠는가?’

  ‘로레토라면 제가 서너 번 다녀 본 곳이기에 별 어려움은 없겠으나, 거리가 170 마일(280km)이 넘는 먼 곳으로 사나흘은 족히 걸릴 터인데 나리의 건강 상태로 어떠실지........’

  ‘아직은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일세.’

  ‘순례자들이 꼭 들른다는 로레토 성당(Basilica della Santa Casa)을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꼭 성당까지가 아니어도 상관없네. 인근의 순례자들이 지난다는 길을 나도 좀 따라 걷고 싶은 것뿐일세.’

  ‘언제 떠나시고자 하십니까?’

  ‘지금 당장일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그냥 지금 이대로 떠났으면 좋겠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음을 약속하겠네. 지금은 그냥 조용히 여기를 무조건 떠나고 싶네.’

  ‘나리 말씀대로 따를 것입니다. 마차에 오르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해가지면 추워질 것이니 덮으실 담요와 마실 물과 빵 한 덩어리만 챙겨서 오겠습니다. 걱정할 테니 아내에게 며칠 출타한다고 언질만 주고 나리 일은 일체 비밀로 하겠습니다.’

  ‘알겠네. 참으로 고맙네. 생각해 보니 조용히 떠나고 싶은 것은 내 마음일 뿐 누군가는 내 걱정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네. 그렇다면 로레토로 출발하면서 내 농장을 지나가주지 않겠는가? 나도 누군가에게 언질은 해주고 떠나야 할 것 같으니 말일세.’

  카발레티는 자신의 공증인 사무실 직원으로 평소 마차를 몰며 자신을 수행해주던 마부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날 그들을 태운 마차는 로마를 떠나 동쪽 아드리아 해의 로레토를 향해서 먼 길을 떠났다.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직업적으로 조금 바쁘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