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들여다 보면 (팔레스타인이 과연 누구의 땅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것은 결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계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안목에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양심과 상식의 선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만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으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가리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장막을 거두어 내는 일이 우선이라고 해야하겠다.
인류가 역사를 깨닫고 기록하기 이전의 신화속의 시대까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끌어들이는 해괴망측한 궤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앞서 본인이 전제한 해괴망측한 궤변이라함은........ '이 세상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하는 물음에서 부터 시작하여야만 하겠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은 물론 온 우주의 억조창생을 주관하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 이라고 말한다. 누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 온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분명히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가 때문이다. 같은 질문을 당신에게 던지고, 또 종교가 다른 혹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던져보자. 아마도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 사람들의 입에서 '절대 아니다. 세상의 주인은 우리 인간이다' 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왜? 우리는 모두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고민하고 해답을 찾던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기독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더하여 유대교까지 포함하여)인들은 모두가 '세상의 주인이 야훼 하나님' 이라고 대답할까?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세시대 천동설과 지동설의 마찰 사건을 격어 본 이후로 기독교인들의 종교관 또한 계속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진정한 주인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의 장소에 따라 달리 답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전혀 다른 답을 내놓는다. '종교의 영역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과 세속의 영역에서 과학과 역사의 잣대를 들이대며 실험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논하는 종교의 역역은 전혀 다른것' 이라고 말이다. 2천 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신의 부재' 혹은 '신의 침묵' 속에서 더이상 세상은 마냥 '교회가 주장하고 이끌어가는 세상'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고, 시간이 지날 수록 성서에 기록된것과 전혀 다른 현실 세계가 거듭거듭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 사람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어린시절의 옛 고향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듯이, 언젠가 많은 인류가 교회를 옛 고향처럼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할 일, 교회가 할 일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창조주께서 직접 대답하실 때 라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팔레스타인이 과연 누구의 땅인가?'
'현대사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중동사태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해답은 아주 간단명료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 사태를 유발시킨 자가 모든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팔레스타인 사태의 모든 원인은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과 유대민족간의 약속' 이라는 믿을 수도, 밎지 않을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럼 누가 풀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과 유대민족이 앞장서서 풀어야만 한다.
그 허무맹랑한 약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기극이 펼쳐졌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기는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온 인류가 피해자다. 가해자는 '하나님과 유대민족'이고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스스로 유대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어여삐 여기셔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으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 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직접 써서 보내주셨다는 등기서류로 구약성경을 내밀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 구약성경의 효력이 극히 제한적인 민족(유대인) 안에서는 효력이 있을지 몰라도,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가 살고있는 너른 세상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전혀 효력이 없는 휴지뭉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유엔 주재 산하의 '인류 부동산 등기소' 도장이 찍힌 서류를 성경에 끼워넣어 주셨더라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말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신(神)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 이시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세상엔 엄청 많은 숫자의 신들이 산재해 계셨으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온 신들의 세계를 평정하셔서 유일신 이심을 증명해 보이시
고, 유대민족에게 약속을 기록하신 구약성경을 내리셨다면 모르겠는데........ 또 다른 민족들에게 번역 포고문이라도 보내실 일이지. 수 천년 동안 그 약속을 알고 있던 사람은 온 세상에서 달랑 유대인들 뿐이었다하니............ 헐!!!!! 또 헐!!!!!!!(이걸 실제 역사라고 믿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레반트(Levant) 라는 용어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11세기 말엽 벌어진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다. 십자군 전쟁사와 더불어 새롭게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레반트는 '해가 떠오른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카르타고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해상민족들이 지중해를 넘나들던 시기에 언제나 태양은 지중해의 동쪽에서 떠 올랐으며, 유럽보다도 드넓은 아라비아반도가 온통 모래사막뿐이던 시절에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만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서 푸른 옥토를 만들고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서 인더스 강 유역의 페르시아 지역을 제외하면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은 오직 지중해 동쪽연안 뿐이었다 하여 이 지역을 가리켜 중세시대부터 레반트 지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거기에 이집트의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을 가리킨다.(위 지도의 초록색 부분)
그리고, 그 초록색 부분의 왼쪽 구석에 치우쳐 예루살렘(Jerusalem)이 위치해 있다. 레반트 지역 안에서 특별히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해안쪽의 가지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 지역을 합쳐서 팔레스타인(Palestnian) 지역이라 하는데, 현대사 속에서 여러차레 중동분재의 발단이 된 이스라엘 점령지역이라고 달리 설명할 수가 있겠다. 팔레스타인 영토의 적은 부분이 유엔이 인정한 이스라엘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 거의 대부분을 강제로 점령하여 합병 내지는 실질적 지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목표는 오로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지역 전체를 병합하여 옛 이스라엘 왕국(시온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팔레스타인 이라는 영토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전체 기독교에서 공통으로 믿고 따르는 성인에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전체 기독교간의 모든 종교적 분쟁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이는 그러니까 믿음의 시작(근원)에서 부터 이미 분열과 다툼은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분(?)은 왜 이런 불합리한 시작을 하셨을까? 책임도 지시지 않을 것이면서 말이다.
아브라함은 윗쪽 지도 가운데 초록색 부분의 하란(harran)이 고향이다. 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 평원 남동부 샨느우르파가 그곳이며 유프라테스강의 최고 상류지역이다. 아브라함이 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커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살이던 때에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게하셨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이삭을 산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100살이 훨씬 넘은 아브라함이 어린 이삭의 손을잡고 아들을 제물로 받칠 장소로 명하신 모리아산(성전산)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찾아 낸 모리아산이 바로 지금의 예루살렘 절대성지인 성전산이다. 어쨋거나 이삭은 목숨을 건지고 산제물로 양이 받쳐졌다. 덕분에 야곱으로 가문은 이어지게 되었다.
100살이 훨씬 넘은 아브라함이 어린 이삭을 데리고 하란에서 예루살렘을 다녀서 다시 하란으로 돌아갔다. 이삭의 산제물 사건으로 해서 모리아산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절대 성지가 되었다. 그런데 지도를 보자. 그게 사람이 그냥 걸어서 쉽게 다녀 올 거리는 결코 아닌것이다. 아라비아산 알라딘 양탄자를 타고 다녀 온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얼마나 걸렸는지...... 그 여정에 대한 서술이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혹,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했다는 모리아산과 예루살렘의 성전산이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산이 아닐까? 하란 인근에 있는 어디 이름이 비스무리한 산이 달리 있는것은 아닐까? 아니면 성경 제작과정에서 억지로 꿰어 맞췄던가 말이다. 모리아산이 성전산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그랬다는 유대측의 주장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말을 꺼내면 신께 불경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럼 다시 지도를 보자.
이집트 멤피스에서 예루살렘 거리는 예루살렘에서 하란 거리의 절반보다도 가깝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유대인)을 모세가 인솔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찾아서 장장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다닌다. 성경에는 유대민족을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고육지책이었노라 적었다지만........ 모세가 무능했거나, 모세가 이용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면 이집트의 왕자로 거대한 이집트 영토는 물론 인근 주변국가들까지 전쟁으로 달려갔거나 돌아보았을 모세에게, 불과 두 세달이면 닿을 수 있는 요단강 저편의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면서....... 끝내 요단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여호수아에게 임무를 인수하면서 그곳이 애초 출발지였던 이집트 국경의 인근이었다고 깨달았을테니......... 40년 동안 모질게 재주만 부리며 떠돌아다닌 꼴이 아니겠는가?
모세는 람세스 2세 만큼이나 이미 가나안 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세는 당당히 파라오 왕위 계승권자였으며 이집트 왕국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왕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왕국 영역에서 보자면 가나안은 비교적 가까운 인근에 위치한 오랜 이집트의 속주(식민지)였었던 것이다. 어쩌면 수도없이 지나다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지도자가 되어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찾아 광야를 떠돌면서도 그 가나안이 그 가나안인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40년 만에 요단강에 도착한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나한테 장난 쳐?' 하지 않았을까?
혹, 모세가 양심이 있어서 이제까지의 40년 여정을 위해서 부당하게 남에게 피해를 입혔던 사실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했을까? 광야에서 이미 터전을 잡고 생활하던 수많은 민족이 느닷없는 유대민족의 침입에 얼마나 많이 피해를 입었던가? 하나님이께서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짐승만도 못한 악으로 낙인찍혀 유대로부터 탄압과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았던가? 왜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개선의 여지가 무엇인지, 공생의 방도를 가릍쳐 주시지 않은 것일까? 그들의 후손이 모두 테러리스트로 후대에 성장할 것이라 생각하셨음일까? 그랬다면 노아의 홍수 이후로 이 세상엔 인류라고는 유대인만 남게끔 애초부터 설계를 하셔야 하는것이 아닐까? 유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하찮은 이민족 존재를 애초부터 창조주는 만들지 마셨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대인에게 승리감을 고취시키고 남의 것을 빼앗고 같은 사람을 죽이는 쾌감을 안겨주기 위해 이민족들을 죄악의 덩어리로 창조하셨던 것일까?
구약성경에 말씀으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Canaan)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지중해의 동쪽해안에 페니키아인들이 모여 장사를 벌이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을 가나안이라 부른다' 라고 적었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된 카르타고의 유물에서도 이들에 대해 카나니(Chanani)라고 부르고 있는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페니키아인들이 처음 여기 가나안 지역에 체류하였을 시기는 아마도 그들이 훗날의 카라반 처럼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지역을 건너다니며 교역을 하던 상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였다.(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이전) 사막을 건너다니면 대상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집트로 전하여져 새로운 문명으로 탄생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새로운 문명의 탄생은 과학의 새로운 발명이자 기술의 발전이며 예술과 문화의 진보였다. 이러한 모든것이 장사꾼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무한한 돈의 가치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페니키아인들에게 아라비아 반도 안에서의 육상 교역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다로 눈을 돌렸고 지중해 건너의 북아프리카와 유럽이 새로운 개척시장이 되었다. 카르타고인들에게서 항해술과 선박기술을 습득한 페니키아인들은 이제 바야흐로 해상무역의 시대를 열게된 것이다. 이들은 부지런히 이집트 문명을 퍼다 날라서 마침내 그리스 문명을 탄생하게 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들의 교두보를 필요로 유럽의 지중해 연안(시칠리아. 프랑스 나무해안)과 북아프리카 연안으로 대대적인 민족 이동을 감행했다. 페니키아인들이 하나 둘 가나안을 떠난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새로운 거점을 확보해 떠났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유목생활을 추구하는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생활하고 있었다. 불레셋 사람도 있고, 사마리아인과 아람인과 암몬인과 모압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유랑하던 히브리인(유대인)들도 섞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대대적인 히브리인 유입(성경에 기록된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유대민족)이 생겨났던 것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유대인들은 오래지않아 본색을 드러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게 약속하신 성스러운 땅이며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은 성서에 기록된 바처럼 반듯이 제거되어야 할 악(惡)으로 낙인찍혀 도망치거나 붙잡혀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유대로 부터 쫓겨나거나 도망쳐 난민이 된 사람들을 통털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난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한 유대인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스러운 예루살렘 왕국이 이룩되었다고 기뻐했다. 그 숱한 만행과 살륙과 침탈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약속의 완성이라고 자찬했다. 시작도 하나님(구약성경) 이었고 과정도 하나님이었고 결과도 하나님 책임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하마스 전쟁까지도)이 다 하나님의 뜻일뿐 자신들의 책임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에서 보는것과 똑같은 만행과 참상이 고대에도 고스란히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만행과 숱한 참상이 유대인들에게는 그저 '하나님께 영광. 유대인에게 축복' 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잠시 졸음을 참지 못하셨음이실까? 먼 우주로 휴가를 떠나셨음일까?
그 찬란한 유대민족의 번영 위에 이민족 신의 분노가 떨어졌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이르러 어느날 거룩한 성전산 위에 건설된 다윗 성전은 허물어졌고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하사받은 성궤가 사라졌다. 하나님의 절대적 지지와 성원속에서 건설된 유대왕국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이후로 300년 동안이나 유대민족은 앗시리아에 지배를 받게되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유일신이신 창조주께서 300년 동안이나 도대체 무얼하시느라 유대민족을 등한시 하셨단 말인가? 혹, 앗시리아 신과의 전쟁에서 다쳐서 회복하느라 300년이 걸리신 것은 아닐까?
이어서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인들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온전한 기둥이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흔히들 (바빌로 유수)로 불리는 유대민족 대이동을 벌였다. 유대인들은 세계 도처로 노예로 끌려가거나 유민으로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그저 흔적만 남아 양떼가 풀을 뜯고있을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모두 쫓겨난 그 지역에 다시...... 그 옛날 여호수아를 위시한 유대 깡패들에게 쫓겨났던 사람들....... 불레셋 사람, 사마리아인, 아람인, 암몬인, 모압인들이 하나 둘 나타나 다시 모여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의 역사에서 구약 성서에 기록된 종교적 역사를 지나 순리대로 다시 본연의 팔레스타인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이 또한 진정한 정의(正義)의 실현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또 기독교적 시각에서 불의(不義)라고 혹시나 한다면....... 하나님이란 존재의 의미나 시작이나 가치 자체가 다분히 모순적이고 불합리성 위에서 시작된 종교관일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하나 둘 다시 에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하기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시 예루살렘 왕국 재건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돌아온 유대민족은 광란에 휩싸이듯 옛 영화의 재건에 급급해 했지만.........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지지가 옛날같지 않았음인지....... 페르시아의 침략에 속수무책 당하고 지배를 당하는가 싶더니,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에게 정복되었다. 그리고 다시 오랜세월 로마제국의 지배들 당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2.000년 전 즈음에 이르러서는 청천벽력 같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가나안땅 등기부 등본 효력정지'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던 것이다. 오랜세월동안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기록하신것' 이라는 명분 하나로 이제껏 권리행사를 해온 유대인 처지에서는 정말 민족의 사활을 걸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유대교와 비 유대교간에 로마제국의 법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분명 34살의 유대인 청년이었다.
유대 청년은 그동안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과 유대민족간의 약속'이 계약만료로 해지되었음을 증언했다.
피 터지는 싸움(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正義)' 인가?
다툼이 생겼고 분쟁이 일어났고 재판이 벌어졌다. 상대가 분명히 존재하는 싸움 혹은 전쟁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어느 쪽인가는 '하나님의 정의'이고, 다른 쪽은 '사악한 불의'라는 것이다. 둘 다 하나님의 정의일 수는 없는 일이고, 둘 다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존위가 의심받게 될 중대 사안이 되는 것이다. 결론은 나야만 했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한시도 하나님의 정의가 자신들 편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하여 로마의 법정에서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입증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세속의 로마 법정에서도 분명하게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어떻게 입증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것은 증인으로 나온 34살 유대 청년의 증언을 무효화 시키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약에 유대청년이 거듭 자신의 증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결론은 단 한 가지 뿐......... 그 청년을 죽여서 더는 주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 아니겠는가? 더하여 그 죽음을 로마의 법정에서 정당하게 받아낸다면 유대민족의 정당성은 더욱 공고히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유대인은 기어코 로마의 법정에서 유대 청년의 사형선고를 받아내고 말았다. 세속의 법정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자신들 스스로가 입증해 보였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렇다면 모든것이 다시 이전으로 완전회복된 것이었을까?
34살의 유대 청년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못밖히는 사형에 처해졌다. 형은 집행되었고 청년의 죽음은 확인되었다.
이제 모든것은 유대민족의 바램대로 모두 이루어 졌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그 청년의 이야기가 모두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다. 완벽하게 완성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사흘 뒤........ 청년의 무덤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여기저기서 그 청년이 하늘로 날라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찬란한 광채에 휩싸인 채 날아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 청년이 유대민족과 약속을 맺었던 이해 당사자였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점차 복음(福音)이 되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찌되었건 이제부턴 누군가가 창조주의 존엄과 엄중한 약속을 폄하시키고 훼손시킨것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하지 않았을까?
유대민족은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들이 창조주께 고해할 양심선언은 과연 어떤것이 될것인가?
이제 하나님과 유대민족 사이에는 어떤 새로운 계약이 성립될 것인가?
But.............. nothing............
유대인들이 새롭게 내놓거나 제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대인들 가슴속에서 하나님과의 오랜 약속(구약성경에 기록된)이 여전히 유효한 진행형(ing)이었다. 그 계약의 시효만료를 외치던 한 유대청년은 가당치도 않은 헛소문을 유포하다가 결국 로마제국의 법률에 의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으며, 그로 인하여 너무도 당연하게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은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모든것이 끝난버렸다고 정의내렸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그 사건은 거기서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끝난것이 아니었다.
34살 유대청년이 잠시 공생의 길을 걷는 동안 지켜보고 함께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유대 청년이 제시하고 떠난 그 '새로운 약속'이 점차 굳건한 믿음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짧은 공생의 길(구도자의 길)을 걷던 유대청년은 유대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로마의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거듭되는 유대인들의 탄원끝에 결국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이승에서의 짦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는 새로운 약속이 도래했음을 외쳤으며, 끝내는 '모두 이루어졌도다' 하는 마지막 말로써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새로운 약속이 체결되었음' 선포하며 숨을 거두었다. 사흘 뒤에 육중한 돌로 잠긴 그의 무덤이 열렸고, 어디에도 그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유대인 청년은 살아서 이야기했던 바처럼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 승천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어디에도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를 따르고 추종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결과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활의 증거는 세상 어디에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떤 간절한 바램이 '그가 죽음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나라로 부활 승천' 했다는 증거로 제시했고, 그들 스스로가 '샐프 가결을 통해 부활의 증거로 채택'하는 도저히 용납되거나 성립될 수 없는 불합리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그 어떤 증거도 없고, 입증되지도 못했고, 입증할 수도 없는 '부활의 사건'을 진실이라고 믿고싶은 사람들(추종자)이 모여서 새로운 신앙적 무리를 이루어 나갔다. 기독교의 탄생이자 출발이다.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개신교)는 모두 이 '부활의 사건'을 기반으로 새롭게 탄생한 종교이다. 부활의 사건이 진실이 아니라 판단된다면 전체 기독교는 종교로서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언젠가 다시 오실 구세주의 약속과 믿음'을 전제로 탄생한 종파인 것이다. 훗날 언제고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훌쩍 이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골고다 언덕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 장면을 되찾아 보매, 부활의 장면이 명확하게 재현된다면 기독교는 정당성을 재입증하는 것이 되겠지만, 어떤 이유 어떤 방식으로든 부활이 없었다면......... 이천 년 기독교의 모든 역사와 행위는 모두 물거품이며 거짓이 되는 것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예수의 부활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활 사건은 오로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다소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 차이가 바로 기독교와 유대교가 대립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마찰하는 이유이다. 유대교(이스라엘)와 이슬람교(팔레스타인)의 다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 시대에 있었던 장자권의 상속문제에서 생겨난 다툼이라고 해야하겠다. 사실 냉정히 따져 보자면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다툼 또한 창조주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창조주께서 행하신 무책임할 정도의 안일한 대처가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분쟁'과 같은 엄청난 비극을 양태시켰으니 말이다. 창조주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이행하셨듯이 이삭에게도 그렇게 행하셨더라면 장자권 사기 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창조주의 절대무기가 바로 전지전능(全知全能)이 아니신가 말이다. 그분이야말로 이삭이 늙으면 사리분별이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과 야곱이 꼼수를 부릴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모두 알고 계셨어야만 한다. 야곱의 꼼수가 20 세기에 얼마나 큰 재앙으로 불어닥칠것이라는 것을 이미 모두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랬음에도 창조주의 대처는 뜨뜨미지근한 태도로 설마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정도의 창조주시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 분에게서 '전지전능하신 존재'라는 칭호를 빼버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지전능을 빼버리면 신(神)의 위상은 그저 인간보다 조금 능력이 뛰어난 존재 정도로 전락할 수 밖에 없겠다. 그런 상황이 되면 유일신(有一神)은 어림도 없는 상황이 당연히 도래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하여, 반듯이 전지전능의 감투를 기독교 창조주께서 소유를 하셔야만 하겠다고 하신다면......... 인류 역사에서 벌어진 모든 비극과 전쟁과 참상은 모두 그분이 책임이라고 나는 따져 묻고 싶은 사람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유대민족과 신흥 종교인 기독교 사이에는 그야말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쟁탈전'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세상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선(善)으로 대표되는 유대민족과 하나님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버려진 짐승만도 못한 악(惡)으로 낙인찍힌 나머지 모든 인류'의 양분된 세상이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시대와 계약이 모두 완성되었음을 선언한 구세주의 새로운 약속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주장해왔던 바 대로, 특정 유대인에게만 허락되어 온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온 세상의 모든사람에게 모두 공평하게 내려졌음을,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 천국에 올라서 영원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복음의 약속' 새롭게 제정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그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늘어가가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그동안 신께서 스스로 직접 선택하신 유대 종교의 특별한 선민사상(選民思想)에 치명상을 입게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 땅이었기에 그 땅은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부터 이미 유대민족의 영토였다는 주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유대민족의 아주 특별한 역사가 모두 정당성 내지는 정통성을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모여서 이 난국을 타개할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았다.
유대교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유대교와 유대민족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유대교에 의해서 파문된 최조의 종교단체인 것이다.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너무도 흔하게 듣고 또 듣게되는 '이단' 이라는 징벌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의해서 내려진 기독교 최초의 낙인이자 시련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 성공회. 무수히 많은 개신교 종파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반으로, 그리고 이단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랬던 기독교가 어느날인가 보편 타당한 정통 종파인 기독교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때부터 툭하면 '이단', 툭하면 '파문' 이라는 용어들이 그 어렵고 힘들게 시작된 기독교 세계 안에서 시도때도 없이 일상처럼 터져나오게 된는 것이다. 이단에서 시작해서 이단 양성소로 발전한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유대교인들이 처음 초대 기독교인들을 이단(異端)으로 몰아 파문 시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참혹하게 탄압했다. 그랬던 기독교가 탄생하자 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가톨릭)과 (비잔틴 정교회)로 나뉘게 되었다. 로마가톨릭이 비잔틴 정교회를 이단으로 파문 시키자, 이번엔 비잔틴 정교회가 로마가톨릭을 이단으로 파문시켜 버렸다. 이 세상은 한 순간에 온전한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악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는지 어느 순간 서로간에 비밀스런 합의 끝에 서로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正義)인가? 서투르면 파문시키고, 곤란해지면 적당히 슬그머니 서로 복권시켜주기를 수도없이 반복한다. 로마가톨릭은 가톨릭 안에서 또 툭하면 나뉘고 싸우면서 언제나처럼 심심하면 '이단'과 '파문'을 들고 나오고, 화가 풀리거나 엄청난 재화로 보상이 되면 언제나처럼 또 슬그머니 복권 시켜주기를 반복해왔다. 유치원 어린이 수준의 짓꺼리를 수도없이 반복하면서도 수치나 반성의 기미조차 없다. 부와 권력에 대한 이권 다툼의 끝에 영국의 가톨릭이 떨어져 나가 (성공회)를 만들었다. 당연히 로마가톨릭은 '이단'과 '파문'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러나 영국은 끝내 꿋꿋하게 로마가톨릭에 대항하며 버텼다. 그리고 성공회는 어느 순간부터 당당하게 정통 기독교 교단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단이고 파문은 무슨 징벌을 뜻하는 것일까? 그 모든 이단의 낙인과 파문과 복권에는 항상 앞에 '하나님의 뜻'이 전제된다. 교회 통수권자들이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사하시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 다녀가시면서 뭐라고 하셨단 말인가? 지극히 보편 타당한 세속의 가치와 판단으로 보자면........ 기독교 자체가...... 기독교 역사 전체가 모조리 한바탕 사기극 마당놀이가 아닐까?
그렇지치자면 과연 하나님의 가치판단력이나 가지신 능력은 도대체 어느정도라는 말인가? 어쩌면 유치원생 수준도 못된다는 말인가?
두 어린이를 면전에 두고 '철수는 착하고 예쁜 어린이야. 그러니까 나쁜 민수를 두둘겨 패도 돼. 알았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민수에게 '철수는가 하는 짓은 하나도 맘에 안들어. 네가 몽둥이로 패 죽인다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거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저 철없는 종교지도자들이 교회 안에서 벌이는 치졸하고 짐승만도 못한 짓꺼리를 어떻게 보고도 못본척 하실수가 있다는 말인가?
로마의 교황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범 인륜적 차원에서 화해하고 전쟁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장은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고 계시니 푸틴은 즉각 악마행위와 같은 침략 전쟁을 중단하고 인간의 생명을 중시해야만 하며 피해 복구에 나서기를 촉구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은 푸틴의 행동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그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계신다'라고 발표했다. 그들 모두가 성경을 들어 올리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는 기초교육을 받았고 같은 신학교에 들어가 같은 교수로부터 같은 성경책을 가지고 같은 분야 공부를 했다. 그런 그들에게서 과연 어떤 공통분모를 찾을 수가 있을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다. 그들이 정당하게 성직자로 나서는 순간부터는 저잣거리에서 나뒹굴며 개판처럼 살아 온 나와 내 친구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것은 '앞으로 그들의 모든 언행에는 반듯이 앞에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존칭이 언제나 먼저 따라나올 것이라는 사실 오로지 그 한 가지 뿐일 것이다. 상당한 공통의 분모를 가졌음에도 차후의 행보에 누군가는 가난한 빈민촌에서 사역을 담당하고, 누군가는 광주사태에 현지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머물렀고, 누군가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주로 찾아가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있다면, 더하여 신군부 세력의 부대에서 군목을 하거나 그들과 동행하는 목회자였다면......... 같은 성경 귀절을 가지고도 그 해석과 그들이 입으로 내뱉는 내용은 너무나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히 먼저 '모든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했으며 그 분의 뜻'이라고 강조들을 했을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 글귀는 하나인데....... 그 해석은 수 백개 수 만개를 넘어 수 천만개로 뜻과 의미를 달리한다.
누구 책임인가? 당연히 하나님 책임이 아니겠는가? 전지전능하신 분이 기본의 임무를 태만히 하시고 계시거나, 아니면 기독교 역사 초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그분의 전지전능이 너무 부풀려졌거나가 아니겠는가? 혹, 그분의 능력이 한 부족이나 민족(유대민족)을 커버하기에는 더없이 훌룡하기는 했는데(흡사 유능한 축구 감독처럼), 이를 눈여겨 보다가 오판한 초대교회의 누군가가 그분을 온세상을 다 바쳐도 충분히 진지전능를 발휘하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라고 판단하여 억지로 끌여들였는데......... 차차 능력 미달이 드러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이쯤이면 불경도 엄청 불경인 것일까? 글쎄다.)
나의 이런 정도 어깃장을 불경(不敬) 이라고 하신다면..... 그 분의 그릇 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그동안 온갖 못된짓을 일삼은 그 수많은 불경스런 존재들에겐 한 말씀도 안하시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당당하게 팔아먹었던 높은 놈들(?) 말이다.
나를 이단으로 낙인 찍고 파문 시키려면........ 창조주께서 직접 내리시기를 간곡히 청한다. 교회(敎會)의 판단과 처벌은 정중히 거절한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고 세레를 받았고 여러가지 많은 일과 봉사를 했다. 그렇게 안식처와 같았던 교회가 어느날 분열했다. 서로가 서로를 비방했고 이단시 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잡아 당겼지만 나는 묵묵히 침묵으로 내 자리를 지켰다. 결국 교인들이 갈라섰다. 어쩔 수 없이 갈라섰으면 다른 곳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각자 나름으로 더 노력하고 발전해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의 갈라섬이 경험이 되었던 것처럼 쉽게 다시 갈라서고 이어서 또 갈라서기를 반복했다. 이젠 툭하면 갈라서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당연시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진짜 교회야' 우리 목회자님이 진짜야'를 누구나 입에 달기 시작했다. 목회자와 시무장로들 사이의 다툼에서 '장로교가 왜 장로교인줄 아세요? 장로들이 주인이기 때문에 장로교인 것입니다' 라고 외치는 어느 한 장로의 외침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는 순간........... '교회가 아니라 시궁창이구나' '교회는 죽었다' '저런 수준의 장로를 배출한 기독교의 수준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라고 생각한 나는 그 순간부터 '비 교회주의자(非敎會主意者)'가 되었다. 나는 불경스럽고 철딱서니 없는 신앙인이기는 하지만 분명 세례를 받은 개신교 교인이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 교회를 거부하고 부정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聖所)가 바로 교회라는 말에 진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빈껍데기 허울뿐인 건축물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 무수히 많은 건물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한 시설로 쓰여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내가 속하고 싶은...... 내 마음에 교회는 저기 저기 아주 먼 조지아라는 나라의 코카서스 산맥 속에 있다. 산자락 언덕에 텅 빈 교회는 지난날 전쟁의 참화로 모두 부서져 천장도 없이 벽채들만 서로 의지한 채 서있다. 을씬년스러운 모습의 옛 고성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 교회는 항상 열려있고 주일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의자도 없어서 모두가 벽채 안의 텅 빈 공간에 모여서 서서 예배를 드린다. 뚫려진 천장에서 비가 내리기도 하고 눈이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소리는 멈춰진 적이 없다. 오십년 만에 겨우 건물 외부의 돌계단을 수리했다. 십시일반 성금이 모여지면 그 모여진만큼 차근차근 교회를 수리해 나간다. 워낙 추운 산악지방이라 천장과 출입문부터 수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쉬우면 아쉬운대로 비가 떨어지고 눈이 날아들지만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어서 좋고, 그곳으로 구세주께서 어서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고들 말해주었다. 수풀이 무성한 들마당에 피어난 야생화가 그 교회의 제단에 바쳐진 꽃이 되고 있었다.
카즈베기를 두 번 찾아가면서........ 나는 그곳을 내 마음속 깊은곳에 '나의 교회'로 새겨 넣었다. 내 마음속의 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한 21세기의 교회 건물에 있는것이 아니라, 험준한 산자락에 위태롭게 겨우 놓여진......... 초대교회의 순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낡은 교회라고 고백해 본다. 내가 한가닥 희망처럼 기대고 싶은 기독교란........... 2.000년 전에 막 시작되던 그때의 교회 모습이다.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짬이 나지않아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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